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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4일 10시 08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 조셉 켐벨(JOSEPH CAMPBELL)

< 신은 죽었다 >

망원경과 현미경에 의한 탐색으로 신들은 숨을 곳이 없어졌다.
한때 신들이 섬김을 받던, 그런 사회도 이제는 없다.
우리 사회의 기본조직은 종교적(또는 신적) 이기 보다는 경제적, 정치적 조직으로 변했다.
이렇게 되면서 인간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어떤 동인(動因)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어떻게 사는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조셉 켐벨은 「신화」를 통해서 이 해답을 찾는다.

그는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우연히 접하게 된 아메리카 인디언에 빠져들어 인디언 신화를 읽게 된다. 인디언 신화의 내용 중에 어릴 때 수녀님에게 들었던 창세, 사망과 부활, 승천, 처녀 수태 등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신화에 푹 빠져들게 된다. 그 이후 힌두교에도, 중세 아더왕 이야기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평생을 신화학 연구에 바치게 된다.

1925년과 1927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였다. 1934 년부터 38년간 사라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에서 학생들에게 신화를 가르쳤다.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와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신의 가면(THE MASKS OF GOD)〉(전 4권)을 펴냈다. 프린스턴 대학 볼링겐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도 유명하며, <천의 얼굴올 가진 영웅>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신화 이미지> 등의 저서를 통해 왕성한 지적 연구 활동을 펼치다 1987년 세상을 떠났다.

저자는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라고 생각된다. 저자 이전에 신화학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르겠지만, “민담과 인류학에 나오는 해골에 생명을 불어넣은 사람”, 20세기 최고의 신화해설가로 불리워 지는 것으로 보거나, 신화 관련 베스트셀러를 저술하고 TV 대담프로를 통해 신화가 일반 대중에게 한층 가까이 다가 갈수 있도록 만든 것 등으로 신화학에 새로운 지평을 연 위대한 스승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과찬인가?

그는 신화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한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 것 같다. 그는 스스로를 잡학가(雜學家)라고 얘기 한다. 요즘은 학문 간의 통합 연구가 보편적인 트랜드가 되었지만 저자가 활동한 30-70년대에는 그런 경향이 일반적이지 않았을 듯싶다. 자신이 좋아하는 신화 연구를 위해 혼자서 뭔가를 이룩해야 한다면, 한 우물을 깊이 파고들어 박사학위를 취득해야 할지, 아니면 여러 분야에 걸친 다방면의 공부를 해야 할 지를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저자는 박사학위 취득도 마다하고 문화인류학, 철학, 역사, 예술, 종교 등 스스로 칭하는 ‘잡학’을 두루 공부하여 일반인들에게 신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부여한다.

그는 변화(경영) 컨설턴트이다. 그가 이야기 하는 것은 결국 신화를 통한 개인과 사회의 변화의 필요성이다. 비신화화(非神話化)한 세계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이 왜 신화를 알아야 하는지, 어떻게 신화를 알아가야 할지, 결국 이를 통해서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어 나가야 할지를 그는 이야기 한다.

개인적으로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열 살 나이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 평생 그 분야를 공부하며 살았다는 점, 그의 표현대로 천복을 좇으며 한 평생을 살았으니 그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겠나? 더구나 그의 책에서 보여 지는 신화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열정은 80 고령이라고 보기에 참으로 놀랍다. 그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건 자기의 인생을 고집스럽게 자기식대로 살아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화를 사랑하면서 끈기와 집념으로 살아간 그의 인생에서 시대를 앞서서 살아간 영웅의 면모를 힐끗 엿 본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머리말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옛 현자들은 말을 하되 언외(言外)의 뜻을 거기에다 실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따라서 그분들의 상징적 언어를 거듭 읽되 그 가르침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상징의 문법을 터득해야 할 터인데, 저자가 알기로는 이 문을 여는 열쇠로 정신분석학만한 현대적 길잡이는 따로 없을 듯하다. 이 말을 금과옥조로 삼지 않고는 정신분석학의 안내를 받기 어렵다.[6]

다음 단계는, 세계 각처에서 채집된 신화와 민간 전설을 한곳에 모아놓고 상징으로 하여금 스스로 입을 열게 하는 일일 듯하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면 그 유사성이 한눈에 두드러져 보이고,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오랜 세월 삶의 길잡이로 삼아온, 방대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일정한 상태로 보존된, 바탕되는 진리와 만나게 된다.[6]

이 책이 다루는 것은 상사성이지 상이성이 아니다. 이런 상사성을 이해하면 상이성은 일반적으로(그리고 정치적으로) 믿어지는 정도만큼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리라 믿는다. 저자가 바라기로는, 이러한 저자의 비교 해석이 이 세계의 통합을 결실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해, 종교적 혹은 정치적 제국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 경은,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 고 했다.[6]

프롤로그 원질신화

1. 신화의 꿈

놀라운 것은, 심원한 창조적 중심을 촉발하고 고무하는 특징적인 효과가 아이들 놀이방에서 굴러다니는 하찮은 동화책에도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한 방울의 바닷물이 바다의 본질을 고스란히 대표하고, 하나의 벼룩 알에 생명의 신비가 두루 깃들여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이는 신화학의 상징은 꾸며낸 것도 아니고 누가 있으라고 해서 있을 수도, 발명될 수도, 억압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14]

최신형 오이디포스의 화신, 미녀와 야수의 속편이 오늘 오후에도 뉴욕의 42번가와 50번가 모퉁이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15]

참으로 놀라운 것은, 상당수의 제의적 시련과 이미지가, 정신분석을 의뢰한 환자가 유아기 고착 상태를 떨치고 미래를 향해 발돋움을 시작하는 순간 꿈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22]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23]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저작에서 인간이 사는 삶의 순환 주기 중 전반부의 통과와 그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의 태양이 천정점(天頂點)으로 떠오르고 있는 시기인 유아기와 사춘기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C. G. 융은 후반부의 위기를 강조했다..... 우리의 욕망과 공포의 정상적인 상징이 인생의 오후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는 반대되는 것으로 전화(轉化)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시기에 도전해 오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인간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궁이 아니라 남근 phallus이다.... 우리는 자궁이라는 이름의 무덤 tomb of the womb에서 무덤이라는 이름의 자궁 womb of the tomb까지 완전한 순환주기를 산다..... 나 개인을 괴롭혔던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모험에의 두려움을 돌이켜볼 때, 결국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유사 이래 이 세계 방방 곡곡, 그리고 문명의 갖가지 위장 아래서 남녀가 더불어 경험한 일련의 상투적인 변신 이야기 일 뿐이다.[25]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29]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든 인류에게 직접 뚜렷이 제시되는 데 견주어,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33]

다이달로스는 아리아드네에게 실을 한 타래 준다. 미궁으로 들어가는 영웅이 한 끝을 미궁의 입구에다 매어놓고 들어가면서 풀어야 하는 실타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란 이 얼마나 하찮은 물건인가! 그러나 이나마 없으면 미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 희망도 없는 모험과 다름없는 것이 아닌가. 재미있는 것은 죄 많은 왕을 섬기는 바로 이 장인이, 미궁의 공포를 연출한 장본인인 동시에 자유라는 이름의 목적을 달성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영웅은 우리로부터 먼 데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수세기 동안 다이달로스는 장인 및 과학자, 기이할 정도로 냉담하고, 거의 악마적인 현상의 상징, 사회정의의 정상적인 경계를 넘어 자기 시대의 도덕률이 아닌, 자기 예술의 도덕률에만 봉사하는 인간 유형을 대표해 왔다. 그는 단순하고, 용기에 차 있으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영웅이다.[38]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그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 안나카레니나 서두>[39]

행복한 가정이 다 그렇듯이, 소생한 신화와 세계는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44]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즉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다. 이 양식은 원질신화(原質神話, monomyth)의 핵심 nuclear unit라고 할 수 있다.
즉,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45]

해지기 전에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정복자는 초저녁에 자기의 전생을 알았고, 한밤중에는 사물을 두루 꿰뚫는 혜안을 얻었으며, 새벽녘에는 인과(因果)를 깨쳤다. 그는 날샐 무렵에 완전한 정각을 얻었던 것이다.<싯타르타>[47]

중요한 것은 Buddhahood, 즉 정각은 말로써는 전할 수 없고(不立文字) 오직 정각에의 방법 Way만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름과 형태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진리의 불립 문자 교리는, 플라톤 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양 전통의 근간을 이룬다. 과학의 진리는 관찰할 수 있는 사실에 근거해서 논리적으로 세워진 논증할 수 있는 가설이기 때문에 전달이 가능하지만 제의, 신화, 그리고 형이상학은 초월적인 조명 가까이까지 인도받는 것은 가능하나 거기에 접근하는 마지막 단계는 개인의 조용한 체험으로써만 가능하다. 따라서 산스크리트어에서는 현자를 Muni, 즉 <조용한 자>라고 한다. Sakyamuni(고타마 부처의 다른 이름)는, 란 뜻이다. 부처가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종교를 세웠지만 그 가르침의 궁극적인 요체는 침묵 속에서만 전수된다.[48]

대개 동화 속의 영웅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소우주적 승리를 거두고, 신화의 영웅은 세계사적, 대우주적 승리를 거두는게 보통이다.[52]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神的)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왕의 아들>이고 그는 이로써 자기의 실제적 권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영웅은, 우리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肉化)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이다.[54]

영웅의 성공적인 모험의 의미는, 생명의 흐름을 풀어 다시 한번 세계의 몸 속으로 흘러들게 하는 데 있다.[55]

신의 화신으로서의 영웅은, 영원의 에너지가 시간성 안으로 흘러드는 배꼽, 즉 세계의 배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연속적인 창조의 상징, 모든 사물 안에서 약동하는 소생의 연속적인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세계 보존의 신비인 것이다.[58]

한 문화가 신화 안에서 인간 존재의 면면이나 그 문화의 면면을 키워나갈 때, 그 문화는 상징적인 암시와 함께 싱싱하게 살아난다.[60]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도처에 있다. 그리고 이곳은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세상의 하고 많은 선과 악을 두루 산출한다. 추한 것, 아름다운 것, 죄악과 미덕, 쾌락과 고통이 모두 이 세계의 배꼽의 공평한 산물이다.[54]

도덕 군자가 의분을 금치 못할 대목에서, 비극 서사시인이 연민과 공포를 동시에 느낄 대목에서, 신화는 장엄하고 무시무시한 신곡(神曲)을 향해 온전한 모습으로 피어난다. 신화의 제신(諸神)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 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 즉 창조자의 무자비함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이 무자비함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통에 의해서는 손상되지 않는 끈질긴 힘의 그림자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언질로 균형을 회복한다. 요컨대 제때에 나고 죽는, 자기중심적이며 투쟁하는 자아를 응시하는 탁월한 정체불명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65]

제1부 영웅의 모험

제1장 출발

꿈에서든, 신화에서든 갑자기 한 사람 생애의 새로운 시대, 새로운 단계를 암시하면서 이런 모험에 등장하는 인물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분위기를 갖는다.[77]

이 신화적 여행의 첫 단계(우리는 이를 <모험에의 소명>으로 불렀다)는, 운명이 영웅을 불렀고, 영웅의 영적 중심(重心)이 그가 속한 사회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암시하고 있다.[80]

이 책의 말미에 이르면, 독자 여러분은 방대한 양의 신화를 읽게 될 것이다. 독자는 모든 신화가 각 원질 신화를 인증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싶겠지만 필자가 바라기로는, 각주에 실린 책들을 일별하면서, 방대한 이야기 중의 일부를 한가하게 들겨주었으면 한다.[80]

소명에의 거부는, 모험을 부정적이게 한다. 타성이나, 힘에 겨운 일, 혹은 <문화>의 장벽 때문에, 모험의 주체는 의미 심장한 긍정적인 행동력을 잃고,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리는 것이다.[81]

너희는 불러도 들은 체도 않고,
손을 내밀어도 아랑곳하지 않는구나.....
너희가 참변을 당할 때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운 일이 닥칠 때 내가 비웃으리라.
두려움이 태풍처럼 덮치고,
참변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기막히고 답답한 일이 들이닥치면,
그제야 너희들은 나를 부를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나에게 등을 돌렸다가 파멸하고,
미련한 자들은 마음을 놓았다가 나동그라진다.<「잠언」>[81]

소명을 거부하지 않은 모험 당사자는 영웅적인 편력 도중 첫 번째 보호자를 만난다. 노파나 노인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 보호자는 모험 당사자가 곧 만나게 되는 용과 맞설 호부(護符)를 준다.[93]

나는, 미지의 종국으로 떠밀리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내가 그곳에 이르는 순간, 내가 불필요하게 되는 순간, 나를 갈가리 찢는 데는 한 입자의 원자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인류가 힘을 모두 합치더라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나폴레옹, 러시아 원정에 즈음하여>[97]

자신을 안내하고 자신을 도와줄 운명을 인격화함으로써 영웅은 모험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이윽고 한 단계 어려운 영역의 입구에서 <관문의 수호자>를 만나기에 이른다..... 이 수호자 뒤로는 어둠이며, 미지의 세계이며, 위험이다..... 보통 사람이면 여기에서 만족한다. 심지어는 표시된 경계선 안에 안주하는 데 만족하기까지 한다. 집단의 보편적 믿음이, 미지의 땅으로 첫 발을 내딛으려 하는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105]

모험이란 기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든, 어느 시대든 마찬가지다. 이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극히 위험한 존재다.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 부담을 안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앞에서는 위험은 그 꼬리를 감추고 만다.[112]

제2장 입문

일단 관문을 통과한 영웅은 기묘할 정도로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웅은 이곳에서 거듭되는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와 모험에서 가장 흥미롭게 다루는 부분도 바로 이 국면이다. 영웅은 거듭나는 데 필요한 충고와 호부(액막이), 그리고 이 영역에 이르기 전에 만났던 초자연적인 조력자의 밀사로부터 도움을 받는다.[128]

우리의 선조들이 신화적 종교적 유산의 상징적 정신적 의식에 힘입어 극복해 왔던 심리학적 위험들을 오늘날 우리가(비신자인 경우, 아니면 신자라고 하더라도 계승받은 믿음으로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납득할 수 없을 경우) 혼자서 혹은 시험적, 즉흥적으로, 더러는 도움이 될 만한 지침도 없이 맞서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모든 신들과 악마들의 존재를 이성의 이름으로 부정한 <개화된> 현대인인 우리가 알고 있는 문제다.[139]

하늘은 우리를 위해 물리학자의 우주 공간이 되어주었고, 신이 사는 천상계는 과거지사를 돌이켜보는 추억의 장(場)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마음은 자라고> 은밀한 불안은 우리 존재의 뿌리를 갉아먹고 있다.[139]

이 분은 존재의 구렁텅이에 빠져 고통받고 있는 모든 지각 있는 중생을 가엾게 여긴다고 해서 관세음보살, 즉 <대자대비로 굽어보시는 주(主)>라고 불린다.[195]

소승 불교는 부처를 인간적인 영웅, 대성인, 그리고 현자로 모신다. 그러나 대승 불교(북방 불교)에서는 부처를 구세주인 대각자(大覺者), 우주적인 정각(正覺) 원리의 화신(化身)으로 파악한다.
보살은, 불성(佛性)의 경계에 든 귀인(貴人)이다. 소승 불교의 견해에 따르면, 환생하면 부처가 될 대성(大聖)이고, 대승 불교의 견해에 따르면, 우주적인 대자 대비의 원리를 표상하는 일종의 구세주다. 산스크리트어의 <보살>은 <존재와 본질이 정각에 이른 자>란 뜻이다.[196]

세계는 서로 싸우는 무리들로 가득 차 있다. 이 모두가 토템, 국기, 그리고 집단의 숭배자들이다. 심지어는 기독교 국가라고 불리는 나라들도(<세계의> 구원자를 따르기는 커녕) 지엄하신 그들의 주(主)가 가르친 에고, 에고의 세계, 그리고 에고의 종족 신의 정복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하기보다는, 식민지주의적 야만성과, 너 죽고 나 죽자 식 전쟁의 선수로 역사에는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의 주는 이렇게 가르치지 않았던가?[206]

어느 유학자가 불조법통(佛祖法統)의 28대 조사(祖師)인 달마에게 「마음을 편케 해주십시오」 하고 청했다. 달마는,
“좋아, 그러마, 너의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고 대답하였다. 유학자는,
“그게 문젭니다.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달마는,
“너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고 했다.
유학자는 그 말귀를 알아먹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다.[217]

두 세계, 곧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삶과 죽음, 밤과 낮처럼 서로 다르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영웅은 우리가 아는 세계에서 암흑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기꺼이 이 일을 맡든, 어쩔 수 없어서 맡게 되든, 우리가 영웅의 행위를 이해하자면 이 잊혀진 부분의 탐험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상 생활에서 중요하게 보이던 두 세계의 가치나 차이는, 지금까지 전혀 다른 것으로 인식하던 <타자>와 <자아>를 동화시키는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281]

<때로는 바보로, 때로는 현자로, 때로는 왕관에 미친 자로, 때로는 방랑자로, 때로는 예언자처럼 부동(不動)하는 존재로, 때로는 자비로운 얼굴로, 때로는 귀인(貴人)으로, 때로는 폐덕자로, 때로는 무명인으로..... 깨달은 자는 이런 상태에서도 지복의 극락을 산다. 무대 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배우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불멸의 지혜를 깨친 자는 늘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307]

영웅이 불가사의한 여행을 끝내고 귀환한 결과는, 과연 무엇인가?[307]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 데 있다.[307]

영웅의 모험은 앞의 도표로 요약될 수 있다.


===========< 그림 도표를 꼭 넣고 싶었는데, 잘 않되네요 >=============

<

관문 통과 모험에의 소명 선약(仙藥)
골육상잔
용과의 싸움 조력자 귀환
사지 절단 모험의 관문(문턱) 부활
고난 구조
피난 관문에서의 시련
야간 항해 시련
불가사의한 여행 도망
고래의 배 조력자들
>

1 신성한 결혼
2 아버지와의 화해
3 신격화
4 선약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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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살던 오두막이나 성에서 떠난 신화 속 영웅은 꾐에 빠지거나, 납치당하거나 자진해서 모험의 문턱에 이른다. 여기에서 영웅은 길을 안내할 그림자 같은 부정적인 존재를 만난다. 영웅은 이를 퇴치하거나 이 권능을 지닌 존재와 화해하여 산 채로 암흑의 왕국으로 들어가거나(골육상잔, 용과의 싸움: 제물 헌납, 혹은 호부에 의지하여), 적대자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의절, 고난). 이 문턱을 넘어선 영웅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친숙한 힘에 이끌려 이 세계를 여행하는데, 경우에 따라 위협을 받기도 하고(시련),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기도 한다.(조력자) 신화적인 영역의 바닥에 다다르면, 영웅은 절대(絶大)한 시험을 당하고, 그 시험을 이긴 보상을 받는다. 이 승리는 세계의 어머니인 여신과의 성적 결합(신성한 결혼), 창조자인 아버지에 의한 인정(아버지와의 화해), 그 자신의 신격화(神格化), 혹은 적대적인 능력이 그의 힘에 벅찰 경우에는 전리품의 가로채기(신부 훔치기, 불 훔치기)로 나타난다. 원래 이 승리는 자기 의식의 확장이며, 존재와의 합일이다.(깨달음, 변모, 자유) 마지막 단계는, 귀환이다. 영웅이 그 권능의 축복을 받은 경우 전리품은 영웅을 보호한다(使者). 그렇지 못할 경우, 영웅은 도망치고, 부정적인 세력의 추격을 받는다(모습을 바꾸며 도주하기, 장애물을 피하며 도주하기). 귀환의 관문에서 초월적인 권능의 소유자는 뒤에 남아야 한다. 영웅은 혼자서 그 무서운 왕국애서 귀환한다(귀환, 부활). 그가 가져온 전리품(홍익)은 세상을 구원한다(불사약).[316]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힐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한 문화가 자기네 신화를 이런 식으로 번역할 때 그들의 삶은 고갈되고 그들의 사원은 박물관이 되며, 과거와 미래의 끈은 끊어지고 만다..... 이러한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만이 빈사 상태에 빠진 성화(聖畵)는 그 영원한 인간적인 의미를 다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320]

신화적 상징은 그 함축적인 의미 그대로 계승되어야 한다. 즉 수천 년에 걸친 영혼의 모험을 유추에 의해 표상해 온 만큼 그 대응 관계의 전 체계를 섣불리 펼쳐보이기 이전에 그것이 지닌 모든 함축적 의미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322]

제2부 우주발생적 순환

우주 발생적 순환에 의해 설명되는 철학적 공식이란, 존재의 세 단계를 통한 의식의 순환을 말한다. 그 첫 단계는 깨어나는 체험의 단계, 즉 태양의 조명을 받고, 만물에 공통된 외계 우주의 험난하고 총체적인 사실들을 인식하는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는 꿈 체험의 단계, 즉 꿈을 꾸는 당사자와는 본질상 동일한 개인적 내부 세계의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를 인식하는 단계다. 세 번째 단계는 깊은 잠에 빠지는 단계, 꿈을 꾸지 않는 지복의 단계다. 첫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삶의 교훈적인 체험과 만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소화되어 꿈을 꾸는 당사자의 내적인 힘에 동화되며, 세 번째 단계에서는, 내부적 통제자가 들어앉은 방 안, 모든 것의 근원이자 끝인 상태, 즉 <마음속에 있는 공간> 안에서 모든 것을 즐기고 의식할 수 있게 된다.[338]


===========< 이 그림도 꼭 넣고 싶었는데, 잘 않되네요 >============


각 성


발 산 꿈 용 해

숙면(깊은 잠)


===================================================================


에필로그

신화 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寶庫)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 갖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 보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478]

삶의 양태에서, 개인은 인간의 전체 이미지의 단편이며 일그러진 형상일 수밖에 없다. 개인은 남성으로서, 혹은 여성으로서 제약을 받고 있다. 주어진 수명의 한도내에서 개인은 다시 유아로서, 청년으로서, 성인으로서, 노인으로서의 제약을 받는다. 더구나 살면서 맡는 역할상 개인은 다시 기술자, 상인, 하인, 혹은 도둑, 성직자, 지도자, 아내, 수녀, 혹은 매춘부로 전문화한다. 개인은 이 모두일 수가 없다. 따라서 개인의 전체성은, 개별적인 구성 인자로서가 아닌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 개인은 한 구성 요소일 수 있을 뿐이다. 개인은 이 집단으로부터 삶의 기술, 사유의 바탕인 언어, 삶의 자양인 이상을 빚졌다. 그의 육체를 이루는 유전자도 그 사회의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개인이 실제든, 상상이나 느낌을 통해서든, 그 사회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킨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과의 절연을 의미할 뿐이다.[479]

출생, 세례, 결혼, 장례, 취임 등의 종족적인 제의는, 개인의 삶의 위기 및 행위를 표준적이고 비개인적 형식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제의는 개인의 정체를 그 자신에게 보여준다. 인격체로서의 개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사로서, 신부로서, 과부로서, 성직자로서, 추장으로서의 개인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제의를 통하여, 개인이 속하는 사회는 원형적 무대에서 옛 현인의 가르침을 시연(試演)할 수 있다. 모든 구성원이 자기 지위의 기능에 따라 이 제의에 참가한다. 전체 사회는 이 제의를 통하여 마모되지 않은, 살아 있는 단위로 참가자들의 눈앞에 전개된다. 살아 있는 몸 안에서 무명의 세포가 사라지듯이, 개인이 속한 세대는 사라지고, 시간을 초월한 형상만 남는다. 이러한 초개인(super individual)을 수렴하려는 비전의 확대를 통해, 개인은 이전보다 더 고상해지고, 풍부해졌으며, 또 충분한 보호를 받고 있다.[479]

사회적인 의미를 통해 개인은 축제를 정상적, 일상의 생존으로 수렴할 것을 배운다. 이로써 개인의 정체가 확인된다. 거꾸로 말하면 무관심과 반항(혹은 도피)은 개인과 사회를 단절시킨다. 사회라는 단위에서 불 때 그 단위에서 단절된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쓰레기다. 남자든 여자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역할(성직자든, 매춘부든, 여왕이든, 노예든)에 충실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동사를 쓸 자격이 있는 인간이다.[480]

진정으로 종교적인(순전한 주술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제의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피할 길 없는 운명에 순종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동기는 계절적 축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겨울이 오는 것을 막겠다는 부족적 의식이 전해진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모든 의식은, 자연의 휴식과 더불어 오는 이 혹한의 계절을 견디어낼 수 있도록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준비를 촉구한다.[480]

성별, 연령별, 직업별 차이는, 우리 인간의 특질상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어느 단계에서 우리가 한동안 입고 있는 옷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부에 있는 인간의 이미지는 의상과 아무 상관도 없다..... 우리의 핵은 무엇일까? 우리라고 하는 존재의 기본적인 성격이란 어떤 것일까?[482]

중세의 성자들 및 인도의 요기들의 고행, 헬레니즘 문화의 비의(비의), 고대 동양과 서양의 철학은, 개인의 의식적인 관심을 그 외부적 의상에서 돌리는 기술이다. 명상에 드는 입문자는 준비 작업으로서 자기 마음과 정신을 세속적인 사건에서 분리시키고, 자신을 존재의 핵으로 몰고 간다.[482]

이러한 명상을 통해 입문자는 자기의 심층에 이르고, 마침내 그 껍질을 뚫고 엄청난 자각에 이른다. 그런 경지에서는 되돌아나올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런 경지에서 미합중국, 어디어디에 사는 모모씨라는 자기 자신을 대견하게 여길 사람도 없다. 요컨대 사회와 의무는 분리된다. 자기 자신을 위대한 인간으로 발견한 아무개 씨는 내성적이며 초연한 인간이 된다.[482]

목표는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즉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이 단계가 끝나면 입문자는 본질 자체처럼, 고삐에서 풀려나 세상을 떠돌게 된다. 뿐인가? 세계라는 것 역시 그 본질이다. 개인의 본질, 세계의 본질..... 이 둘은 하나다. 이때부터 은거, 은둔은 필요없다. 영웅이 어디를 떠돌든, 그가 무슨 짓을 하건 그는 자기의 본질적 실재에 머문다. 그에겐 세상을 보는, 완전성에 이른 눈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엔 분리 및 은둔이 있을 수 없다. 사회적 참여가 결국에는 개인의 내부에 있는 전체를 깨닫게 하듯이 추방으로 인한 유랑이 영웅을 전체에 내재하는 자아에 이르게 한 것이다.[483]

이 표적의 중심에 이르면, 이기주의나 이타주의의 문제는 사라진다. 개인은 율법 안에서 자기를 잃고, 우주의 전적인 의미와 동일하게 재생한 것이다. 세계는 그를 위해, 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신은 이렇게 말했다.
「오 모하메드여, 네가 없으면, 내 저 하늘도 만들지 않았으리라」[483]

그러나 모든 것은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요원하다.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개인의 민주적 이상, 동력으로 움직이는 기계의 발명, 과학적인 연구 방법의 발달이 인간의 삶을 변형시킨 나머지 저 유서 깊은,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상징의 우주는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토해 낸 신기원을 예고하는 숙명적인 선언처럼, <신들은 모두 죽은> 것이다.[483]

오늘날에 이루어져야 하는 영웅의 업적은, 갈릴레오의 세기에 이루어졌던 업적이 아니다. 그때는 암흑 시대였지만 지금은 광명의 시대다. 그러나 빛이 있었던 곳이 지금은 어둠에 싸여 있다. 현대의 영웅의 위업은 영혼이 균형을 이루고 있던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대륙의 불을 다시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485]

오늘날의 사회는 지구지, 경계선에 갇힌 국가가 아니다..... 토템의 깃발을 날리는 국가 개념은, 유아기의 상황을 지우기는커녕 유아적 자아를 강화, 확대시키고 있다. 한 국가가 열병식장에서 벌이는 얼치기 제의는 신(이기주의는 이 신을 통해 제거된다)이 아닌, 포악한 용(龍)인, 압제자를 섬긴다. 그리고 수많은 반제의(反祭儀)의 성자들 - 국기로 장식된 채 곳곳에 나붙어 공식적인 성화(聖畵)로 채택된 이른바 애국자들 - 이야말로, 영웅이 극복해야 하는 첫 번째 시련인, 관문의 문지기(우리의 끈끈이 터럭 악마)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485]

오늘날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세계적 종교도 일반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 이러한 종교들도, 선전과 자화자찬의 도구로서, 갖가지 도당짓기의 요인과 결탁하고 있기 때문이다(심지어는 불교까지도 최근 들어 서구 학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러한 타락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한 가짜 신앙은 제대로 기능하는 세계에는 필요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보다 필요한 것은 전체 사회 질서의 진화다. 그래야 세속적인 삶의 의무와 행위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실제로 내재하고 또 그만큼 효과적인, 보편적인 신인(神人)의 이미지에 생명력을 부여하여, 이를 의식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486]

그런데 이 일은 의식(意識) 자체가 해낼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의식은 오늘 밤의 꿈을 통제할 수도 예언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상징을 발명할 수도, 예언할 수도 없다.[486]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상징이 보이게 됨에 따라, 이 상징이 지구의 갖가지 요소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한 민족 특유의 생활 환경, 인종, 그리고 전통이 유효한 형식으로 화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갖가지 상징을 통해 동일한 구원이 계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고, 또 알아야 한다. 『베다』의 말씀처럼,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 즉 하나의 노래가 인간이라는 합창대의 갖가지 음색으로 들리는 것이다..... 인간이 되려면,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인간의 얼굴로 바뀌어 있는 신의 얼굴을 알아보아야 한다.[486]

오늘날에는 이 모든 비의가 그 힘을 잃었다. 이 비의의 상징은 이제 더 이상 우리 심성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한다. 모든 존재가 섬기고, 인간 자신도 그 앞에서 무릎을 꿇어 마땅한 우주적 법칙이라는 관념도 고대 점성술에 나타난 초보적인 상징의 무대로 넘어간 지 오래며, 이제는 무리적인 용어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다.[487]

동물의 세계도 아니고, 식물의 세계도 아니고, 천체의 기적도 아닌, 이제는 오직 인간만이 결정적인 수수께끼다. 인간은 아득한 존재와 더불어 끝나야 하고, 이 아득한 존재를 통해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해야 하며, 이 사회의 이미지 전체가 개선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러나 <내>가 아닌 <너>로 이해되어야 한다.[488]

감히 소명에 응하여, 우리의 운명을 화해시켜야 하는 존재의 거처를 찾아내는 현대적 인간인 현대의 영웅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만심과 공포와 자기 합리화된 탐욕과, 신성의 이름으로 용서되는 오해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던지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려서도 안 된다.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해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이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488]



3. 내가 저자라면

「신화의 힘」, 「신화의 세계」에 이은 조셉 켐벨의 세 번째 책이다. 그런데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은 이전 두 권의 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켐벨이 직접 저술한 책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완성도 면에서 이전 책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수하다는 점에서 또한 그렇다.

「신화의 힘」, 「신화의 세계」를 통해서 느꼈던 두 책의 대표적인 특징은 산만함이었다. 전체적인 구성 면에서 매끄럽지 못하고 짜임새가 없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느낌이었다. 방송내용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책이라서 그럴 것이라고 이해했지만, 읽기에 그리 유쾌한 책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에서는 느낀 점은 전혀 다르다. 책의 짜임새가 돋보이고, 독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우선 책의 전반적인 구성을 보자.

켐벨은 프롤로그-“원질신화”에서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내용을 먼저 기술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신화와 꿈”, “비극과 희극”, “영웅과 신화”, “세계의 배꼽” 등으로 구분해서 신화 이해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은 먼저 설명한다. 또한 “영웅과 신화”에서는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궤도, 즉 원질신화를 설명하면서 <분리>, <입문>, <회귀>의 형태를 그리는 도표(그래프)를 활용한다. 한눈에 와 닿는 표현 방법이고, 마음에 드는 설명 방식이다. 더구나 이 도표는 뒤에서 상세 도표로 확장되어 독자들이 영웅 신화의 전체적인 틀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준다. 책의 일관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하겠다.

영웅의 모험 1부는 “출발”, “입문”, “귀환”, “열쇠”등 신화적 모험의 표준궤도 순서에 따라 영웅의 일대기를 설명한다. 영웅의 모험 2부에서는 “유출”, “처녀의 잉태”, “영웅의 변모”, “소멸”로 구성하여 심리학적, 형이상학적 해석을 중점적으로 보여준다.

에필로그-“신화와 사회”에서는 켐벨이 생각하는 현대사회, 인간의 문제점과 신화를 통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이유 등을 상세하게 기술한다. 2부의 내용 중에는 이해에 좀 어려운 부분이 나오기도 하는데, 에필로그를 보면 책을 읽는 과정 중에 어렵게 느껴졌던 의문점들이 상당부분 해소되는 느낌을 갖을 수 있도록 자신의 견해를 비교적 상세히, 친절한 방식으로 기술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이 책의 우수한 점 중 하나는 다양한 신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수 많은 사례가 나타나고, 이들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독자에게 부여한다. 더구나 한 가지 신화를 신화의 표준궤도에 맞추어 계속 사례로 활용해 가는 방식은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좋은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한 신화의 출발, 입문, 귀환에 관한 내용을 해당하는 chapter에서 설명)

이 책에서는 각주를 많이 활용한다. 신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수적으로 알아야 할 내용들이 많은데, 이런 내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곁들인다. 배울만한 점이다. 또한 찾아보기(색인)을 만들어 수 없이 많이 등장하는 신화를 등장인물이나 명칭으로 쉽게 찾아 볼 수 있도록 한 점도 독자를 위한 세심한 배려라는 생각이 든다.

구성 면에서 우수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신화에 익숙하지 않은 본인 같은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아쉬운 점이 몇가지 눈에 띈다.

신화를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한 배려로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신화의 사례가 너무 많은 것은 역시 산만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세계 각 처에서 채집된 신화와 민간 전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보면 그 유사성이 한눈에 두드러져 보이고 여기서 독자는 오랜 세월 인간이 길잡이로 삼아온 진리와 만나게 될 것’ 이라고 많은 사례를 제시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저자가 그렇게 많은 사례를 제시하는 이유는 저자가 밝혔 듯이, 신화들 간의 유사성을 독자가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도록 하자는 의도와 더불어 저자가 주장하는 유사성에 대한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많은 사례를 제시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본인 같은 신화 문외한 들은 그 사례들에서 유사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저자의 의도가 쉽게 달성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여하튼 너무 많은 사례, 언제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사례는 독자들이 이해하기에 힘들다거나 조금 산만하다고 느끼게 할 소지가 다분하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신화(story)를 읽는 즐거움이 적다는 점이다. 한 개의 신화를 조각내어서 신화의 표준궤도에 맞추어 설명한 것은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조각난 신화의 단편들은 독자들에게 읽는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사례로 이용된 신화를 온전히 읽을 기회를 독자에게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내가 저자라면 이런 시도를 한번 해 보겠다. 너무 많은 사례를 들었다는 단점과 신화를 읽는 즐거움을 주면 좋겠다는 아쉬움을 같이 생각해 본다. 우선 표준궤도를 갖는 대표적인 신화를 5개 정도 들려준다. 독자들에게 온전히 신화를 읽는 즐거움을 준다. 그리고나서 신화의 표준 궤도를 설명한다. 그 이후에 신화와 표준 궤도를 비교해 간다. 각각의 신화가 표준궤도와 어떻게 맞아 떨어지는지, 또는 어떤 점에서 괴리가 생기는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신화를 잘 모르는 입장에서 이것이 가능한 방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저자라면 이런 시도도 한번 해봄직 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다이달로스는 아리아드네에게 실을 한 타래 준다. 미궁으로 들어가는 영웅이 한 끝을 미궁의 입구에다 매어놓고 들어가면서 풀어야 하는 실타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란 이 얼마나 하찮은 물건인가! 그러나 이나마 없으면 미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 희망도 없는 모험과 다름없는 것이 아닌가. 재미있는 것은 죄 많은 왕을 섬기는 바로 이 장인이, 미궁의 공포를 연출한 장본인인 동시에 자유라는 이름의 목적을 달성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영웅은 우리로부터 먼 데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수세기 동안 다이달로스는 장인 및 과학자, 기이할 정도로 냉담하고, 거의 악마적인 현상의 상징, 사회정의의 정상적인 경계를 넘어 자기 시대의 도덕률이 아닌, 자기 예술의 도덕률에만 봉사하는 인간 유형을 대표해 왔다. 그는 단순하고, 용기에 차 있으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영웅이다.[38]

중요한 것은 Buddhahood, 즉 정각은 말로써는 전할 수 없고(不立文字) 오직 정각에의 방법 Way만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름과 형태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진리의 불립 문자 교리는, 플라톤 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양 전통의 근간을 이룬다. 과학의 진리는 관찰할 수 있는 사실에 근거해서 논리적으로 세워진 논증할 수 있는 가설이기 때문에 전달이 가능하지만 제의, 신화, 그리고 형이상학은 초월적인 조명 가까이까지 인도받는 것은 가능하나 거기에 접근하는 마지막 단계는 개인의 조용한 체험으로써만 가능하다.

한 문화가 신화 안에서 인간 존재의 면면이나 그 문화의 면면을 키워나갈 때, 그 문화는 상징적인 암시와 함께 싱싱하게 살아난다.[60]

나는, 미지의 종국으로 떠밀리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내가 그곳에 이르는 순간, 내가 불필요하게 되는 순간, 나를 갈가리 찢는 데는 한 입자의 원자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인류가 힘을 모두 합치더라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나폴레옹, 러시아 원정에 즈음하여>[97]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힐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한 문화가 자기네 신화를 이런 식으로 번역할 때 그들의 삶은 고갈되고 그들의 사원은 박물관이 되며, 과거와 미래의 끈은 끊어지고 만다..... 이러한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만이 빈사 상태에 빠진 성화(聖畵)는 그 영원한 인간적인 의미를 다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320]


감히 소명에 응하여, 우리의 운명을 화해시켜야 하는 존재의 거처를 찾아내는 현대적 인간인 현대의 영웅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만심과 공포와 자기 합리화된 탐욕과, 신성의 이름으로 용서되는 오해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던지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려서도 안 된다.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해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이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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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4.14 15:45:39 *.244.220.254
"그는 변화(경영) 컨설턴트이다."
무덤 속에서 캠벨이 살아 돌아오면 동의를 하실지........
암튼 형님의 책에 대한 열정에 동기부여 많이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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