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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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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1일 05시 19분 등록
네가 바로 그것이다 Thou Art That (Tat tvam asi)
조셉 캠벨, 박경미 역, 해바라기


1. 저자 소개


한 작가에 대해 벌써 네번째 소개를 해야 할 시점이다. 아직 한 번 더 그를 소개할 일이 남았다. 한정된 자료를 가지고 어떤 각도에서 그를 어떻게 다르게 소개해야 하는지가 번번히 고민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동시에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오늘은 캠벨이 자신의 저서 속에 중요하게 거론하는, 그가 영향을 받은 몇 인물들을 중심으로 캠벨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애초 생각은 캠벨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과 작품, 사건들(이 책 저 책 속에 흩어진 단편적인 정보 조각들)을 모아 캠벨의 지적 여정을 서술하는 멋진 퍼즐을 하나 완성하고 싶은 거였는데 시간과 빈약한 자료를 핑계로 종국에는 용두사미가 되어 버렸다.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 만

캠벨이 이룬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난해한 소설 <피네간의 경야>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지침을 마련하는 것이었다(신화의 힘 p8). 이런 노력으로 출간된 책이 그가 헨리 모튼과 함께 쓴 <피네간의 경야를 여는 열쇠 A Skeleton Key to Finnegans Wake>다. 얼마나 어려우면 그 소설의 문을 열기 위해 필요한 열쇠까지 준비해야 했을까. 조이스의 다른 소설 <율리시즈>가 낮 동안 한 인간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간 것이라면, <피네간의 경야>는 이어위커(Earwicker)라는 한 주점 주인이 하룻밤에 꾼 꿈의 무의식을 그려낸 작품이다. 다양하고 복잡한 꿈 이야기와 함께, 주막 손님 12명의 세속적 농담, 그가 공원에서 저지른 죄에 대한 가책, 아내와의 성과 사랑, 부자(父子)의 대결, 형제의 갈등과 해소, 딸에 대한 친족상간적 애정 등이 전개된다. 인간의 원죄와 추락, 탄생, 결혼, 죽음, 부활을 다룬 대(大)알레고리로서 단테의 ‘신곡’에 견줄 ‘인간곡’(Human Comedy)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이스가 n이 책에서 말한 ‘참으로 엄연하고 항시적인’ 인간의 고뇌에서 캠벨은 바로 고대 신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를 읽는다.
캠벨은 위대한 소설이 인생에 대해 줄 수 있는 교훈을 신화와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 이유로 그가 특히 존경한 소설가는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 만이다. 이들의 작품은 신화적 전통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대단히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고 캠벨은 본다. 토마스 만의 책 <토니오 크뢰거>, 이 책은 ‘인간이 가진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 목적이다. 캠벨은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토마스 만이 <토니오 크뢰거>에서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에 대해 그리는 것이다. 이른바 ‘에로틱 아이러니’라고 하는 그의 소설의 특징은, 잔혹하고 분석적인 언어를 통해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있는 대상에 대해 진실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신화의 힘 p27).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뽑아온 두 비극적 감정, 연민과 공포의 함의
(‘천의 얼굴’ p40-, ‘네가 바로 그것’ p97- ‘신화의 힘’ p301- 참고)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유년기에서 청년기에 이르는 스티븐 디덜러스라는 한 젊은 예술가의 정치적,종교적,지적 편력과 가정, 종교, 국가를 초탈한 그가 예술가로서의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결국에는 자기 유배의 길을 떠나는 성장과정을 그린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을 이끈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자전적 소설이다. 캠벨은 성직자들이 종교적 언어의 본질적인 구조인 은유를 읽는데 실패한 역사를 떠올리며 인간의 영적 탐험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로 예술가들에게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그 희망을 제임스 조이스의 연민과 공포라는 두 단어에서 끌어온다. 이 두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비극적 감정’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 스티븐은 이 두 단어를 다시 정의한다. 연민은 고통당하는 인간과 하나되려는 감정이며, 공포는 고통을 넘어서는 인간의 지고의 존재(신)에 대한 고요한 경험, 즉 은밀한 원인(secret cause)과 하나 되게 하는 감정이다. 영웅이란 결국 운명이 어떻게 되든 자신들의 행동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의 삶의 여정 자체가 바로 죽음의 은밀한 원인인 것이다.
예술작품을 보고 ‘예’하듯, 우리 역시 우리가 태어난 바, 천복을 이루며 죽기를 바라는 것이다. 죽음까지도 긍정하는 삶에 대한 ‘예’의 관점은 삶의 행위들을 통해 드러나는 생명의 신비를 체험하는 일이다. 거기에 예술의 열쇠가 있다. 종교로서의 신화는 선과 악, 너와 나,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근거가 있다. 상징이 문을 열 때 그 배경이 빛나고 흘러나오게 된다. 상징의 문을 여는 것, 우리 안에서 무언가를 끌어내는 것, 초월적 에너지와 영광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 만물의 ‘광휘’를 그 자체가 가진 진리의 드러냄으로 인식하고 해석하는 것, 그것이 예술가의 직무다.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는 악몽’ – 제임스 조이스
이 말은 캠벨이 즐겨 인용하는 귀절이다.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그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이라고 조이스는 말한다. 이는 캠벨의 천복 개념과 닿아있다.

신비주의 저술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시인 윌리암 블레이크
(‘신화의 힘’ pp101-102, p301, 본문 p252)

‘궁극적인 떠남, 최고의 떠남은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으로부터의 떠남, 모든 관념을 초월하는 하나님이라는 관념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에크하르트), ‘궁극적인 ‘놓음-쥠(leave-taking)은 ‘신을 위해 신을 놓음’이다’(에크하르트), ‘지각의 문전이 깨끗하면 만물이 그 자체로 영원하다는 것을 보다 알 수 있다’(블레이크).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다는 것이 캠벨의 생각이고 이것을 잘 지지해주는 것이 에크하르트와 블레이크의 발언들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 갇혀있다. 여자와 남자, 삶과 죽음, 진실과 허위, 이것과 저것, 선과 악…하지만 신화는 우리에게 이 이원성의 이면에는 일원성의 세계가 있어서 대극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음을 암시한다. ‘영원이란 시간의 산물에 대한 애정 속에 존재한다.’ 속세의 근원은 영원이다. 영원은 우리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관념이다. 신화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존재가 언표되는 장이다. 에덴동산은 시간을 초월한 신화적인 꿈의 시간대, 여자와 남자가 다르지 않은, 대극이 존재하지 않는 더할 나위 없이 순진무구한 상태의 메타포다. 그러나 에덴에서 추방된 우리는 영원이라는 것에서 멀리 떨어져 어떻게든 그 영원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는 것이다.

칸트(‘신화의 힘’ pp126-127, 본문 p64-)
캠벨의 신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칸트는 유용하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우리의 모든 경험은 시공에 한정되어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경험은 어떤 공간 안에서 어떤 시간대에 생기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 능력을 형성시킨다. 때문에 우리의 감각은 시공이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는 틀에 갇힌다. 그러나 우리가 접촉하려는 궁극적 존재는 갇혀있디 않다. 다만 우리가 이것을 생각함으로써 가둘 뿐이다. 초월자는 사유의 모든 범주를 초월한다..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도 범주다. 시공간 밖에 존재하는 신적 본성은 인식 불가능하다. 칸트는 이것을 ‘감각의 감성적형식들(the aesthetic forms of sensibility)’이라 불렀다. 신이란 말 역시 사유를 통해 생긴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이름 지을 수 있는 것들을 넘어선 무엇인가를 지시한다.


번역 박경미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졸업, 동 대학원에서 기독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이화여대에서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최만자와 함게 쓴 책, <새하늘, 새 땅, 새여성>이 있다. 초대 기독교 사상의 형성 과정과 요한복음서, 영지주의 사상, 신약성서에 대한 여성신학적 해석에 관심을 가진 저자의 역량은 이 책을 분석한 역자 후기에 잘 드러나 있다. ‘성서의 언어를 죽은 문자와 사실이라는 감옥에 가두지 않으면서도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생동성을 되살려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스스로 던지며, 기독교 신자로서 이 책을 유심히 살피며 번역해가는 그의 태도가 인상적이다. 종교체계의 상징을 해석하는 비교신화학과 신앙은 별개라는 것, 오히려 다른 문화권의 신화 이미지에서 본인이 가진 이미지의 내적, 영적 의미를 더 잘 해석해 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비판적 수용주의 입장을 취한다.


조셉 캠벨 재단 Joseph Campbell Foundation

캠벨은 1987년 숨을 거두기 전까지 방대한 양의 출판물을 남겨놓았다. 그 중에는 아직 발표되지 않은 글이나 편지, 일기, 비디오나 오디오로 녹음된 강연들도 상당수를 차지한다. 캠벨의 그 많은 저작들을 영구 보존하고 보급하기 위해 1991년 조셉 캠벨 재단(pp 288~289 참조)이 설립되었다. 이 재단이 내세우는 세 가지 기본 운영 목표는 1. 신화연구의 선구자 캠벨의 연구를 보전하고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것(그의 연구들의 저작, 출판 포함) 2. 신화학과 비교종교 연구를 촉진하는 것(신화 교육 실행, 지원), 3. 재단 프로그램 참여를 유도하여 개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캠벨 사후에 위와 같은 재단 목표에 따라 최초로 발간된 책이다. 재단은 캠벨이 남겨놓은 자료들이나 절판된 작품들을 ‘조셉 캠벨 전집_ The Collected Works of Joseph Campbell’으로 출간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책은 바로 그 첫 번째 결실로, 조셉 캠벨 전집 제1권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 실린 내용들은 대부분 예전에 소개된 바 없는 글들로, 유진 케네디 박사의 지도 하에 조셉 캠벨의 유고와 강연 테이프들을 중심으로 이 책이 만들어졌다.


2.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

서문

11. 신화와 종교의 상징과 에너지는 인류 공통의 상상력의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와서 스스로를 표현한다.

15. 캠벨의 목적은 성서신화들을 탐구함으로써 그것들을 폐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그것들이 지닌 살아있는 풍성한 의미들의 세계를 열어 보이려는 데 있다.

18. 그는 제도 종교에서 줄곧 영적 은유들을 역사적 사실로 잘못 해석함으로써 생겨나는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19. 본래 은유는 우리로 하여금 먼지가 풀풀 나는 구체적인 역사적 시간이 무대에서 좌절한 채로 영원히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이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해준다…종교적 은유가 지니는 내포적 의미는…바로 우리들 자신, 지금 여기 있는 우리들 자신의 내적이고 영적인 경험을 지시한다.

25. 세계의 종말은..어둡고 무시무시한 끝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출발점에 대한 은유다.
25. 캠벨이 복구한 유대-기독교 전통의 가장 의미깊은 가르침은 자비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죽어서 다름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동일한 인간 본성을 드러내는 비전을 향해 부활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네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가르침이다.

1장 : 은유와 종교적 신비

32.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종교적 은유들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에 자신들은 무신론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33-39 나는 전통적인 신화는 네 가지 기능을 한다고 본다. 첫 번째 기능은 존재의 근원적 조건에 의식을 맞추는 것, 다시 말해 우주의 신비로운 떨림(mysterium tremendum)을 향해 의식을 깨우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 기능은 해석적인 기능이다. 바로 우주 질서의 일관된 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세번째 기능은 구체적인 도덕 질서, 다시 말해 그 신화가 생겨난 사회의 질서를 정당화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네번째 기능은 개인이 삶의 다양한 단계들과 위기들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즉 개인들이 삶의 전개를 통전적(출생부터 죽음까지)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36. 전통적 신화들과 관련해 볼 때 과학 역시 그 시대의 과학일 뿐이다. 따라서 구약성서가 기원전 3000년경의 우주론을 반영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은유, 종교적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단지 자신들이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부할 사실들만을 발견한다.

40. 시대와 상황은 변하지만 수세기에 걸친 역사적 조건의 주체, 즉 우리가 인간 존재라고 부르는 신경정신적 통일체는 지속적으로 남는다. 아돌프 바스티안이 ‘원소적 관념’이라 표현하고 융은 ‘집단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지칭했던 것은 변화하는 역사적, 문화적 시대의 은유들을 통해 표현한다.

42. 신화와 형이상학의 은유적 언어들은 둘 다 실제 세계나 신들을 외연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건드리는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차원들과 실재들의 의미를 표현한다. 은유는 시공간의 외적 세계를 기술하는 것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은유가 지시하는 실제 우주는 내적인 삶의 영적 영역이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45. 진정한 의미에서 신화란 ‘다른 사람들의 종교’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종교란 ‘신화에 대한 대중적인 오해’라고 이해될 수 있다.

2장: 종교적 신비의 경험

48. 신비 전통과 관련해서는 두 개의 커다란 세계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근동과 유럽을 포괄하는 이란 서쪽이고, 다른 하나는 인도와 극동을 포괄하는 인도 동쪽이다. ..서구 종교(조로아스터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유럽이 아니라 지중해 동부 연안, 즉 근동에서 유래했다.이 종교들에는 신이 세계를 창조했고, 신과 세계는 동일하지 않다. 즉 창조주 피조물 사이에 존재론적이고 본질적인 구별이 있다. 따라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구별이 없는 들과는 전혀 다른 심리학과 종교적 구조가 생겨난다. 이 종교들의 목표는 초월과의 동일성에 도달하는데 있지 않고, 동일하지 않은 인간 존재와 신 사이의 관계를 수립하는데 있다.

53. Tat tvam asi, 그것은 바로 너다. 이것은 모든 형이상학적 담론의 기본적인 통찰로서 내가 신이 가면들이라 부르는 이름들과 형식들이 벗겨지는 순간 각 사람이 홀로 알 수 있는 것이다.

57. 인간은 선악의 열매를 먹음으로 이원성의 영역에 있게 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대립의 쌍들로 이루어진 세계에 살게 되었다….그리스도는 우리가 쫓겨났던 그 통일성의 영역-나와 아버지가 하나인-으로 다시 돌아간다. 바로 이것이 신비다.

59. 종교적 관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선과 악을 대비시키는 윤리적 관점으로 성서에 근거한 서구 기독교에서는 선과 악을 대립시키는 윤리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신비적 관점에서는 선과 악을 한 과정을 지니는 두 측면으로 이해한다.

3장: 신에 대한 개념들

67.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야훼가 말했을 때 사실상 야훼는 이 가능성을 찬단한 것이다…신이 초월을 향해 문을 열 때 우리는 신이라 부르는 존재와 하나가 된다.

76. 결혼은 다른 은행계좌를 하나로 합치는 협상 같은 것이 아니다.


79. 성서와 관련해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현대 성서학자들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중심적인신화적 주제들을 모두 그보다 앞서 있었던 수메르-바빌론 문서들에서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81.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그분은 훨씬 높은 곳에 있다고 믿을 때에만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있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

84. 서구의 종교 전통에서는 이처럼 자기 존재의 근거와 하나가 되는 경험의 가능성을 알지 못한다. ..서구 종교는 ‘관계성’의 종교다. 피조물 a가 창조주 X와 관계(Related: R)를 맺는 것이다(aRX). 반면 동양의 종교에 대한 적절한 묘사는 훨씬 단순하다. a=X라는 동일시인 것이다.

87. 인간은 모두 동물로 태어났으며 잠자고, 먹고, 번식하며 싸우는 동물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동물들이 알지 못하는 삶의 또 다른 질서, 존재의 신지 앞에서 느끼는 경외, 즉 삶에서 느끼는 영적 감정의 뿌리이자 가지라고 할 수 있는 ‘신비스럽고 떨리며 매혹적인 것에 대한 경외가 있다.

89. 우리는 우주의 감각이다. 바로 우리 자신 안에 그것이 있다. 한때 우리가 믿었던 신들은 저기 밖에 있고, 그 신들은 우리들 자신이 투사된 것이다. 그 신들은 우주의 신비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해석하고자 했던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다.

4. 종교적 상상력과 전통신학의 규칙들

95. 이 시대 종교의 과제와 기능은 마음을 깨우는 것이다.

96. 종교적 언어의 본질적 구조인 은유들은 구체적인 지시물들, 외연과 관련해서 읽혀졌다. 그 결과 실은 은유의 전체적인 의미는 분열과 이원성을 넘어서는 것임에도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적대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107.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며 그것들을 넘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때만 진정으로 알 수 있다.
–아퀴나스 <이단논박대전>

108. 한 정통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다른 전통에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어서 전 영역을 살펴보는 것이 대단히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이 서로 밝혀주기 때문이다.

5. 유대-기독교 전통의 상징들

128. 은유는 아직 남아있는 신화의 언어이며 여전히 광범위하게 오해되는 말이기도 하다. 소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도 신화는 거짓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은유를 잘못 읽었을 때만 그러한 오해가 생긴다.

129.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은유는 사실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은유가 사실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무신론자라고 부르며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종교적이라 생각한다.

133. 에덴이라는 목가적 장소를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에덴은 남성과 여성, 선과 악으로 이루어진 대립의 쌍들로, 우리들 정신과 생각이 신의 정신만큼 거룩하다는 것의 은유다.

138. 이러한 신화적 주제들은 황당한 동화적 이야기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고 우리 삶을 밝혀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창세기의 이야기들은 내연적 의미에 따라 읽으면-영적 메시지와 중요성을 제공하는 참된 은유적 의미에 따라 읽으면-이러한 모든 상징들이 거기에 나타난다.

146. 신을 하나의 사실로 생각할 때는 신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없다. 그러나 신을 생명의 역동으로 보고 우리 자신을 거기에 포갤 때 우리는 신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동산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는 여기 지상에 존재한다.

151. 만일 당신이 어떤 다른 신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한 신을 선택한다면 그 신을 확고히 긍정하고 붙들 수 밖에 없다. 그 신이 초월을 열어 주면, 신자도 초월을 열 수 있다. 그 신이 닫으면 신자도 닫게 된다…성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그것을 역사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읽는 것이다.

6. 유대-기독교 영성의 상징들에 대한 이해

177. 묵시문학적 사건을 알리는 전령으로서의 메시아개념은 히브리인들이 페르시아인들로부터 받아들인 것이었다.

181. 세 가지의 시험을 이긴 다음, 그리스도는 깨달음을 이루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인식을 얻는다.

198. 융은 만다라 상징이 인간의 경험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네 가지 지본적인 심리학적 기능들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해석했다. 그것은 이해기능인 감각과 직관, 그리고 판단과 평가 기능인 사유와 감정이다.

200. 그리스도는 비록 역사적으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한했고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했지만 대립의 어느 쪽에도 얽매이지 않았으며, 십자가의 수직대와 수평대 어느 쪽에도 매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자신도 그분의 상징을 믿음으로써 얽매이지 않고 ‘구원받았다’는 것이다….(반면) 인간은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삶 속에서 대립되는 쌍의 어느 한 쪽에 얽매어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런 유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법인 도덕과 죄의 법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이 죽고, 네 가지 기능을 모두 통과하는 에너지와 빛의 순환에 스스로를 열어서 강들이 네 방향으로 흐르는 에덴 동산의 생명나무처럼 우리도 한 가운데 머물러야 한다.

203. 마가복음서에서 세계의 종말은 다가올 미래의 사건인 것처럼 나타난다….그러나 결코 세계의 종말이 달력 속의 어느 날짜엔가 일어날 역사적인 사건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 나라는 여기, 우리 앞에 있다’. 만일 당신이 세상의 빛나는 환희를 본다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 ‘예’라고 말할 것이고 만일 그 환희를 보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들에 ‘아니오’ 라고 말 할 것이다. ..(신화)경험을 통해 만유 안에 있는 생명의 역동성을 확인하고 깨닫는 것, 그저 세상의 측면에만 매일 것이 아니라 핵심을 보야야만 하는 것이다.

7. 질의 응답

208. 신화적 이미지들은 불합리하고, 따라서 무의미하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따라서 합리적 체계는 우리 삶에서 신화적 이미지들의 연관성을 깨뜨리고 신화적 상들이 지닌 힘을 사용할 수 없게 한다.

214. 영원은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며, 자 자신의 진리와 존재의 영원성을 나의 가능성 안에서 경험할 수 있다…서구와는 달리 동양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공(空)이 아닌 공(空)과 자신의 동일성을 내면에서 경험하는 데 있다.

216.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나 가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자신을 내어주는 고귀한 사랑의 위대한 예가 바로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여기서 개인의 초월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아버지에 대한 속죄 혹은 아버지와의 일치이다.

217. 결혼이 전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결혼하지 않은 것이다.

228. 쿤달리니 요가라는 말은 ‘감겨진 것’을 뜻하며 인간의 몸 속 가장 밑바닥에 실제로 항문 위치에 감겨져 있다고 여겨지는 영적 에너지를 가르킨다. 이 요가의 목표는 호흡조절과 명상을 통해 수슘나라고 하는 척추의 통로로 쿤달리니가 풀려나오게 하는 데 있다.

8. 대담

237. 신화는 거짓을 뜻하는 말로 잘 쓰이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표현하는 영구적 수단이다….신화와 상징은 모든 종교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특징으로 종교 체험의 특수한 언어이다.

246. 부활절 계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주시대에는 두가지 명제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1. 우리는 새로운 상징체계로 나가야 합니다. 2.현존하는 상징들은 영적으로 해석될 때 계시를 드러낸다.

250. 토마스 머튼이 썼듯이 하나의 상징은 우리의 의식으로 하여금 삶과 실재 그 자체의 내적 의미를 새롭게 자각하도록 일깨우는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상징을 통해 우리는 가장 깊은 자아와 접촉하고 다른 사람과 접촉하고, 신과 접촉합니다.

257. 우리가 서로 하나라는 것, 그것이 우주 시대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많은 종교 제도들이 그 요청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259. 경제적 가치를 입증하는 성과만이 가치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오는 유인원들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먹이를 놓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홀로 떨어져서 경외심에 이끌려 돌판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없는 점이지요. 그가 바로 인간으로 진화한 유인원이며 미래를 이해한 존재입니다.

역자 해설

263. 캠벨은 이 책에서 성서와 기독교의 많은 이야기들을 인간과 세계, 신에 대한 근원적인 이야기로 보고 세계의 다양한 신화들과 비교하여 구조적 유사성을 발견하고, 그러한 구조에 나타나는 인간 종교성의 근본 구조를 밝히려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273. 하나님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역사 속에서 만난다. 따라서 유대 기독교에서 역사는 계시의 장소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우리는 이 책에서 우리가 이미 읽은 캠벨의 책들에서 다소 미흡하게 다뤄진 신화 이해와 해석의 기본 토대인 신화의 언어, 은유와 신비를 비롯해 종교적 상징과 신비경험, 신에 대한 개념들에 대해 보다 체계적으로 살펴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유대 기독교라는 종교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캠벨은 어느 방송사의 생방송 대담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이 글을 시작한다. ‘신화는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대담자와 ‘신화는 은유’라고 주장하는 자신 사이의 실강이가 ‘은유’를 서구의 영성에 대한 탐구의 중심에 놓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유대-기독교 상징과 신화들을 연구하는 캠벨의 목적은 그것들을 폐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그것들이 지닌 살아있는 풍성한 의미들의 세계를 열어 보이려는 데 있다. ‘발이 걸려 넘어지는 곳에서 황금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말은 그래서 이 책의 여정에 해당하는 말이다.

켐벨은 신비 전통과 관련해서 서양과 동양 종교라는 커다란 두 축으로 나누어 고찰한다. 우리가 서양 종교라 부르는 근동에서 유래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관계성’의 종교다. 신이 세계를 창조했고, 신과 피조물 사이에는 존재론적이고 본질적인 구별이 있다. a가 창조주 X와 관계(Related: R)를 맺는 것이다(aRX). 이런 서구의 종교 전통에서는 자기 존재의 근거와 하나가 되는 초월의 가능성을 알지 못한다. 이 종교들의 목표는 초월과의 동일성에 도달하는데 있지 않고, 동일하지 않은 인간 존재와 신 사이의 관계를 수립하는데 있다. 반면 동양의 종교는 훨씬 단순하다. a=X라는 동일시인 것이다.

캠벨은 서양 제도 종교가 영적 은유들을 역사적 사실로 잘못 해석함으로써 야기한 수많은 역사적 피해들을 잊지 않고 있다. 캠벨이 보기에 유대-기독교 전통은 자비에 대한 가르침을 풍성하게 제공할 수 있는 강력한 원천이었다. 이 책에서 캠벨이 복구해내는 유대-기독교는 서로 적대하며 전쟁을 벌이는 종교도 아니고 분열을 일삼는 소종파 종교도 아니다. 그 종교의 가장 의미 깊은 가르침은 자비의 가르침이다. 특히 예수의 삶은 바로 자비를 실천한 위대한 영웅의 족적이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나 가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자신을 내어주는 고귀한 사랑의 위대한 예가 바로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여기서 개인의 초월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아버지와의 일치, 쫓겨난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은 다름 아닌 ‘네가 바로 그것’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종교적 은유가 지니는 내포적 의미는 지금 여기 있는 우리들 자신의 내적이고 영적인 경험을 지시한다. 그리하여 캠벨에게 있어 세계의 종말은 묵시록적인 어둡고 무시무시한 끝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출발점에 대한 은유다.


이 책의 좋은 점

캠벨은 강연에서 대체로 광범위한 주제들을 다루었고, 그 강연들 중에 유대-기독교에 관한 부분은 일종의 예로 다루었다. 이 책에 소개된 글들은 그런 예들을 모아 유진 케네디가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다시는 직접 들을 수 없는 캠벨의 강연을 책을 통해 실제로 듣는 것 같은 기분을 주도록 편집에 신경을 썼다. 특히 본격적인 주제(유대 기독교 상징에 대한 이해)에 들어가기 전 독자들의 신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긴 워밍업시간(1-4장)을 제공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는 5장(유대-기독교 전통의 상징들)에서도 유대 기독교 상징을 검토하기 이전에 신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을 먼저 설명함으로써 그 다음 단계로의 진입을 순조롭게 한다.

이 책에서 케네디가 특히 신경을 쓴 것은 7장은 8장이다. 7장은 이 책의 실제 강연에서 나왔던 질문들 10가지를 편집한 것이라,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내용(우리 시대 신화론의 문제에서 사후세계에 이르기까지)에 대한 캠벨의 대화체 답변을 들을 수 있다. 8장은1979년 케네디가 뉴욕 타임즈 매거진의 부탁으로 진행한 ‘부활절 특집 캠벨 인터뷰’를 편집한 것이다. 케네디 자신의 관심사인 유월절과 부활절 등 종교적 축제와 우주 시대의 개막에 따른 영적 의식 변화에 대한 주제들이 그의 심도 있는 질문과 함께 전개된다. 케네디가 이 책의 결론을 대신해서 이 대담을 마지막 장에 실은 의도를 잘 파악하고 읽으면 유용하다. 다양한 시각에서 캠벨의 육성을 한 번 더 들을 수 있다. 잡지에 실린 이 대담을 보고 빌 모이어스가 캠벨에게 주목하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PBS 대담시리즈 ‘신화의 힘’이 세상에 공개되어 수백만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번역본 칭찬하기

편집의 공은 번역본에게 돌려야겠다. 번역본 편집이 좋아서 지금까지의 책 중에서 가장 수월하게 읽었다. 번역자가 현역 교수로 관련 분야의 전문가라는 점도 이 책의 신뢰도를 높이는데 기여한다(앞 역자 소개 참고). 그는 본래의 각주와 함께,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실들에 대해서는 친절하게 번역자의 주를 따로 달아 두었다. 세심한 역자의 배려 덕분에 실제로 읽는 부담이 훨씬 줄었다. 그녀의 역자 후기 역시 책을 단순히 정리하는 차원이 아니고 자신의 생각을 녹여낸 한 편의 잘 정리된 논문 같아서 읽는 이의 시각에 균형을 잡아준다. 장 별로 앞에 설명 페이지를 따로 마련하여 그 장이 어떤 내용의 강연과 논문 자료들을 참고해서 편집한 것인지 알게 해준 것이나 리드 문장을 뽑아 큰 글자로 곳곳에 배치해 내용을 미리 숙지할 수 있게 해준 것이 좋았다.


아쉬운 점

위의 칭찬을 뒤집으면 그게 바로 잔소리 거리로 둔갑한다. 이 책 역시 유대-기독교 신화들에 대한 캠벨의 일관된 논문이나 저술들이 아니고, 상이한 주제들에 대한 캠벨의 강연 내용에서 유대-기독교 부분들만 모아 편집한 책이어서, 강연의 생생함은 살아있을지 모르나 논리가 불분명하고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당연히 논의를 일과되게 따라가는데 무리가 따른다. 그리고 각 장마다 이 책의 중심을 이루는 ‘신화로서의 종교는 역사적 사실로가 아닌 영적인 상징과 은유로 읽어야 한다’는 캠벨의 주장이 계산 없이(논거의 깊이 없이) 계속 반복되어서 글의 응축성을 떨어뜨린다. 또한 이미 그의 책을 4권 읽다 보니 매번 반복되는 이야기들(일정 신화들, 개인적인 꿈과 집단적인 꿈, 마틴 부버와의 대화, UN 근무하는 힌두교인, 자비 등)에 대해선 솔직히 좀 질린다. 캠벨은 마치 우리 아버지가 술 드시고 하시는 주사처럼,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한다. 이 책의 편집자가 각 장을 구성하기 위해 세심하게 자료를 분류하고 주제가 서로 중첩되지 않도록 애쓴 흔적이 보이지만, 여전히 종횡무진 이곳 저곳을 내달리는 캠벨의 스타일은 여기서도 드러나고 있다(특히 1-5장). 캠벨 책에 중복되고 교차하는 부분(이 책은 두께 얇고 그 정도가 약하지만)을 빼고 나면 무게는 반으로 줄고 읽는 즐거움은 배로 늘어나지 않을까.


관심사: 은유로 에덴 사건을 보면?


일단 캠벨 식의 해석은 에덴이라는 목가적 장소를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에덴은 남성과 여성, 선과 악으로 이루어진 대립의 쌍들로, 우리들 정신과 생각이 신의 정신 만큼 거룩하다는 것의 은유다.
창세기 첫 부분은 온통 신화다. 주로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신화다.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이야기는 ‘금지된 한 가지’라 불리는 오래된 민담의 동기이다. 이 문을 열지 마라. 뒤를 돌아보지 마라, 이 음식을 먹지 말라…
에덴 동산은 어떤 곳인가. 인간 또는 사물의 본성이 하나되고 분열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었을 때 인간은 선과 악, 빛과 어둠, 옳고 그름 뿐 아니라 여성과 남성, 신과 인간 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대립의 쌍에 대해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이 금한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의 열매를 먹었다. 그곳에는 영생의 나무가 있다. 신은 이들을 영생의 나무로부터 분리시키려고 에덴 동산에서 쫓아낸다. 동산 입구문에는 두 케루빔 사이에서 불타는 칼이 지키고 있다.

문제는 에덴에서 쫒겨나(=신과 분리된) 아담과 이브가 어떻게 에덴으로 돌아오느냐 하는 것. 이는 은유적인 해석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 이야기를 과거의 언젠가 일어난 사건으로 받아들일 때 에덴을 역사적 사실로 증명하기 위해 우스운 해프닝이 벌어진다. 그렇게 믿는 것은 종교적 은유 언어를 곡해하는 것이다.

자 이제 동산 안을 다시 둘러보자. 영생의 나무는 무엇인가. 동산 안에 있는 두 나무에 대한 유대 랍비의 긴 토론을 신중히 검토해 보아도 그것은 여전히 신비로 남는다. 자세히 살피면 두 나무는 동일한 나무이다. 우리는 선과 악을 알게 됨으로써 동산에서 나온다. 이것은 모든 것이 하나인 방에서 문지방을 지나 갑자기 모든 것이 둘인 방으로 걸어들어가는 것과 같다. 두 케루빔 사이에 불타는 칼이 있는 동산 문에서 돌아보면 우리는 모두 하나였던 곳에서 쫓겨나 동산 밖에 있다.

불교 전통에 의하면 두 수호신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이 세상 것에 대한 욕망을 나타낸다. 두려움과 욕망이 인간을 동산으로부터 멀리 떼어놓는다. 우리를 유배된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실은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그렇다면 돌아가는 길은 무엇인가.

붓다는 ‘두려워말고 들어와라’ 말하며 블레이크(William Blake)는 ‘천국과 지옥의 결혼’이라는 시에서 말한다. ‘그 문에서 케루빔을 치워라. 그러면 만물이 무한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당신의 눈에서 욕망과 두려움을 깨끗이 씻어내게 되리라. 그러면 만물을 신의 계시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도마복음서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나라’가 올 것인가를 묻는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오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 퍼져나가도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에덴 동산의 추방의 이야기도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여기 바로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은유다.


성경 창세기와 같은 맥락의 창세기 신화들


‘비교신화학은 한 문화권의 신화를 다른 문화권의 신화들과 비교하는 학문이다. 비교를 하면 이미지의 의미가 확연해진다. 다른 문화권의 이미지들은 서로 보완하며 설명을 하게 된다. 메타포는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의 내적 체험과 삶을 위한 메시지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면 그것이 우리의 개인적 체험이 되는 것이다. 다른 문화권의 유사한 창세기 신화들을 보자. 이 신화가 성경의 유일한 신화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창세기 1장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애리조나 피마인디언의 전설 <세상의노래> 한귀절
“태초에는 도처에 흑암, 그러니까 흑암과 물 뿐이었더라. 그러다 한 곳에서 흑암이 덩어리지니 덩어리졌다가 갈라지고, 덩어리졌다가 갈라지고 하니…

창세기 1장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하시매 빛이 있었고…”
기원전 8세기경에 쓰여진 <우파니샤드>의 한 구절
“ 태초에는 사람의 형상으로 비치는 한 위대한 존재뿐이었더라. 사람의 형상으로 비치는 존재는 세상은 자기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더라. 그의 첫 말은 이것이었다. ‘이것이 나로다’.

역시 창세기 1장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
서아프리카 바사리족 전설
‘우눔보테가 인류를 하였다. 인류의 이름은 사람이다. 우눔보테는 그다음에 영양을, 뱀을 마들고 각기 이름을 주었다..그는 이르기를 ‘이 땅은 아직 다져지지 못했구나, 그러니 가서 맘껏 다지거라…’

창세기 2장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날이 이를 때 끝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파마 인디언
“내가 세상을 만들었으니 보라, 세상짓기가 끝났구나.”

창세기 1장
“하나임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우파니샤드
‘’내가 지었구나” 이로써 그는 그 지으신 이가 되었더라. 진실로 이 짓는 일에서 이거을 아는 자가 바로 창조주이니라”

다시 창세기는 이렇게 계속된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된 여자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었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자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바사리 전설에도 같은 식으로 진행된다 “ 어느날 뱀이 말했더라, ‘우리도 이 실과를 먹어야 한다. 왜 우리만 주려야 하느냐’ 영양이 말했다. ‘우리는 이 실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이렇게 되자 남자와 그 아내가 실과를 먹더라. 우눔보테가 하늘에서 내려와 물었더라. ‘ 누가 이 실과를 먹었느냐?’ 그들이 같이 대답했다, ‘’저희가 먹었나이다.’ ‘누가 먹으로라고 하더냐?’ ‘뱀이 그랬나이다’.

태초에 하나였는데, 이 하나가 분리되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생기고 여자와 남자가 생겼다는 아주 기본적인 신화 모티프는 세계 도처에 있다. 유사점은 계속된다. 이 책을 향한 캠벨의 목적은 분명하다. 그는 제도 종교에서 줄곧 영적 은유들을 역사적 사실로 잘못 해석함으로써 생겨나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궁극적으로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종교적 은유가 지니는 내포적 의미, 즉 지금 여기 있는 우리들 자신의 내적이고 영적인 경험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생각하기: ‘Tat tvam asi’

언젠가 이끼에 덮여 썩어가는 나무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다음 세대를 이룰 생명들을 위해 남김없이 자신의 몸을 분해하는 나무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한 세대로 끝나지 않고 순환되는 이 세상에서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다. 어느 한 시점을 이 지구에 잠깐 머물다 떠날 존재들이다. 나무처럼 잘 살다가 죽어서 더 아름다운 우리들이 될 수는 없을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중에 캠벨이 건져 올린 영적 통찰과 마주쳤다.

유진 케네디가 캠벨의 유고와 강연 테이프를 뒤져 유대-기독교 전통의 상징과 은유에 대한 캠밸의 견해를 밝힌 바로 이 책 서문에서 무척 흥미로운 구절을 만났다. ‘Tat tvam asi’. 산스크리트어이고 번역하면 ‘네가 그것이다’ 란 뜻이다. 캠벨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표현한 이 말이 곧 책의 제목이 되었다.

캠벨은 <도덕의 기초 On the Foundations of Morality>에 나오는 쇼펜하우어의 질문을 좋아했다. ‘어떻게 나의 고통도, 내가 관심을 갖는 사람의 고통도 아닌 남의 고통을 보고 마치 그것이 나 자신의 고통인 양, 즉각 몸을 던져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한가……이는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며,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결론에 따르면 그런 즉각적인 반응과 행동은 ‘네가 그것’ 이라는 말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깨달음이 섬광처럼 지나간 결과이다.

쇼펜하우어는 계속해서 이 근원적 통찰은 '나의 참된 내적 존재가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 안에 실제로 존재하며.....그것이 자비(com+passion: 함께 고통 받음)의 근거로서 모든 참되고 이타적인 덕이 여기에 기초하고, 모든 선행에서 바로 이 자비가 표현된다'고 설명한다.

캠벨은 쇼펜하우어에서 한발 더 나아가, 평생에 걸친 다양한 신화 연구를 통해 상이한 신화 속에 흐르는 동일한 영적 통찰로서 Tat tvam asi 를 발견한다. 캠벨은 거듭, 인간 행동의 가장 고귀한 정신으로 ‘네가 그것’, 바로 ‘자비’ 정신을 들고 있다.

캠벨이 보기에 유대-기독교 전통은 자비에 대한 가르침을 풍성하게 제공할 수 있는 강력한 원천이다. 특히 신약의 은유들 속에 꽃핀 예수의 삶과 활동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자비를 실천하는 위대한 영웅의 족적이다. 인류의 온갖 부조리를 알면서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몸소 고난의 역경을 감내한 예수 속에 깊이 들어있던 정신은 다름 아닌 ‘네가 바로 그것’ 이었던 것이다.

'Tat tvam asi'. 사람들이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순간적인 동정 때문이 아니며, 그것은 대상과의 동일시 때문이다. 수영도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고 덮어놓고 물에 뛰어들거나, 어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 철도 위로 뛰어드는 무모한 행동은 ‘네가 그것’ 이 아니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와 스스로를 동일시 하는 것, 혹은 ‘네가 그것’의 정신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심성이라는 대가의 통찰에 깊이 공감한다.

나는 늘 궁금했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안위만으로는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개인적인 성공이 행복과 동의어가 아닌 경우를 주변에서 너무 많이 보았다. 개인의 발전이 타인을 향해 열려 있지 않는 한 사람들은 결국 행복하지 못했다. 내 경우 역시, 궁극적인 만족과 고양은 언제나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다가왔다. 타인에게 기여하는 삶이 아닌 삶은 보람이 없다는 걸 나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건 내 개인 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까 캠벨의 'Tat tvam asi' 에 의하면 ‘나를 넘어 언제나 타인에 이르려고 하는’ 우리들 마음의 지향은 매우 자연스런 인간 심성의 발로인 것이다. 바로 그 심성이야말로 우리 인간됨의 증표인 것이다(그런 자비심이 없는 사람은 고로 인간이 아닌 것이다).

이 개념을 나에게 대비해보니 내가 왜 잘 살고 싶은지, 그리고 왜 잘 죽고 싶은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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