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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1일 02시 02분 등록
신화의 이미지(THE MYTHIC IMAGE)
조셉 캠벨 글/홍윤희 옮김/살림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 조셉 캠벨(1904∼1987)

제 이름은 조셉 캠벨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이 2008년이니까 제가 죽은 지도 벌써 21년이나 되었군요!! 세월 참 빠르게 갑니다. 아직도 이곳에 살고 있다면 100살하고도 5살이나 되었겠군요. 제가 죽을 때 무려 1000명도 넘는 많은 분들이 와 주셨죠. 그걸 보면 제 인기도 만만치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천국에서 보니 저의 인기는 제가 살아있을 때보다 죽어서 더 높아진 듯 싶더군요. 책으로보다 역시 TV에 한번 등장하니 인기가 급상승하는 걸 보아 역시 멀티미디어의 위력은 현대 사회의 총아라 부를만 하겠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전부터 지속적으로 방송계에 진출할 걸 그랬어요, 제 외모도 한 몫 했을테니까요!! 하하!! 농담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하하하!!

제가 지금 어디 살고 있는지 궁금하신가요? 저는 항상 여러분들의 곁에 있답니다.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TV의 한쪽 귀퉁이에 있을 때도 있고, 여러분들이 듣고 있는 음악의 한 파트, 음계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봄날 꽃구경을 하고 있을 때 스쳐가는 바람의 시원함에도 저는 한몫을 담당하고 있고, 여러분들이 한참 꾸고 있는 꿈에서도 때로는 조연, 주연, 감독, 스텝, 각본 등 갖가지 배역을 바꾸어 가면 활약하고 있기도 하지요. 저는 죽어서 신화가 되었어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연구했던 신화를 죽어서는 신화의 한부분이 되었답니다. 그래서 행복하죠.

오늘은 저의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왜 신화에 대해 이렇게나 빠져들게 되었는지. 물론 어른이 되서의 업적이 더 클 수도 있겠지만 제가 생각할 때 어렸을 때의 이 계기가 없었더라면 지금 비교신화학자로서의 조셉 캠벨은 아마도 없었을 겁니다. 여러분들도 경험해봐서 아실거예요. 가슴 속에 담아놓은 꿈이 결국 현실이 된다는 걸. 저는 이 길 밖에 없었어요. 만약 사회 통념, 교육 규범에 의해 소위 돈벌이가 되는 직업을 선택하게 되었다면 아마도 불행했을 거예요. 아니 어쩌면 제대로 된, 소위 세뇌를 제대로 시키는 교육을 받았다면 그 불행조차도 모른채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르지요.

아시다시피 저의 신화에 대한 입문 계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98년전인 1910년이에요. 당시 저는 아버지, 남동생 찰리와 함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를 보러 갔었죠. 그 당시는 사실 공연이라고 해봤자 그다지 많은 선택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죠. 더군다나 저 같이 당시 6살 밖에 안되는 어린 아이가 볼 수 있는 공연은 더더군다나 적었죠. 지금처럼 아이들을 위한 공연이 많지는 않았다는 거죠. 공연에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몰렸어요. 우리 집처럼 아이들을 보여주기 위해 부모들이 아이들 손을 붙들고 많이들 오신거죠. 그러고 보니 제 기억력도 꽤 좋지 않나요? 당시 상황을 다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하하~~!!

쇼의 내용은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들에 대한 내용이었어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면서부터 대륙을 개척하려는 영국 이민족들과 기존 대륙의 주인인 아메리카 인디언들과의 처절한 투쟁이 쇼의 형식으로 전개되었죠. 처음에는 인디언들이 강경하게 대항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역부족이었고, 결국 대부분의 땅을 빼앗기고 안쪽으로 안쪽으로 쫓겨 들어갔죠. 인디언들이 너무나 불쌍했고,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어요. 그러나 그들의 불쌍함을 떠나 거기서 처음 본 인디언들의 의상이나 말, 문양은 너무나 멋졌어요!! 요즘말로 킹왕짱이었어요!!. 그날 본 인디언들이 가슴에 남았어요. 그들은 비록 아메리카 개척자들에게는 쫓겨났지만 저에게는 마구 쳐들어와서 제 작은 가슴을 통째로 정복해 버린거에요. 이건 아무에게도 얘기 하지 않았지만 그 공연을 보고 온날 밤 저는 온통 인디언들과 노는 꿈을 꿨답니다. 아마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인디언이 되겠다고 선언했을지도 몰라요!!^^

그 당시 가슴에 들어온 아메리카 인디언은 아직도 제 가슴에 있어요. 그날 이후 저와 영원한 친구가 되었거든요. 제가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어떤 어려움이나 도움이 필요할 때면 그는 그의 탁월한 인디언 경험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물론 신화에 대한 연구를 하게 만든 것도 그 친구 덕이죠. 아, 그 친구 이름을 얘기하질 않았군요. 그의 이름은 ‘오른 손 높이들고’에요. 태어날 때 머리부터 나온 게 아니라 오른손부터 나왔다나요? 그것도 스스로 신화로써 꾸며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특이한 이름이긴 하죠?.

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께요. 지면사정과 읽는 분들의 수고도 길면 힘들어지니까 여기까지 하고 다음 주엔 성장해서의 이야기를 들려드리지요. 혹시 어렸을 때 이야기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댓글을 달아주세요. 제 대변인을 통해서 답변드릴 건 답해드릴께요. 그럼, 다음 주에 다시 만나요. ^^(웬지 변경연 어린이들을 상대하는 기분이 드는 건 왜죠? ㅋㅋ)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옮긴이의 말

“신화는 당신이 걸려 넘어지는 곳에 당신의 보물이 있음을 알려줍니다.”(6P)

켐벨은 신화가 바로 이 보물이 가득한 동굴로 들어가는 통로라고 본다. 그리고 그 동굴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내면으로 더 깊게 파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캠벨의 책은 바로 이 보물이 가득한 동굴로의 초대이다.(6P)

그가 신화를 ‘인류의 위대한 한 가지 이야기’로서 ‘단일신화’라고 할 때, 그것은 다양한 신화들의 차이를 지워나가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신화들이 공존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하나’이며 그 속엔 무수한 우주의 배꼽, 무수한 우주의 중심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하게 된다.(7P)

신화의 진정한 의미는 문자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고, 신화의 상징적인 의미는 심리학적인 것이다.(7P)

“신화는 개념체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체계에서 옵니다. ……신화는 마음이 거처하는 곳, 경험이 있는 곳에서 생겨납니다. ……신화는 사실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신화는 사실들 너머 그 사실을 알려주는 무언가를 향하고 있습니다.”(8P)


Ⅰ. 꿈으로서의 세계 The World As Dream

꿈은 영혼의 가장 깊고 비밀스러운 곳에 숨어 있는 작은 문이며, 이 문은 우주의 밤을 향해 열려 있다. 그 밤은 ‘자아 의식 ego-consciousness'이 생겨나기 오래 전부터 정신으로 존재했고, 또한 우리의 ’자아-의식‘이 얼마나 멀리 확정되건 간에 정신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모든 ’자아-의식‘은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리하고 구별하며, 개별적인 것들만 알고, 자아에 관계될 수 있는 것들만 본다. 그것이 별들 가운데 가장 멀리 있는 성운까지 미친다 해도, 자아-의식의 본질은 ’한계‘에 있다. 모든 의식은 분리한다.(26P)

꿈은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된 깊은 곳으로부터 생겨나며, 너무나도 유치하고 기괴하며 비도덕적이다. 꽃처럼 피어나는 그 솔직함과 진실함 앞에, 우리는 기만에 찬 우리의 삶에 대해 얼굴을 붉히게 된다.(26P)

‘신이시여, 속세의 삶의 굴레에 가려진 빛나는 진실에 대한 앎으로 나를 인도하소서.’(54P)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했듯이, “내가 태어날 때 모든 것이 태어났다. 그리고 나는 내 자신의 원인이자 만물의 원인이었다. ……만약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신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86P)


Ⅱ. 우주 질서에 대한 생각 The Idea Of A Cosmic Order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문화의 신화의 의례들에서 서로 비슷한 구조나 종종 동일한 모티프들이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여러 방식들 중 한 가지가 바로 심리학적 방법이다. 제임스 G. 프레이저 James G. Frazer의 『황금가지 The Golden Bough』에 나오는 유명한 말을 인용해 보자면,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서로 다른 나라, 서로 다른 하늘 아래 사는 인간 정신의 유사한 구조에 비슷하게 작동하는 유사한 원인들의 결과이다.”(94P)

두 번째로 제기되는 접근 방식은 그렇게 동일시 될 수 있는 시대, 동일시될 수 있는 장소들엣 획기적인 문화적 전환이 일어났으며, 그 영향이 지구의 사방으로 전파되었고 이와 더불어 신화적 체계나 모티프와 관련된 별자리의 배열도 전해졌으리라는 견해이다.(96P)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모든 철학, 신학, 신비주의와 과학이 사실은 다양하게 굴절되고 발전해온 하나의 위대한 문자화된 세계유산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그 역사, 해석, 적용방식, 주안점 그리고 지역적 목적들은 달랐지만 어쨌거나 이들은 기원에 있어서 하나이며, 그 물려받은 상징들에 있어서도 하나이다.(99P)

우주 전체는 존재 Being와 되기 Becoming의 상위 양식과 하위 양식 사이에서 인식되는 조화의 방식으로, 하나의 단일한 생명이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알프레드 예레미아스 Alfred Jeremias-(113P)

인간 역시 영적인 존재로서 지상의 베일에 가려져 있는 '신의 이미지‘이며, 신이 ’생명을 쥐고‘ 있고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금한‘ 이상 어떻게든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모든 인간 존재와 인간되기는 높은 하늘에서 인도된다. -알프레드 예레미아스 Alfred Jeremias-(113P)

뱀의 유동성은 물을 의미하고 계속해서 날름거리는 갈라진 붉은 혀는 불꽃, 즉 생명을 수태하는 바다에 내재된 생명의 불꽃을 의미한다.(115P)

희생의 첫 번째 교훈은 ‘묵종’이며, 이것은 단순한 묵종이 아니라 존재의 숭고한 신비와 전제조건 속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生)을 소진하는 생의 과정이다.(160-161P)

삶이란 죽음의 얼굴 위에 덮어쓴 가면일 뿐이다. 그렇다면 죽음도 또 다른 가면일뿐인가? 아즈텍 시인이 물었듯,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 너머에 진실이 있다고, 혹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단지 꿈꿀 뿐, 우리는 꿈속에서 태어날 뿐.
모든 것이 꿈이라네……(199P)

“이 세계와 모든 만물들은 특정 신이나 한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살아있는 불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불처럼 타오르고 소멸해가는 것이다.-붓다-(296P)

재림하는 그리스도는 우주적 매트릭스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점에서 해석하자면, 복음서에서의 처녀인 인간 어머니에게서 예수가 태어난 것은 일종의 전조(前兆)이며, 인간의 역사에 내딛은 자비로운 ‘한 걸음’이었다. 시공간의 몸에서 태너아는 재림에 있어서의 똑같은 신비는 대우주적 규모로 현시한다.(223P)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전설을 위해서 성당이 지어지고 또한 그 전설 속에서 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처럼, 거기에는 시간과 공간, 영원의 조각들에 앞서 우리 자신과 모든 사물들에 들어 있는 어떤 씨앗이나 부분에 대한 지식이 암시된다. 그리고 그것은 태양과 달과 샛별 속에서 꺼지지 않는 빛이 우주의 법칙에 따라 떠오르고 지는 것처럼 결코 죽지 않고 계속해서 새롭게 태어난다. 그것이 불과 바람에서 태어나고, 물과 대지에서 태어났듯이 그것은 모든 생명 속에 살아있으며, 모든 것보다 앞서 태어나고, 모든 것보다 오래 산다.(224P)

지상에 사람이 거주하는 모든 곳에 걸쳐 그런 형상들이 출현하는 것을 꼭 인종적 전파나 문화적 전파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심리적인 것, 즉 무의식의 깊이이다. 융의 말을 빌자면, “(무의식의 장에서) 사람은 더 이상 별개의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그의 정신은 넓어지고, 인류의 정신으로 융합된다. --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통적인 인류의 무의식으로 융합되는 것이다.”(229P)

애착에서 슬픔이 솟아나고
애착에서 두려움이 솟아나니
애착에서 벗어나는 자에게는
슬픔이 없으니, 어찌 두려움이 있겠는가?
-불교의 한 구절-(243P)

초월성의 이런 모든 가르침들의 극한까지(욕망과 두려움을 넘어선 붓다와 하느님 아버지 속죄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의 가르침까지) 멈추지 않고 따라올 수 있다면, 분명 모든 대립하는 것들을 떨쳐버리게 되며, 동시에 이원성과 비이원성, 무아와 자아, 천상의 진실과 지상의 진실 또한 떨치게 된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243P)

하늘과 땅, 심지어는 비존재와 존재가 둘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고 거기에 동화될 때, 마르지 않는 샘처럼 생의 기쁨이 모든 것으로부터 흘러넘칠 것이다.(244P)

그 시기 이교도의 『헤르메티카』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 중에서 신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규모도, 공간도, 질도, 형태도, 시간도 신을 둘러싸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은 모든 것을 둘러싸고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253P)

신은 자연에 내재하거나 정신을 가진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초월적인 힘이며 절대적 ‘타자’이다.(254P)

구세주의 피는 인류 전체의 조상을 정화한 것이며, 그로 인해 인류를 구제하고 세계축을 시간의 여명으로 되돌려놓는 동시에 종국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게 하였다.(257P)


Ⅲ. 연꽃과 장미 The Lotus And The Lose

오비디우스의 『변신』에서 인용한 그리스의 성자 피타고라스의 말처럼, “영혼은 떠다니면서 이곳으로 왔다가 저곳으로 갔다가 하며 어떤 껍데기든 마음에 드는 것에 깃든다. 짐승의 몸에서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몸에서 짐승의 몸으로 옮겨 다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280P)

워즈워드가 말했듯, 우리의 생은 “한숨 잠이며 망각일 뿐”이었던 것이다.(280P)

연꽃은 우주의 심장인 태양과 몸의 태양인 심장을 동시에 상징하며, 둘 다 내재하는 동일한 자아(아트만)에 의해 움직여진다. 따라서 태양을 향해 피어 있는 연꽃은 이 거울에 비추어진 진실에 대한 만개한 지식을 상징하며, 봉오리가 진 연꽃들은 그 실현을 향해 나아가는 단계들을 표현한다.(282P)

인도에서 코끼리는 비옥함과 생명을 가져다주는 행운의 상징으로 찬양 받는다. 코끼리의 친척인 구름이 코끼리를 보러 오면, 비의 은총이 내리기 때문이다.(298P)


Ⅳ. 내면의 빛의 변형 Transformations Of The Inner Light

사람들은 각기 여러 신들을 섬기면서 “이 신을 숭배하라, 저 신을 숭배하라.”고 한다. 그러나 모두 하나의 창조자로부터 나온 창조물일 뿐이며, 그 자신이 모든 신이다. ……그는 우주 속에, 심지어 우리의 손톱 끝까지 들어와 있으며, 그것은 마치 칼이 칼집 속에 들어 있거나, 불이 장작 속에 들어 있는 것과도 같다. 그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눈으로 보이는 것은 완전한 그가 아니다. 숨을 쉴 때 그는 ‘숨’이라 불리고, 말을 할 때는 ‘마음’이라고 불린다. 이것들은 그가 행하는 일에 따른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 중에 어느 하나만 숭배하는 사람은 그를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이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335P)

그노시스파의 「도마복음」에 실린 예수의 말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오며 모든 것은 나에게로 이른다. 나무 조각을 쪼개어 보면, 그 안에 내가 있다. 돌을 들춰보아도 그곳에서 나를 발견하리라.…… 내 입속에서 마시는 누구나 나처럼 될 것이고, 내 자신이 그가 될 것이다.”(95:24-28, 99:28-29) (337P)

하지만 생명의 신으로 숭배되지 않고, 비천하고 저주받고 거부되는 에덴동산의 뱀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에덴 동산의 뱀이 다른 뱀들과 다른 점은 단지 그가 자신의 역할을 다른 이에게 주었다는 사실이다. 즉, 뱀 대신에 나중에 에덴동산에 온 다른 이, 즉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느님’(「사무엘 상」2:6, 한나의 노래)이 그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350P)


태양과 같이 꺼지지 않는 빛을 얻음으로써 이 영원히 지속되는 순환으로부터 궁극적으로 초월하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인데, 이것이 바로 요가의 목표이다.(360P)

요가를 통해 의식은 그 근원과 결합되며, 그리하여 인간은 그 근원과의 자기동일성에 대한 앎 속에서 살 수 있으며, 이것은 단지 한낮의 빛에 한정된 자아의 자기동일성만이 아니다. 오히려 달빛과 태양 빛에 관한 사고를 개조하는 것이다.(364P)

인도 요가의 목적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것인데, 이런 체험으로 이끌어주는 열쇠가 되는 경구는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Chhandogya Upanishad」에서 성자 아루니가 그의 아들에게 일러준 말이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내 아들아. 너는 이미 네가 알기를 원하는 의식의 빛이며 존재의 지반이며 진실의 지복인 네 자신이다.(365P)

요가는 임의대로 움직이는, 마음이라는 것의 활동을
의도적으로 멈추는 것에 있다.(374P)

요가의 사고방식은 바람을 가라앉히고 물을 다시 평온한 상태로 되돌리려는 것이다.(376P)

하느님의 형상, 붓다의 형상은 진실로 우리 자신의 앎의 형상이며, 요가의 목적은 그 앎과 우리를 결합시키는 것이다.(376P)

요가의 목적은 이 뱀을 깨워서 머리를 들게 만들고 척추의 섬세한 신경이나 통로를 거쳐 머리의 왕관에 있는 이른바 ‘천 개의 꽃잎이 달린 연꽃’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394P)

신화는 사실 사회를 움직이고 형성하는 공적인 꿈들이다. 역으로 한 사람의 꿈들은 그 자신을 움직이고 형성하고 있는 사적인 신들과 반(反)신들과 수호신의 힘으로 이루어진 작은 신화이다.(428P)

요가의 목표는 그 깨어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더 이상 깨어있는 세계이건 꿈속이건 간에 이런 저런 사물에 의거함이 없고, 불교의 가르침에서 ‘어머니의 빛’이라고 하는 내재한 빛과 만나는 곳으로 가라앉는 것이다.(429P)


Ⅴ. 희생 The Sacrifice

바울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똑같은 마음을 지니라며 격려하였다.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이 예수께서 보여주신 태도입니다.……(2:2-5) (490P)

「누가복음」(17:33)에서 말하듯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목숨을 버리려는 사람은 보존할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지혜의 자아가 살고 있는 피안에서 온 메시지이다.(496P)


『황금가지』에서 프레이저는 종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나는 종교를 자연의 운행이나 사람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조정한다고 믿어지는, 초인간적 힘에 대한 회유나 위무로 이해한다. 이렇게 정의할 때 종교는 이론과 실천의 두 가지 요소, 곧 인간보다 우월한 힘에 대한 믿음과 그 힘을 달래거나 기쁘게 하려는 시도로 구성된다. 두 가지 중에서는 분명 믿음이 우선한다. 우선 어떤 신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그것을 기쁘게 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이 그에 상응하는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신학일 뿐이다.(511P)



3. ‘내가 저자라면’

조셉캠벨의 직업은 ‘비교신화학자’였다. 왜 신화학자도 아니고 ‘비교신화학자’였을까? 왜 캠벨은 본인 스스로를 꼭 ‘비교신화학자’라고 주장했을까? 앞서 3권의 책 『신화의 힘』,『신화의 세계』,『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읽었지만, 이번 책 『신화의 이미지』에서는 왜 그가 ‘비교신화학자’인지 보다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기원전 5750년부터 가장 최근의 20세기까지 무려 7,000년을 넘는 시간의 공간을 아우르고 있다. 게다가 전 세계의 지역적 한계까지 뛰어넘어 유럽, 미국, 중남미, 동양을 대표하는 인도, 중국, 일본의 신화 이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그뿐인가. 보여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통점까지 유추하여 자료로써 제시하고 있다.

캠벨이 주장하는 것은 하나다. 전세계의 신화에서 공통되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신화가 지역적 특색과 문화가 덧칠되어 다소의 형식적 변화는 있지만 그 근간이 되는 중심 이야기는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캠벨의 주장이 맞다면 한가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어떻게 그렇게 비슷할 수 있을까?

제시되는 학설은 2가지이다. 하나는 제임스 G. 프레이저의 말처럼 “서로 다른 나라, 서로 다른 하늘 아래 사는 인간 정신의 유사한 구조에 비슷하게 작동하는 유사한 원인들의 결과”라고 유추해 보는 것이다. 즉, 인간의 신경체계가 그 정도로 비슷하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캠벨은 이 주장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시간의 차이가 너무 벌어질뿐더러 지역적, 생물학적 차이를 무시한 채 서로 독립적으로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듯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렇게 동일시 될 수 있는 시대, 동일시 될 수 있는 장소들에서 획기적인 문화적 전환이 일어났으며, 그 영향이 지구의 사방으로 전파되고 이와 더불어 신화적 체계나 모티프가 같이 전해졌으리라는 주장이다. 캠벨은 이 두 번째 견해에 대해 동의하고 있다. 이 견해에 대한 보다 확실한 증거제시를 위해 같은 시기별, 각 나라의 신화이미지를 예로 들어 그 공통점을 하나하나씩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아시아 문화가 중앙아메리카 문화에 미친 영향으로 약 기원전 3000년경 일본의 양식(‘밧줄무늬’, 중앙 조몽 문화)으로 밝혀진 도자기 파편들과 석조 입상들이 에콰도르의 해안 지방, 발디비아라는 곳에서 발굴되었으며, 이것의 전파경로는 이 해안 지역으로부터 남쪽으로 페루와, 북쪽으로 카리브 해를 향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기원전 2000년경, 1500년경에도 일본 및 아시아의 도자기양식이 발견되어짐에 따라 같은 방식으로 그 문화가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세계의 신화 이미지를 보면서 한가지 의아한 점이 있었다. 우리가 기독교 사상에서 알고 있는 뱀의 이미지는 소위 ‘사탄’을 대표하는 유혹, 저주의 이미지인데, 이 책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뱀의 이미지는 생명의 신을 대표하고 있었다. 뭐가 맞는 것일까? 왜 뱀이 기독교란 종교에서는 그렇게 변용된 것일까? 인간의 원죄설을 구성하는 도중 뱀이 악역으로 가장 적당했던 것일까? 이에 대해 캠벨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에덴동산의 뱀이 다른 뱀들과 다른 점은 단지 그가 자신의 역할을 다른 이에게 주었다는 사실이다. 즉, 뱀 대신에 나중에 데덴동산에 온 다른 이, 즉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느님’이 그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에덴동산의 뱀을 제외하고는 성경 안에서도 뱀의 이미지는 사뭇 다르게 나온다. 우상과 같은 형태가 되었던 ‘모세가 만든 청동뱀’이나 파라오를 겁에 질리게 한 전설(지팡이를 뱀으로 변하게 한) 그리고 초창기 뱀 숭배 종파까지 뱀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수많은 그림들이 나오는데 전부 흑백이고 오래된 조각, 이미지들이라 선명치 않을뿐더러 파손된 부분들이 많은 것은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의 이미지를 말로만 설명하는데 쫓아가기가 쉽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전체적인 이미지의 이해가 많이 어려웠다. 그래서 조금 복잡한 그림이라면 세부내용을 선이나 화살표로 연결시켜 간단한 설명을 붙여 놓는다면(몇개의 이미지는 이런 식으로 설명하여 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보다 더 쉽게 이해하고 도움이 많이 되었으리라 판단된다.

그리고 이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을 설명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앞에서 읽은 캠벨의 책과 마찬가지로 쉬운 내용의 책이 아니다. 다만 앞의 책들과 다른 점은 그림이 거의 1/4을 차지하기 때문에 글보다 그림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이책을 읽지 못하는 것이라 판단된다. 이 책을 읽는 처음에는 무조건 글을 이해하려고만 했다. 당연히 이해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덤볐다. 힘들어하면서도 무작정 들이대보았다. 그러다 한 중간쯤 읽으면서부터 방법을 바꿨다. 생각을 바꿨다. 글을 이해하려 하지말고 그냥 그림 그 자체를 가슴으로 받아들여 보기로. 그러자 마음이 좀 편해지며 그림이 좀 더 가까이 내게 다가왔다. 그림 스스로가 나에게 조금씩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 향기를 품기 시작했다. 훨씬 나아졌다. 이 책은 글을 머리로 읽는 책이 아니라 그림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책이다.


이제 다음 주 『네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책으로 캠벨의 한달은 마무리짓게 된다. 4권의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캠벨이 말하려 하는 주제는 어렴풋이 알겠지만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을 내가 제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려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믿음이 부족해서? 긴가민가해서? 확실치 않아서? 그럼 캠벨의 주장은 진리일까? 사실일까? 허구일까? 캠벨은 허풍장이일까?

『황금가지』에서 프레이저는 종교는 이론과 실천의 두 가지 요소 즉, 인간보다 우월한 힘에 대한 믿음과 그 힘을 달래거나 기쁘게 하려는 시도가 있다고 한다. 이 두가지 중에서 분명 믿음이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왜냐면 우선 어떤 신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그것을 기쁘게 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캠벨의 이야기도 마찬가지 아닐까? 믿음이 없이 계속 의심으로만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의 주장은 픽션으로만 간주되지 않을까? 캠벨은 여기에 대해 뭐라고 할까? 나의 생각에 캠벨은 선택은 독자가 하는 것으로 돌리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이야기꾼이지 종교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비교신화학자’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음주까지 모두 5권의 책을 읽으면 보다 더 캠벨의 이야기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직도 갈팡질팡 하는 마음에 최소한 믿음의 씨앗이라도 생겼으면 좋겠다.


IP *.178.3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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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스
2008.04.21 17:59:45 *.41.103.168
재우형 정말 열심히 읽었구나.. 느낌이 팍 오내.
내 얼룩말 아담한놈으로 한마리 보낼태니 잘 받으슈..
난 바다 위에서 캠벨을 더 불러봐야할것 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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