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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8일 10시 21분 등록
신화의 세계(Transformations of Myth Through Time)
조셉 캠벨 글/과학세대 옮김/까치글방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 조셉 캠벨(1904∼1987)

“의식을 억압하는 것은 악귀들이나 요괴들이다. 악귀의 다수는 우리 같은 대학 교수들이나 학교 선생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규칙을 정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유익한 것은 아니다.”(167P)

조셉 캠벨의 책을 읽다보면 그의 시니컬함과 동시에 유머러스한 면을 발견하게 된다. 평생 각국의 신화를 연구하고 비교하다보니 아무래도 인류의 근원에 대해 가까이가고 그 올바른 삶에 대해 많은 고민의 시간을 가졌으리라 판단된다. 특히 개인적 내면의 삶과 사회적 삶을 어떻게 절충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 인간 사상에 대한 종교적 탐구는 그의 연구목적임과 동시에 딜레마였을 듯 싶다. 그러다보니 소위 교육을 업으로 삼는 교육가, 사상을 파는 철학가들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 자체가 그를 시니컬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누구보다 넓은 관점을 가진 신화연구가였다. 전세계 수많은 신화의 증거들을 손수 직접 찾아다니며 각 지역별 발견된 유물을 통해 공통점을 찾는데 기울인 노력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하겠다. 현대의 우리는 그의 손길, 눈길, 사상에 힘입어 바로 이 자리에 앉아 기원전, 후를 넘나들며 인류의 신화역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손안에 펼쳐지는 인류의 역사가!

더 대단하게 느껴지는 건 그 수 많은 그의 지식과 사상들이 바로 책, 독서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그는 스스로의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을 구하는 일반인이나 학생들에게 자신이 터득한 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고 한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지금 우리, 변경연 4기 연구원은 조셉 캠벨의 이 방식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그 첫 번째 대상, 제대로 된 사람이 바로 조셉 캠벨이고, 그의 저서를 붙들고 읽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3권 정도를 더 읽어야 한다. 읽다 보면 그의 사상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까? 그의 말대로 일정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획득한 관점에 따라 세상을 열수 있을까? 솔직히 아직까진 잘 모르겠다. 그가 말하는 내용 자체가 너무 방대할뿐더러 이해를 하기위한 일관성이 다소 부족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된다. 이 책은 입문서라 함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책들은 더욱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걱정하면 무엇하랴. 열린 마음으로 그냥 있는 그대로를 편하게 받아 들여볼 생각이다. 내가 그가 되고 그가 내가 되어 둘이 하나가 되는 그런 정신적 성숙 경험을 하고 싶다. 그리하여 그의 지식과 사상까지 가져오고 싶다. 아니 뼛 속 깊이 새겨보고 싶다.


- 조셉 캠벨의 저서
≪신의 가면(The Masks of God)≫(전4권) / ≪신화와 함께 살기≫ /
≪신화의 세계≫ / ≪세계의 영웅신화≫ / ≪야생 수거위의 비행≫ /
≪신화 이미지≫ / ≪네가 바로 그것이다≫ /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신화의 힘≫ / ≪신화와 함께 하는 삶≫ / ≪현대인을 위한 신화≫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서론 : 인간과 신화의 기원

르 드블뢰(1857-1939, 프랑스 사회학자/역주)가 어머니와 자식, 자식과 어머니 간의 “신비적인 관계(participation mystique)”라고 불렀던 것은 궁극적인 낙원이다.(5P)

어린아이와 어머니의 관계와 같은 정도로 자신과 우주의 관계가 완전하고 자연스럽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우주 사이의 완전한 조화와 일치를 얻게 된다. 우주와 조화를 이루면서 그곳에 오래 머무는 것, 이것이 신화의 주요한 기능이다.(5P)

아주 최근까지, 인간 사회에서 여성의 조건은 인간 생명의 탄생과 그 유지에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여성---자연의 중심이며, 자연의 계승자이기도 한 여성---의 역할의 전부였다.(6P)

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1668-1744, 이탈리아 철학자/역주)가 최초의 신성(神性) 관념은 천둥 소리의 경험에서 나왔다고 말한 것을 떠올렸다. 천둥 소리는 인간의 힘보다 더 큰 힘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최초의 암시이다.(9P)

일찍부터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것은 도구를 만드는 능력이라고 생각해왔다.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즉 도구를 만드는 인간이다.(10P)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 종류는 매우 실제적인 동물적인 인간이고, 다른 한 종류는 신성한 잉여로서의 아름다움의 유혹에 민감한 인간적인 인간이다. 이것은 큰 차이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신적인 관심과 욕구의 최초의 작은 싹이며 다른 동물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12-13P)

수렵문화의 기본적인 신화적 주제는 동물은 자발적인 희생자라는 것이다.(15P)

동물은 다음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 :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죽일 것, 내년이 또 다시 찾아오는 것처럼 자신의 생명을 어머니라는 원천으로 되돌려보내어 소생시키는 제의를 행할 것.(15P)

자연의 신비란 생명을 죽임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잡아먹음으로써 살아가는 것은 두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는 하나의 생명이다. 잡아먹는 쪽도, 잡아먹히는 쪽도 실은 하나의 생명이다. 따라서 어쩌면 자신의 살점을 뜯어먹는 동굴곰의 두개골에는 이미 생명의 본질에 대한 느낌이 나타나 있는지도 모른다.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야말로 근원적인 이미지이다.(16P)

근원적인 신화의 이미지는 생명의 이미지이다.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먹는 생명의 이미지이다.(16P)

소년이 배워야 할 것은 용기였다. 그들은 죽음과 부활의 제의를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은 의존적인 유년기를 마감하고, 자기 책임을 다하고 적극적이며 약자를 보호하는 남자로서의 성인이 되었던 것이다.(21-22P)

우리는 언제나 신을 일종의 사실로서 생각한다. 신이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이란 단지 초월과 신비를 상징하는 우리들 자신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신비이며, 그것은 인간이나 동물로 나타난다. 아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나 동물로 인정되는 것이다.(23P)

신화의 역할은 근동(近東)에서 기원전 2000년에 알려진 우주가 아니라 현재 알려져 있는 우주와 당신을 조화시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30P)


2. 전설 속에서 사는 사람들 :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

우리는 초월적인 신비로부터 태어나고, 사회는 곧바로 우리들에게 각인을 시작한다. 우리가 써야 하는 가면은 사회가 씌어준 것이다. 예이츠는 이것을 원초적 가면(primary mask)이라고 부른다.(33P)

당신은 당신 자신을 참으로 영원한 것과 동일시한다. 의식은 형상을 내던졌다가 되찾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이 모든 존재에 내재하는 의식과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당신은 만물과 하나가 되고, 따라서 지지무게(事事無礙)라고, 곧 개별 존재와 전체 사이에는 어떠한 장벽도 없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지상에서의 궁극적인 신비체험이다.(35P)

상현달이 뜨는 밤의 죽음과 부활은 유치한 자아의 죽음과 정신적 성숙의 탄생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육체에 대한 죽음, 육체 안에 있는 영원한 것과의 동일시가 있다.(36P)

우리는 신비, 곧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나오는, 무한하고 처음도 끝도 없고 영속하는 신비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다.(40P)

모든 생명은 신비로운 생명에 의해서 유지된다. 인간이 먹는 모든 것은, 식물이건 동물이건, 당신 자신의 생명을 구성하는 물질이 되려고 기꺼이 자신을 바치는 생명이다.(41P)

성지(聖地)는 어디에나 있다. 따라서 종교적인 예배를 위해서 자연의 풍경을 찾아갈 때에는 여기가 중심이다. 여기가 북쪽이다, 여기가 남쪽 산이다라는 식으로 스스로 결정하고 신비적인 존재에게 자신의 마음을 호소할 수 있다.(58P)


「24인의 철학자들의 책(Book of the Twenty-Four Philosophers)」이라는 12세기의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신은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공(球)이다. 그 중심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 경계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중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제의나 신화의 기능은, 아주 먼 옛날의 어딘가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당신이 그것을 경험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58P)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사회적 신화의 보호와 복구(Care and Repair of Public Myths)”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그 기사의 요지는 사회는 그것을 떠받치고 그것에 통일성을 주는 신화를 필요로 하며, 그런 신화를 가지지 못한 사회는 붕괴된다는 것이다.(59P)

신화는 살아 있는 인간을 그의 생활주기와 조화시키고, 그가 살고 있는 환경과 조화시키고, 이미 그 자체가 환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회와 조화시키는 기능을 한다.(58P)


3. 그리고 우리는 바다에서 무기를 씼었다 : 신석기시대의 신들과 여신들

문명은 역사와 더불어 출현한다. 청춘, 성숙 그리고 노년의 과정이다. 이것을 표현한 중요한 문헌은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양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landes)」이다.(61P)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에서 여신은 중요한 신화적 상징이 되는데, 과거를 미래로 바꾸고, 정자를 자식으로 바꾸고, 씨앗을 작물로 바꾸는 자연의 에너지를 체현하고 있다.(63P)

초기 문화가 안고 있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회조직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72p)

문자에 의한 기록, 수학 그리고 천체에 대한 정확한 관찰 덕분에, 행성은 수학적으로 결정 가능한 속도로 움직인다는 결론이 얻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학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우주의 질서라는 이념이 생겼다. 그것은 문화의 전면적인 변화이며,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새로운 요소가 들어온 것이다.(72P)

세계 최초의 도시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나타났다.(72P)

인도에서는 신이 자진해서 춤을 추며 세계에 들어온다. 세계는 유희이며 놀이이다. 그것이 이 신화들의 기본적인 분위기이다. 적어도 그것은 즐거운 것이며 유머러스한 것이다.(77P)

부부는 한몸이다. 남편이 죽거나 희생되었다면 아내는 그를 따라야 한다. 아내의 영웅적인 행위에 의해서만 두 사람이 함께 영원으로 인도된다.(84P)


4. 파라오의 지배 : 이집트, 출애굽 그리고 오시리스 신화

인종은 다르지만 문화는 같다. 시대와 장소는 다르지만 같은 전통이 확실하다면 이것을 창조적인 중심으로부터의 전파라고 부른다. 새로운 이념과 함께 그것과 연결되어 있던 신들이나 에너지의 상징들도 퍼져 나간다.(90P)

“나는 어제요, 오늘이요, 내일이다. 나는 다시 태어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신들이 솟아나오는 원천이다.” 이것은 위대한 자각이다. 당신이 죽기 전에, 그것이 어렵다면 저승에 닿기 전이라도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이다.(100P)

세 번째 칼집은 마나마야코샤(Manamayakosha), 곧 정신이다. 정신의 활동은 양식의 칼집과 관련이 있다. 양식의 칼집이 고생하고 있으면 마나마야코샤도 고통을 느끼고 “아, 모든 것이 비참하도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양식의 칼집이 행복하면, 정신의 칼집 또한 행복을 느낀다. 정신의 칼집은 양식과 호흡의 칼집을 향하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이것이 세 개의 직사각형 상자가 상징하는 것이다.(103-104P)

정신의 칼집은 윤리, 곧 선과 악, 밝음과 어둠, 기쁨과 고통에 관계한다. 지혜의 칼집은 그런 분별 이전에 무엇이 있는가를 안다. 그것은 환희이다. 따라서 그것이 당신의 본디 모습이다. 당신은 환희에 뿌리를 두고 있다.(104P)

우리는 물을 지나서 들어가고, 물을 지나서 나온다. 신화에서 그런 들고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무엇이 들어가고, 무엇이 나오는가를 확인해보기 바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신화가 전하는 신비적인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들어간 것은 족장들이고, 나온 것은 민중이다. 지옥의 밑바닥과 같은 고난의 땅 이집트에서 민중이 일치단결하여 공동의 자기 인식을 이룬 것은 위대한 일이다. 영웅은 모세가 아니다. 구약성서의 영웅은 민중이다. 민중은 하나의 단위로서 간주되며, 개인은 그 일원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강조되는 것은 집단, 집단, 집단이다.(109P)

그런즉 우리가 한 것은 타인이 한 것과는 다르다. 이것 또한 우리들(유태-기독교/역주) 전통의 특징이다. 모세는 영웅이 아니다. 그가 이끌었던 부족이 영웅이다. 우리의 신화는 부족의 신화이며, 우주의 유일한 신은 우리의 신이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110P)

전염병이나 그밖의 재앙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어떤 종류의 신일까? 하느님은 재미로 재앙을 내린다. 하느님이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 밖으로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이 거듭 다른 재앙을 파라오와 이집트에 내리기 위해서이다. 틀림없이 그렇게 쓰여 있다. 만인의 필독서로 꼽히는 성서에.(110P)


5. 성스러운 원천 : 영구불변의 동양철학

신화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계속성은 철학 속으로 숨어들어간다. 그것이 바로 영구불변의 철학이다.
신화는 꿈과 같은 영역에 속한다. 나더러 말하라면 그 영역을 지혜의 몸(Wisdom Body)이라고 부르겠다.(114P)

우리는 신을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인다. 신 관념은 하나의 상징이다.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 형상으로 여겨지는 것은 모두 상징이다.(116P)

독일의 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은 이런 훌륭한 말을 했다. “시를 쓰는 것은 말 뒤에 숨어 있는 원초적인 말(Urwort)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116P)

진정한 순례는 글자 그대로의 순례, 물리적인 행동으로서의 순례를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중심을 찾아가는 순례로 바꾸는 것이다. 순례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순례하는 동안 계속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명상하고, 참된 여행은 자신의 내면을 향한 여행임을 자각하기만 한다면.(118P)

고도의 문명이란(한가지 경우를 제외하면) 문자가 있고, 수학이 발달하고, 별자리의 행성의 주기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 문명을 말한다.(122P)

신화는 분석과 관계를 가질 필요가 없으며, 원인을 과학적으로 발견할 필요도 없다. 신화는 인간을 그를 둘러싼 환경에 결합시키는 것과 관계가 있다.(122P)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것은 영혼과 대지의 분리는 극복되어왔으며, 어떤 점에서 영혼과 대지는 우리가 계승해온 이원론 철학이 가르치는 것 이상으로 하나라는 사실이다.(123P)

브라만은 희생을 통해서 신들을 조정한다. 그들은 마치 큰 오르간을 연주하는 것처럼 희생을 다룬다. 부라만이 앉아서 건반을 두둘기면, 전세계가 그 연주에 맞추어 노래한다. 희생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제물을 불 속에 던지는 것이다. 음식을 집어서 입에 넣는 것은 제물을 불 속에 던지는 것이다.(126-127P)

세계는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이며, 그 속으로 무진장한 제물이 던져진다. 그것이 생명의 본성이다. 우리는 모두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지는 제물이다.(127P)

생명이란 끊임없이 타고 있는 불이다. 그 불을 더욱더 지펴야 한다. 그것으로부터 희생에 대한 일종의 열망이 생긴다.(127P)

죽음에서 삶이 나온다. 그리하여 죽음을 통해서 삶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생겼다.(128P)

「찬도기아 우파니샤드」에는 이런 훌륭한 구절이 있다. “이 신을 숭배하라, 저 신을 숭배하라, 차례차례로. 그것은 이 법에 따르는 사람과는 관계 없는 이야기이다. 신들의 근원은 당신 마음속에 있다. 발자취를 더듬어 중심으로 가서, 신들을 낳은 근원은 당신 자신임을 알라.” 이것은 이미 이집트에도 있었던 생각이다. 그것이 영구불변의 철학의 기본적인 관념이다.(129P)

신들은 바로 당신 자신의 에너지의 상징적인 의인화이다. 당신 자신의 에너지는 우주의 에너지이다. 따라서 신은 저 곳에도 있고 이곳에도 있다. 그렇다. 천국은 당신 안에 있다. 그렇지만 또 어디에나 있다. 이것이 영구불변의 철학의 실질적인 내용이다.(129P)

그렇다면 이제 자기 내부의 불을 찾아나서야 한다. 그것은 심리학적인 구별 작업이다. 그것은 실재의 육체적이고 가변적인 면과 영속적인 불꽃을 구별하는 작업이다. 젊음과 늙음, 삶과 죽음은 그 불꽃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129P)

그런 우주와 화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피해야 한다. 원래 우리는 그런 존재, 혼합된 존재이다. 우리는 의도하고 결심하고 행동하고 용기를 가져서, 스스로 선이라고 인정하는 쪽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130-131P)

요컨대 서양에는 서양의 이야기가 있는 법이다. 그것은 “자연과 화해해서는 안 된다. 자연의 본디 모습을 되찾으라”는 사상이다.(131P)

부처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 모든 인생은 비참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인생의 본디 모습이다. 선과 악, 사람이 사물에 붙이는 모든 이름, 곧 ‘선’과 ‘악’은 모두 뒤섞여 있다.”(131P)

열반이란 괴로움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심리적인 태도를 말한다.(131P)

당신의 인생을 괴로움에 불과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욕망과 불안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바라는 욕망, 사람을 속이려는 욕망이며, 무엇인가를 잃지 않으려는 불안이다. 이 욕망과 불안이 진정되었을 때 당신은 마하수카(Mahasukha), 곧 큰 기쁨의 경지에 도달하고 법열(法悅)을 경험하게 된다. 법열을 경험하게 되면 고통이 당신을 아프게 하지 못하게 된다. 당신은 중심으로 들어가며, 기쁨이 흘러넘치게 된다. 당신이 중심에 들어가면 이미 무엇을 얻는다든지 잃는다든지 하는 일이 없게 된다. 당신은 존재 그 자체가 된다. 이것이 열반이다.(131-132P)

자이나 교도가 해야 할 일은 살고 싶다는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순간에 죽는 것이다. 살고 싶지 않다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132P)


6. 정각(正覺)에 이르는 길 : 불교

부처는 한 그루의 나무로 나타난다. 그의 몸은 그곳에 있지만, 그의 존재는 이미 가라앉은 태양과 같다. 그는 서쪽으로 진 태양처럼 자신의 육체를 떠나버렸다. 그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500년 뒤에 불상이 나타난다. 그것은 최초의 불교와는 다른 불교가 출현했음을 의미한다.(135P)

열반적 해방이란 대립물을 초월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욕망과 불안, 너와 나의 대립을 초월하는 것이며, 조화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삼사라(Samsara), 곧 이 세상의 괴로움과 열반, 곧 초월의 환희 사이에는 구별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구별이 없다. 그래서 현세 자체가 불성(佛性)의 구현이라고 보는 사람이 나오게 된다.(136P)

부처는 지상에 앉아 있다. 그것은 명상에 의해서 자신의 의식과 불성, 곧 모든 존재에 깃들어 있는 초월적인 의식이 하나가 되었음을 의미한다.(136P)

부처란 합리적인 방식을 털어내고, 그 뜻을 파악한 다음, 그 뜻으로부터 해방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다.(136P)

부처의 이미지는 천상계의 연꽃으로 상징된다. 연꽃이나 장미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은 그 꽃이 나타내는 에너지를 의인화 한 것이다.(138P)

“하늘 위에도 하늘 아래에도 나와 같은 자는 하나도 없다(天上天下唯我獨尊)”

갓난 아기는 모두 아기 부처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불가사의한 에너지의 천진난만한 표현이다. 그러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통의 아기와 마야 왕비의 아기는 어디가 달랐던가? 마야 왕비의 아기는 자신이 아기 부처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불성의 핵심은 자산이 그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 주된 이유는 사회가 집요하게 너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이다.(140P)

대승불교는 우리는 불성의 표현이며 부동의 태도를 견지하면서 시간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고계(苦界)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이다. 당신도 그 “존재(sattva)”가 “깨달음의 길(bodhi)”인 사람, 즉 보살(菩薩, bodhisattva)이 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부동지를 발견하게 되면, 움직이는 세계 속에 있으면서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이 중요한 점이다.(142P)

불교는 부처의 정각에로 당신을 데려가는 “탈 것(yana)”, 특히 나룻배이다. 불교는 우리를 피안(彼岸)으로 건네주는 나룻배이다. 피안이란 괴로움과 즐거움, 얻음과 잃음, 불안과 공포, 너와 나를 초월한 장소이다. 그것은 우주적인 일원성 또는 우주만물의 불변성을 자각함으로써 이원성을 초월하는 것이다.(143P)

“머리카락에 불이 붙어 연못에 뛰어드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열반을 구하지 않으려거든 아예 처음부터 그만두는 것이 좋다.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길이다.” 여기에는 매우 실천하기 어려운 금욕과 현세 부정의 사상이 있다. 그래서 작은 나룻배(小乘)라고 하는 것이다.(143-144P)

무엇이 최선의 교훈, 최고의 규칙일까? 최고의 규칙은 벗들과 즐겁게 지내고, 즐겁게 식사하는 것이다. 당신의 놀이가 무엇인지를 깨달으라. 그 놀이, 인생의 놀이에 참여하라. 이것이 바로 극락, 곧 마하수카이다.(145P)

보살이란 초월성을 자각한 사람이 현실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기에 하늘에서 내려와 십자가형을 받는, 스스로 나서서 기꺼이 십자가에 매달리는 그리스도의 사상이다.(145P)

당신이 그리스도를 부처와 똑같은 존재라고 생각할 때, 기독교와 불교 사이에는 휼륭한 대화가 생긴다. 기독교와 불교는 동일한 원소적 관념이 두 개의 민속적인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146P)

토마스 아퀴나스의 지옥이 단순한 형벌의 장소인 반면, 단테의 지옥은 생전의 생활태도에 적합하게 되어 있다. 단테의 천국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당신의 미래의 모습은 단지 지금 이 세상의 당신의 성격과 존재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148P)

휴머니즘이란 인간을 신들에게 예속되지 않은, 만물의 중심으로 보는 인간관이다. 신들은 메아리로서만 존재할 뿐, 인간의 다양한 힘의 표현에 불과하다.(151P)

불교는 어디를 가건 “너희의 신들을 제거하라”하고 말하지 않는다. 불교가 가는 곳마다 참으로 간단하게 종교의 융합이 이루어진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특징은 자신들이 진출한 곳의 신들을 전멸시키는 것이다. 보다 온전한 불교의 특징은 먼저 살고 있던 신들 역시 그 땅의 생명력이며, 불성의 표현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신들은 자신들의 불성을 드러내는 데에 참여한다.(154P)


7. 이드에서 자아로 : 쿤달리니 요가(1)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동양사상에 적합한 말로 표현한다면, 신들은 에너지의 의인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생명, 모든 생명, 당신의 생명, 세계의 생명을 만드는 에너지의 의인화이다. 의인화가 어떤 특징을 가지는가는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서 결정된다. 의인화는 민속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에너지는 인간적인 것이다. 신들은 에너지로부터 태어난다. 신들은 말하자면 다양한 에너지의 심부름꾼이자 매개물이다.(155P)

우리 서양인의 신 관념에 따르면, 신은 하나의 사실이며 그 사실로부터 에너지가 방출된다.(155P)

우리는 모두 그런 초월적인 의식의 표현이다. 초월적인 의식은 사물을 생각하고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우리의 모든 능력들을 훨씬 넘어선다. 이런 생각이 모든 생명의 밑바탕에 있는 기본 이념이다.(155P)

「형이상학의 기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라는 훌륭한 책에서 칸트는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해서 우리는 이 공간에서 사물의 관계를 결정할 수 있으며, 같은 관계가 다른 공간에서도 성립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이어서 그는 답한다. “그것은 공간의 법칙들이 이미 우리 자신의 머릿 속에 있기 때문이다.”(157P)

상징이란 본디 신화적인 상징인데, 그 한쪽 발은 이곳에 놓여 있지만 다른 한쪽 발은 무한성에 놓여 있다. 그것은 초월성을 향하고 있다. 기호는 이곳에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서양에서의 통상적인 해석에 따르면, 신은 상징이 아니라 기호이다. 신이라는 말은 하나의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158P)

이미지를 구체화하거나 상징을 구상화하는 것이야 말로 우상숭배이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종교 전체가 우상숭배 체계이다. 어쩌면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우상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에 타인의 우상숭배를 찾아내어 파괴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저 즉흥적으로 해 본 말이다.(158P)

파탄잘리라는 전설적인 현자가 썼다는 「요가 수트라」의 첫머리에 나오는 격언은 요가의 고전적인 정의이다. “요가란 정신의 자연발생적인 활동을 의도적으로 정지시키는 것이다.”(159P)

요가의 목표는 정신을 정지시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영구불변의 철학의 기본 이념, 곧 모든 것은 정신을 통해서 경험된다는 이념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것이 마야이다.(158-159P)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다른 모든 사람의 것이기도 한 의식의 실체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요가의 목표이다.(159P)

요가의 기능은 우리를 시간과 공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켜 초월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159P)

부처란 “깨우친 자, 눈을 뜬 자”라는 뜻이다.(166P)

의식을 억압하는 것은 악귀들이나 요괴들이다. 악귀의 다수는 우리 같은 대학 교수들이나 학교 선생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규칙을 정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유익한 것은 아니다.(167P)

죽음의 영역 안에 있는 의식이 죽음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육체를 얻는다. 그것이 재생이며 세대의 연속이다. 언제나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고, 현세대는 죽음으로 던져진다. 생명은 그렇게 이어져온 것이다.(169P)

낡은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얻는 것은 생명 에너지를 상징한다. 의식은 시간의 영역, 곧 죽음과 탄생의 영역에서 활동한다. 달은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그 그림자를 버린다. 뱀은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허물을 벗는다. 그것들이 이 힘의 상징이다.(169P)

생명나무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그 나무는 바로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 모든 것을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물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부다가야로 가게 될 것이다.(172P)

하인리히 침머가 자주 말했던 것처럼, “최선의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차선의 것은 오해된다.”(175P)

우리의 문화에서 환멸의 명상에 잠기는 것은 1,000년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현상이다.(179P)


8. 심리학에서 영적인 것으로 : 쿤달리니 요가(2)

우리가 신에게서 얻은 것은 불멸성의 지식이다.(183-184P)

호흡은 언제나 당신의 참된 실재는 우주에 생기를 불어넣는 신비한 기(氣)임을 말해주고 있다.(184-185P)

욕구불만이 계속되면 인간은 어떤 다른 대상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 문명이 나타난다. 그것이 승화(昇華)라는 것이다.(185P)

인생의 활동 속에서 신성한 것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힌두교, 탄트라교, 불교의 훌륭한 점이다.(189P)

사랑의 가장 높은 형태는 사랑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다. 앞뒤를 헤아리지 않는, 적극적인, 금지된, 세상의 관습을 무시한 사랑이며 초월계의 돌파구를 여는 사랑이다. 그것은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누군가를 돕는 경험과 비슷하다. 정열과 충동이 너무나 강렬하여 세계가 눈앞에서 사라진다. 이것이 궁정연애의 이념이다.(189P)

민중이 찾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건강, 부, 자식이다. 신의 이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따라서 그것이 하나 뿐인 종교, 세계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민중종교이며, 신의 이름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승려와 사제의 직무, 역사적으로 존재해온 사원에 맡겨진 과업은 그들의 신의 이름을 그것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미친 듯이 돈이 쏟아진다.(194P)

두 개의 사물이 충돌하지 않고 나는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그것이 옴(om)이다. 삼라만상으로 나타나는 우주의 에너지의 소리이다. E=MC2, 곧 에너지는 모든 형상의 바탕에 있는데 그 에너지의 소리를 옴이라고 부른다.(194P)

꿈은 당신 자신이다. 주체인 당신은 객체인 자신을 보고 놀란다. 주체와 객체는 두 개로 보이지만 실은 같은 것이다. 당신과 나는 같다. 이것이 분리되어 나타나는 두 개가 실은 하나라는 형이상학적 인식의 돌파구이다. 이것이 관계를 동일성으로 인식하는 것, 곧 초월로 향하는 중간점이다.(195P)

신들과 천국과 지옥은 꿈의 우주적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꿈은 신화의 개인적인 모습이다. 꿈과 신화는 같은 종류의 것이다. 둘 다 우의 단계, 곧 꿈꾸는 의식의 상태에 있다. 당신과 당신의 꿈이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과 당신의 신은 하나이다. 그러나 당신의 신은 나의 신이 아니다. 따라서 나에게 그것을 강요하려고 하지 말라. 모든 사람은 저마다 고유한 존재와 의식을 가지고 있다.(195P)

우리의 최고의 신은 우리의 가장 큰 장애이다. 그것은 당신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사상과 감정의 완성을 상징한다. 당신은 그것을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궁극적인 헤어짐은 신[곧 원소적 관념]을 위해서 신[곧 민족적인 형태의 신]과 헤어지는 것이다.(200P)

「노자(老子)」나 우파니샤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나로서는 좀체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것은 발자국을 통과할 때의 경고이다.(203P)

지옥에는 어떻게 해서 떨어질까? 자신의 자아를 완고하게 닫아버리는 사람은 그것에 사로잡혀버린다. 지옥이란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천국에는 어떻게 해서 오를까? 마음을 열면 마침내 모든 것이 개인의 한계를 초월하게 된다.(203P)


9. 천상계로의 하강 : 「티베트 사자의 서」

죽음과 삶의 신화는 곧 환생의 신화이다. 동양의 환생은 서양의 연옥에 해당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재생의 기회, 당신이 광명을 경험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기회이다.(205P)

내부에 죽음을 지니지 않은 생명은 결코 생명이 아니며,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생명이란 당신의 내적인 죽음의 과정, 연소의 과정이다.(208P)

이것(임종의 순간에 근원의 빛(mother light)을 보고 있는 것)이 절대의 브라마, 차별이 없는 의식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제껏 찾아온 것인데 그것을 공(空)이라 불러도 좋고, 심연이라고 불러도 좋고, 근원의 빛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것은 모든 사고를 초월한 경지이다.(210P)

당신의 악덕은 당신의 미덕이다. 이 샤크티의 특성은 끈기이다. 끈기의 부정적인 면은 완고함이다. 만일 당신의 미덕이 완고함이라면, 그것을 보존할 일이지 없애려고 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자기의 성격을 개조하려고 할 때 생기는 문제이다.(213P)

당신의 악덕을 제거해서는 안된다. 만일 당신의 악덕이 오만함이라면, 그것이 당신을 타락이 아닌 광명으로 이끌도록 해야 한다.(215-216P)

아미타불은 관세음보살을 섬기는 부처인데 관세음보살이 지상에 환생한 것이 달라이 라마이다.(217P)

플라톤은 「티마이오스(Timaios)」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타인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은 그들을 영혼의 형상들, 탄생과 함께 잊어버린 기억으로 다시 인도하는 것이다.”(225P)

나는 독서와 경전의 신인 판카크사라를 으뜸으로 꼽는다. 그것이 나의 이담이기 때문이다. 나는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독서에서 얻었다. 나는 불교도나 요가 수행자를 만날 때면 나의 독서에 의해서 그들을 이해한다. 나는 부처 자신을 이해하려고 할 때도 부처보다도 이 이담을 앞세운다. 그것이 나를 떠받치는 것이다.(226P)

자신이 선택한 신에게 충실하라. 그것이 당신의 길이다. 당신의 신이 어떤 신이건간에 그 신을 통해서 부처의 전세계가 당신의 지식이 될 것이다.(226P)


10. 어둠에서 광명으로 : 고대 그리스의 신비 종교

고전시대의 그리스에서 신비 종교가 추구한 것은 영적 경험이었다. 그것의 본질은 의식을 인간생활의 순수하게 현상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 헤아리기 어려운 것, 에너지로 가득한 것, 영원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있었다(229P)

생명은 심연 속의 어둠, 곧 지하세계로부터 나온다는 관념은 신화의 중요한 모티프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이교는 죽음, 지하로의 하강, 그 뒤의 재탄생의 주기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231P)

명상이란 우리는 신성한 실체를 먹고 있으며 우리를 길러주는 것은 그 신성한 실체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실체가 아니다. 모든 생명은 어떤 초월적인 힘이 주어지거나 산출됨으로써 유지된다. 이것이 명상의 핵심이다(235P)

이 마지막 입문식의 뜻은 우리는 성적 대립을 뛰어넘는 양성을 갖춘 존재라는 데에 있다. 또한 내가 앞서 달의 의식과 태양의 의식의 결합에 대해서 말했듯이, 우리의 죽어야 할 운명과 불멸성이 하나임을 깨닫는 데에 있다.(244P)

우리가 찾는 것은 경험을 쌓는 것, 인생을 경험하는 것이다.(249P)


그러므로 머리를 사자 입 속에 집어넣고 이렇게 말하라. “에이, 될 대로 돼라.” 그러면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이다.(249P)

영원은 시간의 형상들과 사랑에 빠져 있지만 그 형상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해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시간의 형상 안에서 다른 것들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당신이 이 하찮은 사물에의 의무에서 벗어나려면 해체되어 초월계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251P)


11. 길(道)은 없었다 : 아서 왕 전설과 서양의 길

중요한 것은 느끼는 것이다. 부처는 인생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인생은 살아 있음의 고통의 경험이다. 고통이 있는 곳에 당신의 인생이 있다. 그러니 그것을 찾으라.(261P)

신은 우리 마음속에 있거나, 우리 자신의 경험을 벗어나서 우리 마음속에 없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신의 존재는 그것에 대한 느낌이다.(261P)

진정한 사회적 전통이 있는 곳에서는 신의 형상이 아니라 신의 에너지를 강조한다. 에너지는 동물의 형상, 사람의 형상, 바위의 형상 등 온갖 형상으로 자신을 나타낼 수 있다.(267P)

성배는 우주의 중심에 있는 샘이며, 그곳으로부터 영원한 에너지가 시간의 세계로 흘러들어온다. 그것은 우리의 심장에서 나오는 것과 똑같은 에너지이다.(268P)


12. 고상한 마음 :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궁정연애

“눈은 마음의 척후병이다. 눈은 마음이 호감을 느끼는 이미지를 찾아낸다. 따라서 눈이 그런 이미지를 발견했을 때, 만일 그 마음이 상냥한 마음이라며, 그때 사랑이 생긴다.”(281P)

구원이란 개인의 내부에 신성한 것이 나타남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다.(281P)

“자신이 선택한 길을 여행하는 것은 면도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288P)

중세 이야기의 특징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발전시킨다는 점이다. 그거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를 받아들여 그것을 해석하는 것, 곧 그 시대의 조건에 맞게 새로운 깊이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290P)


13. 성배를 찾아서 : 파르치팔 전설

볼프람의 성배 이야기에 따르면, 성배는 하늘에서 내려보낸 돌그릇이다.(302P)

파르치팔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저 주어지는 여자와 결혼하지는 않겠다. 내 아내는 내 손으로 고르겠다.” 그것이 결혼과 사랑의 최초의 결합이다. 결혼과 사랑의 분열이라는 문제에 대한 최초의 답인 것이다.(308P)

결혼은 사랑의 확인이며, 성애는 결혼의 상징이다. 그것이 사랑과 결혼을 하나로 만든다.(310P)


3. ‘내가 저자라면’

3월초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에 이어 이번에는 조셉 캠벨의 2번째편으로 「신화의 세계(Transformations of Myth Through Time)」를 읽어 보았다. 신화를 주제로 한 전반적인 내용은 큰 차이는 없었으나 책의 형식에서 큰 차이점이 있었다. 즉, 「신화의 힘」이 미국 저널리스트인 빌 모이어스와 조셉 캠벨의 대담을 책으로 옮겨놓은 것이라 한다면, 「신화의 세계」는 그의 강연을 모아서 편찬한 도서라 하겠다. 형식의 상이함은 독자에게 있어 서로간 장단점을 줄 수 있겠으나 나의 경우는 「신화의 힘」이 좀 더 읽기 수월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여기에는 역자의 보이지 않는 손길과 책을 구성한 출판사의 편집도 한몫 했겠지만.

내가 저자라면.. 글쎄.. 일단 무엇보다 쉽게 쓰겠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좀 더 서비스 정신을 베풀겠다. 물론 1987년이란 출판년도를 기억해본다면 그 당시 CS(Customer Satisfaction)는 아직 등장하기 전이겠지만 그래도 책을 읽어줄 독자가 없다면 작가도 없다는 생각을 해야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 몇가지 CS 추가요소를 생각해 보았다.

첫째, 많은 그림을 활용한 건 좋았는데 제발 무슨 그림인지 한줄 설명, 아니면 본문의 내용이라도 연결시켜 놓았으면 한다. 그림보랴, 본문보랴 바쁜데다가 한번 흐름을 놓치면 내용이해를 위해 다시 읽은 시간이 의외로 만만치 않다. 게다가 한가지 더 서비스 한다면 발굴장소와 발굴시기도 같이 넣어준다면 이쁘지 않을까?

둘째, 내용 이해가 다소 어려워 전반적인 배경에 대한 설명이 들어갔으면 좋겠다. 특히 역사적 사실이 신화와 섞여 있다보니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느낌이 든다. 학생들도 읽는다는 가정하에 공부를 겸하여 각 장별로 역사 연대기 표를 하나 삽입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표를 넣는 것이다. 책을 읽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년도 | 종족 | 특징 | 사건내용 | 특이사항 | 비 고
---------------------------------------------------------------


셋째, 중간중간 내용 연결이 잘 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나의 지식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이겠으나, 저자는 그래도 의도하나는 가상스런 나 같은 사람도 끌어들일 수 있는 호흡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이 문제는 솔직히 번역의 문제인지 아니면 원본이 원래 그런 것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역자는 다소 문장의 이해가 어려운 부분에서는 원본을 삽입하여 독자가 원본과 비교하며 볼 수 있도록 하는 ‘톡톡 서비스 정신’을 보여주면 좋을 듯 하다. 한문 공부도 좋지만 영어공부도 해야지, ㅋㅋ

그 외에도 캠벨이 그림 설명을 할 때 세부그림이 잘 보이지 않아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강연을 그대로 옮긴 까닭에 다소 내용 연결이 어색한 부분도 눈에 띄었다. 문어체와 구어체의 혼용도 있었고. 이러한 부분들은 독자를 위하여 조금 더 신경썼으면 하는 부분이다.

이 책 중간중간에 보면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논쟁이 될 만한 소재가 등장하는데 그 중에 가장 큰 부분이 바로 종교, 그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창세기”---“창세기”의 신화---는 주로 수메르-바빌론 지방의 신화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77P)
→ 구약성서중 창세기의 신화내용은 수메르-바빌론 지방의 신화를 차용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물론 법전은 함무라비가 창제한 것이지, 신이 준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세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 할 수 있다.(84P)
→ 십계명은 하느님이 아니라 모세가 만든 것이다?

○기독교와 불교는 동일한 원소적 관념이 2개의 민속적인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146P)
→ 모든 종교의 근원은 동일하다고 보고 있다. 다만 지역적 특성, 문화적 차이에 의해 종교가 갈라지고, 추구하는 목적이 다소 상이하게 변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한 가족? 여기서 궁금한 것 한가지. 그렇다면 인류 역사상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종교전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왜 하나의 근원일 뿐인데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했을까? 이것도 종교 지도자들의 정치적 암투라고 봐야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들의 죽음은 개죽음일 뿐인가? 이 부분만큼은 캠벨에게 꼭 묻고 싶다.

○이미지를 구체화하거나 상징을 구상화하는 것이야 말로 우상숭배이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종교 전체가 우상숭배 체계이다. 어쩌면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우상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에 타인의 우상숭배를 찾아내어 파괴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저 즉흥적으로 해 본 말이다.(158P)
→우상숭배란 말을 이렇게 감히 쉽게 뱉을 수 있을까? 그리고 즉흥적으로 해 본 말이라고 변명하면 다 되는 것인가. 너무 경솔하다. 그것도 책 안에서가 아닌 강연에서 그랬다면..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겸손했어야 맞다고 생각한다.


캠벨은 이 모든 것을 책을 통해 깨달았다 한다. 그는 생전에 여러 가지 종교 중 한가지 종교만을 믿지는 않았지만 죽기전에는 불교에 가까웠다고 한다. 모든 종교가 똑같은 근원인데 불교에 더 빠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캠벨은 책내용에서 불교는 다른 종교를 공격하지 않고 융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그의 사상은 서양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동양 특히 인도사상에 가까워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동양, 서양이란 지역적 관점을 떠나 인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역시 개인, 인간스스로의 내면을 찾는 것, 내면 안에 존재하는 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곧 천복을 쫓는 길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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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4.08 10:43:37 *.244.220.254
거침없는 솔직함이 좋네요~
유산균 발효유의 효과가 좋은가봐요^^
기독교에 대한 형님의 견해에 한표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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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우
2008.04.08 11:03:44 *.122.143.151
거암님, 지점장님이 일 안하고 일일이 댓글달고 있으면 무사할래나?

요즘 보험업계 어렵다면서여? 네에?

그래도 고맙네요.. ㅋ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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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4.08 11:41:18 *.244.220.254
요즘 이름만 지점장이지~ 반 백수예요 ㅎㅎㅎ
캠벨도 백수였는데 영웅으로 귀환하잖아요~
인생 뭐 있습니까? 그냥 가는거지~
저 짤리면 쿠퍼스나 싸게 주세요. 제가 간이 안좋걸랑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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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스
2008.04.09 00:07:54 *.64.7.155
형도 그렇게 느끼셨군요..ㅎㅎ

4월이 지나면 캠벨을 좀 알려는지 모르겠습니다..ㅋㅋ

형 나도 쿠퍼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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