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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7일 20시 01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저자인 캠벨에 대하여 더 풀어낼 ‘썰(표기법에 따르면 ’설‘)’이 없다. 나름대로 잔머리를 굴려 개인적 종교관의 변천, 신화의 대중화에 힘썼던 이유, 삶에서의 중요했던 만남, 신화와 대중 등으로 나누어 지면을 메워왔지만 이제 더 메울 것을 찾지 못했다.
신화종교학자이며 비교신화학자.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린 캠벨이 어떤 학문적 자취를 밟아왔을까 하는 것이 궁금했지만 찾기가 어려웠다. 피상적으로 캠벨의 배움의 과정과 연구의 과정을 시간적으로 정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904년 출생
1921년 명문 다트리머 칼리지 입학-생물학 수학 전공
메디치가에 관한 책을 읽고 인문학에 흥미를 느낌
1922년 콜롬비아대 편입-영문학 비교문학으로 전공을 바꿈
1924년 유럽행 배에서 크리슈나무르티 만남-힌두교 불교를 접함
1925년 대학원 진학-아서왕 전설 연구해 문학석사 받음
학위논문으로 특별장학금을 받아서 유럽 유학
1927년 파리 소르본 대학서 공부
로망스어, 중세프랑스어, 프로방스어, 라틴어 등 전공
제임스 조이스의 ‘유리시즈’ 피카소, 브라크의 그림에 흥미를 갖게됨
1928년 뮌헨대학으로 옮겨서 공부함
산스크리트어 인도-유럽어족을 공부함
괴테, 토마스 만의 문학과 프로이트와 융의 사상을 섭취함
1929년 미국으로 돌아 옴. 대공황의 시절
조각가 지망생인 누이와 우드스톡의 숲속에 은거하며 5년간 독서에 몰두
1933년 모교 캔터베리 프레드 스쿨 교사로 일함
슈펭글러, 토마스 만, 융, 조이스, 제임스 프레이저 연구에 몰두
1934년 뉴욕 새러 로렌스 전임교수가 됨
38년 동안 문학, 독일철학, 비교신화학 등을 가르침
1940년 콜롬비아 대학의 인도 연구교수였던 하인리히 침머와 교류
1942년 종교 신화 정신분석학 논문집인 ‘불링겐 시리즈’의 편집자로 일함


● 마음에 들어온 글귀

이 글이 쓰여질 무렵 아틀랜타에 있는 카터 평화연구소는 주로 전세계의 민족적 대립에 뿌리를 둔 총 112개의 갈등들을 조사했다. 그러한 갈등들은 단일화된 세계에 대한 개념을 파괴하고, 대신 서로 고립된 책 증오하며 싸우는 수백만의 흩어진 군상들로 되돌아가도록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조셉 캠벨의 중요한 가르침들을 왜곡시킨 데 따른 뼈아픈 결과이다. 종교적 은유들을 마음과 영에서 우러나는 상징들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사실로 이해하면서 영적인 권리들을 주장할 경우 세계는 끔찍하게 분열되고, 어쩔 수 없이 엄청난 비극을 맞게 된다. [23]

이 에피소드를 통해 나는 인류의 절반쯤은 종교 전통의 은유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나머지 반은 은유가 결코 사실일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종교적 은유들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에 자신들은 무신론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30]

신화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긍정하도록 만든다고 생각하든, 부정하게 한다고 생각하든, 아니면 세계를 회복시킨다고 생각하든 간에 신화의 첫 번째 기능은 다음의 세 가지 참여의 방식을 통해 현재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일깨우는 것이다. 즉 자기 밖으로 옮겨놓거나 자기 안으로 깊이 침잠하게 되거나, 아니면 스스로 변화하게 한다. 나는 이것이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신화의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신비적인 기능인데, 이를 통해 존재의 신비의 차원을 발견하고 인식하게 된다. [34]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삶의 경험들을 심오하고 풍성하게 느끼고 전달하는 상징들을 불러올 수 있는가? 이 상징들은 그 자체를 넘어 꼭 이야기해야만 하는 궁극적 진리를 지시해야 한다. 삶은 절대적으로 고정된 어느 한가지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이 상징들은 자체에 부여된 온갖 의미들을 넘어서서, 즉 모든 정의들과 관련성들을 넘어서서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를 지시해야 한다. 그 신비란, 바로 우리들 자신과 우리가 사는 세계의 존재 자체와 마찬가지다. 만일 우리가 그 신비에 고정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 신비의 참된 깊이에 대한 경험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인이 의미의 맥락 속으로 마음을 데리고 가서 그 의미들을 넘어서는 곳에 마음을 던져놓는다면, 그 모든 정의의 범주들을 넘어서는 데서 오는 경이로운 환희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정의의 범주들을 넘어서서, 불가능한 여행을 가능케 하는 은유의 기능을 감지할 수 있다. [46]

칼 융은 종교의 기능 중 하나는 종교적 경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식 종교에서는 모든 것이 구체화되고 공식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상 종교적 경험은 오직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경험을 다른 누군가와 나누는 순간 그 특성은 사라져버린다. 즉 미리 만들어진 개념들이 그 경험을 파악하며, 간단히 축약해 버리기 때문에 경험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게 된다. 정교화되고 세부화된 종교들은 감당하기 힘든 폭발적인 신비 체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54]
만일 우리가 시간의 격자무늬를 통해 영원한 불꽃을 있는 그대로 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신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신화적인 상징들을 표현하는 예술작품의 경우,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을 거는 상징들을 통해 그 신비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은 고대의 한 양면 화병 그림에서도 알 수 있다. 한쪽 면에는 헤르메스와 함께 밀을 가지고 있는 노인 트리프톨레무스가 그려져 있다. 헤르메스는 사자의 지팡이를 짚고 있다. 반대쪽으로 돌리면 그 위에 디오니소스가 포도주 잔을 든 사티로스에 이끌려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트리프톨레무스는 빵과 곡식과 관련되며,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와 관련된다. 이것들은 둘 다 로마 가톨릭 미사의 주요 요소들이다. [58]

종교적 관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선과 악을 대립시키는 윤리적 관점으로서, 성서에 근거한 서구 기독교에서는 선과 악을 대립시키는 윤리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서구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로 인해 이원론적 영역에 매여 있다. 그러나 신비적 관점에서는 선과 악을 한 과정이 지니는 두 측면들로 이해한다. 중국의 음양 표징이나 태극이 여기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59]

궁극적으로 남성 이름을 부여하건 여성 이름을 부여하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초월은 그러한 모든 이름들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상징은 총체적으로 명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성부는 달리아, 즉 풍요로서 다른 둘을 하나로 만들며, 성자는 유프로세네로 세상에 자신을 쏟아붓는 사랑의 기쁨을 나타낸다. 성령, 즉 보헤사는 아갈리아이며 그것은 우리를 다시 돌려보내다. 에너지 자체는 아폴로에게서 오는데, 기독교 전통에서 이에 해당하는 것은 유일한 신적 실체로서, 삼위일체의 셋은 그 한 분의 세 인격들이다. [60]

만일 우리가 경험한 것에 대해 시공간적인 이해의 형식들을 통해 사고한다면, 이때 우리는 사유의 문법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궁극적인 범주는 존재와 비존재이다. 신은 존재하는가? 만일 신이라는 말이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무를 의미할 수밖에 없다. 신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공간의 영역에서 ‘사실’은 대상이며, 꿈속에서는 이미지이다. 그러나 신은 꿈도 아니고, 사실도 아니다. 신 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이름지을 수 있는 것들을 넘어선 무언가를 지시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을 저 사람들보다 더 좋아하고, 특정한 삶의 규칙들을 가지고 있기나 한 듯이 생각한다. 모세는 우리가 이처럼 비사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로부터 많은 지식을 얻었다.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분명하게 이해되듯이, 신은 최종적인 언어이다. [66]

그러므로 예수가 “내가 만유이다”라고 말한 의미는 “나는 나 자신을 만유와 동일시 한다”는 것이다. 도마복음서에 보면 예수가 “장작을 쪼개보시오. 나는 거기에도 있소”라고 말하는데, 그것도 마찬가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말하고 있는 자를 가리키는 것도, 그 신체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정말로 그 자신, 그리고 정말로 당신 자신을 가리킨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69]

나는 가끔 유대-기독교 신비가들이 쓴 글들의 번역본들을 보게 되는데, 거기서는 늘 외연을 내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에 대해 명상을 할 때, 그것은 신비주의가 아니라 숭배가 되어버린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구체적인 사항들에 대해 명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방식으로 명상할 수 없다. 예수는 죽고 부활하여 물리적으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몇 달, 혹은 몇 주, 몇 년뒤에 똑같이 하는데, 그것을 성모승천이라고 부른다. 그녀는 결코 인간들처럼 죽지 않았으며, 하늘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 상황을 강조하는 것은 상징을 평가절하시킬 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상징이 구체적인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밖에 안으로 들어오다’라는 말이 내 책제목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마치 외부 공간에 존재하는 듯이 묘사 되었지만, 실은 내적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예수와 마리아의 몸이 올라갔다는 하늘은 실제로는 우리가 자신 안으로 들어갈 때 내려가게 되는 곳이며, 구태여 구체화시키는 말로 표현한다며, 우리가 본래 탄생했던 곳이다. 우리는 그 안에 있으며, 또한 그곳은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이기도 하다. [71]

신화는 꿈과 마찬가지로 상상력의 산물이다. 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단순한 개인적 꿈으로, 이 경우 꿈을 꾸는 사람들은 개인적 문제들의 반영물인 모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프로이드의 심리 분석에서 전형적으로 다루었던 내용들, 즉 삶의 욕망과 두려움, 간절한 소망과 도덕적 금기들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러나 꿈에는 좀더 다른 차원이 있는데, 그것은 환상적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꿈꾸는 사람은 개인적 지평을 넘어서서 모든 위대한 신화들에 상징화되어 있는 동일하고도 위대한 ‘보편적인’ 문제들에 직면하게 된다. [77]

성공회 결혼 예식에서 성직자가 자기 앞에 있는 부부에게 다음 생에 영생을 얻도록 현생을 잘 살라고 가르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아무렴, 그렇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하게 표현한 말은 아닐 것이다. 사실 그는 “잘 살고, 결혼생활을 잘 해서 그 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시오” 라고 말했어야 했다. 영원은 미래도, 과거도 아니고 현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코 시간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영생은 현재와 영원의 한 차원이며, 그 안에서 발견되고 경험되어야 할 존재의 의식적 차원이다. 영생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시간을 타고 전 생애에 걸쳐 그 위를 달리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존재와 삶의 경험들이 지니는 초개인적이고 초역사적인 차원에 대한 인식으로 인도하는 것은 신화적 원형들이다. 이 원형들은 모든 신화의 근저에 깔려 있고, 영원히 인간 삶을 지탱하며 모범이 되어 온 영원한 상징들이다. [80]

인간은 모두 동물로 태어났으며, 잠자고, 먹고, 번식하며 싸우는 동물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동물들이 알지 못하는 삶의 또 다른 질서, 존재의 신비 앞에서 느끼는 경외, 즉 삶에서 느끼는 영적 감정의 뿌리이자 가지라고 할 수 있는 ‘신비스럽고 떨리며 매혹적인 것’에 대한 경외가 있다. 이것은 고유하게 인간적이고 생명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탄생-동정녀 탄생-이다. [87]

이제는 더 이상 ‘이방인들’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고대인들의 경우는 “우리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했고, 자신에게만 사랑과 존경을 적용하고 ‘밖에 있는 사람들’ 에게 죄악을 전가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행동은 자살행위이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진정한 사람을 발휘해서 증오와 경멸을 없애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우리 이웃과 동시에 우리들 자신의 삶에서 열매를 맺는 자비로운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90]

아무 길도 없었다. 길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누군가 다른 사람의 길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서구 정신을 동양 정신과 분명하게 구분하는 점이다. 동방의 구루들은 제자들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진다. 이들에게는 ‘대리 자유의지’라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구루는 당신이 길 위에 어디쯤 있는지, 누구인지, 이제 무엇을 할지, 그리고 다음에는 무엇을 할지 가르쳐준다.
반면 서구의 낭만적 특성은 유례없는 동경으로부터, 이 세상에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무엇인가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나온다. 아직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것은 어떠한 모습일까? 아직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이란, 유례 없이 완성될 우리 자신의 삶이다. 우리의 삶이야 말로 앞으로 존재하게 될 바로 그것이다. [91]

모든 것이, 모든 제도가 급속히 파편화되어 가는 이 시대에는 기존의 의미들이 모두 굳어져 버린 집단 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오늘날 집단은 개인을 생산하기 위한 모태일 뿐이다. 모든 의미는 개인 안에서 발견된다. 각 사람안에서 의미는 저마다 유일무이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점을 생각해보자. 나름대로의 모험을 통해 각자 개인적 삶을 다 살고 나서 돌이켜보았을 때 얻게 되는 깨달음은, 결국 하나의 모범적인 인간적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92]

이 시대 종교의 과제와 기능은 마음을 깨우는 것이다. 만일 성직자들이 마음을 깨우지 못하거나 깨울 수 없다면, 사람들을 깨우고 영적으로 양육할 상징들을 해석할 능력이 없음을 의미한다. 성직자가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배반 행위다. 사회 활동이나 신도들의 가정사에 깊이 관여하는 것으로 성직자의 임무를 대신하는 것은, 그들의 소명의 진정한 이유, 즉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에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 승천의 의미가 지니는 여러차원들을 열어 보이는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사실 완벽하게 기능하는 종교적 상징들의 체계를 이루는 것은 그러한 것들이다. [95]

우리 죽음의 은밀한 원인이 곧 우리 자신의 운명이 된다. 모든 생명은 유한하며, 만일 그 유한성에 도전한다면, 우리는 그 유한성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그리고 영웅이란 결국 운명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신들의 행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그 사람이 한 일의 결과이다. 그 삶 전체에 대해서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은밀한 원인이 드러난다. 우리 삶의 여정 자체가 바로 우리 죽음의 은밀한 원인인 것이다.
삶의 여정 자체가 원인이 되어 사고를 일으키고, 다른 사건이 아니라 바로 이 사건이 죽음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다른 시간이나 다른 장소가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사람이 죽게되는 우연한 사건은 그의 운명의 성취이다. 죽음 그 자체는 부차적이다. 사건 전체에 걸쳐 드러나야 할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엄숙함이며, 사건도 그 삶의 일부분일 뿐이다. 예술작품을 보고 우리는 “아니오”가 아니라 “예”라고 말한다. ‘나도 역시 이런 식으로 죽게 될 것인가?’ 라고 묻게 될 때, 우리 역시 이러한 완성을 이루며 죽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죽음은 우리 삶의 방향과 목적의 성취이다. [99]

완벽한 신체적 조건을 갖춘 남자가 휴식할 때의 심장 박동수는 1초에 한 번이다.“ 1분이 60초이고 한 시간이 60분이며, 하루가 24시간이니 심장은 하루에 86400번 뛰는 셈이다. 이를 둘로 나누면 43200이 나온다. 인간의 심장 박동은 우주의 박동과 일치한다. 그 둘은 같다. 이러한 리듬의 일치야말로 오래된 우주론적 신화의 핵심이다. 우주론적 신화는 소우주와 대우주가 동일한 박동을 가지고 서로 공명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의사에게 ”열이 있다“고 말하면 의사는 그의 맥박이 43200 박동과 조화를 이루는지 재어본다. 즉 환자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120]

신은 상징이다. 상징의 함의는 모든 이름짓기와 계산, 사고의 범주들을 넘어서 존재한다. 우리는 종종 “신은 하나인가, 아니면 다수인가?” 라고 묻는다. 그러나 이는 사고의 범주들이며, 언설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에는 별 기능을 하지 못한다.
아마도 여러분은 내가 좋아하는 하인리히 침머의 인용문에 익술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최상의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차선의 것은 오해받는다.” 어째서 차선의 것은 오해받는가? 아마도 차선의 것들이란 너무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내연이 아니라 외연으로 잘못 읽게 된 은유들일 것이다. [129]

이는 은유로 표현된 영적 사건들이다.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은유는 사실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과 같다. 은유가 사실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을 ‘종교적’ 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들 중 누가 실제로 의미를 이해할까? [129]

나는 신이 아담과 이브를 동산에서 내쫒았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들 스스로 쫒겨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심리학적 해석을 통해서만 의미가 이해될 수 있다. 만일 이 이야기를 먼 과거의 언젠가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웃기는 이야기가 된다. 에덴동산이라는 실제적인 장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믿는 것은 종교의 은유적 언어를 오해하고 곡해하는 것이다. [133]

불교에 나타나는 두 수호신들 중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고, 다른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다. 두 수호신은 서로 대립되며, 하나는 두려움을, 다른 하나는 욕망을 나타낸다.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고, 욕망은 이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다. 두려움과 욕망이 인간을 동산으로부터 멀리 떼어놓는다. 우리를 유배된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134]

“아주 오래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금 당신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것은 동양의 비전이 젊은이들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호소이다. 기독교건, 유대교건 우리 서양 종교들은 역사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사건들을 넘어서서 그 영적 의미를 읽지 못하고, 역사적 사건들 자체를 숭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동양의 종교로 눈을 돌리는 것은, 그동안 자신들의 종교 안에서 지나친 문자주의와 역사주의로 인해 닫혀져 있던 참된 의미를, 이제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149]

그러나 최후의 만찬 장면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빵을 적시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빵조각을 주는 사람이 나를 배신할 것이다.” 이것은 예언인가, 아니면 책임부여인가? 나는 이것이 책임부여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란 가장 성숙한 사람, 즉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정말로 이해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유다는 구원의 산파였으며, 그리스도의 상대역이었다. 유다는 그리스도를 그 분 자신의 죽음에 넘겨주는 사람이며, 자신은 그림자 가운데 죽는다. 그는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다. 그리스도 상 안에는 그림자, 즉 세상의 빛에 대립하는 상대자라는 동기가 늘 나타난다. 그림자 없이는 빛도 없다. 그림자는 빛나는 존재의 반영인 것이다. [188]

어째서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가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본질적인 의미를 내포하는데, 그것은 전혀 역사적이 아니라 신화적이다. 왜냐하면 사실 에덴동산이나 말하는 뱀 같은 것은 없었으며, 원인 이전에 홀로 존재했다는 ‘최초의 인간’ 이나, 혹은 꿈같이 그의 갈비뼈로부터 나왔다는 ‘어머니 이브’ 도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에덴동산 신화 같은 것들이 빈번하게 역사로 잘못 읽히고, 신화적 해석들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같은 실제적 사건들과 결부되기도 했지만 신화는 본래 역사가 아니다. [195]

이처럼 십자가의 은유를 감각과 직관, 감정과 사유라는 융의 심리학적 틀을 통해 읽으면, 인간은 시각적이고 역사적인 삶 속에서 대립이 되는 쌍의 어는 한 쪽에 얽매여 살아가며, 따라서 선악 개념에 얽매어 부분적인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한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살면서 따르는 법인 도덕과 죄의 법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이 죽고, 네가지 기능을 모두 통과하는 에너지와 빛의 순환에 스스로를 열어서 강들이 네 방향으로 흐르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처럼 우리도 한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한다. 혹은 가시 면류관을 쓴 구세주의 머리 뒤에 십자가의 수평대와 수직대가 교차하는 지점처럼, 한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한다. [200]

결혼에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산 사람이 결혼했다면-참으로 결혼한 것이라면-이제 관심의 중심을 자신에게서 둘의 관계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이 희생하거나 무엇인가를 포기한다고 생각할 때, 나는 다른 인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위해서 포기하는 것이다. 상대와 마찬가지로 나도 관계속에 있다. 내가 말하는 뜻을 알겠는가? 둘이 함께 있음, 이것이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이다. 우리는 자신을 하나가 아니라 둘이서 하나라고 생각해야 한다. 결혼이 전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아니마면, 당신은 결혼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려는 것의 전부이다. 내가 자주 말하듯이, 결혼은 긴 연애가 아니다. [217]

내가 말한 대로 결혼은 연애가 아니다. 결혼은 일종의 시련이다. 결혼 생활을 잘 헤쳐나갈 수 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할 것이다. 시련은 관계를 위한 자아를 희생하는데 있다. 자아는 언제나 나타나서 “이이고, 불쌍한 내 신세야. 아무도 나를 위해 타자를 쳐주지 않네” 따위의 말들을 한다. 내가 아는 한 위대한 세명의 아내를 거친 끝에 드디어 그냥 타자를 칠 뿐 아니라, 그리스어와 라틴어로도 칠 수 있는 아내를 만났다. [217]

치명적인 죄를 범한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고 여겨진다. 다른 종교 체계들에 나타나는 지옥 개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연옥에 더 가깝다. 즉 옮겨가는 정화의 장소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유한한 가치체계에 얽매인 채로 죽는다면, 그 상태에서는 초월적인 신의 복된 모습을 향해 열려져 있을 수 없다. 이 경우 연옥은 교육적인 장소로 기능하며, 그의 영적 깨달음의 가능성에 따라 천상의 전체 영역이 펼쳐지게 된다. [231]

신화는 거짓을 뜻하는 말로 잘 쓰이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표현하는 영구적인 수단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기억하고 싶고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 예컨대 아서왕의 전설이나 성서의 영속적인 이야기들을 일시적 유행이나 변덕스러운 일, 일상의 덧없는 사실, 또는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 기록 같은것들과 구별화기 이해서 신화적 형태로 말했다. 신화와 상징은 모든 종교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특징으로, 종교체험의 특수한 언어이다. [237]

후자는 신비주의의 종교이고, 전자는 구체적인 대상을 믿는 종교, 신을 구체적인 대상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구체적인 상징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상징이 떠나가게 해야 합니다. 종교 전통의 문자적 의미가 죽게 할 수 있을때, 그것은 다시 살아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자유로워져서 다른 종교 전통들을 더욱 존경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전통을 놓아버릴 때, 무언가를 잃어버릴 것이라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251]

캠벨이 발견한 종교적 깨달음의 요체란 인간과 자연, 온 우주를 관통하는 근원적 자아에 대한 깨달음이다. 근원적 자아 안에서 나와 너, 그리고 자연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근원적 자아란 다름 아닌 나 자신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원 제목대로 “네가 바로 그것” 이라는 깨달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이 각 종교 문화 전통 속에서 표현되는 양식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때로는 대립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인간과 자연, 하느님을 명확히 구분하고 위계적으로 파악하는 유대-기독교의 경우 근원적 자아와 나와의 동일성에 대한 깨달음, “네가 바로 그것” 이라는 깨달음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265]

캠벨에 의하면 신화의 언어는 은유이며, 신화의 은유적인 언어는 모든 이름들과 형식들을 초월하는 궁극적인 신비를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 안에 경외와 겸허, 존경의 경험을 일깨우고 유지한다. 그는 이것을 우파니샤드에 나와 있는 한 마디 말로 전하고 있다 : Tat tvam asi, 즉 “네가 바로 그것이다” 라는 말이다. [277]

하느님 나라도 이 땅의 어딘가에 임하는 실제 영역이 아니라 마음의 내밀한 공간이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 [280]

캠벨의 도전과 문제 제기는 어쩌면 우리를 어려운 양자택일 앞에 세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밖의 초월인가, 아니면 내 안의 초월인가. 동일성과 일치의 종교인가, 아니면 신의 절대타자성과 복종의 종교인가. 그러나 정말로 종교 문제에서 선택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초월은 내 안이건 내 밖이건 그때그때 내가 발견하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던가. 때로 어디선가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에 겸허히 침묵하고 무릎을 굻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내가 내 안 저 깊숙한 곳에서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일과 무엇이 다른가. 살아있는 종교 경험은 “이것 아니면 저것” 이라기 보다는 “이것도, 저것도” 에 가깝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종교와 그 상징들이란 인간 경험의 심원하고도 불가해한 경지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경험의 무게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285]


● 내가 저자라면

전문가적 지식은 없지만 책의 내용이 아닌 편집에 대하여 말해보고자 한다. 전문가적 소양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 밝히는 의견은 단순히 책을 대하는 한 독자로서의 의견이 될 것이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를 처음에 중간 중간 몇 쪽을 넘겨보았을 때의 느낌은 편안함 이었다. 그동안 보아왔던 캠벨의 책들은 저마다 다른 느낌을 주었다. 책이라는 물체로는 같지만 생긴 모양은 사람 얼굴처럼 제각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를 한참 생각해보고 내린 결론은 행간과 자간, 그리고 서체였다. 독자가 읽을 때 책의 인상을 결정하는 많은 것 중의 하나인 행간, 자간, 그리고 서체를 주먹구구식으로 분석해봤다. 주먹구구임을 자신 있게 밝힐 수 있는 것은 시력 좋지 않은 눈과 30센티미터 자와 초등학생용 돋보기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비교대상을 삼은 책은 ‘신화의 세계’ ‘신화와 함께 하는 삶’ ‘네가 바로 그것이다’ ‘신화의 힘’ 네 권이다.

행간은 문장의 줄과 줄 사이의 공간을 말한다. 책 네 권은 행간의 값이 세 가지였다.
‘신화의 세계’
3밀리미터
‘신화와 함께 하는 삶’
4밀리미터
‘네가 바로 그것이다’
4밀리미터
‘신화의 힘’
4.5밀리미터
행간자체로 보면 ‘신화의 세계’ 가 가장 좁고 ‘신화의 힘’ 이 가장 넓다. 행간의 값은 크고 작지만, 이를 단순 수치로는 넓다 좁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간과 서체 그리고 책의 배판 이라는 요소들이 또 영향을 미치므로 전체적인 결과는 최종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자간은 다섯 권의 책 모두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자간은 글자와 글자 사이의 공간이다. 사실상 자간을 눈과 돋보기로 측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확도를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최소한 출판 때 이미지 망점을 측정하는 세밀한 돋보기라도 있어야 했지만 장비를 갖추고 있지 못하므로 눈과 돋보기로 대략적 측량을 했다.
주먹구구 측량의 결과, ‘네가 바로 그것이다’의 자간이 더 넓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비교해보니 그렇지는 않았다. 자간이 가장 넓어 보이는 책은 ‘신화의 세계’ 였고 ‘신화와 함께 하는 삶’ 은 가장 좁아 보였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신화의 힘’ 은 그 중간 정도로 보였다. 네 권의 책을 유심히 살펴본 결과, 자간은 생각보다 독서할 때 미치는 책의 느낌을 결정하는 비중이 적었다. 자간이 과도하게 넓거나 좁지 않다면, 실제 책을 읽으며 자간 때문에 이러하다 저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글자는 형태가 세 가지로 나타났다. 우선 크기를 보면 아래와 같다.
‘신화의 세계’
가로 3밀리미터 세로 3.3밀리미터
‘신화와 함께 하는 삶’
가로 3.3밀리미터 세로 3.3밀리미터
‘네가 바로 그것이다’
가로 3.5밀리미터 세로 3.8밀리미터
‘신화의 힘’
가로 3.3밀리미터 세로 3.3밀리미터
글자의 크기는 ‘네가 바로 그것이다’ 가 가장 크고 ‘신화의 세계’ 가 가장 작다. 글자의 꼴을 보면 ‘신화와 함께 하는 삶’ ‘신화의 힘’ 은 정사각형이고, ‘신화의 세계’ ‘네가 바로 그것이다’ 는 가로보다 세로가 조금 긴 장방형의 모양이다.
서체는 네 권 모두 중명조를 사용했는데 인쇄상태와 지질이 영향을 미쳐 모두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책의 크기를 말하는 배판은 아래와 같다.
‘신화의 세계’ ‘신화와 함께 하는 삶’ ‘네가 바로 그것이다’ 152X224
‘신화의 힘’ 167X223
크기가 같은 세 권은 신국판이고 ‘신화의 힘’ 은 그것보다 조금 더 큰데 정확히 무슨판으로 불리는지는 알 수가 없다.

위의 결과로 네 권의 책을 상대적으로 비교해 보았을 때
‘신화의 세계’ 는 행간이 좁고 자간이 조금 넓었다. 글자의 크기는 가장 작은 가로 3 세로 3.3밀리미터였다. 책을 펴 보았을 때 조금은 답답해 보이는 느낌을 주는 것은 좁은 행간과 상대적으로 작은 글씨 때문으로 보인다.
‘신화와 함께 하는 삶’ 은 지면의 형태가 안정적이고 여유 있어 보인다. 그 여유는 글씨 크기에 비해서 여유 있는 4밀리미터의 행간이 그 이유로 보인다. 책은 여유 있음을 넘어 시원해 보이기까지 한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는 개인적으로 가장 지면이 안정적이라고 보았다. 읽기에도 수월했는데 그 이유는 상대적으로 큰 글씨와 여유 있는 행간 때문으로 생각된다. 읽는 동안 아주 부드럽게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신화의 힘’ 은 글씨의 크기가 다른 책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큰 편이 아니었지만 행간은 4.5밀리미터로 가장 넓었다. 그럼에도 지면이 시원하다거나 여유 있게 느껴지지 않는 게 특징이다. 그 이유는 책의 판형으로 보인다. 다른 세 권의 책보다 가로 크기가 큰 탓에 문장의 줄 길이가 길어졌는데, 줄의 길이가 길어서 행간의 넓은 공간이 시원해 보이지 않는다. 아니면 반대의 경우일수도 있을 것이다. 판형을 크게 하고 보니 행간을 넓게 쓰지 않으면 지면이 답답해 보일까봐 의도적으로 행간을 넓게 가져갔을 가능성도 있다.

행간과 자간, 서체라는 단순한 도구로 책이 독자에게 주는 인상을 분석해 보았다. 주먹구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아쉬움이 있지만, 이러한 요소는 책의 이미지를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상품으로서의 요소도 생각해보자는 의미에서 어쭙잖은 분석을 시도해봤다.

IP *.212.22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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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4.27 20:19:34 *.127.99.34
하여튼 엉뚱해.
어쨌든 기상천외한,
그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은, 앞으로도 시도해볼 것 같지 않은
아주 유니크한 평가 방식인 것은 분명한데,
so what?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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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환
2008.04.27 21:24:46 *.34.17.71
형님이 썩 좋아하지 않던, 조셉캠벨이 드디어 끝났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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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
2008.04.27 21:25:24 *.36.210.11
지금 그대는 "그 한 분의 세 인격 가운데 아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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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쟁이
2008.04.27 23:47:29 *.52.236.185
문제는 항상 창의성!

어떻게 하면 좀더 창의적이 될 수 있을까요?



암튼... 생각의 탄생이세요. ㅎㅎ

아니면 창의적 자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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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희
2008.04.28 23:17:18 *.41.62.236

근데 칼럼은 저축해뒀어요? 창님.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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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스
2008.04.29 14:13:49 *.39.173.162
창형... 역시 전무가적 기질이 풀풀 풍깁니다..
ㅎㅎㅎ 제가 바다에 떠있는 관계로 참치는 어떠신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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