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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1일 21시 24분 등록
역사 속의 영웅들_7

윌 듀런트 / 안인희 옮김



1. 작가에 대하여
#1
윌 듀런트Will Durant 재단 홈페이지에는 그를 소개하면서, 제일 먼저 다음과 같은 문구를 달아 두었다.

“Anybody can make history. Only a great man can write it.” – Oscar Wilde
(누구든 역사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위대한 영혼만이 역사를 쓴다.)

철학자이자 역사가였고, 50여 년 동안 그 사잇길만을 갔으며, 연구하고 쓰고 가르치면서, 철학과 역사에 대해 이 시대 가장 큰 영감을 주었던 사람. 화석화된 철학이론을 현실세계로 일으켜 세워 일상이라는 전쟁터에서 힘있게 걸을 수 있도록 생기를 불어넣었던 사람. 인간의 사랑, 전쟁, 꿈, 성취에 대해 기술 했고, 무엇보다도, “예술과 문학, 그 찬란한 위대함이여!” 라고 애틋하게 노래했던 순수(purity)의 사람. 훌륭한 소 시민이었으며, 성실한 학자였고, 사랑스런 남편이었던 사람. ‘이해와 용서’의 미덕이 철학과 역사의 본분임을 잊지 않았던, 따뜻하고 넉넉했던 인간애(love of mankind)의 사람.

윌 듀런트.

아마도 그 영혼의 깊음과 아름다움에 대해, 위대하다 칭송하려 하는 것이리라.



#2
스스로에 대한 그(윌 듀런트)의 문장으로 시작해보자.

“내게 있어서 역사란 철학의 한 부분이다. 철학은 광범위한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삶과 현실의 광범위한 전망을 – 당신의 태도를 현실이나 삶의 특정한 부분을 향해 이끌어가는 광범위한 전망 말이다. (…) 역사는 시간 속의 사건들을 탐구함으로써 철학적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결론적으로 나는 스스로를 ‘역사를 쓰는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 윌 듀런트

윌 듀런트는 1885년 메세추세츠의 노스 아담스(Massachusetts, North Adams)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원래 윌리엄 제임스 듀런트William James Durant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어머니(French Canadian)가 그리스도의 사도 중 하나인 야고보James의 이름을 선물해 주었던 것이다.

그는 뉴저지의 커니(New Jersey, Kearny)에서 가톨릭 학교에 다녔다. 수녀들에게 배웠으며, 일찌감치 가톨릭 신앙을 가졌다. 이후 15세가 되던 1900년에는 저지 시티에 있는 세인트 피터스(St. Peter’s Academy and College)에 들어갔다. 그의 길은 명백해 보였다. 성직자였다.

그러나 1903년, 그는 저지 시티의 공공 도서관에서 다윈, 헉슬리, 스팬서, 헤겔 따위에 심취된다. 이들의 사상은 가톨릭의 입장에서 보면 이교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예상대로, 듀런트는 곧 무신론자가 된다. 허나, 하나님께 자신의 아들을 철저히 드렸다고 확신하고 있던 어머니께는 그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그는 마음으로는 가톨릭을 떠났지만, 몸으로는 그곳에 걸친 채,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시작한다.

애매한 상황은 독특한 결과를 낳았다. 듀런트는 가톨릭이 있던 자리에 사회주의 사상을 가져왔다. 그는 사회주의에 심취한다. 그의 젊음의 치기는 죽음 이후의 파라다이스가 아닌, 이생에서의 파라다이스를 꿈꾼 것이다.

1907년, 졸업 후 듀런트는 주급 10달러를 받으며 한 언론사(New York Evening Journal)에 리포터로 취직한다. 그러나 매번 강간 따위의 성 범죄를 다뤄야 했던 리포터 생활은 듀런트와는 맞지 않았다. 새로운 직업을 찾던 그는, 그 해 가을 뉴저지의 사우스 오랜지(New Jersey, South Orange)에 있는 새튼 홀(Seton Hall College)에서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기하학을 가르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칼 막스의 사상을 가미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09년)

이후 그는 도서관 사서가 된다. 그는 그곳에서 스피노자의 <에티카: 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를 읽는다. 그는 스피노자의 이교적 사상과 그 수학적 도구들에 매료된다. 이것을 계기로, 듀런트는 스스로의 부조리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은 1)신앙에서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엉거주춤한 모습. 2)그리고 사회주의와 가톨릭의 어설픈 합치기 노력을 통해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꼴사나운 상황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결국 몸담고 있던 가톨릭 학교를 떠난다. (1911년) 떠나면서 가지고 있던 것은 4권의 책과 수중의 40달러가 전부였다. 이 사건(부모의 신앙과의 결별)을 계기로 그와 어머니의 관계는 요원해졌으며, 이들이 다시 화해하기까지는 수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뉴욕으로 갔다. 평화롭고 정돈된 가톨릭 학교와는 달리 맨하튼은 소동스럽기 그지 없는 과격한 곳이었다. 1911년, 그는 페러 모던 학교(Ferrer Modern School)의 선생이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듀런트는 그의 제자와 사랑에 빠진다. 바로 에이리얼 듀런트Ariel Durant이다. 그는 그녀를 퍽(Puck: 장난꾸러기)이라고 불렀다.

1913년, 듀런트는 학교를 그만두고 콜럼비아 대학(Columbia University)의 대학원 과정에 진학한다. 생물학, 심리학, 철학 따위를 전공했는데, 수업료를 충당하기 위해 강의를 계속하기도 했다.

이어 딸이 태어난다. 딸의 이름은 에델Ethel이다. 한편, 에델의 탄생은 듀런트와 그의 어머니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손녀를 보기 위해 할머니가 찾아온 것이다.

처음에 듀런트는 역사에 별로 흥미가 없었다. ‘살육과 정치와 음모의 연속’ 즈음으로 터부시했다. 그러나 버클Buckle의 <문명의 역사로의 소개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Civilization>는 이후 위대한 역사가의 탄생에 전초가 되어주었다. 버클을 읽으며, 듀란트는 아쉬워했다. 그의 책은 문명의 역사에 대해 그야말로 소개에서 그쳤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듀란트는 버클의 일을 마무리하기로 마음 먹는다. 이것이 바로 그의 위대한 저작, <문명의 역사The History of Civilization> 시리즈가 저술되게 된 계기이다. 그가 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41세가 되던 1921년이었지만, 이때부터 그는 이 일을 위해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다.

1917년, 그는 박사학위를 위해 첫 번째 책을 쓴다. <철학과 사회적 문제Philosophy and the Social Problem>이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철학이 힘을 잃었다. 그것은 철학이 실제적인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고개를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이 사회 문제에 참여해야 한다. 철학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그것은 힘을 되찾을 것이고, 그때 사회 문제는 해결된다.”

그는 결국 이 책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같은 대학(콜롬비아)에서 철학과 교수가 되어 재직한다. 곧이어 1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그의 수업도 철회된다.

그 동안, 그는 뉴욕의 한 장로교회에서(지금은 Labor Temple이라고 불린다) 철학, 역사, 문학, 과학, 음악 따위를 주제로 강연한다. 그 해 어느 일요일 오후, 여느 때처럼 강연을 하던 그에게 뜻하지 않는 일이 찾아온다. ‘Little Blue Books’의 출판업자인 E. 하드만 율리우스E. Haldeman Julius가 우연히 그의 강연을 듣게 된 것이다. 플라톤에 대한 강연이었다.

그의 강연에 감명 받은 율리우스는 강연 내용을 책으로 엮을 것을 제의한다. 듀란트는 그 제의를 거절한다. 바쁜 강연 일정과 몇 가지 개인적인 일 때문이었다. 그러나 율리우스는 선수금을 동봉하며 계속해서 편지를 보낸다. 거듭 제의를 거절하던 듀런트와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던 율리우스. 그 사이에서 11개의 내용을 주제로 한 책자가 오가고, 결국 율리우스가 승리한다. 듀란트가 자신의 강연 내용을 책으로 엮기로 결정한 것이다. 바로 그 11개의 내용을 주제로 말이다.

이 책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처음에 듀런트는 1,100부 정도 팔릴 것이라 예상했고, 출판사 측은 1,500부 정도 팔릴 것을 예상했다. 그러나 몇 년 후, <철학 이야기The Story of Philosophy>는 2백 만부 이상 팔렸다. 그리고 현재 이 책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에 번역되어 계속해서 읽히고 있다.

그야말로, 뜻 밖의 횡재였다. 경제적으로 풍족해진 그는 드디어 버클의 못다한 일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은퇴하고 <문명의 역사The History of Civilization> 저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간간히 잡지에 에세이를 기고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쌓인 에세이는 나중에 <철학의 집The Mansions of Philosophy>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1929년)

맨 처음, 듀란트는 <문명의 역사The History of Civilization>를 5권(Volume)의 책으로 펴낼 것으로 계획했다. 그러나 결과는 11권의 대 저작이 되었다. 간략하게 소개한다.

Volume1. 동양의 유산Oriental Heritage (1935) – 인류의 기원부터 간디와 장개석까지이다.

Volume2. 그리스에서의 삶The Life of Greece (1939) –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에 대한 기술이다.

Volume3. 시저, 그리고 그리스도Caesar and Christ (1944) – 로물루스(Romulus: 로마의 건국자, 초대 왕)부터 콘스탄티누스까지. 로마인 이야기이다. 구성상, 듀런트의 최고의 책으로 평가 받는다.

Volume4. 믿음에 대하여The Age of Faith (1950) – 기독교, 회교, 유대교에 대한 내용이다.

Volume5. 르네상스The Renaissance (1953) – 르네상스의 전초기지인 이탈리아에 대한 기술이다. 14세기 페트라르카Petrarch와 보카치오Boccaccio부터 메디치가(家)의 이야기까지이다.

Volume6. 종교개혁The Reformation (1957) – 1300년부터 1564년까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대한 기술이다.

Volume7. 이성의 기원The age of Reason begins (1961) – 1559년부터 1648년까지, 유럽과 동방의 역사 기술이다. 이 책부터, 그의 아내 에이리얼 듀런트Ariel Durant는 공동 저자가 된다.

Volume8. 루이 14세The age of Louis14세 (1963) –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동방에 대한 기술이다.

Volume9. 볼테르The age of Voltaire (1965) – 볼테르에 의해 부흥된 17 - 18세기 계몽운동에 대한 기술이다. 1715년부터 1756년까지의 프랑스, 영국, 독일이 배경이다.

Volume10. 루소와 혁명Rousseau and Revolution (1967) – 듀런트는 이 책을 통해 퓰리처 Pulitzer Prize를 받는다. (1968년 General Non-Fiction 분야)

Volume11. 나폴레옹The age of Napoleon (1975) –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에 대한 기술이다.

그리고 1977년 10월 1일, 대통령(제럴드 포드Gerald Rudolph Ford; 미 합중국 제38대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훈장(The Medal of Freedom)을 받는다.

이후로도 듀란트의 명성은 계속되었다. 그의 책은 전 세계에서 1,700만 부 이상 팔렸다. 그의 책에 감동 받은 독자들은 너무나 많았다. 그 중에는 마하트마 간디, 조지 버나드 쇼, 클레어런스 스워드 데로우, 버틀랜드 러셀 등의 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죽음은 차분했다. 죽기 직전까지 저술활동을 그치지 않았으며, (이 책 <역사 속의 영웅들>) 때가 되자 조용히 ‘역사 속 영웅들’의 대열에 들어섰다. 그는 미국 내에서 가장 존경 받는 철학자이자 역사가이며, 그의 업적과 저술은 윌 듀런트 재단에 의해 끊임없이 진흥되고 있다. 1981년 9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로스앤젤레스의 작은 묘지에 그의 부인 에이리얼과 함께 묻혔다.


* 출처 http://www.willdurant.com/



#3
그는 철학에 대해 이렇게 썼다.

"No Philosophy or Philosopher was complete without: Understanding and Forgiveness." – Will Durant
(이것이 없이는 어떤 철학도, 어떤 철학자도 온전하다 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이해’와 ‘용서’이다.)

그는 철학을 이해와 용서라고 정의했다. 매우 독특한 정의이지 않은가? 그는 역사라는 망원렌즈를 통해 인간의 약점과 불법, 변덕을 ‘이해’하려 했으며, 그것을 ‘용서’하려 했다. (이것이 철학이다) 그의 책에는 전쟁, 음모, 분노 따위의 악덕이 있으며, 사랑, 꿈, 성취 따위의 미덕도 있다. 그는 이것을 ‘교훈과 예술과 문학’이라는 아름다운 조경으로 꾸몄다.

그가 스스로에 대해 뭐라고 했던가? ‘역사를 쓰는 철학자’라 하지 않았던가? 그는 철학을 위해 역사를 선택한 것뿐이다. 그의 제안대로 역사는 철학의 한 부분이다. 그를 읽으며, 우리는 역사를 보고, 거기에서 철학(교훈, 예술, 문학)이라는 방향타를 쥐게 된다. 우리는 역사 속의 영웅들과 사건들을 탐구함으로써 철학적 전망과 지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는 철학의 손을 잡고 인류의 역사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누구든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바른 철학을 가지고 본을 보이며 나아갔던 수 많은 영혼들이 있기 때문이다. 루쉰의 말대로 그것은 먼저 간 자들에 의해 길이 되었다. 역사가 더욱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희망이란 이름의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루쉰, <고향>에서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들어가는 말: 윌 듀런트가 남긴 마지막 유언
내게 있어서 역사란 철학의 한 부분이다. 철학은 광범위한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삶과 현실의 광범위한 전망을 – 당신의 태도를 현실이나 삶의 특정한 부분을 향해 이끌어가는 광범위한 전망 말이다. (…) 역사는 시간 속의 사건들을 탐구함으로써 철학적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10]

제1장 문명이란 무엇인가
남자는 대단히 빛나는 존재일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따지면, 자궁이며 인간 종족의 주류인 여자에게 공물을 바치는 존재다. [16]
국가의 탐욕은 미래의 필요와 결핍에 대한 방어다. (…) 그러나 축적의 욕심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산발적 도둑질, 대규모 강도질, 정치적 부정 부패 등이 널리 퍼질 것이고, 부가 지나치게 한쪽으로 집중되어 마지막에는 혁명을 부를 것이다. [18]
가족, 교회(종교), 학교, 법, 대중의 의견(여론) 등이 복잡한 도덕 규범의 형성을 도왔다. [19]
문명이란 문화적 창조를 격려하는 사회 질서다. [20]
성이 곧 사랑이 되는 이런 성적인 문란 속에서 성은 남자에게 공짜가 되었고…… [21]

제2장 공자와 추방당한 신선
칼라일은 역사를 영웅들의 연속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수많은 세대에 걸쳐 끈질기게 이루어진 발전을 몇몇 뛰어난 개인의 업적이라고 서술하였다. [26]
네가 다투지 않으면 지상의 그 누구도 너와 다툴 수 없을 것이다. (…) 손해를 친절로 갚아라. (…) 나는 선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며 선하지 않은 사람을 선하게 대한다. 이와 같이 하면 모두가 선해진다. 나는 진실한 사람에게 진실하며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진실하다. 그러면 모두가 진실하게 된다. (…) 세상에서 가장 약한 것이 (…) 가장 강한 것을 이긴다. [30]
지혜로운 사람은 심지어 도와 지혜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지혜란, 말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모범과 경험으로만 전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30]
포도의 술, / 황금의 술잔 / 아름다운 오나라 처녀 하나. / 그 님은 조랑말 타고 오네, 방년 15세 / 푸르게 다듬은 눈썹, / 연분홍 수놓은 신발 / 그 님은 황홀하게 노래도 잘하지. / 거북 껍질을 박아 넣은 식탁에 / 잔치가 벌어지니 / 그 님은 취하여 내 무릎에 앉네. / 오 아이여, 나리꽃 수놓은 장막 뒤에서 / 황홀한 이 포옹! (이태백) [36]
복숭아 나무엔 꽃이 피고 강물은 흘러가고. (이태백) [37]
머리를 쳐들고 산 위에 뜬 달을 바라보았네. (이태백) [37]
나무는 자라서 오두막 지붕 높이 되었겠지. (이태백) [38]
이제 비단 한 조각을 찢어내 이 편지를 써서 / 내 사랑을 담아 강물 위로 먼 길 너희에게 띄워 보낸다. (이태백) [38]

제3장 붓다에서 인디라 간디까지
죄라는 것은 이기심과, 개인적인 이익이나 쾌락을 찾는 일이다. [48]
종교가 미덕과 축복뿐 아니라 공포심으로 설교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무법적인 개인주의를 통제할 길이 없다. (어떤 승려의 말) [49]

제4장 피라미드에서 이크나톤까지
피라미드에는 야만적으로 원시적인 요소가 있다 그토록 난폭하게 엄청난 크기를 만들어낸 일과 영원성을 향한 공허한 갈망이 그것이다. [59]
당신(태양)이 높이 오르면 당신의 발자국은 낮이 됩니다. (이크나톤의 시) [67]

제5장 구약 성서의 철학과 시
지상의 존재란, 피할 길 없는 죽음을 매일 연기하는 것. (욥) [83]
역사는 동일한 것을 큰 규모로 되풀이하고 있으며 성서의 족보처럼 탄생과 죽음의 기록일 뿐이다. (솔로몬, 전도서에서) [86]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시편 19:5-6] [88]

제6장 페리클레스에 이르는 길
흐르는 강의 동일한 물 속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모든 것은 흘러간다, 특히 역사는) [95]
개별적인 영혼은 생명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꽃의 일시적인 혀일 뿐이다. 인간은 이 불꽃 속에서 변하는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불을 붙여 밤에 내놓은 촛불과 같다. (헤라클레이토스) [95]
인간을 위해 지속적인 정의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강하거나 영리한 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떤 법이든 피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법은 거미줄과 같아서 작은 파리는 잡지만 큰 벌레는 뚫고 도망친다. (솔론의 법에 대해 그의 친구였던 아나카르시스가 비웃으며 한 말) [107]

제7장 아테네의 황금 시대
보통 한 시대의 철학은 다음 시대의 문학이 된다. [122]
그(소포클레스)는 당시 청중들이 잘 아는 이야기를 한 것뿐이다. 그가 덧붙인 것은 연극의 섬세한 구조와 진지한 시구의 유려한 흐름이었다. [125]
오, 인간은 헛것, / 즐거울 땐 빛나고 두려움이 없지만 / 바람에 흔들리는 백치처럼 세월의 변화에 따라 춤추는 존재!...... (에우리피데스의 연극 중에서, 셰익스피어와 견줌) [127]

제8장 플라톤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까지
행동의 목적은 행복이지만 행복의 비결은 미덕에 있다. 그리고 최고의 미덕은 지성이다. [150]
잠과 생식 활동은 자기(알랙산더 대왕)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며 잠에게 시간을 내주는 것을 싫어하였다. 육체적으로 그는 거의 신에 가까웠다. [151]
정력이란 천재의 절반일 뿐이다. 나머지 절반은 통제의 능력이다. 그리고 알랙산더는 온통 정력이었다. [155]

제9장 로마 공화국
우리의 힘을 다 쓰고 나면 우리는 잔칫상에서 일어나는 손님처럼 우아하게 감사를 표시하면서 생명의 식탁을 떠나야 한다. [176]
인간의 진정한 부는 마음의 평화를 지니고 단순하게 사는 것이다. [176]
결혼은 좋지만 정열적인 사랑은 정신에서 명료함과 이성을 빼앗아간다. [176]
역사는 국가와 문명이 일어나고, 번성하고, 시들고, 죽는 과정이다. 그러나 각 국가나 문명은 거꾸로 관습, 도덕, 법, 예술 등 문명의 유산을 전달해 준다. (우리는 거기서 지표를 얻을 수 있다) [177]

제10장 로마의 혁명
부의 집중은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고 때로는 혁명을 불러온다. [181]
그는 절반은 사자, 절반은 여우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안에 있는 여우가 사자보다 더 위험하다는 평이었다. 평생의 절반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삶의 마지막 10년은 내전으로 보냈으며,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유머 감각을 유지하였고, 자신의 잔인성을 2행짜리 경구시로 우아하게 감싸고, 로마를 자신의 웃음으로 가득 채우고, 적을 10만 명쯤 만들고, 자신의 목표를 모두 달성하였으며, 그러고도 침대에서 죽었다. 이런 남자는 화학적으로 보면 고향에서는 혁명을 억누르고 해외에서는 반란을 억누르는 데 필요한 특질들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로마의 귀족파였던 술라에 대한 묘사) [187]
주사위는 던져졌다. (카이사르가 혁명을 일으키며 한 말) [200]
용서받은 일을 용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203]

제11장 로마 제국(기원전 27년 – 180년)
예술은 예술가와 그 수용자의 감정을 전제로 한다. 나를 울게 하려면 당신 자신이 먼저 슬픔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예술은 감정만은 아니다. 그것은 훈련된 형식으로 나타나는 감정이다. 평온함 속에서 기억된 감정인 것이다. [214]
나는 내 맡은 역을 다하였으니 여러분이 손뼉을 쳐서 박수로 나를 무대에서 좇아내 주시오. (아우구스투스, 죽으며) [219]

제12장 네로와 아우렐리우스
철학은 논리나 배움이 아니라 이해와 받아들임이다. [234]

제13장 인간 그리스도
단지 몇 명이 겨우 몇 년 동안 예수처럼 강력하고 호소력이 있는 인물을 만들어냈다면 그것이야말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보다 오히려 더 믿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238]

제14장 기독교의 성장
지혜를 향한 첫 번째 열쇠는 자주 부지런히 질문하는 것이다. (…) 의심을 통해 우리는 탐구에 이르고, 탐구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아벨라르, <철학자, 유대인, 기독교도 사이의 대화>의 서문에서) [272]
신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주신다. 이단은 폭력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억제되어야 한다. (아벨라르, <기독교 신학>에서) [272]

제15장 르네상스1 /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중심으로
그녀가 얼마나 달콤하게 말하고 웃는지를 / 아는 사람만이 그녀가 짓는 한숨의 달콤함을 아네.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의 시 중에서) [279]
그(페트라르카)는 그녀(마리아 아키노)를 피아메타(작은 불꽃)라 부르고 그녀의 불꽃 속에서 자신을 태우기를 열망하였다. [280]
나는 너를 천상의 존재도 지상의 존재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네가 너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가 되고 스스로 극복하는 존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너는 짐승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신과 비슷한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피코가 신이 아담에게 들려주는 증언 이라고 해서 쓴 것) [298]
평온한 마음과 여가를 품위 있게 즐기는 것보다 더 소망스러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모든 선량한 사람이 원하는 것이지만 위대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일이다. (로렌초) [300]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일은 실행이 아니라 구상에 있다고 했다. 천재적인 사람들은 일을 가장 적게 할 때 가장 많이 일한다. [310]
이따금 그(다빈치)는 거리에서 혹은 작업장을 갑자기 떠나서 이 식당 건물로 날 듯이 달려와 그림(최후의 만찬)에 붓질을 몇 번 하고는 떠나곤 하였다. (천재의 특징, 몰입, 항상 생각 중이라는 의미) [310]
지식을 향한 정열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고귀한 특성이다. [317]
하루를 잘 보내면 그 잠이 달다. 그렇듯이 이생을 잘 보내면 그 죽음이 달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321]

제16장 르네상스2 / 로마
글은 그림이 타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333]
문명이란 소수의, 소수에 의한, 소수를 위한 것이다. [340]
평범한 보통 사람은 밭을 갈고 수레를 끌거나 짐을 지고 동이 틀 무렵부터 어스름이 질 때까지 일을 하였고, 저녁이면 생각을 위한 근육이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을 대신해서 생각을 하도록 하였다. 자신들이 그들을 대신해서 일을 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340]
<부리단의 당나귀> 스콜라 철학자인 장 부리단이 망설임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는 사실을 덧붙여야겠다. 철학적인 나귀가 절망적으로 배가 고팠지만 두 개의 건초더미가 같은 거리에 떨어져서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아무런 이유도 찾아낼 수 없었기에 굶어 죽었다는 것이다. (우유부단함을 묘사) [352]

제18장 종교 개혁1 / 위클리프와 에라스무스
늑대들이 교회를 통치하면서 기독교 양떼의 피를 먹고 살고 있다. (스페인의 고위성직자인 알바로 펠라요가 한 말, 교황 무리에 대하여) [375]
경건한 사랑과 세속적인 탐욕,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자기 포기와 신을 잊은 자기 탐색 사이의 대비는 사회의 다른 계층들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만큼 모든 계층의 성직자들 사이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가톨릭 고위 성직자이며 역사가인 요하네스 얀센, 도이치 교회의 잘못에 대하여) [401]

제19장 종교 개혁2(1517년 – 1555년) / 루터와 공산주의자들
내가 성서의 증언에 의해서나 명백한 이성에 의해 유죄로 인정된 것이 아닌 한, 나의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따를 뿐이다. (…) 양심에 거슬린다는 것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보름스 의회의 질문에 대한 루터의 답변) [421]

제20장 가톨릭 종교 개혁(1517년 – 1563년)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그 영혼을 잃으면 무슨 득이 있겠는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예수회 창시자) [453]

제21장 셰익스피어와 베이컨
세계란 잡초를 제거하지 않은 정원이 자라 씨앗을 맺는 것. 사물들은 소유라는 자연 속에 사납게 우거져 있을 뿐 (셰익스피어, 햄릿 1막2장) [466]
무덤들도 내 명령을 듣고 / 그 안에 잠든 자들을 깨우고 입을 열어 내 마법에 의해 / 그 자들을 밖으로 토해냈다. / 그러나 이제 나는 사나운 마법을 이만 버리겠다. / 내 지팡이를 꺾어서 땅 속 깊이 파묻을 테다. / 어떤 측연도 닿지 못할 깊은 바다 속에 / 내 마법책을 수장시키겠다. (역시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 <폭풍>, 프로스페로) [470]
오 멋져라! / 이 많은 훌륭한 분들이 여기 다 모였네! /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 훌륭한 신세계, / 그 안에 있는 이 사람들! (셰익스피어) [471]
사람은 이곳으로 오는 것과 / 여기서 떠나감을 견디어야 한다오. / 성숙함이 전부요. (셰익스피어 <리어왕> 5막2장) [471]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지식은 단순히 뒤범벅이며 소화되지 않은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쉽게 믿는 태도, 수많은 우연, 그리고 맨 처음에 흡수된 유치한 관념들로 이루어진 덩어리다. (베이컨의 <노붐 오르가눔>) [487]
우리는 소망스런 사유의 논리적 기만을 없애버려야 한다. 명료하지 않은 생각의 온갖 부조리함을 쓸어버려야 한다. 겨우 몇 개의 공리와 원칙들로부터 수많은 항구적인 가치들을 이끌어내라고 제안하는 저 당당한 연역적 사고체계를 싹 쓸어내야 한다. [488]
자연 탐구는 물리학으로 시작해서 수학으로 끝날 경우에 최선의 결과를 낸다. [490]
무신론의 이유는 (…) 종교 안에서의 분열이다. 그런 분열은 많을 수도 있다. 어떤 분열이든 양측에 열성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열은 무신론을 끌어들인다. 또 하나는 사제들의 스캔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특히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학식이 있는 시대이다. 어려움과 불운은 인간의 정신을 종교로 이끌기 때문이다. (베이컨) [491]
한 국가의 청년기에는 군대가 번성한다. 한 국가의 중년기에는 학문이 번성한다. 그리고 군대와 학문이 잠시 함께 번성한다. 국가가 쇠퇴하는 시기에는 상술과 상인들이 번성한다. (베이컨) [492]
남들이 우리를 보듯이 우리가 자신을 본다면 충격이 될 것이다. [494]
이제 잠시 쉬면서 내가 돌아온 길을 되돌아보니 이 글은 내게는 – 우리가 자기자신의 글을 판단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 악사들이 악기를 조율할 때 내는 소리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소음을 낸 것일 뿐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듣기에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음악이 더욱 달콤하게 여겨질 이유가 된다. 그래서 나는 뮤즈의 악기들을 조율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뒷날 더 나은 손길이 그것을 연주하도록 말이다. (베이컨) [496]
인간의 오성은 메마른 빛이 아니라 의지와 감정으로부터 어떤 주입물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과학은 ‘누군가가 원하는 대로의 과학’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이미 가진 것을 참이라고 믿으려 하기 때문이다. [498]





3. 여신(타고 남은 불기운)
이 부분을 쓰기 위해 개요를 잡으면서, 이번처럼 막막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써야 할 내용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명확성과 정확성 사이에서 한참을 갈등했다. 결국, 무리수를 두기로 했다. 이번만큼은 독자보다는 나 자신에 치중하기로 했다. 이 글은 스스로를 위한 것으로, 명확성보다는 정확성에 집중될 것이다. 매우 대략적이겠지만, 서양사를 한번 정리해 보고 싶었다. 물론, 듀런트가 그랬던 것처럼, 가능한 한 큰 궤적을 그리며 성큼성큼 나아갈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분량이 될 듯 하다.

이 책은 듀런트의 마지막 유작으로, 본래 23개 장(章)으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그가 ‘21장’ 까지의 집필을 마쳤을 때, 안타깝게도 이 위대한 역사가의 운명의 시계는 멈추고 말았다. 지병으로 앓고 있던 심장병이 악화된 것이다. 그는 결국 그 해(1981년) 11월, 그보다 13일 먼저 떠났던 아내의 품에 누웠다.

결국 <역사 속의 영웅들>은 본래의 기획 의도와는 달리 ‘21장 셰익스피어와 베이컨’에서 맺어졌다. 손끝에 마지막 페이지를 거들 즈음, 많이 아쉬웠다. “조금만 더 힘을 내 주었더라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인가?)

허나, 이 책은 지금의 스물 한 개 장(章)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다. ‘서양의 역사’ 라는 가장 성스럽고, 가장 세련되고, 가장 웅장하고, 그러면서도 가장 살벌했고, 가장 추악했던, 투쟁•예술•문화•창조•질서•사랑 따위의 아름다운 철학적 조경(outlook)을 가지게 되었다.



#1
그의 유명한 저작 <문명 이야기The Story of Civilization>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해보자. 그는 서양사를 11권의 대 서사시로 펼쳐놓았다. 깜짝 놀란다. 각 권(volume)은 1,000여 페이지에 이르며, 그 주제도 상당히 오밀조밀하다. 제목만 읽어보자.

<문명 이야기> 시리즈
Volume1. 동양의 유산Oriental Heritage (1935)
Volume2. 그리스에서의 삶The Life of Greece (1939)
Volume3. 카이사르, 그리고 그리스도Caesar and Christ (1944)
Volume4. 믿음에 대하여The Age of Faith (1950)
Volume5. 르네상스The Renaissance (1953)
Volume6. 종교개혁The Reformation (1957)
Volume7. 이성의 기원The age of Reason begins (1961)
Volume8. 루이 14세The age of Louis14세 (1963)
Volume9. 볼테르The age of Voltaire (1965)
Volume10. 루소와 혁명Rousseau and Revolution (1967)
Volume11. 나폴레옹The age of Napoleon (1975)

이 책, <역사 속의 영웅들>은 <문명 이야기>의 축약판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비교가 쉽도록 목차를 내 멋대로 조합해 보았다. 앞서 소개한 11권의 제목과 교차하여 읽어보자.

<역사 속의 영웅들>
프롤로그: 문명이란 무엇인가 (1장에 해당) (volume1의 1장 축약)

제1부: 4대 문명 (volume1의 내용 조금과 전체 문명에 대한 정리)
황하 문명: 공자와 추방당한 신선 (2장)
인더스 문명: 붓다에서 인디라 간디까지 (3장)
이집트 문명: 피라미드에서 이크나톤까지 (4장)
메소포타미아 문명: 구약 성서의 철학과 시 (5장)

제2부: 서양사의 뿌리1 – 고대 그리스 (volume2에 해당)
페리클레스에 이르는 길 (6장)
아테네의 황금 시대 (7장)
플라톤에서 알랙산드로스 대왕까지 (8장)

제3부: 서양사의 꽃 – 로마 (volume3에 해당)
로마 공화국 (9장)
로마 혁명 (10장)
로마 제국(기원전 27년 - 180년) (11장)
네로와 아우렐리우스 (12장)

제4부: 서양사의 뿌리2 – 기독교와 가톨릭 (volume3의 확장)
기독교: 인간 그리스도 (13장)
가톨릭: 기독교의 성장 (14장)

제5부: 서양사의 흐름1 – 르네상스 (volume5의 축약)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중심으로 (15장)
로마 (16장)
베네치아의 일몰 (17장)

제6부: 서양사의 흐름2 – 종교개혁 (volume6의 축약)
위클리프와 에라스무스 (18장)
루터와 공산주의자들(1517년 – 1555년) (19장)
가톨릭 종교개혁(1517년 – 1563년) (20장)

제7부: 이성의 시대 개막
셰익스피어와 베이컨 (21장) (volume7의 축약)

그가 처음의 기획 의도대로 이 책을 마무리했다면, 이어지는 목차는 대략 이런 것이 되었을 것이다.

제7부: 이성의 시대 개막
전조(조짐): 셰익스피어와 베이컨,
영국/프랑스의 이성: 루이14세와 볼테르 (22장) (volume8, volume9의 축약)
혁명의 기운: 루소에서 나폴레옹까지 (23장) (volume10, volume11의 축약)



#2
여기까지가 이 책의 큰 그림이다. 이제 좀더 내부로 들어가보자. 우선 위의 내용을 정리하여 몇 개의 깃발을 꼽아보자. 여러분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좀 어수선하다.

이 책에는 크게 5개의 깃발이 꼽힐 수 있겠다.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 번째 깃발:
4대 문명 – 황하(2장), 인더스(3장), 이집트(4장), 메소포타미아(5장)에 해당한다.

두 번째 깃발:
서양사의 뿌리 –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철학과(6장, 7장, 8장에 해당) 기독교, 가톨릭 철학이다. (13장, 14장에 해당)

세 번째 깃발:
로마 – 9장, 10장, 11장, 12장에 해당한다. 귀족 계급(클라시쿠스)에 의해 통치된 기원전 400년부터 아우렐리우스에서 코모두스로 이어지는 기원후 180년까지, 약 600여 년간의 기록이다.

네 번째 깃발:
서양사의 흐름 – 역시,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르네상스와(15장, 16장, 17장) 종교개혁이다. (18장, 19장, 20장)

다섯 번째 깃발:
이성의 시대 – ‘16장 셰익스피어와 베이컨’ 이다. 베이컨의 경험론과 근세철학의 기원이 주된 논의다.

듀런트는 5장에서 이 책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책의 의도는 문명의 역사를 한정된 지면에 요약해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에 의해 남겨진 사상과 표현의 걸작을 탐구하고 그 예를 살펴보는 것이다.” [73] 그렇다. 이 책은 역사를 요약했다기 보다는, 사상(철학)과 표현(문학, 예술)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역사의 전체 조경을, “휘~” 둘러보려는 것이다.

그는 또 역사가 칼라일의 문구를 인용하며 자신의 서술 방식을 이렇게 예고했다. “칼라일은 역사를 영웅들의 연속이라 여겼다. 그리고 수 많은 세대에 걸쳐 끈질기게 이루어진 발전을 몇몇 뛰어난 개인의 업적이라고 서술하였다.” [26] 이 책의 제목처럼(역사 속의 영웅들) 그의 서술 방식은 개인사의 연속이다. 백 여 개의 잘된 저자소개를 읽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읽고 나니 각 개인사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하나의 조경이 되었다. 신기한 일이다.

어쨌든 그의 책에 대해서라면, 역시 그의 방식이 제일 나을 듯 하다. 이번 여신(읽고 남은 흔적)은 그의 방식대로 모아볼 셈이다. 5개의 깃발에서 출발한다. 사상과 표현이라는 테마로 훑데, 인물 중심으로 요약해보자.



#3
첫 번째 깃발: 4대 문명
황하 문명에서 듀란트가 논의로 삼은 인물은 셋이다. 노자, 공자, 이태백이다. 노자는 <도덕경>을 통해 ‘무위자연’을 설파했던 인물이며, 공자는 설명이 필요 없는 인류의 대 스승이고, 이태백은 아름다운 시구를 남겼던 당나라 때 문인이다. 듀란트는 이들의 인물 됨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중국인의 사유는 성자가 아니라 현자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선의가 아니라 지혜를 주로 이야기한다. 중국인들의 이상은 경건한 헌신이 아니라 성숙하고 고요한 마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말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모범과 경험으로만 전수 될 수 있는 것이다.”

인더스 문명의 중심 인물은 붓다이다. 그는 탄생이 모든 악의 근원이며, 마음 속에서 죄(이기심)를 극복했을 때, 끝없는 윤회가 그친다고 가르쳤다. 최고의 경지인 해탈이란, 이기심을 극복한 고요한 상태이다. 논의는 수 천 년을 뛰어넘어 마하트마 간디에까지 이른다.

이집트 문명의 정점에는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피라미드가 우뚝 솟아 있다. 듀란트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피라미드에는 야만적으로 원시적인 요소가 있다 그토록 난폭하게 엄청난 크기를 만들어낸 일과 영원성을 향한 공허한 갈망이 그것이다.” 태양신을 추종했던 아멘호테프 4세(이크나톤, 왕이자 시인이다), 이집트의 번성시대를 열었던 람세스2세에 대한 기술이 주된 논의이다.

마지막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 때부터 페르시아의 통치기간인 기원전 444년까지의 역사를 요약했다. 이 밖에도 구약 성경의 시가(詩歌: 시와 노래)서(書)인 시편, 아가에서 몇 편의 아름다운 시를 소개하고 있으며, 욥기의 내용도 얼마간 다루고 있다. 중심 인물은 아브라함, 욥, 요셉, 사울, 다윗, 솔로몬,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라 등이다.

두 번째 깃발: 서양사의 뿌리
그 첫째 뿌리는 고대 그리스이다. 고대 그리스의 발원은 이집트 문명으로 알려져 있다. 논의는 기원전 540년의 인물인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시작된다. 그는 인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불을 붙여 밤에 내놓은 촛불과 같다.” 그는 또 다툼이 곧 정의라고 선언했다. 경쟁이 최고의 법정이며, 그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나온다는 의미였다. 다음은 피타고라스이다. 그는 기원전 580년의 인물로, 그리스 최고의 철학자였다. 그리스 사람들이 철학자라고 말할 때는 바로 피타고라스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인물 중 하나는 솔론이다. 빈부격차를 해소해주었으며, 법령을 만들어 통치에 안정을 가져왔다.

아테네는 그리스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여건이 좋았다. 부(富)가 모여들었으며(무역이 번성함) 민주주의가 확립되었고 정치가 안정되었다. 당연히 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 시대 문화의 키워드는 ‘질서’ 였다. 균형, 비율, 리듬, 정밀성, 명료성이 이 시대 문화 유산의 가장 큰 특징이다. 피디아스의 ‘파르테논 아테나’ 상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것은 에우리피데스의 시(時)였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타를 읽는 듯했다. 이 밖에도 프로이트에(20세기 정신의학자) 의해 널리 알려진 엘렉트라와 오이디푸스 신화를 남긴 소포클레스가 있었다. 소크라테스도 이 시대에 활동 했던 인물이다. (기원전 400년)

소크라테스가 죽은 기원전 399년에 플라톤은 스물 여덟 살이 되었다. 당시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는 느슨해졌으며, 아테네는 패배에서 일어서는 중이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추종자였다. 그는 공산주의적 유토피아를 꿈꿨다. 이 시대 특이할 만한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랙산더 대왕이다. 기원전 343년,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립 왕의 요청으로 그의 아들인 알랙산더의 교육을 맡는다. 그(아리스토텔레스)는 정직하고 의로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 문화가 서양사의 거대 뿌리가 된 데에는 알랙산더 대왕의 공이 크다. 그는 세계의 절반을 통치했으며, 이를 발판으로 그리스 문화는 무럭무럭 뻗어나갔다.

서양사의 또 다른 뿌리는 기독교와 가톨릭이다. 아니, 기독교이다. 가톨릭은 기독교에서 불거져(튀어) 나왔다. BC와 AD를 가르는 인물인 예수가 죽고 베드로와 바울을 중심으로 초대교회의 역사가 시작된다. 기독교는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나타나기까지, 250여 년간 심한 박해를 받는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국교회로 인정하면서, 가톨릭의 역사가 시작된다. 허나, 이것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가 인정한 것은 자신에게 힘을 실어줄 새로운 종교의 필요였지, 기독교가 아니었다. 기독교는 여전히 비 주류로 물러나, 이제는 같은 뿌리였던 가톨릭의 박해를 받는다.

가톨릭의 무게중심이었던 교황청의 권위는 나날이 신장되어 결국 황제의 권위를 넘어선다. 황제는 교황에게 파문 당하면 언제든 권력을 잃을 가능성이 있었다. 1077년, 하인리히 4세가 겪은 카노사의 굴욕은 교황의 권위가 얼마나 위대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여기서, 400년부터 1000년까지 약 600년 간의 역사가 생략되어 있다) 강력해진 교황청의 권위만큼, 그 타락의 깊이도 거세졌다. 추기경들의 부정부패와 성적 문란이 만연했고, 교황청은 탐욕스럽게 재물을 모아갔다.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면죄부 판매 따위의 썩은 도랑이 서유럽을 중심으로 흘러내렸다.

세 번째 깃발: 로마
기원전 450년, 당시 로마의 정치는 클라시쿠스라는 귀족계급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원로원과 평민간의 갈등은 기원전 48년 카이사르가 정권을 잡기까지 약 400년간 계속되었다. (카이사르는 평민의 편이다)

먼저 로마의 바깥쪽을 살펴보자. 로마와 카르타고는 기원전 264년부터 146년까지 120여 년간 전쟁을 했다.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이다. 특이할 만한 인물은 스페인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으로(기원전 221년) 탁월한 용병술을 보이며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군을 잇달아 물리쳤다. 그러나 이후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 장군이 로마군에 패하면서 승기는 급격하게 로마 쪽으로 기운다. 이어 3차 포에니 전쟁도 승리로 이끈 로마군은 유럽 전체로 세력을 뻗어나갔다.

이번에는 내부이다. 각국에서 들여온(?) 노예는 본국(로마)에서 넘쳐났다. 노예의 값싼 노동력은 시민의 삶을 헤칠 정도였다. 부가 집중되고, 노예로 인해 시민의 삶이 어려워지면서 혁명의 전조가 일었다. 평민파와 귀족파는 끊임없이 대립했으며, 각 파벌 안에서도 음모는 언제나 꿈틀댔다. 당시 평민의 입장에서 개혁을 단행했던 인물은 티베리우스와 카이우스였다. (이들은 형제다) 이들은 평민의 권익을 신장하는 법안을 시행했으며, 귀족파의 반대에 정면으로 맞섰다. 다시 귀족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법안은 무산되었지만, 이후 카이사르가 정권을 잡으면서 이들 형제의 정신은 계승되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을 기억할 것이다. 귀족파의 세력을 등에 업고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암살하면서, (기원전 44년 3월 15일) 로마의 정치권은 다시 한번 기우뚱한다. 카이사르의 측근이었던 안토니우스가 다시 반기를 들어 브루투스를 몰아내고, 이어서 카이사르의 양아들이었던 옥타비아누스가 다시 안토니우스에 맞선다.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악티움에서 물리치면서, 로마는 오랜 공화정 체제를 마무리하고 새로이 독재관(왕) 체제로 들어선다.

로마는 악티움에서 돌아온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를 독재관에 임명한다. (기원전 29년) 그는 정치적으로 탁월했으며 도덕적으로도 선량했다. 귀족과 평민간의 갈등을 완만히 해결했을 뿐 아니라, 법 체제를 마련하고 정치와 사회를 안정시켰다. 세금의 잔여분을 면제해주고, 자비를 털어 재정을 보충했다. 빈민들을 위한 구호비용을 스스로 마련했으며, 공공사업을 일으켜 국가를 진흥했다. 이렇듯 항거할 수 없는 강력한 통치력 앞에 공화제의 잔재들은 서서히 흐려져갔다.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14년부터 최초의 야만인 통치자인 오도아커가 등장할 때까지, 로마는 자그마치 500여 년간 유럽의 패권을 지켜냈다. 로마의 패업을 잠시 훑어보자.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통치자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였다. 그리고 로마 시가지에 화재를 일으킨 것으로 유명한 네로가 이어 왕좌에 오른다. (54년) 당시 열 일곱 살이었던 그는 철학자 세네카의 도움을 받으며 제국을 통치한다. 세네카가 거들던 5년 동안 제국은 번성한다. 네로는 알랙산더 이후로, 시•연극•음악•미술•체육 등에서 뛰어났던 몇 안 되는 통치자로 알려져 있다.

네로 이후의 통치자들은 하나같이 훌륭했다. 로마는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듀런트는 이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누구든 세계 역사에서 인류의 조건이 가장 행복하고 번성했던 시대를 꼽으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아마도 지체 없이 네르바 황제의 등극(96년)에서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죽음(180년)까지의 시대를 꼽을 것이다. 이 황제들의 통치 기간은 아마도 대규모 국민의 행복이 통치의 확고한 목적이 되었던 역사상 유일한 시대일 것이다.”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죽고 그의 아들 코모두스가 등극하면서, 로마는 서서히 오랜 추락을 시작한다. 자그마치 300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이다.

네 번째 깃발: 서양사의 흐름
1327년,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라우라 디 사데를 보았다. “그는 그녀를 작은 불꽃이라 부르고 그녀의 불꽃 속에서 자신을 태우기를 열망했다.” 한 순간의 작은 불꽃은 그의 가슴속에서 26년 동안이나 화르르 타올랐다. 그는 그녀를 위해 207편의 시를 썼다.

1348년, 유럽에 대규모의 흑사병이 찾아왔다. 10만 명 인구의 절반이 죽었다. 피렌체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는 보카치오에게 <데카메론>을 쓰게 했다. 열흘 간의 여정은 백 개의 이야기가 되어 지성들 사이에서 흩어져갔다.

이제 서양사의 양대 흐름인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다룰 차례이다. 먼저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가 르네상스의 화려한 문을 연다.

르네상스의 배경은 크게 네 가지 정도로 볼 수 있다. 1)중산층의 세력이 커지면서 세속주의가 확산되었다. 2)철학, 지성이 성장했다. 3)역사, 법 연구로 정신이 확장되었다. 4)무역이 발달하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되었다.

르네상스는 13세기에서 15세기까지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곳은 유럽 금융의 중심지였다. 변화의 주역은 당시 최고의 은행가였던 코시모 데 메디치였다. 그는 넉넉한 돈을 투자하여 학자, 예술가, 시인, 철학자 등을 후원했다. 곳곳에서 도서를 사들였으며, 사들일 수 없는 것은 필사가들을 고용해 베껴오게 했다. 그리고 이것들을 수도원이나 도서관에 소장하여 무료로 개방했다. 그의 손자 로렌초는 더욱 열성적인 인물로, 할아버지의 뒤를 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시인이었다. 많은 시를 썼으며, 당대 최고의 시인들과 겨뤘다. 로렌초 도서관을 세웠고 플라톤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예술과 문학, 지성을 권장했다. 토론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에는 폴리치아노, 피코 델라 미란돌라, 미켈란젤로, 마르실리오 피치노 등이 있었다.

르네상스의 정점에 있는 인물은, 단연 레오나르도 다빈치일 것이다. 그에 대해서라면,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천재였다. 듀런트의 평가를 읽어보자.

“우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 여러 방향을 향한 그의 정신이 우리를 홀려 그가 실제 이룩한 것을 과장하도록 만들곤 한다. 그는 실천보다는 착상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시대 가장 위대한 과학자나 엔지니어나 조각가나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냥 이 모든 것을 합친 사람이었고 각 분야에서 최고 거장들과 경쟁하였다. (…)”

“레오나르도의 말(馬) 연구는 당시 해부학에서 이루어진 것 중에서 아마도 최고였을 것이다. 밀라노 공작 로도비코와 체사레 보르지아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그를 자신들의 엔지니어로 선택하였다. 라파엘로나 티치아노나 미켈란젤로의 그림들 중에서 <최후의 만찬>과 겨룰 만한 것은 없다. (…) 그 시대의 어떤 조각상도 레오나르도가 만든 석고 모형 <스포르차>만큼 높이 평가된 것은 없었다. 어떤 드로잉도 <성 안나와 성모와 아기 예수>를 능가하지 못했다. 르네상스 철학에서 어떤 것도 자연법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생각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한편 1309년, 교황청은 로마에서 물러나 아비뇽에 유수(幽囚: 갇힘)된다. 이후 예수회를 힘입어 세력을 회복한 교황청은, 1447년 니콜라스 4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르네상스의 움직임에 동참하기 시작한다. 니콜라스 4세는 철학자가 교황이 된 최초의 케이스였다. 이후 교황들은 면죄부 판매, 십자군 전쟁 따위의 구실로 돈을 걷어 모조리 예술가들에게 투자한다. 이때 활동했던 인물들이 피우스 2세, 율리우스 2세, 레오 10세, (교황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이다. 르네상스의 철학은 이렇다 할 모양새를 갖추지는 못했다. 그나마 후세에 전해지는 인물로는 <군주론>을 저술한 마키아벨리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서양사의 흐름 저편에서 루터가 마음껏 기지를 부리고 있을 즈음, 르네상스 이편에서는 하드리아누스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된다. (1522년 1월 2일) 그는 레오 10세가 걸었던 친 르네상스 노선에서 전속력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그리스도로!” 라고 외쳤던 인물이다. 교회사의 입장에서 보면 칭찬할만한 일이지만, ‘이탈리아노의 르네상스 흐름’과는 보조를 맞추지 못했던 셈이다. 이후 클레멘스 7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가톨릭은 다시 레오 10세의 노선을 걷게 된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의 통제권을 두고 대립하던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의 왕들 사이에서 입장을 분명히 하지 못하던 클레멘스 7세는 세 나라의 왕들에 의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클레멘스가 죽을 때는 영국, 덴마크, 스웨덴, 도이칠란트 절반, 스위스 일부 등이 가톨릭 교회에서 떨어져 나갔다.

피렌체만큼 활발하게 르네상스 기운이 일었던 곳은 없었다. 그러나 굳이 그 다음을 꼽으라 한다면 베네치아를 들 수 있겠다. 이곳에서는 벨리니 형제, 조르조네, 티치아노 등의 화가들이 활동했다. 그 중에서도 카를 5세와 바오로 3세의 초상화를 그렸던 티치아노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576년 99세의 나이로 죽었다.

다음은 서양사의 두 번째 흐름인 종교개혁이다. 르네상스와 동시대에 일어났던 일들이며, 상당부분 서로 교차되고 있다. 이를테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던 교황청 타락의 이면에는 르네상스 기운에 보조를 맞추려 했던 교황들의 탐욕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더러운 돈을 긁어 모아 벽화 제작, 성당 건축, 신상 제작 따위에 쏟아 부었다. 이들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밑 빠진 독을 채우기 위해, 서민들은 노예처럼 일했다. 원성이 쌓여갔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움직임이 일었다. (종교)개혁은 불가피해 보였다.

당시의 시대상은 대략 이랬다.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1309년), 성직자들의 부정부패와 성적 문란, 교황청 분열(1387년 – 1417년), 15세기 내내 일어났던 농민 반란, 삼일 천하에 그친 농민전쟁(1525년). 여러모로 개혁의 조건이 갖추어졌다. 누군가 나타나기만 하면 되었다. 혹자는 당시 시대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썼다. “도이치 사람들은 어떤 바보가 로마에 반대하여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일 먼저 개혁의 기를 들었던 사람은 영국의 존 위클리프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위성직자들은 대사면이나 은총이라는 핑계를 꾸며내서 사람들을 기만하고 그들의 돈을 강탈한다. (…) 이런 사면이나 면죄부를 그렇게 비싼 값으로 사는 사람들은 큰 바보들이다.” 그의 뒤를 이었던 이들은 보헤미아의 얀 후스, 프라하의 제롬 등이다. 이들은 가톨릭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고, 교황의 권위를 비웃었으며, 성상숭배•고해성사 따위의 가톨릭 의식을 거부했다. 이후, 위클리프의 무덤은 파헤쳐져서 그 뼈들은 강변에 버려졌고, (1415년) 후스와 제롬은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화형 당했다. (각각 1416년, 1417년)

다음은 루터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르네상스와 교차하여 읽어보자. 이 시기는 교황 레오 10세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후원하던 1517년이다. 교황은 면죄부를 발부하여 미술품의 금액을 충당했다. 당시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였다.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대해 루터는 95개조로 반박하며 공문을 작성했고, 교황청은 루터에게 로마로 오라는 소환령을 발부한다. 루터는 소환에 응했으며,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1521년 1월 27일) 도이치 여론은 그를 지지했다. 다음은 루터가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했던 말이다.

“내가 성서의 증언에 의해서나 명백한 이성에 의해 유죄로 인정된 것이 아닌 한 (나는 교황과 공회의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은 서로 모순되니까) 나의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따를 뿐이다. 나는 어느 것도 취소하지 않을 것이고 그럴 수도 없다. 양심에 거슬린다는 것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분노했으며, 일각에서는 그를 화형 시켜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루터는 안전하게 풀려났다.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돌아와(1522년 2월 19일) 자신의 신학적 저술을 계속했다.

루터의 승리로, 몸을 숙이고 있던 기독교가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재세례파, 로욜라파 따위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으며, 특유의 청교도적 생활로 칭찬받았다. 그러나, 이후로도 이들은 주류에서 밀려나 끊임없이 핍박 받으며 죽어갔다.

이제 종교개혁의 마지막 부분으로 ‘가톨릭 내부에서의 개혁’을 살펴보자. 클레멘스 7세가 죽고 여러 도시가 가톨릭에게서 등을 돌리면서, 교황청은 어느 때보다 쇠약해져 있었다. 게다가 루터의 종교개혁 성공과 그에 따른 개신교의 움직임, 가톨릭 내부에서 일고 있는 회의주의 등으로 인해 자체 개혁의 필요성은 더욱 대두되었다. 개혁은 서서히 진행되었다. 정체된 종교의 특성상, 그 방식은 상당히 스콜라적이었다.

가톨릭 개혁의 핵심인물은 두 사람이다. 한 사람은 성 테라사, 다른 한 사람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이다. 테레사는 평생에 걸쳐 환상에 시달렸다. 그녀는 자신이 하나님을 보았고 그 환상 속에서 난해한 문제들이 해결되었다고 믿었다. 결국 그녀는 수녀가 되었고, 속세로부터 분리된 엄격하고 자급자족적인 수녀원제도를 만들어 냈다. 여기서 훈련 받은 수녀들은 가톨릭을 위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헌신적이고 복종적으로 일했다. 로욜라는 이후 교황청의 가장 큰 배경세력이 되는 예수회를 창시한 인물이다. (1540년) 그는 평생을 거친 순례자의 의상을 입었으며, 항구적인 순결과 빈곤을 맹세했다. 그가 조직한 예수회는 학식, 충성심, 분별, 능변 따위의 미덕을 강조하며 교황청을 사수했다. 이들은 군사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가톨릭의 개혁은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종결되었다. (154년 – 1563년) 수 차례에 걸친 종교회의에서 교황청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성직자의 결혼은 금지한다. 성직자가 애인을 두었을 때는 심각한 형벌을 가한다. 성직자의 도덕성과 규율을 증진시키기 위해 몇 가지 개혁을 도입한다. 교황청 권위에 제한을 둔다. 교회 음악과 미술의 개혁을 위한 규칙을 도입한다. 나체 모습은 감각적인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도록 가린다. 연옥, 형벌사면, 성인을 부르는 것 등은 그대로 남기되 새로이 정의한다.”

가톨릭 내부의 종교개혁이 시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가톨릭 내부 개혁은 주요 목표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최소한 성직 계층의 도덕성은 개선되었다. 르네상스로 흐트러진 이탈리아의 문란함은 성직자의 모범으로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 순결은 유행이 되었으며 도덕성을 겨냥한 미덕들이 이탈리아를 청교도적으로 바꾸어갔다. 교황의 권위도 얼마간 회복되었다.”

다섯 번째 깃발: 이성의 시대
이제 미 완성으로 종결된 ‘영웅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볼 차례이다. 셰익스피어와 베이컨이다.

1580년.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영국은 이전까지의 두 흐름(르네상스, 종교개혁) 이외에 새로운 흐름(계몽주의)이 가미되는 독특한 시기였다. 이 시기를 아우르는 인물은 세 명이다. 엘리자베스 1세, 셰익스피어, 그리고 프란시스 베이컨이다.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해서는, 영국의 국모였으며 자신의 국민들에게 사랑과 정열을 지녔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는 기술쯤으로 마무리하고 넘어가자. 셰익스피어부터이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타는 너무나 훌륭하다. 아름답고, 유려하고, 찬란하고, 격정적이고, 달콤하고, 매섭고, 환희롭고, 염세적이고, 잔인하고, 사랑스럽고, 황홀하고, 애절하고, 고통스럽고, 회의적이고, 열정적이고, 때론 문란하기까지 하다. 문장의 문학적 기질 때문만이 아니다. 통찰과 지성에 무릎을 치며 깊이와 넓이에 혀를 내두른다. 그에게 있어서 문학성이란 사유와 통찰의 충만함을 슬쩍 거들 뿐이다. 셰익스피어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를 능가하는 문장은 없었다. 그는 르네상스 문학의 전범이요, 종결이다.

그렇듯 시간마다 우리는 익어가고
그렇듯 시간마다 우리는 썩어가고
그래서 이야기 하나가 열린다. <뜻대로 하세요>, 2막 7장

프란시스 베이컨은 셰익스피어와 정 반대의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그를 읽으려면, 문학이라는 감성의 늪에서 빠져 나와 지성이라는 사변의 골짜기로 접어 들어야 한다. 셰익스피어가 유려하게 흘러갔다면, 베이컨은 또박또박 걸어나갔다. 절망에 관하여, 한계에 관하여, 그리고 고통에 관하여, 비극과 희극을 쏟아냈던 셰익스피어. 그러나 똑 같은 절망과 한계와 고통에 관한 논의가 베이컨에 이르러서는 희망과 낙관과 이성과 과학의 많은 물소리가 된다. 프란시스 베이컨. 그가 고기를 잡으려 그물을 던진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지식은 단순히 뒤범벅이며 소화되지 않은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쉽게 믿는 태도, 수많은 우연, 그리고 맨 처음에 흡수된 유치한 관념들로 이루어진 덩어리이다.” – 프란시스 베이컨

베이컨은 문학, 예술, 종교에 의해 뒤덮여버린 이성과 과학의 문을 찾아냈다. 그곳에 깃발을 꼽고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소리친다. “여기서부터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냉철하게 사유해야 한다. 르네상스의 가벼움과 종교개혁의 어두움은 이제 저 멀리 치워버리자. 이제부터는 철저하게 이성의 시대가 열려야 한다. 가설과 경험과 증명으로 명확한 사변의 문을 열자.”

사실 그는 너무나 많은 영역을 건드렸다. “이성과 과학의 문을 열겠다”며 거창하게 시작하긴 했지만, 정작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듀런트의 표현대로 그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것 저것 살펴보는 데’에 그쳤던 것이다. 그러나 근세의 철학과 과학은 그가 열어둔 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영국의 왕립협회(학술원)는 베이컨에게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으며, (1660년) 계몽주의 학자들이 펴낸 백과사전은 다름아닌 베이컨에게 헌정되었다. (1751)

그의 책, <학문의 진보>에는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이 진정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이제 잠시 쉬면서 내가 돌아온 길을 되돌아보니 이 글은 내게는 – 우리가 자기 자신의 글을 판단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 악사들이 악기를 조율할 때 내는 소리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소음을 낸 것일 뿐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듣기에 좋은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음악이 더욱 달콤하게 여겨질 이유가 된다. 그래서 나는 뮤즈의 악기들을 조율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뒷날 더 나은 손길이 그것을 연주하도록 말이다.”

그의 말대로였다. 이성의 시대는 그렇게 열렸다. 후배들은 바통을 넘겨 받았고, 과학과 철학의 변주곡은 더욱 찬란하게 연주되었다.



#4
“문명이란 무엇인가?” 라는 거창한 질문으로 시작했다. 듀런트의 답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문명이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다. 개인은 효율적으로 보호해주는 공동체에 속해 안전해졌을 때 문명화되었다. 여기에는 도덕적 규범이라 불리는 적절한 통제기구가 적용되었다. 그리고 그 규범을 유지, 보수해 주었던 것은 다음의 다섯 가지 제도였다. 가족, 종교, 학교, 법, 여론.”

문명의 시사점은 두 가지다. 1)하나는 문명의 역사가 방종과 규율의 진자운동을 거듭해 왔다는 것이다. 이교적인 방종의 시대가 끝나면, 어김없이 청교도적인 규율의 시대가 왔고, 이어지는 것은 또다시 방종의 시대였다. 그 다음은 규율의 시대, 다시 방종의 시대. 그렇게 다듬어져 온 것이 문명의 역사이다.

2)또 하나는 제도권의 딜레마이다. 이들은 항상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축적에의 욕심은 부의 편중 현상을 낳았고, 그것은 민중의 혁명을 불러왔다. 문명은 여러 차례 전복되었다. 누가 그 탐욕의 제단에 올라서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듀런트의 결론은 희망적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 소란스럽고 더러운 강 위에, 부조리함과 고통 한 가운데에 진짜 신의 도시가 감추어져 있다.” 이야기인 즉 슨, 본성상 욕심을 버리지 못해 구질구질 얽히고 만 문명의 역사이지만, 그 속에서 철학과 예술과 문학과 업적이라는 인간 종족의 엄청난 유산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끊임없이 다듬어져 왔고, 여러 차례 전복되어 왔던 문명의 역사. 그 치열한 산고 속에서 힘있게 알을 깨고 나온 아름다운 인류의 유산들. 무엇이었을까?

멜로디여, 협화음과 하모니의 공명이여.
그리고 제발, 인간의 불협화음이여.
이제는 신의 랩소디를 들려다오.
오, 그대에게 부디 자비를.




4. 내가 저자라면
서술의 명료함
서양사의 큰 그림을 그려주었다. 개략적이지만, 흐름을 알 수 있도록 명쾌하게 풀어주었다.

특별한 지도 없이도 잘 썼다. 시대순의 기술이기 때문인 듯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명료하게 정리해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11부작 <문명 이야기The Story of Civilization>를 저술하면서 정리된 지식일 것이다. 책이 이 정도라면, 그의 머릿속은 더욱 선명할 것이다.

이야기꾼
그의 은유법이 너무 맘에 든다. 그저 은유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앞뒤로 연결성을 갖는다. 유려한 문체는 자칫 딱딱한 나열이 될 수 있는 역사를 재미있게 읽히도록 해 주었다. 몇 가지, 본문에서 가져와 보자.

“우리의 힘을 다 쓰고 나면 우리는 잔칫상에서 일어나는 손님처럼 우아하게 감사를 표시하면서 생명의 식탁을 떠나야 한다.” [176] 잔칫상에서 일어나는 손님에서 그쳤다면 그저 그런 은유가 되었을 것이다. 뒤쪽에 ‘생명의 식탁을 떠나야’ 부분이 있어서 어색하지 않은 훌륭한 은유가 되었다.

“일부일처제에 지불 유예를 선언하였다.” [192] 짧지만 강한 비유이다. 머릿속에 각인된다. 그리고 유쾌하기도 하다.

“루터도 반란의 기치를 신학의 사막에 꽂지 않고 도이치 민족 정신이라는 풍요로운 토양에 꽂았다. 개신교가 승리한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민족주의가 깃발을 흔들었다.” [416] 첫 번째 문장의 ‘꽂다’라는 표현과 두 번째 문장의 ‘깃발을 흔들다’라는 표현이 연결성을 가가진다. 더욱 훌륭한 은유가 되었다.

그는 대체로 인물묘사를 재미있게 했다. 생동감이라기 보다는 유쾌함에 치중한 듯 했다. 그것도 그대로 멋이 낫다. 그 중 가장 재미있었던 묘사를 옮겨온다.

“그 지도자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였다. 그는 역사상 가장 서술하기 곤란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 그는 절반은 사자, 절반은 여우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안에 있는 여우가 사자보다 더 위험하다는 평이었다. 평생의 절반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삶의 마지막 10년은 내전으로 보냈으며,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유머 감각을 유지하였고, 자신의 잔인성을 2행짜리 경구시로 우아하게 감사고, 로마를 자신의 웃음으로 가득 채우고, 적을 10만 명쯤 만들고, 자신의 목표를 모두 달성하였으며, 그러고도 침대에서 죽었다. 이런 남자는 화학적으로 보면 고향에서는 혁명을 억누르고 해외에서는 반란을 억누르는데 필요한 특질들로 구성된 것처럼 보였다.” [187]

그(듀런트)가 이야기꾼인 이유는 아테네의 문인인 소포클레스에 대한 기술에서 드러났다. 본문에서 가져왔다.

“그(소포클레스)는 당시 청중들이 잘 아는 이야기를 한 것뿐이다. 그가 덧붙인 것은 연극의 섬세한 구조와 진지한 시구의 유려한 흐름이었다.” [125]

그렇다. 이야기는 이렇게 해야 한다. 공감이라는 기둥에 기대어 섬세함과 유려함이라는 구슬을 꺼내 보여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몰린다.

세세함이 부족했다?
그 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못했었다. 그러나 306페이지부터 갑자기 생각이 몰아쳤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미술작품, <동방박사의 경배>를 설명하는 부분부터였다. 라파엘로의 <성체논쟁>, <아테네 학당>, [330]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334]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 <전원 풍경>, <전원 교향곡>. [366] 모두 마찬가지였다. 다름이 아니라, “사진이 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미술품에 대해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하면서도 사진이 빠져있었다. 그의 말투는 마치 사진을 꺼내놓고 여기 저기 지목하면서 설명하는 듯 했다. 나는 심지어 뒷장을 넘겨보며 “사진이 어디 있나?” 찾아보기도 했다. 사진을 넣었어야 했다.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혹은, “궁금하면 직접 찾아보시오” 하는 것 같았다. 특히 라파엘로가 그린 율리우스 2세의 초상화와 바오로 3세의 초상화를 비교하는 대목에서는 [369] 급기야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소리치게 했다. “그래, 알겠으니 이제 사진을 보여줘.”

역사를 크게 그려 볼 수 있는 방법(큰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아무래도 타 지역과의 비교일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말이다.

“로마 제국이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기는, 네르바 황제의 등극(96년)에서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죽음(180년)까지인 100여 년이 될 것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했던 시기가 한 무제 때인 AD 100년경이므로 로마의 전성기와 중국의 통일시대가 가까스로 교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야기인 즉 슨, 서양사 중심의 기술이긴 하지만, 이따금씩 아시아 등지의 인물(혹은 사건)들과 비교해 열거해 주었다면, 더욱 훌륭한 역사책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 밖의 아쉬운 점
역사책을 여럿 읽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회가 마련되어 역사책을 보게 될 때면, 제일 먼저 들춰보는 부분이 있다. 다름 아니라, 가톨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AD 400년부터 르네상스, 종교개혁 따위의 조짐이 일어나는 AD 1100년까지 약 600년간에 대한 기술이다. 서양사를 다루는 대부분의 역사책에는 이 구간이 흐려져 있다. 이 책도 마찬가지이다. 이 구간보다 오히려 고대사가 더욱 꼼꼼하게 나열되었다. 실망이었다.

이 시대는 아마도 기독교와 가톨릭 간의 전투, 교황청의 성장, 황제권의 약화, 부정부패, 성적 문란, 경제 생활의 발달, 무역 신장, 중산층의 성장, 계급의 고착화 따위의 일들이 일어났을 것이다. 체계적으로 정리해보고 싶었으나 실종되어 있었다. 여느 책들처럼 그도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 다른 책(때)을 기약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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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5.22 02:41:56 *.36.210.11
평범한 보통 사람은 밭을 갈고 수레를 끌거나 짐을 지고 동이 틀 무렵부터 어스름이 질 때까지 일을 하였고, 저녁이면 생각을 위한 근육이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을 대신해서 생각을 하도록 하였다. 자신들이 그들을 대신해서 일을 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340]

<부리단의 당나귀> 스콜라 철학자인 장 부리단이 망설임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는 사실을 덧붙여야겠다. 철학적인 나귀가 절망적으로 배가 고팠지만 두 개의 건초더미가 같은 거리에 떨어져서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아무런 이유도 찾아낼 수 없었기에 굶어 죽었다는 것이다. (우유부단함을 묘사) [352]


무지하게 분석적이고 꼼꼼하고 이성적이네요. 저자가 쫄았겠어요. 마지막에 조금 지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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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5.22 11:13:36 *.248.75.18
개구쟁이 고마워요, 그대의 꼼꼼한 서치때문에 이글이 문명이야기의 완벽한 축약이라는 것과 전체 구도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이해를 갖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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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쟁이
2008.05.22 12:44:55 *.235.31.78
써니님의 채찍에 힘입어, '내가 저자라면' 부분을 보태 넣었습니다. 그러나 매우 엉성합니다. 시간을 나누기가 힘들어, 개요잡았던 것을 거의 그대로 들어다 놓았습니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소은님은 매번 과찬이십니다. 게다가 이 긴글을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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