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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8일 06시 12분 등록
네가 바로 그것이다(THOU ART THAT)
조셉 캠벨 글/박경미 옮김/해바라기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 조셉 캠벨(1904∼1987)

안녕하세요, 다시 만났네요. 지난주 만나고 일주일만에 다시 만나는 거죠? 지난 1주일 동안 잘들 지내셨는지요? 지난주에는 저의 어렸을 때 이야기를 했었죠?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제가 성공한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 좋겠지만 이 부분은 언론이나 인터뷰를 통해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생략하고 제가 어렵게 공부하던 시절에 대해 이야길 해볼까요? 아무래도 이 부분이 저에 대해 좀 더 알게되고 또한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수 있는 소지도 있으니까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되겠지요? 서양인이 4자성어를 잘 구사하니까 조금 어색한가요? 편견을 버리세요. 있는 그대로만 보지 마시고 내면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하세요. 세상은 보여지는 것보다 보여지지 않는 부분이 훨씬 많을뿐더러 세상의 신비는 감춰진 부분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이랍니다.

음.. 제가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약 3년간이었을거예요. 어려웠다고 말하는 것은 제 학문이나 사상에 대한 어려움이 아니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말하는 겁니다. 1927년부터 저는 학위 논문으로 특별장학금을 받아 파리에서 2년간 유학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죠. 저는 아서왕 전설의 권위자 밑에서 로망스어, 중세프랑스어, 프로방스어, 라틴어 등도 전공하고 새로운 문학이나 피카소 같은 거장의 그림도 접할 수 있었죠. 파리에서의 생활은 정말 좋았어요. 새로운 경험을 통해 저의 학문적 소양 및 안목까지도 넓어질 수 있었으니까요. 파리에서의 생활은 1년으로 끝내고 다음 해인 1928에는 독일 뮌헨대학으로 옮겼어요. 새로운 것을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죠. 저는 그곳에서 나중에 제 신화를 해석해줄 프로이트와 융의 사상을 만날 수 있었지요. 아.. 두 사람에 대한 공부는 정말 저를 가슴 떨리게 했어요. 심리학을 통해 신화에 대한 연구의 폭을 더욱 넓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죠. 아마 제가 프랑스 파리에서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이런 기회는 없었을겁니다. 운도 좋았지만 저의 끊임없는 학구열이 저를 이끈 것이라고 생각하죠.

1929년에는 미국으로 돌아와야만 했어요. 개인적으로 뮌헨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면 했는데 세계 경제공황이 밀려오면서 경제적 문제로 더 이상 공부하기가 어렵게 된거예요. 눈물이 났어요. 정말로 하고 싶은 공부를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그러더군요. 하지만 마음을 다시 추스렸어요. 지역이 어디이든 공부하는 것은 똑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래, 미국에 돌아가서 내가 하고자 하는 분야를 더욱 하면 된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경제적 사정으로 돌아온 미국 또한 주가 폭락과 대공황으로 이미 쓰러져 가고 있었죠. 당장 먹고 사는게 급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지는 판에 저와 같은 사회 초년병 초짜를 받아주는 곳은 아무 곳도 없었죠. 게다가 문학과 사상, 철학, 언어학, 생물학 등을 공부한 저를 관심있게 봐주는 직장은 미국 어디에도 없었죠. 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 했어요. 어떻게 살것인가? 용단을 내렸죠. 더 이상은 방법이 없다. 차라리 산으로 들어가자. 경제쪽을 포기하고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독서를 하자. 까짓거 먹는 거야 굶어죽지 않을 정도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정말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ㅎㅎ 정말 산은 아니고요, 도심을 떠나 우드스톡의 숲속에 있는 작은 집을 아주 싼 값에 빌려 들어갔죠. 혼자는 아니고 조각가 지망생인 누이 앨리스와 함께였죠. 정말 문제는 식비였어요. 어쨌거나 살기 위해 먹든, 먹기 위해 살든 먹는 것은 중요한 것이었으니까요. 아마 그 당시 제가 제대로 먹지 못해 쓰러졌다면 여러분은 세상의 위대한 신화학자 한명을 못 보았을겁니다.^^ 식비 조달을 위해 제가 이용한 건 저의 달란트, 색스폰이었죠. 다행히 저는 취미 생활로 학창시절 조금씩 색스폰을 배우고 있었는데 이게 저의 밥벌이가 된 겁니다. 도심의 한 재즈바에서 우연히 색스폰 주자를 구하고 있었는데 제가 딱 맞아 떨어진 거죠. 아마 매일 저녁 3시간 정도 불었던 것 같아요. 당시 미국 경제 상황이 워낙 안좋다 보니 그곳에 오는 손님도 많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사람들은 조금씩 조금씩 오곤 했었죠. 저는 색스폰을 불면서 많은 돈을 받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누이와 저의 식비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3년을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1933년에 모교인 캔터베리 프레프 스쿨의 교사로 임명되어 가게 되었죠.

제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하납니다.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그리고 주어진 환경하에서 최선을 다하세요.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제가 한 일은 ‘독서’였습니다. 정말 많이 읽었습니다. 읽고 또 읽었죠. 특히 한 사람에 대해 알고자 하면 그가 세상에 내 놓은 책이란 책은 모두 구해 다 읽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 모든 걸 알게 될 때까지 파고 또 팠습니다. 그 결과 저는 그의 사상을 제 사상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이용할 수 있게 되었죠. 그렇습니다. 노력은 절대 자신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프랑스, 독일의 유학시절을 통해 저, 조셉 캠벨이 만들어진게 아닙니다. 저는 극빈생활 동안의 ‘독서’를 통해 만들어졌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그리고 항상 준비하세요. 항상 그런 마음가짐으로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면 언젠가 세상에 우뚝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동안 제 책을 읽느라 혼 좀 났겠네요. 저의 이야기는 은유인거 이제는 알죠? 은유는 내면의 소립니다. 내면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세요. 언제 어디서든 주의를 기울이고 들을 수 있다면 당신은 한단계 성숙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겁니다. 고생했네요. 항상 행복하시고, 파이팅!!~ ^^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서문

조셉 캠벨은 《도덕의 기초》에 나오는 쇼펜하우어의 질문을 좋아했다. “어떻게 나의 고통도, 내가 관심을 갖는 사람의 공통도 아닌 남의 고통을 보고 마치 그것이 나 자신의 고통인 양, 즉각 몸을 던져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한가. [……] 이는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며,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 경험의 세계에서는 어떠한 근거도 찾을 수 없다. 아무리 무디고 이기적인 사람이라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 예들이 매일매일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곤궁에 처해 있고,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 빠져 있다는 단 한 가지 생각 때문에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순간적으로 반응하며 생면부지의 사람을 돕는다. 이를 위해 때로는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한다……(9P)

쇼펜하우어의 결론에 따르면 그러한 즉각적인 반응과 행동은 “네가 그것(Tat tvam asi)" 이라는 말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는 형이상학적 깨달음이 섬광처럼 지나간 결과라는 것이다.(10P)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이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것을 전제한다. 말하자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힌 벽이 뚫려서 타인이 더 이상 무관심한 낯선 자로 받아들여 지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의 피부 밑에 나의 신경이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 안에서 내가 고통을 느끼게 된다.”(10P)

쇼펜하우어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근원적 통찰은 “나의 참된 내적 존재가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 안에 실제로 존재하며…… [그리고] …… 그것이 자비(함께 고통받음)의 근거로서 모든 참되고 이타적인 덕이 여기에 기초하고, 모든 선행에서 바로 이 자비가 표현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10-11P)

신화와 종교의 상징과 에너지는 인류 공통의 상상력의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와서 스스로를 표현한다.(11P)

“근원적 자아는 현실 속에서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생명으로 활동한다. 신화에 나타나는 은유들은 바로 이 근원적 자아에 대한 직관으로부터 나온 표징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의례화된 표현들을 통해서, 교훈적인 이야기들과 기도, 명상, 연례 축제 등을 통해서 근원적인 자아가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해당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로 모여 마음으로 감성으로 근원적 자아를 알게 되고, 이에 따라 살게 된다.”(11P)

켐벨에게 신화는 백여 개의 파이프들이 내는 다양한 음조들이 기막히게 어우려져서 하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창조해 내는 성당의 파이프 오르간과도 같은 것이다. 신화의 복잡하고 다양한 주제들마다 공통적인 것은 모두 인간에게서 기원한다는 점이다. 각 주제들은 동일하고 영원한 영의 울림이 시간의 영역 안에서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굴절되어 담긴 그릇과도 같다. 놀랄 만큼 창조적으로 표현된 인간적 갈망과 욕망, 우리가 속한 전통으로부터 나온 비극들을 보면서 우리는 바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11-12P)

“당신이 걸려 넘어지는 그곳에서 황금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13P)

조셉 캠벨의 목적은 성서 신화들을 탐구함으로써 그것들을 믿을 만하지 못한 것으로 폐기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그것들이 지닌 살아 있는 풍성한 의미들의 세계를 열어 보이려는 데 있다.(15P)

§스코프 재판 : 1920년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는 주법을 통과시키는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스코프 재판으로 좌절되었다. 존 스코프(John Scope)는 1925년 3월 통과된 이 법을 무시하고 다윈의 이론을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클레런스 대로우의 강력하고도 열정적인 변론으로 근본주의자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주 대법원에서 스코프에 대한 기소는 기각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 법령은 확인되었다. 그러나 1968년 연방대법원은 비슷한 법령이 위헌이라고 선언하였다.(17P)

창세기를 신화로 이해하는 것은 그 책을 파괴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영적 생명력과 그 의미를 다시 한번 발견하자는 것이다.(18P)

은유는 한 장소로부터 다른 장소로 이동시킴으로써 우리들을 가두고 있던 경계를 넘어 설 수 있게 한다. 시공을 초월하는 영적 진리들은 은유적 그릇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다. 은유는 그 외연으로서 역사적 맥락이 지니는 딱딱하고 사실적이며 일차원적인 내용들이 아니라, 그 내포를 통해서만-다시 말해 은유가 스스로 일깨우는 진리의 여러 측면들에 대한 증거들의 성운을 통해서만-전달될 수 있다.(19P)

본래 은유는 우리로 하여금 먼지가 풀풀 나는 구체적인 역사적 시간이 무대에서 좌절한 채로 영원히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이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해준다.(19P)

외연은 일회적이며 시간에 매여 있고 영적이지 않다 ; 반면 종교적 은유가 지니는 내포적 의미는 풍부하며 무시간적이고, 다른 어떤 외적 세계에 있는 누군가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 지금 여기 있는 우리들 자신의 내적이고 영적인 경험을 지시한다.(19P)

이 책은 이제는 정착된 것으로 보이는 유대-기독교 전통의 거대한 방주가 거쳐온 항해 속으로 사람들이 들어가서 영을 숨쉴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만들어진 최초의 사전 원고 같은 것이다.(23P)

조셉 켐벨의 중요한 가르침에 의하면 이러한 민족적 분열이야말로 오래전에 뿌리를 내린 종교적 가르침들을 왜곡시킨 데 따른 뼈아픈 결과이다. 종교적 은유들을 마음과 영에서 우러나는 상징들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사실로 이해하면서 영적인 권리를 주장할 경우 세계는 끔찍하게 분열되고, 어쩔 수 없이 엄청난 비극을 맞게 된다.(23P)

자비는 우리들의 내적 품성을 향해 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며, 멀리 우리와는 아주 다른 것 같은 사람들의 삶 속으로 우리들 각자가 영웅적인 여행을 하라고 촉구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경험이며, 우리는 이 여행에 뛰어들기 위해 집을 떠날 필요도, 아니 우리가 앉아 있는 의자를 떠날 필요도 없다.(24P)

세계의 종말은 자신들의 영적 통찰을 통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들, 초월, 신배의 성례전, 또는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썼듯이 ‘무한’을 향해 솔직한 사람들에게 매일매일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종말은 어둡고 무시무시한 끝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출발점에 대한 은유다.(25P)

캠벨이 복구한 유대-기독교 전통의 가장 의미깊은 가르침은 자비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죽어서 다름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동일한 인간 본성을 드러내는 비전을 향해 부활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네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가르침이다.(25P)

21세기를 위한 캠벨의 메시지는 묵시록적이 아니라 희망적이다. 왜냐하면 그의 메시지는 다시 한 번 우리를 유대-기독교 전통의 토대에 뿌리내리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에덴으로부터 우리를 쫓겨나게 만든 욕망과 두려움을 정복함으로써 수치감으로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인간성을 끌어안도록 하기 때문이다. Tat tvam asi. 네가 바로 그것이다.(25P)


제1장 은유와 종교적 신비

“그렇지 않습니다. 신화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신화란 상징적인 이미지들과 이야기들을 조합해 놓은 것이며, 인간 경험의 가능성들에 대한 은유이고, 특정한 시대에 이루어진 특정한 문화적 성취입니다.”(30P)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종교적 은유들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에 자신들은 무신론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32P)

나는 전통적인 신화는 네 가지 기능을 한다고 본다.
첫 번째 기능은 존재의 근원적 조건에 의식을 맞추는 것, 다시 말해 우주의 신비로운 떨림(mysterium tremendum)을 향해 의식을 깨우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 기능은 해석적인 기능이다. 바로 우주 질서의 일관된 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세번째 기능은 구체적인 도덕 질서, 다시 말해 그 신화가 생겨난 사회의 질서를 정당화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네번째 기능은 개인이 삶의 다양한 단계들과 위기들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즉 개인들이 삶의 전개를 통전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33-39P)

신화의 첫 번째 기능은 다음 세 가지 참여의 방식을 통해 현재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일깨우는 것이다. 즉 자기 밖으로 옮겨놓거나 자기 안으로 깊이 침잠하게 되거나, 아니면 스스로 변화하게 한다. 나는 이것을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신화의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신비적인 기능인데, 이를 통해 존재의 신비의 차원을 발견하고 인식하게 된다.(34P)

신화의 생명력은 그 상징들의 은유적 열정으로부터 나오며, 또한 거기에 의존한다. 은유와 상징은 단순한 지적 개념 이상을 전달한다. 왜냐하면 초월의 현실성에 실제적으로 참여한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은유와 상징의 고유한 특성이기 때문이다.(40P)

시대와 상황은 변하지만 수세기에 걸친 역사적 조건의 주체, 즉 우리가 인간 존재라고 부르는 신경정신적 통일체는 지속적으로 남는다. 아돌프 바스티안이 ‘원소적 관념’이라 표현하고 융은 ‘집단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지칭했던 것은 변화하는 역사적, 문화적 시대의 은유들을 통해 표현한다.(40P)

은유들은 당대 경험의 맥락으로부터 생생하게 솟아오를 때, 인간 존재의 이러한 깊은 차원들을 향해 말을 거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새로운 신화는 사회적으로나 영적으로 빈곤하게 됨으로써 급속하게 과거의 은유로 변한다.(41P)

이러한 은유와 상징들은 반드시 현재의 삶과 사고, 경험으로부터 나올 것이며, 그 자체의 힘으로 의식의 가장 내밀한 층을 건드릴 수 있는 특수한 언어로서, 새롭게 충전된 신화를 우리들에게 되살려놓을 것이다.(41P)

예술가들은 각자의 분야와 재능에 따라 신화의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소명을 받았다. 다시말해 예술가들은 초월적이고 무한하며 풍성한 존재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현대판 은유를 제공한다.(41P)

신화는 특정한 마음의 상태들을 내포하는 은유적 언어들의 조직체라고 할 수 있다.(41P)

신화와 형이상학의 은유적 언어들은 둘 다 실제 세계나 신들을 외연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건드리는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차원들과 실재들의 의미를 표현한다. 은유는 시공간의 외적 세계를 기술하는 것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은유가 지시하는 실제 우주는 내적인 삶의 영적 영역이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42P)

은유적 언어가 오해되고 표면적 구조가 파괴될 경우, 그것은 시공간에 매인 현존하는 사물의 질서를 환기시킬 뿐이며, 그 영적인 지시사항은 설사 전달된다 해도 아주 희미하게 전달될 따름이다.(43P)

은유적 상징들을 이해하고, 그것들이 원래의 꾸미지 않은 방식대로 우리 의식의 내밀한 차원에 말을 걸도록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 한, 신화의 기능에 대한 이해의 진정한 발전은 없을 것이다.(43P)

진정한 의미에서 신화란 ‘다른 사람들의 종교’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종교란 ‘신화에 대한 대중적인 오해’라고 이해될 수 있다.(45P)

신화는 의미의 영역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정신과 감성에 부여하는 상징들의 체계이다.(45P) 다양한 신화들은 인간 경험의 가능한 의미들을 그 시기의 지식과 결부시켜 정의하며, 또한 사회구조에 의해 보급된 지식이 인간이라고 불리는 복합체, 내지는 심신체계에 끼친 심리학적 영향과 관련하여 정의한다.(45P)


제2장 종교적 신비 경험

기독교 전통에서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참 신이면서 참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본성의 통일성으로 인해 그리스도는 신비로 간주된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우리들 각자가 신성의 일부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전혀 신비로 간주되지 않는다.(49P)

역동적인 신화의 일차적인 목적으로 고유하게 종교적인 기능이라고 강조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이름들과 형식들을 초월하는 궁극적인 신비를 인식함으로써 인간 안에 있는 경외와 겸허, 존경의 경험을 일깨우고 유지하는 것이다.(52P)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Ervin Schrodinger)의 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 가슴 속에 새겨져 있는가.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삶은 단순히 전체의 일부분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바로 전체입니다. 전체는 이것저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브라만들이 거룩하고도 신비롭게 표현한, 실로 단순하고 명료한 것입니다. [……] Tat tvam asi. 그것은 바로 너다.”(53P)

이것은 모든 형이상학적 담론의 기본적인 통찰로서 내가 신이 가면들이라 부르는 이름들과 형식들이 벗겨지는 순간 각 사람이 홀로 알 수 있는 것이다.(53P)

본질상 종교적 경험은 오직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경험을 다른 누군가와 나누는 순간 그 특성은 사라져버린다.(54P)

인간은 선악의 열매를 먹음으로 이원성의 영역에 있게 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대립의 쌍들로 이루어진 세계에 살게 되었다….그리스도는 우리가 쫓겨났던 그 통일성의 영역-나와 아버지가 하나인-으로 다시 돌아간다. 바로 이것이 신비다.(57P)

종교적 관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선과 악을 대립시키는 윤리적 관점으로서, 성서에 근거한 서구 기독교에서는 선과 악을 대립시키는 윤리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서구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로 인해 이원론적 영역에 매여 있다. 그러나 신비적 관점에서는 선과 악을 한 과정이 지니는 두 측면들로 이해한다. 중국의 표징이나 태극이 여기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59P)

신비의 경험은 단지 기대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 계획을 포기해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계획이란 두려움과 욕망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계획을 버리면 빛이 다가올 것이다.(61P)


제3장 신에 대한 개념들

시공간의 영역에서 ‘사실’은 대상이며, 꿈속에서는 이미지이다. 그러나 신은 꿈도 사실도 아니다. ‘신’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이름지을 수 있는 것들을 넘어선 무언가를 지시한다.(66P)

유대-기독교가 아닌 대부분의 종교 전통들에서, 신은 모든 개념화를 초월하는 특정한 에너지의 대리자이거나 현시이며, 기능들이다. 신들은 에너지의 근원이 아니라 그 대리자들이다.(66P)

정신의학의 목표는 인간이 잘 알지도, 규명하지도 못하는 근원들로부터 나오는 에너지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정신 구조를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초월에 대해 투명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유리창처럼 되어 단절되었던 빛이 우리를 통해 비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도 초월에 대해 투명해야 마땅하다.(67P)

신이 초월을 향해 문을 열 때 우리는 신이라 부르는 존재와 하나가 된다. 따라서 신에 대한 이미지들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초월로 우리를 인도한다.(67P)

무엇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해야 하는가? 전구인가, 아니면 의식인가? 전구가 없었으면 의식도 없었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식이다. 만일 스스로를 의식과 동일시한다면, 육체는 사라진다.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게 해준 육체에게 감사할 수 있고, 또 육체를 사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육체는 단지 매체일 뿐이다.(70P)

근본적이고도 단순하며 위대한 신비적 깨달음이란, 의식의 매체가 아니라 의식 자체와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우리 몸은 의식의 매체이다.(71-72P)

‘개체와 개체는 아무 막힘이 없다.’ 이런 생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마음의 각성이며, 자비, 즉 ‘Mitleid'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을 통해 열정(passion)에서 자비(compassion)로 관계가 변화된다. 이것은 단순한 소유 관계나 타인과의 투쟁 관계가 아니고, 타인과 동일시하는 관계이다. 물론 이러한 동일시의 관계 안에도 투쟁은 있지만, 무자비한 동물적 투쟁 양태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73P)

신화는 자신의 가장 내밀한 세계를 탐구하는 사람들의 환상으로부터 유래했다. 그리고 문화는 신화에서 유래했다.(77P)

신화의 첫 번째 기능을 나는 존재하는 자, 영원히 존재할 자, 존재의 신비, 우주와 그 안에 있는 자아의 신비에 대한 경외감과 감사의 감정을 개인 안에서 일깨우고 유지시키는 신비적 기능이라고 지칭했다.(79P)

영생은 현재와 영원의 한 차원이며, 그 안에서 발견되고 경험되어야 할 존재의 의식적 차원이다. 영생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시간을 타고 전 생애에 걸쳐 그 위를 달리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존재와 삶의 경험들이 지니는 초개인적이고 초역사적인 차원에 대한 인식으로 인도하는 것은 신화적 원형들이다. 이 원형들은 모든 신화의 근저에 깔려 있고, 영원히 인간 삶을 지탱하며 모범이 되어온 영원한 상징들이다.(80P)

성서와 관련해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현대 성서학자들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중심적인신화적 주제들을 모두 그보다 앞서 있었던 수메르-바빌론 문서들에서 발견하였다는 것이다.(80P)

상징은 직접 우리 영혼을 향해 말한다. 영혼은 그 상징을 보여주고 해석하는 사람이 전혀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더라도, 그 상징이 무엇을 말하는지 즉각적으로 안다.(81P)

성 토마스 아퀴나스조차도 《이단 논박 대전》1권 5장에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그분은 훨씬 높은 곳에 있다고 믿을 때에만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있다.”고 말했다.(81P)

힌두교나 불교의 궁극적 의미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모든 존재의 신비이기도 한 그 신비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82P)

서구의 종교 전통에서는 이처럼 자기 존재의 근거와 하나가 되는 경험의 가능성을 알지 못한다. ..서구 종교는 ‘관계성’의 종교다. 피조물 a가 창조주 X와 관계(Related: R)를 맺는 것이다(aRX). 반면 동양의 종교에 대한 적절한 묘사는 훨씬 단순하다. a=X라는 동일시인 것이다.(84P)

교회의 실제적인 기능은, 신자들이 그들에게 가능한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 메시지를 경험할 수 있도록 상징을 보존하고 재현하며 의례를 행하는 것이다.(86P)

인간은 모두 동물로 태어났으며 잠자고, 먹고, 번식하며 싸우는 동물의 삶을 살아간다. 인간에게는 동물들이 알지 못하는 삶의 또 다른 질서, 존재의 신비 앞에서 느끼는 경외, 즉 삶에서 느끼는 영적 감정의 뿌리이자 가지라고 할 수 있는 ‘신비스럽고 떨리며 매혹적인것’에 대한 경외가 있다. 이것은 고유하게 인간적이고 영적인 생명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탄생 - 동정녀 탄생 - 이다.(87P)

철학자 알란 와츠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지구는 마치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듯이 사람들로 가득 채우고 있다. 사람들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맺듯이 지구에서 생겨난다.”(89P)

우리는 지구의 감각기관들이다. 우리는 우주의 감각이다. 바로 우리 자신 안에 그것이 있다. 한때 우리가 믿었던 신들은 저기 밖에 있고, 그 신들은 우리들 자신이 투사된 것이다. 그 신들은 우주의 신비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해석하고자 했던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다.(89P)


제4장 종교적 상상력과 전통신학의 규칙들

이 시대 종교의 과제와 기능은 마음을 깨우는 것이다. 만일 성직자들이 마음을 깨우지 못하거나 깨울 수 없다면, 사람들을 깨우고 영적으로 양육할 상징들을 해석할 능력이 없음을 의미한다.(95P)

종교적 언어의 본질적 구조인 은유들은 구체적인 지시물들, 외연과 관련해서 읽혀졌다. 그 결과, 실은 은유의 전체적인 의미는 분열과 이원성을 넘어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적대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성직자들은 일차적 임무인 상징을-그들은 사실 상징의 수호자이다- 이해하는 일에 실패했을 때, 유일하게 우리의 영적 탐험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술가들뿐이다.(96P)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의를 위해서,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서 내가 죽음을 무릅쓴다는 것을 압니다.” 그가 말한 것은 바로 은밀한 원인이다.(99P)

우리 죽음의 은밀한 원인이 곧 우리 자신의 운명이 된다. 모든 생명은 유한하며, 만일 그 유한성에 도전한다면, 우리는 그 유한성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그리고 영웅이란 결국 운명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신들의 행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다.(99P)

죽음은 우리 삶의 방향과 목적의 성취이다.(100P)

감정은 자아를 향한 여행, 즉 모든 것에 앞서는 예술로부터 온다. 예술을 통해서 우리는 다른 모든 요청들을 밀어놓고 형이상학적인 부름을 느끼며, 거기에 응답하게 된다. 모든 종교들의 전면은 윤리적이다. 그러나 종교에는 선악을 넘어서고 나와 너를 넘어서며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근거가 있다. 상징이 그 문을 열때에는 이 형이상학적 배경이 빛나고 흘러나오게 된다.(101P)

신화적 언어는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거대한 체계 안으로 관계를 맺도록 돕는 은유물이다.(102P)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이단 논박 대전》에서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며 그것들을 넘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때만 진정으로 알 수 있다.”라고 쓰고 있다.(107P)

한 정통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다른 전통에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어서 전 영역을 살펴보는 것이 대단히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이 서로 밝혀주기 때문이다.(108P)

우리의 상상력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도록 스스로 허락하기만 한다면, 생명의 세계가 우리 안에서 스스로 말할 것이다.(112P)


제5장 유대-기독교 전통의 상징들

인간의 심장 박동은 우주의 심장 박동과 일치한다. 그 둘은 같다. 이러한 리듬의 일치야말로 오래된 우주론적 신화의 핵심이다. 우주론적 신화는 소우주와 대우주가 동일한 박동을 가지고 서로 공명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120P)

옛 신화들은 인간 사회를 자연과 일치시키는 기능을 한다. 축제는 계절의 순환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개인을 사회와 일치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살도록 이끈다.(123P)

은유는 아직 남아있는 신화의 언어이며 여전히 광범위하게 오해되는 말이기도 하다. 소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도 신화는 거짓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은유를 잘못 읽었을 때만 그러한 오해가 생긴다.(128P)

하인리히 치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최상의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차선의 것은 오해받는다.”(129P)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은유는 사실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은유가 사실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을 ‘무신론자’라고 부르며,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종교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들 중 누가 실제로 의미를 이해할까?(129P)

나는 신이 아담과 이브를 동산에서 내쫓았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들 스스로 쫓겨난 것이다.(133P)

에덴이라는 목가적인 장소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동산은 대립의 쌍들로-남성과 여성, 선과 악-이루어진 - 우리들의 정신과 생각이 신의 정신과 생각만큼 거룩하다는 것에 대한 은유이다.(133P)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고, 욕망은 이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다. 두려움과 욕망이 인간을 동산으로부터 멀리 떼어놓는다. 우리를 유배된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134P)

이러한 신화적 주제들은 황당한 동화적 이야기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고 우리 삶을 밝혀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창세기의 이야기들은 내연적 의미에 따라 읽으면-영적 메시지와 중요성을 제공하는 참된 은유적 의미에 따라 읽으면-이러한 모든 상징들이 거기에 나타난다.(138P)

전설은 상징적 주제들과 접목되어 모호하게 기억된 역사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설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이 아니라, 상징화된 개념이나 상징화된 개념들의 체계를 표현한 것으로 읽어야 한다.(142P)

신을 하나의 사실로 생각할 때는 신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없다. 그러나 신을 생명의 역동으로 보고 우리 자신을 거기에 포갤 때 우리는 신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동산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는 여기 지상에 존재한다.(147-148P)

기독교는 모든 것을 역사화하면서 동시에 매우 강력하게 영지주의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동산에서 일어난 사건이 기독교 안에서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신화적인 사건이었지만,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역사적 사건이지만, 선행하는 신화적 사건에 대한 답으로 해석되었다.(148P)

기독교건, 유대교건 우리 서양 종교들은 역사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사건들을 넘어서서 그 영적 의미를 읽지 못하고, 역사적 사건들 자체를 숭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동양의 종교로 눈을 돌리는 것은, 그동안 자신들의 종교 안에서 지나친 문자주의와 역사주의로 인해 닫혀져 있던 참된 의미를, 이제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149P)

만일 당신이 어떤 다른 신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한 신을 선택한다면 그 신을 확고히 긍정하고 붙들 수 밖에 없다. 그 신이 초월을 열어 주면, 신자도 초월을 열 수 있다. 그 신이 닫으면 신자도 닫게 된다. 성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그것을 역사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읽는 것이다. 스스로의 방식대로 성서를 읽고, 의미를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성서는 모든 독자들 개개인에게 그들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특수한 무엇인가를 말하기 때문이다.(151P)


제6장 유대-기독교 영성의 상징들에 대한 이해

세계 종교들이 이른바 민족 종교들과 달리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은 고백, 혹은 신조의 종교라는 점이다. 이 종교들은 믿음과 믿음의 고백에 근거한다.(156P)

특별한 인물들이나 그들의 영향력은 마치 자석과도 같아서 떠돌아 다니는 신화적 재료들을 끌어당기는 역할을 한다. 신화적 재료들이 특별한 인물과 결부되면 주위에 일종의 성운 같은 것이 형성되어서, 그들의 성격과 가르침에 빛을 비춰주게 된다.(157P)

그리스와 기독교 전통에서는 어느 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특정한 형태의 고백을 통해 영혼의 변화를 이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187P)

유다는 그리스도를 그 분 자신의 죽음에 넘겨주는 사람이며, 자신은 그림자 가운데서 죽는다. 그는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다. 그리스도 상 안에는 그림자, 즉 세상의 빛에 대립하는 상대자라는 동기가 늘 나타난다. 그림자 없이는 빛도 없다. 그림자는 빛나는 존재의 반영인 것이다.(189P)

구원의 목적은 최초 인간의 불복종 행위로 인한 가증스러운 범법 행위를 죽음을 통해 속죄해 창조주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것이다.(193P)

어째서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가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본질적인 의미를 내포하는데, 그것은 전혀 역사적이 아니라 신화적이다. 왜냐하면 사실 에덴동산이나 말하는 뱀 같은 것은 없었으며, 원인(猿人) 이전에 홀로 존재했다는 ‘최초의 인간’이나, 혹은 꿈같이 그의 갈비뼈로부터 나왔다는 ‘어머니 이브’도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에덴동산 신화 같은 것들이 빈번하게 역사로 잘못 읽히고, 신화적 해석들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같은 실제적 사건들과 결부되기도 했지만 신화는 본래 역사가 아니다.(195P)

융은 만다라 상징이 인간의 경험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네 가지 지본적인 심리학적 기능들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해석했다. 그것은 이해기능인 감각과 직관, 그리고 판단과 평가 기능인 사유와 감정이다.(198P)

예수는 역사적이며 동시에 영원하고 완전한 인간으로서 모든 대립의 쌍들을 넘어서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 안에서 모든 종류의 갈등, 심지어 신과 인간 사이의 대립까지도 넘어선다.(199P)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로마6:6.14)

만일 당신이 세상의 빛나는 환희를 본다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 “예”라고 말할 것이고, 만일 그 환희를 보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영지주의적 통찰은 앞에서 식물과 관련된 신화들과 관련하여 이미 언급했던 경험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경험을 통해 만유 안에 있는 생명의 역동성을 확인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세상의 현상적 측면에만 매일 것이 아니라 직접 그 핵심을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203-204P)


제7장 질의응답

신화적인 상들은 심리학적 에너지를 일깨우고 이끌어간다. 즉 기운을 일깨우고 이끌어가는 표징이다. 신화론은 정서나 감정적 상들의 체계이다. 동시에 신화를 통해 상들이 나타남으로 인해 그러한 정서와 감정이 생겨나게 된다.(208P)

신화적 이미지들은 불합리하고, 따라서 무의미하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따라서 합리적 체계는 우리 삶에서 신화적 이미지들의 연관성을 깨뜨리고 신화적 상들이 지닌 힘을 사용할 수 없게 한다.(208P)

여러분은 신화 체계의 조각들 가운데서 여러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조각을 선택할 수 있다. 신화 조각의 도움을 받아 상징들이 유래했던 무의식의 체계와 여러분 스스로 관계를 만들어가도록 해보라.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당신은 황소를 보게 되고,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보았던 야훼의 면모도 보게 될 것이다. 황소를 붙잡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황소는 사라지고 당신 홀로 거기에 있게 된다.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 물론 이것은 초월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이런 황홀 속에서 자연은 돌아오기 시작한다. 이제 당신은 두 손에 넘치는 풍요로움을 가지고 도시로 돌아온다. 이 길은 도시로 돌아오는 마지막 단계에서 완성된다. 행복을 베푸는 손이 되어 도시로 들어온 당신은 황소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려는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해 줄 수 있을 것이다.(209-210P)

산에서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온 모세의 경우처럼, 모든 사회질서들은 결국 홀로 신비를 경험하고 시험을 통과해서, 인류를 위한 가르침을 가지고 돌아오는 한 개인의 깨달음과 경험에 소급된다.(210P)

우리 사회와 학교가 할 일은 본래 교육의 개념대로 결코 지나침 없이 차근차근 이끄는 것이다. 라틴어 ‘educere'(이끌다)가 시사하듯이, 교육(education)의 기본 개념은 밖에서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이끌어내는 것이다.(213P)

영원은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며, 나 자신의 진리와 존재의 영원성을 나의 가능성 안에서 경험할 수 있다. 만일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자신이 본래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죽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통찰이 태양의 신비, 태양 빛으로 표현되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214P)

서구와는 달리 동양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공(空)이 아닌 공(空)과 자신의 동일성을 내면에서 경험하는 데 있다. 즉, 경험을 통해 내 안에 흘러드는 것과 나 자신과의 동일성을 깨닫는 것이다.(214P)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나 가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자신을 내어주는 고귀한 사랑의 위대한 예가 바로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여기서 개인의 초월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아버지에 대한 속죄 혹은 아버지와의 일치이다.(216P)

결혼이 전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결혼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자주 말하듯이, 결혼은 긴 연애가 아니다.(217P)

어떻게 보통 사람이 초월에 이를 수 있는가? 맨 먼저 시를 공부하라고 말하고 싶다. 시를 어떻게 읽는지 배워라. 시를 읽을 때 반드시 메시지나 메시지의 단서를 얻는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초월의 경험은 서서히 올 수 있다. 초월에 대한 경험에 이르는 길은 많다.(219P)

남자나 여자가 개인에게 속하지 않고, 개인을 도구로 부리는 어떤 위대한 힘에 속한 가치들을 위해 일할 때, 그는 영웅이 된다. 여인은 생명을 낳는 힘의 도구(vehicle)가 됨으로써 영웅이 된다.(219P)

부족 사회에서 여자는 자연의 도구이고, 남자는 사회 질서의 도구이다.(220P)

오늘날 미국에서는 피켓 시위나 그와 비슷한 시위의 선이 얼마 안 되는 효과적인 제의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집단의 구성원들이 함께 걷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피켓 시위의 선을 넘어갈 수 없다. 그것은 분리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피켓 시위의 선은 성스러운 공간이다.(223P)

모름지기 예술이란 전체 사회를 조직하는 신화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으리라.(227P)

쿤달리니 요가라는 말은 ‘감겨진 것’을 뜻하며 인간의 몸 속 가장 밑바닥에 실제로 항문 위치에 감겨져 있다고 여겨지는 영적 에너지를 가르킨다. 이 요가의 목표는 호흡조절과 명상을 통해 수슘나라고 하는 척추의 통로로 쿤달리니가 풀려나오게 하는 데 있다.(228P)


제8장 대담

신화는 거짓을 뜻하는 말로 잘 쓰이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표현하는 영구적인 수단이다.(237P)

신화와 상징은 모든 종교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특징으로, 종교 체험의 특수한 언어이다.(237P)

캠벨은 언제가 대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장 최근에 나타난 오이디푸스의 화신인 미녀와 야수의 계속되는 로맨스는, 오늘 오후에도 뉴욕 42번가 모퉁이에서 변신을 위한 빛을 기다리며 서 있다.”(238P)

이 새로운 삶으로의 여행-우리는 모두 이 여행을 해야 합니다-은 우리가 과거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주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낡은 시대의 종교가 아니라 사물들의 새 질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합니다.(242P)

우주시대에는 두 가지 명제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첫째, 우리는 사회적으로 새로운 상징체계로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낡은 상징체계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현존하는 상징들은 구체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해석될 때 계시를 드러냅니다.(246P)


묵시록은 불타는 아마겟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지와 자기만족이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조합(조합)할 수 있는 신화를 가지지 못한, 갈라지고 분열된 세계관은 끝나고 있습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는 배타주의, 진리를 독점한 집단이 있다는 생각, 이것이 사라져야 할 세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그 나라는 하느님의 보편적 현존이 우리의 이웃들 안에서, 우리의 원수들 안에서, 우리 모두 안에서 실현되는 데 있습니다.(246P)

우주시대는 구원이 우리 안에서 와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바깥 공간으로의 항해는 우리를 내적 공간으로 돌아가게 합니다.(248P)

당신도 알듯이, 우리를 앞으로 나가게 하는 것은 경외감입니다.(250P)

토마스 머튼이 썼듯이 하나의 상징은 우리의 의식으로 하여금 삶과 실재 그 자체의 내적 의미를 새롭게 자각하도록 일깨우는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상징들을 통해서 우리는 정서적으로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와 접촉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 서로 접촉하게 되며, 신과 접촉하게 됩니다.(250P)

내가 좋아하는 신화에 대한 정의는 ‘다른 사람들의 종교’입니다. 종교에 대한 내가 좋아하는 정의는 ‘신화에 대한 오해’입니다.(254P)

우리가 서로 하나라는 것, 그것이 우주 시대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많은 종교 제도들이 그 요청에 저항하고 있습니다.(257P)


역자 해설

오늘날 몇가지 두드러진 형태로 나타나는 세계 종교들은 수천 수만 년에 걸친 인류의 종교 경험이 녹아들고 응축된 결정체이다.(262P)

캠벨은 이 책에서 성서와 기독교의 많은 이야기들을 인간과 세계, 신에 대한 근원적인 이야기로 보고 세계의 다양한 신화들과 비교하여 구조적 유사성을 발견하고, 그러한 구조에 나타나는 인간 종교성의 근본 구조를 밝히려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263P)

캠벨이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이처럼 원초적이고 노골적이며 다듬어지지 않은 그대로의 인간의 종교성이다. 이 원초적인 종교성에 비추어 기독교 신화들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캠벨의 관심은 위로부터 오는 계시의 빛에서 준엄한 하느님의 말씀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경험의 빛에서 인간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 경우 캠벨이 생각하는 인간 경험 역시 역사․사회․정치적이라기보다는 생물학적이고 심리학적인 경험 쪽에 더 가깝다. 캠벨은 그러한 경험들이 인간의 원초적인 종교적 심성의 형성에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따라서 신화에 바탕을 둔 종교의 요체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 같다.(264P)

캠벨이 발견한 종교적 깨달음의 요체란 인간과 자연, 온 우주를 관통하는 근원적 자아에 대한 깨달음이다. 근원적 자아 안에서 나와 너, 그리고 자연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면, 근원적 자아란 다름 아닌 나 자신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원 제목대로 “네가 바로 그것”이라는 깨달음이다.(265P)

신은 자신의 절대적인 자유 안에서 스스로를 계시하고 규정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현상세계의 사물이나 언어로는 신의 본질을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은 어떠한 인간적 가치나 도덕, 이상으로도 정의될 수 없는 신 자신, “나는 나일”뿐이라는 것이다.(268P)

하나님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역사 속에서 만난다. 따라서 유대 기독교에서 역사는 계시의 장소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273P)

유대인들은 자연의 신성화를 우상 숭배, 즉 신화라 하여 단호하게 거부했지만, 자신들의 민족사와 하느님을 뗄 수 없이 결부시켰다. 이들은 하느님의 뜻이 계시되는 장소로서 역사를 강조하는 대신 신화를 거부했다. 그러나 구원사 밖에서, 이스라엘의 신앙적 자기이해 밖에서 보았을 때 이들이 말하는 역사는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사실로서의 역사일 수 없고, 신앙에 의해 해석된 역사, 계시로서의 역사, 다시 말해 신화적인 역사이다. 성서적 종교에서 신화란 역사와 대척점에 놓이는 말이지만, 사실상 이들은 역사를 신화화했다. 유대인들은 신화와 대립된 것으로서 역사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역사 속에서 계시되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새로운 신화를 창조한 것이다.(274P)

인간은 신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 절대적 초월자를 만난다. 시간 안에서 사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역사의 이 엄청난 무게를 홀로, 또는 공동체로서 감당해야 한다.(275P)

캠벨은 기독교가 역사적 계시와 교회라는 사회 제도를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노정시키게 된 문제점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캠벨은 교회가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서 시작되었지만, 역사적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사회 제도로 정착했고, 결국에는 인간의 내적 본성을 신성과 중재하는 역할을 하기보다는 사회적, 정치적 실재로서 스스로를 위한 주장만을 하게 되었으며, 현대의 역사적, 과학적 지식으로부터 제기되는 공격에 대해서도 과거의 주장만을 시대착오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본연의 기능인 종교적 경험의 중재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276P)

그러나 무엇보다도 캠벨이 이 책에서 집요하게 비판하는 것은 신비를 전달해야 할 기독교 전통의 언어가 오로지 역사적으로 이해됨으로써 사실들에 대한 서술로 변질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역사적 계시를 강조함으로 인해 종교적 언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은유와 상징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신성과의 일치에 대한 감각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277P)

캠벨에 의하면 “신화의 역동적이고 은유적인 언어가 전달하는 경험, 내지는 깨달음이란 모든 개체적 존재의 내밀하고도 깊숙한 곳에 있는 내적인 불꽃이 결국은 만물의 근원이자 신으로서의 궁극적 존재와 하나라는 것이며, 종교적 수련의 중요한 과제는 내 안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는 것이다.”(277P)

캠벨에 의하면 무릇 종교란 이 내밀한 존재와의 일체감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며, 종교적 언어는 이러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은유적인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성서와 기독교 전통의 언어 역시 캠벨에 의하면 은유다.(277P)

은유는 종교적 언어로서 매우 적절하며, 무릇 종교적 언어란 본질적으로 은유적이다.(279P)

신화의 생명력은 그 상징들의 은유적 열정으로부터 나오며, 은유를 사실적이고 문자적으로 읽을 경우 단지 피상적인 의미 차원에 머무를 뿐이며, 은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은유의 상징은 단순히 지적 개념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서 초월의 현실성에 실제로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하며, 신비 그 자체를 지시해야 한다. 그리고 캠벨에 의하면 신비란, 바로 우리들 자신과 우리가 사는 세계의 존재 자체에 다름 아니다.(280P)

캠벨은 우리 자신 안에 신화적 코드가 고유하게 내장되어 있다고 한다.(281P)

그러나 캠벨의 해석에 의해 잃는 것도 분명히 있다. 캠벨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역사적 계시종교로서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 대한 강조점은 포기된다. 이러한 기독교의 강조점은 역사와 사회의 죄악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 개인의 죄에 대한 철저한 부정에서 나타난다.(283P)

죄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는 역사와 사회의 갈등과 모순을 드러내고, 인간 내면의 왜곡과 위선을 밝힌다. 죄에 대한 이러한 철저한 의식은 경직된 도덕주의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과 사회에 대해 관념적, 감상적 낙관주의에 빠지지 않고 현실적 이해를 갖게 한다. 죄에 대한 기독교적 감수성은 삶의 부정성, 역사의 갈등과 모순, 즉 고통 앞에서 가장 잘 발휘된다. 그리고 캠벨의 기독교 신화 해석에서 근본적으로 잃어버리는 것이 이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283P)

캠벨이 집요하게 지적하듯이 성서의 언어를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언어로 문자주의 안에 가두어서도 안 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성서의 언어가 탄생했던 당시의 역동적인 인간 경험의 세계, 그 안에서 분출되는 새로운 세계와 초월에 대한 전망은 나와 자연, 시계를 관통하는 일원적이고도 근본적인 신비에 대한 깨달음만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차원이 있다. 사실 캠벨이 시종일관 주장하는 ‘네가 그것이다’라는 원초적인 종교적 깨달음 역시 세련된 철학적 가르침에 머무르지 않고, 그가 추구하는 대로 원초적이고도 생생한 종교적 경험을 담아내려면, 종교적 언어의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284P)

캠벨의 도전과 문제 제기는 어쩌면 우리를 어려운 양자택일 앞에 세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밖의 초월인가, 아니면 내 안의 초월인가. 동일성과 일치의 종교인가, 아니면 신의 절대타자성과 복종의 종교인가. 그러나 정말로 종교 문제에서 선택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초월은 내 안이건 내 밖이건 그때그때 내가 발견하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던가. 때로 어디선가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에 겸허히 침묵하고 무릎을 꿇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내가 내 안에 저 깊숙한 곳에서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일과 무엇이 다른가. 살아 있는 종교 경험은 “이거 아니면 저거” 이라기보다는 “이것도, 저곳도”에 가깝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종교와 그 상징들이란 인간 경험의 심원하고도 불가해한 경지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경험의 무게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284-285P)



3. ‘내가 저자라면’

전체적 개요

벌써 조셉 캠벨의 5권째 책이다. 하지만 안타까운건 아무리 읽어도 큰 실체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사상은 너무 깊고 넓어 나 같은 범인(凡人)이 그를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동안에도 불쑥불쑥 솟아오르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사실유무를 떠나 그의 학문에 대한 무한한 노력과 열정 그리고 호기심에 다시한번 열렬한 박수를 드린다.

이 책의 결론은 바로 한마디로 압축된다. Tat tvam asi. “네가 바로 그것이다.” 캠벨은 “네가 바로 그것이다”란 내용을 쇼펜하우어의 말에서 따오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이 타인의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몸을 던져 타인을 구하는 행동, 그러한 즉각적인 반응과 행동을 “네가 그것(Tat tvam asi)" 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것은 형이상학적 깨달음이 섬광처럼 지나간 결과(10P)라고 한다. 캠벨은 쇼펜하우어의 말을 종교에까지 좀더 확대 적용시키고 있다. 많은 종교학자들이 종교를 은유 그대로 받아 들이지 못한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 종교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초월적 개념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캠벨이 이야기하는 종교의 근원은 바로 우리 내면이며 우리 내면을 찾아서 들어갈수록 소위 말하는 ‘신’을 만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즉, “네가 바로 그것이다”란 개념이다.(71P)

나는 이 개념을 이런 식으로 풀어보았다.

캠벨의 주장을 믿고 안 믿고는 나의 의지이다.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캠벨을 추종하고 따르는 것은 그들의 의지이다. 구본형사부님이 좋고 뛰어나며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그를 따르고 말고 하는 것은 나의 의지이다. 짝사랑을 하든 미워하든 그것은 그와 상관없는 오로지 나에 의해 결정되는 나만의 이야기인 것이다. 나의 의지, 나의 내면, 내 안의 움직임, 목소리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 나의 의지에 따라 조셉 캠벨을, 구본형사부님을 모실 수도 있고 배척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사회에서 말하는 인간관계, 육체적 만남의 틀을 초월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은 나의 의지, 나의 내면 안에 있는 것이다.

이 책의 구성은

이 책은 잘 알다시피 캠벨이 쓴 책이 아니다. 책 표지에는 조셉 캠벨이 지은이라고 되어 있지만 엄밀히 말해 이 책은 캠벨 생전의 강연, 인터뷰 내용을 모아서 엮은 기획도서로써 유진 케네디 박사가 캠벨의 여러 자료들을 모아 편집하여 엮은 책이자, 조셉 캠벨 재단이 1991년 설립이래 조셉 캠벨 전집을 편찬하기 위한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각 장마다 그 내용에 대하여 어떤 자료, 강연의 어느 부분에서 추출하였는지 그 출처를 밝히고 있다.

이 책의 구성은 크게 서문과 전체 뼈대가 되는 내용(1장-8장), 마무리(역자 해설, 조셉 캠벨에 대해서, 조셉 캠벨 재단에 대해서)로 되어 있다. 본문 중 1장에서 6장까지는 종교, 특히 기독교-유대교에 대하여 다루되 동양의 불교와 힌두교를 인용하여 동,서양의 사상을 비교하여 다루고 있다. 특히 종교의 근원인 성서에 대하여 창세기부터 현재까지 자세히 다루고 있는 편이며, 현재 종교가 왜 어긋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지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주장을 펼치고 있다. 7장과 8장은 부록의 개념이 강하다. 즉 7장은 강연 후 질문사항을 요약하여 정리한 장이며, 8장은 캠벨의 생전 유진 케네디 박사가 그와 인터뷰한 내용을 편집, 정리한 내용이다.

재미있는 것은 역자해설 부분이다. 역자인 박경미 교수는 정통한 기독교학 박사로 아마도 이 책을 번역하면서 많은 갈등과 고민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캠벨의 사상이 그녀가 배워왔던 내용과 달라도 너무 많이 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일까? 보통 일반서적의 역자 해설과 비교했을 때 꽤나 긴 분량인 25Page나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캠벨의 주장으로 인하여 잃게 되는 중요성, 가치까지도 자세히 언급한 것으로 보면 박경미 교수의 속앓이가 이만 저만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개인적인 생각에 독자를 위한다면 역자 해설 부분을 차라리 앞으로 옮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캠벨의 책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역자 해설이 전체적인 내용의 설명으로 상당히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단, 역자의 개인적 주장이 들어가는 부분은 다소 조절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는 독자들에게 책에 대한 선입견을 줄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떠오르는 생각들

○ 종교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왜 수많은 젊은이들이 ‘신’을 위해서 죽어야만 했을까?
→ 종교전쟁은 종교의 의미를 역사적 사실로, 민족적 관점으로만 해석하고 고찰함으로 인하여 발생한 민족 이기주의적 전쟁일 뿐이다. 한마디로 ‘신의 이름’을 거짓 타이틀로 내세운 민족 전쟁일 뿐이다.


○ 정말로 에덴동산이 있었고, 거기서 뱀이 아담과 이브에게 말을 걸었으며.....
→ 성서의 내용을 역사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하는 사람들. 문득 이 문구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에덴동산이 있었다? 그러면 그 위치가 어디일까? 물론 찾아서 밝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종교학자가 할 일일 것이다. 그래 여기까진 좋다. 다음. 뱀이 아담과 이브에게 말을 걸어? 어라, 이건 아주 우리 어렸을때 할머니가 얘기해준 ‘호랑이 담배 피는’ 액션, 시츄에이션과 동일하네. 흐흐. 재밌지 않은가? 은유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도 꼭 파고 들어가야 하는 사람들, 그래서 그들을 학자 또는 분석가라고 부르는가?

○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론
→ 그는 성서의 이야기들을 역사적 관점, 사실, 앞으로 발생할 일로만 보고 분석한 사람인가? 왜 그는 성서를 역사적 관점으로 보았고 왜 사람들은 그의 말에 주목한 것일까? 지금은? 지금의 그의 위치, 존재는? 1999년에 크게 대두된 그의 예언서. 그는 우리의 기억에서 점차 잊혀져 가고 있지만 아마도 수많은 포스트 노스트라다무스가 살아서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 이 새로운 삶으로의 여행-우리는 모두 이 여행을 해야 합니다-은 우리가 과거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주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낡은 시대의 종교가 아니라 사물들의 새 질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합니다.(242P)
→ 신화의 삶, 영혼의 삶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과거를 버리고(구태의연한 기존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향한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변화’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계속 우리 옆에서 변화하라고 외치고 있는 변화하는 변화체 그것인 것이다.

마무리

집앞 창문으로 보이는 큰 교회의 십자가는 매우 높은 곳에서 번쩍이고 있다. 이 지역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도록 등대처럼 환히 비쳐지고 있다. 이 상징은 무얼까. 캠벨이 얘기한 상징과 은유를 ‘제대로’ 포함한 것일까? 아니면, 단지 교회 안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 들이기 위한, 세상의 고난을 피해 도피처로 들어오라는 유혹의 손길일까? 하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이 도피처 또한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시작임을. 교회가 내부 안에 만들어 놓은 수많은 관계망이 거미줄처럼 얽혀져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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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쟁이
2008.04.28 18:10:09 *.52.236.185
마무리 부분...

의미심장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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