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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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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4일 10시 19분 등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
조셉 캠벨, 이윤기 역, 민음사

1. 저자 소개

나, 조셉 캠벨은

제가 태어난 집안요? 별로 특별할 건 없습니다. 캠벨 성을 가진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평범한 아일랜드계 중산층 가정이었고, 카톨릭을 믿었죠.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 강렬하게 다가오는 기억이 몇 가지 있는데, 특히 6살 때 아버지랑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보았던 인디언 쇼가 생각납니다.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였는데 대부분 아이들이 버팔로 빌이 분장한 멋지고 날쌘 연방기병대장을 동경했지만 나는 왠지 토벌되는 인디언에게 강한 흥미를 느꼈습니다. 학교에서 필드 트립으로 간 뉴욕 자연사 박물관에서 인디언의 토템 기둥과 가면을 처음 보았을 때 쇼에서 받았던 강렬한 느낌이 되살아나 저는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인디언에 관련된 물건을 수집하고 인디언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죠. 그래서 당시 집 근처의 공립도서관에 자주 갔습니다. 그곳 서가에 있던 인디언 관련 신화 책은 전부 다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열심인 것을 알고 도서관에서는 11살 때부터 어른 서가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해주었답니다. 15살 때 집에 불이나 할머니가 숨지고 그때까지 모은 인디언에 관한 책과 유물들이 다 불타버렸을 때 얼마나 슬펐는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인디언 민담은 내 상상의 날개를 키워주었죠. 유년기 때의 이런 인연이 종국에는 세계의 민담과 신화를 연구하는 내 평생의 직업으로 이어진 것이죠.

나는 호기심이 많고 학구열이 강한 사람입니다. 언제나 마음이 가르키는 방향 쪽으로 지시등을 켜고 달리지요. 대학에선 생물학과 수학을 비롯해 인문학, 영문학, 비교문학 등을 공부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유럽 여행 길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 힌두교와 불교의 정신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왠지 매우 편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에는 장학금을 받아 프랑스와 독일에 가서 공부했습니다. 정말 다양한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했지요. 제가 그때 새로 공부한 언어만 해도 10 여개나 됩니다. 내 삶을 돌아보니 저는 그다지 다른 사람들 눈을 의식하지 않고 산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제 마음에 정직하려고 애썼지요. 내 삶에서 사람들이 진정성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그런 나의 성품에 기인한 것일 겁니다.

1929년 제가 귀국했을 때 미국은 주가가 크게 폭락해 대공황 상태였습니다. 직업을 구하려고 이력서를 정말 여러 곳에 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개의치 않고 저는 극빈 생활을 자처했습니다. 연 20달러 짜리 오두막을 우드 스탁에 얻어 엄청난 양의 독서를 시작했지요. 그렇게 5년이 흐르니 저절로 길이 보이더군요. 제가 그 때 한 공부의 방법은 이런 겁니다. 그냥 방에 쳐 박혀 책을 읽습니다. 읽고 또 읽습니다. 단 읽는 책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작가가 쓴 제대로 된 책이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는 어느 수준에 이르면 마음에 희열을 줍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렇게 읽으면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그에 따라 세상이 열리는 걸 경험하게 됩니다. 시간이 부족한 현대인들이 시도하기엔 쉽지 않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꼭 추천하고 싶군요. 그렇게 읽다 보니 신화, 종교, 철학, 문학, 심리학, 예술, 미학 이런 학문들의 경계가 없어졌습니다. 제 삶과 의식에도 경계가 없어졌습니다. 읽는 것이 저의 삶까지 바꾸어 준 것입니다. 좁은 오두막이 제게는 온 우주였습니다. 그렇게 읽다 보니 34년에는 어느새 사라 로렌스 대학 정교수가 되어 있더군요.

저는 공부 말고도 여러가지에 관심이 많습니다. 관심이 생기면 일단 망설이지 않고 방법을 찾습니다. 무엇이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느새 나는 거기에 가 있는 겁니다. 저는 대학 시절 뉴욕을 대표하는 육상선수로도 활약을 했습니다. 0.5마일 레이스의 뉴욕시 기록도 깼지요. 재즈밴드에서 섹소폰을 불기도 했구요. 책에만 몰두하던 당시 생활고를 덜어준 것도 바로 그놈입니다. 공부와 예체능을 어떻게 다 잘할 수 있냐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저는 무얼 하면 그냥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몰입이 무엇에나 두각을 나타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제가 40년에 침머를 만난 건 참 행운입니다. 그것은 운명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신화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으니까요. 42년부터 융학파가 주도하는 볼링겐 시리즈 편집자가 되어 침머의 인도예술과 신화에 대한 연구들을 편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43년 갑자기 그가 사망하자 그의 유고를 제가 모두 편집하게 되었습니다. 12년이 걸렸지요. 그 동안 비교신화학에 대한 저의 학문도 많은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그때까지 내가 해온 모든 분야의 공부들이 신화라는 황금어장을 캐는데 모두 동원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영광스럽게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볼링겐 시리즈로 출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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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


5. ‘종교 교의에 녹아있는 진리는 대개가 변형된데다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진리로 알아보지 못한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6. 이 책의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14.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이다…모두가 이 은밀한 통로를 지나 인류의 문화로 현현한 것들이다.

19. 인간이라는 왕국에서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비교적 깔끔하고 비좁은 처소의 바닥 밑으로는 뜻밖에도 알라딘의 동굴이 뚫려 있다. 여기에는 보물뿐만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꼬마 정령, 그리고 우리로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거나 감히 우리 일상의 삶으로 통합하지 못했던, 불편한 혹은 억압당한 심리적인 힘이 도사리고 있다.

23.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드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38.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43.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과 죽음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이다.

44.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즉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다.

52. 원질신화의 복합적인 영웅은 예외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이 영웅은 사회의 존경을 받기도하고, 무시당하거나 경멸을 당하기도 한다. 영웅과 그가 속한 세계는 상징적이 어떤 장애로 고통을 받는다. 동화일 경우 이러한 장애는 금반지 하나가 사라졌다는 등 가벼운 이야기이지만, 묵시록적 이야기에는 온 세상의 심리적, 정신적 삶이 나락으로 떨어졌거나 떨어진 판국에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62. 일찍이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닮지 않은 것이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97. 동화에서, 영웅에게 나타나 영웅에게 필요한 호부(액막이)를 주거나 충고해 주는 것은 숲속의 난장이, 마법사, 은자, 목동, 혹은 대장장이인 것이 보통이다. 고급 신화에서는 이 역할을 맡는 조력자는 스승, 나룻배 사공, 영혼을 내세로 안내하는 안내자로 발전한다…그런 조력자를 맞는 영웅은, 소명에 응답한 영웅일 경우가 보통이다. 실제로 소명은, 통과 제의의 사제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리는 첫 번째 통고다.

120. 영웅은, 그 관문을 지키는 세력을 정복하거나, 화해하는 대신, 그 미지의 힘에 빨려 들어, 겉보기에는 죽은 것으로 나타나곤 한다. 세계 도처에서 채집되는 이러한 모티브는, 관문의 통과가 자기 적멸(自己寂滅)의 형태를 취한다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웅이 외부로의 관문, 즉 가시적 세계를 넘는 대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다. 이 신전 안에서,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에 불과하다는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138. 꿈꾸는 사람은 철저하게 유리되어 깊은 지하 감방에 홀로 방치되어 있다. 그 방의 벽과 벽 사이가 점점 좁아지다가 이윽고 꿈꾸는 사람은 꼼짝도 못하게 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어머니의 자궁, 감옥, 그리고 무덤의 이미지에 관련되어 있다.

143. 영웅은 자기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145. 잠자는 여성은 미인의 본보기 중의 본보기이며, 모든 욕망에 대한 응답, 모든 영웅의 지상적, 비지상적 모험의 은혜로운 최종 목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이며, 누이며, 애인이며, 신부이기도 하다. 세상에 유혹하는 것, 기쁨을 약속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의 예조(豫兆)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혹과 약속은, 이 세상의 도시나 숲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찾아온다. 왜 찾아왔을까? 그녀의 존재가 완전성이라는 약속의 화신이며, 조직화된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오랜 방황을 끝낸 영혼의 안식이며, 한 때 이류가 맛보았다가 언젠가 다시 맛볼 은혜이기 때문이며, 위안과 자양, 그리고 우리가 아득한 옛날에 그 사랑을 받았던 좋은 어머니(젊고 아름다운)이기 때문이다. 세월은 우리와 그녀의 사이를 가로막았지만, 그녀는 영원한 잠에 빠져든 미녀처럼, 아직 우리 속 영원의 바다 밑바닥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177.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이 부모의 이야기는, 입문이 잘못되었을 때 입문자의 삶에는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확인 시켜준다. 한 아이가 자라, 어머니의 품속의 목적인 자장가를 떠나 어른의 세계에 눈을 돌리게 될 때, 이 아기는 정신적으로 아버지의 세상을 엿보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의 상징이요. 딸에게 있어서는 미래 남편의 상징이다.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때 마땅히 거쳐 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어머니가 그때까지(산)과 (악)을 표상하고 있듯이, 지금부터는 아버지가 그 역할을 맡는다.

207. 구세주가 전해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듣고, 기뻐하고, 힘써 전파했지만 실천만은 끝내 꺼렸던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은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하며,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그의 아이들임을 가르치고 있다. 자질구레한 신조, 예배의 방법, 교회 행정조직의 설립 같은 비교적 사소한 문제들은 지켜지지 않을 경우 가르치는 일 자체에 부수적인 문제가 생기는 정도의 현학적인 올가미에 지나지 않는다.…성직자들의 행동과는 상관없이 구세주의 십자가는 한 국가의 깃발이라기 보다는 민주적인 상징이다.

209. 오호라, 좋고 싫음의 무상함이여/만상이 본래 비었음을 알면,
그대 마음에 대자 대비가 일어나리라/그대와 남이 다르지 않음을 알면
남을 섬길 수 있으리라/남을 능히 섬겨 내면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나를 만나면 불성에 이르리라

225.(각주에서) 마차를 모는 이가 두 개의 마차 바퀴를 내려다보듯, 그는 밤과 낮,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 그리고 모든 대립물의 쌍을 내려다 본다.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를 넘어 신을 아는 이는 바로 신에게로 간다. – 카우쉬타키 우파니샤드 1:4

249.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253. 근원을 투시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한 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원질신화의 규준인 완전한 순환 체계는 영웅에게 지혜의 시문 황금양털, 혹은 잠자는 미녀를 인간의 왕국으로 데려오는 또 한 번의 수고를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이 은혜가 사회, 국가, 그 전체 아니면 일만 세계를 재생시키는데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281. 영웅의 귀환은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기꺼이 이 일을 맡든, 어쩔 수 없어서 맡게 되든, 우리가 영웅의 행위를 이해하자면 이 잊혀진 부분의 탐험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288. 천국에서의 1년이 지상에서의 백 년에 해당한다는 등식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세계는 변화와 죽음으로 보이고, 신들의 눈으로 보면 불변하는 형상, 곧 끝없는 세계일 뿐이다.

299. 우리는 립 반 윙클, 카마르 알 자만,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서 실제로 존재했는지 여부에 대해 관심하는 것이 아니다…역사성을 강조하면 혼란이 생길 뿐이다. 즉 암시적 메시지를 어지럽게 할 뿐인 것이다.

305.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신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상징을 투명하게 닦아 우리에게 오는 진리의 빛이 이에 가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의미를 실어나르는 수레를 의미 자체로 오해하면 헛된…피만 흘리게 된다.

308. 영원의 원리 안에서 집착하지 않는 이승 세계의 인간이 만일 자기 행위의 결과에 초연해하고, 이를 살아 있는 신의 무릎 위에다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는 이 제물에 의해 죽음의 고해에서 풀려날 수 있다.

313. 온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이다…이로써 한 순간은 다음 순간으로 이어진다. 영원이라는 왕자가 세계라는 공주에게 입맞출 때 잠자던 공주의 저항은 끝난다.

319.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힐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이러한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어야 한다.

325. 오늘날 지식인들에게, 신화의 상징체계가 지닌 심리학적 의미를 감지해 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정신분석학자들의 연구가 있은 후, 신화가 꿈의 내용물로 이어졌으며, 꿈이란 정신 역동의 증후라는 사실에는 별 의혹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

326.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이를 적절한 의미로 재해석하여 오늘날의 세계에, 인간의 특징적 심층에 관한 풍부하고 웅변적인 자료를 장만해 주고 있다. 여기에 하나의 투시경으로 소개하는 예화들은 동양과 서양, 미개인 및 문명인, 현대 및 고대 <호모 사피엔스>의 수수께끼 에 관해 지금까지 묻혀있던 사실을 밝혀준다. 그 전경은 우리 앞에 있다. 우리는 이를 읽고, 그 일정한 패턴을 연구하고, 그 다양성을 분석함으로써 지금까지 인간의 운명을 조명해 왔고, 앞으로도 우리 사적, 공적인 삶을 주관해 나갈 그 무서운 힘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327. 333. 우리에게 전승된 신화학적 표상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우리는 이러한 표상들이 무의식의 징후 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정신적 원리의 통제되고 의도된 진술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정신적 원리는 인간의 육체의 형태 및 신경 구조처럼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류에 유전된 것이다...이 세계의 가시적인 모든 구성물은 편재하는 힘에 의한 결과라고 가르친다. 이 힘은 모든 구성물의 생성 원리이고, 그들이 이 세상에 현현해 있을 동안 그들을 지탱하고, 그들을 채우며, 궁극적으로 그들이 돌아갈 귀소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에서는 에너지라고 부르고, 힌두교도들은 샤크티, 기독교도들은 하느님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정신분석가들은, 심성에 나타나는 이 존재를 리비도라고 부른다. 이 존재의 우주적 현현이 바로 우주 자체의 구조며 우주의 변화인 것이다.

358. 신화는 두 가지 양식으로 나뉜다. 하나의 양식에 따르면 조물주의 능력은 스스로 기능해 나간다. 다른 한 양식에 따르면, 조물주는 주도권을 포기하고 우주 순환의 다음 단계에서 등을 돌려버린다. 후자의 신화 양식에서 나타난 어려움은 오랜 원초적 암흑이 계속될 동안, 창조된 지식이 우주적 어머니의 품 안에 있을 때 이미 시작 되었다.

368. (나피 Napi 가 만든 여자의 질문) ‘저희들은 어떻게 되나요? 언제까지 살아있게 되나요? 저희 삶에는 끝이 없나요?”

400.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402. 실제 역사적 인물의 행위가 영웅적인 것이었다면, 이 전설을 만드는 사람은 그를 위해 영웅의 모험과 그 심도가 유사한 정도의 모험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모험이 바로 초자연적인 영역으로의 여행인데 이 여행이 독자에 의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라는 밤바다로의 여행, 다른 한편으로는 각자의 삶으로 구체화하는 인간의 운명의 측면, 혹은 영역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431. 이 다채로운 쿠훌린의 모험에서, 가장 웅변적이고 가장 극적인 것은, 바퀴와 사과가 구르면서 영웅에게 내어주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길이다. 이것은 운명적인 기적의 상징이며 교훈으로 해독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에 대한 감상에 현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 본성의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니체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 구르는 바퀴인 사람’ 앞으로는 어려움이 비켜나고 뜻밖의 탄탄대로가 나타나는 법이다.

440. 모두들 슬퍼하지 말아요. 죽지 않고 영생하는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과 사의 끝없는 순환일 뿐입니다.

477. 신화의 해석에는 최종적인 체계가 있을 수 없고, 앞으로도 그런 것은 있을 것 같지 않다.

478. 신화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가지로 정의 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캠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초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

479. 개인은 집단으로부터 삶의 기술, 사유의 바탕인 언어, 삶의 자양인 이상을 빚졌다. 그의 육체를 이루는 유전자도 그 사회의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개인이 실제든 상상이나 느낌을 통해서든, 그 사회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킨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과의 절연을 의미할 뿐이다.

480. 종교적인 제의의 가장 중용한 동기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순종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이러한 동기는 계절적 축제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486.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 즉 하나의 노래가 인간이라는 합창대의 갖가지 음색으로 들리는 것이다…인간이 되려면,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인간의 얼굴로 바뀌어 있는 신의 얼굴을 알아보아야 한다.

491. 그는 특정 영웅이 누비던 시대는 물론 그 영웅 이야기가 허구인지 실재인지도 문제 삼지 않는다. 그에게는 정복자 나폴레옹이나, 나바호 인디언 쌍둥이 형제나, 수메르 신화의 이난나나, 그리스 신화의 야손이나 다 유사한 이야기의 주인공, 즉 영웅이다.

491. 모든 신화는 꿈과 동일한 문법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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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캠벨을 흐르는 중심 화두는 이 책의 첫 문장, ‘종교 교의에 녹아있는 진리는 대개가 변형된데다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진리로 알아보지 못한다’(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숨겨 있다. 그의 모든 책은 동일한 것을 말하는 다른 책이다. 그가 인용하기를 즐기는 힌두교 경전의 통찰,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이를 여러 이름으로 드러낸다’를 그에게 대비해보면 ‘요지는 하나이되, 캠벨은 이를 여러 이름의 책으로 드러낸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영웅의 모험을 다루지만 궁극적으로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고’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6p).

잘 알려졌다시피 캠벨은 문화적 접촉이 전혀 없었던 아메리카 인디언 민화를 어렸을 적 접하고, 이들 민화가 아더왕 전설의 상징체계와 놀라우리만치 유사한 것에 착안, 모든 문화권 신화를 두루 꿰는 신화의 원형을 찾아내고자 했다. 이 책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 가운데서 하나의 영웅, 즉 모든 영웅신화의 본(원형)이 되는 영웅을 떠올리기 위해 서로 접촉이 없는 세계 각 문화권의 무수한 영웅신화와, 심층심리학의 꿈 해석에서 재발견되는 영웅의 상징 체계를 체계적으로 (그러나 어렵게) 분석하고 있다. 무대가 다르고 시대가 다르고 의상이 다르지만 인간 무의식에 투사된 영웅, 혹은 인간 집단이 그려낸 영웅 신화는 거의 일정한 형태를 취한다. 거의 대부분의 영웅은 비정상적 탄생, 어린 시절의 고난, 조력자와의 만남, 기적적인 권능의 획득, 귀환이라는 일정한 ‘영웅의 사이클’을 공유하는 것이다.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궤도는 캠벨이 항상 주목하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즉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판이다. 이 양식은 원질신화(monomyth:본질적으로 신화는 '하나'로 수렴한다는 뜻 정도가 될 것이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이 책 역시 캠벨의 다른 책과 동일한 지향을 가진다. 다른 주제의 다른 책이 아니라 같은 주제의 같은 책이다(내가 그의 어떤 책은 입문서고 어떤 책은 아니라고 분류하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것의 이유이다). 그가 다양한 영웅 신화들을 분석하는 것은 인간 내부의 집단 무의식으로 잔존하는 '의례의 에너지'를 뽑아내는 것이다. 영웅이 자기 구원(입문)에서 그치지 않고 귀환하는 것은 집단과 분리되지 않은 집단의 한 구성원으로 타자와 내가 동일하다는 인식(개인의 전체성 479p)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는 자기 구원을 넘어 사회의 구원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신의 가면>의 서곡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이 책이 꿈의 구조물인 원형패턴이 고대 잔존물인 신화 상징을 나태낸다고 본 융 파의 심리학을 철저히 원용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인간이 무의식 속에 공유한 고대적 경험의 잔존물인 집단 무의식을 캠벨은 다양한 영웅 전설을 통해 규명하려 한다. 그것은 '입고 있는 의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인간 내부의 정신 운동을 규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현대문명의 재생 원리까지 제시하려 노력한다(명쾌하고 자세한 건 아니지만, 그의 생각은 항상 여기까지 닿아있다).


아직도 여전히 어렵다

역자 후기에서 이윤기씨가 자신이 감전 현상을 경험한 몇 권의 명저들(엘리아데의 <우주와 역사> &<샤머니즘>, 칼 융의<인간과 상징>)을 소개하면서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과 <신의 가면>도 거기에 포함시키고 있다. 책을 펼쳐 들 때만 해도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 책을 명저의 반열에 올리게 했을까 궁금했다. 이윤기 씨의 경험이 내 것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까지 하면서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책을 내려놓는 순간, 내 자신의 부족한 역량을 실감하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시간을 더 투자하고도 어떤 이가 도달한 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 답답함을 어떻게 설명하랴.

이 책의 매력이 ‘일반인들도 알아들을 수 있게 쉽게 그려낸 데 있다’고? 이윤기씨는 자신의 지식 수준을 대중의 수준으로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양하고 재밌는 신화 속으로 빠져드는 것과, 가슴에 이슬처럼 내리는 시적인 언어들과 만나는 기쁨은 컸으나(예: 시인 알 와라한의 부두르 공주 찬사 : “팔찌 없는 그 손목, 가랑비에 젖은 채 소매에서 나와 있네”. 이 표현 너무 센슈얼해서 가슴에서 녹는다. 탈리에신의 노래(312p) 등) 문장에 담긴 너무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함의들(한 번으로 이해 안되는 문장들)과 싸우느라 기운을 빼야 했다. 자세한 주석이 친절한 가이드가 되기도 했지만, 주석 역시 학위 논문의 각주 수준이고, 거기에 세계 각 종교, 프로이트와 융까지 가세하니 정신을 놓치지 않으려고 잔뜩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천하의 이야기꾼 캠벨도 책을 저술함에 있어서는 자신의 재담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 한 권이 통합적인 하나의 서사로 재미있게 읽히도록 쓰여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아쉬움은 캠벨의 어느 책에서도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그건 그의 스타일이기에. 방법은 그의 스타일(좀 어수선하지)에 빨리 익숙해지는 것뿐이다. 그리고 부족한 것은 그가 한 방식대로, 스스로 찾아 공부를 하는 것이다. ‘유레카!’ 를 외치며 벌거벗은 몸으로 밖으로 뛰쳐 나가게 될 지도 모르는 행복한 어느 날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책 한 권을 넉넉히 이해할 만한 배경지식이 없다는 낭패감은 이럴 때 씩씩한 도전으로 변한다. 어디로 더 달려가야 할 지를 알게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십수년 전에 멀찌감치 밀어둔 골치 아픈 공부거리를 슬그머니 책상 앞으로 다시 끌어다 놓는 40대의 아줌마, 그녀가 징하고 장하다.


이윤기 씨의 번역

그는 이제 60대, 신세대가 아니다. 그의 번역 문체가 그것을 드러낸다. 우리가 이 책을 읽기에 불편한 것은 한문이 많이 들어간, 때론 매우 만연체(캠벨 글의 속성일 거라 본다. 그러나 번역은 창조다. 읽히기 쉽도록 분해하는 것도 번역자의 몫이다)인 그의 상아탑 문체도 한 몫 한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

‘신화 속에는 부동하는 원동력, 즉 살아있는 전능자가 관심의 중심으로 떠오를 때마다 우주의 조형에 대한 초자연적인 자발성이 뒤따른다’(359p). ‘우리가 갱생하지 않으면 응보 천벌 여신의 복수 만이 우리가 얻게 되는 승리가 될 것이다’(29p). ‘요컨대 제 때에 나고 죽는, 자기 중심적이며 투쟁하는 자아를 응시하는 탁월한 정체불명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65p).(재밌는 것은 이런 문장에도 조금씩 길들여진다는 것!!!)

캠벨이 다루는 신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고대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종교와 그 이야기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웬만한 번역자의 역량 가지고는 번역이 힘들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일단 주목된다. 번역하기 매우 까다로운 전문 용어들을 적절한 우리 용어로 바꿔주는 대목에선 더욱 감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의 문장을 다루는 솜씨만 본다면, 글쎄.. 어떤 땐 ‘와 과연!’ 하다가도 어떤 땐 ‘이거 뭐 이래!’ 하게 된다. 200권이 넘는 번역 경험과 그 자신 소설가인 점, 출판사의 교열까지 감안하면 그 실망은 한 발짝 앞으로 더 나간다. 아래의 번역(일부 예)을 보라. 이해가 잘 되는가? 원문을 구해서 대조해 보고 싶을 지경이다.

“연민이란,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고통 받는 사람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공포는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보이지 않는 원인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40p)

이 글은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239p) 에서 캠벨이 발췌한 것이다. 아마도 소설가의 ‘연민과 공포’에 대한 굉장히 멋진 함의를 가진 문장이리라. 연민과 공포는 모두 인간 고통의 하나이고 ‘엄숙하고 부단한 것’(대체 이게 무엇인지)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연민은 ‘고통 받는 사람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인 반면 공포는 ‘보이지 않는 원인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이 번역은 매우 직역이다. 완전히 이해해서 의역하지 못할 경우 직역은 가장 안전한 피난처다(내 생각).


신화야 미안해

‘신화야 미안해.’
오늘 나는 우리의 ‘신화’를 향해 무릎 꿇고 사과한다. 여기서 신화라 함은 우리가 미신, 샤머니즘, 혹은 우상숭배라고 이름하며 밀쳐두었던 우리의 전승 설화, 민담, 굿 등을 통칭하는 말이다. 어쩌다 악수라도 할라치면 그 기분 나쁜 정기가 내 몸에 서려 재앙이라도 불러올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은 언제나 내 머리 속을 어둡고 축축하게 떠다녔다. 가까이 다가오면 꺼림직해서 피하고 싶은 것, 멀리 할수록 좋고, 아예 상종을 안하면 더 좋은 것, 우리의 신화는 내게 그런 것이었다.
기독교가 전래된 100년 동안 서양의 문화는 선진한 것, 우리가 따라가야 할 것이었고, 기독교는 그 선진 문화를 이끄는 종두 마차 같은 것이었다. 기독교가 몽매한 우리 백성들을 음지에서 끌어내 계몽한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잘 살게 되었다는 믿음,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 밑에서 천천히 올라오던 한 생각, 뒤도 안보고 내달려 이 만큼 오게 되었지만 ‘정말 잘 하고 있는 것일까’. 남이 좋다고 하는 것을 따라가다 ‘내 좋은 것’을 다 버리고 있다는 한 줄기 성찰. 그런데, 그런데 미안하게도 ‘내 좋은 것’ 목록에 우리의 빛나는 보석, 신화는 끼어있지도 않았다. 오늘에서야 보석인 줄을 알아보고 신화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한다. 누구나 말하지 않아도 보석의 소중함은 잘 안다.
오늘 나는 신화에게 진심을 담아 이 말을 하고 싶다.
‘신화, 너를 사랑하기 위해 먼저 너에 대해 배울 게.’

아래는 이런 내 생각과 닿아있는 이윤기 씨의 글이다.
-역자 후기에서-

“오랜 세월, 우리 숨 줄이 닿아 있던, 우리의 삶의 육즙이 묻어 있던 문화는 이 땅에 남아 있되, 질투하는 오직 하나의 신학에 가려져 있다. 신화나 종교를 보는 눈이 병적인 교조주의와 경직된 흑백의 논리에 길들어 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걸핏하면 조상이 우상으로 단죄되고, 하나의 신학을 옹호하기 위해서라면 오랜 세월 우리의 것으로 살림을 꾸려온 민족들까지 우상의 자식들로 치부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 시대, 기댈 것 없는 민중의 문화는 ‘미신’으로 오도되고, 충정에서 우러난 비판의 소리는 ‘사탄의 속삭임’으로 간주되는 이 시대에 모든 민중의 문화와 종교를 고루 짚어보며 그 바른 뜻을 더듬는 이 책은, 다른 종교라면 무조건 흰 눈을 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종교 정신을 곧추세우는데 밑바탕이 될 수 있다면 그 이웃집의 담 안도 기웃거려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제안하고 있다.”


한 가지 해보고 싶은 것, 꿈 적기

“…의미 심장한 위험과 장애와, 도상에서 겪는 행운의 모티프는 갖가지 양태로 (꿈 속에서) 굴절되는데(35p)…우리의 꿈에는 아직까지도 시대를 초월한 위험, 괴물, 시련, 정체불명의 조력자, 그리고 우리에게 유익한 인물이 끊임없이 나타난다…현재의 모든 현상 뿐 아니라 그것을 이기기 위해 우리가 취할 행동의 단서들이 (꿈에) 굴절되고 있음을 본다.”(133-134pp)

꿈에는 영웅의 모험이 지닌 보편적 신화양식의 기본 윤곽이 드러난다는 것을 주장하기위해 캠벨이 예시하는 꿈의 사례들을 본문에서 읽으며 나도 꿈을 적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전에도 정신분석학이 주장하는 꿈의 유용성에 대해 들은 바가 있어 몇 번 ‘꿈 적기’를 시도한 적이 있다 (꿈이 달아나기 전에 적으려면 머리 맡에 펜을 놓아두고 자야 한다)

꿈을 가장 멋지게 분석한 심리학자는 누가 뭐래도 융이다. 그는 심지어 꿈에 길이 있다고까지 믿었다.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지만 꿈 해석에 대한 의견 차이로 결국 융은 프로이트와 대립한다. 꿈을 억압된 욕구(성)의 충족 방식으로 본 프로이트에게 꿈은 억압하는 의식의 검열을 위해 무의식이 스스로 '변장'한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꿈은 해석이 어려운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융은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그에게 꿈은 '신이 보내준 편지'이다. 그 편지는 우리의 의식을 향해 열려 있다. 따라서 꿈이 주는 메시지를 해독하면 우리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이 번 주, 기억에 남는 꿈을 두 번 꾸었다. 하나는 제법 선명하다고 생각해서 적으려고 펜을 드는 순간, 기억이 다 달아나 버렸다. 나머지 하나는 매우 산만하고 앞 뒤가 안 맞는 꿈이었지만, 이 책에 예시로 나오는 위험과 장애가 반복되고 그것과 대립하는 내 심리적 강박이 그대로 드러난 꿈이었다. 꿈을 자세히 적어 나가면, 내 꿈에도 어떤 구조, 혹은 패턴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잘 적으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내 자신에 대해 뭔가 심도 깊은 메시지를 건져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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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퍼올린 것들


미궁 탈출?

현대인들은 모두 미궁을 가슴 안에 담고 산다. 그러면서도 그 미궁을 탈출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아름다운 처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없어서?

본문을 보니 우리를 미궁에서 이끌어줄 실타래는 아주 정성껏 만들어졌다. 그것도 다이달로스(미궁을 만든 장본인)에 의해서.

“그(다이달로스)는 실타래를 만드는 데 필요한 아마(亞麻)를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들판에서 거두었다. 수세기에 걸친 경작, 수십 년에 걸친 채집, 수많은 가슴과 손의 힘겨운 작업…. 이 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마를 훑고, 간추리고 헝클어진 실무더기에서 실을 자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38 p).

그렇게 정성껏 만든 튼튼한 실타래가 우리 앞에 던져졌다. 이제 미궁으로 들어가면 된다.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다.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된다(39p). 그런데도 우리는 이 모험 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왜 우리는 미궁에 선뜻 들어서지 못하는가.

여기 캠벨의 영웅들은 다르다. 어떤 결정을 할 때 무의식적으로 위험이 적은 길을 택하는 게 인간의 속성이다. 그러나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미궁으로 들어간다. 우리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그들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길을 나설 수 있는 것은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천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천복은 그들이 미노타우로스와 맞서 미궁을 탈출해야 할 이유가 되어 준다.

우리가 결심하고 미궁에 들어가기만 하면 우리는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곳에서 ‘신’을 발견할 것이고…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사히 미궁을 탈출하면 삶은 이제 더 이상 이전의 삶이 아니고, 우리는 더 이상 어제의 우리가 아니다. '공포는 여전히 눈 앞에 보이고 고뇌의 울부짖음도 여전히 귀에 들리나 막막한 두려움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고통 받는 일은 없다. 삶의 모든 것을 채우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과 정복되지 않은 힘의 자각으로 생기를 얻게 되고 보통 때는 가려져 보이지 않던, 생명의 심연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빛이 되어 비치기 시작하는 것이다.'(44p)


책이나 드라마가 차용하는 영웅의 스토리

책은 인간의 어드벤처에 대한 이야기다. 죽은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안에 있는 아 프리오리에 대한 이야기며, 자신을 가지고 위대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은유이다. 아주 훌륭한 자기경영 이야기다. 신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껍질과 상자 밖으로 나갈 수 없다. – 구본형

사람들은 왜 영웅 스토리에 빠져드는 것일까. 흔히 영웅은 고귀한 혈통을 갖고 있지만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우리는 어느 점에서 영웅을 통해 우리를 본다. 자신의 훌륭함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누구도 모르는 장점이 있음을 알고 있다. 다만 세상이 자신을 몰라주는 것일 뿐. 그럼에도 영웅의 길에 뛰어들고 영웅이 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웅의 모험을 보고 대리 만족하는 것이 아닐지.

드라마가 차용하는 영웅의 스토리는 대략 이런 모습이다.
출발
(1단계) 영웅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물이다. 잔뜩 위축되어 있고 뛰어난 일을 할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다.
(2단계) 그러다 영웅의 인생에 어떤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고 영웅은 비일상적인 모험의 세계로 인도된다.
(3단계) 그러나 영웅은 모험의 길에 나서기를 주저한다. 그러나 피치 못할 사건이 그를 모험으로 이끈다.
(4단계) 모험의 길에서 영웅은 특별한 조력자를 만난다. (우리나라 경우 대개 수염 난 도사)
(5단계) 영웅은 이제 특별한 세계로 헤치고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의 능력은 업그레이드 된다.
입문
(6단계) 목표를 달성을 위한 시련과 장애가 나타난다. 드라마는 흥미진진해 진다.
(7단계) 어느 시점에서 영웅은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종종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다.
(8단계) 죽음의 고비를 넘긴 영웅은 드디어 보물이 있는 곳에 도착한다. 그러나아직 드라마 끝이 아니다.
귀환
(9단계) 되돌아오는 길에는 마지막 장애가 있지만 결국 무사히 귀환한다. 이제 그는 이전의 그가 아니다.
(10단계) 모든 영웅신화는 본질적으로 영웅의 드라마틱한 거듭남을 보여준다. 그러나 가끔 영웅은 자신의 오만함으로 파멸되기도 한다.

캠벨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스타워즈’가 전세계 대 히트를 치자 영웅 신화는 영화와 드라마, 소설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건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영웅신화를 차용하면 훌륭한 플롯이 만들어진다.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영웅 구조는 우리가 특별히 인식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가 듣고 자란 이야기 속에 이미 녹아있다. 이 책의 영웅 신화들이 왠지 친숙한 건 그래서이다. 이런 영웅 신화는 고전 문학에도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영웅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건져 올리는 나와 너이다.
앞으로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볼 때는 영웅 스토리가 어떻게 차용되는지, 나라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갈 것인지 유념해서 본다면 꽤나 즐거운 일이 될 것 같다.


캠벨에게 신은?
(‘신화와 함께 하는 삶’ 에서 정리)

“진정한 상징은 단순히 어떤 것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우리의 의식을 깨워 생의 내적 의미와 실재 자체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구조가 담겨 있다. 진정한 상징은 주변의 다른 곳이 아니라 원의 중심으로 데려간다. 인간은 상징을 통해 자신의 깊은 자아, 타인, 신과 사랑을 나누며 의식적으로 교섭한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말은 사실 상징이 죽었다는 말이다.”
–토마스 머튼 신부 '상징: 소통인가 교회인가' (신화와 함께 하는 삶 304p)

깊이 그의 논점으로 들어가 보면 그에게 신과 신화는 다른 개념이 아니다. 신화와 신에 대한 그의 견해를 그대로 표현해주는 멋진 시가 있다.

..만물에서 신을 보고 듣지만, 조금도 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기 있는 신이 나보다 더 놀라울 수 있음을 알지 못한다…나는 24시간 매시, 매 순간을 신의 무언가를 보고, 남자와 여자의 얼굴에서 신을 보며, 거울 속 내 얼굴에서 신을 본다. 모든 거리에서 신의 편지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신의 사인을 본다. 나는 그 자리에 편지를 놓고 간다. 다른 이들이 영원히 제 시간에 오리라는 것을 알기에…
- 휘트먼(Walt Whitman) 시 ‘풀잎’( Leaves of Grass)

모두 하나의 창조자로부터 나온 창조물일 뿐..그것은 마치 칼이 칼집에 보이지 않게 들어있는 것처럼, 세상을 먹는 자 아그니가 장작 속에 보이지 않게 들어 있는 것과 같으나, 사람들은 그 안에 든 것을 보지 못한다…어느 하나만 숭배하는 이는 그를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그는 어느 하나의 특성으로 나타나지 않고 다만 하나하나로 나타난다…신과 자신을 다르게 생각하고 숭배하는 사람은 그 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니... –우파니샤드

위와 같이 모든 개념을 초월한 궁극적인 신의 신비, 그것이 우리의 존재의 근거다. 그것은 우파니샤드의 가르침, ‘네가 바로 그것이다(tat tvam asi)’로 요약된다. 언젠가는 죽게 될 내가 붙들고 있는 모든 것을 지울 때에야 절대 존재와의 동일성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알 수도 이름 붙일 수도, 의인화해서 섬길 수 있는 신이 아니다. 가장 높은 존재인 신은 창조 이전의 존재다. 이름이 주어지자 신은 신이 아니었다. 서양인들은 신에게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우리네 삶과 그의 존재의 관계를 믿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신이라 알고 있는 것과 완전히 하나가 되고 그것을 넘어서 초월하는 방법을 찾았다. 부처란 ‘깨달은 자’를 뜻한다. 부처는 육체가 아니라 의식이 곧 자신임을 깨달은 자다. 나아가 전구는 빛을 낼 때 가치가 있듯이 자신의 가치는 의식의 빛을 발할 것임을 아는 자다. 전구에게 중요한 것은 필라멘트와 유리가 아니라 빛이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와 신경조직이 아니라 이것들을 통해 빛나는 의식이다. 전구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식의 빛을 위해 사는 사람은 깨달은 자이다.

이런 합일에 대한 가르침은 기독교에서는 이단이다. 그러나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와 의례, 그리고 그 이미지이다. 의례는 신화적 상징체계다. 사람들은 언어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과거나 현재, 혹은 미래의 역사적 사건을 드러내는 게시의 형태로 신화적 상징과 접촉하는 것이다. 효과적인 예배는 의미를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각자의 생각을 남겨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론적인 교리나 정의는 종교적 명상에 방해물이다. 신의 존재는 각자가 가진 영혼의 능력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다. 신은 인생의 가장 큰 미스터리며 우리가 신의 이미지를 만드는 순간, 우리는 거기에 갇힌다.

이집트의 <사자의 서>, 그노시스교의 <도마 복음>, 단테의 <향연>:경전의 신비적 해석 등은 모두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캠벨의 결론: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신화는?

신화와 그 신들은 정신의 산물이자 심상이다.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내지 않은 신이 있던가. 프로이트와 융 뿐 아니라 심리학자, 비교종교학자들도 신화의 형식과 인물은 본질적으로 ‘꿈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주장한다. 전세계에 걸쳐 본질적으로 똑 같은 신화적 모티브가 나타난다. 위대한 경전에는 모두 처녀 수태와 성육신, 죽음과 부활, 재림, 심판 등의 신화와 전설이 있다. 그러한 이미지는 정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정신과 관련된다. 상징적으로 정신의 구조와 질서, 그 힘을 말해준다. 따라서 그 이미지들이 본질적으로 해당지역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나타낸다고 해석할 수 없다. 불교의 고타마 싯다르타나, 힌두교의 비슈누는 무수한 부처나 비슈누의 화신으로 해석된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무이한 신의 아들로,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는 신학적 해석에는 문제가 있다.

현대 세계는 경계가 없다. 지금 충돌하고 폭발하는 세력 중에 유럽 전통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는 고대의 신화적 전통,주로 인도와 극동의 전통과, 역으로 아시아로 흘러 들어오는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인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상은 대단히 의미 있다. 모든 전통에 있는 고대의 믿음 위에 현대 과학 지식의 결실을 더한다면 수많은 일을 달성할 수 있다.

‘나는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곳곳에 구현된 지혜로운 전설의 상징적 형태를 어떤 가상, 혹은 실제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인류 내부의 잠재성을 가르키는 것으로, 심리적, 영적으로 해석하면 인류의 영구불변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올더스 헉슬리))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만물을 통해 나타날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것은 엄격한 정통파처럼 텍스트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신화 해석에 관한 한 우리는 신학자가 아닌 시인과 신비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파벌의식을 가지 신학자는 텍스트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를 고집하고 전통은 모두 다르다고 주장한다. 세 화신, 즉 예수, 크리슈나, 석가모니의 삶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상징이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가르키면 모두 똑같다. 신화와 종교를 거대한 시라고 인식할 때 신화와 종교는 사물과 사건을 통해 ‘존재’나 ‘영원’의 편재를 가르킨다.

그렇다면 새로운 신화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오래되고 영원한 신화, 기억하고 있는 과거나 상상한 미래가 아니라, ‘지금’에 대해 시적으로 새로워진 신화다. 민족들의 아첨이 아니라, 깨어있는 영웅들, 이 아름다운 별에서 평등한 전체적 정신의 중심, 모든 이와 함께 나름의 길을 가고 한계가 없는 영웅에게 말을 거는 신화다. (신화와 함께 하는 삶 31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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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가져가는 생각:

구원은 기독교 안에만 있는가 2

캠벨의 첫 책부터 내 관심의 중심에 자리잡은 문제의식 하나는 기독교의 교의에 관한 것이었다. 과연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기독교에만 있는 구원 안으로 사람들을 끌어 들여야 한다는 내 열심이 하릴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도권(기독교) 밖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평화로운 미소로 악수를 청해올 때, 그들의 손에서 행여 먼지라도 묻을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던 건, 내가 받은 훈련의 힘이다. 그런 내가 어느 날부터인가 그들의 손을 잡으려고 손을 자꾸 뻗치고 있는 것이다.

큰 아이가 ‘엄마 왜 요즘 교회에 안 나가세요’ 하고 말할 때 나는 참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대답을 회피하기 일쑤다. 아이들이 신앙을 가지고 살 길 바라서,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건 나였다. 큰 애 모습이 과거의 나의 모습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내가 왜 교회에 가지 않는지 제대로 설명해 줄 수가 없다. 그 애가 못 알아들을까봐서가 아니라 내가 아직 확신이 없어서이다.

수십 년을 수행하며 진리를 찾아온 사람들이나 진리에 천착하여 높은 깨달음을 얻은 많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제도권 내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이유 만으로 경원시해 온 것, 훈련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제도권의 교의를 더 견고히 세우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구원의 도가 아닌 진리를 배우려고 바깥을 기웃거릴 필요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것은 기껏해야 이미 성경의 전도서나 잠언 같은 데에 이미 나오는, 해 아래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는, 인간 사는 이야기나 고민의 흔적들일 뿐이고, 아무리 심오한 철학이라 해도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이미 치명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구원은 정말 기독교에만 있는 것인가. 이 의심을 따라 나는 캠벨이 어떻게 신에 대해 설명하는지 유심히 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캠벨은 내 고민을 잘 해결해 줄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리는 결론은 아직 내가 받아들이기엔 힘이 든다. 기독교를 역사적 사실이 아닌 하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아직 나의 가슴에선 익숙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내가 배운 것을 고집하기 위해 어떤 가설들을 늘어놓는 일보다 캠벨의 결론을 지지하기 위해 어떤 가설들을 늘어놓는 일이 더 쉽고 무리가 없다는 점이다. 캠벨 쪽으로 나의 믿음이 경도되어 갈 것이라는 감이 막연히 오지만 두 경계에서 나는 아직 몸을 떨고 있다. 나의 믿음의 근거였던 기독교를 바닥부터 뒤집어 새롭게 보아야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 교의가 지시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아무 의심 없이 달려가는 것도 이제는 불편하다. 그래서 나는 캠벨에 의지해 어떤 답을 찾고 싶은 것이다.

신에 대한 문제는 인간의 인식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신을 해명한다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지혜와 머리로는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신을 믿느냐 하는 것은, 아직 증명된 적이 없는 사실에 대해 어떤 가설을 지지하는냐 하는 문제와 같다. 기독교 주장처럼 오직 답이 하나라고 한다면 그와 관련된 가설(신앙의 내용도 일종의 가설이라고 한다면)을 선택한 사람은 운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증명이 불가한 구원의 문제를 그렇게만 생각할 수는 없다. 교조적인 기독교에 의해 터부시되는 타 문화권의 신들과, 그 신들의 자애 속에 삶을 유지하는 수 많은 인류들을 구원에서 제외하는 그런 유일신이라면 당연히 나는 그 치명적인 외골수의 자비 안에 머물고 싶지 않다. 오히려 모든 신들이 ‘동일한 한 신’의 다른 얼굴이라고 말하는 캠벨의 통찰에 더 많이 기대고 싶은 것이다.

한 종교 안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그 세계가 모든 것이라고 믿고 살아온 나의 눈에 우물 속으로 한 줄기 햇살이 비쳤고, 그 햇살은 내 마음의 평화를 깨고 처음으로 내가 속한 세계에 대한 의심을 심어주었다. 이제 더 이상 우물 속을 세상의 전부라고 믿을 수 없게 된 나는 빛의 존재를 따라 밖의 세상을 알아야 했다. 그러나 비록 좁은 우물 안이었지만 그곳 역시 하나의 다른 세계였던 이상 내가 체험한 신은 절대적인 신이다. 그를 거부할 힘은 내게 없다. 그러나 세상 밖에서 만나는 신들도 그 신을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신이며, 그 신들이 사실 서로 다른 신이 아니라는, 그런 화해가 가능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각 문화권에서 발견한 그 방대하고도 다양한 신의 모습은 사실은 하나의 원형으로서의 절대적 신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현현한 것이라는 캠벨의 주장은 가장 탁월한 해결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편협적인 신의 관념을 내놓는 여러 학설들과 달리 캠벨의 결론은 인류가 피의 역사를 그치고 상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지향한다. 그는 적어도 이 세상에 존재했던 학자들 중에 가장 많이 다양하게 신들에 대해 연구했고, 그 신들이 사실은 다른 의상을 걸친 하나의 여러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방대한 그의 연구와 직관으로 멋지게 내린 결론이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신을 배반하지 않고도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까지 품을 수 있으니 꽤나 훌륭한 대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통찰이야말로 미욱한 나의 눈에서 비늘 하나 떼는 일에 일조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의 결론이 세계를 대 통합으로 이끌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나는 그가 유대-기독교 전통의 상징들과 은유에 대해 고찰하며 이 문제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논한 ‘네가 그것이다’ 라는 책을 다음 책으로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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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4.14 15:49:14 *.244.220.254
치사하게 숙제를 먼저 하시는 반칙을?
아무튼 조교님의 지적 스펙트럼과 창조적 글쓰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문득 예리한 칼날을 가진 고수 앞에 대나무 죽창으로 무장한 제가 보이네요. 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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