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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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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8일 10시 23분 등록
Ⅰ. 저자 소개

자신이 택한 학문의 길에서 이토록 정열적인 사람이 또 있었을까? 죠셉 캠벨은 1904년에 태어나서 1987년 사망을 할 때까지 83년의 그의 삶의 대부분을 신화 연구에 바친 학자이다. 그가 자신의 학문에 투자한 시간은 우리에게 그의 정열의 일부만을 보여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위해서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섭렵하고 흡수한다. 영문학과 비교문학, 힌두교, 불교, 괴테와 토마스 만, 프로이트와 융에 이르기까지.

그가 이런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섭렵했었던 것은 신화학이 단지 신화만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신화는 인간의 이야기이며 따라서 문학과 종교, 심리, 철학 등의 모든 인문학과도 불가분의 관계였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정열적이었던 것 만큼 창의적인 학자였다. 그래서 단순히 과학적인 연구로서만 신화를 연구하기는 것을 거부한다. 그에게 신화 연구는 인생의 체험이었고 수도(修道)를 위한 수단이었다. 그에 글에서는 때때로 그가 이러한 수도(修道)의 수단을 이용에 도(道)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는 기존의 종교가 가지고 있는 선악의 기준을 뛰어 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모태 신앙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공언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신화의 세계, p323, 역자 후기)

조각 조각 흩어져 있는 작은 신화의 조각들을 연결시키고 거기에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어 인류의 근원적인 스토리를 찾아내었던 그는 진정 창조적인 학자였다.


Ⅱ.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서론 : 인간과 신화의 기원
[p5]어린아이와 어머니의 관계와 같은 정도로 자신과 우주의 관계가 완전하고 자연스럽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우주 사이의 완전한 조화와 일치를 얻게 된다.

[p6]인간의 발달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의 하나는 유년기가 길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열다섯 살 무렵까지 계속 부모에게 의존한다. 이 의존의 태도, 곧 권위에 순종하고 칭찬받기를 기대하고 징벌을 두려워하는 태도가 정신(psyche)의 주요 조건이 된다.

[p7]그렇다면 남자들은 무엇을 하면 좋을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둘러앉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을 발명했다. 이것은 전쟁놀이지만, 창은 진짜 창이다. 한 남자가 살해되면 전쟁은 끝나며, 다음 기습공격이 시작될 때까지 기다리는 기간이 있다. 덕분에 남자들에게 할 일이 생겼다. 그들은 언제나 상대방의 반격을 경계하면서 준비를 한다. 남자란 뭔가 진지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동물인 것이다.

[p8]남성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계급이고 서열이며, 제인 구달이 ‘알파 수컷’이라고 부른 것이다.

[p12]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 종류는 매우 실제적인 동물적인 인간이고, 다른 한 종류는 신성한 잉여로서의 아름다움의 유혹에 민감한 인간적인 인간이다. 이것은 큰 차이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신적인 관심과 욕구의 최초의 작은 싹이며 다른 동물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p13] 주검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모체의 자궁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것은 신성한 잉여로서의 뛰어난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신비의 첫 체험이다.

[p21]소년이 배워야 할 것은 용기였다. 그들은 죽음과 부활의 제의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의존적인 유년기를 마감하고, 자기 책임을 다하고 적극적이며 약자를 보호하는 남자로서의 성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수렵의 기술만이 아니라 수렵의 제의도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p28]뱀은 달과 마찬가지로 태음의식의 상징이다. 바꾸어 말하면 생명과 의식, 생활 에너지와 의식은 시간적으로 유한한 몸 속으로 들어간다. 의식과 생명은 시간의 영역 – 탄생과 죽음의 영역 –과 관계가 있다. 사자는 태양과 관련이 있다. 사자는 태양의 동물이다. 태양은 그 안에 그림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 태양은 언제나 시간과 찬생과 죽음과 무관하며, 따라서 완전한 생명이다. 한쪽은 타자와의 관련을 초월하고, 다른 한 쪽은 타자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 두 종류의 에너지는 본디 동일한 에너지이다. 그리고 이 두 에너지는 본디 동일한 에너지이다. 그리고 이 두 에너지를 모성적으로 의인화한 것이 여신이다.

[p29]오늘날 우리의 종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 중 하나는 그것이 최초의 출발점에서 선악의 문제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속량해주려고 왔다. 악의 죄값을 치러주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의 말에 최초로 귀를 기울인 이들은 고린토의 상인들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신화적인 주제를 해석할 때 부채와 변제와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이와는 달리 동양에서는 신화 해석에 부채와 변제 같은 개념과는 무관한 무지와 광명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에덴의 낙원 따위는 있지도 않았고 인간의 타락 따위도 없었으므로 하느님을 배반한 죄도 없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부채나 변제라는 설명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면 죄가 없는데도 속죄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2. 전설 속에서 사는 사람들 :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
[p33]예이츠는 이 그릠을 16세기의 연금술에 관한 책 ‘인간과 천사의 거울’에서 빌려왔다. 여기에 묘사된 것은 사람의 일생을 주기에 대응하는 달의 주기인데 보름달은 사람의 서른다섯 살에 해당한다.

[p33]개인이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발견하게 되면, 이른바 원초적인 가면의 억압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을 왼손의 길이라고 부른다. 오른손의 길은 자신이 사는 마을의 울타리, 곧 이데올로기와 가면 체계 – 페르소나(persona : “인격”을 뜻하는 라틴어 본래는 에트루리아인들이 연극배우가 쓰는 탈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융은 개인이 일상생활을 유지해나가는 데에 필요한 조건들에 순응하는 태도를 가리켜 페르소나라고 불렀다/역주)체계-에 갇혀 살아가는 길이다. 왼손의 길은 개인적인 탐구의 길이다.

[p34]그러나 젊은이가 자신의 길을 찾도록 장려하는 사회에서조차 심리적 발달의 지체로 인하여 큰 긴장의 기간이 존재한다. 우리 현대인은 원시사회나 전통사회의 사람들처럼 쉽게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우리는 더욱 복잡한 탄생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p36]그것은 중대한 전환기이다. 상현달이 뜨는 밤의 죽음과 부활은 유치한 자아의 죽음과 정신적 성숙의 탄생을 의미한다.

[p40]그런데 이런 종류의 만다라는 모두 동쪽이 열려 있다. 닫혀있지 않고 열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빛을 받아들이기 위함이다. 만물은 초월성에 대해서 투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p41]인간이 먹는 모든 것은, 식물이건 동물이건, 당신 자신의 생명을 구성하는 물질이 되려고 기꺼이 자신을 바치는 생명이다.

[p46]젊은이들은 이제 더 이상 이 모든 것들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제의들이 사라지고 있다. “만일 현대 문화인류학 연구자들에게 그 내용을 가르쳐준다면, 그것을 보물로 지정해서 나바호 박물관에 보존할 참이다.”

[p47]북쪽은 인생의 새로운 소재를 얻는 유일한 방향이다. 사회의 관습과 명령에 따르지 말라. 그 방향에는 막다른 골목이나 분쟁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무지개인간의 지시에 따라서 산들, 곡 그들의 활동무대로 간다.

[p49]내가 걸었던 길을 가서는 안 돼. 그 길의 오른쪽을 걸어 가라구” 하고 말한다. 그래서 소년들은 오른쪽으로 따라 걷기 시작하지만 어느새 충고를 잊어버린다. 영웅들을 늘 잘 잊어버리는 법이다.

[p54]시련을 이겨낸 그들은 너무나 강력해져서 네 명으로 분열한다.

[p55]재미있는 사실은 이 괴물 역시 태양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태양은 소년들이 이 괴물을 죽이는 것을 도와준다. 미덕과 악덕, 대립물들, 그밖의 모든 것들이 가지는 모호성을 상징하는 이야기이다.

[p56]그 제의는 내가 방금 말했던 것, 그들 자신의 인생 역정이라는 제의였다. 정신분석의들은 유년시대에 일어났던 일을 회상하게 함으로써 정상을 되찾게 해준다. 그것과 똑 같은 제의를 치렀던 것이다. 온갖 시련을 겪은 끝에 이 제의를 치르고 나서 소년들은 또다시 네 명이 된다.

[p57]이 이야기는 신화적인 모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자란 세계의 경계를 넘어 아직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초월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없었던 것을 얻고 그 전리품과 함께 돌아온다. 여기에서는 이런 종류의 신화체계가 가지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p58] ‘24인의 철학자들의 책’이라는 12세기의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신은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곳이다. 그 중심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 경계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중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제의나 신화의 기능은, 아주 먼 옛날의 어딘가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당신이 그것을 경험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p58]나는 신비적인 차원과 그것에 대한 깨달음, 곧 신비주의와 과학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고 생각한다.

[p59]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신화도 그것을 제시한다. 신화는 살아 있는 인간을 그의 생활주기와 조화시키고, 그가 살고 있는 환경과 조화시키고, 이미 그 자체가 환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회와 조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3. 그리고 우리는 바다에서 무기를 씻었다 : 신석기시대의 신들과 여신들
[p77]여신, 뱀, 나무의 경합은 에덴 동산, 하와, 뱀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원기를 회복하려고 남성 달(male moon)dl 이곳으로 찾아온다. 기운을 돋우는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얻으려고 찾아온다. 이것은 타락이 아니다. 이런 전통에는 타락의 관념이 없다. 인도에서는 신이 자진해서 춤을 추며 세계에 들어온다. 세계는 유희이며 놀리리다. 그것은 이 신화들의 기본적인 분위기이다. 적어도 그것은 즐거운 것이며 유머러스한 것이다. 세계의 신화 가운데서 구약성서의 신화만큼 음울한 것은 없다.

[p78]모성 신앙을 생각할 때면 누구나 떠올리는 것이 번식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여신의 중요한 힘은 아니다. 그것은 육체적 차원의 것일 뿐이다. 이것은 명상에 잠긴 여성이다. 정신적 차원에서 그녀는 우리의 정신적 탄생의 어머니요, 처녀 수태하는 어머니요, 우리의 정신생활을 낳는 어머니이다 여기에 표현되어 있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신석기시대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발굴물들 중의 하나이다.

[p80]그 무렵부터 정복을 위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전의 전쟁은 단순히 복수를 위한 전쟁 또는 뉴기니 섬의 전쟁처럼 제의적인 전쟁에 불과했다. 한 마을을 습격해서 끝장을 낸다. 그러나 이제 찬미의 노래와 축하 잔치를 곁들인 실질적인 정복이 행해지게 된다. 도시를 철저히 공격하고 파괴해버린다. 그리고 후렴이 되풀이된다.”그리고 우리는 바다에서 무기를 씻었다네. 그리고 우리는 바다에서 무기를 씻었다네.”

[p83]이 시대의 소의 신이자 달의 신인 두무체에 대한 찬미의 노래가 지금도 남아 있다. 저승으로 내려간 두무체는 그의 아내인 여신을 향하여 이곳으로 와서 당신과 자신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달라고 노래한다. 여신은 한걸음 한걸음 저승으로 내려가 자신과 남편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영웅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이것이 순사의 사상이다. 부부는 한몸이다. 남편이 죽거나 희생이 되었다면 아내는 그를 따라야 한다. 아내의 영웅적인 행위에 의해서만 두 사람이 함께 영원으로 인도된다.

4. 파라오의 지배 : 이집트, 출애굽 그리고 오시리스 신화
[p88]여기에는 배타주의와 부족주의가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에도 유태인들에게서 이어지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야훼만이 유일한 신이며, 다른 신들은 악마들이다. 이 세상에는 이스라엘에만 신이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서양의 전통 속에서 계승해온 종교이다.

[p89]인도에는 통합주의의 경향이 있다. 강조점을 보편적인 신들에 둔다. 지역의 수호신인 부족의 신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보다 큰 하나의 종교체계에 속해 있다. 다른 곳에 다른 체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큰 체계가 있고, 그 아래의 지역적인 조상이 수호신이 있는 것이다.

[p98]죽은 오시리스는 이집트를 풍요롭게 해주는 나일 갈의 범람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토막 난 오시리스의 체액은 나일의 강물과 동일시된다. 따라서 이집트를 살찌우는 힘이 바로 오시리스이다.

[p100]”나는 어제요, 오늘이요, 내일이다, 나는 다시 태어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신들이 솟아나는 원천이다.” 이것은 위대한 자각이다. 당신이 죽기 전에, 그것이 어렵다면 저승에 닿기 전이라도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이다.

[p104]그것들은 두 개의 완전한 다른 방향성이다. 정신의 칼집은 윤리, 곧 선과 악, 밝음과 어둠, 기쁨과 고통에 관계한다. 지혜의 칼집은 그런 분별 이전에 무엇이 있는가를 안다. 그것은 환희이다. 따라서 그것이 당신의 본디 모습이다. 당신은 환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무리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크나큰 번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비참에 빠져 있다고 할지라도, 만일 환희의 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만 한다면, 이 현실이야말로 인생의 환희임을 깨달을 수 있다. 고통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영웅적인 신화에는 이런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p110]”그 답은 우리(We)’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고 빋습니다.”내가 들은 답은 그것뿐이었다.
그런즉 우리가 한 것은 타인이 한 것과는 다르다. 이것 또한 우리들(유태-기독교/역주) 전통의 특징이다. 모세는 영웅이 아니다. 그가 이끌었던 부족의 여웅이다. 우리의 신화는 부족의 신화이며, 우주의 유일한 신은 우리의 신이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5. 성스러운 원천 : 영구불변의 동양철학
[p113] 먼저 두 개의 단순한 관념을 소개하고 싶다. 첫번째 관념은 이미 여러 번 말한 것이지만 독일의 문화인류학자 아돌프 바스티안의 생각이다. 세계의 신화와 종교체계를 조사한 바스티안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같은 이미지와 같은 주제가 되풀이 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그것을 “원소적 관념(Elementary Ideas)”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또 그것들은 발생할 때마다 환경에의 적응이나 해석에 차이가 있으며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이런 지역적인 차이를 “민속적 관념(Folk Ideas)”또는 “민족적 관념”이라고 불렀다.

[p114]신화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계속성은 철학 속으로 숨어들어간다. 그것이 바로 영구불변의 철학이다.
신화는 꿈과 같은 영역에 속한다. 나더러 말하라면 그 영역을 지혜의 몸 (Wisdom Body)이라고 부르겠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몸이 말하기 시작한다. 몸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에너지에 의해서 움직인다. 에너지가 지혜의 몸을 지배한다. 에너지는 거대한 생물학적 바탕에서 나온다. 그곳에 있는 에너지는 에너지임과 동시에, 의식의 양태이다. 그러나 몸은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 독작적으로 사물을 생각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머리에 뿌리를 두고 의식의 모든 양태가 생기는데 지혜는 몸의 지식과는 다르다.
(중략)
그것과 똑 같은 지혜가 어머니의 몸 속에도 생긴다. 그것은 우리 내부의 살아 있는 에너지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우리는 그런 에너지의 육체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꿈의 지혜, 환상의 지혜는 영구 불변의 철학의 지혜이다. 꿈을 꾸다가 깨어난 당신의 의식은 그 꿈을 이해할 수 없다.

[p115]신화에서 중요한 것, 신비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상징에 포함되어 있는 속뜻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속뜻은 언제나 정신적이다.

[p115]약속의 땅으로 가려면 이스라엘로 가야 한다는 것도 그것과 비슷한 오해이다. 우리 서양인이 상징을 다룰 때의 주요 문제점들의 하나는 상징을 사실로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우리가 원소적 관념이나 영구불변의 계시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도 이런 상징의 구체화가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p116]독일의 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 만은 이런 훌륭한 말을 했다. “시를 쓰는 것은 말 뒤에 숨어 있는 원초적인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세상만물은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다. 괴테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변화하는 것들은 거울에 비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그러나 거울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실체는 공이다.

[p118](갠지스 강에 대해서)진정한 순례는 글자 그대로의 순례, 물리적인 행동으로서의 순례를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중심을 찾아가는 순례로 바로 바꾸는 것이다. 순례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순례하는 동안 계속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명상하고, 참된 여행은 자신의 내면을 향한 여행임을 자각하기만 한다면.

[p120]제임스 조이스는 ‘피네건의 경야’에서 더블린 시를 관류하는 리피 강에 대해서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리피 강을 끼고 있는 더블린은 바로 갠지스 감을 끼고 있는 베나레스에 해당한다. 환경과 신화의 관련성, 정신생활의 모든 비밀이 여기에 집약되어 있다. 그것은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란트남”이라고 부르는 것, 곧 어떤 풍경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 땅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을 성지로 여긴다.

[p120]”나의 조국, 나의 국토는 이곳 미국이다. 나는 이곳에서 살도록 강요받지 않았다. 이 나라를 나의 성지라고 부르는 것은 나의 자발적인 의사일 뿐더러, 나의 기쁨이기도 하다.” 그의 주장은 우리가 자신의 “전통적인 유산”으로부터 벗어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한 훌륭한 답이다. 그 “전통적인 유산”은 자칫 그 자체의 상징체계를 구체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자신을 해방시켰으며,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성지에 대한 모든 관념을 발견했다.

[p124]당신은 글을 쓸 때면 의도해서 쓰기도 하지만 영감에 사로잡혀 쓰기도 한다. 영감이 샘솟으며 말이 터져 나로는 일이 있다.

[p126]브라만은 신들보다 강하다. 따라서 신의 계시를 받은 인간은 어떤 신보다도 강하다. 이것이 우주의 위대한 점이며, 브라만은 그런 위대한 존재이다. 이것이 한 가지 핵심이다.

[p127]우리가 제물을 불 속에 던질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 세계는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이며, 그 속으로 무진장한 제물이 던져진다. 그것이 생명의 본성이다. 우리는 모두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지는 제물이다.

[p129]”이 신을 숭배하라, 저 신을 숭배하라, 차례차례로. 그것은 이 법에 따르는 사람과는 관계 없는 이야기이다. 신들의 근원은 당신 마음속에 있다. 발자취를 더듬어 중심으로 가서, 신들을 낳는 근원은 당신 자신임을 알라.”이것은 이미 이집트에도 있었던 생각이다. 그것이 영구불변의 철학의 기본적인 관념이다.

[p129]신들은 바로 당신 자신의 에너지의 상징적인 의인화이다. 당신 자신의 에너지는 우주의 에너지이다. 따라서 신은 저곳에도 있고 이곳에도 있다. 그렇다, 천국은 당신 안에 있다. 그렇지만 또 어디에나 있다. 이것은 영구불변의 철학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제 가지 내부의 불을 찾아나서야 한다 그것은 심리학적인 구별 작업이다. 그것은 실재의 육체적이고 가변적인 명과 영속적인 불꽃을 구별하는 작업이다. 젊음과 늙음, 삶과 죽음은 그 불꽃이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p131]당신의 인생을 괴로움에 불과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욕망과 불안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바라는 욕망, 사람을 속이려는 욕망이며, 무엇인가를 잃지 않으려는 불안이다. 이 욕망과 불안이 진정되었을 때 당신은 마하수카, 곧 큰 기쁨의 경지에 도달하고 법열을 경험하게 된다. 법열을 경험하게 되면 고통이 당신을 아프게 하지 못하게 된다. 당신은 중심으로 들어가며, 기쁨이 흘러넘치게 된다.

[p133]그는 자이나 교도가 만사를 물리적으로 해석한다고 말했다. 죽여야 할 것은 심리적 차원의 온갖 욕망과 불안이다. 그때 비로소,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생명은 긍정적인 것이 된다.

6. 정각에 이르는 길 : 불교
[p136]스즈키 다이세츠가 쓴 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 젊은 제자가 스승에게 “제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스승이 “없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제자가 말했다. “그렇지만 스승께서는 만물에는 불성이 깃들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돌, 나무, 나비, 벌, 새, 짐승,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말입니다.“ 스승이 말했다. “네 말이 옳다. 만물에는 불성이 깃들어 있다. 돌, 나무, 나미, 벌, 새, 짐승, 모든 것들에. 하지만 네게는 없다.””제겐 없다구요? 어째서 그렇습니까?””네가 그런 걸 묻기 때문이다.”

[p140]하지만 우리 동양에서는 만사가 뒤죽박죽이지요. 우리는 정신생활과 물질생활에 큰 구별을 두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것은 정신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 다음 준비해간 강의 노트는 몽땅 잃어버린 체하면서 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일본과 중국의 그림에는 많은 여백이 있는데, 그 여백에는 어떤 것이 담겨있다. 그래서 그는 노트를 잃어버린 체함으로써 우리에게 그 여백을 보여주었던 것이고, 우리는 그와 함께 그 여백을 찾아냄으로써 강연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무엇이든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한 법이다.

[p141]언제나 사회가 의무라고 말하는 것만을 행한다면, 어떻게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p142]어느 날 저녁, 정각을 얻은 부처는 큰 충격을 받고 이레 동안 움직이지 않고 한곳에 앉아 있었다. 시간의 영역으로부터 철저히 물러났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부처는 일어나서 일곱 걸음 물러서서 자신이 앉아 있었던 곳을 이레 동안 내내 바라보았다. 이것은 현세적인 것을 부동의 정각에 관계시키는 것이다. 그 뒤 그는 이레 동안 두 곳을 왕복함으로써 관계와 통합을 심화시킨다. 이윽고 그는 다른 나무 아래에 앉았는데, 그 때 떠오른 첫 생각은 “이것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불교에 관한 첫번째 사실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가르칠 수 없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딸을 배서(뉴욕의 명문대학)에 보낸 수는 있지만 공부하는 것은 자기 몫이다.”

[p143]그러자 부처가 답했다. “그럼 가르쳐주겠소. 그러나 내가 가르치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 불교에 이르는 길이오.” 불교는 부처의 정각에로 당신을 데려가는 “탈것”, 특히 나룻배이다. 불교는 우리를 피안으로 건네주는 나룻배이다. 피안이란 괴로움과 즐거운, 얻음과 잃음, 불안과 공포, 너와 나를 초월한 장소이다.

[p143]이것이 작은 나룻배인데, 모든 것을 버릴 각고가 되어 있고 실제로 기꺼이 버리는 사람만이 탈 수 있다. 어떤 경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머리카락에 불이 붙어 연못에 뛰어드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열반을 구하지 않으려거든 아예 처음부터 그만두는 것이 좋다.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길이다.”여기에는 매우 실천하기 어려운 금욕과 현세 부정의 사살이 있다. 그래서 작은 나룻배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 배에 탄다.

[p144]여기까지가 소승이다. 맨해튼을 떠나 저지로 간다. 비참한 고통이 소용돌이치는 세상을 떠나 열반이라는 해방의 세계로 간다. 뉴저지에 도착하여 맨해튼을 뒤돌아존다. 당신은 지금 비이원성의 세계, 모든 대립을 초월한 세계에 있다. 그러나 건너편에 맨해튼은 없다. 중가에 허드슨 강도 없다. 사공도 없다 그렇다. 노든 것이 그렇다 당신은 이원성을 초월하며, 그래서 깨닫는다. 나는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다. 견해가 바뀐 것이다. 외경(전거를 믿을 수 없어서 정경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작품)인 “토마스 복음서”에 쓰여 있는 것처럼, “아버지의 왕국은 이 지상에 널려 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느니라.” 보라! 지금, 여기, 그대의 몸에 후광이 비친다! 그렇다. 다양성은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난 통일성에 불과하다. 그것이 대승이다. 우리는 그곳에 있다.
[p146]당신이 그리스도를 부처와 똑 같은 존재라고 생각할 때, 기독교과 불교 사이에는 훌륭한 대화가 생긴다. 기독교와 불교는 동일한 원소적 관념이 두 개의 민속적인 원소로 표현된 것이다. 부처가 당신에게 주는 가르침은 이렇다. “네가 그것이다.”(우주의 근본 원리인 범과 개인의 중심인 아의 본체가 궁극적으로 동일하다.(범아일체)

[p148]당신이 간 천상계는 당신의 상태에 꼭 들어맞는 곳이다. 당신을 재판해서 천상계의 여기로 가라거나 지옥의 저기로 가라고 명령하는 사람은 없다. 일종의 특수한 중력을 가지고 있는 당신 자신의 정신이 당신을 천상계에서 가장 적당한 곳으로 옮겨준다. 로큰롤이 좋아하는 사람이 콘서트에 가게 되는 일은 없다. 당신이 즐길 천상계는 당신의 준비에 걸맞는 곳일 것이다. 천상계에는 단계가 있다.

[p149]중국에서는 적극적으로 사회적 흐름에 참여하는 태도가 인도에서보다도 훨씬 중요시되고 있는데, 이것은 누구나 매우 강하게 느끼는 것이다.

[p151]휴머니즘이란 인간을 신들에게 예속되지 않은, 만물의 중심으로 보는 인간관이다. 신들은 메아리로만 존재할 뿐, 인간의 다양한 힘의 표현에 불과하다.

[p154]아소카 왕은 최초의 불교도 왕으로서 실론에 선교사를 파견했는데, 이것이 중요한 점이다. 그는 자기 아들과 딸도 한 명씩 실론에 보내어 교단을 설립하게 했다. 그는 또 마케도니아, 키프로스, 이집트에도 선교사를 파견했는데, 이 사실은 바위나 대리석에 새겨진 비문에도 기록되어 잇다. 따라서 기원전 250년 무렵의 근동에는 불교의 선교사가 있었고, 같은 시기에 신플라톤 학파의 철학도 그곳으로 찾아왔다.

[p154]불교는 어디로 가건 “너희의 신들을 제거하라”하고 말하지 않는다. 불교가 가는 곳마다 참으로 간단하게 종교의 융합이 이루어진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특징은 자신들이 진출한 곳의 신들을 전멸시키는 것이다. 보다 온건한 불교의 특징은 먼저 살고 있던 신들 역시 그 땅의 생명력이며, 불성의 표현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신들은 자신들의 불성을 드러내는 데에 참여한다.

7. 이드에서 자아로 : 쿤달리니 요가(1)
[p155]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동양사상에 적합한 말로 표현한다면, 신들은 에너지의 의인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생명, 모든 생명, 당신의 생명, 세계의 생명을 만드는 에너지의 의인화이다.

[p157]예를 들자면, 논리법칙과 범주가 있다. 그 법칙에 들어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당신은 얽매여 있다. 이것이 바로 마야(진정한 실재에 대립되는 허깨비)이다.

[p158]요가는 의식, 곧 자아의식을 의식의 원천에 연결시킨다. 물론 의식의 원천은 모든 관념을 초월한다.

[p159]”요가란 정신의 자연발생적인 활동을 의도적으로 정지시키는 것이다.”

[p159]요가의 목표는 정신을 정지시키는 데에 있다. 어째서 그런 일을 하고 싶어할까?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영구불변의 철학의 기본 이념, 곧 모든 것은 정신을 통해서 경험된다는 이념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것이 마야이다. 정신은 언제나 움직이고 있가. 그것은 바람에 잔물결이 일렁이는 연못을 연상시킨다.

[p161]”쿤달리니”는 “서리다(똬리를 틀다)”라는 뜻의 “쿤달린”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말하자면 척추의 아랫부분, 육체의 밑바탕에 서려 있는 정신적인 에너지를 가리킨다. 에너지가 그곳에 서려 있는 동안에는 정신적 생명이 아직 빈약하다. 정신적 에너지를 축적한 기관은 골반 언저리에 있다. 요가의 목표는 서려 있는 에너지를 깨어나게 해서 등골을 통해서 위로 가져가는 것이다. 그것은 뱀, 작은 암뱀의 형상으로 표상된다.

[p163]어떤 충격으로 마음이 흔들리면 호흡은 흐트러진다.반대로 호흡을 바꾸면 정신상태도 바뀐다.천천히 호흡함으로써 연못의 잔물결을 잠재우는 것이다. 참선중인 승려의 한 호흡의 길이는 놀라울 정도이다. 수련을 쌓은 요가 수행자를 대단한 폐활량을 가지고 있다.

[p166] 소년들은 북쪽으로 간다. 사회의 규칙을 넘어서는 유일한 길은 북쪽으로 가는 것이며, 그것은 규칙을 깨는 것이다. 그곳에는 사회가 그 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오면 그것이 구원하는 힘, 확장된 힘이 된다.

[p169]낡은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얻는 것은 생명 에너지를 상징한다. 의식은 시간의 영역, 곧 죽음과 탄생의 영역에서 활동한다. 달은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그 그림자를 버린다. 뱀은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허물을 벗는다. 그것들이 이 힘의 상징이다.

[p170]의식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당신이 있다. 당신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특정한 모습으로 활동하는 의식의 표현이다. 당신은 개인적 생명이라는 특정한 것을 통해서 불멸의 것을 끌어낸다. 유한한 자기 존재의 변천 속에서 자기의 영원성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목적의 전부이다.

[p179]지금 사람들은 원자폭탄과 그밖의 것들에 대해서 명상하고 있다. 우리의 문화에서 환멸의 명상에 잠기는 것은 1,000년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현상이다.

8. 심리학에서 영적인 것으로 : 쿤달리니 요가(2)

[p185]차크라 2, 곧 스바디스타나인데 이것은 “그녀가 즐겨 가는 곳”, 그녀가 즐겨 서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성기이다. 이 차크라에서는 사람의 심리가 바뀌다. 이미 행동주의가 아니라 프로이트의 심리학에 가까워진다. 모든 것이 흥분 상태에 빠진다. 성이 인생의 목적이 된다

[p188]누구나 순수한 차크라 2의 경험을 통해서 성스러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이 비슈누와 관련된 전통이며, 바이슈나바교의 전통이며, 성애적인 형태의 전통이며, 사랑의 길이다.

[p194]차크라 4는 아나하타이다. 아나는 “없다”,”하타”는 “부딪치다”라는 뜻이다. 곧 아나하타라 두 개의 사물이 서로 부딪치지 않고서 나는 소리를 의미한다. 나의 목소리, 당신이 듣는 어떤 소리도 두 개의 사물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이다.

[p197]차크라 4는 심장의 차크라이다. 이것은 변신의 차크라이다. 이 작은 공간은 소망을 충족시키는 나무를 위해서 준비된 공간이다. 에너지와 광명이 이 돌파구에 가까워지면 누구나 “바야흐로 나의 모든 소망이 실현되고 있다”고 느낀다.

[p198]차크라 5는 비슈다이다. 이것은 단순히 동물적인, 육체적인 몸을 씻어내는 “정화”를 의미한다.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을 씻어낸다기보다는 승화시키고 계발하는 경험을 통해서 초월적인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p204]부처는 심장이 중심에서 기능한다. 에너지는 심장의 중심에서 나온다. 부처가 유혹자에게 “아니다”하고 말할 때, 그의 손은 땅에 닿아있다. 그러나 경험해야 할 것을 다 경험한 귀, 부처의 손은 한바퀴를 돌아서 은혜를 베푼다. 따라서 부처는 은혜를 베풀려고 되돌아온다. 고행에서 돌아와서 중생에게 가르침을 준다. 우주의 지배자가 자기를 낮추어 우주로서의 자신, 여신으로서의 자신을 포옹한다. 그것이 쿤달리니의 교훈이다.

9. 천상계로의 하강 : 티베트 사자의 서
[p205]그런데 죽음과 삶의 신화는 곡 환생의 신화이다 동양의 환생은 서양의 연옥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재생의 기회, 당신이 광명을 경험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기회이다.

[p207]사람들 중에는 관명을 경험할 수는 없어도 관명에 대한 강의를 들을 수는 있는 사람들이 있다. 오스카 와일드 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인은 천구에 갈 것인가 혹은 천국에 대한 강연회를 갈 것인가를 선택하라고 하면 강연회를 선택할 것이다.” 당신은 천국을 경험할 수는 없어도 천국에 대한 강의를 들을 수는 있다. 그것이 당신을 구해줄지도 모른다.

[p213]만일 당신이 비열한 인간이라면 그 비열함을 굳게 지키라. 다만 그 에너지, 곧 샤크티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완고함만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방향전환을 시킬 수 없는 사람은 완고한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지옥이다. 지옥이란 자기의 개별적 존재, 개별적 존재, 개별적 존재가 자신에게 의미하는 것, 자기의 인격, 자기의 소망, 선악의 관념 따위에 관해서 완고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따라서 그것이 당신의 미덕이자 당신의 악덕이다.

[p214]만약 자기의 완고함에 사로 잡히게 되면 지옥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부처는 생이 가장 높은 목소리로 그에게 호소했을 때도 그것에 귀 기울이지 않고 땅에 손을 댄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는 아버지 –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와 같이 –에게로 가려고 했던 것이다.
[p217]여기에서의 미덕은 불굴의 의지, 단순한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노력으로 전진하는 자세이다. 그 부정적인 측면은 호전성이다. 만일 당신이 그런 성격을 가진 채 죽는다면, 신의 적들, 악귀들, 싸우는 신들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p218] “죽여라! 죽여라! 죽여”죽음은 생의 장식이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죽음의 경계선에서 계속 임종의 흥분을 경험하고 있다.

[p219]누구나 야마 안타카, 즉 자기 내면에 있는 죽음의 공포를 죽이는 힘에 의지함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

[p226]나는 독서와 경전의 신인 판카크사라를 으뜸으로 꼽는다. 그것이 나의 이담이기 때문이다. 나는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독서에서 얻었다 나는 불교도나 요가 수행자를 만날 때면 나의 독서에 의해서 그들을 이해한다. 나는 부처 자신을 이해하려고 할 때도 부처보다도 이 이담을 앞세운다. 그것이 나를 떠받치는 것이다.

[p226]누구나 자기가 선택한 신, 곧 이스타데바타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선택한 신에게 충실하라. 그것이 당신의 길이다. 당신의 신이 어떤 신이건 간에 그 신을 통해서 부처의 전세계가 당신의 지식이 될 것이다.

10. 어두에서 광명으로 : 고대 그리스의 신비종교
[p234]외설스러움이 새로운 전망을 열어준다. 당신은 환성한 인간의 영역을 떠나서 생성과 재생성이 이루어지는 자연역학의 영역으로 물러나며, 비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다.

[p235]”우리는 어떤 제의를 행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이미 제의를 행하고 있다. 단지 그것에 대해서 명상하지 않을 뿐이다. 밥 먹는 일도 제의이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라. 벗들과 의논하는 일도 제의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자식을 낳는 일 –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p240]디오니소스의 힘은 생명력으로 가득한 격정을 몰고 온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대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의의 본질적인 메시지는 분명히, 우리는 시간의 영역에 에너지를 쏟아붓는 무한한 자연의 힘을 올바르게 준비된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며, 그것과 더불어 그 힘의 생산적인 면과 파괴적인 면 양쪽 모두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p244] 이 입문식에서 경험하는 것들 중의 하나는 남녀 양성을 모두 갖춘 초월적 존재가 되는 것, 곧 시간내 존재로서의 우리가 실은 단지 참존재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신들 가운데서도 가장 남자다운 헤라클레스가 때때로 여자의 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영웅도 다음 번에는 양성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의 머리카락은 길고, 머리 위에서 영의 날개가 있고, 그의 손에는 빈 접시가 있다. 그는 남자이자 여자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입문식의 뜻은 우리는 성적 대립을 뛰어넘는 양성을 갖춘 존재라는 데에 있다. 또한 내가 앞서 달의 의식과 태양의 의식의 결합에 대해서 말했듯이, 우리의 죽어야 할 운명과 불멸성이 하나임을 깨닫는 데에 있다.

[p248]첫번째 동물 사자는 자만심, 자아에 대한 집착,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상징한다. 두번째 동물 표범은 욕망을 상징한다. 여기서는 욕망을 상징하는 개의 얼굴로 그려져 있다. 세번째 동물이라는 공포, 과거를 상징하며 당신이 가진 것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이것은 부처가 받은 유혹과 같다. 만일 그가 자아에 집착했더라면 욕망과 불안이 그를 움직였을 것이다.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욕망과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으며, 그 때문에 막다른 곳에 이르게 된다.

[p248]우리가 자아와 공포와 욕망에 집착하는 한,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에 집착하는 한, 우주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려야 한다.

[p249]에우프로시네는 세계의 에너지를 부어 넣는다. 빛남의 여신인 아글라이아는 그것을 되가져 온다. 그리고 가운에 있는 탈리아 –앞에 나온 뮤드와 이름이 같다 –는 다른 두 여신을 결합시킨다. 이것은 고전적, 이교적, 헤르메스적 상징 해석이다.

[p251]어릴 덕에 당신에게 불어넣어진 종교적 전통은 지금도 그곳에 존재한다. 현대 과학으로 그것들을 해석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하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천국에 오르는 것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천국의 존재를 가정할 수도 없다. 천국 따위는 없는 것이다.

[p251]먼저 영원은 시간의 형상들과 사랑에 빠져 있지만 그 형상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해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시간의 형상 안에서 다른 것들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당신이 이 하찮은 사물에의 의무에서 벗어나려면 해체되어 초월계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p253]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알고 싶거든 “사도 신경”을 소리내어 읽으면서 자신이 내는 소리에 주의를 기울 이기만 하면 된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는 하느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여기가 중요한 대목이다.” “또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 이 그 문장에서 유일하게 역사적인 서술이다. 나머지는 신화이다.

[p253]당신은 육체적으로 완벽한 나이, 즉 서른다섯 살의 나이로 부활할 것이다.


11. 길은 없었다 : 아서 왕 전설과 서양의 길
[p259]한 기사가 다른 사람이 걸었던 자취를 발견하고는 “아하, 그가 여기를 지났었군!”하면서 그 길을 따라가기 시작하면, 그때는, 설령 다른 기사들은 성공할지라도, 완전히 길을 잃고 만다. 얼마나 멋진 이야기인가. 우리의 의도, 우리의 여행, 우리의 목표는 지금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 곧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똑 같은 지문을 가진 사람은 없다. 당신 몸의 모든 세포와 구조는 지금까지 이 세상에 존재한 어떤 사람의 것과도 다르다. 따라서 당신은 여기저기에서 암시를 받으면서도 직접 그것을 움직일 수밖에 없다.

[p261]고통이 있는 곳에 당신의 인생이 있다. 그러니 그것을 찾으라.

12. 고상한 마음 :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궁정연애
[p280]그런데 중세를 통틀어 가장 통이 큰 귀부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이다. 그녀는 두 명의 위대한 국왕의 아내였다. 그녀는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결혼하고 남편과 함께 십자군 원정에 나섰는데, 돌아올 무렵에는 루이에게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졌다. 루이 7세가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이미 엘레오노르는 후에 영국 왕 헨리 2세가 되는 남자와 결혼하려고 가출하고 없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두 명의 국왕의 아내가 되었다.

[p281]”눈은 마음의 척후병이다. 눈은 마음이 호감을 느끼는 이미지를 찾아낸다. 따라서 눈이 그런 이미지를 발견했을 때, 만일 그 마음이[이 대목이 중요한데] 상냥한 마음[정욕을 일으키는 마음이 아니라 애정을 일으키는 마음을 뜻하며, 정욕과 애정은 전적으로 다르다]이라면, 그때 사랑이 생긴다.”

[p283]만일 상대가 자신에게 정욕이 아니라 상냥한 마음을 쏟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면 그녀는 메르시라고 알려진 것을 남자에게 줄 수도 있다. 메르시란 기술적인 말이다. 여성이 얼마만큼의 메르시를 주는가는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있다. 그것은 해마다 성신강림절에 자신의 목덜미에 한 번 키스하는 특권을 주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보다 더 나아간 것일 수도 있다.
[p288]”자신이 선택한 길을 여행하는 것은 면도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 실제로 그렇다 ; 그 길을 여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특히 자신만의 희열, 자신만의 열망을 추구하는 사람은 균형을 잃고 열망의 급류로 떠내려가기 십상이다.

[p288](중세의 결혼에 대립하는 연애에 대해서)그것은 기존의 문화에 대항하는 반문화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세 유럽에서 결혼은 집안간에 결정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귀족사회는 이것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랑의 주제를 찬미했던 것이다. 이 양가를 조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p288]나는 성배를 그 해담으로 제시하고 싶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성배 전설은 중세의 가장 위대한 이야기이다. 볼프람 폰 에셴바흐이 ‘파르치팔’이야말로 중세 최고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단테의 ‘신곡’을 능가한다. 왜냐하면 단테는 천국에서 이야기를 끝냈지만, 고트프리드는 이 지상에서 이야기를 끝냈기 때문이다. 모든 일들이 지금, 여기에서, 육체를 가진 인간에 의해서, 참으로 멋지게 해결된다.

13. 성배를 찾아서 : 파르치팔 전설
[p302]선과 악의 대립물 속에 있는 한 당신은 윤리의 영역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p302]파르치팔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저 주어지는 여자와 결혼하지는 않겠다. 내 아내는 내 손으로 고르겠다.”그것이 결혼과 사랑의 최초의 결합이다. 결혼과 사랑의 분열이라는 문제에 대한 최초의 답인 것이다.

[p308]이 전통을 근동에서 전해진 기독교 전통과 비교해보라. 기독교 전통에서 자연은 선과 악의 양면을 가지지만, 인간은 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독교 전통은 “자연에 따르라”가 아니라 “자연을 교정하라”고 말한다. 볼프람은 “자연에 따르라”고 말한다. 그래서 말의 본성이 파르치팔을 성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p312]볼프람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그가 말하려는 것은 초자연적인 은총과 자연적인 은총을 구별한 중세의 정신적 이상이 유럽을 거세해버렸다는 것이다. 자연적인 은총 – 말이 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 그것이 삶을 이끌어가지도 않는다.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은 초자연적인 은총, 곧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회 추기경들을 통해서 얻게 되는 정신적인 관념이다. 유럽에서 자연은 살해되었다. 자연의 에너지 –이것이 볼프람의 교훈이며, 그는 실제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 –는 살해 되었다. 이교도 기사의 죽음은 그것을 상징하며, 성배왕의 정신적인 불임은 그것의 결과이다.

[p312] 고상한 마음음 자만이 아닌 사랑에서 나오며, 그것도 성적인 사랑이 아닌 동정심에 의한 사랑에서 나온다. 그것이 성배가 던지는 문제이다.

Ⅲ. 내가 저자라면

나는 ‘마음으로 읽는 책’과 ‘머리로 읽는 책’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으로 읽는 책은 활자로 읽는 순간 일종의 체험이 가슴으로 느껴지는 책이다. 반면, 머리로 읽는 책은 그 체험이 가슴으로 전해지지 않는 책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마음으로 읽는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 서술되어 있는 종교적인 체험들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것처럼 보인다. 주제와 주제를 넘나들고, 동양과 서양의 넘나드는 산만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저자의 체험들이 녹아 있기 때문일 거다. 이런 책은 독자들에게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을 것을 요구한다. 자신의 생애 중에서 어떤 체험이 저자의 체험과 비슷한 지 주파수를 잘 찾아 볼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일단 머리로 읽고자 하면 이 책은 불친절하기 그지 없는 책이다. 한 가지 주제를 다 설명하기도 전에 다른 주제가 튀어 나오기도 하고, 갑자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한다. 마치의 저자의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산만한 설명은, 요가의 차크라를 소개하는 부분 (8. 심리학에서 영적인 것으로 : 쿤달리니 요가(2))에서 가장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산만한 부분은 출판을 하기 전, 편집하는 과정에서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것 같다. 가령, 캠벨의 의식의 흐름이 담긴 강의록 자체는 그대로 생생하게 남겨 두더라도, 각 장에서 소개가 되는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훑어줄 필요는 있었다고 생각이 된다. 가령, 8장에서는 캠벨의 강의록이 나오기 전에 콘달리니 요가에서 말하는 차크라의 순서와 일반적으로 논해지는 그 의미에 대해서 먼저 논의를 해 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리스의 신들이 등장하는 부분에서는 등장하는 신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독자가 그 후에 나오는 캠벨의 강의록을 좀 더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좀 산만하긴 하지만, 캠벨 만큼 다양한 문화, 다양한 종교, 다양한 철학 들에 대해서 한꺼번에 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도 한편 든다. 특히, 불교와 요가, 중국 철학, 인도 철학에 대한 설명 부분에서 이 사실이 더욱 뚜렷해진다. 서양인인데다가 카톨릭을 모태 신앙으로 갖고 있었던 캠벨이 불교와 요가, 중국 철학, 인도 철학을 그 어떤 동양인들보다도 명쾌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이 명쾌한 것은 그의 탁월한 비유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이 된다. 그의 탁월한
비유가 없었다면 그 어찌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 생명의 환희, 체험으로서만 얻을 수
있는 종교적인 어떤 부분을 이처럼 쉽게 우리가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인가?


[p144]여기까지가 소승이다. 맨해튼을 떠나 저지로 간다. 비참한 고통이 소용돌이치는 세상을 떠나 열반이라는 해방의 세계로 간다. 뉴저지에 도착하여 맨해튼을 뒤돌아존다. 당신은 지금 비이원성의 세계, 모든 대립을 초월한 세계에 있다. 그러나 건너편에 맨해튼은 없다. 중가에 허드슨 강도 없다. 사공도 없다 그렇다. 노든 것이 그렇다 당신은 이원성을 초월하며, 그래서 깨닫는다. 나는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다. 견해가 바뀐 것이다. 외경(전거를 믿을 수 없어서 정경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작품)인 “토마스 복음서”에 쓰여 있는 것처럼, “아버지의 왕국은 이 지상에 널려 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느니라.” 보라! 지금, 여기, 그대의 몸에 후광이 비친다! 그렇다. 다양성은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난 통일성에 불과하다. 그것이 대승이다. 우리는 그곳에 있다.

[p104]지혜의 몸 아래에 있는 것은 아난다마야코사, 곧 축복이다. 생명은 환의의 표현이다 그런데 애처로운 정신의 칼잡이 모든 것을 양식의 몸과 연결시켜서 “아아, 인생이란 참으로 비참하도다”하고 생각한다. 누군가 이 중일 간격으로 잔디를 깎는다고 하자. 그때마다 풀이 “글쎄, 이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담?”하고 생각하는 것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p142]“이것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불교에 관한 첫번째 사실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가르칠 수 없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딸을 배서(뉴욕의 명문대학)에 보낼 수는 있지만 공부하는 것은 자기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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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4.08 10:46:10 *.244.220.254
아~ 캠벨이 종교적 체험을 직접 가슴으로 경험했는지 궁금해지네요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지적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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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희
2008.04.08 18:20:55 *.41.62.236

그의 설명이 명쾌한 것은 그의 탁월한 비유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이 된다.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피곤하진 않았는지요, 공항이나 신촌가면 불심검문 할 수도. ㅎㅎㅎ 다 제 바운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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