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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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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8일 03시 09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박경리 선생이 사경을 헤메고 있다. 너무나 어릴 때 ‘ 김약국의 딸들’을 읽으면서 만났던 선생은 토지를 읽으면서 더 가까워졌다. 선생이 머무시는 곳에서 농사를 짓느라 투박해진 선생의 손으로 지으신 무공해의 성찬을 지인들과 먹던 일이 눈에 선하다.

글을 쓰고 책을 낸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자취를 남기는, 다시 말해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다.
독자로서 작가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는 것, 이기적인 내게는 기쁜 일이며 동시에 어떤 부분 버거운 일로도 받아들여진다. 이해하고 접어 두어야할 세상이 그만큼 넓어진 것으로 이해되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박경리 선생의 작품과는 또 다른 기쁨을 알게 한 조셉 켐벨은 내게 때로 행복했고, 때로 요령부득이었던 작가였다. 우주의 섭리를 다각도로 분석하고 비판하고 해석하고자 했던 그에게 배운 것은 그의 족적이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깨달음 이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신의가면II 동양신화
p.11. 동양인의 삶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영원 회귀의 신화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정한 형식의 질서를 보여준다. 태양의 일주, 달의 차고 이지러짐, 연 단위의 주기, 그리고 유기체의 출생, 죽음, 재생의 리듬은 우주의 본성을 이루는 영원한 생성의 기적을 표상한다. 금, 은, 동, 철의 네 시대로 이루어진 고대 신화는 잘 알려져 있다. 거기에서는 세계가 점차 쇠퇴하고 악화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신화 속의 세계는 혼돈 속에서 일시적으로 해체되었다가 꽃처럼 신선하게 다시 피어나서 그 자체의 필연적인 과정을 새롭게 시작한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때는 없었으며, 시간 안에서 작용하는 이러한 요지경 같은 영원성의 놀이가 중단되는 경우도 결코 없을 것이다.

p.11-12. 이러한 신화 속에서 우주나 개인이 개별적인 독창성이나 노력을 통하여 새롭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소멸하는 수밖에 없는 신체 및 감정과 그들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만사가 고통임을 반드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모든 것은 종말을 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물의 회전축을 이루는 고요한 영원성의 지점을 발견한 사람들은 만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심지어는 만사를 영광스럽고 경이로운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의 첫 번째 의무는 그에게 주어진 역할 - 태양과 달, 여러 가지 동물과 식물의 종, 물, 바위, 별들처럼 - 을 아무런 저항이나 오점 없이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의식과 내재적인 전체성의 원리를 동일화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조절해야 한다.

p.13. 심리학적으로 볼 때, 그러한 의례를 행하는 것은 마음의 초점을 (사멸하는) 개인으로부터 영속적인 집단으로 옮기는 효과가 있다. 주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모든 생명체 속에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력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 생명체들은 다양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이다. 이렇게 하여 얌, 코코넛, 돼지 달, 빵나무 열매가 활기차게 자라게 되며, 인간 공동체의 성장도 활기를 띠게 된다. (중략)
기원 후 16세기의 인도에서는 왕이 그 자신의 몸을 자르는 의식을 행하였다. 검은 여신 칼리는 “접근하기 어렵다(durga)”라는 뜻을 지닌 많은 이름들 중의 하나로서 매우 무시무시한 신이다. 그녀의 위는 텅 비어있고 결코 만족할 줄 모른다. 그녀의 자궁은 영원토록 모든 것을 낳고 있다. 그녀의 사원에서는 제물로 바친 잘린 머리로부터 수천 년 동안 피가 강물처럼 계속 흘러왔다. 이 피는 신성한 근원으로 돌아가도록 조각한 순환 통로를 통하여 용솟음치며 흐르고 있다.

p.18. 기원전 700년 경의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Brihadaranyaka Upanishad)』에는 인도의 예가 나오고 있다.
처음에는 인간의 모습을 한 아트만만이 있었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니 그가 아닌 다른 존재는 있지를 않았다. 그래서 그가 ‘아함 아스미(내가 있다.)’라고 말하였는데 아함(나)이라는 말은 이렇게 해서 생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도 우리는 스스로를 지칭할 때 ‘야함 아함(이것은 나)’ 하고 나서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두려웠다. 그의 이 두려움 때문에 지금도 우리는 ‘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는 생각하였다. 나 이외의 아무도 없는데 도대체 누구를 두려워하는가. 두려움이란 다른 존재에 대해서 생기는 것이다.
그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가 이때 즐겁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는 혼자가 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존재를 원하였다. 그는 여자와 남자가 서로 부등켜안고 있는 것과 같은 크기가 되었다. 그 자신을 둘로 떨어지게 하였다. 거기에서 남편과 아내가 생겨났다. 성자 쟈쟈발키야도 몸은 과일 (배)을 두 쪽으로 나눈 것 같아 절반이라 하였다. 나머지 절반은 대공인 여자로 채워지는 것이니 그는 여자와 하나가 되었으며, 거기에서 인간이 나게 되었다.

p.19. 최초의 존재에 관한 이러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가장 잘 알려진 서양의 예는 물론 창세기 제 2장이다. 거기서도 최초의 존재가 둘로 나뉘어져 있어서 둘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이다.

p.20. 더구나 이 신화에 대한 성서적 해석에 따르면 인간이 타락한 것은 창조 이후지만, 인도의 경우에는 창조의 자체가 하나의 타락, 곧 신의 파편화이다. 그렇지만 그 신은 비난받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창조, 다시 말해서 그의 “쏟아 냄”은 그 이상의 것이 되려고 하는 자발적이고 역동적인 행위로 묘사된다. 이러한 행위는 창조에 선행한 것이며, 따라서 문자적, 역사적 의미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은 이미 창조된 시공간 구조 안에서의 한 사건이며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하나의 사고였다. 이와 달리 인간의 형태 - 주위를 돌아보고, 자기 자신 이외에는 어떤 것도 보지 못하자, “나”라고 말하고, 두려움을 느끼고, 둘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 를 한 자아의 신화는 존재의 다양성 속에서 방황하는 요소가 아니라 본질적 요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 요소를 수정하거나 폐기하는 것은 창조를 지향시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를 해체하게 된다. 인도적 시각은 형이상학적이고 시적이다. 반면 성서적 시각은 윤리적이고 역사적이다.

p.21. 이와 반대로 인도적 시각에서는 여기서 신적인 것은 저기서도 신적인 것이다. 어느 누구도 “주의 날”을 기다리거나 그것에 대해서 희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상실된 것은 단지 사람들이 찾아와 주기를 바라면서 각자의 자아(아트만[atman]) 안에, 바로 지금 이곳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그들이 말하듯이, “사람들이 한 조각의 가죽처럼 우주를 말아올릴 때에만 슬픔은 사라질 것이다. 신을 아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다.”

p.22. 이처럼 동양과 서양이 공유하고 있는 원초적 양성구유 신화는 두 전통에서 모두 동일한 과제에 적용되고 있다. 그 신화는 일상의 세속적 생활 안에서 인간이 신적 알파와 오메가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신화의 논증들은 근본적으로 다르며, 근본적으로 다른 두 문명을 지지하고 있다. 만일 인간이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신에게서 벗어났다면 그를 신에게로 되돌릴 수 있는 것 또한 역사적 사건일 것이며, 이와 달리 인간이 어떤 심리학적 전치에 의해서 신으로 향하는 길이 막혔다면 심리학이 그를 되돌아가게 하는 운반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도에서는 최종적 관심의 초점이 공동체 (뒤에서 보겠지만 성스러운 공동체의 관념이 규율적 힘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더라도)가 아니라 요가이다.

p.24. 카를 융은 『정상심리학과 병리심리학에서의 무의식(The unconsciousness in Normal and Pathological Psychology)』(1916)이라는 초기 저술에서 2가지의 심리학적 유형인 두려움에 시달리는 내향형과 욕망에 시달리는 외향형에 관해서 서술하였다. 프로이드도『쾌락 원칙을 넘어서(Beyond the Pleasure Principal)』(1920)에서 “죽음에의 욕구”와 “삶에서의 욕구”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인간에게는 폭력으로 향하는 의지와 그것에 대한 두려움(타나토스[thanatos], 데스투르도[desturdo])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하고 사랑 받으려는 욕구와 욕망(에로스[eros], 리비도[libido])이 있다는 것이다. 이 2가지는 심리 에너지의 깊고 어두운 근원인 이드(id)로부터 동시적으로 튀어나오므로 자아 중심적인 “쾌락 원칙”에 의해서 행사된다. 따라서 나는 원한다. 그러나 나는 두렵다. 이를 인도 신화와 비교하면, 인도 신화에서는 자아가 “나(아함)”를 말하자마자 먼저 두려움을 인식하게 되고, 그 다음 욕망을 인식하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 영혼 개발에 관한 동서양의 접근 방식의 근본적 차이를 해명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이 있다. 인도 신화에서는 에고, 즉 “나”의 원칙이 쾌락 원칙과 완전히 동일시되는 반면,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에서는 에고의 고유한 기능이 외적 실재(프로이드의 “현실원칙”)를 인식하고 그것과 관련을 맺는다. 이때 외적 실재는 형이상학적 실재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물리적, 경험적 영역의 실재이다. 다른 말로 하면, 현대 서양에서 이해하는영적 성숙은 이드로부터 에고의 분화를 요구하는 반면, 동양 - 에서는 에고(아함-카라[aham-kara] : "나라는 소리의 형성") 를 리비도적 기만 원칙으로 간주하여 비난하며, 궁극적으로 해체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p.26-27. 왕자 고타마 샤카무니(석가모니/역주)는 모든 존재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지식을 찾기 위해 우주의 중심에 도달하였다. 이 이야기는 우주의 중심이 지상의 어느 곳에 있는 물리적 장소로 간주되지 않도록 하기위해서 신화적 용어로 기술되어 있다. 이 이야기 속의 우주의 중심은 심리학적 위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곳은 우주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마음의 균형점이다. 모든 존재가 그 주위를 돌고 있는 해방의 지점이다.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물은 시간 안에서 움직이며, 궁극적으로는 구체적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나는 여기 있고 당신은 거기 있다. 오른쪽과 왼쪽, 위와 아래, 생과 사의 어느 쪽에 우리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의 쌍은 무한하며, 세계의 바퀴와 시간의 바퀴는 계속해서 돈다. 우리의 삶은 이러한 수레바퀴의 회전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바퀴의 살과 같은 모든 대립물이 텅 빔 속에서 함께 수렴되는 바퀴통, 즉 모든 것을 떠받치는 중심이 존재하고 있다. 동쪽(새로운 시대의 세계의 방향)을 향한 바로 그곳이 과거, 현재, 미래의 붓다들 - 이들은 시간의 양식 속에서는 연속적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하나의 붓다이다 - 이 절대적 깨달음을 경험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p.28. 축복받은 자는 무수한 생을 통하여 무한한 공덕을 베품으로써 그의 마음 안에서 “나(아함)”라고 하는 개념을 부수어 버렸고, 어떠한 “너(트밤[tvam])”와의 관계적 경험도 없애버렸다. 나와 너만이 아니라 삶과 죽음, 선과 악의 대립쌍들을 넘어선 지식의 나무 아래에 있는 부동지의 텅 빔 속에서 그가 “나”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였다면, 그는 “그들”에 대해서도 어떤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매혹적 동작을 보여준 신의 관능적 딸들을 주체의 자리에서 하나의 대상으로 파악하였다면, 그는 적어도 스스로를 통제하는 것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어떠한 “나”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떠한 “그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붓다들처럼 결코 정복될 수 없는 (심리학적) 자세로 부동지에서 확고하게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 자신이 거기에 결코 존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축복받은 자는 날카로운 화살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p.32. 성인들이 예부터 가르쳐 온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새로울 수 없으며 새로 배워야 할 어떤 것도 없다. 결국 “당신은 해야 한다”에 대항하여 “나는 원한다”라고 외치는 유아적 지평의 지루함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제공되는 것은 네 번째이자 마지막 목표인 유아적 에고의 전면적 소멸이다.

p.34. 이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는 다르마임에 틀림없다. 다르마의 어근 dhr는 유지하다, 지탱하다, 휴대하다, 지니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르마는 우주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존재를 유지하는 질서이다. 『도덕경』이 도에 대하여 말하듯이 인도인들은 다르마에 대하여 말한다. 다르마의 저편은 정의할 수 없고, 다르마의 이편은 만물의 어머니이자 토대이고 운반자이다.

p.36. 이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중국적 일자 개념은 둘로 분화되어 만물을 낳으며, 만물의 존재 법칙 - 도, 길, 의미, 질서, 실체 -으로서 내재한다. 따라서 이러한 중국적 일자 개념은 둘로 분화되어 있는 성서적 일자 개념보다는 인도적 일자 개념에 확실히 더 가깝다. 도의 상징은 이브가 분리되기 이전에 아담이 지닌 이중적인 이미지를 제공한다. 그러나 도는 성서적 표상과는 대조적이며 둘로 분리된 자아에 대한 인도적 표상과 조화를 이룬다. 도는 초월적일 뿐만 아니라 내재적이다. 도는 만물의 비밀스러운 본질이며 가장 심오한 신비이다.

p.36-37. 기원전 4세기와 3세기의 중국에는 많은 정숙주의 학파가 존재하였다. 그 문헌 중에 약간의 것이 남아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내가 기학파라고 부르는 학파의 것이다. 그 학파의 교의는 “마음의 기술”을 의미하는 심술이다. 여기서의 “마음”은 두뇌나 심장이 아니라 “마음 안의 마음”이며, 태양이 하늘과 맺고 있는 것과 같은 관계를 인간의 신체와 맺고 있다. 마음은 신체의 주인이고 신체의 각 부분은 마음의 대리인이다. 마음은 옥좌에 앉아 있는 군주처럼 침착하고 움직이지 않는 채로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말끔히 쓰고 곱게 장식한 그 거소를 차지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신일뿐이다. 인간이 신을 위하여 마련해야 하는 장소는 신의 사원, 즉 궁이라고 불린다. “문을 열고 자기 자신을 옆으로 물리고 조용히 기다려라. 그러면 신령의 빛이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집을 만들 것이다.” 잠시 뒤, “모든 것이 깨끗이 청소된 곳에만 신령이 거할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알고 싶어 하나 자신들이 무엇에 의해서 인식하는가를 탐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그것(외적세계)이다. 그러나 그의 인식 수단은 이것(그 자신)이다. 어떻게 그가 그것을 알겠는가? 자신의 완성에 의해서만 세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p.39-40. 일상적인 인도인의 관점과 목표는 항상 고요한 물의 상태를 경험하려는 요기의 그것이었던 반면, 중국인과 일본인은 파도와 함께 움직이는 경향이 있었다. 서구의 근본적인 신학적 혹은 과학적 체계와 비교하면, 인도와 극동의 이 2가지 관점은 분명 동일한 것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이 2가지 관점을 비교하면 그들 사이에는 서로 대조되는 점이 보인다. 인도인은 존재의 껍질을 깨고 초월적이고 내재적인 영원성의 텅 빔 속에 황홀하게 남아 있으려고 한다. 이와 달리 중국인이나 일본인은 “위대한 텅 빔”이 바로 인물의 “운동자”라는 사실에 만족하면서 사물의 움직임을 허용한다. 그리고 두려움이나 욕망 없이 그 자신의 삶이 사물과 함께 움직이면서 도의 리듬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한다.

p.40. 극동의 현자들은 만물을 정지시키려고 하는 대신, 각각 사물이 나름의 방식대로 움직이는 것을 허용한다. 사실은 만물과 함께 춤을 추면서 “행동 없는 행동”을 한다. 이와 달리 인도인은 텅 빔의 강직증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

p.45. 이간 이성과 책임적 개인, 초자연적 계시와 신이 지배하는 하나의 참된 공동체, 위대한 내재적 텅 빔 상태에서의 요가적 통제, 천지의 도와 자발적으로 일치하는것, 이러한 4가지 전통을 각기 대표하는 프로메테우스, 욥, 눈을 감고 앉은 붓다, 눈을 뜨고 소요하는 현자를 네 방향으로부터 함께 모아보았다. 이제 이러한 4가지의 전통을 각각 장엄함의 측면만이 아니라 유치함의 측면에서, 그리고 몰입이나 경멸의 태도 없이, 아주 냉정하게 살펴볼 차례이다. 니체가 선언하듯이, 삶은 “기만당하기 원하고 또한 기만으로 살아가지만” 때로는 진리의 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p.46. 세계의 신화와 종교에는 두 가지의 강력한 모티브가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다. 이 두 가지 모티브는 같은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중 역사적으로 먼저 나타난 첫 번째 모티브는 경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이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관조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당황스러움으로부터, 악마적 공포나 신비적 경외에 사로잡히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다. 두 번째 모티브는 자기 구원으로서, 이는 빛 바랜 세계로부터의 해방이다.

p.47.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가 어떤 일련의 “랍리적” 명제에 전적으로 포함될 수 없음을 주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의 다양한 “계기(moments)”의 상호 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은 가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종교의 본성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p.47-48. 나는 이 명제를 이 책의 좌우명이자 과제로 삼을 것이다. 중동의 중심부에서 동서양의 공통분모가 발전한 이후, 고등 문화의 역사 속에서 동양과 서양이 분리되고, 성스러움을 경험하는 “계기(심리학적 단계라고도 부를 수 있는)”들도 분리되었음을 덧붙이고 싶을 뿐이다. 더구나 내가 위대한 반전(the great reversal)이라고 이름 붙인 중요한 시점 - 이때 서양만이 아니라 동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성스러움의 의미를 우주와 자신의 본성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찾았으며, 견딜 수 없는 죄, 추방, 또는 기만 상태로부터 벗어나려고 열망하였다 -이후, 두 세계에서 등장한 자기 구원의 방식은 전적으로 달라졌다. 앞장에서 지적하였듯이 서양에서는 인간과 신의 분리를 강조하기 때문에, 신으로부터의 분리를 고통으로 해석한다. 이때 고통은 대체로 죄의식, 처벌, 속죄 등의 용어로 나타난다. 이와 대조적으로 만물 안에 신성이 내재하고 있다는 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는 동양에서는, 잘못된 판단으로 인하여 독해가 차단되기도 하지만, 독해의 방법은 심리학적이다. 따라서 동양에서의 해방의 방식과 이미지는 초자연적 부친의 권위적 명령보다는 대안적 치료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아이러니가 작용하고 있다. 가장 열렬하게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자신의 욕망에 구속되어 있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바로 자기 추구이기 때문이다. 붓다가 스스로 에고를 소멸시켰을 때 세계가 꽃으로 변화하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앞 장에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구원보다도 경이가 종교인 사람에게는 언제나 일어났다.

p.57. “농경문화 최초의 가시적이고 중요하고 영적인 표현인 지모신과 신성한 황소는 수천 년간 근동에서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어떤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물론 근동에서만 그러는 것이 나타났다고 할 수는 없다. 문명 창조자들의 경이감을 이러한 최초의 상징들을 통하여 회화적으로 나타낸 모티브들은 어느 정도는 현대 동양과 서양의 최신 신학들에서도 잔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세계 문명 여명기의 한 위대한 지역이 되어 버렸지만 그들의 노래가 신화적 과거를 통하여 메아리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들의 음악은 이러한 최초의 신석기적 형태로 소박하게 나타났으나, 성당 예술과 사원 예술의 완전한 합주를 통하여 기원후 500년에서 1500년경 사이에 아일랜드에서 일본에 이르는 지역에서 아주 위대하고 풍부한 결실을 맺었다.

p.72. 슈펭글러는 계속 말하였다. “어린이는 생명력을 상실한 시체, 다시 말해서 전적으로 물체와 공간이 되어버린 어떤 것을 어느 순간 갑자기 이해하려고 한다. 그와 동시에 그는 낯설고 광활한 세계 안에서 자기 자신을 개별적 존재로서 느끼게 된다. ‘다섯 살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의 자신에 도달하는 데에는 단지 한걸음이면 족하다. 그러나 신생아로부터 다섯 살 어린이 사이의 거리는 엄청나게 멀다’고 토인비는 말한 적이 있다. 바로 이러한 결정적인 실존의 순간에 인간은 처음으로 인간이 되고 우주 안에서 그의 무한한 고독감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세계에 대한 공포가 처음으로 그 자체를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두려움, 즉 죽음, 빛의 세계의 한계, 냉혹한 공간의 현존에 직면한 인간적 공포로 드러난다. 바로 여기서 죽음에 대한 사색이라는 높은 수준의 사상이 출현하는 것이다.”

p.89. 철저히 연출되어 왔던 이전의 낡고 어둡고 무시무시한 왕의 죽음 대신에 이제 청중은 장엄한 상징적 마임, 즉 세드 축제(the sed festival)를 보게 되었다. 여기서는 왕이 실제적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불편함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파라오의 권위를 새롭게 하였다. 어떤 권위 있는 학자들에 의하면, 그 의례는 통치 기간에 관계없이 30년을 주기로 행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의례의 일정을 좌우하는 유일한 요인은 왕 자신의 욕구와 명령이라고 한다. 어떻든 그 의례의 실제 영웅은 마치 파라오를 옷처럼 입고 벗는 무시간적 파라오(대문자 P)가 아니라, 살과 뼈로 된 살아 있는 옷, 즉 특정한 파라오 아무개이다. 이러한 파라오는 배역을 위해 그 자신을 넘겨주는 대신 배역을 그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길을 발견하였다. 그는 신화적 이미지를 단지 한 단계 낮추는 방법으로 이러한 일을 하였다. 그것은 파라오들을 변화시키는 파라오가 아니라 복장을 바꾼 파라오였다.

p.90.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행렬과 광경은 중심적 사건으로 나아가는 예비 단계에 불과하다. 모든 전통적인 의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의례에서도 의례의 시작과 준비 단계는 절정의 순간(과거에는 왕의 살해)으로 이어지며, 그 후 일련의 간단한 마무리 명상과 축복 등의 행위가 있고, 마침내 종료 행진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프로그램에는 대체로 5가지 단계가 있다.

p.105. 에두아르드 메이어는 이 텍스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우리는 이 이집트적 지혜의 사색들이 얼마나 오래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 신화들을 단순한 문자적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더 이상 안 된다. 그것들은 세계를 영적으로 파악하려는 보다 깊은 사고의 연출, 즉 하나의 통일체로 이해하여야만 한다.”

p.114. 아직 살아 있는 신들 자신에 의하여 세워진 이 지하 궁전의 주인들에 대한 이러한 기술에 비추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들 자신을 수용하기 위해서 건설되고 있는 방과 복도를 보았고 그 의미를 알고 있던 젊은 여인들, 난쟁이들, 환관들, 그리고 궁정의 경호원과 지배인들의 감정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위대한 “나”라고 하는 이러한 괴물들이 인간적이고 자비로운 존재로 간주되도록 한 그 냉정한 영향들은 무엇이었을까?
이미 언급하였듯이, 나 자신의 첫 번째 추측에 의하면, 그것은 예술의 영향이다. 신화는 환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사실적인 신화적 동일시나 인플레이션의 결과 - 즉 구체적인 신의 모방 -로 형성된 문명이나 삶은 필연적으로 악몽, 다시 말해서 너무 심각하게 연출된 꿈의 게임 - 다른 말로 하면 광기 -의 특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반면 그와 동일한 신화적 이미지가 환상으로서 적절하게 읽혀지고 자연이 아니라 예술 - 격렬한 악마적 강제가 아니라 역설과 은총을 지닌 -로서 삶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 허락될 때, 이전에 강제적인 이미지의 포로로 있던 심리적 에너지가 그 이미지를 다시 포착하게 되고, 나아가 그것은 삶의 확장을 위하여 선택적인 자발성을 가지고 재배치될 수 있다. 더구나 삶 자체는 꿈을 만드는 재료와 같은 것으로, 그러한 강조점의 전환은 때가 되면 그 자신의 본성을 고귀하게 의식하면서 사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p.128. 엔키는 이를 축하하기 위해서 배우자와 어머니를 위한 잔치를 열었으며, 모든 신을 초대하였다. 그가 실천한 것은 위대하고 놀라운 생각이었다. 신들은 이것을 재빠르게 알아차렸다. 엔키가 그들을 위하여 노예로서 봉사할 인류를 발명한 것을 놓고 신들은 분에 넘칠 정도로 칭송하였다. 이 노예들이 농지를 열심히 경작하면 신들은 희생물의 풍부한 영양분을 영원히 취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들은 관리인과 소작인이 딸린 자신들의 소유지와 장원을 소유하게 되고, 엔릴이 신들 사이에서 왕 노릇 하는 것을 지상의 인간들 사이에서 그대로 모방할 수 있게 된다.

p.130. 엔키는 “나의 생은 멀리 있다”라고 불리는 피조물을 창조하였다. 이 피조물의 간과 심장은 큰 고통을 당하고 있었고 눈은 병에 걸렸고 손은 떨리고 정신은 나간 상태에 있었다. 그는 여신을 불렀다.

“그대가 주조한 각 존재들에 대하여 나는 쉽게 장소를 지정하였다.
이제는 내가 주조한 이것에 대하여 그대가 장소를 지정할 차례이다. 그곳에 그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그 존재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빵을 주었으나 그것도 받지 못하였다. 그는 앉을 수도 설 수도 무릎을 꿇을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에게 어떤 운명도 지정할 수 없었다.

p.135. "어떠한 종류의 것이든 모든 사물은 그 자체 안에 질서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은 우주를 신처럼 만드는 형식이다"라고 시인 단테는 썼다. 동일한 맥락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썼다. “신 자신은 인간의 행동에 의하여 어떠한 것도 얻거나 잃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쪽에서는 신으로부터 어떤 것을 취하고 신에게 어떤 것을 제공한다. 그때 그는 신이 제정한 질서를 준수하기도 하고 준수하지 못하기도 한다.”

p.136.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관한 모든 지식에 근거하여 볼 때, 어떤 숫자들은 우주의 질서를 파악하기 위한 통로로 간주되었음에 틀림없다. 기원전 3200년경에 이미 점토판의 첫 번째 출현과 더불어 10진법과 60진법의 두 숫자 체계가 분명히 등장하였다. 60진법은 오늘날까지 우리가 원을 측정하고 시간을 계산하는 단위인 소스(soss, 60)에 근거한다. 60초는 1분을 만들며, 60분은 1도를 만들고, 360도는 하나의 원을 만든다. 하늘과 땅은 도로 측정된다. 그리고 시간의 원 안에서는 60초가 1분이 되고 60분이 1시간이 된다. 메소포타미아의 1년은 360일로 계산되었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의 원은 숫자의 동일한 원리의 두 방향으로서 서로 조화되고 있었다. 공간의 원 중앙에는 신성한 지구라트의 5가지 지점 - 4개의 각은 동서남북 네 방향, 정상은 하늘에 상응하는 -이 있으며, 이것에 의하여 신성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반면 시간의 원에는 세속적인 360일 이외에 5일간의 축제 주간이 덧붙어 있는데, 그 기간 동안 낡은 해가 죽고 새로운 해가 태어났으며 새로운 신성의 원리가 세상 안에서 회복되었다. 더구나 하루가 한 해에 비례하듯이, 한 해는 위대한 해(great year)에 비례하였다. 그러한 각 에온(eon, 영겁[永劫])이나 위대한 해의 종말에는 대홍수, 그리고 우주적 해체와 귀환이 있다.

p.149. 서양에서는 노아의 홍수, 인도에서는 마누의 홍수로 알려진, 대홍수에 관한 이러한 최초의 해석을 보여주는 점토판의 날짜는 기원전 1750년경이다. 이는 수메르의 입장에서 보면 후대에 속하는 셈이다 포에벨 교수는 “그 텍스트에 나타난 수메르 어구는 더 이상 고전 시대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때는 수메르의 정치적 힘이 이미 붕괴되었고 문명의 주도권도 셈 족에 속하는 아카드 인에게 넘어갔다. 아카드 인에게 수메르 어는 중세의 라틴 어처럼 고대적이고 학문적인 언어였다. 기원전 2050-1950년에 해당하는 수메르의 마지막 시기인 우르 3세의 시대도 과거를 지향하는 신수메르(neo-Sumerian) 재건의 세기였고, 그 당시의 마지막 3명의 왕 아마르- 신, 슈- 신, 입바- 신은 셈 족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p.150. 여러 방면에서 나온 많은 확고한 증거들에 의하면,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의 수메르 신화 텍스트에서는 수학적 영감에 기초한 사제적 상상력이 이미 공격적인 신인 동형론적 견해는 최초의 고등 문명을 발생시킨 세계관보다 더욱 원시적이다. 따라서 오늘날 잔존하고 있는 신화들은 전통의 몰락이나 퇴화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는 모든 열정적인 통속화의 경우처럼 의도적일 수도 있고, 그 과정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처럼 비의도적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가 더 그럴듯하다. 포에벨 교수가 알려주듯이, 이러한 텍스트에 나타난 수메르 어법은 “더 이상 고전 시기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이미 후대의 아류 시대의 것이다.

p.152-153. 오페르트 교수는 수메르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았던 1877년에 논문을 썼는데, 당시 그는 히브리의 숫자가 본래적인 것이고 베로소스의 것은 “위조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반대의 사실이 지금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어느 쪽에서건 어떠한 “위조”도 있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유연한 이야기의 어디에서 위조될 수 있는 사실은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 다른 사람의 길을 원하는가? 이집트, 인도, 중국, 크레테, 그리스, 로마, 그리고 게르만 인과 켈트 인이 극동 중심부의 문명화하는 유산을 전수받고 모델을 바꾸었던 것처럼, 「창세기」의 저자들도 그랬다. “위조”가 아니라 “재창조”가 신화의 재건을 논의할 때에 사용하여야 할 용어이다.

p.153. 이 책의 주제를 통하여 계속 남아 있으면서 동양과 서양을 분리시키는 하나의 역설이 지금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제 우주적 상상은 배경으로 사라지고, 신들은 더 이상 수학적 질서의 단순한 집행자가 아니라 그들 자체가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비교적 자의적인 질서를 창조하는 전능한 창조자들 - 변덕, 분노, 사랑 등의 감정에 종속되는 부성의 인격화 -로 등장한다. 따라서 위엄과 성숙, 장엄한 전망과 영적 확신을 특징으로 하는 어떤 신비한 세련화가 사라진다. 다른편 벽에서 전적으로 사라진 인격적이고 윤리적인 인간화하는 요소가 여기에 나타나고 있다. 저쪽의 벽에서는 비이원성, 영혼의 평화, 그리고 비인간성이 발견되지만, 여기에서는 긴장, 이원성, 그리고 추방 의식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기능자의 얼굴이 아니라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자율적인 개인의 얼굴이며, 그는 운명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 자신과 인간과 미래 - 우주와 형이상학과 과거가 아니라 -에 대하여 책임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부터 하늘, 지옥, 저 세상에 이르기까지 두 반구인 동양과 서양을 분리시키는 벽이다.

p.154. 인간의 덕을 신의 쾌락을 위하여 만들어진 노예의 덕으로 묘사하는 수메르의 창조 신화에는 이미 비판적인 성향이 내재하고 있다. 그러한 신화는 본질적으로 경배가 아니라 하나의 논평의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한 논평의 자세 속에서 동양은 사라지고 서양이 태어난다. 형이상학적 두려움, 위대하고 불변하는 진리 앞에서 느끼는 깊은 경외감, 그리고 모든 인간의 판단을 이름 지어지지 않은 신비 - 무한하고 비인격적이지만, 모든 존재와 사물 그리고 죽음 안에서조차 친근하게 존재하는 -에 종속시키는 것, 이러한 것들은 동양에서는 가장 성스러운 것으로 존중되어 온 감정들이다. 그 충만한 공허의 황홀감을 즐기는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 속 인간들의 단순한 개인사에 빠져 있는 서양적 정신은 생명의 과실 - 남편과 함께 땅속으로 들어갔을 때 갠지스 강가의 그 작은 소녀가 깨달은 - 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p.161. 말하자면 우리의 영웅 개념은 현실적이고 특수한 개인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그렇게 운명 지어져 있다. 반면 동양의 모든 신화에 등장하는 진실한 영웅은 헛되이 삶을 추구하는 경험적 인격이 아니라 환생하고 윤회하는 자이다. 유명한 문장을 인용하자면, “결코 태어나지 않고 결코 죽지도 않는다. 일단 태어나면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태어나지 않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이 태고적 존재는 신체가 실해될 경우에도 죽지 않는다.”

p.173. 아난다 쿠마라스와미 박사의 책에 따르면, “생명의 기원을 물에서 찾는 믿음은 고대의 많은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나일 강, 유프라테스 강, 혹은 인더스 계곡 등에서 이러한 믿음이 매우 자연스럽게 등장하였다. 이들에게는 주기적인 강우나 지속적으로 흐르는 강물이 식물 생장의 가장 확실한 전제 조건이었다.”
이는 유사한 신화들이 세계의 각 지역에 공통의 심리학적 법칙에 따라 독립적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선호하였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많은 지역에서 공유되는 곡식, 가금, 새로운 물품의 주조 기술 등은 어느 특정한 문화 중심지들에서 출현하여 세계 각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따라서 이제는 각각 고립되었던 문명들이 “자연적인” 경제적, 사회학적 혹은 심리학적 “법칙”을 통하여 평평하게 발전하였다는 낡은 논의는 대체로 포기되었다.

p.175. 이제 유사성이 아니라 차이성을 찾는다면, 광범위하게 걸쳐 있는 근동 신석기 연속체의 동양 쪽 끝 부분에서 곧바로 여러 특성들을 보게 될 것이다. 이 특성들은 서양으로부터 새롭게 유입된 영감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인도 문명의 질서를 보여주는 것 같다.

p.176-177. 그러나 이와 같은 증거를 가지고 있는 선사 시대 역사가는 하나의 실제적인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고고학적 삽을 가지고 이 최초의 마을과 공동체의 거주지 밑을 1인치 더 파들어가보라. 그러면 거대한 문화적 간격을 보여주는 훨씬 더 원시적인 층, 즉 후기 카프시안 수렵시대의 매우 소박한 신석기 이전 자료와 갑자기 만나게 된다. 이 층의 특성을 이루는 것은 후기 구석기 문화 지대의 서쪽 영역 전체, 곧 남아프리카에서 북유럽, 모로코에서 실론 - 이 나라의 모국은 확실히 인도가 아니다 - 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작은 부싯돌 (세석기) 이다. 여기서 조금 더 깊이 파들어가면 그 다음의 문화적 층은 전기 구석기인의 문화적 단계의 근처로 나아가는 완전한 심연이다.

p.191. “죽음과 섹스의 상호 의존성, 단일한 존재 상태의 상호 보완적 측면으로서의 죽음과 섹스의 내용, 이 존재 상태 - 지상에서의 인간의 존재 상태만이 아니라 동물, 새, 물고기와 같은 지상에 있는 모든 존재의 상태이다 -의 지속을 위한 살해(살해와 먹기)의 필연성이었다고 말이다. 죽음을 산 자의 생명으로 보는 이러한 매우 감동적이고 정서적으로 불안한 감각은 초기 식물 재배 공동체의 사회 구조를 구성하는 의례들을 지탱하는 근본적인 동기부여이다.” 덧붙이자면, 그것은 인도의 모든 신화, 문명, 철학이 자라나온 근본 모티브이기도 하였다.

p.194. 인도에서는 자궁에서 식물이 자라나는 대지의 여신을 두드러지게 표상하는 것이 부자연스럽지 않다. 이는 초기 굽타 시대(기원후 330-650년)의 한 테라코타 부조와 매우 유사하다.

p.198. 시바와 그의 피를 먹는 배우자인 “어두운자”칼리, “접근하기 어려운 자”두르가 - 이들에게 희생 제물이 바쳐진다 -으로 알려진 위대한 신과 여신의 고대성은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p.203. 이렇게 인도에 도달한 아리안의 기원에 대해서 약 1세기 반 동안 훌륭한 학자들이 논의하여 왔다. 아직 많은 중요한 점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만, 선사 시대의 이른바 아리안, 인도 -유러피안, 혹은 인도- 게르만 계통의 인종, 언어, 신화에 관한 일반 이론의 주요 흐름은 제법 잘 정리되었다.
간략하게 보자면 처음에 상당히 동질적인 핵공동체였을, 혹은 그렇지 않았을 그러한 공동체로부터 나온 2개의 선사 시대의 발전 단계를 구별할 수 있다.
1. 공동 기원의 단계 : 이 단계는 라인 강과 돈 강 사이 혹은 라인 강과 서투르키스탄 사이의 어떤 광대한 목초 지대에 있었을 것이다.
2. 서쪽 부족군과 동쪽 부족군 사이에 분리 단계 : a)서쪽의 부족은 아마도 드네페르 강과 다뉴브 강 사이에 있는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었으며, 여기에서부터 최초의 그리스 인, 이탈리아 인, 켈트 인, 게르만 인이 분화되어 나왔다.

p.217. 더구나 다르마에 대한 강조도 나타나고 있다. 다르마를 우주 법칙, 곧 마트, 메, 르타, 도와 일치하는 덕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청동기 시대의 질서 원리가 개인적 행위라는 베다의 영웅적 주제를 물리치면서 다시 전면에 부상한 것이다 실제로 영웅적 주제와 대립하는 비 영웅적 주제가 이러한 설명을 통하여 지배적인 힘으로 나타났다. 이는 『마하바라타』에서 매우 강조되고 있다. 거기서는 거인들의 집단과 신들의 집단 사이의 권력 변동이 어둠과 빛의 주기의 원리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톨스토이나 마르크스의 역사관 같은 근대의 역사관에서처럼 명백한 영웅들(나폴레옹, 비스마르크, 인드라 등)을 어떤 저항할 수 없는 물마루 위에 위치시키는 것은 역사 자체의 파도이다. 그러나 약간 레반트적인 마르크스 체계와는 대조적으로 이 신화에는 역사 법칙의 활동을 중지시키는 어떤 메시아 시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p. 231. 이러한 가르침은 심장으로부터 나오는 신경이나 정맥, 그리고 이러한 내부의 해부학적 구조를, 꿈꾸는 잠 및 꿈 없는 잠의 상태와 신비적으로 결합시킨 데에 그 현저한 특성이 있다. 존재의 존재에 관한 이러한 지식은 요가의 정신신체 교의에 확실히 속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 교의는 베다에서는 언급된 적이 없지만 기원 전 700-600년경에 상당히 발전하고 있었다. 아트만, 곧 영적 “자아”의 교리도 위의 문헌에서 완전하게 전개되고 있다. 더구나 이 아트만 교리는 희생제의에 관한 브라마나의 가르침이 아니라 내면화된 꿈의 상태 및 꿈 없는 상태의 교의와 연결되어 있다.

p.240. “태양은 우주에서 움직이는 최고 힘의 전형이고 모든 다른 운동을 지배하므로, 사비트리는 자연스럽게 태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나타난다. 따라서 그에게 태양신의 속성을 전이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본래의 사비트리, 심지어 『리그 베다』의 사비트리를 태양-신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이러한 관념 전체의 복합 구조를 오해하는 것이다. 사비트리 개념의 본질은 태양의 관념도 아니고 생명과 운동을 자극하는 것과 같은 어떤 기능에 봉사하는 태양 관념도 아니다. 그와 반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극 자체에 대한 추상적 사고이다. 이러한 추상적 사고는 이 신과 관련된 모든 관념을 포괄하는 틀을 제공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사비트리라는 이름은 “흥분시키다, 고무시키다, 자극하다, 추진하다”를 뜻하는 어근 su에서 나왔으며, 고대의 주석가에 따르면 “만물의 자극자”를 의미한다.

p. 245. 이렇게 하여 내향화를 통해서 절대적인 안정을 획득하려는 길이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요가의 최초의 목적이 성자로 하여금 이러한 길을 따라 재생의 소용돌이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p.258. 이러한 세계 주기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최초의 신화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되었지만, 거기에는 자이나교의 신화에서처럼 세계 증오에 대한 체계적인 합리화의 징표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p.261. 영혼들은 1초보다 작은 시간으로부터 약 22,000년에 이르는 다양한 기간 동안 이러한 형태들로 존족하며, 이러한 영역에 존재하는 동안에는 700,000번의 화육을 경험할 것이다. 이들은 거친 물질(스툴라[sthula])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천상의 장면이나 꿈의 환영처럼 미세한 물질(수크스마[suksma])로 나타나기도 한다.

p.271-272. 자이나교의 문헌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흘러 들어오는 물이 차단될 때 커다란 연못의 물이 점차 소진되고 증발되어 다 마르듯이, 수백만 번의 출생을 통하여 축적된 승려의 업보도 금욕에 의해서 소멸된다. 더 이상의 유입이 없다면.
그러므로 자이나교 스승의 첫 번째 과제는 제자들 안에 있는 업의 유입을 막는 것이다. 이는 삶의 활동 영역을 점차적으로 축소시키는 것에 의해서만 실현할 수 있다. 제자가 마침내 모든 감각의 문을 잠그었을 때, 두 번째 과제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업보를 금욕 행위를 통해서 불태우게 하는 것이다.

p.282. 첫 번째의 가장 급진적인 혁신은 퇴행적 세계 주기가 아닌 발전적 세계 주기이다. 내가 아는 한, 이것은 신화의 역사에서는 최초로 등장한 것이다.

p.283. “너의 귀를 가지고 듣거라. 보다 선량한 마음의 눈으로 밝은 불꽃을 보아라. 종교에 대한 결정은 각자 스스로 행하는 것이다. 그 주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하기 전에 우리의 가르침에 눈을 뜨거라.”

p.292. 인도에서도 이와 마찬가지 상황이 일어난다. 죽음에서의 재생, 금욕, 심리학적 초연, 신화적 동일시와 같은 근본 주제들을 제고하는 전 아리안 시대의 도시에서 나타나는 낡은 의례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방향으로 새로운 가르침이 출현하였다. 이 가르침들은 아마도 페르시아의 길과 상호 작용하면서 전개되었을 것이다. (중략)
붓다가 된 사람의 성격, 삶, 그리고 그의 실제 가르침을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기원전 563-473년경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팔리 경전에 나타나는 그에 관한 최초의 전기는 기원전 80년경 실론에서 쓰여진 것으로 간주되며, 이는 그가 살던 실제의 역사적 무대로부터 5세기의 간격과 1500마일의 거리를 두고 있다. 그 무렵에는 그의 삶이 신화가 되었다. 그 신화는 기원전 500년경에서 기원후 500년경 사이의 “세계 구세주”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양식에 따라 쓰여 졌으며, 그러한 양식은 인도에서는 자이나교의 전설에서, 근동에서는 복음서의 그리스도관 에서도 보이고 있다.

p.310. 미래의 붓다는 평화로운 은둔의 숲에서 열심히 고행하고 있는 요기들을 쳐다보면서 몇 일 밤을 보냈다. 그가 돌아가려고 하자, 그들 모두는 돌아가지 말라고 간청하였다. 한 노인이 말하였다. “당신이 오면서 이 은둔의 집은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아들이여! 당신은 지금 우리를 떠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경외하여야 할 성스러운 히말라야가 있으며 그곳은 성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의 존재는 우리의 고행의 공덕을 증대시킵니다. 근처에 있는 수많은 순례의 중심지는 하늘로 향하는 사다리들입니다. 당신은 이곳에서 자신의 직업을 무시하는 자를 본 적이 있나요? 어떤 카스트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를 본 적이 있나요? 불순한 자를 본 적이 있나요? 말해보십시오, 우리는 기꺼이 경청하겠습니다!”

독자들도 알겠지만, 기원 후 100년경에 쓰여진 이 문헌의 저자는 불교 교단에 가입하기 이전의 브라만이다.

p.329-330. 정신이 더 이상 주인이나 신이라고 부르지 않을 그 위대한 용은 누구인가? 그 위대한 용의 이름은 “그대는 해야 한다(Thou shalt)”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고자 한다(I will)”라고 말한다. “그대는 해야 한다”는 금처럼 빛나면서 자신의 길에 비늘로 덮힌 동물을 놓는다. 그 모든 비늘위에서는 황금으로 된 “그대는 해야 한다”가 빛나고 있다.
수 천년 된 가치들이 이 비늘들 위에서 빛나고 있다. 모든 용 중에서 가장 강한 자가 이렇게 말한다. “만물의 모든 가치가 내 위에서 빛나고 있다. 모든 가치는 오래 전에 창조되었다. 나는 창조된 가치이다. 진실로 거기에는 더 이상 ‘나는 하고자 한다’ 라는 의지는 없을 것이다.” 용은 그렇게 말할 뿐이다.
형제들이여! 왜 사자에게는 정신상 한가지 필요한 것이 있는가? 왜 짐을 나르는 짐승, 곧 체념하고 경건한 짐승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p.331. “이러한 우주관에 따르면 인간은 윤리적 활동으로 신이 정한 세계 목적을 실현하는 데에 참여한다.”(중략)
“정직한 사람은 선한 것이건 악한 것이건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한다. 그의 행동은 어린이의 행동과 같기 때문이다.”

p.348. 이 시기의 문헌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깨달은 자’는 ‘위대한 나룻배’를 타고 출발한다. 그러나 그의 출발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우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아무 곳으로부터도 출발하지 않는다. 그의 배는 완전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안에는 아무도 없다. 그 배는 어디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지만 전지의 상태에서 지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전지의 상태에서는 그 배를 지지하지 않으면서 그 배에 봉사할 뿐이다. 더구나 ‘위대한 나룻배’를 타고 출발한 자는 일찍이 아무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아무도 없을 것이며, 지금 그것을 타고 출발하는 자도 없다. 왜 그런가? 출발하는 자도, 출발 목적지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대체 출발하는 자가 누구이며, 어디로 가려는 것인가?”

p.354. 아미타 종교는 페르시아적 계시나 기독교적 계시에 근거한 서양적 이원론과는 정신의 측면에서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겉에서 보면 양 전통 사이에는 단순한 유사성만이 아니라 이미지와 전반적인 영적 목적에서도 유사성이 있으므로, 양 전통을 혼합하려는 시도는 확고한 토대를 얻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운명에 대한 기독교와 힌두교-불교의 견해를 비교하면, 양자의 근본 주제와 최고 관심은 시간적 존재로 하여금 영원성 속에서 최고선을 경험하도록 하는 준비임을 알 수 있다. 죽음의 순간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죽음 저편에 있는 일종의 대학원 과정의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

p.356. 앞에서 인용하였던 “아미타에 관한 명상 안내서”에서는 붓다. 그와 동반하는 보살들, 그리고 극락이라는 구원의 표상을 마음속에서 점차적으로 형성하는 방법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그리고 그 표상은 문자 그대로 서쪽의 어딘가에 실제로 있는 하나의 존재나 장소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계 전체, 만물과 그 만물을 넘어서는 모든 것 안에 내재하는 존재 및 본성이라는 최종적 확신이 전제되고 있다. 더구나 그 문헌을 더 읽어 들어가면(여기서 이것을 약간 길게 서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 극동 전체의 불교 사원예술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의 원천이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것을 잘못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미지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우상이 아니고 명상의 방편이다. 명상하는 붓다 자신은 천상의 어떤 곳, 심지어 어떤 실제적인 극락이 어딘가에 있는 최고의 존재가 아니라, 모든 현상성(phenomenality) - 세계의 현상성이건 사원의 현상성이건 이미지의 현상성이건 봉헌자 자신의 현상성이건 간에 - 에 내재하는 신비의 형상이고 가면이고 표현이다.

p.357. 고타마는 이렇게 말하였다 거기에서 태어나기를 바라는 자는 먼저 효도를 행하고 자비로워야 하고 다음과 같은 10가지 금기 계율을 지켜야만 한다. 1. 죽이지 말 것, 2. 훔치지 말 것, 3. 거짓말하지 말 것, 4. 음란하지 말 것, 5 취하게 하는 음료를 마시지 말 것. 이것들은 누구나 지켜야 하는 5가지 계율이며, 승려는 다음과 같은 5가지를 더 지켜야 한다. 6. 금지된 시간에는 먹지 말 것, 7. 춤추거나 노래하거나 연극 및 기타 구경거리에 참여하지 말 것, 8. 향수나 화환이나 기타 장식품을 사용하지 말 것, 9. 높거나 넓은 침상을 사용하지 말 것, 10. 돈을 받지 말 것.

p.359. 그러나 현재 우리의 목적은 열반이 아니라 세계의 각 지역 사람들이 용어들을 넘어선 그 용어 - 서양에서는 신으로 인격화하고 동양에서는 존재나 비존재로 비인격화하는 -에 대한 직관을 시공간 안에서 표상한 이미지를 비교 문화적으로 조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붓다와 함께 계속 나아가기를 바라는 품위 있는 독자들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의 적대자(알다시피 그 자신이 하나의 붓다이다)가 붓다에게 말한 것처럼 내가 붓다에게 정중하게 “오, 그대 축복받은 자여, 그대는 열반으로 가십시오”라고 말하도록 허락하여 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정리를 하기 위하여 여기서 잠시 멈추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구는 이제 전 분야가 정토처럼 5억 가지의 다채로운 광선 안으로 돌진하여 들어가는 지점에 이르렀고, 그 모두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확실히 어렵기 때문이다.

p.366. 무수한 빛을 내는 그녀의 꽃 왕좌 위에 붓다가 나타난다. 그녀의 꽃받침 안에서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어리석고 사악하고 범죄로 가득 찬 존재마저도 자신의 영광의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 더구나 자이나교도와 소승 승려에 의해서 일축된 모든 이러한 여성적 존재들 안에 그녀는 육화되어 있다. 그녀는 이렇게 변형되어 돌아온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녀는 처음에는 최초의 불교 예술 작품에서 성소를 장식하는 가장 뛰어난 상으로 나타났다. 후기의 어떤 대승 불교의 문헌에는 이러한 말이 나온다. “모든 형태의 환상 중에서 여자가 가장 중요하다(savasam eva mauanam strimataiva visisyate).” 그러므로 그녀의 역할은 처음에는 입상의 방식으로, 다음에는 현실성의 방식으로 증가한다. 해탈의 현관, 곧 정토 그 자체인 그녀의 환상적 본성 안에 열반의 자비(카루나)가 나타나는 것이다. 붓다가 부정적 길의 근원적 상징이듯이 그녀는 긍정적 길의 근원적 상징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경이로움의 살아 있는 이미지인 그녀는 나룻배인 동시에 목적지이다.

p.373-374. 여기에서 중요한 점이 있다. “그처럼 많은 새로운 관념, 기술, 형태가 흡수되어 실제로 아주 새롭고 가장 중요한 인도 예술의 장이 열렸지만, 그것들은 결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부수어져 인도적 개념으로 번역되고 인도적 원리 안에서 재건되었다.” 신체에 대한 헬레니즘 적 기준에 대립하여 인도적인 기준이 형성되었다. 헬레니즘-로마 적 유형론에 대립하는 인도적인 유형론이 발전함으로써, 이것은 서양과는 완전히 다른 삶에 봉사하였다. 수입된 건축 및 조각 형식은 그와 유사한 인도적인 형식으로 개조되거나 대체되었다. 트리톤(절반은 사람이고 절반은 물고기인 바다 신)은 간드하르바로, 아칸서스 잎은 연꽃으로 대체되었다. 브라민은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토착 민담도 체계적으로(그러나 결코 일관성 있게 한 것은 아니다) 이용하였다. 고에츠 박사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그 결과 “우리 시대에 나찌즘과 공산주의만이 상상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역사의 재서술”이 이루어졌다. 실제의 과거는 망각되고 신화적 과거가 투사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신화적 과거에 의해서 현재는 항상 모든 이단, 모든 비판, 모든 진리에 대항하여 그 자신의 타당성을 확보하여야만 하였다.
“굽타 혁명은 고대의 리시(rishi), 영웅, 신들의 ‘과거의 호시절’을 복구한다는 슬로건에서는 성공하였다. 어찌 되었든 실제로 열광적인 문화적 발달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혁신적인 문물은 과거에 신들 자신에 의해서 선포되었다는 주장을 바탕을 통해서만 도입되었다.”
대담한 중국인 순례자 법헌이 인도에 도착하여 놀란 것은 바로 이 활기찬 절정의 시기였다. 이 황금 시대의 인도는 얼마 동안 인류의 문명을 선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p.392. 마침내 종교적 영감을 빼앗긴 예술은 은밀한 방식으로 에로틱하게 되거나 아주 무표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과거에는 놀라운 모험의 정신이 있었던 곳에 이제는 단지 농민의 경건, 응용 예술, 사제적 일상성, 그리고 호전적인 반야마적 법정의 세계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고에츠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네팔과 티벳처럼 문명이 낙후한 오지에서만 인도의 예술 전통은 중세적 의미의 도상학으로 오늘날까지 실재로 살아 있다. 그러나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이 그대로 모든 활력과 풍부한 형식을 지닌 참된 인도 예술의 척도로 여겨질 수는 없다.”

p.394. 크리슈나와 고피가 함께 춘 이 춤은 라사(rasa)라고 불린다. 이 춤에 대한 해석본은 6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판본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에로틱한 놀이에 관한 문학적 전통의 해석과 매우 종교적인 전통의 해석이 각기 증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종교 사상사에서 나타나는 어떤 보편적인 원리, 곧 시적 통찰력과 감각이 쇠퇴하는 만큼 선정주의, 진부한 공식, 그리고 감상적 태도가 증가한다는 원리를 이보다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 곳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p.395. 여기서 초월적 신의 내재의 관념은 하나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이다. 인도의 모든 신비 전승에서처럼 여기에서도 하나의 경향이 깊게 흐르고 있다. 그 흐름 속에서 초월의 내재화가 실현되며 모든 차별성은 용해된다. 고피들의 감은 눈에서 그 신이 각 존재의 존재 근거로서 모든 자 안에 현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초기 판본의 라사는 인도의 정통적인 “이중의 길(Double way)”이 적절하게 균형 잡혀 있는 상징이다. 거기에서는 덕(다르마)의 외적 질서가 유지되는 동시에 그 질서가 하나의 원리와 통일을 이룬다. 이 원리는 외적 질서를 지탱하고 초월하며, 우주의 모든 피조물과 입자는 그 원리와 영원히 동일하다.

p.398. 상서로운 전능의 주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람들이 서로 애착을 가지는 것은 이해 관계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있다. 자기에게 헌신적이지 않은 자에게 애착을 가지는 사람은 2종류가 있다. 하나는 동정심이 있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앞의 사람은 종교적 공덕을 얻고, 뒤의 사람은 친구를 얻는다. 여기서도 자기 이해관계가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자기에게 헌신적인 사람이나 헌신적이지 않은 사람 그 어느 쪽에도 애착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4가지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자신의 영혼에서 위안을 찾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욕망의 결실을 이미 얻은 사람이고, 세 번째는 이기심에 젖어 배은망덕한 사람이고, 네 번째는 단지 남을 괴롭히기 좋아하는 사람이다.”

p.432. 우리의 저자 포우가 말하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그는 그런 시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형이상학주의는 선험적으로 날조되어왔다. 이해심이 많거나 순종적인 사람보다는 지식인이나 논리적인 사람이 이러한 기획, 즉 신에게 어떤 목적을 강요하는 데에 힘을 썼다. 그들은 자기만족적으로 야훼의 의도를 헤아리고 그렇게 파악한 내용으로 무수한 사상 체계를 만들어냈다.” 성인들은 그와 동일한 전도의 성향을 가지고 그러한 고안물을 가르쳐왔으며, 보통 사람이나 식자층도 모두 양조주 - 그들의 삶과 꿈과 생활을 규정해주는 -의 본질을 드러내줄 수 있는 그 어떠한 사실이 폭로되는 것을 꺼려왔다. 성서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그러하였다. 극동의 요순 황금시대, 우왕의 치수 사업,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국의 5천 년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p.444-445. 이러한 이야기는 중국의 위대한 황금 시기에 대한 것으로서, 50년 전 까지만 해도 학자들, 심지어 서구 학자들도 중국의 상고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잠시 몇 가지 사실을 주목해보자.
첫 번째는 이미 살펴본 것처럼, 10명의 수메르 왕, 성서의 족장, 중국의 군주 사이의 명백한 유사성이고, 또 이 시리즈들의 마지막 인물이 대홍수를 극복한다고 하는 전설이 공유되고 있다는 점이다.

p.446. 어쨌든 이제 우리 앞에는 신화시대의 열 번째 군주가 직면하였던 대홍수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서로 다른 3가지 관점이 놓여 있다. 첫 번째는 고대 수메르의 우주적 영겁 회귀인데, 이것은 수학적 필연성을 지니며 우주의 소멸로 종언을 고한다. 두 번째는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신에 의해서 일어나는 우주적인 파국이다. 이것은 신성으로부터의 분리와 신성에 대립하는 죄의식을 지닌 셈 족 특유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 같다(이것과 대립하는 것은 악마에 의해서 일어나는 베다의 가뭄에 관한 아리안의 믿음인데, 거기서는 신들이 인간의 편에 서 있다). 마지막으로 중국에서는 재앙이 우주적 사건에서 하나의 국지적 사건으로 축소되며, 죄의식이나 수학이 이 사건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등장하지 않는다. 칼그렌 박사는 “이는 무엇보다도 영웅 전설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범람의 재앙이라기보다는 이를 극복하는 영웅과 홍수의 관련성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올바른 행위에 대한 중국인의 기본 정신 - 서주 시대에 이미 형성되었지만 확실히 유교적인 -속에는 영웅의 덕이 자연 질서에 일치하며, 그렇기 때문에 영웅은 자신의 과제를 수행할 때에 하늘의 명령과 하늘이 계시한 홍범구주의 도움을 받는다.

p.463. 베다와 대조적으로 여기서는 목축이 아니라 농경이 지배적이고, 제사는 자연 세계의 힘들이나 신들이 아니라 조상에게 드리고 있다. 의례를 주관하는 것은 사제가 아니라 왕이며, 조상의 후손인 왕이 축문을 담당하였다.(중략)
그러나 이 두 문화 세계가 서로 비교될 수 있는 변동의 시대를 거의 동시에 거치고 있었음은 놀라운 일이다. 아리안이 인도로 들어온 시기와 상나라의 전사들이 중국에 들어온 시기는 거의 같았다. 봉건적 베다 시대는 기원전 8세기 경 군소 도시 국가가 등장하는 시기에 끝나고, 중국도 그 무렵에 이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격심한 변동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p.476. "묵자가 한 유가에게 이렇게 물었다. ‘음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요?’ 유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음악 그 자체를 위해서 연주합니다.’(‘음악’을 의미하는 악(樂)은 ‘즐거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묵자가 알아챌 수 없는 말 장난이 숨어 있다.) 묵자는 말하였다. ‘당신은 나의 물음에 답하지 않는 군요. 왜 집을 짓는가라고 내가 물었다고 합시다. 이때 당신이 겨울에 추위를 막고, 여름에 더위를 막으며, 또 남자와 여자를 분리하기 위해서라고 답하였다고 합시다. 그 경우 당신은 집을 짓는 이유에 대해서 나에게 충분히 답한 것입니다. 지금 왜 음악을 연주하는가라고 나는 묻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당신은 음악 자체를 위해서 연주한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왜 집을 짓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집을 위해서 집을 짓는다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풍우란 박사는 묵자의 견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고 있다.
“음악은 실용적 가치가 없으므로 폐기해야 하고 모든 형태의 미술도 역시 폐기해야 한다. 감정의 산물인 음악과 미술은 이러한 감정에만 호소할 수 있다. ……그의 실증주의적 공리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수많은 감정은 어떠한 실용적 가치도 없고 어떤 중요성도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것들은 인간의 행동에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서 폐기되어야만 한다.”

p.478. 내적 본성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자 유일한 의지처로 남은 것은 천명으로 감상화 된 전제주의였으며, 그것의 대행자는 음악이 아니라 정탐, 처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보상욕 이었다.

p.479. 그러면 남을 미워하고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은 겸애(兼愛)와 별애(別愛) 가운데 어느 것에 속할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별애이다. 사람이 서로 별애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해독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른 것이다.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이 별애하는 것을 보고 그르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그릇된 것을 올바른 것으로 고쳐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별애를 겸애로 바꾸어야 한다.

p.482. 더구나 이 은둔자들은 내적 실현을 위한 다양한 규율을 지키면서 인류의 복지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여긴 어떠한 것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산악의 은둔자들 자신이 어느 정도 포기하였던 의식주 - 묵가의 덕의 근본으로 간주한 -보다 더 큰 힘이었으며, 그러한 물질적 재료를 모든 사람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경찰력이나 군사력보다 더 큰 힘이었다. 그들의 경험에 의하면, 심오하고 놀라운 도의 실현 속에 존재하는 힘과 경험은 모든 사물, 모든 존재, 그리고 진실한 인간성의 실제적 토대였다

p.484. 도를 체득한 훌륭한 옛사람은
미묘 현통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습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니
드러난 모습을 가지고 억지로 형용을 하라고 한다면
겨울에 강을 건너듯 머뭇거리고,
사방의 이웃 대하듯 주춤거리고,
손님처럼 어려워하고,
녹으려는 얼음처럼 맺힘이 없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소박하고,
계곡처럼 트이고,
흙탕물처럼 탁합니다.

탁한 것을 고요히 하여 점점 맑아지게 할 수 있는 이
누구겠습니까?
가만히 있던 것을 움직여 점점 생동하게 할 수 있는 이
누구겠습니까?

도를 체득한 사람은 채워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채워지지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새로워집니다.

p.495. 귀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음악이고, 음악을 듣는 것을 금하는 것은 귀의 장애물이라고 불린다. 눈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아름다움이고, 아름다움을 보는 것을 금하는 것은 시력의 장애물이라고 불린다. 코가 냄새를 맡고 싶어 하는 것은 향기이고, 향기를 맡는 것을 금하는 것은 냄새의 장애물이라고 불린다. 입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옳고 그름이고, 옳고 그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이해의 장애물이라고 불린다. 몸이 즐기고 싶은 것은 풍부한 음식과 좋은 옷이고, 이것을 즐기는 것을 금하는 것은 신체 감각의 장애물이라고 불린다. 마음이 가지고 싶은 것은 자유스러움이고, 이러한 자유를 금하는 것은 자연의 장애물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모든 장애물이 삶을 괴롭히는 주요 원인이다. 이러한 원인들을 제거하고, 죽을 때까지 1일, 1개월, 1년 혹은 10년 동안 스스로 즐기는 것, 바로 그것이 내가 삶을 가꾸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들에 집착하여 그것들을 제거하지 못하고 기나긴 슬픈 삶을 백 년, 천 년, 심지어 만 년 동안 사는 것, 이것은 내가 삶을 가꾸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p.500. 니담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304년에서 535년 사이에 북부에서는 17개의 ‘왕조’가 서로 투쟁하고 있었다. 이중에서 4개의 왕조는 훈 족, 4개의 또 다른 왕조는 투르크(돌궐), 6개의 왕조는 몽골 족(선비)이었고, 단지 3개의 왕조만이 한족의 가문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를 통하여 북중국이 야만화되었다기 보다는 ‘오랑캐’가 더 중국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목민의 복장이 광범위하게 채택된 것은 틀림없지만, 전반적으로 중국의 농업과 행정은 지속되었고 오랑캐의 관습이 그것에 동화되었다. 종족간의 결혼이 보편적이었고 권유되었으며, 심지어 오랑캐 지도자의 다음절(多音節) 이름도 한자로 바뀌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약 5세기 동안 중국 땅에서 정착해온 외래 종교인 불교도 토착화를 통하여 철저하게 중국적인 2가지 현상을 보여주었다.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대중적 도교를 패러디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불교의 매우 조잡한 민간신앙적인 측면이 중국적 체계 안에서 재형성되었다. 다른 하나는 선(禪, 일본의 “젠” “명상하다”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 dhyana에서 나옴)으로 알려진 극동의 불교 종파이다. 선불교 분명히 도교적인 사상과 감정을 수입된 불교 용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흥미로운 종파는 어떤 인도 승려(아마도 전설적인)의 중국 방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정통 불교 조단의 제 28대 종정으로 간주된다.

p.526. 나는『신의 가면 : 원시 신화』에서 아이누의 샤머니즘, 곰, 불, 산아 숭배, 장례와 정화 의식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문화적으로 볼 때, 이러한 요소들과 일본 신도의 한층 원시적인 측면은 아주 잘 어울린다. 두 민족의 근원지는 동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북부이며, 이곳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북아메리카로 흘러들어갔다. 그리고 같은 북아시아의 극지방으로부터 많은 물품이 계속해서 북유럽으로 흘러들어갔기 때문에, 일본의 토착 전승은 아일랜드, 캄챠카, 캐나다 북동부처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의 신화와 놀라운 유사성을 도처에서 보여주고 있다. 영국에서는 기원전 450년 경 켈트 족의 침입과 함께 철기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기원전 250년경에는 두 번째 파도가 일었다. 후자의 경우에는 영웅 무덤, 전차, 언덕 위의 요새, 석탑 등을 동반한 발달된 라 템(La Tene : 할슈타트 시대 이후의 유럽의 철기 시대, 기원전 5-기원후 1세기/역주) 유형의 철제 장식이 그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시기적 측면이나 문화적 요소를 고려해 볼 때, 이러한 것들은 야마토 시대의 일본을 연상시킨다.

p.540. 그러므로 신도가 도덕 관념을 결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도덕의 근본 관념에 의하면 자연의 과정은 악할 수 없다. 순수한 마음은 자연의 과정을 따른다. 자연적 존재인 인간은 본래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라 그의 순수한 마음과 자연적 상태에서 신적인 존재이다. “밝은 마음(아카키 고코로)”, “순수한 마음(기요키 고코로)”, “정확한 마음(다다시키 고코로)” 그리고 “곧은 마음(나오키 고코로)”은 신도의 기본 용어들이다. 첫 번째 것은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마음의 특질을 나타내고, 두 번째 것은 하얀 보석같이 깨끗한 마음, 세 번째 것은 정의를 향하는 마음, 그리고 마지막 것은 잘못된 성향이 없는 사랑스러운 마음을 지칭힌다. 이 4가지는 세이메이신, 곧 순수하고 밝은 영혼으로서 서로 결합한다.

p.571-573. 변증법적 세계관은 이미 고대중국과 고대 유럽에서 출현하였다.(모택동은 『모순론』에서 그렇게 썼다.) 그러나 고대의 변증법은 다소 자연 발생적이고 소박한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의 사회적, 역사적 조건에 근거한 변증법은 충분한 이론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세계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후에 형이상학이 이를 대체하였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살았던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헤겔은 변증법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공헌을 하였지만 그의 변증법은 관념적이었다. 인간 지식의 역사에서 위대한 혁명이 일어난 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위대한 인물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이르러서였다. 그들은 인간 지식의 역사에서 긍정적 성과들을 종합하였고, 특히 헤겔 변증법의 합리적인 요소를 비판적으로 흡수하여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만들었다.
후에 레닌과 스탈린이 이 위대한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중국에 소개된 이 이론은 즉각적으로 중국 사상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변증법적 세계관은 다양한 사물 안에서 진행되는 대립물의 운동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하여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요컨대 사물에 내재하는 모순의 법칙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여기서 신화학도들에게 재미있는 첫 번째 점은 고대 중국의 음양 이원론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사이의 관련성이다. 현대 동양의 많은 현상이 보여주듯이 동양적 정신에는 마르크스주의와 깊은 친화성을 보이는 점이 적지 않다. 이는 다음의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역행할 수 없는 역사 법칙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교의는 마트(maat), 메(me), 다르마(Dharma), 도 의 개념을 지상의 인간 질서에 적용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우주 법칙의 관념을 부적절한 것으로 규정하여 제거하지만, 인간 역사에 작용하는 법칙 개념은 유지한다. 인간 역사의 법칙은 개인적 선택이나 자유로운 결정의 필연성 혹은 그 가능성에 관계없이 파악될 수 있고 준수되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과거에는 법을 알고 가르친 사람의 별의 해석자인 사제였지만, 이제는 사회학도가 그를 대체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양 사회는 서양 사회가 지녔던 중요한 문제 - 융 박사는 개성화라고 불렀으며, 보다 전통적인 용어로는 자유 의지(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결정하는 각 개인의 책임성)의 문제 -에 봉착함이 없이, 현대 사회로 직접 이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인도의 성인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는 이렇게 말하였다. “영국인은 자유의지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신을 깨달은 자는 자유 의지가 하나의 단순한 외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실제로 인간은 기계이고 신은 그것의 작동자이다. 인간은 탈것이고 신은 운전자이다.”
동양의 신화에는 이름과 형식으로 이루어진 법칙- 구속적인 세계 질서의 저편에, 영원한 속성과 가치를 지닌 초월적이고 선험적인 개인성의 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비어 있는 도의 다른 얼굴인 비이원적인 텅 빈 브라만이 있을 뿐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동양에서는 그러한 독특한 실체성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신이 아닌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아니 인간 일반이라기보다는 지금 이곳의 특정한 남자와 여자가 존재할 뿐이다. 자유로운 상태에 처한 이러한 존재들은 우주적 자발성의 단순한 나타남이 아니라 그것의 주체이고 주창자이다. “당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당신 얼굴을 보여 달라!”라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동양에서 들었다. 다듬지 않은 통나무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 유래 없는 창조적 결정을 통하여 다듬어지고 있는 통나무의 경우는 어떠한가?
오늘날 세계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의 하나는 신화적으로 조건지어져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개인적인 자유를 향한 서양의 모든 외침이 동양인의 귀에는 악마(세계를 창조한 ‘나’를 의미하는 아함[aham], 실제로 그것은 세계를 창조하였다!)의 선전처럼 들리는 반면, 마르크스주의 화관(Marxian Flower Wreath)의 노래는 오랫동안 존중되어 온 -매우 영적이고 신비스럽고 성스러운 것으로- 주체의 필연적인 현대적 변형처럼 들린다. 마르크스주의에는 스스로 원하는 어떤 종류의 세계도 인간이 결정할 수 있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p.579. 암도 지역의 도이-두라에서 온 22세의 남자는 중국인으로부터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더욱 지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치료가 요청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인들은 티벳인이 어리석고 열등한 족속이므로 러시아 인이나 중국인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p.582. 이렇게 전체에 대한 비전이 냉정하면서도 무시무시하게 실현되었으므로, 다시 말해서 신화가 삶의 안에서 물질화되었으므로, 나는 이제 침묵으로 모든 논의를 마치려고 한다. 어떠한 서양 지성인도, 동양 자체에 고유한 관점으로, 하나의 위대한 동양이 지닌 이러한 두 측면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구적인 현대의 몇몇 동양 지성이 말하는 것처럼, 동양은 이러한 두 측면에 대해서 다소 자부심을 느끼며 희망을 걸고 있다.
“두 동반자의 비밀”에 관한 고대 이집트의 교리, 공(空), 연기(緣起), 화엄(華嚴)에 관한 대승의 가르침, 음양의 상보성에 관한 도교의 가르침, 상호 침투에 관한 중국 공산주의의 교의, 그리고 각 존재 안에 천상과 지옥의 층에 있는 모든 신과 악마가 현존한다는 탄트라 전승. 이것들은 다양한 방향을 취하며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지만, 영원한 생명에 관한 하나의 무시간적 교리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영원한 생명은 서양인, 적어도 대다수의 서양인이 먹는 데에 실패한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의 신주(神酒)이다.

역자 후기
p.613-614. 조교적 근본주의는 자기 경전 속의 이야기는 절대적 ‘진리’의 영역에 넣고 타종교의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는 ‘신화’의 범주에 넣는다. 자기 종교의 이야기는 ‘사실’로서의 진리로 주장되며 타종교의 이야기는 ‘허위’로서의 신화로 간주된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진리의 ‘말씀’에서 벗어난 거짓 이야기에 불과한 신화에 관심을 가질 까닭이 없다. 신화에 관심을 가지는 자는 참 신앙을 위협하는 ‘요주의’인물로 지목될 것이다.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의 진보 진영에 이념적 무기를 제공해왔던 세계관은 계몽주의적 합리주의라고 할 수 있다. 경험적 실증주의에 기초한 계몽주의적 합리주의는 비논리적이고 증명될 수 없는 이야기를 논의의 장에서 배격한다. 초자연적인 신비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신화의 세계는 당연히 배격의 대상이다. 기만적이고 환상적인 세계관의 산물, 기껏해야 유치한 사고의 잔존물에 불과한 신화는 합리적 사고와 합리적 개혁의 적이다. 과학과 사실적 역사에 입각하여 이러한 비합리적 이야기를 하루빨리 청산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과제이다.
조교적 근본주의와 계몽주의적 합리주의는 서로 배치되는 세계관이지만, 신화에 대해서는 동일한 기반에 서 있다. 신화는 ‘참 신앙’을 위협하는 거짓이야기거나 ‘참 과학’을 외치는 계몽주의적 실증주의의 목소리가 너무나 컸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신화는 움추린 채 억눌려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 들어와 서점가에서는 신화에 관련된 책이 잘 팔린다는 소리가 들린다. 종교계에서는 교세 성장의 둔화와 그에 따른 위기의식이 팽배하여 있다고 한다. 진보 진영에서는 사회주의 사회의 몰락에 따라 이념적 정체성을 상실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신화에 대한 관심의 증대와 이러한 사회 문화적 현상이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사실’과 ‘허위’의 단순한 이분법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신화가 자신의 고유한 언어인 상징과 이미지를 통하여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욕망, 광기, 악마, 성, 환상의 이름으로 신화가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그동안 간과되어온 삶의 중요한 영역에 관심을 가지도록 촉구하고 있다. 이제 삶의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화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p. 615-616. 세계 각 지역에서 나타나는 신화는 그 구조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지역의 신화가 완전히 동일한 내용과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캠벨은 모티브와 양식(스타일)을 구별하고 있다. 모티브란 신화를 형성하는 신화적 동기 혹은 신화적 주제를 의미한다. 인종이나 지역에 관계없이 모든 인류는 정신 구조상 동일한 신화적 모티브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신화적 모티브는 지역마다 다른 양식으로 나타난다. 이 책에서는 그것을 각 지역의 독특한 서명(signature)이라고 부르고 있다.
캠벨은 이러한 신화적 양식 혹은 서명을 다음과 같이 크게 4가지로 구별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인간 이성과 책임적 개인, 레반트 지역에서는 초자연적 계시와 신이 지배하는 하나의 참된 공동체, 인도에서는 위대한 내재적 텅 빔(空) 상태에서의 요가적 통제, 극동에서는 천지의 도와 자발적으로 일치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4가지 전통을 각기 대표하는 전형적 인간상으로 프로메테우스, 욥, 눈을 감고 앉은 붓다, 눈을 뜨고 소요하는 현자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4가지 전통을 장엄함의 측면만이 아니라 유치함의 측면에서, 그리고 몰입이나 경멸의 태도 없이, 아주 냉정하게 살펴보는 것이 자신의 작업이라고 말한다.

캠벨은 총체적 신화학의 과제를 3가지로 설정하고 있다. 첫째로 고등 문명의 근본이 되는 신화적 유산의 기원과 전파를 분석하는 것, 둘째로 다양한 지역의 신화적 양식의 발생, 성숙, 쇠퇴를 살펴보는 것, 마지막으로 단일 인류사의 맥락 속에서 각 지역적양식의 힘을 측정하는 것이라고 본다. 캠벨은 이 3가지 작업을 각기 다른 작업이라고 보면서도 이 책에서 그 모든 측면을 고려하면서 서술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동과 서, 아득한 과거와 현재를 가로지르며 수많은 이야기를 뿜어내는 대가의 저작을 번역하는 것은 역시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얻은 것도 그만큼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3. 내가 저자라면
신의 가면 시리즈 중 한권인 이 책은 동양신화를 다루고 있어서 흥미 있게 읽을 수 있었다.
중국과, 일본, 티벳, 등의 신화들이 문화가 다르듯 다른 창조신화를 가졌지만 결국에는 어떤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지, 모든 종교가 어떻게 유사성이 있는지를 캠벨의 목소리로 더 잘 알게 된 책이었다. 예를 들어 죽었다 부활하는 신 오시리스의 신화는 탐무즈, 아도니스, 그리고 디오니소스의 신화와 몹시 닮았다. 그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중국이 창조신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책, 다섯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졌던 감상은 이 시리즈를 마치면서 캠벨이 했던 말과 상당 부분 동감되기에 캠벨의 말을 올려 두는 것으로 마친다.

캠벨은 이 대작을 마무리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서 내가 얻은 중요한 성과는 내가 오랫동안 충실하게 지켜온 생각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생물학적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그 영적인 역사에서도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 통일성은 하나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것처럼 세계 곳곳에서 펼쳐져왔고 지금도 펼쳐지고 있다. 주제들이 나타나고 전개되고 확대되었다. 또 방향을 돌리고, 비틀었다가, 다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모든 악기들이 함께 소리를 내며 거역할 수 없는 물결을 이루어 장대한 포르티시모로 힘찬 절정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이 절정으로부터 그 다음의 위대한 악장이 나타날 것이다."
발췌 -까치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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