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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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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8일 07시 19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신화의 세계’를 읽으면 만나는 조셉 캠벨은 박학다식의 끝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세계사와 철학,종교,문학,언어까지 그가 연구하는 신화를 위해 그가 흡수한 지식들은 거의 백과사전 분량이다. 사실 한 인간이 그렇게 많은 분야에서 정통할 정도로 내용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에 응용,대입한다는 것은 거의 신기에 가깝다는 생각까지 든다. 과연 그는 대학자답다. 그는 이름 캠벨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일랜드계 카톨릭 신자였던 집안에서 자라났으나 결국 ‘나는 기독교도가 아니다’라고 공표했다. 신화를 스스로 공부해 나가면서 나름의 신에 대한 정의를 이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당당하게 “ 당신의 신은 나의 신이 아니다. 따라서 내게 그것을 강요하지 말라.”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자신만의 정의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즉 그에게 신은 하나의 에너지일 뿐이지 어떤 구체화된 모습이 아니었던 것 같다.

직접적으로 불교신자라고 알려졌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자신이 생각하는 신의 정의와 맞는 종교가 불교라 생각하고 불교적 방법론과 사상들에 의지했던 것도 같다. 그의 집에 달마대사 초상이 걸려 있었다는 것, 명상을 꾸준히 해왔다는 것은 그것을 나타낸다. 즉, 그는 불교의 기본 사상처럼 자신 안에서, 내면에서 신을 찾고자 했고 답을 찾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이런 그도 한때는 취업이 어려워 밤에는 재즈밴드에서 색스폰을 불고 낮에는 숲 속의 값싼 집에서 독서에 몰두하면서 외적인 시련을 보내기도 했다. 외적 시련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겉으로 보에기에는 힘들고 극빈층과 같은 삶을 살았을지 모르지만 조셉 캠벨 그 스스로에게는 앎과 지식이 더욱 단단해 지는 충만감에 가득 찬 시기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가 그 시기에 다양한 독서를 통해 습득한 지식들은 평생 그의 상상력과 이야기의 원천이 된다.

조셉 캠벨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면서 개인적으로는 나의 사상과 맞는 부분이 있어 더더욱 반가웠다. 자연과 인간을 그 자체로 보려 하고 그것 스스로를 존중하는 것, 인생의 활동 속, 자체에서 신성을 찾아내는 것, 결국은 더 많은 배려와 포용을 갖고자 하는 것, 그로써 감사의 마음까지 생겨나는 선순환을 아는 사람. 나는 조셉 캠벨 그를 그렇게 느낀다.


내 마음속에 들어오는 글귀

1. 서론:인간과 신화의 기원

5P 우주와 조화를 이루면서 그곳에 오래 머무는 것, 이것이 신화의 주요한 기능이다.
10P 남성의 과제 중의 하나는 공동체에 속한 여성을 유괴로부터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예부터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며, 종족의 번식은 이 두 상반된 육체조직을 선호한다. 그러므로 신화는 당연히 이 사실을 다루며, 남성의 몸과 여성의 몸은 모든 신화에서 저마다 상징적인 가치를 지닌다.
13P 호모사피엔스. 대뇌가 일정한 크기에 이르고 의식에 어떤 변혁이 일어난 결과, 이 단계에서 신화적 사고의 최초의 징후가 출현한다.
14P 네안데르탈인 시대로 되돌아가보자. 그곳에는 신화적인 경험 및 사고의 두 가지 징후가 발견된다. 첫째는 인간의 매장이고, 둘째는 동굴 곰의 두개골 숭배이다.
15P 수렵문화의 기본적인 신화적 주제는 동물은 자발적인 희생자라는 것이다. 동물은 자진해서 살해되려고 찾아온다. / 동물계와 인간 사회 사이에는 자연의 신비를 존중한다는 계약이 있었던 것 같다.
16P 동굴 곰 시대 사람들은 동물이 자신을 바친 데에 대해서 감사했다. 오늘날 우리는 양식을 주신 성스러운 존재를 떠올리고 그에게 감사한다.이것은 전혀 다른 심리이며, 전혀 다른 신화이다. 근원적인 신화의 이미지는 생명의 이미지이다.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먹는 생명의 이미지이다.
22P 마법사는 반인 반수이다. 이것은 제의적 의미에서의 동물 지배자이다. 이 시기에 샤먼적인 행위가 행해졌던 증거는 뚜렷하다./그는 어떤 신을 상징할까, 아니면 샤먼을 상징할까? 그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어느 쪽이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샤먼은 반드시 신성을 띠기 때문이다.
23P 우리는 언제나 신을 일종의 사실로서 생각한다. 신이 실재한다고 생각한다.그러나 신이란 단지 초월과 신비를 상징하는 우리들 자신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29P 신비적인 차원은 선악을 초월해서 존재한다. 윤리적인 차원은 선악의 영역에 존재한다.오늘날 우리의 종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 중의 하나는 그것이 최초의 출발점에서 선악의 문제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30P 신화의 역할은 근동에서 기원전 2000년에 알려진 우주가 아니라 현재 알려져 있는 우주와 당신을 조화시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2. 전설 속에서 사는 사람들 :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

38P 태고의 신화에서는 인간의 육체만이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특정한 땅의 풍경도 신성시했다. 여러분은 성지를 찾아서 어느 먼 곳으로 갈 필요가 전혀 없다.그것이 내가 말하려고 하는 주제이다.
40P 우리는 신비, 곧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나오는, 무한하고 처음도 끝도 없고 영속하는 신비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다.
41P 모든 생명은 신비로운 생명에 의해서 유지된다. 인간이 먹는 모든 것은, 식물이건 동물이건, 당신 자신의 생명을 구성하는 물질이 되려고 기꺼이 자신을 바치는 생명이다.
58P 나는 신비적인 차원과 그것에 대한 깨달음, 곧 신비주의와 과학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고 생각한다.
59P 신화는 살아 있는 인간을 그의 생활 주기와 조화시키고, 그가 살고 있는 환경과 조화시키고, 이미 그 자체가 환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회와 조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3. 그리고 우리는 바다에서 무기를 씻었다 : 신석기시대의 신들과 여신들

63P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에서 여신은 중요한 신화적 상징이 되는데, 과거를 미래로 바꾸고, 정자를 자식으로 바꾸고, 씨앗을 작물로 바꾸는 자연의 에너지를 체현하고 있다.
77P 인도에서는 신이 자진해서 춤을 추며 세계에 들어온다. 세계는 유희이며 놀이이다.그것이 이 신화들의 기본적인 분위기이다.적어도 그것은 즐거운 것이며 유머러스 한 것이다. 세계의 신화 가운데서 구약성서의 신화만큼 음울한 것은 없다.

4. 파라오의 지배 : 이집트, 출애굽 그리고 오시리스 신화

88P 여기에는 배태주의와 부족주의가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에도 유태인들에게서 이어지고 있다.
100P 여기에는 신들이 우리 인간 에너지의 반영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나타나 있다.
103P 나는 이집트의 상징과 인도의 신비철학 사이에는 아주 큰 유사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08P 물 속을 지나는 것은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신화적인 주제이다.
109P 우리는 물을 지나서 들어가고, 물을 지나서 나온다. 신화에서 그런 들고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무엇이 들어가고, 무엇이 나오는가를 확인해 보기 바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신화가 전하는 신비적인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들어간 것은 족장들이고, 나온 것은 민중이다.
109P 영웅은 모세가 아니다. 구약성서의 영웅은 민중이다.
109P 강조되는 것은 집단, 집단, 집단이다.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근동의 특징이다. 유럽에서는 다른 데에 강조점을 둔다. 유럽을 기독교에 동화시킬 때 생긴 문제 중의 하나는 둘도 없는 실체로서의 개인의 의식을 어떻게 재발견하고 유지해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근동의 집단주의 전통을 개인적인 자기 실현의 전통 속에 어떻게 옮겨심을 것인가와 같은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5. 성스러운 원천: 영구불변의 동양철학

113P 세계의 신화와 종교체계를 조사한 바스티안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같은 이미지와 같은 주제가 되풀이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그것을 "원소적 관념"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또 그것들은 발생할 때마다 환경에의 적응이나 해석에 차이가 있으며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런 이런 지역적인 차이를 "민속적 관념" 또는 "민족적 관념"이라고 불렀다.
113P 역사학자나 민족학자는 차이에 관심을 가지기 마련인데, 이런 차이에 중점을 두고 세계의 다양한 신화와 철학을 연구하는 것도 가능하다. 한편, 원소적 관념의 문제도 제기된다. 왜 그런 것들이 어디에서나 존재하는가? 이것은 심리학적인 문제이며, 신화나 철학을 비교연구하는 우리와 차이를 조사하는 다른 모든 연구자를 구별하는 점이다. 그런데 동양의 체계를 이야기할 경우, 나는 어디까지나 원소적 관념에 중점을 두고 싶다.
113P 내가 생각하는 두 번째 관념이란 다름과 같다. 기원전 9-기원전 8세기 무렵에는 특히 동양에서 강조점의 변화가 나타났다. 단지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미지를 해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화를 상징하는 상(像)과 신화를 생활에 받아들게 해주는 제의를 통해서 신화의 형식에서 선명하고도 생생한 변화가 나타났으며, 그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동양철학은 실제로 원소적 관념을 해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114P 서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이후 신화적인 사상을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114P 서양사상의 밑바닥에도 한결같은 흐름이 있다. 그것은 영지주의, 연금술 그리고 영구불변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품어온 다양한 이단적 사상과 관련이 있다.
114P 신화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계속성은 철학 속으로 숨어들어간다. 그것이 바로 영구불변의 철학이다.
114P 신화는 꿈과 같은 영역에 속한다. 나더러 말하라면 그 영역을 지혜의 몸(Wisdom Body)이라고 부르겠다.
114P 똑같은 지혜가 어머니의 몸 속에도 생긴다. 그것은 우리 내부의 살아 있는 에너지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우리는 그런 에너지의 육체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꿈의 지혜, 환상의 지혜는 영구불변의 철학의 지혜이다.
115P 영구불변의 철학과 이성적인 사고체계 사이에는 그 방법과 원리에서 극단적인 차이가 있다.
115P 신화 형태의 해석은 아주 오랜 옛날에 주로 인도에서 발달했다. 따라서 나는 먼저 인도에서 시작하여 그 다음에 중국과 일본의 신화와 신화해석을 재검토함으로써 영구불변의 철학의 바탕을 이루는 사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동양사상의 풍부한 민족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지만, 나의 주된 관심은 신화에서 원소적인 것을 꿀어내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서 동양사상의 민족적인 특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원소적인 것을 끌어내는 데에 중점을 둘 참이다.
115P 상징의 주요한 문제는 사람들이 상징에 빠져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115P 신화에서 중요한 것, 신비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상징에 포함되어 있는 속뜻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속뜻은 언제나 정신적이다. 따라서 상징을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갠지스의 원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라디와(Haridwar)로 가야한다고 생각한다면 속뜻을 잘못 읽은 것이다.
115P 우리 서양인이 상징을 다를 때의 주요 문제점들의 하나는 상징을 사실로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우리가 원소적 관념이나 영구불변의 계시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도 이런 상징의 구체화가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신을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인다. 신 관념은 하나의 상징이다.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 형상으로 여겨지는 것은 모두 상징이다.
116P 시를 쓰는 것은 말 뒤에 숨어 있는 원초적인 말(Urwort)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 게르하르트 하우프만
116P 세상만물은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다.
116P 모든 변화하는 것들은 거울에 비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 괴테
116P 그 실체는 공이다. 공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어떤 사고도 거기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상징은 본래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투명해질 필요가 있으며, 열려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민족적인 것은 원소적인 것에 대해서 열려 있다. 우리 서양인이 이런 것을 해석할 때 생기는 문제점에는 두 가지 큰 원인이 있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이성적 사고에 치우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화적 상징에 나타나는 민족적 요소를 성서의 틀에 끼워맞추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우리를 사실과 이성적 인식의 세계의 묶어둔다. 그러나 동양적 관점에서 말하면, 그것이야말로 초월되어야 한다. 상징은 투명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나도 그런 관점에서 힌두의 전체계를 살펴보고 그것을 서양의 다양한 주제들과 비교해보려고 한다.
118P 진정한 순례는 글자 그대로의 순례, 물리적인 행동으로서의 순례를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중심을 찾아가는 순례로 바꾸는 것이ㅏㄷ. 순례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순례하는 동안 계속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명상하고, 참된 여행은 자신의 내명르 향한 여행임을 자각하기만 한다면.
120P 갠지스는 갠지스라는 이름의 여신이다. 그리고 이 강물은 여성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은총이다.
120P "전통적인 유산"은 자칫 그 자체의 상징체계를 구체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자신을 해방시켰으며,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성지에 대한 모든 관념을 발견했다.
121P 인더스 문명에서 고대 크레타와 메소포타미아 양식의 문화가 나타난다.
122P 고도의 문명이란 문자가 있고, 수학이 발달하고, 별자리의 행성의 주기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 문명을 말한다.
122P 세계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라는 식으로. 그것은 설명적인 신화, 이른바 원인론적인 신화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화의 기능이 아니다. 신화는 분석과 관계를 가질 필요가 없으며, 원인을 과학적으로 발견할 필요도 없다. 신화는 인간을 그를 둘러싼 환경에 결합시키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런데 행성의 위대한 움직임을 발견하기 전에는 인간의 환경은 주로 동물과 식물의 세계였다. 따라서 가장 이른 시대의 신화는 인간계와 동물계의 상호 관계를 다루고 있다.
122P 식물도 동물도 갠지스 강처럼 세계 속으로 흘러들어와 우리의 생명을 지탱해주며, 따라서 존경을 받는다. 동물과 식물은 숭배하는 힘 또는 상징이 되며, 인간은 그것드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된다.
123P 하늘의 표상은 위대한 영적 세계의 질서를 드러내는 표상이 되었다. 물론 현재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우리는 우주에 로켓을 쏘아보내고 있고, 인간은 이미 최초의 영적인 빛이었던 달의 표면을 걸었다.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것은 영혼과 대지의 분리는 극복되어왔으며, 어떤 점에서 영혼과 대지는 우리가 계승해온 이원론 철학이 가르치는 것 이상으로 하나라는 사실이다.
123P 인도-유럽인들이 온 뒤, 인도에는 큰 정신적 전환기가 찾아왔다. 이띠는 신화가 철학으로 이행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129P 신들의 근원은 당신 마음속에 있다. 발자취를 더듬어 중심으로 가서, 신들을 낳는 근원은 당신 자신임을 알라
129P 신들은 바로 당신 자신의 에너지의 상징적인 의인화이다. 당신 자신의 에너지는 우주의 에너지이다. 따라서 신은 저곳에도 있고 이곳에도 있다.
129P 인도에서는 전적으로 내면적인 요가의 경험에 의해서 매우 심오한 분석이 이루어졌는데, 그 덕분에 매우 복잡하면서도 고도로 세련된 상키아 학파(수론학파: 고대 인도의 여섯 철학 학파 중의 하나로서, 정신과 물질의 이원성을 주장했다/역주)가 생겼다. 상키아 학파는 내적 존재의 심리는 분석한다.
131P 열반이란 괴로움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심리적인 태도를 말한다.
133P 자이나 교도는 그 정도로 생명에 대해서 관대하다. 그토록 생명을 부양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어째서 자신의 생명은 끊으려고 하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어떤 종교에도 부조리한 요소가 있는 법이다.
133P 죽어야 할 것은 심리적 차원의 온갖 욕망과 불안이다. 그때 비로서,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생명은 긍정적인 것이 된다.

6. 정각에 이르는 길 : 불교

140P 불상의 핵심은 자신이 그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 주된 이유는 사회가 집요하게 너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142P 그래서 두 개의 불교가 있게 된 것이다. 시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초기의 소승불교와 나중에 생긴 불교(대승불교/역주)이다. 나중에 생긴 불교는 우리의 불성의 표현이며 부동의 태도를 견지하면서 시간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143P "불교는 부처의 정각에로 당신을 데려가는 "탈것(yana)", 특히 나룻배이다. 불교는 우리를 피안으로 건네주는 나룻배이다. 피안이란 괴로움과 즐거움, 얻음과 잃음, 불안과 공포, 너와 나를 초월한 장소이다. 그것은 우주적인 일원성 또는 우주만물의 불변성을 자각함으로써 이원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145P 대승불교는 인도의 북서 지역에서 발달했는데, 흥미롭게도 그 시기는 주로 기원후 처음 2세기 동안으로 기독교가 발달한 시기와 겹친다. 보살이랑 초월성을 자각한 사람이 현실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146P 당신이 그리스도를 부처와 똑같은 존재라고 생각할 때, 기독교와 불교 사이에는 훌륭한 대화가 생긴다. 기독교와 불교는 동일한 원소적 관념이 두 개의 민속적인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
148P 당신의 미래의 모습은 단지 지금 이 세상의 당신의 성격과 존재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149P 중국에서는 적극적으로 사회적 흐름에 참여하는 태도가 인도에서보다도 훨씬 중요시되고 있는데, 이것은 누구나 매우 강하게 느끼는 것이다. 인도 대승불교의 "보가가 곧 요가이다."라는 말에서조차 "아무튼 가능하면 빠져나오고 싶다"는 기분이 느껴진다. 그러나 중국에는 이처럼 훌륭한 참여의 정신이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
150P "왜 하느님이 너를 창조하셨지?" "하느님이 저를 창조하신 것은 제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섬기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천국에서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 사는 행복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 여기서 신과의 관계가 나타난다.
151P 5세기의 그리스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이 출연과 더불어 다른 요소, 곧 합리적인 철학 글고 인간을 인간으로서 보는 휴머니즘의 전통-그것은 동양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이 추가되었다. 휴머니즘이란 인간을 신들에게 예속되지 않는, 만물의 중심으로 보는 인간관이다. 신들은 메아리로서만 존재할 뿐, 인간의 다양한 힘의 표현에 불과하다.
154P "삶은 괴로움이다"라는 불교의 깨우침이 그를 압도한 결과, 그는 불교도가 되었다.
154P 탑에는 불교 이전의 신들이 부처를 경배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것이 블교의 훌륭한 점이다. 불교는 어디로 가건 "너희의 신들을 제거하라"하고 말하지 않는다. 불교가 가는 곳마다 참으로 간단하게 종교의 융합이 이루어진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특징은 자신들이 진출한 곳의 신들을 전멸시키는 것이다. 보다 온건한 불교의 특징은 먼저 살고 있던 신들 역시 그 땅의 생명력이며, 불성의 표현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7. 이드에서 자아로 : 쿤달리니 요가(1)

155P 요가의 이념은 요가(yoga)라는 말 속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어떤 것을 다른 어떤 것과 "묶다. 결합하다(yoke)"라는 뜻을 가진 유즈(yuj)라는 어근에서 유래한다. 결합되는 것은 우리의 자아의식과 의식의 근원이다. 영구불변의 철학의 신 관념이 서양의 신 관념과 크게 다른 것처럼, 의식의 관념도 동양과 서양이 크게 다르다.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동양사상에 적합한 말로 표현한다면, 신들은 에너지의 의인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생명, 모든 생명, 당신의 생명, 세계의 생명을 만드는 에너지의 의인화이다.
155P 우리 서양인의 신 관념에 따르면, 신은 하나의 사실이며 그 사실로부터 에너지가 방출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에 따르면, 두뇌가 의식의 원천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생각에 따르면, 두뇌는 의식의 한 가지 기능이다. 의식이 앞선다. 두뇌는 의식을 포함하고, 그것을 어떤 방향, 곧 이차적 지식인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식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기관이다.
155P 서양사상에도 주류 철학 또는 제도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항하여, 비록 단기간이지만, 이런 이념이 들어온 적이 있다.
157P 사고의 법칙은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결정한다. 예를 들자면, 논리법칙과 범주가 있다. 그 법칙에 들어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당신은 얽매여 있다. 이것이 바로 마야(maya)이다.
157P 인도의 마야 개념이 감성의 형상이나 논리의 범주에 대한 칸트의 개념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거승ㄹ 처음으로 인정한 사람은 쇼펜하우어였다.
158P 당신이 "신은 하나인가, 여럿인가?"하고 묻는다면, 하나와 여럿은 개념이다. 그것들은 사고의 범주들이다. 그리고 신이라는 말은 본래 하나의 인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인격을 넘어서는 것, 실제로 사고를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화적인 상징은 초월성에의 길을 열어준다.
158P 상징이란 본디 신화적인 상징인데, 그 한 쪽 발은 이곳에 놓여 있지만 다른 한쪽 발은 무한성에 놓여 있다. 그것은 초월성을 향하고 있다. 기호는 이곳에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서양에서의 통상적인 해석에 따르면, 신은 상징아 아니라 기호이다.
158P 어쩌면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우상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에 타인의 우상숭배를 찾아내어 파괴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159P "요가란 정신의 자연발생적인 활동을 의도적으로 정지시키는 것이다."
159P 요가의 목표는 정신을 정지시키는 데에 있다.
161P 당신과 타인은 하나이다.
161P 요가의 목표는 서려 있는 에너지를 깨어나게 해서 등골을 통해서 위로 가져가는 것이다.
162P 요가의 목표는 이 뱀을 깨워서 등골을 타고 오르게 하는 것이다.
164P 신은 모든 에너지의 의인화일 뿐이며,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에너지는 이 세상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164P 동양에는 전통적으로 다섯 개의 원소가 있다. 서양에는 네 개의 원소가 있다. 그러나 그 원소들을 끌어당기거나 멀리하는 애증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제5의 원소를 나타낸다. 동양에서는 제5의 원소를 "아카샤(akasha)"라고 부르는다, 이것은 보통 에테르(ether)를 의미한다. 그 밖의 원소는 흙, 물, 불, 바람이다.
170P 이 세상에는 상징의 정신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상징을 물질적인 것으로 해석하면서 엉뚱한 속물적인 행동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있다.
173P 사실에 매달리는 사람을 우리는 좀팽이라고 부른다. 그들이야말로 바로 차크라 1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계의 예술은 감상적인 자연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곳에는 광휘를 살짝 엿볼 수 있는 틈새조차 없다.
8장. 심리학에서 영적인 것으로: 쿤달리니 요가(2)
182P 여신의 시간의 주기이다. 여신은 시간이며 자궁이다.
184P 호흡은 언제나 당신의 참된 실재는 우주에 생기를 불어놓는 신비한 기(氣)임을 말해주고 있다.
185P 달은 생명의 조수의 지배자이다. 모든 성적인 것은 생명의 조수이다.
189P 인생의 활동 속에서 신성한 것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힌두교, 탄트라교, 불교의 훌륭한 점이다.
193P 민중종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 바란다. 사람들은 건강, 부, 자식, 승리를 얻으려고 기도한다. 신들은 당신의 동물적 본성에 봉사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그것이 민중종교이다. 신의 이름이 무엇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
194P 민중이 찾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건강, 부, 자식이다. 신의 이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194P 우리는 차크라 4에 도달할 때까지는 참된 종교생활, 즉 정신적 탄생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195P 세계의 쪼개진 형상들, 곧 모든 이미지들이 형상들의 형상의 조각들인 것처럼, 모든 말은 옴의 조각들이다. 옴은 신의 영광의 소리이다.
195P 꿈은 신화의 개인적인 모습이다. 꿈과 신화는 같은 종류의 것이다.
195P 당신의 신은 나의 신이 아니다. 따라서 나에게 그것을 강요하려고 하지 말라. 모든 사람은 저마다 고유한 존재와 의식을 가지고 있다.
200P "궁극적인 헤어짐은 신(곧 원소적 관념)을 위해서 신(곧 민족적인 형태의 신)과 헤어지는 것이다."

9. 천상계로의 하강 : '티베트 사자의 서'

205P 죽음과 삶의 신화는 곧 환생의 신화이다.
205P 만일 당신이 광명을 얻지 못하고 죽는다면, 아직 어둠속에 있는 당신의 모든 것을 분쇄하는 지복의 직관을 볼 준비가 안 된 채로 죽는다면, 연옥에서 죄를 씻게 된다.
206P "그대는 이제 근원의 빛을 체험하고 있다. 그대의 의식과 우주의 의식 사이에는 아무런 장벽도 없다. 그 상태에 머물려고 노력하라...."
219P 누구나 야마 안타카(Yama-Antaka), 즉 자기 내면에 있는 죽음의 공포를 죽이는 힘에 의지함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
223P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 모든 것은 시간의 영역 안에서 일어난 사건일 뿐이다. 부동지는 지금 여기에 있다"라고 생각하는 승려가 잇다면, 그는 정각의 광명을 얻었을 것이라고.
226P 경전에 인도되어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면, 그토록 무섭게 느껴졌던 세계가 불성의 세계, 어디에나 부처가 있는 세계로 바뀐다. 경전은 우리를 그곳으로 이끈다.
226P 누구나 자기가 선택한 신, 곧 이스타데바타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선택한 신에게 충실하라. 그것이 당신의 길이다. 당신의 신이 어떤 신이건 같에 그 신을 통해서 부처의 전세계가 당신의 지식이 될 것이다.
226P 자신이 선택한 신을 자신의 길라잡이로 삼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세련된 관념이다.

10. 어둠에서 광명으로 : 고대 그리스의 신비종교

235P "우리는 어떤 제의를 행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이미 제의를 행하고 있다. 단지 그것에 대해서 명상하지 않을 뿐이다.
250P 기원후 처음 4세기 동안 기독교와 유태교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말하자면 예수는 야훼의 아들인가, 아니면 야훼가 알지 못하는 더 큰 힘의 아들인가?
251P 우리가 그런 상징들에서 읽어낼 수 잇는 것은 세속적인 깨달음과 영적인 깨달음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11. 길은 없었다: 아서 왕 전설과 서양의 길

255P 위대한 작품들은 갑자기 나타난다. 이것은 문명의 탄생에 대한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다.
257P 사회의 구성원은 국민이 아니라 시민이라는 사상은 그리스에서 생겼다. 이 개인사상 그리고 개인의 탐색이 이 장의 주제이다. 중세 유럽에서 어것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개인의 길이라는 생각이 더욱더 강해지는 것이다.
257P 성배 이야기에는 유럽의 두 가지 전통이 흐르고 있다. 그 하나는 고대 게르만-켈트족의 정신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럽의 고유한 영웅적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근동에서 들어온 기독교적 전통이다. 근동의 사고체계와 가치체계는 유럽의 그것과는 정반대였다.
259P 우리의 의도, 우리의 여행, 우리의 목표는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 곧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261P 부처는 인생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인생은 살아 있음의 고통의 경험이다. 고통이 있는 곳에 당신의 인생이 있다. 그러니 그것을 찾으라.
261P 신은 우리 마음속에 있거나, 우리 자신의 경험을 벗어나서 우리 마음속에 없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262P 황무지는 진실하지 않은 사람을 살아가는, 규범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의 세계이다.
267P 동물로 나타나는 신은 인간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진정한 신화적 전통이 있는 곳에서는 신의 형상이 아니라 신의 에너지를 강조한다.
268P 성배는 우주의 중심에 있는 샘이며, 그곳으로부터 영원한 에너지가 신간의 세계로 흘러들어온다.
270P 로마인 그리고 그 앞의 그리스인은, 다른 민족이 섬기는 신들과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을 같은 신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들을 우주로 만들고 유지하는 에너지의 의인화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272P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뒤를 이은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4세기 후반에 이렇게 선언한다. "로마 제국에는 기독교 외에는 어떤 종교도 존재하지 않으며, 비잔틴 왕조가 섬기는 기독교 외에는 어떤 형태의 기독교도 전재하지 않는다." 그때부터 로마, 사리아, 그밖의 지역의 예술가들이 아시아로 탈출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페르시아와 인도 예술이 새로운 꽃을 피운 반면에, 유럽 예술은 완전히 시들어버렸다.

12. 고상한 마음 :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궁정연애

288P 자신이 선택한 길을 여행하는 것은 면도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
289P 이것은 자기의 참존재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리고 그녀를 궁정으로 데려오기 위하여 겪는 온갖 시련에 관한 이야기이다.
295P 사랑의 신성한 맹세는 성교이다. 그래서 성교는 신성하다.

13. 성배를 찾아서: 파르치팔 전설

308P "그저 주어지는 여자와 결혼하지는 않겠다. 내 아내는 내 손으로 고르겠다." 그것이 결혼과 사랑의 최초의 결합이다. 결혼과 사랑의 분열이라는 문제에 대한 최초의 답인 것이다.


내가 저자라면

이 책 역시 조셉 캠벨이 신과 신화는 시대와 사회의 반영이며 이는 결국 어떤 시대이건 어떤 지역이건 인간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고 말하는 연장선상의 이야기들인 듯 하다. 그는 각 시대와 지역의 모든 이야기 및 사실들과 작품들로 신화를 멋지고도 생생하게 해석해낸다. 그가 읽어내는 다양한 이야기와 작품들의 은유,상징,추리는 마치 탐정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나를 매료시키기도 했다. 그의 폭을 알 수 없는 박식함과 깊은 통찰력, 추리력, 논리력등은 탁월하다고 할밖에. 이 책에서의 신화 이야기는 나일강 문명의 이집트 신화 세계를 거치고 동양철학인 불교로 넘어가며 그 다음 불교하면 떠오르는 인도의 요가, 불교에서 빠질 수 없는 나라 티벳까지 나아간다. 다시 그리스 문명으로 넘어가고 대표적인 작품인 ‘아서왕’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르치팔’ 이야기를 신화로 풀이하면서 방대한 여정은 마무리된다.
하지만 각 풀이에 대한 그의 상상력은 뛰어나지만 그 전체를 이해하기에는 책의 구성 자체도, 나의 이해력도 부족하다.
그는 이 모든 지역과 시대를 이야기를 하면서 종종 그가 바라보는 신화와 신,종교에 관한 그의 생각들을 정확하게 내비치기도 한다. 모든 신화는 공통적인 요소들의 반복이라는 것. 즉 모두는 같은 은유와 상징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외치는 신도 결국은 에너지의 의인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신의 모습은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뿐이라고. 다만 이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일 뿐인데 이와 관련해서는 책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기독교의 배타주의에 대해서 역설하고 있기도 하다. 즉, 달을 가리키는데 달이 아닌 손가락을 보는 것과 같다고 말이다. 본질,즉 상징이 나타내는 그 실체를 보지 못하고 그 표상 자체만을 실체로 인식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는 신은 실재하는 게 아니고 단지 초월과 신비를 상징하는 우리들 자신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특히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더 이상의 신화 이외의 새로운 내러티브는 없다는 것이다. 많은 소설과 영화의 이야기들(가령 이 책을 읽다 보면 영화 ‘제 5원소’, ’무극’ 및 문학 작품인 ‘로미오와 줄리엣’등이 떠오른다.) 은 결국 조셉 캠벨이 풀이해 주는 옛 이야기들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 듯 하다. .
이 책을 읽는 도중 반가운 그림이 나오기도 했다. ‘생각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다루어졌던 반인반수 모양의 동물그림인데 캠벨 또한 생각의 탄생 저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일반적인 해석인 반인반수 모양의 동물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생각의 탄생의 저자들은 동물처럼 생각하는 감정이입법의 학습으로 동물을 잡기 위해 동물이 되어보는 사냥법 학습이라고 풀이하는데 과연 조셉캠벨 살아 있다면 무엇이라고 했을지 궁금해 지기도 한다.

이 책은 역자 후기에 나와있듯이 조셉 캠벨이 쓴 저서는 아니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 미국 각지에서 행한 캠벨의 강연을 출판사에서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따라서 내가 저자라면은 내가 출판사라면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조셉 캠벨은 이 책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타계했다고 하는데,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이 책은 나오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내가 캠벨이라면 이 목차는 독자에게 너무 불친절하고 균형이 맞지 않는 책이기 때문에 출판을 고려했을 것이다. 물론 이 생각은 지금까지 내가 접해온 그의 이야기가 단지 누군가 엮어낸 강연이나 대담집 뿐이었기에 저자로서의 진짜 조셉 캠벨을 알 수 없으므로 미완성의 생각일 수 있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로서 조셉 캠벨은 어떨까 더욱 궁금해 지는 것이 다음 편 리뷰 선정작인 그의 저작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라는 책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책 자체만 놓고 보면 전체 목차는 하나의 어떤 주제로 모아지는 유기적인 느낌이 없이 추상적일 뿐이다. 그냥 그가 제시하고 있는 각 신화, 신, 종교이야기의 공통적인 모습들을 조각 맞추기로 제시할 뿐이지 큰 틀을 보기는 힘들다. 즉 각 목차와 이야기들은 하나의 풍성한 이야기들을 중간에서 토막 내 가져다 편집한 듯한 인상을 준다. 목차 중에 서론 정도만이 책을 읽는 독자로서 와 닿는다고 해야 할까? 구석기시대부터 다양한 지역에서 나타나는 종교 별 특징까지 신화라는 주제로 그는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전체가 아닌 일부를 책으로 만나는 독자는 어리둥절하다. 즉 이 책 자체의 내용만 놓고 보자면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없다면 읽기 어려운 면이 있다. 이는 책이 끝날 때까지도 정리되지 않아 마치 먹기만 하고 나오지 않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조셉 캠벨의 전작과 사상을 모두 이해하고 있지 못하지만 종종 그가 제시하는 은유와 상징 풀이들이 어느 정도의 적합성이 있을까 따져보고 싶기도 할 정도로 그의 의견에만 치중되었다는 느낌을 받는 풀이도 눈에 띈다. 이는 그의 책을 4월 한달 동안 지속적으로 읽어나가면서 풀어야 할 숙제일 것이다. 더불어 가끔 느껴지는 번역의 미숙함은 간간이 불편함을 주는 것도 같다.

조셉캠벨의 이야기를 좀 더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역사,철학,문학에 어느 정도 식견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가 풀어내는 독특하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기에 나의 식견이 너무도 짧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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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희
2008.04.08 18:07:29 *.41.62.236
그렇죠?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하지만 앞으로 읽어야 할 책이 많으니 다 읽고 나면 아주 쬐끔이라도 알게 되지 않겠어요.

출근을 잘 하셨나요. 은근 걱정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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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환
2008.04.08 19:24:18 *.34.17.31
당신의 북리뷰를 오늘 처음으로 읽어봤습니다.

아무도 안 믿으려나? ㅎㅎㅎ

몸이 많이 고되겠지만, 집안일은 내게 맡기고 그냥 달리시길~

변경연엔 사부님이.

집에선 내가.

빨간모자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말길~!!!

ps. 오늘 저녁 메뉴는 실패한 두부찜. 내일 쉬는거 고려해 양도 많이 했는데.. 미안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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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창
2008.04.08 22:10:38 *.243.36.77
두부찜도 제대로 못하면서 빨간모자라니... 애들 집나가면 어쩔려구...
두부찜 많으면 택배로 보내삼. 내일 반찬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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