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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8일 00시 58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저자에 소개 글로는 이번 글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
먼저 그에게 감사(感謝)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나는 과거 유독 종교학에 관심을 두고 책 속의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인생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지구라는 별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종교는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가, 인생의 궁극적 행복은 무엇인가와 같은 생뚱(?) 맞은 질문들을 던지곤 했었다. 물론 그 깊이는 일천한 수준이지만, 종교의 역사적 흐름과 사상적 행적들을 기웃거렸다.

그리고 나름의 결론을 내린 것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종교는 기존의 과거 종교를 통합할 수 있는 신비주의(神秘主義)에 그 해답(解答)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학문적 깊이의 천박함으로 인해 자신있게 내 견해를 피력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많은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무겁게 보일 수 밖에 없는 종교적 주제와 철학에 대해 어떻게 사람들과 의사소통할 지에 대한 부분도 쉽지 않은 난제(難題)였다.

그런데 조셉 캠벨을 만났다.
그는 내가 고민하고 있었던 주제들에 대해 신화(神話)라는 도구를 통해 너무도 재미있게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많은 종교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던 어마어마한 주제; 궁극적인 질문들에 대해 신화로의 여행을 통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번 연구원 활동을 통해 조셉 캠벨을 만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다.
아쉬운 점은 그의 저작들에 대해 깊이 있는 독해와 이해를 하지 못한 내 자신이다. 일상의 바쁨을 핑계로 그의 저작들을 심도깊게 연구하지 못한 점은 향후 내 자신의 과제로 남기고 싶다. 과제를 위한 과제로 그를 만난 나의 태도에 반성을 한다.

그와 다시 만나고 싶다. 다시 만날 때는 제대로 가르침을 받고 싶다. 그 날을 기다린다.


2. 내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

서문 – 유진 케네디

조셉 캠벨은 <도덕의 기초 One the Foundations of Morality>에서 나오는 쇼펜하우어의 질문을 좋아했다. “어떻게 나의 고통도, 내가 관심을 갖는 사람의 고통도 아닌 남의 고통을 보고 마치 그것이 나 자신의 고통인 양, 즉각 몸을 던져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는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며,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 경험의 세계에서는 어떠한 근거도 찾을 수 없다. 아무리 무디고 이기적인 사람이라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9p

쇼펜하우어의 결론에 따르면 그러한 즉각적인 반응과 행동은 “네가 그것”이라는 말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는 형이상학적 깨달음이 섬광처럼 지나간 결과라는 것이다. 10p

쇼펜하우어는 “나의 참된 내적 존재가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들 안에 실제로 존재하며……그것이 자비 Compassion, Mitleid, 함께 고통받음의 근거로서 모든 참되고 이타적인 덕이 여기에 기초하고, 모든 선행에서 바로 이 자비가 표현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0~11p

그렇게 다양하고 때로는 핻곡할 수 없는 선율들 속에서 캠벨이 느낀 것은 존재의 신비 앞에서 누구나 느끼는 놀라움과 두려움의 감정이었다. 캠벨은 인간 반응들 중 자비가 가장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모든 전통들에서 똑 같은 관심과 확신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12p

사람들은 종교적 가르침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종의 전쟁과도 같은 일을 감행했다. 18p

그는 제도종교에서 줄곧 영적 은유들을 역사적 사실들로 잘못 해석함으로 인해 생겨나는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은유를 뜻하는 ‘metaphor’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지나감’ 또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는’ 것을 뜻하는 ‘meta’와 ‘옮기다’ ‘나르다’를 뜻하는 ‘phrein’에서 나온 말이다. 은유는 한 장소로부터 다른 장소로 이동시킴으로써 우리들을 가두고 있던 경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한다. 19p

동정녀의 탄생은, 독자들이 알게 되겠지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생물학적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영적 거듭남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약속의 땅은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인간 내면의 영역을 가리킨다. 19p

종교적 은유가 지니는 내포적 의미는 풍부하며 무시간적이고, 다른 어떤 외적 세계에 있는 누군가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 지금 여기 있는 우리들 자신의 내적이고 영적인 경험을 지시한다. 19p

조셉캠벨의 중요한 가르침에 의하면 이러한 민족적 분열이야말로 오래전에 뿌리를 내린 종교적 가르침들을 왜곡시킨 데 따른 뼈아픈 결과이다. 종교적 은유들을 마음과 영에서 우러나는 상징들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사실로 이해하면서 영적인 권리들을 주장할 경우 세계는 끔찍하게 분열되고, 어쩔 수 없이 엄청난 비극을 맞게 된다. 23p

조셉 캠벨이 복구한 유대-기독교 전통의 가장 의미 깊은 가르침은 사실 자비의 가르침으로서, 그것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죽어서 다른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동일한 인간 본성을 드러내는 비전을 향해 부활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네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가르침이다. 25p

1. 은유와 종교적 신비

신화란 무엇인가

“전체적으로 신화란 상징적인 이미지들과 이야기들을 조합해 놓은 것이며, 인간 경험의 가능성들에 대한 은유이고, 특정한 시대에 이루어진 특정한 문화적 성취입니다”30p

신화의 기능은 무엇인가

나는 전통적인 신화들이 네가지 기능을 한다고 본다.
첫째, 존재의 근원적 조건에 의식을 맞추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주의 ‘신비스러운 떨림 mysterium tremendum’을 향해 의식을 깨우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33p
이 첫 번째 기능은 다음의 세 가지 참여의 방식을 통해 현재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일깨우는 것이다. 즉 자기 밖으로 옮겨놓거나 자기 안으로 깊이 침잠하게 되거나, 아니면 스스로 변화하게 한다. 34p
둘째, 해석적 기능이다. 바로 우주질서의 일관된 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P35
셋째, 구체적인 도덕질서, 다시 말해 그 신화가 생겨난 사회의 질서를 정당화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이 세 번째 기능을 통해 신화는 지리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조건지어진 구체적인 사회 집단의 요구에 개인을 맞춤으로써 도덕 질서를 강화한다. 37p
넷째, 개인이 삶의 다양한 단계들과 위기들을 통과할 수 있게 하는 것, 즉 개인들이 삶의 전개를 통전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38p

신화의 언어, 은유

은유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지속적인 오해는 신비를 경험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 앞에 가로놓인 주요 장애물 중의 하나이며, 이 장애물은 편협하게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만 초점을 맞추려는 제도 종교에 의해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44p

은유와 신비

이 상징들은 그 자체를 넘어 꼭 이야기해야만 궁극적 진리를 지시해야 한다. 삶은 절대적으로 고정된 어느 한 가지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이 상징들은 자체에 부여된 온갖 의미들을 넘어서서, 즉 모든 정의들과 관련성들을 넘어서서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를 지시해야 한다. 46p

2. 종교적 신비 경험

상징과 종교적 경험

서구 종교는 유럽이 아니라 지중해 동부 연안, 즉 근동으로부터 유래했다. 조로아스터교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종교들에서는 신이 세계를 창조했고, 신과 세계는 동일하지 않다. 즉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존재론적이고 본질적인 구별이 있다. 49p

신비경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삶은 단순히 전체의 일부분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바로 전체입니다. 전체는 이것저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브라만들이 거룩하고도 신비롭게 표현한, 실로 단순하고도 명료한 것입니다. …… Tat tvam asi, 그것은 바로 너다.” 53p

3. 신에 대한 개념들

신에 대한 개념들의 의미

유대-기독교가 아닌 대부분의 종교 전통들에서, 신은 모든 개념화를 초월하는 특정한 에너지의 대리자이거나 현시이며, 기능들이다. 신들은 에너지의 근원이 아니라 그 대리자들이다. 66p

예수가 “내가 만유이다”라고 말한 의미는 “나는 나 자신을 만유와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도마복음서에 보면 예수가 “장작을 쪼개보시오. 나는 거기에도 있고”라고 말하는데, 그것도 마찬가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말하고 있는 자를 가리키는 것도, 그 신체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정말로 그 자신, 그리고 정말로 당신 자신을 가리킨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69p

연민(자비)이라는 것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며, 다른 동물들은 동물적 본성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그러한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74p

신의 신비에 대한 경험의 요소들

그들은 서로를 먹고 사는 존재들을, 다른 생명들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생명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초기 신화들의 일차적 기능은, 이 장면을 긍정하고 또한 거기 참여하게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79p

서구의 종교적 전통에서는, 이처럼 자기 존재의 근거와 하나가 되는 경험의 가능성을 알지 못한다. 그보다 창조주라고 여겨지는 인격적 존재와 관계를 수립하고 유지할 것을 강조한다. 달리 말하자면 서구 종교는 ‘관계성’의 종교이다. 피조물 a가 창조주 X와 관계(related: R)을 맺는 것이다(aRX). 반면 동양의 종교에 대한 적절한 묘사는 훨씬 단순하다. a=X라는 동일시일 것이다. 84p

상징 : 시공간을 벗어남

오늘날 집단은 개인을 생산하기 위한 모태일 뿐이다. 모든 의미는 개인 안에서 발견된다. 각 사람 안에서 의미는 저마다 유일무이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점을 생각해 보자. 나름대로의 모험을 통해 각자 개인적 삶을 다 살고 나서 돌이켜보았을 때 얻게 되는 깨달음은, 결국 하나의 모범적인 인간적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92p

4. 종교적 상상력과 전통신학의 규칙들

전통 신학의 규칙들과 종교적 상상력의 퇴화

우리 죽음의 은밀한 원인이 곧 우리 자신의 운명이 된다. 모든 생명은 유한하며, 만일 그 유한성에 도전한다면, 우리는 그 유한성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그리고 영웅이란 결국 운명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신들의 행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그 사람이 한 일의 결과이다. 그 삶 전체에 대해서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은밀한 원인이 드러난다. 우리 삶의 여정 자체가 바로 우리 죽음의 은밀한 원인인 것이다. 99p

상상력과 신학적 물음의 관계

5. 유대-기독교 전통의 상징들

우리에게는 어떤 종류의 신들이 있는가

‘브라만 Brahman’이라는 말은 모든 개념들 너머에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가리킨다. 이러한 측면에서 ‘초월’이라는 말을 해석하는 데에도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여기, 이곳을 초월하여 저기, 밖에 있는 무엇인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야훼는 초월이다. 야훼는 저 위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초월이라는 말을 해석하는 또 다른 방식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했던 것으로서, 모든 개념화와 사유 그리고 범주를 넘어서는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우파니샤드에 나타나는 개념이다. 128p

영적 체험은 그리스어 ‘gnosis’, 즉 ‘지식’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언설을 넘어서는 신비에 대한 직관적 깨달음을 묘사한다. 128p

모든 종교적 관념들은 신비에 대한 은유들이다. 그러나 내연으로 잘못 받아들일 경우, 상징이 내포하는 의미는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28p

창세기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고, 욕망은 이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다. 두려움과 욕망이 인간을 동산으로부터 멀리 떼어놓는다. 우리는 유배된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동산으로 돌아가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려움과 욕망을 극복해야 가능할 것이다. 134p

유대 민족의 아버지 아브라함

기독교는 모든 것을 역사화하면서 동시에 매우 강력하게 영지주의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동산에서 일어난 사건이 기독교 안에서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신화적인 사건이었지만,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역사적 사건이지만, 선행하는 신화적 사건에 대한 답으로 해석되었다. 148p

기독교건, 유대교건 우리 서양 종교들은 역사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사건들을 넘어서서 그 영적 의미를 읽지 못하고, 역사적 사건들 자체를 숭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동양의 종교로 눈을 돌리는 것은, 그동안 자신들의 종교 안에서 지나친 문자주의와 역사주의로 인해 닫혀져 있던 참된 의미를 이제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149p

성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그것을 역사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읽는 것이다. 스스로의 방식대로 성서를 읽고, 의미를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성서는 모든 독자들 개개인에게 그들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특수한 무엇인가를 말하기 때문이다. 149p

우리가 신을 이해하는 방식대로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150p

6. 유대-기독교 영성의 상징들에 대한 이해

유대 – 기독교의 상징들

동정녀의 탄생

동굴

유아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이야기가 일깨워주는 것은, 새로운 왕의 탄생은 권력의 영역 밖에 있는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 이루어지며,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왕이 그러한 권세들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170p

이집트로의 도피

스승이 된 아이

메시아

기적들

뛰어난 영적 깨달음을 이룬 사람들은 기적적인 치유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거듭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질병들은 대부분 심리학적 원인에서 비롯된 것들이기 때문에 영적인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심리적 질환은 영적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영향에 의해 치유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기적들은 심대한 영적 능력의 기능일 수 있다. 185p

최후의 만찬

유대

최후의 만찬 장면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예언인가, 아니면 책임부여인가? 나는 이것이 책임 부여라고 생각한다. 188p

십자가 처형

십자가

세계의 종말

7. 질의 응답

질문시간

* 재생은 되풀이 되는 주제이다. 그 상징에 대해서 더 설명해 줄 수 있는가?

영원은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며, 나 자신의 진리와 존재의 영원성을 나의 가능성 안에서 경험할 수 있다. 만일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자신이 본래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죽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14p

* 당신은 자주 시간 속의 그늘을 달의 상징을 통해 말한다. 그것은 삶의 한가운데 있는 고통과 같은 것인가?

내가 말한대로 결혼은 연애가 아니다. 결혼은 일종의 시련이다. 결혼생활을 잘 헤쳐나갈 수 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할 것이다. 시련은 관계를 위해 자아ego를 희생하는 데 있다. 218p

* 어떻게 보통 사람이 초월에 이르며, 의식 儀式은 어떤 구실을 하는가?

초월 transcendence이라는 말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본래 분명한 의미는 ‘무엇인가를 지나가는 것’이며, 무엇인가로부터 벗어나 있거나, 무엇인가를 넘어서는 것beyond이다. ‘신은 초월적이다’라는 생각을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신은 세상을 넘어서는 어떤 것임을 뜻한다. 세상의 사실을 넘어서는 사실이 있을 수도 있겠다.
둘째, ‘모든 개념화를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어떠한 개념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초월은 인간 정신의 어떠한 개념도 넘어서기 때문이다. 218p

어떻게 보통 사람이 초월에 이를 수 있는가? 맨 먼저 시를 공부하라고 말하고 싶다. 시를 어떻게 읽는지 배워라. 시를 읽을 때 반드시 메시지나 메시지의 단서를 얻는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초월의 경험은 서서히 올 수 있다. 초월에 대한 경험에 이르는 길은 많다. 219p

* 제의는 집단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개인의 참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잘못된 사람들의 손에 들어갈 경우, 제의의 효과는 대단히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다. 히틀러에게서 이 점이 아주 잘 드러나는데, 그는 국민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제의를 천제적으로 잘 이용했다. 222p

*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을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기독교만이 유일하게 소위 영원한 지옥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치명적인 죄를 범한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고 여겨진다. 다른 종교 체계들에 나타나는 지옥 개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연옥에 더 가깝다. 즉 옮겨가는 정화의 장소이다.

8. 대담

지구의 떠오름 – 새로운 영적 각성의 시작

신화와 상징은 모든 종교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특징으로 종교체험의 특수한 언어이다. 237p

우주시대의 신비적 명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끝나가고 있습니다. 묵시록은 불타는 아마겟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지와 자기만족이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조합調合 할 수 있는 신화를 가지지 못한, 갈라지고 분열된 세계관은 끝나고 있습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는 배타주의, 진리를 독점한 집단이 있다는 생각, 이것이 사라져야 할 세계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무엇입니까? 그 나라는 하느님의 보편적 현존이 우리의 이웃들 안에서, 우리의 원수들 안에서, 우리 모두 안에서 실현되는 데 있습니다. 246p

우리가 어떤 호의적인 방문자에 의해서, 다른 행성으로부터 온 힘들에 의해서 구원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분명히 우주에 대한 낡은 이해가 반영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다른 근원으로부터 오는 나라에 대한 관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들이 ‘바깥 어딘가’로부터 행동한다는 관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248p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hart는 궁극적인 ‘놓음-쥠leave-taking’은 ‘신을 위해 신을 놓음’이라고 언젠가 썼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무엇인가를 공유할 수 있으며, 진리에 대한 독점을 포기하게 된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것은 당신이 프랑스인이면서 동시에 한 인간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종교들이 우주 시대에 직면한 도전입니다. 252p

내가 좋아하는 신화에 대한 정의는 ‘다른 사람들의 종교’입니다. 종교에 대한 내가 좋아하는 정의는 ‘신화에 대한 오해’입니다. 254p

<역자 해설>

1. 자연, 인간, 신

캠벨이 발견한 종교적 깨달음의 요체란 인간과 자연, 온 우주를 관통하는 근원적 자아에 대한 깨달음이다. 근원적 자아 안에서 나와 너, 그리고 자연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근원적 자아란 다름 아닌 나 자신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원 제목대로 ‘내가 바로 그것’이라는 깨달음이다. 264p

2. 근동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자연과 유대-기독교의 초월적 신관

히브리인들의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신 이해는 이러한 현상세계와의 관련성을 부정한다. 이러한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인식을 결정한 자연환경적 요소로서 광야, 사막이 지니는 중요성은 대단히 크다. 270p

발달된 도시 문명과 국가의 종교는 근본적으로 화려한 물질문명을 찬양하며, 국가의 건설과 유지를 위해 사람들을 동원하고 독려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한다. 그럼으로써 문명과 종교는 한 배를 탄다. 그러나 광야는 본질적으로 비어 있는 곳, 문명과 인간적 성취가 그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곳이다. 사막은 모든 것을 무로 돌리고, 문명과 인간적 가치가 지니는 허망함과 위선, 기만을 폭로한다. 사막은 문명의 구역질나는 배설물이 없다는 점에서 깨끗한 곳이지만, 사막의 깨끗함이란 사실상 가난과 고독, 황량함이기도 하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의 사막 체험은 양면성을 지난다. 피압박 민족으로서 문명의 필연적 부산물인 억압과 굴종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문명을 혐어하고 경명하면서 동시에 사막의 척박함, 빈곤으로부터 벗어나 문명이 약속하는 풍성한 삶에 이르고자 하는 동경이다. 히브리인들의 종교 체험 근저에는 물질문명에 대한 경멸과 동경이라는 모순된 심리학적 정서가 역설적으로 공존한다. 히브리인들의 사막 체험은 사막이 지니는 문화적 결핍, 경제적 빈곤, 열등감, 무산자들의 복수심 같은 심리학적 특징들을 기반으로 한다. 271p

3. 유대-기독교 : 역사, 사회적 계시 종교

국가는 인간들 사이의 계약이나 계급적 이해 관계의 타협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의 경륜이 펼쳐지는 자리이고, 민족사는 하느님의 구원사로 이해되었다. 자연이 아니라 역사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로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이들에게는 구원사와 실제 역사가 동일시 되었던 것이다. 273p

이스라엘의 신앙적 자기이해 밖에서 보았을 때 이들이 말하는 역사는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사실로서의 역사일 수 없고, 신앙에 의해 해석된 역사, 계시로서의 역사, 다시말해 신화적인 역사이다. 유대인들은 신화와 대립된 것으로서 역사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역사 속에서 계시되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새로운 신화를 창조한 것이다. 274p

이것이 조편성과 객관성을 지닌다고 주장될 때 독단과 편견, 아집이 판을 치게 된다. 275p

구약성서와 기독교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시간 안에 있는 인간 실존을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신 앞에서 선 존재로 엄숙하게 인식하는 역설이 생겨난다. 이것은 유대-기독교적 인간 이해의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275p

4. 사실과 은유

기독교에서도 역시 신성은 인간 안에 있지 않으며, 기독교라는 종교의 목표 역시 초월과의 동일성에 도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결코 동일하지 않은 인간과 신 사이에 관계를 수립하는 데 있다.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구체적인 사회적 실체인 교회를 통해 매개된다. 교회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현실적이고 눈에 보이는 대리인으로서 이 땅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책임을 부여받는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교회라는 사회 집단과 이들이 내세우는 다양한 성서적, 교리적 주장들에 엄청난 힘을 부여하게 되었다. 캠벨이 유대-기독교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276p

캠벨은 교회가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서 시작되었지만, 역사적 발전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사회 제도로 정착했고, 결국에는 인간의 내적 본성을 신성과 중재하는 역할을 하기보다는 사회적, 정치적 실재로서 스스로를 위한 주장만을 하게 되었으며, 현대의 역사적 과학적 지식으로부터 제기되는 공격에 대해서도 과거의 주장만을 시대착오적으로 되풀이하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본연의 기능인 종교적 경험의 중재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캠벨이 이 책에서 집요하게 비판하는 것은 신비를 전달해야 할 기독교 전통의 언어가 오로지 역사적으로 이해됨으로써 사실들에 대한 서술로 변질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역사적 계시를 강조함으로 인해 종교적 언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은유와 상징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신성과의 일치에 대한 감각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277p

“신화의 역동적이고 은유적인 언어가 전달하는 경험, 내지는 깨달음이란 모든 개체적 존재의 내밀하고도 깊숙한 곳에 있는 내적인 불꽃이 결국은 만물의 근원이자 신으로서의 궁극적 존재와 하나라는 것이며, 종교적 수련의 중요한 과제는 내 안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캠벨에 의하면 무릇 종교란 이 내밀한 존재와의 일체감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며, 종교적 언어는 이러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은유적인 성격을 지닌다. 성서와 기독교 전토의 언어 역시 캠벨에 의하면 은유이다. 277p

기독교인들은 이 매체와 핵심과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캠벨이 보기에 기독교인들은 역사적이고 물질적인 옷에 불과한 매체를 사실화, 사물화해서 그것 자체가 핵심인 것처럼 착각한다. 은유는 영적인 실재나 현실을 묘사하는 언어들이다. 그러나 은유의 매체는 절대적일 수 없다. 문제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고 역사적인 옷에 불과한 매체를 사실적ㅇ로 이해하고 다시 이것을 절대화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성서의 문자적 차원을 역사화, 사실화하고 다시 이것을 영적으로 절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278p

캠벨에 의하면 신비란, 바로 우리들 자신과 우리가 사는 세계의 존재 자체에 다름 아니다. 280p

캠벨에 의하면 신은 근원이 아니라 세계를 지탱하는 힘과 에너지를 개념화하는 한 방식이다. 신들은 에너지의 근원이 아니라 그 대리자들이다. 그러나 근원이자 신비 그 자체는 모든 개념 규정과 정의를 넘어선다. 281p

5. 맺는 말

죄에 대한 기독교적 감수성은 삶의 부정성, 역사의 갈등과 모순, 즉 고통 앞에서 가장 잘 발휘된다. 그리고 캠벨의 기독교 신화 해석에서 근본적으로 잃어버리는 것이 이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283p
사실 캠벨이 시종일관 주장하는 “네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원초적인 종교적 깨달음 역시 세련된 철학적 가르침에 머무르지 않고, 그가 추구하는 대로 원초적이고도 생생한 종교적 경험을 담아내려면, 종교적 언어의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 284p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친절한 캠벨씨’가 생각났다.
물론 친절함의 원인은 유진 케니디와 관련 기획자들의 노력과 헌신의 결과였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을 번역한 이화여대 박경미 교수의 캠벨에 대한 넓은 이해와 책에 대한 정성이 빛을 발하고 있다.

첫째, 이 책은 기독교 사상을 재구성하는 측면에서 기획, 편집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캠벨과 관련된 다른 저작들과는 다르게 그의 사상을 일목 요연하고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캠벨의 원전을 읽어 들어가기 전에 유진 케네디의 서문만으로도 캠벨의 전체적 사상과 주장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인용과 은유에 대한 정의, 유대-기독교 전통에 대한 설명은 너무도 멋진 표현이었다.

둘째, 1장~ 6장까지의 전체적 흐름이 정말 매끄러웠던 것 같다. 첫 장의 신화에 대한 정의와 그에 따른 종교적 신비에 대한 설명(2장), 논쟁적으로 흐를 수 있는 신에 대한 개념들(3장), 상상력과 신학적 질문(4장), 유대-기독교전통(5장), 그리고 상징들의 이해(6장). 이 모든 흐름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지루하지 않게 구성되었다. 저자가 독자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 그리고 정성을 들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셋째, 마지막 장인 질의응답과 대담에 대한 구성이 돋보였다. 이 부분을 통해 캠벨에 대한 이해를 정리할 기회가 주어졌다. 또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던 다른 부분에 대해서 일정부분 해소시킬 수 있는 좋은 구성이었다.

넷째, 책 중간중간에 단어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존재했던 ‘각주’부분이 특히나 마음에 들었다. 스코트 재판, 창세기 원전에 대한 비교설명, 종교적 용어와 단어들에 대한 설명 등 과 같은 각주의 설명이 이 책을 더욱 흥미롭게 읽어 나갈 수 있도록 도왔다. 캠벨의 저작의 경우, 고대 신화와 종교적, 심리학적 용어가 많이 인용되고 있기에 이러한 용어의 어려움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난해함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미흡한 부분에 대한 지적보다는 여러 캠벨의 저서 중에서 <네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책을 최고의 백미로 꼽고 싶다. 물론 기독교 신화에 한정된 책의 구성은 한계가 분명하지만, 초심자들을 위한 좋은 길라잡이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유진 케네디와 박경미 교수의 노력과 작업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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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4.29 00:03:39 *.36.210.11
<동정녀의 탄생은, 독자들이 알게 되겠지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생물학적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영적 거듭남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약속의 땅은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인간 내면의 영역을 가리킨다. 19p>

<조셉 캠벨이 복구한 유대-기독교 전통의 가장 의미 깊은 가르침은 사실 자비의 가르침으로서, 그것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죽어서 다른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동일한 인간 본성을 드러내는 비전을 향해 부활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네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가르침이다. 25p>


캠벨과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도 연구원 생활 내내 작가들과 그들의 책과 다시 읽고 싶고 다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여간해서 쉽게 주어지거나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할 때 열심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부님께서는 작가를 술자리에 불러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일상 가운데에서 그를 느끼고 그대들의 책과 그대들의 문제와 만나는 것이 가장 잘 만나는 것이 될 것이다.

잊지 말라. 읽기 전에는 자지 말고 쓰기 전에는 펜을 놓지 말라. 두 눈에 신념의 불을 켜고 가고 또 가라. 그대가 신화이니. 그대를 깨우는 것은 그대요 우리들 몫이다. 가고 또 가고 쉼 없이 가자. 올 한 해는 모쪼록 그렇게 하자. 우리는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위대하다.


나는 생물학적 의미의 출산을 하면서 신의 신비와 경이에 대한 궁금증을 체험하였다고 처음 느꼈습니다. 남자인 그대들은 어떨 때 어떻게 '내가 바로 그것이다' 라고 느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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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4.29 07:29:46 *.244.220.254
써니누님~ 글 잘 쓰시네요. 진심으로. 글에서 격렬한 역동성이 느껴집니다. 거친 호흡으로 밀어붙이는 문체가 장점인 것 같아요.

누님 말씀대로 캠벨을 다시 못만날 수도 있겠죠. 다만 제가 대안적 사상이라고 생각하는 신비주의사상을 다시 공부할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다시 만나리라 생각합니다. 열심히 할 때 제대로 하라는 정곡을 찌르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아이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에 취할 때.
저녁을 채워나가는 아름다운 석양에 취할 때.
허물없는 사람과 긴밤 소주 잔을 기울이며 취해갈 때.
'내가 바로 그것이다.'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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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
2008.04.30 12:09:32 *.36.210.11
여자는 복잡해서 단순하고 남자는 단순해서 복잡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대의 글을 읽으니 하루 하루가 신화였고 늘 무거운 신화라는 사실이 이해가 되네.

하루를 전쟁처럼 치르며 살아가는 위대한 남자들, 그들을 사정없이 볶아치는 여자 여자 여자. 엄니 아내 그리고 딸 더하여 또 수 많은 여자들의 세상, 그 속에 나는 영낙없는 악처였구나. 그는 소크라테스가 됐을라나?

전쟁 같은 우리의 신화가 신비하고 경이로운 즐거운 신화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샐러리맨의 죽음에서 그 주인공처럼 사회가 만든 사람이 되어 살지 않고 기꺼이 고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 우리가 타고난 원래의 신화를 소생시켜 경탄하고 신나게 살 수 있는 것은 무엇으로 어떻게 찾아내고 기억하며 살아가는 삶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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