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校瀞 한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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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 / 김화영옮김 / 현대문학
Ⅰ. 프롤로그
Ⅱ. 저자에 대하여
미셀 투르니에 책 중에 세번째 독서이다. 저자를 알고 그의 저서를 보면 그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지만, 실제로 그를 책으로 만나기 전에는 저자를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1월에 읽은 미셸 투르니에 산문집 [짧은 글 긴 침묵]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노신사, 넉넉한 옆집 아저씨 같은 그를 만났다.
이번의 외면일기에도 그는 여전히 그러한 자신의 매력을 살며시 풍긴다.
미셸 투르니에와 그의 소설, 수필들에 대해서 그가 만들어내는 글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작품은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원시적 상상력이 현대적 감수성으로 재해석되는, 기분 좋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의 작품 세계는 동화적이고 악마주의적인가 하면,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이야기 형식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매우 철학적이고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가 삶의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은 매우 유머러스하고 쾌락주의적이다.
그의 글은 완전히 그와 같다. 그가 그의 집에 대해서 말한 것처럼. 그는 글과 함께 평생을 살았다.
"지젤이 내게 말한다 : “당신의 집이 참 마음에 들어요.” 나는 그에게 대답한다 : “나의 집은 바로 나 자신인걸요.”
45년동안 한몸처럼 같이 살다보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쌍이 되고 만다."(95p)
Ⅲ. 내가 저자라면
모든 감각들이 열린 저자와 그가 속한 세계가 구분되지 않는 것.
저자만을 이야기한다면, 혹은 그의 글만을 이야기한다면 어쩌면 사진에서 그를 오려낸 사진들을 보는 것처럼 이상할 것 같다.
외면일기. 세계를 받아들이는 하나의 방법.
자동차 앞유리에 찍힌 발자국, 친구들의 촌철살인의 한마디, 집 주변을 날아드는 새, 바람에 속에 선 나무의 몸부림. 그것들이 저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올만큼, 저자는 그것들을 알아 들을 만큼 깨어 있다. 저자는 늘상 깨어 있다. 그리고, 이 외면일기는 그의 그런 감각적인 그의 내면(의식)의 일기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의 저자처럼 깨어 있고 싶다.
일상의 황홀이다.
특별한 틀을 사용하지 않고, 구성한 것이 저자의 황홀을 그대로 드러낸다. 주제별로 엮지도 않았고, 글이 쓰여진 순서대로 월별로 엮은 것이다. 지문이 가장 잘 드러나는 밋밋한 도기처럼. 그를 잘 드러내는 구성은 매우 간단하다.
Ⅳ. 가슴으로 읽는 글귀(인용)
[5] 이 ‘외면일기’는 지난날의 소박한 시골 귀족들이 추수, 아이들의 출생, 결혼, 초상, 날씨의 급변 등을 적어두곤 했던 ‘출납부’와 비슷한 것이다.
[6] 밖에서 마주친 사물들, 동물들, 사람들이 내게는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보다 항상 더 흥미롭게 느껴졌던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저 유명한 말이 내게는 항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명령으로만 느껴졌다. 나는 나의 창문을 열고 문밖으로 나설 때 비로소 영감을 얻는다. 현실은 나의 상상력의 밑천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어서 끊임없이 내게 경이와 찬미를 자아낸다.
1월
[15] 발그레하고 향기로운 그 나무토막들이 여간 아름답지 않은데 특히 그 단단한 정도가 완벽하다. 다시 말해서 돌이나 쇠붙이로 도니 같은 크기의 물건처럼 너무 무거운 것도 아니고 마른 장작처럼 너무 가볍지도 않은 것이다. 양과 질이 잘 혼합된 ‘완벽한 무게’라는 이 기이한 개념.
[19]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러나 시간은 또한 우리가 싫어하는 모든 것, 모든 사람들, 우리를 증오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또 고통, 심지어 죽음까지도 파괴하는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잇다. 결국 시간은 우리들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상(喪)과 모든 고통의 원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19] 친구를 잃어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시 접촉하는 주도권을 그에게 맡겨두는 것이다. 그러면 머지 않아 그가 꼼짝도 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이다.
[20] 나는 이 ‘그리스도를 안은 요셉’이 안고 있는 아기가 그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는 ‘추정상의 아버지’에 불과한 것이다. 소설가인 나도 그와 닮은 데가 있다. 내가 마음속에 품어 낳은 아이들의 경우도 늘 이와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는 지금 자신이 품어 낳은 아이들(소설)이 실제는 자신의 손에 의해서 쓰여졌다고 믿어지는 ‘신의 아이’, 즉 신이 주신 어떤 영감에 이끌리어 그것을 쓰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22] 나는 오늘 아침에 오스트리아 텔레비전 방송을 보다가 비엔나 왈츠를 연주하는 어떤 교향악단 지휘자에게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 나는 오래전부터 교향악단의 지휘자란 대체 무엇에 소용되는 것인지 늘 궁금했었다. 아무리 보아도 내 눈에 그는, 연주자들을 아무도 쳐다볼 생각을 않는데 쓸데없이 자기 혼자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허수아비만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보니 그는 오직 관람객들만을 위해서 안무를 해 보이는 춤꾼임이 분명했다. 그는 연주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펄쩍펄쩍 뛰고 두 팔을 휘젓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하는 일은 자신의 온몸으로 음악을 육화(肉化)하는 것이다.
[23] 콕토의 말 : “시인은 꿈에서 깨면 즉시 바보가 된다. 즉 지적(知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30] 우리집 정원에서 괴물처럼 엄청난 덩치로 자라버린 코카서스 산 어수리나무를 보고 어떤 여자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난다.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니까 그렇죠. 이 나무가 그걸 아는 거예요.”
[32] “뭘 그렇게 겁을 내?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는 걸 자네도 알잖아.” 내 대답 : “나야 알지. 하지만 개도 그걸 알까?”
2월
[38] 아니, 욕구도 없으면서 무엇 하러 거길 찾아가는 것일까? 그의 대답인즉, 자기가 욕망하는 것은 그 여자가 아니라 그 여자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그의 등을 떠미는 것이 욕망에 대한 욕망이라니......
* 자신이 여전히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즐거운 것이지.
[39] 신의 뜻을 조작하려 들지 말고 신 자신이 우리에게 말을 하도록 내버려두자. 그렇게 될 때 신은 우선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나는 존재한다. 그건 바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동시에 훗설의 현상학이다. 현상학: 자체가 말을 한다. 그것은 또한 중세시대의 ‘말씀’이다. 신의 ‘말씀’ :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있는 존재다.”
[46] 버나드 쇼 :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해주지를 바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라. 그들의 취향이 당신과 똑같은 것이라는 증거는 없으니까.”
3월
[58] 그 친구는 내게 자기 어머니의 처녀적 성은 마레샬(Maréchal)이었는데 그녀가 마레쇼(Maréchaux)라는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녀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이름의 알파벳 순서에 따라 자리를 정했다. 따라서 그녀의 어머니 마레샬은 마레쇼라는 성을 가진 여자아이와 짝이 되었다. 그녀는 자기 짝의 집에 갔다가 친구의 오빠를 알게 되어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녀의 이름은 단수에서 복수로 바뀌게 되었다.
[59] 빅토릐 위고 : “오리는 털 달린 돼지다.”
[64] 여자 껍추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는 예수이기 때문에 수녀가 된 어린 여자 꼽추 이야기.
[65] 프로스트의 설문 : “당신의 행복한 이상은? 아주 어린 나이일 때부터 천재적인 아이를 키우는 것. 어떤 분야에서건 빛나는 재능들이 싹트는 것을 보고 그 재능이 피어나도록 돕는 것. 동일한 존재 속에 부드러움과 찬미가 합쳐지도록 하는 것.”
[68] 어떤 알지 못하는 여자가 내게 원고를 보내온다. 설명인즉, “저는 말을 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서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겠다. 하지만 글을 쓴들 누가 읽어주겠는가?
[69] 그가 젊은 여자를 살해한 것으로 확신한 경찰관이 그의 방을 수색하면서 그에게 질문한다. “네가 분명 여자를 죽였단 말이지? 그러고도 식탁에 가 앉아 식사를 해?” 이렇게 말하면서 냉장고를 열어본 경찰관은 정성스레 썰어놓은 피해자의 사체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실신하고 만다. 이세 사가와의 설명 : “그 여자를 죽일 생각은 없었어요. 사랑했어요. 그냥 그 여자를 먹고 싶었을 뿐이에요!”
[72] 장님이 말한다. “나는 이제 어둠이 어떤 것인지 알겠다. 그대가 내 몸을 더 이상 건드리지 않을 때 그것이 어둠이구나.”
* 슬프네. 서로의 관계가 없어지면 그것이 바로 어둠인 것일까? 장님은 소리와 감촉과 코로 세상을 본다.
[74] “암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아. 암은 목숨을 앗아가기 전에 우선 사람의 기를 꺽어놓는 거야. 반면에 결핵에 걸리면 성욕이 강해지고 경화증에 글리면 행복감이 일어나는데......”
[74] 문학 분야에 있어서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을 구분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즉, 자신이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책의 탁월한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프로페셔널의 특권이 아닐까 한다. 반대로 아마추어는 자기의 취향과 맞지 않는다 싶으면 즉시 그 책의 분명한 장점들에 대해서도 아예 장님이 되어버린다.
[81] 독일의 《슈테른Stern》지의 한 기사는 ‘불굴의 사람들’이라는 제목 하에 어떤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그 기사에 따르면, 질명에 대한 저항력이 가장 강한 성인들은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니체가 한 말이 그대로 증명되었다고 하겠다. “나를 죽이지 않는 모든 공격은 나를 강하게 만들어준다.”고 그는 말했었다. 면역학의 원리가 그러하다. 즉 백신은 나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공격을 가함으로써 나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 결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은 또한, 초근 ‘어릴 때 앓는 질병’들(유행성 이하선명, 수도, 백일해, 맹장염 등)이 자취를 감추면서 성인들의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화되었다는 사실이다.
[86] 폴 발레리의 플레리아드 전집 제1권에서 문득「물의 예찬」이라는 멋진 텍스트를 발견한다. 문학의 어떤 드높은 경지를 보여주는. 그런데 그 글에 대한 주석이 달려 있어 읽어보니, 그 글이 페리에 광천수 회사에서 발레리에게 청탁한 광고문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레리의 천재성을 이처럼 순전히 상업적인 경우에 활용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인 것 같다. 요한 세바프찬 바하가 소나타나 칸타타의 주문을 받고 불후의 명작을 각곡해준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천재’니 ‘재능’이니 하는 말은 그의 사전에 없었다. 그는 오직 가장 겸허한 장인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4월
[91] 어느 날 나는 히치 하이킹을 하는 어린 녀석 하나를 차에 태워주게 되었다. 이게 웬 횡재나 싶어 신이 난 그 녀석은 의자에 드러눕듯이 기대 앉아서 맨발인 한쪽 말을 자동차의 앞 유리에 갖다 붙이고 있었다. 두 주일 뒤, 나는 카페리에 실었던 차를 마르세유에 도착하여 끌어내린 다음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11월 어느 날 아침, 감자기 기온이 내려가면서 내 자동차의 안쪽 유리에 김이 잔뜩 서리게 되었다. 그러자 자동차 앞 유리에 그 튀니지 아이녀석의 맨발 자국이 또렷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 일상의 황홀.....
[95] 지젤이 내게 말한다 : “당신의 집이 참 마음에 들어요.” 나는 그에게 대답한다 : “나의 집은 바로 나 자신인걸요.”
45년동안 한몸처럼 같이 살다보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쌍이 되고 만다.
5월
[120] 이 군중들은 아마도 공통된 신앙을 통해서 한데 모였기 때문에 우연히 모인 군중보다 더 전형화되고 판에 박힌 모습이 된 느낌이다. 특이하고 희화적인 인물들, 혹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인물들이 얼마든지 있다.
[122] 내 눈의 누관(淚管)이 막힌 것이 분명하다. 그치지 않고 눈물이 나오니 말이. 더욱 기이한 것은 그것 때문에 내가 감상적이 되었다는 점이다. 어떤 감정의 표현이 바로 그 감정의 원인인 경우다.
[125] 나는 어떤 학교의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매일 큼지막한 공책에다가 글을 몇 줄씩 쓰십시오. 각자가 정신상태를 나타내는 내면의 일기가 아니라, 그 반대로 사람들, 동물들, 사물들 같은 외적인 세계 쪽으로 눈을 돌린 일기를 써보세요. 그러면 날이 갈수록 여러분은 글을 더 잘, 더 쉽게 쓸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특히 아주 풍성한 기록의 수확을 얻게 도리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눈과 귀는 매일 매일 알아 깨우친 갖가지 형태의 비정형의 잡동사니 속에서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골라내어서 거두어들일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사진작가나 하나의 사진이 도리 수 있는 장면을 초착하여 사각의 틀 속에 분리시켜 넣게 되듯이 말입니다.”
[126] 감옥이란 단순히 문을 잠근 빗장만이 아니라 지붕이기도 하다. 위를 막고 있는 지붕을 경계하라.
[131] “애들아, 투르니에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뇌에 종양이 있다는 걸 알아둬라. 너희들도 투르니에 집안이니 너희들 역시 미치광이들이란다. 그런데 나로 말하면 집안 전체에서 가장 행동이 얌전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나는 뇌 속에 있는 모든 광기들을 내 책들 속에다 전부 다 비웠기 때문이지.”
[134-135] 긴 두개골을 가진 사람들은 ‘중간 가르마’를 타게 되어 있다. 그런 이들은 대다수의 예수 상, 16세가 이탈리아 화가 파르메산의 <목이 긴 성모와 아기 예수>, 영국화가 로세티가 라파엘 전파를 모양하여 그린 아가씨들, 그리고 실제 현실의 인물들로는 폴 발레리, 알렝, 알프레드 코로 등이다. 둥근 두개골을 가진 사람들은 사발 모양의 헤어스타일이 어울리는 데, 소크라테스, 뒤러가 그린 바오로 성자 상, 베를린트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구별이 중요해지는 경우는 특히 심리학적인 측면이라 하겠다.
긴 두개골을 가진 사람들은 역동적이며, 전투적인 성격, 변덕이 특징이다. 둥근 두개골을 가진 사람은 차분하고 현명하고 안정적이다.
* 얼굴이 긴 사람은 확실히 역동적이다. 활동이 많은 운동선수들은 평균에 비해 비교적 긴 얼굴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의 숨을 쉬는 특징들은 그의 얼굴에 반영된다고 키와 얼굴모양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과학다큐에서 보았다. 둥근 두개골을 가진 사람은 긴 두개골을 가진 사람보다 활동량이 적다. 그는 긴 두개골을 가진 사람보다 더 사색적이고 의 심사숙고한다.
투르니에의 얼굴과 심리학적인 면의 연결은 흥미롭다. 그리고, 그의 관찰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여러 가지의 연결, 넘나듬이 자유로워 보이고, 부럽다.
[135] “뇌는 광대한 대륙이고 그것을 에워싸는 두개(頭蓋)는 그 지도다.”
[136] 스탕달 : “이상화할 것. 라파엘이 초상화를 그릴 때 실물과 가장 닮아 보이도록 하기 위하여 이상화하듯이.”
그 독일 친구는 자신의 손녀에 대해서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 “그 여자아이는 제 아버지를 뱉어낸 듯이 닮았다.”
6월
[144] 나의 과도하고 절대적이며 타개책이 없는 정착의 버릇을 나 스스로도 나무라온 터이다. 그렇다 떠난다는 것, 이사를 간다는 것,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여러 톤의 낡은 잡동사니들을 처분해버린다는 것, 모든 것을 제로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신선한 충격인가! 내 친구들 중에 이렇게 행동하는 이가 여럿이다. 나는 그들을 따라가지는 못하지만 그들을 부러워한다.
[156] 영감을 받은 작가란 곧 자기 자신의 텍스트에 의하여 추월당한 작가다.
[159] 우리 집 정원에서 넓적부리 암놈 한 머리가 제 아들놈 중 하나와 살림을 차렸다. 자연이 앙갚음을 하는지 이 암놈이 모두 새끼를 깔 수 없는 알을 낳았다. 그런데도 암놈은 한사코 알을 품는다. 두 번이나 나는 암놈이 그 알을 깨어서 속에 든 것을 삼키는 것을 보았다. 그러더니 괴상하게도 이놈은 그 알들의 껍질들을 연못에 가지고 가서 씻는 것이다. 이 새는 마치 내게 나 자신에 대한 일종의 희화를 보여주는 느낌이다. 구상하다가 결국은 실패하고 만 작품들의 원고를 버리지 못한 채 끝없이 품고 있는 작가의 희화를 말이다.
[161] 내가 M.W에게 말한다. “나는 위대한 작품을 쓰고 위대한 사랑을 경험하는 꿈을 꾸었어.” 그가 내게 대답한다. “내가 아는 자네로 보아, 오히려 위대한 작품을 쓰는 쪽이 더 울릴 것 같네.”
7월
[168] J.R은 노쇠에 발목이 잡힌 섹스-인간의 흥미로운 케이스로 보인다. 늙어버린 돈 후안인 것이다. 그가 내게 이야기한다. “오클리에서 마르세유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아주 젊은 아가씨를 만났는데 그녀를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고 확신이 들면서 마음이 몹시 아팠어요. 비행기를 타고 가는 그 몇 분동안 나는 옆에 앉아 있는 그녀를 정열적으로 빨아들이는 느낌이었지요. 나는 그녀를 눈으로 마셨어요. 그런데 그녀가 나를 모른 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내가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할 수 없게 되면서부터 이런 일이 점점 더 자주 생겨요. 나의 사람의 능력은 아주 잠시, 잠시만 깨어나는 거예요. 덧없이, 아무런 기약 없이 사랑이 나타날 때만 말입니다. 충동, 열렬한 동경, 그리고는 씁쓸하고 감미로운 낙하.”
[179] Si vis vitam para mortem(삶을 견디려거든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 삶의 필요불가결한 요소인 죽음, 충만하고 온전한 삶은 그 스스로의 죽음을 내포한다.
[180] 상당히 몸이 무거워 보이고 납작코와 들창코지만 그 신선함이 광채를 발한다. 금발 머리, 푸른 눈, 발그레한 살빛, 반질반질한 엉덩이, 과일 같은 어깨. 온 몸이 잘 익은 빵처럼 햇빛에 금빛으로 익었다. 콧망울이 두텁고 선정적인 돼지 같지만 당당하고 육감적이 몸매를 자랑하는 이 아기씨들은 패션쇼에서 선호하는 해골같은 모델들과는 정반대다. 루벤스에서 르누아르에 이르는 전통적 회화에서 바라는 여자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다. 거기에는 음식에 대한 식욕과 에로틱한 욕망이 단 하나의 충동으로 결합되어 있다.
[182] 밀물 때가 매일 한 시간씩 늦어진다. 요컨대 조수는 23시간 주기로 기능하는 것이다. 만약에 조수가 24시간 주기로 기능했다면, 그 밀물과 썰물이 일 년 내내 낮과 밤의 같은 시기에 생김으로써 금찍할 지경으로 단조로웠을 것이다.
[187] 우리를 괴롭히는 여러 가지 병들은 외국과의 전쟁과 내란처럼 서로 정반대되는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병의 경우는 명백하다. 세균감염에 의한 병은 외부의 공격(외국과의 전쟁)인 반면 암은 나의 신체 조직이 스스로의 신체를 공격하는 경우(내란)다. 그렇기 때문에 전자의 경우에는 열이 나고(내 신체조직이 동원되어 공격자와 맞선다). 반면 암의 경우에는 열이 나지 않는다. 이 구분을 정신적인 차원으로 옮겨서 생각해볼 것 : 원인이 나의 밖에 있는 슬픔, 나 자신이 원인인 슬픔(불안, 신경 쇠약, 회한 등등).
8월
[200] 내 노르웨이 친구 P.C가 술에 대해서 말하다 : “우리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 절제하고 수수하게 살다가 토요일 저녁이면 죽을 지경으로 푹 취한다. 그런데 프랑스에 와 보니 대다수의 프랑스 사람들이 언제나 반쯤 취한 상태에서 지내고 있어서 매우 기분이 좋다.” 나는 그에게 사랑도 그렇게 경험될 수 있다고 대답해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빠져서 일종의 심각한 열광상태를 통과하게 된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게 지나가면 다음 번 열광이 솟구칠 때까지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언제나 사랑에 반쯤 취한 상태로 산다. 결코 엄청난 열광에까지 이리지 않고 매순간 어떤 미열 같은 것이 그들을 따뜻한 상태로 유지시켜준다. 그러나 결코 불이 붙어 타오르는 법은 없다.
[207] 우리는 어느 날 저녁, 작품이 그것의 ‘독서’에 의하여 풍부해지는 그 현상의 놀랍고도 유쾌한 시각적 실제 예를 보게 되었다. 다름이 아니라 마르셀 블뤼발이 나의 소설 『황금 물방울』을 원작으로 삼아 제작한 영화의 상영이 그것이었다. 그 소설에는 사막 지붕의 베두인 족 젊은이가 낙타를 뒤에 끌고 파리를 통과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베두인 족 젊은이와 낙타가 루브르 바굼ㄹ관 뜰의 유리 피라미드 앞을 지나는 광경이라야말로 엉뚱하면서도 재미있는 충력을 자아내는 기막힌 한 장면이다. 이 놀라운 영상은 본래 내 소설에 없던 것으로 이 작품의 절정을 이루는 동시에 어는 면 이 작품 전체를 그것 자체 속에 요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11] 강렬한 햇빛. 엄청나게 큰 밀짚모자를 쓴 어린 계집아이가 모자의 넓은 차양의 그늘 속에 완전히 들어앉으려고 몸을 웅크린다.
주여, 엄청난 사랑이 찾아와서 저의 삶을 비추어 뒤죽박죽을 만들어놓도록 해주소서!
마음의 고요와 한여름의고요 속에서 나는 이 기도를 드리자니 가슴이 떨린다. 내 소원은 그것이 열렬한 것이기만 하면 결국 이루어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9월
10월
[238] 폭풍. 바람은 낙엽을 흩어놓지 않는다. 반대로 바람은 낙엽을 작은 무더기 무더기로 깨끗하게 모아놓는다. 거세지만 정성스런 바람. 자연 속의 무질서를 초래하는 쪽은 인간이다.
[240] 루브르에 가다. 전세계의 각종 사람들이 뒤섞인 그 군중 속에서 걸작 미술품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는 매혹적인 얼굴들을 주목하게 된다. 마침내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에 도달한다. 이렇게 ‘매혹적인 얼굴들’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이곳에 더 많이 있고 더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런 얼굴들을 유난히 드러나게 하고 어느 면 그 얼굴에 ‘불을 붙이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 걸작품들이 아닐까?
11월
[267] 네 살 난 이반은 그림 그리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그는 집과 나무와 동물들을 보고 그대로 그린다. 나는 그에게 글 쓰는 것을 가르쳐주려고 해본다. 나는 그 아이에게 편지 몇 통을 주고 베끼라고 시킨다. 그랬더니 그는 그 편지들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물체인 양 세심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그림 그리는 것과 글 쓰는 것의 근본적인 차이를 깨닫는다. 사실 나는 반대로 힘들이지 않고 글을 쓰긴 하지만 그림은 줄 모른다. 아마 서예는 이 차이를 없애주는 것이 아닐까?
[272] 어떤 로봇이 우리들의 모든 행동, 모든 말을 기록하고 무시무시하고 위협적인 중압을 우리 앞에 끊임없이 들이댄다고 할 때 우리들의 삶이 어떻게 도리 것인지는 상상하지가 쉽지 않다.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능력은 한없이 귀중한 것으로 그것은 어린아이의 탄생, 더 비근한 경우로는 밤에 잠이 들었다가 이른 아침에 깨어나는 일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완전한 망각의 자질, 절대적 기억상실의 능력을 지닌 인간은 불멸의 인간이 될 것이다.
12월
[278] ‘사람의 슬픔’이라는 것을 말할 때 생각나게 되는 것은 다만 사랑하면서도 사랑받지는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상대방은 무엇이든 다 줄 태세로 사랑하고 있는데 이쪽은 그저 막연한 연민의 감정 이외에는 아무것도 갚아줄 것이 없는 사람의 씁쓸한 검정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좋은 것인가? 상대방의 풍요로움 앞에서 느끼는 이 엄청난 낭패감, 이 수치심, 이 비참한 기분의 씁쓸함을 누가 알랴?
[285] 소설 한 권을 쓰려고 고심히면서 나는 내 두뇌를 개처럼 부린다. 『엘레아자르』를 쓰면서 나는 내 두뇌에게 모세의 냄새를 맡게 해주고서는 말한다. “자, 가서 찾아와! 찾아오라고! 모세를 찾아와!” 6개월이 지나가 그는 내게 모세를 데리고 왔다. 그 이름이 바로 『샘과 덤불숲』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나는 그에게 코브라의 냄새를 맡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자, 가서 찾아와! 뱀의 비밀을 찾아와!” 두 달이 지난 뒤 그는 뱀의 상징인 눈꺼풀을 가져온다.
[286] 독학한 사람과 정규적인 공부를 한 사람과의 차이를 그는 이렇게 설정한다. 독학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배웠다. 그의 교양은 자기 자신의 인격의 한계 내로 제한되어 있다. 반대로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골고루 다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장점은 엄청난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보기에 자신으로서는 별 흥미도 없는 지식들을., 나아가서는 싫어하는 지식들 또한 습득해야 한다는 것은 더할 수 엇을 만큼 중요한 마음이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290] 오늘 밤 라디오를 듣다가 나는 옛 스승 가스통 바슐라르 선생의 부르고뉴 악세트가 섞인 목소리를 즉시 알아 차린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 목소리는 그에게 엉뚱한 질문들을 던지곤 하는 어떤 바보녀석 때문에 자꾸 끊어지곤 한다. 그리고 방송이 끝나면서 이런 안내의 말이 흘러나온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1949년 가스통 바슐라르와 미셸 투르니에가 주고 받은 대담을 녹음한 INA 자료 내용을 들으셨습니다.”
* 기막힌 짧은 반전이다.
[291] 여러 가지 신화들은 창조한 사람들은 그들 작품의 후예들은 알지 못한 채 죽는다. 아마도 니르소데 몰리나-『세비야의 사기꾼』(1620)에 나오는 돈 후안의 창조자-는 자신의 주인공이 몰리에르와 모차르트에 의하여 되살아난 것을 보았다면 몹시 놀랐을 것이다. 나의 대니얼 디포는 자신이 쓴 『로빈슨 크루소』(1719)에서 파생한 ‘로빈슨 놀이들’, 예컨대 『방드르디』를 읽고 나자 소리친다. “아냐, 아냐, 난 그런 걸 윈치 않았어!” 어쨌건 그건 바이마르의 유지가 된 괴테가 다음 세대들이 50년 전 자신이 발표한 『베르테르』의 모델을 본떠서 옷을 입고 말을 하고 때로는 자실까지 하는 것을 보고 내뱉은 비명의 소리였다.
미셸 투르니에-김화영 인터뷰
[298] “간단해요. 이곳에 부는 바람은 네 가지죠.(투르니에 씨 특유의 박학과 설명의 명쾌함. 그리고 주름살과는 대조적인 그 목소리의 젊음.) 하나는 동풍, 지금 그게 부는 거예요. 건조하고 차죠. 다음은 서풍. 이건 따뜻하지만 습해요. 그래서 비가 오게 하죠. 그리고 북풍. 이게 제일 나빠요. 차고 습하죠. 류머티스는 바로 이것 때문이죠. 끝으로 남풍. 이게 제일 좋은 데 유감스럽게도 드물어요. 건조하고 따뜻한 남풍.” 투르니에 씨 특유의 분석은 늘 이처럼 간결한 정답이다. 그리고 늘 그렇듯 ‘대칭적’인 ‘사상의 거울’……
[320] “그렇죠. 정확하게 지적해주었어요. 나는 쌍으로 놓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해요. 그런 발상은 많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해줘요. 우리가 두 발로 걷듯이 나는 두 가지 쌍으로 놓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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