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이은미
  • 조회 수 1901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8년 4월 21일 10시 52분 등록
1.저자소개
안녕하세요? 조셉캠벨입니다. 지난주에 이어 다시 만나게 되어 참 기쁩니다. 사실 나를 소개한다고 여러분 앞에 섰지만 특별히 나에 대해 말할게 많지는 않아요, 그저 내가 생각하고 있는것, 나를 평생동안 몰두하게 만들었던 신화 이야기를 빼고는 무엇도 없지요. 그래서 신화를 바탕으로 삶에 대한 몇가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자난번에는 나의 어린시절과 내가 신화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 신화의 상징적 의미, 공부하는 방법,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는 나에 대한 평가에 대해 얘기했었지요. 오늘은 결혼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현대문명에서 신화가 사라짐으로 나타나는 우려들에 대해 말할까 해요.
누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방법은 그가 어디에서 나고 어떻게 자랐는지를 아는 것도 되겠지만 무슨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가 더욱 중요할 테니까요.

그럼 우선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요. 결혼은 책임입니다. 요즘 현대 사회는 결혼에 대해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 보입니다.
나는 1938년에 진 애드먼을 만나 사랑하고 결혼했어요. 그녀는 나의 아주 좋은 친구입니다. 사실 내가 평생토록 신화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힘이 큽니다. 그녀는 내가 가는 어느 곳이든 함께했고, 내가 쓴 원고의 첫번째 독자가 되어 주었으며 책을 쓸때마다 언제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고 비판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지요. 이 자리를 빌어 그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결혼은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오늘날 급격히 늘고 있는 이혼율은 결혼을 단순히 사회적 계약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영적인 수련입니다. 결혼은 경험이 지니는 또 하나의 신화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쉽게 결혼이 깨지는 것은 진정한 결혼이라 할 수 없어요.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라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진 자아’입니다. 결혼은 책임임을 잊지 마세요. 두 사람이 관계 속에서 하나가 될때 평생 함께하는 아주 근사한 파트너이자 친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 세상의 질서와 복종을 배우는 어린시절에는 부모에게 기대어 살게 되다가 이 세상을 내것처럼 사는 시절이 지나면, 이윽고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가 오고 인간은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닌 최종적인 해방이라 할 수 있지요. 살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을 먹어야 하잖아요. 오늘 아침의 식탁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오늘 식탁에 올려진 봄나물의 어제는 싱싱한 초록잎을 자랑하고 바람에도 춤을 추었지요. 또 딸기는 어떤가요? 단내가 온 사방에 진동하고 그 탐스러움은 보는 이에게 설레임을 주었고, 생선 한 마리는 그 푸른 바다를 힘차게 요동치며 은빛을 자랑했지요. 어제의 생명이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에너지를 줍니다. 그러니 ‘죽음’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지요. 삶의 빛은 미처 준비하지 못한채 가라앉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내면으로의 여행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날 닥치는 죽음으로 가라앉을때 신화적 이미지가 나타내는, 내면에서 들리는 우주의 목소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빛은 칠흑같은 암흑에서 나오는 법이니까요.

마지막으로 현대사회에 신화적 의례가 전혀 행해지고 있지 않아 걱정입니다. 고대의 의례가 지니던 중요한 역할은 개인을 부족의 한 구성원으로, 한 지역의 구성원으로 통합시켜 주었지만, 현대문명은 개인을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분리시키므로 결국 나 먼저, 개인 먼저가 되어 버렸어요. 이 사회에 다시 신화적 의례를 재현시켜야 합니다.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 주므로 우리 삶의 질서를 옳바르게 바로잡아주기 때문이지요. 삶과 우주에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며, 가치 체계의 화신이지요. 삶이란 배움이며 깨달음의 과정입니다. 여러분이 충만된 기쁨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영성을 발견해 주길 바랍니다


2.내 마음에 무찔러 들어온 글귀
<추천의 글>
“신화가 무너졌다”라는 말에서 보듯이 우리는 신화를 거짓 또는 허완된것이라란 의미로 사용한다. 그건 말도 안되는 엤날 이야기라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미궁이란 길이 하나밖에 없다. 외길이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미궁은 나선이 그려진 원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좌우를 살필 필요없이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중심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미궁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면 그대로 뒤로 돌아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오면 된다.

다시 미궁으로 들어가자. 미궁은 들어갈때와 나올 때 같은 길을 걸어야 하지만 그 길을 걸은 사람에게는 들어갈 때와 나올때의 길이 다르다. 다르게 표현하면 미궁의 중심을 향해 걸어갈 때와 중심에서 나올 때 서로 다른 사람이 된다. 깨닫기 전의 사람과 깨달은 후의 사람은 다를수 빢에 없다.

신화는 미궁이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미궁으로 안내하고 보물로 얻도록 해준다. ,,,신화란 자기를 찾고 이해하는 일이며 혼잡한 세상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살게 해주는 힘이다

상징화된 ‘정신의 사실’을 밝히고 분석하며 해석할 뿐 아니라 건강하게 간직할 방법을 개발하고 희미해지는 과거의 오랜 전통이 사라질 때 인류가 내면뿐 아니라 세상의 외적 사실을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심리학자와 비교신학자의 임무는 갈수록 절박해질 것이다.24

마술에 대한 프레이저의 제1법칙은 유유상종, 즉 결과는 그 원인을 닮는다는 것이다. 두번째 접촉은 ‘한때 서로 접촉했던 물건은 더 이상 물리적으로 접축하지 않은 먼 거리에서도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카를G융은 신화와 종교의 이미지는 긍정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목적으로 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 몸의 모든 기관에는 저마다 목적과 동기가 있으며 의식적으로는 통제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융은 신화를 제대로 해석하기만 한다면, 다시 그 내면의 힘을 얻는 수단이 된다고 말했다. 신화는 삶속에서 인식되고 통합되어야 하는 정신의 힘을 그림문자로 말해주고 이 영혼의 힘은 언제나 인간 정신에 보편적이었으며 인간이 수천년의 세월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인류의 지혜를 나타낸다. 27

과학은 그저 이 세상의 ‘실용적인 가설’이며 당장은 지금까지 그러단 모든 관련 사실을 고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궁극적인 체제나 충분한 양의 사실로 충족시킬 의도는 없는가? 절대로 없다. 좀더 지속적인 탐구, 좀더 성장하고자 하는 정신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성장이 지속되는 한 과학은 현대 서구인의 삶의 척도이자 지금도 지키고 있는 모든 약속이 존재한 세상의 척도일 것이다. 다시말해 변화와 새로운 생각, 새로운 물건, 새로운 크기 그리고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세상의 척도인 것이다. ,,,과학의 매력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든, 그것은 진리에 대한 열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30

신화는 인류와 함께 성장해왔다. …신화적사고라는 근본적인 주제는 역사 전반에 그리고 인류가 차지하는 영역 전반에 걸쳐 항상 보편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35

유사시대와 선사시대라는 긴 시간 속에 세계곳곳에서 발생한 모든 신화체계에는 이 두가지 근본적인 깨달음, 누구나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과 사회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상징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의례와 사회를 이루는 힘이었다. 37

영혼의 풍경을 가리키는 에덴동산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중심에서 멀리 내던진 것은 지식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우리는 지식을 통해 사물을 판단하고 영원한 생명대신 선과 악만을 경험한다. 영원한 생명을 알지 못하지만, 벽으로 둘러싸인 동산은 우리 내면에 있고 이미 우리의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신화를 선사시대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영혼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때, 그것이 바로 신화의 의미일 것이다. 43

성서의 교훈은 아이가 부모에게 찾는 의존심과 공포심, 존경 어린 애정 등의 태도를 가르치는 불복종과 처벌에 대한 유아용 동화 수준인 반면, 불교의 가르침은 스스로 책임감을 갖는 성인용 우화와 같다. 46

도살된 동물들과 먹힌 식물은 자발적인 희생자로 여겨진다. 그래서 원한을 품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한갓 일시적인 몸을 ‘망가뜨리고 먹어줌으로써’ 영혼을 해방시켜 준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50

불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최초로 신성하게 생각했던 신이었을 것이다. 불은 반으로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는 속성을 갖고 있다. 불은 지상에서는 유일하게 태양이나 번개처럼 빛을 발한다. 또한 살아있다. 인체의 온기는 삶 자체로 몸이 식으면 생명은 사라진다. 52

벽화의 남자 그림은 모두 똑 같은 옷을 입은 반면, 여자 그림은 완전히 벌거벗은 채 아무 장식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다는 점이 대단히 중요한 듯 하다. 이는 남녀에 대한 심리적 가치, 곧 신화적 가치에 대한 무언가를 가리킨다. 여성은 본래 신화적인 존재이며 생명의 근원이자 생명을 낳는 사라밀 뿐 아니라 마법 같은 손길과 존재로 경험된다. 달의 주기와 일치하는 여성의 신체 변화 역시 신비다. 반면 옷을 갖춰 입은 남자는 권력을 쟁취해 특별하고 제한된 사회적 역할이나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이다.55

원시 사냥꾼들의 신비한 세계도 많은 개념이 있다. 주로 머나먼 지평선과 맞닿은 하늘에 뒤덮인 드넓은 땅에 살고 넓은 초원을 어슬렁거리는 동물계와 자주 만나며 동물을 죽여서 먹고 사는 유목민족은 대부분 호전적이다. 남성들의 사냥기술과 싸움에 대한 용기로 지탱되고 보호받았던 유목민족은 필연적으로 남성적 심리와 남성 지향적 신화 그리고 용맹성에 대한 평가를 중시할 수 밖에 없었다. 59

의례는 단순히 겉으로가 아니라 심도있게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63

신화는 이러한 의례의 버팀목이었으며 의례는 신화의 구체적 수행이었다. 64

집에서 보내는 시기에 모든 기본적인 사회적 각인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사회적 각인은 심리적으로 성숙해지기 전에 벗어나야 하는 의존적인 태도와 관련된다. ,,,원시사회 사춘기의 통과의례와 전 세계 교육의 기능은 항상 부모에게 의존하는 청소년을 책임감있는 성인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65

사회는 완벽하게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 이 살아있는 과정에서 모든 가능성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서로 협력해야 한다. 때문에 교육문제는 상당히 복잡하다. 즉 과거의 패턴을 무 비판적으로 수용하지 말고 자신의 창조적 가능성을 인식하고 개발하도록 그리고 초기 생물학과 사회학이 증명한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발달을 꾀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현재 살아가는 모든 근대 서구인의 특별한 의무일 것이다. 67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 –니체도 그랬으리라-은 형식은 삶이 당당하고 웅장하게 드러나는 수단이자 매개체이고 단순한 현식의 파괴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의 삶에 대한 재앙으로, 이는 모든 문명의 구조는 형식의 의례이자 예절이라는 점이다. 69

일본 문화의 의례는 다주 안에 고스란히 녹아들었으며 다주는 대단히 섬세하고 자연스럽게 그 의례 안에서 움직였다. 그 결과는 아름다운 일본 정원과 같다. 그 정원에선 자연과 예술이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면서 그 전형을 나타낸다. 70

워싱턴에서 케네디 대통령 암살 다음에 거행된 국장에 대한 얘기 – 미국의 결속과 현대 문명국가로서의 위엄과 체면을 회복하기 위해선 미국인을 위한 행사뿐 아니라 전 세계에 대한 성명으로서 보상적인 의례가 필요했다. 그것은 자발적이고 살아있는 행사의 일부였다. …미국은 거대한 국가지만 그 나흘동안 온 국민을 동시에 똑같이 하나의 상징적인 행사에 참석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은 온 국민과 함께 하나가 되어 참석했던 내게 소속감을 준 평화시대의 최초이자 유일한 행사였다. 72

교육능력은 역사 전반에 걸쳐 인간의 문화형성을 좌우하고 거기에는 영감을 주었던 것이다. 요즘의 원시처럼 초기 인간의 교사는 동물과 식물이었다. ..야생마와 동일시한 어린아이는 새로운 활력과 성격을 지닌 채 거리를 질주한다. 딸은 어머니를, 아들은 아버지를 흉내낸다.
잊혀진지 오래된 구석기 위대한 수렵시대 나름의 생활방식으로 자연의 힘과 원형을 보여주었던 인간의 교사는 다름아닌 동물이었다. 원시부족은 짐승의 이름을 짓고 의례를 행할 때 동물 가면을 썼다. 한편 주로 식물을 보고 살았던 열대 정글 부족은 식물계를 모방했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기본 신화에는 살해되고 절단된 후 땅에 묻혀 인간의 음식이 되기 위해 식물로 자라도록 자신의 몸을 바친 신이 묘사되어 있다. 모든 농경문화권에 공통적인 인간 희생의 의례에서는 이 원시적인 신화적 사건을 충실하게, 지겹도록 모방했다. 식물계에서는 삶이 죽음에서, 어린 새싹은 썩은 나뭇잎에서 비롯되는 것 같았고, 인간 역시 그러리라고 생각했기 대문이다. 죽은 자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 땅에 묻히고 식물계의 순화은 인류의 신화와 의례를 위한 본이 되었다. 75

연민이란 엄숙하고 영원한 인간의 고통과 대면했을 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감정인데, 이때 우리의 마음은 고통받는 사람들과 같아진다네. 공포 역시 엄숙하고 영원한 인간의 고통과 대면했을 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감정인데, 이때는 공포의 원인을 알 수 없어, 그 원인은 알 수 없는 비밀인 셈이다. 79

동양의 장례식은 인간을 통해 상상한 우주를 가리킨다. 한 개인으로서 고통받은 사람은 장례식을 통해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만 장례식의 모든 요소는 그 사람의 가치를 존중하고 있다.73

자연의 음악 – 다른 목에서 나와 한 말로 읊조리는/ 친근한 바다 목소리, 새처럼 지저귀는 강물소리/(겨울은 이들에게 금대신 은을 주었네. 그 물은 더럽혀졌고 기슭에 줄지어 있던 푸른 잎을 갈색으로 바뀌었네) 우리가 욕망과 공포의 구분없이/아픈 나라의 폭풍과 굶주린 도시의 분노에/귀 기울일 만큼 강하다면, 그 목소리들 역시 아이의 목소리만큼, 아니면 바닷가에서 연인을 꿈꾸며 홀로 춤추는 여인의 숨결만큼 순결함을 알리라 믿는다네 81

동양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라고 잠시 자문하는 일은 없다. 태생이 그의 미래와 생각, 행동을 결정한다. 88

유럽의 인간관은 개인의 완전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개성화’라고 표현했다. 카를G 융의 말을 인용해 보자. 그는 누구나 평생사회로부터 특정한 사회적 역할의 수행을 강요받는다고 지적했다. 이 세상에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끊임없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데 융은 이 역할을 페르소나(personae)라고 했다. 이 단어는 ‘가면, 거짓없는 얼굴’을 뜻하는 라틴어’persona’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대 로마극장에서의 배우는 이 가면을 쓰고 그 가면 너머 말을 한다.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런 저런 가면을 써야 한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러한 성격은 깊이 각인된 페르소나로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자기 자신을 알린다. 이러한 페르소나가 없다면 그 사람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89

융의 표현대로 개성화되고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무수한 역할의 가면을 언제, 어떻게 쓰고 벗을지 알아야 한다. …개성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과 해로운 것을 통제하면서 자신의 중심을 찾아 그에 따라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융의 말처럼 “모든 삶은 완전한 자아의 실현이다. 그 때문에 그 실현을 ‘개성화’라고 할 수 있다. 90

동양철학에서 ‘나’라는 말은 욕구, 욕망, 공포, 그리고 집착, 다시말해 프로이트가 쾌락 원리의 억압으로 제어되는 이드라고 칭했던 충동을 가리킬 분이다. …동양의 덕은 명령에 복종하고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 부대 수행에 책임지는 훌륭한 군인의 덕과 비슷하다. 95

왕은 더 이상 이집트 파라오처럼 신격화된 왕이 아니라 신의 ‘소작농’으로 일컬어진다. 인간은 더 이상 그 어떤 의미에서도 신의 화신이 아니며 신과 전혀 다른 자연, 즉 세속적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자연이다.었다. 나는 이러한 상태를 ‘신화적 분리’라고 부르며 여기서 이후 레반트 지역의 종교들, 즉 오늘날 가장 중요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발견했다. 96

동양에선 각자 자신과 다른이가 사실은 똑 같은 자아인 우주적 존재의 본질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때문에 동양종교의 목적은 보통 살아 있는 동안 자신과 절대적 존재의 동일성을 경험하고 깨닫는 것이다. 반면 성경을 따르는 서양에서는 내면의 자아가 아닌 저 멀리에 있는 조물주, 절대적인 타자와 관계를 맺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102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편이고,유대인은 신의 편이었다. 그리스에는 욥 같은 이야기가 없다. 무고한 욥은 이유없이 자신을 괴롭히고 권능을 뽑내며 회오리 바람을 타고 온 신에게 간청했다. “보소서. 저는 미천합니다…당신께서 모든 일을 할 수 있음을 아나이다….깊이 뉘우치나이다” 뉘우치다니! 뭘 뉘우친단 말인가? 반대로 욥기를 쓴 익명의 작가와 동시대인 5세기경 당대의 위대한 그리스 극작가 아이스킬로스는 프로메테우스(그 역시 낚시로 거대한 해수를 낚아 새처럼 그 괴수와 놀며 그 살에 작살을 꽂을 수 있었던 신에 의해 고통받았다)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괴물이다…난 제우스에겐 관심없다. 제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래서 비록 오늘날 혀로는 욥처럼 말하지만 가슴으로는 메테우스처럼 말한다.103


1920년대에는 70년대가 되면 지적인 사람들중에 종교 얘기를 듣거나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우리는 전 세계가 종교와 단절됐다고 철저히 확신했다. 과학과 이성이 창궐했고, 세계대전에서 승리했으며, 세상은 민주주의라는 이성적인 힘이 지배하고 있었다. 105

요즘 수업을 하다보면, 서구 문화의 전 역사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는 학생들을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아이들에겐 그 모든 일에 맞서 도전할 에너지가 없는 것 같다. 누구나 가끔은 전의를 상실한다. 하지만 또한 누구나 자신의 상화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고 현재의 새로운 문제와 사실, 영향력의 연관관계를 고려할 수 있다. 그 다음 자신이 발전하는 현재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슈펭글러의 개념과 같은 맥락에서 이 시대 서구인은 과거의 문화형식을 저버릴 뿐 아니라 위대하나 문화적 미래를 만들고 지탱할 수 있는 문화 형식을 구성하고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107

동양이 매력적인 까닭은 가르침이 영적이고 신비하며 심리적이기 때문이다. 110

신화적 상징의 중요한 효과는 삶의 에너지를 깨워 그리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에너지를 방출하고 에너지를 관리하는 징후로, 사람들을 가르칠 뿐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이게 하면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는 인생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사회 집단의 목적에 도움을 줄 것이다. 112

성서의 상징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5000~6000년 전 엤 수메르 인들의 천문학적 관찰과 인류학에 근거한 성서는 오늘날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적합하지 않다. …우주에 대한 성서적 이미지는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한다. …오늘날 이 세상의 사회문제는 기원전 6세기 옛 레반트의 사회문제와 다르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하고, 한 사회의 법이 다른 사회에 적용하지 않는다. 지금 이 세상은 돌에 새겨진 십계명의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 113

궁극적인 신의 신비는 각자의 내면에 있는 유배지에 있다. 그 유베지는 저 멀리 어딘가에 있지 않다. 자기 내부에 있다. 그리고 유배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116

인간적인 감정과 생각 너머에 있는 신비를 의인화시켜 생각한다는 것은 어린아이에게나 알맞은 종교양식이다. 반면 성인은 궁극적으로 범주, 이름과 형식, 감정과 생각등을 초월한 신비가 자신의 존재 근거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117

부처라는 말은 ‘깨달은 사람’라는 뜻이다. 부처는 육체가 아니라 육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 곧 자신임을, 생각이 아니라 생각을 알고 있는 사람, 즉 의식이 곧 자신임을 깨달은 사람이다. 나아가 전구는 빛을 낼 때 가치가 있듯이 자신의 가치는 의식의 빛을 발하는 것임을 안다. 전구에게 중요한 것은 필라멘트나 유리가 아니라 이 전구가 만들어 내는 빛이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와 신경조직이 아니라 이것들을 통해 빛나는 의식이다. 119

많은 교회가 이미 극장으로 바뀌었고 나머지는 일요일이면 신의 의지를 상징하는 찬송가와 함께 큰 소리로 윤리와 정치, 사회학을 가르치는 강의실로 바뀌었다.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와 의례 그리고 그 이미지며 말이 없는 그곳은 현대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도 없는 개념의 수레이다. 의례는 신화적 상징체계다. 사람들은 예배라는 드라마에 참여함으로써 언어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과거나 연재, 혹은 미래의 역사적 사건을 드러내는 계시의 현태로 신화적 상징과 접촉하게 된다. 유대교 회당과 교회는 자기네 상징의 ‘의미’를 말로 표현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효과적인 의례는 모두에게 각자의 생각을 남겨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121

서양에서는 성인이란 스스로 생각하고 평가하며 발전하는 자아를 말한다. 다시 말해 주위 환경을 해석하고 상황에 관해 자신의 능력을 판단할 수 있으며, 독립적인 관찰과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지닌 사람을 말한다. 또한 과거의 이상이 아니라 현재의 가능성과 관련된 행동을 취하는 사람이다. 126

동양의 가르침을 들여다 보면 자기 자신으로 가는 신비한 내면의 길에 대한 무언가를 배울 것이라고, 그리고 현실적 삶을 잊지 않은채 그 가르침을 따른다면 인생과 문학, 예술을 깊이 있고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실행할 수 있으리라고만 말할 것이다. 127

이미지의 의미란 말 너머 말이 정의하는 의미 너머 직관적으로 파악된다. 춤을 출때는 그 의미를 묻지 말고 그저 즐길 뿐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의미를 물어보지 말고 즐겨라 자신의 의미를 묻지 말고 자신을 즐겨라. 최소한 건강할때만이라도 자신을 즐겨라. 128

어느 사회든 다 사악하고 불행하며 불공평하다.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정말로 이 세상을 구하고 싶다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즐거운 슬픔과 슬픈 즐거움이라는 삶의 지식으로 사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는 법을 가르칠 수 없다. 131

목소리는 숨이 성대에 부딪혀 나는 소리다. 마찬가지로 모든 소리는 눈에 보이던 보이지 않던, 두 개가 부딪혀야 한다. 부딪혀서 나는 것이 아닌 소리란 우주 그 자체가 현현하는 기본 에너지의 소리다…이는 내면의 소리, 즉 우리 자신과 우리가 알고 보는 모든 것이 존재하는 데 필요한 기본 에너지의 소리다.138

자기 마음과 모든 생명의 소리와 존재로 ‘들리면’, 그는 고요하고 평화로워진다. 평화가 여기에, 저기에, 사방에 있기에 더 이상 평화를 구할 필요가 없다. 동양 예술의 숭고한 기능은 진정 그러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141

도(道)란 만물이 어둠에서 나와 빛으로 가고 다시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이치를 말하는데 이 두 원리 –빛과 어둠-은 삼라만상을 이루면서 영원히 상호작용하고 다양하게 결합한다.146

중국고전의 예술의 법칙- 첫째는 리듬이다. 어떤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리듬을 알고 경험해야 한다. 둘째는 살아있는 형식이다. 살아 있는 것의 모방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 자체를 말한다. 셋째는 자연에 대한 충실함이다 예술가는 대상의 생활리듬에 충실해야 한다. 그림속의 새는 실제로 살아있는 새이다. 그다음은 색. 그다음은 화폭의 사물의 배치이다148

항상 경계하지 않으면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놓친다. 반면 무의식의 예술을 끊임없는 경계 자세다. 그는 항상 깨어 있다. 삶의 의식을 표현하기 때문에 삶은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삶을 가르치거나 지시할 필요가 없다. 삶은 자연스레 움직이고 자연스럽게 살며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한다. 따라서 동양 전역의 예술이란 서양처럼 스튜디오나 무용실, 음악실에 제한되어 삶과 동떨어진 활동이 아니다. 동양예술은 삶의 예술이다. ..고대 예술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이가 특별한 예술가였다. 150

일본에는 독특하고 재미있는 단어가 있다. 유희어가 그것이다. 정중하고 귀족적인 공손어투를 가리킨다. 가령 “도쿄에 오셨군요”라고 말하는 대신 “도쿄에 계신 것을 향유하시는 군요”라고 표현한다. 이는 상대방이 자신의 삶과 능력을 제어하기 때문에 그에겐 모든 일이 유희이자 놀이라는 개념을 나타낸다. 그는 편안하게 놀이를 시작하듯 삶을 즐길 수 있다. 152

용기를 잃지 말라 항상 용기를 갖고 언제나 자신의 유희를 즐겨라. 물론 경기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승패 결과를 떠나 가장 재미있게 경기를 즐긴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위험해도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제일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다. 153

인도에는 종교에 대한 두가지 태도를 두 상징으로 묘사한다. ‘고양이의 길’과 ‘원숭이의 길’이 그것이다. 어미 고양이는 새끼가 울면 목덜미를 물고 안전한 곳으로 데려간다. 원숭이 떼가 나무에서 내려와 잽싸게 길을 지날 때 제 스스로 어미 등에 매달린 새끼 원숭이를 보았을 것이다. 157

서양의 많은 심리학파들은 우리들이 가장 갈구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식인이 삶을 그 이름과 범주, 관계에 대한 인식과 의미의 정의로 다룰 때 진짜 본질은 쉽게 잊혀진다. 반대로 선은 인생과 인생에 대한 깨달음은 의미에 앞선다고 말한다. 삶이 있는 그대로 흘러가게 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그러면 자신이 살고 있는곳, 지금 있는곳, 이름 붙이지 않은 곳으로 곧장 돌아갈 수 있다. 162

사물과 사물 사이에 구분이 없다는 깨달음- 이를 그물처럼 펼쳐진 우주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물코마다 보석이 있고, 개개 보석은 그 안에 다른 보석들을 비출 뿐 아니라 다른 보석들 안에는 다른 개개 보석들이 비추어진다. 혹은 꽃다발에 비유할 수도 있을것이다. 꽃다발 속에 있는 꽃은 다른 꽃의 ‘원인’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꽃이 다발을 이룬다. 우리는 보통 원인과 결과를 생각한다. 원인은 결과에 앞선다. 그렇다면 미래의 일은 지금 일어나는 일의 원인이다. 동시에 과거의 일은 또한 지금 일어나는 일의 원인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언제나 다른 모든 것의 원인이다 177

사랑의 신화- 이 얼마나 근사한 신화인가! 우주의 신비 중 가장 놀라운 신화가 아닌가! 181

사탄이 신을 너무 사랑해서 다른 존재에 절을 할 수 없었다. 바로 이 때문에 그 깊은 사랑에도 불구하고 악마는 영원한 지옥으로 추방됐다. 악마에게 지옥의 수많은 고통 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은 불이나 악취가 아니라 사랑하는 신을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점이다. 신이 직접 다른 존재에 절하라고 했는데도 무릎을 꿇지 못했던 이 위대한 연인에게 지옥으로의 추방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182

인류 최초의 조상에 대한 고대 조로아스터교의 전설에 나오는 사랑이야기다. 이 신화에서 인류의 조상은 땅에서 갈대의 모습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서로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도 없을만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후 서로 분리되었다가 머지않아 다시 하나가 되었으며 두 자녀를 낳았다. 이들은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각각 한 아이를 먹었다. 신은 인류를 보호하기 위해 인간이 지닌 사랑의 양을 95%로 줄였다. 이후 인류 최초의 조상은 열 네 자녀를 더 낳았고 신 덕택에 모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183

신화의 두번째 가르침은 우리는 사랑의 결합이라는 경험을 통해 모든 존재의 근원인 창조행위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183

기독교해석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항상 큰 골칫거리였다.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예수는 자발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는 세속에 대한 인간의 관심을 신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의 행동이었다. 187

서양에서 열정적인 사랑에 관한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는 단연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신화다. 이 이야기는 사랑의 기쁨에 대한 고통,그 고통속에 있는 연인의 기쁨을 찬양한다. 191

고삐를 느슨하게 한 채 말 가고 싶은대로 내버려두었던 파르치팔은 자연의 의지에 따라 포위된 성으로 이끌려간다. 그 성은 파르치팔과 동갑인 여왕 콘드비라무르스(사랑의 인도라는 뜻)의 성이었다. 한 왕이 그녀를 납치, 결혼하여 그녀의 영토를 차지하려 비겁하게 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파르치팔은 영웅답게 그녀를 구해낸다. 아름다운 젊은 여왕은 결국 파르치팔의 아내가 된다. 그 결혼을 축복한 성직자는 없었다. 신인 볼프람은 이야기를 통해 고귀한 사랑이란 결혼과 배우자, 사랑의 약속에 대한 믿음임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200

볼프람 폰 에센바흐의 파르치팔은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다. 유머러스하고 재미있으면서 분위기가 주제 면에서 마그너의 장중한 오페라와는 전혀 다른 이 작품은 유럽 중세시대의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이다. 나아가 세상을 구하는 사랑의 능력을 다룬 불후의 작품으로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사랑이야기일 것이다.202

인생의 완벽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해도 사랑스럽기 보다는 지겨울지 모른다. 완벽함에는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운 것은 바로 그 불완전함때문이다. 작가는 이 불완잔성을 표현하기 위해 적절한 말을 찾고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그 단어를 보내야 한다. 단 향기, 향기를 담아서 사방으로 보내야 한다. 그 불완전성이야말로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자 그 삶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203

평화의 신화보다 전쟁의 신화가 쉽게 떠오르는 이유는 집단끼리의 갈등이 많을 뿐 아니라 실상이 모든 생명의 전제조건 이라는 잔인한 현실이 존재하며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살기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삶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207

혼잡한 우리 사회의 큰 문제 중 하나는 보호를 받으며 평화로운 가정에서 기능하며 자랐던 젊은이가갑자기 전사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을 때 심리적 가르침을 거의 혹은 전혀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209

말세는 시간의 차원에서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방에서 홀로 얻어야 하는 것이리라. 229

행위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과 욕망을 모두 저버린 사람은 의무에 집착하지 않고 행동한다. 그 일은 어떤 것이든 해야 할 일이며 왕자의 의무는 싸우고 죽이는 것이다 “왕자에게 정당한 전쟁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구하지 않는데도 그러한 전쟁이 찾아오는 왕자는 자기 자신을 전쟁에 바치고 하늘의 문을 여는 것이 가장 적합한 행동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평화와 전쟁의 신화는 사실 같은 것이다. 힌두교 뿐 아니라 불교- 대승불교-에서도 이러한 역설은 근본적이다.결국 피안의 지혜는 모든 반대개념을 넘어서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전쟁과 평화의 반대개념을 초월하고 포함해야 한다. 그리고 대승불교에서 언급된것처럼 “불완전함을 지닌 이 세상은 완벽한 금빛 연꽃의 세계다. 238

인도에는 수백년 전부터 ‘맛시야 니야야’ 즉 물고기의 법이라고 하는 국제관계의 통치법이 있었다. 즉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먹기에 작은 물고기는 똑똑해야 한다는 것이다. 241

정신분열증의 일반적인 패턴을 간단히 말하면, 첫째는 사회적 질서에 위반되거나 벗어난다. 둘째는 내면으로 오래도록 깊숙히 스며들고 곧이어 점점 더깊이 물러나 내면의 정신 빝바닥까지 들어간다, 거기서 무서운 경험을 하면서 몇차례 혼동을 겪고 새로운 용기를 주는 일종의 구심점을 만나며 마지막으로 다시 태어난다. 신화적 영웅의 일반적인 여행 공식이기도 하다. 나는 이 여행을 분리, 입문, 회귀로 표현했다. 영웅은 평범한 일상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그 다음 그곳에서 엄청난 세력을 만나고 결국에는 승리를 차지한다. 그리고는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힘을 얻어 이 신비한 여행에서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이것이 신화의패턴이자. 정신적 환상의 패턴이다. 244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신분열은 잃어버린 무언가를 회복하고 대단히 중요한 균형을 복원하기 위한 내면의 퇴행적 여행이다. 그렇다면 항해자가 여행을 떠날 수 있게 하라. 배가 뒤집혀 물에 빠진다. 익사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바닥 밑에는 하나뿐인 목숨과 맞바꿀 정도로 가치있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을 빼앗지 말고 밑바닥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라 245

금식은 숨겨진 것을 깨닫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그쥬가르쥬크는 “유일한 참 지혜는 인류보다 오래 되었고 엄청난 외로움 속에 나타나며 고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고난과 고통만이 다른 이들에겐 감추어진 모든 것을 인간의 마음을 열어 준다고 했다. 247

나자크네크는 말했다 “ 우주의 거주자나 여행자는 절대 보이지 않습니다. 목소리만 들리지요. 우리가 아는 것이라곤 그 목소리가 여자처럼 부드럽고 어린아이도 겁내지 않을 만큼 상냥하다는 것 뿐입니다. 그 목소리는 ‘세상을 두려워 말라’라고 말하지요 이들은 대단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최소한 문학이나 학식, 문명에 대해 말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얻은 지혜는 가장 존중받았던 신비주의자들이 말하고 가르쳤던 것과 본질적으로 똑같다. 여기에는 깊고 보편적인 인간의 지혜가 있다. 일반적인 합리적 사고방식으로는 잘 알 수 없는 지혜가.248

객관적인 세계는 무너져 없어지며 무의식의 침략에 패배한다. 한편 편집증적 정신분열증에 걸린 사람은 항상 경계하고 세계와 그 사건에 극단적으로 예민하다.하지만 자신이 투사한 환상과 공포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공격의 위험에 처해 있다고 생각한다. …즉 정신이상자는 대부분 자신이 투사한 무의식의 영역에 있다. ,,,다른 종류의 정신병 환자는 내면의 깊은 뱀 구덩이에 떨어져 있다. 그의 모든 관심과 존재는 그곳에서 길들일 수 없는 심리적 에너지라는 무서운 유령과 삶과 죽음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미래의 샤먼은 환상 여행에서 바로 이러한 일을 경험한다. 249

인간에게는 유전된 생물학과 개인적 생물학이 있는데앞의 것이 무의식의 ‘무의식의 원현이다 한편 프로이트가 관심을 가졌던 유아기의 충격, 공포등 억압된 개인적 기억을 융은 ‘개인적 무의식’ 이라고 불렀다.252

본능-물에서 100m정도 떨어진 모래에 알을 낳는 거북 다큐멘터리 며칠 후 갓 태어난 조그만 거북들이 모래에서 나온다. 그리고는 주저없이 모두 바다를 향해 기어가기 시작한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다. 시행착오도 없다. ‘어디로 가는 게 제일 좋지? 라고 묻지도 않는다. 공연히 수풀로 갔다가 “저런!”하고 돌아서며 ‘이보다 더 나은 곳으로 가야지!’라고 생각하는 거북도 없었다. 모두 어미 거북이 알고 있던 것처럼 곧장 가야할 곳으로, 어미 거북에게 혹은 대자연으로 향했다. 253

모든 인간에게는 자동 본능 시스템이 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저마다 특정 문화조직의 교육을 받았다. 다른 동물의 왕국과 달리 인간의 특이한 점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12년이나 빨리 테어났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를 바랄 엄마는 없겠지만 그것이 바로 인간의 문제다. 254

나는 기능하는 신화적 상징을 ‘에너지를유발하고 조작하는 신호’라고 정의했고 페리 박사는 그러한 신호를 ‘감응 이미지’라고 지칭했다. 그 메시지는 두뇌에 전달되어 거기서 해석되고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신경과 선,혈액,교감신경에 전달된다. 하지만 그러한 싱호는 두뇌를 통해 전달되고 훈련된 두뇌는 그 메시지를 간섭하고, 오해하고, 방해할 것이다. 그러면 신호는 더 이상 의무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이어받은 신화는 오전(誤傳)되고 그 지배적인 가치는 없어지고 곡해된다. 255

내가 보기에 부모와 가족이 정면으로 해결해야할 중요한 문제가 있다. 자녀에게 각인하는 신호에 아이들이 잘 적응하는지 그 신호가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야 할 세계와 동떨어져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녀에게 편집증을 물려주고 죽을 수 밖에 없다.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부모는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문화의 정서체계에 잘 적응해 합리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하며, 적극적으로 삶을 풍요롭고 비옥하게 하는 요소들로 자신을 건설적으로 만들 자녀를 낳고자 할 것이다. 256

잘못교육을 받은 사람은 결국 신화적 의미에서 황무지라고 하는 상황에 처한다. 세상은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그는 세상에 말을 걸지 않는다. 그러면 단절이 일어난다.256

적절한 신화적 기능- 신비적기능이다 아주 드넓은 우주에 대한 경외감과감사의 마음을 일깨우고 간직하게 하여 우주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거기에 참여하고 있음을 인식하도록 한다.두번째 기능은 시간의 지식, 신화를 이야기 하는 민족의 행동과학 및 영역과 일치할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세번째 기능은 사회의 구체적이고 일정한 도덕적 규범을 인정하고 지지하며 각인하는 것이다. 네번째 기능은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균형을 이루면서 예측할 수 있는 삶의 과정을 거치도록 단계적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신화는 새둥지처럼 지역 환경의 재료로 만들어지고 의식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무의식적인 내면의지시를 받아 구성된다. 아이를 어르고 돌보고 인도하는 신화적 이미지가 성인에게 적합한가 아니한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신화는 어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신화의 첫번째 기능은 미숙한영혼이 세상에 맞설 준비를 하고 성숙해지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신화의 다음 기능은 준비를 갖춘 청소년이 세상에 발을 디딜수 있도록 두번째 자궁인 신화를 떠나 동양에서 말하는 두번째 탄생 즉 어린시절을 뒤로 하고 세상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는 능력있는 성인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258

삶의 빛은 미처 준비하지 못한 무의식으로 가라앉고 익사한다. 어릴적 건강한 신화가 각인되었다면 그래서 퇴행적으로 밑으로 가라앉을 때가 되었을때 저 밑의 풍경이 조금은 더 익숙하게 느껴지고 상황은 좀 더 나을 것이다. 최소한 그곳에서 마주친 몇몇 괴물의 이름을 알고 있거나 무기를 준비했을지 모른다. 259

어느날 닥치는 죽음으로 가라앉을때 돌아갈 곳은 신화의 이미지 그 이미지가 나타내는 자연력- 내면에서 들리는 우주의 정령의 힘과 목소리이다. 따라서 앞으로 다가올 문제에 대비해 내면에 있는 바다의 밀물과 썰물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할 일이다. 260

왓킨스는 이렇게 말했다. “만물을 의식하고 관리하며 운행하게 한다는 이 무거움 짐” “모두가 여행을 해야 한다. 모든것, 모든 존재의 목적은 우리가 한 걸음, 또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더 내딛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다”267

자신의 ‘자아’를 그 어떤 형상 혹은 능력과 동일시하지 않는것이다. 해탈을 구하는 인도의 요가수련자는 자신과 빛을 동일시하고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생명에 도움을 주려는 사람은 그런 식으로 탈출하지 않는다. 되돌아오려는 사람의 궁극적인 목적은 해탈이나 자신의 황홀경이 아니라 타인에게 베풀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일 것이다. 271

내면의 밤바다 모험을 그리고 있는 이 위대한 서사시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을 그 어느 곳에도 머물려 하지 않는 사람으로 묘사했다는 점이다. 272

고대에 그리고 지금도 전세계 여러 곳에서는 달을 하느님 아버지의 저택, 죽어서 부활을 위해 돌아가기를 기다리는 영혼들의 집이라고 생각한다. 달이 이울었다 부활하기 때문이다. 생명이 자손을 퍼뜨려 다음 세대 안에서 부활하듯 달은 그림자를 퍼뜨려 부활한다. 280

인간과 동물의 의식 차이를 보여주는 최초의 증거 중 하나는 인간이 불을 길들였다는 점이다. …전세계 곳곳에서 불을 갖게 된 것과 관련된 신화가 있다. 이들 신화는 대부분 불의 실용적인 사용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불에 매료됐기 때문에 시작된 모험을 그리고 있다….불은 지금도 신성시 되고 있다. 여러 문화권에서 집안의 불빛은 의례적인 행동이다. 로마에서 가장 높이 숭배받는 여신은 성화다. 인류 역사상 무언가에 매료되어 큰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모험을 강행했던 최초의 대상이 바로 불이다. 이는 보통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지닌 본질적 능력을 나타내며 지금 찬양하고 있는 모험에서 잘 드러난다.296

맨 처음 인간을 과거에는 몰랐던 삶으로 나아가게 만든 것은 불의 매력이다. 화로는 가정의 중심이 되었고 신성한 존재로 숭배되었다.287

식물의 신화적 이미지는 ‘자신의 한계를 넘게 하면서’ 집단이라는 거대한 삶에 개개 삶의 유기적 참여를 권유한다. 288

달에 간 우주비행사는 달을 지구로 끌어당겼고 지구를 하늘로 솟아오르게 했다. 머지않아 화성의 사막에서도 더 높이, 더 멀리, 더 신성하게 빛나는 지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더 멀리 있는 목성에서도 그리고 다른 별들에서도 우리 자손과 손자, 증손자들이 지만 몇 년 동안 우리가 마음속의 우주 공간을 탐험하고 모험하면서 열었던 그 경로를 따라갈 때, 지구는 더 높이, 더 높이 올라갈 것이다. 289

인류의 전 역사를 인간의 생애처럼 성장기, 성숙기,노년기 등의 단계가 있는 거대한 유기적 과정으로 보았던 레오 프로베니우스였다. 한 사람의 삶이 유년기에 시작해 청년기를 거쳐 성숙하고 노년기에 이르는 것처럼 인류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290

3.내가 저자라면...
신화와 함께하는 삶은 1958년부터 1971년까지 일반인을 대상으로 스물다섯차례에 걸쳐 있었던 강좌 중 열세 차례의 강연을 선별해 책으로 구성한 것이다. 캠벨은 책 속의 딱딱한 문장에도 생생하고 즐거운 강연장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겼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밝혔다. 캠벨의 바램대로 강영장의 생생한 분위기를 책속에서 느껴지지는 않지만, 그 이전의 책에 비해 조금 더 부드러운 음식을 씹는듯하였고 이 전의 그 어는 책에서 보다 캠벨의목소리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고 하겠다. 일반인을 위한 강연이다 보니 신화의 기능과 우리삶에 미치는 영향등에 대해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예들을 들어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라고 한다면 그 어느 곳에서 보다 친절한 캠벨과 그 어디에서 보다 비판적인 캠벨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신화의 기능에 대해 캠벨의 시선을 따라가보면, 신화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된다. 즉 신화야말로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실마리이며, 자기를 찾고 이해하는 길이며, 혼잡한 세상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살게 해주는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신화는 새 둥지처럼 환경의 재료로 만들어지고 의식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무의식적인 내면의 지시로 구성되어졌고 미숙한 영혼이 세상에 맞설 준비를 하고 성숙해지도록 도와주며, 청소년이 세상에 발을 디딜수 있도록 자기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전구가 빛을 낼때 가치가 있듯이 자신의 가치와 빛을 발하도록 에너지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캠벨의 그 어느 책에서 보다 신화적 정의와 기능 그리고 삶에 미치는 영향 나아가 더 나은 삶에 대한 지향점이 쉽게 잘 드러나 있어 좋았다. 다시말해 그동안 신화의 방대한 설명으로 자칫 요점에서 벗어나는 경향들이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좀 더 간결하게 설명하므로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고 하겠다.

또한 캠벨에 삶의 관한 관점도 좋다. 항상 용기를 갖고 언제나 자신을 즐기라는 것이다. 경기에서 승패를 떠나 즐긴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위험해도 자신의 삶을 완수하기 위해 가장 열심히 일한 사람이라며,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부모와 이 사회의 교육에 대한 중요성도 잊지 않는다. 교육의 기능은 항상 부모에게 의존하는 청소년을 책임감있는 성인으로 바꾸는 것이며, 자신의 창조적 가능성을 인식하고 개발하도록 돕고 나아가 인류발달을 꾀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잘못 교육을 받은 사람은 신화적 의미로 ‘황무지’라고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세상은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그는 세상에 말을 걸지 않아 결국 단절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부모로서 자녀 교육에 대한 원칙을 갖도록 도와주어서 이또한 좋았다.

그동안의 책을 통한 캠벨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다소 불편하기는 하였지만 이번 만큼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적인 감정과 생각 너머에 있는 신비를 의인화시켜 생각한다는 것은 어린 아이에게나 알맞은 종교라고 한다거나, 성서의 교훈은 아이가 부모에게 찾는 의존심과 공포심, 존경어린 애정등의 태도를 가르치는 불복종과 처벌에 대한 유아용 동화수준이라고 하는 등, 교회는 이미 극장으로 전락했고 우주에 대한 성서적 이미지는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한다며 고약할 정도로 비판하고 있다. 평소에 캠벨이 신화에 대한 주장을 보면, 믿을만한 것이냐 아니냐의 관점, 혹은 옭고 그름의 관점이 아닌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상징적의미를 우리 삶에 접목시키므로 삶의 에너지를 깨우고 인생에 대해 적극적인 참여와 사회집단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삶으로 이끄는 도구이며, 그 안에 내재된 신성을 발견하고 그러므로 충만된 기쁨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것이 신화와 종교의 역할이라고 본다면 ,그의 비판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자신의 관점과 다를 수 있고 자신의 지향하는 바와 다르다하여 학자로서의 객관성과 겸손함을 잃는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또한 그의 동양에 관한 이해 역시 다소 불편하다.
동양의 가르침은 자신으로 가는 신비한 내면의 길에 대한 배움을 준다든가 동양이 매력적인 까닭은 가르침이 영적이고 신비하며 심리적이고, 동양의 예술은 삶 자체라고 평하는것으로 보아 동양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며 동양의 매력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양은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되고 싶은것등에 대한 질문은 없으며 태생이 그의 미래와 생각, 행동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이 외에도 동양이 자신의 삶에 대해 매우 소극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이 많이 있다. 물론 과거에는 그저 주어진 인생으로 살 수 밖애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많이 변했고 삶이 바꼈으므로 그의 관점에 동의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일본이 피아 구분없이 이해심으로 2차 대전 패망후 분노하지 않았다는 평은 안타까움을 넘어 불쾌감까지 준다.

그럼에도 그 어떤 책 보다도 신화에 대해 자세하게 안내하고 있고 무엇보다 자료가 방대하지 않고 일목요연하며 사례들이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더욱 좋았다.
독서는 더 많은 독서를 불러 일으킨다. 읽으면 읽을수록 더 많은 것들을 읽어보고 싶고 더 꼭꼭 씹어먹고 싶은 욕망을 낳는 것을 알겠다. 배움은 더 많은 배움을, 깨달음을 더 큰 깨달음을 갈구하게 한다.
캠벨의 책 마다 말의 고삐를 느슨하게 한채 말 가고 싶은대로 두었던 파르치팔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조셉캠벨이 볼프람 폰 예센바흐의 파르치팔은 반드시 일어야 할 책이며 세상을 구하는불후의 작품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파르치팔을 꼭 읽어봐야 겠다.
IP *.128.30.49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12 나는 무엇을 잘 할 수 있는가. [1] @햇살 2008.04.25 2769
1411 [번역010] 15장 서두르지 않는 삶, 16장 한결같은 삶 [4] 香山 신종윤 2008.04.25 2273
1410 신화의 이미지_3 [2] 개구쟁이 2008.04.21 2187
1409 [03] 네가 바로 그것이다 - 죠셉 캠벨 오현정 2008.04.21 1969
» (03) 신화와 함께 하는 삶- 조셉캠벨 이은미 2008.04.21 1901
1407 [03] 네가 바로 그것이다 - 조셉 캠벨 [2] 정산 2008.04.21 1889
1406 7_신화의 이미지, 조셉 캠벨 [1] [1] 홍스 2008.04.21 2437
1405 [03] 신화와 함께 하는 삶 - 조셉 캠벨 [2] 거암 2008.04.21 1911
1404 [03] 신화와 함께하는 삶-조셉캠벨 [1] 손지혜 2008.04.21 1923
1403 (03) 네가 바로 그것이다-조셉 캠벨 이한숙 2008.04.21 2918
1402 (07) 신화와 함께 하는 삶 2. [1] 서지희 2008.04.21 2108
1401 (07) 신화와 함께 하는 삶 1. 서지희 2008.04.21 1715
1400 [03]신화의 이미지 - 조셉 캠벨 [1] [4] 양재우 2008.04.21 2170
1399 신화와 함께 하는 삶-조셉 캠벨 [1] [2] 유인창 2008.04.20 2300
1398 [03] 신화의 이미지 - 조셉캠벨 최지환 2008.04.20 2327
1397 열하일기1(미완성 정리) [1] 김지현 2008.04.16 2826
1396 [50] 황진이, 선악과를 말하다/ 황진이ㆍ문화영 [3] 써니 2008.04.16 3071
1395 나는 무엇을 잘 할 수 있는가 [6] 김나경 2008.04.16 2677
1394 6. 시인은 노래 했노니 이것이 험로라고 [5] 서지희 2008.04.14 2207
1393 6. 시인은 노래 했거니 이것이 험로라고 [1] 서지희 2008.04.14 18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