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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6일 09시 52분 등록

열정과 기질 - 하워드 가드너/임재서 옮김/북스넛

1. ‘저자에 대하여’-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NER)

이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 중 한 사람인 하버드 대학의 하워드 가드너 교수. 1983년 『마음의 틀(Frames of Mind)』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정신은 IQ테스트로 간단히 측정할 수 있는 단면적인 현상이 아니며, 인간은 언어, 논리수학, 음악, 공간, 신체운동, 인간친화, 자연친화, 자기성찰 지능 등의 다원적인 지능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것이 이후 교육계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다중지능’ 이론이다. 그는 이 각각의 지능들이 서로 독립적이며, 각기 독자적인 발달과정을 갖는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인간의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의 발달과정을 분석하는 프로젝트제로(PROJECT ZERO)연구소의 책임자로서, 인간의 정신능력에 관한 폭넓고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해 왔다. 30년 가까이 연구소를 이끌면서 지능과 창조성, 리더십, 교육방법론, 두뇌개발에 관한 연구 결과를 정리하여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그는 다중지능 이론을 바탕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를 살면서 창조적 기질을 보여준 대표적 거장인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등 7명의 삶을 조명하면서 창조성의 비밀을 풀어나간다. 그것이 바로 이 책, 『열정과 기질(Creating Minds, 1993)』이다. 그는 이 저서를 통해 창조성은 어떻게 길러지는지, 창조성의 조건은 무엇인지, 그들이 살았던 현대 사회는 창조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탐구해간다.

또한 그는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살았던 세계적으로 주목할 만한 리더들의 삶을 면면히 들여다보며, 그들이 시대와 역사를 이끌고 변화시킬 수 있었던 배경과 원인을 분석한 연구 결과를 또 한권의 책으로 펴냈다. 그것이 『통찰과 포용(Leading Minds, 1995)』이다. 창조성 연구 이후 저자가 천착해온 지도자의 마인드에 대한 종합적 결론이기도 한 이 책은, 리더십이라는 포괄적 주제를 인지학적으로 접근하여 풀어낸 독창적 연구로 평가받는다.

하버드 비즈니스 출판부는 수십 년에 걸친 연구를 통해 인간 정신 작용의 단면들을 파헤친 가드너에게 그의 이론을 ‘비즈니스’에 접목시켜 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에 가드너 교수는, 모든 사람이 인생의 매 순간 시도하고 있지만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고, 그 과정 또한 베일에 가려져 있는 ‘마음의 변화’라는 수수께끼를 삶의 다양한 장면에 적용시켜 조명해보려는 시도를 했다. 그리고 그 결과 탄생한 책이 바로 『체인징 마인드(Changing Minds, 2004)』이다.

한편 그는 1995년부터 클레어몬트 대학교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 스탠퍼드 대학의 윌리엄 데이먼 교수와 함께 '훌륭한 전문 직업인 되기 연구 프로젝트(The Good Work Project)' 를 진행해 왔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1차 결과물을 정리하여 『Good Works(2001)』를 출간하였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심리학자, 경제학자, 교육학자인 세 사람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전문가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의 조화, 윤리성과 유능성의 만남에 대해 깊이 있게 살펴본다.

그의 저작물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그의 홈페이지(www.howardgardner.com)를 방문하면 찾아 불 수 있는데, 한가지 재미난 점은 그가 발표하는 ‘Minds 시리즈’를 살펴보는 것이다.

Multiple Intelligences(1983, 1993) 로 시작해서
Creating Minds(1993) => Leading Minds(1995) => Extrordinary Minds(1997) => The Disciplined Mind(1999) => Changing Minds(2004) => Five Minds for the Future(2007) 까지...

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그가 발간한 일련의 책 제목을 삺펴보면 보면 그가 평생에 걸쳐 연구해온 교육심리학 분야의 업적들을 장기적인 계획 하에 저술로 쏟아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좀더 알고 싶은, 끌림이 오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1. 취리히에서의 우연한 만남

나는 창조적인 혁신에는 아이다운 천진성과 어른의 원숙함이 결합해 있다고 생각한다. 20세기의 고유한 천재들은 어린 아이이 감수성을 체화하고 있었다.[38]

이 분석틀은 세 가지 핵심 요소로 이루어진다. 창조적인 인물, 창조적인 행위의 대상이나 직업(일), 그리고 창조적인 인물의 세계에 거주하는 다른 사람들이 바로 그것이다.[38]

정치를 비롯한 인간관계의 영역에서는 창조적인 도약이 수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일어나고, 따라서 어떤 특정한 창조적인 도약을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활약한 특정한 개인과 동일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45]

창조적인 인물과 그가 활약하는 분야의 변증법적 관계는 이 책에서 변함없이 주목하는 주제이다. 모든 사례 연구에서 나는 개인과 그가 속한 분야 사이의 변화하는 관계를 주목할 뿐 아니라, 그가 특정 분야에서 새로운 상징체계를 구상하고 보급하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46]

헤겔적 사고방식의 핵심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즉, 역사에는 고유한 추동력이 있어서 일정한 시대에는 특정한 시대정신과 주제가 전면에 나서고 시대가 바뀌면 다른 시대정신에게 자리를 내주는 식으로 역사가 나선형적(변증법적)으로 진행한다는 생각이다. 심지어 특정한 시대정신을 예측할 수도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과거에 대응하는 방식에 따라 한 시대의 고유한 모습이 결정된다는 것이다.[48]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서유럽과 동유럽에 만연한 것은, 한편으로는 기존 사회제도의 퇴조와 공통 지식의 소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개는 불온하다 싶을 정도로 낯설고 때로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무모한 창조적 열정이었다.[53]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 시대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1900년 무렵은 특별한 성격을 갖는 시기로서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중요한 창조자들은 공통의 역사적 힘과 사건에 노출되었을 뿐 아니라. 서로의 활동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들 각자의 노력을 독립적으로 연구하는 것도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작업이지만, 특히 현대라는 시대를 공동으로 창조한 이들의 삶에서 비슷한 사건들과 통찰을 찾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그들의 업적을 연구하면 더욱 더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56]

2. 창조성의 연구 방법

창조적인 사람들은 어떤 자극을 받거나 문제를 보면 아주 다양한 연상을 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중 일부는 매우 유별나고 엉뚱하기까지 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창조성 검사의 ‘표준적인’ 문제 항목은 대개 벽돌의 용도를 얼마나 많이 생각할 수 있는지, 하나의 이야기에 어느 정도까지 다양한 제목을 붙일 수 있는지, 추상적인 선화(線畵)를 얼마나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59]

창조적인 작가와 놀고 있는 아이가 하는 일은 똑같다. 창조적인 작가는 환상의 세계를 창조하고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즉, 작가의 환상 세계에는 그의 감정이 충전돼 있다. 물론 그는 환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날카롭게 구별한다.<프로이트>[67]

프로이트의 성격 묘사는 일부 창조적인 인물에게도 적용되지만, 창조성이 없는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관점은 뛰어난 예술가나 과학자를 평범한 예술가나 과학자와 구별하는 데 소용이 없다.[67]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이렇게 ‘몰입 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 순간에는 자신이 무엇을 경험하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중에 반성적으로 자신이 완전히 살아 있었고 자신의 모든 것이 실현되는 ‘절정의 경험’을 했다고 느낀다. 자주 창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 상태를 추구한다고 말하곤 한다. 이러한 ‘몰입 순간’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훈련과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몸과 마음의 고통까지도 감수하려 드는 것이다.
작품에 전념하는 작가들은 책상에 묶여 있는 시간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결과도 신통치 않은 작품을 쓰면서 그런 ‘몰입 순간’을 겪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더욱 실망할 것이다.[69]

사이먼튼은 ‘뛰어난 창조자들은 대체로 왕성한 창조력을 보이는 법이어서 후세대가 존경하는 ’훌륭한‘ 작품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무시되어 온 ’신통찮은‘ 작품도 많이 창조했다’고 주장한다.[71]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거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경우에는 유년기야말로 가장 든든한 동반자가 된다. 실상 창조적인 인물이란 호기심 많던 어린 시절에 품었던 수많은 의문점과 문제의식, 그리고 주변 사물을 관찰하는 섬세한 감수성을 자신이 선택한 분야의 가장 선진적인 이해 방식과 ‘결혼’시키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이다.[78]

창조적인 도약을 이룬 인물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탐구자이며 혁신가이고 사색가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다수를 따르는 데만 만족하지 않으며, 선택한 분야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실험적인 시도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80]

이제 일곱 가지 사례 분석에서 반복해서 드러나는 발달상의 특징을 요약하겠다.
(1) 세상의 일반적인 원리와 (사례마다 다른) 특별한 문제에 대한 유년 시절의 관심
(2) 처음 흥미를 느낀 문제를 탐구하다가 이 흥미를 이어받아 특정 분야를 마스터하겠다고 결심
(3) 선택한 분야에 정통한 후에 모순적인 요소를 발견하거나 새로운 요소를 창조
(4) 창조자가 신기한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단계적(program)으로 탐구해가는 방식
(5) 고립의 시기에 주변 사람들이 행하는 격려와 지지 역할 혹은 방해 역할
(6) 서서히 새로운 상징체계와 언어 혹은 표현 방식을 만들어가는 모습
(7) 관련 비평가들의 첫 반응과 오랜 기간에 걸쳐 이 반응이 변화하는 모습
(8) 보통은 중년의 시기에 이뤄내는 좀더 포괄적인 성격의 두 번째 혁신(및 이와 관련된 사건들) [82]

합법적인 권위를 가진 장(場)의 판단이 없으면, 어떤 사람이 ‘창조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결정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92]

나는 이들 요소 각자에 혹은 요소들 사시에 모종의 비동시성(asynchrony)이 존재하며, 이 비동시성이 창조성의 실현 전망을 높인다고 주장할 것이다.[92]

3. 지그문트 프로이트 - 세상에 홀로 맞선 사람

“내 아들의 발가락이 내 머리보다 영리하다” <프로이드 아버지>[108]

정신분석학자인 에릭 에릭슨의 용어를 빌면, 프로이트의 20대는 일종의 ‘심리사회적 유예기간(psychosocial moratorium)' 이었다. 이 기간에 그는 자신이 어느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결정하기 위해 다양한 직업과 생활방식을 시도했었다.[117]

프로이트는 전환점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하기 직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빈의 의사들 모임에서 그는 “수천 년이나 수수께끼로 남은 문제의 해답, 즉 ‘나일강의 원천’”을 발견했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빈에서도 다른 어디에서도 프로이트의 말을 귀기울여 들은 사람은 없었다. 대개는 무시당했고, “어리석고 말도 안 되는 억측이며, 비합리적인, 증명되지도 않고 증명할 수도 없는”주장이라는 모진 비난을 들었다. 한때는 가족들에게 왕 대접을 받았고 동료들과 스승들에게는 애정과 존경을 받았으며, 광범위한 지식을 섭렵할 수 있었던 프로이트가 가장 불행한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브로이어 등 가장 가까운 동료들은 더 이상 뜻을 같이 하려고 들지 않았고,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은 그가 주장하려는 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때는 세상에 많은 친구들이 있었던 프로이트였지만, 이제 그는 자신의 문명을 그대로 걷기로 했다면, 그것은 그 혼자서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122]

『정신분석학 운동의 역사』에서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 외로웠던 시절, 요즘과 같은 압박이나 분망한 일이 없었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영광스러운 ‘영웅시대’처럼 느껴진다. 나의 ‘찬란한 고립’에는 분명 장점도 있었고 매력도 있었다.” 다른 혁신가들도 위대한 비약을 이루기 직전의 정신 상태를 회고할 때면, 감정상의 절정과 추락이라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127]

꿈과 무의식, 그리고 마음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는 확고하게 정립된 연구 방식이나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 개념은 억압(repression)이다. 좀더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면 방어 기제(defense mechanism)라고 하는데, 이는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표상(Vortellung)들을 의식 아래로 억누르는 심리 과정을 일컫는다.[129]

만약 억압이 프로이트 이론 체계의 중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면, 꿈은 억압 과정을 이해하고 그 밖의 정신 생활(psychic life)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프로이트는 꿈을 발견한 것이 자기 인생에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130]

이 대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프로이트는 정신 기관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어휘를 모두 스스로 만들어냈다.[134]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고대 그리스의 오이디푸스 신화와 중세의 햄릿 이야기의 토대가 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해소되지 않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바로 성인 신경증의 뿌리이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 여성의 경우는 ‘엘렉트라 콤플렉스’ - 는 모든 인간의 무의식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140]

프로이트가 유아 성욕(infantile sexuality) 이론을 전개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꿈 분석과 자기분석을 통해 그는 어린 아이들은 유아기부터 강한 성욕(육체적인 쾌락뿐 아니라 정신적인 쾌락 추구)을 갖는다고 확신했다. 모든 아이들은 성 에너지가 특정한 신체 부위에 집중되는 일련의 리비도 단계(처음에는 입, 그 다음에는 항문, 그리고 배뇨 기관, 마지막으로 생식기)를 거쳐 성장한다는 것이다. 유아 성욕에 관한 이런 믿음 등으로 인해 프로이트는 사회에서 배척당했다. 비록 무의식 수준에서 작용한다고 하지만, 단정하고 예절 바른 빅토리아 - 함부르크 시대에 어떻게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들이 강한 성욕을 품고 있다는 말인가?[142]

꿈의 동인(動因)은 무의식에서 생기며, 꿈에는 무의식적 소원이 잠복해 있다. 소원은 전의식으로 표출되고자 하는데, 낮에는 검열에 의해 왜곡되지만 저항이 약해지는 밤에는 다양한 위장과 타협 형성(compromise formation)을 통해 꿈으로 분출된다.
결론 부분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의 꿈 분석을 모델로 삼아 다양한 현상, 즉 두려움, 고통 속에서의 흥분감, 복잡한 사고 기능, 억압 작용, 지배적인 심리 기제 등을 설명한다. 그는 모든 신경증 증상을 무의식의 소원 성취로 간주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지난 10여 년 동안에 구축된 통찰과 연구 사례에 기초하여 하나의 총체적인 세계관이 성립하기 시작한 것이다.[144]

『꿈의 해석』초판본은 처음 2년 동안 겨우 351권이 팔렸을 뿐이며, 곧 절판되었다. 몇몇 공감 어린 서평도 받긴 했으나, 가령 다윈의 『종의 기원』과는 달리 학자들이나 대중들은 이 책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출판 얼마 후에 플리스에게 이런 내용을 써보냈다. “『꿈의 해석』이 무언가 의미 있는 책이라는 걸 인정하는 글은 한 줄도 보이지 않아..... 책의 평판은 그저 그렇고 기껏해야 다들 침묵하는 바람에, 겨우 싹트기 시작한 나와 주위 환경과의 관계가 다시 한 번 파괴되었네.” 그 후에는 이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명백한 사실만을 발견하는 게 내 운명인 모양이네. 아이들이 성적인 감정을 갖는다는 것, 보모라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 밤에 꾸는 꿈은 백일몽과 마찬가지로 소원 성취를 표현한다는 점도 다들 알고 있겠지.”[148]

프로이트는 1910년 무렵에 사회적 문제로 관심사를 확대했고,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정치와 문화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10년 규칙>[161]

프로이트는 생애의 거의 마지막 날까지 활동적인 삶을 살았다. 82살의 나이에 런던으로 강제로 이주한 후에도 환자를 보고 글을 썼다. 암으로 인해 몸은 쇠약해지고 고향을 잃은 상황에서 곧 죽을 목숨이라는 것을 알고도 그는 의연했다.[162]

내 논의에서 그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이를테면, 그는 특정 지능을 활용하여 창조성의 절정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인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성찰하는 자성 지능을 통해, 그리고 아무도 공감과 이해를 보이지 않을 때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통해 그런 성과를 보였던 것이다. 그런 다음에 프로이트는 에너지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려, 자신을 적대하는 세상에게 자기 이론의 진실성을 납득시켰다. 처음엔 세상에 매료되었고, 다음엔 세상에서 가장 고립된 처지가 되어 비밀스런 탐구 작업을 계속했으며, 결국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다양한 집단의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프로이트는 창조성의 이원적 성격을 새삼 환기시킨다. 특정 분야에서 창조적인 도약을 이루어 냈고, 덕분에 그 분야는 마침내 다양한 인간 사회의 관심과 가치를 논할 수 있게 된 것이다.[165]

4.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영원한 아이

아이들은 다섯 살에서 열 살 무렵까지는 상상력을 자유롭게 발휘하면서, 신기하거나 두려운 현상에 관해 질문을 던지고, 야외에서 산책하거나 밤에 잠을 자면서도 그 해답을 궁리하곤 한다.[169]

내가 어떻게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보통 어른이라면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생각하느라 길을 멈추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유가 아닌가 싶다. 이런 문제는 아이 적에나 골몰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지능 발달이 더뎌서 어른이 된 뒤에나 겨우 시간과 공간에 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나는 보통 능력을 가진 아이보다 그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었다.<아인슈타인>[170]

또 한 명의 존경스러운 물리학자 라바이(I. I. Rabi)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물리학자들이란 인간 피터팬이다. 그들은 결코 어른이 되지 않으며 언제나 호기심을 갖고 있다. 세상 물정에 밝아지면, 호기심을 갖기에는 너무 많이, 지나치게 많이 알게 된다.”[171]

아인슈타인은 이 책들을 기쁜 마음으로, 열광적으로, 철저하게, 그러면서도 비판적으로 탐독했다.[174]

명문 취리히 연방 공과 대학에 한 번 입학시험에 실패한 후 입학허가를 받았다.[175]

하지만 학생이던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은, 역학에 대한 전문적인 설명이나 복잡한 문제의 해답이 아니라, 역학과 전혀 관련이 없는 분야에서 역학이 이루어낸 성과였다.[179]

과학사가 토마스 쿤(Thomas Kuhn)의 유명한 용어로 말하자면, 심리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은 ‘패러다임 이전(preparadigmatic)'의 분야라 할 수 있다. 즉, 공인된 지식 체계나 탐구 방법, 혹은 인식상의 발전을 나타낼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분야다. 반면에 패러다임적 과학 분야는 비교적 합의된 지식 체계와 문제 집합, 그리고 널리 인정된 접근 방법과 새로운 작업을 판단하는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180]

패러다임의 개념은 여러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물리학과 같은 분야의 개략적인 역사를 설명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사실 패러다임적 학문 분야의 범례(paradigmatic case)가 물리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중세 학자들의 패러다임을 운위할 수 있고, 갈릴레오와 뉴턴 물리학의 패러다임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여러 학자들의 양자역학을 중심으로 한 20세기 물리학의 패러다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각각의 경우에, 앞선 시기의 패러다임은 일정 기간 과학자들에 의해 널리 수행된다. 처음 발생하는 문제들은 대개 무시되지만, 점차 여러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고, 문제점으로 뚜렷이 부각된다. 이런 시기가 오면, 아인슈타인도 나중에 말했듯이, “마치 땅이 꺼지는 듯해서 어디에서도 새로운 이론을 다질 굳건한 토대를 발견할 수 없게 된다.”
이 같은 위기의 기간에, 결국 몇몇 과학자들이 기존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발견 사항을 보다 넓은 사고틀 속에 봉합하고 편입시킬 수 있는 새로운 체계와 원리, 이론을 만들어낸다. 이 새로운 사고틀은 물론 기존의 이론적 종합을 대부분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 포함하게 된다. 내가 여기서 다루는 경우로 말하자면, 뉴턴 물리학이 아인슈타인 물리학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사고틀에 편입되어 하나의 특별한 사례가 되는 것이다.[181]

그의 결혼 생활이 두 번 모두 실패로 끝났고 두 아들과의 관계 역시 순탄치 않았던 이유는, 이처럼 다른 사람에 대한 갈망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193]

아인슈타인은 남다른 집중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몇 시간, 심지어 몇 일 동안이나 중단 없이 같은 문제를 숙고할 수 있었다. 그가 관심을 두었던 주제 중에는 수십 년 동안 마음속에 담아 둔 것도 있었다. 기분 전환을 위해서는 음악을 듣거나 요트를 타곤 했지만, 이런 순간에도 사색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그는 공책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공책에다 적곤 했다.[194]

그는 가장 야심적인 도전 앞에서 몸을 사리는 과학자들에 대한 경멸감을 감추려들지 않았다. “나는 나무판자를 들고서는 제일 얇은 부분만 찾고 구멍 뚫기가 쉬운 곳에만 송곳을 들이대는 과학자들을 참기가 힘들다.”[198]

아인슈타인은 물리학 분야에서 아직 그 해답은 뚜렷하지 않지만 수십 년 동안 연구되었고 비교적 명확하게 규정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골몰했다. 그를 사로잡았던 주제는 로렌츠와 푸엥카레를 비롯한 당시의 최고급 두뇌들이 연구하던 주제였다. 이 나이 든 학자들이 상대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굳이 천재인 아인슈타인이 아니더라도 그의 세대에 속하는 누군가가 이 문제를 해결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확실한 일이었다. 실제로 아무나 칭찬하거나 신임하는 사람이 아닌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아니라면 프랑스 동료인 폴 랑게방(Paul Langevin)이 특수 상대성 이론을 내놓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199]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의 베른 시에서 특허국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발명품을 평가하지 않을 때는 물리학을 연구했다.[201]

아인슈타인이 어떤 업적을 이룰지 알 도리가 없던 당대인들은 당연하게도 그를 실패한 사람으로 여겼다. 김나지움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지 못했고, 취리히 공대 입학에 실패했으며, 영향력 있는 스승이나 후원자도 없었다. 교수직을 확보하지도 못했고 박사 논문을 완성하지도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특허국의 이름 없는 관리로 남게 될 가능성이 가장 컸던 것이다.[202]

“직접적인 감각 경험으로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복잡한 현상에서 통일성을 인식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라네!”<1901년 그로스만에게 보낸 편지에서>[202]

“특수 상대성 이론을 구상하고 그것을 발표하는 데까지는 5주에서 6주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상대성 이론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전에도 몇 년 동안 충분히 논의하면서 이론의 주춧돌을 준비하고 있었지요. 다만 근본적인 수준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겁니다.”<전기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203]

바로 이점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리학의 표준 절차는 현상을 관찰하고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한 후에, 이로부터 원리와 이론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와 정반대로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높은 추상 수준에서 기본적인 물리 법칙, 가령 광속 일정의 원리를 우선 제기한 후에 이에 근거하여 경험적 현상을 추측하고 그 기본 원리를 다른 법칙과 연결시켰다.[208]

아인슈타인이 이룬 성과는 정말 대단한 업적이었다..... 26살의 특허국 직원이 물리학자들(결국에는 일반 사람들 까지도)이 현실에 대해 사고하는 방법을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실험을 통해 증명된 후에나 인정했을 법한 생각을 아인슈타인은 전제 조건으로 삼아 그로부터 추론을 전개했다.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1900년이 지나고 얼마 후에..... 나는 기지(旣知)의 사실을 토대로 추론을 통해 참된 법칙을 발견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했다. 더 오랫동안 더 필사적으로 노력하면 할수록, 오직 보편적인 공식(원리)을 발견했을 때만 확실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커졌다.”[209]

초기에 주요 잡지에 실린 응답은 하나뿐이었다. 3년쯤 시간이 흐르자 학계의 반응도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이 처음으로 주요 회의에 초빙된 것은 4년이 지난 뒤였다. 특수 상대성 이론을 전면적으로 다룬 진지한 해설서가 나온 것은 6년 뒤였다..... 하지만 저자가 유럽 학계의 중심지 바깥에서 활동하는 무명의 특허국 직원이었고 통신망이 오늘날에 비해 협소하고 느린 시절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반응도 빠른 편이라고 할 수 있다.[213]

심리학을 비롯한 미숙한 과학 분야는 장의 모든 성원들이 인정하고 참여하는 규범적인 패러다임이 나오는 대신 여러 학파들이 충돌하고 대립한다는 점이 특색이다. 반면 물리학 분야는 학자들이 대거 새로운 이론, 즉 양자역학으로 몰려가는 경우에도 상대성 이론을 옹호하는 학자들을 도외시하지 않는다. 다만, 고전적인 뉴턴 물리학이나 ‘고전적인’ 아인슈타인 물리학이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는 주제로 관심을 돌릴 뿐이다. 마찬가지로 다윈은 진화론을 도입하면서 생물학이 보다 성숙한 과학의 지위를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종의 기원』(1859)이 출판된지 135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다윈의 종합, 신 다윈주의의 종합, 그리고 점진주의자와 불연속적 진화 주창자들 간에 벌어지는 현재의 논쟁을 거쳐 왔다. 이 점에서 생물학은 심리학보다는 물리학과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218]

아인슈타인은 프로이트처럼 자기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를 다그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사소한 다툼이나 앙심을 품은 경쟁자에게 시달리지 않았다.[218]

그가 공간과 시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기한 사실, 그것도 ‘상대성’이라는 매력적인 표찰을 붙여서 제기한 것도 한 가지 요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영향력이 더 컸던 ‘양자 이론’은 상대성 이론에 견줄 만한 대중적 추종자를 불러 모으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의 평판은 그의 개인적인 성품에서도 연유했던 것 같다. 털털한 옷차림, 헝클어진 머리, 텁수룩한 콧수염, 격의 없는 태도, 보헤미안 기질 등 남의 이목을 쉽게 끄는 겉모습을 하고 다녔던 그.... 아인슈타인은 외모와 몸가짐, 그리고 마음속으로 ‘어른’의 기준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태도에는 아이다운 천진성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가장 기여한 요인은 제1차 시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수행된 중요한 실험 결과에 대한 전 세계의 반응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발표한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아인슈타인은 중력에 의한 적색 이동과 태양을 지나는 별빛이 1.7초 가량 휘어지는 현상을 예견했고, 이것이 영국의 연구 파견대에 의해 입증됐다.[221]

직관과는 다른 이해 능력, 즉 성찰적 지혜(reflective wisdom)라고 부를 만한 능력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계속 성숙한다.[236]

“나는 신이 어떻게 우주를 창조했는지 알고 싶다. 이런저런 현상이나 이런저런 요소에 대한 각양각색의 견해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신의 생각이다. 나머지는 지엽적인 것이다.”<아인슈타인> [236]

아인슈타인은 겉으로 보면 모순적인 인물이다. 어떤 면에서는 젊은이와 같지만 다른 면에서는 나이보다 원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신자는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신에 관해 사색했고,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무기 개발을 고무한 평화주의자였다. 한때는 과학의 근본을 바꾼 혁신가였으나 만년에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과학 패러다임을 논박했고, 과학자이면서도 이론적 기준을 심미적인 아름다움에 두었다. 물리적 세계에 온 관심을 쏟았던 과학자로서 그는 시간을 초월한 문제와 시간 개념에 관해 숙고했을 뿐 아니라, 그가 살았던 시대에 인간을 괴롭혔던 세속적인 문제에 관해서도 장시간 고심하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아인슈타인은 이처럼 다채로운 면모를 보였지만, 그의 과학적 천재성, 심미적 감성과 종교적 심성 그리고 세계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은 모두 아인슈타인이라는 한 사람의 인격 속에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238]

사상가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은 “허수나 비유클리드 기하학, 양자 이론과 같은 중요한 발견의 경우는, 보통 사람들이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기는 사고 범주에서 분리될 수 있는 능력, 즉 원리상 자연어로는 상상하지도 표현하지도 못하는 것을 사색할 수 있는 재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239]

독창적인 과학자로서의 아인슈타인은 마흔 살 때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는 과학과 철학, 심리학, 인간 본성, 세계 문제 등에 관해 계속 성찰하면서 남은 생애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했다..... 물리학보다 체계가 느슨한 분야에서는. 이를테면 문학이나 철학 혹은 역사와 같은 분야에서는 어린 시절의 직관에서 성찰적인 지혜로의 변화가 자연스럽고 무리없이 일어난다.[240]

간주곡 1.

이미 다른 학자들이 제기한 문제의 해답을 마련하는 수준을 넘어설 때 과학자의 소명은 더욱 빛이 난다. 우리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공식과 프로이트의 무의식 탐구에서 보는 것은 이론 체계의 구축이다. 과학자들은 특정 분야의 개념과 현상을 탐구하고 통용되는 관점이 적절치 못함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243]

어떤 점에서 프로이트와 아인슈타인은 둘 다 하나의 이론 체계 혹은 학파를 만들어냈다고 해도 무방하다.[245]

두 사람 모두 위대한 도약의 시기에 고립된 생활을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이론적이고 정서적인 도움을 받았다.[245]

5. 파블로 피카소 - 신동과 천재

피카소가 처음 인정을 받은 시기를 ‘청색 시대’라 부른다. 이 시기에 그는 파리의 비참한 생활상을 주로 그렸다..... 그리고 피카소의 ‘장미빛 시대’가 이어졌다. 이 시기의 작품은 색상이 다소 밝아졌고, 서커스단의 생활과 인물을 주로 그렸는데, 이들은 안정되고 평화로운 모습은 아니어도 참혹할 정도로 가난한 형편도 아니었다.[269]

피카소에겐 현재의 영예에 만족하는 것을 막는 무언가가, 아마도 어린 시절에 형식을 해체하도록 했던 것과 동일한 충동일 터인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화가라는 전문가로서나 사사로운 개인으로서나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에 맞서 새로운 경지에 오르고자 했으며, 전례가 없는 깊이에 도달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와 같은 가차 없는 도전 의지는 이 책에서 다루는 창조적인 거인들 모두의 특징이며, 그들을 그들답게 만드는 특성이다.[278]

초상화가 스타인을 닮지 않았다는 비난을 듣자 피카소는 세기의 농담이라고 할 만한 유명한 말로 대꾸했다고 한다. “별로 걱정할 필요 없어. 결국은 스타인이 저 그림을 닮게 될 테니까.”[279]

훗날 칸바일러는 이렇게 회고한다. “우선 이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피카소는 믿기 힘들 정도로 영웅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동료 화가들 누구도 그를 뒤따르지 않았으니, 당시 그가 느낀 정신적 고독이란 참으로 공포스러울 정도였겠지요. 다들 괴상하고 기형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피카소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는 이러한 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그림은 자유다. 도약하면 밧줄을 놓쳐 추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이 부러지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고 무슨 좋은 점이 있겠는가? 도약하지 않는 것뿐이다. 우리는 사람을 일깨워야 한다. 그들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미지를 창조해야 한다." 피카소는 대개는 적대적이었던 주변 사람들의 반응으로 인해 길을 잃지는 않았어도 쓰라린 상처를 받았는지 어디론가 그림을 조용히 치워버리고 몇 년 간은 공개하지 않았다.[287]

“우리가 입체주의를 창시했을 때는 입체주의를 창안하겠다는 의도는 없었고, 그저 우리의 내면에 있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293]

입체주의(cubism)라는 명칭도 논란거리였다.[294]

일반 대중은 이 새로운 시도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 소개된 지 10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도 입체주의는 여전히 현대 미술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예술적 업적의 정점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수수께끼 같은 호기심의 대상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303]

입체주의는 미(美)에 대한 전혀 새로운 관념을 표현했다. 여타의 공감적인 평자들은 입체주의 미술이 과학을 예술에 도입한 사조이며 최초의 객관적인 예술이고 대상 사물의 구조를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양식이라고 서술했다.[303]

20세기 들어 대중적인 평가의 장과 아방가르드적인 평가의 장은 점차 그 간격이 넓어졌다.[304]

피카소는 예술작품이 관람자에게 충격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람자에게 아무런 감정상의 동요도 일으키지 못하고 관람자가 그저 대충 훑어보는 예술작품은 아무 의미가 없다..... 관람자가 비록 상상 속에서라도 어떤 반응을 보이고 스스로 창조에 대한 열망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되어야 한다..... 관람자를 마비 증상에서 일깨워야 한다.” 피카소는 확신을 갖고 이렇게 말했다.[309]

“내 그림은 모두 탐구다..... 이 탐구에는 논리적인 순서가 있다. 내가 번호를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간 순서에 따라 실험을 하고, 여기에 번호와 날짜를 적어두었다. 이런 점을 고맙게 생각할 날이 올 것이다.” 이를 좀더 상세히 설명하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 예술가의 작품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가 언제, 왜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작업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언젠가는 과학이 존재할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과학이라고 불릴 수도 있을 터다. 창조적인 인물을 탐구해서 인간 일반에 관해 알고자 하는 그런 과학이다.”[313]

이와 같은 다양한 변화는 피카소가 시각적 묘사라는 상징체계를 통해 사유한다는 점을 보여준다.[320]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정신적 가치가 삶을 영위하고 작품 활동을 하는 토대인 예술가들은 인간성과 문명의 가장 숭고한 가치가 위기에 처한 갈등 상황에 대해 오불관언(吾不關焉)의 태도를 보일 수도 없고 보여서도 안 된다. 항상 나는 이렇게 믿어 왔다.” 이어서 그는 더욱 날카로운 말을 남겼다. “예술가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백치(白痴)이다..... 정치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심장을 뒤흔드는 정열적이거나 행복한 사건에 민감한 사람이다..... 그림은 집 따위를 꾸미는 수단이 아니다. 그림은 적을 공격하고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전쟁 수단이다.”[322]

다른 창조적인 인물 역시 주변 사람들의 죽음이나 불행에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피카소와 관련된 사람들이 비참한 운명에 처한 경우는 그 정도가 심했다. 특히 여인들이 그랬다.... 첫 번째 부인 올가는 정신 이상이 되어 1935년에 죽었고, 가장 낙천적인 성격이던 마리 테레즈 발터는 1977년에 스스로 목을 멨다.... 1961년에 결혼한 두 번째 부인 자클린은 그녀가 소장하고 있던 피카소의 작품을 전시할 계획을 세운 날 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328]

6.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 음악가이자 정치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자서전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음악은 그 본질상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는 무력하다.”[334]

‘불순한 음악가’들은 언제나 민족적 단결이나 종교적 자유와 같은 음악 외부의 목적을 위해 음악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스트라빈스키는 음악가라는 장인(匠人)이 작업하는 소재인 가락과 리듬은 그 자체로는 목수의 대들보나 보석 세공사의 보석과 마찬가지로 표현할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334]

창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거의 누구나 자신의 경력을 관리하는 일에 만만찮은 정력을 쏟아야 한다. 정치적 행위에 나섰다고 해서 성공을 보장받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치적 행위를 도외시하면 아무리 포부가 큰 예술가라도 영원히 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337]

훗날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디아길레프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끊임없이 의견을 주고받았다는 얘기다....”[349]

스트라빈스키는 「불새」의 성공에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당시에 작곡된 민속음악 중에서 가장 활기찬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게 독창적인 작품은 아니다. 하긴 이 정도면 성공의 조건은 다 갖춘 셈이다.” 물론 스트라빈스키는 오만함이나 의기소침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창조력이 풍부한 예술가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다음 작품을 구상하느라 바빴을 뿐이다.[351]

공전의 성공을 거듭하는 가운데서 이례적인 실패를 맛보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아무리 창조성이 뛰어난 혁신가라 해도 길을 잘못 들어설 수가 있는 법이며, 이들은 본래부터 오류 따위는 범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만 그 실패를 딛고 재기하는 방식이 보통 예술가와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점을 새삼 일깨우는 사실인 까닭이다.[355]

「별들의 왕」은 실패한 「아비뇽의 처녀들」이나 폐기처분된 『황무지』의 초고 원고, 혹은 프로이트의 「프로젝트」와 비슷한 부류로 여겨야 한다. 새롭게 움트고 있지만 아직 분명하게 표현하기 힘든 예술적 이상을 서툴지만 진지하게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상징체계로 전달하고자 했던 시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대중의 평범한 평가 기준에 의해 실패할 수는 있을지언정, 창조자 자신에게는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자신이 그 작품을 통해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으며, 무엇을 성취하고자 했는지, 나아가서 그러한 목표를 미래의 작품 속에 가장 훌륭하게 담아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355]

현대의 뛰어난 고전음악 가운데 「봄의 제전」만큼이나 노골적인 적대에 부딪쳤던 작품은 없다. 샹젤리제 극장에 모인 청중은 서곡의 첫 소절이 들릴 때부터 동요했다. 막이 오르고 무용수들이 도약하고 착지하는 모습이 보이자, 객석에서 야유와 고성이 터져나왔다. 공연 내내 소란은 그칠 줄을 몰랐다. 관객들은 휘파람을 불고 발을 구르고 뿔피리를 불고 욕설을 퍼부었다. 청중의 동요가 너무 심해서 음악을 듣는 것은 불가능했다. 안무가 니진스키가 무대 옆에 서서 무용수들에게 큰 소리로 번호를 불러줘야 할 정도였다.[362]

나는 하나의 요인이 분노와 소외감을 자아냈다기보다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적대감을 야기했다고 생각한다.... 불협화 화음과 불규칙한 리듬, 이국적인 음계, 변칙적인 강세 유형 등이 관객에게 마치 소나기처럼 퍼부어진 것이다. 갑작스런 중단, 재배열, 러시아 민요에서 차용한 단순한 ‘4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동기(four-note motifs)'의 치환 등을 특징으로 한 멜로디 전개 방식은 19세기 교향악에 익숙한 관객의 귀에 충격을 가했다..... 요컨대, 「불새」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었고 「페트루슈카」에서도 흔적만 느낄 수 있었던 요소가 「봄의 제전」에서는 인내심의 한도를 넘어설 정도로 많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365]

분명히 이 작품은 여러 이유로 처음 듣는 청중을 소외시킨 면이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와 똑같은 이유로 결국에는 수용되고 인정받았던 것이다. 물론 변한 것은 작품이 아니라 장(場)이었다.[366]

탁월한 창조자들은 언제나 완벽주의자이다..... 용기 있는 창조자들은 어떤 권리도 타인에게 양도하지 않으려 하며, 설사 의식적으로는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도 무의식적으로는 원래의 착상을 그대로 고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서 타인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374]

디아길레프는 이 작품의 무대를 장식할 화가로 피카소를 선택했는데,... 스트라빈스키에 따르면 “피카소는 내가 음악 작곡을 맡기로 한 것과 똑같은 이유로 「풀치넬라」의 무대를 디자인해 달라는 주문을 받아들였다.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381]

스트라빈스키와 피카소가 과거와 자극적인 대화를 지속적으로 했다는 점은 두 사람이 오랫동안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다. 그들은 과거로부터 배우고 과거를 재창조함으로써 자신의 목소리를 한층 더 심화시킬 수 있었다. 이는 과학자나 수학자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383]

스트라빈스키는 엘리엇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의식이라는 진창에서 허우적거리는 작품을 경멸했다. 그는 자기만의 독특한 양식을 창조하기보다는 전통을 확인하고 유지하기를 원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엘리엇과 내가 낡은 배를 수리하지 않았는가? 낡은 배를 수리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진정한 임무다. 예술가는 이미 말해진 것을 그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말할 수 있을 뿐이다.<스트라빈스키>[384]

“창조적인 음악가로서 나는 매일매일 짐을 풀 듯이 내 마음속의 아이디어를 표출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나는 작곡가라는 운명을 타고났고 다른 것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작곡을 했다..... 나는 영감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을 하다 보면 영감이 떠오르는 것이다. 물론 처음엔 잘 모를 수도 있다.”(프로이트 역시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영감이 내게 오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맞으러 마중 나간다.”) ...“뜻밖의 참신한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면 메모를 해두고 적절할 때에 적절하게 활용한다.[388]

역설적인 의미로 가득한 『음악의 시학』의 마지막 대목에서 스트라빈스키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의 행동 반경을 좁힐수록, 그리고 내 주위에 장애물을 더 많이 쌓아둘수록, 나의 자유 역시 더욱 커지고 풍부해진다. 속박을 없애면 그만큼 내가 발휘할 힘도 줄어든다. 더 많은 제한을 부과할수록 우리는 영혼을 구속하는 사슬에서 더 자유로와진다.”[390

스트라빈스키는 20대에는 디아길레프와 교제하면서 음악적 영감을 얻었고, 중년에는 고전 음악을 사숙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었으며, 만년에는 음렬주의 음악을 접하면서 창조력의 원천을 얻었다.[394]

여든 살이 넘으면서 스트라빈스키의 열정도 퇴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잦은 질병에 시달리면서 작곡과 연주 활동을 서서히 줄여나갔다.... 하지만 노년에 접어들자 스트라빈스키는 좀더 생기가 넘치는 젊은이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인지적이고 정서적인 도움을 제공한 협력자 가운데 크래프트가 최후의 인물이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오든과 크래프트처럼 동시대의 분위기를 호흡하고 동시대의 주위 환경에 관여하도록 그에게 권유하는 젊은이들에게 먼저 협력의 손을 내밀 수 있을 만큼 영리했다.[398]

기력이 쇠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즐거운 일일 수 없겠지만, 세기의 거장에게는 더욱 더 쓰라린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는 우리 시대의 거장 누구 못지않게 늙어가는 현실에 잘 대처했고, 부인과 ‘양자’ 크래프트와 함께 개인적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다른 창조자들과 부대끼며 치러야 하는 갈등과 분쟁의 요소를 스스로 단념할 줄도 알았다. 결국 그는 마지막 안식을 찾아 땅에 묻혔다. 그가 사랑했던 도시 베네치아에, 반세기 전에는 언쟁을 벌였지만 이제는 단체를 세우고 예술적 촉매 역할을 하는 데 남다른 재능을 보인 그와 화해를 원한다는 듯이 디아길레프 옆에 묻혔다.[399]

7. T.S. 엘리엇 - 경계선에 위치한 거장

엘리엇에게 하버드는 무미건조한 곳이어서, 그는 인문학을 경시하는 대학 풍토에 고통을 느꼈다.[407]

“1909년이나 1910년에 시가 처한 상황은 오늘날의 젊은 시인으로서는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침체해 있었다.”[414]

은행에서 일을 하기로 결정했던 것인데, 전혀 예술과 상관없는 직업을 자기가 좋아한다는 사실에 그 자신도 놀랐고 다른 사람도 놀랐다. 엘리엇은 숫자 놀음과 판에 박힌 업무를 즐기기까지 했으며, 진부한 은행원 일에 소홀함이 없었다.... 이런 업무에 수완을 발휘했고 결국 전쟁 부채를 다루는 큰 책임을 떠맡기까지 했다.[422]

『황무지』의 작시 과정은 창조적인 걸작품의 탄생에는 다른 사람의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429]

엘리엇은 한때는 통합된 전체를 이루었지만 이제는 점차 조각나고 해체되어 무력화된 유럽 문명의 묵시록적 종말, 유럽 문명에 만연되어 있는 병적인 불안감을 시라는 언어 예술에 담아냈다.... 『황무지』의 어느 대목에서도 서양 문명이나 인간의 분열 혹은 가치의 몰락이나 부재를 명백하게 언급하는 구절은 없다.... 이러한 감수성은 생생한 이미지를 통해 표현되었다.[431]

『황무지』는 난해하기 이를 데 없어서, 소수의 교양 있는 독자나 이해할 수 있는 시행과 아무리 장황한 주석을 달아도 완전한 해독이 불가능한 암시로 가득한 작품이다. 하지만 『황무지』의 난해성과 심오함은 독자(특히 젊은 독자들)를 속이거나 정떨어지게 하는 대신, 시의 효과를 높이고 독자가 겉으로만 심오한 작품을 읽는 데서 오는 속물적인 만족감을 뛰어넘도록 유도한다. 엘리엇은 개별 시행의 의미가 애매하고 상호 연결이 어색한 5부로 시를 나누어 구성했음에도 시의 메시지를 훌륭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을 읽고 또 읽으면(다른 현대의 문학작품처럼 재독, 삼독이 필요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는 작품이다), 하나하나의 부분을 명료하게 이해하기는 힘들어도 엘리엇의 비감한 정서를 더욱 뚜렷하고 힘차게 느낄 수 있다. 이런 점에서도 「아비뇽의 처녀들」과 「게르니카」 혹은 「봄의 제전」과 「결혼」에 유사한 점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432]

매우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품이라는 점은 대부분 동의했지만,... 현대인의 삶과 감수성은 혼란스럽기 때문에, 이러한 분위기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시라면 당연히 무질서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었다.[433]

『황무지』는 당대의 다른 어느 시작품보다 동시대 교양층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기분과 주제를 풍부하게 담아냈다. 500행에서 다소 모자라는 시행에서 엘리엇은 놀라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시행 하나하나 연(聯) 하나하나가 의미로 가득했고, 개별적인 주제를 다룬 독립적인 시가 될 수 있었다. 이런 굉장한 특성으로 인해, 독자는 하나의 거대한 시세계(사실은 여러 세상)을 음미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세계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관문을 찾아낼 수 있었다. 부분마다 장면마다 구어체 언어와 생생한 희화(戱畵), 한결같은 자연 묘사, 신화적인 이미지, 재기 넘치는 대화, 애상적인 도시 장면, 이야기체의 소품(小品), 음가(音價)를 이용한 언어 유희, 붉은 빛이 강렬한 스냅사진과 같은 이미지 등 수많은 특징이 두드러졌다. 현대의 또 다른 걸작, 가령 『율리시즈』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처럼, 처음에는 한 쪽 방향으로 전개되다가 나중에는 다fms 방법으로 변주된 다양한 주제들 역시 작품의 효과를 높이는 데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435]

『황무지』에 담긴 주제로는 다산성(多産性)과 초목 제의, 어부왕 전설, 타로 카드, 성배 이야기, 고대의 다리와 교회가 있는 런던의 더러운 풍광, 주점의 농지거리, 상류 사회의 대화, 사랑 없는 정사, 구원의 가능성 그리고 동양의 사상과 종교의 매혹적인 반향 등이 있다. 이러한 중요한 모티프들이 주로 고전적인 오보격(pentameter) 시형식에 담겨서 강렬한 시행과 꾸밈 없는 진술로 표현되었다.[435]

『황무지』는 극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힌 정신, 즉 현대인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온갖 생각을 농밀하고 강렬하게 묘사한 작품이었다. 비록 정연한 서사와는 거리가 멀지만, 독자는 마치 고대의 모험담을 읽을 때처럼 하나의 완결된 체험을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정조는 무모하고 헛된 전쟁(엘리엇이 십여 년 전에 보스턴 거리에서 예기했던 환상)에 오랫동안 시달렸던 유럽인의 정서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젊은이와 지식인들(이 작품을 판단하는 장) 사이에는 전쟁은 아무 성과도 내지 못했고, 문명의 힘찬 진보란 아무 가망 없는 가냘픈 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 종교는 힘을 잃었고, 부도덕한 방종과 타락이 넘쳐 났으며, 한때 활력에 넘쳤던 도시들이 이제는 노쇠하고 붕괴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황폐하고 절망적인 분위기를 표현한 예술작품을 대망하고 있었다. 『황무지』가 이런 기대에 가장 훌륭하게 부응했고, 그리하여 그트루드 스타인의 ‘잃어버린 세대’, 상실감에 사로잡힌 모든 세대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 되었다.[435]

시인 데이 루이스(C. Day Lewis)는 이렇게 말했다. “『황무지』는 전쟁 직후에 심리적 무력감에 빠진 지식인들의 정신을 진실되게 포착한 작품이다.”[436]

“위대한 시인은 모두 요절했다. 소설은 중년의 예술이고, 에세이는 노년의 예술이다.”<소설가 마샤 데이븐포트>[437]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생각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엘리엇은 오직 국외자만이 총괄적인 평가를 내리는 위치에 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443]

엘리엇이 문학 이론에 기여한 내용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개념일 터이다. 시인은 정서를 직접 전달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시인은 해당 정서를 훌륭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상황이나 이미지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한 정서를 명확히 표현하는 일련의 객관 대상이나 상황, 사건인데, 해당 정서를 환기하려면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외부적인 상(像)을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객관적 상관물을 창조할 수 있는 시인이 가장 훌륭한 시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비상한 감수성과 뛰어난 언어 구사력을 결합시킬 줄 아는 시인이 없다면, 우리가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뿐 아니라 그것을 느끼는 능력까지도 퇴화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444]

엘리엇의 수수께끼 같은 인간 관계를 조각그림 맞추듯 그려보면,... 성격상 엘리엇은 마음이 불안정하고 내향적인 사람이었으며 다소 위험스럽게도 다른 사람들과 되도록 어울리지 않고 고립된 삶을 살았다.... 점차 나이가 들고 다른 사람의 정치적인 지원이 필요 없게 되면서, 사람들로부터 고립되고 그들과 거리감을 유지하려는 천성이 다시 강하게 나타났다. 오래 사귄 친구나 호감가는 젊은이들에게만 편안하게 속내를 드러낼 수 있었다.[448]

엘리엇의 중년 작품은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 그레이엄의 후기 작품이 지닌 힘을 갖지 못했고, 오히려 아인슈타인이 만년에 시도한 노력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경우와 비슷하게 그저 관심의 이동만을 나타냈을 뿐이다.[452]

엘리엇 탄생 101주년에 해당하는 해에 미국 소설가이자 비평가 신시아 오직(Cynthia Ozick)은 엘리엇을 가혹하게 비판했다. 그녀는 거의 모든 차원에 걸쳐 엘리엇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한다. 즉, 시의 질적인 면, 희곡 작품의 진부함, 과거의 고전에 대해 부당한 반역죄를 저지른 비평...[453]

게다가 엘리엇은 저절로 경계인이 될 수 없는 처지였기에, 생산적인 비동시성의 수준에 이르기 위해 스스로 경계인이 되기로 선택한 인물이었다.[457]

=============< 종합 1편 끝, 2편에서 계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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