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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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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1일 11시 17분 등록
Ⅰ. 저자 소개

저자 : 조셉 캠벨

이 책을 읽으면서 캠벨의 종교적인 관념을 좀 더 세밀하게 엿보게 되었다. 첫 책 ‘신화의 힘’을 읽을 때 직감적으로 그가 ‘학문’을 통해서 ‘득도(得道)’를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 직감은 그의 책을 네 권 읽은 지금은 내게 확신으로 자리잡고 있다.

저자로서 보이는 어떤 태도들이 그를 ‘득도’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가? 나름대로 몇 가지를 정리해 본다.

그는 두려움 없이 용감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주장을 두려움 없이 용감하게 피력한다. ‘신비를 전달해야 할 기독교 전통의 언어가 오로지 역사적으로만 이해됨으로써 그 은유와 상징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 버렸으며 이제는 그 본질에서 멀어져 버렸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서슴없이 해댄다. 저자 자신의 배경이 카톨릭교라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이는 얼마나 무서운 발언인가? 자신을 둘러 싼 많은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주장인데, 이러한 주장을 그의 저서 내에서 일관성 있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두려움 없이 용감한 사람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아마 그의 두려움 없는 용기의 이면에는 분명 확고한 자기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창의적인 사람이다. 그는 뛰어난 창의성을 발휘하여 신화적인 은유를 해석한다. 가령 그는 동정녀 마리아가 처녀로서 구원자를 낳은 것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예수를 낳았으며 동정녀로부터의 탄생이 육신의 탄생을 넘어서는 영적인 탄생의 의미임을 이야기 한다. 이는 그가 정해진 틀로 신화를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신화를 해석할 때 세상의 일반적인 눈을 넘어서서 저 높은 경지에서 내려다 보는 입장을 취한다. 그리하여 그 은유가 어떤 의미로 해석이 될 수 있는지 기존의 해석과는 그 색이 다른 창의적인 해석을 보여 준다.

그는 경계가 없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에게는 문학과 신학과 예술이 그저 한 덩어리일 뿐이고, 베다와 성경과 불경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Tat tvsm asi.” 로 성경을 설명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며, 과거의 신화적 기록을 현재로 끌어 들여와 적용을 시키는 것도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두려움 없이 용감하고, 창의적이며, 경계가 없이 자유로운 캠벨의 글을 읽기 위해서 독자는
논리적인 머리만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그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열어 두고,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내어 두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여야 할 것이다.

Ⅱ.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서문

[p8]”Tat tvam asi.”
(중략)
그는 위대한 신화 연구자로서 이 경구의 심오한 영적 의미를 이해했을 뿐 아니라 이 말대로 살았다.

[p8]조셉 캠벨은 <도덕의 기초 On the Foundation of Morality>에 나오는 쇼펜하우어의 질문을 좋아했다. “어떻게 나의 고통도, 내가 관심을 갖는 사람의 고통도 아닌 남의 고통을 보고 마치 그것이 나 자신의 고통인 양, 즉각 몸을 던져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는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며,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p11]신화의 복잡하고 다양한 주제들마다 공통적인 것은 모두 인간에게서 기원한다는 점이다. 각 주제들은 동일하고 영원한 영의 울림이 시간의 영역 안에서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굴절되어 담긴 그릇과도 같다. 놀랄 만큼 창조적으로 표현된 인간적 갈망과 욕망, 우리가 속한 전통으로부터 나온 비극들을 보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p12]자신이 연구하는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너무나도 몰두해서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였으며, 자신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p14]그러나 신화는 진리를 담는 일종의 그릇으로서 인구조사나 연감 같은 것들보다 훨씬 더 신뢰할 만하다.

[p18]은유는 한 장소로부터 다른 장소로 이동시킴으로써 우리들을 가두고 있던 경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한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적 진리들은 은유적 그릇들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다. 은유는 그 외연으로서 역사적 맥락이 지니는 딱딱하고 사실적이며 일차원적인 내용들이 아니라, 그 내포를 통해서만 – 다시 말해 은유가 스스로 일깨우는 진리의 여러 측면들에 대한 증거들의 성운을 통해서만 – 전달될 수 있다.

[p20]어떠한 종교 전통에 속하는 신자라 하더라도 만일 참된 신자라면, 조셉 캠벨의 글을 읽음으로써 신앙이 감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의 성스러운 가르침들과 의례들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그 전통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p20]그의 부인에 따르면 병실에서 그는 “예전에 지적으로 이해했던 것을 감정적으로 경험했다. 가톨릭 병실에서 이러한 상징을 봄으로 인해 그는 유년 시절의 종교와 가졌던 갈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조셉 캠벨은 확실히 시대에 발을 딛고 있는 인물이었으며, 생기 넘치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위대한 존재의 신비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서 자시 자신을 거기에 완전히 내던진 인물이었다.

[p23]사실 이 위대한 영적 은유는 그 외피만을 취하고, 그 안의 살은 던져버린 사람들에 의해 너무도 파괴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캠벨이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세계의 종말은 우리가 그 최종적인 심판의 공포를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그런 파국적인 사건이 아니다. 세계의 종말은 자신들의 영적 통찰을 통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들, 초월, 신비의 성례전, 또는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썼듯이’무한’을 향해 솔직한 사람들에게 매일매일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종말은 어둡고 무시무시한 끝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출발점에 대한 은유이다.

1. 은유와 종교적 신비

[p30]이 에피소드를 통해 나는 인류의 절반쯤은 종교 전통의 은유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나머지 반은 은유가 결코 사실일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종교적 은유들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에 자신들은 무신론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p32]나는 전통적으로 신화들이 네 가지 기능을 한다고 본다. 첫번째 기능은 존재의 근원적 조선에 의식을 맞추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주의 ‘신비스러운 떨림’을 향해 의식을 깨우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창세 신화들을 포함하여 원시 신화들은 그 ‘신비스러운 떨림’에 대해 동의하고 ‘예’라고 말하도록 사람들을 이끈다. 그런데 그 신화들은 아주 기이한 방식으로, 말하자면 전 공동체가 참여하는 가운데 구경꾼들 앞에서 무시무시한 살인 의례를 행함으로써 그러한 떨림에 동의하도록 만든다.

[p33]신화의 첫 번째 기능은 다음은 세 가지 참여의 방식을 통해 현재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일깨우는 것이다. 즉 자기 밖으로 옮겨놓거나 자기 안으로 깊이 침잠하게 되거나, 아니면 스스로 변화하게 한다.

[p33]두 번째 전통적인 신화의 기능은 해석적인 기능이다. 바로 우주 질서의 일관된 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기원전 3200년경 우주적 질서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것이 인간 삶의 기본 질서이므로 사회와 인간 남녀는 이 우주적 질서에 참여해야 한다는 관념이 생겨났다.

[p35]가장 놀라운 경험의 순간이 장엄한 이미지들을 통해 묘사되었지만, 적절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 순간은 훨씬 더 종교적인 언어로 표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언가 현명하고 우리의 기원을 반영하는 존재에 대한 커다란 두려움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왔다.

[p36]신화의 세 번째 기능은 구체적인 도덕 질서, 다시 말해서 그 신화가 생겨난 사회의 질서를 정당화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모든 신화는 특정한 문화권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며, 그 문화의 언어와 상징들을 통해 전해질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신화적 관념에 의하면 도덕 질서는 우주적 질서와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거나, 아니면 그 일부분이다.
이 세 번째 기능을 통해 신화는 지리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조건지어진 구체적인 사회 집단의 요구에 개인을 맞춤으로써 도덕 질서를 강화한다.

[p37]사회 제도가 구성원들에게 그들의 인간적 경험과 맞지 않는 신화적 구조를 내리누를 때 심각한 위험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인간 삶에 대한 특정한 종교적, 정치적 해성이 계속 고수될 때 신화로부터 분리를 통해 개인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질서에 관한 효과적인 설명 체계를 거부하거나 그로부터 분리된다.
전통적인 신화의 네 번째 기능은 개인이 삶의 다양한 단계들과 위기들을 통과할 수 있게 하는 것, 즉 개인들이 삶의 전개를 통전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p39]신화의 생명력은 그 상징들의 은유적 열정으로부터 나오면, 또한 거기서 의존한다. 은유와 상징은 단순한 지적 개념 이상을 전달한다. 왜냐하면 초월의 현실성에 실제적으로 참여한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은유와 상징의 고유한 특성이기 때문이다. 은유를 통해 힘을 얻은 상징은 단순히 무한의 고유한 특성이기 때문이다. 은유를 통해 힘을 얻은 상징은 단순히 무한의 관념이 아니라, 특정한 형태로 무한이 실현되는 사건을 전달한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특정한 역사적 시기의 은유들과 그것이 전달하는 상징들은 그보다 훨씬 후대에 전혀 다른 경험들에 의해 의식이 형성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메시지도 전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p39]시대와 상황은 급격하게 변하지만 수세기에 걸친 역사적 조건의 주체, 즉 우리가 인간 존재라고 부르는 신경정신적 통일체는 지속적으로 남는다. 아돌프 바스티안이 “기본적 관념들”이라고 기술하고, 융이 “집단무의식의 원형”이라고 지칭했던 것은 변화하는 역사적, 문화적 시대의 은유들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나 사실은 지속적으로 남아 있는 신화들이 생물학적으로 뿌리내린 추동력이며, 통시에 신화의 내포적 지시대상이다.

[p41]은유가 지시하는 실제 우주는 내적인 삶의 영적 영역이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p42]은유적 언어가 오해되고 표면적 구조가 파괴될 경우, 그것은 시공간에 매인 현존하는 사물의 질서를 환기시틸 뿐이며, 그 영적인 지시사항은 설사 전달된다 해도 아주 희미하게 전달될 따름이다.

[p44]진정한 의미에서 신화란 다른 사람들의 종교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종교란 신화에 대한 대중적인 오해라고 이해될 수 있다.

[p45]삶은 절대적으로 고정된 어느 한 가지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이 상징들은 자체에 부여된 온갖 의미들을 넘어서서, 즉 모든 정의들과 관련성들을 넘어서서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를 지시해야 한다.

2. 종교적 신비 경험

[p48]서구 종교는 유럽이 아니라 지중해 동부 연안, 즉 근동으로부터 유래했다. 조로아스터교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종교들에서는 신이 세계를 창조했고, 신과 세계는 동일하지 않다. 즉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존재론적이고 본질적인 구별이 있다.
(중략)
이 종교들의 목표는 초월과의 동일성에 도달하는 데 있지 않고, 동일하지 않는 인간 존재와 신 사이에 관계를 수립하는 데 있다.

[p49]기독교 전통에서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참 신이면서 참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본성의 통일성으로 인해 그리스도는 신비로 간주된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우리들 각자가 신성의 일부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런 것은 전혀 신비로 간주되지 않는다.

[p50]우리는 지금까지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한 주장을 할 뿐인 사회조직이나 위계 제도에 헌신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주장들 자체가 의문시 된다. 따라서 ‘소외’라 부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다시 말해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중재하는 종교 제도로부터 개인이 소외된 것이다.

[p51]역동적인 신화의 일차적인 목적으로 고유하게 종교적인 기능이라고 강조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이름들과 형식들을 초월하는 궁극적인 신비를 인식함으로써 인간 안에 있는 경외와 겸험, 존경의 경험을 일깨우고 유지하는 것이다.

[p52]에르빈 슈뢰딩거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삶은 단순히 전체의 일부분이 아닙니다. 어떤의미에서 그것은 바로 전체입니다. 전체는 이것저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브라만들이 거룩하고도 신비롭게 표현한, 실로 단순하고도 명료한 것입니다. […]Tat tvam asi, 그것이 바로 너다.”

[p52]어느 누구도 함축적으로 자기가 하는 말이나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가 아는 내용을 넘어서는 것을 지시하지 않는 함, 신의 존재나 비존재를 이야기 할 수 없으며, 초월과 신비의 경험에 대해 말할 수 없다.

[p53] 본질상 종교적 경험은 오직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경험을 다른 누군가와 나누는 순간 그 특성은 사라져버린다. 즉 미리 만들어진 개념들이 그 경험을 파악하며, 간단히 축약해 버리기 때문에 경험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게 된다. 정교화되고 세부화된 종교들은 감당하지 힘든 폭발적인 신비 체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p6]인간은 선악의 나무를 먹음으로써 통일성이 아니라 이원성의 영역에 있게 되었고,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p59]궁극적으로는 남성 이름을 부여하건 여성 이름을 부여하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초월은 그러한 모든 이름들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상징은 총체적 명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p60]내가 앞에서 했던 말, 즉 신비의 경험은 단지 기대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 계획을 포기해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계획이란 두려움과 욕망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계획을 버리면 빛이 다가올 것이다.

3. 신에 대한 개념들

[p64]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신적 본성은 인식 불가능하다는 점을 근본적으로 밝혔다. 칸트가 지적했듯이, 모든 인간적 경험은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에게서 분리되어 있다. 둘 사이에는 분리시키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p64]우리는 시공간의 영역 밖에 있는 것들은 경험할 수 없다. 칸트는 이것을 ‘감각적 감성적 형식들’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인도에서 ‘마야’라고 부르는 것에 해당한다. 마야는 시공간의 영역이며, 파편화된 세계를 넘어서 있는 것들을 변형시킨다.

[p65]선사들이 말을 하고 난 뒤 곧바로 반대되는 말을 함으로써 자기가 할 말을 해체시켜 버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은유가 궁극적으로 지시하는 내용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은유가 지시하는 함축적인 의미들, 궁극적인 영역의 차안적 측면은 시공간의 영역 안에서 이 초월적 에너지가 작용하는 신비를 열어 보인다.

[p70]근본적이고 단순하며 위대한 신비적 깨달음이란, 의식의 매체가 아니라 의식 자체와 우리자신을 동일시 하는 것이다. 우리 몸은 의식의 매체이다.

[p79] 사실 그는 ‘잘 살고, 결혼생활을 잘 해서 그 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시오”라고 말했어야 했다. 영원은 미래도, 과거도 아니고 현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코 시간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영생은 현재와 영원의 한 차원이다. 영생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시간을 타고 전 생애에 걸쳐 그 위를 달리게 되는 것이다.

[p80]그렇듯 모든 인간적인 생각을 넘어서는 존재를 남성, 혹은 여성으로 생각하는 것은 확실히 적절치 못한 것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이 문제는 여성적 측면이 배제된 남성 하느님 상으로 인해 더욱 복잡해진다. 이 때문에 양성을 넘어서거나 포괄하는 신성에 대해서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신적 이미지는 심리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처럼 편파적으로 하느님의 신비의 한 가지 측면만 강조한 것은 일차적으로 모계적 희생자들에 대한 가부장적 정복자들의 우월성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다.

[p81]tat tvam asi,”네가 바로 그것이다”, 혹은 “너 자신이 그것이다! 힌두교나 불교의 궁극적 의미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모든 존재의 신비이기도 한 그 신비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그러나 이 “너”는 다른 존재들과 구분해서 스스로 애지중지 하는 그런 개별적인 “너”가 아니다.

[p83]서구의 종교적 전통에서는, 이처럼 자기 존재의 근거와 하나가 되는 경험의 가능성을 알지 못한다. 그보다 창조주라고 여겨지는 인격적 존재와 관계를 수립하고 유지할 것을 강조한다. 달리 말하자면, 서구 종교는 ‘관계성’의 종교이다. 피조물 a가 창조주 X와 관계(related ;R)를 맺는 것이다.(a RX) 반면 동양의 종교에 대한 적절한 묘사는 훨씬 단순하다. a=X라는 동일시인 것이다.

[p85]우리가 잘 알듯이 역사는 종교적 상징들의 실질적인 근원도 아니고, 일차적인 지시대상도 아니다. 상징들은 ‘모든’ 신화에 잘 알려져 있는 심리학적인 원형이다.

[p86]예를 들어 동정녀 탄생은 우리 마음속에 영적 생명이 탄생하는 것으로, 즉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내면적인 동정녀 탄생은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다.”(갈라 2:20)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p87]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회중들에게 했던 설교에서 이러한 위기에 대해 말했다. )”설교와 성서일기 Ⅷ).”하느님이 영적으로 한 처녀나 한 훌륭한 영혼 안에서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마리아에게서 육체적으로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보다 났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이것은 우리들 자신이, 아버지가 영원히 낳은 ……독생자가 된다는 뜻을 포함한다.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한 가장 훌륭한 일은 스스로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이러한 방식으로 상징을 읽으면, 역사의 찌꺼기를 털어내고 직접적으로 신비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p90]”그들은 무리 지어 가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각자 자기가 선택한 가장 어둡고 길 하나 없는 지점에서 숲으로 들어갔다.”
아무 길도 없었다! 길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누군가 다른 사람의 길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서구 정신을 동양 정신과 분명하게 구분하는 점이다. 동방의 구루들은 제자들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진다. 이들에게는 ‘대리 자유의지delegated free will”라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구루는 당신이 길 위에 어디쯤 있는지, 누구인지, 이제 무엇을 할지, 그리고 다음에는 무엇을 할지 가르쳐준다.

[p91]모든 것이, 모든 제도가 급속히 파편화되어 가는 이 시대에는 기존의 의미들이 모두 굳어져 버린 집단 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오늘날 집단은 개인을 생산하기 위한 모태일 뿐이다. 모든 의미는 개인 안에서 발견된다. 각 사람 안에서 의미는 저마다 유일무이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점을 생각해 보자. 나름대로의 모험을 통해 각자 개인적 삶을 다 살고 나서 돌이켜보았을 때 얻게 되는 깨달음은, 결국 하나의 모범적인 인간적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4. 종교적 상상력과 전통신학의 규칙들

[p94]이 시대 종교의 과제와 기능은 마음을 깨우는 것이다. 만일 성직자들이 마음을 깨우지 못하거나 깨울 수 없다면, 사람들을 깨우고 영적으로 양육할 상징들을 해석할 능력이 없음을 의미한다.

[p95]성직자들의 일차적 임무인 상징들을 –그들은 사실 상징의 수호자이다-이해하는 일에 실패했을 때, 유일하게 우리의 영적 탐험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술가들뿐이다.

[p97]여기서 ‘고통 당하는 인간’이라는 말은 중요하다. 고통 당하는 미국인이나 고통 당하는 흑인, 고통 당하는 유대인이 아니라 고통 당하는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연민은 인간 고통 안에 있는 심대하고도 지속적인 무엇 앞에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감정이며, 동시에 고통 당하는 인간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p98]우리 죽음의 은밀한 원인은 곧 우리 자신의 운명이 된다 모든 생명은 유한하며, 만일 그 유한성에 도전한다면, 우리는 그 유한성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그리고 영웅이란 결국 운명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신들이 행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그 사람이 한 일이 결과이다. 그 삶 전체에 대해서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은밀한 원인이 드러난다. 우리 삶의 여정 자체가 바로 우리 죽음의 은밀한 원인이 것이다.

[p99]예수는 십자가에서 자신이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예”하고 스스로 세상에 내려왔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이러한 방식으로 “아니오”가 아니라 “예”라고 말하면서 삶으로 들어가야 한다.

[p99]십자가도, 그리고 그 위에서의 죽음까지도 긍정하는 삶에 대한 “예”의 관점은 그 사건의 배경을 만들어 그것이 빛을 발하게 한다.

[p101]그러나 가령 성례전 중 하나인 세례가 지니는 기능은 우리 안에 무언가를 퍼붓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으로부터 무언가를 끌어내는 데 있다. 성례전은 불러냄evocation이지, 교리주입(교화)indoctrination이 아니다.

[p105]칼 융은 인간의 심원한 창조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적 상상력’이라는 기술을 제시했다.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신화적 상을 제사하고 이에 대해 자유롭게 명상하며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신화적 상들은 –기독교 전통에서 나온 것이건, 아니면 다른 어떤 전통에서 나온 것이건 간에 서로 관련되어 있는데 –영혼의 가장 깊은 중심에 말을 건다. 신화적 상들은 원래 영혼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다시 영혼에게 말을 건다.

[p106]그러나 신은 초원의 범주마저도 초월해 있다. 초월 역시 그 대응 개념인 내재와 마찬가지로 사유의 범주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초월의 관념을 진지하게 다루는 헤르메틱 전통의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이 같은 것은 바울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경험이라고 말한 것에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p111]문명의 건강을 해치는 또 다른 요인은 프로이드에게서 볼 수 없는데, 그는 성서 못지않게 이른바 남성 쇼비니즘에 물들어 있다. 아마도 여기에 여성운동이 중요한 영향력을 끼쳐서, 종교적 상징론의 영역에까지 그들의 영향력은 확대되었다.

5. 유대-기독교 전통의 상징들

[p119]우주론적 신화는 소우주와 대우주가 동일한 박동을 가지고 서로 공명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의사에게 “열이 있다”고 말하면 의사는 그의 맥박이 43,200박동과 조화를 이루는지 재어본다. 즉 환자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p122]인간이 상상력은 근원적으로 반응했고, 방대한 개념이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자궁 안에 생물과 무생물의 세계를 모두 끌어안은 거대한 어머니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우주이다. 인간의 몸은 대우주 형태의 복사품, 내지는 축소판이다. 전 영역에 걸쳐 은밀한 조화가 유지된다. 신화와 종교적 의례의 기능은 이러한 대우주-소우주에 대한 통찰을 우리에게 알려주어서, 약 성분이 우리 몸 속에서 효과가 나듯이 (열두 시간마다 심장이 43,200번 박동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인간이 자연계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p128]아마도 여러분은 내가 좋아하는 하인리히 치머의 인용문에 익숙할지도 모른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최상의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차선의 것은 오해받는다.”어째서 차선의 것은 오해받는가? 아마도 차선의 것들이란 너무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내연이 아니라 외연으로 잘못 읽게 된 은유들일 것이다.

[p129]내가 이미 언급했던 순환을 기억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가부장적 신화들이 힘을 얻게 됨에 따라 모신의 신화들에 압박을 가했다. 모신에 대한 신화들은 기원전 7세기 무렵 그리스에서 ‘엘류시우스 신비’라는 경이로운 신비 종교로 부활했다. 인도에서도 모신 신화의부활로 여신은 인도의 주요 신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칼리 여신의 다양한 형태들 중 하나가 샤크티로, 만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에너지다. 그러므로 신화는 다른 것과 관계를 맺으면서 다시 돌아온다.

[p132]에덴이라는 목가적인 장소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동산은 대립의 쌍들로 –남성과 여성, 선과 악 이루어진 –우리들의 전신과 생각이 신의 정신과 생각만큼 거룩하다는 것에 대한 은유이다.

[p133]불교 전통에 의하면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들어와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교에 나타나는 두 수호신들 중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고, 다른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다. 두 수호신은 서로 대립되며, 하나는 두려움을 다른 하나는 욕망을 나타낸다.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고, 욕망은 이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다. 두려움과 욕망이 인간을 동산으로부터 멀리 떼어놓는다. 우리를 유배된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p135]그러나 자의식을 갖자마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두려움을 경험했다. 다음에 그것은 – 이와 같은 신은 ‘그것(It)이다.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데.”

[p136]그는 말만으로 창조한다. 본래 말을 성적 상징으로 보는 개념이 확대된 것이다. 이teeth는 여성 성기이며, 혀 tongue는 남성 성기이다. 이 둘이 합쳐서 나오는 말을 통해 모든 신들과 천상계, 그리고 세상이 생겨난다. 구약성서의 첫 장에서 창조하는 신은 바로 이 신이다. 여기서도 아마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만물이 나오게 되는 최초의 살해, 또는 분리에 대한 이야기를 변형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p141]그러므로 “어떻게 홍해가 갈라졌는가?”하고 물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과거에도 신화적 사건이었으며, 지금도 신화적 사건이다. 과학자들 가운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p142]요셉은 우물로 간다. 우물은 말랐지만, 우리는 우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즉 우물은 물을 통과하여 이집트로 들어갔다가 물을 통과하여 이집트로부터 나오는 것을 상징한다. 물은 언제나 아래 영역, 현시의 영역, 새로운 에너지와 새로운 역동성의 장소를 나타낸다. 그것은 무의식의 영역, 즉, 그곳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그곳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가리킨다.

[p147]그것은 전적으로 신화적인 사건이었지만,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되었다.

[p148]유대교는 동일성의 종교가 아니라 신이 허락한 참여의 종교이다.
그러나 힌두교는 유대교와 정반대이다. 힌두교에서는 모든 사회적 규범을 초월하는 깨달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요기가 숲으로 들어갈 때는 자신의 카스트를 벗어둔 채 들어간다.모든 사회적 의무들은 거부당하며, 그는 전적으로 그로부터 벗어나 있다.

[p148]이러한 종교의 구루들이 젊은이들에게 해주는 말은 이것이다.”아주 오래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금 당신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p148]기독교건, 유대교건 우리 서양 종교들은 역사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해 봤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사건들을 넘어서서 그 영적 의미를 읽지 못하고, 역사적 사건들 자체를 숭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p150]스스로의 방식대로 성서를 읽고, 의미를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성서는 모든 독자들 개개인에게 그들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특수한 무엇인가를 말하기 때문이다. 신의 선물은 당신 자신의 언어로 다가온다. 순수하고,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하는 신은 너무도 크다. 칼융은 이렇게 말했다. “종교는 신에 대한 경험 앞에서 우리를 방어해 주는 체계이다.”우리가 신을 이해하는 방식대로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6. 유대-기독교 영성의 상징들에 대한 이해

[p163]동굴에서의 탄생에 관한 동기 역시 매우 오래된 것이다. 이 상징은 특히 동지와 관련된다. 동지 때 태양은 지구로부터 가장 멀리 여행하며 빛이 심연의 최하점에 이르게 된다.

[p170]그리스도에 관한 이 전설에서 유대인들의 역사가 흥미로운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유대인들이 이집트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예수도 이집트에서 나오려고 하며,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했듯이 예수도 사막에 들어가서 40일 동안 머문다. 이를 통해 유대인들의 큰 역사가 흥미로운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p171]일반적으로 이러한 전설에서 젊은 영웅은 많은 유아 기적들을 행한다. 헤라클레스는 요람에 누워 있던 아기 시절에 이미 뱀을 무찔러 죽였다. 일반적으로 영웅들은 전 생애에 걸쳐 이루게 될 업적의 전조가 되는 기적들을 차례차례 행한다.

[p176]묵시문학적 사건을 알리는 전령으로서의 메시아 개념은, 히브리인들이 페르시아인들로부터 받아들인 것이었다. 예로부터 내려온 유대인들의 메시아 개념은 세상의 종말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고, 여러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다시 세울 왕과 관련이 없었고, 여러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다시 세울 왕과 관련이 있었다.

[p178]”이는 내가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이다.” 은유적으로 이해하면 이 이야기는 마리아가 문자 그대로 처녀로서 구원자를 낳은 것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예수를 낳았으며, 그는 바로 세례의 순간에 로고스의 매개자가 되었음을 뜻한다.

[p184]왜냐하면 뛰어난 영적 깨달음을 이룬 사람들은 기적적인 치유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거듭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질병들은 대부분 심리학적 원인에서 비롯된 것들이기 때문에 영적인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심리적 질환은 영적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영향에 의해 치유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기적들은 심대한 영적 능력의 기능일 수 있다.

7. 질의 응답

[p215]작용은 인간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나와 너의 관계,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 나와 내 직업과의 관계, 나와 지구와의 관계 든 관계의 영역 안에서 인간은 과정 속에 있다. 예를 들어 결혼에서 한쪽이 희생할 때 그는 상대방에게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 양쪽이 관계에 참여하므로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의 한 측면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 밖에서 심리적 발전은 없다. 이것이 중심 내용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형태로 되어 있다. 관계와 포기, 어둠과 빛이 함께 있는 것이다.

[p229]당연히 지옥은 자신들의 자아와 이기적인 가치들에 사로잡혀서 초인간적인 은총에 자신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가리킨다.

[p230]만일 어떤 사람이 유한한 가치 체계에 얽매인 채로 죽는다면, 그 상태에서는 초월적인 신의 복된 모습을 향해 열려져 있을 수 없다. 이 경우 연옥은 교육적인 장소로 기능하며, 그의 영적 깨달음의 가능성에 따라 천상의 전체 영역이 펼쳐지게 된다.

8. 대담

[p236]신화는 거짓을 뜻하는 말로 잘 쓰이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표현하는 영구적인 수단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기억하고 싶고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 예컨대 아서왕의 전설이나 성서의 영속적인 이야기들을 일시적 유행이나 변덕스러운 일, 일상의 덧없는 사실, 또는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 기록 같은 것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신화적 형태로 말했다. 신화와 상징은 모든 종교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특징으로, 종교 체험의 특수한 언어이다.

[p240]우주 시대는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꿀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관념을 고수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처럼 많은 지역에서 낡은 정통주의가 부활하고 있습니다. 우주 공간에는 지평선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전처럼 우리 자신과 우리의 집단에 매어 있을 수 없습니다. 우주 시대는 그것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요구를 배척하거나, 이런 요구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참된 하나의 교회’나 흑인 세력, 노동조합, 또는 자본가 계급 속으로 물러섭니다.

[p241]이 새로운 삶으로의 여행 –우리는 모두 이 여행을 해야 합니다 –은 우리가 과거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주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낡은 시대의 종교가 아니라 사물들의 새 질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지평선이 없다는 것이 우주 시대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신비로운 미래 속으로 들어가는 자유로운 폭포 속에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유동적이며, 많은 사람을 당혹스럽게 합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오직 낙하산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p245]우주시대의 신비적 명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끝나가고 있습니다. 우주의 중심으로서의 세계, 하늘로부터 분리된 세계, 집단 내의 구성원들에게 만으로 사람이 한정되는, 지평선에 매인 세게, 이 세계는 사라지는 세계입니다.

역자 해설

[p262] 그러나 캠벨은 이 책에서 성서와 기독교의 많은 이야기들을 역사와 사실이라는 관점보다는 인간과 세계, 신에 대한 근원적인 이야기로 보고, 세계의 다양한 여러 신화들과 비교하여 구조적 유사성을 발견하고, 그러한 구조에 나타나는 인간 종교성의 근본 구조를 밝히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p264]캠벨이 발견한 종교적 깨달음의 요체란 인간과 자연, 온 우주를 관통하는 근원적 자아 안에서 나와 너, 그리고 자연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근원적 자아란 다름 아닌 나 자신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원 제목대로 “네가 바로 그것”이라는 깨달음이다.

[p264]캠벨은 성서를 밑바닥에서부터 뒤집어 읽고 있다. 그의 시도가 새롭고 도전적인 것은 단순히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성서 설화들의 신화적 배경, 내지는 신화적 요소들을 밝힌다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p276]그러나 무엇보다도 캠벨이 이 책에서 집요하게 비판하는 것은 신비를 전달해야 할 기독교 전통의 언어가 오로지 역사적으로 이해됨으로써 사실들에 대한 서술로 변질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역사적 계시를 강조함으로써 인해 종교적 언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은유와 상징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신성과의 일치에 대한 감각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캠벨이 의하면 신화의 언어는 은유이며, 신화의 은유적 언어는 모든 이름들과 형식들을 초월하는 궁극적인 신비를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 안의 경외와 경험, 존경의 경험을 일깨우고 유지한다. 그는 이것을 우파니샤드에 나와 있는 한 마디 말로 표현하고 있다 : Tat tvsm asi. 즉 “네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말이다.

[p276]내적인 불꽃이 결국은 만물의 근원이자 신으로서의 궁극적 존재와 하나라는 것이며, 종교적 수련의 중요한 과제는 내 안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p279]사실적 의미는 종교의 요체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약속이 땅’이라는 말을 은유로 읽는다면, 그 말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공간, 마음의 내밀하고도 영적인 영역을 나타낸다. 그곳은 누군가를 무찔러서 내쫓은 다음 들어가야 할 지구상의 어느 지역이 아니라, 명상과 관조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마음의 내밀한 장소이다. 동정녀 탄생도 처녀 마리아가 남자와의 성적인 결합 없이 예수를 낳았다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신비가 세상에 임하는 놀랍고도 기적적인 방식을 나타낸다. 하느님 나라도 이 땅의 어딘가에 임하는 실제 영역이 아니라 마음의 내밀한 공간이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

Ⅲ.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캠벨의 신화학 중에서도 유대 –기독교 관련 부분만을 중점적으로 추려내어 정리한 책인데, 무엇보다도 그 편집이 돋보이는 책이다. 사실, 캠벨의 책들은 본인이 직접 글을 썼거나, 인터뷰를 옮겨 두었거나, 강의록을 그대로 옮겨 두었거나의 경우와는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나 산만함이 그 특징이었다. 그리고 그 산만함이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불친절한 요소로 작용을 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다른 책들에 비해 그 불친절한 요소를 많이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된다.

이는 엮은이인 유진 케네디 박사의 편집 능력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짐작해 보건데, 유진 케네디 박사의 수준 높은 구성 능력은 그가 캠벨의 사상에 대해 그리고 캠벨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어서 일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그는 핵심을 빠뜨리지 않고 한 권의 책에 간결하게 잘 담아둘 수 있었을 것이다.

편집 중에서는 특히 전체적인 장의 구성이 좋았다고 생각된다. 은유와 종교적 신비의 관계를 밝히는 부분을 제1장에 집어 넣어서 신화에서의 은유에 대해 개략적인 설명을 하기 시작하여 점점 더 구체적인 방향-즉 ‘제 6장 유대-기독교 영성의 상징적인 이해’에서 유대교-기독교와의 관계로 중점적으로 들어감-으로 끌고 들어가는 점진적인 스타일의 장 구성이 좋았다고 생각이 된다.

각주 부분도 매우 뛰어났다. 다양한 문화에서 나오는 서로 다른 신화들을 그 때 그 때 적절하게 인용을 하는 캠벨의 이야기 스타일로 볼 때, 이야기의 흐름을 산만하지 않게 끌고 가기 위해서는 이런 자세한 각주 부분은 절실히 요청이 되는 부분이었다. 이 책의 편집자들을 이 부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본문의 내용을 좀 더 부드럽게 이어지게 만들고 독자가 궁금해 하는 부분은 더욱 꼼꼼하고 자세하게 설명해 둔 각주 부분, 칭찬할 만하다.

앞에서 주로 이 책의 편집에 대해서 많은 칭찬을 늘어 놓았는데, 편집 이외에 번역 부분에 대해서도 칭찬을 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캠벨의 신화에 대한 다른 여타의 번역서보다 이 책의 번역이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번역서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매우 쉽게 그 내용이 전달 되는데 이는 역자 박경미의 뛰어난 번역 능력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번역 능력은 그녀의 언어적인 능력 이외에도 그녀의 학문적인 배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역자는 기독교학을 연구하는 학자인데 이로 인해 그녀는 성경과 여타의 종교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다. 이러한 그녀의 배경 지식이 이 책의 번역에 오롯이 녹아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왜 언어 이외에 많은 배경 지식을 지닌, 제대로 된 번역인이 번역을 해야 하는 지는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역자 해설’ 부분은 한 권의 책에서 그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만은 예외가 적용된다. 역자는 ‘역자 해설’ 부분에서 책의 앞부분에서 미처 설명되지 않았던 부분,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다시 꺼내어 꼼꼼하게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여기 나온 그녀의 해설이 너무도 명쾌해서 이 부분만 읽어도 이 책의 요점을 대부분 파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지만 제대로 된 역자가 책 한 권을 얼마나 빛내 줄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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