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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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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4일 11시 05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조셉캠벨이 신화에 어떻게 입문하게 되었는지, 어떤 과정을 지나 이렇듯 폭포와 같은 역량을 지니게 되었는가가 더 궁금해진 책이었다.
1948년, 캠벨의 나이 44세에 출판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영웅 입문서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영웅 탄생의 서사구조를 단단히 이해시킨 도서였다. 그런 이유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을 모티브로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라는 책을 펴낸 영화 연출가인 크리스토퍼 보글러는 신화 안에서 영화 시나리오 창작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캠벨의 다른 저서인 ‘신의 가면’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이 출간 된 지 꼭 십년 후에 출판 되었다. 도서관에 다른 도서를 빌리러 갔다가 이 책들을 보고 하염없이 책장을 넘기다 왔다. 4권의 제목을 살펴보면
1. 원시신화
2. 동양신화
3. 서양신화
4. 창작 신화 이다.
캠벨의 책, 자유지정 4주차에 ‘네가 바로 그것이다’ 를 읽으려던 참이었는데 신의 가면 시리즈를 보자 다 읽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이 4 권의 책을 읽으면 조셉캠벨의 신화가 조금이라도 정리되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험기간인지라 마음만으로 그칠 확률이 높다)
캠벨이 신화에 천착하고, 그 중에서도 영웅의 탄생과 역정에 주목한 것은 그 자신의 삶 또한 영웅, 그와 같은 길을 목표로 살아낸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이 도서는 영웅의 생애 과정을 단순히 전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이 영웅이 되고자 했던 저자의 체험이 아니고는 쓸 수 없는 사유가 곳곳에 녹아 공명을 준다. 그가 신화에 대해 폭포와 같은 영향력을 갖게 된 이유일 것이다.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현대 사회에 현존하는 갖가지 모습의 영웅의 메타포라 한다면 캠벨은 영웅의 호칭을 수여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는 인물이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머리말
p.5.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종교 교의에 녹아들어 있는 진리는 대개가 변형된 데다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진리로 알아보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아이를 상대로 갓난아기는 황새가 물어다 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황과 흡사하다. 우리는 이 큰 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따라서 이 경우, 우리는 상징으로 분식된 진리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아이는 알아듣지 못한다. 아이는 우리가 말하는 내용 중 변형된 부분만을 알아듣고는 속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른에 대한 아이들의 불신과 면역성이 종종 이러한 부정적 인상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진리의 상징적 분식을 피하고 아이들의 지적 수준에 맞추어 사건의 진상을 알게 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p.6. 옛 현자들은 말을 하되 언외(言外)의 뜻을 거기에다 실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따라서 그분들의 상징적 언어를 거듭 읽되 그 가르침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고문집 편집자(古文集編輯者)의 재주쯤은 갖추고 있어야 할 듯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상징의 문법을 터득해야 할 터인데, 저자가 알기로는 이 문을 여는 열쇠로 정신분석학만한 현대적 길잡이는 따로 없을 듯하다. 이 말을 금과옥조로 삼지 않고는 정신분석학의 안내를 받기 어렵다. 다음 단계는, 세계 각처에서 채집된 신화와 민간 전설을 한곳에 모아놓고 상징으로 하여금 스스로 입을 열게 하는 일일 듯하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면 그 유사성이 한눈에 두드러져 보이고,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오랜 세월 삶의 길잡이로 삼아온, 방대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일정한 상태로 보존된, 바탕되는 진리와 만나게 된다.(중략)
그러나 이 책이 다루는 것은 상사성이지 상이성은 아니다. 일단 이런 상사성을 이해하면 상이성은 일반적으로(그리고 정치적으로) 믿어지는 정도만큼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리라 믿는다. -중략-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 경은, <진리는 하나 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프롤로그 윈질신화. 1 신화와 꿈
p.13. 재미삼아 귀를 기울여보는 콩고 주술사의 잠꼬대 같은 주문이나, 점잖은 취미로 읽어보는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노자 경구집(老子驚句集)의 얇은 번역본이나, 이따금씩 깨뜨리고 보는 견고하기 그지없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법이나, 기괴한 에스키모 요정 이야기의 빛나는 의미나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별로 다른 것이 없다. 즉 변화무쌍한 듯 하지만 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야기의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도전적이리만치 끈질긴 암시를 던진다. 말하자면, 아무리 읽고 들어도 이런 이야기는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는 암시다.

p.14.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종교, 철학, 예술, 선사 인류 및 유사 인류의 사회적 양식, 과학과 기술의 으뜸가는 발견, 바닥째 흔들어 수면을 엎어버리는 꿈, 신화의 불가사의한 고리…… 모두가 이 은밀한 통로를 지나 인류의 문화로 현현(顯現)한 것들이다.(중략)
시간을 초월한 이 환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의 어느 심연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신화는 왜 어느 곳에서 채집된 것이든 그 다양한 의상 아래로는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신화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p.15. 제대로 된 일반 신화학은 없어도, 사사롭고 드러내어 인정받지 못한 미성숙 단계에 있다 뿐이지, 그래도 우리의 내부에는 속으로 알찬 꿈의 판테온이 있다. 최신형 오이디포스의 화신, 미녀와 야수의 속편이 오늘 오후에도 뉴욕의 42번가와 50번가 모퉁이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p.16-17. 인간이 가진 심성 중에 가장 끈질기게 남는 성향은, 동물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어머니 젖가슴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너무 빨리 모태를 떠난다. 미완성인 상태, 세상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당연히 위험으로부터 이들을 지켜주는 방벽은 어머니이고, 이 어머니의 보호 아래 자궁 내 체재 기간 intra-uterine period은 연장된다. 그래서 보호가 필요한 유아와 어머니는 출산이라는 대격변을 치르고도 육체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몇 개월간이라는 이원일체(二元一體) 상황 dual unit을 형성한다.

p.21. 꿈을 읽는 현대 과학인 정신분석학은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이 같은 비현실적 이미지에 유념하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정신 분석학은 이러한 이미지가 스스로 가능하게 하는 방법도 발견했다. 자아 발달의 위기는, 민간전승이나 꿈의 언어에 노련한 전문가의 감시안(監試眼) 앞에서 저질러진다. 이 전문가가 시험과 비전(秘典)을 관장하는 원시림 성소(聖所)의 주의(呪醫, medicine man), 즉 고대 비법 전수자 ancient mystagogue나 영혼의 안내자로서의 역할과 성격을 떠맡게 된다. 의사는 신화 영역에 관한 현대의 명인(名人)이며, 그 비방(秘方)과 영험이 있는 주문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의사의 역할은, 신화나 동화에서 주문으로 무서운 모험의 시련과 위기에 몰린 영웅을 도와주는 노현자 wise old man의 역할과 같다. 의사는 갑자기 나타나, 무서운 용(龍)을 죽일 수 있는 빛나는 마법의 칼이 어디 있는지 일러주고, 영웅을 기다리는 신부와 보물이 쌓여 있는 성(城)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며, 영웅의 치명적인 상처에다 고약을 발라주고, 마침내 원수를 물리치고는 어느 황홀한 밤에 모험을 떠난 길을 되짚어 정상적인 생활이 기다리는 세계로 돌아오게 한다.

p.22. 한 차례의 통과 제의가 있은 다음에는 다소 느슨한 휴지 기간이 뒤따르는데, 이 기간에는 인생을 살아갈 당사자를 새로운 시대의 형식과 적절한 감정 상태로 유도하는 절차가 있다. 그래서 마침내 정상적인 생활로 되돌아올 때가 되었을 때 입문자 initate를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p.23.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p.24-25.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저작에서 인간이 사는 삶의 순환 주기 중 전반부의 통과와 그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의 태양이 천정점(天頂點)으로 떠오르고 있는 시기인 유아기와 사춘기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C. G. 융은 후반부의 위기를 강조했다. 즉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 빛나는 태양이 마침내 그 고도를 떨어뜨리고 무덤이라고 하는 밤의 자궁 속으로 사라지기 위해 기를 꺾어야 하는 시기를 말한다. 우리의 욕망과 공포의 정상적인 상징이 인생의 오후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는 반대되는 것으로 전화(轉化)한다.

p.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p.33. 신화에서는 문제와 해결책이 모든 인류에게 직접 뚜렷이 제시되는 데 견주어, 꿈속에서는 꿈꾸는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따라서 영웅은 과거 개인적, 지방의 역사적 제약과 싸워 이것을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상의 인간적인 형태로 환원시킬 수 있었던 남자나 여자를 일컫는다. 그런 사람의 상상력과 이상과 영감은 태고적부터 인간의 생명과 사상의 원천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영웅은, 현재의 붕괴되어 가는 사회나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회 재생의 심원한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간(완전하게 되되, 특이하지 않은 우주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따라서 두 번째 엄숙한 과업과 행위는(토인비가 주장하고, 인류의 모든 신화가 보여 주듯이)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재생의 삶에 대해 그가 배운 바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p.34. 어쩌면 재생의 징조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둡고 궂은 길을 가야 마침내 평화의 강, 혹은 우리 영혼의 목적지로 통하는 탄탄대로를 발견하게 되는 모양이지요.

p.36. 건너기 어려운 날카로운 칼날 / 시인은 노래했거니, 이것이 험로라고.

p.37. 오늘날의 우리 대부분은 가슴 안팎으로 이 미궁을 안고 있다는 이야긴데 아, 미노타우로스와 맞설 용기를 심어주는 미궁 탈출의 단서와, 괴물을 만나 도륙한 다음 우리를 자유의 길로 이끌어줄 안내자, 저 아름다운 처녀 아리아드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p.39.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하게 될 것이다.

2. 희극과 비극
p.39.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그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레오 톨스토이 백작은 이 예언적인 말을, 현대적 여주인공 안나 카레리나의 정신적 의절(義絶, dismemberment)을 그린 소설의 서두로 삼았다.

p.40. 비의적 연극에서, 명상하는 정신은, 죽을 팔자를 타고 태어난 육체가 아니라, 한동안 육체에 깃드는 영속적인 생명의 원리와 합일하며, 실재가 허깨비로 분장(고통 받는 자와 보이지 않는 원인으로)하고 있을 동안, <인간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하던 비극>이 우리 필멸의 육체를 찢고 해체할 때, 우리들 자신은 바로 그 밑바닥으로 녹아 들어간다.

p.42-43. 동화, 신화, 그리고 영혼의 신곡에 나오는 해피엔딩은 모순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비극의 초절성(超絶性)으로 읽히어야 한다. 객관적 세계는 과거의 형태 그대로이나 주관이 강조되면서부터는 변형된 것처럼 보인다. 과거에는 삶과 죽음이 투쟁하던 곳에서 이제는 영속적인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냄비 속에서 끓는 물이 거품의 운명에 대해, 우주가 은하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 그러하듯이 시간의 우유성(偶有性)에 대해 무심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양자를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체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이다.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신의 의지에 대한 거역)과 죽음(필멸의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katharsis, purga-torio)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 kathodos and anodos인 것이다.

p.43. 신화와 동화 고유의 사명은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는 어두운 뒤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신화나 동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환상적이며 <비실재적>이기 때문에, 이들이 표상하는 것은 심리적인 승리지 육체적 승리는 아니다. 전설이 실재의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경우라도 승리의 행위는 꿈같은 형상을 묘사하는 것이지 실물의 형상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 땅 위에서 이러저러한 일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이 땅 위에서 이러저러한 일이 있기 전에 보다 중요하고 보다 본질적인 것이, 우리가 알고 있고 더러 꿈속에서 찾아가기도 하는 미궁 안에서 일어났어야 했다는 것이다.

p.44. 시간은 영광의 승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세계는 더할나위없이 천사적인, 더할나위없이 단조롭고 요정의 노래처럼 매혹적인 하늘의 노래를 부른다. 행복한 가정이 다 그렇듯이, 소생한 신화와 세계는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p.47. 해지기 전에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정복자는 초저녁에 자기의 전생을 알았고, 한밤중에는 사물을 두루 꿰뚫는 혜안을 얻었으며, 새벽녘에는 인과(因果)를 깨쳤다. 그는 날샐 무렵에 완전한 정각을 얻었던 것이다.

p.52-53. 대개 동화 속의 영웅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소우주적 승리를 거두고, 신화의 영웅은 세계사적, 대우주적 승리를 거두는 게 보통이다. 또 전자(젊은이, 아니면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경멸당하는 아이)는 자신을 압제하던 상대를 이겨내는 데 그치는 반면, 후자는 모험을 통하여 자기가 속한 사회 전체의 소생에 필요한 수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황제(皇帝), 모세, 혹은 아즈텍의 테까틀리포카 Tezcatlipoca 같은 종족적, 혹은 국지적 영웅은 한 종족에게만 그 선물의 은혜를 베풀지만 모하멧, 예수, 부처 같은 우주적 영웅은 전세계에 넉넉히 한 소식을 전해준다.
보잘것없는 영웅이든, 탁월한 영웅이든, 그리스 영웅이든, 야만족의 영웅이든, 이방인의 영웅이든, 유태족의 영웅이든, 영웅의 행장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잣거리에 나도는 이야기는 영웅의 행위를 주로 물리적으로 그려내고 있지만, 고급 종교에서는 영웅의 행적이 도덕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험의 형태, 등장인물의 역할, 마침내 얻은 승리의 내용물에는 놀라울 정도로 별 차이가 없다. 동화나 전설이나, 제의나, 신화에서 원형 패턴의 기본적인 이러저러한 요소가 빠져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엔 그 나름의 함축된 의미가 있다. 앞으로 알게 될 테지만, 생략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사례(事例)의 역사와 병리학에 관한 몇 권의 책이 씌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p.62-63. 닮지 않은 것이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또 시인 블레이크 Blake도 비슷한 말을 한다.
사자의 포효, 이리의 울부짖음, 성난 바다의 광란, 그리고 피를 부르는 칼은 인간의 눈에는 과분한 영원의 관련들이다.

p.64-65. 도덕군자가 의분을 금치 못할 대목에서, 비극 서사시인이 연민과 공포를 동시에 느낄 대목에서, 신화는 장엄하고 무시무시한 신곡(神曲)을 향해 온전한 모습으로 피어난다. 신화의 제신(諸神)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 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 즉 창조자의 무자비함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신화는 비극적인 자세를 신경질적인 것으로, 도덕적인 판단을 근시안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 무자비함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통에 의해서는 손상되지 않는 끈질긴 힘의 그림자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언질로 균형을 회복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란 무자비하면서도 공포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요컨대 제때에 나고 죽는, 자기중심적이며 투쟁하는 자아를 응시하는 탁월한 정체불명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제 1부 영웅의 모험
출발
p.71-72. 이 동화는, 모험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본보기다. 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는 극히 드문 것이긴 하지만 뜻밖의 세계를 드러내고,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력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부지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그리고 이 주름의 골은 매우 깊다. 영혼 그 자체만큼이나 깊다. 실수는, 운명의 시작에 해당되는 수도 있다. 이 동화에서 황금 공이 사라진 사건은, 공주에게 닥칠 어떤 운명의 첫 번째 조짐이고, 개구리는 두 번째, 무심결에 한 약속은 세 번째 조짐이다. 갑자기 등장한 세력 집단의 예비 선언처럼, 기적같이 등장하는 개구리의 존재는 <전령관>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개구리가 등장하는 운명의 갈림길이 곧 <모험에의 소명>인 것이다. 전령관의 부름은, 여기 이 예화(例話)에서 보이듯이 구원에 이르는 길일 수 있으나 당사자 일대기의 후반에 이르러서는 죽음일 수도 있다. 전령관은 귀한 역사적 사명에 수행을 촉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의(秘義)에서 알 수 있듯이, 전령관의 등장은, <자아의 각성 the awakening of the self>이라고 불리는 단계를 암시하고 있다. 동화에 나오는 공주의 경우, 전령관의 등장은 사춘기의 도래를 뜻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크든 작든, 삶의 단계나 정도가 어디에 이르러 있든, 이러한 소명은 언제나 변용의 신비 mystery of transfiguration, 완성되면 곧 죽음과 탄생에 이르는, 정신적 통과 의례 혹은 순간을 개막(開幕)한다. 지금까지의 삶의 지평은 이제 너무 웃자라, 낡은 개념과 정서 패턴은 몸에 맞지 않는다. 바야흐로 또 하나의 문턱을 넘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p.73. 동화에 나오는 징그럽고 욕지기나는 개구리나 용은, 태양을 입에 물고 솟아오른다. 이 징그러운 뱀이나 개구리, 즉 징그러운 동물은 무의식 심층(<하도 깊어서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을 상징한다. 여기엔 징그럽고, 사랑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 미지의 혹은 지진한 요소, 원리, 그리고 생존의 본질이 우글거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수정(水精)이며, 트리톤Triton이며, 물의 수호신들이 사는 우화에 나오는 용궁(龍宮)의 진주이며, 지하의 도깨비 나라를 밝히는 보석이며, 뱀처럼 땅을 괴고, 땅을 감싸는 불사(不死)의 바다에 있는 불씨이며, 불멸의 밤을 꽃피우는 별이다. 용이 지키는 금 덩어리며, 헤스펠리데스 Hesperides가 지키는 금단의 능금이며, 황금 양털의 보풀이다. 따라서 모험에의 소명을 알리는 전령관, 혹은 고지자(告知者)는 어둡고, 징그럽고, 무섭고, 세상의 버림을 받은 존재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길을 따르면, 길은 낮의 벽을 통해 보석이 빛나는 밤으로 열린다. 혹 전령관은 우리 내부의 억압된 본능적 다산성(多産性)의 상징인 야수(동화에서처럼), 또는 미지의 베일에 가려진 신비스런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p.76. 변형의 때가 무르익은 정신은 끊임없이 이런 전령관을 산출하는데 아래에 소개하는 두 사람의 꿈이 이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첫 번째 예는,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려는 어느 젊은이의 꿈이다.

p.77. 꿈에서든, 신화에서든 갑자기 한 사람 생애의 새로운 시대, 새로운 단계를 암시하면서 이런 모험에 등장하는 인물은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분위기를 갖는다. 주인공이 필연적으로 맞서야 하는, 무의식적으로는 상당히 익숙해져 있는(의식적으로는 알지도 못할뿐더러 놀랍고 무서운 존재로 여겨지는) 이 인물은 자기 정체를 밝힌다. 그리고 이때, 주인공은 이전에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던 사물이 이제 무가치하게 되어버리는 상황을 경험한다. 막내 공주의 세계에서처럼, 황금 공이 샘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 뒤, 주인공은 잠깐이나마 일상의 생활로 되돌아오나, 생의 의미는 느끼지 못한다. 이때, 어떤 힘에 대한 일련의 조짐이 나타난다. 이 세계의 문학 가운데서 모험에의 소명을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실례인, 아래에 소개할 <네 가지 조짐>의 전설에서처럼, 이러한 소명은 마침내 부정하지 못할 국면에 이른다.
p.82-83. 세계 전역의 신화와 민화는,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제 이득으로 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래란 생과 사의 부단한 연속만은 아니다. 개인이 가진 현재의 이상과, 미덕과, 목적의 체계가 어떻든 이득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이고 또 보장되어 있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다, 밤과 낮으로.
나는 도망쳤다, 세월의 녹문(綠門)으로,
나는 내 마음을 피신시켰다, 미궁의 미로 속으로.
눈물 속에서, 울음을 참으며 나는 그로부터 몸을 숨겼다.
인간은 밤이고 낮이고, 자신의 어지러운 심성의 폐쇄된 미궁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자기의 이미지인 신적인 존재에 쫓긴다. 문을 나가는 길은 막힌 지 오래다. 출구는 없다. 인간은 사탄처럼, 죽자고 자기 자신에게 매달린다. 이때 그가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혹자는 그러다 신 안에서 마침내 파멸하기도 한다.

p.87. 실재로 고의적인 내향성은 창조적인 정신의 고전적인 방편 중의 하나이고, 이를 효율적인 장치로 응용할 수도 있다. 이방편은 심적 에너지를 심층으로 몰아 무의식적 유아기의 이미지 및 원형적 심상이라는 잃어버린 대륙을 활성화시킨다. 그 결과 의식의 분열이 다소간 일어날 수 있음도 물론이다(신경증, 정신병, 겁을 집어먹은 다프네의 혼비백산이 그것이다). 그러나 인격이 이 새로운 힘을 흡수하고 통합할 수 있으면 당사자는 자기의식의 초인간적인 단계 및 완전한 통제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인도 요가수련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서양의 창조적인 정신도 이런 길을 걸어왔다.

p.92.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세계 전역의 모든 신화에도 두루 통용된다. 『코란』에는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알라 신뿐>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문제는 어떤 기적의 힘이 이를 가능케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비밀은 바로 이 『아라비안 나이트』의 다음 단계에서 드러난다.

p.95-96. 영웅을 도와주는 노파나 요정 노파는 유럽의 민담에 자주 등장한다. 기독교의 성인전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이 역할을 맡는다. 성모의 주선으로 성자는 천주의 자비를 얻는 것이다. 지주녀는 그 줄로써 태양의 운행을 통제할 수 있다. 우주 태모(宇宙太母, cos-mic Mother)의 보호를 받는 영웅은, 어떤 가해도 받지 않는다.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테세우스가 미궁의 모험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은 테세우스가 미궁의 모험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은 단테의 작품에서 베아트리체와 성모라는 여성의 모습으로, 그리고 괴테의 파우스트 에서는 그레첸, 트로이아의 헬렌, 그리고 성모로 나타나는, 영웅의 보호령(保護領, guiding power)이다. 삼계(三界)의 위난을 안전하게 두루 거친 끝에 단테는 이렇게 기도한다.

p.96-97. 이러한 존재는 자비로운 힘, 즉 숙명적인 보호 세력을 표상하고 있다. 영웅이 빠져드는 환각은 곧 안식처이며, 낙원의 평화에 대한 약속이다. 모태 안에서 처음으로 경험했던 이 낙원의 평화에 대한 약속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 약속은 현재를 지탱케 하고 과거와 미래까지 주관한다(따라서 알파이자 오메가다). 이러한 약속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여러 단계에 이르는 삶의 문턱을 넘으면서, 그리고 삶을 자각하면서 무산의 위기를 겪지만 보호 세력은 항상 영혼의 지성소에, 심지어는 이 세상의 낯선 사건에 내재하거나 그 배후에 존재한다. 모험을 나선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그 존재를 믿기만 하면 시공을 초월한 안내자는 언제나 나타난다. 소명에 응답했고, 용기 있게 미지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영웅은 모든 무의식의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 대자연 Moher Na-ture은 항상 위대한 임무를 지원한다. 영웅의 행동이 그 사회가 예비하고 있는 것과 일치될 때, 그는 흡사 역사적 변화의 리듬을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러시아 원정에 즈음해서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미지의 종국으로 떠밀리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내가 그곳에 이르는 순간, 내가 불필요하게 되는 순간, 나를 갈가리 찢는 데는 한 입자의 원자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인류가 힘을 모두 합치더라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드물지 않게 초자연적인 외부 조력자는 형태상 남성으로 나타난다. 동화에서 영웅에게 나타나 영웅에게 필요한 호부(액막이)를 주거나 충고를 해주는 것은 숲속의 난장이, 마법사, 은자, 목동, 혹은 대장장이인 것이 보통이다. 고급 신화에서는 이 역할을 맡는 조력자는 스승, 나룻배 사공, 영혼을 내세로 안내하는 안내자로 발전한다.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서 이러한 안내자는 헤르메스와 메르쿠리우스이고, 이집트에서는 토트(따오기 비슷한 신)이며, 기독교 문화권에선 성령이다.
p.104-105. 이 말을 들은 마이무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마이무나는 날개로 다나시를 몹시 쳤다. 어찌나 세게 쳤던지 다나시로서는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마이무나가 명령했다.
「이 저주받은 것아, 내 너에게, 사랑하는 분의 더없이 준수하신 모습에 기대어 명하노니, 이 길로 날아가서 네가 그처럼 어리석게 사랑한다는 그 공주를 데려오너라. 서둘러 데려와 둘을 나란히 눕혀놓고 보자 어느 쪽이 아름다운지 곧 알게 되리라」
이렇게 해서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 삶을 거부하던 카마르 알 자만의 운명은 의식적인 의지의 협력이 없이도 완성되기 시작했다.

p.105. 자신을 안내하고 자신을 도와줄 운명을 인격화함으로써 영웅은 모험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이윽고 한 단계 어려운 영역의 입구에서 <관문의 수호자>를 만나기에 이른다. 이러한 수호자는, 영웅의 현재 상황, 혹은 삶의 지평의 한계를 상징하면서 사방에서(위 아래까지) 세계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수호자 뒤로는 어둠이며, 미지의 세계이며, 위험하다.

p.106. 중앙 아프리카에서는 이런 반인 반수 괴물이 조우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네가 나를 만났으니 마땅히 싸워야 한다」
만약 사람에게 지면, 이 괴물은, 「나를 죽이지 마십시오. 의술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하고 애원한다. 이렇게 되면 이 괴물과 싸워 이긴 사람은 용한 의사가 된다. 그러나 이 반인 반수의 괴물(<이상한 것>이란 뜻인 <치루위>라고 불리어진다)이 이기면, 진 사람은 죽음을 당한다.

p.112-113.그러나 이 뱀, 즉 메는 참으로 무서운 존재다. 섬 사람들은 이 뱀은 자기를 본 사람의 친척으로 변한다고 믿는다. 자기 생활권이라는 벽에서 한 발이라도 밖으로 나가는 영웅은 반드시 이런 괴물(몹시 위험하면서도 때로는 마법의 권능을 베푸는)과 만나야 한다. 동양의 이야기 두 가지를 더 들어보자. 이 두 이야기는 영웅이 겪는 복잡한 관문 통과의 다의성과, 영웅의 공포는 완전한 정신적 무장 앞에서 사라지겠지만, 자기 능력을 과신하는 무모한 영웅이 이 관문 통과에는 실패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인도 북부 베나레스 출신의 어느 대상 우두머리에 관한 것이다.

p.119. 그는 오무기 태자를 보내주었다. 미래의 부처는 그에게 법을 가르쳐 조복(調伏)시키고, 스스로를 부정하게 한 다음, 숲에서 보시를 받는 정령으로 화신케 했다. 도깨비를 깨우친 태자는 숲을 빠져나와 숲 어귀의 인간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고는 가던 길로 걸음을 재촉했다.
우리가 오감(五感)으로 집착하고 있는 세계의 상징, 그리고 육체적인 어느 기관에 의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상징인 그 도깨비는 미래의 부처가 덧없는 이름과 물리적인 성격의 다섯 가지 무기로 더 이상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름할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여섯 번째의 무기로 바꾸어 대항하자 조복한것이다. 이 여섯 번째 무기가, 명(名)과 형(型)이라는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원리의 지혜라는 천상적 벼락인 것이다. 여기에서 상황은 일전한다.

p.123. 신전 안, 고래의 배, 세계라는 한정된 공간 건너 위, 아래로 보이는 천상적 공간은 결국 하나다. 모두가 같은 것이다. 신전에 접근하거나 들어가는 자들이 기괴한 괴수, 즉 용, 사자, 마검을 든 괴물 살해자, 욕지기나는 난장이, 날개 달린 소에 의해 보호를 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괴수들은, 한 차원 심화된 내적 침묵과 만날 준비가 되지 않는 자들을 지켜주는 관문들의 수호자이다. 이들은, 인습 세계를 특징짓는 신화적 도깨비, 혹은 두 줄로 난 고래의 이빨과 일치하는 존재들로서 존재의 위험한 측면을 보여주는 예비적인 경고의 화신이다. 이들은, 신자가 신전으로 들어가는 순간 변형을 체험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인다. 이 순간 신도의 세속적 성격은 사라진다. 그는 뱀이 허물로 싸여 있듯이 이 신전을 허물로 삼는다. 신전 안에서 신도는, 시간적으로는 이미 죽어 세계의 자궁, 세계의 배꼽, 지상의 낙원으로 돌아갔다는 암시를 받는 수도 있다. 사람들 가운데엔 그저 물리적으로 신전 수호자 앞을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괴물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 될 수는 없다. 침입자가 이 성전을 제대로 거치지 못하는 한 얻은 것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러한 괴수들을 그저 괴물로만 본다. 따라서 그들은 이 괴수들 손에 접근부터 거부당한다. 그렇다면 비유적으로 보아,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과, 고래의 입을 향한 영웅의 돌진은 같은 모험인 셈이다. 즉 회화적 언어로 말하면 둘 다 생의 구심화 행위, 거듭나는 행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p.124. 세계 전역에서, 용을 죽임으로써 삶을 비옥하게 하는, 신비스러운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들은 오시리스처럼 그 몸을 난자당하는 등, 세계를 개혁하는 위대한 상징적 행위까지 그 몸으로 짊어졌다.

2. 입문
p.128-130. 일단 관문을 통과한 영웅은 기묘할 정도로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웅은 이곳에서 거듭되는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와 모험에서 가장 흥미롭게 다루는 부분도 바로 이 국면이다. 이 국면은, 기적적인 시험과 시련을 다룬 세계의 문학을 창출해 왔다. 영웅은 거듭나는 데 필요한 충고와 호부(액막이), 그리고 이 영역에 이르기 전에 만났던 초자연적인 조력자의 밀사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어쩌면 모험 당사자가 자신의 초인간적 여행 도정의 도처에 자비로운 권능이 있어서 자기를 도와준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인지도 모른다.
<어려운 임무>라는 모티프의 실례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또 가장 매력적인 것은 잃어버린 애인 쿠피도(에로스)를 찾는 프쉬케의 경우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모든 기본적 역할이 역전된다. 즉 신랑이 신부를 찾으려고 애쓰는 대신 신부가 신랑의 사랑을 얻으려고 목을 늘이며, 엄부가 청년으로부터 딸을 지키려고 애쓰는 대신, 시기심 많은 어머니인 베누스(아프로디테)가 신부로부터 자기 아들 쿠피도를 감추려고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프쉬케가 베누스에게 아들 있는 곳을 가르쳐달라고 애원하자, 베누스는 프쉬케의 머리채를 잡고 머리를 땅에다 사정없이 메치고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밀, 보리, 기장, 양귀비 씨, 완두, 렌즈 콩, 그리고 붉은 콩을 무더기로 쌓아 놓고는 어두워지기 전까지 종류별로 골라내라고 명했다. 프쉬케는 개미 대군(大軍)의 도움을 받아 명령대로 했다. 베누스는, 이번에는, 위험한 숲의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계곡에 사는 야생 양의 금모(金毛)를 모아오라 했다. 이 양은 뿔이 날카롭고 이빨에는 독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초록빛 갈대가 그 방법을 일러주었다. 그 양이 지나는 길목의 갈대에 묻은 금모를 모으면 된다고 한 것이다. 베누스 여신은, 잠들 줄 모르는 양이 지키고 있는 바위 꼭대기, 얼어 있는 샘에서 물 한 항아리를 길어오라고 했다. 이번에는 독수리가 다가와 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을 도와주었다. 마지막으로 프쉬케는, 명계의 심연(深淵)으로 내려가 초자연적인 아름다움을 한 상자 가져오라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높은 탑루가 프쉬케에게 명계로 내려가는 길을 가르쳐주고, 카론에게 줄 동전과 케르베로스에 줄 뇌물까지 주어 그 길을 다녀오게 했다.
프쉬케의 저승 여행은, 동화나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이 겪었던 수많은 모험 중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북극 지방 사람들(라프 족, 시베리아 인, 에스키모 그리고 아메리카 인디언의 일부 종족)의 샤먼들이 잃어버린 사물을 찾거나, 병든 영혼을 치료할 때 하는 모험이다. 시베리아의 샤먼은 모험에 대비해서 새나 사슴, 즉 샤먼 자신의 영혼의 모습이며, 자기 망령의 본체인 짐승을 상징하는 마법의 의상을 걸친다. 그의 북은 곧 독수리, 사슴, 말 같은 동물이다. 그는 이런 동물과 함께 날거나, 타고 달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든 지팡이 역시 그를 돕는 조력자 중 하나다. 거기에다 그는 보이지 않는 요정을 거느린다. 일찍이 라플란드 Lappland로 갔던 한 여행자는 죽음의 나라를 향한 이 기이한 사자(使者)의 불가사의한 여행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p.132. 우리는 모든 원시 종족에서 주술사가 사회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주술사가 신경증적, 혹은 정신병적이거나, 아니면 그의 주술이 신경증이나 정신병과 같은 메카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확인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인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理想)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 유아기 상태란 성장의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수정되고 역전되다가 현실에 적용될 필요가 있을 때 재수정된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거기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충동의 유대 libidinal tie를 강화하고 있다. 이 유대가 없다면 인간의 집단은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주술사는, 그 사회 성인들의 심성에 내재하고 있는 상징적 환상 체계를 출몰시키는 역할을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주술사란, 이러한 유아적 놀이를 주도하고, 공통의 근심거리를 밝혀내는 지도자인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방에서 성공하고 현실적인 어려움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잡귀와 대리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p.142-143. 수메르 신화는 서구 세계에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수메르의 신화는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페니키아 전통 및 성서 전통(회교와 기독교를 잉태시킨)의 근원인 동시에 켈트인, 그리스인, 로마인, 슬라브인, 독일인의 이교적 종교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p.144. 모든 장애물이 극복되고 도깨비가 퇴치되었을 때 영웅이 치르는 마지막 모험은, 승리한 영웅과 세계의 여왕인 여신과의 신비스러운 혼례(婚禮)로 표상된다. 이로써 영웅은 천저(天底), 천정(天頂), 혹은 땅 끝, 우주의 중심선, 신전의 성소, 혹은 마음속의 가장 어두운 방 속에서 위기를 맞는다. 아일랜드 서부 사람들은 아직도 외로운 섬의 왕자와 투버 틴다이의 여왕 이야기를 한다.

p.150. 플뤼켈 교수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마음, 정신, 혹은 영혼의 개념과 아버지, 혹은 남성이라는 관념, 또 한편으로는 육체 혹은 물질(materia, 즉 어머니에게 속하는)의 개념과 어머니 혹은 여성적 원리라는 관념은 극히 보편적인 관련을 갖는다. 이 관련성에 비추어볼 때, 어머니(우리 유대-기독교의 유일신교에 있어서)에 관련된 정서나 감정이 억압당하면, 인간에 대한 것이든 일반적인 사상(事象)에 대한 것이든 영적 요소를 과대평가하거나 강조하는 경향과 더불어, 인간의 육체, 땅, 그리고 물질적 우주에 대한 혐오, 경멸, 염증 혹은 호전적 태도를 취하게 하는 경향을 창출하는 수가 있다. 모르긴 하나, 철학에 있어서의 지나친 이상주의적 경향은 어머니에 대한 이러한 반응의 이상화 현상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이며, 물질주의의 교조적이고 편협한 양식은, 원래 어머니와 관련된 억압된 감정에의 희귀인 방향전환 때문인 듯하다>

p.153-154. 고도의 이해력을 갖춘 천재만이 이 숭고한 여신의 계시를 읽을 수 있다. 이해의 정도가 낮은 사람을 위해 여신은 그 신통력의 정도를 낮추어, 그들의 지진한 능력에 알맞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신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여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엄청난 재앙일 수 있다. 수사슴이 된 악타이온의 예에서 우리는 이미 이런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악타이온은 성자가 아니었다. 정사적인(유치한) 욕망이나, 놀라움이나, 공포에 반응하는 인간으로서 엿보아서는 안 될 계시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일개 사냥꾼에 지나지 않았다.
신화학의 심상 언어에서 여자는, 알려질 수 있는 것들의 전체성으로 표상된다. 알게 되는 존재가 곧 영웅이다. 영웅이 삶의 다른 형태인 입문의 과정을 진행함에 따라 여신의 형상은 그에게 일련의 변형 과정을 체험하게 한다. 여신은 항상 영웅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할 수 있지만 영웅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 여신은 그를 유혹하고, 인도하고, 그의 발목에 채인 족쇄를 깨뜨리게 한다. 그리고 만일 영웅의 능력이 여신에 미치면 이 양자, 즉 아는 존재와 알려지는 존재는 갖가지 제약에서 해방된다. 여성은 감각적인 모험의 정점으로 영웅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열등한 눈으로 보면 여신은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무식한 눈으로 보면 범용하고 추악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가 아닌,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p.158-159. 동화에 나오는 공주는, 우물가에서 개구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도망친 그 다음날, 누군가가 성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개구리가 성문 앞에 와, 약속을 지키라고 조르고 있었다. 개구리는, 공주가 자기를 싫어하는 데도 불구하고 개구리는 식탁 앞 의자로 다가와 공주와 함께 조그만 황금 접시와 황금 잔에 든 음식을 함께 먹었고, 심지어는 공주의 조그만 비단 이부자리 안에서 함께 자야 한다고 졸라대기까지 했다. 짜증이 몹시 났던 공주는 개구리를 집어 벽에다 메치고 말았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아, 개구리가 아니라 왕자였다. 눈길이 다정하고 아름다운 왕자였다. 이 대목에 이르면 결과는 뻔하다. 두 사람은 결혼한 뒤 화려한 마차를 타고 왕자의 나라로 가서 왕과 왕비가 된다는 것이다. 아니, 이렇게 되는 수도 있다. 프쉬케가 자기에게 맡겨진 어려운 문제를 모두 풀어내자 제우스는 프쉬케에게 불사의 영약을 내려 주었다. 이렇게 해서 프쉬케는 사랑하는 애인 에로스와 더불어 완전한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었다.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모 몽소 승천(聖母蒙召昇天, The Assumption) 대축일에 이와 같은 비의(秘義)를 치른다.
「성모 마리아는, 왕 중 왕이 번쩍이는 보좌에 앉아 있는 천상의 신방(新房)으로 올라간다」 「오, 사려 깊은 성처녀시여, 아침같이 밝은 신이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아름답고 다정하신 이여, 오, 시온의 딸이시여, 달같이 다정하시고 해같이 영원한 분이시여!」

p.160. 현대의 정신분석가 진료실에서는, 영웅 모험의각 단계가 환자의 꿈과 환각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정신분석가는 조력자, 즉 입문식의 사제가 되어 환자의 무의식의 바다의 깊이를 잰다. 그리고 최초의 단계가 끝나면 환자의 모험은 항상 어둡고, 무섭고, 욕지기나고, 마술 환등 속에서 보는 듯한 공포의 여행으로 진행되게 마련이다.
참으로 까다롭고 재미있는 것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의식적 견해가 실제의 현실적 삶과 잘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것, 우리 친구들에게 내재해 있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기 방어적이고, 악취가 나고, 탐욕적이고 음탕한 흥분 상태, 즉 우리 조직 세포의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를 윤색하고, 회칠을 하고, 재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름에 빠진 파리, 우리가 먹을 국에 빠진 머리카락을 누군가 다른 불유쾌한 사람의 허물로 돌리려 한다.

p.161. 왕비를 차지했을 때 오이디포스가 맛보았던 순진한 기쁨이, 그 왕비의 정체를 알고부터는 심한 정신적 고뇌로 바뀐다. 햄릿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아버지의 도덕적 이미지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햄릿과 마찬가지로 오이디포스도 이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것들에 등을 돌리고, 그 근친상간의 악몽을 주는 사치스럽고, 교정 불가능한 어머니의 세계보다 훨씬 어두운 왕국을 향하는 모험가로 변한다. 삶의 배후에 있는 삶을 찾아나서는 모험가는 그녀의 유혹을 물리치고, 현실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에테르(精氣) 속으로 날아 들어가야 한다.

p.170-171. 아버지의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피해자의 에고가 투영된 것이다. 즉 지난날 존재했던 예민한 유아기의 장면이 전면으로 투사됨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교육적으로 백해무익한 이러한 우상 숭배에 집착한다는 것은 당사자를 죄의식에 빠지게 하고, 잠재적인 성인의 정신을 아버지,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세상에 대한 온전하고 현실적인 견해로부터 당사자를 봉쇄하게 된다. <화해 atonment>,즉 <하나되기 at-one-ment>란 스스로 만들어낸 두 마리의 괴물(신(초자아)으로 보이는 용과 죄악(억압된 이드))으로 보이는 용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자면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는데 이게 예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사자는 아버지가 자비로우며, 이 자비를 믿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믿음의 중심은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신의 족쇄 바깥으로 이동하고, 믿음의 중심이 이동하면 무섭고 잔인한 측면은 사라진다.
영웅이, 조력자인 여성에게서 희망과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다. 여성의 마법(꽃가루라는 호부, 중재의 능력) 덕분에 영웅은, 자아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하는 아버지의 무서운 입문 의식 경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영웅은, 아버지의 끔찍한 얼굴을 믿을 수 없으며 그 믿음을 다른 곳에다 기울인다.(즉 지주녀, 혹은 성모). 지원을 보장받은 영웅은 위기를 견디어 나가고, 결국에 가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투영하고 있지만 사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p.173-174. 갖가지 시련을 다 치른 자를 집안으로 용납하는 아버지 입장이 얼마나 어려우며, 얼마나 주의를 요구하는가는, 그리스의 유명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파에톤의 불행한 행적이 잘 그려내 보이고 있다. 이디오피아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파에톤은 아버지를 찾아보라는 친구들의 조롱을 받자 페르시아와 인도를 지나 태양의 궁전을 찾아 나선다. 어머니가 그에게, 아버지는 태양 마차를 모는 <포이보스 Phoebus>, 즉 <빛나는 자>라고 일러준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p.175-176. 「적어도 아비의경고만은 명심하도록 하여라. 채찍질은 삼가고 고삐는 꼭 잡고 있어야 한다. 말은 채찍질하지 않아도 자진해서 달릴 것이다. 하늘의 다섯 권역을 지나는 길로 똑바로 들어서서는 아니된다. 왼편으로 비켜가도록 하여라. 내가 지났던 바퀴 자국이 보일 것인즉 네 길잡이로 삼도록 하여라. 하늘과 땅이 똑같은 열을 받을 수 있도록 너무 높게도, 너무 낮게도 날지 않도록 하여라. 너무 높이 올라가면 하늘이 탈 것이요, 너무 낮게 내려오면 땅에 불이 붙을 것이어서 하는 소리다. 그 한가운데로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서둘러야 한다.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순간에도 밤은 이미 서쪽 해안에서 제 목적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이미 그 조짐이 보이고 있지 않느냐? 보아라, 날이 밝아오고 있다. 아들아, 네 힘에 의지하기보다는 행운이 네 길을 인도하게 하여라. 자, 이제 고삐를 잡아라」

p.177.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이 부모의 이야기는, 입문이 잘못 되었을 때 입문자의 삶에는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확인시켜 준다. 한 아이가 자라, 어머니 품속의 목적인 자장가를 떠나 어른의 세계에 눈을 돌리게 될 때, 이 아기는 정신적으로 아버지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의 상징이요, 딸에게 있어서는 미래 남편의 상징이다. 알든 모르든, 그리고 사회의 지위가 어떻든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이 더 넓은 세계로 나갈 때 마땅히 거쳐 가는 입문식의 사제다. 어머니가 그때까지 <선>과 <악>을 표상하고 있었듯이, 지금부터는 아버지가 그 역할을 맡는다.

p.178. 입문에 대한 전통적 인식은, 부모의 이미지에 대한 정서적 관련성을 철저하게 바로잡아주면서 그가 살아갈 삶의 기술과 의무와 특권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수렴하고 있다. 비법 전수자(아버지 혹은 아버지를 대신하는 사람)는, 유아기의 부적당한 카텍시스 cathex-es, 리비도가 특수한 사람, 물건, 또는 관념을 향하여 집중 발현되는 현상)로부터 놓여난 입문자에게만 의식(儀式)의 상징을 베풀게 되어 있다. 이런 입문자라야 자기 강화라는 무의식적(혹은 의식적,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동기나 개인적인 선호나 혹은 증오 때문에 정당하고 비개인적인 힘을 오용할 가능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입문의 영광을 입는 자는, 자기 인간성을 모두 박탈당하고, 비개인적인 우주적 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그는 이제 거듭난 자이며, 그 자신이 곧 아버지다. 그는 끊임없이 삶의 싸움판에 나서야 하고 입문의 사제, 안내자, 태양을 향한 문 노릇을 해야 한다. 요컨대, 선악에 대한 유아기 환상을 떨치고, 희망과 공포에서 놓여나 평화롭게 존재의 계시를 이해하고 우주 법칙을 엄숙하게 경험하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입문자를 인도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p.199. 2세기의 그노시스파 기독교인들의 기록이나, 중세 유태인 신비주의자들은 육(肉)으로 된 말씀 Word Made Flesh을 양성구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여성적 측면의 이브가 형태를 얻기 전, 갓 창조된 아담의 상태가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헤르마프로디토스(헤르메스 Hermes와 아프로디테 Aphrodite의 자식인 Hemaphroditos)뿐만 아니라 사랑의 신 에로스(플라톤에 따르면 <으뜸신>)도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갖춘 신이었다.
p.210. 은하계 건너 은하계, 우주의 세계 건너 세계, 별의별 존재의 세계(은하수를 경계로 한 지금의 이 우주뿐만 아니라 공간 끝까지 뻗어있는)에서 무한한 공(空)의 본질을 본질로 삼고, <대자대비로 굽어 보시는 주(主)>의 자식이며, 무한히 계속되는 무상의 허상이며, 긴 꿈의 세계다. 그러나 이분의 이름은 <내면에서 보이는 주 The Who is Seen Within>이기도 하다.

p.214-215.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적으로 빗나간 욕망과 적의 때문에 비현실적인 공포와 애증의 이중 감정에 시달리는 환자를 치료해 주는 기술이다. 이러한 증상에서 놓여난 환자는 보다 현실적인 공포나 적의, 육욕적 종교적 관행, 전쟁, 유희, 가사 등 그가 속한 문화가 베푸는 일을 비교적 만족스럽게 대처해 나갈 수 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구역을 벗어나 어렵고도 위험한 여행을 한 사람이 있다면 이러한 여행에의 관심도 오류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인 가르침의 목적은 개인을 일반적인 미망의 상태로 되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그 미망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이다. 종교는 욕망, <에로스Eros>와 적의, 즉 <죽음 Thanatos>를 바로잡는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이렇게 되면 새로운 미망의 상태가 만들어질 뿐이다) 저 유명한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에 따라 충동을 뿌리째 <꺼버리는>방법을 통해서 그 목적을 달성한다. 불교의 팔정도는, 이치를 올바르게 보는 정견, 정견으로 본 이치를 올바르게 생각하는 정사유, 진실한 지혜로 구업을 닦는 정어, 잘못된 행동이 없게 하는 정업, 정당한 법으로 살아가는 정명, 꾸준히 매진하는 정정진, 진실한 지혜로 정도를 생각하는 정념, 진실한 지혜로 선정에 드는 정정이다.
마지막 <미망과 욕망과 적의의 적멸(寂滅)>(즉 열반)과 더불어 마음은, 생각이 실체가 아님을 깨닫는다. 생각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참된 경지에 들어간 마음은 안식을 얻는다. 상태는 육체가 사윌 때까지 계속된다.

p.232. 우리 모두가 무의식 속에 간직하고 있는 유아기적 환상은, 불멸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신화와 동화와 교회의 가르침에 반영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현상은, 마음이 이러한 이미지와 더불어 안식을 찾는다는 뜻에서, 그리고 예부터 익히 알려져 있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는 의미에서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온통 경건하게 만들어버리는, 유치한 행복에 젖어 있는 무리와 진정으로 자유로운 무리 사이에는 엄청난 심연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상징은 무너지고 초월 당한다.

p.249.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차례로 용을 쓰러뜨리고, 관문과 관문을 차례로 지남에 따라, 영웅이 고도로 갈망하는 신의 모습은 점점 커져, 이윽고 우주 전체에 가득 차게 된다. 영웅의 마음은 마침내 우주의 벽을 깨뜨리고 모든 형상(모든 상징, 모든 신성(神性))의 경험을 초월하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변의 공(空)에 대한 자각이다.
단테가 정신적 모험을 마지막 한 걸음까지 마치고 천상의 장미에 싸인 삼위 일체 신Triune God의 상징적 환상 앞에 썼을 때도 마찬가지다. 성부, 성자, 성신의 형상을 두루 경험한 그에게도 아직 한 가지 경험이 더 유보되어 있었다.
3. 귀환
p.262. 영웅이 도망치는 대목에서 또 하나 자주 등장하는 방법은, 도망치는 영웅이 끊임없이 장애물을 던져 추격을 지연시키는 수법이다.

p.263. 심연의 권능에는,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된다. 동양에서는, 엄격한 지도와 감독 없이 심리적으로 해이해진 상태에서의 요가 수련은 몹시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수련자의 명상은 그 발전 단계에 따라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수련자의 상상력은 데바타(devate: 수련자의 수준에 알맞은 신성)에 의해 각급 단계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 정신을 수련한 다음에야 수련자에게는 홀로 초월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순간이 온다.
p.280. 이제 우리는 이 여행의 마지막 고비에 이르렀다.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모험은 서곡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신화 영역에서 이상 현실로 귀환하는 영웅의, 역설적이고 험난한 관문 통과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구조를 받든, 내적 충동에 따라 살아나든, 신들의 안내를 받든, 영웅에게는 오래 잊고 있던 곳으로 애써 얻은 전리품(홍익)을 가지고 돌아가야 할 단계가 남는다. 뿐만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재생의 영약을 가지고 돌아가 원래 속해 있던 사회와 맞서면서 그들의 까다로운 신문과 서릿발 같은 증오와 맞서야 한다.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는 선한 사람들까지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p.294. 카마르 알 자만의 기나긴 이야기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운명이 일상의 삶으로 구체화되는 완만하면서도 놀라운 역사다. 그러나 이 운명이 모든 이에게 다 구체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안으로 뛰어들어 이를 체험하고, 반지를 얻어 다시 현실로 귀환한 영웅에게만 가능하다.

p.297.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말하자면 시간을 초월한 세계인 저승과, 일상적인 세계인 이승을 두루 돌아다니는 자유(그것도 한 세계의 원리로 다른 세계를 오염시키지 않되, 한 세계의 선으로써 다른 세계의 존재를 깨우치면서)는 거장들의 재능에나 어울리는 자유다. 니체는, 우주적인 춤의 신 Cosmic Dancer은, 한곳에 붙박혀 있지 않고 이곳저곳을 가볍게 떠돌아다닌다고 주장한다. 물론 한 관점에서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관점에서의 통찰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다. 신화는, 이미 변모한 신비의 형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굳혀 내보이지는 않는다. 이 경우 변모의 순간은, 마땅히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고구되어야 할 귀중한 상징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변모한 당시의 순간이 바로 이런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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