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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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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6일 13시 05분 등록
열하일기

참고문헌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박지원 씀, 고미숙 옮김)
열하일기 상 (박지원 씀, 리상호 옮김)
그린비 출판사 웹페이지







1. 저자에 관하여(발췌 인용)

연암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년) 음력 2월 5일 새벽, 서울 서소문 밖 야동(冶洞)에서 반남 박씨 박사유와 함평 이씨 사이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인 반남 박씨가는, 조광조 문인으로 중종 때 사간(司)을 지낸 박소 이후 명문 거족 이었다. 연암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할아버지 박필균은 신임사화로 노론과 소론이 분열될 당시, 집안의 당론을 노론으로 이끄는 한편, 영조 즉위 후 정계에 진출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출신 성분으로 보면 조선 후기의 권력의 핵심부인 노론 경화사족의 일원인 셈이다.
처가쪽 역시 마찬가지다. 연암은 16세 때 전주 이씨와 결혼한 후, 장인 이보천과 그 아우인 이양천의 지도를 받으면서 학업에 정진했는데, 이들은 노론 학통을 충실히 계승한 산림처사였다.
연암은 젊은 시절부터 시대의 주류를 빗겨가는 삶을 선택한다.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이라는 코스에서 스스로 탈주해 버렸던 것이다.
그가 과거를 포기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개입했을 것이다. 그가 과거를 포기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 들이 개입했을 것이다. 당쟁으로 얼룩진 정국, 아수라장으로 변한 과거 시험장, 절친한 친구들의 정치적 희생 등등. 그리고 아마 체질적으로 격식에 갇히는 삶을 지독히도 싫어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과거를 포기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어쨌든 연암의 젊은 날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요즘으로 치자면 말 그대로 한량에 백수인 셈인데, 집안이 가난하기까지 했으니 제대로 '놀' 팔자도 못 된 셈이다.
이렇게 부도, 명예도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그의 30대를 생애 가장 빛나는 시절로 만들어 준 결정적인 사건을 만나게 된다. 바로 언제나 함께 웃고 함께 울어주는 벗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름하여 '백탑白塔에서의 청연淸緣' 백탑은 파고다 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말한다. 당시 연암과 그의 친구들이 이 근처에서 주로 살았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북학파의 핵심 멤버인 박제가와 이덕무, 천재 과학자이자 음악가인 홍대용, 괴짜 발명꾼 정철조, 조선 최고의 창검술을 자랑한 백동수 등이 그의 자랑스러운 친구들이었다. 삼십대 중반 즈음, 연암은 전의감동에 혼자 기거하면서 이 모임을 이끌었다. 연암과 그의 친구들은 매일 한곳에선 풍류를, 다른 한편에선 명상을, 또 한쪽에선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모임을 이어갔다. 벗이 있었기에 진정 행복햇고, 벗이 있었기에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백탑에서의 빛나는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776년 우여곡절 끝에 정조임금이 즉위하게 되자, 그대부터 본격적으로 홍국영의 세도가 시작되면서 자신의 반대파를 하나씩 제거해 나갔는데, 그 불똥이 급기야 연암에게도 튀게 된 것이다. 때마침 집안의 사정으로 먹고살기도 막막해진 연암은 도주하듯 개성 부근에 있는 '연암골'로 들어가야 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마흔 두 살 즈음. 2년 뒤, 홍국영의 실각과 더불어 연암은 다시 서울로 돌아오지만, 옛 친구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뿔뿔히 말았다.
하지만 인생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둔다고 했던가. 바로 이 시기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열하일기>가 탄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780년, 울울한 심정으로 어디론가 멀리 떠나기를 염원하던 차, 삼종형 박명원이 건륭황제의 만수절(70세) 푹하 사절로 가게 되면서 연암을 동행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정식 수행단이 아니라 일종의 '꼽사리" 여행자인 채, 그의 생애 가장 큰 행운이자 18세기 지성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인 '중국 여행'은 이렇게 우연하게 시작된다.
1767년(31세)
아버지 박사유가 65세로 돌아가셨다. 부친상을 당하고, 장지 문제로 녹천 이유 집안과 시비가 벌어졌다. 이 일로 상대방의 편을 들어 상소를 올렸던 이상지가 스스로 관직에서 관직에서 물러난 것을 보고 이때부터 연암도 스스로 벼슬길을 단념하였다.

1770년(34세)
감시의 양장에서 모두 일등으로 뽑혔다. 입궐하여 영조에게 극찬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박지원을 급제시켜 공을 세우려 했으나 회시에 응하지 않거나, 응시한다 하더라도 시권을 제출하지 않거나, 제출하더라도 노송과 괴석을 그린 그림을 제출하여 벼슬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1778년(42세)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홍국영의 견제를 피해 연암골에 은둔하였다. 초간삼간을 장만하고 손수 뽕나무도 심었다.

1778년(44세)
홍국영이 실각하자 서울로 돌아와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렀다. 삼종형인 금성도위 박명원을 따라 북경으로 갔다. 5월에 떠나 6월에 압록강을 건넜고, 8월에 북경에 들어갔다가 열하에 들러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10월에 귀국하였다. 돌아오자 마자 3년여에 걸쳐 열하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787년(51세)

부인 전주 이씨가 51세로 죽었다. 박지원은 그 뒤로 죽 혼자 지냈다.
큰형 회원이 58세로 죽었다. 연암골에 있는 형수의 무덤에 합장했다.
형을 보내면서 쓴시 ‘연암에서 돌아간 형님을 생각하고’를 썼다.

우리 형님 얼굴 누굴 닮았나

아버지 생각나면 형님을 보았지

이제 형님 생각나면 그 누굴 보나

시냇물에 내 얼굴 비추어 보내

1793년(57세)
열하일기로 잘못된 문체를 퍼뜨린 잘못을 속죄하라는 정조의 하교를 받고 답남직각공철서
答南直閣公轍書를 썼다. 임금의 문책을 받은 처지로 새로 글을 지어 잘못을 덮으려 하는 것은 오히려 누가 되는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1796년(60세)
안의현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려 하자 자기 뜻을 몰라서 하는 일이라고 크게 꾸짖고, 세우지 못하게 했다.

1797년(61세)
7월, 면천군수에 임명되자 정조를 알현하게 되었고, 이때 문체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나누었다. 정조의 명령으로 서이방익사書李邦翼사(반성문) 라는 글을 쓰게 됐다.

1799년(63세)
봄에 흉년이 들자, 안의에서 했던 것처럼 봉록을 덜어 백성을 구휼했다.

1800년(64세)
6월에 정조가 승하했다.
8월에 양양부사로 승진했다.


1805년(69세)
박지원은 10월 20일, 가회방 재동 집의 사랑에서 69세 나이에 죽었다.
깨끗하게 씻어 달라고만 유언을 남겼다.





2. 인상 깊은 글
[1] 이용(利用)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후생(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이 있은 후에야 그 질서를 바로잡을 것이다. 물건을 이롭게 쓸 줄 모르고 그 생활을 넉넉하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물건을 이롭게 쓸 줄 몰라 생활 자료가 근본 부족하면서 억지로 잘살겠다고만 한다면 어떻게 그 도덕과 질서를 바로잡을 것인가?

[2] 사흘간이나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바람에 어여쁘던 살구꽃이 죄다 떨어져 땅을 분홍빛으로 물들였구려. 긴 봄날 우두커니 앉아 혼자 쌍륙놀이를 하고 있사외다. 오른손은 갑이 되고 왼손은 을이 되어 ‘다섯이야!’ ‘여섯이야!’ 하고 소리치는 중에도 나와 너가 있어 이기고 짐에 마음을 쓰게 되니 문득 상대편이 적으로 느껴지외다. 알지 못하겠구려. 내가 나의 두 손에 대해서도 사사로움을 두고 있는 건지. 내 두 손이 갑과 을로 나뉘어 있으니 이 역시 물(物)이라 할 수 있을 터이고, 나는 두 손에 대해서 대해 조물주의 위치에 있다 할 수 있지 않겠소? 그렇건만 사사로이 한쪽을 편들고 다른 한쪽을 억누름이 이와 같구려. 어제 비에 살구꽃은 죄다 떨어졌지만, 곧 꽃망울을 터뜨릴 복사꽃은 장차 그 화사함을 뽑내겠지요. 나는 또 다시 알지 못하겠구려. 저 조물주가 복사꽃을 편들고 살구꽃을 억누르는 것 역시 사사로움을 두어서인지.

[3] 지난 계유 갑술년 사이에 내 나이는 열에 일곱여덟 살이었다. 병에 오랫동안 시달리어 음악, 서화 혹은 칼, 거문고, 골동 등 모든 잡물을 제법 좋아했을 뿐더러 더욱이 지나는 손님을 모아놓고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옛이야기로써 마음을 여러 모로 위안시켰으나, 그 깊숙이 스며든 울적한 증세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4] 당시 아버지의 문장에 대한 명성은 이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래서 과거시험을 치를 때마다 시험을 주관하는 자는 아버지를 꼭 합격시키려고 하였다. 아버지는 그것을 눈치채고 어떤 때는 응시하지 않았고 어떤 때는 응시는 하되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으셨다. 하루는 과거시험장에서 고송(孤松)과 괴석(怪石)을 붓 가는 대로 그리셨는데, 당시 사람들은 아버지를 어리석다고 비웃었다.

[5] 어제 과거에 응시한 사람은 수만 명도 더 되는데, 이름이 불린 사람은 겨우 스무 명뿐이니 참으로 만 분의 일이라 할 만합니다. 문에 들어설 때에는 서로 짓밟느라 죽고 다치는 자를 헤일 수도 없고, 형과 아우가 서로를 불러대며 찾아 헤매다가 서로 손을 잡게 되면 마치 다시 살아 온 사람을 만난 듯이 하니, 그 죽어 나간 것이 ‘열에 아홉’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제 그대는 능히 열에 아홉의 죽음을 면하고 만에 하나의 이름을 얻었구려, 나는 무리 가운데에서 만 분의 일에 영예롭게 뽑힌 것을 축하하지 않고, 다시는 열에 아홉이 죽는 위태로운 판에 들어가지 않게 된 것만 가만히 경사롭게 여깁니다. 즉시 몸소 축하해야 마땅하겠으나, 나 또한 열에 아홉의 나머지인지라, 바야흐로 드러누워 끙끙 앓으면서 용태가 조금 나아지기를 기다리고 있다오.


[6] 아버지(연암)는 늘 남들과 함께 식사하는 걸 좋아하셨다. 그래서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언제나 서너 사람은 더 됐다.

[7]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 빛깔식 물들인다면, 50일 만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 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古玉)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 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이덕무의 이목구심서>

[8] 진실로 능히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화할 줄 알고, 새것을 만들면서도 법도에 맞을 수만 있다면 지금의 글이 옛글과 같게 될 것이다. (중략) 하늘과 땅이 비록 오래되었지만 끊임없이 생명을 내고, 해와 달이 비록 오래되었어도 그 광휘는 날마다 새롭다. 책에 실려 있는 것이 비록 방대하지만 가리키는 뜻은 제가끔 다르다. 때문에 날고 잠기고 달리고 뛰는 온갖 생물 가운데에는 간혹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있고, 산천초목에는 반드시 비밀스런 영(靈)이 있게 마련이다. 썩은 흙에서 지초(芝草)가 나오고, 썩은 풀이 반딧불로 화한다.
<초정집서(楚亭集序)>

[9] 글자는 비유컨대 병사이고,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敵國)이고, 전장(典掌 : 전거를 인용하는 것) 고사(故事)는 싸움터의 진지이다. 글자를 묶어 구절이 되고, 구절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부대의 대오행진과 같다. 운으로 소리를 내고, 사(詞)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유격의 기병이다. 억양반복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 다시 묶어 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중략) 그런 까닭에 병법을 잘하는 자는 버릴 만한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는 가릴 만한 글자가 없는 것이다. (중략) 글이 좋지 않은 것은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 저 글자나 구절의 우아하고 속됨을 평하고, 편과 장의 높고 낮음을 논하는 자는 모두, 합하여 변하여 기미와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중략) 합하여 변화하는 저울질이란 것은 때에 달린 것이지 법에 달린 것은 아니다.

[10] 혼자서 잠자코 잔 부어 마실 제, 동쪽으로 용만 철산의 모든 메(山)를 바라보니 만첩(萬疊)의 구름 속에 들어 있었다. 이에 술 한 잔을 부어 문루 첫 기둥에 뿌려서 스스로 이번 길에 아무런 탈 없기를 빌고, 다시금 한 잔을 쳐 다음 기둥에 뿌려서 장복과 창대를 위하여 빌었다. 그러고도 병을 흔들어 본즉, 오히려 몇 잔 더 남았기에 창대를 시켜 술을 땅에 뿌려서 말을 위하여 빌었다.

[11] 물을 건널 때면 모두 몸이 떨리고 앞이 캄캄하여, 낯빛을 잃고 하늘을 우러러 가만히 목숨을 빌지 않은 자가 없었다. 강 저편에 도달한 뒤에야 비로소 서로 돌아보며 축하의 말들을 주고받는데, 마치 죽을 고비를 겪은 사람이나 만난 듯이 하였다. 그러나 다시 건너야 할 물이 이미 건너온 물보다 더하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기가 막혀 서로 돌아보며 앞이 캄캄해 할 뿐이었다.

[12] 새벽에 신광녕을 떠날 때 지새는 달이 아직 땅 위에서 몇 자 안 되는 곳에 있는 듯 서늘하고 둥근 것이 계수나무 그림자가 성기고 옥토끼와 은두꺼비는 금방이라도 만져질 듯하고, 펄펄 날리는 항아(달에 산다는 선녀)의 흰 옷자락 속으로 비치는 살결이 얼롱얼롱하는 듯하여, 나는 정군을 돌아보면서, “이상도 하이,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돋는구료.”하였더니, 정은 별안간 그것이 달 인줄 깜빡 잊고는 입에 나오는 대로, “늘 새벽에 여관을 떠나므로 동서남북을 가리기가 정말 어렵네요” 하메, 모두들 허리를 잡았다.

[13] 마침 때가 한낮이라 불볕이 내리쬐어서 숨이 막혀 더 오래 머물 수 없으므로, 드디어 길을 떠난다. 정진사와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간다. 나는 정진사에게, “그 성 쌓은 방식이 어떠한가”하고 물었다. 정진사는, “벽돌이 돌만 못한 것 같에”하고 답한다. 나는 또, “자네가 모르는 말일세. 우리나라의 성제(城制)에 벽돌을 쓰지 않고 돌을 쓰는 것은 잘못일세. 대개 벽돌로 말하면 …. 내가 일찍이 차수(박제가)와 더불어 성제를 논할 때에 어떤이가 말하기를 , “벽돌이 굳다 한들 어찌 돌을 당할까보냐” 하자, 차수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벽돌이 돌보다 낫다는 게 어찌 벽돌 하나와 돌 하나를 두고 말함이요’ 하던데그려. 이는 가위 철론(鐵論) 일세 ….. 벽돌 한 장의 단단함이야 돌에다 비할 수 없겟지마는, 돌 한 개의 단단함이 또한 벽돌 만 개의 굳음만 같지 못할지니, 이로써 본다면 벽돌과 돌 중 어느 것이 이롭고 해로우며 편리한가 불편한가를 쉽사리 알 수 잇겠지” 하였다.
(중략)
내가 부채로 그의 옆구리를 꾹 지르며 “어른이 말씀하는데 웬 잠을 자고 듣지 않아” 하고 큰 소리로 꾸짖으니, 정진사가 웃으며 “내 벌써 다 들었네.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느니”한다. 나는 하도 부아가 나서 때리는 시늉을 하고, 함께 한바탕 크게 웃었다.


[14]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 화장하던 것이 어제 일만 같구나. 나는 그때 갓 열덟 살이었다. 장난치며 누워 발을 동동 구르며 새신랑의 말투를 흉내내어 말을 더듬거리며 점잖을 빼니, 누님은 그만 부끄러워 빗을 떨구어 내 이마를 맞추었다. 나는 성나 울면서 먹으로 분을 뒤섞고, 침으로 거울을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玉)오리 금(金)벌 따위의 패물을 꺼내 뇌물로 주면서 울음을 그치게 했었다. 지금에 스물여덟 해 전의 일이다.


[15] 이곳의 벽돌가마를 보니 벽돌로 쌓고 석회로 봉해서 애초에 불로 말리고 굳히는 비용이 들지 않는다. 또 높이와 크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 모양은 큰 종을 엎어 놓은 것 같은데, 가마 위는 연못처럼 움푹 파이게 하여 물을 몇 섬이라도 부을 수 있다. 옆구리에 연기 구멍 네댓 개를 뚫어 불길이 잘 타오르게 만들고, 그 안에 벽돌을 놓았는데 서로 기대도록 해서 불길을 만들어 놓았다. 대체로 그 요점은 벽돌을 쌓는 데 있었다. -도강록 7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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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2008.04.16 13:56:28 *.67.52.204
열하일기는 기행문, 역사, 문물, 관습, 풍습,제도 등 하나의 텍스트에 다양한 주제를 하나로 포개놓아 읽기가 어렵습니다.
연암은 다른 사람의 말을 빌려 자신이 주장을 은근슬쩍 끼워 놓았습니다. 연암의 기질이 직선적이며 태양인적 기질을 타고난 사람인것과는 대조적으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글 사이에 자신을 주장을 끼워 넣습니다. 같은 시기를 산 다산 정약용과는 비교가 됩니다. 다산은 18년간 유배를 당했죠.
연암이 "유쾌한 분열자"라면 다산은"구도자(순교자)적 열정을 가진 실천가"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부분 .
열하일기 자체가 정조에게 두 차례나 언급이 된 것을 보면 그 당시 조선에는 문제적 텍스트 였나 봅니다. 이른바 소품문 혹은 패관잡기라 사대부 양반이 이런 문체를 쓰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나 봅니다.
지금으로 치면 "언론 출판의 자유"가 상당히 엄격하게 통제 했던 시기로 보입니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가 남한산성에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후 청나라를 오랑캐라 칭하며 스스로 소중화라 뽑내던 조선은 청나라의 앞선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와 후에 효종인 되는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갑니다. 인조는 귀국 한 소현세자와 세자빈 그의 자식까지도 죽여버립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배우고 받아들이며 이를 조선에 구현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청나라에서도 소현세자를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소현세자를 죽이고 효종(봉림대군)을 즉위시키게 했습니다. 효종은 우암 송시열과 북벌을 주장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안보'이데올로기로 국가와 사회를 통제하려 했던 것처럼 북벌론으로 조선을 통제 했습니다.
그저 중인 계급인 역관이 오히려 더 많은 문물을 들여오고 배우고 스스로 부를 쌓았던 것과는 비교가 됩니다.
연암은 어떤 의도로 열하일기를 지었는지는 아직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읽은 소감은 이용후생의 관점에서 당대 조선을 비판한 것 같습니다.
연암이 사행길에서 보고 적은 것은 도로, 수레 , 벽돌, 주택 등과 같은 실질적인 것들 입니다. 당시 조선의 낙후된 문물과 비교하면서 아주 신랄하게 적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과학적이라고 배웠던 온돌에 대해서도 비판을 했습니다.
하여간 지금 현재로서는 실용적 관점에서 열하일기를 읽을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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