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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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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1일 03시 40분 등록
7 선
p.157. 하나는 ‘고양이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원숭이의 길’이다. 어미 고양이는 새끼가 울면 목덜미를 물고 안전한 곳으로 데려간다. 하지만 인도에 가본 사람이라면, 원숭이 떼가 나무에서 내려와 잽싸게 길을 지나갈 때 제 스스로 어미 등에 매달린 새끼 원숭이를 보았을 것이다. 첫 번째 태도는 “하느님, 하느님, 절 구원해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고, 두 번째는 그런 기도나 간청을 하지 않고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의 자세다. 일본에서는 이와 똑같은 두 자세를 ‘타라키’, 즉 ‘외부의 힘’ 혹은 ‘외부로부터의 힘’과 ‘지키리’, 즉 ‘자신의 힘’ 혹은 ‘내면의 노력이나 힘’ 이라고 한다. 또한 일본의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이 상반되는 두 방식을 상반되는 두 종교생활과 생각으로 표현된다.

p.160-161. 사람들은 자신을 덧없는 육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자기 육체를 단순한 의식의 수레로 여기고, 의식을 우리 모두를 통해 현현하는 존재로 여길 수도 있다. 이는 똑같은 현재의 사실을 해석하고 경험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어느 방식이 다른 것보다 더 진실한 것은 아니다. 그저 첫 번째 방식은 영원하지 않은 것들이라는 의미에서, 두 번째 방식은 이 수많은 것들 통해 드러나는 진여라는 의미에서 해석하고 경험하는 두 가지 방식일 뿐이다. 첫 번째를 세간, 두 번째를 우주 만법의 출세간이라 한다.
그렇다면 세간의 의식은 자아를 그렇게, 즉 깨지기 쉬운 이 유리 몸에 갇힌 것으로 자아를 구분하고 경험할 수밖에 없다. 반면 출세간의 의식에서는 그러한 경계가 없다. 결국 모든 신비한 동양적 가르침의 주된 목적은 자기 동일시의 초점을 소위 이 전구 알에서 그 빛으로 언젠가는 죽는 이 육체에서 육체란 수레에 불과하다는 의식으로 바꾸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도의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 적힌 저 유명한 격언, 즉 “네가 바로 그것이다.” “네 자신은 모든 존재, 모든 의식, 모든 행복의 구분되지 않은 보편적 근거다”라는 의미다.
하지만 ‘너’는 사람들이 보통 동일시하는 ‘너’가 아니다. 즉 ‘너’는 세금을 내고 숫자로 나타내고 컴퓨터에 입력하는 ‘너’가 아니다. 이는 ‘바로 그것’인 ‘너’가 아니라, 분리된 전구로 만드는 조건이다.
하지만 존재 의미를 육체에서 의식으로, 그 다음 이 의식에서 의식 전체로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p.162. 신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관념의 그물을 끊어내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선을 ‘무심’ 철학이라 하는 이들도 한다. 서양의 많은 심리치료 학과들은 우리들이 가장 갈구하는 것을 삶의 의미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식인이 삶을 그 이름과 범주, 관계에 대한 인식과 의미의 정의로 다룰 때, 진짜 본질은 쉽게 잊혀진다. 반대로 선은 인생과 인생에 대한 깨달음은 의미에 앞선다고 말한다. 삶이 있는 그대로 흘러가게 하고 거기 이름 붙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살고 있는 곳, 지금 있는 곳, 이름 붙이지 않은 곳으로 곧장 돌아갈 수 있다.(중략)
의미를 찾으면서도 관념의 그물 안에 갇힌 이들이 그 그물을 벗어나 언젠가는 참 의미를 찾도록 하는 설법이었다.(중략)
나는 거기에 우리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딘지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얼마나 있었는지도 말할 수 없다. 그건 그곳을 시간 안에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p.164. 하지만 깨달음을 가르치지도, 가르칠 수도 없었다. 따라서 불교는 길일 뿐이다. 이는 이 세간(만물, 많은 친구, 빛이 분리되어 경험되는 세계)이라는 치안에서 개념과 생각의 그물 너머, 침묵 너머 절대적 침묵을 깨닫는 피안으로 가는 수레라 한다.

p.170. 부처는 ‘여래’라고 한다. 그는 꽃이나 나무 같은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우주, 당신이나 나 같은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어떤 관념이나 관계와 가리키지 않고 그저 그 자체로 경험될 때마다 그 순간 보는 사람은 의미를 두지 않는 순수한 존재로 돌아간다. 그 또한 불에서 불똥이 일어나는 것처럼 의식의 수레-‘여래’-이기 때문이다.(중략)
“그건 저급한 공덕입니다. 그 같은 행동의 목적은 단순한 그림자일 뿐입니다. 공덕을 쌓는 유일한 방법은 순수하고 완벽하며 신비한 지혜를 얻는 세속적 행동으로는 그 지혜를 얻을 수 없지요.”

p.171. 혜가는 말했다. “부처의 가르침을 구하고 있나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네”라고 달마는 대답했다.
“그러면 제 마음을 달래주소서.”
“마음이라는 것을 내놓아 보아라. 그러면 달래 주겠다” “9년 동안 마음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혜가가 말했다.
“그것이다! 그것이 마음의 평화니라.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달마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혜가는 그 순간 갑자기 자신이 세상에 알려진 모든 지식과 이해관계로부터 초월한다는 것을 깨닫고 중국 선종 최초의 대사가 되었다.

p.173. 혜능은 “내면을 들여다 보라! 비밀은 네 안에 있다” 고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교리 연구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비밀을 깨달을 수 있단 말인가?

p.173-174. 화두는 언뜻 보면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깨달음을 위해 세심하게 계획된 초이성적인 직관의 심리상태다. 그리고 화두를 통한 수행이 수백 년 동안 계속되어왔다는 점은 화두의 의미나 가치에 대한 비평가들의 의문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8. 사랑의 신화
p.184. 사람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안전을 잊고서 마치 타인의 생명과 위험이 자신의 것인 양 다른 사람을 죽음이나 고통에서 구하기 위해 자신과 자기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가? 라고 묻고는, 그러한 행동은 자신과 그 타인이 사실은 하나라는 진리를 본능적으로 인식한 데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타인과 별개라는 이차적인 자아의식 때문에 행동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토대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라는 더 크고 더 참된 진리를 직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욕구를 ‘동정’ 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도덕적 행동의 본질적이고 유일한 동기라 했다. 그가 보기에 동정은 형이상학적으로 타당한 통찰력에 근거한다. 잠시 이기심 없고 무한하며 자아가 없는 상태가 된다.

p.185. 그 다음 두 번째 단계의 사랑은 친구끼리의 사랑으로 기독교에서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친구다. 어떤 문제에 대해 토론할 수도, 싸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랑은 첫 번째보다 더 깊은 이해와 더 큰 영적 성장을 의미한다.(중략)
라마크리슈나의 질문에 여인은 “어린 조카를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그는 여인에게 말한다. “그 아이를 사랑하고 보살필 때, 당신은 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p.186.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다섯 번째 사랑은 무엇인가? 그것은 열렬하고 맹목적인 사랑이다. 결혼을 할 때에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성적이고 이 세상의 재물과 재산, 사회적 위치 등을 좋아한다. 나아가 동양에서 결혼은 서구의 사랑관과 달리 가족끼리의 결합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열정적인 사랑이란 무서운 폭풍처럼 성실한 삶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의 목적은 할라즈가 말했던 나방의 사랑과 같다. 사랑의 불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p.187. "사랑이 아닌 이유로 고통 받는 사람에게 고통은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다. 하지만 사랑을 위해 고통 받는 사람은 괴로워하지 않고 하느님이 보기에 그의 고통은 값진 것이다."
p.189. 혹은 “영원은 시간의 산물과 함께 사랑 안에 있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가 연상되기도 한다(중략)
가르침의 생을 마치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부처와 달리 스스로 윤회에 영원히 머물겠다고 했던 무한한 자비의 관세음보살은 살아 있는 동안 항상 영원한 자유의 신비를 상징한다. 따라서 여기서 가르침의 대상이 되는 자유는 역설적으로 윤회의 소용돌이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자비심을 통해 자발적으로 윤회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사실은 무욕을 통해 자아로부터 벗어나고, 자아로부터 벗어남과 함께 욕망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p.192. 본질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 즉 카루나(karuna)는 기독교의 자애, 즉 아가페(agape)에 해당한다. 아가페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충고, 더 나아가 가장 숭고하고 대담한 기독교의 가르침,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p.193. 하지만 그렇다면 이 새로운 사랑, 즉 아가페나 에로스가 아니라 아모르였던 이 사랑의 특별한 속성은 무엇인가?

p.194. 어떤 사람이든 이웃을 자기처럼 아끼는 사랑이 아니다. 자비나 자애의 사랑이 아니다. 또한 섹스에 대한 일반적인 의지의 표현도 아니다.(이 역시 무차별적이다.) 이는 하늘도 땅도 아닌 지상의 사랑이다. 특별한 개인의 영혼과 구체적으로는 눈의 편애에 근거를 둔 사랑이다. 즉 다른 특별한 사람을 인식하고 그녀의 이미지가 그의 가슴에 전달되는 것이다. 그의 가슴은 단순한 욕정이 아닌 사랑, 아모르의 감정을 가질 수 있는 ‘숭고’하거나 ‘온화한’가슴이다.

p.196. 장 폴 사르트르의 연극은 『출구는 없다 No Exit』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연극의 배경은 지옥의 호텔방이다.

p.203. ‘정확한 말’ 이라는 단어가 상처가 될 수도, 심지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작가의 임무는 관찰하고 정확히 이름을 붙여야 하는 것이다. 상처를 주고 죽일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작가가 묘사할 때 이름을 붙여야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인생에 완벽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해도 사랑스럽기 보다는 지겨울지도 모른다. 완벽함에는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불완전함 때문이다. 작가는 이 불완전성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말을 찾고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그 단어를 보내야 한다. 단 향기, 사랑의 향기를 담아서 사방으로 보내야 한다. 과녁, 그 불완전성이야 말로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자 그 삶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p.204. 사도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하느님께 서는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사로잡힌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p.205. 미국의 소설가 호손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형제애를 포기하면 안 된다.”

9. 전쟁과 평화의 신화
p.211. 하지만 원시민족들이 모두 전사들은 아니었다. 동물을 사냥하고 전쟁을 벌이는 유목민에서 훨씬 안정된 열대의 마을 정착민 -이들은 대부분 육식이 아니라 채식을 했다-으로 관심을 돌려보면 전쟁과 관련된 신화나 심리학이 거의 혹은 전혀 필요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장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열대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아주 독특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p.218. 하지만 이 모든 것 위에는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평화라는 아름다운 이상이 있었다. 이 평화는 이사야 시대부터 서양의 모든 주요 전쟁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이사야 65장 끝부분에 자주 인용되는 환상적인 이미지가 있다.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고 살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나 서로 해치고 죽이는 일이 없으리라.”하지만 이사야서 바로 앞에는 평화의 이상이 어떻게 실현되는지가 나와 있다.

p.222. 시편 137장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 위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놓고서.
우리를 잡아온 그 사람들이
그 곳에서 노래하라 청하였지만,
우리를 끌어온 그 사람들이
기뻐하라고 졸라대면서
“한 가락 시온 노래 불러라”하였지만,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야훼의 노래를 부르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버릴 것이다.
네 생각 내 기억에서 잊혀진다면
내 만일 너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것이 있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

p.231. 이 현자들은 절대적인 비폭력 가르침에 따르면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은 어떤 존재도 죽이거나 다치게 해서는 안 되고 어떤 동물의 살도 먹어서는 안 된다.

p.233. 도로 왕을 보필하는 자는 무력으로 세상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
그럼 일은 언젠가는 보복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병력이 주둔하던 곳에는 싸리나무와 가시나무가 우거지게 되고 큰 전쟁을 치르고 나면 반드시 흉년이 들게 마련이다. 병법에 능한 자라면 좋은 결과를 얻었으면 그치고 승리 이상의 것을 취하려 하지 않는다.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자랑하지 말고 공을 내세우지 말고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용병을 단행하더라도 부득이한 경우에 한할 것이며 이겨도 거칠고 포악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물은 지나치게 왕성하면 곧 쇠퇴하게 마련이다.
늙어 노쇠 하는 것을 도를 따르지 않는 것이라 한다. 도를 따르지 않는 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p.234.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쓰더라도 편안하고 삼삼한 마음으로 쓰는 것이 최상이다. 싸워서 승리하더라도 이것을 미화해서는 안 된다. 이기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자이다. 사람 죽이기를 즐겨 하는 사람은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펴지 못한다.

p.237-238. "태어나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그리고 죽는 것은 반드시 태어난다.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 모든 사람의 육체 안에 사는 절대자아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무기는 그것을 베지 못한다. 불은 그것을 태우지 못한다. 물은 그것을 적시지 못한다. 바람은 그것을 말리지 못한다.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변하지 않는 자아는 영원히 한결 같다……. 모든 육체 안에 사는 절대자아는 죽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생명을 위해 슬퍼 하지 말라.”
간단히 말해 동양 사상에서 보면 그것이 모든 평화의 궁극적 근거다. 행동의 영역, 즉 삶에는 평화가 없으며 절대로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평화를 얻기 위한 공식은 집착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다.

p.238. 따라서 역설적으로 평화와 전쟁의 신화는 사실 같은 것이다. 힌두교뿐 아니라 불교-대승불교- 에서도 이러한 역설은 근본적이다. 결국 피안의 지혜는 모든 반대개념을 넘어서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전쟁과 평화의 반대 개념을 초월하고 포함해야 한다. 그리고 대승 불교에서 언급된 것처럼 “불완전함을 지닌 이 세상은 완벽한 금빛 연꽃의 세계다.” 그리고 이렇게 보거나 볼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잘못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p.240. 하지만 마침내 전쟁과 평화의 개념과 이상과 관련된 세 번째 관점, 즉 삶으로서의 전쟁과 전쟁으로서의 삶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지만 전쟁을 그만 두어야 할 때 생긴 관점도 발견했다. 최초로 종말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상상한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의 말세론 신화에서 대 변화의 시대는 우주의 위기라는 속성 때문이라고 본다. 우주의 위기 때에는 자연의 법칙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시간도, 변화도, 우리가 생명이라 알고 있는 생명도 없는 영겁의 상태가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변형에 앞서 수백 년간 무수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페르시아 제국은 상대적인 평화의 힘이 번영하고 갈수록 늘어난다.

p.241. 반면 그로티우스의 관점에서 보면 전쟁은 올바른 문화 기준, 즉 평화의 위배다. 그 목적은 평화를 낳는 것이며 이러한 평화는 무기가 아니라 합리적인 상호 이익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이는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날 무렵 우드로 윌슨이 “승리 없는 전쟁”이라고 표현한 개념이기도 하다. 또한 왼발로는 화살을, 오른발로는 올리브 나뭇가지를 쥐고 있으며 머리-그리티우스의 정신에 따라-를 오른쪽으로 돌려 올리브 가지를 보고 있는 미국 독수리에도 이 같은 개념이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하지만 평화의 이름으로 그 독수리에도 이 같은 개념이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하지만 평화의 이름으로 그 독수리가 금욕주의나 무력이 아니라 상호 이익이라는 합의가 오래토록 평화 시대를 위한 모든 인류의 보증서가 될 때까지 계속 그 화살촉을 뾰족하게 간직하길 바란다.

10. 정신 분열증- 내면으로의 여행
p.244-245. 주로 모든 신화에 공통적인 주제와 모티프로 강연을 준비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신화적 주제가 광인의 환상과 똑같다는 정도 외에는 알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모든 전통적 신화의 보편적, 전형적, 심리적 근거를 둔 상징적 주제와 모티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페리 박사의 논문을 통해 똑같은 상징이 정신분열증(공동체의 삶 및 사고와 단절되고 완전히 동떨어진 사람의 상태)을 앓고 있는 현대인의 심리상태에서도 나타난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신분열증의 일반적인 패턴을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역의 사회적 질서와 환경을 위반하거나 벗어난다. 둘째, 내면으로 오래도록 깊숙이 숨어들고, 곧이어 점점 더 깊이 물러나 내면의 정신 밑바닥까지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서 무서운 경험을 하면서 몇 차례 혼동을 겪고(운이 좋은 경우) 새로운 용기를 주는 일종의 구심점을 만나며 마지막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는 신화적 영웅의 일반적인 여행 공식이기도 하다. 나는 이 여행을 1) 분리, 2) 입문, 3) 회귀로 표현했다. 영웅은 평범한 일상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그 다음 그곳에서 엄청난 세력을 만나고, 결국에는 승리를 차지한다. 그리고는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힘을 얻어 이 신비한 여행에서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이것이 신화의 패턴이자, 이 정신적 환상의 패턴이다. 그런데 페리 박사는 논문에서 때로는 충격요법 같은 것을 동원해 정신분열 과정을 방해하지 않고 분열과 회복 과정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는 게 최선의 치료방법인 경우도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렇게 도움을 주려면 의사는 신화의 이미지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합리적 사고 및 의사전달 방식과 완전히 멀어진 환자가 어떤 접촉을 시도한다는 단편적인 징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신분열은 잃어버린 무언가를 회복하고 대단히 중요한 균형을 복원하기 위한 내면의 퇴행적 여행이다. 그렇다면 항해자가 여행을 떠날 수 있게 하라. 배가 뒤집혀 물에 빠진다. 익사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옛날 바다 밑바닥에 있는 영생의 수초를 따려고 바다에 뛰어든 길가메시 신화처럼 저 밑에는 하나뿐인 목숨과 맞바꿀 정도로 가치 있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을 빼앗지 말고 밑바닥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라.

p.249. 객관적 세계는 무너져 없어지며 무의식의 침략에 패배한다. 한편 편집증적 정신분열증에 걸린 사람은 항상 경계하고 세계와 그 사건에 극단적으로 예민하다. 하지만 자신이 투사한 환상과 공포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항상 공격의 위험에 처해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러한 공격은 내부에서 오는 것인데도 환자는 세상이 자신을 곳곳에서 감시한다고 생각하면서 공격을 외부로 투사한다. 실버만 박사가 말하길 이러한 종류의 정신분열증은 샤머니즘과 유사한 내적 경험을 하지 않는다. “편집증적 정신분열증은 내적 세계의 끔찍한 공포를 이해하거나 감당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외부 세계로 관심을 돌리는 듯하다. 이 경우 위기의식을 막는 치료 방법으로는 내적 혼란을 가라앉히지도 그럴 수도 없다.” 즉 정신이상자는 대부분 자신이 투사한 무의식의 영역에 있다.
p.251. 요가 역시 의도적인 정신분열이다. 내면으로 뛰어 들어 이 세상에서 벗어난다. 이때 경험하는 환상은 사실 정신병 환자의 경험과 똑같다. 하지만 그렇다면 차이는 무엇인가? 정신병이나 환각제 경험과 요가수행자나 신비한 경험의 차이는 무엇인가? 모두 똑같이 깊은 내적 바다로 뛰어든다.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거기서 만난 상징적 형상은 대부분의 경우 동일하다.(잠시 이 형상에 대해 좀 더 얘기할 것이다.) 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수영할 줄 아는 잠수부와 못하는 잠수부의 차이와 같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서 단계적으로 스승의 지시를 따른 신비주의자는 물에 들어갔을 때 자신이 수영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반면 미처 준비하지 못했고 지도를 받지도 못했으며 수영 실력을 타고나지도 않은 정신분열증 환자는 실수로 물에 빠졌거나 의도적으로 뛰어든다. 구조될 수 있을까? 어떤 줄을 그에게 밀어 넣었다면, 그는 줄을 잡을 수 있을까?

p.252. 원형은 여러 전통에서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가령 불교의 사원과 중세의 대성당, 수메르의 지구라트 마야의 피라미드에서 말이다. 신성의 이미지는 그 지방의 식물군과 동물군, 지형, 인종적 특징 등에 따라 다 다를 것이다. 신화와 의례는 달리 해석되고 달리 적용되며 다른 규칙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전형적이고 본질적인 형태와 개념은 똑같다. 때로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똑같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를 가장 자세히 다르고 가장 정확히 설명하고 해석한 심리학자는 카를 G. 융이다. 그는 이를 ‘집단 무의식의 원형’ 이라 하고, 이는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 공통적인 정신구조와 관련됐다고 말했다.

p.255. 나는 기능하는 신화적 상징을 ‘에너지를 유발하고 조작하는 신호’라고 정의했고 페리 박사는 그러한 신호를 ‘감응 이미지(affect image)’라고 지칭했다. 그 메시지는 두뇌에 전달되어 거기서 해석되고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신경과 선, 혈액, 교감신경에 전달된다.

p.256. 넓은 곳에서는 길을 잃고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부모와 가족이 정면으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다. 즉 자녀들에게 각인하는 신호에 아이들이 잘 적응하는지, 그 신호가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야 할 세계와 동떨어져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녀에게 자신의 편집증을 물려주고 죽을 수밖에 없다.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부모는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문화의 정서체계에 잘 적응해 합리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하며, 적극적으로 삶을 풍요롭고 비옥하게 하는 요소들로 자신을 건설적으로 만들 자녀를 낳고자 할 것이다.

p.263. 혹은 아버지의 권위가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면 혹은 부권이 무의미하고 존경할 만한 남성적 존재가 없을 뿐 아니라 가정사가 복잡한 집이었다면 좋은 아버지 상을 찾아 떠날 것이고 또 그런 아버지 상을 찾아야 한다. 이는 초자연적 자식 된 도리의 상징적 실현이다. 중요한 감정적 박탈과 관련된 세 번째 가정 내 상황은 가족에서 배제됐다고, 자신은 원치 않은 아이였다고 느끼는 아이나 아예 가족이 없는 아이의 상황이다. 예를 들어 재혼 가정의 경우 이전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나쁜 계모나 못된 이복자매가 나오는 옛날이야기와 관련된다. 그렇게 배제된 아이는 외로운 내면의 여행에서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중심-가정이 아니라 전 세계의 중심-을 찾거나 만들어낼 것이다. 페리박사는 너무나 완벽하게 고립되어 있어서 그 누구와도 얘기할 수 없었던 정신분열증 환자의 사례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그 말없는 남자는 의사가 곁에 있을 때 삐둘빼뚤한 원을 그리고는 가만히 연필을 원 가운데 내려놓았다. 페리 박사는 몸을 굽히고 말했다. “당신은 중심에 있군요. 그렇지 않나요? 그렇지 않나요?” 그 의미가 통했고 회복 과정이 시작되었다.

p.269. 하지만 정신분열적 환상의 경우, 우주의 정상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는 신 역시 자신에게 너무 많은 의무가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 누가 진정한 삶(진정한 우주)이라는 것의 무시무시한 즐거움을 한꺼번에 경험하는 엄청난 충격을 흔쾌히 받아들이겠는가? 그것은 완벽한 자비의 마지막 시험일 것이다. 조건 없이 이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지, 그러면서도 진심으로 그 끔찍한 즐거움을 견디면서도 모든 존재에 흔쾌히 기쁨을 줄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이다. 제스 왓킨스는 광기 속에서 한 순간 자신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p.271. 나는 이것이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방법의 단서라 생각한다. 즉 자신의 ‘자아’를 ‘그 어떤’ 형상 혹은 능력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해탈을 구하는 인도의 요가수련자는 자신을 빛과 동일시하고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생명에 도움을 주려는 사람은 그런 식으로 탈출하지 않는다. 되돌아오려는 사람에게 그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해탈이나 자신의 황홀경이 아니라 타인에게 베풀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일 것이다. 서양에도 그러한 여행을 그린 방대하고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가 10년 간 빛의 영역을 찾아가는 여행이 그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왕실 해군 함대사령관처럼 오랜 전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전사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정신적 태도와 중심이 크게 바뀌어야 했다.

p.274. 요약하자면 신화의 영웅, 샤먼, 신비주의자, 정신분열증 환자의 내면 여행은 원칙적으로 똑같다. 귀환을 하거나 병이 나으면 이는 부활로 경험된다. 즉 ‘두 번 태어나’ 자아의 탄생으로 더 이상 낮은 세계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커다란 자아의 반영이라고 하고 그 적절한 기능은 원형적 본능체계의 에너지를 현실의 시공간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두 번 태어난 사람은 더 이상 자연도, 자연의 산물인 사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회 역시 무서운 대상이며 사실 무섭지 않다면 존재할 수도, 존속할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자아는 이 모든 것과 평화롭게 하나가 된다.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후의 삶은 더욱 풍요롭고 행복해진다. 언젠가 다시 여행을 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든 난파하지 않고 돌아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미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보게 될 광경과 마주칠지도 모를 세력을 알아야 한다. 그 에너지를 인식하고 진압해 흡수할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p.274-275. 친구나 원수와의 관계에서 자기 역할을 할 때, 모두가 구원자일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구원자의 형상이지, 진짜 구원자는 아니다. 누구나 어머니와 아버지가 될 수 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처녀가 한창 피어오르는 자신의 여성성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통해 자아를 인식하는 즐거운 느낌을 인식할 때 그녀는 이미 약간은 미친 것이다. 그녀는 엉뚱한 대상과 동일시했다. 그녀를 흥분시킨 것은 자신의 놀라운 작은 자아가 아니라 그 주위에서 성장하고 있는 놀라운 새 몸이다. 일본에 인간의 성장은 다섯 단계라는 말이 있다. “열 살에는 동물, 스무 살에는 미치광이, 서른 살에는 패배자, 마흔 살에는 사기꾼, 쉰 살에는 범죄자.” 나는 여기 덧붙여(그때까지는 이 모든 과정을 거칠 것이므로) 예순 살에는 친구에게 충고하기 시작하고 일흔 살에는(그동안 들은 것들이 모두 오해였음을 깨닫고) 침묵을 지키고 현자가 된다. 공자는 말했다. “여든 살에 나는 나의 자리를 알고 굳게 섰다.”

11. 달위를 걷다- 외면의 여행
p.277. 오, 작은 배에서 듣기를 갈망하는 그대는 노래하며 지나가는 내 배 뒤를 쫓아와 다시 고개를 돌려 너의 해안을 보는구나. 저 바다에서 나온 것이 아니구나. 아마 나를 놓쳐 길을 잃었나 보다. 내가 가는 물은 한 번도 건너본 적이 없다. 미네르바는 숨을 쉬고 아폴론은 나를 인도하여 아홉 뮤즈는 내게 큰곰자리를 가리키노라.

p.282. 그들의 목적지인 지구는 ‘끝없는 우주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너무나 아름답다고. 그곳에는 선명한 이미지가 있었다. 이 지구, 온 우주의 오아시스, 일종의 아름답고 성스러운 숲은 삶의 의례를 마련하고 있었다.
지구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지구 전체가 성소, 눈부신 성소다. 나아가 우리는 모두 하늘에서 태어난 지구가 얼마나 작은지, 그 반짝이는 지구 위의 우리가 얼마나 위태로운 처지에 있는지를 목도했다.(중략)
이 놀라운 대답을 듣고 나는 임마누엘 칸트가 고찰했던 본질적인 인식 문제를 떠올렸다. 이 자리에 서 있으면서 어떻게 저 너머 다른 곳에서 타당하리라 여기는 계산을 할 수 있는가 라고 칸트는 의심했다. 그 누구도 달 표면의 지면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p.283. 칸트의 말처럼 시간과 공간은 ‘감각의 선험 형식’, 즉 태어나기 전부터 몸과 모든 감각이 은연중에 작용하게 될 영역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경험과 행동의 선결조건이다. 이러한 선결조건은 ‘저 멀리’ 있어서 하나하나 관찰해서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그 법칙이 있고, 이미 우주를 마음에 얼싸안고 있다. 시인 릴케의 말처럼 “세상은 넓으나 우리 안에선 바다처럼 깊다.” 인간의 내면에는 질서 있는 법칙이 있다.
우리는 신비의 존재다. 우주의 경이를 구하다보면 우주와 인간의 경이를 알 수 있다. 외면의 여행인 달 착륙은 우리 내면을 향한 여행이었다. 시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에서 그러하다. 달 여행의 실현과 방송이라는 가시적 현실은 새로운 정신적 시대로 인간 의식을 바꾸고 깊고 넓게 했다.
p.286. 인간 본성은 일정한 방식에 고정된 다른 종의 본성과 다르다. 사자는 평생 사자로 살고 개는 죽을 때까지 개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우주비행사나 은자, 철학자, 선원, 조각가 등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삶 속에서 수많은 운명 중 하나를 실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실현하기로 선택한 삶은 결국 이상이나 상식이 아니라 희열을 통해 결정될 것이다. 시인 로빈슨 제퍼스는 그것을 “한계를 벗어나도록 기만하는 환상” 이라면서 “인간성은 부수어야 하는 틀, 뚫어야 하는 껍질, 불이 되어야 할 석탄, 분해해야 하는 원자” 라고 발했다. 무엇이 이렇게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게 만들 것인가?

p.288-289. 사회는 더 이상 행성의 운행경로와 일치하지 않는다. 사회학, 물리학, 정치학, 천문학은 더 이상 개별 학문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또한 (최소한 민주적인 서구에서는) 개인이 국가라는 유기적 조직체의 분리할 수 없는 하위 기관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개개인이 모두 특별하며 그 삶의 법칙은 지구상 다른 누군가의 삶의 법칙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또한 신성이 행성이나 저 너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갈리레오는 지구 생명체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자연법칙과 저 위 별들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자연법칙이 똑같다는 것을 증명했다.

p.293. 따라서 이장의 주제는 지금까지 그래왔고 영원히 그럴 것이며 언제든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외부 자연뿐 아니라 깊은 내면의 신비를 향한 커다란 정신적 도약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p.294. 그는 프로베니우스와 비슷한 역사적 단계에 대해 생각했으며 우리 시대가 마지막이 되리라 여겼다. 역사는 네 단계가 있는데, 첫 번째 단계는 물론 인간의 타락으로, 그후 그원과 관련된 장구한 드라마가 펼쳐졌으며 각 단계는 삼위일체 중 한 위격에 고무된다. 첫째는 하느님 아버지와 모세의 법칙, 이스라엘 민족의 단계고, 둘째는 그 아들과 신약, 교회의 단계며, 마지막 그가 머지않으리라 생각한 세 번째 단계(이 부분에서 그의 가르침은 교회의 다른 교부들의 것과 크게 달랐다.)는 성령의 시대로, 이때 교회는 필요 없어지고 곧 와해될 것이다. 요하킴 시대의 많은 이들은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직접적인 영성이 오는 다음 시대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 중세 말엽부터 종교를 신비하게 바라보는 당시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살펴보노라면 플로리스 요아킴이 예언한 시절이 바로 우리 시대였다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인정해야 할 성스러운 권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2. 글을 맺으며: 더 이상의 한계는 없다.
p.302. 1백년 전, 니체는 이미 우리 시대를 비교의 세대라고 했다. 전에는 사람들이 살고 생각하고 신화화하는 일정한 경계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경계가 없다. 그리고 경계의 붕괴와 함께 우리는 어떤 민족이 아니라 그들 신화와의 충돌, 무시무시한 충돌을 경험했고 또 경험하고 있다. 아주 뜨겁고 아주 차가운 공기가 채워진 여러 방에서 부서진 석관이 철거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p.306. 정신분석학에서 이 환각기의 갈등과 연관지은 신화적 주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알렉트라 콤플렉스 등-는 사실 신화와 아무 관련이 없다. 이 신화적 주제는 이 유아기의 생물학적 연관관계에서 볼 때 신비하고 초개인적인 상관관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혹은 가상의 부모가 내리는 금기나 위협 때문에 좌절된 유년시절의 욕망을 우의적으로 나타내는 것뿐이다.

p.307. 그로프 박사는 프로이트식 정신분석 과정과 ‘정신 역학적’ 단계의 수많은 환자들이 무의식적으로 뿌리박힌 감정 및 행동패턴에 대한 병적 애착을 ‘다시 체험’ 함으로써 이 개인저인 기억을 뒤로 하고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전혀 다르게 재생된 경험체계의 징후를 나타내기 시작한다는 것을 관찰했다. 즉 실제로 탄생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이다. 탄생의 순간 수동적이고 힘없는 존재는 갑자기 자궁수축이 시작되어 계속 반복될 때 공포를 느낀다.
p.312. 과거에는 서로 다른 형식이 지역의 집단적 영역과 규범으로 개개인을 구속하면서, 서로 다르고 갈등하기도 하는 여러 사회에 도움을 주었다. 반면 오늘날 서양인들은 한편으로는 사회, 실질적 생존, 경제적, 정치적 목적의 차이를,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한 심리적(또는 영적)가치의 영역과 기능의 차이를 인정한다.(중략)
우리는 오늘 이 세속적인 나라, 계속 발전하고 있으며 예루살렘이 아니라 로마에서 만들어진 법의 원리에 따라 인간이 통치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나아가 국가의 개념은 세계주의라는 개념을 향해 지금 이 순간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 아무것도 우리를 결합시키지 못한다면 생태학적 위기가 우리를 하나로 만들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객관적 의미’의 지역적, 사회정치적인 서로 다른 형태의 종교는 더 이상 필요도 없고, 또 그런 종교가 있을 수도 없다. 황제의 것은 하느님에게, 하느님의 것은 황제에게 주어야 한다.

p.313. 따라서 이제 우리의 신화는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 있는 무한한 우주와 그 빛에 대한 신화여야 한다. 모기처럼 외부로, 즉 달과 그 너머로 날아가면서 그리고 동시에 내부로 날아가면서 우주의 매력에 사로잡혀있다. 지구에서 구분하고 있던 모든 한계는 무너져왔다. 더 이상 집에 대한 사랑을 고집하고 다른 곳을 공격할 수 없다. 이 지구라는 우주선에는 더 이상 ‘다른 곳’이 없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다른 곳’과 ‘이방인’을 말하거나 가르치는 신화는 이 시대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렇다면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주관적 의미’에서 볼 때, 오래되고 영원한 신화, 기억하고 있는 과거나 상상한 미래가 아니라 ‘지금’에 대해 시적으로 세워진 신화다. 즉 ‘민족들’의 아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 깨어 있는 개인들, 이 아름다운 별에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개개인이 아니라 평등한 전체적 정신의 중심, 모든 이와 함께 나름의 길을 가고 한계가 없는 개인에게 말을 거는 신화다.


3. ‘내가 저자라면’
『신화와 함께 하는 삶』은 1958년부터 1971년까지 지은이가 뉴욕 쿠퍼 재단 포럼의 그레이트 홀에서 스물다섯 차례에 걸쳐 있었던 대중 강연 중 열세 차례의 강연을 편집한 것이다. 여전히 산만하고 중복 일색이다. 그러나 캠벨 도서의 특성상 그런 불편은 감수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밑줄을 긋고 싶은 부분도 많았다.

목차를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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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 신화에 미친 과학의 영향
2.인류의 출현
3.의례의 중요성
4.동양과 서양의 분리
5.동양과 서양의 종교적 대립
6.동양예술의 영감
7.선
8.사랑의 신화
9.전쟁과 평화의 신화
10.정신분열증-내면으로의 여행
11.달 위를 걷다-외면으로의 여행
12.글을 맺으며-더 이상의 한계는 없다 순이다.

『신화와 함께 하는 삶』에서 가장 주의 깊게 읽었던 대목은 ‘신화에 미친 과학의 영향’이었다. 아래의 글은 과학과 신화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을 명쾌하게 보여주는 예시이다.

p.16. 사내아이는 냉정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알아요, 하지만 과학자들은 사실을 근거로 하지요. 그들은 뼈를 발견했다고요.” 우유와 샌드위치가 나오자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잠시 이 아이 같은 젊은 진리 탐구자의 사실과 발견 때문에 파괴된 신성한 우주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자.

p.28-29. 과학적 사고는‘세상의 기원과 창조자에 대한 믿음을 앗아’갔다. 그래서 그리그 학문의 빛이 막 이슬람에서 유럽으로 전해지기 시작하던 바로 그 때 -약 1100년경부터-부터 이슬람의 과학과 의학은 정체되고 사라져갔다. 그와 함께 이슬람도 스러져갔다. 과학뿐 아니라 역사의 횃불 역시 기독교 서방세계로 넘어갔다. 이후 12 세기 초부터 장구한 인류 역사에 비해 대단히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던 대담하고 훌륭한 정신사가 이어졌다. 유럽 경계 너머의 땅에 한 번도 발을 내딛어 보지 못한 사람은 이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 진 엄청난 빚을 다 갚지 못할 것이다. 소위 ‘개발도상국가’ 의 사회 변화는 수백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침략과 그로 인한 여파로 이루어졌다. 작은 사회는 모두들 오래 전에 확립되고 굳어진 신화에 고정되어 있으며 충돌에 의해서만 변화가 일어났다.(중략)
하지만 현대 과학자들에게 ‘진리’란 무슨 의미인가? 분명 신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는 아닐 것이다! 과학적 발견과 관련된 위대하고 본질적인 사실-대단히 놀랍고 대단히 매력적인 사실-은 과학이 절대적인 ‘진리’인 척 하지도, 또 그럴 수도 없다. 과학은 그저 이 세상의 ‘실용적인 가설’ 이며(“아, 과학자들이라니!” “그렇겠죠. 하지만 그들은 뼈를 발견했잖아요.”) 당장은 지금까지 드러난 모든 관련 사실을 고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화는 현실과 동떨어진 허황된 이야기인 동시에 현상을 설명하는 가장 근원적인 통찰을 담고 있는 이야기로 평가받고 있다. 신화에 대해 이처럼 모순된 평가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신화가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보기: 저자는 위의 글을 통해 신화는 인간의 삶과 더불어 면면히 맥을 이어온 인류의 지적 자산이며, 인간과 우주를 연결하는 신비로운 미로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신화를 ‘증명이 가능한 과학적 사실’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신화속의 영웅들의 이야기는 존재성 없는 상상의 봉황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 의미 너머로 관점을 이동할 수 있다면, 인간의 본성을 다각도로 분석한 시공을 초월한 현실적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신화는 과학의 이름으로 풀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열쇠일 수 있는 것이다. 한때 진리처럼 전해져 오던 신화가 과학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그 설 자리를 잃었지만 다시 신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도 그 같은 맥락으로 풀이 할 수 있다. 과학의 현상으로 우주안의 모든 것을 풀이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이다. 독자가 공명을 할 수 밖에 없는 설득력인 것이다.

p.30.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믿어야 하는 것도, 해야 하는 일도 없다. 한편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오래 전 중세시대나 동양, 심지어 원시인의 종교를 택할 수도 있다.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정신병원에 가지 않게 해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은 것으로 추앙받을 수 있다.

『신화와 함께 하는 삶』의 이 대목은 저자의 폭넓은 종교관이 예컨대 우리의 종교관의 기존 질서를 해체하는 세계관을 보여 주고 있는 대목이다.
다종교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학자의 입장에서 그 같은 주장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인들에게는 논쟁으로 삼을 만한 주장이지만, 점점 문명의 이기로 복잡다단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은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정신병원에 가지 않게 해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은 것으로 추앙받을 수 있다.’는 캠벨의 말에 공명할 수도 있겠다.

『신화와 함께 하는 삶』을 읽으면서 캠벨의 그동안의 저서에서 가졌던 모호함이 얼마쯤 선명하게 다가왔다. 캠벨이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드는 느낌이다.
다음 자유도서는 『신의 가면 』시리즈 중 ‘동양’을 읽을 생각이다. 맥락을 이해하고 깊이 보고 싶은데 시험이 끝나고, 지친 상태에서 읽게 될 것이라 제대로 읽게 될지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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