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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13일 10시 14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사기열전 [史記列傳] 사마천(司馬遷), 2007년 민음사
사기열전의 저자 사마천 (司馬遷)은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역사가(B.C.145~85)로 성은 사마(司馬)이고, 이름은 천(遷)이다. 자는 자장(子長)이며, 주나라 역사가 집안인 사마 가문의 후손이며, 아버지인 사마담(司馬談)은 전한(前漢)의 천문, 달력, 기록을 맡아 처리하는 부서의 장관인 태사령(太史令)으로 천문과 달력에 밝고, 고전에도 통달한 이였다. 20세경 낭중(郎中)이 되어 한 무제(漢武帝)를 수행하여 강남. 산둥·허난 등의 지방을 여행하였다.

아버지 사마담이 역법과 도서를 관장하는 태사령이 된 후, 사마천이 36살 때 사마담은 한 무제가 태산(泰山)에서 거행된 봉선 의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을 분하게 여기다가 병이 나서 죽었다. 죽을 때 아들 사마천에게 생전부터 편찬하던 역사서의 편찬을 완료해 줄 것을 유언한다. 사마담이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인 사마담의 관직이었던 태사령(太史令)의 벼슬을 물려받아 태사령으로 복무하였으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역사 기술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를 통해 견문을 넓히며'사기'저술에 필요한 방대한 자료들을 수집하게 되었다. 사마천은 부친의 유언에 따라 10여년에 걸쳐 '사기' 집필에 착수하였다.
사마천의 나이 42살쯤 역법을 개정하여 태초력(太初曆)을 한 무제(漢武帝) (태초 원년)에 완성하였다.
기원전 99년에 한 무제(漢武帝)의 명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던 장군 이릉(李陵)이 흉노족와의 전투에서 패전을 하여 포로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한 무제는 매우 진노하여, 이릉의 처분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중신회의를 열었다. 신하들은 모두들 이릉을 비난하고 이릉의 가족들을 모두 능지처참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사마천은 이릉의 충절과 용감함을 변호하다가 한무제에 의해 궁형을 받게 된다. 때문에 한 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사마천은 태사령의 직책에서 파면 당하고, 궁형(宮刑)을 받았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궁형을 받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회 풍조였다.
궁형을 당할 것인가, 아니면 자결을 택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길목에서 사마천은 한신(韓信)이 동네 사람의 가랑이 밑을 기어 나가 훗날 중용되었듯이 궁형의 치욕을 감수하고라도 살아남아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편이 현명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죽음을 모면한 사마천은 아버지의 대부터 편찬 중이었던 역사서 사기(史記)의 편찬을 완료하였다. 이후 다시 황제의 신임을 얻고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中書令)에 올랐으며, B.C. 90년에 드디어 '사기'를 완성하였다.

사마천의 출생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가인 사마천도 자신의 출생년도를 기록하고 있지 않았다. 그가 죽은 지 불과 백 년이 지난 후한시대에 그의 전기를 쓴 반고(班固)도 그의 출생시기를 정확히 모르고 있으니 2천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의 생몰연대를 알기는 더욱 어렵다.
현재 사마천이 태어난 시기를 알 수 있는 가장 신뢰할 만한 문헌은 고증학의 성과로 왕국유(王國維)가 쓴 태사공행년고(太史公行年考)를 근거한다면, 前漢 경제(境帝)의 중원(中元)5년 (B.C.145년)이 된다.
태어난 곳은 하양(夏陽)이다. 自序에 遷生龍門, 耕牧河山之陽이라 쓰여져 있다.
용문은 연안에서 동남쪽으로 3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궁벽한 시골이다.남쪽으로 흐르는 황하의 지류를 경계로 하여 왼쪽은 섬서성, 오른쪽으로는 산서성으로 나뉘는 경계선인 깊은 계곡에 자리잡은 동네이다.
행정구역상 용문은 섬서성 동주(東州) 한성현(韓城縣) 사마판(司馬坂)이다.섬서성은 중국 중서부에 있는 성으로 성도는 시안(西安)이다. 용문(龍門) 상류에 이르면 물살이 드세어 역류하는데 성공한 물고기는 용으로 변하여 승천한다는 이야기가 삼진기(三秦記)에 전해진다. 등용문(登龍門)이란 고사가 여기서 생겨났다.
하양은 전에 소량(少梁)이라 불리었다가 이름이 바뀐 곳이다.
이 나루터 근처에 용문산이라 불리우는 산이 있고 황하로 흐르는 북쪽 산 기슭에 넓지 않는 땅이 있는데 사마천의 조상이 이 곳에서 농사지으며 거주했다. 용문산 근처에 삼문협(三門峽)이라는 유명한 계곡이 있는데 우왕의 치수(治水)를 말해주는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사마천의 무덤도 한성현의 교외 지천진(芝川鎭)에 자리잡고 있다.
사당은 晋代의 永嘉4年(310년)에 건축되었으나 묘지는 둥근 융기의 형태로 元代에 만들어졌다. 사당과 무덤은 4개의 거대한 구릉에서부터 급경사를 이루어 기세가 웅대하고 장관을 이루고 있다. 궁전에 사마천의 소상(塑像)을 모셔두고 제사 지내지고 있다. 건물 외에 역대의 비석 61기도 전시되고 있다. 사마천 사당과 무덤은 황하에 가까이 자리잡고 있어 높은 곳에서 거대한 황하를 바라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그 곳을 다녀온 기행가들에 의하면 무덤도 초라하고 허름하고 낡은 사당에 사마천의 위패와 영정을 모셔놓고 관리인 한 명이 지키고 있다 한다.

♣ 작가에 대하여
저자는 여러문헌에서 알 수 있듯이 친구를 변호하다가 궁형(宮刑) 당한다.

궁형이란 생식기를 제거하는 것이다. 절대 권력인 황제에게 대항 한다는 것은 역상(逆上)이라 하여 죽음을 면치 못하는 것이지만 궁형을 원하면 사형을 대신하는 제도가 있었다. 또한 씁쓸한 것은 지금의 벌금제도처럼 물질변상이 있었다 한다. 사마천은 여하튼 고심 끝에 궁형을 선택한다. 인간의 본능을 거세당한 사마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가 친구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 <보임소경서>에서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하루에도 간장이 아홉구비로 꼬이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 정신이 멍멍하고, 밖에 나가면 어디로 가야할 지 막연합니다. 제가 당한 수치를 생각할 때마다 등에 식은 땀이 흥건하여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腸一日而九回,居則忽忽若有所亡,出則不知所往。每念斯恥,汗未嘗不發背沾衣也
저자가 어떤 심정으로 기술했는지 알게 된 사기열전은 그래서 시간이 더 짧았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해제
p.24. 『사기 열전』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마천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겪는 고충을 거의 모든 인물이 똑같이 겪었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말해 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대에 맞선 자, 시대를 거스른 자, 그리고 시대를 비껴간 자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역시 적지 않다.
이러한 열전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사마천은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 배반과 충정, 이익과 손실, 물질과 정신, 도덕과 본능, 탐욕과 베풂 등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을 제시하고, 그런 갈등 자체가 인간이 사는 모습임을 강조한다.
p.25. 일반 역사서와 달리 『사기 열전』에 적잖은 주관적 서술이 보이는데, 사마천 자신의 사료 비판 능력과 어우러져 탄탄한 역사 서술 체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사마천의 혼이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사기 열전』의 서술 방식에는 냉정한 이성과 처절한 열정을 갖고 살아간 시대적 거장들의 숨결이 행간마다 녹아 있다.
백이열전
p.65-p.66.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은 제각기 자기의 뜻을 좇아서 행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공자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부귀가 찾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말채찍을 잡는 천한 일자리라도 나는 하겠다. 또 만일 찾아서 얻을 수 없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좇아 행하겠다.” (중략)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죽은 뒤에 자기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는 것을 가장 가슴 아파한다.”
관 ․ 안 열전
p.69-p.70.안영은 춘추시대 제나라의 영공, 장공, 경공 등 세 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오십 년 동안 집정하면서 제나라를 중흥시켜 제후들 사이에 이름을 떨쳤다. 그는 2인자 행동 미학의 귀감을 보여 결단력과 슬기와 해학이 넘쳤고, 제갈공명이 극찬할 만큼 내치에도 뛰어났다. 그는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고 하며 삼십 년 동안 옷 한 벌로 생활할 만큼 검소했다. 그러면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은 명재상이다.
p.71.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난하게 살 때 포숙과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곤 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내가 포숙을 대신해서 어떤 일을 경영하다가 실패하여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지만 그는 나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다. 운세에 따라 좋은 때와 나쁜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갔다가 세 번 다 군주에게 내쫓겼지만 포숙은 나를 모자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세 번 싸움에 나갔다가 세 번 모두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임금 자리를 놓고 벌인 싸움에서 졌을 때, [나와 함께 곁에서 규를 도운] 소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나는 붙잡혀 굴욕스러운 몸이 되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자그마한 일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천하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포숙은 관중을 추천하고 자신은 그의 아랫자리에 있었다. 포숙의 자손들은 대대로 제나라의 봉록을 받으며 봉읍지를 십여 대 동안 가졌으며 늘 이름 있는 대부의 집안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송하기보다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포숙을 더 찬미하였다.
p.76. “안자라는 분은 키가 여섯 자도 채 못 되는데 제나라 재상이 되어 제후들 사이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그분이 외출하는 모습을 살펴보니 품은 뜻이 깊고 늘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키는 여덟 자나 되건만 겨우 남의 마부 노릇을 하면서도 아주 의기양양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첩이 헤어지자고 하는 까닭입니다.”
p.78. 이 때 포숙은 관중을 추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제나라만을 다스리고자 하면 고혜와 숙아가 있으면 됩니다. 당신이 천하의 우두머리가 되고자 한다면 관이오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이오는 어느 나라에 있든 그 나라에서 소중히 여길 인물이니 잃어서는 안 됩니다.”
노자 ․ 한비 열전
p.82. 대체로 노자는 160여 살 또는 200여 살을 살았다고 한다. [이처럼 노자가 오래 살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도를 닦아 양생의 방법을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p.87. 이와 반대로 상대방이 큰 이익을 얻고자 하는데 높은 이름을 얻도록 설득한다면 상식이 없고 세상 이치에 어둡다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이 속으로는 큰 이익을 바라면서 겉으로는 높은 이름을 원할 대 높은 이름을 얻는 방법으로 설득한다면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겠지만 속으로는 멀리할 것이며, 만약 큰 이익을 얻는 방법으로 설득한다면 속으로는 의견을 받아들이면서도 겉으로는 그를 꺼릴 것이다. 유세자는 이러한 점들을 잘 새겨 두어야 한다.
사마 양저 열전
p.103.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사마병법』을 읽어 보니 그 개략이 넓고 크며 깊어 설령 하, 은, 주 삼대의 제왕들이 전쟁에 나서도 그 내용을 다 발휘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장을 보면 과장된 점도 없지 않다. 양저는 보잘것없는 작은 나라를 위해서 군대를 움직였으니, 어찌 한가하게 『사마병법』에서 말하는 겸양의 예절을 지킬 틈이 있었겠는가? 세상에는 이미 『사마병법』이 많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논의하지 않고 양저의 열전만을 짓는다.”
손자 오기 열전
p.114. 오기는 위나라 사람으로 병사 다루는 일을 좋아했다. 그는 일찍이 증자에게 배우고 노나라 군주를 섬겼다. 제나라 사람들이 노나라를 공격하자 노나라에서는 오기를 장군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오기의 아내가 제나라 여자이므로 의심을 품었다. 그러자 오기는 이름을 얻기 위해 자기 아내를 죽여 제나라 편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p.118-p.119. “이 세 가지 점에서 당신은 모두 나보다 못한데 나보다 윗자리에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전문이 대답했다. “왕의 나이가 어려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신하들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며, 백성은 그분을 믿지 못하고 있소. 이런 때에 재상자리를 당신에게 맡기겠소, 아니면 내게 맡기겠소?” 오기는 한참동안 조용히 있다가 말했다. “당신에게 맡기겠소.”
오자서 열전
p.139. “오자서는 고집이 세고 사나우며 정이 없고 시기심이 강합니다. 그는 왕께 원한을 품고 있어 큰 화근이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예전에 왕께서 제나라를 치려고 할 때 오자서는 반대했지만 왕께서는 결국 제나라를 쳐서 큰 공을 세우셨습니다. 오자서는 자신의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원망을 품었습니다. 지금 왕께서 다시 제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오자서는 고집스럽게 간언하여 왕께서 병사를 내는 것을 막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오직 오나라가 싸움에 져서 자기 계책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기를 원하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왕께서 직접 전쟁터로 나가 나라 안의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제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오자서는 자신의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여 전쟁터로 나가지 않으려고 병을 핑계 삼아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왕께서는 이에 대비책을 세우셔야만 합니다. 그가 재앙을 일으키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또 신이 몰래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오자서는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자기 아들을 제나라의 포씨에게 맡겨 두었다고 합니다. 오자서는 신하가 된 몸으로 나라 안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여 밖으로 제후들에게 기대려고 하며, 선왕의 모신이던 자신이 지금은 버림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 늘 원망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빨리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십시오.”

p.143. “원한 맺힌 사람이 끼치는 해독은 정녕 무섭구나! 임금이라도 신하에게 원한을 사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끼리야 어떠하겠는가? 일찍이 오자서가 아버지 오사를 따라 함께 죽었다면 하찮은 땅강아지나 개미와 무슨 차이가 있었겠는가? 그는 작은 의를 버리고 큰 치욕을 씻어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겼으니 그 뜻이 참으로 비장하구나! 오자서는 장강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위급한 상황에 놓이고, 또 길에서 빌어먹을 때도 어찌 초나라의 수도 영을 잠깐인들 잊었겠는가? 그는 모든 고초를 참고 견뎌 내어 공명을 이룰 수 있었다. 강인한 대장부가 아니면 어느 누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백공도 만일 스스로 왕이 되려고만 하지 않았던들 그 공적과 계책이 어찌 훌륭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중니 제자 열전
p.145. 그는 정치가로서의 삶에는 실패했지만 무관의 제왕으로 불릴 만큼 교사로서의 역할에서는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공자는 교육의 중요성을 부르짖고, 그의 나이 서른 살을 전후로 하여 제자를 모아 수업을 했는데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자가 3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교육관을 ‘유교무류’에 두었다.
p.153. “군자는 의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 군자가 용맹함만을 좋아하고 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세상을 어지럽히게 되고, 소인이 용맹함만을 좋아하고 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도적이 된다.”
p.164. 용맹스러운 사람은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곤경에 빠진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지 않으며,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놓치지 않고, 왕은 다른 나라의 후대를 끊지 않음으로써 의를 세웁니다. 왕께서는 월나라를 그대로 둠으로써 제후들에게 어질다는 것을 보이고, 제나라에 핍박당하고 있는 노나라를 돕고 제나라를 정벌한 뒤, 오나라의 힘을 진나라로 찾아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패업을 이룰 수 있습니다. 왕께서 월나라가 마음에 걸리신다면 제가 동쪽으로 가서 월나라 왕을 만나 군대를 지원하도록 설득하겠습니다. 그러면 실질적으로는 월나라를 텅 비게 만들면서 제후를 이끌고 제나라를 친다는 명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p.165-p.166. “오나라 왕은 사람됨이 사납고 모질어 모든 신하가 버티기 힘들 지경이고, 나라는 잦은 전쟁으로 황폐해졌으며, 군사들은 견디지 못합니다. 백성은 왕을 원망하고 대신들은 마음이 변하였습니다. 충신 오자서는 간언하다가 죽었고, 태재 백비는 나랏일을 맡고 있으나 임금의 그릇된 명령을 그대로 따르며 자기의 사욕만을 채우기에 급급하니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정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왕께서 병사를 보내어 그의 뜻을 선동하고, 귀중한 보물들을 보내 환심을 사며, 자신을 낮춤으로써 그를 높여 주면 틀림없이 안심하고 제나라를 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오나라가 싸움에서 지면 그것은 왕의 복이고, 설령 이기더라도 반드시 여세를 몰아 진나라를 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저는 진나라 임금을 만나 함께 오나라를 치도록 만들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오나라의 세력은 반드시 약해질 것입니다. 오나라의 정예 병사들은 제나라에서 싸울 수 있는 힘을 다 쓰고, 튼튼한 무기를 지닌 군사는 진나라에서 거의 기진맥진할 것입니다. 왕께서 그 틈을 타서 공격한다면 반드시 오나라를 쇠약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p.168. 자공은 진나라를 떠나서 노나라로 돌아왔다. 오나라 왕은 과연 제나라의 애릉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적의 장군 일곱 명이 이끄는 군사들을 사로잡았다. 오나라는 돌아오지 않고 여세를 몰아 진나라를 향해 나아가 황지에서 진나라 군대와 마주쳤다. 이 두 나라는 서로 강함을 다투었으나 진나라가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월나라 왕은 이 소식을 듣자 강을 건너 오나라를 습격하여 도성 밖 칠 리쯤에 주둔하였다. 오나라 왕은 이 소식을 듣고서 급히 진나라와의 싸움을 그만두고 돌아와 오호에서 월나라와 세 차례 싸웠으나 다 지고, 결국 월나라 군대에게 도성까지 내주었다. 월나라 군대는 오나라 궁궐을 에워싼 뒤 오나라 왕 부차를 죽이고, 재상 백비의 목을 베었다. 월나라는 오나라를 깨뜨린 지 삼 년후 위데 동방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p.171. “사와 상 중 누가 더 낫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사는 지나친 데가 있고, 상은 미치지 못하는 데가 있다.” 자공이 또 물었다. “그렇다면 사가 더 낫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공자가 자하에게 말했다. “너는 도에 힘쓰는 군자의 선비가 되어야지, 명성을 좇는 소인의 선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 자하는 서하에 살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위나라 문후의 스승이 되었다. 그는 자식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여 소리 높여 울다가 눈이 멀었다.

p.173. “그것은 명망이지 통달이 아니다. 대체로 통달한 사람은 질박하고 정직하여 의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잘 듣고 표정을 잘 살피며, 깊이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을 낮춘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통달하게 된다. 그러나 명망 있는 사람은 겉으로는 어진 척하지만 실제 행동은 완전히 어긋나면서도 그러한 것에 물들어 조금도 의심 없이 행동한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이름을 얻게 된다.”
p.174. “나는 말 잘하는 것으로 사람을 골랐다가 재여에게 실수하였고, 생김새만을 보고 사람을 가리다가 자우에게 실수하였다.”
p.176. "나라에 도가 제대로 시행되는데도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다만 녹이나 먹고 있고, 나라에 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데도 벼슬자리에 연연하여 녹이나 먹고 있는 것이 바로 부끄러움이라는 것이다."
p.178-179. “봄옷이 새로 만들어지면 젊은이 대여섯 명과 어린아이 예닐곱명을 데리고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기우제를 지내던 누대) 밑에서 바람을 쐰 다음 시를 읆조리며 돌아오고 싶습니다.”
p.179. 안무요는 자가 노이며 안회의 아버지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일찍이 각각 때를 달리하여 공자를 섬겼다. 안회가 죽었을 때, 안로는 집이 가난하니 공자의 수레를 팔아서 제사 지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잘났든 못났든 저마다 제 자식을 위한다. 그러나 내 아들 공리가 죽었을 때도 내관만 쓰고 외관은 쓰지 못했다. 내가 수레를 팔아서 아들의 외곽을 만들어 주지 못한 것은 내가 대부가 되어 수레 없이 걸어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p.180. 말만 잘하는 자를 미워한다.
p.182. 모든 일은 천명에 의해 결정된다.
p.183. 예와 의를 좋아하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p.185. “예전에 공자께서는 밖에 나갈 때에 제게 우산을 준비시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말 비가 내렸습니다. 제가 ‘선생님께서는 비가 올 줄을 어떻게 아셨습니까?’라고 물으니, 선생님께서는 ‘『시경』에서 달이 필이라는 별에 걸려 있으면 큰비가 내린다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뒤부터 제가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다른 날 달이 필에 걸려 있는데도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또 상구가 나이가 많도록 자식이 없으므로 그 어머니가 아내를 얻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공자께서는 그를 제나라로 심부름을 보내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상구의 어머니는 뒤로 미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에 공자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구는 마흔이 넘으면 반드시 다섯 아들을 두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뒤 정말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감히 묻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었을까요?”
p.186. 군자는 가난한 사람만 돕는다.
p.187.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상군열전
p.193. 「태사공 자서」에서도 말하지만 사마천이 「상군열전」을 설정한 것 자체가 상앙의 변법론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나타낸 것이다. 상앙은 법가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이회의 영향을 깊이 받아서 개혁적인 성향이 강했으나 위나라에서는 중용되지 못하였다. 그는 진나라 효공이 기원전 36년에 현명한 선비를 구한다는 말을 듣고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들어가 효공을 도와 변법을 만들었다.
p.195. 죽음의 문턱에 있는 자의 말은 믿을 수 없는가?

p.199-200. “옳지 않습니다. 성인은 백성의 풍속을 고치지 않고 교화시키며, 지혜로운 자는 법을 고치지 않고 다스립니다. 백성의 풍속에 따라서 교화시키면 애쓰지 않고도 공을 이룰 수 있고, 이미 시행되고 있는 법에 따라 다스리면 관리도 익숙하고 백성도 편안할 것입니다.”
위양이 말했다.
“감룡의 의견은 속된 생각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옛 풍속에 안주하고 학자들은 자기가 배운 것에만 몰두합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은 관직에 있으면서 법을 지키게 할 수는 있지만 법 이외의 문제(변법)를 더불어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하, 은, 주 삼대는 예악 제도가 서로 다르지만 천하에서 왕노릇하였고 오백(춘추 오패)은 종법 제도가 서로 다르지만 모두 천하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예법의 통제를 받으며, 현명한 자는 법을 고치고, 평범한 자는 예법에 얽매입니다.”
두지가 말했다.
“백 배의 이로움이 없으면 법을 고쳐서는 안되며, 열 배의 효과가 없으면 그릇을 바꿔서는 안 됩니다. 옛것을 본받으면 허물이 없고 예법을 따르면 사악함이 없습니다.”
위양이 말했다.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나라에 편하면 옛날 법을 본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은 옛 법을 따르지 않았지만 제왕의 일을 이루었고, 하나라 걸왕과 은나라 주왕은 예법을 바꾸지 않았지만 멸망했습니다. 옛날 법을 반대한다고 해서 비난할 것도 아니고 옛날 예법을 따른다 하여 칭찬할 것도 못 됩니다.”
p.206. 사람의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
p.208-209. “저 오고대부는 형(초) 땅의 보잘것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진나라 목공이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만나 보고 싶지만 찾아갈 여비가 없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자신을 진나라로 가는 여행자에게 팔아 남루한 홑옷을 입고 소를 치며 따라갔습니다. 그로부터 일년이 지나서야 목공은 백리해가 어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하루아침에 미천한 소치기 이던 그를 백성의 관리가 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에서는 이 일에 불만을 갖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가 진나라 재상이 된 지 육칠 년이 지나자 동쪽으로 정나라를 치고, 진나라의 임금을 세 번이나 세우며, 형나라의 재앙을 한 차례 구해주었습니다. 나라 안 사람들을 가르치고 [진나라 남쪽에 있는] 파인까지 공물을 가져오고, 은덕을 제후들에게 베푸니 [진나라 서쪽에 있는] 여덟 곳의 오랑캐까지 와서 복종했습니다. 유여도 이 소문을 듣고 문을 두드리며 만나기를 청하였습니다. 오고대부는 진나라 재상이 된 이래 아무리 피곤해도 수레에 걸터앉지 않으며 더워도 수레에 햇빛 가리개를 치지 않았습니다. 나라 안을 순시할 때에도 호위하는 수레를 거느리지 않고 무장한 호위병도 없었습니다. 그의 공로와 명예는 역사책을 모아 놓은 창고 안에 보존되고 덕행은 후세에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고대부가 세상을 뜨자 진나라 사람들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눈물을 흘리고,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으며, 절구질을 할 때도 방아타령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오고대부의 덕정 때문입니다.”

소진 열전
p.215. 세상에서는 소진을 나라를 팔아먹은 반역의 신하로 일컫지만, 합종에 성공하여 진나라 병사가 십오년 동안 동쪽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데 크게 공헌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소진의 뒤를 이어 소대와 소려가 잇달아 연나라를 위해 세운 계책도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이 때문에 사마천도 소씨 형제들이 지혜와 역량 면에서 다른 사람을 능가했음을 인정하고 이 열전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바로 뒤편에서 보이듯 장의에 대한 사마천의 평가는 비판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p.217. 새도 깃털이 자라지 않으면 높이 날 수 없다.
p.218. “새도 깃털이 자라지 않으며 높이 날 수 없소. 우리나라는 다스리는 이치가 밝혀지지 않았으니 천하를 통일할 수 없소.”
p.227. 닭부리가 될지언정 쇠꼬리가 되지말라.
p.231. 『주서』에서는 ‘처음에 싹을 자르지 않아 무성해지면 어떻게 하나? 터럭같이 작을 때 치지 않으면 결국 도끼를 써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p.255-256. “초나라는 지 땅을 얻고서 나라가 멸망하고, 제나라는 송 땅을 얻고서 나라가 멸망 하였습니다 .초나라와 제나라가 지 땅과 송 땅을 차지하였으나 진나라를 섬기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싸워서 공을 세운 나라는 어느 나라든 진나라와 큰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진나라는 천하를 얻는 데 정의를 따르지 않고 폭력을 썼습니다. 진나라는 폭력으로 정치를 하면서 천하에 공개적으로 경고했습니다.
[예를 들면] 초나라에는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촉 땅의 군대가 배를 타고 문강(사천성에 있는 강으로 문수 또는 민강이라고도 함)에 떠서 여름에 물이 불었을 때를 틈타 장강으로 내려오면 닷새 만에 영도에 이를 수 있소. 한중의 군대가 배를 타고 파강을 나와 여름에 물이 불었을 때를 틈타 한수로 내려오면 나흘 만에 오저에 이를 수 있소 내가 직접 완에서 군대를 모아 수읍을 항하여 내려가면 현명한 사람이라도 계략을 세울 겨를이 없고, 용감한 사람이라도 성내며 맞서 싸울 겨를이 없으므로 나는 매를 쏘는 것처럼 당신들을 재빠르게 칠 것이오. 그런데 왕은 천하의 요새인 함곡관을 치러 오기를 기다리려 하니 그것은 아주 아득한 일이지 않소.’
장의 열전
p.263. 전국시대 중기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에 의거하여 국력을 증강시키는 데 힘썼고, 제나라도 강국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나머지 여섯 나라가 함종으로 맞서자 진나라의 장의는 각 나라와 개별적으로 동맹을 맺어 함종을 깨뜨리고, 제나라와 초나라를 이간시키는 방법을 써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하였다. 특히 장의가 그 아내와 이야기 할 때 혀가 붙어 있는지를 물어 본 것은 혀가 없는 장의는 생각할 수 없으며, 세 치 밖에 안되는 혀를 무기 삼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부귀를 좇던 당시 유세가들의 모습을 부각시키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역사가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일 수 없는 일화들을 기록함으로써 역사의 흐름에 대한 저자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p.265. 작은 이익을 탐내면 큰 뜻을 이루지 못한다.
p.268. 지난날 내가 당신과 술을 마셨을 때 나는 당신 구슬을 훔치지 않았건만 당신은 나를 매질하였소. 이제 당신 나라를 잘 지키시오. 나는 당신나라의 성읍을 훔칠 것이오.
p.270-271. “그렇지 않습니다. 신은 나라를 잘살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땅을 넓히는 일에 힘쓰고, 군대를 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백성을 부유하게 만드는 일에 힘쓰며, 왕업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덕정을 널리 펼치는 일에 힘쓴다고 들었습니다. 이 세가지 조건만 갖추어지면 왕업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지금 왕의 국토는 좁고 백성은 가난합니다. 그러므로 신이 바라건대 상대하기 쉬운 나라부터 추진하십시오. 저 촉나라는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석진 나라로 오랑캐의 우두머리 걸이나 주처럼 난폭한 행동을 합니다. 우리가 진나라가 이를 치기란 마치 이리나 승냥이가 양떼를 쫒는 것처럼 쉬울 것입니다. 그들의 땅을 얻으면 국토는 넓어질 것이고 그들의 재물을 손에 넣으면 백성들은 부유해지며, 무기를 완벽하게 갖출 수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고도 저들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한나라를 빼앗을지라도 천하가 포악하다고 하지 않으며, 서해의 이익을 다 차지하더라도 천하가 탐욕스럽다고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명분과 실속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난폭한 행동을 그치게 했다는 명분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나라를 치고 주나라 천자를 위협한다면 이는 나쁜 이름만 남기게 될 뿐이고, 반드시 이익이 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의롭지 못한 일을 하였다는 이름이 남습니다. 천하가 공격하기를 원하지 않는 주나라를 치는 것은 위험합니다. 신이 그 까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나라는 천하의 종실이며, 제나라는 한나라와 동맹을 맺은 나라입니다. 주나라가 구정을 잃고 한나라가 삼천을 잃게 될 일을 그들 스스로 안다면 두 나라는 힘과 지혜를 한데 모아, 제나라와 조나라를 통해서 초나라와 위나라에 구원을 요청할 것입니다. 주나라가 구정을 초나라에 넘겨주고, 국토를 위나라에 주더라도 왕께서는 그것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위태롭다고 하는 바입니다. 그것은 촉나라를 치는 것만큼 완전하지 못합니다.”

p.275. 신이 듣건대 깃털도 많이 쌓으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물건도 많이 실으면 수레의 축이 부러지며,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이고, 여러 사람의 비방이 쌓이면 뼈도 녹인다고 합니다.
p.282. 또 합종론자들은 힘이 약하고 작은 나라만을 모아서 제일 강한 나라를 치기로 하고는 적을 헤아리지 않고 섣불리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나라가 가난한데도 자주 전쟁을 일으킨다면 위험에 빠지고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은 ‘병력이 부치면 싸워서는 안 되고, 식량이 부치면 오래 싸우지 말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합종을 주장하는 자들은 말을 부풀려 꾸미고 거짓말로 임금의 절개를 높이 추켜올리면서 이로운 점만 말하고 해로운 점은 말하지 않습니다.
p.283-284. 왕께서는 전날 오나라와 싸운 일이 있는데 다섯 번 싸워서 세 번 이겼지만 싸움에 나선 병사들을 모두 잃었고, 한쪽 구석의 신성을 지키느라고 백성만 나선 병사들 모두 잃었고, 한쪽 구석의 신성을 지키느라고 백성만 고달파하고 있습니다. 신은 공이 크면 위험에 빠지기 쉽고 백성이 고달프면 윗사람을 원망한다고 들었습니다. 위험에 빠지기 쉬운 공을 지키느라 강한 진나라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은 신이 생각컨데 왕께 위험한 일입니다.
p.286.달콤한 말은 나라를 망친다.
p.304. “당신 나라는 먼 곳에 있어 다시 우리 위나라에 오기 어려울 테니 이곳 사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원의 여러 나라가 진나라를 치지 않으면 진나라는 분명 당신 나라를 쳐서 불사르고 짓밟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원의 여러 나라가 진나라를 치면 진나라는 서둘러 사신들 편에 많은 예물을 보내서 당신 나라를 섬길 것입니다.”
그 뒤 다섯 제후국이 진나라를 공격하였다. 마침 진진이 진나라 왕에게 말했다.
저리자 감무 열전
p.314. 옛날 효자로 유명한 증삼이 비읍에 있을 때 일입니다. 노나라 사람 가운데 증삼과 이름과 성이 똑같은 자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증삼의 어머니에게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라고 했지만 그 어머니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태연하게 베를 짰습니다. 그러나 조금 뒤 또다시 한 사람이 와서 증삼의 어머니에게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하자 그 어머니는 베 짜던 북을 내던지고 베틀에서 내려와 담을 넘어 달아났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어진 증삼에 대한 믿음이 있었지만 세 사람이나 그를 의심하자 정말인가 싶어 겁을 먹었습니다. 지금 신은 증삼처럼 어질지 못하고, 왕께서 신을 믿는 마음도 증삼의 어머니가 아들을 믿는 마음만 못합니다. 또한 신을 의심하는 자가 어디 세 사람뿐이겠습니까? 신은 왕께서 북을 내던진 증삼의 어머니처럼 신을 의심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p.316. 짐승도 궁지에 몰리면 수레를 뒤엎는다.
p.321. “저는 진나라에서 죄를 짓고 처벌될까 두려워서 도망쳐 나왔지만 몸을 안전하게 둘 만한 곳이 없습니다. 제가 듣건대 못사는 여자와 잘사는 여자가 함께 길쌈을 하였는데, 못사는 여자가 ‘나는 초를 살 돈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히 당신의 촛불에는 남는 빛이 있으니 그 남는 빛을 나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당신의 밝음에 해를 끼치지 않고 나도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양후열전
p.329. 잃는 게 없는 싸움을 하라.
백기 왕전 열전
p.334. 천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
p.353-354. 왕전은 빈양 동향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병법을 좋아하여 진나라 시황제를 섬겼다. 시황제 11년에 왕전은 장군이 되어 조나라 연여를 무찌르고 성 아홉 개를 함락시켰다. 18년에 왕전은 장군이 되어 일 년 남짓 조나라를 공략하여 깨뜨리고 조나라 왕을 항복시키고, 조나라 땅을 모두 평정하여 진나라의 군으로 만들었다. 이듬해에 연나라에서 형가를 보내 진나라 왕을 찔러 죽이려고 했다. 진나라 왕은 왕전에게 연나라를 치게 했다. 연나라 왕 희는 요동으로 달아나고. 왕전은 연나라 수도 계를 평정하고 돌아왔다. 진나라는 왕전의 아들 왕분에게 초나라를 치게 하여 깨뜨리고, 다시 군사를 돌려 위나라를 치게 하여 결국 위나라 왕의 항복을 받고 위나라 땅을 평정했다.
진시황은 삼진을 멸하고, 연나라 왕을 달아나게 했으며, 초나라 군대를 자주 무찔렀다. 진나라 장군 이신은 나이가 젊고 용맹스러워 한때 군사 수천 명을 이끌고 연나라 태자 단을 뒤쫓아 가 연수에서 단의 군사를 무찌르고 단을 사로잡은 적이 있었다. 시황제는 이신을 어질고 용감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이렇게 물었다.
p.358. “세상에 ‘자에도 짧은 데가 있고, 치에도 긴 데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백기는 적의 전력을 헤아려 날쌔게 대응하고 끊임없이 기이한 계책을 생각해 천하에 명성을 떨쳤지만, 응후와의 사이에서 생긴 근심은 없애지 못했다. 왕전은 진나라 장군이 되어 여섯 나라를 평정했다. 당시 왕전은 노련한 장수가 되어 시황제조차도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진나라를 보필해서 덕을 세워 천하의 근본인(인을 베푸는 것)을 튼튼하게 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시황제에게 아첨하여 편하게 있을 곳을 구하다가 늙어서 죽음에 이르렀다. 손자왕이 때에 이르러 항우에게 사로잡힌 것도 마땅하지 않은가? 그들에게는 각기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맹자 순경 열전
p.361. 맹자는 공자 학설의 단순한 계승자라기보다는 유가 사상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유가 사상을 더욱 드러내고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순자는 전국시대 말기 사람으로 맹자를 이어 유가 사상을 더욱 체계화시킨 대표인물이지만 맹자의 사상과는 다른 각도에서 이해해야 한다. 순자가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 ‘예’를 기초로 해서 계층간의 불화와 갈등을 조정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묵자는 유학을 배웠지만 유가 학설이 귀족들의 예, 상, 악, 장 을 옹호하여 백성을 상하게 한다고 보고 유가의 반대파에 서게 되었다. 묵자가 유가를 집중 공격한 것은 그가 유가의 한 이단적 지파를 대표함을 시사하지만, 그가 논리학에 가지는 관심은 명가를 생겨나게 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p.363. 사욕은 혼란의 시작이다.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일찍이 『맹자』라는 책을 읽다가 양(위)나라 혜왕이 맹자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구절에 이르러 책 읽기를 멈추고 ‘아! 이익이란 진실로 혼란의 시작이로구나.’라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자가 이익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그 혼란의 근본 원인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원한을 사는 일이 많다.’라고 했던 것이다 천자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이익을 좋아하는 데서 생긴 폐해가 어찌 다르겠는가?”
p.381.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로 위기를 벗어난다.
p.390.군주가 이익에 눈멀면 백성은 떠난다.
평원군 우경 열전
p.405. 세 치 혀가 군사 백만 명보다 강하다.
p.422. 고대 사람들은 피를 입술에 묻히거나 마셔서 맹세를 했는데 제왕들은 소와 말의 피를 쓰고, 제후들은 돼지와 개의 피를 쓰며, 대부 이하는 닭의 피를 썻다. 여기서는 맹약을 맺는 자들의 신분에 걸맞은 가축의 피를 논하지 않고 서둘러 맹약할 것을 뜻하는 내용으로 보면 된다.
위공자열전
p.425. 신릉군 무기는 전국시대 네 공자 중 가장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서 걸출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는데, 이는 그가 선비를 대하는 남다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이 열전에 함께 나오는 후영, 주해, 모공, 설공 도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신릉군의 일생에서 가장 두드러진 공적은 조나라를 도와 진나라를 무찌른 일인데, 이는 빈객들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했다. 사마천은 신릉군이 예의 바르고 어질며 나랏일을 중시한 것을 이상적으로 평가하여 높이 존경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작위에 근거하여 「위공자 열전」을 「신릉군 열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네 공자 중 신릉군은 그 빈객들로부터 충성과 존경을 얻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사로 일컬어지는 지식인들의 능력을 알아보는 혜안을 갖고 있었다.
p.427. 어진 사람을 얻으려면 정성을 다하라.
p.431.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져 주지 말라.
p.436-437. “세상일에는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고, 또 잊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이 공자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공자께서 다른 사람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시기 바랍니다. 또 위나라 왕의 명령이라 속여 진비의 군사를 빼앗아 조나라를 구한 것은 조나라 입장에서는 공을 세운 것이지만 위나라 입장에서 보면 틀림없이 충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스스로 교만해져 공로가 있다고 하시니, 이는 공자로서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공자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라하였다. 조나라 왕은 몸소 길을 청소하고 직접 나와 공자를 맞이하여 주인의 예로 공자를 서쪽 층계로 오르게 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가로 비켜서 걸으며 사양하고 동쪽 층계로 올라가고 스스로 위나라를 저버리고 조나라에는 공을 세우지 못하고 죄를 지었다고 말하였다. 조나라 왕은 날이 저물 때까지 공자와 함께 술을 마셨지만 차마 성 다섯 개를 바치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공자가 너무나도 겸손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자는 결국 조나라에 머무르게 되었다. 조나라 왕은 호를 공자의 탕목읍(조세 수입이 목욕이나 할 정도로 적다는 겸양어임)으로 주었고, 위나라도 신릉을 공자의 봉읍으로 주었다. 공자는 조나라에 머물렀다.
p.439. 비방 한마디가 인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춘신군열전
p.443. 춘신군 황헐은 네 공자 중 한 사람으로 변설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황헐은 국력이 쇠약해져 가던 경양왕 때에 진나라 소왕에게 글을 올려 곤경에 빠진 초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도와주도록 하였다. 뒤에는 진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태자를 귀국시킴으로써 초나라의 대통을 잇게 하였는데, 이 태자가 바로 초나라 고열왕이다.
황헐은 이십여 년 동안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함종책을 추진하여 진나라에 맞서는가 하면 노나라를 멸망시켜 초나라를 다시 한 번 일으키는 데 이바지했다. 그렇지만 말년에는 권세와 부귀를 지키려다 이원의 간사한 음모에 걸려 비참하게 살해된다.
p.445. 호랑이 두 마리가 싸우다 지치면 개도 못 이긴다.
p.448. 『시경』에 “병사를 잘 다스리는 이는 멀리까지 가서 징벌하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초나라는 진나라 편이고, 한나라와 위나라는 진나라의 적입니다. 또 『시경』에 “이리저리 날뛰는 토끼도 사냥개를 만나면 잡힌다. 다른 사람이 무언가 마음에 두고 있으면 내 마음으로 그걸 헤아릴 수 있다.”
p.459. 복과 불행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다.
범저 채택 열전
p.463. 사마천은 범저와 채택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들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신들의 뜻을 잃지 않았고 공을 이룬 뒤에는 물러나 어진 사람을 따랐기 때문에 특별히 이들에 관한 열전을 만든 것이다. 아울러 진나라가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
p.465. 군주가 의심하면 잠시 떠나 때를 기다려야 한다.
p.482. 머리카락을 뽑아 속죄해도 부족하다.
악의 열전
p.509. 충신의 반역자가 되는 것은 하루아침이다.
p.516. 신이 듣건데 “옛 군자는 사람과 교제를 끊더라도 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않고, 충신은 그 나라를 떠나더라도 자기 결백을 밝히려고 군주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
p.517.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떠나라.
p.520. 연나라 소왕은 즉위하자마자 곽외에게 천하의 어질고 현명한 선비들을 연나라로 모여들게 할 좋은 방법을 물었다. 곽외는 먼저 자신을 정성껏 대우해 달라고 하였고, 소왕은 그에게 큰 집을 마련해 주고 스승으로 모셨다. 그러자 악의와 추연 같은 유명한 선비들이 몰려들었다.
염파 인상여 열전
p.528. “지금 상여를 죽이면 끝내 화씨벽을 얻을 수 없고, 진나라와 조나라의 우호 관계만 끊어질 것이다. 차라리 상여를 극진히 대접하여 조나라로 돌려보내는 편이 낫다. 조나라 왕이 어찌 화씨벽 하나 때문에 진나라를 우롱하겠는가?”
p.529. 피를 뿌려서라도 군주의 위엄을 지킨다.
p.535. 쥐구멍 안의 싸움에서는 용감한 쥐가 이긴다.
p.537. 아버지와 자식은 마음 씀씀이부터 다르다.
p.545. 태사공은 말한다.
“죽음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죽는 것 그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고 죽음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돌려받고 기둥을 노려볼 때라든지 진나라 왕 주위에 있던 신하들을 꾸짖을 때 그 형세는 기껏해야 죽음뿐이었다.”
노중련 추양 열전
p.529. 천하에서 선비가 귀하게 여겨지는 까닭
p.566. 조나라의 평원군은 노중련에게 봉지를 내리려 했지만 노중련은 여러 차례 사양하고 끝내 받지 않았다. 그래서 평원군은 술자리를 마련하여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앞으로 나가 천 금을 내놓으며 노중련의 장수를 빌었다. 그러자 노중련이 웃으며 말했다.
“천하에서 선비가 귀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다른 사람의 걱정거리를 덜어 주고 재앙을 없애 주며 다툼을 풀어 주고도 보상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부상을 받는다면 이것은 장사꾼의 행위입니다. 저는 이런 짓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평원군에게 인사하고 떠나가서는 평생토록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p.567. 잠시의 부끄러움을 참고 이름을 길이 남겨라(중략)
제가 듣건데 지혜로운 자는 때를 거슬러 유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용감한 자는 죽음을 겁내어 명예를 훼손시키지 않으며, 충성스러운 신하는 자기 한 몸을 앞세워 군주를 뒤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p.569. 또한 제가 듣건데 작은 예절에 얽매이는 사람은 영화로운 이름을 이룰 수 없고, 작은 치욕을 마다하는 사람은 큰 공을 세울 수 없다고 합니다.
p.570-571. 또한 조자는 노나라 장군이 되어 제나라와 세 번 싸워 세 번 다 져서 노나라 땅 500리를 잃었습니다. 그때 조자가 뒷일을 생각하여 발꿈치를 되돌려 달아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싸움에서 진 군대이며 포로가 된 장군’이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자는 세 번 싸워 세 번 패한 부끄러움을 떨쳐 버리고 돌아와 노나라 왕과 계책을 상의하였습니다. 제나라 환공이 천하 제후들을 모아 만나는 기회를 틈타 조자는 칼 한 자루의 힘만 믿고 단상으로 뛰어 올라 환공의 심장을 겨누었습니다. 그때 조자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목소리도 떨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세 차례 싸움에서 잃었던 땅을 하루아침에 되찾았습니다. 이 일로 조자는 천하를 뒤흔들어 놓고 제후들을 경악하게 하였으며, 노나라의 위엄을 멀리 오나라와 월나라에까지 미치게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작은 부끄러움과 작은 절개를 이룰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고 후손을 끊어 공과 이름을 세우지 못하는 것을 지혜로운 행동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잠시 개인적인 울분과 원한을 버리고 영원히 빛날 수 있는 이름을 세웠으며, 원망에 사로잡힌 작은 절개를 버리고 대대로 전해질 수 있는 공을 세운 것입니다. 그들의 업적은 삼왕과 우열을 다툴 수 있고, 그 이름은 천지와 함께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부디 당신은 이 가운데 하나를 골라 행동하십시오.
p.572. 여러 사람 입은 무쇠도 녹인다.
p.577-578. 신이 듣건대 “어두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명월주와 야광벽을 던지면 칼을 잡고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는데 무엇 때문인가? 아무런 까닭 없이 갑자기 보물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구불구불 뒤틀린 나무 뿌리일지라도 만승의 그릇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주위 사람들이 먼저 그 모양을 꾸미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까닭 없이 눈앞에 나타나면 제아무리 수후주나 야광벽이라고 해도 원한만 살 뿐 고마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미리 이야기 해 둔다면 마른나무와 썩은 등걸일지라도 공을 세워 잊혀지지 않게 됩니다. 오늘날 지위도 벼슬도 없어 곤궁한 선비들은 빈천한 처지이기 때문에 요 임금과 순 임금의 도를 알고, 이윤이나 관중 같은 말재주를 지니고, 관용봉이나 비간 같은 뜻을 품고 당대의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려 해도 나무 뿌리를 다듬어 군주에게 바치듯이 추천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한 마음과 생각을 다하고 충성과 진실을 열어 군주의 정치를 돕고 싶어도 군주는 칼을 잡고 노려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위도 벼슬도 없는 선비를 마른나무와 썩은 등걸의 쓰임만도 못하게 만듭니다.
어진 임금이 세상을 다스리고 풍속을 바로잡을 때는 도공이 돌림판으로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교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천박하고 현란한 말에 이끌리거나 사람들의 떠도는 말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없습니다.
p.579. 신이 듣건대 “의관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 들어온 사람은 이익을 위해 의로움을 더럽히지 않으며, 명예를 갈고 닦는 사람은 욕심 때문에 행실을 그르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증자는 어머니를 이긴다는 뜻의 승모라는 이름이 붙은 고을에는 들어서지 않았고, 묵자는 조가라는 이름이 붙은 마을에서 수레를 되돌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임금들은 지위만을 제일로 여기므로 얼굴을 돌려 행실을 더럽히면서까지 아첨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섬기게 하고,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친하고 가깝게 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된다면 뜻있는 선비들은 바위굴 속에서 엎드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충성과 신의를 다하여 대궐 밑으로 들어가는 자가 있겠습니까?
굴원 가생 열전
p.585. 사람은 곤궁해지면 근본을 돌아본다.
p.586. ‘이소’란 ‘걱정스러운 일을 만난다.’라는 뜻이다. 무릇 하늘은 사람의 시작이며 부모는 사람의 근본이다. 사람은 곤궁해지면 근본을 돌아본다. 그러므로 힘들고 곤궁할 때 하늘을 찾지 않는 이가 없고, 질병과 고통과 참담한 일이 있으면 부모를 찾지 않는 이가 없다. 굴원은 도리에 맞게 행동하고 충성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여 군주를 섬겼지만 헐뜯는 사람의 이간질로 곤궁해졌다고 할 수 있다. 신의를 지켰으나 의심을 받고, 충성을 다했으나 비방을 받는다면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굴원이 「이소」를 지은 것은 이처럼 분통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p.596. 모자를 신발 삼아 신어서야 되겠는가.
p.598. 가생은 상수를 건널 때 부를 지어 굴원을 조문하였는데 그 문장은 이러하다.
p.599-560.
그만두자꾸나!
나라가 나를 알아주지 않으니
홀로 답답한 마음 누구에게 말하랴!
봉황새는 훨훨 날아 높이 갔네
스스로 날개짓하며 멀리 가 버렸네.
깊은 연못 속 신룡은
깊숙이 잠겨 스스로 제 몸을 소중히 한다네.
밝은 빛 마다하고 숨어 지낼 뿐
어찌 개미, 거머리, 지렁이와 놀랴?
성인의 신덕을 소중히 여기고
탁한 세상 멀리하여 스스로 숨네.
준마도 고삐를 매어 지게 한다면
어찌 개나 양과 다르다 하랴!
어지러운 세상에서 머뭇거리다 재앙 받은 것,
또한 선생의 허물이로다!
천하를 두루 둘러보고 어진 임금 돕지 않고
어찌 이 나라만 고집했는가?
봉황새는 천 길 높이 하늘 위로 날다가
덕이 밝게 빛나는 것 보면 내려오지만,
작은 덕에서 험난한 징조를 보면
날개를 쳐 멀리 날아간다.
저 작은 못이나 도랑이
어찌 배를 삼킬 만한 물고기를 받아들일 수 있으랴?
강과 호수를 가로지르는 큰 물고기도
정녕 땅강아지와 개미에게 제압당하는구나!
여불위 열전
p.613. 진귀한 재물은 사 둘만하다.
p.616. 한 글자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p.618. 거짓으로 얻은 명성은 물거품 같다.
p.622. 이 말은 『논어』「안연」편의 “소문이란 겉으로는 인덕을 좋아하는 듯 하지만 실제 행동은 오히려 그렇지 못하고, 스스로 어진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면서도 그에 대한 의혹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관리가 될 때도 거짓으로 명성을 취하고, 집에 있을 때도 거짓으로 명성을 취한다.”라는 구절에서 나온다. 이 말은 마음이 말한 바와 같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사열전
p.659. 이사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는 진나라에 큰 공을 세웠을지언정 자신은 오형을 받아 죽었고, 집안사람들까지 목숨을 보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의 모습은 동정을 받을 수 없다. 그의 개인적인 비극보다 역사적인 비극이 더 참혹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이사가 진나라가 여섯 나라를 통일하고 제도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인정하면서도, 그와 조고의 음모를 비롯하여 2세를 도와 가혹한 정책을 펼치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것을 적어 꾸짖음으로써 역사의 죄인으로 만들었다.
p.661. 사람이 잘나고 못남은 자기 위치에 달려 있다.

p.680. 선제께서 건강하셨을 때 신이 궁중에 들어가면 먹을 것을 내려 주시고 나갈 때는 수레를 태워 주셨으며, 어부 (황제의 옷을 관장하던 곳)의 옷을 내려 주시고 황제의 마구간의 좋은 말도 내리셨습니다. 신은 마땅히 선제를 따라 죽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아들로서 효도하지 못했고, 신하로서 충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아갈 명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제를 따라 죽으려 하니, 원컨대 여산 기슭에 묻어 주십시오. 폐하께서 신을 가엾게 여겨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p.681. 제 몸조차 이롭게 못하면서 어찌 천하를 다스리랴.
p.684. 대체로 현명한 군주는 반드시 온갖 수단을 다하여 신하의 잘못을 꾸짖고 벌주는 방법을 시행하려고 합니다. 책임을 꾸짖으면 신하들은 능력을 다하여 자기 군주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주는 홀로 천하를 통제하고 남에게 제어되는 일이 없습니다. 더없는 즐거움을 다 맛볼 수 있어야 이런 분이 현명한 군주이신데, 이러한 도리를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p.683-684. 그래서 신불해 (법가 계열에 속함)는 “천하를 차지하고도 자기 뜻대로 행동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천하를 질곡 (차꼬와 수갑)으로 삼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신하를 잘 꾸짖지 못하면서 도리어 천하의 백성을 위해 자기 몸을 괴롭혀 요 임금과 순 임금처럼 그렇게 하면, 그것이 바로 질곡이라는 말입니다. 대체로 신불해나 한비자의 훌륭한 법술을 배워 신하를 꾸짖는 방법을 실행하여 천하를 자기 마음대로 부리지 못하고, 부질없이 애써서 제 몸을 괴롭히고 정신을 수고롭게 하여 몸소 백성에게 봉사하는 것은 백성이 할 일이지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가 할 일이 아닙니다. 이래서야 어찌 존귀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p.684. 옛날에 현명한 사람을 존중한 까닭은 그 사람이 존귀했기 때문이고, 못난 사람을 미워한 까닭은 그 사람이 미천하였기 때문입니다.
p.685. 현명한 군주, 성스러운 왕이 오래도록 존귀한 지위에 있으면서 길이 큰 권세를 잡고 천하의 이익을 독점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결단을 내리고 죄상을 세밀히 살펴 반드시 엄한 형벌을 내림으로써 천하 사람들이 감히 죄를 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근본 원인에는 힘쓰지 않고, 자애로운 어머니가 아들을 망치는 근원을 일삼는다면 성인의 이치를 살피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인의 이치를 실천하지 못하면 자기를 버려서 천하를 위해 고생하는 것인데 어찌 본받으시겠습니까? 이것을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p.690. 신이 듣건데 “신하의 권력이 그 군주의 권력과 비슷해지면 위태롭지 않은 나라가 없으며, 첩의 세력이 남편의 세력과 비슷해지면 위태롭지 않은 집안이 없다.”라고 합니다. 지금 대신 중에는 폐하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이익을 주기도 하고 해를 주기도 하여 폐하의 권력과 별 차이가 없는 자가 있으니, 이것은 매우 온당히 못한 일입니다. 옛날ㄱ에 사성 벼슬에 있던 자한은 송나라 재상이 되자 자신이 형벌을 집행하며 위엄 있게 행세하더니 일 년 만에 자신의 군주를 위협하였습니다. 전상은 제나라 가농의 신하가 되어 작위와 서열로는 나라 안에서 따를 자가 없었고, 그 개인 집이 재력이 제나라 공실과 비슷해지자 은혜를 펴고 덕을 베풀어 아래로는 백성의 마음을 얻고 위로는 신하들의 마음을 얻어 은밀히 제나라의 국권을 빼앗으려고 재여를 뜰에서 죽이고 간공을 조정에서 죽여 드디어 제나라를 손에 넣었습니다. 이 일은 천하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p.698. 태사공은 말한다.
“이사는 여염집에서 태어나 제후들에게 유세하다가 진나라로 들어가서 진나라 왕을 섬겼다. 열국 사이에 틈이 생긴 기회를 타서 시황제를 도와 마침내 진나라의 제업을 이루게 했다. 이사는 삼공의 지위에 올랐으므로 높은 자리에 등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사는 육경의 근본 뜻을 잘 알면서도 공명정대하게 정치를 하여 군주의 결점을 메워 주려 힘쓰지 않고, 높은 작위와 봉록을 누리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군주에게 아첨하고 좇으며 구차하게 비위를 맞추기만 했다. 조칙을 엄하게 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하였으며, 조고의 간사한 의견을 따라 적자를 폐하고 첩의 자식을 제위에 오르게 했다. 제후들이 이미 돌아선 뒤에야 비로소 군주에게 충고하려 했으니 때가 너무 늦었구나! 세상 사람은 모두 이사가 충성을 다했는데도 오형을 받고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근본을 살펴보면 세속의 말과는 다르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사의 공은 주공이나 소공과 어깨를 겨룰 만하였을 것이다.”
장이 진여 열전
p.717. 명분이 있어야 도울 수 있다.
p.728. 이익 앞에서는 친구도 원수가 된다.
경포 열전
p.763. 천하를 다스리는 데 어찌 썩은 선비를 쓰랴.
회음후 열전
p.783. 싸움에서 진 장수는 무용을 말하지 않는다.
p.769. 들짐승이 다 없어지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
p.798. “귀하게 되느냐 천하게 되느냐는 골상에 달려 있고, 근심이 생기느냐 기쁨이 생기느냐는 얼굴 모양과 빛깔에 달려 있으며, 성공과 실패는 결단력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것을 참고하여 판단하면 만의 하나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p.801. “한나라 왕은 나를 정성껏 대접해 주었습니다. 자기 수레로 나를 태워주고, 자기 옷을 나에게 입혀 주며, 자기가 먹을 것을 나에게 먹여 주었습니다. 내가 듣건데 ‘남의 수레를 타는 자는 남의 우환을 제 몸에 지고, 남의 옷을 지는 자는 남의 근심을 제 마음에 품으며, 남의 것을 먹으면 그 일을 위하여 죽는다.’라고 합니다. 내가 어떻게 이익을 바라고 의리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p.802. 옛날 대부 종과 범려는 멸망해 가는 월나라를 존속시키고 월나라 왕 구천을 제후들의 우두머리로 만들어 공을 세우고 이름을 떨쳤지만 자신은 죽었습니다. 들짐승이 다 없어지면 사냥개는 삶아 먹히게 마련입니다. (중략)
또 제가 듣건데 ‘용기와 지략이 군주를 떨게 만드는 자는 그 자신이 위태롭고, 공로가 천하를 덮는 자는 상을 받지 못한다.’라고 합니다.
p.803. “원래 남의 의견을 듣는 것은 일의 성공과 실패의 조짐이며, 계획을 세우는 것은 일의 성공과 실패의 기틀이 됩니다. 진언을 잘못 받아들여 계책에 실패하고도 오래도록 편안한 이는 드뭅니다. 진언을 분별하는 데 한두 가지도 실수하지 않으면 말로도 어지럽힐 수 없고, 계책이 처음과 끝을 잃지 않으면 교묘한 말로 분란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p.804. 높이 나는 새가 모두 없어지면 훌륭한 활을 치운다.
p.806. “정말 사람들의 말에 ‘날랜 토끼기 죽으면 훌륭한 사냥개를 삶아 죽이고, 높이 아는 새가 모두 없어지면 좋은 활은 치워 버린다. 적을 깨뜨리고 나면 지모 있는 신하는 죽게 된다.’라고 하더니,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내가 삶겨 죽는 것은 당연하구나!”
전담 열전
p.836. 독사에게 물린 손은 잘라야 한다.
p.841. 치욕스러운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
번 역 등 관 열전
p.849.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데 어찌 술 한 잔을 사양하리.
p.850. 항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패공은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번쾌를 손짓으로 불러내어 그 자리를 떠났다. 군영을 벗어나자 패공은 수레를 그대로 남겨둔 채 혼자 말에 올라타고 번쾌 등 네 사람은 걸어서 그 뒤를 따랐다. 패공은 산 아래 샛길을 따라 군영으로 돌아 온 뒤 장량을 시켜 항우에게 사과하도록 하였다. 항우도 이것으로 마음이 흡족하여 패공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 이날 번쾌가 군영으로 달려 들어가 항우를 꾸짖지 않았다면 패공은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이튿날 항우는 함양으로 들어가 성안 사람을 모두 죽이고 패공을 한나라 왕으로 세웠다. 한나라 왕은 번쾌에게 열후 작위를 내리고 임무후로 불렀다. 번쾌는 낭중으로 승진하여 한나라 왕을 따라 한중으로 들어갔다.
3. 내가 저자라면
《사기(史記)》는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역사책으로, 중국인의 공통시조 황제(黃帝)로부터 사마천이 살았던 당시 한무제(漢武帝)에 이르는 근 3천년을 기록한 통사(通史)이다. 모두 130편 다섯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제왕을 기록한 12본기(本紀), 제후를 기록한 30세가(世家), 뛰어난 인물을 기록한 70열전(列傳), 그리고 각종 제도를 기록한 8서(書), 연대기에 해당하는 10표(表)가 그것이다.
우리가 아는 중국의 정사(正史)는 모두 사기의 기술형태를 따른 것이며, 우리나라의 대표적 사서(史書)인 삼국사기(三國史記)나 고려사(高麗史) 사기의 영향을 받은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삼국유사를 내내 함께 생각하게 되었다. 삼국유사를 읽으면서 아쉬웠던 부분이 이 책에서 해소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의 원거리. 너무나도 넓은 공간적 배경이 건너뛰는 널뛰기에 맥락을 이해하느라 되돌아가서 다시 읽어야 했다.
연구원 과정내내 책을 덮으며 시간의 아쉬움을 토로하게 될 것 같다. 도서관에서 구해 보는 도중, 나는 책을 주문했다. 기원전의 여러 사례들이 지금 현대사회에 적용해 보아도 무리가 없는 훌륭한 지침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깨달음이 왔기 때문이다.
사부님이 쓰신 ‘사람에게 구하라를 읽었을 때와 이 책을 읽고 나서 다시 그 책을 보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형벌같은 생을 마무리 하면서 이런 고전을 남긴, 사마천에게 감사를 보낸다. 또한 무엇인가를 써서 남긴다는 것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된 시간이었다.

♣ 남는 이야기
관중․ 안자열전(管仲․晏子列傳)의 ‘관포지교’ 와 제자열전, 자객열전의 [형가(荊軻)]등은 오래 남을 이미지가 되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역사를 만들기 위해 목숨을 부탁하고, 목숨을 버리고, 목숨을 의탁하는 그네들의 무협지 같기만 했던 일상이 한껏 다가왔다.

♣자객열전- 중 [형가(荊軻)]
진시황을 죽이기 위해 보내지는 형가, 형가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그의 조상이 제나라 사람이었는데 위로 오자 위나라 사람들은 그를 경경(慶卿)으로 불렀고 연나라로 오자 그를 형경(荊卿)으로 불렀다.

형가는 무술과 검술을 좋아했고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현인 호걸들과 어울렸다.연에서 축(거문고의 일종)을 잘 타는 고점리( 高漸離)와 친하게 지냈다.또한 연나라에 숨어사는 선비 전광(田光)선생도 그를 잘 대접하였다.

전광은 형가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 무렵 秦에 인질로 잡혀 갔던 연나라 태자 단(丹)이 도망쳐 돌아왔다. 태자 단은 일찍이 조나라에 볼모로 갔는데 진나라 왕 政이 조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두 사람은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 단이 진에 볼모로 와서는 진왕 政이 단을 예우하지 않아 단은 이를 원망하고 도망쳐 돌아온 것이다. 태자 단은 진왕에게 원수를 갚아줄 사람을 찾았으나 연나라가 소국이라 힘이 미치지 못하여 태부 국무(鞠武)가 이를 말렸다.

그 후 진나라 장수 번어기(樊於期)가 죄를 짓고 연나라로 망명했는데 국무는 진나라가 두려워 받아주지 말것을 간하였으나 태자가「번어기장군이 천하에 몸둘 곳이 없어 나에게 몸을 의탁 한 것인데 설령 진나라의 협박을 받을지언정 가엽게 된 저 친구를 보낼 수 없습니다라 말하여 받아들였다
.연나라의 위기를 피할 방법을 찾던 중 국무는 태자에게 전광선생을 소개하였다 태자는 전광을 만나 도움을 청하였다.
태자 단은 전광에게 형가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전광에게「이 일은 나라의 큰일이므로 선생께서 새어나가지 않게 해 주십시오」
형가는 전광의 부탁으로 태자 단을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전광은 자기 역할을 다 한후 형가에게 「태자께서는 이일이 나라의 큰일이니 새어나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태자가 저를 의심한 것입니다. 대체로 일을 도모할 때 남을 의심을 사는 것은 절개 있고 의협심 있는 사람의 행동이 아닙니다」라 말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형가는 태자를 찾아갔다.
태자는 형가에게 진왕을 암살할 것을 부탁하고 지위를 높혀 상경으로 삼았다. 진나라가 인접국가들을 침공하기 시작하자 태자 단은 초조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형가는 진나라로 떠나려하지 않았다. 태자가 재촉하자 형가는 진왕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번어기 장군의 머리와 연나라 땅 독항의 지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태자는 지도야 줄 수 있지만 번어기 장군의 머리는 줄 수 없다고 말했다.
형가는 번어기 장수를 만나 전후 사정 이야기를 하자 번어기는「이것이야말로 내가 밤낮으로 이를 갈고 가슴을 치며 고대했던 것입니다.
이제 당신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라 말하고 스스로 목을 쳐 죽었다. 태자는 이 소식을 듣고 시체에 엎드려 통곡하며 슬퍼했다. 태자는 형가가 떠나기에 앞서 연나라의 용사 진무양(秦舞陽)을 형가의 조수로 삼게했다. 떠나는 날 태자와 이 일을 알고 있는 빈객들은 형가가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흰 옷과 모자를 쓰고 형가를 배웅하였다.

고점리가 축을 타고 형가가 여기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이별의 슬픈 노래였다.
「바람은 소슬하고 역수는 차갑구나
장사 한 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형가는 수레를 타고 뒤를 끝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진에 도착하여 형가가 번어기의 머리를 내놓아 진왕을 믿게 하고 지도를 헌상하기 위해 진왕을 알현했다. 진왕은「지도를 펼쳐 보이시오」라 말하자 형가는 지도를 들고 진왕 앞으로 다가섰다. 지도가 다 펼쳐지자 독이 묻은 비수가 드러났다. 형가왼손으로 진왕의 소매를 붙잡고 오른손으로 비수를 쥐고 진왕을 찌르려 하였다. 비수가 닿기 전에 진왕은 놀라 뒤로 물러섰다. 신하들도 놀랐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왕은 검을 등에 지고 칼을 뽑아 형가를 향해 내리쳤다. 형가는 부상을 입고 기둥에 기대어 웃으며 이렇게 꾸짖었다.
「내가 일을 이루자 못한 까닭은 왕을 사로잡아 위협하여 약속을 반드시 받아내어 태자에게 보답하려 했기 때문이다」
형가는 결국 연에 돌아오지 못했다.
初唐四傑 (왕발 王勃, 양형 楊炯, 노조린 盧照隣, 낙빈왕 駱賓王)중 협객의 기질이 있었던 낙빈왕은 형가에 관한 시 한수를 남겨 형가의 비장한 감정을 노래했다.
이곳은 형가(荊軻)를 송별하던 곳 장사(壯士)의 머리털이 관을 찔렀지
그때 그 사람은 이제 죽어 없지만 오늘도 강물만은 여전히 차갑도다.
此地別燕丹
壯士髮衝冠
昔時人已沒
今日水猶寒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완성한 것은 대략 한무제(漢武帝) 말년으로 추정된다.
사마천(司馬遷)은 자신의 저술이 '일가지언(一家之言: 내 독특한 견해)'이며 '장지명산(藏之名山:내 뜻을 알아줄 사람을 기다린다는 의미에서 깊은 산중에 보관)'하겠노라 했던 것인만큼, 게다가 사기(史記)는 통사(通史)이고 정식 지도이념으로 삼은 점이다.
한무제(漢武帝)가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학관(學官)를 임명하고 현량방정(賢良方正/품행이 방정하고 인품이 훌륭)한 인물을 발탁한 것도 모두 동중서(董仲舒)의 건의에 근거했던 것이며, 이와 동시에 방대한 중국의 문관제도(文官制度)가 등장하여 시정(施政)의 주요 통로가 되었다. 그런데 사마천(司馬遷)은 동중서(董仲舒)와 동시대의 사람이지만 이러한 정책의 영향을 받지 않은 다소 특별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지금 ≪사기(史記)≫를 펼쳐보면 사마천(司馬遷)의 경우 낭만주의적이고도 개인주의적인 냄새를 강하게 맡을 수 있다.
어떤 틀에 얽매이거나 고리타분한 유학자(儒學者)의 곰팡이 냄새가 전혀 나지 않으며 상쾌하고 생기발랄한 약동적인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사마천(司馬遷)이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에서 「저는 어려서부터 생기발랄한 성격이었으며 커서는 동네에서 착실하다는 평판을 듣지 못했습니다」는 고백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물론 사마천이 종종 거론했던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이뻐해주는 사람을 위해 치장을 한다」(士爲知己用, 女爲悅己容)는 이야기는 물론 유가 도덕에 근원을 둔 발언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미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굳어진 유가사상의 맥락과는 거리가 있는 내용이다.
≪사기(史記)≫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신명나게 묘사되어 있는 형가(荊軻)와 고점리(高點離)의 방약무인한 태도는 동중서(董仲舒)가 지적한 사교(邪敎)에 가까운 행위였다.
게다가 항우(項羽)랄 것같으면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의 숙적이었는데도 사마천(司馬遷)은 버젓이 유방(劉邦)의 고조본기(高祖本紀) 위에 항우본기(項羽本紀)에 기록했다.
아마 사마천 이후의 역사가가 기록했다면 본기(本紀)에 올려놓는 것은 고사하고 열전(列傳)같은 곳에 넣었을 것이고 그 제목 또한 '항추(項酋)'나 '위초(僞楚)' 등으로 격하시켰을 것이다.--항추(項酋)란 항우란 두목자식, 위초(僞楚)란 헛깨비 초나라 출신 놈팽이 정도의 뜻.
한편 항우(項羽)를 기록한 내용을 보자면 비록 포악한 성격이 드러나면서도 순진하고도 정이 많은 면모가 특별히 부각되어 있다. 특히나 항우(項羽)의 말로(末路)를 기록한 대목에 이르면 읽는 이로 하여금 항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도록 묘사되어 있다.
이에 비해 유방(劉邦)은 음험하고도 위선적인 모습이 더욱 부각되어 있다. 유방의 부인인 여태후(呂太后)를 묘사한 부분은 더욱 신랄하다.
유방(劉邦)이 죽자 그의 애첩이었던 척부인(戚夫人)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장면에 이르자 사마천(司馬遷)은 여태후의 아들 효혜제(孝惠帝)의 입을 빌어 「이건 사람의 짓이 아니다」며 풍자하기도 했다.

사마천(司馬遷)은 <화식열전(貨殖列傳)>을 통해 그의 개인적인 사리관(私利觀)을 피력하고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을 보자면 「천승(千乘)의 왕이나 만가(萬家)의 제후 그리고 백실(百室)의 군(君) 조차도 가난한 것을 걱정하는 판에 하물며 일반 서민들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라고 반문하고, 이어서 「부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라 갈파했다.
물론 일부 특수한 인간이 소신 때문에 빈곤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예외로 치고 그외의 빈곤한 사람에 대해서는 실패한 인생이라 보았던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은
「집이 가난하고 부모님은 연로하시고 처자식들은 밥벌이를 못할 지경에 처했다. 게다가 명절이 되면 조상에게 제사 지내거나 술자리를 마련할 돈도 없고 또한 먹고 마시고 입고하는 기본적인 의식주도 마련하지 못하는 주제에 스스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면 그런 분들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사마천(司馬遷)이 이렇게 과감한 주장을 한 이후로 어언 2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공부를 많이 한 현대 중국의 지식인들일지라도 혹 마음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이런 이야기를 감히 입밖으로 내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과감하게 했기 때문에 사마천(司馬遷)은 훗날 《한서(漢書)》의 저자 반고(班固)의 호된 비난을 받게 된다. 《한서(漢書)》 <사마천전(司馬遷傳)>에서 반고는 다음과 같이 비난을 퍼부었다.
「사마천의 가치관은 성인(聖人)의 가르침에 위배되고 있다. 인생 만사의 최고 기준을 논함에 있어 유가 사상보다 도가 사상을 우위에 놓았고, 협객(俠客)을 논하면서 고결한 인물을 뒤로 하고 간웅(奸雄)을 치켜세웠다. 또한 돈 문제로 들어가면 권력과 재물을 숭상하고 빈곤함을 경멸하였으니 이런 점들이 사마천의 오류라 할 것이다.」
모든 글은 도덕적 윤리적 관점에 충실해야한다는 관점이지만 그렇게 되었더라면 이책의 백미는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외에도 사마천은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되뇌이며 인류의 보편적 과제인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탐구했다. 따라서 우리는 사기를 읽으며 인생의 의미, 처세의 태도, 인간 관계 등에 대해 깊이 사색하게 된다.
단 한 권의 책이 문학 사학 철학을 포괄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 속에서 강자의 부당한 핍박에 대해 강도높게 비판하고 그와 동시에 약자에 대한 인류애적 동정심을 진하게 표현했다는 점은 놀랍다. 사마천의 사기가 2천여년 전의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인류 전체의 고전(古典)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부님처럼 사기열전을 책상위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읽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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