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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12일 21시 44분 등록


사기열전(상) - 정범진外 옮김, 까치


● 저자에 대하여

사마천의 사기에 대한 평가는 차고도 넘친다. 사기의 역사서로서의 위치와 내용이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기는 2세기 이전에 기록된 사서로서 가장 방대한 역사 서적이다.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저자인 사마천의 평가까지 곁들여져 있는 사기의 집필방식은 후세의 역사기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중국뿐 아니라 주변 인접국 역사까지 기록되어있는 사기는 역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학술적으로 역사적으로 명저(名著)라고 불리는 사기와 달리 저자인 사마천은 개인적으로 힘든 세월 속에서 이러한 작품을 일구어냈다.

사마천은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역사가이다. 생몰연도는 기원전 145년~86년. 성은 사마(司馬)이고 이름은 천(遷)이다. 아버지 사마담은 전한(前漢)의 천문, 달력, 기록을 담당하는 부서의 장관인 태사령 직책에 있었다.
기원전 110년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태산(泰山)에서 거행된 봉선의식(역대 중국의 황제들이 태산에서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의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것을 분하게 여겨 병이 나서 죽었다. 이때 사마천의 나이가 36세였는데, 아버지 사마담은 아들에게 자신이 편찬하던 역사서의 완성을 부탁한다. 아버지 사마담 상례기간이 지난 뒤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사마천은 42세때 역법을 개정해서 기원전 104년에 태초력(太初歷)을 완성하였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역사서 편찬에 나선다.

기원전 99년 사마천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굴욕의 시기가 온다. 궁형(宮刑:去勢刑을 받은 것이다. 사마천이 궁형을 받은 이유는 흉노와의 싸움서 패한 장군 이릉을 두둔한 것이다. 당시 한무제의 명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떠난 이릉(李陵)은 전투에서 패하고 포로가 된다. 흉노는 이릉을 정치적 계산으로 회유했고, 이릉은 결국 항복하고 흉노의 여자와 결혼해서 흉노땅에서 살았다. 한무제는 이릉 문제로 중신회의를 열었는데 궁중에서는 엄청난 비난이 일었다. 신하들은 이릉을 비난하고 이릉의 가족들을 능지처참 할 것을 주장했지만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해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사마천은 태사령 직책에서 파면을 당하고 궁형을 받았다. 당시의 궁형을 당하면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 이었지만 사마천은 그럴 수 없었다. 아버지의 유언인 역사서 완성이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마천은 굴욕을 참으며 책을 썼고, 그 결과 중국역사의 보물인 사기를 완성했다.

사마천은 사서를 편찬하면서 기전체라는 역사 기술 방법을 만들어 내었다. 사기는 상고시대의 황제로부터 진한의 무제에 이르기까지 2천년이 넘는 기간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데, 역대 왕조의 편년사인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기는 왕조의 편년사를 기록한 것으로, 권력의 핵심인 황실과 황제들의 정치, 행적과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표는 연표로써 여러 독립 제후국의 복잡한 역사를 정확하고 일목요연하게 기록했다. 서는 행정의 중요한 측면을 다루고 당시 사회상이나 문물제도의 등장시기 내용 변화 등을 담고 있다. 세가는 제후들의 가문내력과 성공 몰락의 과정을 시대별 나라별로 자세히 실은 일종의 열국사이다. 열전은 역사의 교훈이 될만한 사람들을 골라서 그들의 일생을 전기 형태로 기록한 것으로, 사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하기 위해 황실 문헌은 물론이고 다른 역사서와 제후국의 궁정 연대기, 경전이나 제자백가의 저술 등 방대한 기록을 참조하였고 시중에 떠도는 민담을 참고하기도 하였다. 사마천은 춘추(春秋:중국 노(魯)나라에 전해오는 사관의 기록을 바탕으로 공자가 기원전 722년에서 기원전 481년에 이르는 사이의 중요한 일의 기록을 편년체로 엮어 놓은 사서)와 비교될 수 없이 사기의 품격이 낮으며 자신은 단지 역사적인 사실을 후대에 알려주는 전달자로 생각하였다 한다. 이런 이유로 사상적으로 제자백가의 주장을 자유롭게 인용할 수 있었고, 유교중심의 평가를 떠나서 여러 사상을 근간으로 하였으므로 더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

동양의 역사 서술 방식은 기전체, 편년체, 기사본말체가 3대 체제라고 일컬어진다.
기전체는 역사 사실을 서술할 때 본기(本紀)·열전(列傳)·지(志)·연표(年表) 등으로 구성하는 역사 서술 체재로서 사마천의 《사기》에서 비롯된 방식이다.
편년체는 시간순으로 사건을 서술하는 방법으로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절요가 있다.
기사본말체는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방법으로 연려실기술이 있다.
강목체는 성리학적 사관을 바탕으로 역사를 정통과 비정통으로 구분하고, 강(큰 줄거리)과 목(자세한 항목)으로 나누어 서술하는 형식이다. 동사강목이 이에 속한다.


● 마음에 들어 온 글귀

공자가 말하기를 “가는 길이 같지 않은 사람과는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 라고 하였는데, 이 또한 사람은 제각기 자기의 뜻에 따라 행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귀라는 것이 만약에 추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비록 채찍잡이와 같은 천한 직업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할 것이며, 또 만약에 구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좇아 행할 것이다” 라고 하였고, “추운 계절이 된 연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는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모두 세속 사람들은 그처럼 부귀를 중시하고 청렴한 사람은 이처럼 부귀를 경시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13]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것은 포숙이다. [16]

그대가 말하는 성현들은 그 육신과 뼈가 모두 이미 썩어버리고 단지 그 말만 남아있을 뿐이오. 하물며 군자도 그때를 만나면 관직에 나아가지만, 때를 못 만나면 이리저리 날려다니는 다북쑥처럼 떠돌아다니는 유랑의 신세가 될 것이오. 뛰어난 장사꾼은 물건을 깊이 숨겨두어 겉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보이고, 군자는 훌륭한 덕을 간직하고 있으나 외모는 어리석게 보인다고 들었소. 그대의 교만과 탐욕, 허세와 지나친 욕망을 버리도록 하시오. 이러한 것들 모두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오. 내가 그대에게 말할 것은 다닞 이것뿐이오. [21]

천금이라면 막대한 돈이며 재상이라면 존귀한 지위이지만, 그대는 교제를 지낼 때 제물로 바쳐지는 소를 보지 못하였는가? 그 소는 몇 년동안 사육되다 수놓은 옷이 입혀져 태묘로 끌려들어가는 데, 그때 가서 하찮은 돼지가 되겠다고 해서 그렇게 될 수가 있겠소? 그대는 빨리 돌아가 나를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마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즐거워할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구속당하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가지 벼슬하지 않아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자 하오. [24]

무릇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추앙하는 바를 미화하고 상대방이 추악하게 여기는 것을 덮어버릴 줄 아는 것이다. 상대가 그 자신의 계책을 탁월하게 여긴다면 그의 결점을 들어 궁지로 몰아서는 안되며, 자신의 결단을 용감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반대의견을 들어 화나게 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면 그가 해내기 어려운 일을 들어 억압해서는 안된다. [27]

용이란 동물은 잘 길들이면 그 등에 탈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목줄기 아래에 한 자 길이의 거꾸로 난 비늘이 있는데 사람이 이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 사람을 죽여버린다. 군주에게도 거꾸로 난 비늘이 있으니, 유세하는 사람이 군주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으면 거의 성공적인 유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9]

사무친 원한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은 참으로 크다. 왕이라고 하더라도 신하에게 원한을 사서는 안되는 것이거늘 하물며 동등한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서랴. 일직이 오자서가 아버지 오사를 따라 죽었다면 하찮은 땅강아지나 개미와 무엇이 달랐겠는가? 그는 소의를 버리고 큰 치욕을 갚아 명성이 후세에까지 전해졌다. 슬프도다. 오자서가 강가에서 위급한 상황에 처하고 길에서 걸식을 할 때도 마음속에 잠시라도 초나라의 국도인 영을 어찌 잊은 적이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모든 고초를 참고 견디며 공명을 이룰 수 있었으니, 강인한 대장부가 아니면 어느 누가 이런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백공이 만약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면 그의 공적과 계략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58]

염구가 공자에게 “의를 들었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라고 물으니 공자가 “바로 생해야 한다” 라고 답하였다. 자로가 “의를 들었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라고 물으니 “부형이 계시니 어찌 듣고서 바로 행하겠느냐?” 라고 답하였다 자화가 기이하게 여겨 “감히 여쭙겠사온대, 물음이 같은데 대답이 어찌하여 다릅니까?” 라고 물으니, “염구는 머뭇머뭇거리는 사람인지라 진취시켜준 것이고, 자로는 남에게 이기려 들기 때문에 억제시켜준 것이다” 라고 답하였다. [63]

자로가 정치를 행하는 방법에 대하여 묻자, 공자가 “백성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솔선수범하고 백성들의 일, 즉 농사와 같은 것에는 몸소 애쓰는 것이다” 라고 답하였다. 더 보탤 것을 무자, “시종여일하게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자로가 “군자는 용맹을 숭상합니까?” 라고 물으니, 공자가 답하여 “군자는 의를 최상의 것으로 삼는다. 군자가 용맹을 좋아하고 의를 숭상하지 않는다면 도둑질을 한다” 라고 말하였다. 자로는 좋은 말을 듣고 아직 행하지 않았다면, 이것도 아직 행하지 않았는데 또 다른 좋은 말을 듣게 될까봐 염려하였다. [63]

자공이 “부유하지만 교만함이 없고 가난하지만 아첨함이 없다면, 어떻습니까?” 라고 물으니, 공자가 “그런대로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지만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함만 같지 못하니라” 고 답하였다. [67]

자공이 “사(師)와 상(商) 중 누가 더 낫습니까?” 라고 물으니, 공자가 “사는 지나친 데가 있고, 상은 미치지 못하는 데가 있다” 라고 답하였다 자공이 또 “그렇다면 사가 더 낫습니까?” 라고 물으니, 공자가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라고 하였다. [75]

자장이 녹(祿)을 구하는 것을 묻자, 공자가 답하여 “많이 듣고 그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빼버린 다음, 그 나머지를 신중히 말한다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 많이 보고서 그중에서 의심나는 것을 빼버린다면, 그 나머지를 신중히 행한다면 후회가 적을 것이다.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후회가 적다면, 녹이 바로 그 안에 있다” 라고 하였다. [76]

자사가 공자에게 “남에게 이기려고 하는 것, 자기가 이룬 공에 대해서 자랑하는 것, 남을 원망하는 것, 욕심내는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인(仁)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으니, 공자가 “실행하기 어려운 것을 행한다고는 할 수 있겠으나, 인한지 안 한지는 모르겠다” 라고 하였다 [78]

번지가 인(仁)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고, 지(智)에 대해서 묻자 “사람을 아는 것이다” 라고 대답해주었다. [83]

조량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반성하면서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총(聰)이라고 하고, 마음속에 있는 눈으로 보는 것을 명(明)이라고 하며,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이기는 것을 강(强)이라고 합니다. 순임금의 말에도 ‘스스로 낮추면 더욱더 높아진다’ 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은 순임금의 도를 실행하셔야겠지요.” [96]

속어(俗語)에 이르기를 ‘자(尺)가 비록 긴 것이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더 긴 것과 비교하였을 때에는 짧고, 치(寸)가 비록 짧은 것이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더 짧은 것과 비교하였을 때에는 길다’ 라고 하였다. [201

“내가 [맹자]를 읽다가 양 혜왕이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한 대목에 이르러 일찍이 책을 덮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 이롭다고 하는 것은 진실로 어지러운 것의 시작이구나! 공자가 이로운 것을 말하는 것이 드물었던 것은 항상 그 (어지러운 것의) 근원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로운 것에 따라 행동하면 원망이 많다’라고 하였다.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이로움을 좋아해서 생긴 병폐가 어찌 다르겠는가! [203]

살아 있는 것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사물의 필연적 결과이며, 부유하고 귀하면 선비가 많고 가난하고 천하면 친구가 적은 것은 일의 당연한 면모입니다. 선생께서는 아침에 시장에 모이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날이 밝으면 어깨를 비비고 다투며 문으로 들어가는데, 날이 저문 뒤에는 시장을 지니는 사람들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침을 좋아하고 저녁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하는 물건이 그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선생께서 지위를 잃으니 빈객들이 다 떠나갔는데, 이것을 가지고 선비들을 원망하면서 일부러 빈객들의 길을 끊을 필요는 없습니다. 선생께서는 예전과 같이 빈객들을 대우하시기 바랍니다. [226]

“일에는 가히 잊어야만 하는 것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릇 남이 공자에게 베푼 은덕은 공자께서 잊지 말아야 하며, 공자가 남에게 베푼 은덕은 공자께서 잊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위나라 왕의 명령을 속여 진비의 군사를 빼앗아 조나라를 구한 것은 조나라의 입장에서는 공이 있지만 위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충신이 아닌 것입니다. 공자께서는 이에 스스로 교만하여 공이 있다고하시니, 가만히 보건대 그것은 공자께서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249]

시경에 이르기를 “처음이 없는 사람은 없으나, 끝을 잘 맺는 사람은 드물다”라고 하였고 역경에는 “여우가 길을 건너다 끝내는 꼬리를 적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시작은 쉽지만 결과가 어렵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257]

물총새, 따오기, 코뿔소, 코끼리는 그들이 살고 잇는 곳이 그렇게 안전한 곳이 아니지만 그런대로 천수를 누릴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도 잡혀 죽게 되는 것은 먹이를 탐하는 욕심에 끌리기 때문입니다. 소진과 지백의 재주는 치욕을 피하고 죽음을 멀리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은 이유는 욕심에 미혹되어 그만둘 시기에 그만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94]

저는 ‘물을 거울로 하는 사람은 자신의 얼굴 생김새를 알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하는 사람은 자기자신의 길흉을 추측하여 알 수 있다’라고 들었습니다. 또 고서에는 ‘공업(功業)을 이룩한 곳에서는 오래 머물지 말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297]

범수와 채택이 두루 돌아다닌 끝에 진나라에 와 머무르면서 연이어 재상의 높은 벼슬로 공명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그들의 능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강하였고 다른 사람들의 능력이 그들보다 약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선비는 우연히 때를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들 두 사람 못지않는 어진 사람들도 듯을 이루지 못한 경우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도 곤궁한 처지에 빠지지 않았던들 어떻게 분발하여 성공을 거둘 수 있었겠는가? [299]

싸움이라는 것은 정면에서 적과 맞서는 한편 예측하지 못한 계책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전투를 잘하는 사람은 남들이 예측하지 못할 병법이 무궁무진하다. 따라서 그들이 사용하는 정면적인 책략과 예측하지 못한 계책은 돌고돌아 계속 순환하여, 마치 고리에 처음과 끝의 구별이 없는 것과 같다. 병법을 쓰는 것은 무릇 처음에는 처녀처럼 얌전하고 약해 보여서 적들이 문을 열어둔 채 방비하지 않게 하며, 나중에는 도망가는 토끼처럼 날래서 적이 방비하려고 해도 그럴 여지가 없게 하는 것이다. [330]

“나는 부귀하면서 남에게 눌려 사느니, 차라기 빈천한 대로 세상을 가볍게 내 맘대로 살겠노라!” [343]

역경에서 말하기를 “우물물이 맑아도 와서 마시지 않는구나. 나의 마음을 슬프게 함은, 이 물은 가히 마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왕이 명철하다면, 또한 그 복을 받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밝지 못하니, 어찌 복을 받을 수 있겠는가! [358]

어부가 묻기를 “대저 성인이란 물질에 구애되지 않고 능히 세속의 변화를 따를 t 있는 사람입니다. 온 세상이 혼탁하다면 왜 그 흐름을 따라 그 물결을 타지 않으십니까? 모든 사람이 취해 있다면, 왜 그 지게미를 먹거나 그 밑술을 마셔서 함께 취하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미련한 자존심만을 움켜잡고 추방을 자초하셨습니까?”라고 하였다. 굴원이 대답하기를 “내가 듣기로,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을 털어서 쓰고, 새로 목욕을 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 다고 하였소. 사람으로서 또한 누가 자신의 깨끗함에 더러운 오물을 묻히려 하겠소? 차라리 흐르는 강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의 뱃속에서 장사를 지낼지라도, 또 어찌 희디흰 결백함으로서 세속의 더러운 먼지를 뒤집어 쓰겠소!”라고 하였다. [359]

이사는 초나라 상채 사람이다. 그는 젊었을 때에 군의 하급관리가 되었는데, 관청의 변소에서 쥐가 오물을 먹다가, 사람이나 개가 가까이 가면 자주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다. 어느날 이사는 창고에 들어가서, 곡식을 먹는 창고의 쥐들이 넓은 건물안에 살고 있었으므로, 사람이나 개를 겁내지 않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리하여 이사는 이에 탄식하기를 “사람의 잘나고 못난 것이 쥐와 같으니, 그것은 스스로 처한 바에 달렸을 뿐이로다”라고 하였다. [405]


● 내가 저자라면

책을 처음 열어보면 답답하다. 빼곡한 글씨에 적지 않은 한문이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까닭이다. 대충의 흐름을 보려고 차례를 펼쳐보면 답답함은 더해진다. 차례에 쓰여 있는 것은 아마도 원문그대로 가져온 것 같은 글씨들이다. 원문의 차례를 한문 그대로 옮겨 놓았고 그 앞에 한글을 첨기 했다. 사람이름의 나열뿐이다. 그 사람들의 이름이라는 것도 역사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면 대부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책의 발행일을 찾아보니 1995년 초쇄를 찍었다. 2008년까지 12쇄가 발행되었으니 그래도 해마다 한번씩은 재판을 찍은 셈이다. 반갑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하다. 현대의 독자들이 읽기에 쉽지 않은 내용과 편집임에도 누군가 끊임없이 찾고 있다는 게 반갑고, 그런 책을 적지 않은 독자가 읽고 있다는 게 경이롭다.

까치에서 펴낸 사기열전을 ‘존재의 이유’라는 명제로 이야기 해본다면 어떨까.
존재의 이유라는 명제를 집어든 것은,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독자로서는 책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는 이유에서이다. ‘책이 매력적이지 않다’는 판단은 출판사 입장에서 본다면 무척 기분 안 좋은 말이다. 독자를 위해서 힘들게 만들어낸 책인데 매력적이지 않다니 기분이 좋을 리 없는 것이다. 일단 미안하다고 하고서 시작하자. 어설픈 독자의 개인적 판단일 뿐이니 말이다.
독자로서 책이 매력적이지 않은 이유를 하나씩 꼽아보자.
우선 활자의 크기에 비해 행간이 좁아서 읽기에 편하지 않다. 지면을 보는 첫 느낌부터가 답답해 보이는 것이다. 글씨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사방으로 튀어 눈을 혼란하게 만든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이번엔 차례가 턱하니 가슴을 누른다. 첫 번째가 ‘권 61 「백이열전(伯夷列傳)」제1’ 이다. 이게 무슨 소린가. 아마 백이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그렇다고 치면 ‘권61’과 ‘제1’은 무어란 말인가. 밑도 없고 끝도 없다. 사전지식이 없는 사람은 일단 그러려니 하고 읽어나가는 수밖에 없다.
책 속으로 들어서면 적지 않은 한자가 같이 한다. 한자도 그렇지만 각종 지명과 이런 저런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알지 못하는 것들이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각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주를 본다고 해결되지 않으니 더 답답하다. 각주에는 역시 한자가 가득한데 설명마저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각주를 본다고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는다. 각주에 대한 각주를 달아야 할 만큼 각주의 내용이 간단하고 어렵다.
무엇보다 책을 구성하는 내용이 어렵다.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독자는 친절한 해설을 기대하면 안 된다. 자신의 역사 지식을 총동원하고 스스로 행간을 읽고 유추해야 한다. 직역의 지루함 이랄까. 끝없는 듯 이어지는 내용의 연결도 읽기에 불편한 부분이다. 잠깐 숨도 돌리고 물도 한 모금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별로 없는 것이다. 쉬운 것, 간단한 것, 좋아하는 현대의 독자들로서는 책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이유다.
책이 전달해주고자 하는 내용도 콕 집어내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물론 여러 곳에서 삶에 지표가 되는 이야기들이 적지 않게 나온다. 그러나 감나무 아래 누워서 책을 읽다가 뚝 떨어진 감을 입 한번 벌려 간단하게 먹는 그런 것과는 구성이 다르다. 감나무 아래에 눕기는 했지만 책을 읽는 틈틈이 눈을 크게 뜨고 어느 감이 나에게 떨어질 것인지 쉬지 않고 지켜보아야 한다. 편리하고 달콤한 것 좋아하는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책읽기 이다.

그렇다면 이 책 ‘사기열전’은 존재의 이유가 없다는 말인가.
일단 출판사의 입장에서 보자. 책이 나올 당시인 1995이면 어려운 옛 책의 쉬운 책읽기라는 방식은 이미 자리를 잡은 다음이다. 책을 쉽게 만들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스테디셀러로 수백만부가 팔린 ‘소설 목민심서’는 1992년에 출간되었다. ‘소설 손자병법’은 그보다 훨씬 전인 1981년에 한국경제신문에 연재된 뒤 단행본으로 나왔다. 출판사라고 몰랐을 리 없다. 쉽게 만들고 접근하기 쉬워야 책이 잘 팔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책 만들기의 방식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다른 출판사에서 간행한 사기열전은 현대적 해제에 충실한 것들이 많다. ‘소설보다 재미있는…’ ‘소설…’ ‘풀어 쓴…’식의 꼬리말을 앞에 붙인 책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사기열전을 이런 불편한 방식으로 만든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책이 매력적이지 않다’는 판단을 개인적으로 내렸으니, 책을 이렇게 만든 이유도 개인적으로 내려보자.
일단 ‘피곤한 정통의 맛’이다. 쉬운 책읽기의 바람을 타고 당의정(糖衣錠)같은 책들이 서점에는 가득하다. 편집도 가볍고 화려해 눈과 손길을 잡아끈다. 그 속에서 피곤하지만 정통의 옛 맛을 느낄 수 있는 책들은 모습을 찾기 어렵다. 마치 초가집을 보려면 민속마을로 몇 시간동안 차를 달려야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였을까. 사기열전을 읽는 동안 원목 마루처럼 편안하지는 않지만 한옥의 시원한 대청마루에 누워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구수한 맛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중의 하나이다. 문장에 문장을 이어서 연결되는 이야기들은 읽기에 편하지 않지만 마치 할머니가 옛 이야기를 들려주듯 구수한 맛을 가지고 있다. 주어 서술어가 완벽하고 깔끔한 단어를 선택해 예쁘게 포장된 문장은 아니지만 청국장 같은 나름대로의 맛을 충분히 갖고 있는 것이다.
머리를 써야 하는 책읽기라는 것도 장점 중의 하나로 넣을 수 있겠다. 쉽고 재미있게 구성한 책들은 읽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쉬워 술술 넘어가는 게 장점이다. 그러나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보인 사기열전은 술술 넘어가지가 않는다. 곳곳에서 무언가 목에 걸리는 게 있다. 그럴 때마다 생각을 해봐야 하고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봐야 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역사지식을 동원해봐야 한다. 불편하지만 주체적인 책읽기로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읽기에 불편하게 만든 이 책 사기열전이 해마다 1쇄씩 재판을 찍는 것은 이 책의 매력에 공감하는 독자들이 그만큼 있다는 방증으로 보아도 된다. 그렇기에 쉬운 책읽기의 바람 속에서도 생명력을 이어왔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 사기열전은 한편 반갑기까지 하다.
책읽기는 어떤 책이든 쉽지 않다. 재미로 책을 읽는 경우도 많지만 책읽기라는 것은 대표적인 지적 노동의 하나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더 쉬운 책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쉬운 책읽기의 조류에 휩쓸려 사고하는 능력이 자꾸 떨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든다면 가끔씩은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책읽기를 해보자. 말하자면 이 책 사기열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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