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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_5
알랜B. 치넨 / 이나미 옮김
1. 작가에 대하여
#1
“전에 장주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것이 분명히 나비였다. 스스로 즐겁고 뜻대로라 장주인 줄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조금 뒤에 문득 깨어보니 분명히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호접몽>, 장자의 제물론편에서.
4월이 끝났다. 나는 장자의 나비가 되어 신나게 놀았다. 매년 그랬다. 따사로움. 그 예쁜 이름이 “오라. 오라.” 하는 통에 가슴이 쿵쿵댔다. 꽃도 되어보고 나무도 되어보고 바람도 되어본다. 나비가 되었으니까, 꽃에 앉으면 꽃이고 나무를 지나면 나무고 바람에 흔들리면 바람이다. 어차피 꿈처럼 하는데야 뭐든 어떠하랴.
하늘하늘 깔깔대며 정신 없이 나비 꿈을 꾸고 나니, 벌서 5월이다. 그 5월의 첫째 날. 누군가 마음을 나누어 편지를 보내왔다. 시작과 끝, 하루와 습관, 그리고 나에 대해서. 편지를 쥐어 들고 돌아오는 길에, 이제는 습관처럼 자리한 독서에 대해 생각한다.
#2
어차피 사람을 읽는 것이리라.
사람에 대한 시를 써 보았는지 모르겠다. 가끔 사람에 대해 쓴다. 어떻게 써야 할지는 간단하다. 써야 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 사람의 ‘어떤 면’. 또 하나는 그 사람이 겪은 ‘사건’. 이 두 가지를 적당히 늘어 놓다 보면, 그 사람이 가진 ‘뭔가’가 드러난다. 우린 그걸 읽는 것이다.
이번에는 하나만 골라보자. 나는 ‘사건’으로 하겠다. 사람들은 스토리를 좋아한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겪은 사건으로 풀어가는 것이 제격이다. 사건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입을 연다. 생동감 있는 목소리로.
#3
사건 하나. C.G 융을 만나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제일 먼저 프로이트와 융을 이해해야 한다. 그녀도 그랬다. 스탠포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준비하면서, 그녀는 프로이트와 융의 차이에 주목했다.
“프로이트는 어떤 증상의 원인을 개인의 무의식에서 찾아 내려 하는군. 그런데 그 무의식이란 것이 좀 흉악하게 묘사되고 있군. 욕망이나 성적 금기 따위의 금지된 소망을 숨겨주고, 회피하는 장소로 정의하고 있어. 그렇다면 융은? 증상의 원인을 개인의 무의식에서 찾아내려 하는 것은 같군. 그러나 그 무의식에 대한 정의가 프로이트와는 완전히 달라. 융에 의하면, 무의식은 오히려 억압되고 무시된 문제를 끄집어내어 의식의 한계를 메워주는 것이지.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이 숨고 싶은 동굴이라면, 융에게 무의식은 표출하고 싶은 화산인 셈이야.
“그래. 이런 차이도 있군.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으로 정의하는 반면, 융은 그것을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집단의 공간으로 정의하고 있어. 비교 신화학의 영향 때문일까? 융은 누구나 경험하는 신비스러운 현상에 대해 존중하고 있는 것 같아. 프로이트는 그 신비로움을 개인의 치기 정도로 폄하하는 데 반해서 말이야.”
“이들이 작업했던 환경도 매우 독특하군. 프로이트는 대개 젊은이들과 함께 일했고, 융은 노년층과 함께 일했어. 이들의 이론이 갈린 것은 당연해. 젊은 남녀는 전형적으로 고통스런 문제를 부정하고 회피하며, 그들의 꿈은 이런 억압을 반영하지. 하지만 중년은 그들의 고통과 비극을 인정하고 거기서 운명, 죽음 따위의 한계와 화해하는 시기 아닌가? 당연히 그들의 꿈은 재생, 해결, 치유 따위의 화두를 반영하게 되는 거지.”
“융의 방식이 좋다. 더 아름답고, 인간적이야. 프로이트 식이라면, 현실적이고 이성적일 수는 있겠지. 하지만 차가운 머리보다는 뜨거운 가슴이 좋다.”
(치넨은 알려진 바, 융 학파에 속한다. 그녀는 융의 개념을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 그녀의 책에서는, 융의 분석심리학 개념들이 쉴새 없이 불려 나온다. 이 책, <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에서 그의 개념은 적어도 한 장(章)에 한 번씩은 인용되고 있다.)
사건 둘. 몇 권의 책을 쓰다
책을 쓴다는 것은 개인사에 있어, 거대한 사건이다. 혹자는 자식을 낳는 것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녀에게 어떤 출산이 있었는지 알아보자.
<언제나 그렇게>
<젊은 여성을 위한 심리 동화>
<영웅을 넘어서>
<어른스러움의 진실>
그리고 이 책, <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
열거 한 책 중에서 내가 읽은 책은 <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뿐이다. 읽은 책을 기준으로 논의를 확장시킬 뿐 다른 도리가 없다. 기준점에서 벗어난 논의는 모두 추측이다.
<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은 그녀의 거대 관심사인 ‘중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서른 이후, 남자와 여자에게는 각각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또 공통의 문제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옳게 해결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재미있게 썼다. 특이한 것은 전개방식인데, 세계의 동화, 민담, 전설, 신화 따위에서 알맞은 이야기를 골라와 주제에 맞게 나름의 논리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총 16개의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추측 성 발언이 되고 말겠지만,) 그녀의 주제는 한결 같다. 그것은 바로 ‘중년의 문제’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정녕 무엇인가? 젊은이들의 이야기(영웅 스토리)인 <잠자는 숲 속의 공주>와 <개구리 왕자>가 늙어서는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가? 나이가 들어서도, 혹은 죽음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서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가부장적인 사회의 틀 안에서 젊은 여성들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중년을 준비할 수 있을까?
이렇듯 그녀가 출산한 5개의 사건은 하나 같이 ‘중년’이라는 화두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풀이하고 있는 중년의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이해, 받아들임, 베풂, 나눔, 인정’. 그녀는 그런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의미하는 바는, 어쩌면 ‘사랑’이 아닐까? 그림 형제의 표현처럼 ‘짐을 지고 가는 당나귀’에 대한 애틋한 사랑 말이다.
사건 셋. 동화를 즐기다
동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녀는 동화를 좋아한다. 그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7,000여 편의 동화를 수집했다. 그리고 가장 알맞은 것으로 16편을 선정했다. 옛날 이야기들이 늘 상 그렇듯, 이 책에 소개 된 이야기들도 대부분이 아기자기하고 잔잔하다.
동화의 특징을 좀더 열거해 보자. (그럼 그녀가 어떤 위인인지 좀 더 드러날 테니 말이다) 동화는 친절하게 쓰여져 있다. 차분한 어조이고, 순수하며, 폭력을 싫어한다. 때론 비극적이지만, 그 안에는 지혜가 있으며, 희극적일 때에도 그저 유쾌함에서 그치지 않고 교훈을 주려 한다. 특별한 이야기 보다는 뻔한 이야기이고, 그렇기 때문에 실용적이고 더욱 진실되다. 설명하려 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논하려 하지 않고 그저 드러낸다. 어떤가? 그녀가 보이는가?
힌트를 하나 더 주자면, 그녀의 책이 꼭 그렇다. 그녀는 동화처럼 쓴다.
#4
그 외의 잡다한 기록
1952년 출생. 정신 의학 박사. 병원 원장. 페미니스트. 미국. 작가. 추상적. 주관적. 이야기적. 자신을 드러낼 정도로 정신적으로 건강함. 인간미가 있음. 그리고 중년임(집필 시기가).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머리말
왕자가 늙어 대머리가 되고 공주가 중년의 위기에 처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13]
옛날 이야기란 어른들을 위해 어른들이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들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의 희망과 두려움과 지혜를 표현했다. 과거에는 옛날 이야기란 하나의 진지한 의사 소통 수단이었고 오늘날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하는 역할들을 옛날 이야기들이 담당했다. 이야기들은 새 소식과 오락과 시사 사건들을 제공하면서 청중들이 자신들의 삶을 반성하게끔 유도하기도 했다. [14]
사람들에게 사실이나 이념들을 들려주어라. 그러면 그들의 마음이 밝아질 것이다.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어라. 그러면 그들의 영혼과 맞닿을 것이다. 하시드(기원전 2세기 헬레니즘에 반대하는 유대 집단) 속담 [15]
이야기란 듣는 사람의 가치관이나 이성적인 사고를 일단 멈추게 하고 사람을 자유롭게 놔두도록 하는 일종의 주문처럼 작용할 수 있다. [16]
제1부 서른 이후, 젊음의 마법을 풀어 놓다
그의 수수께끼 같은 조수가 다시 온 것입니다. [30]
인생의 시간 동안에: 좋은 비유 [36]
이를 자크는 잘 다듬은 창조성이라고 이야기한다. 예술가들은 불완전한 영감으로 일단 일을 시작하지만 그 생각을 갖고 작업에 임하여 또 다시 재 작업 한다. 젊은이들의 특징인 발작적인 창조적 불꽃은 계속되는 일의 습관으로 진화해서 성숙하고 기댈 만한 기술로 변하는 것이다. 만약 젊은이들의 창조성을 99퍼센트의 영감이라고 한다면 성숙한 창조성은 99퍼센트의 땀이다. [39]
젊었을 때 사람들은 보통 개인의 성취와 만족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중년이 되면 보다 인본주의적인 관심을 가지며 많은 시간을 남에게 베푸는 일에 할애하게 된다. 성공적인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하면서도 자기보다 젊은 사람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아끼지 않는다. [54]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 이야기 [56]
마법의 상실은 슬픈 게 아니라 발달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일 뿐이고 이를 거절할 때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상실이란 단순히 마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서 가족으로 또 다음 세대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회로 변하는 것뿐이다. [61]
제2부 서른 이후, 남자가 가는 길과 여자가 가는 길
도둑이 그녀의 재산을 훔쳤기 때문에 반대로 그녀는 도둑의 마음을 훔친 것이다. [80]
중년쯤 되어 문제가 생기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부의 악한들을 찾아 비난하는 것을 그만두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점을 훨씬 더 쉽게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방식을 바꾼다. [82]
결국 남자가 자신들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했을 때만이 여성들은 숨어 있는 자신들의 힘과 재능을 발견해 내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해 일어나는 것이다. [110]
여성들이 중년이 되어 자기 확신을 선언하는 것은 개인적인 성취의 문제일 뿐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의 필요성 때문이기도 하다. [122]
남자들은 대개 작은 실망들을 여러 번 겪고 나서 자신들이 젊었을 때 가졌던 야망들을 줄여나간다. 그리고 극적인 특별한 위기 없이 수년 간 적당히 타협해 나간다. [125]
제3부 서른 이후, 운명을 받아들이다
죽음의 사자 이야기: 좋은 비유 [138]
자신의 병이 충분한 경고가 되지 못한다면 중년에 친구와 친척의 죽음을 맛보는 것은 죽음의 문제를 일깨우게 할 수 있다. 사별은 점점 흔해지고 심상치 않은 일이 된다. 죽음으로 끝나는 행렬에서 부모와 늙은 친구들이 가듯이 중년의 남녀는 결국 가게 된다. [139]
개인이 자기 본위의 관심에만 쌓여 있는 한 죽음은 재앙이 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자아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만약에 개인이 사적인 관심을 초월하여 개인적인 이익을 초월한 것에 스스로를 위임하게 된다면 – 예를 들어 자신의 아이들이나 사회적 활동 – 죽음은 덜 위협적이게 된다. [139]
슬픔의 식사 이야기: 좋은 비유 [140]
아들을 잃은 부모는 단 하나의 위안을 가지게 된다. 다른 모든 사람들도 유사한 슬픔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141]
역설적으로 죽음은 삶에 대한 실질적인 지혜를 제공한다. [152]
중국의 꿈 이야기: 좋은 비유 [155]
오이디푸스 신화: 좋은 비유 [180]
중년의 오이디푸스적 질투를 이기지 못하고 베풂의 미덕을 발전시키는 데 실패한 사람은 자신의 괴로움과 분노로 소모되고 만다. [183]
오이디푸스 신화: 좋은 비유 [186]
젊은 남녀는 그들이 부모가 되었을 때 그들 자신의 한계를 발견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부모가 사랑이나 보호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더 이상 사랑과 보호를 줄 수가 없었음을 깨닫는다. 이것은 실패와 죄의 문제가 아니라 한계와 비극의 문제이다. 젊은이의 분노는 그래서 탄식과 슬픔과 분노로 바뀐다. 겸손과 동정은 비극적 통찰에서 나온다. [187]
제4부 서른 이후, 삶을 깨닫다
성숙한 성인은 책에서 배우는 것과 삶에서 배우는 것을 구별하며 후자가 그들에게는 더 실리적이라는 것을 안다. [198]
예방은 치료보다 낫지만 또한 어려운 것이다. [199]
지혜에 대한 이야기: 좋은 비유 [200]
공감은 과학과 관련된 똑같은 추상적 사고를 사용하며 단지 사물과 사고보다는 사람과 감정을 다룬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201]
바르겐슈타인이 결론 내리기를, 철학은 그가 초기에 믿었듯이 영원한 진리를 제공해 주지 못했다. 철학은 단지 실용적 도구이고 그것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과 의사 소통하는 데 있어서 문제를 해결하고 복잡한 사고를 명확히 해주는 것이다. 즉 “철학은 실용적이다” 라는 것이다. [202]
새 길을 가려고 옛길을 버리지 마시오, 다른 사람의 일에 끼어들지 마시오, 그 다음날까지 분노를 참으시오. [207]
젊은이들은 악을 억압하고 부정한다. 청소년들에게 인기 있는 공포 영화들은 젊은이들이 악을 회피하고 있음을 극화한다. [211]
중년이 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도덕적 판단이 틀릴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다른 윤리적 원칙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214]
중년들이 종종 느끼는 유혹, 즉 자신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하는 태도 [216]
그가 세상을 바꿀 수 없고 모든 잘못을 개혁할 수는 없지만 그는 최소한 그 자신의 악은 통제할 수 있다. [216]
농담과 기지는 참을 수 없고 폭력적인 감정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정서로 바꾸어놓는다. [227]
유머는 성숙의 징표다. [228]
유머는 대처 능력 중 가장 고귀하고 성숙한 방식이다. (프로이트) [228]
중년 여성들의 가장 큰 과제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자기를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229]
치고 빠지는 것, 즉 싸우고 도망가는 행동은 젊은이들 이야기에 전형적으로 나오는 테마들이다. 그러나 중년에게는 그런 호사를 누릴 여유가 없다. 그들은 무능한 권위체제에 대해 분노를 표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들이 책임을 지고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229]
젊은이들은 치료되지 않는 상처도 있고 낫지 않는 고통도 있다는 인생의 어두운 한 부분을 보려고 애쓰지 않는다. 반면에 중년들은 인간 조건들의 비극적인 차원을 경험하고 나서야 보다 깊은 동정심을 배우게 된다. [245]
치유와 재생이 절망과 고통 속에 감추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50]
배움 (…) 이는 중년 남자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다. [276]
중년의 원형적 통찰은 인간 관계에 근거한다. [286]
에필로그
중년이란, 짐을 잔뜩 싣고 가는 가축에 불과한 당나귀일 뿐이다. (그림형제, <인생의 시간 동안>) [295]
(중년에 이르러) 남자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하고 자신들이 갖고 있는 유약함에 대해 인정하며 관계의 중요성을 알기 시작한다. [296]
대부분 남녀 모두를 가장 진지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 자신이 희생자일 뿐 아니라 악한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고 악함이 남들뿐 아니라 그 자신의 마음에도 존재한다는 점을 배우는 일이다. 자신의 한계에 대한 자각이 젊은 시절의 끝없는 희망을 대신한다. 운명이 믿음을 가리게 하는 것이다. [297]
젊은이들은 너무 확신에 찬 것이 문제라면, 중년들은 너무 믿음을 적게 가진다는 함정이 있다. [297]
역자 후기
이 책의 번역은 마치 도둑질하듯 사뭇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306]
3. 여신(타고남은 불기운)
“30대 이후 마음의 위기를 다스리는 16가지 이야기”
책의 선전문구이다. 이제와 하는 이야기이지만, 제대로 선전했다. “잘했다, 못했다”의 의미가 아니라, 담고 있는 내용을 가감 없이 잘 표현했다는 말이다. 책의 내용은 정말 그렇다. 그런, 열 여섯 가지 이야기이다.
저자는 무려 7,000여 편의 동화, 민담, 전설, 신화를 수집했다고 한다. 본문에 소개 된 16개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서 말이다. (1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장당 하나의 동화, 민담, 전설, 신화 따위가 소개되고 있다) 0.2%의 확률을 깨고 저자의 가슴에 안착한 이야기들. 과연 어떤 이야기들일까? 궁금하지 않은가? 게다가 이 이야기들은 메말라 굳어버린 중년의 가슴에 따스한 온기를 담은 희망의 불씨를 물어다 준다는데……
구성은 대략 이렇다.
머리말
제1부 서른 이후, 젊음의 마법을 풀어놓다 (요정과 구두장이 외 2편)
제2부 서른 이후, 남자가 가는 길과 여자가 가는 길 (고집쟁이 남편과 아내 외 2편)
제3부 서른 이후, 운명을 받아들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왕 외 3편)
제4부 서른 이후, 삶을 깨닫다 (현명한 대답 외 5편)
에필로그 – 중년의 길
역자 후기
머리말과 에필로그를 제외한 본문은 4부, 총 16개의 장(章)으로 되어 있다. 각 장에는 동화나 민담 따위의 옛날 이야기가 하나씩 소개된다. 저자는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숨은 뜻(은유적 표현)을 드러내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잠시 후에 다루자)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제1부의 첫째 장인, ‘젊음의 마법을 상실하는 중년’에는 독일 동화가 한 편 소개된다. ‘요정과 구두장이’라는 제목의 동화이다. 요정이 가난한 구두장이를 도와주어 훌륭한 구두를 만들 수 있게 해주고, 그것으로 이들 부부는 곧 부자가 되지만, 어떤 금기를 범함으로써 요정의 도움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해설은 대략 이렇다. “주인공이 부부인 것은 중년을 다룬 이야기임을 알려준다. 요정의 도움은 ‘젊은 시절’이라는 마법을 상징하며, 금기를 범하고 요정이 떠나는 것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젊음을 잃어버리는 마법의 상실을 의미한다. 벌거벗은 요정들은 일, 책무, 사회적 관습 따위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운 순수성을 상징하며, 이것이 떠나갔다는 것은 중년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새로운 장이 시작될 때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한 편씩 소개되고, 그럴싸한 해설이 이어진다. 억지스런 풀이는 거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지는 동화 해설이, 저자의 의도대로, ‘중년의 문제’라는 애매한 미로를 통과하는 지도가 되어준다. 이 지도는 정말이지 먹힌다. 놀랍다. 과연, 어떤 지도길래……
자, 여기 지도가 있다. 예상대로 모서리 끝이 헐거워진 오래된 지도이다. 색이 누렇게 바랬고, 군데군데 닳아 나간 것이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왠지 모를 고풍스러움과 단단한 매무새에서 지혜의 냄새가 난다. 지도를 펼쳐보자.
크게 보면, 스토리는 대략 이렇다.
1부
“중년이란 무엇인가?” “
“마법의 상실. 왜냐고? 이유 없다. 그저 중년이니까.”
“너무한 거 아닌가?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데?”
2부
“남자는 여자가 되고, 여자는 남자가 되라.”
“이해가 잘 안 되는데?”
“멍청하기는. 남자는 수동적, 여자는 적극적이 되란 말이야. 여자의 역할이 중요해. 지혜롭고, 현명한 여자는 가정의 축복이지.”
“그게 끝인가?”
3부
“운명(죽음)을 받아들여. 그렇지 않으면 파멸하고 말 테니.”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게 뭔데?”
“순응하란 말이야. 비극은 필연이야.”
“어려운걸. 힌트를 하나만 더 줘.”
“베풂의 미덕.”
“그렇군.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아직도 모호해. 좀 더 해줄 말 없나?”
4부
“바라는 것도 많군. 좋아. 몇 가지 실천 방안을 알려주지. 중년을 슬기롭게 헤쳐가기 위한 6가지 제언.”
“첫째, 삶에서 배워라.
둘째, 악에 대해 관용해져라.
셋째, 유머를 배워라.
넷째, 고통에서 배워라.
다섯째, 영웅주의를 버려라.
여섯째, 결국 인간관계임을 배워라.”
여기까지가 책의 큰 그림이다. 그림이 잘 그려졌는지 모르겠다.
앞서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잠시 후에 다루겠다”고 했던 말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쯤이 좋겠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책의 의도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1)중년의 남녀가 가족과 일의 요구를 어떻게 아슬아슬하게 다루고 있는지, 2)또 자신에 대한 회의나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 어떻게 마음속에서 격투를 벌이는지, 3)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중년의 새롭고 깊이 있는 의미를 어떻게 발견하는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렇게 말이다.
번역상의 문제로 매끄럽게 읽히진 않지만, 무슨 말인지는 전해졌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중년의 문제, ‘가족과 일의 요구’, ‘스스로에 대한 회의와 이상•현실간의 갈등’,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결국 중년이란 무엇인가? 어떤 것이 중년의 문제를 해결해가는 슬기로움인가?” 이런 미로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안을 내놓으려는 것이 저자가 하려는 바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3가지 대결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남성 vs 여성’ ‘죽음 vs 삶’ ‘운명 vs 믿음’. 그리고…… 안타깝게도(?) 중년의 문제에 있어서 대결의 승자는 ‘여성’ ‘죽음’ ‘운명’이다. 중년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기이고, 그 받아들임을 거부할 경우 삶은 더 할 수 없는 비극이 된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그 받아들임에 대해서 좀더 실천적으로 풀어준다. 바로,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는 4부이다.
4부는 1부, 2부, 3부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실천방안이라 할 수 있다. “문제가 그런 것이었어? 그래 좋아. 알겠어. 그럼 구체적으로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라 보면 되겠다. 저자가 제시한 여섯 가지 실천방안을 약간 명, 살펴보는 것으로 논의를 마무리하자.
첫째, 삶에서 배워라. 이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인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설명이 될 듯 하다. “성숙한 성인은 책에서 배우는 것과 삶에서 배우는 것을 구분하며 후자가 더 실리적임을 안다.” 젊은이들은 세련된 미적 감각이나 시적 은유에 열광하지만, 중년은 그렇지 않다. 중년은 실용적이고 쓰임새 좋은 도구에 집중한다. 그럴싸한 이론보다는 삶의 지혜에 기대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삶의 지혜가 중년에게 대두되는 여러 가지 애매한 문제들을 슬기롭게 헤쳐갈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준다.
둘째, 악에 대해 관용해져라. 이것은 ‘운명에의 순응’과 관련된 가르침이다. 중년이 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 판단이 틀릴 수 있으며 상대방의 생각을 인정해 주어야 함을 깨닫는다. 이것은 자칫, 다른 사람의 악을 모른 척 해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본문에서 인용된 예시는 ‘교통 경찰관을 따돌리는 친구의 사악함’이다. 그 당시에는 친구를 비난했지만,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자신도 똑 같은 악을 범하고 있음을 보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는 얘기다. 중년이 되면서 ‘인간의 악함’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그것을 개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악을 통제하는 것일 뿐, 다른 사람의 악에 대해서는 관용해져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셋째, 유머를 배워라. 말 그대로다. 앞서 살펴본 바, 중년은 죽음과 운명에 순응해야 하는 시기이다. 이것은 극복의 문제가 아니라 한계의 문제이다. 중년에게는 피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불가피성의 문제가 대두되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유머다. 중년은 유머를 통해 분노를 웃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넷째, 고통에서 배워라. 중년이 되어서 얻는 가장 진지한 깨달음은 “세상에는 치료되지 않는 상처도 있고 낫지 않는 고통도 있다” 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이것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며, 중년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이것을 배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주저 앉아 슬퍼만 하고 있을 것인가? 그렇다. 이때 얻어지는 깨달음이 ‘치유와 재생’이다. 받아들임. 그곳에 치유와 재생이 있다.
다섯째, 영웅주의를 버려라. 우리는 모두 내재된 원시적 생명력이 있다. 이것은 절대 늙지 않는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매 순간 소년처럼 소리친다. “내가 있다구! 나에겐 꿈과 이상이 있어! 난 멈추지 않아! 난 살아 있다구!” 느지막한 중년의 어느 날, 소년처럼 소리치는 자신의 원시성과 조우하는 인간은 슬퍼진다. 현실과 이상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화해해야 한다. 영웅주의를 버리고 미친 듯이 날뛰는 소년을 가만히 잡아줘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생이란 열차는 외도, 범죄, 일탈 따위의 탈선을 하게 된다.
여섯째, 결국 인간관계임을 배워라. 중년은 많은 것을 배워 온 시기이다. 그리고 이제껏 배워왔던 모든 가르침들이 일제히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인간관계’이다. 인간은 결국 인간(人間: 사람과 사람 사이)인 것이다. 관계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특별히 부부관계에서.
4. 내가 저자라면
이야기
본문을 조금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해 보자.
“옛날 이야기란 어른들을 위해 어른들이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들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의 희망과 두려움과 지혜를 표현했다. 과거에는 옛날 이야기란 하나의 진지한 의사 소통 수단이었고 오늘날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하는 역할들을 옛날 이야기들이 담당했다. 이야기들은 새 소식과 오락과 시사 사건들을 제공하면서 청중들이 자신들의 삶을 반성하게끔 유도하기도 했다.” [14]
나는 책의 한 귀퉁이에 이렇게 적어 두었다. “글은 이렇게 써야 한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처럼. 훌륭한 글쓰기 요강이다.” 그리고는 별표를 세 개나 쳐 두었다. 얼마나 마음에 시원했으면……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 항상 고민한다. 논리적으로? 친절하게? 유쾌하게? 강력하게? 은유적으로? 문학적으로? 조금은 가볍게? 친근하게? 솔직히 지금도 확신은 없다. 더구나 어떻게 해야 답에 가까워질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훌륭한 선배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으는 것처럼, 많이 읽고, 많이 써보는 수 밖에.
헌데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특이한 발상이 떠올랐다. “그래! 이야기처럼 쓰는 거야!” 이런 발상이 튀어나온 배경은 대략 이렇다. 책의 중간 즈음을 읽고 있을 때였다. 문득, 동화를 읽을 때는 크게 집중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자의 해설부분을 읽을 때는 온 정신을 집중해도 놓치는 부분이 생기는 반면, 동화는 스치듯 읽어도 줄거리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다. “이야기에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이렇게 말이다.
물론, 이야기는 쉬운 내용을 담고 있고, 꼬리에 꼬리를 물 듯 내용이 이어지기 때문에 독자가 정신을 놓칠 염려가 없다. 더구나 갈등과 위기가 관심을 붙잡아주고, 유머와 문제해결이 마음을 시원케 해준다. 그래서 이야기를 읽을 때면 독자는 편안하다. 반면, 어떤 내용에 대한 주장이나 설명은 조금은 어려운 내용을 담게 되고, 때론 모호한 내용을 풀어내기 위해 장황해져야 하는 위험이 있다. 무언가를 설명하려다 보면, 가르치듯 쓰게 되고, 주장하려다 보면, 설득조로 문장을 맺게 된다. 독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지루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말인데, 이야기의 이런 강점을 살리고, 해설서의 이런 단점을 지우고 써보면 어떨까? 어려운 내용이라도 최대한 쉽게 쓰고, 연결성이 없다면 다리를 놓아 이어주고, 평이한 내용에는 갈등을 주고, 가끔은 유머러스하게, 가끔은 질문을 던져 놓고 다시 그것을 해결해 주는 식으로 쓰는 것이다. 모호한 내용은 최소화하고 가르치려 하기 보다는 비밀 이야기인 듯 꺼내 놓고, 설득하려 하기 보다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어떤가? 어디선가 벌써 나온 내용이라고? 맞다. 그러나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이번 기회에 “아하! 정말 그렇구나” 하는 것이다.
보물지도
밝혀둔 바, 나는 친절 예찬론자이다. 글쓰기에 있어 친절은 나의 지론이다. 글은 어두운 숲을 통과해야 하는 보물찾기와 같은 것이어서 지도가 꼭 필요하다. 그리고 그 지도는 친절할수록 좋다. 쓰는 사람은, “이 정도는 따라올 수 있겠지” 하며 마구 달려가선 안 된다. 중간 중간에 깃발을 꼽아주어야 하고, 필요하다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지금까지 어떤 길을 온 것이고 앞으로 어떤 길을 지나게 될지를 다시 한번 설명해 주어야 한다. 생각해 보면, 이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성의의 문제다.
저자는 시작하면서, (머리말이다) 책을 통해 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짚어주고 있다. 이것은 방향설정과 같다. “목적지가 저기이니, 독자들은 한눈 팔지 마시오” 하는 것이다. 이어 지도를 건네준다. (역시 머리말이다) “이 책은 이러이러하게 진행될 것이오. 여기에서는 이렇게, 여기에서는 이렇게, 또 저기에서는 저렇게 말이오.” 한다. 나는 머리말을 읽으며 이런 메모를 남겼다. “이사람 글 쓸 줄 안다.” (나와 같은 성향이라서 마음에 들었나 보다)
사실, 이 책은 그리 복잡한 구조가 아니다. 독자는 목차만 보고도 길을 잃을 염려가 전혀 없다. 내용도 비교적 평이해서(평이하게 쓴 것이지, 주제 자체가 평이한 것은 아니다) 저자의 의도가 어렵지 않게 읽힌다. 그런데도 저자는 다시 한번 친절을 베푼다. 137페이지였다. 별 어려움 없이 잘 읽어나가고 있는데, 다시 한번 지도가 나온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이러이러한 내용을 읽었다오. 이어지는 내용은 이미 설명 드린 것처럼, 이러이러한 내용이라오. 그럼 건승하시오.” 이렇게 말이다.
여기서 내 반응은 어땠을까? “이사람 괜한 일을 하네 그려. 지면만 넓디 차지하고 모하는 짓이여.” 이랬을까? 아니다. “역시, 이사람 글 쓸 줄 안다. 아주 명쾌하게 읽힌다.” 이랬다. 글쓰기에 대해서라면, 과잉친절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같은 내용도 표현을 바꿔서 여러 번 해주고, 탈선 될 법한 모호함은 자꾸자꾸 붙잡아 줘야 한다. 길어져도 상관없다. 글이 길면 안 읽는다고? 천만에. 모호하게 쓰면 안 읽는다. 명쾌하게 읽힌다면, 독자는 끝까지 따라온다. 길이 보이는데 왜 멈춰서겠는가?
흐르는 강물처럼
조셉 캠벨이 쓴 책 중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란 것이 있다. 역시, 어떤 이야기(신화)를 소개하고 그것을 풀이하는 식으로 쓴 책이다. 이 책, <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에서처럼 정형화하지는 않았지만, 두 책의 전개 방식이 비슷한 셈이다. 둘 다, 이야기(동화, 신화)의 은유를 풀어, 그 상징의 의미로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달아둔 제목(흐르는 강물처럼)이 말해주듯,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책의 흐름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특별히 캠벨의 책을 언급한 것은, 그 전개 방식이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흐름의 자연스러움’이라는 측면에서 두 책이 판이하게 갈리고 있으며, 그런 차이가 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음을 견주어 밝혀보기 위함이다.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캠벨의 책은 부자연스럽고, 이 책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캠벨의 책도 억지스러운 내용은 많지 않다. (성경을 인용하는 내용은 석연찮은 부분이 꽤 있다) 그런데도 그의 책은 어딘지 모르게 어렵고, 모호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다루고 있는 주제가 어려웠기에? ‘신화’와 ‘중년’. 어느 것이 어려운가? 인간의 의식을 탐구해야 하고, 명확하게 결론을 내리려면 ‘주관적인 내용’이 곁들여져야 한다는 측면에서 난이도는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
나의 결론은 ‘초점’이다. 캠벨의 책은 다루려는 범위가 너무 넓다. 끌어온 이야기(신화)도 너무 많고, 막상 소개된 것들은 짧게 토막이 나 있다. 이 이야기를 했다가 저 이야기를 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가 아까 했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간다. 딴에는 연결된 내용이라고 생각하지만, 독자들이 따라가기에는 너무 벅차다.
흐름을 쫓기가 힘들다고 해야 할까? 그저, 여기 저기서 은유적 표현들만 붙들어 매 놓고 “이것 봐라. 얘들이 의미하는 바는 이런 것이다. 아까 그 이야기 했지? 그게 바로 이 얘기다. 그리고 이런 얘기도 있다. 또 이런 얘기도 있는데……” 라고 한다. 아주 집중하지 않으면, “이사람…… 아까는 이랬다 해놓고, 이제는 또 저랬다 하네? 맞는 말 같기는 한데, 좀 어지럽군. 여기에 대해 뭔가 설명이 좀 있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부자연스럽게 읽히는 것이 당연하다.
반면, 이 책의 저자는 논의의 초점을 양껏 좁혀두었다. 본문에서 인용한다.
“중년이 가야 할 여행은 길고 복잡하다. 중년의 이야기는 아주 충실하게 이 여행의 여러 단계를 반영하지만 여기서 모든 중요한 이야기들을 다 담을 수는 없다. 특히 나는 남자들이 중년에 마음 깊숙이 숨어 있는 남성성과 만날 때 겪는 일과, 여성들이 자신의 또 다른 여성성과 조우할 때 느끼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이야기들은 뺐다.” [303]
그렇다. 책 한 권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모두 전하려 하다간, 아무것도 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버리고 만다. 이런 면에서 알렌B. 치넨은 현명했다. 그녀는 명확함을 위해 정확함을 희생했으며, 그것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주요했다. 만약, 그녀의 말대로 ‘중년의 남녀가 각각 남성성과 여성성을 발견하는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좀 더 정확한 이야기가 되긴 했겠지만, 스토리의 일관성은 흐트러졌을 것이고, 중언부언을 막기 위해 많은 부연 설명이 더해져야 했을 것이다. 쓸데없는 못질에 촌스러운 글이 되었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초점’이다. 모든 소재는 하나의 주제를 바라보도록 집중적으로 써야 한다. 그래야 자연스럽다. 방향이 흐트러진 녀석들은 과감히 쳐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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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랜B. 치넨 / 이나미 옮김
1. 작가에 대하여
#1
“전에 장주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것이 분명히 나비였다. 스스로 즐겁고 뜻대로라 장주인 줄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조금 뒤에 문득 깨어보니 분명히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호접몽>, 장자의 제물론편에서.
4월이 끝났다. 나는 장자의 나비가 되어 신나게 놀았다. 매년 그랬다. 따사로움. 그 예쁜 이름이 “오라. 오라.” 하는 통에 가슴이 쿵쿵댔다. 꽃도 되어보고 나무도 되어보고 바람도 되어본다. 나비가 되었으니까, 꽃에 앉으면 꽃이고 나무를 지나면 나무고 바람에 흔들리면 바람이다. 어차피 꿈처럼 하는데야 뭐든 어떠하랴.
하늘하늘 깔깔대며 정신 없이 나비 꿈을 꾸고 나니, 벌서 5월이다. 그 5월의 첫째 날. 누군가 마음을 나누어 편지를 보내왔다. 시작과 끝, 하루와 습관, 그리고 나에 대해서. 편지를 쥐어 들고 돌아오는 길에, 이제는 습관처럼 자리한 독서에 대해 생각한다.
#2
어차피 사람을 읽는 것이리라.
사람에 대한 시를 써 보았는지 모르겠다. 가끔 사람에 대해 쓴다. 어떻게 써야 할지는 간단하다. 써야 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 사람의 ‘어떤 면’. 또 하나는 그 사람이 겪은 ‘사건’. 이 두 가지를 적당히 늘어 놓다 보면, 그 사람이 가진 ‘뭔가’가 드러난다. 우린 그걸 읽는 것이다.
이번에는 하나만 골라보자. 나는 ‘사건’으로 하겠다. 사람들은 스토리를 좋아한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겪은 사건으로 풀어가는 것이 제격이다. 사건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입을 연다. 생동감 있는 목소리로.
#3
사건 하나. C.G 융을 만나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제일 먼저 프로이트와 융을 이해해야 한다. 그녀도 그랬다. 스탠포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준비하면서, 그녀는 프로이트와 융의 차이에 주목했다.
“프로이트는 어떤 증상의 원인을 개인의 무의식에서 찾아 내려 하는군. 그런데 그 무의식이란 것이 좀 흉악하게 묘사되고 있군. 욕망이나 성적 금기 따위의 금지된 소망을 숨겨주고, 회피하는 장소로 정의하고 있어. 그렇다면 융은? 증상의 원인을 개인의 무의식에서 찾아내려 하는 것은 같군. 그러나 그 무의식에 대한 정의가 프로이트와는 완전히 달라. 융에 의하면, 무의식은 오히려 억압되고 무시된 문제를 끄집어내어 의식의 한계를 메워주는 것이지.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이 숨고 싶은 동굴이라면, 융에게 무의식은 표출하고 싶은 화산인 셈이야.
“그래. 이런 차이도 있군.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으로 정의하는 반면, 융은 그것을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집단의 공간으로 정의하고 있어. 비교 신화학의 영향 때문일까? 융은 누구나 경험하는 신비스러운 현상에 대해 존중하고 있는 것 같아. 프로이트는 그 신비로움을 개인의 치기 정도로 폄하하는 데 반해서 말이야.”
“이들이 작업했던 환경도 매우 독특하군. 프로이트는 대개 젊은이들과 함께 일했고, 융은 노년층과 함께 일했어. 이들의 이론이 갈린 것은 당연해. 젊은 남녀는 전형적으로 고통스런 문제를 부정하고 회피하며, 그들의 꿈은 이런 억압을 반영하지. 하지만 중년은 그들의 고통과 비극을 인정하고 거기서 운명, 죽음 따위의 한계와 화해하는 시기 아닌가? 당연히 그들의 꿈은 재생, 해결, 치유 따위의 화두를 반영하게 되는 거지.”
“융의 방식이 좋다. 더 아름답고, 인간적이야. 프로이트 식이라면, 현실적이고 이성적일 수는 있겠지. 하지만 차가운 머리보다는 뜨거운 가슴이 좋다.”
(치넨은 알려진 바, 융 학파에 속한다. 그녀는 융의 개념을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 그녀의 책에서는, 융의 분석심리학 개념들이 쉴새 없이 불려 나온다. 이 책, <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에서 그의 개념은 적어도 한 장(章)에 한 번씩은 인용되고 있다.)
사건 둘. 몇 권의 책을 쓰다
책을 쓴다는 것은 개인사에 있어, 거대한 사건이다. 혹자는 자식을 낳는 것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녀에게 어떤 출산이 있었는지 알아보자.
<언제나 그렇게>
<젊은 여성을 위한 심리 동화>
<영웅을 넘어서>
<어른스러움의 진실>
그리고 이 책, <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
열거 한 책 중에서 내가 읽은 책은 <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뿐이다. 읽은 책을 기준으로 논의를 확장시킬 뿐 다른 도리가 없다. 기준점에서 벗어난 논의는 모두 추측이다.
<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은 그녀의 거대 관심사인 ‘중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서른 이후, 남자와 여자에게는 각각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또 공통의 문제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옳게 해결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재미있게 썼다. 특이한 것은 전개방식인데, 세계의 동화, 민담, 전설, 신화 따위에서 알맞은 이야기를 골라와 주제에 맞게 나름의 논리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총 16개의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추측 성 발언이 되고 말겠지만,) 그녀의 주제는 한결 같다. 그것은 바로 ‘중년의 문제’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정녕 무엇인가? 젊은이들의 이야기(영웅 스토리)인 <잠자는 숲 속의 공주>와 <개구리 왕자>가 늙어서는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가? 나이가 들어서도, 혹은 죽음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서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가부장적인 사회의 틀 안에서 젊은 여성들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중년을 준비할 수 있을까?
이렇듯 그녀가 출산한 5개의 사건은 하나 같이 ‘중년’이라는 화두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풀이하고 있는 중년의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이해, 받아들임, 베풂, 나눔, 인정’. 그녀는 그런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의미하는 바는, 어쩌면 ‘사랑’이 아닐까? 그림 형제의 표현처럼 ‘짐을 지고 가는 당나귀’에 대한 애틋한 사랑 말이다.
사건 셋. 동화를 즐기다
동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녀는 동화를 좋아한다. 그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7,000여 편의 동화를 수집했다. 그리고 가장 알맞은 것으로 16편을 선정했다. 옛날 이야기들이 늘 상 그렇듯, 이 책에 소개 된 이야기들도 대부분이 아기자기하고 잔잔하다.
동화의 특징을 좀더 열거해 보자. (그럼 그녀가 어떤 위인인지 좀 더 드러날 테니 말이다) 동화는 친절하게 쓰여져 있다. 차분한 어조이고, 순수하며, 폭력을 싫어한다. 때론 비극적이지만, 그 안에는 지혜가 있으며, 희극적일 때에도 그저 유쾌함에서 그치지 않고 교훈을 주려 한다. 특별한 이야기 보다는 뻔한 이야기이고, 그렇기 때문에 실용적이고 더욱 진실되다. 설명하려 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논하려 하지 않고 그저 드러낸다. 어떤가? 그녀가 보이는가?
힌트를 하나 더 주자면, 그녀의 책이 꼭 그렇다. 그녀는 동화처럼 쓴다.
#4
그 외의 잡다한 기록
1952년 출생. 정신 의학 박사. 병원 원장. 페미니스트. 미국. 작가. 추상적. 주관적. 이야기적. 자신을 드러낼 정도로 정신적으로 건강함. 인간미가 있음. 그리고 중년임(집필 시기가).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머리말
왕자가 늙어 대머리가 되고 공주가 중년의 위기에 처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13]
옛날 이야기란 어른들을 위해 어른들이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들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의 희망과 두려움과 지혜를 표현했다. 과거에는 옛날 이야기란 하나의 진지한 의사 소통 수단이었고 오늘날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하는 역할들을 옛날 이야기들이 담당했다. 이야기들은 새 소식과 오락과 시사 사건들을 제공하면서 청중들이 자신들의 삶을 반성하게끔 유도하기도 했다. [14]
사람들에게 사실이나 이념들을 들려주어라. 그러면 그들의 마음이 밝아질 것이다.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어라. 그러면 그들의 영혼과 맞닿을 것이다. 하시드(기원전 2세기 헬레니즘에 반대하는 유대 집단) 속담 [15]
이야기란 듣는 사람의 가치관이나 이성적인 사고를 일단 멈추게 하고 사람을 자유롭게 놔두도록 하는 일종의 주문처럼 작용할 수 있다. [16]
제1부 서른 이후, 젊음의 마법을 풀어 놓다
그의 수수께끼 같은 조수가 다시 온 것입니다. [30]
인생의 시간 동안에: 좋은 비유 [36]
이를 자크는 잘 다듬은 창조성이라고 이야기한다. 예술가들은 불완전한 영감으로 일단 일을 시작하지만 그 생각을 갖고 작업에 임하여 또 다시 재 작업 한다. 젊은이들의 특징인 발작적인 창조적 불꽃은 계속되는 일의 습관으로 진화해서 성숙하고 기댈 만한 기술로 변하는 것이다. 만약 젊은이들의 창조성을 99퍼센트의 영감이라고 한다면 성숙한 창조성은 99퍼센트의 땀이다. [39]
젊었을 때 사람들은 보통 개인의 성취와 만족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중년이 되면 보다 인본주의적인 관심을 가지며 많은 시간을 남에게 베푸는 일에 할애하게 된다. 성공적인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하면서도 자기보다 젊은 사람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아끼지 않는다. [54]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 이야기 [56]
마법의 상실은 슬픈 게 아니라 발달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일 뿐이고 이를 거절할 때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상실이란 단순히 마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서 가족으로 또 다음 세대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회로 변하는 것뿐이다. [61]
제2부 서른 이후, 남자가 가는 길과 여자가 가는 길
도둑이 그녀의 재산을 훔쳤기 때문에 반대로 그녀는 도둑의 마음을 훔친 것이다. [80]
중년쯤 되어 문제가 생기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부의 악한들을 찾아 비난하는 것을 그만두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점을 훨씬 더 쉽게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방식을 바꾼다. [82]
결국 남자가 자신들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했을 때만이 여성들은 숨어 있는 자신들의 힘과 재능을 발견해 내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해 일어나는 것이다. [110]
여성들이 중년이 되어 자기 확신을 선언하는 것은 개인적인 성취의 문제일 뿐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의 필요성 때문이기도 하다. [122]
남자들은 대개 작은 실망들을 여러 번 겪고 나서 자신들이 젊었을 때 가졌던 야망들을 줄여나간다. 그리고 극적인 특별한 위기 없이 수년 간 적당히 타협해 나간다. [125]
제3부 서른 이후, 운명을 받아들이다
죽음의 사자 이야기: 좋은 비유 [138]
자신의 병이 충분한 경고가 되지 못한다면 중년에 친구와 친척의 죽음을 맛보는 것은 죽음의 문제를 일깨우게 할 수 있다. 사별은 점점 흔해지고 심상치 않은 일이 된다. 죽음으로 끝나는 행렬에서 부모와 늙은 친구들이 가듯이 중년의 남녀는 결국 가게 된다. [139]
개인이 자기 본위의 관심에만 쌓여 있는 한 죽음은 재앙이 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자아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만약에 개인이 사적인 관심을 초월하여 개인적인 이익을 초월한 것에 스스로를 위임하게 된다면 – 예를 들어 자신의 아이들이나 사회적 활동 – 죽음은 덜 위협적이게 된다. [139]
슬픔의 식사 이야기: 좋은 비유 [140]
아들을 잃은 부모는 단 하나의 위안을 가지게 된다. 다른 모든 사람들도 유사한 슬픔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141]
역설적으로 죽음은 삶에 대한 실질적인 지혜를 제공한다. [152]
중국의 꿈 이야기: 좋은 비유 [155]
오이디푸스 신화: 좋은 비유 [180]
중년의 오이디푸스적 질투를 이기지 못하고 베풂의 미덕을 발전시키는 데 실패한 사람은 자신의 괴로움과 분노로 소모되고 만다. [183]
오이디푸스 신화: 좋은 비유 [186]
젊은 남녀는 그들이 부모가 되었을 때 그들 자신의 한계를 발견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부모가 사랑이나 보호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더 이상 사랑과 보호를 줄 수가 없었음을 깨닫는다. 이것은 실패와 죄의 문제가 아니라 한계와 비극의 문제이다. 젊은이의 분노는 그래서 탄식과 슬픔과 분노로 바뀐다. 겸손과 동정은 비극적 통찰에서 나온다. [187]
제4부 서른 이후, 삶을 깨닫다
성숙한 성인은 책에서 배우는 것과 삶에서 배우는 것을 구별하며 후자가 그들에게는 더 실리적이라는 것을 안다. [198]
예방은 치료보다 낫지만 또한 어려운 것이다. [199]
지혜에 대한 이야기: 좋은 비유 [200]
공감은 과학과 관련된 똑같은 추상적 사고를 사용하며 단지 사물과 사고보다는 사람과 감정을 다룬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201]
바르겐슈타인이 결론 내리기를, 철학은 그가 초기에 믿었듯이 영원한 진리를 제공해 주지 못했다. 철학은 단지 실용적 도구이고 그것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과 의사 소통하는 데 있어서 문제를 해결하고 복잡한 사고를 명확히 해주는 것이다. 즉 “철학은 실용적이다” 라는 것이다. [202]
새 길을 가려고 옛길을 버리지 마시오, 다른 사람의 일에 끼어들지 마시오, 그 다음날까지 분노를 참으시오. [207]
젊은이들은 악을 억압하고 부정한다. 청소년들에게 인기 있는 공포 영화들은 젊은이들이 악을 회피하고 있음을 극화한다. [211]
중년이 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도덕적 판단이 틀릴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다른 윤리적 원칙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214]
중년들이 종종 느끼는 유혹, 즉 자신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하는 태도 [216]
그가 세상을 바꿀 수 없고 모든 잘못을 개혁할 수는 없지만 그는 최소한 그 자신의 악은 통제할 수 있다. [216]
농담과 기지는 참을 수 없고 폭력적인 감정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정서로 바꾸어놓는다. [227]
유머는 성숙의 징표다. [228]
유머는 대처 능력 중 가장 고귀하고 성숙한 방식이다. (프로이트) [228]
중년 여성들의 가장 큰 과제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자기를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229]
치고 빠지는 것, 즉 싸우고 도망가는 행동은 젊은이들 이야기에 전형적으로 나오는 테마들이다. 그러나 중년에게는 그런 호사를 누릴 여유가 없다. 그들은 무능한 권위체제에 대해 분노를 표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들이 책임을 지고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229]
젊은이들은 치료되지 않는 상처도 있고 낫지 않는 고통도 있다는 인생의 어두운 한 부분을 보려고 애쓰지 않는다. 반면에 중년들은 인간 조건들의 비극적인 차원을 경험하고 나서야 보다 깊은 동정심을 배우게 된다. [245]
치유와 재생이 절망과 고통 속에 감추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50]
배움 (…) 이는 중년 남자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다. [276]
중년의 원형적 통찰은 인간 관계에 근거한다. [286]
에필로그
중년이란, 짐을 잔뜩 싣고 가는 가축에 불과한 당나귀일 뿐이다. (그림형제, <인생의 시간 동안>) [295]
(중년에 이르러) 남자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하고 자신들이 갖고 있는 유약함에 대해 인정하며 관계의 중요성을 알기 시작한다. [296]
대부분 남녀 모두를 가장 진지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 자신이 희생자일 뿐 아니라 악한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고 악함이 남들뿐 아니라 그 자신의 마음에도 존재한다는 점을 배우는 일이다. 자신의 한계에 대한 자각이 젊은 시절의 끝없는 희망을 대신한다. 운명이 믿음을 가리게 하는 것이다. [297]
젊은이들은 너무 확신에 찬 것이 문제라면, 중년들은 너무 믿음을 적게 가진다는 함정이 있다. [297]
역자 후기
이 책의 번역은 마치 도둑질하듯 사뭇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306]
3. 여신(타고남은 불기운)
“30대 이후 마음의 위기를 다스리는 16가지 이야기”
책의 선전문구이다. 이제와 하는 이야기이지만, 제대로 선전했다. “잘했다, 못했다”의 의미가 아니라, 담고 있는 내용을 가감 없이 잘 표현했다는 말이다. 책의 내용은 정말 그렇다. 그런, 열 여섯 가지 이야기이다.
저자는 무려 7,000여 편의 동화, 민담, 전설, 신화를 수집했다고 한다. 본문에 소개 된 16개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서 말이다. (1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장당 하나의 동화, 민담, 전설, 신화 따위가 소개되고 있다) 0.2%의 확률을 깨고 저자의 가슴에 안착한 이야기들. 과연 어떤 이야기들일까? 궁금하지 않은가? 게다가 이 이야기들은 메말라 굳어버린 중년의 가슴에 따스한 온기를 담은 희망의 불씨를 물어다 준다는데……
구성은 대략 이렇다.
머리말
제1부 서른 이후, 젊음의 마법을 풀어놓다 (요정과 구두장이 외 2편)
제2부 서른 이후, 남자가 가는 길과 여자가 가는 길 (고집쟁이 남편과 아내 외 2편)
제3부 서른 이후, 운명을 받아들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왕 외 3편)
제4부 서른 이후, 삶을 깨닫다 (현명한 대답 외 5편)
에필로그 – 중년의 길
역자 후기
머리말과 에필로그를 제외한 본문은 4부, 총 16개의 장(章)으로 되어 있다. 각 장에는 동화나 민담 따위의 옛날 이야기가 하나씩 소개된다. 저자는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숨은 뜻(은유적 표현)을 드러내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잠시 후에 다루자)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제1부의 첫째 장인, ‘젊음의 마법을 상실하는 중년’에는 독일 동화가 한 편 소개된다. ‘요정과 구두장이’라는 제목의 동화이다. 요정이 가난한 구두장이를 도와주어 훌륭한 구두를 만들 수 있게 해주고, 그것으로 이들 부부는 곧 부자가 되지만, 어떤 금기를 범함으로써 요정의 도움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해설은 대략 이렇다. “주인공이 부부인 것은 중년을 다룬 이야기임을 알려준다. 요정의 도움은 ‘젊은 시절’이라는 마법을 상징하며, 금기를 범하고 요정이 떠나는 것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젊음을 잃어버리는 마법의 상실을 의미한다. 벌거벗은 요정들은 일, 책무, 사회적 관습 따위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운 순수성을 상징하며, 이것이 떠나갔다는 것은 중년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새로운 장이 시작될 때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한 편씩 소개되고, 그럴싸한 해설이 이어진다. 억지스런 풀이는 거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지는 동화 해설이, 저자의 의도대로, ‘중년의 문제’라는 애매한 미로를 통과하는 지도가 되어준다. 이 지도는 정말이지 먹힌다. 놀랍다. 과연, 어떤 지도길래……
자, 여기 지도가 있다. 예상대로 모서리 끝이 헐거워진 오래된 지도이다. 색이 누렇게 바랬고, 군데군데 닳아 나간 것이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왠지 모를 고풍스러움과 단단한 매무새에서 지혜의 냄새가 난다. 지도를 펼쳐보자.
크게 보면, 스토리는 대략 이렇다.
1부
“중년이란 무엇인가?” “
“마법의 상실. 왜냐고? 이유 없다. 그저 중년이니까.”
“너무한 거 아닌가?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데?”
2부
“남자는 여자가 되고, 여자는 남자가 되라.”
“이해가 잘 안 되는데?”
“멍청하기는. 남자는 수동적, 여자는 적극적이 되란 말이야. 여자의 역할이 중요해. 지혜롭고, 현명한 여자는 가정의 축복이지.”
“그게 끝인가?”
3부
“운명(죽음)을 받아들여. 그렇지 않으면 파멸하고 말 테니.”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게 뭔데?”
“순응하란 말이야. 비극은 필연이야.”
“어려운걸. 힌트를 하나만 더 줘.”
“베풂의 미덕.”
“그렇군.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아직도 모호해. 좀 더 해줄 말 없나?”
4부
“바라는 것도 많군. 좋아. 몇 가지 실천 방안을 알려주지. 중년을 슬기롭게 헤쳐가기 위한 6가지 제언.”
“첫째, 삶에서 배워라.
둘째, 악에 대해 관용해져라.
셋째, 유머를 배워라.
넷째, 고통에서 배워라.
다섯째, 영웅주의를 버려라.
여섯째, 결국 인간관계임을 배워라.”
여기까지가 책의 큰 그림이다. 그림이 잘 그려졌는지 모르겠다.
앞서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잠시 후에 다루겠다”고 했던 말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쯤이 좋겠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책의 의도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1)중년의 남녀가 가족과 일의 요구를 어떻게 아슬아슬하게 다루고 있는지, 2)또 자신에 대한 회의나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 어떻게 마음속에서 격투를 벌이는지, 3)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중년의 새롭고 깊이 있는 의미를 어떻게 발견하는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렇게 말이다.
번역상의 문제로 매끄럽게 읽히진 않지만, 무슨 말인지는 전해졌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중년의 문제, ‘가족과 일의 요구’, ‘스스로에 대한 회의와 이상•현실간의 갈등’,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결국 중년이란 무엇인가? 어떤 것이 중년의 문제를 해결해가는 슬기로움인가?” 이런 미로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안을 내놓으려는 것이 저자가 하려는 바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3가지 대결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남성 vs 여성’ ‘죽음 vs 삶’ ‘운명 vs 믿음’. 그리고…… 안타깝게도(?) 중년의 문제에 있어서 대결의 승자는 ‘여성’ ‘죽음’ ‘운명’이다. 중년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기이고, 그 받아들임을 거부할 경우 삶은 더 할 수 없는 비극이 된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그 받아들임에 대해서 좀더 실천적으로 풀어준다. 바로,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는 4부이다.
4부는 1부, 2부, 3부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실천방안이라 할 수 있다. “문제가 그런 것이었어? 그래 좋아. 알겠어. 그럼 구체적으로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라 보면 되겠다. 저자가 제시한 여섯 가지 실천방안을 약간 명, 살펴보는 것으로 논의를 마무리하자.
첫째, 삶에서 배워라. 이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인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설명이 될 듯 하다. “성숙한 성인은 책에서 배우는 것과 삶에서 배우는 것을 구분하며 후자가 더 실리적임을 안다.” 젊은이들은 세련된 미적 감각이나 시적 은유에 열광하지만, 중년은 그렇지 않다. 중년은 실용적이고 쓰임새 좋은 도구에 집중한다. 그럴싸한 이론보다는 삶의 지혜에 기대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삶의 지혜가 중년에게 대두되는 여러 가지 애매한 문제들을 슬기롭게 헤쳐갈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준다.
둘째, 악에 대해 관용해져라. 이것은 ‘운명에의 순응’과 관련된 가르침이다. 중년이 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 판단이 틀릴 수 있으며 상대방의 생각을 인정해 주어야 함을 깨닫는다. 이것은 자칫, 다른 사람의 악을 모른 척 해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본문에서 인용된 예시는 ‘교통 경찰관을 따돌리는 친구의 사악함’이다. 그 당시에는 친구를 비난했지만,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자신도 똑 같은 악을 범하고 있음을 보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는 얘기다. 중년이 되면서 ‘인간의 악함’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그것을 개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악을 통제하는 것일 뿐, 다른 사람의 악에 대해서는 관용해져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셋째, 유머를 배워라. 말 그대로다. 앞서 살펴본 바, 중년은 죽음과 운명에 순응해야 하는 시기이다. 이것은 극복의 문제가 아니라 한계의 문제이다. 중년에게는 피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불가피성의 문제가 대두되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유머다. 중년은 유머를 통해 분노를 웃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넷째, 고통에서 배워라. 중년이 되어서 얻는 가장 진지한 깨달음은 “세상에는 치료되지 않는 상처도 있고 낫지 않는 고통도 있다” 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이것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며, 중년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이것을 배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주저 앉아 슬퍼만 하고 있을 것인가? 그렇다. 이때 얻어지는 깨달음이 ‘치유와 재생’이다. 받아들임. 그곳에 치유와 재생이 있다.
다섯째, 영웅주의를 버려라. 우리는 모두 내재된 원시적 생명력이 있다. 이것은 절대 늙지 않는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매 순간 소년처럼 소리친다. “내가 있다구! 나에겐 꿈과 이상이 있어! 난 멈추지 않아! 난 살아 있다구!” 느지막한 중년의 어느 날, 소년처럼 소리치는 자신의 원시성과 조우하는 인간은 슬퍼진다. 현실과 이상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화해해야 한다. 영웅주의를 버리고 미친 듯이 날뛰는 소년을 가만히 잡아줘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생이란 열차는 외도, 범죄, 일탈 따위의 탈선을 하게 된다.
여섯째, 결국 인간관계임을 배워라. 중년은 많은 것을 배워 온 시기이다. 그리고 이제껏 배워왔던 모든 가르침들이 일제히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인간관계’이다. 인간은 결국 인간(人間: 사람과 사람 사이)인 것이다. 관계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특별히 부부관계에서.
4. 내가 저자라면
이야기
본문을 조금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해 보자.
“옛날 이야기란 어른들을 위해 어른들이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들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의 희망과 두려움과 지혜를 표현했다. 과거에는 옛날 이야기란 하나의 진지한 의사 소통 수단이었고 오늘날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하는 역할들을 옛날 이야기들이 담당했다. 이야기들은 새 소식과 오락과 시사 사건들을 제공하면서 청중들이 자신들의 삶을 반성하게끔 유도하기도 했다.” [14]
나는 책의 한 귀퉁이에 이렇게 적어 두었다. “글은 이렇게 써야 한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처럼. 훌륭한 글쓰기 요강이다.” 그리고는 별표를 세 개나 쳐 두었다. 얼마나 마음에 시원했으면……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 항상 고민한다. 논리적으로? 친절하게? 유쾌하게? 강력하게? 은유적으로? 문학적으로? 조금은 가볍게? 친근하게? 솔직히 지금도 확신은 없다. 더구나 어떻게 해야 답에 가까워질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훌륭한 선배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으는 것처럼, 많이 읽고, 많이 써보는 수 밖에.
헌데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특이한 발상이 떠올랐다. “그래! 이야기처럼 쓰는 거야!” 이런 발상이 튀어나온 배경은 대략 이렇다. 책의 중간 즈음을 읽고 있을 때였다. 문득, 동화를 읽을 때는 크게 집중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자의 해설부분을 읽을 때는 온 정신을 집중해도 놓치는 부분이 생기는 반면, 동화는 스치듯 읽어도 줄거리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다. “이야기에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이렇게 말이다.
물론, 이야기는 쉬운 내용을 담고 있고, 꼬리에 꼬리를 물 듯 내용이 이어지기 때문에 독자가 정신을 놓칠 염려가 없다. 더구나 갈등과 위기가 관심을 붙잡아주고, 유머와 문제해결이 마음을 시원케 해준다. 그래서 이야기를 읽을 때면 독자는 편안하다. 반면, 어떤 내용에 대한 주장이나 설명은 조금은 어려운 내용을 담게 되고, 때론 모호한 내용을 풀어내기 위해 장황해져야 하는 위험이 있다. 무언가를 설명하려다 보면, 가르치듯 쓰게 되고, 주장하려다 보면, 설득조로 문장을 맺게 된다. 독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지루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말인데, 이야기의 이런 강점을 살리고, 해설서의 이런 단점을 지우고 써보면 어떨까? 어려운 내용이라도 최대한 쉽게 쓰고, 연결성이 없다면 다리를 놓아 이어주고, 평이한 내용에는 갈등을 주고, 가끔은 유머러스하게, 가끔은 질문을 던져 놓고 다시 그것을 해결해 주는 식으로 쓰는 것이다. 모호한 내용은 최소화하고 가르치려 하기 보다는 비밀 이야기인 듯 꺼내 놓고, 설득하려 하기 보다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어떤가? 어디선가 벌써 나온 내용이라고? 맞다. 그러나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이번 기회에 “아하! 정말 그렇구나” 하는 것이다.
보물지도
밝혀둔 바, 나는 친절 예찬론자이다. 글쓰기에 있어 친절은 나의 지론이다. 글은 어두운 숲을 통과해야 하는 보물찾기와 같은 것이어서 지도가 꼭 필요하다. 그리고 그 지도는 친절할수록 좋다. 쓰는 사람은, “이 정도는 따라올 수 있겠지” 하며 마구 달려가선 안 된다. 중간 중간에 깃발을 꼽아주어야 하고, 필요하다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지금까지 어떤 길을 온 것이고 앞으로 어떤 길을 지나게 될지를 다시 한번 설명해 주어야 한다. 생각해 보면, 이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성의의 문제다.
저자는 시작하면서, (머리말이다) 책을 통해 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짚어주고 있다. 이것은 방향설정과 같다. “목적지가 저기이니, 독자들은 한눈 팔지 마시오” 하는 것이다. 이어 지도를 건네준다. (역시 머리말이다) “이 책은 이러이러하게 진행될 것이오. 여기에서는 이렇게, 여기에서는 이렇게, 또 저기에서는 저렇게 말이오.” 한다. 나는 머리말을 읽으며 이런 메모를 남겼다. “이사람 글 쓸 줄 안다.” (나와 같은 성향이라서 마음에 들었나 보다)
사실, 이 책은 그리 복잡한 구조가 아니다. 독자는 목차만 보고도 길을 잃을 염려가 전혀 없다. 내용도 비교적 평이해서(평이하게 쓴 것이지, 주제 자체가 평이한 것은 아니다) 저자의 의도가 어렵지 않게 읽힌다. 그런데도 저자는 다시 한번 친절을 베푼다. 137페이지였다. 별 어려움 없이 잘 읽어나가고 있는데, 다시 한번 지도가 나온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이러이러한 내용을 읽었다오. 이어지는 내용은 이미 설명 드린 것처럼, 이러이러한 내용이라오. 그럼 건승하시오.” 이렇게 말이다.
여기서 내 반응은 어땠을까? “이사람 괜한 일을 하네 그려. 지면만 넓디 차지하고 모하는 짓이여.” 이랬을까? 아니다. “역시, 이사람 글 쓸 줄 안다. 아주 명쾌하게 읽힌다.” 이랬다. 글쓰기에 대해서라면, 과잉친절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같은 내용도 표현을 바꿔서 여러 번 해주고, 탈선 될 법한 모호함은 자꾸자꾸 붙잡아 줘야 한다. 길어져도 상관없다. 글이 길면 안 읽는다고? 천만에. 모호하게 쓰면 안 읽는다. 명쾌하게 읽힌다면, 독자는 끝까지 따라온다. 길이 보이는데 왜 멈춰서겠는가?
흐르는 강물처럼
조셉 캠벨이 쓴 책 중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란 것이 있다. 역시, 어떤 이야기(신화)를 소개하고 그것을 풀이하는 식으로 쓴 책이다. 이 책, <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에서처럼 정형화하지는 않았지만, 두 책의 전개 방식이 비슷한 셈이다. 둘 다, 이야기(동화, 신화)의 은유를 풀어, 그 상징의 의미로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달아둔 제목(흐르는 강물처럼)이 말해주듯,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책의 흐름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특별히 캠벨의 책을 언급한 것은, 그 전개 방식이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흐름의 자연스러움’이라는 측면에서 두 책이 판이하게 갈리고 있으며, 그런 차이가 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음을 견주어 밝혀보기 위함이다.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캠벨의 책은 부자연스럽고, 이 책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캠벨의 책도 억지스러운 내용은 많지 않다. (성경을 인용하는 내용은 석연찮은 부분이 꽤 있다) 그런데도 그의 책은 어딘지 모르게 어렵고, 모호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다루고 있는 주제가 어려웠기에? ‘신화’와 ‘중년’. 어느 것이 어려운가? 인간의 의식을 탐구해야 하고, 명확하게 결론을 내리려면 ‘주관적인 내용’이 곁들여져야 한다는 측면에서 난이도는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
나의 결론은 ‘초점’이다. 캠벨의 책은 다루려는 범위가 너무 넓다. 끌어온 이야기(신화)도 너무 많고, 막상 소개된 것들은 짧게 토막이 나 있다. 이 이야기를 했다가 저 이야기를 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가 아까 했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간다. 딴에는 연결된 내용이라고 생각하지만, 독자들이 따라가기에는 너무 벅차다.
흐름을 쫓기가 힘들다고 해야 할까? 그저, 여기 저기서 은유적 표현들만 붙들어 매 놓고 “이것 봐라. 얘들이 의미하는 바는 이런 것이다. 아까 그 이야기 했지? 그게 바로 이 얘기다. 그리고 이런 얘기도 있다. 또 이런 얘기도 있는데……” 라고 한다. 아주 집중하지 않으면, “이사람…… 아까는 이랬다 해놓고, 이제는 또 저랬다 하네? 맞는 말 같기는 한데, 좀 어지럽군. 여기에 대해 뭔가 설명이 좀 있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부자연스럽게 읽히는 것이 당연하다.
반면, 이 책의 저자는 논의의 초점을 양껏 좁혀두었다. 본문에서 인용한다.
“중년이 가야 할 여행은 길고 복잡하다. 중년의 이야기는 아주 충실하게 이 여행의 여러 단계를 반영하지만 여기서 모든 중요한 이야기들을 다 담을 수는 없다. 특히 나는 남자들이 중년에 마음 깊숙이 숨어 있는 남성성과 만날 때 겪는 일과, 여성들이 자신의 또 다른 여성성과 조우할 때 느끼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이야기들은 뺐다.” [303]
그렇다. 책 한 권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모두 전하려 하다간, 아무것도 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버리고 만다. 이런 면에서 알렌B. 치넨은 현명했다. 그녀는 명확함을 위해 정확함을 희생했으며, 그것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주요했다. 만약, 그녀의 말대로 ‘중년의 남녀가 각각 남성성과 여성성을 발견하는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좀 더 정확한 이야기가 되긴 했겠지만, 스토리의 일관성은 흐트러졌을 것이고, 중언부언을 막기 위해 많은 부연 설명이 더해져야 했을 것이다. 쓸데없는 못질에 촌스러운 글이 되었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초점’이다. 모든 소재는 하나의 주제를 바라보도록 집중적으로 써야 한다. 그래야 자연스럽다. 방향이 흐트러진 녀석들은 과감히 쳐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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