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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8일 11시 14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 조셉 켐벨(JOSEPH CAMPBELL)

< 신은 죽었다 >

망원경과 현미경에 의한 탐색으로 신들은 숨을 곳이 없어졌다.
한때 신들이 섬김을 받던, 그런 사회도 이제는 없다.
우리 사회의 기본조직은 종교적(또는 신적) 이기 보다는 경제적, 정치적 조직으로 변했다.
이렇게 되면서 인간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어떤 동인(動因)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어떻게 사는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조셉 켐벨은 「신화」를 통해서 이 해답을 찾는다.

그는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우연히 접하게 된 아메리카 인디언에 빠져들어 인디언 신화를 읽게 된다. 인디언 신화의 내용 중에 어릴 때 수녀님에게 들었던 창세, 사망과 부활, 승천, 처녀 수태 등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신화에 푹 빠져들게 된다. 그 이후 힌두교에도, 중세 아더왕 이야기에도 유사한 줄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평생을 신화학 연구에 바치게 된다.

1925년과 1927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였다. 1934 년부터 38년간 사라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에서 학생들에게 신화를 가르쳤다.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와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신의 가면(THE MASKS OF GOD)〉(전 4권)을 펴냈다. 프린스턴 대학 볼링겐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도 유명하며, <천의 얼굴올 가진 영웅>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신화 이미지> 등의 저서를 통해 왕성한 지적 연구 활동을 펼치다 1987년 세상을 떠났다.

저자는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라고 생각된다. 저자 이전에 신화학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르겠지만, “민담과 인류학에 나오는 해골에 생명을 불어넣은 사람”, 20세기 최고의 신화해설가로 불리워 지는 것으로 보거나, 신화 관련 베스트셀러를 저술하고 TV 대담프로를 통해 신화가 일반 대중에게 한층 가까이 다가 갈수 있도록 만든 것 등으로 신화학에 새로운 지평을 연 위대한 스승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과찬인가?

그는 신화를 공부하기 위한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 갔다. 그는 스스로를 잡학가(雜學家)라고 얘기 한다. 요즘은 학문 간의 통합 연구가 보편적인 트랜드가 되었지만 저자가 활동한 30-70년대에는 그런 경향이 일반적이지 않았을 듯싶다. 자신이 좋아하는 신화 연구를 위해 혼자서 뭔가를 이룩해야 한다면, 한 우물을 깊이 파고들어 박사학위를 취득해야 할지, 아니면 여러 분야에 걸친 다방면의 공부를 해야 할 지를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저자는 박사학위 취득도 마다하고 문화인류학, 철학, 역사, 예술, 종교 등 스스로 칭하는 ‘잡학’을 두루 공부하여 일반인들에게 신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부여한다.

그가 보여주는 특징 중 두드러지는 점은 박학다식함과 유연한 사고다. 그는 자신의 방대한 지적 자산을 바탕으로 신화를 종교학, 심리학, 역사학 등과의 연결을 통해 재조명한다. 그가 제시하는 다양한 사례와 그에 대한 해석들은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시간과 공간, 학문 간의 범주를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그의 뛰어난 상상력과 유연한 사고가 이 같은 사유를 가능하게 해 주는 것 같다. 유진 케네디는 켐벨을 이렇게 표현한다.“그의 학문 세계는 마치 성서에 나오는 기름단지 같다. 그가 아무리 책을 쓰고 강연을 하고 질문에 답을 해도 늘 새롭게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신화에 대한 열정과 신념 그리고 사랑도 그를 잘 표현하는 키워드 들이다. 그의 대담이나 강연내용에서는 자신이 신화를 공부하면서 체득한 진실을 인류에게 알리고자 하는 열정이 묻어난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는 기독교에서 역사적 사실로 해석되고 있는 성서의 내용을 신화로 해석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정리한 책이다. 이것은 그를 수십억 기독교인과 적대 관계에 놓이게 할 수 있는, 거대 종교에 대한 도전이고 반역일 수 있다. 그의 이런 주장에 대한 기독교계의 반응이 어떤지 자못 궁금한데, 어찌 보면 무모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이런 주장을 자신 있게 펼치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열정과 학자로서의 강한 신념을 느낀다. 또한 그것은 자신과 사회에 대한 사랑, 궁극적으로 인간과 우주에 대한 사랑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그는 변화(경영) 컨설턴트이다. 그가 이야기 하는 것은 결국 신화를 통한 개인과 사회의 변화의 필요성이다. 비신화화(非神話化)한 세계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이 왜 신화를 알아야 하는지, 어떻게 신화를 알아가야 할지, 결국 이를 통해서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어 나가야 할지를 그는 이야기 한다.

개인적으로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열 살 나이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 평생 그 분야를 공부하며 살았다는 점, 그의 표현대로 천복을 좇으며 한 평생을 살았으니 그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겠나? 더구나 그의 책에서 보여 지는 신화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열정은 80 고령이라고 보기에 참으로 놀랍다. 그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건 자기의 인생을 고집스럽게 자기식대로 살아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화를 사랑하면서 끈기와 집념으로 살아간 그의 인생에서 시대를 앞서서 살아간 영웅의 면모를 힐끗 엿 본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옮긴이의 말

“신화는 당신이 걸려 넘어지는 곳에 당신의 보물이 있음을 알려 줍니다.”[6]

“신화는 개념체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체계에서 옵니다. ..... 신화는 마음이 거처하는 곳, 경험이 있는 곳에서 생겨납니다...... 신화는 사실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신화는 사실들 너머 그 사실을 알려주는 무언가를 향하고 있습니다.”[8]

저자 서문

신화는 꿈의 본성에서 비롯된다. 꿈은 깨어있는 의식에 알려지지 않은 채 내면세계로부터 떠오르는 것이며, 이는 신화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삶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12]

1, 꿈으로서의 세계

C.G. 융은 이 인도의 예술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꿈은 영혼의 가장 비밀스러운 곳에 숨어 있는 작은 문이며, 이 문은 우주의 밤을 향해 열려 있다. 그 밤은 ‘자아-의식(ego-consciousness)'이 생겨나기 오래 전부터 정신(psyche)으로 존재했고, 또한 우리의 ‘자아-의식’이 얼마나 멀리 확장 되건 간에 정신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모든 ‘자아-의식’은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리하고 구별하며, 개별적인 것들만 알고, 자아(ego)에 관계될 수 있는 것들만 본다. 그것이 별들까지 멀리 있는 성운까지 미친다 해도, 자아-의식의 본질은 ‘한계’에 있다. 모든 의식은 분리한다.
하지만 꿈속에서 우리는 태초의 밤의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좀 더 보편적이고 진실하고 영원한자의 초상이 된다. 그곳에서 그는 여전히 전체이며, 그의 안에 전체가 있다. 자연과 구분할 수도 없으며 모든 자아를 벗어버린 상태이다.
꿈은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된 깊은 곳으로부터 생겨나며, 너무나도 유치하고 기괴하며 비도덕적이다. 꽃처럼 피어나는 그 솔직함과 진실함 앞에, 우리는 기만에 찬 우리의 삶에 대해 얼굴을 붉히게 된다.< C. G. 융 >[26]

C. G. 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에 무의식을 의인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집합적 인간존재로, 다시 말해 양성의 성격을 다 갖추고, 젊음과 노년, 탄생과 죽음을 넘나들며, 백만 년이나 이백만 년 동안의 인간의 경험을 고루 갖추고 있는, 불멸의 존재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그는 변화하는 현세의 모든 것들보다 더 고귀한 위치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에게 현재란 더도 덜도 아닌 예수보다 십만 년 전의어느 해[年]을 의미할 것이다. 그 존재는 오랜 옛날부터 꿈을 꾸는 자이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험으로 인해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훌륭한 예언자일 것이다. 그는 무한히 긴 세월 동안 개인의 삶, 가족의 삶, 부족의 삶, 국가의 삶을 계속 반복하여 살아 왔으며, 성장하고, 피어나고, 부식하는 삶의 리듬 감각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32]

“나는 어제이자, 오늘이며, 내일이다. 그리고 나는 두 번 태어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나는 신들을 창조하고 무덤의 식사를 주는, 신성하며 숨겨진 영혼이다. 나는 동쪽의 지배자이며 빛이 뿜어져 나오는 신성한 두 얼굴의 소유자이다. 나는 양육된 자들의 신이며, 어둠으로부터 생겨나 죽은 자가 살고 있는 집의 형태로 존재하는 신이다. 경배하라! 지구의 중심에 서 있는 성소의 군주를. 그가 바로 나이고, 내가 바로 그이다.”(『이집트 사자의 서』, 「낮이 다가오다」)[35]

그림38. <대좌에 앉은 여신의 출산>, 기원전 5750년경, 차탈 휘육
그림39. <신들의 어머니 키벨라>, 후기 로마
그림40. <신들의 여왕 인드라니>, 750 ~ 785년

점토로 빚은 이 거대한 여신상(그림38.)은 두 마리의 범이 받친 상태에서 여신이 아이를 낳는 장면이다. 이 작품은 ‘동물들의 여주인’으로서의 여신 개념을 보여주는 초기 형태로 사원의 곡물 상자 안에서 발견되었다. 아마 공감 주술을 통해 풍작을 촉진시키려고 그 안에 넣어두었을 것이다.[61]

이른 시기의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는 이 신석기 유적지에서는 아시아 대모신의 다른 형태들이 유난히 많이 발견되었다. 그림 38을 그 예로 들 수 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6,000년 뒤 로마에서도 이것과 완전히 동일한 형태가 나타났고, 더 이후에 인도에서도 나타났다는 점이다(그림 39, 40)[61~63]

2, 우주 질서에 대한 생각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문화의 신화와 의례들에서 서로 비슷한 구조나 종종 동일한 모티프들이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여러 방식들 중 한 가지가 바로 심리학적 방법이다. 제임스 G.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 나오는 유명한 말을 인용해보자면,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서로 다른 날, 서로 다른 하늘 아래 사는 인간 정신의 유사한 구조에 비슷하게 작동하는 유사한 원인들의 결과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그러므로 두 번째로 제기되는 접근 방식은 그렇게 동일시될 수 있는 시대, 동일시될 수 있는 장소들에서 획기적인 문화적 전환이 일어났으며, 그 영향이 지구의 사방으로 전파되었고 이와 더불어 신화적 체계나 모티프와 관련된 별자리의 배열도 전해졌으리라는 견해이다.[95]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널리 퍼진 이러한 문화적 전환은 대략 기원전 4000년대 중반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원하였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만나는 하류 지역에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하늘의 관찰을 통해 생겨난 ‘우주적 질서와 법칙’이라는 관념에 따라 왕들이 통치하는 도시국가들이 생겨난 것이다. 우주의 새로운 이미지를 상징하는 높이 솟은 사원들은 그 당시에 외관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것이 인류 문명사에서 첫 번째 기념비적 건축물들이 되었다. 그리고 ‘하늘을 관찰하는’ 고도로 전문화된 새로운 유형의 사제직이 생겨나, 기원전 3200년경에 문자기록을 하고 수학적 기수법(60진법과 십진법)과 정확한 천문학적 관찰 등 진정한 과학의 시작을 연 것도 이런 성소의 경내(境內)에서 이루어졌다.[96]

이렇게 천상에 의거한 정치적 사회적 질서를 천상에 의거하여 변모시킨다는 관념(174쪽 이후를 참조)은 기원전 2850년경 첫 번째 왕조를 설립했던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기원전 2500년경에는 크레타와 인도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는 중국의 상(商)왕조에서, 그리고 기원전 1200년경에는 뜻밖에도 중남미의 올메카(Olmec)와 차빈(Chavin) 문화지구에서 출현하였다.[98]

‘지구라트(ziggurat)'(그림73)라는 단어는 메소포타미아의 탑처럼 쌓아올린 건축물을 지칭하는 말로, ‘크다, 높다’는 뜻의 바빌론어 동사 ‘자가루(zagaru)'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런 탑들은 성서의 바벨탑이야기(「창세기」11:1-9)에서처럼 천국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신과 마음을 숭고한 기도의 상태에 이르도록 고양시키고 신이 지상으로 강림할 수 있도록 사다리를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지어진 것이다.[106]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알려진 인공산은 기원전 800년 경에 만들어졌다. 이 산은 모든 것이 신비롭고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의례단지에 우뚝 솟아 있는 성소로서, 주위가 늪으로 둘러싸인 작은 모래섬 위에 있다. 이 섬은 지름이 거의 1,189미터 가까이 되고 길이가 0.8 ~ 1.2 킬로미터 정도이며, 베라크루즈와 타바스코의 경계가 되는 토날라 강에서 상류로 1.45킬로미터쯤 가면 높은 강우량과 느리게 흐르는 강, 그리고 광대한 늪지대를 가진 열대림 지역에 있다. 왜 성소를 짓기 위한 장소로 그런 지역을 선택해야만 했을까? 그런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미 고도로 발전한 그들의 조각술과 건축기술, 종교적 관념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일까? 그리고 미개발된 이웃 지역의 더 원시적인 사람들과는 어떤 관계를 가졌을까? 이런 질문들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132]

“너는 지금부터 ‘영광의 얼굴’인 키르티무카‘Kirttimukha'로 불려질 것이며, 영원히 나의 문 앞에 살게 될 것이다. 너를 경배하는 데 태만한 자는 누구든 절대로 나의 은총을 받지 못하리라.”[152]

많은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동일한 신화적 모티프들(개별적인 모티프뿐만 아니라 모티프들의 거대한 복합체들, 게다가 동일한 종교적 실천들까지)이 나타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사용한 ‘수렴(convergence)'이라는 인류학 용어도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학문은 원인을 찾아내고 확인하고자 한다. ‘수렴’이라는 용어는 어떤 원인도 밝혀주지 못하고 그 결과만 지칭할 뿐이다. 그렇다면 ‘수렴’의 원인은 무엇인가? 어떤 경우에는 인류가 공통적으로 지닌 심리학적 원리들이 그 원인이 된다. 또는 전파에 의해서 맺어진 역사적 연관성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보기에 중국의 도철문양, 인도의 ‘영광의 얼굴’, 로마의 메두사, 중앙아메리카의 재규어마스크가 보여주는 유사성은 ‘전파’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 같다.
멕시코의 올메카 문화에 상응하는 남아메리카의 문화는 페루의 신비한 차빈 문화로, 대략 기원전 800 ~ 400년경 역시 매우 이른 시기에 완전한 형태로 갑자기 출현하였다.[155]

100 브라흐마년이라는 브라흐마의 일생에서, 신의 눈은 날마다 1,000번을 천천히 떴다 감긴다. 눈을 뜨면 우주가 모습을 드러내고, 눈을 감으면 우주가 점점 자취를 감춘다. 드러나고, 지속되고, 점점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다.[175]

브라흐마의 100년 = 브라흐마의 한 생애 = 311조 40억년 (인간의 연수)

각각의 브라흐마의 한 생애가 끝날 무렵, 브라흐마의 모든 것들은 우주의 꿈을 꾸는 자의 몸속으로 용해되어 들어간다. 그 꿈꾸는 자는 다시 브라흐마의 한 생애만큼의 시간 동안 꿈꾸지 않고 깊은 잠에 빠진다. 그리고 그의 몸속에서 다시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연꽃의 꿈이 다시 펼쳐지고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된다. 게다가 무한한 공간에서 무수히 많은 연꽃 우주들이 무한히 넓은 연꽃에서처럼 어디서나 움트고 꽃피우고 시든다. 시간의 무한성 속에서 과거에 시작도 없었듯이 피고 지는 브라흐마의 세계는 끝이 없다.[178]

중앙아메리카에서도 그 문명의 주된 사고방식을 끊임없이 천문학에 적용한 것은 분명히 하늘과 인간의 일치라는 신화적 관념이었다. 그리고 코디세 드레스데에 기록된 마야의 천문학표와 한대(漢代) 천문학의 오류가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183]

삶이란 죽음의 얼굴 위에 덮어쓴 가면일 뿐이다. 그렇다면 죽음도 또 다른 가면일 뿐인가?[199]

중국(中國)은 그 자체로 ‘중심에 있는 나라’이며 우주의 조정자이고, 시공간이 순환하는 세계 속에서 불과 물, 쇠와 나무, 운동과 정지, 하늘과 땅의 모든 대립쌍들이 모여드는 중심축에 있다.[205]

아즈텍과 칼데아와 중세 기독교 상징은 완전한 등가성을 가지며, 재림하는 그리스도는 우주적 매트릭스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점에서 해석하자면, 복음서에서의 처녀인 인간 어머니에게서 예수가 태어난 것은 - 치말만에게서 퀘찰코아틀이 태어나듯 - 일종의 전조(前兆)이며, 인간의 역사에 내딛은 자비로운 ‘한 걸음’이었다. 시공간의 몸에서 태어나는 재림에 있어서의 똑같은 신비는 - 믹틀라치우아틀에게서 퀘찰코아틀이 부활하듯이 - 대우주적 규모로 현시한다.[223]

그러므로 모든 기록이 말하고 있듯, 사라진 퀘찰코아틀은 돌아올 것이다. 어느 날, 빛나는 동쪽에서 그는 깃털달린 아름다운 얼굴의 시종을 데리고, 자신의 왕국을 다시 찾고, 백성들을 다시 보살피기 위해 나타날 것이다. 그의 영광된 궁전도시 톨란의 소멸을 가져온 변경할 수 없는 시간의 법칙은 필연적으로 톨란의 재건도 가져올 것이다.[224]

기독교적 사고에서, 에덴동산의 두 번째 나무의 대응물은 십자가이다(그림 182). 그리고 십자가 아래 마리아의 팔에 안겨 있는 버려진 그리스도의 육신은, 불교에서 완전한 깨달음의 나무 아래 있던 비어있는 자리에 완벽하게 겹친다. 피에타에서 어머니의 슬픔은 티치아노의 그림에서 아이를 갈구하던 이브의 마지막 종결점이 된다.[242]

어쨌건 초월성의 이런 모든 가르침들의 극한까지(욕망과 두려움을 넘어서 붓다와 하느님 아버지 속죄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의 가르침까지) 멈추지 않고 따라올 수 있다면, 분명 모든 대립하는 것들을 떨쳐버리게 되며, 동시에 이원성과 비이원성, 무아와 자아, 천상의 진실과 지상의 진실 또한 떨치게 된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243]

3. 연꽃과 장미

샤크티라는 이 중요한 산스크리트 단어는 ‘힘, 역량, 에너지, 재능, 가능성’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여기서는 동양에서 모든 종교적 사고의 바탕이 되는 특정한 의미로 쓰였다. 즉, 그의 배우자로 육화된 남성 신의 에너지와 활력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샤크티는 일반적으로 여성의 영적인 힘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아름다움의 광채나(그림57 참조), 남성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여성적인 힘의 기본적인 단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씨앗을 열매로 만들고 감싸고 보호하고 생산하는 자궁의 힘 속에 작동한다. 심리학적 측면에서도 그것은 한 남자로 하여금 그의 감각들을 일깨우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한다(그림419 참조). 더 나아가 그것은 자기 자신을 실현시키거나 파괴하도록(그것은 당황하게 만들거나 파괴하는 힘이기도 하기에) 유혹하는 여성의 힘이다.[266]

두 손을 한데 모으는 것은 영적 세계와 매트릭스, 또는 물질적 세계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나타낸다.[270]

그러자 붓다가 그에게 말했다. “설법하라. 불자여. 여래가 허락하는도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하지만 그때 다르마카야는 거기서 붓다가 되기를 거절하였다. 대신 그는 자신이 성취한 불국토에, 자기 자신과 모든 존재를 위해 완전한 깨달음을 얻게 되면 그 자신의 것이 되리라고 기대했던 그 불국토에, 축복 받은 자에게 불국토의 훌륭한 점들이라고 묘사했던, 공전의 조건들이 실현될 것을 요구했다.[275]

4. 내면의 빛의 변형

C.G. 융이 D.T. 스즈키의 『선불교 입문 Introduction to Zen Buddhism』의 서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적인 ‘치료’라는 문제가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동양의 가장 모험적인 지성인들을 사로잡아왔으며, 이런 측면에 있어서 그 방법과 철학적 원칙들은 동일선상에 있는 모든 서양의 시도들을 무색케 할 정도로 발전해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335]

사람들은 각기 여러 신들을 섬기면서 “이 신을 숭배하라. 저 신을 숭배하라.”고 한다. 그러나 모두 하나의 창조자로부터 나온 창조물일 뿐이며, 그 자신이 모든 신이다..... 자아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삼아 숭배하라. 그처럼 자아를 가장 소중히 숭배하면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절대로 파멸하지 않을 것이다.<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335]

요가에 관한 가장 기본이 되는 글은 『요가 수트라 Yoga Sutra』이다. 이것은 파탄잘리(Patanjali, 'pata'는 ‘떨어지다’의 뜻이고, ‘anjali’는 ‘합장한 손’이라는 뜻이다.)라고 하는 고대의 성자가 썼다고 하는데, 전설에서 그는 파니니(Panini)라는 문법학자가 기도를 하려고 막 그의 두 손바닥을 모았을 때 작은 뱀의 모습을 하고 천상에서 그의 두 손으로 떨어졌다고 한다.[338]

우리는 결과적으로 ‘a는 x가 아니고, x이다.’라는 즉 a (not =) = x(a는 일시적인 국면에서는 x와 다르지만, 그 불멸의 국면에서는 x와 같다.)라는 불합리한 공식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신비로운 비밀에 이르는 단서가 된다..... 요가수행자는 자연현상의 전체를 관통하고 형태, 이름, 관계까지, 그 모든 것을 (뱀이 허물을 벗듯이) 벗어던진다. 그리고 모든 것을 관통하며 빛나는 분화되지 않은 의식만을 자신의 명상 속에 남겨둔다.
예컨대, 주변에 있는 아무 사물이나 집어 들어보자. 마음속으로 그 둘레에 원을 그려서 세계로부터 격리시키자. 그 용도도 잊고 그 이름도 잊고 그것이 무엇으로 또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부분 부분을 뭐라고 부르는지도 잊자.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만 알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단순히 그것을 바라보자. 그랬을 때,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막대, 돌, 고양이, 새, 그 무엇이든 간에 이런 방식으로 모든 개념에서 분리된다면 그것은 특정한 ‘의미’를 갖지 않는 경이로 비춰질 것이며, 그 자체로 처음이자 끝인 것, 즉 마치 보편자 ‘여래’처럼 비춰질 것이다. 붓다는 여래 ‘타따가타’라고 불려지며 “만물이 부처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명상하는 동안, 우리는 자신의 순수 상태로 되던져진다. 주체가 객체를 향하듯, 그러면 각자의 신비의 국면들이 “도래하리라.”[367]

파탄잘리의 고전 요가 안내서의 첫 번째 경구는 책 전체를 향한 열쇠를 제공해준다.
요가는 임의대로 움직이는, 마음이라는 것의 활동을
의도적으로 멈추는 것에 있다.[374]

요가의 사고방식은 바람을 가라앉히고 물을 다시 평온한 상태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바람을 잠재울 것인가 하는 것이 요가의 첫 번째 과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엄밀히 심리학적인 문제로서, 주로 우리 정신의 관심을 표면에서 내면을 향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 번째 과제가 생겨난다. 즉, 정신의 바람에 의해 흩어져 삶의 수면에서 노닐고 있는 사물의 표면으로 정신을 되돌리는 것이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과제는 이 변화하는 사물들의 즐거움과 자기 내면에 고정된 중심을 유지하는 것이다.[376]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현세의 화신으로 간주된다.[385]

요가의 목적은 이 뱀을 깨워서 머리를 들게 만들고 척추의 섬세한 신경이나 통로를 거쳐 머리의 왕관에 있는 이른바 ‘천 개의 꽃잎이 달린 연꽃’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394]

그리고 우리는 U로 왔다. U는 ‘꿈 의식’의 지평과 상태를 나타낸다고 한다. 여기서는 주관과 객관이 서로 다르게 분리되어 나타나긴 하지만 그것들은 실상 하나이고 동일하다. 꿈꾸는 자는 꿈 때문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채로 놀라기도 하고 위협받기도 한다. 심지어는 꿈꾸는 동안 스스로 꿈을 창조하기도 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한 가지 주관의 두 가지 국면이 숨바꼭질을 한다. 하나는 창조적 행위 속에서, 다른 것은 반-무지의 상태에서.[427]

신화는 사실 사회를 움직이고 형성하는 공적인 꿈들이다. 역으로 한 삶의 꿈들은 그 자신을 움직이고 형성하고 있는 사적인 신들과 반(反)신들과 수호신의 힘으로 이루어진 작은 신화이다. 이것은 한 사람의 삶을 무의식적으로 질서지우는 공포, 욕망, 목표와 가치들이 계시되는 것이다.[428]

A가 깨어있는 의식, 미묘하지 못한 사물들, 형성된 것들(과거)과 관련되고, U가 꿈 의식, 섬세한 사물들, 형성되고 있는 것들(현재)과 관련된다면, M은 꿈꾸지 않는 깊은 잠과 관련된다. 여기서 우리는 의식을 ‘잃고’, (인도의 텍스트에 묘사된 것에 따르면) 정신은 어둠 속에서 잃어버린 순전한 의식의 ‘분화되지 않은 덩어리, 또는 연속체’이다. 깨어있을 때는 단지 무엇이 이루어 졌는 지만 지각하고, 꿈속에서는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만 지각하던 것이, 꿈 없는 깊은 잠 속에서는 모든 구속에서 떨어져 나와 원초적이고 분화되지 않고 특화되지 않은 카오스와 잠재성의 상태로 돌아간다.[428]

이것이 AUM의 네 번째 원소와 관련된 것이다. 즉, 소리 나는 음절의 앞과 뒤와 안과 주변에 있는 침묵이다. 말은 낮의 세계의 것이건 꿈속의 것이건 사물의 이름과 형상 관계들만을 지칭할 수 있을 뿐이므로, 침묵은 고요하다.[429]

그렇다면 AUM이라는 소리는 “두 가지 사물이 부딪쳐서 내는 어떤 소리도 아니며”, 늘 그랬듯이 침묵 속에서 떠다니고, 창조의 씨앗소리로서 쿤달리니가 올라와 심장의 단계에 이를 때 들린다. 거기에는 대자아가 살고 있으며 문은 공(空)을 향해 열려 있다고 한다.[429]

꿈을 꾸준히 잘 인식할 수 있는 요가수행자는 꿈의 변형을 훈련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말하자면 꿈의 상태에서, 그는 자신의 신체를 새, 호랑이, 사자, 브라흐만, 왕, 집, 바위, 숲 또는 그가 좋아하는 어떤 것으로라도 변신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 수련이 안정적으로 잘 이루어지면, 그때는 자신을 다양한 형상의 붓다의 몸으로 변신해야 한다.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크거나 작거나 그 밖의 많은 모습으로, 또한 그는 그가 꿈속에서 보는 사물들을 다른 사물로 바꾸어야 한다. 예컨대 어떤 동물을 사람으로, 물을 불로, 땅을 허공으로, 하나를 여러 개로, 여러 개를 하나로 바꾸는 등등. 그런 다음에 요가수행자는 불국토로의 여행을 수련해야 한다.[446]

신비로운 『티베트 사자의 서』[바르도 퇴돌(Bardo Thodol - 사후의 지평(바르도)에서 듣는 것(퇴돌)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책]는 그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성소들과 고대의 밀교적 가르침이 주는 보고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기록일 것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그것은 환생하는 영혼이 7주, 즉 49일 동안 죽음과 환생 사이에서 경험하는 시련에 대한 설명이다. 융의 견해에 따르자면, 이 책은 “대승불교에 관심 있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자 하는 일반인에게도 특별한 매력을 가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인간 정신의 비밀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융은 이렇게 덧붙인다. “『바르도 퇴돌』초판이 나온 이래 이 책은 언제까지나 내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이 책에서 새로운 생각과 발견을 위한 많은 영감을 얻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근본적 통찰력을 얻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460]

“가장 행복한 사람들, 가장 좋은 곳으로 가게 되는 사람들은 평범한 시민으로서 선행을, 이른바 자기 절제와 정직을 닦은 이들이라고 생각하네. 그것은 철학이나 지성의 도움 없이, 습관과 훈련으로 생기는 것이지.”
“어떻게 그들이 가장 행복한 이들입니까?”
“그들은 아마도 사회적이고 절도 있는 꿀벌들이나 말벌들, 개미들과 같은 생물들로 태어나거나, 심지어는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 훌륭한 시민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네.”[463]

『바르도 퇴돌』의 주요한 관념은 바로 죽음의 순간에 내재하는 밝은 빛을 볼 수 있고, 요가의 종국적 경험은 우리 각자가 이르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있다는 점이다.[463]

프로이트는 형이상학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신비의 영역 안으로는 파고들지 않았다.[484]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이론은 사실상 무의식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 말고는 어떤 결론에도 이를 수 없다. 더 높은 차원으로 추적해 들어가는 문이 닫혀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는 무의식은 ‘무의식에 불과한 것’이다.[486]

5. 희생

「누가복음」(17:33)에서 말하듯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목숨을 버리려는 사람은 보존할 것이다.”[496]

『황금가지』에서 프레이저는 종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나는 종교를 자연의 운행이나 사람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조정한다고 믿어지는, 초인간적 힘에 대한 회유와 위무로 이해한다. 이렇게 정의할 때, 종교는 이론과 실천의 두 가지 요소, 곧 인간보다 우월한 힘에 대한 믿음과 그 힘을 달래거나 기쁘게 하려는 시도로 구성된다.[511]

『황금가지』의 더 앞부분에 나타난 관점을 고려한다면, 이런 이분법에는 제 3의 층위가 덧붙여져야 한다. 즉, 신비주의자나 시인의 층위로서, 신이나 인간을 궁극적 경계로 간주하지 않고 법신(法身)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의 범주를 확장하려고 노력하면서, 존재의 경이에 대한 경외감으로만 자기-변형이라는 어려운 과업에 몰두하는 자들의 층위이다.[511]

하나의 항목 아래 (프레이저가 정의한 바) ‘종교적인 것 the religious’과 (나의 정의대로) ‘신비적인 것 the mystical'인 것을 다 모은다고 해보자. 그러면 이 둘은 언제나 공통되는 여러 가지 상징들을 공유해왔음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상징들은 확연히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읽혀진다.[514]

그들은 의례가 진행되는 동안 행동이나 말에 있어서 그에 적합한 경건함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의무적으로라도 종교적 의식에 더 무게를 두었어야 하는 사제들도 기도문을 계속해서 외웠던 우두머리 사제 한 명을 제외하고는, 그런 일에 익숙해서인지 아니면 그런 제도의 효율성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인지, 그 종교적 의식에 별로 집중하지 않았다.[530]

그리고 특히, 이 제도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를 묻는 질문에 ‘이것은 매우 오래된 관습이며, 그들의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은 강림하여 희생물로 배를 채우고, 그 보답으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530]

이 미혹된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향연의 음식으로 인육을 신에게 바치는 대신, 그처럼 무시무시한 살해의 공포를 다른 동물로 대체하는 법을 배웠으면 싶었다.[531]

쿡 선장이 의례에 참석한 사람들에게서 목격했듯이, 종교적 경외감은 고사하고 경건함이나 진지한 집중도 없었다는 점에 특별히 관심의 초점을 맞춰보자..... 이것은 영적인 존재의 현현에 대한 어떤 즉각적인 감각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 전해져 내려온 익숙하고 상투적인 형식을 보여주는 것 같다.[536]

“지구상의 수천 마일에 걸쳐 나타난 이 명백한 상호 관계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지만 언젠가는 설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설명이 되건 안 되건 어마어마한 거리를 가로지르며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을 거쳐 그토록 확실하고 부인할 수 없는 문화적 연속성의 증거들이 실제로 존재하며, 그것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사진으로 남길 수 있고, 고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어쨌거나 신화를 연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다행인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위대한 연속체로서의 신화를 묘사하고 논의할 때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공통적인 무형의 유물에 대한 어떤 인식도 주장하거나 확인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551]

위대한 어머니이자 대지의 여신이었던 키벨레에게 가장 사랑 받았으며, 도살당하고 부활한 프리기아의 신 아티스에 대한 고대 전설을 보면 이 젊은 신은 멧돼지에 받혀 살해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판본에서는 소나무 아래에서 스스로를 거세하다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죽었다고도 한다.
프레이저의 논증에 따르자면, 이 둘은 결국 같은 것이다. 더 나아가 어느 쪽이든지, 그런 신화적 죽음은 부활의 전조가 된다. 즉, 육체적 죽음 뒤에 오는 생명의 부활이라는 일반적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더 적절하게는 정신적 자기박탈의 행위를 통해 불멸에 눈뜨게 된다는 밀교적 의미에서 해석이 가능한 이미지의 상징성이다. 그리고 여기서 후자는 눈, 즉 호로스의 눈(그림390)으로 상징된다. 그 눈에 의해 죽으리라고 생각된 사람이 자기 자신과 모두에게, 사실은 그 자체로, 그리고 그의 아들에게 있어서 영원히 살아 있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교훈의 근거를 제공해준 이는 (결국 호로스와 오시리스 둘 다와 형이상학적으로 동질적이며, 그래서 일체였던) 검은 멧돼지 세트였다.[568]

그러므로 이런 이원성의 통일에 대한 지식이 한 문화의 예술과 예술가들에게 지식을 주고 영감을 주는 곳이라면 어디서나(인도에서 창조적인 탄트리즘의 시기 동안 특히 그랬던 것처럼) 가장 단순한 민담의 테마라도 확대되고 화려해지며, 놀랍게도 변형된다.[569]

6. 깨어남

붓다의 마지막 식사에 관한 전설은 초기 팔리어 경전인 『대반열반경』에서 전해졌다. 이 경전은 대략 기원전 80년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전설에 관해서는 어쨌거나 이 경전에 나온 것처럼 (특색이 완전히 다르긴 하지만) 최후의 만찬에 관한 복음서의 기록과 공통되는 전승이 뚜렷하게 암시되어 있다. 유다의 역할을 하는 춘다. 베드로 역할의 아난다 Ananda, 그리고 자발적인 희생양으로서 붓다까지.[579]

붓다는 서른다섯살의 나이로 자신의 마음속에서 욕망과 증오와 망상을 완전히 잠재웠고, 여든의 나이로(그는 45년 동안 고통과, 고통의 유래와 사라짐, 그리고 고통을 사라지도록 이끄는 방법을 깨우쳐주는 가르침을 펼쳤다.) 불씨가 꺼져 가듯이 세상을 떠났다.[582]

쇼펜하우어는 이 광대한 우주 전체, 이 경이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조건지어진 현상의 다양성’에 관한 이미지를 제시한다. 즉, 그 이미지는 “하나의 존재가 꾸는 광대한 꿈으로서, 그 꿈속의 등장 인물들도 모두 꿈을 꾸고 있는, 그리하여 만물이 맞물려 있고 다른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는”이미지이다.[582]

우리의 삶-꿈의 세계, 그 경계를 이루는 범주들이 초월될 때, 만물이 멸절되고 모든 논쟁이 멸절될 때, 그곳에는 더 이상 논쟁을 위한 장이나 “죽느냐 사느냐”하는 햄릿의 질문은 남아있지 않게 된다.[588]

오늘날 우리가 꾸고 있고, 그것이 우리를 꿈꾸는, 그 꿈은 무엇인가? 어떤 르네상스적 깨어남이 티치아노의 붓과 셰익스피어의 거침없는 펜에 영감을 불어넣고, 갈릴레오와 뉴턴과 달나라를 향한 우주비행사들의 비행을 가능케 했는가?[591]

지구여, 그대는 하늘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말해다오. 무얼 하고 있는지, 고요한 지구여.[592]



3. 내가 저자라면

「신화의 힘」, 「신화의 세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 「네가 바로 그것이다」, 「신화의 이미지」까지 조셉 켐벨의 책을 다섯 권째 접한다. 이전의 책들이 신화에 관한 이론서라면, 「신화의 이미지」는 그림(서화, 조각, 건축물 등)을 통해 신화를 소개하고 이해시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책의 전체적인 구성을 보면, 1부(꿈으로서의 세계)에서는 꿈의 모습을 통해서 신화의 세계로 들어간다. 2부(우주 질서에 대한 생각)에서는 세계산, 달력 등에서 나타나는 고대 문명의 상징들을 통해 신화를 설명하고, 3부(연꽃과 장미)에서는 연꽃으로 표현되는 동양과 장미로 표현되는 서양의 신화적 차이점을 비교 설명해 간다. 4부(내면의 빛의 여행)에서는 요가를 통하여 우리 내면의 빛이 형성되고, 변형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5부(희생)에서는 자아를 뛰어넘는 것으로서의 희생을 살펴보고, 6부(깨어남)에서는 꿈으로서의 신화, 삶으로서의 신화를 통해 진정한 깨어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캠벨은 이 책을 구성하면서“그림 자체가 지닌 특성에 따라 배열하여 독자들이 언제라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 페이지부터 읽어나갈 수 있게 하고자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전체적인 책의 구성도 그림을 어떻게 감상하고 이해할 것이냐에 중점이 두어졌다. 따라서 책의 구성적인 면을 평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이 책은 다양한 그림의 배열과 그에 대한 해석을 통해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신화의 공통된 본질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획되었고, 책을 읽어가면서 몇 번인가 강하게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아주 잘 만들어진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책을 읽으며 본인이 저자와 같이 공감한 경험을 소개하면, 터키 남부 아나톨리아 평원의 신석기시대 유적지에서 발견된 “여신의 출산”(기원전 5750년) 모습이, 6,000년 뒤 로마에서 또 서기 750년 경 인도에서도 나타났다는 점이다. 어떻게 수 천년의 시차를 두고 이런 유사한 형태의 모습들이 나타날 수 있을까? 또 한가지는 기원전 800년 경 만들어진 멕시코의 올메카 유적들이다. 왜 그렇게 외딴 곳에 그런 성소를 만들었는지, 그 곳에선 어떤 의식들이 행해졌는지, 그것이 제공해주는 신화는 무엇인지? 등 캠벨이 궁금해 하던 여러 의문점에 대해서 강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게재된 사진들 중에 선명도가 떨어져서 알아보기 힘든 경우가 많았고, 화살표로 구체적인 내용을 지적(설명)하는 사진들이 일부 있었지만 좀 더 많은 부분에서 그런 설명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한 저자의 책을 다섯권 쯤 읽으면 통상 그 저자의 사상에 많이 익숙해지고, 내용을 받아들이기도 그만큼 수월해지기 마련인데, 「신화의 이미지」의 내용을 이해하기는 그리 만만치 않다. 번역자가 서두에 밝혔듯이, “캠벨은 끔찍하리만큼 박학다식하고, 두려우리만치 깊었다.”는 말로 그 내용의 심오함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번역자의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미숙한 번역의 문제는 곳곳에서 독자를 괴롭히고, 결국 이 책의 이해도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번역서의 경우 역자의 자질과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신화의 이미지」는 한번 읽고 나서 책장에 꼽아둘, 그런 책은 아닌 것 같다. 항상 곁에 두고 시간 날 때마다 들춰보면서, 아름다운 그림들을 감상하고 그 설명들을 읽다보면, 지속적으로 독자에게 영감과 상상력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그런 유형의 책이란 생각이 든다.
바로 이런 독서를 생각하고 조셉 캠벨은 이 책을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C. G. 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에 무의식을 의인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집합적 인간존재로, 다시 말해 양성의 성격을 다 갖추고, 젊음과 노년, 탄생과 죽음을 넘나들며, 백만 년이나 이백만 년 동안의 인간의 경험을 고루 갖추고 있는, 불멸의 존재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그는 변화하는 현세의 모든 것들보다 더 고귀한 위치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에게 현재란 더도 덜도 아닌 예수보다 십만 년 전의어느 해[年]을 의미할 것이다. 그 존재는 오랜 옛날부터 꿈을 꾸는 자이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험으로 인해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훌륭한 예언자일 것이다. 그는 무한히 긴 세월 동안 개인의 삶, 가족의 삶, 부족의 삶, 국가의 삶을 계속 반복하여 살아 왔으며, 성장하고, 피어나고, 부식하는 삶의 리듬 감각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32]

그러므로 모든 기록이 말하고 있듯, 사라진 퀘찰코아틀은 돌아올 것이다. 어느 날, 빛나는 동쪽에서 그는 깃털달린 아름다운 얼굴의 시종을 데리고, 자신의 왕국을 다시 찾고, 백성들을 다시 보살피기 위해 나타날 것이다. 그의 영광된 궁전도시 톨란의 소멸을 가져온 변경할 수 없는 시간의 법칙은 필연적으로 톨란의 재건도 가져올 것이다.[224]

두 손을 한데 모으는 것은 영적 세계와 매트릭스, 또는 물질적 세계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나타낸다.[270]

신화는 사실 사회를 움직이고 형성하는 공적인 꿈들이다. 역으로 한 삶의 꿈들은 그 자신을 움직이고 형성하고 있는 사적인 신들과 반(反)신들과 수호신의 힘으로 이루어진 작은 신화이다. 이것은 한 사람의 삶을 무의식적으로 질서지우는 공포, 욕망, 목표와 가치들이 계시되는 것이다.[428]

쿡 선장이 의례에 참석한 사람들에게서 목격했듯이, 종교적 경외감은 고사하고 경건함이나 진지한 집중도 없었다는 점에 특별히 관심의 초점을 맞춰보자..... 이것은 영적인 존재의 현현에 대한 어떤 즉각적인 감각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 전해져 내려온 익숙하고 상투적인 형식을 보여주는 것 같다.[536]

오늘날 우리가 꾸고 있고, 그것이 우리를 꿈꾸는, 그 꿈은 무엇인가? 어떤 르네상스적 깨어남이 티치아노의 붓과 셰익스피어의 거침없는 펜에 영감을 불어넣고, 갈릴레오와 뉴턴과 달나라를 향한 우주비행사들의 비행을 가능케 했는가?[591]

지구여, 그대는 하늘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말해다오. 무얼 하고 있는지, 고요한 지구여.[592]
IP *.97.37.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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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희
2008.04.28 22:06:23 *.41.62.236

드뎌 캠벨을 마치셨네요. 축하 드려요. 주말마다 오르내시기도 힘드셨을텐데. 님의 글이 올라오는 것이 제일 기다려지고 궁금해지고,
그렇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 드리는 것은 영화번개때 찬맥주 내시라고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진정코, 정녕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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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04.29 15:15:36 *.97.37.242
아이고 무서버라!

지희님 말은 찬맥주 내지 않은면 진정코, 정녕코, 결단코~~~
어떤 상황이 벌어질 지 책임지지 못한다는 말씀? ㅎㅎㅎ

자~알 알겠습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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