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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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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8일 09시 58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 조셉 켐벨(JOSEPH CAMPBELL)

「신화의 힘」에 이은 켐벨의 두 번째 책이다. 「신화의 세계」에는 「신화의 힘」에서 보다 신비적인(또는 아리송한) 내용들이 더 많이 나타난다. 이해하기에 쉽지 않은 저자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은 그가 이야기 하는 신화의 중요성이다. 그는 신화가 우주와 그 각 부분들, 국가와 그 밖의 인간 집단과 신비적인 차원의 관련을 맺고 있다고 말한다. 신화의 기능 중 이 신비적인 기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 하나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신화의 교육적 기능이다. 그는 개인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신화를 통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신화가 살아있는 인간을 그의 생활주기와 조화시키고, 그가 살고 있는 환경과 조화시키고, 사회와 조화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말한다.

그는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우연히 접하게 된 아메리카 인디언에 빠져들어 인디언 신화를 읽게 된다. 인디언 신화의 내용 중에 어릴 때 수녀님에게 들었던 창세, 사망과 부활, 승천, 처녀 수태 등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신화에 푹 빠져들게 된다. 그 이후 힌두교에도, 중세 아더왕 이야기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평생을 신화학 연구에 바치게 된다.

1925년과 1927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였다. 1934 년부터 38년간 사라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에서 학생들에게 신화를 가르쳤다.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와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신의 가면(THE MASKS OF GOD)〉(전 4권)을 펴냈다. 프린스턴 대학 볼링겐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도 유명하며, <천의 얼굴올 가진 영웅>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신화 이미지> 등의 저서를 통해 왕성한 지적 연구 활동을 펼치다 1987년 세상을 떠났다.

저자는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라고 생각된다. 저자 이전에 신화학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르겠지만, “민담과 인류학에 나오는 해골에 생명을 불어넣은 사람”, 20세기 최고의 신화해설가로 불리워 지는 것으로 보거나, 신화 관련 베스트셀러를 저술하고 TV 대담프로를 통해 신화가 일반 대중에게 한층 가까이 다가 갈수 있도록 만든 것 등으로 신화학에 새로운 지평을 연 위대한 스승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과찬인가?

그는 신화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한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 것 같다. 그는 스스로를 잡학가(雜學家)라고 얘기 한다. 요즘은 학문 간의 통합 연구가 보편적인 트랜드가 되었지만 저자가 활동한 30-70년대에는 그런 경향이 일반적이지 않았을 듯싶다. 자신이 좋아하는 신화 연구를 위해 혼자서 뭔가를 이룩해야 한다면, 한 우물을 깊이 파고들어 박사학위를 취득해야 할지, 아니면 여러 분야에 걸친 다방면의 공부를 해야 할 지를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저자는 박사학위 취득도 마다하고 문화인류학, 철학, 역사, 예술, 종교 등 스스로 칭하는 ‘잡학’을 두루 공부하여 일반인들에게 신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부여한다.

그는 변화(경영) 컨설턴트이다. 그가 이야기 하는 것은 결국 신화를 통한 개인과 사회의 변화의 필요성이다. 비신화화(非神話化)한 세계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이 왜 신화를 알아야 하는지, 어떻게 신화를 알아가야 할지, 결국 이를 통해서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어 나가야 할지를 그는 이야기 한다.

개인적으로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열 살 나이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 평생 그 분야를 공부하며 살았다는 점, 그의 표현대로 천복을 좇으며 한 평생을 살았으니 그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겠나? 더구나 그의 책에서 보여 지는 신화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열정은 80 고령이라고 보기에 참으로 놀랍다. 그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건 자기의 인생을 고집스럽게 자기식대로 살아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화를 사랑하면서 끈기와 집념으로 살아간 그의 인생에서 시대를 앞서서 살아간 영웅의 면모를 힐끗 엿 본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1. 서론 : 인간과 신화의 기원

우주와 조화를 이루면서 그곳에 오래 머무르는 것, 이것이 신화의 주요한 기능이다. 사회가 원시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발전할 때 제기되는 문제는 개인과 사회의 이런 “신비적인 관계”를 지속시키는 일이다. 지금 주위를 둘러보면, 특히 대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거의 없음을 알게 된다.[5]

남성의 과제 중의 하나는 공동체에 속한 여성을 유괴로부터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예부터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며, 종족 번식은 이 두 상반된 육체조직을 선호한다. 그러므로 신화는 당연히 이 사실을 다루며, 남성의 몸과 여성의 몸은 모든 신화에서 저마다 상징적인 가치를 지닌다.[10]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 종류는 매우 실제적인 동물적인 인간이고, 다른 한 종류는 신성한 잉여로서의 아름다움의 유혹에 민감한 인간적인 인간이다. 이것은 큰 차이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신적인 관심과 욕구의 최초의 작은 싹이며 다른 동물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12]

이 단계에서 신화적 사고의 최초의 징후가 출현한다.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나타난다. 그 하나는 매장이다..... 매장할 때 희생제물을 바치는 행위가 따랐던 것이다..... 이것은 신성한 잉여로서의 뛰어난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신비의 첫 체험이다..... 무엇이 그를 떠난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떠나간 것은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상을 발견한다. 부장품과 함께 사람을 매장한다. 최초의 매장이 행해진 것은 이 네안델타인 시대이다.[13]

그 무렵에 이미 순장(殉葬)이 있었을까? 진상은 알 수 없다. 6만 년 전의 일인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아는 것은 인간의 영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 살아남으며, 사람은 그 영혼과 관련을 맺는다는 것이다.[14]

네안델타인 시대로 되돌아가보자. 그곳에는 신화적인 경험 및 사고의 두 가지 징후가 발견된다. 첫째는 인간의 매장이고, 둘째는 동굴곰(cave bear : 구석기 시대의 동물)의 두개골 숭배이다.[14]

수렵문화의 기본적인 신화적 주제는 동물은 자발적인 희생자라는 것이다. 동물은 자진해서 살해되려고 찾아온다. 우리는 세계 곳곳의 신화에서 이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동물은 다음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 :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죽일 것. 내년이 또 다시 찾아오는 것처럼 자신의 생명을 어머니라는 원천으로 되돌려보내어 소생시키는 제의를 행할 것.[15]

자연의 신비란 생명을 죽임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이다. 달리 살아갈 방법이 없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잡아먹음으로써 살아가는 것은 두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는 하나의 생명이다. 잡아먹는 쪽도, 잡아먹히는 쪽도 실은 하나의 생명이다.[16]

동굴곰 시대의 사람들은 동물이 자신을 바친 데에 대해서 감사했다. 오늘날 우리는 양식을 주신 성스러운 존재를 떠올리고 그에게 감사한다. 이것은 전혀 다른 심리이며, 전혀 다른 신화이다. 근원적인 신화의 이미지는 생명의 이미지다.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먹는 생명의 이미지다.[16]

우리는 언제나 신을 일종의 사실로 생각한다. 신이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이란 단지 초월과 신비를 상징하는 우리들 자신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신비이며, 그것은 인간이나 동물로 나타난다. 아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나 동무로 인정되는 것이다.[23]

마치 달이 그 그림자를 벗어던지고 모습을 바꾸는 것처럼, 뱀은 허물을 벗음으로써 재생한다. 따라서 뱀은 달과 마찬가지로 태음의식(太陰意識)의 상징이다. 바꾸어 말하면 생명과 의식, 생활 에너지와 의식은 시간적으로 유한한 몸 속으로 들어간다. 의식과 생명은 시간의 영역 - 탄생과 죽음의 영역 - 과 관계가 있다. 사자는 태양과 관련이 있다. 사자는 태양의 동물이다. 태양은 그 안에 그림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 태양은 언제나 시간과 탄생과 죽음과 무관하며, 따라서 완전한 생명이다. 한쪽은 타자와의 관련을 초월하고, 다른 한 쪽은 타자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 두 종류의 에너지는 본디 동일한 에너지이다. 그리고 이 두 에너지를 모성적으로 의인화한 것이 여신이다.[28]

신비적인 차원은 선악을 초월해서 존재한다. 윤리적인 차원은 선악의 영역에 존재한다. 오늘날 우리의 종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 중의 하나는 그것이 최초 출발점에서 선악의 문제를 강조한다는 점이다.[29]

2. 전설 속에서 사는 사람들 :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

우리는 초월적인 신비로부터 태어나고, 사회는 곧바로 우리들에게 각인을 시작한다. 우리가 써야 하는 가면은 사회가 씌워준 것이다. 예이츠는 이것을 원초적 가면(primary mask)이라고 부른다.[33]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신비의 순간이다. 여기에서 당신의 의식, 당신의 몸과 그 의식은 최고의 상태에 도달한다. 그 속에서 당신은 자문한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나는 의식인가, 아니면 의식을 나르는 수레인가? 나는 빛, 태양의 빛을 나르는 육체인가, 아니면 빛 그 자체인가?..... 중요한 것은 빛을 나르는 수단이 아니라 빛이다.[34,35]

이렇게 높은 곳에서 여러분의 머리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자문해본다. 여러분의 머리가 나르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분의 머리는 의식을 나르는 수레이다. 여러분의 머리는 얼마나 많은 의식을 비추고 있으며, 그중 어느 것이 당신인가? 당신은 의식을 나르는 수레인가, 그렇지 않으면 의식 자체인가?
만일 당신이 자신을 의식과 동일시한다면, 그것을 옮겨준 수레에는 감사의 마음으로 작별을 고할 수 있다. 오 죽음이여, 너의 가시는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당신 자신을 참으로 영원한 것과 동일시한다. 의식은 형상을 내던졌다가 되찾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이 모든 존재에 내재하는 의식과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당신은 만물과 하나가 되고, 따라서 지지무게(事事無게)라고, 곧 개별 존재와 전체 사이에는 어떠한 장벽도 없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지상에서의 궁극적인 신비체험이다.[35]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대지는 인간의 것이 아니며, 인간이 대지의 것임을. 우리가 핏줄로 얽혀 있듯이, 이 세상 만물은 그렇게 얽혀 있습니다. 인간은 생명의 피륙을 스스로 짜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 피륙의 한 올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피륙에 대해서 무엇을 하건, 그것은 그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시애틀 추장의 연설>[37]

우리는 신비, 곧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나오는, 무한하고 처음도 끝도 없고 영속하는 신비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다.[40]

모든 생명은 신비로운 생명에 의해서 유지된다. 인간이 먹는 모든 것은, 식물이건 동물이건, 당신 자신의 생명을 구성하는 물질이 되려고 기꺼이 자신을 바치는 생명이다.[41]

“한 그림을 완성하는 것, 예컨대 이 모래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어떤 뜻이 있습니까?” 그러자 그들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이 그림을 완성해버리면 내일 아침에 맨해튼의 모든 여자들이 임신하게 된답니다.” 이 그림들이 힘을 옮기는 것이다.<나바호족>[45]

재미있는 사실은 이 괴물 역시 태양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태양은 소년들이 이 괴물을 죽이는 것을 도와준다. 미덕과 악덕, 대립물들, 그밖의 모든 것들이 가지는 모호성을 상징하는 이야기이다.[55]

이 이야기는 신화적인 모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자란 세계의 경계를 넘어 아직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초월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없었던 것을 얻고 그 전리품과 함께 돌아온다. 여기에서는 이런 종류의 신화체계가 가지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57]

그는 소년 시절에 경험한 환상 속에서 “나는 세계의 중심에 있는 성스러운 산에 서 있는 자신을 보았다” 고 말했다..... 그는 세계의 중심이자 가장 높은 산은 사우스다코다 주의 하니 피크(Harney Peak)라고 말하지만, 곧 이어 “그러나 중심이 되는 산은 어디에나 있다.” 고 덧붙인다. 이 노인은 민간 신앙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는 상징과 그 상징이 의미하는 것의 차이를 잘 알고 있다.<블랙 엘크>[58]

“신은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공[球]이다. 그 중심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 경계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중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제의나 신화의 기능은, 아주 먼 옛날의 어딘가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당신이 그것을 경험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58]

나는 신비적인 차원과 그것에 대한 깨달음, 곧 신비주의와 과학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기원전 2000년의 과학과 2000년의 과학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 점에서 우리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전(성전 :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역주)은 아주 오래 전에 우리의 어떤 생활경험도 공유하지 않는 다른 민족이 다른 곳에서 편찬한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근본적인 괴리가 있다. 지금 그 성전을 읽어보면, 성전은 인간을 자연보다 우월한 존재로 말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인간에게 주어진 본성으로 본다. 그것을 시애틀 추장이나 블랙 엘크의 말과 비교해보라. 이것이야말로 이미 진부해진, 죽어버린, 기능하지 않는 신화와 지금 기능하고 있는 신화의 차이다. 신화가 살아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에게도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림과 마찬가지로, 신화는 기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이미 신화를 경험하고 해석하고 확대했다면 신화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화는 먼저 기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기능하는 신화를 잃어버린 것이다.[59]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사회적 신화의 보호와 복구(Care and Repair of Public Myths)”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그 기사의 요지는 사회는 그것을 떠받치고 그것에 통일성을 주는 신화를 필요로 하며, 그런 신화를 가지지 못한 사회는 붕괴된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다.[59]

신화는 살아 있는 인간을 그의 생활주기와 조화시키고, 그가 살고 있는 환경과 조화시키고, 이미 그 자체가 환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회와 조화시키는 기능을 한다.[59]

3. 그리고 우리는 바다에서 무기를 씻었다 : 신석기시대의 신들과 여신들

문명은 역사와 더불어 출현한다. 청춘, 성숙 그리고 노년의 과정이다.[61]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에서 여신은 중요한 신화적 상징이 되는데, 과거를 미래로 바꾸고, 정자를 자식으로 바꾸고, 씨앗을 작물로 바꾸는 자연의 에너지를 체현하고 있다.[63]

“오오, 어머니 여신이여. 달이 다시 태어나듯이 저도, 저의 유한한 육체도 모체로 돌아가게 하소서.”[65]

실제로 신들도 두 종류가 있었다. 우주와 우리 자신들 속에 작용하고 있는 다양한 자연의 힘을 대표하는 신들과, 부족의 특정한 수호자로서의 신들이다. 대부분의 신화에서 부족의 수호신은 자연신보다 아래에 놓인다. 셈족의 신화에서는 이 역할이 역전된다.[67]

최초의 도시는 근동에서 나타났는데, 여기에는 전혀 새로운 요소가 있었다..... 농업의 정착과 가축의 사육에 이어 나타난 공동체의 확대와 함께 직업의 차별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사람들간의 차별과 함께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생활양식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단일조직의 구성원이라는 자각을 가지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이다..... 초기문화가 안고 있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회조직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직업적인 사제들 덕분에..... 그리하여 수학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우주의 질서라는 이념이 생겼다. 그것은 문화의 전반적인 변화이며,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새로운 요소가 들어온 것이다..... 아주 옛날에는 이 특정한 한 그루의 나무, 이 특별한 연못이나 바위 들의 예외적인 것이 주요했다. 그 뒤에는 어떤 동물이나 식물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 우주적 질서라는 관념이 생기고, 예외는 환영받기는 커녕 배척된다. 예외는 이상한 존재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우주관이 생기게 된다.[72]

인도에서는 신이 자진해서 춤을 추며 세계에 들어온다. 세계는 유희이며 놀이이다. 그것이 이 신화들의 기본적인 분위기이다. 적어도 그것은 즐거운 것이며 유머러스한 것이다. 세계의 신화 가운데서 구약성서의 신화만큼 음울한 것은 없다.[77]

따라서 기원전 2400년 무렵부터 우리 세계의 특징, 곧 우리 문명의 특징이 된 전쟁, 용서 없이 몰살하는 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80]

이 시대의 소의 신이자 달의 신인 두무체에 대한 찬미의 노래가 지금도 남아 있다. 저승으로 내려간 두무체는 그의 아내인 여신을 향하여 이곳으로 와서 당신과 자신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달라고 노래한다. 여신은 한걸음 한걸음 저승으로 내려가 자신과 남편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영웅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이것이 순사(殉死)의 사상이다. 부부는 한몸이다. 남편이 죽거나 희생되었다면 아내는 그를 따라야 한다. 아내의 영웅적인 행위에 의해서만 두 사람이 함께 영원으로 인도된다.[84]

4. 파라오의 지배 : 이집트, 출애굽 그리고 오시리스 신화

인도-유럽인 전사들이 들어오면서 전세계가 호전적인 부족집단들로 변모했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시리아-아라비아 사막지대로부터 역시 본질적으로 전사의 성격을 띤 셈족이 침입해온다. 전사들의 주요 신은 벼락을 내던지는 야훼나 제우스 같은 남성신이다.[87]

인도-유럽인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제우스라고 부르는 신을 당신들은 인드라라고 부른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통합주의(syncretism)로 알려져 있다. 통합주의의 경향은 곳곳에서 발견된다.[88]

죽은 오시리스는 이집트를 풍요롭게 해주는 나일 강의 범람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토막 난 오시리스의 체액은 나일의 강물과 동일시된다. 따라서 이집트를 살찌우는 힘이 바로 오시리스이다.[99]

끝내 못 찾은 나머지 한 토막인 성기는 물고기가 먹어버렸다. 금요일에 물고기를 먹는 습관은 여기에서 유래 한 것이다. 그것은 신성한 살을 먹는 일종의 제의이다.[99]

사람이 죽게 되면 모두 오시리스와 동일시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사자(死者)는 오시리스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오시리스 존스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사자는 오시리스와 하나가 되기 위하여 저승까지 여행한다. 오시리스가 오시리스에게 가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한 몸이라는 모티프이다. 가는 도중에 사자인 오시리스는 모든 신들을 먹고 자신으로 돌아간다. 여기에는 신들이 우리 인간 에너지의 반영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나타나 있다. 우리가 신들을 먹는다..... 이것은 내 몸의 모든 기관은 신들의 기관이며, 누구도 저승에서 내 심장을 빼앗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누구나 저승을 두렵고 위험한 곳으로 생각한다..... “나는 어제요, 오늘이요, 내일이다. 나는 다시 태어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신들이 솟아나오는 원천이다.” 이것은 위대한 자각이다. 당신이 죽기 전에, 그것이 어렵다면 저승에 닿기 전이라도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이다.[100]

나는 이집트의 상징과 인도의 신비철학 사이에는 아주 큰 유사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이 세 개의 상자와 석관 안에 있는 두 개의 장식관은 인도에서 다섯 개의 칼집이라고 부르는 것과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해 둔다.[103]

그것들은 두 개의 완전히 다른 방향성이다. 정신의 칼집은 윤리, 곧 선과 악, 밝음과 어둠, 기쁨과 고통에 관계한다. 지혜의 칼집은 그런 분별 이전에 무엇이 있는가를 안다. 그것은 환희이다. 따라서 그것이 당신의 본디 모습이다. 당신은 환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무리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크나큰 번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비참에 빠져 있다고 할지라도, 만일 환희의 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만 한다면, 이 현실이야말로 인생의 환희임을 깨달을 수 있다. 고통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영웅적인 신화에는 이런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104]

그는 양을 사육할 때 사용하는 끝이 구부러진 지팡이와 도리깨를 들고 있는데 그것은 정복하는 파라오를 그린 이집트 미술에서는 표준적인 모티프이다. 파라오는 무릎을 꿇고 있는 적의 머리채를 붙잡고 지금 바햐흐로 찍어 죽이려고 하고 있다. 이들은 정복민들이다.[107]

이리하여 우리는 물을 지나서 들어가고, 물을 지나서 나온다. 신화에서 그런 들고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무엇이 들어가고, 무엇이 나오는가를 확인해보기 바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신화가 전하는 신비적인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들어간 것은 족장들이고 나온 것은 민중이다. 지옥의 밑바닥과 같은 고난의 땅 이집트에서 민중이 일치단결하여 공동의 자기 인식을 이룬 것은 위대한 일이다. 영웅은 모세가 아니다. 구약성서의 영웅은 민중이다. 민중은 하나의 단위로서 간주되며, 개인은 그 일원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강조되는 것은 집단, 집단, 집단이다.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근동의 특징이다. 유럽에서는 다른 데에 강조점을 둔다. 유럽을 기독교에 동화시킬 때 생긴 문제 중의 하나는 둘도 없는 실체로서의 개인의 의식을 어떻게 재발견하고 유지해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근동의 집단주의 전통을 개인적인 자기 실현의 전통 속에 어떻게 옮겨심을 것인가와 같은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13세기 유럽의 성배(聖杯, Grail) 전설의 문제이기도 하다. 13세기에 이 전설은 새로운 방식으로 정리되었다.[109]

그런즉 우리가 한 것은 타인이 한 것과는 다르다. 이것 또한 우리들(유태-기독교/역주) 전통의 특징이다. 모세는 영웅이 아니다. 그가 이끌었던 부족이 영웅이다. 우리의 신화는 부족의 신화이며, 우주의 유일한 신은 우리의 신이다. 이점이 매우 중요하다.[110]

5. 성스러운 원천 : 영구불변의 동양철학

내 생각으로는 “영구불변의 철학”은 신화적 이미지가 가지는 의미를 말로 옮겨 설명한 것이다. 세계의 신비철학들에서 똑같은 관념이 되풀이해서 발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신화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계속성은 철학 속으로 숨어들어간다. 그것이 바로 영구불변의 철학이다.[114]

신화는 꿈과 같은 영역에 속한다. 나더러 말하라면 그 영역을 지혜의 몸(Wisdom Body)이라고 부르겠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몸이 말하기 시작한다. 몸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에너지에 의해서 움직인다. 에너지가 지혜의 몸을 지배한다. 에너지는 거대한 생물학적 바탕에서 나온다. 그곳에 있는 에너지는 에너지임과 동시에, 의식의 양태이다.[114]

꿈의 지혜, 환상의 지혜는 영구불변의 철학의 지혜이다. 꿈을 꾸다가 깨어난 당신의 의식은 그 꿈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정신분석의를 찾아가지만, 정신분석의라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꿈의 해석은 서서히 행해지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당신 자신의 지혜를 당신의 머리로 탐색할 필요가 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영구불변의 철학과 이성적인 사고체계 사이에는 그 방법과 원리에서 극단적인 차이가 있다.[115]

상징의 중요한 문제는 사람들이 상징에 빠져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천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갠지스 강이 흘러나오는 근원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화에서 중요한 것, 신비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상징에 포함되어 있는 속뜻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속뜻은 언제나 정신적이다.[115]

우리 서양인이 상징을 다룰 때의 주요 문제점들의 하나는 상징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우리가 원소적 관념이나 영구불변의 계시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도 이런 상징의 구체화가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신을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인다. 신 관념은 하나의 상징이다.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 형상으로 여겨지는 것은 모두 상징이다.[116]

독일의 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은 이런 훌륭한 말을 했다. “시를 쓰는 것은 말 뒤에 숨어 있는 원초적인 말(Urwort)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세상만물은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다. 괴테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변화하는 것들은 거울에 비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거울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실체는 공(空, sunya)이다. 공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어떤 사고도 거기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상징은 본래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투명해질 필요가 있으며, 열려있지 않으면 안 된다.[119]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살고 잇는 땅을 성지로 여긴다.[120]

신화는 분석과 관계를 가질 필요가 없으며, 원인을 과학적으로 발견할 필요도 없다. 신화는 인간을 그를 둘러싼 환경에 결합시키는 것과 관계가 있다.[122]

그뒤, 천체의 위대한 주기가 발견되자 사회의 전조직을 이 주기운동에 연관시키려는 강한 관심이 생긴다. 그곳에서는 계절마다 열리는 축제가 매우 중요시된다. 이 축제는 자연에 대한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자연은 풍부한 혜택을 준다.[123]

이슬람 세계의 칼리프(caliph)는 그런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정신적인 지배자와 정치적인 지배자가 같은 인물이다. 이 두 가지가 매우 밀접하게 결합되었기 때문에 정신과 사회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125]

마지막으로 제기되는 것은 “희생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희생을 통해서 신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희생은 신들보다 강하다. 그렇지만 그 희생을 주재하는 것은 누구인가? 브라만(Brahman)이다. 따라서 브라만은 신들보다 강하다. 따라서 신의 계시를 받은 인간은 어떤 신보다 강하다. 이것이 우주의 위대한 점이며, 브라만은 그런 위대한 존재이다. 이것이 한 가지 핵심이다.[126]

그 힘에 따를 수 밖에 없다. 그 규칙은 존재한다. 어차피 떨어질 바에는 아예 뛰어들라. 꼭 해야 할 일이라면 해 버려라. 이렇게 해서 희생에 대한 열의가 생기는 것이다.[128]

“이 신을 숭배하라, 저 신을 숭배하라, 차례차례로. 그것은 이 법에 따르는 사람과는 관계 없는 이야기이다. 신들의 근원은 당신 마음속에 있다. 발자취를 더듬어 중심으로 가서, 신들을 낳는 근원은 당신 자신임을 알라.”<찬도기아 우파니샤드>[129]

신들은 바로 당신 자신의 에너지의 상징적인 의인화이다. 당신 자신의 에너지는 우주의 에너지이다. 따라서 신은 저곳에도 있고 이곳에도 있다. 그렇다, 천국은 당신 안에 있다. 그렇지만 또 어디에나 있다. 이것이 영구불변의 철학의 실질적인 내용이다.[129]

열반이란 괴로움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심리적인 태도를 말한다. 당신의 인생을 괴롭게 만드는 것, 그것은 욕망과 불안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바라는 욕망, 사람을 속이려는 욕망이며, 무엇인가를 잃지 않으려는 불안이다. 이 욕망과 불안이 진정되었을 때 당신은 마하수카(Mahasukha), 곧 큰 기쁨의 경지에 도달하고 법열(法悅)을 경험하게 된다. 법열을 경험하게 되면 고통이 당신을 아프게 하지 못하게 된다. 당신은 중심으로 들어가며, 기쁨이 흘러넘치게 된다. 당신이 중심에 들어가면 이미 무엇을 얻는다든지 잃는다든지 하는 일이 없게 된다. 당신은 존재 그 자체가 된다. 이것이 열반이다.[132]

죽여야 할 것은 심리적 차원의 온갖 욕망과 불안이다. 그 때 비로소,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생명은 긍정적인 것이 된다.[133]

6. 정각(正覺)에 이르는 길 : 불교

이런 합리적인 방식으로 자기 발견을 이루고자 하는 한, 그 뜻을 파악할 수 없다. 부처란 합리적인 방식을 털어내고, 그 뜻을 파악한 다음, 그 뜻으로부터 해방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다.[136]

외경(외경 : 전거를 믿을 수 없어서 정경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작품/역주)인 “토마 복음서”에 쓰여 있는 것처럼, “아버지의 왕국은 이 지상에 널려 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느니라.”[145]

“우리는 그곳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큰 나룻배의 사람들이다. 한편, “우리는 수행에 힘쓰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작은 나룻배의 사람들이다.[146]

7. 이드에서 자아로 : 쿤달리니 요가(1)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동양사상에 적합한 말로 표현한다면, 신들은 에너지의 의인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생명, 모든 생명, 당신의 생명, 세계의 생명을 만드는 에너지의 의인화이다. 의인화가 어떤 특징을 가지는가는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서 결정된다. 의인화는 민속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에너지는 인간적인 것이다. 신들은 에너지로부터 태어난다. 신들은 말하자면 다양한 에너지의 심부름꾼이자 매개물이다.[155]

우리 서양인의 신 관념에 따르면, 신은 하나의 사실이며 그 사실로부터 에너지가 방출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에 따르면, 두뇌는 의식의 원천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생각에 따르면, 두뇌는 의식의 한 가지 기능이다. 의식이 앞선다. 두뇌는 의식을 포함하고, 그것을 어떤 방향, 곧 이차적 지식인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식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기관이다. 우리는 모두 그런 초월적인 의식의 표현이다. 초월적인 의식은 사물을 생각하고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우리의 모든 능력들을 훨씬 넘어선다. 이런 생각이 모든 생명의 밑바탕에 있는 기본 이념이다.[155]

우리의 어떤 경험보다도 앞서는 선험적인(priori) 것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식이다.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의 영역으로 들어온다.[156]

뱀은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허물을 벗는다. 따라서 그것은 생명력, 에너지 그리고 죽음을 떨쳐버리는 의식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영역 안에 있다. 죽음의 영역 안에 있는 의식이 죽음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육체를 얻는다. 그것이 재생이며 세대의 연속이다. 언제나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고, 현세대는 죽음으로 던져진다. 생명은 그렇게 이어져온 것이다.[168]

이 세상에는 상징의 정신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상징을 물질적인 것으로 해석하면서 엉뚱한 속물적인 행동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꿔 말하면 이런 것이다. 정신적인 상징을 구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때는 현실의 육체와 관련을 가지는 현실의 행위에 열중하게 되고 정신적인 내용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들이 하나의 의식이 가진 두 가지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 당신은 쿤달리니를 중심에까지 끌어올릴 수 없다. 달빛은 햇빛이 반사된 것이다. 당신의 육체의 빛, 당신의 육체의 의식은 당신의 내면에 있는 불멸의 의식의 반영이다. 의식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당신이 있다. 당신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특정한 모습으로 활동하는 의식의 표현이다. 당신은 개인적인 생명이라는 특정한 것을 통해서 불멸의 것을 끌어낸다. 유한한 자기 존재의 변천 속에서 자기의 영원성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목적의 전부이다.[170]

우리는 이전에 서로 적이었지만, 사실은 대립물, 곧 동일물의 두 측면에 지나지 않았다. 동일물은 아름답다. 사물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 이것이 브라만에 이르는 길이다.[177]

8. 심리학에서 영적인 것으로 : 쿤달리니 요가(2)

한 여성이 라마크리슈나(1834-1886. 인도의 신비주의 종교가)에게 찾아와서 말했다. “저는 도저히 신을 사랑할 수 없어요. 신이라는 개념은 제 마음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답니다.” 라마크리슈나가 물었다. “이 세상에 당신이 사랑하는 게 아무 것도 없나요?”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있지요. 제 어린 조카를 사랑합니다.” 라마크리슈나가 말했다. “거기에 신이 계십니다.”[189]

어떤 사람에게는 성,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권력에의 의지가 근원적인 에너지이다. 둘이 다투고 있는 곳으로 융이 찾아와서 말한다. “그렇다, 이쪽을 향해서 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쪽을 향해서 달리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모두 그 양면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경우에든지 한쪽은 열성이고 다른 쪽은 우성이다.” 그래서 융은 에난티오드로미아(enantiodromia : 서로 반대쪽에 있는 것들 간의 반발과 상호 의존이라는 긴장관계를 가리킨다/역주)라는 이원론적인 심리학을 세웠다. 순식간에 당신의 성 충동은 폭력 충동으로 바뀐다. 또는 이기고 싶은 충동이 성 충동에 점령된다. 우리의 인생에서 그것들은 서로 대립하고 있다.[191]

민중이 찾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건강, 부, 자식이다. 신의 이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따라서 그것이 하나뿐인 종교, 세계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민중종교이며, 신의 이름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194]

9. 천상계로의 하강 “ 「티베트 사자의 서」

나는 독서와 경전의 신인 판카크사라를 으뜸으로 꼽는다. 그것이 나의 이담이기 때문이다. 나는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독서에서 얻었다. 나는 불교도나 요가 수행자를 만날 때면 나의 독서에 의해서 그들을 이해한다. 나는 부처 자신을 이해하려고 할 때도 부처보다도 이 이담을 앞세운다. 그것이 나를 떠받치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가 선택한 신, 곧 이스타데바타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선택한 신에게 충실하라. 그것이 당신의 길이다.[226]

자신이 선택한 신을 자신의 길라잡이로 삼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세련된 관념이다.[226]

10. 어둠에서 광명으로 : 고대 그리스의 신비종교

생명은 심연의 어둠, 곧 지하세계로부터 나온다는 관념은 신화의 주요한 모티프이다.[231]

상징적인 형상을 해석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헤르메스는 신비적이고 상징적인 방법을 의미하고, 모세는 사실에 충실한, 산문적이고 역사적인 방법을 의미한다. 형상에는 두 면이 있는데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는 보는 이의 마음에 달렸다.[246]

「신곡」의 첫머리에서 단테가 위험한 숲속에서 길을 잃자 세 마리 짐승이 그를 위협한다. 첫 번째 동물 사자는 자만심, 자아에 대한 집착,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상징한다. 두 번째 동물 표범은 욕망을 상징한다. 세 번째 동물 이리는 공포, 과거를 상징하며 당신이 가진 것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이것은 부처가 받은 유혹과 같다. 만일 그가 자아에 집착했더라면 욕망과 불안이 그를 움직였을 것이다.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욕망과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으며, 그 때문에 막다른 곳에 이르게 된다.[248]

요컨대 초기의 기독교국 로마에서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물론, 신약성서와 이교 신앙이 서로 대등한 지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250]

따라서 신비적으로 해석하라.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신비적으로 해석하라. 그러면 이 모든 전통들은 위대한, 참으로 위대한 진실, 즉 우리는 영원한 힘과 한몸이지만 만일 자신을 속박하는 불안과 욕망의 세계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일체성을 잃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250]

11. 길[道]은 없다 : 아서 왕 전설과 서양의 길

근동에서는 사회에 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이며 유기적 조직체의 한 기관이다. 어떤 일에서나 의례, 규칙, 계율을 매우 강조한다.[257]

황무지는 진실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규범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의 세계이다.[262]

진정한 신화적 전통이 있는 곳에서는 신의 형상이 아니라 신의 에너지를 강조한다. 에너지는 동물의 형상, 사람의 형상, 바위의 형상 등 온갖 형상으로 자신을 나타낼 수 있다.[267]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제6장에서 켈트족의 신들에게 로마의 이름을 붙였다. 놀랍지 않은가. 로마인 그리고 그 앞의 그리스인은, 다른 민족이 섬기는 신들과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을 같은 신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들을 우주를 만들고 유지하는 에너지의 의인화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선교가 아니라 오히려 훌륭한 수용이 있었다.[270]

켈트족과 사막의 종족에게 중요한 신들은 부족신들 또는 부족의 수호신들이었고, 따라서 자연을 다스리는 신들은 종속적인 존재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의 전통에서 중요한 신들은 우주를 떠받치는 신들이며, 부족의 수호신은 종속적인 신이다..... 그래서 로마인이 찾아오면서 고전적인 신들과 켈트 신들의 융합이 시작되는데, 그것들은 모두 동일한 인도-유럽인의 청동기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놀랄 만한 동화현상이 나타난 것이다.[270]

12. 고상한 마음 :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궁정연애

“눈은 마음의 척후병이다. 눈은 마음이 호감을 느끼는 이미지를 찾아낸다. 따라서 눈이 그런 이미지를 발견했을 때, 만일 그 마음이 (이 대목이 중요한 데) 상냥한 마음(정욕을 일으키는 마음이 아니라 애정을 일으키는 마음을 뜻하며, 정욕과 애정은 전적으로 다르다)이라면, 그 때 사랑이 생긴다.” 이것은 새로운 생각이다.[281]

중세 이야기의 특징은 한 사람이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발전시킨다는 점이다. 그것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를 받아들여 그것을 해석하는 것, 곧 그 시대의 조건에 맞게 새로운 깊이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290]

13. 성배를 찾아서 : 파르치팔 전설

그것은 진실하지 않게 살아가는, 자기의 삶이 아닌 사회로부터 주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황무지”의 문제를 안고 있다. 파르치팔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저 주어지는 여자와 결혼하지는 않겠다. 내 아내는 내 손으로 고르겠다.” 그것이 결혼과 사랑의 최초의 결합니다. 결혼과 사랑의 분열이라는 문제에 대한 최초의 답인 것이다.[308]

볼프람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가 말하려는 것은 초자연적인 은총과 자연적인 은총을 구별한 중세의 정신적 이상이 유럽을 거세해버렸다는 것이다. 자연적인 은총-말이 가는대로 내버려 두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 그것이 삶을 이끌어가지도 않는다. 삶을 이끌어가는 것은 초자연적인 은총, 곧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회 추기경들을 통해서 얻게 되는 정신적인 관념이다. 유럽에서 자연은 살해되었다. 자연의 에너지-이것이 볼프람의 교훈이며, 그는 실제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 는 살해되었다. 이교도 기사의 죽음은 그것을 상징하며, 성배왕의 정신적인 불임은 그것의 결과이다.[312]

성배왕은 참기 어려운 고통을 느끼면서 말을 타고 궁전으로 돌아왔다. 상처에서 창을 뽑아내자 거기에는 “성배”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의미는 이렇다. 자연은 본디 정신을 지향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데에 반하여, 그-정신의 지도자-는 자연을 거부했다. 그것이 황무지이다. 황무지를 치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답은 고상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행위이다. 고상한 마음은 자만이 아닌 사랑에서 나오며, 그것도 성적인 사랑이 아닌 동정심에 의한 사랑에서 나온다. 그것이 성배가 던지는 문제이다.[312]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방인을 지배하게 되거든 그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야 할 것이니라.”<성배에 새겨진 글귀> 내 생각으로 이런 생각이 나타난 것은 문명의 역사상 이것이 처음이다.[319]

따라서 볼프람의 이야기에는 사랑을 위한 결혼, 결혼 생활에의 충실을 통해서 확인되는 사랑 그리고 인민을 위해서 통치하는 국왕의 이념이 나타나 있다. 그것이 13세기 초에 나타났다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319]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지난 번 읽었던 「신화의 힘」과 마찬가지로 켐벨이 직접 저술한 책이 아니다. 1987년 켐벨이 사망한 후 ‘82년부터 84년까지 그의 텔레비전 강연내용을 기초로 「하퍼&로 출판사」에서 발간한 책으로 전체적인 구성과 기술방식 면에서 손봐야 할 곳이 매우 많은 것 같다.

이 책은 읽기에 힘들 뿐만 아니라, 이해하기도 참 어려운 책이다. 우선 본인이 신화, 철학, 역사 등 이해에 필요한 기본지식에 대한 내공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책의 전체적인 구성 면에서나 각 Chapter 안에서의 기술 방식에서 전혀 짜임새 없는 백화점식(나열식) 설명이 계획성 없이 이루어지는 것도 중요한 요인인 것 같다.(강연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산만하다는 느낌이 들고, 그런 이유로 이해가 어렵다는 생각이 강하다. 이 책이 왜,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는데, 이 책의 제작 배경이나 경위가 궁금해지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이 책의 원제는 『Transformations of Myth Through Time』이다, 직역하면“시간을 통하여 변모하는 신화”라고 볼 수 있는데, 책의 목차부터 시간대 별로 정리 되어 있지 않고, 각 챕터 안의 내용들도 시간대 별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산만하다고 느끼게 되는 가장 큰 이유이다. 그리고 원제를 어디서 따 왔는지,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궁금해진다.

‘목차’가 달랑 한 페이지이고 챕터별 제목만 적혀있을 뿐, 전체적인 책의 구성이나 내용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부분이 없다. 챕터별 요약과 읽는 방법 등을 설명해 주면 독자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7장, 8장에서는 쿤달리니 요가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는데, 여기서 산만함의 극치를 이룬다. 차크라를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이해가 녹록치 않은데, 사이사이에 철학(신비주의 철학), 종교,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 등 과의 비교 설명을 시도한다. 이정도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상당한 지적수준의 독자가 아니라면 힘들 것이다. 그리고 설사 수준 높은 독자라도, 그 챕터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지식이 있으면 이를 간략하게나마 설명해주고 본 설명에 들어가는 것이 독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내가 7, 8장을 다시 쓴다면, 우선 차크라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요약해서 2-3페이지에 걸쳐 설명하겠다. 독자가 차크라에 대해 개략적으로 이해 한 후, (1) 차크라와 철학, (2) 차크라와 불교, (3) 차크라와 심리학 등 관련된 비교를 소 Chapter로 구분하여 설명하겠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 7, 8장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요약 설명해 주는 것이 독자의 이해를 돕는데 좋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철학, 종교나 심리학 등 난해하거나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는 경우 전체적인 책의 구성과 기술방식은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각 챕터의 내용 요약과 연결 관계를 설명해 주는 부분이 있으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정리하는데 도움을 준다. 한 챕터 안에서도 도입부, 본문과 결론 부분을 가능한 한 명확하게 구분하고, 결론 부분에서는 그 챕터에서 다루었던 내용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 해 주는 것이 독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설혹 일부 반복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관계없다. 책 내용이 어려운 경우, 어려운 내용을 따라가다가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많은 일반 독자들을 위한 배려로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이 책에는 신화, 역사, 철학, 종교, 심리학 등의 전문용어나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용어들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그런데 그 용어를 [각주]를 이용하지 않고 본문에서 설명하다 보니 설명이 충실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본문 내용이 길어지거나 샛길로 들어서게 되어 전체 내용을 파악하는데도 어려움이 있다. 별도의 설명이 필요한 경우 페이지 하단에 [각주]를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책을 읽던 중에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일부 있었다.(내용의 어려움이 아니라, 문장구조나 어법이 맞지 않는 경우이다, 예로 105p. 클레오파트라의 근친상간 이야기) 번역과정 중에 생긴 문제인 것으로 생각되는 데 이런 부분은 보완이 필요 할 것 같다.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도 그렇고 번역한 과학세대도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책을 출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켐벨 생존 시 그가 직접 저술했거나, 적어도 감수를 했다면 상당히 많은 보완이 이루어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켐벨이 직접 저술한 다음번 책이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동굴곰 시대의 사람들은 동물이 자신을 바친 데에 대해서 감사했다. 오늘날 우리는 양식을 주신 성스러운 존재를 떠올리고 그에게 감사한다. 이것은 전혀 다른 심리이며, 전혀 다른 신화이다. 근원적인 신화의 이미지는 생명의 이미지다.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먹는 생명의 이미지다.[16]

우리는 언제나 신을 일종의 사실로 생각한다. 신이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이란 단지 초월과 신비를 상징하는 우리들 자신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신비이며, 그것은 인간이나 동물로 나타난다. 아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나 동무로 인정되는 것이다.[23]

나는 신비적인 차원과 그것에 대한 깨달음, 곧 신비주의와 과학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기원전 2000년의 과학과 2000년의 과학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 점에서 우리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전(성전 :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역주)은 아주 오래 전에 우리의 어떤 생활경험도 공유하지 않는 다른 민족이 다른 곳에서 편찬한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근본적인 괴리가 있다. 지금 그 성전을 읽어보면, 성전은 인간을 자연보다 우월한 존재로 말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인간에게 주어진 본성으로 본다. 그것을 시애틀 추장이나 블랙 엘크의 말과 비교해보라. 이것이야말로 이미 진부해진, 죽어버린, 기능하지 않는 신화와 지금 기능하고 있는 신화의 차이다. 신화가 살아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에게도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림과 마찬가지로, 신화는 기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이미 신화를 경험하고 해석하고 확대했다면 신화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화는 먼저 기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기능하는 신화를 잃어버린 것이다.[59]

그것들은 두 개의 완전히 다른 방향성이다. 정신의 칼집은 윤리, 곧 선과 악, 밝음과 어둠, 기쁨과 고통에 관계한다. 지혜의 칼집은 그런 분별 이전에 무엇이 있는가를 안다. 그것은 환희이다. 따라서 그것이 당신의 본디 모습이다. 당신은 환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무리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크나큰 번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비참에 빠져 있다고 할지라도, 만일 환희의 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만 한다면, 이 현실이야말로 인생의 환희임을 깨달을 수 있다. 고통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영웅적인 신화에는 이런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104]

상징의 중요한 문제는 사람들이 상징에 빠져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천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갠지스 강이 흘러나오는 근원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화에서 중요한 것, 신비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상징에 포함되어 있는 속뜻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속뜻은 언제나 정신적이다.[115]

우리 서양인이 상징을 다룰 때의 주요 문제점들의 하나는 상징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우리가 원소적 관념이나 영구불변의 계시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도 이런 상징의 구체화가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신을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인다. 신 관념은 하나의 상징이다.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 형상으로 여겨지는 것은 모두 상징이다.[116]

독일의 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은 이런 훌륭한 말을 했다. “시를 쓰는 것은 말 뒤에 숨어 있는 원초적인 말(Urwort)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세상만물은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다. 괴테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변화하는 것들은 거울에 비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거울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실체는 공(空, sunya)이다. 공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어떤 사고도 거기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상징은 본래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투명해질 필요가 있으며, 열려있지 않으면 안 된다.[119]

마지막으로 제기되는 것은 “희생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희생을 통해서 신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희생은 신들보다 강하다. 그렇지만 그 희생을 주재하는 것은 누구인가? 브라만(Brahman)이다. 따라서 브라만은 신들보다 강하다. 따라서 신의 계시를 받은 인간은 어떤 신보다 강하다. 이것이 우주의 위대한 점이며, 브라만은 그런 위대한 존재이다. 이것이 한 가지 핵심이다.[126]

죽여야 할 것은 심리적 차원의 온갖 욕망과 불안이다. 그 때 비로소,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생명은 긍정적인 것이 된다.[133]


IP *.97.37.242

프로필 이미지
거암
2008.04.08 10:37:33 *.244.220.254
"저자라면" 부분이 예리하시네요~
형님~ 많이 배웠습니다. 역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네요 ^^
프로필 이미지
서지희
2008.04.08 18:24:11 *.41.62.236

레이스 할 때도, 장례식때도 느꼈는데 참 잔잔하면서도 포인트가 있습니다. 미처 보지 못한 것 알고 갑니다.
젊은 오라버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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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392 [02]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2] 오현정 2008.04.14 2183
1391 (02)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조셉 캠벨 [1] 이한숙 2008.04.14 2332
1390 [02]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조셉 캠벨 [1] 정산 최현 2008.04.14 1867
1389 6_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1] 홍현웅 2008.04.14 2236
1388 [02]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조셉캠벨 [2] [1] 손지혜 2008.04.14 2264
1387 [02]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조셉 캠벨 [1] 양재우 2008.04.14 2193
1386 &lt;리뷰5&gt;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5] 거암 2008.04.13 2075
1385 [02]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조셉캠벨 [2] [1] 최지환 2008.04.13 2694
1384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조셉 캠벨 [1] 유인창 2008.04.13 2173
1383 나는 무엇을 잘할 수 있는가 [2] 형산 2008.04.13 1887
1382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_2 [2] 개구쟁이 2008.04.13 2268
1381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조셉캠벨 [1] 이은미 2008.04.13 1872
1380 (01) 신화의 세계-조셉 캠벨 [4] [1] 이한숙 2008.04.08 2385
1379 [01]신화의 세계 - 조셉 캠벨 저 [2] [1] 오현정 2008.04.08 2336
1378 [01]신화의 세계 - 조셉 캠벨 [4] 양재우 2008.04.08 2223
1377 &lt;1&gt;신화의 세계 - 진정한 자아를 찾아라 [2] 이은미 2008.04.08 2081
» [01] 신화의세계 - 조셉 켐벨 [2] 최현 2008.04.08 2335
1375 [01] 신화의 세계-조셉캠벨 [3] [2] 손지혜 2008.04.08 2373
1374 [01] 신화의 세계 - 조셉캠벨 [3] 최지환 2008.04.07 2089
1373 신화의 세계-조셉 캠벨 [2] 유인창 2008.04.07 2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