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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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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0일 13시 09분 등록
I. 저자에 대하여

인디언 신화 - 뉴욕 공립 도서관 (당시 나이 10세, 11세부터 성인 도서 서가 출입)
생물학 - 캔터베리 예비학교
생물학, 수학 - 다트머스 칼리지
영문학, 비교문학 - 콜롬비아 대학
힌두교, 불교, 동양철학에 관심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난 후
중세문학 (아더왕 전설 연구) - 콜롬비아 대학원
로망스어, 중세프랑스어, 프로방스어, 라틴어, 문헌학 - 소르본 대학
현대미술(피카소, 브라크)에 관심 - 소르본 대학
현대문학(예이츠, 엘리엇, 제임스 조이스)에 관심 - 소르본 대학
산스크리트어, 인도-유럽어족의 언어 - 뮌헨대학
괴테, 토마스만, 프로이트, 융의 작품을 접함 - 뮌헨대학
러시아어 - '전쟁과 평화'를 원문으로 읽기 위해
슈펭글러, 토마스만, 융, 조이스, 프레이저 - 캔터베리스쿨 교사
역사, 영어, 불어, 독어를 가르침 - 캔터베리스쿨 교사
문학, 독일철학, 비교신화학 - 사라 로렌스 대학 교수
하인리히 침머 - 볼링겐시리즈 편집자

조셉 캠벨, 그가 평생에 걸쳐 공부한 학문과 학자들이다. 그는 평생을 책과 함께 살아온 지독한 공부벌레였다. 위의 그가 공부했던 학문과 언어의 목록을 보고 있자면, 한 사람이 저렇게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타고난 학자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저런 것들을 공부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천복을 쫓는 일이었기에 한 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그의 방대한 지식과 다양한 어학 실력은 모두가 혀를 내둘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의 수업을 듣기 위해 매주 읽어야 하는 독서분량이 너무 많다고 항의한 한 학생에게 그가 했던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어쨌건 그걸 다 읽어보려 했다니 놀랍네. 그것들은 일주일 동안 읽으라고 내 준 것이 아니네. 평생 읽으라는 것이지."



그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니 상당한 미남이다. 젊은 모습 뿐 만 아니라, 나이가 든 모습도 평생을 연구에만 몰두한 학자답게 학구적인 기풍이 물씬 풍기면서도, 중후한 멋이 묻어난다. 대학생 시절엔 육상팀의 주자로서 0.5마일 경주 부문에서는 콜럼비아 대학과 뉴욕시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며,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AAU 선수권 대회에 뉴욕 체육 동호회 육상팀과 함께 출전하기도 했다. 또한 대학의 재즈 밴드에서 색소폰을 연주하기도 했으며, 대공황 후 취직자리를 구하지 못해 어려운 생활을 할 때에는 색소폰 연주로 식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그는 그야말로 지적, 감성적, 신체적 건강함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학자로서의 자신의 본분을 절대 잊지 않으면서도, 감성과 신체적인 건강함을 유지하며 균형 잡힌 삶을 살아온 그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감동과 교훈을 준다.


II. 내 마음을 무찔러 든 글귀

서문

12) 신화는 꿈의 본성에서 비롯된다. 꿈은 깨어있는 의식에 알려지지 않은 채 내면세계로부터 떠오르는 것이며, 이는 신화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삶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1 꿈으로서의 세계

20)
우린 그런 것들이지
꿈으로 만들어진 것들, 하여 우리의 작은 생은
한숨 잠과 함께 한바퀴 도는 것이디.
- 세익스피어, '헛소동'

우리를 꿈꾸는 꿈이 있답니다.
- 칼라하리의 한 부시맨.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지구별에 왔다는 건 사실이 아니야. 우리는 잠자기 위해서, 꿈꾸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이지
- 아즈텍 시인, 작자미상

26) 꿈속에서 우리는 태초의 밤의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좀더 보편적이고 진실하고 영원한 자의 초상이 된다. 그곳에서 그는 여전히 전체이며, 그의 안에 전체가 있다. 자연과 구분할 수도 없으며 모든 자아를 벗어버린 상태이다.
꿈은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된 깊은 곳으로부터 생겨나며, 너무나도 유치하고 기괴하며 비도덕적이다. 꽃처럼 피어나는 그 솔직함과 진실함 앞에, 우리는 기만에 찬 우리의 삶에 대해 얼굴을 붉히게 된다.
- C.G. 융

29) 꿈속에서는 사물들이 일상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단일하고 단순하거나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맞지 않으며, not A는 진짜로 A가 될 수 있다.

31) 인도 신화에서의 형상들이 우주적 의미의 상징으로서 인식되는 반면, 블레이크의 판화에서 신과 그의 율법은 불길이나 지옥의 사신들과 마찬가지로 꿈꾸는 자의 개인적 한계나 종족적 한계를 반영할 뿐이다. 다시 말해 신화적 형식은 우주적 의미의 신비를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고, 단순히 지역적 종족성이나 심지어는 개인적 특이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31) 우주적 의미들은 절대로 그 자체로 순수한 상태에서 경험될 수 없고, 자신의 지역적 조건에 따른 종족적 적용양식으로부터 추상해 낼 수밖에 없다. 사실 우주적 의미들의 매력은 그 무한히 다양한 변형 작용들에 있다.

54) 태고의 모든 밀교에서 나온 약속과 열망은 역사적으로 화신한 단 한 명의 유일자와, 단 하나뿐인 진실한 신의 복음에서 성취되었다.

56) 근동 이교도의 위대한 어머니 여신 이미지들은 초기 기독교의 성모 유형을 형상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77)
그의 아래요, 위요, 뒤요, 앞이요, 남쪽이요, 북쪽이다. 그는 실로 이 세계 전체이다....
그리고 실로, 이것을 보고, 이것을 성찰하고, 이것을 이해하고, 아트만에서 기쁨을 취하는 자는 아트만에 참여하게 되고, 아트만에서의 지복을 안다. 그런 자는 자율적이며, 모든 세계에서 무한한 자유를 갖는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지 않는 자들은 다른 이들에게 지배되고, 결국 사라져버릴 세계에서 살게 되며, 모든 세계애서도 자유롭지 않다.
- 인도의 '찬도기야 이파니사드' (7장 25편 1-2)

83) 자연과 영혼의 절대적 이분법(A는 not A가 이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이라는 일반적 생각을 초월하는 신화적 이미지로서 성육신의 교리는 이미 지적되어 왔듯이(교회법 의해 경시되긴 했지만) 예수라는 한 사람 속에서 신과 인간이라는 대립쌍의 절대적인 구분이 없어진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또한 예수의 경우처럼 이러한 대립물들의 일치가 궁극적인 진실이며 자아의 기반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도 강조된다.

84) 너를 이끄는 자가 너에게 "보라, 왕국은 천상에 있다."고 말한다면, 천상의 새들이 네 앞에 있을 것이다. 그들이 너에게 "그의 왕국은 바다 속에 있다."고 말한다면, 물고기가 네 앞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왕국은 네 안에 있고, 네 밖에도 있다. 네가 네 자신을 알게 된다면 너는 네가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닫게 되리라. 하지만 네가 네 자신을 알지 못하면 너는 가난 속에 있을 것이고, 네 자신이 가난이 되리라
- 도마복음 80:19-81:5

84) 내 입을 통해 마시는 자는 누구든 나처럼 될 것이고, 나 자신은 그가 될 것이며, 숨겨져 있던 것들이 그의 앞에 펼쳐지리라
- 도마복음 98:28-30

84) 하느님 아버지의 왕국이 이 땅에 널리 펼쳐져 있는데, 인간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 도마복음 99:16-18

86) 내가 그를 에워쌀 때, 신은 나의 중심이 된다.
내가 그에게로 녹아들어갈 때, 신은 나의 둘레가 된다.
- 실레지우스
2 우주질서에 대한 생각

94) "서로 다른 나라, 서로 다른 하늘 아래 사는 인간 정신의 유사한 구조에 비슷하게 작동하는 유사한 원인들의 결과이다."
- 제임스 G.프레이저의 '황금가지' 중 (신화에 의례들에서 공통점이 드러나는 이유에 대해)

98) 432,000년 이라는 신화적 수는 어떤 심리학적인 원형이나 기반에 놓인 사고의 산물이 아니라, 몇 세기에 걸친 신중한 천문학적 관찰을 통해서 발견된 것이 분명하다.

106) '지구라트 ziggurat'라는 단어는 메소포타미아의 탑처럼 쌓아올린 건축물을 지칭하는 말로, '크다, 높다'는 뜻의 바빌론어 동사 '자가로 zagaru'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런 탑들은 성서의 바벨탑이야기('창세기 11:1-9)에서처럼 천국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신과 마음을 숭고한 기도의 상태에 이르도록 고양시키고 신이 지상으로 강림할 수 있도록 사다리를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지어진 것이다.

144) 캘리포니아 대학의 피터 퍼스트 Peter Furst 교수가 말했듯이 "샤먼과 재규어는 단순히 힘이 동등한 것이 아니라 샤먼이 동시에 재규어고 재규어가 샤먼이었다."

174) 시계 위에 씌여진 시간주기의 질서가 인도의 신 비슈누의 꿈속의 시간주기 질서와 똑같을 뿐 아니라, 이 체계 속에서 소우주로서 인간신체 기관의 리듬과 대우주로서의 우주의 순환하는 겁(劫)의 리듬이 상응한다는 신화적 관념이 세워져 있음을 보여준다.

183) 중앙아메리카에서도 그 문명의 주된 사고방식을 끊임없이 천문학에 적용한 것은 분명히 하늘과 인간의 일치라는 신화적 관념이었다. 그리고 코디세 드레스데에 기록된 마야의 천문학표와 한대(漢代) 천문학의 오류가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183) 어떤 경우라도, 지상과 하늘을 통제하는 수학적 질서의 신화들은 동일하다.

199) 삶이란 죽음의 얼굴 위에 덮어쓴 가면일 뿐이다.

199) 우리는 단지 꿈꿀 뿐, 우리는 꿈속에서 태어날 뿐.
모든 것이 꿈이라네.........

202) 공간 또는 에테르, 그리고 공기, 불, 물, 흙의 순서로 내려가며, 이 각각의 원소에는 청각, 촉각, 시간, 미각, 후각의 다섯 가지 감각이 하나씩 연결된다. 그리하여 대우주의 질서와 소우주의 질서가 조화된다.

202) 중국에서도 세계의 원소는 다섯 가지인데 인도와 동일하지는 않다. 이 다섯 가지는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 물(水)인데 보통 이 순서대로 상생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즉, 나무는 장작으로 쓰여 불을 낳는다. 불은 재로 변하여 흙을 낳는다. 흙은 바위 속에서 금속이 자라도록 길러줌으로써 쇠를 낳는다. 쇠는 금속 거울처럼 밤에 내놓으면 이슬을 빨아들이거나 배출해서 물을 만든다. 그리고 물은 식물 속으로 들어가 다시 나무를 낳는다.

229) 융의 말을 빌자면, "(무의식의 장에서) 사람의 더 이상 별개의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그의 정신은 넓어지고, 인류의 정신으로 융합된다.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통적인 인류의 무의식으로 융합되는 것이다."

238) 중심축이 되는 지점이나 기둥의 이미지의 본질은 움직임에서 정지로, 시간에서 영원으로, 분리에서 통합을 향해 가는 길이나 장소를 상징하는 것이다. 반대로, 즉 정지에서 움직임으로, 영원에서 시간으로, 통합에서 다수성으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이다.

243)
애착에서 슬픔이 솟아나고
애착에서 두렴움이 솟아나니
애챡에서 벗어나는 자에게는
슬픔이 없으니, 어찌 두려움이 있겠는가?

243) 초월성의 이런 모든 가르침들의 극한까지(욕망과 두려움을 넘어선 붓다와 하느님 아버지 속죄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의 가르침까지) 멈추지 않고 따라올 수 있다면, 분명 모든 대립하는 것들을 떨쳐버리게 되며, 동시에 이원성과 비이원성, 무아와 자아, 천상의 진실과 지상의 진실 또한 떨치게 된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244) 하늘과 땅, 심지어는 비존재와 존재가 둘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고 거기에 동화될 때, 마르지 않는 샘처럼 생의 기쁨이 모든 것으로부터 흘러넘칠 것이다.

3 연꽃과 장미

267)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적절한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280) 오비디우스의 '번신'에서 인용한 그리스의 성자 피타고라스의 말처럼, "영혼은 떠다니면서 이곳으로 왔다가 저곳으로 갔다가하며 어떤 껍데기든 마음에 드는 것에 깃든다. 짐승의 몸에서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몸에서 짐승의 몸으로 옮겨 다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붓다와 보살(그리고 힌두교에서는 신)의 신성한 능력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새로 부여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으로, 혹은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기억나게' 되는 것이다. 그때, 무지(마야의 감추는 힘)라는 장애물은 천천히 사라져가거나 일시에 초월되는 것이다. 워즈워드가 말했듯, 우리의 생은 "한숨 잠이며 망각일 뿐"이었던 것이다.

296) 힌두교는 유대교처럼 기본적으로 민족 종교이다. 하나는 유대인에게서 생겨났고, 하나는 힌두인에게서 생겨난 것이다. 한편 불교는 기독교처럼 신앙에 기반한 종교로서, 믿음의 종교다. 그러므로 세계 종교로서 모두에게 동등하게 열려 있고, 어느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308) 동방의 현자들에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이 세계는 신이 따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신성 그 자체가 육체적으로 감지되는 것이다.

308)
살아 있는 존재는
머리카락 하나를 백 갈래로 가르고
그 갈라진 가락을 다시 백 갈래로 갈라
이런 식으로 백 번을 백 갈래씩으로 갈라서 나온
백 갈래 중의 한 갈래 끝과 같은 것.
그리고 그 안에 무한이 들어 있다.

이는 여자도 아니요, 남자도 아니요, 중성도 아니다.
다만 그가 어떤 육신을 입는가에 따라
그 안에 깃드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는 모든 생물체에 숨어 있으며
각각의 아트만은 우리에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지극히 뛰어나고 미묘한 지혜를 지닌 사람의
지극히 세밀한 시각으로면 볼 수 있는 것이다.

330) 우리는 응시하고 돌아선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아름다움에 눈멀고 아름다움에 취해서, 심장이
그 충만함으로 진동할 때까지; 거기에 -영원히 거기에-
예술의 개선 마차에 목이 감긴 채로,
포로들처럼 서서, 떠날 줄을 모르며
치워라! 아무 말도, 적절한 표현도 필요치 않다.
탁상공론하는 바보들이 모여 있는
대리석 시장의 하잘 것 없는 지껄임들도
-우리에겐 눈이 있다.

4 내면의 빛의 변형

334) 현대 학문인 심리학을 요가와 동일한 컨텍스트 안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개인의 운명은 그의 심리적 성향의 작용이라는 생각이다. 즉, 자신에게 들이닥치는 재앙들은 스스로가 초래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신화와 종교의 형상들은 저 높은 곳으로부터의 계시가 아니라 정신생활의 발현이며, 그 환상으이 투영이라는 것이다. 즉, 신들과 정령들은 우리 안에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개인의 심리적 성향은 자신의 꿈과 그의 운명적 사건들에 대한 통제를 통해서 변형될 수 있다는 점이다.

334) 서양이 몇 세기 동안 자연과학이나 휴머니즘적 사회 제도들을 만들어 내는 데 있어서 외면적으로 진보하였지만, 내면적 심리학적 측면에 있어서는 동양에 많이 뒤져 있으며, 이런 면에서 오늘날 가장 많이 배워야 하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 서양인들이다.

335) 위대한 문명들의 신화적 체계에는 여러 모티프들이 공유하는 중요한 하나의 밑바탕이 있으며, 이 모티프들 중 많은 것들은 청동기 시대 초기, 수학적으로 구조지어진 근동의 천문학적 체계처럼 단일한 역사적 원천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335) "그 자아가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자는 누구나 '그와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진실을 알지 못한다"
-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

335) 사람들은 각기 여러 신들을 섬기면서 "이 신을 숭배하라. 저 신을 숭배하라."고 하낟. 그러나 모둔 하나의 창조자로부터 나온 창조물일 뿐이며, 그 자신이 모든 신이다...그는 우주 속에, 심지어 우리의 손톱 끝까지 들어와 있으며, 그것은 마치 칼집 속에 들어 있어나, 불이 장작 속에 들어 있는 것과도 같다.
-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

349) 그렇게 널리 나타나는 문화들의 영향관계를 주장하는 것은 정당한 것일까? 만약 아니라면 다르게 질문을 던져보자.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동일한 모티프들이 동일한 구조의 구성으로 나타나는 경우(많은 경우 유사한 신화와 전설들이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그것이 담고 있는 사고도 상당히 유사할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견지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것인가? 하지만 생명의 신으로 숭배되지 않고, 비천하고 저주받고 거부되는 에덴동산의 뱀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360) 피안의 지혜에 이르는 신비로운 방식에 따르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의 빛을 가득 찬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생애를 거쳐 자신의 의식이 그 극점으로, 즉 달에서 태양으로 도약하게 되면 자신의 육체는 이지러지는 달처럼 제 갈 길을 가게 한다.

364) 요가를 통해 의식은 그 근원과 결합되며, 그리하여 인간은 그 근원과의 자기동일성에 대한 앎 속에서 살 수 있으며, 이것은 단지 한낮의 빛에 한정된 자아의 자기동일성만이 아니다. 오히려 달빛과 태양 빛에 관한 사고를 개조하는 것이다. 즉, 달 아래 일시적인 의식을 반영하는 빛은 모든 빛과 모든 의식의 영원한 태양적 원천과 결합되어야 한다.

365) "네가 바로 그것이다." 내 아들아. 너는 이미 네가 알기를 원하는 의식의 빛이며 존재의 지반이며 진실의 지복인 네 자신이다.
-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367) 막대, 돌, 고양이, 새, 그 무엇이든 간에 이런 방식으로 모든 개념에서 분리된다면 그것은 특정한 '의미'를 갖지 않는 경이로 비춰질 것이며, 그 자체로 처음이지 끝인 것, 즉 마치 보편자 '여래'처럼 비춰질 것이다.

374) 요가는 임의대로 움직이는, 마음이라는 것의 활동을
의도적으로 멈추는 것에 있다.

376) 요가의 사고방식은 바람을 가라앉히고 물을 다시 평온한 상태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387) 호흡을 조절하는 것은 감정과 느낌을 조절하는 것이며, 정신을 조절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424) 모든 소리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사물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생긴다. 예를 들어 목소리는 성대에 숨이 부딪쳐 나는 소리이다.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 유일한 소리는 우주의 창조적 에너지가 내는 소리, 다시 말해 공(空)에서 나는 소리인데, 이것은 사물에 선행하며 사물들은 거기서 응결한 것들이다.

428) 신화는 사실 사회를 움직이고 형성하는 공적인 꿈들이다. 역으로 한 사람의 꿈들은 그 자신을 움직이고 형성하고 있는 사적인 신들과 반(反)신들과 수호신의 힘으로 이우러진 작은 신화이다.

447) "인간의 마지막이자 가장 높은 떠남의 성취는 신을 향하여 신을 떠나는 것이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5 희생

496) '누가복음' (17:33)에서 말하듯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목숨을 버리려는 사람은 보존할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지혜의 자아가 살고 있는 피안에서 온 메시지이다.

511) 나는 종교를 자연의 운행이나 사람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조정한다고 믿어지는, 초인간적 힘에 대한 회유나 위무로 이해한다. 이렇게 정의할 때, 종교는 이론과 실천의 두 가지 요소, 곧 인간보다 우월한 힘에 대한 믿음과 그 힘을 달래거나 기쁘게 하려는 시도로 구성된다. 두 가지 중에서는 분명 믿음이 우선한다. 우선 어떤 신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그것을 기쁘게 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이 그에 상응하는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신학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사랑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일정하게 다스리지 않는 사람은 결코 종교적이라고 할 수 없다. 다른 한편 종교적 믿음이 없는 단순한 실천 역시 종교가 아니다. 두 사람이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한 사람은 종교적이고 다른 사람은 아닐 수 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나 두려움 때문에 같은 행동을 했다면 그 사람은 종교적이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나 사랑 때문에 행동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 행동이 공동선(共同善)에 일치하느냐 어긋나느냐에 따라 도덕적일 수도 있고 비도덕적일 수도 있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중

568) "이 무지의 분리를 보상해주는 것은 '희생'이다. 희생한 자의 자기양도와, 분리된 신을 온전한 하나의 전체로 다시 세움으로써 다수의 자아들은 하나의 원리로 응축된다."
- 아난다 쿠마라스와미

569) 이원성의 통일에 대한 지식이 한 문화의 예술과 예술가들에게 지식을 주고 영감을 주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인도에서 창조적인 탄드라리즘의 시기 동안 특히 그랬던 것처럼) 가장 단순한 민담의 테마라도 확대되고 화려해지며, 놀랍게 변형된다.

6 깨어남

576) 불이 이글거리는 대장간에서 광석들은 불후의 에센스, 그 값진 금속을 추출해내기 위해 '희생된다'.

581) "우리의 탠생은 단지 꿈이요 망각일지니."
- 워즈워드

582) 쇼펜하우어는 시적이고 사색적인 글 '개인의 운명에 있어서 확연한 의지에 관해서 On An Apparent Intention in the Fate of the Individual'에서 이 광대한 우주 전체, 이 경이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조건지어진 현상의 다양성'에 관한 이미지를 제시한다. 즉, 그 이미지는 "하나의 존재가 꾸는 광대한 꿈으로서, 그 꿈속의 등장 인물들도 모두 꿈을 꾸고 있는, 그리하여 만물이 맞물려 있고 다른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는" 이미지이다.

591) "그곳에 있는 그는 한 분이지만, 이곳에 그의 자식들 안에 있는 그분은 다수이다."
- 샤타파타 브라흐마나


III. 내가 저자라면

눈으로 보는 신화 해설서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421장의 사진과 그림이 수록되어있다. 책을 읽어보면 이 책에서는 텍스트보다는 이미지가 주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텍스트는 방대한 양의 이미지의 이해를 돕는 보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책 제목이 '신화의 이미지' 인 것만 봐도 그러하다.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캠벨의 안내에 따라 수시로 책장을 앞뒤로 넘겨가길 반복해야 한다. 마치 캠벨 자신이 수없이 많은 자료를 쌓아두고 이것저것 비교해가며 해 왔던 평생의 작업을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경험시켜 주는 듯하다. 그의 안내를 따라 시키는 대로 묵묵히 가다보면 그가 느꼈던 통찰의 순간을 약간이나마 경험할 수가 있었다. "아! 이런 것이었구나.", "정말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적이 몇 번 있었다. 그 동안 읽은 캠벨의 책에서 반복적으로 들었던 이야기들을 이 책을 통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말이지 않는가. 단 이렇게 이미지 위주의 책이다 보니, 다른 책과 달리 밑줄 친 부분의 분량이 많지 않았다.

조셉 캠벨, 언제나 그 자리에

책 속에 담긴 그 많은 이미지를 보고서는 이번엔 읽기가 좀 수월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잠시 했다. 그건 역시 그저 기대일 뿐이었다. 조셉 캠벨 그는 그저 신화만 알고, 언제나 한결같은 주장만을 평생 해온 사람이라는 걸 내가 잊고 있었다. 텍스트를 통해서건 이미지를 통해서건 그의 이야기는 같다. 모든 신화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공통점들은 우리 인간의 무의식의 자연스러운 산물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는 한결같이, 하지만 이번엔 이미지와 함께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줄곧 들어왔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색다르게 이미지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경험을 안겨 주었다.

그에게 신은

그의 말을 따르자면, 종교와 신화는 다르지 않다. 모든 책을 통해 일관된 주장을 하고 있다. 모든 신들은 이 우주에 하나 뿐인 신이 가면을 바꾸어 쓴 모습일 뿐이다. 어떠한 종교를 가진 사람도 자신의 종교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살짝 뒤로 하고 캠벨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의 주장에 어느 정도 수긍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이건 내 생각일 뿐 실제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4기 이한숙 연구원의 컬럼(보기)을 통해서도 이런 캠벨의 주장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한 기독교인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실제 종교인들로부터 캠벨이 어떠한 평가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한 번 조사해 볼 만하다 여겨진다. 나 역시 독실한 기독교의 집안에서 자라왔지만, 그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채 홀로 버티며 사는 사람으로서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의 많은 기독교인들과 여러 번 논쟁을 벌였던 내용에 대해서 캠벨은 적절한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무의식이 전부가 아니다.

이 책에서 특이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있다. 세계 각지에서 발생된 신화들 사이에 공통점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캠벨은 융의 정신분석학에 기반하고 있으며, 특히 꿈과 집단무의식이라는 것에 대해서 많은 언급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신화의 내용과 더불어 그 형식과 신화로부터 발생된 많은 작품들(건축물, 토기 등) 사이의 공통점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공톰점이 인간의 무의식 뿐 만 아니라, 실질적인 전파를 통해서도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상 전파경로를 표시한 지도와 각 작품들의 제작시기와 장소를 함께 표시한 연대기표 등을 통해서 구체적인 증거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어찌 보면, 신화에서 드러나는 공통점을 철저하게 인간의 공통된 무의식속에서 찾아왔던 그 간의 캠벨 자신의 주장을 약화시키는 듯도 하지만, 여러 가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좀 더 신뢰성을 높였다는 생각도 든다.

신화 테마 여행

신화는 결국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통로라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신화를 통해 들어간 우리의 내면에서 값진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 말한다. '신화의 이미지'의 전체구조는 꿈으로 들어가 깨어남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캠벨이 말하는 내면으로의 여행을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경험시켜 주고 있다. 캠벨은 우리를 우주의 꿈속으로 안내한다.(1부. 꿈으로서의 세계)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우리는 다시 깨어난다.(6부. 깨어남) 2부에서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성스런 건축물들을 통해, 그리고 세계의 달력들을 통해 우주의 구조를 시공간적으로 탐색한다. 3부에서는 연꽃과 장미로 대표되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점에 대해 말하며, 4부에서는 요가를 통한 우리 내면의 변화를 보여준다. 5부에서는 신의 희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6부 깨어남을 통해 그가 안내하는 여행을 마친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이미지를 통해 많은 설명을 하고 있다. 그만큼 시각적 즐거움을 안겨주고 있으며. 책을 읽는 과정을 그야말로 여행이라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정도이다. 앞서 읽었던 캠벨의 저서 '신화의 세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내가 아쉬운 점으로 지적했던 책의 구성 방법에 대해서, 캠벨은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떠냐? 한 번 보아라."하는 식으로 내게 이 책을 던져준 듯하다. 책 속의 수많은 이미지 자료들은 상당히 자유로워 보이면서도 체계적이고 치밀하게 배치되었다는 느낌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끔 만든다. 책의 특성상 읽는 방법도 그저 페이지 순서대로만 읽는 것인 아닌 수없이 제시되는 캠벨의 요청에 의해 앞으로 뒤로 이리저리 책장을 넘기며 바쁘게 움직여야 했으며, 그림과 그에 딸린 설명과 해석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다. 이러한 구성은 흉내 낸다고 쉽게 따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평생 그 많은 이미지와 텍스트를 머릿속에 줄줄이 꿰고 있는 그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자유로움 속에 들어있는 치밀함이라 하면 맞을까? '신화의 이미지'는 그러한 구성이 돋보이는 책이었다.

캠벨 역시 이 책을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 구상했음을 밝히고 있다. 봐야지만 믿을 수 있는 나 같은 범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제대로 보여주는 책이다. 어느 페이지를 펼치건 쉽게 신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냈다. 우리는 이미지 속에서 꿈을 꾼다. 그 속에서 우리는 신화 속의 등장인물과 많은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림으로 보는 신화는 더욱 재미있었다.

우린 그런 것들이지
꿈으로 만들어진 것들, 하여 우리의 작은 생은
한숨 잠과 함께 한바퀴 도는 것이디.
- 세익스피어, '헛소동' 중 ('신화의 이미지' 20p)

나의 삶이 우주의 꿈이라면?

좋다. 꿈 속에서 난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에.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가 그랬던 것처럼, 난 초절정 무술의 고수가 될 수도 있고, 컴퓨터에 능통한 해커도 될 수도 있다. 돈 버는 건 더더욱 우습지 않겠는가? 나의 삶이 꿈이라면, 나를 가두고 있는 내 마음 속의 모든 벽들을 흔적없이 날려 버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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