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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1일 11시 49분 등록
신화의 이미지_3

조셉 캠벨 / 홍윤희 옮김


1. 작가에 대하여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캠벨의 죽마고우가 있었다는 사실. 그의 이름은 루이스 월레스이다. 얼마 전, 나는 그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캠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나의 요청에, 그는 흔쾌히 답신을 보내온 것이다. 그는 벗과 주고 받았던 여러 통의 편지들을 인용하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거기에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있었고, 완전히 새로운 내용도 있었다. 캠벨에 대한 그의 정(情)은 각별했다. 그의 편지를 소개한다.


조지를 기억하시는 여러분들께.

먼저 제 소개를 하는 게 좋겠군요. 저는 조지(조셉 캠벨)의 오랜 친굽니다. 저는 그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봐 왔지요. 그와의 우정은 우리가 5살이었던 1909년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함께했지요. 저는 아직도 그를 그리워한답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그를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여 오만상을 짓게 되는군요. 허허. 주책이지요?

제가 받은 요청은 조지가 어떤 위인이었는가에 대해 객관적으로 기술해 달라는 것이지만, 제가 그 객관적이라는 원칙 앞에 충실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조지에 대한 기록은 ‘기억’이라기보다는 ‘추억’에 가까운 것이어서, 입가에 향수를 머금지 않은 채로는 도무지 쓸 방법을 찾을 수가 없군요. 여러분은 제가 다소, 조지에게 치우치더라도 쓸쓸한 늙은이의 바램이거니 하며 웃어넘기시기 바랍니다. 그럼, 시작해보지요.

그는 봄에 태어났습니다. 봄은 초롱한 계절이지요. 봄은 그에게 맑음을 주었나 봅니다. 그의 생각은 우리들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도시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친구였지요. 항상 전원(田園)의 것들에 적(的)을 두고, 먼 발치에 무언가를 두고 온 양, 향수에 젖곤 했어요. 뉴욕은 애초부터 그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거지요.

언젠가,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리는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가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 동네의 아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그 쇼를 보고 왔을 겁니다. 쇼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온 아이들로 연일 만원이었지요. 물론, 우리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쇼의 재미도 재미였지만, 우리는 행사장의 분위기와 오랜만의 나들이에 들떠 있었지요. 조지도 그 쇼를 꽤나 즐거워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쇼를 본 후, 조지가 한동안 입에 달고 다녔던 말이 있습니다. 어찌나 되뇄던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군요. 그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인디언의 몸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어. 아니, 함성을 지르고 있다고!”

몇 년 뒤, 조지는 뉴 로셸로 이사를 갔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우리들은 종종 편지를 주고 받았지요. 그는 도착하자마자 제게 이런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친애하는 루이
찰리와 난 잘 도착했어. 여긴 뭐랄까. 사람들이 회색 빛을 띠고 있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지? 벌써 그리워. 오늘 밤엔, 시간을 돌이켜 다시 그곳에서 함께 하는 꿈을 꿀 꺼야. (…)

둥지를 떠나, 낯선 곳에 서게 된 아이들이 늘 상 그렇듯, 조지도 적잖은 상실감에 젖어 있었나 봅니다. 그러나 그는 곧 뉴 로셸의 생활에 적응한 듯 했습니다. 얄밉게도 말이지요.

(…) 루이! 이곳은 정말 대단해! 어린이를 위한 공립 도서관에는 엄청난 분량의 책이 있어. 아마 상상도 못할걸? 인디언에 관한 책만 해도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나는 매일 이곳에서 책을 읽어. 찰리도 매일 나와 함께 이곳에 오는데 (…)

맞아요. 조지는 책을 좋아했습니다. 매일 인디언에 관한 책을 읽었지요. 인디언에 대한 그의 관심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이건, 조지의 집에 불이 나서, 모아두었던 인디언 책과 유물들이 모두 타버릴 때까지 계속되었지요. 조지가 15살 때였던 걸로 기억해요.

조지의 학창시절은…… 여전했다고 해야 할까요? 캔터베리에서도, 다트머스에서도 그는 항상 우등이었어요. 조지처럼 순수하게 학문에 빠져들었던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는 천상 학자였지요.

1921년은 조지에게 꽤나 의미 있는 해였습니다. 그의 인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친애하는 루이.
(…) 얼마 전에 멜레코우스키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로망스>를 읽었어. 나…… 생각을 좀 바꿀 셈이다. 문학을 하고 싶어. 아직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진 않았어. 너에게 처음 말하는 거야.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인디언에 대한 생각도 좀 굳히게 되었고. (…)

그는 곧 콜럼비아 대학의 영문과로 옮겨갔지요. 부모님의 반대가 좀 있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워낙 굳은 친구였으니까요. 그의 결심을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조지는 거기서도 썩 잘 해냈습니다. 육상도 하고, 밴드도 하면서 말이지요. 재미있는 친구지요?

1927년에 조지는 프랑스로 갔습니다. 이후 뮌헨에도 조금 있었고요. 그의 꿍꿍이는 대략 이런 것이었지요.

(…) 루이! 아무래도 소르본에 다녀와야겠어. 조지프 베디에르 기억하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쓰신 분 말이야. 그분 밑에서 좀 배워야겠어. 그리고 산스크리스트어나 로망스어 같은 언어도 좀 배워오려고. 전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났던 것 이야기했었지? 동양철학을 보려면, 배워두어야 할 언어가 좀 있어. 몰랐는데, 소르본에 가면 여러 언어를 배울 수 있데. (…)

(…) 다음 달에 뮌헨에 가게 됐다. 프로이트, 융, 토마스 만, 괴테 같은 인물들에 대해서 확실하게 해둘 셈이다. 철학의 본고장이라는데,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

이 친구…… 한동안 연락이 두절되었드랬죠. 후에 알고 보니, 고생을 참 많이 했더군요. 귀국해서는 직장을 찾지 못해 우드스탁 숲에서 극빈생활을 했다나요? 책이 그렇게 좋은지, 이후에 보내온 편지에서 조지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하더군요.

(…) 계속 읽었다. 배를 움켜쥐어야 할 때면, 의자에서 내려와 쪼그리고 읽었다. 그러면 이내 허기가 달아나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 내 평생에 그 때처럼 치열하게 읽었던 적은 없었다. 책이 없었다면, 나는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

그렇게 공부를 하더니만…… 조지는 곧 선생이 되더니, 얼마 안 있어 대학에서 가르치게 되었지요. 사라 로렌스 대학의 문학부 교수가 된 겁니다. 지금쯤 진을 소개해야겠군요. 교수가 제자에게 흑심을 품다니. 조지는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닌 모양입니다. 허허. 제게 이런 편지를 보내올 때부터 낌새가 수상했지요.

(…) 자네는 가르치는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전에는 몰랐는데, 가르치는 것이 일종의 교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 문학이라는 주제로 서로 접촉되어 느낌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지. 그러다 보면,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는 서로를 가르는 벽을 헐고 한 원안에 들오올 수 있게 되는 거야. 그때에는 오직 서로를 배우고 서로를 느끼고 서로를 아는 것에 심취하게 된다네. 어쩌면, 가르친다는 것과 배운다는 것은 각각이 모두 사랑일지도 모르겠네. (…)

그는 곧 청첩장을 보내오더군요. 교수와 학생이 결혼을 하다니…… 재미있는 친구에요. 저는 기쁜 마음으로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었지요. 진은 이후에 그레이엄 무용단을 거쳐 세계적인 안무가가 되었는데, 우리들은(조지와 저는) 공연이 있을 때면, 매번 진을 응원하러 다니곤 했지요. 진은 우리를 보며 아이처럼 웃어주었어요. 우리는 그게 좋았습니다.

1941년은 조지가 (저와도 각별했던)짐머를 만난 해지요. 우린 자주 주말을 함께 보내곤 했는데, 조지와 저는 늘, 그(짐머)의 동양학 편린에 휩싸이곤 했어요. 그는 열정적이었습니다. 조지는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요. 이후, 조지가 힌두교와 불교에 그렇듯, 깊게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짐머의 영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짐머가 갑작스럽게 폐렴으로 떠나고, 우리는 그 상실감을 달랠 길이 없어 한동안 흐리터분하게 지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몇 개월간의 기억은 조지와 제게는 희미한 안개처럼 가리워져 있습니다. 이후, 조지는 볼링겐 시리즈로부터 짐머의 미완성 된 유작 4편을 완성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는데, 그 일을 흔쾌히 승낙한 것도 아마 그 희미함을 걷어보려 했음일 겁니다. 조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짐머의 유작을 마무리하면서, 조지는 비교 신화학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제게 이런 편지를 보내왔지요.

(…) 신화들의 움직임은 놀랍다. 세계 각지의 신화가 어떻게 이렇듯 유사성을 보일 수 있지? 융은 신화를 ‘집단의 꿈’이라 정의했다. 이건 우리들 무의식의 심연에서 동일한(집단의) 모티프의 꿈을 꾸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 꿈을 우리가 기억하지는 못하지. 하지만, 그것은 남아있다. 그리고 그 꿈은 조상들이 선사시대부터 꾸던 꿈과 같다. 이 꿈의 발로가 바로 신화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꿈의 내용을 신화로 표현해 온 것이다. 이것이 세계의 신화가 유사성을 보이고 있는 이유다. 이것은 묵시와 같은 것. 좀더 조사해봐야겠지만, 이 가설을 가지고 책을 하나 쓸 셈이다. 책을 쓰면서 더 뚜렷해지겠지. 제목은 미정이지만, <영웅들의 얼굴> 정도로 해둘 셈이다. (…)

1949년, 출판 이후 신화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국립예술문자협회상을 받은 그 책의 이름이 바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입니다. 신화학의 고전이라 할만한 책이 쓰여진 것이죠.

조지는 이때부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신의 가면> 시리즈를 비롯하여, <신화의 이미지>, <야생 수거 위의 비행> 따위의 저서를 잇달아 내놓으며 신화학의 거장이 되어갔지요. 1972년부터는, 아예 교편을 내려놓고, 세계를 다니며 강연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는 행복해 보였습니다.

1982년, 그는 결국 하와이로 이사를 갔지요. 호놀룰루에 도착한 그는 아이처럼 좋아했습니다. “왜 진작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까?” 하며. 저는 그의 집에 몇 개월 다니러 갔었는데, 아침에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해변을 배경 삼아 책을 읽고, 저녁에는 샹들리에가 달린 거실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파도소리에 진지한 클래식을 섞어가며, 가만히 왈츠를 추곤 하는 그의 생활을 잠시나마 함께 했더랬죠.

그리고, 사랑하는 조지는 1987년에 먼저 갔습니다. 그 해 가을은 제게는 너무 쓸쓸했답니다. 그 상실감을 표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군요. 단테의 마음을 알 듯 합니다. “아아, 내 말은 생각에 비해 얼마나 약하고 모자라는가, 그리고 이 생각 또한 내가 본 것에 비하면 ‘조금’이라는 말조차도 못할 만큼 모자라는 것이다!" <신곡The Divine Comedy 중 천국 편>

하지만, 조지는 오늘도 많은 이의 기억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의 여러분들보다 더 오래 살아갈지 모릅니다. 아니, 신화가 있는 곳이라면, 그는 영원히 기억 되겠지요. 저도 곧 누군가의 기억으로 살아가게 될 겁니다. 여러분도 곧 그럴 거구요. 그리고 그 기억의 주인공들이 다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게 될 즈음, 저나 여러분이나, 조지가 드러내고자 했던 참 뜻을 알게 될 꺼라 믿습니다.

조지도, 기억이 되기 전까진 여러분처럼 흐릿했을 겁니다. 이제는 알게 되었겠지요. 신화가 진정 무엇이었는지를.

2008년 4월 맨하튼의 발치에서 소중한 조지의 지기(知己之友), 루이스 월레스가.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언어가 떠난 자리에서 이야기는 더 풍성하게 들려올 수 있음을 [10]

Part 1. 꿈으로서의 세계
우린 그런 것들이지
꿈으로 만들어진 것들, 하여 우리의 작은 생은
한숨 잠과 함께 한 바퀴 도는 것이지.
셰익스피어, <헛소동> [20]
중국의 현자 장자는 자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일어나 상념에 잠겼다. 자신이 나비가 되는 꿈을 꾼 사람인지, 혹은 사람이 된 꿈을 꾸고 있는 나비인지. [20]
우리들이 스스로 믿는 것처럼 우리는 어떤 고결한 신비의 반영인가? 그렇다면 그 신비가 ‘신’에 관한 우리의 상상 속에서 적절하게 표상되는가? [29]
한낮의 빛과 달빛은 다르다. 사물들은 달빛 아래에서 볼 때와 태양 아래서 볼 때 서로 다르게 보인다. 그리고 성령에게는 달빛이 보다 더 진실한 빛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토마스 만Thomas Mann <요셉과 그 형제들Joseph and His Brothers>에서 달의 문법Moon Grammar) [86]
아무런 위험 없이 여인과 함께 산다는 것은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것보다 더 어렵다. (성 버나드Saint Bernard) [87]

Part 2. 우주 질서에 대한 생각
천천히, 아주 천천히, 땅과 하늘 사이에서 타네 마후타는 한 그루 카우리 소나무처럼 일어났다. (…) 이윽고, 하지만 시간의 막대함으로 보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 하늘과 땅이 붙어 있기를 체념하기 시작했다. (마오리 신화) [105]
이제 나는 듣노라 코욜리 새의 말을
생명을 주신 분에게 대답하는 그의 말을.
그는 노래하면서, 꽃을 바치며 그의 길을 간다.
그의 말들은 옥돌처럼, 케트살 새의 깃털처럼
비가 되어 내린다.
생명을 주신 분을 기쁘게 하는 게 이것일까?
이것이 이곳 지상에서의 유일한 진실일까?
(아즈텍 시인 아요콴 퀘츠팔친Ayocuan Quetzpaltzin, <꽃과 노래: 소치틀 인 쿠이카틀Xochitl in cuicatl>) [199]
삶이란 죽음의 얼굴 위에 덮어쓴 가면일 뿐이다. 그렇다면 죽음도 또 다른 가면일 뿐인가? 아즈텍 시인이 물었듯,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 너머에 진실이 있다고, 혹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199]
애착에서 슬픔이 솟아나고
애착에서 두려움이 솟아나니
애착에서 벗어나는 자에게는
슬픔이 없으니, 어찌 두려움이 있겠는가?
(다마파다, 불교 경전) [243]

Part 3. 연꽃과 장미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위로 끌어올린다.
(괴테, <파우스트> 유혹하는 여성의 힘) [267]
(…)
아아, 내 말은 생각에 비해 얼마나 약하고 모자라는가, 그리고 이 생각 또한 내가 본 것에 비하면 ‘조금’이라는 말조차도 못할 만큼 모자라는 것이다!
(…)
그러나 돌연, 내 머릿속에 번개같이 섬광이 스치더니,
내가 알고자 한 것이 빛을 발하며 다가왔다.
내 공상의 힘도 이 높이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사랑은 벌서 내 소망과 내 마음을
한결같이 도는 수레바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태양과 뭇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이었다.
(단테, 신곡 천국 편) [286]
C.G 융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연금술사는 엄격하게 중세의 3분법에 의해 사유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육체corpus, 아니마anima(soul: 혼), 정신spiritus(영혼)으로 이루어져 잇다.” [312]
그는 스스로가 저지른 죄와 자신의 딸을 보고 말았다. (술에 취해서 자신을 딸을 범한 뒤에) [323]
아름다운 깃털을 가진 두 마리 새, 이 둘은 친한 친구들
같은 나무를 꽉 붙들었네.
한 마리는 그 달콤한 열매를 먹고
다른 한 마리는 먹지 않고 바라보네.
(…)
<리그 베다> [325]
이상은 모두 넌센스라고 간주한 바이런은 비너스에게 <해롤드 도련님Childe Harold>라는 다음의 시를 바쳤다.
우리는 응시하고 돌아선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아름다움에 눈멀고 아름다움에 취해서, 심장이
그 충만함으로 진동할 때까지; 거기에 – 영원히 거기에 –
예술의 개선 마차에 목이 감긴 채로,
포로들처럼 서서, 떠날 줄을 모르며
치워라! 아무 말도, 적절한 표현도 필요치 않다.
탁상공론하는 바보들이 모여있는
대리석 시장의 하잘것없는 지껄임들도
― 우리에겐 눈이 있다. [330]

Part 4. 내면의 빛의 변형
흔들리는 물결 위에 흩어졌던 그림자들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376]

Part 5. 희생
나는 종교를 자연의 운행이나 사람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조정한다고 믿어지는, 초인간적 힘에 대한 회유나 의무로 이해한다. 이렇게 정의할 때, 종교는 이론과 실천의 두 가지 요소, 곧 인간보다 우월한 힘에 대한 믿음과 그 힘을 달래거나 기쁘게 하려는 시도로 구성된다. 두 가지 중에서는 분명 믿음이 우선한다. 우선 어떤 신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그것을 기쁘게 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이 그에 상응하는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신학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사랑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일정하게 다스리지 않는 사람은 결코 종교적이라고 할 수 없다. (프레이저, <황금가지>에서) [511]
(…)
그 놈이 한번 발칵 성이 나면 사자한테도 덤벼들 거에요.
뾰족한 가시덤불도, 둘러서 있는 수풀도 그 놈이 겁나는 듯
나타나기만 하면 갈라서고, 그 놈은 그 사이로 돌진하지요.
(…)
(셰익스피어, <비너스와 아도니스>에서) [559]
신은 자기 자신을 위해 희생된다. (프레이저) [567]

Part 6. 깨어남
(…) 여래께서 당신의 음식을 마지막 식사로 드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은, 춘다 당신에게 불행이자 큰 손해입니다. (…) 춘다여, 여래께서 당신의 음식을 마지막 식사로 드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은 당신에게 행운이자 소득입니다. (…) (고대 인도의 민족 대서사시 중 하나, 마하파리니바나 수타) [580]




3. 여신(타고 남은 불기운)
“언어가 떠난 자리에서 이야기는 더 풍성하게 들려올 수 있음을 (…)” [10]

밝혀두지만, 이 책은 그림 책이다. 600여 페이지의 지면에 약 420장의 그림을 실었다. 두꺼운 책이지만, 알고 보면 본문의 내용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림을 빼고, 새로이 책으로 만들면 200페이지 남짓의 얇은 책이 될 듯 하다.

그렇다고 얕잡아 볼 책은 아니다. 420장의 그림 중 1/3에 해당하는 150여 장이 장문의 해설을 달고 있는데, 이 내용이 만만치 않다. 이 내용만 따로 모아도 책 한 권 분량이 된다. 게다가 생소한 내용이 많고, 그 내용을 시적으로 은유(간접적으로 암시)하려 하였기에 여간의 마음가짐으로는 정독(精讀)으로 일독(一讀)하기가 쉽지 않다.

책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대략 이런 것이다. “세계의 신화들이 남긴 이미지는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놀라운 유사성을 보인다. 여기 보라. 그대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라.”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앞 페이지로 돌아와서 비교해보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새롭게 소개되는 그림들이 이전 그림들과 어떻게 유사성을 보이고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가령, 351페이지부터 363페이지까지는 5장의 유물 사진이 나오는데, 각각 7세기의 마야, 19세기의 티베트, 13세기의 아메리카, 중세의 기독교, 9세기의 인도가 남긴 유물들이다. 이들 사진의 주인공들은 모두 여원인(與願印: 왼손을 내려뜨려 손바닥을 보여주는 자세로 중생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게 해준다는 덕을 표시하는 자세이다)과 시무외인(施無畏印: 오른손을 꺾어 어깨높이까지 들고 손바닥을 보여주는 자세로 중생의 근심을 덜어준다는 덕을 표시하는 자세이다)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본문과 그림에 달린 해설에는 이런 식으로 덧붙이고 있다. “394~395쪽을 볼 것” “이 손을 올메카의 재규어 인간(그림 102)의 왼손과 비교해 볼 것.” “마야의 옥수수신(왼쪽 위, 그림 271)과도 비교해 볼 것.” 이렇게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서술이라고 보면 무방하겠다. 처음에는 좀 지루하지만, 저자가 지시하는 대로 페이지를 넘겨 비교해가며 읽다 보면, 세계 신화의 이미지들이 놀랍게 일치하는 모습에 요상한(?) 재미를 맛볼 수 있다. (그림들은 정말 들어 맞는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따금 소개되고 있는 C.G 융의 환자들이 그린 그림이었다. 이들은 꿈속에서 본 것을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그 그림들은 고대 신화 예술이 남긴 문양들과 일치하고 있었다. “신화의 이미지가 무의식에서 꿈을 통해 올라온 것이고, 예나 지금이나 인류는 같은 꿈을 꿔 왔기에, 세계 신화가 시대와 지역을 물론하고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는 논증에 무게가 실린다.

캠벨의 책이 3번째이지만, 그가 이 책에서 하고자 했던 바 역시, 다른 책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드러내고자 했던 바를 뒷받침하기 위한 자료가 달라졌을 뿐이다. 그는 세계 신화의 유사성을 밝히려 했고, 다른 책에서는 신화의 스토리와 플롯, 모티프 따위를 비교하여 자료로 썼다면, 이번 책에서는 신화가 남긴 예술 작품이나 유물, 벽화 등의 ‘이미지’를 통해서 하고자 했던 바를 한 것이다.

캠벨의 다른 책 중 <네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책이 있다. 그가 쓴 책은 아니지만, 생전 그의 강연 내용과 메모를 바탕으로 ‘조셉 캠벨 재단’에서 펴낸 것이다. 다른 책에서는 희미하지만, 이 책에서는 비교적 명확한 결론을 보여주고 있기에 조금 인용한다.

“근원적 자아는 현실 속에서 다양하고 구체적인 생명으로 활동한다. 신화에 나타나는 은유들은 바로 이 근원적 자아에 대한 직관으로부터 나온 표징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의례화된 표현들을 통해서, 교훈적인 이야기들과 기도, 명상, 연례 축제 등을 통해서, 근원적인 자아가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해당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로 모여 마음으로나 감성으로 근원적 자아를 알게 되고, 이에 따라 살게 된다.”

번역상의 문제와 신화 특유의 표현방식 때문인지, 명쾌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풀어보자.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보다 더 자기 자신다운 ‘영혼’이 있다. (근원적 자아라고 표현했다) 이 영혼은 현실 속에서 다양하게 스스로를 드러내는데, 신화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이 흔히 신화라 부르는 것은 대략 이런 것이다. 각종 제의(제사, 미사, 예배 등의 의례), 교훈적인 이야기, 기도, 명상, 연례 축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통해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 이렇게 하나로 모인 마음은 서로를 향해 ‘자비’라는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본래부터 인간의 영혼이 추구하는 바이다. 따라서 신화의 기능은, ‘자비’라는 영혼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말의 의미처럼. “비록 그의 피부 밑에 나의 신경이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 안에서 내가 고통을 느끼게 된다”라는 쇼펜하우어 기록의 의미처럼. 서로를 동일시하며 사랑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신화의 기능이며, 우리 영혼의 뜻이다.

이 정도가 신화에 대한 캠벨의 결론이 되겠다. 결국 우리가 신화를 알아야 하는 것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발견하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그는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많은 줄거리와 플롯과 모티프와 이미지를 보여준 것이다. 갑작스러운 결론이긴 하지만, 신화를 하는 그의 태도가 다분히 인간적(사랑과 하나됨이라는 그의 결론이 의미하는 바)이기에 마음에 든다.

그러나. 그의 결론이 여전히 억지스럽다는 사실만큼은 끝까지 잡고 있을 셈이다. 단순히, “신화가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기능을 해왔고, 그런 신화가 우리 영혼으로부터 발현 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신화와 영혼이 기능하는 바는 ‘사랑’이다”라는 식의 결론은 논증이라는 철옹성 보다는 의견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하겠다.




4. 내가 저자라면
노블레스 타이틀
제목은 중요하다. 어떤 제목인가에 따라서 그 글을 읽느냐 마느냐를 결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런 내용을 읽은 기억이 난다. “제목으로 유혹해서 첫 문장을 읽게 하고, 첫 문장이 그 다음 문장을 읽게 하고, 그렇게 한 문단이 다 읽히고 나면, 다음 문단이 궁금해져서 계속 읽어나갈 수 밖에 없도록. 이런 식으로 끝까지 쓰는 것이다.” 공감되는 내용이다.

나 역시, 책을 고를 때면 제목을 유심히 본다. 서점에 가면 책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나하나 다 빼볼 수가 없다. 끌리는 제목 위주로 선별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다. 물론, 이 책을 고르기 위해 서점에 갔다는 말은 아니다. 이 책은 커리큘럼 중 하나이고, 선택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선정되어 있는 책이었으니까.

지금쯤 어떤 독자는 어리둥절해 할지 모르겠다. “아하? <신화의 이미지>라는 제목이 끌리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구나? 그런데 이상하네. 별로 참신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매력적이지도 않은 제목이지 않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하고 말이다. 우습지만, 내 말이 그 말이다. <신화의 이미지>라는 제목은 그런대로 괜찮은 것이긴 하지만, 특별히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것이 있는데, <신화의 이미지>는 그것을 잘 지켜주었을뿐더러, 나름의 매력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진정성’이다. 제목이 솔직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책이 너무 많다. 앞서 떠올린 내용처럼, 제목으로 유혹하는 일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 유혹에는 반드시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 본문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반지르르한 얼굴로 호객행위에만 열중인 책들은 정중히 사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화의 이미지>라는 제목은 훌륭하게 역할을 해냈다. 이 책은 그야말로 ‘신화의 이미지’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세계 신화들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 이미지들이 얼마나 맞아 떨어지는지를. 그리고 그렇게 맞아떨어지는 이미지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게다가 역설적(力說的: 힘있게 보여줌)이게도, 그렇게 드러난 신화의 어떠함이, 다름아닌 신화의 이미지임을. (세계 신화가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바로 신화의 이미지(상징, 뜻하는 바)이다)

<신화의 이미지>. 금새 식상해지는 현란한 제목보다는 뜻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포함하고 있는, 기품 있는 제목이 참 좋다. 더군다나, 신화라는 키워드를 들고 서점에 간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빼 볼만한 매력도 있지 않은가?

배려
나는 친절한 책이 좋다. 언젠가, ‘의도적으로 진의를 숨겨서 청중을 현학의 문으로 인도하는 연설가’에 대해, 훌륭한 것인 양 꾸며놓은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솔직히 아직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설령, 그게 그렇게 필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글을 조금이라도 써본 사람이라면, 그 ‘현학’이라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지 않은가?

글쓰기에 있어서 ‘친절’은 나의 지론이다. 어떤 의미에서건, 읽히는 책이 아니라면 나쁜 책일 가능성이 크다. 읽히지 않는다는 것. 어려운 내용을 다룬 것이라면, 성의가 부족했던 것이고, 쉬운 내용을 다룬 것이라면, 제대로 알지 못하고 떠든 것이다. 엄청난 양을 써 내는 것으로 유명한(한 해에도 몇 권씩 책을 쓴다) 강준만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조금 어려운 내용을 조금 쉽게 써라.” 그의 말이 맞다. 쉽게, 성의 있게 써야 한다. 어려운 내용을 다룰 셈이라면, 그 만큼의 성의를 각오해야 한다.

책 이야기로 넘어오자. 신화와 관련한 책이 3권째인데, 이 책이 가장 어려웠다. 그림도 많았고 구성도 깔끔했는데, 소용없었다. 처음 300여 페이지를 읽으면서 “으…... 나 지금 모 하는 거니” 하며 여러 번 자괴했다. 그렇게, 그저 그림 보는 재미로 사막을 지나던 중. 드디어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334페이지였다.

거기에는 지금까지의 내용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이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내용은 어떤 것인지, 게다가 각각의 장을 어떤 식으로 설명할 것인지, 그 숨은 뜻은 무엇인지 까지, 크고 정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게 아니었다면, 400페이지 즈음해서 그림위주로 촤르르 넘겨버렸을지 모를 일이다.

솔직히, 이 책이 친절하다는 얘기는 하지 못하겠다. 지도나 안내방송은 고사하고, 표지판이나 신호등 따위의 작은 지침도 거의 없다. 그저 내용, 내용, 내용이다. 가끔씩 비교, 예시, 분류 따위의 친절을 베풀고 있긴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기에는 내용이 너무 벅차다. 334페이지에서와 같은 배려가 더 여러 곳에서 담기었더라면, 훨씬 훌륭한 책이 되었을 것이다.

왜 이리 안 읽힐까?
이 책을 읽는데 꼬박 6일이 걸렸다. 시간을 나누어 틈틈이 들여다 봤건만, 진도가 너무 더뎠다. 이제와 하는 이야기이지만, 읽다가 잠이든 적도 있다. 어려운 책이라 느껴졌기에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천천히 정독하려 했건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기는 쉽지 않았다. 머리말과 옮긴이의 말에 소개된 목차 설명도 여러 번 읽었고, 한 장(章)이 끝날 때면 여지없이 목차로 돌아와 큰 그림을 놓지 않으려 애썼는데, 안 읽히기는 여전했다.

왜 일까? 단순히 어려운 내용이라서? 이유를 정리해 봤다.

첫째, 추측 성 발언이 난무한다. “~일지 모르겠다” “~일 것이다” 등의 표현이 많을 뿐 아니라, 어떤 때는 저자 스스로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독자에게 모든 짐을 떠넘기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들은 이런 식으로 매장되어 있는가? 그런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런 질문들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이런 식의 결론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여운을 남기고 싶은 건가? 여운이 아니라 안개만 뿌옇게 남았는걸?” 하며 답답하게 넘어갔던 적이 여러 번이다.

자신의 견해를 확실히 밝히데, 그 견해를 갖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쓴다는 것은 증명해내는 것이다. 명확함과 친절함이 생명이다. 굳이 여운을 남기고 싶다면, 누가 보더라도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독자의 고민이 더 깊게 타 들어갈 수 있도록 많은 사색의 땔감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나무 쪼가리 몇 개 던져놓고 손을 놔버리는 것은 둘 중 하나이다. 성의가 없는 것이거나, 숲이 어디인지 모르는 것.

둘째, 번역이 미숙하다. 나는 항상 이것이 불만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쓴 내용이 아니라 하더라도, 한 권의 책을 새롭게 뽑아내는 창조의 작업이 아닌가? 왜 이렇게 성의가 없는 번역본이 많은지 모르겠다. 그뿐인가? 성의는 둘째치고 자격미달의 번역가도 왕왕 있는 듯 하다. 비록 책을 번역해 본 일이 없는 문외한이긴 하지만, 쓰기의 기본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쯤은 안다. “과연 이런 책도 출판이 가능한가?” 라는 의문을 자아내는 책이 있다. 신기한 일이다.

물론, 이 책을 신기한 책의 부류로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주어 동사 짝 맞추기, 형식에 맞게 대구 이루기, 긴 문장 다듬기, 수동태 표현 아끼기 따위의 기본은 비교적 잘 지켜졌다. 눈을 부릅뜬다면, 원문 없이도 대부분 이해할 수 있게끔 번역된 셈이다. 하지만 좀더 신경 써야 할 부분에 대해서 소홀했던 것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이 문장을 읽어보기 바란다.

“서로 다른 나라, 서로 다른 하늘 아래 사는 인간 정신의 유사한 구조에 비슷하게 작동하는 유사한 원인들의 결과이다.”

제임스 G. 프레이저가 <황금가지>라는 책에서 ‘세계 신화들이 공통점을 보이는 이유’에 대해 쓴 것을 인용하는 부분이다. 어떠한가? 한 번 읽으면서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겠는가? 내 경우는 아니었다. 세 네 번 천천히 읽어보고서야 겨우 의미를 알아 챘다. 번역상의 문제 때문이다. 이렇게 바꾸어 보면 어떨까?

“서로 다른 나라, 서로 다른 하늘 아래 사는 인간의 정신구조가 유사했고, 거기에 작동한 원인들 역시 유사했기에, 그 결과도 그토록 유사하게 나타난 것이다.”

아니면 좀더 운치 있게.

“서로 다른 나라, 서로 다른 하늘 아래 사는 인간 정신의 유사한 구조. 유사한 작동. 그리고 유사한 원인과 유사한 결과이다.

셋째, 너무 많은 이야기를 너무 전문적으로 하고 있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책의 서문에서는 캠벨을 이런 식으로 소개한다. “자신이 연구하는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너무나도 몰두해서 자신을 잊어 버릴 정도였으며, 자신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의 열정은 아름답지만, 이런 식이라면 자칫 혼자서 떠드는 일이 되기 십상이다.

이 책에서 그가 소개한 신화는 몇 백 개에 이른다. 게다가 400여 장의 유물 사진을 소개하고 있고, 그 중 1/3에는 전문적인 해설이 달려 있다. 책 한 권으로 소화하기에는 많은 양이다. 또한 그의 관심분야인 동양의 요가 부분은 완전히 전문적이다. 명상의 의미와 방법을 소개함은 물론, 요가 명상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차크라 6단계를 심도 있게 다룬다. 이 부분은 아무리 집중하려 해도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여기에는 물론 내 문제도 있다. <신화의 이미지>가 다루는 테마들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나의 수준이 너무 낮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문제도 분명 있다. 말이 되었든 글이 되었든 상대를 배려하며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다.

가장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 두 부류 있다. 하나는 종교적 감상에 심취한 사람. 그리고 또 하나는 상대방은 잊은 채로 혼자서 떠드는 사람. 사람들은 이 두 부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독서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글쓰기 역시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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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4.22 12:39:11 *.127.99.39
저자소개, 제가 해보고 싶었던 구성이네요, 아주 좋아요. 글을 엮어가는 솜씨가 많이 고민하며 오래 글 쓴 사람 같아요.
그런데 캠벨의 친구로 등장하는 루이스 월레스는 개구장이가 창조한 인물인가요, 아니면 실제 인물인가요?

캠벨은 상대방을 잊은 채로 혼자서 떠드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너무 열정적이어서 상대의 페이스를 본의아니게 무시하는 것 같지요?
캠벨 책 4권을 읽고나니 모호했던 것들이 다시 읽혀요.
아마 쿤달리니 명상도 그의 저서가 아닌 그것에 대한 책을 한 두권 읽고 읽으면 캠밸의 심중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스스로에게 강제성을 부여하며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레이스를 혼자서 감당하는 그대의 아름다운 행보와 의지에 큰 박수를 보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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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쟁이
2008.04.22 17:41:32 *.235.31.78
와! 박수 감사해요. ㅎ

그런데 이거, 정말 쉬운 일이 아니군요.
레이스를 마친 연구원 분들은 참 대단했네요.
지금 달리고 계신 분들도 대단하시고요.
한 주 내내 쉴틈이 없어요. ㅋ

그래도, 한 편으로는 신나게 이 과정을 즐기고들 계시겠죠? 므흣.

루이스 월레스는, 허구의 인물.
제가 좋아하는 작가 C.S 루이스와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의 주인공 자말 월레스를
짬뽕해서 만들었지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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