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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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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8일 11시 25분 등록
신화의 세계 Transformation of Myth Through Time
까치글방, 2005, 과학세대 역


l. 저자 소개(Joseph Campbell 1904-1987)

한 때 뉴욕 최고의 육상선수였고, 색소폰 주자였으며, 대공황이 닥친 후에는 우드스톡의 숲 속으로 들어가 연 20달러짜리 전세집에 은거하며 맹렬한 독서 속으로 빠져든 사람, 극빈을 즐거워하며 재즈밴드에서 종종 연주한 대가로 생계를 유지한 자유인. 35세에 사라 로렌스 대학의 제자인 진 어드먼(마사 그레이엄의 제자)과 결혼, 자신의 말대로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 시작하여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기까지 아름다운 결혼의 여정을 걸어간 낭만주의자. 조지 루카스라는 희대의 영화감독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켜 <스타 워즈>를 만들게 한 장본인.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가요 비교 신학자인 그, 그의 이름은 조셉 캠벨.

여섯 살 때 어느 쇼에서 본 인디언에게 매료된 그는 평생에 걸쳐 신화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1921년 다트머스 대학에 입학에 생물학을 전공했으나 메디치家에 대한 책을 읽고 1922년 콜럼비아 대학에 편입해 영문학과 비교문학을 공부한 후에 1924년 처음으로 유럽 여행길에 오른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섬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의 주도적인 삶의 태도와 거침없는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여기에 자세히 서술하지 않아도그의 생애가 어떠할지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은 생겨먹은 대로 살게 되어있다는 말을 우리는 종종 한다. 자연상태에서 덜 왜곡되고, 천편일률적으로 교육되지 않는다면, 이 말은 누구에게나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생긴 대로 살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세상의 문법에 그다지 구애되지 않고 자기 생긴 대로 사는 사람들을 가끔 만난다. 캠벨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생겨먹은 대로 한 세상을 잘 살았다. 모험과 지적 탐구,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정직하게 따라가는 용기로 가득 찬 그의 삶은 그래서 그의 것이다.

유럽을 향해가는 배 위에서 만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통해 힌두교와 불교에 일단 흥미로운 악수를 건네둔 그는, 이후 자신의 공부가 깊어진 후에는 자신의 종교였던 카톨릭과 결별하고 불교에 가장 가까운 종교관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간다. 이 책에서 동양철학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접할 수 있는 것도, 이 때의 인연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의 인생에 중요한 또 하나의 만남은 1940년 콜럼비아 대학 교수였던 하인리히 침머와의 만남이다. 이 책 본문 인용에서 캠벨이 침머를 부르는 호칭에는 각별함이 묻어있다. 그는 ‘내가 존경하는 친구 침머’ 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침머와의 만남은 그의 신화 연구가 세상과 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캠벨이 평생 몸담았던, 볼링겐 시리즈를 소개한 것도 침머였다. 그는 1942년 융 학파가 주도하는 볼링겐 시리즈의 편집자가 되어, 인도 예술과 신화에 관한 침머의 연구들을 편집하였다. 독일 유학 시절 시작된 융에 대한 탐험은 그와의 인연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1943년 침머가 폐렴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미완성으로 남은 침머의 유작들을 편집하는 일에 그는 12년 동안 헌신하였다. 1950년대 중반부터는 그 자신, 저명한 신화 강연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저서로는 <천의 얼굴을 한 영웅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1949), <신화와 함께 하는 삶 Myths to Live By>(1972), <야생 수거위의 비행 The Flight of the Wild Gander>(1969),<신의 가면 The Masks of God> 4부작(1959~1968)과 그의 신화 연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신화의 이미지 The Mythic Image>(1974) 등이 있다. 그가 죽은 이듬해인 1988년 사라 로렌스 대학에 캠벨의 비교신화학 강좌가 개설되고, 1991년에는 조셉 캠벨 재단(www.jcf.org)이 설립되었다.

“금세기의 어느 누구도 세계의 신화적 의미와 신화의 영원한 존재들을 그처럼 생생하게 우리의 일상적 의식 속으로 살려놓은 사람은 없다. 프로이트, 토마스 만, 레비 스트로스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_ James Hillman

“캠벨은 미국 지식인들 가운데서 드물게 대중문화의 환영을 받은 진지한 사상가이다.”
_〈Newsweek〉


ll. 가슴에 무찔러 오는 글귀


1. 서론 : 인간과 신화의 기원

5. 신화는 우리의 삶, 우리의 육체 그리고 우리의 환경을 소재로 한다. 역동적이고 살아 있는 신화는 이 소재들을 각 시대의 지적 특성에 적합한 형태로 다룬다.

5. 누구나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것이 어머니의 몸이다. 르 드블뢰가 어머니와 자식, 자식과 어머니간의 “신비적인 관계”라고 불렀던 것은 궁극적인 낙원이다. 우리의 어머니인 대지와 전 우주는 이 경험을 범위가 더 넓은, 성인의 경험 속으로 옮긴다. 어린아이와 어머니의 관계와 같은 정도로 자신과 우주의 관계가 완전하고 자연스럽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우주 사이의 완전한 조화와 일치를 얻게 된다. 우주와 조화를 이루면서 그곳에 오래 머무는 것, 이것이 신화의 주요한 기능이다.

7. 남자란 뭔가 진지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동물이다.

12.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 종류는 매우 실제적인 동물적인 인간이고, 다른 한 종류는 신성한 잉여로서의 아름다움의 유혹에 민감한 인간적인 인간이다. 이것은 큰 차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신적인 관심과 욕구의 최초의 작은 싹이며 다른 동물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16. 근원적인 신화의 이미지는 생명의 이미지이다.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먹는 생명의 이미지이다.

33. 보름달은 사람의 서른다섯 살에 해당한다. 예이츠가 이 책에서 사용한 용어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초월적인 신비로부터 태어나고, 사회는 곧바로 우리들에게 각인을 시작한다. 우리가 써야하는 가면은 사회가 씌워진 것이다. 예이츠는 이것을 원초적 가면이라고 부른다.

2. 전설 속에서 사는 사람들 :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

33. 개인이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발견하게 되면, 이른바 원초적 가면의 억압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은 왼손의 길(left-hand path)이라고 부른다. 오른손의 길은 자신이 사는 마을을 울타리, 곧 이데올로기와 가면 체계-페르소나(persona : "인격"을 뜻하는 라틴어. 본래는 에트루리아인들이 연극배우가 쓰는 탈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체계에 갇혀 살아가는 길이다. 왼손의 길은 개인적인 탐구의 길이다.

35. 당신은 당신 자신을 참으로 영원한 것과 동일시한다. 의식은 형상을 내던졌다가 되찾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이 모든 존재에 내재하는 의식과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당신은 만물과 하나가 되고, 따라서 지지무개(事事無儗)라고, 곧 개별 존재와 전체 사이에는 어떠한 장벽도 없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지상에서이 궁극적인 신비체험이다.

35. 여러분의 머리가 나르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분의 머리는 의식을 나르는 수레이다. 여러분의 머리는 얼마나 많은 의식을 비추고 있으며, 그중 어느 것이 당신인가? 당신은 의식을 나르는 수레인가, 그렇지 않으면 의식 자체인가?

48. 사회의 관습과 명령에 따르지 말라. 그 방향에는 막다른 골목이나 분쟁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무지개 인간(Rainbow Man)의 지시에 따라서 산들, 곧 그들의 활동무대로 간다.

58. "신은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공(球)이다. 그 중심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 경계는 어디에도 없다. " - <24인의 철학자들의 책>(Book of the Twenty-Four Philosophers
결국 중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제의나 신화의 기능은, 아주 먼 옛날의 어딘가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당신이 그것을 경험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59. 신화가 살아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에게도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실제로 당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림을 보는 것과 같다. 그 그림은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만일 당신이 "저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화가가 대답해준다면, 그것은 당신을 경멸하기 때문이다. 그림과 마찬가지로, 신화는 기능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당신이 이미 신화를 경험하고 해석하고 확대했다면 신화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화는 먼저 기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기능하는 신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59. 신화는 살아 있는 인간을 그의 생활주기와 조화시키고, 그가 살고 있는 환경과 조화시키고, 이미 그 자체가 환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회와 조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3. 그리고 우리는 바다에서 무기를 씻었다 : 신선기 시대의 신들과 여신들

71. 농업의 정착과 가축의 사육에 이어 나타난 공동체의 확대와 함께 직업의 차별이 생기기 시작한다. 비전문가 또는 아마추어 문화 대신, 가족이 대를 이어가면서 평생 동안 관리, 사제, 상업, 농업과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생활양식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단일조직의 구성원이라는 자각을 가지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그러한 자각이 붕괴되고 있다.

72. 우리는 지금도 시간이나 천체의 주기를 계산할 때 이 육십진법을 사용하고 있다. 문자에 의한 기록, 수학 그리고 천체에 대한 정확한 관찰 덕분에, 행성은 수학적으로 결정 가능한 속도로 움직인다는 결론이 얻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학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우주의 질서라는 이념이 생겼다. 그것은 문화의 전면적인 변화이며,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새로운 요소가 들어온 것이다…그리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우주관이 생기게 되었다.

77. 인도에서는 신이 자신해서 춤을 추며 세계에 들어온다. 세계는 유희이며 놀이이다. 그것이 이 신화들의 기본적인 분위기이다. 적어도 그것은 즐거운 것이며 유머러스한 것이다.

4. 파라오의 지배 : 이집트, 출애굽, 그리고 오시리스 신화

89.인도에는 통합주의의 경향이 있다. 강조점을 보편적인 신들에 둔다.

90. 미케네의 위대한 아크로폴리스의 한 매장지에서 두 마리 말이 끄는 전차가 발견되었다. 같은 시대의 중국의 한 매장지에서도 두 마리의 말, 전차 그리고 전차를 모는 전사가 발견되었다. 인종은 다르지만, 문화는 같다.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는 인도의 위대한 전차부대 용사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기원전 1340년 무렵의 투탕카멘의 그림에도 같은 종류의 전차가 나온다. 같은 전통에서 나온 것이 확실한 것 같다…새로운 이념과 함께 그것과 연결되어 있던 신들이나 에너지의 상징들도 퍼져나간다.

100. 사자는 저승의 입구에 다다른다. 매우 중요한 순간이다. “나는 어제요, 오늘이요, 내일이다. 나는 다시 태어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신들이 솟아나오는 원천이다.” 이것은 위대한 자각이다. 당신이 죽기 전에, 그것이 어렵다면 저승에 닿기 전이라도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이다.

101. 아크나톤은 지배권을 상징하는 것은 양떼를 지키고 인도할 때 사용하는 끝이 구부러진 지팡이와 곡식의 낱알을 떨어내는 도리깨였다. 이것은 자비의 신과 정의의 신이라는 지배의 두 측면, 곧 규제와 보호를 상징한다.

104. 정신의 칼집은 윤리, 곧 선과 악, 밝음과 어둠, 기쁨과 고통에 관계한다. 지혜의 칼집은 그런 분별이전에 무엇이 있는가를 안다. 그것은 환희이다. 따라서 그것이 당신의 본디 모습이다. 당신은 환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무리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크나큰 번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비참에 빠져 있다고 할지라도, 만일 환희의 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만 한다면, 이 현실이야말로 인생의 환희임을 깨달을 수 있다. 고통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영웅적인 신화에는 이런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108.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이 홍해를 건넜다는 흥미로운 문제에 부딪힌다. 이것을 어떤 종류의 정신적 상징, 신화적 사건으로 해석해야 할까, 아니면 사실로 보아야 할까?… 물 속을 지나는 것은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신화적인 주제이다.

110. 15분 전에 선생님은 페니키아인들이 그들의 장남을 죽였다고 해서 그들을 심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브라함이 장남에게 같은 짓을 했는데도 그것을 칭찬했습니다. 그래서 답을 듣고 싶습니다.” 부버 박사는 말했다. “그 답은 ‘우리(We)’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고 믿습니다.” 내가 들은 답은 그것뿐이었다.

5. 성스러운 원천 : 영구불변의 동양철학

113. 세계의 신화와 종교체계를 조사한 바스티안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같은 이미지와 같은 주제가 되풀이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이것을 ‘원소적 관념(Elementary Ideas)’이라고 불렀다.

114. 신화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계속성은 철학 속으로 숨어들어간다. 그것이 바로 영구불변의 철학이다. 신화는 꿈과 같은 영역에 속한다. 나더라 말하라면 그 영역을 지혜의 꿈(Wisdom Body)이라고 부르겠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몸이 말하기 시작한다. 몸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에너지에 의해서 움직인다. 에너지가 지혜의 몸을 지배한다. 에너지는 거대한 생물학적 바탕에서 나온다. 그곳에 있는 에너지는 에너지임과 동시에, 의식의 양태이다.

115. 상징의 주요한 문제는 사람들이 상징에 빠져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천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갠지스 강이 흘러나오는 근원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화에서 중요한 것, 신비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상징에 포함되어 있는 속뜻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속뜻은 언제나 정신적이다.

116. "시를 쓰는 것은 말 뒤에 숨어 있는 원초적인 말(Urwort)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독일 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116."모든 변화하는 것들은 거울에 비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 괴테 -

118. 진정한 순례는 글자 그대로의 순례, 물리적인 행동으로서의 순례를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 잇는 중심을 찾아가는 순례로 바꾸는 것이다. 순례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순례하는 동안 계속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명상하고, 참된 여행은 자신의 내면을 향한 여행임을 자각하기만 한다면.

122. 신화는 분석과 관계를 가질 필요가 없으며, 원인을 과학적으로 발견할 필요도 없다. 신화는 인간을 그를 둘러싼 환경에 결합시키는 것과 관계가 있다.

123. 우리는 환경보호운동을 통해서, 자신이 그 속에서 살아가는 환경을 파괴함으로써 실제로 에너지를 잃고 있으며 자신의 생명력의 근원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조화의 관념을 가지고 이 세계에서 해야 할 일을 잘 분별해서 올바로 살아간다면 환경의 생명력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126. “희생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희생을 통해서 신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희생은 신들보다 강하다.

128. 어차피 떨어질 바에는 아예 뛰어들라. 꼭 해야 할 일이라면 해버려라. 이렇게 해서 희생에 대한 열의가 생기는 것이다.

129. “이 신을 숭배하라, 저 신을 숭배하라, 차례차례로. 그것은 이 법에 따르는 사람과는 관계 없는 이야기이다. 신들의 근원은 당신 마음속에 있다. 발자취를 더듬어 중심으로 가서, 신들을 낳는 근원은 당신 자신임을 알라”….신들은 바로 당신 자신의 에너지의 상징적인 의인화이다. 당신 자신의 에너지는 우주 의 에너지이다. 따라서 신은 저곳에도 있고 이곳에도 있다. 그렇다, 천국은 당신 안에 있다. 그렇지만 또 어디에나 있다. 이것이 영구불변의 철학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제 자기 내부의 불을 찾아나서야 한다. 그것은 심리학적인 구별작업이다. 그것은 실재의 육체적이고 가변적인 면과 영속적인 불꽃을 구별하는 작업이다. 젊음과 늙음, 삶과 죽음은 그 불꽃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131. 열반이란 괴로움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심리적인 태도를 말한다. 당신의 인생을 괴로움에 불과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욕망과 불안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바라는 욕망, 사람을 속이려는 욕망이며, 무엇인가를 잃지 않으려는 불안이다. 이 욕망과 불안이 진정되었을 때 당신인 마하수카(Mahasukha), 곧 큰 기쁨의 경지에 도달하고 법열(法悅)을 경험하게 된다. 법열을 경험하게 되면 고통이 당신을 아프게 하지 못하게 된다. 당신은 중심으로 들어가며, 기쁨이 흘러넘치게 된다. 당신이 중심에 들어가면 이미 무엇을 얻는다든지 잃는다든지 하는 일이 없게 된다. 당신은 존재 그 자체가 된다. 이것이 열반이다.

132. (자이나 교도들은) 살고 싶다는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순간에 죽는 것이다. 살고 싶지 않다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133. 죽여야 할 것은 심리적 차원의 온갖 욕망과 불안이다. 그 때 비로소,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생명은 긍정적인 것이 된다.

6. 정각(正覺)에 이르는 길 : 불교

136. 스즈키 다이세츠가 쓴 책에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 - 한 젊은 제자가 스승에게 "제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스승이 "없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제자가 말했다. "그렇지만 스승께서는 만물에는 불성이 깃들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돌, 나무, 나비, 벌, 새, 짐승,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말입니다." 스승이 말했다. "네 말이 옳다. 만물에는 불성이 깃들어 있다. 돌, 나무, 나비, 벌, 새, 짐승, 모든 것들에. 하지만 네게는 없다." "제겐 없다구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네가 그런 걸 묻기 때문이다." 이런 합리적인 방식으로 자기 발견을 이루고자 하는 한, 그 뜻을 파악 할 수 없다. 부처란 합리적인 방식을 털어내고, 그 뜻을 파악한 다음, 그 뜻으로부터 해방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142. 인드라와 브라마가 말했다. "부디 인류와 신들과 전세계의 구제를 위해서 가르침을 베풀어주십시오." 그러자 부처가 답했다. "그럼 가르쳐주겠소. 그러나 내가 가르치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 불교에 이르는 길이요." 불교는 부처의 정각에로 당신을 데려가는 "탈것(yana)", 특히 나룻배이다. 불교는 우리를 피안(彼岸)으로 건네주는 나룻배이다. 피안이란 괴로움과 즐거움, 얻음과 잃음, 불안과 공포, 너와 나를 초월한 장소이다. 그것은 우주적인 일원성 또는 우주만물의 불변성을 자각함으로써 이원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143. "머리카락에 불이 붙어 연못에 뛰어드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열반을 구하지 않으려거든 아예 처음부터 그만두는 것이 좋다.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길이다." 여기에는 매우 실천하기 어려운 금욕과 현세 부정의 사상이 있다. 그래서 작은 나룻배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 배에 탄다.

145.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무엇이 최선의 교훈, 최고의 규칙일까? 최고의 규칙은 벗들과 즐겁게 지내고, 즐겁게 식사하는 것이다. 당신의 놀이가 무엇인지를 깨달으라. 그 놀이, 인생의 놀이에 참여하라. 그것이 바로 극락, 곧 마하수카이다.

146. 당신이 그리스도를 부처와 똑 같은 존재로 생각할 때, 기독교와 불교 사이에 훌륭한 대화가 생긴다. 기독교와 불교는 동일한 원소적 관념이 두 개의 민속적인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 부처가 당신에게 주는 가르침은 이렇다. "네가 그것이다."(여기에서의 "그것"은 "불성을 자각하여 보살의 도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역주) 확실히 그렇다. 그리스도의 호소는 무엇일까? 기쁨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 불안해하거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기꺼이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환희이다. 그것이 거기에 담긴 뜻이다.

148. 당신의 미래의 모습은 단지 지금 이 세상의 당신의 성격과 존재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154. 불교는 어디로 가건 “너희의 신들을 제거하라” 하고 말하지 않는다. 불교가 가는 곳마다 참으로 간단하게 종교의 융합이 이루어진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특징은 자신들이 진출한 곳의 신들을 전멸시키는 것이다. 보다 온건한 불교의 특성은 먼저 살고 있던 신들 역시 그 땅의 생명력이며, 불성의 표현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신들은 자신들의 불성을 드러내는데 참여한다.

7. 이드에서 자아로 : 쿤달리니 요가(1)

155.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동양사상에 적합한 말로 표현한다면, 신들은 에너지의 의인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생명, 모든 생명, 당신의 생명, 세계의 생명을 만드는 에너지의 의인화이다.

155. 초월적인 의식은 사물을 생각하고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우리의 모든 능력들을 훨씬 넘어선다. 이런 생각이 모든 생명의 밑바탕에 있는 기본 이념이다.

157.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밝힌 것은 우리의 모든 지식, 우리의 모든 경험은 지식의 기관, 경험의 기관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어떤 경험보다도 앞서는 선험적인(priori) 것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식이다. <형이상학의 기초>라는 훌륭한 책에서 칸트는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해서 우리는 이 공간에서 사물의 관계를 결정할 수 있으며, 같은 관계가 다른 공간에서도 성립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이어서 그는 대답한다. “그것은 공간의 법칙들이 이미 우리 자신의 머릿속에 있기 때문이다.”

157-158. 당신은 모든 것들을 본 뒤에 그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지만, 사고의 법칙은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결정한다. 예를 들자면, 논리법칙과 범주가 있다. 그 법칙에 들어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당신은 얽매여 있다. 이것이 바로 마야(maya: 진정한 실재에 대립되는 허깨비)이다….당신이 “신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하고 묻는다면, 하나와 여럿은 개념이다. 그것들은 사고의 범주들이다. 그리고 신이라는 말은 본래 하나의 인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인격을 넘어서는 것, 실제로 사고를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화적인 상징은 초월성에의 길을 열어준다.

159. 서양에서의 통상적인 해석에 따르면, 신은 상징이 아니라 기호이다. 신이라는 말은 하나의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160. 우리는 자신을 그런 일그러진 상들의 하나, 곧 연못의 수면에 일그러진 모습으로 비친 상의 하나와 동일시한다. 나는 나타난다. 그리고 사라진다. 그것이 우리를 시간의 흐름, 시간과 공간-마야-에 결합시킨다. 연못을 정지시키고, 상을 하나로 만들라. 일그러져 비쳤던 것이 이제 완전한 정지 상태에서 보인다. 그것이 당신의 참된 실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다른 모든 사람의 실재이기도 하다.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다른 모든 사람의 것이기도 한 의식이 실체를 발견하는 것, 이것의 요가의 목표이다.

160. "왜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위험에 깊은 관심을 품으며 자기 몸의 위험을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자발적으로 뛰어드는 것일까?"…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보통 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형이상학적인 자각이 갑자기 생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보편적인 의식의 구현이라는 자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과 타인은 하나이다.

161. 요가의 기능은 우리를 시간과 공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켜 초월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165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에서, 괴물들로부터 어머니를 구하려는 어린 영웅들은 어머니로부터 북쪽은 위험하니 가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았었다…사회의 규칙을 넘어서는 유일한 길은 북쪽으로 가는 것이며, 그것을 규칙을 깨는 것이다. 그곳에는 사회가 그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오면 그것이 구원하는 힘, 확장된 힘이 된다.

168. 뱀은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허물을 벗는다. 따라서 그것은 생명력, 에너지 그리고 죽음을 떨쳐버리는 의식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영역 안에 있다. 죽음의 영역 안에 있는 의식이 죽음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육체를 얻는다. 그것이 재생이며 세대의 연속이다.

172. 낙원의 문을 지키는 거룹들, 불멸의 생명나무로부터 인간을 떼어놓기 위해서 신이 문 앞에 배치한 두 마리의 거룹이 지금 그 문을 열고 있다. 따라서 당신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들어가면 생명나무가 있다. 부처가 그 밑에 앉았던 나무이다. 그 나무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그 나무는 바로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다. 따라서 당신은 부다가야에 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 모든 것을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물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부다가야로 가게 될 것이다.

175. 하인리히 침머가 자주 말했던 것처럼, "최선의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차선의 것은 오해된다." 왜냐하면 차선은 초월계를 설명하려고 시간과 공간의 사물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시간과 공간의 용어로 설명됨으로써 언제나 오해된다. 차선에 버금가는 선은 대화이다. 우리는 지금 최선의 것을 말하려고 차선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8. 심리학에서 영적인 것으로 : 쿤달리니 요가(2)

188-189. 사랑에는 다섯 가지 형태가 있다. 처음의, 가장 낮은, 가장 단순한 사랑은 주로 사랑이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의 사랑이다. 그것은 주인과 노예간의 사랑, 특히 주인에 대한 노예의 사랑이다(신을 향한 사랑). 사랑의 두 번째 형태는 친구들간의 사랑이다. 기독교에서 제자들 간의 사랑이다. 서로 친밀하며, 무엇이든 물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끔찍히 사랑하며 마침내 깨달음에 이른다. 사랑의 세 번째 형태는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다. 여기서 숭배의 대상은 아기이다. 사랑의 네 번째 형태는 배우자끼리의 만남, 결혼이다. 사랑의 가장 높은 형태는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다. 앞뒤를 헤아리지 않는, 적극적인, 금지된, 세상의 관습을 무시한 사랑이며 초월계의 돌파구를 여는 사랑이다. 그것은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누군가를 돕는 경험과 비슷하다. 정열과 충동이 너무나 강렬하여 세계가 눈앞에서 사라진다. 이것 궁정연애의 개념이다.

189. 우리의 종교생활은 지금, 이곳에 있다.

202. 나방은 불꽃에 뛰어들려고 한다. 그러나 유리가 그것을 막는다. 나방은 밤새 유리에 몸을 부딪고는 아침이 되자 친구들에게 정말 대단한 것을 보았노라고 말한다. 그러자 친구들은 말한다. "그런데도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는군." 돌파구를 열려고 필사적으로 몸을 부딪치는 것, 이것이 요가 수행자의 필요 조건이다. 나방은 다음날 밤 유리를 부수는 데에 성공한다. 한 순간에 나방은 목적을 이루고 불꽃이 되어버린다. 그 순간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순간이다.

203. 지옥에는 어떻게 해서 떨어질까? 자신의 자아를 완고하게 닫아버리는 사람은 그것에 사로잡혀버린다. 지옥이란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천국에는 어떻게 해서 오를까? 마음을 열면 마침내 모든 것이 개인의 한계를 초월하게 된다.

213. 지옥이란 자기의 개별적 존재, 개별적 존재가 자신에게 의미하는 것, 자기의 인격, 자기의 소망, 선악의 관념 따위에 관해서 완고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따라서 그곳이 당신의 미덕이자 당신의 악덕이다.

9. 천상계로의 하강 : '티베트 사자의 서'

217. 아미타불은 관세음보살을 섬기는 부처다…아미타불의 특성은 자비, 자애이다. 그럼 그의 악덕은 무엇인가? 집착, 사랑하는 이에 대한 집착이다.

217. 만일 당신이 그런 집착의 마음을 가진 채로 죽는다면 아귀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 아귀(餓鬼)들은 탐욕스러운 위를 가지고 있으나 바늘 끝처럼 작은 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먹고 싶은 것을 결코 먹을 수 없다.

219. 누구나 야마 안타카(Yama-Antaka), 즉 자기 내면에 있는 죽음의 공포를 죽이는 힘에 의지함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

수피교의 위대한 신비주의자인 만수르 알-할라즈는 (처형 전에)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통파 교단의 임무는 신비적인 욕구를 불어넣는 데에 있다.”

225. "우리가 타인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은 그들을 영혼의 형상들, 탄생과 함께 잊어버린 기억으로 다시 인도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티아이오스(Timaios)')

10. 어둠에서 광명으로 : 고대 그리스의 신비 종교

235. 명상이란 우리는 신성한 실체를 먹고 있으며 우리를 길러주는 것은 그 신성한 실체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실체가 아니다. 모든 생명은 어떤 초월적인 힘이 주어지거나 산출됨으로써 유지된다. 이것이 명상의 핵심이다.

248. 우리가 자아와 공포와 욕망에 집착하는 한, 자신의 개인적인 무제에 집착하는 한, 우주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려야 한다.

248-249. 선(禪)의 과제 중의 하나는 경험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의 의미를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인생에 의미는 없다. 꽃에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찾는 것은 경험을 쌓는 것, 인생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눈앞의 모든 경험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고, 해석하고, 분류하느라 경험에서 멀어져버린다. 당신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그것은 결혼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아니면 불륜 또는 이런저런 것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은 이런 식으로 분류하느라 경험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머리를 사자 입 속에 집어넣고 이렇게 말하라. "에이, 될 대로 돼라." 그러면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이다.

11. 길(道)은 없었다. : 아서 왕 전설과 서양의 길

259. 동양의 구루(guru)를 만나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들은 길(道)을 알고 있으며, 당신이 길의 어디쯤에 와 있는지도 알고 있다. 어떤 도사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상황을 당신에게 가르쳐주기도 한다. 따라서 당신은 직접 상황을 파악하지 않고서도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유럽과 동양의 다른 점이다…“그들은 성배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동양적 전통을 상징하는 집단심리와 비교해보라. “그들은 떼를 지어 가는 것은 명예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저마다 가장 어둡고 길이 나 있지 않은 지점을 골라 숲으로 들어갔다.”

261. "당신 말은 이해할 수 없군요. 만일 당신이 말하는 죽음이 이졸데를 사랑하는 나의 아픔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내 생명이라고 말하겠소. 만일 당신이 말하는 죽음이 세상에서 내리는 벌을 가리킨다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겠소. 만일 당신이 말하는 죽음이 지옥의 영원한 저주를 가리킨다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겠소."-트리스탄이 브랑게네에게

12. 고상한 마음 :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궁정연애

281. 지로 드 보르네일이라는 트루바두르가 가장 그럴 듯한 공식을 내놓았다. “눈은 마음의 척후병이다. 눈은 마음이 호감을 느끼는 이미지를 찾아낸다. 따라서 눈이 그런 이미지를 발견했을 때, 만일 그 마음이 상냥한 마음(정욕을 일으키는 마음이 아니라 애정을 일으키는 마음)이라면, 그때 사랑이 생긴다.”….무엇이 사랑(amour)을 위협하는가? 명예이다. 따라서 중세의 전통에서는 명예와 사랑 사이에 갈등이 나타난다. 고상한 마음을 얻기 위한 궁극적인 희생은 사랑을 위하여 명예를 희생하는 것이다.

287. “여성의 기질은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존재한다.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죽 끓듯 한다.” 그리고 내가 존경하는 친구 하인리히 침머는 이렇게 말했다. “시련은 참고 견디는 것이다.” 인내하라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들지 말라. 오직 참고 견뎌라. 그러면 아름다운 여성의 자비가 모두 당신의 것이 되리라.

290. 중세 이야기의 특징은 한 사람이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발전시킨다는 점이다. 그것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를 받아들여 그것을 해석하는 것, 곧 그 시대의 조건에 맞게 새로운 깊이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295.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여러 해에 걸친 숲속 생활이다. 그들은 기독교 시대 이전의 거인들이 만들어 놓은 동굴에 도착한다….본래 제단이 있어야 할 곳에는 수정으로 만든 침대가 있다. 이 제단의 신성함은 성의 신성함이다.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가 그렇게 생각했고, 중세인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사랑의 신성한 맹세는 성교이다. 그래서 성교는 신성하다.

298. 중세 유럽에서 결혼은 집안 간에 결정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귀족사회는 이것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랑의 주제를 찬미했던 것이다.

13. 성배를 찾아서 : 파르치팔 전설

302. 루시퍼는 인간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이슬람 시아파의 해석에 따르면, 그는 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루시퍼는 신 이외의 어떤 자도 섬길 수 없었다. 따라서 지옥의 사탄이 신을 가장 깊이 경배하는 자이다..

308. 파르치팔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저 주어지는 여자와 결혼하지는 않겠다. 내 아내는 내 손으로 고르겠다." 그것이 결혼과 사랑의 최초의 결합이다. 결혼과 사랑의 분열이라는 문제에 대한 최초의 답인 것이다.

310. 결혼은 사랑의 확인이며, 성애는 결혼의 상징이다. 그것이 사랑과 결혼을 하나로 만든다.


lll. 내가 저자라면


캠벨의 모든 주제는 한 가지 관심으로 흐른다

‘신화는 우리의 삶, 우리의 육체 그리고 우리의 환경을 소재로 한다. 역동적이고 살아 있는 신화는 이 소재들을 각 시대의 지적 특성에 적합한 형태로 다룬다’. 이 책 서론, ‘인간과 신화의 기원’ 첫 문장이다. 이 문장은 이 책이 어떤 책일지 독자에게 확실한 가이드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이 이 책만을 설명할 수 있는 대표 문장이냐, 그렇지는 않다. 이 문장은 캠벨의 어느 책에 갖다 대도 참이다. 캠벨의 책 두 권을 읽고 느낀 것은 캠벨에게 있어 주제 간의 경계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읽고 있는 텍스트의 구조가 명확하지 않다거나, 주제가 선명하지 않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불평은 빨리 내려 놓아야 한다. 자칫 캠벨 글쓰기의 단점으로 보일 수 있는 이 모호함은 뒤집어 보면 캠벨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일 수도 있다. 캠벨의 모든 저작(두 권을 읽었지만, 단언컨대 좀 더 넓고 깊은 신화의 세계로 우리가 안내될 것이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앞으로 읽을 다른 책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변을 통과하는 핵심 주제, 혹은 캠벨 속에 관류하는 단 하나의 화두는 신화의 상징을 현재의 나에게로 되살리는 것, 좀 더 어렵게 말하자면, 역사에 대한 반성을 넘어 현재(혹은 미래 지향적인)에 대한 메시지를 건져올리는 것이다. 이 사실만 잡고 있으면 캠벨의 어떤 글도, 설사 미궁같이 얽히고 혼란스런 글들도 그 밑에 흐르는 영적 근저에 닿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입문서가 아니다

이 책이 입문서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한 주제를 깊이 파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주제를 다룬 책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쓴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은 전문적인 책이고, 그 만큼 내용들이 어렵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 읽은 '신화의 힘' 역시 마찬가지다. 동양 배경을 가진 우리들이라고 해서 그가 소개하고 있는 동양철학, 불교, 요가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는 동양철학을 논하면서 다른 문화권의 신화들도 함께 논한다. 동서양의 신화들을 넘나들며 비유와 상징을 연결하는 그의 솜씨는 감탄을 자아내지만, 한 편 우리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우리는 여전히 그의 저작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에게 배경 지식이 좀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글을 읽게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입문서로 생각하고 쉽게 달려들었다가는 중간에 길을 헤매고 말 것이다.

캠벨의 관심은 사람이다.

인간과 신화의 기원을 시작으로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와 신석기 시대의 신들과, 이집트의 신화들, 고대 그리스의 신비종교, 성배이야기, 동양철학 불교 요가에 이르기까지 한 책에 담기엔 너무 거대한 담론들을 술술 풀어가는 그에게는 한 가지로 회귀되는 궁극적인 관심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다. 세계 신화가 지니는 주제에서 공통 요소를 찾아내려는 그의 집요한 노력은 신화의 상징이 가지는 심오한 원리를 통해 인간 정신의 원류에 이르려는 고투에 다름 아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숱한 신화의 주인공들, 가장 대표적으로는 예수와 부처, 그리고 긴 지면을 할애해 설명하고 있는 불교, 요가의 세계관 모두가 타자와 내가 동일한 하나인 것을 자각하는, ‘바로 그것’(우파니샤드의 개념인 타자와 동일시된 자신, 근원적 자아)인, 우리 인간에게로 귀결된다. 신화에 나타나는 은유들은 바로 이런 근원적 자아에 대한 직관으로부터 나온 표징들이고, 신화가 우리 안에 살아날 때 인간 공동체는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캠벨에게도 사람만이 희망인 것이다.

훌륭한 삽화와 사진 자료들

이 책에 소개된 풍부한 자료들은 매우 흥미롭다. 적절하게 배치된 예시와 사진 자료들은 곳곳에서 한 숨을 쉬게 하는 어려운 내용들에도 불구하고 책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자료도 있고 매우 새로운 자료도 있다. 책의 설명만으로는 다 이해가 안되는 자료의 경우, 그 사진을 바라보는 마음은 답답하기만 하다. 신화를 잘 아는 사람이 설명을 곁들여 이 책을 읽게 도와준다면, 오랜 시간 어둠을 헤매며 혼자 깨닫는 고통에서 벗어나, 우리는 신화의 바다에 맘껏 유영하며 더 큰 호기심을 가지고 더 빨리 언덕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원제인 ‘시간에 따른 신화의 변모’(Transformation of Myth Through Time)를 이 책을 설명하는 지시어로 생각하고 따라가면 그나마 전체적인 맥락을 잘 연결해 갈 수 있다. 결국 저자가 원하는 것은 역사와 다양한 문화를 통해 변형을 겪어온 신화가 오늘 우리를 향해 무슨 메시지를 주고자 하는가를 우리가 발견해 내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미 언급했듯이 신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우리가 읽기에 이 책은 여전히 어렵다. 그의 역작인 '신의 가면' 시리즈나 ‘신화의 이미지’, 혹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을 읽고 나면 좀 수월해지지 않을까. 4월 숙제가 끝날 때 쯤이면 캠벨이 도달한 신비의 영지에 우리의 발도 들여놓게 되기를 빌 뿐이다. 발걸음을 뗐으니 계속 걸어가다 보면 혼돈 속을 헤매다가도 밝은 양지로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런 기대가 캠벨 속으로의 탐험을 즐겁게 해준다.


흥미로운 개념들

이 책에 나온 흥미로운 개념들을 정리해본다. 그 개념들을 비판적인 내 글로 옮기고 싶지만 아직 내공이 부족해 책을 다시 편집하는 수준에서 소개한다. 관심의 끈을 놓치 않고 계속 생각을 확장해가는 것이 필요하다.

오른 손의 길과 왼 손의 길
우리는 초월적인 신비로부터 태어나고, 사회는 곧바로 우리들에게 각인을 시작한다. 우리가 써야하는 가면은 사회가 씌워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원초적 가면(예이츠)이다. 우리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권위를 유지하고 자신이 속한 문화의 관념을 지속시켜주는 제의를 주재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사는 마을의 울타리, 곧 이데올로기와 가면 체계, 페르소나(persona: ‘인격’을 뜻하는 라틴어로 본래는 에트루리아인들이 연극배우가 쓰는 탈을 가르키던 말, 개인이 일상생활을 해나가는 데 필요한 조건에 순응하는 태도)의 체계이다. 이것을 오른 손의 길이라고 부른다. 반면 왼손의 길은 자신만의 막중한 과업을 깨닫고 여기서 집단과 분리,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발견, 개인적인 탐구의 길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현대에는 이 가면이 다른 가면에 적대하며 나타난다.

나는 의식 자체인가 의식을 나르는 수레인가
그러나 이런 두 대별은 빛과 전구, 우리 의식과 의식을 담는 형식의 문제와 연관된다. 나는 빛을 나르는 전구인가, 빛 자체인가. 어느 것이 당신인가. 당신은 의식을 나르는 수레인가, 그렇지 않으면 의식 자체인가. 전구 하나하나에 강조점을 두는 것과, 빛 자체에 강조점을 두는 것의 차이. 사물을 인식하는 두 가지 개념으로 지홋카이(하나하나 사물에 차별이 있는 영역)와 리홋카이(하나하나 현상 배후에 있는 전체)가 일본에 있다. 그리고 이 둘을 아우르는 것이 지리무게(事理無儗)자. 즉 하나와 전체 사이에는 어떠한 장벽도 없다. 의식은 형상을 내던졌다가 되찾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이 모든 존재에 내재하는 의식과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당신은 만물과 하나가 되고, 따라서 지지무개(事事無儗)라고, 곧 개별 존재와 전체 사이에는 어떠한 장벽도 없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지상에서의 궁극적인 신비체험이다.

영웅은 모세가 아니다
지옥의 밑바닥과 같은 고난의 땅 이집트에서 민중이 일치단결하여 공동으로 자기 인식을 이룬 것은 위대한 일이다. 영웅은 모세가 아니다. 구약성서의 영웅은 민중이다. 민중은 하나의 단위로서 간주되며, 개인은 그 일원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강조되는 것은 집단, 집단, 집단이다.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근동의 특징이다. 유럽에서는 다른 데에 강조점을 준다. 유럽을 기독교에 동화시킬 때 생긴 문제 중의 하나는 둘도 없는 실체로서의 개인의 의식을 어떻게 재발견하고 유지해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근동의 집단주의 전통을 개인적인 자기실현의 전통 속에 어떻게 옮겨심을 것인가와 같은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13세기 유럽의 성배 전설의 문제 이기도 하다. 13세기에 이 전설은 새로운 방식으로 정리되었다.

기독교와 불교의 원소적 관념(Elementary Ideas)
이 관념은 독일의 문화인류학자 아돌프 바스티안의 것이다. 세계의 신화와 종교체계를 조사한 바스티안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같은 이미지와 같은 주제가 되풀이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원소적 관념’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또 그것들은 발생할 때마다 환경에의 적응이나 해석에 차이가 있으며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이런 지역적인 차이를 ‘민속적 관념’ 또는 ‘민족적 관념’ 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이다. 그것은 우리의 주제를 두개의 전혀 다른 부문으로 나눈다. 역사학자나 민족학자는 차이에 관심을 가지기 마련인데, 이런 차이에 중점을 두고 세계의 다양한 신화와 철학을 연구하는 것이 가능하다.
기독교와 불교는 동일한 원소적 관념이 두 개의 민속적인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 부처가 당신에게 주는 가르침은 이렇다. "네가 그것이다. "(우주의 근본 원리인 범(梵)과 개인의 중심인 아(我)의 본체가 궁극적으로 동일하다(梵我一如)는 우파니샤드의 중심적 사상을 요약한 말. 여기에서의 "그것"은 "불성을 자각하여 보살의 도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역주) 확실히 그렇다. 그리스도의 호소는 무엇일까? 기쁨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 불안해하거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기꺼이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환희이다. 그것이 거기에 담긴 뜻이다. 146

큰 나룻배와 작은 나룻배 (대승불교와 소승불교)
아래는 캠벨의 스승 하인리히 침머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를 비교할 때 써먹던 예화다. 불교의 진리를 아주 간명하게 담았다.
침머는 말했다. “우리가 불교를, 곧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 작은 나룻배와 큰 나룻배 – 를 이해하고 싶다면 나룻배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맨하튼에 있다…강 건너편에는 가든 세테이트라고 부르는 뉴저지 주가 있다…맨하튼 생활에는 이미 넌더리가 난 생태다. 우리는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꼭 그곳(뉴저지)에 가보고 싶다고 동경한다.
건너편에서 나룻배가 와서 우리의 발치에 정박한다.
가보고 싶다고 동경한다. 건너편에서 나룻배가 와서 우리의 발치에 정박한다.
“가든 스테이트의 저지로 가실 분 없나요?” 하고 묻는다.
당신은 재빨리 “제발 저지로 데려다 주세요” 하고 말한다.
그러자 나룻배 사공이 말한다.
“잘 들어보세요. 이건 아주 중요합니다. 당신은 다시 돌아올 수는 없답니다. 이 배는 편도만 운항합니다. 당신의 가족, 당신의 이상, 당신의 돈, 당신의 미래, 이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럴 각오가 되어 있나요?”
당신은 말한다. “이곳 생활에는 이미 넌더리가 난 상태입니다.”
그러자 사공이 말한다. “그럼 타세요.”
이것이 작은 나룻배인데,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고 실제로 기꺼이 버리는 사람만이 탈 수 있다. 여기에는 매우 실천하기 어려운 금욕과 현세 부정의 사상이 있다. 그래서 작은 나룻배라고 하는 것이다. 배가 움직인다. 결국 당신은 ‘왼쪽’이나 ‘오른쪽’이라는 말 대신에 ‘좌현’이나 ‘우현’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건너기 전과 마찬가지로 저지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맨하튼의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생각하게 된다. 실제 배 위에서 생활은 청결하고 소박하다. 두세 번 환생을 되풀이한 뒤 (당신은 참으로 짧은 여행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 매우 긴 여행이었다), 배는 마침내 저지에 도착한다. 아, 참으로 흥분되는 순간이다. 겨우 도달했다. 이것이 환희라는 것이다. 당신은 상륙한다. 그곳은 별세계이다.
여기까지가 소승이다.
맨하튼을 떠나 저지로 간다. 비참한 고통이 소용돌이치는 세상을 떠나 열반이라는 해방의 세계로 간다. 뉴저지에 도착하여 맨하튼을 뒤돌아본다. 당신은 지금 비이원성의 세계, 모든 대립을 초월한 세계에 있다. 그러나 건너편에 맨하튼은 없다. 중간에 허드슨 강도, 나룻배도, 사공도 없다. 그렇다. 당신은 이원성을 초월하며, 그래서 깨닫는다. 나는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다. 견해가 바뀐 것이다. 보라! 지금, 여기, 그대의 몸에 후광이 비친다! 그렇다. 다양성은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난 통일성에 불과하다. 그것이 대승이다.
이것이 불교의 훌륭한 역설이다. 핵심이 되는 말은 “무아”이다. 삼라만상에는 자아가 없다. 우리 모두는 그런 초월성의 표현이다. 우리를 타인과 구별하는 것이 바로 자아의 관념이다. 그것을 없애라. 두려워하지 말고 상대에게 양보하라. 타자의 먹이가 되라. 그럴 때 당신은 완성자가 된다. 그때의 경지를 극락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무엇이 최선의 교훈, 최고의 규칙일까? 최고의 규칙은 벗들과 즐겁게 지내고, 즐겁게 식사하는 것이다. 당신의 놀이가 무엇인지를 깨달으라. 그 놀이, 인생의 놀이에 참여하라. 이것이 바로 극락, 곧 마하수카이다.

불륜에 대하여, 그것은 옹호될 수 있다?
선(禪)의 과제 중의 하나는 경험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의 의미를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인생에 의미는 없다. 꽃에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찾는 것은 경험을 쌓는 것, 인생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눈앞의 모든 경험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고, 해석하고, 분류하느라 경험에서 멀어져버린다. 당신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그것은 결혼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아니면 불륜 또는 이런저런 것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은 이런 식으로 분류하느라 경험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머리를 사자 입 속에 집어넣고 이렇게 말하라. "에이, 될 대로 돼라." 그러면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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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4.08 11:34:07 *.244.220.254
"읽고 있는 텍스트의 구조가 명확하지 않다거나, 주제가 선명
하지 않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불평은 빨리 내려 놓아야 한다."

제 정곡을 무찔러 드는 문구네요~ 빨간모자가 생각나네~
4기 짱님! 너무 기죽이지 마세요~ 역시 짱님다운 멋진 글이네요.
만나서 대화해보면 이런 내공~ 잘 모르겠는데...........농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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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우
2008.04.08 11:37:16 *.122.143.151
34분 15초전!! ㅋ
한숙조교님~ 고생 많으셨어여~ 이제 숨 한번 돌리셔여~
담엔 좀 여유있게 가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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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8.04.09 16:39:34 *.253.249.55
그대가 불교의 교리를 이야기하면서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수 있는여인인지 알고 싶다.

자아의 발견이라는 거대한 사기꾼의 이야기를 믿는 여인 인지...

신경조직이 끊어진 한 철학자가 십자가에 목밖히면서
"파터 파터 저들을 구원해 주십시요" 라는 기막힌 시를 낭송한것 처럼 꾸민자들을 그대는 아는지?

일생 바른소리, 쓴소리만하다가 먹을 것이 없어 다락방에서 쓸쓸히 생애를 마친 독일의 철학자의 일생은 그댄 어찌 생각하는지...

그대의 글은 마치 진리를 만들어 놓고 설득하고 낭송하는 버릇은 타고남인가? 아님 꾸밈인가 ? 난 거걸 알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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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4.10 22:38:27 *.248.75.5
초아 선생님
언제나 글 읽어주시고 좋은 생각을 나눠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기독교인이지만 기독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생각은 불편해 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사랑하고 따르는 것은 신이면서 철저히 인간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나의 관심은 불교와 다른 종교의 좋은 가르침에도 손이 뻗칩니다.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불편하게 하거나, 위협을 가한다면 그것은 종교권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의 잘못된 권력 때문에 역사가 얼마나 피의 희생을 당했는지요. 자비와 구원을 말하는 종교가 오히려 더 많은 피를 불렀습니다. 기독교는 특히 더 그랬습니다. 캠벨을 읽고 제가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는 그의 주장 때문입니다. 그가 찾아낸 인류 공통의 영적인 원리는 각 종교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갇힌 문화의 감옥에서 우리를 해방해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캠벨 책을 읽으며 계속 이런 생각을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미사를 드리면서 불교 교리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아직 자유롭지 못한 종교성에서 벗어나길 기대합니다.
종교적 교조주의에 벗어나, 참으로 진리에 맞닿기를 소원합니다.
갈수록 나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도 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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