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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3일 23시 02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1904~1987)은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가로 불린다. 여섯 살 때 인디언에 관심을 가진 이후로 평생을 신화 연구에 바친 그의 일생은 신화에 대한 연구로 요약할 수 있다.

비교신화학자인 캠벨은 신화가 대중들과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데 많은 신경을 썼다. 그가 저술한 책들은 신화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1949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시작으로 캠벨은 ‘신의 가면 4부작’ ‘신화와 함께 살기’ ‘애생수거위의 비행’ ‘신화의 이미지’ ‘신화의 힘’ ‘신화의 세계’ 등의 저작을 세상에 내놓는다. 저술활동 외에도 다양한 강연을 펼치면서 신화가 현대인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를 알리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그런 까닭에 신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캠벨의 책을 피해가기 힘들다.

캠벨이 신화의 대중화에 힘을 쏟은 이유는 오늘날 세계가 겪고 있는 혼란을 신화의 부재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청소년 비행, 난무하는 범죄, 쉴새없이 이어지는 가정의 불화, 종교의 위기 등의 원인이 삶의 뿌리를 잃은 데서 시작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캠벨은 삶의 근원인 영적인 삶의 원형을 엿볼 수 있는 신화의 중요성을 소리 높여 외친다. 또한 신화가 전하는 메시지를 삶에서 재연하고, 삶의 질서를 바로 잡아주는 의례를 되살릴 것을 강조한다.

캠벨이 신화학자로서 색다른 평가를 받는 것은 그가 이룬 학문적 성과를 인류 역사에 대한 반성의 기제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현재와 미래에 대한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지고 있는 것도 다른 신화학자들과의 차이점이다. 그것은 인류와 함께 성장한 신화의 상상력과 초월적 힘을 잃은 비문화적 문명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가 외쳤던 경고들은 그가 왜 신화의 대중화에 힘을 쏟았는지를 말해준다.


● 내가 저자라면

역자후기에서 이윤기는 ‘이 책의 매력은, 저자가 학자들 사이에서나 통용되는 심오한 은어적 술어로 이야기하는 대신, 이른바 거장의 붓이 그러는 것처럼 우리 시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를 일반인이 알아들을 수 있게 그려내는 데 모자람이 없다는데 있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5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읽고 났을 때 떠오른 것은 혼란스러움이었다. 무언가 대단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거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책이 전하는 메시지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바로 나이고 당신이고 우리이다’라고 정리하면 맞는 것일까. ‘영웅은 자아의 실체를 찾아가는 사람이며, 그 험난한 여정을 거쳐 스스로에게 내재되어 있는 영웅을 발현 시킨다’고 하면 맞는 것일까.

저자 캠벨은 신화의 대중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적지 않은 책의 저술과 강연으로 미루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캠벨이 생각한 대중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사전적 의미로 보았을 때 대중은 ‘수많은 사람의 무리. 엘리트와 상대되는 개념’을 말한다. 대중화는 ‘대중 사이에 널리 퍼져 친숙해짐. 또는 그렇게 되게 함.’을 말한다. 두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풀어본다면 ‘장삼이사張三李四들에게 알려 친숙해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중의 범주는 어디까지일까. 책을 읽고 혼란스러워하는 나는 대중인가 아닌가. 개개인의 지적 능력과 삶의 환경과 취향과 이해력은 많은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함부로 이 책의 내용과 수준에 관한 나의 의견을 일반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일반화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러한 전제 아래서 책의 전체적 느낌을 뜯어보고자 한다.

설상가상(雪上加霜) - 신화학자인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원질은 당연히 신화이다. 책에 게재되어 있는 신화는 동서고금을 넘나들고 내용도 이제까지 일반 대중이 접하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신화들이 적지 않고, 담겨있는 함의도 고차원적이며 철학적이다. 책이 쉽지 않다는 말이다. 거기에 프로이트와 융까지 가세한다. 저자가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는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학적 이론은 대중에게 또 하나의 벽으로 다가온다.

애매모호(曖昧模糊) - 캠벨의 또 다른 책 ‘신화의 힘’에서는 전체적인 내용의 이해가 부족해도 부분 부분에서 필요한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게 어렵지 않았다. 신화와 메시지가 적절히 혼합되어 있고 메시지의 내용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이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전체적 이야기를 따라가며 독자가 스스로 메시지를 캐내야 하는 구조이다. 신화와 철학과 메타포가 뒤섞인 내용을 따라가기도 허덕이는 독자가 메시지를 정확히 유추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 책은 신화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저자로서는 그 많은 신화들이 분명 필요하기에 끌어왔을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어지는 신화의 이야기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되레 읽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메시지를 제공하기 위해 연이어 나오는 신화들의 연결도 헷갈리는 부분이 적지 않다. 더구나 관련 지식이 별로 없는 대중들에게 퍼부어지는 신화의 사례는 책의 한가운데서 길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

오리무중(五里霧中) - 신화와 철학이 혼재된 책의 성격상 어쩔 수 없기도 하지만 문장 자체도 난해한 부분이 많다. 신화를 이야기 할 때는 재미있게 읽히다가 정작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많은 지적 사유와 해석을 요구한다. 하나하나의 문장에 치여 마치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기분이 드는 이유다. 난해한 문장의 숲을 헤치고 나오면 기진맥진해져서 저자가 독자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명확히 알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고장난명(孤掌難鳴) - 신화학자와 대중의 간극이 너무 커 보인다. 신화를 매개로 한 저자와 대중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해 보이지 않는 것은, 지식과 사유의 형태가 원천적으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는 캠벨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그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저자가 아무리 중요성을 강조해도 책을 읽는 대중들이 알아듣기 어렵다면 무의미하다. 그런 까닭에 캠벨이 강연이라는 수단을 활용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책으로만 접하는 사람에게는 저자의 외침에 대답할 메아리를 찾기 어렵다.


● 마음에 들어 온 글귀

정신분석학자들의 대담하고도 획기적인 저술은 신화학도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자료다. 왜냐하면, 세부적인 데 이르면 견해가 다소 다를수 있고, 특정 사례나 문제에 대한 해석이 서로 상반되는 경우도 있지만, 프로이트와 융과 그 후계자들은 영웅과 신화의 행적이 현대로 계승되었음을 여지없이 증명해 내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일반 신화학은 없어도, 사사롭고 드러내어 인정받지 못한 미성숙 단계에 있다 뿐이지, 그래도 우리의 내부에는 속으로 알찬 꿈의 판테온이 있다. 최신형 오이디포스와 화신, 미녀와 야수의 속편이 오늘 오후에도 뉴욕의 42번가와 50번가 모퉁이에 서서 신호등의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5]

인간이 가진 심성중에 가장 끈질기게 남는 성향은, 동물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어머니 젖가슴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너무 빨리 모태를 떠난다. 미완성인 상태, 세상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당연히 위험으로부터 이들을 지켜주는 방벽은 어머니이고, 이 어머니의 보호 아래 자궁 내 체재기간은 연장된다. 그래서 보호가 필요한 유아와 어머니는 출산이라는 격변을 치르고도 육체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몇 개월간이라는 이원일체 상황을 형성한다. 양친이 곁에 없는 기간이 길어지면 유아는 긴장하게되고 결과적으로 공격 충동을 일으키다. 어머니의 속박을 받아도 유아는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다. 따라서 유아가 최초로 적의를 갖는 대상은 최초로 애정을 투사하는 대상과 일치하고, 유아가 최초로 갖는 이상은(이때부터 유아는 축복, 진리, 아름다움, 완전함이라는 이미지를 무의식 기저에다 간직하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예수라는 이원일체 상황이다. [16]

인간이라는 왕국에서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비교적 깔끔하고 비좁은 처소의 바닥 밑으로는 뜻밖에도 알라딘의 동굴이 뚫려있다. 여기에는 보물뿐만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꼬마 정령, 그리고 우리로서는 생각해본 적도 없거나 감히 우리 일상의 삶으로 통합하지 못했던, 불편한 혹은 억압당한 심리적인 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감지되지 않는 채 그대로 눌러 있지만, 혹 한마디 말, 주위의 냄새, 차 한 잔의 맛, 또는 어느 사람의 시선에 촉발되면 무서운 사신으로 우리 머릿속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무섭다고 하는 까닭은, 이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는 질서의 바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기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 그러나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19]

우리는 아직도 남아있는 유아기의 이미지에 발목이 잡혀있고, 따라서 어른으로 가는 길을 애써 좆으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전후가 도착된 슬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삶의 목표가 어른이 되는데 있지 않고, 청년으로 머물러 있는데 있으며,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오는데 있지 않고 어머니와 유착되는데 있다고 믿는 현상이 그것이다. [23]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29]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행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39]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양자를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신의 의지에 대한 거역)과 죽음(필멸의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인 것이다. [42]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지상적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즉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뚫리고, 오래전에 잊혀졌던 힘이 다시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게 되는 그런 심연으로 뚫린 길인 것이다. 이러한 영웅의 행위가 완성되면, 삶은 더 이상 도처에 도사린 재앙의 가혹한 단죄와 시간에 의한 마손磨損이나 막막한 공간의 두려움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고통받는 일이 없게 된다. 뿐인가, 공포는 눈앞에 여전히 보이고, 고뇌의 울부짖음은 여전히 귀에 들리나, 삶은 모든 것을 채우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과 정복되지 않는 힘의 자각으로 다시 생기를 얻는다. 여느 때에는 막막한 물질로 뒤덮인 생명의 심연에서 보이지 않게 타오르던 불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빛이 되어 비치기 시작한다. 저 무서운 단죄의 손길은, 그제서야 우리들 마음속의 불멸하는 우주의 그림자로 비친다. 시간은 영광의 승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세계는 더할 나위없이 천사적인, 더할나위없이 단조롭고 요정의 노래처럼 매혹적인 하늘의 노래를 부른다. 행복한 가정이 다 그렇듯이, 소생한 신화와 세계는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44]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겨로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부지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그리고 이 주름의 골은 매우 깊다. 영혼 그 자체만큼이나 깊다. 실수는, 운명의 시작에 해당하는 수도 있다. 이 동화에서 황금 공이 사라진 사건은, 공주에게 닥칠 어떤 운명의 첫 번째 조짐이고, 개구리는 두 번째, 무심결에 한 약속은 세 번째 조짐이다. [71]

프로이트는 불안한 순간은 어머니로부터 분리될때의 고통(탄생하는 순간의 숨이 막히고, 피가 응어리지는 등의)을 상기시킨다고 지적한 바 있다. 거꾸로 말하면, 분리와 탄생의 순간은 불안을 야기시킨다. 부왕과 함께 누리던 특권과 행복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려는 왕의 자식의 경우든, 사바 세계의 마지막 지평을 뛰어넘는 순간의 전심 전력하는 미래 부처의 경우든, 위험, 안심 입명, 시련과 극복, 그리고 탄생이라는 신비의 기이한 신성을 상징하는 원형 이미지는 똑같다. [73]

소명에의 거부는 모험을 부정적이게 한다. 타성이나, 힘에 겨운 일, 혹은 <문화>의 장벽때문에 , 모험의 주체는 의미심장한 긍정적 행동력을 잃고,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리는 것이다. 모험의 주체가 누리던 화려한 세계는 메마른 돌멩이가 구를 뿐인 황무지가 되고, 그의 삶은 무의미해진다. 그렇긴 하나, 미노스 왕처럼 이 모험의 주인공 역시 초인적인 노력으로 예사롭지 않은 제국을 건설하는 데엔 성공할지 모른다. 그러나 무슨 집을 짓건, 그가 짓는 것은 죽음의 집이다. [81]

인간은 밤이고 낮이고 자신의 어지러운 심성의 폐쇄된 미궁안에 살아 있는 자기으 이미지인 신적인 존재에 쫒긴다. 문을 나가는 길은 막힌지 오래다. 출구는 없다. 인간은 사탄처럼, 죽고 자신에게 매달린다. 이때 그가 있는 곳이 지옥이다. 혹자는 그러다 신 안에서 마침내 파멸하기도 한다. [82]

여자를 일러 물으니 대답하겠노라.
내 일찍이 여자의 글에서 명문을 대한 바 없고,
사내의 머리가 희어지고, 주머니가 빌 때면,
사내에겐 나누어줄 사랑의 몫도 없다더라. [89]

그러나 이 뱀, 즉 메는 참으로 무서운 존재다. 섬 사람들은 이 뱀은 자기를 본 사람의 친척으로 변한다고 믿는다. 자기 생활권이라는 벽에서 한 발이라도 밖으로 나가는 영웅은 반드시 이런 괴물(몹시 위험하면서도 때로는 마법의 권능을 베푸는)과 만나야 한다. [112]

세계 도처에서 채집되는 이러한 모티프는, 관문의 통과가 자기적멸自己寂滅의 형태를 취한다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교훈은 쉼폴레가데스(충돌하는 바위 섬)의 모험에 이르러 한층 더 분명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웅이 외부로의 관문, 즉 가시적 세계의 한계를 넘는 대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다. 이 들어감은 신도가 신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일치한다. 신도는 신전 안에서,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에 불과하다는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122]

아난다 쿠마라스와미 박사는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고 썼다. 어쩌면 영웅의 육신은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구세주 오시리스처럼 정말 죽고, 해체되고, 땅이나 바다위로 뿌려지는지도 모른다. [124]

그러니까 어떤 사회에 속하는 사람이든지, 고의적으로든 타의에 의해서든 자기 정신의 미궁이라는 미로로 내려가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저 시베리아의 <푸닥>과 성산에 못지 않는 상징적인 것들(능히 여행 당사자를 삼켜버릴 수도 있는)에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신비주의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자기 정화>에 이르는 길의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즉 감각이 <정화되고, 스스로를 낮추어> 모든 에너지와 관심이 <초월적인 것에 집중될> 때인 것이다. 굳이 현대적인 의미의 어휘를 쓰자면, 우리 개인이 가진 과거의 유아적 심상이 분리, 초월, 변화하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의 꿈에는 아직까지도 시대를 초월한 위험, 괴물, 시련, 정체불명의 조력자, 그리고 우리에게 유익한 인물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들의 형태에서 우리는 현재 상태의 모든 현상뿐만 아니라, 그 현상을 이기기 위해 우리가 취할 행동의 단서도 굴절되고 있음을 본다. [133]

잠자는 여성은, 동화나 신화에 곧잘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이미 브린힐트와 <덩굴장미 아가씨>라는 형태로 등장하는 이런 여주인공을 만난 바 있다. 잠자는 여성은 미인의 본보기 중의 본보기이며, 모든 욕망에 대한 응답, 모든 영웅의 지상적, 비지상적 모험의 은혜로운 최종 목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며, 누이며, 애인이며, 신부이기도 하다. 세상에 유혹하는 r서, 기쁨을 약속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의 예조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혹과 약속은, 이 세상의 도시나 숲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찾아온다. 왜 찾아 왔을까? 그녀의 존재가 바로 완전성이라는 약속의 화신이며 조직화된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오랜 방황을 끝낸 영혼의 안식이며, 한때 인류가 맛보았다가 언젠가 다시 못볼 은혜이기 때문이며, 위안과 자양, 그리고 우리가 아득한 옛날에 그 사랑을 받던 <좋은> 어머니(젊고 아름다운)이기 때문이다. 세월은 우리와 그녀의 사이를 가로막았지만, 그녀는 영원한 잠에 빠져든 미녀처럼, 아직 우리의 속 영원의 바다 밑바닥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147]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적인 결혼은 영웅의 삶 전체가 완성되었음을 상징한다. 즉 여성이 곧 삶인데, 영웅은 이 삶을 알게 되었고, 이를 완성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웅의 궁극적인 체험과 행위의 예비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의 시련은, 자각의 위기를 상징한다. 이 자각의 위기를 통해 영웅의 의식은 증폭되고, 어머니상의 파괴자, 즉 천생연분의 신부를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시련을 받는 당사자는 자기와 아버지가 동일하다는 사실과, 자기가 곧 아버지의 입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59]

참으로 까다롭고 재미있는 것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의식적 견해가 실제의 현실적 삶과 잘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것, 우리 친구들에게 내재해 있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기 방어적이고, 악취가 나고, 탐욕적이고 음탕한 흥분상태, 즉 우리 조직세포의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를 윤색하고, 회칠을 하고, 재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름에 빠진 파리, 우리가 먹을 국에 빠진 머리카락을 누군가 다른 불유쾌한 사람의 허물로 돌리려 한다. [160]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이 부모의 이야기는, 입문이 잘못되었을 때 입문자의 삶에는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확인시켜 준다. 한 아이가 자라, 어머니 품속의 목적인 자장가를 떠나 어른의 세계에 눈을 돌리게 될 때, 이 아기는 정신적으로 아버지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의 상징이요, 딸에게 있어서는 미래 남편의 상징이다.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갈 때 마땅히 거쳐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177]

어떤 방법으로, 어떤 지역에서, 갖가지 고대 문명의 신화적, 문화적 패턴이 이 지구의 구석까지 전파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단언하거니와, 우리 문화 인류학자들이 연구한 소위 <원시 문화>중 자생적인 것은 거의 없다. 오히려 원시문화란, 전혀 다른 지역에서, 대개는 그리 단순하지 않은 풍토 그리고 다른 종족에 의해 발전한 풍습이 어느 지역에서 채용, 변질, 형식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84]

창조의 역설, 영원으로부터의 시간이라는 양식의 도래는 아버지가 지니는 근원적인 비밀이다. 이것은 설명될 수가 없다. 따라서 모든 신학 체계에는 배꼽, 즉 어머니인 생명의 손가락이 닿았던, 끝내 아무도 알 수 없는 아킬레우스 건이 있는 법이다. 영웅이란, 정확하게 그곳을 뚫고(그가 속한 세계와 함께) 들어가, 그의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192]

세상에는 도처에 보살(존재와 본질이 대각에 이른 자)이 있고, 보살의 광명을 받고 있지만, 세상이 보살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살이 세상, 즉 연화를 들고 있다. 고통과 쾌락은 그를 구속하지 못한다. 그가 고통과 쾌락을 깊은 휴먼 상태로 구속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라고 하는 존재, 그의 형상, 혹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희망이다. [197]

세계는 서로 싸우는 무리들로 가득 차 있다. 이 모두가 토템, 국기, 그리고 집단의 숭배자들이다. 심지어는 기독교 국가라고 불리는 나라들도(<세계의> 구원자를 따르기는커녕) 지엄하신 그들의 주主가 가르친 에고, 에고의 세계, 그리고 에고의 종족 신의 정복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하기보다는, 식민지주의적 야만성과 너 죽고 나 죽자 식 전쟁의 선수로 역사에는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의 주는 이렇게 가르치지 않았던가? [205]

우리는 모두 보살 이미지의 그림자다. 우리 내부의 고통은 바로 저 신적인 존재다. 우리와 저 보호자인 아버지는 한몸이다. 이것은 구원의 통찰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우리 보호자인 어버지다. 그러니 이 무지하고, 유한하고, 자위적이고, 고통받는 육신이 다른 육신(적)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에도 그 적 또한 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도깨비는 우리 기를 꺾지만, 유능한 후보자인 영웅은<사나이답게> 입문한다. 보라, 그 도깨비가 바로 아버지였다. 우리는 그의 안에 있고, 그는 우리 안에 있다. [211]

어느 유학자가 불조법통佛祖法統의 28대 조사인 달마에게 “마음을 편케 해주십시오”하고 청했다 달마는, “좋아 그러마, 너의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하고 대답했다. 유학자는 “그게 문젭니다, 찾을 수가 없습니다”하고 말했다. 달마는, “너의 소원은 이루어졌다”고 했다. 유학자는 그 말귀를 알아먹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217]

육체의 불로불사를 구하는 것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눈동자를 크게해서 육체와 그 종자인 개성이 더 이상 시야를 가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로불사는 현실로서 체험된다. <그것이 여기에 있다. 그것이 여기에 있다>의 경지인 것이다. [248]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차례로 용을 쓰러뜨리고, 관문과 관문을 차례로 지남에 따라, 영웅이 고도로 갈망하는 신의 모습은 점점 커져, 이윽고 우주 전체에 가득 차게 된다. 영웅의 마음은 마침내 우주의 벽을 깨뜨리고 모든 형상(모든 상징, 모든 신성)의 경험을 초월하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변의 공에 대한 자각이다. [249]

저는 근심을 기쁨으로 잘못 알았습니다. 사막 위로 나타나는 신기루를 시원한 샘물로 알았습니다. 제가 기쁨을 잡으면 손 안에 남는 것은 고통뿐이었습니다. 왕의 권능, 지상의 소유, 부와 권력, 벗과 자식들, 아내와 추종자들 이 모든 존재는 제 오감을 홀렸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원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에게 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것이 되는 순간부터 이 모든 것들은 그 본성을 벗고 불길이 되었습니다. [256]

그러나 정상 상태로 깨어있는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심층에서 솟아난 지혜와, 속세에서 유용한 분별 사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이 존재한다. 그래서 미덕에서 득실 계산이 파생하고, 그 결과 인간의 존재는 타락한다. 순교는 성자나 하는 것이지만, 범인에게도 그들 나름대로 중요한 것은 있는 법인 바, 이런 것들을 들의 백합처럼 멋대로 자라게 버려둘 수는 없다. [281]

덧없는 만남과 헤어짐,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사랑의 고통이 아닌가. 한 영혼이 제 운명을 저주하고, 운명의 장난에 저항할 때 그의 고통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위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에 대응하는 것은 감정이 아닌 힘이다. 세계 도처에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런 이야기를 한 곳에 모아보면 일치하는 하나의 필연적인 공통분모가 엿보인다. [294]

신화란 신화는 이 한순간의 이야기속에 모두 들어있다. 예수는 안내자이며, 길이며, 초월적인 세계, 귀환의 동반자다. 제자들은 그의 비의 전수자들이다. 그러나 그 신비를 통달한 자들이 아니라, 두 세계를 일거에 수렴하는 역설적 체험으로 안내받는 자들이다. [298]

이제 의미는 분명해진다. 말하자면 이것은 모든 종교적 관행이 좇고 있는 바다.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 at-one-ment>, 즉 <자기 화해 self-atonement>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법은 그 안에서 거침새가 없다. [306]

원래 살던 오두막이나 성에서 떠난 신화 속 영웅은 꾐에 빠지거나 납치당하거나 자진해서 모험의 문턱에 이른다. 여기에서 영웅은 길을 안내할 그림자 같은 부정적인 존재를 만난다. 영웅은 이를 퇴치하거나 이 권능을 지닌 존재와 화해하여 산 채로 암흑의 왕국으로 들어가거나(골육상잔, 용과의 싸움,: 재물 헌납, 혹은 호부에 의지하여), 적대자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의절, 고난). 이 문턱을 넘어선 영웅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친숙한 힘에 이끌려 이 세계를 여행하는데, 경우에 따라 위협을 받기도 하고(시련),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기도 한다(조력자). 신화적인 영역의 바닥에 이르면 영웅은 절대한 시험을 당하고, 그 시험을 이긴 보상을 받는다. [316]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힐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왕성하게 살아 있는 이미지들은 옛날 다른 하늘 아래서 있었던 까마득한 사실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한 문화가 자기네 신화를 이런 식으로 번역할 때 그들의 삶은 고갈되고 그들의 사원은 박무관이 되며, 과거와 미래의 끈은 끊어지고 만다. 이러한 오류는 성경이나, 많은 기독교 의식에 대해서도 자행되어 왔다. [319]

한 처음의 우주는 인간의 형상을 한 자아self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내가 바로 그다(I am he)> 하고 소리쳤다. 여기에서 <나>라는 이름이 생겼다. 오늘날에도 누가 말을 건네오면 <응, 나>라는 말로 서두를 삼은 연후에야 자기가 만난 다른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355]

여기에 신화의 근본적인 모순, 즉 이중 초점의 모순이 있다. 우주 발생적 순화의 초기에 <신은 관여하지 않으나>, <신은 창조자이자 수호자이며 파괴자인>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가 여럿으로 나뉘는 이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운명은 <우연히> 그러나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근원적인 시각에서 보면, 세계는 존재하고, 폭발하고, 해소되는 형식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덧없는 피조물들이 경험하는 것은 전쟁 구호와 고통의 비명이다. 신화는 이 고뇌(시련)를 부정하지 않는다. 신화는 안으로, 뒤로, 그 주변으로 본질적인 평화(천상의 장미)를 거느리고 있다. [365]

강가에서 여자가 그에게 물었다. “저희들은 어떻게 되나요? 언제까지 살아있게 되나요? 저희 삶에는 끝이 없나요?” 그가 대답했다. “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구나. 어디 그럼 지금 그걸 정하도록 하자. 내 여기 있는 마른 들소 똥을 주워 강물에다 던지겠다. 만일 이 덩어리가 뜨면, 인간은 죽되 나흘 안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니까 나흘간만 죽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가라앉으면, 죽어도 되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것을 강물 위로 던졌다. 덩어리는 곧 물 위로 떠올랐다. 이번에는 여자가 돌멩이를 하나 주워들고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이 돌멩이를 던져 보겠습니다. 만일 이 돌멩이가 떠오르면, 우리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만, 가라앉으면 영원히 죽어 서로의 죽음을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 여자는 돌멩이를 던졌고, 돌멩이는 가라앉았다. 노인이 말했다. “그것 보아라, 네 운명을 네가 골랐다. 인간에겐 끝인 있을 것이다.” [368]

이러한 관점은, 영웅이란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지워진다는 관점과 일치한다. 이러한 관점은, 영웅의 전기와 그 고유한 성격과의 관계에 문제를 제기한다. 가령 예수는, 엄격한 고행과 명상으로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인간의 모습을 취한 하강한 신이라고 믿어질 수도 있다. 전자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은 예수와 같은 초월적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 그의 행적을 글자 그대로 흉내내는 수가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견해를 따를 경우, 예수라는 영웅은 글자 그대로 본이 되는 전형이라기보다는 묵상해야 할 하나의 상징이다.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400]

이러한 전절적인 전기들은 유형화한 유아기의 도피와 귀환의 주제를 상당히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이것은 또 모든 전설, 민화, 그리고 신화에서 두드러지는 양상이기도 하다. 학자들은 여기에다 심리학적 근거를 부여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문제의 영웅이 위대한 족장, 요술쟁이, 선지자, 혹은 위대한 존재의 화신일 경우, 기적은 얼마든지 일어난다. [404]

요약건대 이렇다. 문제의 숙명적인 아기는 기나긴 암흑의 기간을 견뎌야 했다. 이 기간은 극히 위험하고, 장애물이 많은 상황이며, 치욕을 당하는 기간이다. 그는 자기 내부로 깊이, 혹은 미지의 세계인 외부로 던져졌다. 어느 경우든 그를 당혹케 하는 것은 미지의 암흑이다. 이곳은 의외의 존재, 자비로운 동시에 심술궂은 존재의 영역이다. 천사가 나타나기도 하고, 아기를 도와주는 동물, 어부, 사냥꾼, 쪼그랑 할머니, 혹은 농부가 나타나기도 한다. 동물들 사이에서 자라거나, 혹은 지그프리트처럼 생명의 나무 뿌리를 파먹는 땅귀신 사이에서 자라거나, 혹 작은 방에서 혼자 자라면서 이 어린 세상의 신참자는, 헤아리고 이름 붙여질 수 있는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권능이 있음을 배운다. [410]

폭군은 자만한다. 그리고 자만은 폭군이 파멸하는 씨앗이다. 폭군은, 자기 힘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만한다. 따라서 그는 그림자를 본질로 오인하는 광대역을 맡고 있는 셈이다. 그 시대 본연의 모습의 근원인 암흑에서 다시 나타난 신화적 영웅은 폭군을 파멸로 몰아넣는 비밀을 알고 있다. 단추 하나 누르는듯한, 참으로 간단한 몸짓으로 그는 이 무서운 형상을 지워버린다. 영웅의 행적은 순간의 결정화에 대한 끊임없는 파괴 행위다. 이야기는 순환한다. 신화의 초점은 발전하는 단계에 모인다. 변모, 유동성, 일정하지 않은 무게는, 살아 있는 신의 특징이다. 한 시대의 형상은 부서지고, 토막나고, 이을고 흩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요건대 도깨비-폭군은 불길한 사상(事象)의 옹호자이며, 영웅은 창조적인 삶의 옹호자다. [422]

이 다채로운 쿠훌린의 모험에서, 가장 웅변적이고 가장 극적인 것은, 바퀴와 사과가 구르면서 영웅에게 내어주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길이다. 이것은 운명적인 기적의 상징이며 교훈으로 해독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에 대한 감상에 현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 본서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니체의 말을 빌리면<스스로 구르는 바퀴>인 사람) 앞으로는 어려움이 비켜나고 뜻밖에 탄탄대로가 나타나는 법이다. [431]

그러나 최고의 영웅이란 우주 발생적 순환의 원동력을 추진시키는 영웅이 아니라, 눈을 다시 뜨고서 오고 가며 기쁨과 고뇌가 교차되는 세계의 파노라마를 통해 하나의 실재가 다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깨치는 영웅이다. 이러한 영웅이 되려면 보다 깊은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심장한 개념 작용의 결과로 나타난다. [432]

이제 이렇게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 영웅의 임무는, 아버지(용, 시험자, 무섭고 잔인한 왕)의 부정적인 측면을 살해하고, 우주의 자양이 될 생명의 에너지를 그 둘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과업은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서도 성취될 수 있고, 그 의지를 거스르고도 성취될 수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아니 어쩌면 신이, 그에게 스스로 자식을 위한 제물이 되라는 의지를 심어주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역설적인 논리가 아니라 한 이야기, 같은 이야기를 다른 방법으로 한 것일 뿐이다. 실제로, 용의 살해자와 용, 제관과 제물은, 뒤집어 보면 결국 하나다. 이 하나인 세계에서는, 대립물의 양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과 거인이 끊임없이 사우는 세계는 이쪽 세계인 것이다. 어쨌든 용(아버지)은 어디에든 있다. 소산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치 탈환으로 늘어만 간다. 용(아버지)은 우리 삶이 걸린, 죽음이다. <죽음은 하나인가, 여럿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그가 거기에 있는 한 그는 하나지만, 여기 자식들 안에 있을때는 여럿이다.’ [441]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고, 엄격하게 자아를 통제하고, 소리와 빛과 맛 같은 색에 집착하지 않고, 애증을 버리고, 고독안에서 살고, 소식하고, 말과 몸과 마음을 삼가고, 명상과 정신집중에 전심하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힘쓰고, 이기심과 권세, 자만심과 색욕, 분노와 편견을 떨치고, 마음 안에서 정일을 얻고,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사람, 이런 사람은 능히 불멸의 존재에 값하는 사람이라 일러 무장하다. [443]

축복받은 자는 첫 번째 무아에 이른다. 첫 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두 번째 무아로 들어간다. 두 번째 무아에서 일어나 그는 세 번째 무아로 들어간다. 세 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네 번째 무아로 들어간다. 네 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무한 의식의 역역으로 들어간다. 무한 공간의 영역에서 일어난 그는 무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무의 역역에서 일어난 그는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영역으로 들어간다.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닌 영역에서 일어난 그는 지각과 감각의 휴식 상태에 이른다. [456]

놀란 만한 권능을 가진 막강한 영웅(손가락으로 고바르단 산을 들어올리 수 있고, 자기 몸을 우주의 엄청난 영광으로 채울 수도 있는)은 바로 우리들 개개인이다. 거울에 비추어볼 수 있는 육체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에 내재하는 왕으로서다. 크리슈나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모든 피조물의 가슴안에 있는 실재다. 나는 모든 존재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 [458]

신화 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 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서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한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갈침의 보고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 했다. 갖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보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478]

삶의 양태에서, 개인은 전체 이미지의 단편이며 일그러진 형상일 수밖에 없다. 개인은 남성으로서, 혹은 여성으로서 제약을 받고 있다. 주어진 수명의 한도내에서 개인은 다시 유아로서, 청년으로서, 성인으로서, 노인으로서의 제약을 받는다. 더구나 살면서 맡는 역할상 개인은 다시 기술자, 상인, 하인, 혹은 도둑, 성직자, 지도자, 아내, 수녀, 혹은 매춘부로 전문화한다. 개인은 이 모두일 수가 없다. 따라서 개인의 전체성은, 개별적인 구성 인자로서가 아닌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 개인은 한 구성요소일 수 있을 뿐이다. 개인은 이 집단으로부터 삶의 기술, 사유의 바탕인 언어, 삶의 자양인 이상을 빚졌다. 그의 육체를 이루는 유전자도 그 사회의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개인이 실제든, 상상이나 느낌을 통해서든, 그 사회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킨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과의 절연을 의미할 뿐이다. [479]

이러한 명상을 통해 입문자는 자기의 심층에 이르고, 마침내 그 껍질을 뚫고 엄청난 자각에 이른다. 그런 경지에서는 되돌아나올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런 경지에서 미합중국, 어디어디에 사는 모모씨라는 자기 자신을 위대한 인간으로 발견한 아무개씨는 내성적이며 초연한 인간이 된다. [482]

오늘날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세계적 종교도 일반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 이러한 종교들도, 선전과 자화자찬의 도구로서, 갖가지 도당짓기의 요인과 결탁하고 있기 때문이다.(심지어는 불교까지도 최근 들어 서구 학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러한 타락의 길을 걷고 있다). 세속적인 국가의 보편적인 승리는 모든 종교 조직을 부수적인, 필경은 무익한 위치로 끌어내려, 오늘날에는 종교적 무언극이 일요일 아침에 벌이는, 경건한 체하는 종교 놀음에서 더도 덜도 아니게 되고 말았다. [485]

오늘날에는 이 모든 비의가 힘을 잃었다. 이 비의의 상징은 이제 더 이상 우리 심성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한다. 모든 존재가 섬기고, 인간 자신도 그 앞에서 무릎을 꿇어 마땅한 우주적 법칙이라는 관념도 고대 점성술에 나타난 초보족인 상징의 무대로 넘어간지 오래며, 이제는 물리적인 용어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다. 서양 학문의 , 하늘에서 땅으로의 하강(17세기 천문학에서 19세기 생물학으로의),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 집중(20세기 문화 인류학과 심리학에서의)은, 인간의 경이라는 초점의 놀라운 이동로를 닦았다. 동물의 세계도 아니고, 식물의 세계도 아니고, 천체의 기적도 아닌, 이제는 오직 인간만이 결정적인 수수께끼다. 인간은 아득한 존재와 더불어 끝나야 하고, 이 아득한 존재를 통해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해야 하며, 이 사회의 이미지 전체가 개선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러나 <내>가 아닌 <너>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종족, 민족, 대륙, 사회적인 지위, 혹은 세기의 이상과 세속적 관습도 우리 모두의 내부에 살아있는 불멸의, 놀라운 신적인 존재의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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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4.14 09:16:14 *.244.220.254
캠벨에 대한 이해가 쉽지않은 것은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그래도 어려움에 대해 고사성어로 표현하는 것은 인상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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