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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0일 19시 24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신화학자인 캠벨은 신화와 불가분의 관계인 종교에 대해서도 깊은 천착과 연구를 하였다. 아일랜드계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후에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뜻밖의 행로를 보였다. 캠벨은 종교에 있어서 어떤 경험과 사유를 거쳐 그런 결과를 도출해내었을까.

캠벨은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아일랜드계 가톨릭 집안이었고 장남이었다. 캠벨이 다닌 학교도 당연하게 로마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였다. 열다섯 살에 코네티컷 주의 캔터베리 프레드 스쿨에 입학한 그는 3년뒤에 우등으로 졸업한다. 캔터베리는 영국의 캔터베리 대성당과 캔터베리 대주교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영국성공회에서 공식적인 수장인 영국 여왕을 제외한다면 가장 높은 직위다. 597년 로마에서 영국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선교사 성 아우구스티누스(후에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가 됨)를 보냈는데 그것이 캔터베리 대성당의 시초이다.

캠벨의 종교에 대한 사유가 큰 전환을 하게 되는 계기는 스무 살 때이다. 캠벨은 1924년 유럽을 여행하러 가던 배에서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난다. 이 만남에서 캠벨은 힌두교와 불교를 접하게 되고 큰 흥미를 가지게 된다.
그 동안 캠벨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힌두교와 불교는 전혀 다르다. 힌두교는 브라만교의 철학을 배경으로 하는 다신교이다. 힌두교의 전설에 의하면 힌두교의 신은 3억3천만 종류에 이른다고 하기도 한다. 브라만은 영원하며 알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는데 힌두교는 ‘인간의 영혼이 곧 브라만’ 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안데 담긴 궁극적인 믿음은 우리 모두가 신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파는 비슈누교와 시바교의 두 그룹으로 나뉜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욕망에 사로잡힌 자아란 고통이며 고통의 덩어리이기에 그러한 욕망과 사로잡힌 미망을 바로 깨달아 벗어나는 법칙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의 법이다.

청년시절에 만난 힌두교와 불교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캠벨에게는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이다. 캠벨은 유럽으로 유학을 가는데 뮌헨에서 공부하던 시절 산스크리트어, 인도․유럽어족을 공부한다. 아마 이 언어를 배우며 힌두교와 불교에 대한 관심이 더 깊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부터 캠벨은 가톨릭 교회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게 되고, 귀국후에는 사람들에게 공언하기까지 했다. 청교도 사회인 미국에서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가 “나는 이미 기독교도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배교와 같은 행위였고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캠벨이 기독교에 대하여 강한 의문을 품었던 것은, 자연정복 사상과 배타성(선민사상이나 교판간의 교의 대립 등) 그리고 그 이상으로 신화적인 상징을 사실처럼 다루는 것 등이었다. 그는 그것에 대신해야 할 것을 인디언 신화나 불교사상에서 발견했다.

캠벨은 ‘토마 복음서’에 큰 공감을 느끼기도 했다. 토마복음서는 예수의 가르침, 예언, 격언, 우화를 모은 문서이며 전체는 연결되어 있지 않고 독립적인 문장으로 구성된다. 토마복음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 이집트의 옥시링쿠스(Oxyrhynchus)에서 파피루스 형태로 발견되었고 1945년에 이집트의 나그함마디(Nag Hammadi) 에서 옥시링쿠스 파피루스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파피루스가 다시 발견되었다. 이 토마복음서는 대략 A. D 2세기경에 희랍어(그리스어)로 기록되어 내려오다가 최근에 발견된 것이다. 토마복음서와 신약성경의 관계를 조사하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오늘날 학자들은 형태와 내용이 비슷한 공관복음서의 저자 마태, 마가, 누가가 복음서를 쓰기위하여 참고한 공통 자료("Q" 로 불린다)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공통자료와 토마복음서는 상당히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으리라 추정된다. 기독교인은 토마복음이 기존 복음서와는 많이 다르다는 이유로 위경으로 간주한다. 전부 114절로 되어있고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캠벨은 그러나 만년에는 불교에서 그의 이상에 가장 가까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만년에는 서재에 달마대사 초상을 걸어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불교신자가 된 것은 아니었고 생활속에서 명상을 통하여 내면을 향한 여행을 계속 했다. 그는 종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신은 나의 신이 아니다. 내게 그것을 강요하지 말라.”


● 마음에 들어 온 글귀

이 같은 믿음이 없어지자 불확실성이, 뒤이어 불안감이 찾아왔다. 니체와 입센이 알고 있던 것처럼 삶은 삶을 뒷받침하는 환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환상이 사라진 곳에는 안정감도, 도덕률도, 확실한 것도 없다. 가령 원시 사회가 백인 문명에 의해 파괴됐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보라. 오랜 터부가 의심받자마자 그들은 파괴됐고 분열됐으며, 악과 질병으로 분류됐다. [22]

이들 역시 무의식과 강박적 공포, 망상의 표현이다. 더욱이 프로이트가 보기에 모든 예술, 특히 종교 예술 역시 병리적이다. 모든 철학도 마찬가지다. 사실 문명은 무의식에 남아 있는 유아기적 좌절의 병리적 대체물이다. 따라서 프레이저처럼 프로이트는 신화와 마술, 종교의 세계를 부정적으로, 결국에는 과학에 의해 비판받고 뒤처지며 밀려날 오류라고 평가했다. [26]

신화는 삶속에서 인식되고 통합되어야 하는 정신의 힘을 그림문자로 말해주고 이 영혼의 힘은 언제나 인간 정신에 보편적이었으며 인간이 수천 년의 세월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인류의 지혜를 나타낸다. 따라서 신화는 잠들 때 빠져드는 깊은 곳이 아니라 외부 세계와 관련된 과학의 연구 결과에 의해 대체된 적이 없었고, 또 그럴 수도 없다. 꿈과 신화 연구를 통해 이 내면의 힘과 대화를 하다보면 더욱 깊고 더욱 현명한 내적 자아의 드넓은 지형을 깨달을 수 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신화를 소중히 하고 계속 살아 있게 하는 사회는 인간 정신의 가장 건전하고 풍요로운 땅에서 자라날 것이다. [27]

죽음에 대한 의식과 죽음을 초월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신화의 가장 커다란 발생원인이었다. 이와 함께 또 다른 깨달음이 있다. 즉 한 인간이 태어나 그를 돌보고 보호해주는 사회 집단, 그리고 거의 평생동안 그 역시 돌보고 보호해야 하는 사회 집단은 그가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존재했고 그가 죽은 다음에도 존재하리라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36]

다시 말해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동산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신의 질투나 분노 때문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집착 때문이다. 시공간 세계를 향한 외부 지향적인 관념 때문에 우리는 그 세계와 그 속에 있는 찰나의 육체에 집착한다. 우리는 이 물질적 삶의 재물과 쾌락이라 여기는 것을 포기하기 싫어하며, 이 집착이야 말로 우리가 동산에 들어가지 못하는 커다란 사실, 거대한 이유 혹은 걸림돌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내면에서 외부를 향한 육체적 감각이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44]

그노시즘의 토마복음에서 그리스가 했다고 하는 말처럼 “아버지의 왕국은 이 세상 어디에나 있으나 인간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47]

아이누족의 장례식에서 고인에게 보내는 마지막 말에도 똑같은 개념이 나타난다. 고인은 유령이나 귀신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자연의 절차를 거쳐 아이로 돌아온다. 나아가 죽음이 아이누 족에겐 형벌이 아니기 때문에 중죄를 지는 사람에게 내리는 가장 극심한 선고는 고문을 통한 사형이다. [50]

그리고 같은 시기 벽화의 남자 그림은 모두 똑같은 옷을 입은 반면, 여자 그림은 안전히 벌거벗은 채 아무 장식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다는 점이 내 생각에는 대단히 중요한 듯하다. 이는 남녀에 대한 심리적 가치, 곧 신화적 가치에 대한 무언가를 가리킨다. 여성은 본래 신화적인 존재이며 생명의 근원이자 생명을 낳는 사람일 뿐 아니라 마법 같은 손길과 존재로 경험된다. 달의 주기와 일치하는 여성의 신체 변화 역시 신비다. 반면 옷을 갖춰 입은 남자는 권력을 쟁취해 특별하고 제한된 사회적 역할이나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55]

이렇게 집에서 보내는 시기에 모든 기본적인 사회적 각인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사회적 각인은 심리적으로 성숙해지기 전에 벗어나야 하는 의존적 태도와 관련된다. 아이는 부모의 충고와 지지, 보호를 받으며 환경의 도전에 대처하고 성인으로 인정받기 전에 이 같은 생활패턴은 바뀔 것이다. 따라서 원시사회 사춘기의 통과의례와 전 세계 교육의 기능은 항상 부모에게 의존하는 청소년을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오늘날에는 청소년이 부모에게 의존하는 시기가 20대 중, 후반까지 늘어났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독립하기가 훨씬 힘들고 독립에 실패할 확률도 높다. [65]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니체도 그러했으리라-은 형식은 삶이 당당하고 웅장하게 드러나는 수단이자 매개체이고 단순한 형식의 파괴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의 삶에 대한 재앙으로, 이는 모든 문명의 구조적 형식인 의례이자 예절이라는 점이다. [69]

이제는 잊혀진 지 오래된 구석기 위대한 수렵 시대-다양한 종의 짐승이 인간과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던 당시-나름의 생활방식으로 자연의 힘과 원형을 보여주었던 인간의 교사는 다름 아닌 동물들이었다. 원시부족은 짐승의 이름을 짓고 의례를 행할 때 동물 가면을 썼다. [75]

마찬가지로 사회관계가 이루어지는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는 의식화된 절차가 그 의례의 주인공을 비개인적인 존재로 만들고 그들을 그 자신이 아닌 존재로 높이거나 낮춘다.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종, 사회, 계급 혹은 직업의 것이다. 그러므로 임명식 같은 곳에서 판사나 시장으로 취임한 사람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 원칙이나 법의 매개자라는 그들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러한 규칙이 없는 사회는 존속하지 못한다. 사람들 역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다. 한 사람이 개인적 속성은 그 사회의 규칙을 통해서만 막연한 가능성에서 벗어나 유일무이한 삶을 실현할 수 있다. [76]

나는 그리니치 동경 60도 부근에서 이란을 수직으로 가로지르고 동양과 서양을 나누는 굵은 선을 그었다. 이 선을 문화적 분기점이라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 선의 동쪽에는 인도와 극동(중국과 일본)이라는 창조적이고 중요한 두 문화권이 있으며, 서쪽 역시 레반트(Levant, 그리스와 이집트 사이에 있는 동지중해 연안지역을 통틀어 이르는 말. 시리아, 이스라엘 등) 혹은 근동과 유럽이 있다. 이들 네 지역은 생활양식이나 의상, 예술 뿐 아니라 신화와 종교, 철학, 이념, 등 각 지역의 역사 전반에 걸쳐 뚜렷이 구분되어 왔다. 하지만 이 네 문명은 다시 크게 둘로, 즉 인도와 극동 그리고 레반트와 유럽으로 구분할 수 있다. [83]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에서 개인은 어디 있는지 묻고 싶다. 사실 그런 세계에는 개인적 인생 같은 것은 없었고, 그저 만물을 지배하는 거대한 우주의 법칙만 있을 뿐이다. 이 법칙을 이집트어로는 마트(Matt) 수메르어로는 메(Me), 중국어로는 도(道), 산스크리트어로는 다르마(Dharma)라고 한다. 거기에는 개인의 선택, 의지, 심지어 생각도 없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일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라고 잠시 자문하는 일이 없다. 태생이 그의 미래와 생각, 행동을 결정한다. 여기서 내가 가장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사회적으로 명백한 우주의 질서라는 이 초기 청동기의 개념(어쨌든 무엇인가 되어야 한다면, 누구든 이 질서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은 지금까지 동양에선 어떤 식으로든 중요하다. [87]

바로 유럽의 인간관으로 관심을 돌려보자. 우선 모든 저서에서 개인의 완전성을 획득하는 심리적 과정을 ‘개성화’라고 표현했던 스위스 심리학자 카를 G. 융의 말을 인용해보자. 그는 누구나 평생 사회로부터 특정한 사회적 역할의 수행을 강요받는다고 지적했다 이 세상에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끊임없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데, 융은 이 역할을 페르소나(personae)라고 했다. 이 단어는 ‘가면, 거짓 얼굴’을 뜻하는 라틴어 persona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대 로마극장의 배우는 이 가면을 쓰고 그 가면 너머 말을 한다.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가면을 써야 한다. [89]

융의 표현대로, 개성화되고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무수한 역할의 가면을 언제, 어떻게 쓰고 벗을지 알아야 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고”, 집에서는 국회에서 했던 역할의 가면을 벗어야 한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깊숙이 각인된 가면도 있기 때문이다. 판단과 도덕적 가치, 자존심, 야망, 성취, 관심분야 등이 그것이다. 자신의 가면이든, 다른 사람의 권위적인 가면이든, 어떤 가면에 지나치게 큰 인상을 받고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개성화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강압적인 영향을 받아선 안된다. 개성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과 해로운 것을 통제하면서 자신의 중심을 찾아 그에 따라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90]

현악기가 다른 악기에 맞추어 화음을 이루듯, 내부에서는 외부의 이미지에 대한 일종의 공명이 일어난다. 따라서 어떤 사회 집단의 살아있는 상징이 모든 구성원들에서 이 같은 반응이 일으킬 때 일종의 마술적인 화음이 그들을 하나의 정신적 유기체로 만들고, 이를 통해 그 구성원들은 공간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하나의 존재, 하나의 믿음으로 움직인다. [112]

부처라는 말은 ‘깨달은 사람’ 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산스크리트어의 budh, 즉 ‘깨닫다, 바닥까지 꿰뚫다’ 혹은 ‘인식하다, 알다, 의식을 되찾다, 눈을 뜨다’ 라는 동사에서 비롯됐다. 부처는 육체가 아니라 육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 곧 자신임을, 생각이 아니라 생각을 알고 있는 사람, 즉 의식이 곧 자신임을 깨달은 자이다. 나아가 전구는 빛을 낼 때 가치가 있듯이 자신의 가치는 의식의 빛을 발하는 것임을 안다. 전구에게 중요한 것은 필라멘트나 유리가 아니라 이 전구가 만들어내는 빛이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와 신경조직이 아니라 이것들을 통해 빛나는 의식이다. 전구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식의 빛을 위해 사는 사람은 깨달은 자이다. [119]

의례는 신화적 상징체계다. 사람들은 예배라는 드라마에 참여함으로써 언어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과거나 현재, 혹은 미래의 역사적 사건을 드러내는 계시의 형태로 신화적 상징과 접촉하게 된다. 유대교 회당과 교회는 자기네 상징의 ‘의미’를 말로 표현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효과적인 의례는 모두에게 각자의 생각을 남겨주는 것이다. 교리나 정의는 혼란을 일으킬 뿐이다. [121]

태어난 것에는 죽음이 확실하고 죽은 것에게는 태어남이 확실하다. 피할 수 없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라. 법의 수호가 의무인 귀족으로서 이 정당한 전쟁을 거부하면 너는 덕과 명예 모두를 잃을 것이니라.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의무의 행동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옳도다. 그 다음 그 결실에 대한 모든 욕망과 두려움을 버리고 너의 의무를 수행하라. [125]

나는 학생들이 동양에서 배울 수 있는 것, 많은 사람들이 본받으려 하는 것을 적극 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동양의 가르침을 들여다본다면 자기 자신으로 가는 신비한 내면의 길에 대한 무언가를 배울 것이라고, 그리고 현실적 삶을 잊지 않은 채 그 가르침을 따른다면 인생과 문학, 예술을 훨씬 깊이 있고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실행할 수 있으리라고만 말할 것이다. [127]

이미지의 의미는 말 너머, 말이 정의하는 의미 너머 직관적으로 파악된다. 이미지가 당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말은 당신이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 뿐이다. 결국 이미지와 멀어진다. 춤을 출 때는 그 의미를 묻지 않고 그저 즐길뿐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의미를 물어보지 말고 즐겨라. 자신의 의미를 묻지 않고 자신을 즐겨라. 최소한 건강할 때만이라도 자신을 즐겨라.
하지만 세상을 즐기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의 건강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잘 알다시피 이 세상은 무시무시하기 때문이다. 부처는 말했다. “모든 삶은 고통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 삶을 소모하는 삶. 이것이 그 존재의 본질이요, 영원히 바뀌고 다른 것이 된다. 부처는 말했다. “세상은 영원히 타오르는 불이다.” 그렇다. 누구나 고통(신비한 의례의 중심)너머 신비한 행복의 엄숙하고 정적인 춤을 출 때 이 점을 확신한다. [128]

삶의 경이와 신비를 상징하는 최고신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인생의 잔인한 속성과 그 영광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가르침이다. 세상이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었는지, 자신들이 고통이나 시간 인생 없는 세상을 만들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혹은 ‘우선 사회를 바로 잡고, 그 다음 나 자신을 바로 잡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들 역시 많다-은 신의 평화라는 대저택의 정문조차 넘지 못한다. 어느 사회든 다 사악하고 불행하며 불공평하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따라서 정말로 이 세상을 구하고 싶다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즐거운 슬픔과 슬픈 즐거움이라는 삶의 지식으로 사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는 법을 가르칠 수 없다. [128]

항상 경계하지 않으면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놓친다. 반면 무위의 예술은 끊임없는 경계 자세다. 그는 항상 깨어있다. 삶은 의식을 표현하기 때문에 삶은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깨어 있다. 삶은 가르치거나 지사할 필요가 없다. 삶은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자연스럽게 살며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한다. [150]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는가? 햄릿은 이 의문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고통과 쾌락, 슬픔과 기쁨이 삶 속에 분리되지 않고 섞여 있다는 것, 그것이 삶의 본질이다. 하지만 기쁨을 위한 삶의 의지는 곧 고통을 통해 이 세상에 오려는 의지였다. 그렇지 않다면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환생이라는 동양 사상의 기본 개념이다. 당신이 지금 이 세상에, 이 자리에, 이 특별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의 궁극적인 깨달음을 위해서는 바로 그러한 의지가 필요하다. 그 놀라운 삶의 의지 때문에 당신은 이 자리에 존재한다. 이때 ‘당신’이란 지금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당신의 심장을 뛰고 폐를 숨 쉬게 하며 당신을 위해 모든 복잡한 삶을 실천하는 ‘당신’을 가리킨다. [152]

부처는 환자의 병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의사의 자격으로 이 세상에 온다. 제일 먼저 이렇게 물었다. “세계 병의 징후는 무엇인가?” “고통이다!” 이라는 것이 그 답이었다. 첫 번째 진리는 다음과 같다. “모든 삶은 고통이다.”
“모든 삶은 고통이다1”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모든’으로, 이는 ‘근대’ 생활 혹은(얼마전에 들었던 것처럼) ‘자본주의 생활’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질서가 바뀌면 사람들이 행복해질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부처는 혁명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의 첫 번째 진리는 삶-모든 삶-이 고통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치료책은 환자의 사회적, 경제적, 지리적 환경에 상관없이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 [164]

하지만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라. 우리는 평등하고 차별 없는 절대 진리의 해안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이 절대적인 관점에서 맨해튼 해안이 어떻게 보이는지 돌아본다...... 세상에! ‘건너편’ 해안이 없다. 두 곳을 가르는 물도, 배도, 선원도 없다. 불교도, 부처도 없다. 속박과 자유, 고통스러운 삶과 열반의 기쁨의 구분, 깨우치지 못한 그 개념이 인식되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여행은 환상이었다. [175]

생계를 위한 노동과 가족 부양, 친지들과의 관계, 고통과 기쁨이 모두 우리의 수행이다. T.S. 엘리엇은 ‘칵테일 파티’라는 희곡에서 이 개념-불경의 수많은 구절과 함께-을 현대 사회에 적용했다. 그리고 이는 중세 일본에서는 사무라이의 불교였다. 지금도 검술이나 궁술 등 일본의 방어술에서 그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정원 손질이나 요리, 심지어 선물 포장에서도 이러한 불교가 효력을 발휘한다. 이 방식이 ‘원숭이의 길’이며 세상의 일부분인 종교뿐 아니라 모든 생활과 관계된다. 실제로 이는 아름다운 일본 문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가난과 고통, 학대, 불의, 이 속세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이곳에 존재한다. 그 모든 것들이 끝없는 세상 여기저기에 항상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다. 그것은 열반이다. 그리고 니르바나는 욕망과 두려움 없이 있는 그대로 경험할 때 이 세상 그 자체다. 열반은 여기에 있다! 열반은 여기에 있다! [178]

다행히 건초더미에 떨어져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몸과 마음이 놀란 젊은이는 일어나 옷을 고쳐 입지도 않은 채 넋을 잃은 채 구루에게 돌아갔다. “스승께서는 제가 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루가 대답했다. “그렇다. 너는 신이다.” “스승께선 만물이 신이라 하셨습니다.” 구루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 만물이 신이다.” “그렇다면 그 코끼리는 신이었습니까?” “그렇다. 코끼리는 신이었다. 하지만 왜 코끼리 목위에 앉아서 길을 비키라 했던 신의 목소리는 듣지 않았단 말이냐?” [179]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도덕성의 기초’ 라는 글에서 이 영혼의 초월적 경험을 다뤘다. 그는 ‘어떻게 사람이 자기자신과 자신의 안전을 잊고서 마치 타인의 생명과 위험이 자신의 것인 양 다른 사람을 죽음이나 고통에서 구하기 위해 자신과 자기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가?’ 라고 묻고는, 그러한 행동은 자신과 그 타인이 사실은 하나라는 진리를 본능적으로 인식한데서 나온 행동이라고 대답했다. [184]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다섯 번째 사랑은 무엇인가? 그것은 열렬하고 맹목적인 사랑이다. 결혼을 할 때에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성적이고 이 세상의 재물과 재산, 사회적 위치 등을 좋아한다. 나아가 동양에서 결혼은 서구의 사랑관과 달리 가족끼리의 결합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열정적인 사랑이란 무서운 폭풍처럼 성실한 삶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의 목적은 할라즈가 말했던 나방의 사랑과 같다. 사랑의 불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186]

본질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 즉 카루나(karuna)는 기독교의 자애, 즉 아가페(agape)에 해당한다. 아가페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충고, 더 나아가 가장 숭고하고 대담한 기독교의 가르침,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192]

그렇다면 그렇게 태어난 사랑의 본성은 무엇인가? 근동이든 인도든 동양의 성애와 관련된 신비에 따르면 여성은 연인에게 초월적인 깨달음보다 더욱 심오하게 경험되는 존재로 해석된다. [194]

이 중요한 만남은 당시 대립하고 있던 두 종교, 즉 기독교와 이슬람교, 다시 말해 ‘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두 아들’을 비유하고 있다. [202]

그는 ‘정확한 말’ 이라는 단어가 상처가 될 수도, 심지어 사람을 죽일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작가의 임무는 관찰하고 정확히 이름을 붙여야 하는 것이다. 상처를 주고 죽일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작가가 묘사할 때 이름을 붙여야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인생에 완벽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해도 사랑스럽기 보다는 지겨울지도 모른다. 완벽함에는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불완전함 때문이다. 작가는 이 불완전성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말을 찾고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그 단어를 보내야 한다. 단 향기, 사랑의 향기를 담아서 사방으로 보내야 한다. 과녁, 그 불완전성이야 말로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자 그 삶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203]

사도 바울은 말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또한 예수는 “남을 판단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신에게 만물은 공평하고 선하면 정당하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은 그릇되다 하고 어떤 것은 옳다 한다. 선과 악은 하나다.” 라고 했다. 이 말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신비가 담겨있다. [204]

그리고 전쟁이 이미 없어졌다고 가르쳤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이미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바로 이것이 전쟁의 복음과 평화의 복음 간의 차이다. [228]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이 처음 나온 역사적 환경에서 보면, 그것은 이 세상이 붕괴되고 있다는 절박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기 신화적 개념은 대 전쟁, 마지막 성전이었고 이를 통해 역사가 끝날 때에는 결국 평화가 지배하게 되리라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평화의 신화가 아니라 전쟁, 영원한 전쟁을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금욕적인 기독교의 메시지가 예수의 입에서 가장 가까운 제자의 귀로 전해지자마자 그 말씀은 성전, 지하드 혹은 십자군과 같은 교리로 바뀌었고 계속 그렇게 해석되었다. [230]

지금까지 전쟁의 신화를 살펴보면서 토라와 쿠란 모두 창조자이자 우주의 유일한 통치자인 신은 전적으로, 항상 어느 선택된 민족의 편을 든다. 따라서 그들의 전쟁은 신의 이름으로, 신의 의지를 위한 성전이라 믿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 다르지 않은 개념을 통해 아스텍에서는 태양을 계속 운행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꽃의 전쟁’ 이 일어났다. [239]

이는 신화적 영웅의 일반적인 여행 공식이기도 하다. 나는 이 여행을 1) 분리 2) 입문 3) 회귀로 표현했다. 영웅은 평범한 일상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그 다음 그곳에서 엄청난 세력을 만나고, 결국에는 승리를 차지한다. 그리고는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힘을 얻어 이 신비한 여행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244]

이그쥬가르쥬크는 “유일한 참 지혜는 인류보다 오래되었고 엄청난 외로움 속에 나타나며 고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고난과 고통만이 다른 이들에겐 감추어진 모든 것으로 인간의 마음을 열어준다고 했다.” [247]

원형은 여러 전통에서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가령 불교의 사원과 중세의 대성당, 수메르의 지구라트 마야의 피라미드에서 말이다. 신성의 이미지는 그 지방의 식물군과 동물군, 지형, 인종적 특징 등에 따라 다 다를 것이다. 신화와 의례는 달리 해석되고 달리 적용되며 다른 규칙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전형적이고 본질적인 형태와 개념은 똑같다. 때로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똑같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를 가장 자세히 다르고 가장 정확히 설명하고 해석한 심리학자는 카를 G. 융이다. 그는 이를 ‘집단 무의식의 원형’ 이라 하고, 이는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 공통적인 정신구조와 관련됐다고 말했다. [252]

넓은 곳에서는 길을 잃고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부모와 가족이 정면으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다. 즉 자녀들에게 각인하는 신호에 아이들이 잘 적응하는지, 그 신호가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야 할 세계와 동떨어져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녀에게 자신의 편집증을 물려주고 죽을 수밖에 없다.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부모는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문화의 정서체계에 잘 적응해 합리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하며, 적극적으로 삶을 풍요롭고 비옥하게 하는 요소들로 자신을 건설적으로 만들 자녀를 낳고자 할 것이다. [256]

신화는 새 둥지처럼 지역 환경의 재료로 만들어지고 의식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무의식적인 내면의 지시를 받아 구성된다. 아이를 어르고 돌보고 인도하는 신화의 이미지가 성인에게 적합한가 아닌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신화는 어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신화의 첫 번째 기능은 미성숙한 영혼이 세상에 맞설 준비를 하고 성숙해지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가 사람을 이 세상에서 혹은 천국이나 상상속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느냐 아니냐, 라는 의문이 더 적절하다. 따라서 신화의 다음 기능은 준비를 갖춘 청소년이 세상에 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두 번째 자궁인 신화를 떠나 동양에서 말하는 것처럼 ‘두 번째 탄생’, 즉 어린 시절을 뒤로 하고 세상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는 능력있는 성인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258]

이렇게 두 번 태어난 사람은 더 이상 자연도, 자연의 산물인 사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회 역시 무서운 대상이며 사실 무섭지 않다면 존재할 수도, 존속할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자아는 이 모든 것과 평화롭게 하나가 된다.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후의 삶은 더욱 풍요롭고 행복해진다. [274]

인간 본성은 일정한 방식에 고정된 다른 종의 본성과 다르다. 사자는 평생 사자로 살고 개는 죽을 때까지 개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우주비행사나 은자, 철학자, 선원, 조각가 등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삶 속에서 수많은 운명 중 하나를 실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실현하기로 선택한 삶은 결국 이상이나 상식이 아니라 희열을 통해 결정될 것이다. 시인 로빈슨 제퍼스는 그것을 “한계를 벗어나도록 기만하는 환상” 이라면서 “인간성은 부수어야 하는 틀, 뚫어야 하는 껍질, 불이 되어야 할 석탄, 분해해야 하는 원자” 라고 발했다. 무엇이 이렇게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게 만들 것인가? [286]

신은 (나와) 다르고 또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고, 자신과 신을 다르게 생각하고 숭배하는 사람은 그 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니, 그런 자라면 신들의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짐승들이 사람을 따르고 섬기듯,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신을 따르고 섬기는 것이다. 짐승이 한 마리만 없어져도 인간은 불쾌하게 여기는데, 하물며 여러 마리가 없어진다면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신들은 인간이 그 지혜를 아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299]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기독교도의 난점은 나사렛 예수를 유일무이한 신의 역사적 화신이라고 생각한다는데 있다. 마찬가지로 유대교에서는 신은 당신이 창조한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선택된 민족만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민족 중심적 역사주의 때문에 오늘날 목사들은 신도를 끌어들이기 어려워졌다. [301]

그렇다면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주관적인 의미‘ 에서 볼 때, 오래되고 영원한 신화, 기억하고 있는 과거나 상상한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에 대해 시적으로 새로워진 신화다. 즉 ’민족들‘ 의 아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 깨어 있는 개인들, 이 아름다운 별에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개개인이 아니라 평등한 전체적 정신의 중심, 모든 이와 함께 나름의 길을 가고 한계가 없는 개인에게 말을 거는 신화다.‘그렇다면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주관적인 의미‘ 에서 볼 때, 오래되고 영원한 신화, 기억하고 있는 과거나 상상한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에 대해 시적으로 새로워진 신화다. 즉 ’민족들‘ 의 아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 깨어 있는 개인들, 이 아름다운 별에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개개인이 아니라 평등한 전체적 정신의 중심, 모든 이와 함께 나름의 길을 가고 한계가 없는 개인에게 말을 거는 신화다.’ [313]


● 책에 대하여

성격 급한 초여름이 시간의 더딤을 참지 못하고 달력을 건너뛰어 달려온 듯 하다. 겨울옷을 벗자마자 반팔을 입어야 하는 이상한 날씨. 4월의 평년 최고기온이 평균 17도이니 요 며칠 새 25도를 넘나드는 날씨는 분명한 이상기온이다.
날이 더우니 움직이기 귀찮고 가벼운 산책도 내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른 산책을 떠나보자. 책을 펴고 책 속으로 떠나는 산책이다. 어떻게 책 속으로 산책을 가느냐고? 옛날부터 이미 책 속으로 산책을 많이 다녀서 책 속에 길이 생긴지는 오래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책 속에 길이 있다’ 고.
산책이라고 하면 천천히 걸으면서 부담 없이 즐기는 것이다. 그런 산책에 적합한 책이 있다. 조셉 캠벨의 ‘신화와 함께 하는 삶’ 이다. 캠벨의 책들을 읽으려면 상당한 노력과 사고를 필요로 한다. 내용들이 접하기 어려운 것들이고,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머리를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중에서 그래도 부담이 적은 게 이 책 ‘신화와 함께 하는 삶’ 이다.

책은 캠벨이 1958년부터 1971년까지 뉴욕 쿠퍼 재단 포럼에서 25차례에 걸쳐 강연한 내용 중 13차례의 강연을 선별해서 엮은 것이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었기에 내용도 비교적 평이하고 이해하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다.
책은 가벼운 듯 무거운 듯, 얕은 듯 깊은 듯 다양한 신화들과 삶을 통한 사례들을 안내한다.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 온 신화를 현대의 과학과 연관시켜 살펴보는 첫 걸음부터가 그렇다. 첫 걸음을 내딛은 책은 인류의 출현에서부터 달 위를 걸은 현세의 인류까지 한 달음에 내닫는다. 그 발걸음 속에서 만나는 신화의 이야기는 즐거움과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호모하빌리스 피테칸트로푸스 베이징인 네안데르탈인 호모사피언스를 거쳐 내려오는 신화에 대한 역사적 유추가 그렇고, 동양과 서양의 종교적 대립에 관한 내용은 새로운 시각을 일깨워준다. 정신분열증을 신화와 연관짓고 내면으로의 여행이라는 시각으로 보는 독특한 방법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쓴 소리와 단 소리를 넘나드는 기독교와 힌두교 불교에 대한 거침없는 필치에는 순간순간 가슴이 섬뜩해지기도 한다.
인간의 영원한 주제인 남녀의 열정적 사랑과 인류의 보편적 사랑에 관한 동서양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존재를 위한 필요조건’ 인 전쟁을 신화와 성서를 통해 표현한 저자는 달 위를 걸은 과학을 외면의 여행이라 말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정작 저자가 그렇게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은 책의 마지막에 적어 놓은 그 말을 하고 싶어서였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주관적인 의미‘ 에서 볼 때, 오래되고 영원한 신화, 기억하고 있는 과거나 상상한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에 대해 시적으로 새로워진 신화다. 즉 ’민족들‘ 의 아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 깨어 있는 개인들, 이 아름다운 별에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개개인이 아니라 평등한 전체적 정신의 중심, 모든 이와 함께 나름의 길을 가고 한계가 없는 개인에게 말을 거는 신화다.’

신화 속으로 떠났던 산책은 끝이 났다. 책을 덮었으면 시원한 마루에서 잠을 청해보자. 마루가 없다고 곤란해 할 것은 없다. 방바닥에 누워 시원한 숲 속의 평상에 누워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달콤한 잠에 빠져들면 책 속에서 보았던 신화들이 이젠 꿈속에서 나타날 것이다. 함께 어우러지자고 조르는 신화속의 주인공들과 한판 놀이마당을 벌여라. 그 순간 당신은 독자가 아니라 신화의 주인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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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4.21 09:40:08 *.244.220.254
저자 소개에서 밝히신 것처럼, 저는 이번 '신화와 함께 하는 삶'을 통해 토마복음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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