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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1일 09시 24분 등록
조셉 켐벨, <신화와 함께 하는 삶>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의 저작(著作)들을 3권이라는 얄팍한 분량이지만 잠시 곁눈질 하면서,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철학(哲學)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신화’(神話)라는 장난감(?)을 선택하였다. 그 장난감은 그의 지적 여행을 흥미롭고 재미있게 안내해 주었다. 그는 직접적인 설명이나 명확한 답변을 거의 피하고 있다. 음유시인의 아름다운 시구처럼, 거리악사의 구슬픈 노래가락 처럼 신화라는 미궁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기를 원하는 구루를 연상케 한다.

그의 철학을 단언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총체적인 시각에서 볼 때, 성급한 면이 있지만 나름대로 그가 신비주의자(神秘主義者)라고 정의내렸다. 신비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우주를 움직이는 신비스러운 힘 즉 신(神)이나 존재의 궁극 원인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사상으로 말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합일(合一)의 과정은 합리적 추론이나 정해진 교리 및 의식의 실천을 통하여서는 이루어질 수 없고 초이성적 명상이나 깨달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사상이다.

그는 신화적 연구들을 통해 철저하게 서구 근대 철학의 존재방식인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배제한다. 감각과 이성,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과 같은 대극(對極)의 개념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이러한 모순적 관계에 있는 개념들의 합일을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저작에서 소개되고 있는 토마 복음서, 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 인디언사상, 불교사상, 힌두철학들은 신비주의 철학의 근간이 되고 있는 사례들이다.

물론 신비주의 철학의 다양한 스펙트럼들을 개인적으로 소화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깊이 있는 수준에서 그의 사상을 논하기에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언젠가 한번은 신비주의 철학을 내 나름의 언어로 정리하고 싶다.

“이미지의 의미는 말 너머, 말이 정의하는 의미 너머 직관적으로 파악된다. 이미지가 당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말은 당신이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뿐이다. 결국 이미지와 멀어진다. 춤을 출 때에는 그 의미를 물어보지 말고 즐겨라. 자신의 의미를 묻지 않고 자신을 즐겨라.” <신화와 함께 하는 삶> 128p

이 얼마나 신비주의자의 감성과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글인가? 무릇 이 글을 읽으면서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의 제례행사가 생각났다. 수피란 그 교도들이 입었던 풍성한 치마같이 생긴 옷을 말한다. 그들은 제례행사에서 빨간 모자와 치마 같은 것을 입고 1분에 60회전을 하는 춤을 춘다. 그 춤을 통해 몰아지경에 이르기 위해서이다. 이 몰아지경의 경지를 통해 이들은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며, 신과 만나게 된다.

신과 하나되어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춤을 추는 캠벨의 미소가 보인다.


2. 내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

추천의 글 – 이경덕

미로와 미궁은 얼핏 서로 닮은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다. 미로와 미궁은 크게 다르다. 미로는 말 그대로 길이 넝쿨처럼 얽혀 있어서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힘든 길이다. 그러니까 미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처럼 복잡하게 뒤엉켜 있어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분간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미궁은 길이 하나밖에 없다. 외길이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미궁은 나선이 그려진 원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좌우를 살필 필요 없이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중심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미궁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면 그대로 뒤로 돌아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오면 된다. 1p

다시 미궁으로 돌아가자. 미궁은 들어갈 때와 나올 때 같은 길을 걸어야 하지만 그 길을 걸은 사람에게는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길이 다르다. 다르게 표현하면 미궁의 중심을 향해 걸어갈 때와 중심에서 나올 때 서로 다른 사람이 된다. 깨닫기 전의 사람과 깨달은 후의 사람은 다를 수 밖에 없다. 4p

신화는 미궁이다. 신화학자들이 아이시크의 이야기를 자주 인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미궁으로 안해하고 보물을 얻도록 해준다.
“신화와 상징들 그리고 먼 곳으로부터의 지혜의 징표들은 바로 그러한 방법으로 우리 자신의 보물에 대해 우리에게 이야기해 줄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우리 존재의 잊혀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것을 파내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것은 우리들의 문제들을 해결해주고 우리를 둘러싼 모두의 이익을 위하여 살아 있는 정신의 신전을 건립토록 허락할 것이다.” 4p

1. 신화에 미친 과학의 영향

니체와 입센이 알고 있던 것처럼 삶은 삶을 뒷받침하는 환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환상이 사라진 곳에는 안정감도, 도덕률도, 확실한 것도 없다. 22p

전통적으로 대중적 종교의 신화적 인물과 사건은 대부분 사실로 간주되고 교육된다.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는 실제로 이집트 탈출이 있었고, 예수의 부활이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같은 사실은 이제 역사적으로 의심받고 있다. 따라서 그 이야기들이 지지하는 도덕적 질서도 의심받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상상으로 만든 역사 이야기라고 해석한다면, 그리고 중국과 인도, 유카탄 등 전세계 곳곳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 의미는 명확해진다. 다시 말해 비록 사실이 아니고 실제 역사는 아니지만, 그토록 보편적으로 숭배 받은 신화적 가상인물은 정신의 사실을 재현하는 것이 틀림없다. 24p

프로이트의 관점에 따르면 신화는 꿈이라는 심리적 상태를 다룬다. 다시 말해 신화는 공공의 꿈이고 꿈은 개인의 신화다. 그에 따르면, 신화와 꿈은 모두 유아기 근친상간의 소망이 억압된 징후로 공공의 종교와개인의 신경증간의 유일하고도 본질적인 차이다. 신경증을 앓는 사람은 수치심과 고독감을 느끼고 질병 속에 고립되는 반면, 신들은 우주라는 스크린에 크게 비추어진다. 26p

카를 G. 융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가 보기에 신화와 종교의 이미지는 긍정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목적으로 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 몸의 모든 기간-섹스나 공격과 관련된 기관뿐 아니라-에는 저마다 목적과 동기가 있으며 의식적으로 통제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삶의 필요조건을 중시하는 외부 지향적 의식은 이러한 내면의 힘을 잃을 수도 있다. 그리고 융은 신화를 제대로 해석하기만 한다면, 다시 그 내면의 힘을 얻는 수단이 된다고 말했다. 신화는 삶 속에서 인식되고 통합되어야 하는 정신의 힘을 그림문자로 말해주고 이 영혼의 힘은 언제나 인간 정신의 힘을 그림문자로 말해주고 이 영혼의 힘은 언제나 인간 정신에 보편적이었으며 인간이 수천년의 세월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인류의 지혜를 나타낸다. 27p

융은 어느 극단에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7p

우리는 사물을 알지 못하고 과학도 진실을 말해주지 못한다. 과학의 매력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든, 그것은 진리에 대한 열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는 과거의 종교가 주거나 수없이 제안했던 것보다 더 크고 더 생생한 계시가 존재하는 것 같다.
과거의 텍스트는 다양한 영역에서 인간을 위로해준다. 언제나 저 너머에는 애정이 많고 다정하며 정의로운 하느님 아버지가 우리를 굽어보시고 언제든 우리를 이해해주시며 언제까지나 우리의 소중한 인생을 생각하신다고 말한다. 반면 과학에 따르면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혹은 ‘저 너머에’ 무엇이 있기는 한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저 놀라운 현상이 나타났고 인간의 감각과 그 도구는 정신의 본성에 따라 그 현상을 마음에 전달한다고만 말할 뿐이다. 그리고 내면으로부터 전혀 다른 종류의 이미지가 나타나는데, 그 이미지는 밤에 잠들어 있을 때 가장 제대로 경험할 수 있지만 낮의 일상을 깨뜨리고 광기로 인간을 파괴할 수 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이러한 형상의 배경이 무엇인지, 우리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긜고 왜 존재하는지는 완벽한 신비다. 신비라는 것만이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것이고, 이제는 그 점을 인정해야 한다. 30p

2. 인류의 출현

죽음에 대한 의식과 죽음을 초월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신화의 가장 커다란 발생원인이었다. 이와 함게 또 다른 개달음이 있다. 즉 한 인간이 태어나 그를 돌보고 보호해주는 사회 집단, 그리고 거의 평생동안 그 역시 돌보고 보호해야 하는 사회 집단은 그가 태어나기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그가 죽은 다음에도 존재하리라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인류의 한 구성원은 죽음을 맞이해야 할 뿐 아니라,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을 자기가 태어난 사회체제의 것이 되도록 스스로 적응해야할 필요성에 직면한다. 그리하여 개인이 스스로 동화되도록 해야 하는 사회체제는 한 개인의 인생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개인은 사회에 참여하면서 죽음을 초월한 인생을 알게 될 것이다. 유사시대와 선사시대라는 긴 시간 속에서 발생한 모든 신화 체계에는 이 두가지 근본적인 깨달음-누구나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과 사회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상징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의례와 사회를 이루는 중요한 힘이었다. 36~37p

지금은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불과 150년 전만 해도 목사와 철학자, 지배계층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이 모든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믿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것은 전혀 없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 지구상 그 어디에도 에덴동산도, 뱀이 말할 줄 알던 시절도, 선사시대의 ‘타락’도, 동산에서의 추방도, 대홍수도, 노아의 방주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주된 서양 종교의 역사는 허구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다른 종교들 역시 이 같은 전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어느 전설에나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에덴동산이나 뱀, 나무, 대홍수 같은 것은 없었다. 40p

신화는 외부의 사건이 아니라 상상의 주제를 말하고 있다. 신화는 사실 보편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인간 정신 혹은 요즘 말로 영혼의 영원한 특징, 특유한 인류의 보편적 상상력을 나타낼 것이다. 따라서 신화는 기본 원리를 인정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본질적인 문제를 얘기하고 있다. 그 문제는 의식적인 정신이 가장 은밀하고 깊은 곳과 계속 접촉해야 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 성스러운 이야기와 그 이미지는 일상적인 낮의 의식은 알지못하는 영혼에서 의식적인 마음으로 보내는 메시지다. 그리고 그것이 시공간의 영역-미래든, 현재든, 과거든-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힌다면 그 힘은 신화 그 자체가 상징하는 이차적인 것, 즉 신성시된 막대기나 돌, 동물, 사람, 사건, 도시 혹은 사회 집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왜곡될 것이다. 42p

그노시즘의 <토마 복음 Gospel According to Thomas>에서 그리스도가 했다고 하는 말처럼 ‘아버지의 왕국은 이 세상 어디에나 있으나 인간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47p

3. 의례의 중요성

마찬가지로 사회관계가 이루어지는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는 의식화된 절차가 그 의례의 주인공을 비개인적인 존재로 만들고 그들을 그 자신이 아닌 존재로 높이거나 낮춘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종, 사회, 계급 혹은 직업의 것이다. 그러므로 임명식 같은 곳에서 판사나 시장으로 취임한 사람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 원칙이나 법의 매개자라는 그들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러한 규칙이 없는 사회는 존속하지 못한다. 사람들 역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다. 한 사람의 개인적 속성은 그 사회의 규칙을 통해서만 막연한 가능성에서 벗어나 유일무이한 삶을 실현할 수 있다. 78p

위에서 얘기했던 장례식에서 가장 눈에 띠는 부분은 고대와 근대 서양은 개개인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동양의 장례식은 그렇지 않다. 장례식은 인간을 통해 상상한 우주를 가리킨다. 동양의 장례식에 참석해본 사람이라면 한 개인으로서 고통 받는 사람은 장례식을 통해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만 장례식의 모든 요소는 그 사람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음을 눈치 챘을 것이다. 낡은 가죽부대에는 새 술이, 그 사람의 술, 정확히 말해 이 특별한 젊은이의 술이 그리고 영원히 반복되는 주기가 아니라 현재라는 역사적 시간에서 그가 보여준 것이라는 술이 담겨 있다. 하지만 여전히 포차를 이끄는 일곱 마리 말과 그 옆의 주인 없는 군마에는 오랜 의식의 상징이 담겨 있다. 그 이미지에는 특별하고 전례가 없었으며 복제할 수 없는, 그 고통 받는 인간을 기리는 새로운 노래가 담겨 있다. 하지만 엄숙하고 신비한 인간의 고통뿐 아니라 부정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원인’의 성스러운 암시도 담겨 있다. 그렇지 않다면 장례식의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80p

4. 동양과 서양의 분리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에서 개인은 어디 있는지 묻고 싶다. 사실 그런 세계에는 개인적 인생 같은 것은 없었고, 그저 만물을 지배하는 거대한 우주의 법칙만 있을 뿐이다. 이 법칙을 이집트어로는 마트(Maat), 수메르어로는 메(Me), 중국어로는 도(道), 산스크리트어로는 다르마(Dhama)라고 한다. 거기에는 개인의 선택, 의지, 심지어 생각도 없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일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라고 잠시 자문하는 일이 없다. 태생이 그의 미래와 생각, 행동을 결정한다. 여기서 내가 가장 강조하고 하는 바는, 사회적으로 명백한 우주의 질서라는 이 초기 청동기의 개념은 지금까지 동양에선 어떤 식으로든 중요하다. 88p

우선 모든 저서에서 개인의 완전성을 획득하는 심리적 과정을 ‘개성화(individuation)’라고 표현했던 스위스 심리학자 카를 G.융의 말을 인용해보자. 그는 누구나 평생 사회로부터 특정한 사회적 역할의 수행을 강요받는다고 지적했다. 이 세상에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끊임없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데, 융은 이 역할을 ‘페르소나’(personae)라고 했다. 이 단어는 ‘가면, 거짓 얼굴’을 뜻하는 라틴어 ‘persona’에서 유래한 것이다. 89p

이는 모든 사람에게-위대한 성직자와 현인에게도-강요된 동양의 이상과 정반대된다. 동양에서는 누구나 사회적 지위에 따른 일정한 가면이나 역할과 전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규정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면서 바다에 떨어지는 빗물처럼 자기 자신을 철저히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서구 유럽에서는 전형적으로 개개인에게는 운명과 역할이 내재되어 있고 살아가면서 그 ‘의미’와 ‘완성’을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동양은 사람이 아니라 확립된 사회질서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즉 유일하고 창조적인 개인-동양에서는 이를 위협으로 여겼다-이 아니라, 사회적 원형과의 동일시를 통한 복종과 개인적 삶의 모든 욕망에 대한 내적 억제에 관심의 초점을 두었던 것이다. 교육은 주입 혹은 요즘 표현대로 세뇌였다. 91p

레반트에서는 복종, 즉(다소 변덕스럽기는 하지만) 신의 의지에 대한 인간의 복종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의 계시는 인간이 읽고 숭배하며 절대로 비판하지 않고서 그냥 받아들이고 복종해야 하는 책의 주요한 사상이다. 성경을 모르거나 거부하는 이들은 그 창조주로부터 추방당한다. 크고 작은 수많은 국가 혹은 대륙은 사실 신을 믿지 않는다. 이들 지역에서 발생한 모든 주요 종교-조로아스터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지배적 사상은 지상에 신의 말씀은 받은 민족, 하나의 전통을 지닌 성스러운 민족은 하나뿐이고, 그 민족은 역사적 집단이라는 것이었다. 즉 이들은 초기 신화처럼 자연스러운 우주적 무리가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성스럽고 때로는 가혹할 정도로 잔인한 법을 지닌 예외적인 사회다. 따라서 레반트의 완전한 영웅은 한 개인이 아니라 신의 사랑을 받은 선택받은 민족이나 교회이며, 그 속의 개개인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기독교인은 세례를 받은 기독교도라는 점에서 축복받았고, 유대인은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신비 덕에 야훼와 성약을 맺었다고 기억된다.
그리고 이 세상의 마지막 날, 성약에 충실한 자-기독교에서는 신의 자비를 받고 죽은 세례받은 자-만이 신 앞에 부활해 성서의 거대한 짐승들의 고기를 먹는 영원한 낙원의 식탁에 참석할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거대한 금수 고기를 먹는 천국의 식사를 참석할 것이다. 유럽은 이러한 레반트의 공공 개념을 개인의 가치에 대한 그리스와 로바, 켈트, 게르만 고유의 생각에 동화시키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그 확실한 증거가 내세에서 영혼이 감수해야 하는 심판과 관련된 두가지 천주교 교리다. 첫째는 각자 영원한 보상이나 벌을 받게 되는 죽음 직후의 ‘개별적 심판’이고 둘째는 ‘일반적 심판’으로, 이때에는 말세에 지금까지 지상에서 살고 죽었던 모든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공개재판을 받아 하느님의 섭리가 결국에는 정의로웠음을 보여준다. P100

동양에선 각자 자신과 다른 모든 이가 사실은 똑 같은 자아인 우주적 존재의 본질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때문에 동양종교의 목적은 보통 살아있는 동안 자신과 절대적 존재의 동일성을 경험하고 깨닫는 것이다. 반면 성경을 따르는 서양에서는 내면의 자아가 아닌, 저 멀리에 있는 조물주, 절대적인 타자와 관계를 맺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102p

5. 동양과 서양의 종교적 대립

그런데 살아 있는 신화적 상징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삶의 에너지를 깨워 그리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에너지를 방출하고 에너지를 관리하는 징후로, 사람들을 가르칠 뿐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이게 하면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는 인생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사회 집단의 목적에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사회 집단이 제공하는 상징은 효과가 없고, 효과적인 상징은 그 사회 집단의 것이 아닐 때, 사람들은 분열되고 혼란을 겪으며 상징의 병리학이라고 할만한 것에 직면하게 된다. 112p

서양에는 그런 가르침이 있는가? 기독교에는 없다. 성서에 따르면 하느님이 이 세상을 만들었고 하느님이 인간을 만들었으며, 하느님과 피조물은 어떤 의미에서도 같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사실 합일에 대한 가르침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관점에서 보면 철저한 이단이다. 120p

태어난 것에는 죽음이 확실하고 죽은 것에는 태어남이 확실하다. 피할 수 없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라. 법의 수호가 의무인 귀족으로서 이 정당한 전쟁을 거부하면 너는 덕과 명예 모두를 잃을 것이니라.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의무의 행동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옳다. 그 다음 그 결실에 대한 모든 욕망과 두려움을 버리고 너의 의무를 행하라. 125p

내 많은 교수 친구들은 요즘 학생들에게 교사가 아니라 구루를 찾으라고 권하기 시작했다. 동양에서 구루는 제자의 도덕적 인생을 책임지며, 제자는 구루와 동일시하고 가능하면 구루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우리 학생들에겐 그런 제자의 첫째 미덕이 없다. 그 첫째 미덕이란 존경하는 구루에 대한 의심 없는 믿음, ‘완벽한 믿음’을 말한다. 한편 비판과 책임감 있는 판단은 전통적으로 학생들이 개발하기를 원했던 것이고, 대부분 성공했다. 사실 현재의 수확에서 더 나아가 기저귀를 갓 뗀 학생들이 교사를 가르칠 수 있는 정도가 되면 더욱 좋은 일이다. 나는 학생들이 동양에서 배울 수 있는 것, 많은 사람들이 본받으려 하는 것을 적극 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동양의 가르침을 들여다본다면 자기 자신으로 가는 신비한 내면의 길에 대한 무언가를 배울 것이라고 그리고 현실적 삶을 잊지않은 채 그 가르침을 따른다면 인생과 문학, 예술을 훨씬 깊이 있고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실행할 수 있으리라고만 말할 것이다. 127p

이미지의 의미는 말 너머, 말이 정의하는 의미 너머 직관적으로 파악된다. 이미지가 당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말은 당신이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뿐이다. 결국 이미지와 멀어진다. 춤을 출 때에는 그 의미를 물어보지 말고 즐겨라. 자신의 의미를 묻지 않고 자신을 즐겨라. 최소한 건강할 때만이라도 자신을 즐겨라. 128p

삶의 경이와 신비를 상징하는 최고신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인생의 잔인한 속성과 그 영광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가르침이다. 세상이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었는지, 자신들이 고통이나 시간 인생 없는 세상을 만들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혹은 ‘우선 사회를 바로 잡고, 그 다음 나 자신을 바로 잡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들 역시 많다-은 신의 평화라는 대저택의 정문조차 넘지 못한다. 어느 사회든 다 사악하고 불행하며 불공평하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따라서 정말로 이 세상을 구원하고 싶다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즐거운 슬픔과 슬픈 즐거움이라는 삶의 지식으로 사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사는 법을 가르칠 수 없다. 그것이 요가 신의 성소 입구 위에서 내려다보는 무시무시한 기르티무카, 즉 ‘영광의 얼굴’의 의미다. 그 영광의 얼굴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겸손하게 지나가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이 신과 여신을 알 수 없다. 131p

6. 동양 예술의 영감

요가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어있는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깨어 있는 의식이 의식 그 자체의 근원에 ‘참여’하거나 ‘결합’하는 것이다. 그것은 깨어 있는 세계에서든 꿈의 세계에서든 어떤 대상에 집중하거나 어떤 주체에 얽매이지 않고 완벽하게 불특정하고 한정되지 않는 의식을 말한다. 모든 단어가 어떤 대상이나 대상과 관련된 생각은 혹은 개념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 네 번재 상태의 경험을 가리킬 단어는 없다. 심지어 ‘침묵’이나 ‘허공’같은 단어조차 소리나 대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즉 소리가 없거나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반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소리를 잠재적으로 품고 있는 소리 이전의 근본적인 침묵 그리고 잠재적으로 모든 시공간을 품고 있는 삼라만상이전의 공간이다. 그 어떤 단어로도 사방에, 우리 내면에 있는 침묵을 나타낼 수 없으며 이 침묵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깨어 있을 때나, 꿈을 꿀때나, 혹은 꿈도 없는 잠을 잘 때나 만물을 통해 울려 퍼지는 침묵이다. 음이라는 음절을 둘러싸고 뒷받침하며 가득 채우면서.
도시의 소리를 들어보라. 옆집 사람의 목소리나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러기 소리를 들어보라. 어떤 소리나 침묵을 해석하지 말고 들어보라. 그러면 아나하타는 존재의 근본인 공간을 들을 것이고, 존재의 몸인 세계는 존재의 근원인 침묵과 음을 들을 것이다. 나아가 일단 이 소리가 자기 마음과 모든 생명의 소리와 존재로 ‘들리면’, 그는 고요하고 평화로워진다. 평화가 여기에, 저기에, 사방에 있기에 더 이상 평화를 구할 필요가 없다. 동양 예술의 숭고한 기능은 진정 그러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혹은 서양 시인 게르하르트 카우프만(Gerhart Kauptmann)이 진정한 시의 목적에 대해 말한 것처럼 “말씀을 말 뒤에서 울려 퍼져 들리게 하는 것”이다. 또한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dhart)가 신학적 용어로 “신 안에서는 벼룩도 천사 중의 천사보다 더 숭고하다. 신 안의 만물은 모두 똑같다. 만물은 곧 신이다.”라고 한 설교 역시 위와 똑 같은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네 번째 차크라의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아나하타의 경험이며, 이 네 번째 차크라에서 만물은 더 이상자신의 진실을 감추지 않고 “지각의 문이 깨끗해지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무한한 것으로 드러나리라”라는 시에서 블레이크가 말한 경이를 경험할 수 있다. 141p

당신이 지금 이 세상에, 이 자리에, 이 특별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의 궁극적인 깨달음을 위해서는 바로 그러한 의지가 필요하다. 그 놀라운 삶의 의지 때문에 당신은 이 자리에 존재한다. 이때 ‘당신’이란 지금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에 존재했고 지금도 당신의 심장을 뛰고 폐를 숨 쉬게 하며 당신을 위해 모든 복잡한 삶을 실천하는 ‘당신’을 가리킨다. 용기를 잃지 말라! 항상 용기를 갖고 언제나 자신의 유희를 즐겨라! 물론 경기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승패 결과를 떠나 가장 재미있게 경기를 즐긴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위험해도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제일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단순 작업만 하는 예술가는 만족하지 못한다. 152~153p

7. 선

그렇다면 세간의 의식은 자아를 그렇게 즉 깨지기 쉬운 이 유리 몸에 갇힌 것으로 자아를 구분하고 경험할 수밖에 없다. 반면 출세간의 의식에서는 그러한 경계가 없다. 결국 모든 신비한 동양적 가르침의 주된 목적은 자기 동일시의 초점을 소위 이 전구 알에서 그 빛으로, 언젠가는 죽는 이 육체란 수레에 불과하다는 의식으로 바꾸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도의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 적힌 저 유명한 격언, 즉 “네가 바로 그것이다.”, “네 자신은 모든 존재, 모든 의식, 모든 행복의 구분되지 않은 보편적 근거다”라는 의미다. 160~161p

깨달음을 가르치지도, 가르칠 수도 없었다. 따라서 불교는 길(道)일 뿐이다. 이는 이 세간이라는 차안(此岸)에서 개념과 생각의 그물 너머, 침묵 너머 절대적 침묵을 깨닫는 피안(彼岸)으로 가는 수레라 한다. 164p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다’는 ‘불어 끄다’라는 뜻으로, 부처에게는 자아의 소멸을 가리킨다. 이와 함께 쾌락에 대한 욕망, 죽음에 대한 공포, 사회가 부여한 의무감도 사라질 것이다. 해탈한 자는 외적인 권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행하기 때문이다.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모든 고통 받는 존재에 대한 자비심으로 행한다. 세간을 경험과 지식을 지닌 깨달은 자는 싯다르카가 깨달음을 얻은 후 여든 두 살까지 가르쳤던 법계(法界) 안에서 움직인다. 166p

아직도 더 높은 수준의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 구분이 없다는 깨달음이다. 이를 그물처럼 넓게 펼쳐진 우주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물코마다 보석이 있고, 개개 보석은 그 안에 다른 보석들을 모두 비출 뿐 아니라 다른 보석들 안에는 다른 개개 보석들이 비추어진다. 혹은 꽃다발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발 속에 있는 꽃은 다른 꽃의 ‘원인’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꽃이 다발을 이룬다. 177p

가난과 고통, 학대, 불의, 이 속세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이곳에 존재한다. 그 모든 것들 것 끝없는 세상 여기저기에 항상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다. 그것은 열반이다. 그리고 니르바다는 욕망과 두려움 없이 있는 그대로 경험할 때 이 세상 그 자체다. 열반은 여기에 있다! 열반은 여기에 있다.! 178p

8. 사랑의 신화

우리는 사랑의 결합이라는 경험을 통해 모든 존재의 근원인 창조행위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인도의 관점에 따르면 이 지상에서 시공간적으로 우리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우리가 하나의 존재, 하나의 씨앗이라는 진리의 이차적이고 현혹되기 쉬운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진리-자기 자신과 자신의 한계를 초월한-를 사랑의 희열 속에서 깨닫고 경험한다. 183p

작가의 임무는 관찰하고 정확히 이름을 붙여야 하는 것이다. 상처를 주고 죽일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작가가 묘사할 때 이름을 붙여야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인생에 완벽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해도 사랑스럽다기보다는 지겨울지도 모른다. 완벽함에는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불완전함 때문이다. 작가는 이 불완전성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말을 찾고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그 단어를 보내야 한다. 단 향기, 사랑의 향기를 담아서 사방으로 보내야 한다. 과녁,그 불완전성이야 말로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자 그 삶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203p

9. 전쟁과 평화의 신

지구상에 있는 문맹 민족들의 원시 신화로 관심을 돌려보면, 그 신화들은 예외 없이 첫 번째 것, 삶의 끔찍한 전제조건을 긍정하는 것이다. 전 세계 어느 곳에도 갈등을 거부하고 경멸하거나 전쟁을 절대악으로 묘사하는 원 신화는 없다. 208p

그노시스교의 <도마의 복음> 중 마지막 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그에게 “하느님의 왕국은 언제 올 것인가?”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기대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여기 있다’거나 ‘저기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하느님 아버지의 왕국은 온 땅에 뻗어 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229p

요약해서 말해보자. 처음부터 전쟁은 필연적이고 선할 뿐 아니라 문명화된 인류의 보편적이고 가장 유쾌한 형태의 사회 행동이었으며 전쟁이란 왕의 평범한 즐거움이자 의무였다. 이렇게 생각하면 전쟁을 하지도, 전쟁에 대비하지도 않는 왕은 바보이고 ‘종이호랑이’일 것이다. 239p

10. 정신분열증 – 내면으로의 여행

정신분열증의 일반적인 패턴을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역의 사회적 질서와 환경을 위반하거나 벗어난다. 둘째, 내면으로 오래도록 깊숙이 숨어들고, 곧이어 점점 더 깊이 물러나 내면의 정신 밑바닥까지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서 무서운 경험을 하면서 몇 차례 혼동을 겪고 새로운 용기를 주는 일종의 구심점을 만나며 마지막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는 신화적 영웅의 일반적인 여행 공식이기도 하다. 나는 이 여행을 1)분리 2) 입문 3)회귀로 표현했다. 영웅은 평범한 일상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그 다음 그곳에서 엄청난 세력을 만나고, 결국에는 승리를 차지한다. 그리고는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힘을 얻어 이 신비한 여행에서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이것이 신화의 패턴이자, 이 정신적 환상의 패턴이다. 244~245p

신화의 기능
첫째는 신비적 기능이라는 것이다. 이는 드넓은 우주에 대한 경외감과 감사의 마음을 일깨우고 간직하게 하여, 우주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거기에 참여하고 있음을 인식하도록 한다. 우주라는 존재의 신비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심오한 신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시간의 지식, 신화를 이야기하는 민족의 행동과학영역과 일치할 우주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요즘같이 종교를 열광적으로 추구하는 시대에 신도가 없는 이유는 분명 대부분 여기 있을 것이다. 교회는 존재한 적도 존재할 리도 없으며 어떤 경우든 오늘날 지구상 어떤 곳이 아닌 미지의 땅으로 들어가 평화를 찾으라 한다. 그러한 신화적 선물은 경미한 정신분열증 환자에게나 효과를 발휘한다.
셋째는 사회의 구체적이고 일정한 도덕적 규범을 인정하고 지지하며 각인시키는 것이다.
넷째는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균형을 이루면서 예측할 수 있는 삶의 과정을 거치도록 단계적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256~257p

신화는 어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신화의 첫번째 기능은 미성숙한 영혼이 세상에 맞설 준비를 하고 성숙해지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가 사람을 이 세상에서 혹은 천국이나 상상 속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느냐 아니냐, 라는 의문이 더 적절하다. 따라서 신화의 다음 기능은 준비를 갖춘 청소년이 세상에 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두 번째 자궁인 신화를 떠나 동양에서 말하는 것처럼 ‘두 번째 탄생’ 즉 어린 시절을 뒤로 하고 세상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는 능력 있는 성인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258p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을 깨달은 정신분열증 환자는 사실 요가수련자와 성인들이 누리려 했떤 행복의 바다 깊은 곳을 우연히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요가 수련자와 성인들은 그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데, 환자는 익사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262p

요약하자면 신화의 영웅, 샤면, 신비주의자, 정신분열증 환자의 내면 여행은 원칙적으로 똑같다. 귀환을 하거나 병이 나으면 이는 부활로 경험된다. 즉 ‘두 번 태어난’ 자아의 탄생으로 더 이상 낮은 세계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커다란 자아의 반영이라 하고 그 적절한 기능은 원형적 본능체계의 에너지를 현실의 시공간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두 번 태어난 사람은 더 이상 자연도, 자연의 산물인 사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회 역시 무서운 대상이며 사실 무섭지 않다면 존재할 수도, 존속할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자아는 이 모든 것돠 평화롭게 하나가 된다.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후의 삶은 더욱 풍요롭고 행복해진다. 언젠가 다시 여행을 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든 난파하지 않고 돌아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미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보게 될 광경과 마주칠지도 모를 세력을 알아야 한다. 그 에너지를 인식하고 진압해 흡수할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274p

11. 달 위를 걷다 – 외면의 여행

칸트의 말처럼 시간과 공간은 ‘감각의 선험 형식’, 즉 태어나기 전부터 몸과 모든 감각이 은연중에 작용하게 될 영역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경험과 행동의 선결조건이다. 이러한 선결조건은 ‘저 멀리’ 있어서 하나하나 관찰해서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그 법칙이 있고, 이미 우주를 마음에 얼싸안고 있다. 시인 릴케의 말처럼 “세상은 넓으나 우리 안에선 바다처럼 깊다” 인간의 내면에는 질서 있는 법칙이 있다. 우리는 신비한 존재다. 우주의 경이를 구하다보면 우주와 인간의 경이를 알 수 있다. 외면의 여행인 달 착륙은 우리 내면을 향한 여행이었다. 시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에서 그러하다. 달 여행의 실현과 방송이라는 가시적 현실은 새로운 정신적 시대로 인간 의식을 바꾸고 깊고 넓게 했다. 283p

12. 글을 맺으며 : 더 이상의 한계는 없다.

신화는 일종의 시다. 297p

사람들은 각기 여러 신들을 섬기면서 이 신에게 제례를 올리라, 저 신에게 제례를 올리라 한다. 그러나 모두 하나의 창조자로부터 나온 창조물일 뿐이다…… 298p

신은 (나와) 다르고 또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고, 자신과 신을 다르게 생각하고 숭배하는 사람은 그 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니, 그런 자라면 신들의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짐승들이 사람을 따르고 섬기듯,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신을 따르고 심기는 것이다. 짐승이 한 마리만 없어져도 인간은 불쾌하게 여기는데, 하물며 여러 마리가 없어진다면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신들은 인간이 그 지혜를 아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299p

사실 초기 그노시스교의 <도마 복음>에도 똑같이 젹혔다.
“내 입으로 마시는 자는 누구든 내가 될 것이고 나는 그가 될 것이며, 감추어진 것은 그에게 드러날 것이다. 나는 삼라만상이요, 삼라만상은 내게서 나오며, 나와 하나가 된다. 나무를 갈라보아라. 내가 거기에 있다. 돌을 들어보아라. 그러면 내가 거기 있으리라.” 300p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이 육체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다. 영생은 천국의 어느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이땅에, 지금 존재한다. 303p

고(故) 토마스 머턴 신부
“하지만 그러한 종교를 좀더 제대로 이해하고 종교적 믿음과 실천의 완성인 경험이 상징 안에 선명하게 드러난 것을 본 사람은 서로 다른 종교의 상징이 추상적으로 공식화된 교리보다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상징은 단순히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우리의 의식을 깨워 생의 내적 의미와 실재 자체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구조가 담겨 있다. 진정한 상징은 주변의 다른 곳이 아니라 원의 중심으로 데려간다. 인간은 상징을 통해 자신의 깊은 자아, 타인, 신과 사랑을 나누며 의식적으로 교섭한다.” “신은 죽었다는 말은 사실 상징이 죽었다는 뜻이다.” 304p

신화와 종교는 거대한 시라고 인식할 때, 신화와 종교는 사물과 사건을 통해 ‘존재’나 ‘영원’의 편재를 가리킨다. 이러한 기능을 하는 모든 신화와 모든 위대한 시 그리고 모든 신비한 전통은 일치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환상이 문명에 효력을 발휘하는 곳에서는 그 안의 모든 사물과 모든 생명이 살아있다. 따라서 신화가 현대 생활에 생명을 준다면 신화는 제일 먼저 무서운 동시에 매력적이기도 한 인간과 우주의 경이를 향해 지각의 문을 깨끗이 해주어야 한다. 반면 이와 반대로 계시를 읽는 신학자는 과거를 가리키고, 몽상가들은 계시가 꿈꾸는 미래의 약속이라고만 주장한다. 때문에 정신의 산물인 신화는 거꾸로 정신을 가리킨다. 사실 진지하며 내면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그 의미를 다시 발견할 것이다. 305p

그렇다면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주관적인 의미’에서 볼 때, 오래되고 영원한 신화, 기억하고 있는 과거나 상상한 미래가 아니라 ‘지금’에 대해 시적으로 새로워진 신화다. 즉 ‘민족들’의 아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 깨어 있는 개인들, 이 아름다운 별에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개개인이 아니라 평등한 전체적 정신의 중심, 모든이와 함께 나름의 길을 가고 한계가 없는 개인에게 말을 거는 신화다. 313p

3. 내가 저자라면

조셉 캠벨의 저작은 이번이 네 번째 이다. 여러 저작들을 읽어 본 후에 접한 책이라 그런지 모르지만, 저자의 책들 중에서 가장 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던졌던 질문 중에 하나가 “그래서 신화가 도대체 어떤 의미와 기능을 한다는 거야?”라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명쾌한 해석이나 단호한 해답을 내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이 책에서는 신화의 기능에 대해서 명쾌한 답변을 해주고 있다.

“신화의 기능은 첫째는 신비적 기능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시간의 지식, 신화를 이야기하는 민족의 행동과학 영역과 일치할 우주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셋째는 사회의 구체적이고 일정한 도덕적 규범을 인정하고 지지하며 각인시키는 것이다. 넷째는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균형을 이루면서 예측할 수 있는 삶의 과정을 거치도록 단계적으로 인도하는 것이다.”<신화와 함께 하는 삶> 256~257p 요약

또한 책을 번역해서 소개한 이경덕씨의 서문을 통해서 미궁과 같은 신화(神話)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언지에 대해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미로는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길이 다르지만, 미궁은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길이 동일하다. 다만 우리가 신화라는 미궁을 거슬러 올라가서 나올 때는 ‘다른 사람’이 될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신화라는 테마를 통해 우리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으며, 새로운 의식의 신전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1958년~1971년까지 뉴욕 쿠퍼 재단 포럼의 그레이트 홀에서 스물 다섯 차례에 걸쳐 있었던 신화 강좌 중 열세 차례의 강연을 선별해 새로 구성했다. 또한 강연제목을 책의 목차로 삼은 것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대한 전체적 구성에 대해 간략하게 논한다면,
첫 장(章) ‘신화에 미친 과학의 영향’ ~ 다섯 번째 장(章) ‘동양과 서양의 종교적 대립’까지 일정한 흐름을 갖고 읽을 수 있었으나, 그 이후부터 진행되었던 여섯번째 장 ‘동양예술의 영감~ 열한 번째 장 ‘달 위를 걷다-내면으로의 여행’까지는 단편적인 나열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여덟 번째 장 ‘사랑의 신화’ ~ 아홉 번째 장 ‘전쟁과 평화의 신화’는 그 분류 기준이 애매모호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강연을 편집하여 만든 다른 책들과 달리 이 책은 열 두 번째 장에서 전체적인 결론을 정리를 해 줘서 책을 마무리하기에 좋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책의 결론을 통해서 밝힌 저자의 새로운 신화의 원형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변을 주고 있지 않다.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주관적인 의미’에서 볼 때, 오래되고 영원한 신화, 기억하고 있는 과거나 상상한 미래가 아니라 ‘지금’에 대해 시적으로 새로워진 신화다. 즉 ‘민족들’의 아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 깨어 있는 개인들, 이 아름다운 별에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개개인이 아니라 평등한 전체적 정신의 중심, 모든 이와 함께 나름의 길을 가고 한계가 없는 개인에게 말을 거는 신화다. 313p

이 책을 통해 그가 꿈꾸는 새로운 신화의 원형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 신화의 근본이 되는 사상적 원류(原流)는 직감적으로 알 듯 하다. 앞의 글‘저자에 대하여’에서도 지적했던 것과 같이 그는 신화(神話)로의 산책을 통해 철저하게 상징과 비유를 죽이고 있다. 그가 꿈꾸는 새로운 신화의 원형은 신비주의(神秘主義)라는 철학에 근간하고 있다. 인간과 신의 이분법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代案) 사상으로 신비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의 신화여행을 통해 언젠가는 인류의 대안사상이 될 신비주의(神秘主義)사상에 대해 자신의 언어로 정리하고 싶은 강한 욕망을 느꼈다. 저자가 신화로의 꿈을 꾸었다면, 나는 신비주의로의 여행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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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3 11:18:25 *.36.210.11
니르바다는 욕망과 두려움 없이 있는 그대로 경험할 때 이 세상 그 자체다. 열반은 여기에 있다! 열반은 여기에 있다.! 178p

시인 릴케의 말처럼 “세상은 넓으나 우리 안에선 바다처럼 깊다” 인간의 내면에는 질서 있는 법칙이 있다. 우리는 신비한 존재다. 우주의 경이를 구하다보면 우주와 인간의 경이를 알 수 있다. 외면의 여행인 달 착륙은 우리 내면을 향한 여행이었다. 시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에서 그러하다. 달 여행의 실현과 방송이라는 가시적 현실은 새로운 정신적 시대로 인간 의식을 바꾸고 깊고 넓게 했다. 283p

더 이상의 한계는 없다.

신화는 일종의 시다. 297p

사람들은 각기 여러 신들을 섬기면서 이 신에게 제례를 올리라, 저 신에게 제례를 올리라 한다. 그러나 모두 하나의 창조자로부터 나온 창조물일 뿐이다…… 298p

신은 (나와) 다르고 또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고, 자신과 신을 다르게 생각하고 숭배하는 사람은 그 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니, 그런 자라면 신들의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짐승들이 사람을 따르고 섬기듯,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신을 따르고 섬기는 것이다. 짐승이 한 마리만 없어져도 인간은 불쾌하게 여기는데, 하물며 여러 마리가 없어진다면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신들은 인간이 그 지혜를 아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299p

사실 초기 그노시스교의 <도마 복음>에도 똑같이 적혔다.
“내 입으로 마시는 자는 누구든 내가 될 것이고 나는 그가 될 것이며, 감추어진 것은 그에게 드러날 것이다. 나는 삼라만상이요, 삼라만상은 내게서 나오며, 나와 하나가 된다. 나무를 갈라보아라. 내가 거기에 있다. 돌을 들어보아라. 그러면 내가 거기 있으리라.” 300p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이 육체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다. 영생은 천국의 어느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이땅에, 지금 존재한다. 303p

고(故) 토마스 머턴 신부
“하지만 그러한 종교를 좀더 제대로 이해하고 종교적 믿음과 실천의 완성인 경험이 상징 안에 선명하게 드러난 것을 본 사람은 서로 다른 종교의 상징이 추상적으로 공식화된 교리보다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상징은 단순히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우리의 의식을 깨워 생의 내적 의미와 실재 자체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구조가 담겨 있다. 진정한 상징은 주변의 다른 곳이 아니라 원의 중심으로 데려간다. 인간은 상징을 통해 자신의 깊은 자아, 타인, 신과 사랑을 나누며 의식적으로 교섭한다.” “신은 죽었다는 말은 사실 상징이 죽었다는 뜻이다.” 304p

신화와 종교는 거대한 시라고 인식할 때, 신화와 종교는 사물과 사건을 통해 ‘존재’나 ‘영원’의 편재를 가리킨다. 이러한 기능을 하는 모든 신화와 모든 위대한 시 그리고 모든 신비한 전통은 일치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환상이 문명에 효력을 발휘하는 곳에서는 그 안의 모든 사물과 모든 생명이 살아있다. 따라서 신화가 현대 생활에 생명을 준다면 신화는 제일 먼저 무서운 동시에 매력적이기도 한 인간과 우주의 경이를 향해 지각의 문을 깨끗이 해주어야 한다. 반면 이와 반대로 계시를 읽는 신학자는 과거를 가리키고, 몽상가들은 계시가 꿈꾸는 미래의 약속이라고만 주장한다. 때문에 정신의 산물인 신화는 거꾸로 정신을 가리킨다. 사실 진지하며 내면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그 의미를 다시 발견할 것이다. 305p

그렇다면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주관적인 의미’에서 볼 때, 오래되고 영원한 신화, 기억하고 있는 과거나 상상한 미래가 아니라 ‘지금’에 대해 시적으로 새로워진 신화다. 즉 ‘민족들’의 아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 깨어 있는 개인들, 이 아름다운 별에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개개인이 아니라 평등한 전체적 정신의 중심, 모든이와 함께 나름의 길을 가고 한계가 없는 개인에게 말을 거는 신화다. 313p

“신화의 기능은 첫째는 신비적 기능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시간의 지식, 신화를 이야기하는 민족의 행동과학 영역과 일치할 우주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셋째는 사회의 구체적이고 일정한 도덕적 규범을 인정하고 지지하며 각인시키는 것이다. 넷째는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균형을 이루면서 예측할 수 있는 삶의 과정을 거치도록 단계적으로 인도하는 것이다.”<신화와 함께 하는 삶> 256~257p 요약


그대의 리뷰를 읽으며 또 하나의 그대- 새로운 신화의 원형, 신비주의 철학-를 봅니다. 얼마나 애쓰며 참여하고 있는 지 어떻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려고 하는 지 그대의 노력만큼이나 글이 빛나게 될 것임을 믿습니다. 그날을 위하여!

그리고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인 기업가로 나서며 공부하기 10년, 이제부터 정말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졌어." 라고요.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쫓아 가야 하는 길일까요. 아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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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4.23 18:03:14 *.244.220.254
후후후 누님께서 이런 댓글을~ 감사드립니다. 꾸벅!
써니누님의 필체를 보면, 변경연의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제가 언제쯤 정말 제대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까요?
누님 말씀대로 그 날을 위해 걸어가겠습니다. 함께 가실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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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9 신화와 함께 하는 삶-조셉 캠벨 [1] [2] 유인창 2008.04.20 2300
1398 [03] 신화의 이미지 - 조셉캠벨 최지환 2008.04.20 2327
1397 열하일기1(미완성 정리) [1] 김지현 2008.04.16 2826
1396 [50] 황진이, 선악과를 말하다/ 황진이ㆍ문화영 [3] 써니 2008.04.16 3071
1395 나는 무엇을 잘 할 수 있는가 [6] 김나경 2008.04.16 2677
1394 6. 시인은 노래 했노니 이것이 험로라고 [5] 서지희 2008.04.14 2207
1393 6. 시인은 노래 했거니 이것이 험로라고 [1] 서지희 2008.04.14 18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