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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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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8일 11시 40분 등록
네가 바로 그것이다
조셉 캠벨, 박경미 옮김, 해바라기

I. 저자에 대하여

2차 과정을 포함해서 조셉 캠벨에 대해서만 다섯 번째다. 이번 저자에 대하여는 내가 캠벨이 되어 나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캠벨은 그 스스로 강연에 앞서 본인을 어떻게 소개했을지 무척 궁금하다. 그리고 참석할 수 있을지 미지수인 5월 연구원 1차 오프라인 교육의 숙제이기도 하다. 나름 일석이조의 전법을 구사해 본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인터넷 속도가 느려 캠벨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으로 보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냥 내 마음대로 캠벨이 되어 볼 것이다.

여러분! 오늘 제가 하는 이야기가 제 생애의 마지막 강연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저와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이곳에 오신 분들은 정말 재수가 좋은 겁니다. 남들은 저를 비교신화학자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저는 신화를 단순히 비교하는 것으로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신화를 찜쩌먹은 사람으로 기억해 주시면 더욱더 고맙겠습니다.

1924년 저는 유럽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여행 중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라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 만남은 제 인생에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힌두교와 불교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죠. 기독교-힌두교-불교 세계 3대 종교에 대해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다 된 만남이었습니다. 역시 혼자 뭘 한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제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를 만난 것은 신화의 한 장면과 같았습니다. 제가 영웅은 아니지만 신화 속 영웅은 결정적인 순간 누군가를 만나 세상 살아가는 힌트를 얻곤 합니다. 저도 그와 나눈 대화속에서 제 삶의 힌트를 얻었습니다.

저는 아일랜드계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시절 교회에 나가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철이 들면서 교회와 이별을 고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매우 궁금해 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제 이야기를 듣고 여러 가지 반응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저는 그 반응을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이런 제 이야기를 들어주면 그 뿐입니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이 말속에 모든 것이 담겨져 있으니까요.

우린 평생 배웁니다. 앞으로는 더욱더 이 배움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할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구요? 글세요....... 한국의 어머니들은 ‘배워서 남주냐’는 말을 자주 쓰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남을 주려고 배우면 더 많이 배울 수 있다는 걸 저는 경험했습니다. 나 혼자 먹기에는 그 배움의 크기가 너무 크거든요. 남에게 나눠줘야 많이 먹을 수 있어요. 그러다 보면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는 것 이죠. 배움은 우물과 같아서 자꾸 퍼내 남을 주면 더 맑은 물로 채워지죠.

언제인지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였어요. 한 학생이 제 수업을 듣기 위해서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다며 투덜대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어쨌건 그걸 다 읽어보려 했다니 놀랍네. 그것들은 일주일 동안 읽으라고 내 준 것이 아니네. 평생 읽으라는 것이지.”

그래요. 우린 평생 읽고 배우며 살아 갈 겁니다. 최소한 여기 모이신 분들은 그런 삶에 한가운데 있는 분들이십니다. 각자의 모습에 그렇게 쓰여 있어요.

여러분은 신화에 대해 알고 싶으셔서 이곳에 오셨을 겁니다. 서두에서 제가 잠간 이야기 했던 ‘네가 바로 그것이다’ 이 말을 유심히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생각해보세요. ‘내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의 제 이야기 주제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제 이야기의 주제입니다.

II.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서문

“Tat tvam asi." 조셉 캠벨의 영적 성찰을 모아 놓은 책을 보면 이 구절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 구절은 그의 생애와 한 일을 기리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기도 하다. 산스크리트어인 이 구절을 번역하면 ”네가 그것이다“라는 뜻으로, 학자로서 캠벨의 관심과 폭넓은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위대한 신화 연구자로서 이 경구의 심오한 영적 의미를 이해했을 뿐 아니라 이 말대로 살았다.
조셉 캠벨은 《도덕의 기초 On the Foundations of Morality》에 나오는 쇼펜하우어의 질문을 좋아했다. “어떻게 나의 고통도, 내가 관심을 갖는 사람의 고통도 아닌 남의 고통을 보고 마치 그것이 나 자신의 고통인 양, 즉각 몸을 던져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한가. [......] 이는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며,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9p

쇼펜하우어의 결론에 따르면 그러한 즉각적인 반응과 행동은 “네가 그것” 이라는 말로 가장 잘 표현드리 수 있는 형이상학적 깨달음이 섬광처럼 지나간 결과라는 것이다. 캠벨은 기쁘게 이 답을 자신의 답으로 삼았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이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것을 전제한다. 말하자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힌 벽이 뚫려서 타인이 더 이상 무관심한 낯선 자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의 피부 밑에 나의 신경이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 안에서 내가 고통을 느끼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근원적 통찰은 “나의 참된 내적 존재가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들 안에 실제로 존재하며....... [그리고] ........그것이 자비의 근거로서 모든 참되고 이타적인 덕이 여기에 기초하고, 모든 선행에서 바로 이 자비가 표현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0p

신화의 복잡하고 다양한 주제들마다 공통적인 것은 모두 인간에게서 기원한다는 점이다. 각 주제들은 동일하고 영원한 영의 울림이 시간의 영역 안에서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굴절되어 담긴 그릇과도 같다. 놀랄 만큼 창조적으로 표현된 인간적 갈망과 욕망, 우리가 속한 전통으로부터 나온 비극들을 보면서 우리는 바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12p

그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인 인간성에 관한 주제를 떠올리면서 이렇게 말하고 했다. “당신이 걸려 넘어지는 그곳에서 황금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13p

조셉 캠벨의 목적은 성서 신화들을 탐구함으로써 그것들을 믿을 만하지 못한 것으로 폐기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그것들이 지닌 살아 있는 풍성한 의미들의 세계를 열어 보이려는 데 있다. 15p

은유는 그 외연으로서 역사적 맥락이 지니는 딱딱하고 사실적이며 일차원적인 내용들이 아니라, 그 내포를 통해서만-다시 말해 은유가 스스로 일깨우는 진리의 여러 측면들에 대한 증거들의 성운을 통해서만-전달될 수 있다. 19p

외연은 일회적이며 시간에 매여 있고 영적이지 않다 ; 반면 종교적 은유가 지니는 내포적 의미는 풍부하며 무시간적이고, 다른 어떤 외적 세계에 있는 누군가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 지금 여기 있는 우리들 자신의 내적이고 영적인 경험을 지시한다. 19p

제도 종교가 보이는 타성은 영적 성장을 위한 끊임없는 도전이 된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남이 만들어놓은 길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길을 개척해 가야만 하는 것이다. 20p

자비라는 말조차 이 시대는 아무렇게나 평가 절하되어 희생과 전혀 상관이 없고, 유치한 감상주의와도 구별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작은 민주국가가 이웃의 전체주의 국가에 합병되듯이, 뉴 에이지 열광주의자들에게 흡수되어 황당한 별세계에 대한 이야기들로 도배되었다. 24p

캠벨의 노고는 우리 서구의 영적 유산을 역사에 의해 어두워지고 변질되기 이전의 원래 모습대로 다시 볼 수 있도록 복구시키는 예술품 복원가의 노고에 비교할 수 있다. 24p

세계의 종말은 자신들의 영적 통찰을 통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들, 초월, 신비의 성례전, 또는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썼듯이 ‘무한’을 향해 솔직한 사람들에게 매일매일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종말은 어둡고 무시무시한 끝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출발점에 대한 은유이다. 25p

1. 은유와 종교적 신비

나는 신화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로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화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신화란 상징적인 이미지들과 이야기들을 조합해 놓은 것이며, 인간 경험의 가능성들에 대한 은유이고, 특정한 시대에 이루어진 특정한 문화적 성취입니다.” 30p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종교적 은유들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에 자신들은 무신론자라고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32p

신화의 기능은 무엇인가

신화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긍정하도록 만든다고 생각하든, 부정하게 한다고 생각하든, 아니면 세계를 회복시킨다고 생각하든 간에 신화의 첫 번째 기능은 다음의 세 가지 참여의 방식을 통해 현재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일깨우는 것이다. 즉 자기 밖으로 옮겨놓거나 자기 안으로 깊이 침잠하게 되거나, 아니면 스스로 변화하게 한다. 34p

전통적 신화들과 관련해서 볼 때 과학 역시 그 시대의 과학일 뿐이다. 따라서 구역성서가 기원전 3000년경의 우주론과 과학을 반영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은유, 즉 종교적 계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단지 자신들이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부할 사실만을 발견한다. 36p

전통적인 신화의 네 번째 기능은 개인이 삶의 다양한 단계들과 위기들을 통과할 수 있게 하는 것, 즉 개인들이 삶의 전개를 통전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통전적이란 출생으로부터 중년, 죽음에 이르기까지 개인이 처음에는 그들 자신을 따라, 두 번째는 사회 문화에 따라, 그리고 세 번째는 우주, 마지막으로 그들 자신과 만물 너머에 있는 ‘신비스러운 떨림’과 일치해서 중요한 사건들을 경험하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39p

신화의 언어 은유

신화의 생명력은 그 상징들의 은유적 열정으로부터 나오며, 또한 거기에 의존한다. 은유와 상징은 단순한 지적 개념 이상을 전달한다. 왜냐하면 초월의 현실성에 실제적으로 참여한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은유와 상징의 고유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40p

은유들은 당대 경험의 맥락으로부터 생생하게 솟아오를 때, 인간 존재의 이러한 깊은 차원들을 향해 말을 거는 기능을 한다. 41p

신화와 형이상학의 은유적 언어들은 둘 다 실제 세계가 신들을 외연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건드리는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차원들과 실재들의 의미를 표현한다. 42p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대중적으로 구체적인 지역 체제의 제의들과 전설들을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상징의 의미는 특정한 정치 체제가 도모하는 사회화라는 구체적인 목표로 축소되었다. 은유적 언어가 오해되고 표면적 구조가 파괴될 경우, 그것은 시공간에 매인 현존하는 사물의 질서를 환기시킬 뿐이며, 그 영적인 지시사항은 설사 전달된다 해도 아주 희미하게 전달될 따름이다. 43p

은유와 신비

삶은 절대적으로 고정된 어느 한 가지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이 상징들은 자체에 부여된 온갖 의미들을 넘어서서, 즉 모든 정의들과 관련성들을 넘어서서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를 지시해야 한다. 그 신비란, 바로 우리들 자신과 우리가 사는 세계의존재 자체와 마찬가지다. 46p

2. 종교적 신비 경험

상징과 종교적 경험

신비 경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의 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 가슴속에 새겨져 있는가.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삶은 단순히 전체의 일부분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바로 전체입니다. 전체는 이것저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눈에 알수 있습니다. 이것은 브라만들이 거룩하고도 신비롭게 표현한, 실로 단순하고도 명료한 것입니다. [..........] Tat tvam asi, 그것은 바로 너다.” 53p

내가 앞에서 했던 말, 즉 신비의 경험은 단지 기대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 계획을 포기해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계획이란 두려움과 욕망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계획을 버리면 빛이 다가올 것이다. 57p

3. 신에 대한 개념들

신은 최종적인 언어다. 66p

그러므로 예수가 “내가 만유이다”라고 말한 의미는 “나는 나 자신을 만유와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도마복음서에 보면 예수가 “장작을 쪼개보시오. 나는 거기에도 있소”라고 말하는데, 그것도 마찬가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말하고 있는 자를 가리키는 것도, 그 신체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정말로 그 자신, 그리고 정말로 당신 자신을 가리킨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69p

'개체와 개체는 아무 막힘이 없다‘ 이런 생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마음의 각성이며, 자비, 즉 ’Mitleid'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을 통해 열정에서 자비로 관계가 변화된다. 이것은 단순한 소유 관계나 타인과의 투쟁 관계가 아니고, 타인과 동일시하는 관계이다. 물론 이러한 동일시의 관계 안에도 투쟁은 있지만, 무자비한 동물적 투쟁 양태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 73p

가령 엄청난 재앙이 닥친다거나 커다란 불행에 직면했을 때, 나를 지탱해 주고 견디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지탱해 주고 견디게 해주는 무언가를 나는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나를 지탱해 준다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 나를 넘어지게 하는가? 이것이 신화, 즉 내 삶을 구성하는 신화가 내놓는 신험이다. 77-78p

우리는 지구의 감각 기관들이다. 우리는 우주의 감각이다. 바로 우리 자신 안에 그것이 있다. 한때 우리가 믿었던 신들은 저기 밖에 있고, 그 신들은 우리들 자신이 투사된 것이다. 그 신들은 우주의 신비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해석하고자 했던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다. 90p

4. 종교적 상상력과 전통신학의 규칙들

영웅이란 결국 운명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신들의 행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99p

약속 받은 땅은 군대를 동원해서 정복하거나, 다른 민족을 내몬다고 해서 확고해질 수 있는 어떤 장소가 아니다. 약속 받은 땅은 우리 마음속의 한 모퉁이고, 신화적으로 영화된 환경인 것이다. 102p

기독교 전통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초자연적 은혜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되는데, 이에 따르면 실질적으로 구원은 우리 안에서 부터가 아니라 우리 밖으로부터, 일종의 제의적 경험을 통해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령 성례전 중 하나인 세례가 지니는 기능은 우리 안에 무언가를 퍼붓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으로부터 무언가를 끌어내는 데 있다. 설례전은 불러냄이지, 교리주입(교화)이 아니다. 102p

토마스 아귀나스 역시 《이단 논박 대전》에서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하며, 그것들을 넘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때에만 진정으로 알 수 있다”라고 쓰고 있다. 그는 《신학대전》을 썼는데, 그는 이 책에서 하느님의 ‘뜻’과 ‘사랑’, ‘자비’는 물론이고, 하느님의 ‘존재’, ‘순진무구’, ‘완전성’ 등 신의 속성들에 관한 목록을 만들고 논증하는 데 생을 바쳤다. 107p

5. 유대-기독교 전통의 상징들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은유는 사실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은유가 사실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을 ‘무신론자’라고 부르며,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종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들 중 누가 실제로 의미를 이해할까? 119p

축제는 계절의 순환과 긴밀한 관련이 있으며, 개인을 사회와 일치되게 하고, 그럼으로써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살도록 이끈다.
신화의 세계에서는 개인과 사회 사이에 어떠한 긴장도 없다. 이러한 사회의 의례와 규칙들은 개인을 사회적 세계와 외부의 자연 세계뿐만이 아니라, 안에 있는 인간 자신의 본성과도 일치되게 한다. 123-124p

아마도 여러분은 내가 좋아하는 하인리히 치머의 인용문에 익숙할지도 모른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최상의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차선의 것은 오해 받는다.” 어째서 차선의 것은 오해받는가? 아마도 차선의 것들이란 너무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내연이 아니라 외연으로 잘못 읽게 된 은유들일 것이다. 129p

예수는 “너희가 신판 받지 않으려면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 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동산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다. 우리는 두 차원에서 살 수밖에 없다. 하나는 아무 판단 없이 삶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속한 문화나 특수한 종교의 윤리적 가치들과 관련을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두 가지 모두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133p

이러한 신화적 주제들은 황당한 동화적 이야기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고, 우리의 삶을 밝혀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창세기의 이야기들을 내연적 의미에 따라 읽으며 - 영적 메시지와 중요성을 제공하는 참된 은유적 의미에 따라 읽으면-이러한 모든 상징들이 거기에도 나타난다. 138p

문제는 기독교가 앞서 기술한 두 가지 영향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모든 것을 역사화하면서 동시에 매우 강력하게 영지주의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동산에서 일어난 사건이 기독교 안에서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신화적인 사건이었지만,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역사적 사건이지만, 선행하는 신화적 사건에 대한 답으로 해석되었다. 148p

"아주 오래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금 당신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것은 동양의 비전이 젊은이들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호소이다. 149p

서양 사람들이 동양의 종교로 눈을 돌리는 것은, 그동안 자신들의 종교 안에서 지나친 문자주의와 역사주의로 인해 닫혀져 있던 참된 의미를, 이제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149p

아주 오랫동안 나는 교회에 대해 지독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고, 가톨릭 교회에 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나중에 나 스스로 신화와 관련된 주제들을 공부하고 나서 원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150p

성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그것을 역사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읽는 것이다. 스스로의 방식대로 성서를 읽고, 의미를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성서는 모든 독자들 개개인에게 그들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특수한 무엇인가를 말하기 때문이다. 신의 선물은 당신 자신의 언어로 다가온다. 순수하고,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하는 신은 너무도 크다. 칼 융은 이렇게 말했다. “종교는 신에 대한 경험 앞에서 우리를 방어해 주는 체계이다.” 우리가 신을 이해하는 방식대로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152p

6. 유대-기독교 영성의 상징들에 대한 이해

구원자의 전기라는 것은 구원자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한 한 가지 길이라 할 수 있다. 157p

세 가지 시험을 이긴 다음, 그리스도는 깨달음을 이루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인식을 얻는다. 이것은 붓다의 경우와 같은 실제적인 깨달음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더라도 마찬가지다. 붓다를 유혹한 자는 산스크리트어로 욕망과 죽음을 의미하는 카마 마라이다. 사회적 의무, 또는 정치적 활동의 유혹을 받는 붓다는 마지막에 간단히 자신의 손가락 끝을 땅에 댄다. 그러자 대지의 여신이 이렇게 말한다.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는 여러 생에 걸쳐 자신을 포기해서 여기 아무도 없다. 그는 이 자리에 대한 권리가 있다.” 유혹자의 군대는 흩어졌고, 그날 밤 붓다는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는다. 181p

그렇다면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는 반쪽짜리 인간으로 살아갈 뿐이며, 모든 사회가 인간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선과 악으로 도덕적으로 나누어서 한쪽을 선호하며 키워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상징 체계에서는 십자가가 중심에 있고, 선한 것은 모두 위에 있는 천상으로, 악한 것은 모두 아래 있는 지옥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갈보리 산 위 예수의 십자가는 착한 강도와 악한 강도 사이에 있었고, 착한 강도는 천국으로, 악한 강도는 지옥으로 보내졌다. 예수는 천상으로 올라가기 전에 지옥으로 내려갔다. 그는 역사적이며 동시에 영원하고 완전한 인간으로서 모든 대립의 쌍들을 넘어서기 때문에(타락하기 이전에, 그리고 그의 갈비뼈에서 이브가 나오기 이전에 아담이 선악과 남녀의 대립을 넘어서 존재했듯이), 자신의 존재 안에서 모든 종류의 갈등, 심지어 신과 인간 사이의 대립까지도 넘어선다. 바울이 빌립보인들에게 선언했듯이,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느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위에 있는 이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셔서 하느님 아버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빌립 2:6-11) 199-200p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이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압니다. ....... 여러분은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 6:6.14) 201p

만일 당신이 세상의 빛나는 환희를 본다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 “예”라고 말할 것이고, 만일 그 환희를 보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영지주의적 통찰은 앞에서 식물과 관련된 신화들과 관련하여 이미 언급했던 경험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경험을 통해 만유 안에 있는 생명의 역동성을 확인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세상의 현상적 측면에만 매일 것이 아니라 직접 그 핵심을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204p

7. 질의응답

신화적인 상들은 심리학적 에너지를 일깨우고 이끌어간다. 즉 기운을 일깨우고 이끌어가는 표징이다. 신화론은 정서나 감정적 상들의 체계이다. 동시에 신화를 통해 상들이 나타남으로 인해 그러한 정서와 감정이 생겨나게 된다. 208p

합리적 체계는 우리 삶에서 신화적 상들의 연관성을 깨뜨리고, 신화적 상들이 지닌 힘을 사용할 수 없게 한다. 208p

라틴어 ‘educere' (이끌다)가 시사하듯이, 교육의 기본 개념은 밖에서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 다음에 영적으로 우리는 아무도 우리를 위해 길을 내지 않은 숲속으로 들어가서 성배를 찾아야 한다. 213p

영원은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며, 나 자신의 진리와 존재의 영원성을 나의 가능성 안에서 경험할 수 있다. 만일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자신이 본래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죽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통찰이 태양의 신비, 태양 빛으로 표현되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214p

결혼에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한 사람이 결혼했다면 - 참으로 결혼한 것이라면 - 이제 관심의 중심을 자신에게서 둘의 관계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이 희생하거나 무엇인가를 포기한다고 생각할 때, 나는 다른 인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위해서 포기하는 것이다. 상대와 마찬가지로 나도 관계 속에 있다. 내가 말하는 뜻을 알겠는가? 둘이 함께 있음, 이것이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이다. 우리는 자신을 하나가 아니라 둘이서 하나라고 생각해야 한다. 결혼이 전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아니라면, 당신은 결혼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려는 것의 전부이다. 217p

8. 대담

신화는 거짓을 뜻하는 말로 잘 쓰이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표현하는 영구적인 수단이다. 237p

캠벨은 다양한 종교 전통들로 나타나는 것이 실제로는 모든 문화가 공유하는 단일한 체험의 상이한 표현이라고 말했다. 237p

지구의 떠오름을 봄으로써 지구와 하늘이 나뉘어지는 게 아니라, 지구가 하늘 속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의)분리는 없습니다. 하늘과 땅의 구분에 기초한 모든 신학적 관념은 이 깨달음과 함께 무너집니다. 우주에는 통일성이 있고, 우리의 경험에도 통일성이 있습니다. 244p

묵시록은 불타는 아마켓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지와 자기 만족이 RMx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조합할 수 있는 신화를 가지지 못한, 갈라지고 분열된 세계관은 끝나고 있습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는 배타주의, 지리를 독점한 집단이 있다는 생각, 이것이 사라져야 할 세계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무엇입니까? 그 나라는 하느님의 보편적 현존이 우리의 이웃들 안에서, 우리의 원수들 안에서, 우리 모두 안에서 실현되는 데 있습니다. 246p

내가 좋아하는 신화에 대한 정의는 ‘다른 사람들의 종교’입니다. 종교에 대한 내가 좋아하는 정의는 ‘신화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 오해는 영적, 종교적 상징들이 마치 일차적으로 역사적 사건들을 지시하는 것처럼 읽는 데 있습니다. 254p

[역자 해설]

신적인 것이 자연 안에 내재하고 있으며, 자연은 인간 사회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확신이 그들의 행위와 사유, 감정을 지배했다. 자연과 인간이 내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가정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신화적 사고를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된다. 262p

성서의 언어를 죽은 문자와 사실이라는 감옥에 가두지 않으면서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생동성을 되살려낼 수는 없을까? 사실 그렇게 볼 수 있을 때 무릇 모든 종교가 품어야 마땅한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지평과 함께 제 종교들이 탄생하고 성장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특수성 속에서 각 종교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지 않겠는가? 284p

III 내가 저자라면

이번이 조셉 캠벨의 다섯 번째 책이다. 사실 이 책은 조셉 캠벨이 썼다고 보기 어렵니다. 캠벨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가 직접 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몇 권의 책도 그렇지만 이 책 역시 그를 연구한 사람에 의해 엮어진 책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내가 저자라면은 캠벨의 관점이 아닌 유진 케네디의 관점에서 봐야 할 것이다.

유진 케네디와 역자 박경미씨의 통찰력은 대단하다. 왜냐하면 나는 이전의 캠벨에 대한 이야기를 엮은 몇 권의 책을 통해 이야기의 초점을 찾지 못했었다. 이건 내 무지의 소산이 가장 큰 것이다. 그러면서도 항상 아쉽게 생각했던 것이 좀더 쉽게 설명할 수 는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었다. 책 읽는 내내 용어에 대한 짧은 설명이라도 있으면 이해하기가 훨씬 쉬울 것 같다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숨을 쉬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책의 구성이 돋보인다.
이 책은 기독교에 대한 캠벨의 생각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유진 케네디 역시 이점을 분명히 밝혔다. 책의 전체적인 구성을 잡는 데 많은 생각과 노력이 들어갔음이 느껴진다. 캠벨의 수많은 강연 속에서 이 책으로 나타내려는 내용을 속아내는 작업 역시 만만치 않았을 텐데 시공을 넘나는 구성이 인상적이었다.

신화 - 종교 - 신에 대한 개념 - 종교적 상상력 - 기독교의 전통적 상징 - 기독교의 상징들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는 전개방식은 매우 탄탄하다.

이해를 돕기 위한 배려
많은 책이 독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할 때가 많다. 저자 스스로의 만족감에 쓰여 진 책이라도 편집 과정에서 좀더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들어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많았는데 이 책은 그런 아쉬움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7장 질의응답과 8장 대담은 사실 앞의 내용보다도 더 흥미로웠다. 아무래도 캠벨이 직접 쓴 책이었다면 7장, 8장과 같은 내용은 없었을 것이다.

역자 해설이 앞에 나왔으면 하는 작은 생각
나는 유진 케네디의 서문보다 역자 박경미씨의 해설이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것이 최소한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캠벨과 유진 케네디의 원서를 존중하는 의미와 일반적으로 역자의 해설이 맨 뒤에 나오는 것이 별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렇지만 신화와 종교적인 내용의 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독자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보면 기독교를 전공한 역자 박경미씨의 역자 해설은 책에 대한 해설을 넘는 통찰이었다.

5권의 캠벨 책을 읽으며 느낀 점

어려웠다.
책 읽는 내내 생각한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 이렇게 어렵게 책을 쓰는지 저자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 어려움의 원인은 전적으로 내 무지의 소산이지만 좀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배려의 손길이 아쉬웠다. 결국 나는 캠벨의 신화에 대한 개념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숙제가 더 남았으니 틈틈이 다시 봐야겠다.

생동감있는 문장이 아쉽다.
강연 내용을 책으로 옮긴 것으로 치자면 『신화의 힘』이 가장 잘 다가왔다. 글과 말은 전달 방식이 다르다. 글은 깊이를 나타내는데 좋고, 말은 생동감을 전달하는데 그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연에 열광하는지도 모른다. 강연 내용을 책으로 옮기면 깊이와 생동감을 함께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생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내가 바로 그것이다』는 깊이에 무게가 더 실린다. 생동감은 좀 덜하다. 이건 내 기질적 특성인지도 모른다. 나는 생동감 있는 책을 좋아한다. 문장이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신화의 세계』를 읽으면서는 사실 화가 나기도 했다. 어쨌든 강연 내용을 책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그 현장감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해본다.

날아다니는 돼지
나에게 신화는 날아다니는 돼지였다. 꿈같은 이야기란 뜻이다. 어떻게 돼지가 날 수 있겠는가? 적어도 한 달 전 나에게 신화는 꿈보다 먼 거시기였다. 이제 조금 돼지의 날개가 보이기 시작했다. 돼지도 꿈을 꾼다.

5주에 걸쳐 조셉 캠벨을 만났다. 한 작가의 책을 끈질기게 물어뜯어 본적이 만화책 말고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자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내가 그것이다』를 읽지 못했다면 나는 조셉 캠벨을 오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학자적 기질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유진 케네디에게 오해를 풀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더욱더 감사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옮긴이 박경미씨다. 기독교를 전공한 사람으로써 객관적인 시각이 돋보였다.

그리고 사부님.......
저는 왜 사부님이 조셉 캠벨의 책을 선택하셨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묻지 않았습니다. 뭔가가 있겠지 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다. 사실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해 물을 수 없었습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며 책을 읽었습니다. ‘너에 신화를 만들어라’
조셉 캠벨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부님.
IP *.39.173.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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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
2008.04.28 11:43:51 *.84.240.105
나이지리아에서까지 시간 맞추어 올리신 우리 영웅!!!

이거 보니 웬지 우리가 나이지리아에 계신 홍스와 연결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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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스
2008.04.28 11:53:59 *.39.173.162
고마워요 현정씨..^^

시간내에 제출 못하는줄 알았습니다.. 이곳 시간은 한국보다 8시간이 늦어요. 새벽 4시 50분.. 아~~ 이제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시간내 제출하게 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다행히 인터넷도 느리긴 하지만 끊기지는 않았습니다.

정말 인터넷의 위력을 실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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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환
2008.04.28 14:05:41 *.34.17.71
그러게요. 대단하신데요~ 멋지네요!!

형아 못올릴까봐 쬐금 걱정이 됐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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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8 16:04:20 *.64.21.2
홍스 고생많으삼
얼룩말 잊지 마삼
홍~홍~홍~(웃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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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8 22:01:33 *.41.62.236

짝짝 짜자작 홍스 이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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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4.28 23:08:53 *.36.210.11
'네가 신화다.' 스스로의 믿음이 되어라.
읽고 쓰지 않는다면 곰필 것이다.

우리는 배우고자 했고 쓰고자 했고 각자의 신화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예 있다.

멀리서도 자신의 안위와 타협하지 않은 채 길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책을 읽고 쓰는 이 과정에 입문한 보람일 것이다. 너의 약속을 지켜가는 신화를 만들어라. 그 과정을 함부로 하지 마라. 때로 독한 신념이 소망을 뚫는다. 얼마나 아름다우랴. 그대는 이미 원하는 곳에 닿아있고 발을 내밀어 한 발 한 발 가면 되는 것이다. 그대의 다짐이 신비요 그대의 약속이 구원이요 그대의 꾸준함이 곧 신화이다.

벗으로부터 아우로부터 배우는 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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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스
2008.04.29 13:54:06 *.39.173.162
지환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니가 제일 걱정할 것 같더라니..ㅎㅎ
창형... 이걸 어쩌나. 바다위에 아무리 찾아도 얼룩말이 없으니 말야 ㅋ
희님 제가 아는 그 희님이 맞으시나요.. 고마워요..^!~ 멋진걸요..^)^
써니누나.. 항상 감사감사.. 잘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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