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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6일 11시 20분 등록
p.282. 하지만 피카소에게 가장 중요한 예술적 영향을 미친 요소를 하나만 고른다면 (이 점에선 피카소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를 띤 동시대 화가였던 마티스와 브라크고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들의 직계 선배 세잔의 작품이었다. 세잔은 소묘나 채색에 특별히 능한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20세기의 기준에 맞는 화화의 본성을 깊이 꿰뚫어 보았다. 세잔은 회화를 형태 위주의 작업으로 여겼다. 여기서 ‘형태적’이라 함은 회화에서는 형태 문제가 결정적이고 모든 지각 대상에 내재한 기하학적 형태가 시각 예술의 근본이 된다는 뜻이다. 그는 “자연에서 우리는 원통과 구, 원뿔의 형태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잔은 특히 후기에 이르러서 원근법적인 표현 방식을 포기하고, 형태와 색상이 포개진 장면으로 전경과 후경을 용해시켰다. 그리고 영원한 회화적 현실을 추구하면서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화가들이 중요시한 색상과 정서, 감정의 복잡성에도 등을 돌렸다. 세잔이 사망한 이듬해인 1906년에 열린 세자 회고전은 그의 젊은 동시대 화가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피카소는 수십 년 후에 브라사이에게 “내가 세잔을 아냐고요? 그는 나의 유일한 스승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p.283. 이 기막힌 발견물에는 「아비뇽의 처녀들」의 스케치만 그린 노트 8권도 포함되어 있다. 게다가 「아비뇽의 처녀들」의 일부 형태는 처음부터 피카소가 탐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형태를 변형하고 캐리커처를 그리면서 인간의 형태를 묘사하려고 무수히 노력했던 것이다. 그리고 19991년 말에는 「아비뇽 처녀들」의 유일한 유화 스케치가 발견되었다.
p.293. 피카소 역시 이런 견해에 공명하는 심정을 토로한 바 있다. “우리가 입체주의를 창시했을 때는 입체주의를 창안하겠다는 의도는 없었고, 그저 우리의 내면에 있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획기적인 변화나 ‘패러다임의 변동’에는 수많은 원인들이 작용하는 법인데, 이 중 어떤 원인도 반드시 필요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트로카데로 박물관에서 전시한 아프리카 가면이나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의 심리학 저서에 서술된 시각적 환영 이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상징주의 시인들의 작품, 혹은 학생노트와 카바레 포스터의 이미지나 거장 세잔의 작품이 없었어도 누군가는 입체주의를 창안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술 분야의 이러한 변화를 지향하는 인습 타파적인 추세가 강해진다는 점 자체가 중요할 것이다. 그만큼 미술계의 변화가 일어나고 혁신적인 화풍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p. 307. 내가 나 자신을 반복해서 흉내낼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과거는 더 이상 내게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 나 자심을 베낄 바에야 차라리 다른 사람을 모방하겠다. 그러면 적어도 새로운 면을 추가할 수는 있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난 새로운 걸 발견하기를 좋아한다. …… 화가란 결국 무엇이겠는가? 다른 사람의 소장품에서 본 그림을 그려서 자신의 소장품으로 만들고 싶은 수집가가 아니겠는가. 시작은 이렇게 하더라도 여기서 색다른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p.316-317. 이러한 설명은 실로 놀랄 만큼 유사한 결론을 내포하고 있다. 학자들에 따르면, 「게르니카」에 적용된 화면 구도의 씨앗은 피카소가 직전에 완성한 여러 점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고, 특히 앞서 언급한 연작 「프랑코의 꿈과 거짓」과 복잡한 구성의 대형 동판화 「미노타우로스 마키」에서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게르니카」는 또한 과거의 위대한 작품, 특히 니콜라스 푸생(Nicolas Pussain, 1594~1665)과 장 오귀스트 앵그르, 외젠 들라크루아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으며, ‘양민 학살’이라는 고전적인 주제와도 뚜렷한 연관성이 존재했다. 평생 투우를 좋아한 만큼 투우장면과 연관된 주제와 색조도 반영되었다. 물론 피카소가 몸소 겪은 두려운 경험, 특히 세 살 무렵에 지진을 피해 가족 모두가 피신해야 했던 혼란스러운 경험에 대한 기억을 암시하는 측면도 있다.
p.321-323. 「게르니카」는 미술학도뿐만 아니라 창조성 연구자에게도 한결같은 관심의 대상이다. 다른 예술가의 여느 대표작과 마찬가지로 창조자의 내면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성향에 의존한 작품인 까닭이다. 「게르니카」는 개인적으로도 대단히 의미 있는 작품이었지만, 동시에 민족적 의의와 세계적인 의의를 모두 지닌 작품이었다. 고전적인 구도와 어린아이 같은 이미지를 한꺼번에 드러낸 작품으로서 천진한 아이의 눈에 비친 혼돈의 이미지를 묘사하고 있다. 피카소는 모든 갈등, 스페인 내전으로 폭발한 사회적 갈등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폭력과 성, 예술 창조에 관한 갈등까지도 화폭에 담아냈다.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렬하게 내세웠고, 프랑코의 파시즘을 격절하게 비난했다.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정신적 가치가 삶을 영위하고 작품 활동을 하는 토대인 예술가들은 인간성과 문명의 가장 숭고한 가치가 위기에 처한 갈등 상황에 대해 오블관언의 태도를 보일 수도 없고 보여서도 안 된다. 항상 나는 이렇게 믿어 왔다.”이어서 그는 더욱 날카로은 말을 남겼다. “예술가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백치이다. …… 정치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심장을 뒤흔드는 정열적이거나 행복한 사건에 민감한 사람이다. ……그림은 집 따위를 꾸미는 수단이 아니다. 그림은 적을 공격하고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전쟁의 수단이다.”
「게르니카」는 심미적인 최고선의 경지에 오른 작품이다. 오랫동안 피카소의 작품을 뚜렷이 부각시켰던 상징적인 측면이 이제 통제된 혼돈과 축적된 힘과 결합되어 이 작품의 심미적 성취를 배가시켰다. 블런트는 “청색의 시대의 정서적 강렬함을 신화적인 그림의 환상과 결합한 작품이며, 20대 초반에 보여준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탁월한 데셍 솜씨와 입체주의 시기의 엄격한 형태 실험을 두루 활용한 작품” 이라고 말했다. 피카소의 마음속 생각과 감정을 거의 모두 담아낸 최종 완성작은 관람객을 압도할 정도로 농밀한 메시지를 전한다. 화폭의 거대한 크기와 획기적인 주제 덕분에 「게르니카」는 당연히 성공할 수 있었다.
실상 「게르니카」는 피카소의 대표작 중의 대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불멸의 위치에 오른 작품이라고 자신 있게 단언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인생」의 사랑과 인생, 그리고 죽음이라는 주제, 「아비뇽의 처녀들」의 척박함과 잔혹함, 초현실주의 작품인 「세 무용수」의 예기치 못한 열정과 무아지경의 폭력성,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와 「우는 여인」의 데포르마시옹, 그리고 「미노타우로마키」의 복잡하게 엉킨 주제와 의인화 모두 이 작품에 담겨 있다. 오직 「세 음악가」와 「앙티브에서의 밤낚시」에서 볼 수 있는 비교적 유희적인 성격과 평화로운 정경만이 최종 완성작에서 빠져 있다(물론 이 두 작품에도 불길한 징조가 스며 있다).
p.325. 이 같은 피카소의 마지막 시기에 대해 삐딱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존재한다. 전기 작가 존버거는 이렇게 말한다. “피카소는 일을 할 때는 행복하기만 하다. 하지만 자신만의 독자적인 주제는 없다. 그는 다른 화가의 작품에서 주제를 취한다.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단지와 접시를 장식할 뿐이다. 철부지 애들처럼 군다. 다시 꼬마 신동이 된 모양이다.” 피카소 스스로도 자신의 후기 작품이 훌륭한지 여부에 대해서는 별 확신이 없었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p.329. “피카소는 결코 헌신적인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이 못 되었다. 다른 누구보다 자기만을 추켜세울 수 있는 친구들을 원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친구들의 헌신적인 자세와 이해 능력, 그리고 인내심을 까다롭게 시험했다.”
p.332. 마지막 예외는 채 10년을 넘기지 못한 브라크와의 관계인데, 미술사 전반이나 본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두 화가는 사적으로도 친밀하게 지내면서 회화 작업에 공동보조를 취했으며, 매우 효과적이고 끈질긴 공동작업을 통해 서양 미술사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었다. 이 때 피카소는 이전이든 이후든 비근한 사례를 볼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자아와 개성을 억눌렀고, 덕분에 새로운 전망을 열 수가 있었다. 훗날 그는 이 무렵을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회상했다. 브라크와 맺은 관계가 그의 가족 관계를 재현한 것인지, 동성애적인 함의를 내포했는지, 이후에는 입체주의에 버금가는 혁명적인 양식을 추구하는 길을 방해한 면이 있는지 여부는 임상 의학자들에게 맡겨둬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피카소가 「아비뇽 처녀들」의 수준을 뛰어넘어 한 단계 높이 도약하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6이고르 스트라빈스키
p.334.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자서전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음악은 그 본질상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는 무력하다.” 이런 문장을 보면 스트라빈스키의 곡을 들어본 청중은 깜짝 놀랄 것이다. 스트라빈스키야말로 서정적인 「페트루슈카」에서부터 극적인 「봄의 제전」, 그리고 애가조의 「시편 교향곡」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음악에서 표현성이 가장 풍부한 작품을 작곡했던 장본인이 아닌가. 하지만 스트라빈스키는 논객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리하르트 바그너의 추종자를 비롯해서 자신의 미학적 정적이라 생각되는 자들을 가차없이 비판했다. 이 ‘불순한 음악가’들은 언제나 민족적 단결이나 종교적 자유와 같은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스트라빈스키는 음악가라는 장인이 작업하는 소재인 가락과 리듬은 그 자체로는 목수의 대들보나 보석 세공사의 보석과 마찬가지로 표현할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p.334-335. 외부에서 부과한 ‘프로그램’이 없는 경우에 음악은 그저 음악일 뿐이라는 스트라빈스키의 주장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는 음악의 ‘시학’을 얘기하는데, 여기서 시학이란 글자 그래도 음악을 만드는 행위(포이에시스. poiesis)를 지칭한다. 하지만 스트라빈스키는 평생 이와는 전혀 다른 측면을 생생하게 보여준 인물이다. 정치라는 외부적인 자극 요소가 없이는 음악 창작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웅변한 실례인 것이다. 모든 창조자들, 특히 음악가들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폭넓은 대중과 더불어 자신이 창조한 작품의 운명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는 주위 동료들 사이에서 적절히 처신해야 한다.
p.338-339. 스트라빈스키는 언제나 음악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실상 그가 아주 생생하고 정확하게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의 장면은 소리와 관련이 깊다. 그는 벙어리였지만 매우 희한하게 혀를 굴려 묘한 소리를 내곤 했던 어느 농부를 기억했다. 동부는 두어 마디의 음절(자기가 발음할 수 있는 유일한 소리)로 이상한 노래를 매우 빠르고 솜씨 있게 불렀는데, 오른 손을 왼쪽 겨드랑이에 낀 채로 왼팔로 오른손을 눌러서 은근히 입맞춤 소리를 내며 박자를 맞추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집에서 농부의 음악을 흉내냈다. 어린 이고르는 또한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면서 여럿이 입을 맞춰 부르는 여자들의 노래도 흉내냈다.
이러한 유년 시절을 결정화 경험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결국 창조적인 인물이나 그 가족들은 탁월한 재능을 암시하는 어린 시절의 특징적 표지를 찾는 데 열심인 법이고, 필요하면 그것이 증거로서 ‘가치 있음’이 분명해질 때까지 기억을 윤색하는 짓도 마다하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개별 인물에 따라 어린 시절에 흥미를 느낀 일이나 훗날 기억 속에 오롯이 떠오르는 경험은 서로 다르다고 가정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이런 맥락에서어린 스트라빈스키의 청각적 경험은 나침반에 흥미를 느낀 아인슈타인의 기질이나 시각과 촉각에 민감했던 앨리엇의 감수성과 유비 관계를 이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스트라빈스키는 이러한 장면의 시각적인 요소도 정확히 기억했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황금귀’의 소유자였음을 입증할 생각만 했다면 굳이 꾸며낼 필요초자 없는 기억의 윤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스트라빈스키는 연극성이 짙은 작품을 공연하면서 시각적인 요소를 능란하게 다룰 줄 알았다는 점에서 다른 작곡가들과는 뚜렷이 구별된다고할 수 있다.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에 심취하기는 했지만 음악 신동은 아니었다. 실상 그는 음악 자체보다는 회화나 연극에 더 흥미를 느낀 아이였다. 피아노 교습은 아홉 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받기 시작했는데, 일단 배우기 시작하자 일취월장했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오페라 악보를 읽었고 연주회에도 열심히 참석했다. 음악 교육을 받는 초창기부터 즉흥 연주에 흥미를 보였고 스스로 멜로디와 변주곡을 만드는 일을 되풀이했는데, 가족과 교사들이 이를 시간 낭비라고 나무랐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p.346. 스트라빈스키는 디아길레프에 관해 이런 글을 남겼다. “그는 새롭고 신선한 구상을 단숨에 알아채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거기에 몸을 던질 줄 아는 대단하고 신기한 능력을 지녔던 사람이다.” 스스로는 위대한 예술가가 되지 못할 운명임을 잘 알았던 디아길레프는 재능을 키워주는 역할에 자족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런 인물로는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작곡 교사인 나디아 블랑제,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 등이 있는데, 이 소수의 예술 양육자들이 20세기의 예술사를 풍요롭게 키워낸 장본인이었다.
p.350. 「불새」의 성공은 스트라빈스키의 인생 횅로를 바꿔놓았다. 당시 국제적인 예술 중심지로 이름 높았던 파리에서 발레뤼스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스트라빈스키의 독창적인 작품은 발레음악의 명곡 반열에 올랐다. 실로 그는 하룻밤 사이에 러시아 작곡가의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알려졌으며, 이후 몇 년 동안 그의 음악은 고향 러시아에서보다 서유럽에서 더 유명하고 진가를 인정받았다.
p.371. 가령, 1919년 지휘자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디아길레프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그가 언제나 입에 달고 다니는 ‘도덕적 고결함’ 이란 것은 별 가치가 없습니다. …… 특히 친구가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가 ‘법적 권리’에 도움을 청하기보다는 그냥 법적 권리를 운운하기만 하는 모습에서 이런 모든 것을 알았는데, 저는 속이 많이 뒤틀렸습니다. 우정을 표시하는 희한한 방법이지요. …… 그래서 전 그가 제 권리를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보내는 돈은 모두 거절합니다. 이런 돈은 선물일 뿐이어서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겁니다. 그리고 디아길레프는 제가 그의 방식대로 행동한다고 불평해서도 안 됩니다. 그가 부추긴 셈이니까요.
p.382. 사람들은 종종 스트라빈스키와 피카소의 유사점을 언급한다. 두 사람 모두 한 해 차이로 태어났고, 서유럽 문명의 주류에서는 다소 벗어난 인물이었다. 1900년대 초반 자석에 끌리듯 파리에 온 두 사람 모두 전위적인 색채가 가장 짙은 작품을 제 1차 대전이 발발하기직전에 완성했다. 피카소는 브라크와 공동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고, 스트라빈스키는 발레뤼스에 참여하고 있을 때였다. 두 사람 모두 전쟁 기간에는 다소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 기간에 피카소는 첫 부인을 만났는데, 공교롭게도 발레뤼스 단원이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둘은 바리에서 중산층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고, 신고전주의 국면으로 넘어갔다. 물론 서로 작업 내용을 알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이 시기에 두 사람은 흥미로운 작품을 함께 창조하게 된 셈이었는데, 관객이 보다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형식을 만드는 데 열중했다.
p.383. 스트라빈스키와 피카소가 과거와 자극적인 대화를 지속적으로 했다는 점은 두 사람이 오랫동안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다. 그들은 과거로부터 배우고 과거를 재창조함으로써 자신의 목소리를 한층 더 심화시킬 수 있었다. 이는 과학자나 수학자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들이 이런 식으로 과거와 유희하지 않았다면 훨씬 개인적이고 급진적인 작품은 창조했겠지만, 이는 기껏해야 창조력을 갉아먹은 곤란한 재주에 불과했을 것이다.
p.387. 나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내가 가진 기질과 재능이라면 차라리 소 바흐로 살아가는 편이 나았다. 가끔 교회와 신을 위해 곡을 쓰면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아가는 삶 말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상에서 만난 온갖 어려움을 이겨냈고 견뎌냈다. 타락한 면이 없지 않은 출판업자나 음악 축제, 음반사, 홍보업계의 오랜 인습(물론 나 역시도 그런 인습에 빠져 있었지만)을 극복해낸 것이다.
스트라빈스키의 삶은 대중적인 이목과 논란의 중심에 선 저명한 음악가로서의 삶과 지성적이면서 부지런히 일하는 장인의 삶이 균형을 이루었다. 그 자신은 스스로를 특별한 경우에만 격렬한 디오니소스의 세계에 들어가는, 기본적으로 질서와 균형이라는 아폴로적 원리를 체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p.388. “창조적인 음악가로서 나는 매일매일 짐을 풀 듯이 내 마음속의 아이디어를 표출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나는 작곡가라는 운명을 타고났고 다른 것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작곡을 했다. …… 나는 영감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일을 하다 보면 영감이 떠오르는 것이다. 물론 처음엔 잘 모를 수도 있다.”(프로이트 역시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영감이 내게 오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맞으러 마중 나간다.”)스트라빈스키는 작곡의 우연성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다. “뜻밖의 참신한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면 메모를 해두고 적절할 때에 적절하게 활용한다.”
p.389. 이러한 글에서 스트라빈스키는 좋은 음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면서, 음악상의 정적에 대한 혹평도 빼놓지 않았다. 특히 그는 모든 예술 형식을 종합하고 음악을 종교의 경지로 고양시키려는 바그너의과장된 음악론에 대한 언짢음을 노골적으로 표명하면서, 음악 자체는 아무것도 표현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인상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멜로디를 뚜렷하게 구획되는 순서에 따라 정렬하고, 혼합적이고 종합적인 형식을 자족하는 형식으로 대체하고, 감정적인 표현을 자제하는 대신 엄격하게 음악적인 언어만으로 아이디어를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p.390. 더 많은 제한을 부과할수록 우리는 영혼을 구속하는 사슬에서 더 자유로워진다.
p.398. 작곡을 선택하고 게다가 주로 다른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필요한 장르를 선택함으로써, 그는 회화나 시처럼 비교적 혼자서 작업하는 개인적인 분야에는 그다지 필요치 않은 공동작업에 관여해야 했다. 디아길레프에게서 공동작업의 기본적인 모델을 배웠고, 사람들을 지도하고 이끌어가는 적극적인 성격과 다소 부정적이라 할 만한 위압적인 성격을 모두 내면화했다. 음악가로서 절정에 올랐을 때는 공동작업자로서는 꽤 불쾌한 면모도 보여서, 20세기 초반에 스트라빈스키가 남긴 선동적인 글을 보고 크래프트가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p.399. 기력이 쇠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즐거운 일일 수 없겠지만, 세기의 거장에게는 더욱 쓰라린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는 우리 시대의 거장 누구 못지않게 늙어하는 현실에 잘 대처했고, 부인과 ‘양자’ 크래프트와 함께 개인적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다른 창조자들과 부대끼며 치러야 하는 갈등과 분쟁의 요소를 스스로 단념할 줄도 알았다. 결국 그는 마지막 안식을 찾아 땅에 묻혔다. 그가 사랑했던 도시 베네치아에, 반세기 전에는 언쟁을 벌였지만, 이제는 단체를 세우고 예술적 촉매 역할을 하는 데 남다른 재능을 보인 그와 화해를 원한다는 듯이 디아길레프 옆에 묻혔다.
7 T. S. 엘리엇
p.404-405. 모든 기록을 통해 보건데, 어린 엘리엇은 감수성이 매우 예민한 아이였다. 누이에 따르면, 아직 말을 배울 무렵에도 단어 꼴도 만들지 못하면서 운율에 맞춰 말을 했다고 한다. 어떤 냄새나 소리, 장면과 같은 감각적인 인상에 넋을 잃곤 했고, 조상이나 양초, 향기에 정신이 팔리기 일쑤였다. 수십 년 후에도 그는 새해를 자축하는 증기선의 기적소리와, 홍수로 범람한 강에 떠다니는 사람의 몸뚱아리와 동물의 시체와 온갖 잔해들, 그리고 아일랜드계 보모가 해주던 기도와 신이 존재한다는 얘기들을 또렷이 기억했다. 감각적인 인상에 이처럼 강하게 매료되었다는 점은 그 자체로도 유별난 일이지만,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이런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능력이나 어릴 때 받은 인상을 시에 담아내려는 강한 성향은 더욱 더 유별난 점이다.
글쓰기는 오랜 세대에 걸쳐 양친의 두 집안에서 모두 뜻을 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된 방식이었다. 샬롯 엘리엇은 대개는 교훈적인 의도를 담은 종교시를 많이 썼다. 어린 엘리엇은 언어에 대한 기억 용량이 남달리 큰 편이었고, 학교에서 주로 익살과 농담으로 채운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10대가 되자 항해 소설과 광시 그리고 좀 더 진지한 운문을 썼고, 남태평양과 하와이에 관한 이야기를 꾸며내면서 환상에 빠져들곤 했다. 엘리엇의 시는 특별히 조숙한 편은 아니었어도 형식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과 분명한 어조를 드려냈다. 재치있게 모방하는 재능도 뛰어난 편이어서, 열여섯 살 때는 벤존슨(Ben Johnson, 1572~1637)의 작품을 훌륭하게 모방한 작품을 쓰기도 했다.
p.408. 엘리엇은 라포르그의 작품에 ‘친화성’을 느꼈다.
p.424. 중요한 작가가 되는 데는 오직 두 방법이 있습니다. 아주 많은 작품을 써서 온갖 지면에서 제 작품을 볼 수 있게 하거나, 아니면 아주 조금만 쓰는 거지요. …… 저는 과작 인지라 많이 써서 유력한 작가가 되기는 글렀습니다. ……런던에서는 작은 책자 분량의 시 한편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 한 편 한 편마다 완벽성을 기해야 하고, 그래서 각기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는 것이 유일한 관건일 테지요. 미국과 관련해서 말씀드리자면, 저는 아무래도 고향보다는 여기서 훨씬 더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 생계를 유지하려면 예술하고는 하등 상관 없는 직업을 택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겠지요.
p.426. 이 작품이 『황무지』로 완성되는 데는 두 가지 요인이 결정적이었다. 하나는 긍정적 요인으로, 엘리엇이 성배 전설에 관한 제시 웨스턴의 저서『제식에서 로망스로』를 읽었다는 점이다. 오래 전부터 엘리엇은 의혹과 폐허로 가득한 세상에서 모험과 탐색을 시작한다는 구상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지만, 다양한 문화에서 취한 신비적인 탐색 주제를 풍부하게 서술한 웨스턴의 책이 아직은 이런 주제와는 다른 구상을 품고 있던 엘리엇에게 매력적이고 풍요로운 사유의 수간을 제공한 셈이었다. 두 번째 요인은 일단은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 요인이었는데, 급속히 악화되는 엘리엇의 건강이었다.
p.432 『황무지』에 대한 초기의 서평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나 피카소의 「아비뇽 처녀들」과 같은 획기적인 작품에 비하면, 상당히 우호적인 편이었다.
p.435. 현대의 또 다른 걸작, 가령 『율리시즈』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처럼, 처음에는 한 쪽 방향으로 전개되다가 나중에는 다른 방법으로 변주된 다양한 주제들 역시 작품의 효과를 높이는 데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황무지』에 담긴 주제로는 풍요로운 다산성과 초목 제의, 어부왕 전설, 타로카드, 성배 이야기, 고대 다리와 교회가 있는 런던의 더러운 풍광, 주점의 농지거리, 상유 사회의 대화, 사랑 없는 정사, 구원의 가능성 그리고 동양의 사상과 종교의 매혹적인 반향 등이 있다. 이러한 중요한 모티프들이 주로 고전적인 오보경 시형식에 담겨서 강렬한 시행과 꾸밈없는 진술로 표현되었다. 『황무지』는 극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힌 정신, 즉 현대인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온갖 생각을 농밀하고 강렬하게 묘사한 작품이었다. 비록 정연한 서사와는 거리가 멀지만, 독자는 마치 고대의 모험담을 읽을 때처럼 하나의 완결된 체험을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p.444-445. 엘리엇이 문학 일ㄴ에 기여한 내용 중 가장 유명한 것인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개념일 터이다. 시인은 정서를 직접 전달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시인은 해당 정서를 훌륭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상황이나 이미지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한 정서를 명확히 표현하는 일련의 객관 대상이나 상황, 사건인데, 해당 정서를 환기하려면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외부적인 상을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객관적 상관물을 창조할 수 있는 시인이 가장 훌륭한 시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비상한 감수성과 뛰어난 언어 구사력을 결합시킬 줄 아는 시인이 없다면, 우리가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뿐 아니라 그것을 느끼는 능력까지도 퇴화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객관적 상관물에 관해 글을 쓰면서 앨리엇은 자신의 경험을 염두해 두었을지 모른다. 어린 시절 넋을 일고 빠져들었던 감각적인 장면이나 보스턴 거리에서 겪은 신비한 체험을 시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던 경험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엇의 문학에 대한 견해, 특히 시에 대한 견해는 당연히 개인적인 체험과 선입견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그는 시작 과정, 특히 자신의 경우를 비롯한 당대의 시작 과정을 깊이 있게 통찰했다. 엘리엇은 철학을 공부하고 비평을 썼던 경험을 십분 살려서 당대의 예술을 조망하면서, 보통은 교육 배경이 서로 다르고 감수성은 반대되기까지 하는 여러 사람들이 담당하는 역할을 동시에 맡을 수 있었다. 그는 시인으로서 그리고 비평가로서 성공하고 갈채를 받았는데, 당대의 다른 누구 못지않게 이러한 다양한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런 성공과 갈채를 한층 배가시킨 면이 있었다.
p.446-447. 이 연구를 수행하면서 내가 계속 놀란 점이 있다. 재능 있는 젊은이들은 마치 희귀종 생물처럼 자신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동료들을 금방 찾아낸다는 점이다. 젊은 피카소는 프랑스어를 거의 하지도 못하는 처지에서 일찍부터 막스 자코브와 거트루드 스타인, 기욤 아폴리르, 앙리 마티스, 조르쥬 브라크와 만나 어울렸다. 스트라빈스키는 작곡에 전념한 지 한두 해 만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바슬라프 니진스키와는 늦은 저녁을 함께 먹고, 클로드 드뷔시와 모리스 라벨과는 작곡 기법을 서로 얘기하면서 칭찬을 주고받는 사이게 되었다. 엘리엇은 비록 만년에는 조금 쌀쌀맞은 사람이 됐지만, 젊은 시절에는 이들 조숙한 천재들과 비슷한 패턴을 보였다. 일찍이 미국인인 콘래드 에이킨과 에즈라 파운드와 우정을 나누었고, 나중에는 윈덤 루이스, 리처드 올링턴, 올더스 헉슬리, 줄리안 헉슬리 등 1급의 젊은 영국인 예술가들과 교제했다.
p.458-459. 널리 인정되는 이같은 유사점 외에 이 책의 연구 관점에서도 몇 가지 연속성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이들은 모두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서 가족이 높이 평가한 예술 장르에서 활약했다. 이런 점은 가족이 존중할 수는 있었으나 이해할 수는 없었던 일을 했던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의 경우와는 구별된다. 세 예술가는 젊은 나이에 예술 중심지로 이주했다.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는 파리로, 엘리엇은 런던으로 갔는데, 곧 가장 혁신적인 예술가와 지식인 그룹의 중심 인물로 부상했다. 이들의 가장 근본적인 예술적 업적은 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그들과 가까운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 피카소에겐 조르쥬 브라크가 있었고, 스트라빈스키에겐 디에길레프 발레단이, 그리고 엘리엇에겐 에즈라 파운드와 비비언 엘리엇이 있었다. 이들이 중년에 들어 부르주아적 삶에 굴복했다는 사실이나 자클린 피카소와 로버트 크래프트, 발레리 엘리엇 등 젊은 사람들이 그들 인생의 측근에게 활기를 되찾아주는 역할을 한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창조력의 원천을 잃지 않고 새로운 작품을 계속 추구하기 위해 일종의 협약, 아주 인상적인 계약을 맺었다는 점이다. 피카소는 젊음을 유지하고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가학적으로 대했고, 스트라빈스키는 친분 관계를 희생해서라도 법정 싸움의 불씨를 지피는 데 주저치 않았으며, 엘리엇은 프로이트처럼 금욕적인 삶을 선택하고 동시에 가학적이라 할만큼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무시했다.
우리의 예술가들은 다른 중요한 면에서도 순서대로 정렬할 수 있다. 이들은 우선 지적 능력에 있어서 폭넓은 편차를 보인다. 엘리엇은 교수가 될 만한 능력이 있었고, 스트라빈스키는 미학과 철학상의 특정 주제에 관심이 많았다. 학문적 관심이 가장 미약했던 피카소는 당대의 이론가와 지식인들에게 마치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처럼 휘둘린 감이 있었다. 종교 문제에 관련해서도 주목할 만한 차이점이 보인다. 스트라빈스키와 엘리엇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가톨릭교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피카소는 기성 종교보다는 미신에 의존하는 성향이 짙었다. 정치적인 영역에 관해서도 상당한 차이점이 있어서, 엘리엇이 생래적인 보수주의자라 할 수 있다면 피카소는 반사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8 마사 그레이엄
p.468. 용기 있는 성격에다 미학적인 모험을 추구하였던 이사도라는 당연하게도 무용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녀의 기술적인 혁신은 많은 사람의 추종을 불러올 만큼 숙련성이나 일관성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사도라의 성공 요인은 제자나 ‘양녀’ 들에게 전수해 줄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주로 그녀의 카리스마 넘치는 태도와 ‘몸의 본능적인 움직임’에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이사도라는 통상적으로 새로운 무용 전통의 창시자라기보다는 고독한 선구자로 여겨진다. 날카로운 식견을 지닌 무용 비평가 애그니스 드 밀 은 이렇게 말한다. “이사도라는 무대에 널린 쓰레기를 모두 청소했다. 그녀는 거대한 빗자루였다. 그녀로 인해 비로소 무대가 깨끗하게 청소된 것이었다.”
p.4770-471.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 특히 미디어의 홍수 속에 살아야 했던 20세기의 인물답게, 그레이엄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가지 일화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겨우 아장아장 걸어다닐 무렵에 벌써 교회 좌석의 토로에서 춤을 추었다고 하며, 갑자기 기차가 움직이는 바람에 안에 갇혔을 때 또렷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저씨, 전 그레이엄 박사의 딸인데요, 여기서 내리고 싶어요.” 어린 그레이엄은 거짓말하는 버릇이 있어서 자주 문제를 일으켰다. 어머니는 할 수 없이 집에 작은 무대를 마련해 놓고 그레이엄에게 흉내내기 놀이를 시켰다. 가장 인상적이면서 그만큼 자주 언급되는 일화로서, 그레이엄의 아버지는 딸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가 거짓말을 하면 내가 모를 줄 아니? 네가 나를 속인다는 걸 항상 네 몸짓이 말해 준단다. 네가 말하는 내용과는 상관 없이 네 모습에 다 써 있어. 주먹을 쥐면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등이 뻣뻣해지고 발을 끌거나 눈을 내리깔고 있잖니. 몸은 거짓말을 못하는 법이란다.” 딸의 잘못에 대한 이런 통찰력 있는 부모의 대응은 나중에까지 커다란 의미로 남았다.
p.472. 1916년 스물 두 살이 된 마사 그레이엄은 무용가 루스 세인트 데니스와 무용가이자 사업가인 테드 숀이 몇 해 전에 설립한 로스앤젤레스 유일의 무용학교인 데니숀에 입학했다. 입학할 때의 여건은 별로 좋지 않았다. 스무 살은 무용가가 되기에 너무 늦은 나이다. 대부분의 무용가 지망생은 열 살이 되기 전에 엄격한 훈련을 받기 시작한다. 그레이엄은 몸이 아주 작은 편이었고, 일반적인 의미에서도 딱히 매력적이랄 수 없는 용모에 유연성도 별로 뛰어나 보이지 않았다. 가망이 없어 보였는지 세인트 데니스는 별로 인상적이지 못한 이 학생을 제자로 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입생을 숀에게 맡겼다.
p.475. 그레이엄은 푸른 색의 바탕에 붉은 물감을 튀기듯 칠한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Vasily Kandinsky, 1866~1944)의 작품에서 하나의 해답을 얻었다. “나는 이 그림처럼 춤을 추겠다.”
p.480. …… 이런 창조의 순간에 내가 참여했다는 사실이 기쁘다. 사본이 따로 없는 유일무이한 작품을 처음 보는 것은 감동적이고 경이로운 일이었다. 더 위대한 무용가, 더 섬세한 안무가도 나올 테지만, 그 때 우리는 기존의 양식이나 선례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 거대한 재즈 즉흥 연주회나 다름없던 그 시절은 9년 동안 지속되었다.
p.481. 신들을 모방하고자 했을 때 우리는 신들의 춤을 추었다. 그런 후에 우리는 바람과 꽃과 나무 등 자연의 힘을 재현함으로써 자연의 일부가 되고자 했다. 춤은 더 이상 의사소통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았다. ……현대 무용은 고집스럽게 추함만을 극화하는 것도 아니고 신성한 전통에 타격을 가하려는 것도 아니다. …… 표현주의적인 무용의 장식적인 형식에 대한 반역이 일어난 것이다 대단히 엄격한 간소함의 시대가 온 것이다.
p.483. 마틴은 무용을 자신의 신조로 삼았고, 그레이엄을 그 신조를 드러내는 매개자로 선택했다. 똑똑하고 지적이며 정력적이었던 마틴은 자신의 생각을 무용을 다루는 고정난 유창한 글로 써내려갔다. 몇 가지 대표적인 예문을 인용해 보겠다.
좀 인상적인 예를 들자면, 한 시즌에 마사 그레이엄 같은 무용가가 창조하는 새로운 작품의 수는 옆에서 지켜보는 구경꾼이 보기에 아연실색할 정도이다. 이 풍부한 내용을 한 번 보고 소화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이런 계획에 놀라는 구경꾼이라면, 그걸 창조하고 연출한 사람에 대해서는 뭐라고 느낄까.
무용 레퍼토리 극단의 장점에 관해 결국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막스 엘리엇 극장에서 첫 시즌이 개막되는 오늘 밤은 미국 무용 역사에서 참으로 중요한 날이다. 1급의 무용가들이 공통의 대의, 그러니까 미국 무용의 통합을 위해 독립성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고 깨달은 적은 예전엔 없었다.
p.484. 무용의 최종적인 역사를 쓴다면, 다른 어떤 무용가도 그레이엄이 동작의 범위를 확장시킨 경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써야 할 게 분명하다. 기술적인 의미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물론 그녀는 이런 면에서도 대단한 능력을 입증했지만, 창조적인 동작을 표현한 면에서 그녀는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공헌을 했던 것이다.
p.488. 그레이엄과 호스트의 관계는 불안정했다.
p.493. 윗킨스는 「헤럴드 트리뷴」에서 이렇게 적었다. “미국에서 나온 작품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안무다. …… 구성이 탁월한 걸작일 뿐 아니라 관객과 무용수들을 정신의 지극한 황홀경으로 고양시키는 분위기를 연출한 작품이다.” 마틴 역시 “아마도 가장 훌륭한 작품일 것”이라고 말했다.
p.498-489. 이 무렵 그레이엄은 미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을 명시적으로 드러냈다. 1930년에 벌써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 무용의 문제에 대해 길을 찾아야 할 사람들 입장에서 내놓을 해답이란 이 땅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황량함과 비옥함이 참으로 흥미로울 정도로 대조를 이룬 이 땅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몇 년 후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의 무용가는 미국인 관객에게 빚을 지고 있다. 미국이란 나라 자체에 걸맞는 힘을 가진 예술을 낳기 위해서 우리는 미국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던컨이나 데니스에게는 팔을 들어울리는 것은 곡물을 재배하는 것을 뜻하고 손을 흔드는 것은 비가 내리는 것을 암시했다. 팔은 반드시 곡물이 되어야 하는가? 손은 반드시 비가 되어야 하는가? 손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 손이 다른 어떤 것의 빈약한 모방에 불과한 게 아니라 손동작 자체만으로 어마나 광대한 특성을 의미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 …… 우리의 극적인 힘은 에너지와 활력에서 나온다.
p.508. 그레이엄은 여성 혹은 미국인으로서의 자신을 옹호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녀는 겉으로 비치는 자기 모습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고, 비판을 견뎌내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창조 활동에 전념했다. 무용단의 매력적인 지도자였던 그녀는 자기 주변 사람들이나 멀리서 알게 된 사람들 모두에게 영감을 주었다. 사업 분야에는 별다른 재주가 없었기에 회계 장부를 기록하는 일이나 무용단의 재정을 관리하는 일은 기꺼이 관리인에게 맡겼다. 이 일은 처음엔 호스트가 맡았고 호킨스가 이어받았으며, 마지막으로 이 역할을 맡은 사진작가 출신의 론 프로타스는 그녀가 사망한 후에도 유산을 관리했다.
p.509. 아인슈타인은 혼자서 연구게 몰두할 수 있었고, 스타리빈스키조차 연주회가 열리는 순간에 꼭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었지만, 그레이엄은 쉴 새 없이 모든 일에 관여해야 했다. 이런점에서 그녀의 활동 분야는 간디의 활동 분야와 가장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간디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공연’을 했어야 했거니와, 게다가 후속적으로 생기는 일에 관해서는 그레이엄보다 통제럭을 더 가질 수 없는 처지였다. 분명히 그레이엄은 모든 현장에 참여하고자 했다. 그녀에게 있어 공연이란 삶 자체였고, 자신의 페르소나를 완전히 실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형식의 삶이 요구하는 긴장은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무용가로 나선 초기에 겪었던 우울증이 1940년대 후반에 재발했다. 이 시기는 그레이엄이 전례 없을 정도로 인생의 부침을 겪은 시기였다. 거의 30년 동안이나 가까운 사이로 일했던 호스트와 그레이엄이 급작스럽게 헤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p.518. [이 작품은]‘사회적 의미’를 강조한 초기의 유행 풍조와 마찬가지로 많은 무용 신참자들을 유혹하는 막다른 길이다. 마사 그레이엄의 최근작을 보면, 무용 분야가 파국적인 상황에 직면했음을 절감할 수 있다. …… 그레이엄은 신경증적 갈등만을 표현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데, 이것은 누군가와 소통하길 원하지 않고 그저 자신을 전시하고픈 욕구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녀가 근본적으로 예술가로서 실패했음을 말해준다.
같은 작품에 대해 「PM」의 헨리 사이먼은 “「죽음과 입구」는 소음과 분노로 가득찬……. 지루한 작품이다. 무슨 의미가 있기는 하겠지만, 나는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고 말했으며, “칙칙한 롱 스커트를 입은 여자들이 무미건조한 무대에서 역시 하품만 나오는 음악에 맞춰 걸어다니고 뜀뛰기한다” 고 경멸조로 말했다. 「디트로이트 뉴스」의 한 기자는 실망감을 숨기지 않았다.
p.523.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종이에 적는다. 어떤 책에서든 인상적인 구절이다 싶으면 바로 옮겨 적는다. 그리고 출처를 적어둔다. 이렇게 하면 실제 작업을 할 때 모든 과정에 대한 기록을 간직하고 있을 수 있다. 내 무용에 대한 메모는 모두 갖고 있다. 특별한 기호는 쓰지 않는다. 내 생각을 그냥 적어둘 뿐이고, 나는 내가 쓴 글과 동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여기저기에 설명이 있다.
p.524. “기억에 의존합니다. 내가 인생을 이해한 방식과 다른 사람들이 이해한 방식에서 많은 걸 얻지요. 우리가 읽고 마음 깊이 흡수한 것이 보석처럼 우리의 존재를 이루는 겁니다. ” 무용을 시작하는 것은 다양한 느낌으로 왔다. 그레이엄은 그것을 끔찍하다고, ‘거대한 고통’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녀는 작곡가 에드가 바레즈가 그녀 면전에서 했던 말을 반복해서 말하길 좋아했다. “모든 사람이 재능을 타고 나지만, 대부분은 겨우 몇 분 동안만 그 재능을 간직한다.”
p.531. 그 결정은 내 몸을 아프게 했다. …… 심신이 안정될 때까지 시골에 은거해야 했다. 누군가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마사, 당신은 신이 아니예요.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인간임을 인정해야 해요.”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살고 있던 사람한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었다. …… 결국 나는 사람들이 나한테 미안한 마음을 갖기를 원하지 않았다.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다면 춤추기를 바라지 않겠다. 적어도 춤을 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p.536. 20세기의 100년 동안 현대 예술을 형성한 다섯 예술가를 고른다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벨라 버르토크,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파블로 파카소 그리고 마사 그레이엄이라고 생각한다. 무용과 무대 공연에 관해서라면 20세기는 그녀의 시대였다. 그리고 다섯 명의 거목 중에서 그레이엄이 해당 예술 분야에 가장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표현 형식이나 기법, 내용, 시점 면에서 다른 어떤 예술가보다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9 마하트마 간디
p.546-547. 어른 나이에 결혼을 시키는 풍습이 만연한 사회에서 자란 간디는 카스투르바이와 두 사람의 나이가 13살일 때 결혼했다. 결혼 자체는 무리가 없었다. 간디의 아내는 남편만큼이나 억세고 엄격한 인물이었고, 결혼 생활은 반세기 이상 이어졌다. 하지만 아직 미성숙한 간디는 이 강요된 결합을 훗날 ‘조혼의 잔인한 풍습’이라고 부르며 많은 점에 대해 분개했다. 간디는 어린 아내의 몸을 영렬하게 탐했고, 자신의 음탕한 생각과 행위에 죄책감을 느꼈다. 특히 임종 적전의 아버지 곁을 떠나 임신 중이었던 아내와 성관계를 맺으려 했던 데서 갖게 된 도덕적 자책감은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더욱 커졌다. 간디는 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이런 자신의 행동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고, 얼마 후에 태어난 첫 아이의 죽음을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이라고 생각했다.
p.555. 힌두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어른이 된 시기는 인간이 활동의 중심에 서는 시기이다. 이런 의미에서 간디는 인도의 전형적인 가장이었다. 성공한 변호사로서 그는 윤택하게 살면서 안락한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고 유능한 직원도 많이 둘 수 있었다. (그는 공적 사안에 대해서는 수임료를 받지 않았다.) 그는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시간을 분 단위로 지켰고 자신이 관장하는 활동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신중하게 기록했다. 그는 나탈 인도 국민회의와 인도 교육협회에서 에소테릭 크리스천 유니온과 런던 채식주의자 협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체에 속해 있었다.
p.562. 간디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남아프리카에서 시도했던 방법을 인도에 알리고 싶었고, 어느 정도로 그 방법의 적용이 가능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동지들과 나는 우리의 봉사 목적과 실천 방법을 모두 전달할 수 있는 ‘사티아그라하 아쉬람(공동체)’이라는 이름을 택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은 추축국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간디는 원칙적으로 인도인이 기록상의 정부에 충성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영국에 대한 모든 불복종 운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저항을 중단하는 이런 결정에 대해 일부는 인도 상류 사회의 유약함을 나타내는 표지로 간주했다. 레밍턴 경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인도에 계속 머무는 것을 보증하는 담보물은 카스트 제도만큼이나 튼튼한 것이다. 온갖 부족과 종파, 원주민 간의 믿음과 신뢰의 부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영국은 인도에 정치적 양보를 하고 약간의 권력을 이양할 수밖에 없었다. 백만 명 이상의 인도인이 영국 깃발 아래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수만 명이 생명을 잃어야 했던 당시 상황에서는 반드시 필요하고 적절한 방침이었다.
p.567. 전기 작가 주디스 브라운은 이렇게 쓰고 있다.
간디의 아메다바드 운동은 미래의 투쟁 방법인 사티아그라하의 생존 능력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그가 어느 정도 통제력을 발휘하는 운동에서는 늘 볼 수 있었던 많은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처음부터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는다는 것, 투쟁의 중심부에는 신성한 맹세가 있다는 것, 참여자들은 엄격한 규율을 지키고 자기 수양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운동의 대의를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알린다는 것, 도덕적인 권위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관련자의 사고를 자연스럽게 압박한다는 것, 그리고 관련자들 모두의 체면을 깎지 않는 선에서 타협안을 마련한다는 것 등이다.
p.575. 에릭슨이 그의 간디 연구에서 강조한 것처럼, 종교적인혁신가란 자신의 개인적인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해답이 궁극적으로는 보다 넓은 공동체의 난국을 해결하는 데도 효과가 있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간디 내부의 갈등은 인도에 미만한 갈등, 더 나아가 많은 개발도상국에 잠재한 갈등에 반향하게 될 것이었다. 그가 몸소 짊어진 짐은 다른 사람들도 짊어질 수 있는 그런 종류였다. 에릭슨은 이 점을 좀 더 웅변적으로 표현했다. “어떤 천재들은 도대체 왜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진화론적이고 실존적인 저주를 스스로 짊어질 수가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왜 그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능가하는 신적 위대성을 그런 사람에게 기꺼이 부여하려고 하는 것일까?”
p.576. 아마도 간디의 가장 도전적인 사상은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 서양인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교회와 국가의 오랜 분리를 영예롭게 생각한다. 간디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많은 글을 통해서 이 두 영역, 서양인의 기준으로는 전혀 어울릴 성 싶지 않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불가능성을 역설했다. 한편으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있어 종교가 없는 정치란 우리가 피해야 하는 완전한 쓰레기나 다름 없다.”하지만 그는 실제적인 문제를 도외시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에는 별 관심이 없는 종교에 대해서도 그에 못지않은 거부감을 표명했다. “인생의 어느 부분도 종교와 떨어질 수 없으며 정치는 거의 모든 점에서 인도의 생명 있는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정치에 참여한다.” 그는 이 점을 좀더 신랄하게 말하기도 했다. “종교는 정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종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러나 아무런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p.590.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데 특장이 있는 사람이 이처럼 인간관계가 불안한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부터 시작해서 간디는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들과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이상할 정도로 어려워했다. 그는 부모를 존경했지만, 죄책감 말고는 부모나 다른 직계 가족에 대해 별다른 애착이 없었다. 비록 시인이자 철학자인 라지찬드라(앞서 말했듯이 두 사람이 모두 젊었을 때 사망했다)와 정치가 고칼레(간디에게 인도 정계 입문을 인도한 사람으로서 간디가 인도에 돌아온 직후에 사망했다)에게는 친밀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스승이라고 할 만한 사람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리고 소로와 톨스토이, 러스킨을 개인적으로 만난 일도 없었다.
p.600. 인도는 칼로 지배받고 있습니다. 나는 한 순간도 칼의 힘으로 인도를 지배할 수 있는 대영 제국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 것일까요? 노예 상태이지만 반역적인 인도와 존경받는 대영제국의 동반자인 인도 중에 영국의 슬픔을 공감하고 불행에 빠진 영국을 도와줄 인도는 어느 쪽이겠습니까? 자유 의지가 있는 인도인은 필요하다면 영국과 함께 힘을 합쳐 싸울 수 있습니다. 어떤 한 인종이나 한 사람을 착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 세계의 공동선을 위해 싸울 수 있을 것입니다.
p.606. 물론 간디와 같은 훌륭한 인물도 비난을 비껴갈 수는 없는 일이며,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자신의 추종자들을 고압적으로 대한 일이나 가족을 이상할 정도로 몰인정하게 대한 일, 그리고 일부 정치적 견해의 소박함 등에 덧붙여 새로운 비난이 가해졌다. 만년의 간디가 나체의 젊은 여자를 곁에 두고 잠을 자겠다고 고집을 피웠다는 비난이 그것이다. 간디는 이러한 사실 자체를 부인한 적은 없었다. 다만 그가 젊은 여자들을 성적으로 욕보였다거나 여자들이 억지로 늙은이 옆에서 잠을 자야 했다는 추측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행태는 간디의 괴팍함을 확고하게 드러낼 뿐 아니라, 간디가 종종 다른 사람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개인적인 괴벽과 취향을 만족시켰다는 사실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p.610. “나의 전문 분야는 행동이다.”- 마하트마 간디
p.611. 그렇다면 간디와 그레이엄은 아주 구체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육체로서 창조 활동을 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신체적인 외양, 그리고 자신들의 몸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그들의 창조 활동의 핵심이다. 그레이엄과 간디는 비록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딱히 매력적인 용모라 할 수는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풍모를 지녔고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공연(연설)에 매료되어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창조성의 조건
10 다양한 분야의 창조성
p.643-644. 1. 특정한 문제 풀이(주로 과학 문제 풀이). 예를 들어 브라운 운동을 다룬 아인슈타인의 초기 논문이 바로 이러한 활동에 속한다. 스트라빈스키가 고전 음악을 편곡하는 것처럼 예술 훈련 과정에서 부과되는 과제 수행도 같은 사례이다.
2. 일반적인 이론 체계 수립. 본래의 과제가 무엇이었든 간에, 아인슈타인과 피카소는 상대성 이론과 무의식 과정의 정신분석학 이론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3. 작품 창조. 예술가들은 기초 데생이나 단시 등 소규모의 작품과 벽화 오페라, 장편소설과 같은 대규모의 작품을 창조한다. 이들 작품은 창조자의 사상과 정서, 관념 등을 표현한 것이지만, 전반적으로 어떤 문제를 풀거나 혹은 하나의 이론 체계를 고안하는 시도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특정 장르에서 매우 독창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거나 아니면 새로운 장르를 만들려는 시도로 이해된다.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 엘리엇이 바로 이 범주에 들어간다. 그레이엄 역시 안무가로서 여기에 속한다.
4. 양식화된 공연. 무용이나 연극 같은 장르에서는 개인 창조자가 예술 형식을 구현하는 존재이다. 이 경우 ‘자기 색깔이 분명한’ 작품은 특정한 역사적 순간의 공연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다양한 방식으로 이런 양식화된 공연을 규정할 수 있지만, 혁신과 즉흥 공연 및 해석의 기회는 언제나 존재한다. 몸의 상태와 역사적 순간의 긴박성에 따라 공연의 성공 여부가 가려진다.
5. 대의를 위한 실천(실행). 정치나 종교 분야에서는 한 개인의 공적인 발언과 행동 역시 창조성을 발휘하는 영역이 된다. 간디가 품었던 사상은 탁월한 것일 수도 있고 제대로 정리가 안 된 산만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몸소 실천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추종자와 전 세상에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었거니와 바로 여기에 그의 창조성의 중심 요소가 있다. 양식화된 무용가나 극예술가와 달리 대의를 위한 실천가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일신의 안위와, 건강 그리고 생명까지 거는 모험을 한다. 클리포트 기어츠의 유명한 말을 빌면, 이것은 매우 ‘심오한 연극(deep play)’ 형식이라고 할 만하다.
p.645. 1. 활용되는 특정한 상징체계
2. 창조 활동의 성격
3. 창조적인 도약 과정의 특정 계기들
p.646.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는 과학 이회의 분야에도 확장해서 비유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 경우 다른 분야에도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존재하는 시기가 있음을 분명히 나타낼 수 있다. 18세기 후반 서양 고전 음악은 하나의 작곡 패러다임을 수용했으며, 오늘날의 영국 법정도 분쟁을 다루는 몇 가지 패러다임을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다.
p.646-647. 어쩌면 하나의 패러다임이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는 것은 새로운 접근 방법이 매우 빠른 속도로 폭넓게 수용될 수 있음을 예고하는 최적의 표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혁신적인 이론은 처음에는 의혹을 받았지만 물리학 공동체에서 신속하게 수용될 수 있었다. 반면 하나의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분야의 구심적인 특성은 젊은 세대가 곧바로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반하여 자신들의 업적을 낼 수 있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시자와 경쟁하는 수준에 이를 수 있음을 뜻한다. 아인슈타인이 겪었던 일은 기존의 확립된 분야에서 다른 패러다임 창시자가 겪었던 일과 같다. 그는 곧 자신의 이론을 쉽사리 터득하고 여기에 기반해 새로운 이론을 세웠던 젊은 과학자들에게 추월당했던 것이다.
p.652. 편집자와 비평가로서 엘리엇의 역할을 소설과 시를 비롯한 문학 장르를 장려하고 활성화 하는 데 있었다. 그처럼 존경받는 참여자가 중요한 평자로도 활동한 예는 별로 없다. (프로이트가 정신 분석학에서 이런 두 가지 역할을 했던 것이 또 다른 실례가 될 수 있다.) 엘리엇은 예상보다는 훨씬 관대한 마음으로 이런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정치적 ․ 시회적 입장과 관계 없이 문학적 우수성의 등급을 판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과거의 선배 문학인들에 대해서는 우사파괴적인 작업을 즐겁게 수행했다. 의식을 했건 안했건 그는 문학사를 다시 쓰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치를 더욱 높일 수 있었다.
p.657-659. 네 명의 예술가들 역시 상당 수준의 비동시성을 경험했다. 하지만 이런 부조화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주류 계층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학자와 교수의 길이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던 엘리엇이 비동시성을 야기하기 위해 가장 큰 무리수를 두어야 했다. 다소 이상한 성품에다 힘든 결혼 생활, 그리고 자신의 수입만으로 해외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처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절망적일 정도로 ‘비동시적인’ 상황에 직면했다. 이후로 이런 비동시성은 다소 약화되었는데 아마도 이는 그의 창조력의 쇠퇴를 반영한 것일 터이다. 그레이엄은 엘리엇과 반대 사례로 보인다. 그녀는 가족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고 여성으로 태어난 탓에 사회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힘든 상황에서 도전을 거듭하여 성격은 더욱 강해졌고(엘리엇은 이렇지 못했다), 덕분에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은 원래 처한 상황 때문에 생긴 것이든 여러 비동시성의 조건에서도 무용가로 대성할 수 있었다.
스트라빈스키와 피카소는 닮은 점도 있고 상반된 점도 있다. 스트라빈스키도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피카소도 아버지가 화가였지만, 피카소의 아버지는 화가로서 평범한 재능을 지녔을 뿐이다. 스트라빈스키는 안온한 부르주아의 삶에서 도망하고 싶어한 반면, 피카소는 좁은 시골구석에서 떠나고 싶어 했다. 두 사람 모두 일찍 성공을 거두었지만 (「불새」와「페트루슈카」, 그리고 청색 시대의 작품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훨씬 더 근본적인 혁신을 향해 나아갔다. 이런 노골적인 인습파괴적인 작품도 성공하기에 이르렀지만, 그들은 이후로도 비동시성의 조건을 계속 추구했다. 이런 모습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나 작품을 창조할 때나 한결 같았다.
간디는 이번에도 역시 복잡한 모습을 보인다. 인구통계상으로 보면 인도나 세계 시민으로서나 간디는 주위 환경과 어긋나는 인물이었다. 즉 비동시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게다가 매우 독특한 성품과 사상을 지녔기에 그는 언제나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이채를 띠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업적은 사회 성원들과 깊은 유대를 맺는 능력이 그에게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인도인 대다수를 대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그는 인도 사회 및 인류 전체와 동렬에 서면서도 뚜렷한 경계인의 위치, 즉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위치에 설 수 없었다. 어쩌면 이런 이원적인 역할이 비동시성의 형태로 비칠 수도 있다. 즉, 한 발을 평범한 사람들의 세상에 걸치고 있다는 점이 소속 사회에서 완전히 절연된 것보다 훨씬 변칙적인 모습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얘기다. 비동시성 연구자들은 태생적으로 주어진 비동시성의 조건뿐 아니라 그런 조건을 일부러 만들었을 여러 증거 자료를 제공한 이 사례 연구에서 무언가를 얻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창조적인 인물들은 어떤 식으로든 남들에 비해 튀어 보일 생각이 없는 보통 사람들과 무척 다르다. 하지만 이들의 관련 분야에서 이들 못지않게 야심은 컸지만 그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람들, 이를테면 의학의 벨헬름 플리스나 정신의학의 피에르 자네와 같은 대조 표준 그룹(control group) 과도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다룬 일곱 명의 인물들은 분명 다른 점이 있으며, 이들이 대변하는 비동시성의 정도나 유형이 다소나마 더욱 생산적이었다는 게 나의 직감이다. 이를 테면 프로이트의 사유는 너무 괴상한 면이 있었던 빌헬름 플리스의 이론이나 날카로운 면이 부족한데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피에르 자네의 이론보다 더욱 생산적이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비동시성과 생산성을 평가하는 설득력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좀더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로 남는다.
p.673. 우리는 현대 거장들은 마치 강력한 자석의 힘에 이끌리듯 젊은 시절에 모두 유럽과 북미의 주요도시로 이주했다. 그들은 이 책의 맨 앞에 인용한 미워시의 시에 나오는 ‘젊은이들’이었다. 이런 도시들에서 미래의 거장들은 취향이 비슷한 젊은이들을 만나고 공부 모임이나 예술 혹은 과학 회합을 결성하고 인습파괴적인 잡지를 발간하거나 공연을 기획하면서, 훗날의 창조적인 도약을 낳게 되는 지적 잉태 기간을 보냈다.

3. 내가 저자라면

하워드 가드너는 삼리학계의 연구자로서뿐만 아니라 리더십, 경영학에서도 이미 그 가치를 인정받아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 열정과 기질, 이 책은 어른들을 위한 입체적 위인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워드 가드너는 이 책에 앞서 1999년에 국내에 소개된 ‘비범성의 발견’에서도 버지니아 울프, 간디, 모차르트, 프로이드를 다루고 있다.
이책에서 그는 20세기 거장 7명,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파블로 피카소,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T. S. 엘리엇, 마사 그레이엄, 마하트마 간디의 일생을 그가 그동안 주창해온 다중지능 이론에 근거하여, 현대를 대표하는 창조적 거장들의 삶을 살펴보며, 그들의 창조성이 발아할 수 있었던 조건을 분석하고 있다.
또한 서로 다른 지능을 대표하는 대표성에 초점을 맞추어 분류하고 있다. 언어 지능과 논리 지능에서 천재성을 보인 프로이트와 공간지능과 신체지능이 높은 피카소는 어떤 방법으로 자신들의 지능을 활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750여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지만 속도감있게 읽히며 가드너가 그 자신이 읽고 싶어 하는 스타일의 책을 쓰고자 전문 용어보다는 서술을 중점으로 썼다‘고 말한 만큼 창조성과 그 발현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아쉬운점.
작가 자신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작가가 그 수많은 거성들 가운데서 선정한 그들의 창조성을 과연 제대로 읽어내고 있는가이다. 1965년 하버드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은 후 런던대학의 경제학과에서 1년간 수학한 그가 출간한 책들은 제목과 목차만 바꾸었을 뿐 창조성과 비범성들을 적당히 섞어 비빈 비빔밥처럼 보인다. 그 덕분에 그의 책은 출간되는 즉시 베스트셀러의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이 같은 종류의 책, 영웅 리더십, 유사 주제가 여러 권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저서 중 <20세기를 움직인 11인의 휴먼 파워>의 목차를 살펴보면
001. 리더십의 기본틀
002. 마거릿미드/다양한 문화의 관찰자로서 자신의문화를 교육시키다
003. J.로버트 오펜하이머/물리학의 가르침, 정치학의 교훈
004. 로버트메이나드허친스/미국에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도입한인물
005. 알프레드 P.슬론/미국의 기업
006. 조지 C.마셜/훌륭한 군인의 전형
007. 교황 요한 23세/교회정신의 재발견
008. 엘리너 루스벨트/평범함과 비범함
009. 마틴 루터 킹 2세/급변하는 환경 속의 리더십
010. 마거릿 대처/명확한 정체감
011. 미래를 내다보는 리더십/세계적 지도자의 세대
012.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는 리더십:장 모네와 마하트마 간디
013. 옮기고 나서/스토리의 창조와 실현
으로 구성 되어 되어 있다. 또 다른 저서, <비범성의 발견>의 목차를 살펴보면

1. 비범성의 과학을 향하여
비범하다는 것의 의미
비범성에 대한 상식적 이해를 넘어서서
비범성 연구의 방법
비범성의 구성 요소
비범성의 네 가지 유형
이 책의 방향
2. 인간의 발달 과정
두 사람의 위대한 아동 관찰자
유아기의 마음
유아기 이후의 마음: 상징의 사용자로서의 아동
마음에 대한 이론가로서의 아동
비범하면서도 평범한 다섯 살 아동의 마음
도제 교육: 전문가가 되는 전통적인 통로
학교에서의 전문가
능력 있는 성인
개인차
결론

3. 비범성의 발달 과정

비범한 지능: 전통적인 관점
비범한 지능: 새로운 관점
학문적인 조숙성
지능에 관한 몇 가지 질문
문화와 경험의 영향력
다섯 살의 특정 영역 신동들
예외적인 비범성
매일하는 다섯 가지의 경험
네 가지 유형의 전형적인 능력

4. 위대한 대가형: 모차르트의 경우

위대한 학습자로서의 모차르트
소박한 천재
신동
천재와 창조자
창조적 숙달의 종류들
말년의 모차르트
다른 사람들의 세상
대가로서의 모차르트

5. 위대한 창조자형: 프로이트의 경우

나일강의 원류
초년기
창조자의 특징
인생 후기의 프로이트
창작자로서의 프로이트
관심 분야와 영역
세 가지 교훈

6. 위대한 내관자형: 울프의 경우

내관에 대한 네 가지 접근
특이한 성장 배경
자신의 경험에 대한 집중
내관자들 가운데
창의성과 광기
예술가로서의 울프

7. 위대한 지도자형: 간디의 경우

생산적 저항과 파괴적 저항
창조자와 지도자
지도자의 특징
이야기와 '개발되지 않은' 마음
위대한 운동
실패 극복하기

8. 다양한 종류의 비범성

비범성의 점검
명성과 성공
정신적 비범성
도덕적 비범성
비범한 이탈자들
절정기 사회
몇 가지 질문

9. 비범성 연구의 교훈

비범성은 바람직한 것인가
대비되는 접근 방식: 일종의 공식인가, 분위기인가
세 가지 주요 요인들: 자기 성찰, 균형 잡기, 토대화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
미래에 나타날 비범성에 대한 예측
인간적 비범성

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대부분의 개발서가 그렇듯이 보편적 삶에서의 통찰이나 긍정적 마인드 보다는 그가 비범이나. 창조성,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 등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가드너의 교육이론과 저서들은 영재 교육기관에서 가드너의 인기는 특히 폭발적이다. 심리학을 주재료로 무기로 삼아 자칫하면 하루에도 수 백 권씩 출판되고 있는 자기 개발서를 보태는 우를 작가가 범하고 있는지 한편 우려되는 점이다.

다중이론도 좋았지만 <체인징 마인드>의 내용도 좋아서 가드너는 이책에서 사람의 마음은 결코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변하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겉보기에는 매우 갑작스럽고 직관적인 변화라 할지라도 그 배경에는 오랜 시간에 걸친 점진적이고도 능동적인 변화 과정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고, 그 변화 과정에는 그가 ‘일곱 가지 지렛대’라고 부르는 다양한 요소들이 작용을 하는데, 그 일곱 가지 지렛대는 우연히도 모두 영어의 알파벳 Re로 시작한다. 이성(Reason), 연구조사(Research), 동조(Resonance), 표상의 재구성(Representational Redeions), 자원과 보상(Resources and Rewards), 실제 사건들(Real World Events), 그리고 저항(Resistances). 마음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이 일곱 가지 지렛대를 적절히 활용하여 마음의 내용, 즉 각각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개념(concept)이나 이야기(stories), 이론(theories), 기술(skill) 등에 변화를 가져온다고 말하고 있다.


이번 학기에 사회심리학을 들으면서 에릭슨과 가드너에게 어느부분 매료된 나는 심리학의 대가인 그가 좀 더 본질 적인 것에 천착하였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파블로 피카소,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동의 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았고 끼워 넣기 정도로 보이는 마서 그레이엄,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대해서도 너무나 할 말이 많았지만 정리 할 수 없어서 무척이나 아쉽다. 곁에 두고 다시 한번 읽 어 볼 것이다.

♣ 2000년 존 구겐하임 펠로십을 수상했고, 2005년 포린폴리시지(誌) ‘세계 100대 지성’에 선정되었으며 월스트리트 저널이 지난 5일 발표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영 사상가 20인’의 2위에 하워드 가드너가 선정되었다.

♣ 특히 좋았던 구절
가드너가 언급한 10-10-10의 법칙, 10년의 숙성기간을 거치후에야 10년간 발휘하고, 그 다음 10년간 다른 분야로 확산한다는 인생 패턴, 창조성의 10년 규칙은 상당 부분 공감가는 부분이었다.

보통은 10년 간의 견습기간을 거쳐 중대한 혁신을 이뤄냈다. 이러한 도약은 대개 일련의 시험적인 단계를 거쳐 이루어지는 편이지만 일단 도약을 하게 되면 과거로부터 결정적인 단절을 이룬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프로이트의 프로젝트와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엘리엇의 황무지, 그레이엄의 크론티어, 간디의 아메다바드 파업을 결정적인 도약을 간주한다. 이어서 창조자는 자신의 혁신적인 도약과 타협을 한다. 혁신에의 열정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후속적인 혁신은 보다 폭이 넓고 종합적인 성격을 갖게 마련이다. 좀더 미묘한 방식으로, 그러니까 해당 분야의 과거에서 이루어진 성과 및 다른 사람들이 수행한 업적과 좀더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는 식으로 혁신을 감행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 피카소의 게르니카, 스타라빈스키의 결혼, 엘리엇의 4개의 사중주, 그레이엄의 애팔래치아의 봄, 간디의 소금 행진 등이 두 번째로 정점에 오른 도약이라 할 수 있다.

원숙한 전문가에게는 유능한 조언자가 없다고는 전혀 생각하기 어렵다.

이 책에서 다룬 인물들은 모두 경계에 존재하는 전율 혹은 몰입 체험을 하기 위해 반드시 비동시성의 조건을 의도적으로 추구했으며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은 왜 이런 비동시성의 과실을 경험하고 싶어 하지 않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도약의 시기에 얻는 인지적, 정서적인 도움
이상적인 상황에서는 두 가지 차원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무조건적인 지지로 격려하는 정서적인 차원이 있어야 하고, 혁신적인 도약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 본질에 관해 유용한 조언을 해 주는 인지적인 차원이 있어야 한다.

각각의 인물들은 훗날 파우스트적 계약을 맺었다. 파우스트 전설이란 창조적인 인물은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점에서 특별하지만 그런 재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를 치르거나 모종의 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통념의 가장 유명한 판본이다. 물론 이런 통념은 사소한 의미에서 사실이다.
악마와 재능을 또는 명성을 바꾸어야 하다니, 너무나 슬픈 현실로 비춰졌다.
다시 보는 6명의 그들
지그문트 프로이트-세상에 홀로 맞선 사람

정신분석학자인 에릭 에릭슨의 용어를 빌면, 프로이트의 20대는 일종의 '심리사회적 유예기간‘이었다. 이 기간에 그는 자신이 어느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결정하기 위해 다양한 직업과 생활방식을 시도했었다. 그런데 이제 프로이트는 앞으로의 학문 인생을 전부 걸어야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다.

한편 철학자이자 교육자인 존 듀이처럼 추종자들이 자기 휘하에 모이는 것은 허용하면서도 별다른 행동 지침을 내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혹은 정치 철학자인 칼 마르크스처럼 자기 사상에 기반한 운동을 이끌고자 했으나 결국 스스로 그 운동을 파괴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전혀 다른 길을 택했고 추종자들을 훨씬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융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명예롭지만 고통스러웠던 고립’에 관해 심정을 토로한 후에 이렇게 썼다. “고요한 확신이 내 마음에 들어차기 위해선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내게 응답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자네라네.” 프로이트는 아무 망설임없이 그의 조그만 모임에서 융을 가장 중요한 인물로 만들었으며, 1910년 새로 탄생한 국제정신분석학 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만만찮은 두 사람의 성격이 부딪칠 때가 되면, 그것은 분명 후회할 결정이었다.

* 프로이트의 이론의 핵심 개념은 억압(repression)이다. 좀더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면 방어 기제(depence mechanism)라고 하는데, 이는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표상(Vorstellung)들을 의식 아래로 억누르는 심리 과정을 일컫는다. 프로이트 자신도 이 개념의 중요성을 확언한 바 있다. “억압이라는 교의는 정신분석학 이론 전체가 서 있는 주춧돌이다.” 억악 개념은 프로이트적 세계관의 핵심이다. 우선, 의식화되지는 않았지만 의식의 표면으로 튀어나오려는 일군의 표상들이 있다고 가정할 필요가 있다. 검열 기제(censoring mechanism)는 의식에 닿기에 부적절한 표상들을 걸러내고 그것을 무의식 영역에 가두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전환 과정(conversion process)을 통해 그 불편한 표상들에 결부된 정서가 여러 종류의 증상으로 전환되는데, 이 중에는 말실수와 같은 무해한 증상도 있고 히스테리 발작과 같은 꽤 심각한 증상도 있다. 불편한 표상들이 전의식(前意識)에 닿거나 의식의 층위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변형되어야 한다. 만약 억압이 프로이트 이론 체계의 중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면, 꿈은 억압 과정을 이해하고 그 밖의 정신 생활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프로이트는 꿈의 힘을 발견한 것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꿈의 해석」(1899/1900)에서 탁월하고도 단호하게 종합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에 구축된 통찰과 연구 사례에 기초하여 하나의 총체적인 세계관을 성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영원한 아이
아인슈타인은 가장 야심적인 도전 앞에서 몸을 사리는 과학자들에 대한 경멸감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나는 나무 판자를 들고서는 제일 얇은 부분만 찾고 구멍 뚫기가 쉬운 곳에만 송곳을 들이대는 과학자들을 참기가 힘들다.”
넓게 보아 학자들이란 세계(물리 세계, 사회 세계, 정신 세계)의 현상을 기술하고 설명하는 과업을 맡은 사람들이다.
파블로 피카소 - 신동과 천재-피카소의 「인생」

창조자가 낯선 영역으로 나아가는 모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해당 영역의 경계를 넘어서는 모험을 할 때는 이런 행동에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는 인물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고 어쩌면 꼭 필요할 지도 모른다.
내가 나 자신을 반복해서 흉내낼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과거는 더 이상 내게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 나 자신을 베낄 바에야 차라리 다른 사람을 모방하겠다. 그러면 적어도 새로운 면을 추가할 수는 있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난 새로운 걸 발견하기를 좋아한다. 화가란 결국 무엇이겠는가? 다른 사람의 소장품에서 본 그림을 그려서 자신의 소장품으로 만들고 싶은 수집가가 아니겠는가. 시작은 이렇게 하더라도 여기서 색다른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예술가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백치(白痴)이다. 정치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심장을 뒤흔드는 정열적이나 행복한 사건에 민감한 사람이다. 그림은 집 따위를 꾸미는 수단이 아니다. 그림은 적을 공격하고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전쟁의 수단이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 음악가이자 정치가

그는 새로운 재주꾼을 발굴하는 데 기막힌 재주가 있는 인물이었고, 청중을 매혹시키고 놀라게 할 만한 작품을 고를 때도 실패가 거의 없었을 만큼 탁월한 감각의 소유자였다.

젊은 스트라빈스키는 디아길레프의 활동 모습에서 공동작업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교훈 두 가지를 배웠다. 하나는 마감 시한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술적 이상은 각기 다르면서 고집은 무척이나 센 사람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며 타협을 이끌어 내는 방법이었다.

공전의 성공을 거듭하는 가운데서 이례적인 실패를 맛보았다는 점은 꼭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아무리 창조성이 뛰어난 혁신가라 해도 길을 잘못 들어설 수가 잇는 법이며, 이들을 본래부터 오류 따위는 범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만 그 실패를 딛고 재기하는 방식이 보통 예술가와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점을 새삼 일깨우는 사실인 까닭이다.

스타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내가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약동하는 봄의 기운, 다시 태어나는 자연의 거침없는 기세였다.”

“ 나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내가 가진 기질과 재능이라면 차라리 소(小) 바흐로 살아가는 편이 나았다. 가끔 교회와 신을 위해 곡을 쓰면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아가는 삶 말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상에서 만난 온갖 어려움을 이겨냈고 견뎌냈다. 타락한 면이 없지 않은 출판업자와 음악 축제, 음반사, 홍보업계의 오랜 인습(물론 나 역시도 그런 인습에 져 있었지만)을 극복해 낸 것이다.” 스트라빈스키의 삶은 대중적인 이목과 논란의 중심에 선 저명한 음악가로서의 삶과 지성적이면서 부지런히 일하는 장인의 삶이 균형을 이루었다. 그 자신은 스스로를 특별한 경우에만 격렬한 디오니소tm의 세계에 들어가는, 기본적으로는 질서와 균형이라는 아폴로적 원리를 체현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T.S. 엘리엇 - 경계선에 위치한 거장

“파운드는 좋은 구절과 나쁜 구절이 함부로 뒤섞인 초고 뭉치를 한 편의 시로 만들었다.” 우호적이면서 솔직한 비판을 삼가지 않는 친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해 준 것이다.

젊은이들의 시가 대개 그렇듯 감정은 강렬했으나 명확한 표현에 담기지 못했고, 자기만 아는 언어로 쓰여 졌기에 독자들로서는 뜻을 알기가 어려웠다.

엘리엇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한결같은 경계인답게 그에겐 젊은 시절의 프로이트나 아인슈타인 혹은 피카소가 지녔던 대단한 자신감이 별로 없었다.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한 정서를 명확히 표현하는 일련의 객관 대상이나 상황, 사건인데, 해당 정서를 환기하려면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외부적인 상을 제시해야 한다.(객관적 상관물)

경계인이라는 느낌과 인생 전부를 걸고 경계성을 탐구하는 능력이 그에겐 있었다.

창조성이 뛰어난 인물들은 어느 정도는 세계 전체에 속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만 홀로 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양극을 오가는 모습이야말로 창조자의 생애에 긍정적인 비동시성과 부정적인 비동시성을 동시에 가능케 한 요인일 것이다.

마사 그레이엄 -무용계에 혁명을 몰고 온 여자

그녀는 자시를 복제하고 반복하는 진부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계속해서 관객을 놀라게 하면서 참신한 새 작품을 선보였다. 그녀는 언제나 위험을 감수할 태세가 되어 있었고, 가끔은 신랄한 비판에 의욕이 꺾이기는 했어도 다시 도전할 용기를 잃은 적이 없었다.

마하트마 간디 - 신념을 실천한 정치 지도자

간디의 아메다바드 운동은 미래의 투쟁 방법인 사티아그라하의 생존 능력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그가 어느 정도 통제력을 발휘하는 운동에서는 늘 볼 수 있었던 많은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처음부터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는다는 것, 투쟁의 중심부에는 신성한 맹세가 있다는 것, 참여자들은 엄격한 규율을 지키고 자기수양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운동의 대의를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알린다는 것, 도덕적인 권위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관려자의 사고를 자연스럽게 압박한다는 것, 그리고 관련자들 모두의 체면을 깍지 않는 선에서 타협안을 마련한다는 것 등이다.

그는 서양인의 기준으로는 전혀 어울릴성 싶지 않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불가능성을 역설했다. “나에게 있어 종교가 없는 정치란 우리가 피해야 하는 완전한 쓰레기나 다름없다.” 그는 실제적인 문제를 도외시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에는 별 관심이 없는 종교에 대헤서도 그에 못지않은 거부감을 표명했다. “인생의 어느 부분도 종교와 떨어질 수 없으며 정치는 거의 모든 점에서 인도의 생명 있는 존재에 여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정치에 참여한다... 종교는 정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종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러나 아무런 주저없이 말할 수 있다.”

사티아그라하는 두 세력이 그 내부에서 불화와 반목 상태에 놓여있는 공동체의 존재를 전제한다. 사티아그라하의 신봉자는 폭력과 고통 혹은 위협을 통해 서로 대결하는 대신, 몸소 통을 짊어짐으로써 상대방의 양식과 양심을 깨운다. 이를 통해 진리파지자는 상대방을 개심시키고 그들이 자진해서 동반자가 되기를 바르는 것이다. 사티아그라하는 정화의 형식이자 영혼의 일깨움이다.

“나의 전문 분야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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