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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6일 09시 53분 등록

8. 마사 그레이엄 - 무용계에 혁명을 모고 온 여자

「프론티어」는 6분 30초 분량의 작품으로서, 무용이 무엇이며 무용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지를 보여준 걸작이었다. 그레이엄은 미국인이란 누구이며 미국이란 세계는 어떤 곳인지를 박진감 넘치는 표현으로 관객에게 전달했다. 그것은 “순수한 미국, 솔직하고 자유로운 미국, 불굴의 의지로 서쪽을 향해 나아가는 미국인의 정신”이었다.[498]

「프론티어」가 그레이엄의 명성을 확고하게 해준 작품이라면, 「애팔래치아의 봄」은 아마도 가장 의미폭이 넓은 작품일 것이며 불후의 명성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프론티어」가 그레이엄이 미국적 주제에 주목한 창조력이 왕성한 시기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라면, 「애팔래치아의 봄」은 그 마지막을 장식한 작품이다.[505]

그녀는 유럽의 고전적 전통에 대항했을 뿐 아니라 던컨과 데니숀 무용단의 미국 고유의 특색을 지녔으면서도 낭만적인 색조가 짙은 스타일에도 반대했다. 무용에서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그 신체적, 감정적 정수만을 취한 그녀는 미국 무용의 잠재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다.[507]

그리스적 작품을 만들던 시기에 그레이엄은 이미 무용계의 지도자 위치를 벗어나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엔 기이한 점이 있었다. 엘리엇이나 스트라빈스키, 조이스, 피카소, 쇤베르크 등 다른 현대의 거장들의 경우보다도 훨씬 많은 사람들이 그레이엄의 작품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녀가 시도하는 일을 비난했던 것이다.

“나는 이해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나를 느끼기를 원한다.”[522]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종이에 적는다. 어떤 책에서든 인상적인 구절이다 싶으면 바로 옮겨 적는다. 그리고 출처를 적어둔다. 이렇게 하면 실제 작업을 할 때 모든 과정에 대한 기록을 간직하고 있을 수 있다. 내 무용에 대한 메모는 모두 갖고 있다.[523]

“나는 도둑이다. 하지만 부끄럽지는 않다. 플라톤, 피카소, 베르트람로스 등 누구라도 최고의 인물들에게서 생각을 훔친다. 나는 도둑이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나는 내가 훔친 것의 진가를 잘 알고 있고, 늘 소중하게 간직한다. 물론 나만의 재산이 아니라 내가 물려받고 물려줘야 할 유산으로 여긴다.”[523]

그레이엄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이 생각하게 하고 싶다. 내 일에 대한 논쟁은 어제든 환영이다. 아무도 나의 무용 작품을 논하지 않으면, 도대체 내가 했던 일에 실패할리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526]

20세기 초반에 선을 보인 던컨의 영감 넘치는 공연과 데니숀의 스펙터클한 무대로부터 출발한 현대 무용은 1920년대 후반 뉴욕에서 개화하기 시작했다.[535]

대략 200편에 이르는 그녀의 무용 작품은 ‘전설’이라 불러도 하등 손색이 없다. 전기 작가 스토댈은 말한다. “엄청난 작품 목록이다. 한 명의 안무가가 창조한 작품으로는 그 규모가 최대이고 그 독창성이나 다양성이 우리의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오직 희곡의 셰익스피어와 회화의 피카소만이 이와 견줄 만한 업적이다.”[536]

무엇보다 그녀는 모험을 꺼리지 않았다. 현재의 영예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위험을 감수할 태세가 되어 있었으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실패하면 새로운 열정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다시 도전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다른 창조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한계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고, 사람들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하면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더욱 과감하게 밀고 나갈 줄 알았다.
몸도 젊었고 마음은 더욱 젊었다. 그레이엄은 피카소만큼이나 오랫동안 창조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다른 어떤 거장들보다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했던 것이다. 그레이엄은 실질적으로 새로운 분야를 창조한 셈이나 마찬가지였고 게다가 비평적 장(場)의 발전을 자극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자신을 표현할 여지가 그만큼 풍부했고 그런 여자를 최대한 활용했다.[538]

결국 그녀가 맺었던 파우스트적 계약은 개인적인 행복감이나 친밀한 인간관계의 희생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539]

9. 마하트마 간디 - 신념을 실천한 정치 지도자

1600년 영국의 동인도 무역회사가 설립되었다. 10년 후에 영국의 왕은 아시아 전역에 무역할 수 있는 무제한의 권리를 이 회사에 부여했다.[542]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기 시작한 지 250년 후, 그리고 세포이의 항쟁이 일어난 지 겨우 10년 후인 1869년에 아라비아 해에 면한 포르반다르 지방에서 모한다스 K. 간디가 태어났다.[543]

소년 간디는 몸집이 왜소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체육을 싫어했다. 특별히 훌륭한 학생도 아니어서 학교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보통 이하의 능력밖에 갖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다. 날카로운 지성을 지닌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난 괘념치 않는다. 지성의 발달에는 한계가 있지만 마음의 성장에는 그런 한계가 없다.”[544]

다행스럽게도 간디의 가족은 그에게 가족 간의 문제를 살펴보고 거의 매일 일어나던 사회적․윤리적 문제에 대해 자기 나름의 대답을 마련할 수 있는 재량권을 주었다. 그래서 간디는 도덕적 중재인으로서의 자기 능력을 반복해서 시험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545]

유럽에서 3년을 지낸 경험은 자신의 종교에 대한 신념과 인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549]

1891년 간디는 조국 인도로 돌아왔다.[550]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이 2등 시민으로 대접받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고 결심했다.[551]

간디는 종종 위험에 처했다. 1897년에는 거의 의식불명 상태에 이를 때까지 두들겨 맞았고 더반 거리에서 백인 폭도들에게 린치를 당했다. 그는 자신을 때린 무지한 사람들을 가엾게 생각하고 책임을 묻지 않았다. 1908년에는 처음으로 감옥에 갇혔다. 감옥의 형편은 매우 열악했고, 간디는 비참한 심정이 되었다..... 간디는 이처럼 가혹하고 단단한 현실에 부딪치고도 두려움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변호사로서 더욱 원숙해지고 투쟁 결의를 더욱 굳건하게 다졌다. 유혹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다.[554]

‘사티아그라하’.... 1906년에 벌써 간디는 동지들에게 법령에 항의하고 불복종할 뿐 아니라 복력을 자제하고 체포에 순응하는 방법으로 부당한 법에 저항할 것을 요구했다. 추종자들은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하면서 이 방법을 끝까지 고수했다. 간디는 사티아그라하가 단지 수동적인 저항에 그쳐서는 안 되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생명의 힘이 되어야 한다고 깨닫기 시작했다.[559]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적 창조자들은 주로 개념을 체계화하는 작업을 하고, 스트라빈스키나 피카소 같은 예술가들은 기존의 상징체계로 작품을 구상하고 제작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한다. 반면 간디와 같은 정치적 창조자들에게 있어 창조적인 작업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보다 넓은 목적을 위해 움직이도록 추동하는 능력에 있다.[561]

“나는 영국 법을 어겨야 했다. 내가 복종하는 것은 그보다 더 높은 법, 내 양심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영국에 대한 첫 번째 시민 불복종 운동이었다.”[563]

요컨대 나는 인도 중서부 지역의 아메다바드에서 1918년에 있었던 사건이 마하트마(‘위대한 영혼’)의 탄생에 결정적인 사건이었다는 에릭 에릭슨의 지적에 동의한다.[564]

전기작가 주디스 브라운(Judith Brown)은 이렇게 쓰고 있다. 간디의 아메다바드 운동은 미래의 투쟁 방법인 사티아그라하의 생존 능력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그가 어느 정도 통제력을 발휘하는 운동에서는 늘 볼 수 있었던 많은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처음부터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는다는 것, 투쟁의 중심부에는 신성한 맹세가 있다는 것, 참여자들은 엄격한 규율을 지키고 자기수양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운동의 대의를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알린다는 것, 도덕적인 권위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관련자의 사고를 자연스럽게 압박한다는 것, 그리고 관련자들 모두의 체면을 깍지 않는 선에서 타협안을 마련한다는 것 등이다.[567]

창조자는 새로운 언어로 작업하는 만큼, 이를 이해하고 창조자가 표현하려는 내용이 그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있음을 알아주는 지지자가 꼭 필요한 법이다.[568]

“하늘에 신이 계시다면, 이런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해 영국과 인도의 양국민이 어떤 대답을 내릴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과거의 어떤 정부보다 인도에 더 큰 해악을 끼친 정부에 대해 반감을 품는 것은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재판정 변론에서, 6년형을 선고받음>[571]

어떤 시련도 기회로 삼을 줄 알았던 간디는 구속 수감을 일시적인 유예로 여겼다. 그는 과거의 행적을 반추하면서 폭넓은 독서와 사색에 전념할 수 있었고,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기 전에는 결코 멈출 수 없는 저항 운동의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있었다.[572]

간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편에 독서와 저작과 성찰이 있고 다른 한편에 몸소 용기 있는 모범을 보이는 지도력이 있는 두 가지 활동의 항구적이고도 생산적인 변증법적 관계를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573]

무엇보다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톨스토이의 저작이었다. 톨스토이를 읽은 경험으로 말미암아 그는 영원히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서 폭력에 호소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났을 뿐 아니라, 인간의 권리보다는 의무, 그리고 모든 인간 문제에서는 사랑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간디는 톨스토이가 사망하기 직전에 이 위대한 러시아 사상가와 서신 교환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꼈다. 톨스토이는 간디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몸소 다른 사람들에게 간디를 칭찬하면서 간디의 비폭력 저항은 “인도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셈”이라고 말했다.[574]

“내가 이루고 싶은 것, 지난 30년 동안이나 내가 애타게 갈망했던 것은 자기 실현, 신과 대면하는 것, 다시 말해 모크샤(Moksha) (대체로 ‘신과 하나됨’을 뜻함)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러한 표현은 놀랍게도 신의 생각을 알고자 했던 아인슈타인의 교만한 욕구와 일맥상통한다.)[577]

• 마음속에 분노를 품지 말고 상대의 분노를 그대로 감내할 것. 상대의 공격을 앙갚음하지 말 것
• 체포에 저항하지 말고, 타인의 재산을 보관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재산의 압류에도 저항하지 말 것.
• 사티아그라하의 신봉자로서 사티아그라하 지도자의 명령에 복종하고, 심각한 의견 불일치 사안이 생기면 사티아그라하 운동 집단에서 물러날 것. <세부 규범, 예> [578]

간디는 사티아그라하의 한계도 지적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티아그라하를 채택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도덕적 명확성이 결여된 상황, 규율 바른 실천자나 추종자가 없는 상황, 반대파에게 공정성에 대한 분별이 없는 상황은 사티아그라하가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리고 간디는 안타까운 듯이 폭군에게는 사티아그라하가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사티아그라하에 잠재된 강제적인 요소는 아주 조심스럽게 활용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반대자를 파괴하거나 후속 사건을 통제불능 상태로 몰아가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간디는 대단히 정밀하고 효과적인 저항 방법을 완성했던 셈이며, 이는 20세기 전반기에 인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거니와, 이 방법을 받아들을 수 있고 확신을 갖고 실행할 수 있는 사람들만 있다면 세계 공동체에는 그보다 더 큰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 세계의 모든 나라 가운데 인도는 비폭력 저항 방법을 배울 수 있는 한 나라이며..... 만약 이 실험이 지금 성공한다면, 압제자들에 대한 아무런 적대감도 없이 자진해서 죽음을 맞이하려는 수천명의 남녀가 생길것이라는 믿음이다.”[581]

아나수야 사바라이는 이렇게 말했다. “바푸지(Bapuji, ji는 힌두어로 존경과 친밀함을 뜻함 - 옮긴이)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우리 대부분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다 다르다. 바푸지는 그렇지 않았다. ... 그는 자신이 믿는 것을 말했고 말한 것을 실천에 옮겼다. 그의 정신과 영혼과 몸은 일치했다.[589]

친밀한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간디의 결함은 결국 가족 문제로 불거져 나왔다. 처음부터 간디는 무조건 가족을 사랑하거나 연민하는 대신 공적인 목표와 사상적인 원칙에 입각해서 가족을 대했다.... 간디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훨씬 가깝게 느꼈고 이들에게 느끼는 사적인 애정도 각별했다.[590]

간디를 폄하한 발언으로 가장 유명한(악명 높은) 것은 아마도 윈스턴 처칠의 “반쯤 벌거벗은 몸으로 영국 왕이자 인도 황제의 대리자들과 협상하기 위해 총독 관저의 계단을 올라가는 선동적인 탁발승”이라는 경멸조의 발언일 것이다.
1930년대 초반에 네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서적으로는 강한 유대감을 느끼고 있지만 정신적으로 점점 더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어서 다소 유감이다. 그가 끊임없이 신을 말하는 것은 나를 무척 화나게 한다. 그의 정치적 행위는 한치의 오차도 없는 본능에 인도되고 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지 않는다.” 간디를 존경하거나 두려워하는 문제와는 별도로 이러한 의혹의 눈빛과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언제나 간디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593]

피셔는 “힘센 정부에 맞서 소금 한줌을 집어들고 범죄자가 되는 것은.... 위대한 예술가의 상상력과 위엄 그리고 약간의 쇼맨쉽을 필요로 했다. 그것은 무식한 농부와 지식인 모두에게 호소력을 가졌다”고 논평했다.[595]

만년의 간디가 나체의 젊은 여자를 곁에 두고 잠을 자겠다고 고집을 피웠다는 비난이 그것이다..... 수백만 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탁월한 호소력을 발휘했던 사람이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과는 그처럼 어렵게 지냈고, 이 마지막 사례에서 보듯 자신의 강압적인 행태와 이기적인 동기에 그처럼 둔감했다는 사실은 매우 이채롭다.... 이러한 밤의 행태가 노인의 회춘 방법이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을 시험하는 수단이었다고 해도, 간디가 매우 보기 흉한 일을 했음에는 틀림이 없다.[606]

“간디는 일반적인 권모술수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우월한 삶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정치 영역에서 더 높은 수준의 인간관계를 실현하기 위해 싸운 유일하게 참다운 정치가였다.” 아인슈타인은 좀더 시각적인 말로 이런 생각을 표현하기도 했다. “아마도 후세대인들은 이런 인물이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으로서 이 지구상에 걸어다녔다는 사실조차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609]

간주곡 3

10. 다양한 문야의 창조성

본 연구에서는 전통적으로 특이성 중심적(idiographic) 방법과 공통성 중심적(nomothetic) 방법으로 불리는 이러한 두 입장을 종합하고자 했다.[621]

나는 이들 창조자의 생애를 검토하면서... E.C.라는 약칭으로 부르게 될 전형적인 창조자(Exemplary Creator)의 초상을 묘사하는 데 그다지 불편한 느낌은 없었다.[622]

여기서 제시된 유형은 결정판은 아니고 다만 내 이론을 설명하는 실례이다. 각각의 유형의 타당성을 확립하려면 더 많은 실례와 더 정확한 방법이 필요하다.[626]

E.C. 유형의 인물들은 실제로 자신감과 기민함,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 근면함, 일에 대한 집중력 등을 지니고 있다. 이들에게 사교 생활이나 취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기껏해야 일에 몰두하다가 한숨 돌리는 정도의 주변적인 의미밖에 없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러한 성격적 특색이 전통적으로 너무 긍정적으로만 이해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즉, 자신감은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 나르시즘과 합쳐질 수 있으며, 모두가 자기도취라 할 만큼 지나치게 자기 일에 몰두하는 편이어서 남을 희생하고라도 자신의 목적을 완수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이다.[628]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무관심하거나 아예 가학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동시에 자기 주창에 많은 정력을 쏟기도 한다. 일곱 명의 인물 모두 자신의 작품에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일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부모나 배우자 등 이런 일을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면 스스로 알아서 했을 것이다. 자기 주장은 대개 작업(작품)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났다.[629]

창조성의 현저한 특징은 아이다운 천진성과 어른의 원숙함의 결합에 있다. 이런 결합은 성격만이 아니라 사고방식(관념)에서도 나타난다.[629]

각각의 인물이 감정을 얼마나 공공연하게 드러내는가 하는 문제, 특히 열정과 분노라는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는가 하는 문제 역시 복잡하다.... 이들은 특히 창조의 긴장이 높은 시기에 만만찮은 괴로움을 겪었다. 내가 아는 한, 이들 모두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낙담하고 의기소침했으며 거의 모두가 일종의 신경쇠약에 걸린 적이 있다.[632]

가정의 분위기는 대개 엄격했다. 규율이 엄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의 가풍에서 자랐기에 어릴 때부터 해야 할 일을 반드시 지켰고, 학과 공부나 전문 지식을 빨리 습득했다. 이들을 모두 억압적인 통제에 반발했다.[633]

나는 두 가지 요인이 없었다면 이러한 반항적인 태도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조상과는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재능과 솜씨가 뛰어났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유년기에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바람직한 모델을 만났다는 점이다.[634]

젊은 시절에는 이처럼 가족의 도움을 받았지만, 여러 면에서 경계인적인 삶이 그들 앞에는 기다렸다. 일부 창조자들은 탄생의 조건에 의해 경계인이 되었다.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는 독일어권 지역의 유대인이었고, 그레이엄은 남성 위주의 세계에서 활약한 여성이었다. 다른 인물들은 본인의 선택이나 어떤 필연에 의해 경계인의 삶을 살게 되었다.[634]

우리의 창조적인 인물들은 모두 인구통계상 경계인이었음은 물론이려니와 그러한 경계인이라는 위치를 창조 활동의 지렛대로 삼았다. 그들은 자신의 그런 경계인이라는 위치를 활용하여 작품 활동의 내용이나 방식을 결정했고, ‘기성 체제’에 편입될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언제든 진로를 바꿔서 최소한의 지적인 주변성(경계성)을 유지하려고 했다.[635]

이들 모두가 단호하게 경계인의 위치에 있었고 이런 위치를 견지하기 위해 많은 것을 기꺼이 포기할 태세가 되어 있었지만, 이들이 단지 다른 사람들의 세계와는 담을 쌓고 지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얘기다.[635]

일곱 명의 창조적인 인물들은 물론 분야마다 약간씩 기간은 달라도 대략 10년을 사이에 두고 창조적인 도약을 이루었다. 인지 심리학 계통의 연구를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한 사람이 어느 분야를 기본적으로 통달하는 데 필요한 기간은 대략 10년 정도이다.[637]

두 번째 도약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창조자 개인의 재능과 포부보다는 해당 분야의 성격에 따라 좌우된다. 최근에 생긴 개방적이고 경쟁자가 비교적 적은 분야라면, 활동 여력이 남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혁신적인 업적을 낼 수가 있다. 그레이엄과 프로이트, 스트라빈스키, 간디, 피카소 등이 바로 이런 분야에서 활동했다. (사실 프로이트는 자신이 7년마다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경계가 분명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활동하고 있는 분야라면, 혹은 창조자 자신의 에너지가 고갈된 상황이라면, 지속적인 혁신의 가능성이 줄어든다. 엘리엇도 아인슈타인도 두 번째 도약을 이룬 후로는 계속해서 혁신적인 작업을 하지 못했다.[638]

두 번째 10년이 지난 후에는 다른 종류의 기회가 생긴다. 관련 분야를 역사적으로 혹은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기 시작할 수도 있다.[639]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는 과학 이외의 분야에도 확장해서 비유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 경우 다른 분야에도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존재하는 시기가 있음을 분명히 나타낼 수 있다..... 어쩌면 하나의 패러다임이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는 것은 새로운 접근 방법이 매우 빠른 속도로 폭넓게 수용될 수 있음을 예고하는 최적의 표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646]

커다란 정치 세계의 거장이 사적인 대인관계에서는 구제 불능의 미숙아였던 것이다.[651]

간디는 창시자로서 사티아그라하의 실천가와 실행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최선의 인물이다. 하지만 간디는 평가하는 일에 별로 관여하지 않았고, 세상을 바꾸는 일에 전념했다. 그는 대의를 위해 싸웠던 것이다.[652]

창조적인 인물의 특징적인 모습은 창조성의 삼각형에서 어떤 부조화, 혹은 부드러운 연결의 결여를 장점으로 활용할 줄 안다는 점이다. 분석적으로 보면, 여섯 가지의 비동시성 영역이 존재한다. 개인 내부, 분야 내부, 장 내부, 그리고 개인과 분야 사이, 개인과 장 사이, 분야와 장 사이에 비동시성 영역이 존재한다. 모든 종류의 비동시성에서 면제된 사람들은 신동이나 전문가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반면, 모든 지점에서 비동시성을 경험하는 사람 역시 여기에도 압도당할 가능성이 크다. 나는 몇몇 지점에서 비동시성을 겪으면서도 동시에 거기에 따르는 중압감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만이 창조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가정했다.[655]

여러 예술 장르에는 대중의 장과 엘리트의 장 사이에 긴장이 스며 있다.[655]

이 책에서 다룬 인물들은 모두 ‘경계(edge)'에 존재하는 전율 혹은 몰입 체험을 하기 위해 비동시성의 조건을 의도적으로 추구했으며,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은 왜 이런 비동시성의 과실을 경험하고 싶어하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각각의 인물에게 처음 주어졌던 비동시성 혹은 경계성의 조건이 어느 정도인가와는 상관 없이 이들 모두의 삶에는 이러한 특색이 두드러졌다.[656]

현재로서는 비동시성과 생산성을 평가하는 설득력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좀더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로 남는다.[659]

이런 친밀한 관계에 대해 좀더 말해 둘 내용이 있다. 첫째, 이상적인 상황에서는 두 가지 차원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무조건적인 지지로 격려하는 정서적인 차원이 있어야 하고, 혁신적인 도약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 본질에 관해 유용한 조언을 해주는 인지적인 차원이 있어야 한다.[661]

창조적인 도약의 시기는 정서적으로나 인지적으로 매우 긴장이 높은 시기일 수밖에 없다. 이 때는 유아기 이래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지지와 격려가 필요하다. 이 때 벌어지는 의사소통의 종류는 이미 동일한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의 평범한 대화보다는 어릴 때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상황과 더 닮았으며, 그만큼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또한 창조적인 인물들이 분명치 못하고 어눌하게 말하는 것은 자신의 두뇌가 정상이며 마음 맞는 이들은 충분히 자기 말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시험하려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662]

나는 창조적인 인물들이 자신의 재능을 잃지 않기 위해서 미신을 믿거나 비합리적이고 강박적인 행동을 하는 모습에 상당히 놀랐다. 보통 그들은 창조 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일환으로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희생했다. 계약의 종류는 다양할지 몰라도 그것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모습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이러한 거래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계약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파우스트 박사와 메피스토펠레스를 연상시키는 그런 반쯤은 마술적이고 신비적인 계약이라고 할 만하다. 그만큼 종교적인 특색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각각의 인물은 자신의 개인적인 신과 계약을 맺은 것처럼 보였다.[663]

새로 발견한 두 가지 주제는 분명 창조력이 뛰어난 사람을 들여다보는 독자적인 창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대단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무엇인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강박감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거래를 되도록 분명하게 확정하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하면서 창조력을 최대한 발휘할 때는 다른 사람들의 지지와 격려가 큰 도움이 된다. 여기서 가장 어울리는 모델은 어머니가 갓 태어난 아기에게 처음 세상을 느끼도록 도와주는 상황일 것이다.[665]

에필로그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한 것은 20세기 초엽에 나온 혁신적인 업적들이다. 대체로 『꿈의 해석』이 출간된 1900년에서 프로이트가 사망한 1939년 사이에 나온 업적들이다.[670]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여파를 염두에 두지 않고 엘리엇의 『황무지』나 피카소의 「게르니카」, 스트라빈스키의 「병사 이야기」, 아인슈타인의 핵이론 응용, 영국에 대한 간디의 태도 변화 혹은 프로이트의 고통스런 성찰인 『문명 속의 불만』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우리는 여러 인물들이 동일한 환경에 반응하게 된 중심 이유가 무엇이지 말할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와 미국, 스페인과 러시아와 같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인물들이 하나의 세계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산업화와 도시화,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정보 전달 능력의 지속적인 발전, 전쟁 직전의 점증하는 불안감 등 많은 요인이 현대 거장들의 의식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667]

시대가 그들의 과학적 이론에 어떤 영향을 미쳤건, 프로이트와 아인슈타인이 그들의 정치적․사회적 시대에 속해 있다고 느낀 것은 분명하다. 젊었을 때 그들은 과거의 종교적․과학적․정치적 진리를 체계적으로 의심하는 청년 문화를 받아들였고, 이미 실패한 사상(이론)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사상을 찾는 자유사상가들이었다. 그리고 점차 나이가 들면서 전쟁과 평화 공동체, 종교와 철학 문제 등을 사색하는 시간이 늘었다.[681]

내 생각에 모든 창조적인 도약에는 겉보기엔 전혀 이질적인 두 영역의 결합이 있다. 하나는 관련 분야에 대한 철저하고 조숙한 통달이고, 다른 하나는 유년기의 의식과 관련된 이해 방식과 직관이다. 창조적인 도약은 이런 두 영역의 성공적인 결합에 있으며, 이런 결합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도 그 도약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682]

아동의 세계와 거장의 세계에는 의미 있는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주장함으로써 나는 현대의 업적에 독특한 점이 무엇인지 포착하려고 했다. 게다가 나는 인류사의 다른 시대에도 어른 거장의 세계와 어린 시절의 의식 사이에 비슷한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런 연관성을 너무 강조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분명 현대의 거장들은 그들의 유년기와 어떤 식으로든 연계되어 있고, 다른 시대의 거장들 역시 그들의 유년기와 각별한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 조금 달리 말하면 다른 많은 시대에도 ‘현대적인’ 인물이 존재했던 것이다.[685]

보들레르가 말한 대로 천재란 유년기를 다시 찾을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나는 창조적인 거장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내 요점은 유년기의 놀라운 힘을 찬양하는 것이고, 어떤 인물들은 그런 능력을 오랫동안 보유한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685]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유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본격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은 유년기를 별개의 독립적인 발달 단계로 상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오히려 사람들은 마치 시대와 문화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것처럼, 유아 단계로 퇴행하기도 하고, 유년기에 고착되기도 하며,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중년에 들어서 아동기의 완고함이나 청년기의 신중하게 열린 마음을 받아들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전파하는 온갖 매체들 - MTV, '디자인이 멋진‘ 쇼핑몰, 테마 파크, 컴퓨터 문화 - 은 온갖 집단과 세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모든 문화가 서로 접촉하고 있으며 아이들이 일찍부터 세상의 신비와 경이와 공포에 접하게 되는 시대에는 어쩌면 아이다운 천진성은 영원히 사라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많은 식자(識者)들이 ’유년기의 사라짐‘을 향수어린 마음으로 혹은 불안한 듯이 말하는 것도 전혀 놀랄 일은 아닌 것이다.[690]

유년기를 부인하거나 과거를 폐기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 분야, 그리고 다른 분야에서도 이런 경향에 대한 신랄한 반작용이 일어났다는 징조가 눈에 보이고 있다. 인간이란 어쩌면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방향, 장르 혼융의 방향으로 무한정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혁신과 전통, 모더니즘과 역사주의, 창조적인 도약의 시기와 인간의 파괴로 이어질 수 있는 정체 혹은 퇴행적인 시기를 시계추처럼 왕복하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1900년 경의 현대적 정신이란 아마도 인간의 모험적 능력을 보여주는 실례일 것이며, 그들이 그처럼 활기찬 정신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역사의 그 처럼 짧은 기간에만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691]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술술 잘 읽히는 책이다. 하워드 가드너는 또 읽고 싶어지는 저자다.
왜 이런 저자와 미처 만나지 못했는지... 지금이라도 만나게 되어 참 반갑다.

심리학, 교육학을 전공한 교수답게 저자는 책을 읽는 독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책을 읽고 이해하게 되는지, 이 방면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이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쉽고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구조와 장치들을 여러 곳에 마련해두었다.

우선 저자는 들어가는 글에서 자신의 저술 방법을 친절히 설명해준다.
“나는 내가 읽고 싶어 하는 스타일의 책을 쓰고자 했다는 점을 밝혀둔다. 전문용어는 되도록 쓰지 않고, 꼭 필요한 시각 자료만 제시했다. 다루는 주제는 복잡하지만 간단명료하게 쓰고자 했다. 복잡한 주제를 쉽게 다루기 위해 중간 중간에 서술 내용을 요약해 정리 했으며, 나름대로 신중하게 고른 곳에 세 개의 짤막한 해설(간주곡, interlude)을 삽입했다. 그리고 누가 내 생각을 도용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책의 첫 부분에 내 이론의 요지와 중요한 결론을 기술했다.[들어가는 글, 19]

전체적인 책의 구성을 보면 아주 심플하다.
제1부 (창조성은 어떻게 길러지는가?)에서는 이 책에서 검토하게 될 7명의 창조적 거장들과 왜 그들을 선택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이 책의 목표와 저자가 활용한 창조성 연구방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특히, 저자는 창조성 분석을 위한 “분석적 틀” 모형을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분석을 시도한다.

제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에서는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피카소, 스트라빈스키, 엘리엇, 마사 그레이엄, 마하트마 간디 등 7명의 삶을 저자의 창조성 연구방법에 따라 조명한다. 그리고 과학자인 프로이트와 아인슈타인을 ‘간주곡 1’에서, 예술가인 피카소, 스트라빈스키, 엘리엇을 ‘간주곡 2’, 현실적인 무대와 관련 되었다고 생각되는 그레이엄과 간디를 ‘간주곡 3’에서 요약하여 비교․정리한다.

제3부 (창조성의 조건)에서는 1부에서 소개한 창조성 연구방법에 따라 7명 위인들에 대해 종합적인 평가를 내리고 이를 정리한다. 3부에서 특히 돗보이는 점은 독자들이 당연히 질문을 갖을 수있는 부분 - 합당한 인물을 선택했는지?, 적절한 분야를 선택했는지?, 지나치게 인지적인 측면에 주목한 것은 아닌지?, 정말로 창조성에 주목했는지?, 이 연구의 결론은 현대에 한정된 결론인지? - 에 대해 저자가 먼저 질문을 꺼내들고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다. 매우 친절한 발상이고 독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다. 이 책이 내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에필로그에서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살펴본 내용 즉, 저자가 현대라고 칭하는 20세기 초반과 1950년대 이후(현대이후)의 시기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살펴본다.

이 책에서 특히 배울만한 점은 저자의 논리적인 서술방법, 표현 기법과 글 쓰는 자세다.

저자의 문장은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다. 불필요한미사어구가 없고 과장하려고 부풀리지도 않는다. 불필요한 반복이 없고, 적절한 곳에서 나타나는 반복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독자에게 다시 한번 정리할 기회를 주기 위한 의도된 반복들이다.

상충되는 의견이 있을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저자는 자기주장을 일방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반대되는 의견이 있을 시에는 먼저 반대 견해를 객관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나서 자신은 그 견해에 대해서 반대 한다고 밝힌다. 그 이후에 자신이 반대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상대방의 견해와 저자의 견해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이 책이 논리적인 책이라는 느낌을 갖게 만들어 주는 단면이다.

또한 흔히 위인들의 전기를 다룬 저서에서 가볍게 다루거나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있는 위인들의 약점, 감추고 싶은 개인사 부분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아쉬운 점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책이지만 구지 한가지 지적하자면, 저자는 7명의 거장을 선택한 이유로 자기가 잘 아는 사람, 자기가 연구해 보고 싶은 사람을 선정했다고 밝힌다. 또 그들을 선정할 수밖에 없었던 추가적인 이유들도 제시한다. 하지만 일반 대중들의 관심에서 비중이 높지 않은 예술가들을 4명씩이나 선정했다는 점은 좀 불만이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 갖을 만한 인물(경제 또는 정치 분야 인물)을 선택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나는 창조적인 혁신에는 아이다운 천진성과 어른의 원숙함이 결합해 있다고 생각한다. 20세기의 고유한 천재들은 어린 아이이 감수성을 체화하고 있었다.[38]

이 분석틀은 세 가지 핵심 요소로 이루어진다. 창조적인 인물, 창조적인 행위의 대상이나 직업(일), 그리고 창조적인 인물의 세계에 거주하는 다른 사람들이 바로 그것이다.[38]

창조적인 작가와 놀고 있는 아이가 하는 일은 똑같다. 창조적인 작가는 환상의 세계를 창조하고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즉, 작가의 환상 세계에는 그의 감정이 충전돼 있다. 물론 그는 환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날카롭게 구별한다.<프로이트>[67]

“내 아들의 발가락이 내 머리보다 영리하다” <프로이드 아버지>[108]

이 대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프로이트는 정신 기관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어휘를 모두 스스로 만들어냈다.[134]

아인슈타인이 어떤 업적을 이룰지 알 도리가 없던 당대인들은 당연하게도 그를 실패한 사람으로 여겼다. 김나지움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지 못했고, 취리히 공대 입학에 실패했으며, 영향력 있는 스승이나 후원자도 없었다. 교수직을 확보하지도 못했고 박사 논문을 완성하지도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특허국의 이름 없는 관리로 남게 될 가능성이 가장 컸던 것이다.[202]

직관과는 다른 이해 능력, 즉 성찰적 지혜(reflective wisdom)라고 부를 만한 능력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계속 성숙한다.[236]

피카소는 예술작품이 관람자에게 충격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람자에게 아무런 감정상의 동요도 일으키지 못하고 관람자가 그저 대충 훑어보는 예술작품은 아무 의미가 없다..... 관람자가 비록 상상 속에서라도 어떤 반응을 보이고 스스로 창조에 대한 열망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되어야 한다..... 관람자를 마비 증상에서 일깨워야 한다.” 피카소는 확신을 갖고 이렇게 말했다.[309]

“창조적인 음악가로서 나는 매일매일 짐을 풀 듯이 내 마음속의 아이디어를 표출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나는 작곡가라는 운명을 타고났고 다른 것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작곡을 했다..... 나는 영감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을 하다 보면 영감이 떠오르는 것이다. 물론 처음엔 잘 모를 수도 있다.”(프로이트 역시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영감이 내게 오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맞으러 마중 나간다.”) ...“뜻밖의 참신한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면 메모를 해두고 적절할 때에 적절하게 활용한다.[388]

“나는 도둑이다. 하지만 부끄럽지는 않다. 플라톤, 피카소, 베르트람로스 등 누구라도 최고의 인물들에게서 생각을 훔친다. 나는 도둑이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나는 내가 훔친 것의 진가를 잘 알고 있고, 늘 소중하게 간직한다. 물론 나만의 재산이 아니라 내가 물려받고 물려줘야 할 유산으로 여긴다.”[523]

피셔는 “힘센 정부에 맞서 소금 한줌을 집어들고 범죄자가 되는 것은.... 위대한 예술가의 상상력과 위엄 그리고 약간의 쇼맨쉽을 필요로 했다. 그것은 무식한 농부와 지식인 모두에게 호소력을 가졌다”고 논평했다.[595]

유년기를 부인하거나 과거를 폐기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 분야, 그리고 다른 분야에서도 이런 경향에 대한 신랄한 반작용이 일어났다는 징조가 눈에 보이고 있다. 인간이란 어쩌면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방향, 장르 혼융의 방향으로 무한정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혁신과 전통, 모더니즘과 역사주의, 창조적인 도약의 시기와 인간의 파괴로 이어질 수 있는 정체 혹은 퇴행적인 시기를 시계추처럼 왕복하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1900년 경의 현대적 정신이란 아마도 인간의 모험적 능력을 보여주는 실례일 것이며, 그들이 그처럼 활기찬 정신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역사의 그 처럼 짧은 기간에만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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