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서지희
  • 조회 수 2207
  • 댓글 수 5
  • 추천 수 0
2008년 4월 14일 11시 13분 등록
p.305.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언급하는 바의 궁극적인 의미, 즉 <진로>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의 성격, 혹은 일련의 성격(3원적이든, 2원적이든, 1원적이든, 다신론적이든, 유일신론적이든, 단신론적이든, 회화적이든, 언어적이든, 문서로 기록된 사실이든, 묵시적 환상이든)을 최종적인 의미로 읽거나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징을 투명하게 닦아 우리에게 오는 진리의 빛이 이에 가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하느님이, 인간의 생각이 미칠 수 없는 높은 곳에 계신다는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도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 셈이다.>
<아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요, 알지 못하는 것은 아는 것이다.〉

p.306-307. 이러한 무애적(無碍的) 존재의 궁극적인 상태를 표상하는 것이야말로 신화적 존재의 대종을 이룬다. 특히 동양의 사회적 신화적 문맥에서 그러하다. 은자의 숲에 은거하는 현자와 운수행각(雲水行脚)의 박탈승은 동양의 삶과 전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신화에서 이러한 인물은 방랑하는 유태인(추방당한 무명의 존재지만 주머니 속에는 고귀한 진주가 들어 있는), 개에게 쫓기는 거지, 음악으로 듣는 자의 영혼을 위무하는 방랑 시인, 가장(假裝)한 신, 오딘, 비라코챠, 에드슈로 나타난다.
<때로는 바보로, 때로는 현자로, 때로는 왕관에 미친 자로, 때로는 방랑자로, 때로는 예언자처럼 부동(不動)하는 존재로, 때로는 자비로운 얼굴로, 때로는 귀인(貴人)으로, 때로는 폐덕자로, 때로는 무명인으로…… 깨달은 자는 이런 상태에서도 지복의 극락을 산다. 무대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배우 이전에 그 자신이듯이, 불멸의 지혜를 깨친 자는 늘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

4 열쇠
p.316. 영웅의 모험은 앞의 도표로 요약될 수 있다.
원래 살던 오두막이나 성에서 떠난 신화 속 영웅은 꾐에 빠지거나, 납치당하거나 자진해서 모험의 문턱에 이른다. 여기에서 영웅은 길을 안내할 그림자 같은 부정적인 존재를 만난다. 영웅은 이를 퇴치하거나 이 권능을 지닌 존재와 화해하여 산 채로 암흑의 왕국으로 들어가거나(골육장산, 용과의 싸움: 제물 헌납, 혹은 후부에 의지하여), 적대자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의절, 고난). 이 문턱을 넘어선 영웅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친숙한 힘에 이끌려 이 세계를 여행하는데, 경우에 따라 위협을 받기도 하고(시련),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기도 한다(조력자) 신화적인 영역의 바닥에 다다르면, 영웅은 절대(絶大)한 시험을 당하고, 그 시험을 이긴 보상을 받는다. 이 승리는 세계의 어머니인 여신과의 성적 결합(신성한 결혼), 창조자인 아버지에 의한 인정(아버지와의 화해), 그 자신의 신격화(神格化), 혹은 적대적인 능력이 그의 힘에 벅찰 경우에는 전리품의 가로채기(신부 훔치기, 불 훔치기)로 나타난다. 원래 이 승리는 자기의식의 확장이며, 존재와의 합일이다(깨달음, 변모, 자유). 마지막 단계는, 귀환이다. 영웅이 그 권능의 축복을 받은 경우 전리품은 영웅을 보호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영웅은 도망치고 부정적인 세력의 추격을 받는다(모습만 바꾸며 도주하기, 장애물을 피하며 도주하기). 귀환의 관문에서 초월적인 권능의 소유자는 뒤에 남아야 한다. 영웅은 혼자ㅓ 그 무서운 왕국에서 귀환한다(귀환, 부활). 그가 가져온 전리품(홍익)은 세상을 구원한다(불사약). 구조가 단순한 원질신화가 보이는 다양한 변화를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화 중에는 전체 이야기의 전형적인 요소(시련 모티프, 도망 모티프, 신부 사취)의 한두 가지를 따로 떼어 부연하는 설화도 있고, 일치된 연속 이야기(가령『오딧세우스 이야기』처럼)로 꿰어 맞추는 설화도 있다. 다른 인물과 에피소드가 녹아들어올 수도 있고, 단일의 요소가 되풀이되거나 상당히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p.322. 세례에 대한 일반의 해석은 <원죄를 씻는 의식>으로 되어 있다. 즉 재생이라는 측면보다는 정화의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차적인 해설이다. 또 설혹 전통적인 탄생의 이미지가 기억되고 있다 해도 이에 선행하는 결혼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신화적 상징은 그 함축적인 의미 그대로 계승되어야 한다. 즉 수천 년에 걸친 영혼의 모험을 유추에 의해 표상해 온 만큼 그 대응 관계의 전 체계를 섣불리 펼쳐보이기 이전에 그것이 지닌 모든 함축적 의미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2부 우주 발생적 순환
1. 유출
p.325-326. 오늘날 지식인들에게, 신화의 상징 체계가 지닌 심리학적 의미를 감지해 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정신분석학자들의 연구가 있은 이후, 신화가 꿈의 내용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꿈이란 정신 역동의 증후라는 사실에는 별 의혹의 여지가 남지 않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C. G. 융, 빌헬름 슈터켈, 오토 랑크, 카알 아브라함, 게자 로하임, 그리고 지난 수십 년간 활약한 많은 학자들은 꿈과 신화 해석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이들의 학설은, 각자 서로 다른 것이긴 하나, 상당히 공통적인 원리 체계에 의해 괄목할 만한 경향으로 수렴된다. 동화와 신화의 패턴 및 논리가 꿈의 패턴 및 논리와 일치한다는 발견과 더불어 오랫동안 의혹의 대상이 되어왔던 고대적 인간의 기괴한 환상은 극적으로 현대인 의식의 표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기담(奇談, 전설적인 영웅의 생애, 조물주들의 놀라운 능력, 죽은 자들의 혼령, 집단의 토템적 조상을 즐겨 그리는)을 통해 인간 행동의 의식 패턴을 이루는 무의식적 욕망, 공포, 그리고 긴장은 상징적 표현을 획득하고 있는 듯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신화 체계란, 전기나 역사, 그리고 우주론으로 오독(誤讀)되어 온 심리학이다.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이를 적절한 의미로 재해석하여 오늘날의 세계에, 인간의 특징적 심층에 관한 풍부하고 웅변적인 자료를 장만해 주고 있다. 여기에 하나의 투시경으로 소개하는 예화들은 동양과 서양, 미개인 및 문명인, 현대 및 고대 <호모사피엔스>의 수수께끼에 관해 지금까지 묻혀 있던 사실을 밝혀준다. 그 전경(全景)은 우리 앞에 있다. 우리는 이를 읽고, 그 일정한 패턴을 연구하고, 그 다양성을 분석함으로써 지금까지 인간의 운명을 조형해 왔고, 앞으로도 우리 사적, 공적인 삶을 주관해 나갈 그 무서운 힘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p.326-330. 이른바 원시적인 민간 신화 체계의 기능이 바로 이것이다. 몽환 상태에 빠지는 샤먼과 입문사제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지혜에 어두운 사람들도 아니고, 유추에 의한 전달 원리에 무지몽매한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이 의지하고, 실제의 의식에서 구사하는 메타포는 수세기(아니 어쩌면 수십 세기)동안이나 고찰되고, 탐구되고, 논의된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사상과 생활의 지주로서 그들이 속한 사회에 봉사해왔다. 그들의 효과적인 입문 의례 양식의 연구, 경험, 이해를 통해 젊은이들은 새로운 세계를 배워왔고 노인들은 지혜를 얻어왔다. 말하자면 그들은 인간 정신의 원천적 에너지와 접해 왔고 이 에너지를 가능하게 해온 것이다. 그들은 불합리하게 신경증적 투사라는 방법을 통해 무의식을 실제 행위에다 연관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완숙하고, 온당하고 실재적인 이해를, 엄격한 통제 아래 유아기적 원망(遠望)이나 공포로 되돌려놓는 것일 뿐이다. 이 말이 비교적 단순한 민간의 신화 체계(원시적인 수렵 종족이 의지하는 신화 및 제의 체계)에도 해당된다면, 호메로스의 서사시, 단테의 『신곡』,「창세기」, 그리고 동양의 시간을 초월한 사원(寺院)이 반영하고 있는 우주적 메타포는 어찌된 일인가?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상징적 심상들은 인간의 삶을 버티고 철학, 시 그리고 예술의 영감을 자극해 왔다. 노자, 부처, 조로아스터, 그리스도 혹은 모하메드에 의해 거론된 전승적 상징(도덕적, 형이상학적 가르침을 전교한 위대한 정신적 스승들에 의해 채용되었던) 덕분에 우리는 암흑이 아닌 깨어 있는 의식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전승된 신화학적 표상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우리는 이러한 표상들이 무의식의 징후(사실은 모든 인간의 생각과 행동)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정신적 원리의 통제되고 의도된 진술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정신적 원리는 인간의 육체의 형태 및 신경 구조처럼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류에 유전된 것이다. 간단하게 공식화한 이 보편적인 교리는, 이 세계의 사기적인 모든 구성물(사물과 존재)은 편재하는 힘에 의한 결과라고 가르친다. 즉 이 힘은 모든 구성물의 생성 원리이고, 그들이 이 세상에 현현해 있을 동안 그들을 지탱하고, 그들을 채우며, 궁극적으로 그들이 돌아갈 귀소(歸巢)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에서는 에너지라고 부르고, 멜라네시아인들은 <마나 mana>, 수우족 인디언들은 <와콘다 wakonda>, 힌두교도들은 <샤크티>, 기독교도들은 <하느님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정신분석가들은, 심성에 나타나는 이 존재를 <리비도 libido>라고 부른다. 이 존재의 우주적 현현이 바로 우주 자체의 구조며 우주의 변화인 것이다.
분화되지 않았으면서도, 도처에서 개체화된 이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은, 바로 이를 인식해야 하는 기관에 이해 좌절당한다. 인간이 지닌 감각 능력의 형식과 인간이 지닌 생각의 범주는 이 권능의 현현 그 자체다.

p.332. 우주적 상징이 종잡기 어려운 역설로 표상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신의 왕국은 내재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외재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은 잠자는 공주, 즉 영혼을 깨우는 편의수단이다. 삶은 공주의 잠이고, 죽음은 공주의 깨어남이다. 자기 자신의 영혼을 깨우는 영웅은, 그 자신이 자기 소멸의 편의수단일 뿐이다. 영혼을 깨우는 신은 그 영웅과 죽음을 함께 한다.

p.333. 우주 발생적 순환은 우주 자체의 반복, 즉 끝없는 세계로 표상된다. 각 순환의 주기 안에는 소멸의 과정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삶이 잠과 깨어 있음의 주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즈테크인들의 설명에 따르면, 4대(四大, 곧 물, 흙, 공기, 불)가 각 세계의 주기를 끝맺는다. 즉 물의 시기는 홍수로, 흙은 지진으로, 공기는 바람으로, 그리고 현재의 주기는 불로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p.357. 우주 발생 순환의 다음 단계는 하나가 여럿으로 분화하는 단계다. 이 단계와 더불어 창조된 세계에는 분명히 상호 모순적인 존재의 두 양상으로 갈라지는 위기가 온다. 파이오레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은 아래층의 어둠 속에서 떠올라 하늘을 밀어올 리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들은 분명히 독립 의지로 움직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들은 모이고, 결의하고, 계획한다. 그러고는 세계를 정리하는 작업을 맡는다. 그러나 우리는 배후에서 <부동하는 원동력 Unmoved Mover>이 꼭두각시 조종자처럼 작용하고 있는 것을 안다.
신화 속에서는 부동하는 원동력, 즉 살아 있는 전능자가 관심의 중심으로 떠오를 때마다 우주의 조형에 대한 초자연적인 자발성이 뒤따른다. 각 구성 요소들은 응축하여 자기네들의 뜻대로, 혹은 창조자의 말 한마디에 움직인다. 저절로 깨어지는 우주적 알껍질의 부분부분은 외부의 도움이 없이도 제자리를 찾는다. 그러나 초점이 살아 있는 존재로 옮겨지면, 즉 공간과 자연의 파노라마를 거기에 거주하는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 이 우주적 풍경에 갑작스런 변모의 그늘이 진다. 세계의 형상은 더 이상 살아 있고, 자라고, 조화를 이루는 사상(事象)의 패턴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완고하게 정지하거나 타성에 머문다. 우주적 무대의 지주가 다시 세워지거나 만들어져야 한다. 땅은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만들어내고, 인간은 땀을 흘려야 빵을 먹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신화는 두 가지 양식으로 나뉜다. 하나의 양식에 따르면 조물주의 능력은 스스로 기능해 나간다. 다른 한 양식에 따르면, 조물주는 주도권을 포기하고 우주 순환의 다음 단계에서 등을 돌려버린다. 후자의 신화 양식에서 나타난 어려움은, 오랜 원초적 암흑이 계속될 동안, 창조된 자식이 우주적 어머니의 품 안에 있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 마오리족의 신화를 빌려 이 주제를 다루어보자. 랑기(Rangi, 하늘)가 파파(Papa, 어머니의 대지)의 배와 너무 가까운 곳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자식들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수 없었다.

p.373. 민간 신화들은 초자연적 발산물이 공간적 형식을 취해 돌입해 들어오는 순간에만 창조 설화를 흡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 신화들은 인간의 상황을 평가한다는 본질적인 점에 있어서 위대한 신화들과 차이가 없다. 이런 신화 체계의 상징적인 등장인물은 의미상(특징 및 행적에서도) 고급 종교의 성화(聖畵)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치하며, 이 등장인물이 넘나드는 불가사의한 세계는 위대한 계시의 세계, 즉 깊은 잠과 깨어 있는 의식 사이에 놓인 세계와 시간, 하나(一者)가 여럿으로 갈라지고, 여럿이 하나(一者)와 화해하는 지대와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다.
3 영웅의 변모
p.396. 이제 우리는 두 단계를 거쳐왔다. 즉 첫 번째는, 비실재적 실재의 직접적인 유출에서 신화적 시대의 유동적이나 시간을 초월한 존재에 이르는 단계, 둘째는, 이 실재적 실재에서 인류 역사의 영역에 이르는 단계다. 유출은 이제 그 극점에 이르렀고 의식의 장은 이제 좁아질 대로 좁아졌다. 전에는 사상의 실체가 보였지만 이제는 그 부수 효과만 인류의 눈, 작고 현실적인 동공의 초점 앞에 모일 뿐이다. 따라서 이제 우주 발생적 순환은, 보이지 않게 된 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갖춘 영웅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세계의 숙명은 바로 이 영웅들을 통해 실현된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추방당한 뒤로 창세기가 그러했듯이, 창조 신화가 전설에 자리를 물려주어야 할 대목이 바로 이 대목이다. 형이상학은 선사학(先史學)에 자리를 물린다. 이 선사학은, 처음에는 모호하고 불분명하나 차츰 그 형태가 자세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영웅은 점차 우화적인 성격을 일탈하다가 다양한 지방적 전승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마침내 전설은, 기록되는 시대라는 빛의 세례를 받게 된다.

p.400. 이러한 관점은, 영웅이란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 지워진다는 관점과 일치한다. 이러한 관점은, 영웅의 전기와 그 고유한 성격과의 관계에 문제를 제기한다. 가령 예수는, 엄격한 고행과 명상으로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인간의 모습을 취한 하강한 신이라고 믿어질 수도 있다. 전자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은 예수와 같은 초월적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 그의 행적을 글자 그대로 흉내내는 수가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견해를 따를 경우, 예수라는 영웅은 글자 그대로 본이 되는 전형이라기보다는 묵상해야 할 하나의 상징이다.

p.409-410. 요약컨대 이렇다. 문제의 숙명적인 아기는 기나긴 암흑의 시간을 견디어야 했다. 이 기간은 극히 위험하고, 장애물이 많은 상황이며, 치욕을 당하는 기간이다. 그는 자기 내부로 깊이, 혹은 미지의 세계인 외부로 던져졌다. 어느 경우든 그를 당혹케 하는 것은 미지의 암흑이다. 이곳은 의외의 존재, 자비로운 동시에 심술궂은 존재의 영역이다. 천사가 나타나기도 하고, 아기를 도와주는 동물, 어부, 사냥꾼, 쪼그랑 할머니, 혹은 농부가 나타나기도 한다. 동물들 사이에서 자라거나, 혹은 지그프리트처럼 생명의 나무 뿌리를 파먹는 땅귀신 사이에서 자라거나, 혹 작은 방에서 혼자 자라면서(이런 이야기는 도처에 널려있다) 이 어린 세상의 신참자는, 헤아리고 이름 붙여질 수 있는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권능이 있음을 배운다. 신화는, 그러한 체험을 견디고, 거기에서 살아나오는 데는 범상하지 않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이런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대개가 힘이 세고, 영리하고, 또 지혜롭다. 헤라클레스는 여신 헤라가 요람으로 보낸 뱀을 죽인다. 폴리네이사의 마우이는, 어머니에게 요리할 시간을 주느라고 태양을 꾀어 그 운행을 늦추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아브라함은, 별과 달과 태양을 주관하는 하느님이라는 존재의 실재를 깨닫기에 이르렀다. 예수는, 논쟁에서 이른바 지혜로운 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어린 시절 부처는 어느 날 나무 그늘에 놓여지게 되었는데, 유모는 나무 그림자가 오후 내내 움직이지 않고, 아기는 요가적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 걸 보고 기겁을 했다.

p.422. 폭군은 자만한다. 그리고 자만은 바로 폭군이 파멸하는 씨앗이다. 폭군은, 자기 힘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만한다. 따라서 그는 그림자를 본질로 오인하는 광대역을 맡고 있는 셈이다. 그 시대 본연의 모습의 근원인 암흑에서 다시 나타난 신화적 영웅은 폭군을 파멸로 몰아넣는 비밀을 알고 있다. 단추 하나 누르는 듯한, 참으로 간단한 몸짓으로 그는 이 무서운 형상을 지워버린다. 영웅의 행적은 순간의 결정화(結晶化)에 대한 끊임없는 파괴 행위다. 이야기는 순환한다. 신화의 초점은 발전하는 단계에 모인다. 변모, 유동성, 일정하지 않은 무게는, 살아 있는 신의 특징이다. 한 시대의 위대한 형상은 부서지고, 토막나고, 이윽고 흩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요컨대 도깨비-폭군은 불길한 사상(事象)의 옹호자이며, 영웅은 창조적인 삶의 옹호자다.

p.434. 영웅 모험의 목표가 미지의 아버지를 찾는 것일 때, 여기에 등장하는 기본적은 상징 체계는, 시험 및 정체 고백의 상징체계다. 위의 경우에서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시험은 되풀이되는 같은 질문과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나타난다. 대합 아내의 이야기에서는, 아버지가 대나무 칼로 위협함으로써 아들을 시험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영웅의 모험에서 아버지의 시험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보아왔다. 조나단 에드워드 앞에 앉은 회중들에게 있어서 이 아버지는 무시무시한 도깨비가 되고 있다.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영웅은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증거한다. 스승으로서(모세), 혹은 황제로서(후앙 티), 그의 말은 곧 법이다. 이제 근원에 접한 영웅은 중심의 정적과 조화를 가시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는 수많은 동심원이 퍼져나가는 종심인 세계의 축World Axis, 세계의 산World Mountain, 세계수World Tree에 비추인 영상이다. 그는 대우주의, 완벽한 소우주적 거울microcosmic mirror이다. 이제 그에게서 은총이 만방으로 퍼져나간다. 그의 언어는, 생명의 바람이다.
그러나 아버지로 대표되는 성격에 부정적인 변화가 생기는 수도 있다. 이 위기는 황금 시대의 황제 젬쉬드Jemshid에 대한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전설에 그려져 있다.

p.437. 자기 치적의 은총을 초월적이며 근원적인 존재의 은혜로 돌리지 않고 황제는 마땅히 자기가 누릴 바를 누린다는 입체적인 환상을 품는다. 이런 자는 더 이상 두 세계의 중재자일 수 없다. 인간의 시각이 평형 상태의 인간적 측면으로 기울어 질 때, 천상적 능력의 체험은 그것으로 끝난다. 한 사회를 관류하던 사상(思想)도 사라지고, 오직 힘만이 그 사회를 동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황제는 도깨비 같은 폭군(해롯, 니므롯)이 되며, 세계는 이 손 안에서 구원되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p.437. 아버지의 집에서는 두 단계의 이니시에이션이 구분된다. 첫 번째 단계에서 아들은 사자가 되어 귀환하지만, 두 번째 단계에서는 <아버지는 결국 하나>라는 통찰과 함께 귀환한다. 이 두 번째의 보다 높은 자각에 이른 영웅은 구세주, 한 차원 높은 의미에서의 이른바 지고한 존재의 화신이다. 그들의 신화는 우주적인 조화를 지향한다. 그들의 언어는, 권위의 홀장과 율법서의 영웅이 뱉어낸 어떤 말 이상의 권위를 갖는다.

p.442. 이 무서운 예언과 맞설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신화는 이 궁극적인 계시를 희미한 장막으로 가려놓았다. 그러나 신화는 단계적인 교훈의 형태를 포기하지 않는다. 폭군인 아버지를 제거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구세주적 인물은 (오이디포스처럼) 그 아버지의 운명에 한걸음 다가선다. 골육상잔의 끔찍한 광경을 완화시키기 위해 전설은 아버지를, 잔인한 숙부, 혹은 포악한 니믈롯으로 출현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일 것은 보이고 만다. 결국 보이게 되면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인다. 아들은 아버지를 시해하지만,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은 원초적인 혼돈 속으로 해소된다. 이것이 바로 세계종말 그리고 재개(再開)의 비밀이다.

p.443. 삶의 마지막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영웅의 유형이 있다. 즉 성자, 고행자, 출가자(出家者)로서의 영웅이다.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고, 엄격하게 ‘자아’를 통제하고, 소리와 빛과 맛 같은 색(色)에 집착하지 않고, 애증을 버리고, 고독안에서 살고, 소식(小食)하고, 말과 몸과 마음을 삼가고, 명상과 정신 집중에 전심하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힘쓰고, 이기심과 권세, 자만심과 색욕, 분노와 편견을 떨치고, 마음 안에서 정일을 얻고,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사람, 이런 사람은 능히 불멸의 존재에 값하는 사람이라 일러 무방하다.>(중략)
나폴리에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신비스러운 체험을 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잉크와 펜을 선반에 얹어버리고 『신학 대전 Summa Thelogica』의 마지막 장(章)이 다른 손에 의해 완성되게 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쓰는 시대는 끝났다. 나는 나에게 계시된 것을 써왔고, 가르쳐왔지만, 내가 보기엔 참으로 하잘것없다. 이제 바라건대, 내가 가르치는 시대가 끝났듯이 내 삶 또한 그러하기를……」
에필로그
p.477-478. 신화의 해석에는 최종적인 체계가 있을 수 없고, 앞으로도 그런 것은 있을 것 같지 않다. 신화 체계는, <진실만 말하는 고대의 해신(海神)> 프로테우스Proteus와 같다. 이 해신은, <땅에서 기는 모든 생물, 물 속에 사는 모든 생물, 심지어는 타오르는 불꽃에게도 말을 시킬 수 있고, 그와 똑같이 변신할 수도 있다>.
프로테우스로부터 배우기를 바라는 삶의 항해자는, 「그에게 바싹 달라붙어 그를 조여야 한다. 그러면 그는 온전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교활한 신은 아무리 재주 있는 질문자에게라도, 그 질문자에게 자신의 지혜의 전부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p.478. 신화의 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 Durkgeim 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을 보고(寶庫)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돌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 갖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 보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p.479. 삶의 잉태에서, 개인은 인간의 전체 이미지의 단편이며 일그러진 형상일 수밖에 없다. 개인은 남성으로서, 혹은 여성으로서 제약을 받고 있다. 주어진 수명의 한도 내에서 개인은 다시 유아로서, 청년으로서, 성인으로서, 노인으로서의 제약을 받는다. 더구나 살면서 맡는 역할상 개인은 다시 기술자, 상인, 하인, 혹은 도둑, 성직자, 지도자, 아내, 수녀, 혹은 매춘부로 전문화한다. 개인은 이 모두일 수가 없다. 따라서 개인의 전체성은, 개별적인 구성 인자로서가 아닌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 개인은 한 구성 요소일 수 있을 뿐이다. 개인은 이 집단으로부터의 삶의 기술, 사유의 바탕인 언어, 삶의 자양인 이상을 빚졌다. 그의 육체를 이루는 유전자도 그 사회의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개인이 실제든, 상상이나 느낌을 통해서든, 그 사회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킨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과의 절연을 의미할 뿐이다.

p. 483. 「나는 저것이 아니다. 저것이 아니다. 조금 전에 죽은 내 어머니도 아니고, 내 아들도 아니다. 내 몸은 병들거나 나이를 먹는다. 내 팔, 내 눈, 내 머리, 이 모든 것을 합한 것도 아니다. 나는 내 감정이 아니다, 내 직관력이 아니다」

p.486.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상징이 보이게 됨에 따라, 이 상징이 지구의 갖가지 요소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한 민족 특유의 생활 환경, 인종, 그리고 전통이 유효한 형식으로 화해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갖가지 상징을 통해 동일한 구원이 계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고, 또 알아야 한다. 『베다』의 말씀처럼,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즉 하나의 노래가 인간이라는 합창대의 갖가지 음색으로 들리는 것이다. 따라서 국부족인 문제의 해결책에 대한 선전이 난무하는 것이다. 난무하는 정도가 아니라 협박에 가깝다고 보아도 좋다. 인간이 되려면,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인간의 얼굴로 바뀌어 있는 신의 얼굴을 알아보아야 한다.

p.487-488. 오늘날에는 이 모든 비의가 그 힘을 잃었다. 이 비의의 상징은 이제 더 이상 우리 심성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한다. 모든 존재가 섬기고, 인간 자신도 그 앞에서 무릎을 꿇어 마땅한 우주적 법칙이라는 관념도 고대 점성술에 나타난 초보적인 상징의 무대로 넘어간 지 오래며, 이제는 물리적인 용어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다. 서양 학문의, 하늘에서 땅으로의 하강(17세기 천문학에서 19세이 생물학으로의),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 집중(20세기 문화 인류학과 심리학에서의)은, 인간의 경이라는 초점의 놀라운 이동로를 닦았다. 동물의 세계도 아니고, 식물의 세계도 아니고, 기적도 아닌 이제는 오직 인간만이 결정적인 수수께끼다. 인간은 아득한 존재와 더불어 끝나야 하고, 이 아득한 존재를 통해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해야 하며, 이 사회의 이미지 전체가 개선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러나 (내)>가 아닌(너)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종족, 민족, 대륙, 사회적인 지위, 혹은 세기의 이상과 세속적 관습도 우리 모두의 내부에 살아 있는 불멸의, 놀라운 신적인 존재의 척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감히 소명에 응하여, 우리의 운명을 화해시켜야 하는 존재의 거처를 찾아내는 현대적 인간인 현대의 영웅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만심과 공포와 자기 합리화된 탐욕과, 신성의 이름으로 용서되는 오해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던지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려서도 안 된다.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역자후기
p.489. (명저(名著))라고 일컬어지는 책이 무슨 해독이 끼치는 바 있을까만, 역자는 나름의 까닭이 있어서 <명저의 해독>이란 말을 더러 은밀히 생각에 올린다. 이른바 <명저>에 걸려 있는 고압의 전하(電荷)가, 여유로운 정신으로 사상(事象)을 대하여야 할, 그러니까 사상(思想)이 덜 여문 독자와의 만남에서 예사롭지 않은 방전 현상을 일으키고, 이 방전 현상의 체험이 독자로 하여금 그 감독의 여신으로만 사물을 파악하게 하는 편집증적 색안경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기야 <명저>란, 독자에게 베푸는 관점의 안경이 부정적 색안경이 아닌 경우에 붙여지는 이름이긴 하다. 그렇다면 역자가 말하는 <명저의 해독>이란 명저에 대한 심술궂은, 극단적 찬양이 될 터이다.

p.491-492. 그의 견해에 따르면 모든 신화는 꿈과 동일한 문법을 갖는다. 가령 프로이트의 이른 바 <꿈의 작업>, 즉 응축, 치환, 형상화 작업은 신화 형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거의대부분의 영웅이 공유하는 경험인, 비정상적인 탄생, 어린 시절의 고난, 방황, 조력자와의 만남, 기적적인 권능의 획득, 귀환의 도식이 캠벨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켐벨은, 무대가 다르고 사건이 다르고 의상이 다르지만, 인간의 무의식이 투사된 영웅, 말하자면 인간의 집단이 그려낸 영웅 신화는 거의 일정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캠벨의 주장에 따르면 아폴로든, 동화 속의 왕자든, 듀톤의 신 오딘이든 부처든, 모든 영웅은 일정한 영웅의 싸이클을 따른다. 그는, 서로 접촉이 없는 세계 각 문화권의 무수한 영웅 신화와 심층 심리학의 꿈 해석에서 재발견되는 영웅의 상징체계를 분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 가운데서 하나의 영웅, 그러니까 모든 영웅 신화의 본(원형)이 되는 하나의 영웅을 떠올린다.

3. ‘내가 저자라면’
세 번째 만난 캠벨은 여전히 인내심을 요구했다. 하지만 지난주 과제 신화의 세계 보다는 훨씬 잘 읽혔는데 그 이유는 목차에 있었다. 목차의 큰 개념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그 맥락 안에서 저자가 의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완점- 여전히 중복되는 내용들이 많이 있었다. 낯선 문자를 만날 때 설레이는 편인지라 식상하기도 했지만 끝없는 되풀이가 신화의 체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또한 이미 원서가 출판된 지도 5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번역서로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알 수 없기에 원서의 목차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영웅에 열광하는 것은 평범과는 다른 신비로운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고, 호수의 범주를 넘어서 바다를 본 사람들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매력은, 우리가 열광 하는 그 영웅이 바로 ‘네’가 아니고 ‘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일관되게 보여주는 과정이다. 캠벨은 한때 우리의 무조건적인 숭배를 받았던 프로이드나 구스타프 칼 융의 말을 빌려 끝없는 되새김질을 의도하고 있다. ‘신화의 힘’을 읽으며 주술에 걸렸던 것처럼은 아니었지만 얼마쯤은 즐거운 책읽기였다.

“감히 소명에 응하여, 우리의 운명을 화해시켜야 하는 존재의 거처를 찾아내는 현대적 인간인 현대의 영웅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만심과 공포와 자기 합리화된 탐욕과, 신성의 이름으로 용서되는 오해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던지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려서도 안 된다.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 다시 읽고 싶은 구절

오랜 세월, 우리 숨줄이 닿아 있던, 우리 육즙이 층층이 묻어 있던 문화는 이제 이 땅에 남아 있되, 오직 하나의 질투하는 신학에 가려져 있다. 신화나 종교를 보는 눈이 병적인 교조주의와 경직된 흑백의 논리에 길들어 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걸핏하면 조상이 우상으로 단죄되고, 하나의 신학을 옹호하기 위해서라면 오랜 역사 살림을 꾸려온 민족까지 우상의 자식들로 치부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 시대, 기댈 곳 없던 민중의 문화가 <미신>으로 업어치기를 당하고, 충정에서 우러난 비판 정신과 각자의 자유를 겨눈 정신적 편력의 간증이 <사탄>의 소리 수작으로 간주되는 이 시대에, 모든 민중의 문화와 종교를 고루 짚어보며, 그 바른 뜻을 더듬는 이 책을 우리 글로 옮긴 뜻은 그러므로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의 믿음, 다른 이들의 종교라면 듣도 보도 않고 흰 눈을 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주체로운 종교 정신을 곧추세우는 데 밑바탕 삼을 수 있다면, 남의 집(종교)도 좀 기웃거려 보는 데 인색해서야 되겠느냐는 뜻에서이다.


p. 21.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 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 그러나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p.22. 한 차례의 통과 제의가 있은 다음에는 다소 느슨한 휴지 기간이 뒤따르는데, 이 기간에는 인생을 살아갈 당사자를 새로운 시대의 형식과 적절한 감정 상태로 유도하는 절차가 있다. 그래서 마침내 정상적인 생활로 되돌아올 때가 되었을 때 입문자 initate를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p. 29.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 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p. 38~39. 아리아드네가 그랬듯이 우리도 이 사람에게로 달려가 보자. 그는 실타래를 만드는 데 필요한 아마(亞麻)를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들판에서 거두었다. 수세기에 걸친 경작, 수십 년에 걸친 채집, 수많은 가슴과 손의 힘겨운 작업…… 이 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마를 훑고, 간추리고 헝클어진 실무더기에서 실을 자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혼자서는 이 모험 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p. 217. 세상으로부터의 출발은 오류가 아니라 여행의 첫 출발이다.이 먼 여로에서, 우주 순환의 심오한 적멸을 깨치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p. 305.〈아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요, 알지 못하는 것은 아는 것이다.〉

p. 307.〈때로는 바보로, 때로는 현자로, 때로는 왕관에 미친 자로, 때로는 방랑자로, 때로는 예언자처럼 부동하는 존재로, 때로는 자비로운 얼굴로, 때로는 귀인으로, 때로는 폐덕자로, 때로는 무명인으로…… 깨달은 자는 이런 상태에서도 지복의 극락을 산다. 무대 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배우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불멸의 지혜를 깨친 자는 늘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


♣ 이밖에도 밑줄친 부분이 많았는데 팔이 아파 더 이상 옮길 수 없었다.
양서의 풍모를 유감없이 자랑하고 있는 이책을 읽으면서 한편 긍정적 자극을 받았고, 한편 전문가적(?) 작가세계에 한없이 기가 죽었다.

'시인은 노래했노니 험로라고........'


IP *.71.76.251

프로필 이미지
거암
2008.04.14 15:57:34 *.244.220.254
숙제 못했다고 울상이시더니~ 뭐이리 내용이 많아요? ㅎㅎㅎ
토요일날 가시는 길에 못챙겨드려서 죄송~ 제가 술에 꼴아서시리....
저는 그날 인천가는 막차타고 가다가 핸폰을 잃어버려서 오늘 다시 구입했답니다. ㅜ.ㅜ
프로필 이미지
서지희
2008.04.14 18:01:36 *.41.62.236

밤을 그냥 꼬박 새웠어요. 앉은채로,
그대가 챙기는 것이 아니라 어쩐지 내가 챙겼어야 할 듯 해서 그만 가자고 했던 것인데. 잃어버린 핸폰이 다시 안그러게 해 주겠네요. ㅎㅎㅎ 쑈를 하라, 판매대수가 많이 늘었다던데, 혹시 그건 가요?
샬롬. !
프로필 이미지
최지환
2008.04.14 22:55:18 *.34.17.31
"♣ 이밖에도 밑줄친 부분이 많았는데 팔이 아파 더 이상 옮길 수 없었다. "

저는 이부분이 굉장히 인상적인걸요? ^^

프로필 이미지
지희
2008.04.15 02:58:56 *.41.62.236

뭐에요. ㅈ,ㄱ,ㅁ 놀리시남. ㅎㅎ ^!~
프로필 이미지
박안나
2008.04.15 23:26:53 *.92.140.235
지난 주 토요일날 처음 뵈었죠? 처음 만났는데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 처럼 편안했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다음에 또 봐요~~^^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12 나는 무엇을 잘 할 수 있는가. [1] @햇살 2008.04.25 2769
1411 [번역010] 15장 서두르지 않는 삶, 16장 한결같은 삶 [4] 香山 신종윤 2008.04.25 2273
1410 신화의 이미지_3 [2] 개구쟁이 2008.04.21 2187
1409 [03] 네가 바로 그것이다 - 죠셉 캠벨 오현정 2008.04.21 1969
1408 (03) 신화와 함께 하는 삶- 조셉캠벨 이은미 2008.04.21 1902
1407 [03] 네가 바로 그것이다 - 조셉 캠벨 [2] 정산 2008.04.21 1889
1406 7_신화의 이미지, 조셉 캠벨 [1] [1] 홍스 2008.04.21 2438
1405 [03] 신화와 함께 하는 삶 - 조셉 캠벨 [2] 거암 2008.04.21 1912
1404 [03] 신화와 함께하는 삶-조셉캠벨 [1] 손지혜 2008.04.21 1923
1403 (03) 네가 바로 그것이다-조셉 캠벨 이한숙 2008.04.21 2918
1402 (07) 신화와 함께 하는 삶 2. [1] 서지희 2008.04.21 2108
1401 (07) 신화와 함께 하는 삶 1. 서지희 2008.04.21 1715
1400 [03]신화의 이미지 - 조셉 캠벨 [1] [4] 양재우 2008.04.21 2170
1399 신화와 함께 하는 삶-조셉 캠벨 [1] [2] 유인창 2008.04.20 2300
1398 [03] 신화의 이미지 - 조셉캠벨 최지환 2008.04.20 2327
1397 열하일기1(미완성 정리) [1] 김지현 2008.04.16 2826
1396 [50] 황진이, 선악과를 말하다/ 황진이ㆍ문화영 [3] 써니 2008.04.16 3071
1395 나는 무엇을 잘 할 수 있는가 [6] 김나경 2008.04.16 2677
» 6. 시인은 노래 했노니 이것이 험로라고 [5] 서지희 2008.04.14 2207
1393 6. 시인은 노래 했거니 이것이 험로라고 [1] 서지희 2008.04.14 18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