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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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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일 16시 09분 등록
1.저자소개

불패의 명장, 난세의 영웅, 이순신은 1545년 1545년 4월 28일, 서울에서 부친 이정과 초계 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시조인 이돈수(李敦守)는 고려중엽 고종 때 신호위 중랑장(神虎衛 中郞將)의 벼슬을 지냈으며 그의 증조부인 이거(李據)는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한 후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이조 좌랑 등 청요직을 역임하면서 엄격한 탄핵과 간쟁을 서슴지 않아 ‘호랑이 장령’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처럼 이순신의 집안은 대대로 문신의 관직을 지냈으나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李百祿)은 기묘사화에 연루돼 고난을 겪었다.
이로 인해서 아버지 이정(李貞)은 벼슬에 뜻이 없이 평민으로 지냈다. ‘하급 무관직인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다고는 하지만,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초계 변씨(卞氏)이다.
.모친 초계 변씨의 꿈에서 시부가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 이 아이는 반드시 귀인이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고 하라”고 하여 그대로 명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문신집안 출신어었으나 어려서부터 전쟁놀이를 즐겼고 언제나 대장이 되어 동료를 포용하는 기풍이 있었다고 한다. 소년시절부터 말과 행동이 엄격하고 지혜와 용맹이 특출하였으므로 다른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학문과 서예까지도 실력을 겸비하였다.

28세때 무과별시에 응시하지만 말을 타고 달리면서 과녁에 활을 명중시키려는 순간에 말이 넘어지고, 이순신장군도 넘어져 왼쪽 다리의 골절상을 입으나 좌절하지 않고, 버드나무 껍질로 부러진 다리를 동여맨 채 다시 말고삐를 잡고 달렸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제힘으로 목적을 달성하려는 이순신장군의 늠름한 의지를 볼수 있다.
이순신장군은 32세 때야 비로소 무과에 등제한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관직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4년 뒤인 1576년 이순신은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이순신은 함경도에서 국경을 수비하며 북방의 오랑캐를 막아냈다. 그 뒤 정읍 현감이 된 이순신은 당시 좌의정 유성룡의 추천으로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순신은 부임하자마자 왜구의 침입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군대를 재정비하고, 거북선을 만들고, 군량미를 확보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이듬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은 원균, 이억기 등과 함께 옥포에 나가 적과 싸웠다. 첫 싸움인 옥포에서 적선 30여 척을 쳐부수고 크게 승리한 이순신은 사천에서 13척, 당포에서 20척, 당항포에서 100여 척을 쳐부수었다. 사천 싸움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한 이순신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거북선을 앞세워 '학익진'(학이 날개를 편 모양의 진법)이라는 뛰어난 진법으로 적선 70여 척을 격침 시켰다. 이것이 '한산도 대첩'이다. 부산 앞바다에서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는 등 계속된 싸움에서 모두 승리한 이순신은 바다를 완전히 장악하여 왜군의 식량 보급로를 막았다.
그 공으로 삼도 수군 통제사에 오른 이순신은 명나라와 왜군간에 회담이 열리는 동안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백성들을 돌보는 데 힘을 기울였다. 1597년 왜군이 다시 쳐들어온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은 왜구의 계략과 평소 그를 시기하던 원균의 모함으로 서울로 붙잡혀 갔다. 그때 정탁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이순신은 도 원수 권율 장군 밑에서 백의 종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해 삼도 수군 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왜군에게 패해 군사와 함선을 모두 잃자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했다.
그때 조선 수군은 군사 120명에 함선은 12척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명랑해전에서 지형을 이용하여 133척의 왜군 함대 가운데 31척을 쳐부수었다. 다시 바다를 장악한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과 함께 노량진 앞바다에 모여 있는 왜군을 공격하였다. 뱃머리에 나가 싸움을 독려하던 이순신은 승리를 눈앞에 두고 적의 총탄을 맞고 말았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까지 이르기를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숨겨서 군중을 놀라게 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끝까지 이 나라의 장군으로서 살았다.

그는 무인이었지만 난중일기를 비롯 시조, 한시 등 여러 작품을 남겨 그가 문인 집안 출신임을 느낄 수 있고 그의 글솜씨는 매우 탁월했다.
이순신은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9일 새벽 노량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까지 진영생활을 ‘난중일기’에 기록하였는데 막막한 바다 한 가운데서 한 장수가 짊어졌던 무거운 마음의 짐과 두려움과 나라를 향한 끝없는 충심과,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노모를 걱정하는 끝간데 없는 그의 애달픔이 사무치게 녹아있다.


2.내 마음속에 무찔러 들어온 그귀

충무공의 저작인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중에 쓴 7년간의 진중(陳中) 일기이다. 여기에는 전쟁 중 진영에 나가 업무를 본 것에 대한 기록이 가장 많고 전쟁상황 및 임금에게 장계를 올린 것, 또 각 관청에 공문을 발송한 것, 간혹 일기 사이에 적어 놓은 선인들의 명언, 또는 시를 짓거나 감회를 적은 내용들을 보면 그의 우국충정에 대한 염원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4

그에게는 오직 진중 생활이 곧 일상적인 생활무대 였다. 5

난중일기를 읽다보면 자주 눈에 띄는 대목이 있는데 드 내용들이 가슴에 종종 간절하게 와 닿는다.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을 자주 볼 수 있다. 5

맑았지만 바람이 세게 불었다.
흐렸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17

초6일 정유 맑았지만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초7일 무술 맑았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18

비가 크게 내려 윗사람 아랫사람 모두가 꽃비에 흠뻑 젖었다. 22

나라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23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39

왜장이 화살에 맞고 떨어졌다 그러자 모든 왜적이 한꺼번에 놀라 흩어졌다. 40

고성 등지로 가고자 했으나 우리 병사의 형세가 외롭고 약하기 때문에 울분을 느끼며 머물러 밤을 지냈다. 40

한꺼번에 쳐서 깨뜨리려고 비오듯 화살을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죽은 자는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41

자정무렵에 달빛을 타고 배를 몰아 사천 모사랑포에 이르니 동녘에 벌써 서광이 비쳤지만 새벽 안개가 사방에 끼어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42

서풍이 차갑게 부니, 나그네의 심사가 화평하지 않았다. 이날 밤 꿈자리도 몹시 어지러웠다. 43

새벽에 앉아 꿈을 생각하니 처음에는 나쁜 것 같았으나 도리어 좋은 것이었다. 43

급히 공격하여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다시 왕실을 재건하는 일이 바로 이 때에 달려 있다. …한 모퉁이의 외로운 신하가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애통해 하니 간담이 찢어지는 듯하다 44

배의 뜸 아래 웅크리고 앉아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 속에 치밀어 올라 마음이 어지럽다. 62

삼가 사모하는 마음 간절하여 담아두지 못하겠다. 75

글로 적기로 생각하면서도 배와 육지에서 매우 바쁘고 또한 쉴세가 없어서 잊어둔지 오래였다. 여기서부터 계속한다. 84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었으나 적을 토벌하느라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 한이 되겠다. 84

피란중에 임금의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통곡할 일이다.87

이날 저녁 달빛은 배에 가득차고 혼자 앉아 이리 저리 뒤척이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자려해도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닭이 울 즈음에야 선잠이 들었다. 88

몸이 몹시 불편하여 베개를 베고 누워 신음하던 중 ‘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늦추며 머무르는 것은 무슨 교묘한 술책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라를 위한 걱정이 많았던 차에 일마다 이러하니 더욱더 탄식이 일고 눈물에 잠겼다. 89

적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과 약탈을 일삼고 있으니 통분하고 통분하다. 종일 바람이 세게 불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90

원균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보내어 대군을 동요하게 했다.
우습고도 우습도다
가소롭다.
수사 원균이 음흉하게 속임수를 쓰는 것이 아주 형편이 없다.

종일 비가 내리니 긴 밤이었다. 99

비가 오다 개다 하였다.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그런데 흰머리카락 난 것을 어찌 싫어하겠는가.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102

계사년 7월 초1일 맑음 인종의 제삿날이다. 밤기운이 몹시 서늘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도 놓이지 않아 홀로 뜸 밑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일어난다. 110

남해현령이 또 와서 전하기를, “광양 순천이 이미 분탕질 당했다.”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으니 뼛속까지 아파와 말을 할 수 없었다. 113
이날 밤바다에 뜬 달은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빛인데, 서늘한 바람이 선뜻 불어온다. 113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울적하네/ 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 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닭이 벌써 울었구나. 116

새벽 꿈에 사내아이를 얻었다. 이는 포로로 잡혀간 사내 아이를 얻을 징조이다. 120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누워서 신음했다. 식은 땀이 때도 없이 흘러 옷을 적시어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 124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홀로 배의 뜸 아래에 앉았으니 온갖 회포가 다 일어난다. 125

나라 일이 다급한데/ 누가 곽리의 충성을 바치리오/ 서울을 떠난 것은 큰 계획 이루려 함인데/ 회복하는 것은 그대들에게 달렸네/ 관산의 달 아래 통곡하고/ 압록강 바람에 마음이 슬퍼지네/ 그래도 서로 동과 서로 다투겠는가/
이는 임금이 지은 ‘누가 곽자의나 이광필처럼 되겠는가’라는 시이다. 134

만 번 죽어도 한 삶을 돌아보지 않을 계책을 내고 보니 발분하는 마음 그지없네. 136

국가를 편안히 하고 종사를 안정시키는 일에 충성과 능력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그렇게 하리라 138

사직의 존엄한 신령에 힘입어 겨우 작은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초월하여 분에 넘친다. 장수의 직책을 지닌 몸이지만 세운 공은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못하는 입으로는 교서를 외우지만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138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어 살을 에듯이 추웠다. 각 배에서 옷을 갖춰 입지 못한 사람들이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추위에 떠는 소리는 차마 듣지를 못하겠다. 145

새벽 꿈에 한쪽 눈이 멈 말을 보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식사 후에 활터 정자에 올라서 활을 쏘았다. 광풍이 크게 일었다. 우조방장이 (어영담)이 왔는데 역적들의 소식을 들었다. 걱정스러움과 통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151

새벽부터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괴로웠다. 아침에 보성 군수가 와서 만났다. 밤새도록 앓았다.
통증이 극히 심하여 거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173

갑오년 5월 초1일 무인 맑음 아침 식사 후에 활터 정자의 방에 올라가니 날씨가 맑고 시원했다. 종일 땀이 비오듯이 흐르더니 좀 나아진 것 같았다.

16일 계사 흐리고 가랑비가 내렸다. 저녁에는 큰비가 내려 밤새도록 지붕이 새어 마른 데가 없었다. 각 배의 사람들이 거처하는데 고생스러울까 매우 걱정되었다. 177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와 어머니의 평안하심을 알았으나, 면의 병세는 중하다고 하였다. 몹시도 애타지만 어찌하랴. 영의정 유성룡이 죽었다는 부고가 순변사 있는곳에 왓다고 한다. 이는 필시 유정승을 질투하는 자들이 말을 만들어 훼방하려는 것이리라. 통분함을 이길 수 없었다. 이날 저녁에 마음이 몹시 어지러웠다. 홀로 빈 집에 있으니 마음을 스스로 걷잡을 수 없었다. 걱정이 더욱 심해져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유정승이 만일 돌아가셨다면 나랏일을 어찌할 것인가 190

비가 계속 내렸다.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떨까하고 염려하여 글자를 짚어 점을 치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 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어보니 ‘밤에 등불을 얻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다시 점치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무척 좋았다. 저녁 내내 비가 내리는데 홀로 앉아 있는 마음을 가눌 길 없었다. 191

비가 올것인가 개일 것인가를 점쳤더니 점은 ‘뱀이 독을 내뿜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앞으로 큰비가 내릴 것이니, 농사일이 염려된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191

밤에 꿈을 꾸니 머리를 풀고 곡을 했다. 이것은 매우 길한 조짐이라고 한다. 196

달빛이 비단결처럼 고와 바람도 파도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바다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했는데 밤이 깊어서야 그쳤다. 200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여 촛불을 밝힌채 뒤척였다. 이른 아침에 손을 씻고 조용히 앉아 아내의 병세를 점쳐보니 ‘중이 속세에 들어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다시 쳤더니 ‘의심이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매우 길하다. 또 병세가 나아질 것인지와 어떤 소식이 올 지를 점쳤더니 ‘귀양 당에서 친척을 만나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이 역시 오늘 중에 좋은 소식을 들을 조짐이었다. 206 –( 이순신은 자주 점을 쳤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으나 노모와 자주 아픈 아내, 아들의 병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새벽에 잠깐 비가 뿌리더니 늦게 개었다. 배 만들 목재를 운반해 왔다. 영의정이 ㅇ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고 나는 관을 벗었는데, 함께 민종각 집으로 가서 같이 이야기 하다가 깨었다. 이게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222 (“…의미 심장한 위험과 장애와, 도상에서 겪는 행운의 모티프는 갖가지 양태로 (꿈 속에서) 굴절되는데…우리의 꿈에는 아직까지도 시대를 초월한 위험, 괴물, 시련, 정체불명의 조력자, 그리고 우리에게 유익한 인물이 끊임없이 나타난다…현재의 모든 현상 뿐 아니라 그것을 이기기 위해 우리가 취할 행동의 단서들이 (꿈에) 굴절되고 있음을 본다.”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중에서… 이순신은 꿈을 많이 꾸었다. 굳이 캠벨의 해석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나의 경우만 보더라도 극도의 긴장과, 두려움, 놓지 못하는 현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과제는 항상 꿈으로 나타난다.)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만한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만한 기둥 같은 인재가 없으니 더욱이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 226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번싸워 다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이기고 지는 것이 반반이며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설이다. 226

무제시- 비바람 몰아치는 밤/ 맘이 초조하여 잠 못 이룰 적에/ 긴 한숨 거듭 짓노라니/ 눈물만 자구 줄줄 흐르네/ 배를 무린 몇해의 게책은 / 다만 성군을 속인 것이 되었네/ 산하는 오히려 부끄러운 빛 띠고/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231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또 팔순의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 239

궂은 비가 그치지 않아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다. 새벽꿈이 몹시 심란했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신지 소식을 듣지 못한지가 벌써 이레나 되니 애가 타고 걱정이 된다. 261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종일 퍼부었다.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만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얼굴에는 군사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분이다. 264

혼자 기대어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만한 재목 같은 존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271

희미한 달빛이 수루를 비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시를 읊었다. 281

우수사와 경상수사가 함께 와서 이별주를 같이 나누고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선수사(거이)와 작별하며 짧은 시 한 수를 써 주었다.
북쪽에 갔을 때에 같이 힘써 일 하더니/ 남쪽에 와서도 죽고 삶을 함께 했네/ 오늘밤 달빛 아래 한 잔 술 나누고 나면/ 내일은 우리 서로 헤어지겠구려 287

바다의 달빛이 대낮같고 물결빛은 비단결 같은데 혼자서 높은 수루에 기대어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어지러워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317

식은땀이 등을 적셔 옷 두겹이 다 젖고 이부자리도 젖었다. 몸이 불편하였다. 328
-(이순신은 왜 이리 자주 아팠을꼬 ! 마음이 아리다. 그 막막한 바다에서 매서운 바닷바람과 짠기 가득한 습한 기운 때문이었을까? 나라를 향한 충심과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애닯기 그지 없어서였을까?)

여러 장수들이 회의하고 그대로 들어가 앉아서 위로하는 술잔을 4순배 돌렸다. 경상수사는 술잔 돌리기가 한창일 때쯤 씨름을 시켰는데 낙안군수 임계형이 일등이었다. 밤이 깊도록 이들로 하여금 즐겁게 뛰놀게 한 것은 스스로만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병들의 노고를 풀어주고자 한 생각에서 였다. 340

새벽꿈에 어떤 사람이 멀리 화살을 쏘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이었다. 스스로 이것을 점쳐보니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가는 것이요,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은 머리 위에 있어야 할 것이 채인 것이니 이는 적의 괴수를 모조리 잡아 없앨 징조라 하겠다. 353

종일 바삐 노를 저어 밤 10시경에 어머님께 이르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곧 끊어지려 하시는 모습이 아침 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새도록 위안하며 기쁘게 해 드리면서 그 마음을 풀어 드렸다. 369

한산도가-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큰 칼 차고 깊은 시름할 때/ 어디선가 들리는 오랑캐/피리소리가 시름 더하네/정유년 중추 이순신 읊다. 383

정유년 4월 초1일 신유- 맑음 옥문을 나왔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었다. –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을 받고 파직되어 2월 26일 함거에 실려 서울로 압송되어 3월 4일 옥에 투옥되었다. 28일간의 옥고 끝에 석방되어 이날부터 다시 일기를 썼다. )

새벽꿈이 매우 심란하여 이루다 말할 수가 없었다. 덕이를 불러서 대강 이야기 하고 또 아들 울에게도 말했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미친듯 마음을 가눌수 없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387

종 순화가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였다.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388

일찍 길을 떠나며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389 – (원균의 모함으로 옥에 갖히고 옥고 끝에 옥문을 나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죽음을 만나는 이순신, 그러나 어머니의 영정을 지키지 조차 목하고 백의종군을 떠나야 하는 그의 비통함이 얼마나 컸을까? 그러니 어서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라 하지 않았겠는가!!)

아침에 둘째아들 울의 이름을 열로 고쳤다. 열은 음이 열悅이다. 싹이 처음 트거나 초목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뜻이니 글자의 뜻이 매우 아름답다. 394

비가 내렸다. 오늘은 어머니 생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어찌 견디랴. 닭이 울 때 일어나 앉아 눈물만 흘렸다. ,,,천리 밖에 멀리 와서 종군하여 어머니 장례도 못 모시고 곡하고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로 앙갚음을 당하는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하여도 짝이 없을 것이니 가슴이 찢어지는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394

꿈에 돌아가신 두 형님을 만났는데 서로 붙들고 우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 장사를 지내기 전에 천리 밖으로 떠나와 군무에 종사하고 있으니, 도대체 누가 일을 주관한단 말인가. 통곡을 어찌하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까지 따라 와서 근심하고 애달파함을 이렇게까지 한 것이니 비통함을 금치 못하겠다.,,,,아침 저녁으로 그립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피가 되건마는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가. 왜 어서 죽지 않는지…394-395

원균이 온갖 계략을 꾸미고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또한 운수로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 길을 연잇고 있으며, 그러면서 나를 헐뜯는 것이 날로 심하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396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이다 401

오늘은 칠석이다 슬프고 그리운 마음을 어찌 그칠 수 있겠는가. 꿈에 원균과 함께 모였는데 내가 원균의 윗자리에 앉아 음식상을 받을 때 원균이 즐거운 기색을 보이는 것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 없다. 420

새벽에 열과 변존서를 보낼 일로 앉아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일찍 아침식사를 하였는데 정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고 통곡하여 떠나 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저녁에 홀로 빈집에 앉아있으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심하여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421

정유년 8월 초2일 경신, 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3일 신유,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교서와 유서를 가지고 왔는데 그 내용은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늦게 조종이 원균이 다 말아먹은 살림을 가지고 이순신에게 다시 맡기게 되었다. )430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아 약속하기를 “오늘밤에는 반드시 적의 야습이 있을 것이니 미리 알아서 대비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균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대로 시행할 것이다” 하고 두번 세번 당부하고 헤어졌다. 밤 10시경에 왜적이 과연 야습을 해 와 탄환을 계속 쏘며 공격하였다. 내가 탄 배가 곧바로 앞장서서 지자포를 쏘니 강산이 온통 흔들렸다. 적의 무리들도 감히 범할 수 없음을 알고 네번이나 나왔다가 물러났다 하면서 화포만 쏘다가 자정이 지나서는 아주 물러갔다. 458

꿈이 이상했다. 임진년에 크게 승리할때의 꿈과 거의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알수 없었다. 459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다스리어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460

이른 아침에 별망군이 보고하기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지를 향해 온다”고 했다. 곧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백30여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달아날 꾀만 내고 있었다….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여 지자와 현자등 각종 총통을 마구쏘니탄환이 나가는 것이 마치 바람과 천둥처럼 맹렬하였다.,,,나는 부드럽게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고 하였다.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보니 먼 바다에 물러가 있고,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려 하니 적들이 물러간 것을 틈타 더 대어들 것 같아서 물러나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마믐 배 위에서 직접 안위를 불러서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 간다고 어디 가서 살것이냐? 고 말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격하였다. 또 김응함을 불러서 “너는 중군장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단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고 말하였다….비단옷을 입은 적장 마다시를 잡아 시체를 토막내어적에게 보이게 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꺽였다. 우리의 여러 배들은 적이 다시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쫓아 들어가 지지 현자 총통을 쏘니 소리가 산천을 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댔다. 그디어 적선 31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후퇴하여 달아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했다. ,,,이번 일은 실로 천행한 일이었다. 461-463 –(짝짝짝 드디어 영웅 이순신을 만나다. 몸은 많이 아팠고 마음은 주로 비통함과 애달픔이 컸고 나라와 어머니를 향한 충효는 다할길이 없고 무인이라 보기에는 섬세함과 감성이 지나치리 만큼 풍부한 이순싱에게서 무인으로서의 충무공을 만나게 되었다.
난중일기가 그의 사사로운 일기형식을 띄고 있어 그의 애잔함이 글속에 많이 묻어 있었으나 명랑대첩의 묘사는 시원시원하고 굵직 굵직하고 한 편의 대하드라마 혹은 대 서사시를 읽는듯 하다. 뛰어난 리더쉽 , 솔선수범 , 부하를 움직이는 리더쉽 )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로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는데 막내 아들 면이 끌어안는 듯한 형상이 보이더니 깨었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慟哭’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시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들 앞으로 무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469-470 (불쌍한 영웅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이 어찌 제정신 이었겠는가. 그럼에도 혼자 들끓는 가슴을 부여잡고 울부짖을 뿐 달려가지 못하고 공무를 봐야 하는 영웅이 안타깝다. )

어두울 무렵 코피를 한되 남짖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어찌 말로 다하리요 이제는 죽고 혼령이 되었으니 불효를 이리 저지를 줄을 어찌 알 것인가. 비통한 마음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하여 가눌 수가 없었다. 471

<부록 다른 문헌에 남은 이순신의 최후 기록 >
11월 18일에 남해, 부산의 여러 적들이 구원하러 나왔는데 선봉이 이미 노량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이 도독에게 이르기를,,,
“우리 군사가 앞뒤로 적을 맞게 되었으니 차라리 묘도로 물러가 진을 치고 있다가, 다시 장수들과 약속하여 결사전을 벌이는 것이 낫겠소 “ 라고 하니 도독이 그대로 따랐다. 이날 밤 삼경에 이순신이 배 위에서 꿇어앉아 하늘에 축원하기를 “오늘은 진실로 죽기로 결심했사오니 원컨대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11월 19일 적이 도독을 매우 급하게 포위하자 공이 곧바로 전진하여 그를 구하였다. 그리고 친히 시석을 무릎쓰고 손수 스스로 북을 치다가 갑자기 탄환을 맞아 쓰러졌는데 운명하기 직전에 휘하를 둘러보고 이르기를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숨겨서 군중을 놀라게 하지 말라 “고 하였다. 도독은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세번씩이나 배에 엎어져 넘어지면서 말하기를 “함께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남민들은 공의 죽음을 듣고 분주히 길거리에서 통곡하였고 시장에 있던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502-503


3.내가 저자라면...

난중일기를 읽고… 조선조 역사에서, 아니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을 들라면 나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단연코 이순신을 들겠다.
난중일기를 읽기 전 나는 이순신에 대해 아는바가 없었다. 그저 한민족 역사속의 하나의 영웅적 인물이겠거니 했다.

지금도 그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기 그지 없지만, 난중일기를 읽는 동안 그의 삶이 고스란히 내 일상속으로 스며 들어왔다. 실제로 그가 신열이 나고 식은땀이 나 아플때는 나도 미열이 나고 식은 땀이 흐르는듯 하였고, 그가 아파서 공무를 보지 못하는 날을 읽고 있으면 나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울음을 그치지 않을 때는 나도 덩달아 눈물을 삼켰고 , 무엇보다 그가 아들 면의 죽음 앞에서 울부짖을 때는 눈물이 앞을 가려서, 내 심장이 요동치고 들끓어대서 차마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오래도록 함께 울었다.
.
이렇게 임란 7년간에 걸쳐 쓴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필사본 국보 7호)는 눈물 없이는 읽어낼 수 없는 책이다. 이순신의 삶은 '비극적인 삶'이었다. 아니 어쩌면 극단적인 표현이겠다. ‘비극적인 삶’이었다라고 하기엔 지나침이 있다. 그의 삶이 어찌 비극만 있었겠는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도 있었을 것이고 찬란하리 만치 기쁜 날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에게는 ‘비극적인 위대함’이 있었다.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전권을 일관하여 반복되고 있는 듯한 모티브가 있다.
첫째는 출중한 무장이 간결하게 기록한 엄격한 진중, 생활 속의 일상과 나라를 근심하고 군주를 향한 충심.
둘째는 다정다감한 인간이 토로하는 회포와 가족애, 특히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짙게 뭍어나는 효심.
셋째는 임란 개전 초부터 충무공을 일종의 '강박관념' 처럼 괴롭혀 온 문제의 인물,경상좌수사 원균의 존재가 곧 그것이다.

이 원균이 이순신을 무고하여 모함의 덫에 걸린 이순신은 한산대첩의 영웅에서 하루아침에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 얼토당토 아니한 죄명으로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 ‘비극적 무죄'속에서 죽어가려는 그를 가까스로 구해낸 사람은 우의정 정탁이었다.
왜구의 재침이 임박한 정유년(1597년) 4월초 1일 "옥문 밖으로 나왔다"는 말로 다시 계속된 '난중일기'는 "울적한 마음 한층 이기기 어렵다"고 적혀 있다.

관직을 삭탈당하고 풀려난 이순신은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 도원수 밑에서 '백의종군'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이미 그의 나이 42세 때 녹둔도 사건으로 백의종군 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는 충무공 앞에는 보다 더 가슴 쓰라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부음이 그것이다.

출옥한지 열흘째 되는 4월11일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새벽에 꿈, 이 몹시 산란하여 마음이 매우 불안하다. 병드신 어머님을 생각하여 눈 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다. 그래서 종을 보내서 어머님의 안후를 알아 오게하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4월 13일,
"…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한다. 뛰쳐나가 뛰며 뒹구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야 이루 다 어찌 적으랴."

본시 '난중일기'는 그 첫 장부터 자나깨나 극진하게 어머니를 생각하는 이순신의 효
심이 도처에서 독자들의 가슴을 때린다.
예컨대, 임진 1592년 정월 초 1일,
"맑다.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과 아들 회가 와서 얘기했다. 다만 어머님을 떠나서 두 번이나 남도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길이 없다.…"

계사년(서기 1593년) 4월초 4일,
"맑음. 이날은 어머님 생신이건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술잔을 드리지 못하게 되니 평생 유감이다.…"

계사년 6월12일,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다. 흰 머리털이 싫어서가 아니라 다만 위로늙은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난중일기'는 이때부터 , 어머니의 죽음이후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이순신의 내면을 들춰내 보여 주고 있다.

"마을을 바라보며 찢어지는 아픔이야 어떻게 다 말하랴.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나는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 길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정유년 4월16일)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 앞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 같은 사정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어서 죽은 것만 같지 못하구나 …" (정유 4월19일).

이 해 7월, 이순신을 모함하여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던 원균이 왜군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앞바다에서 전멸됨으로써 일찍이 이충무공이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제서야 어리석은 조정은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한다. 충무공이 붙잡혀가면서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할 당시, 한산도에는 밖에 비축해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약 1만석이 있었으며 화약은 4천근, 총통은 각 선척에 적재한 것 말고도 3백자루나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옥에서 풀려나 다시 통제사가 되어 내려온 이순신에게는 모든 것이 소실되어버리고 고작 군사 1백20인과 병선 12척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정유년 9월, 충무공은 이 12척의 전선으로 1백 30여척이 몰려든 왜군과 싸워 기적과도 같은 명량대첩의 전과를 거두게 된다. 이 해전海戰 전야前夜의 '난중일기'는 특히 주목을 끈다.

이른 아침에 별망군이 보고하기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곶바로 진지를 향해 온다”고 했다. 곧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백30여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달아날 꾀만 내고 있었다….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여 지자와 현자등 각종 총통을 마구쏘니탄환이 나가는 것이 마치 바람과 천둥처럼 맹렬하였다.,,,나는 부드럽게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고 하였다.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보니 먼 바다에 물러가 있고,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려 하니 적들이 물러간 것을 틈타 더 대어들 것 같아서 물러나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비단옷을 입은 적장 '마다시'를 잡아 시체를 토막내어적에게 보이게 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꺽였다. 우리의 여러 배들은 적이 다시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쫓아 들어가 지지 현자 총통을 쏘니 소리가 산천을 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댔다. 드디어 적선 31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후퇴하여 달아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했다. ,,,이번 일은 실로 천행한 일이었다. 461-463 –

짝짝짝 이 대목을 읽다가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드디어 영웅 이순신을 만난 것 같았다. 몸은 많이 아팠고 마음은 주로 비통함과 애달픔이 컸고 나라와 어머니를 향한 충효는 다할길이 없고 무인이라 보기에는 섬세함과 감성이 지나치리 만큼 풍부한 이순신에게서 무인으로서의 충무공을, 장군으로서의 이순신을 마침내 만나는듯 하였다..
난중일기가 그의 사사로운 일기형식을 띄고 있어 그의 애잔함이 글속에 많이 묻어 있었으나 명랑대첩의 묘사는 시원시원하고 굵직 굵직하여 한 편의 대하드라마 혹은 대 서사시를 읽는듯 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리더쉽을 볼 수 있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장수, 적군앞에 먼저 나아가 군사의 사기를 잃지 않도록 독려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역할을 다하도록 만들어내고야 마는 리더쉽은 탁월성을 넘어 현대의 리더가 배워야하는 필수덕목이다.

내가 그를 ‘비극적 위대함을 지닌 영웅’이라 말하는 이유에는 그의 아들 면의 죽음이다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로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는데 막내 아들 면이 끌어안는 듯한 형상이 보이더니 깨었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慟哭’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시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들 앞으로 무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469-470

불쌍한 영웅,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이 어찌 제정신 이었겠는가. 그럼에도 혼자 들끓는 가슴을 부여잡고 울부짖을 뿐 달려가지 못하고 공무를 봐야 하는 영웅이 너무도 안타까워 차마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오래도록 울었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공무를 보고 일기를 쓴다.
다음날도 공무를 보고 일기를 쓰고 그 다음날도 공무를 보고 일기를 쓴다.
그리고는 마침내 코피를 한되 남짓 쏟고 그는 울고 또 울었다.

이 외에도 난중일기를 읽고 있으면 재미있는 사실들을 알게 된다. 일기를 쓰면서 날씨를 꼭 썼는데 어느날은 일기 내용이 없는 날에도 날씨만을 기록하기도 했다. 날씨를 묘사함에 있어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가 수군이기에 날씨의 변화에 누구보다도 긴장하게 됐을 것이다.
또 그는 꿈을 아주 많이 꾸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점도 많이 치는 사람이었다.
“의미 심장한 위험과 장애와, 도상에서 겪는 행운의 모티프는 갖가지 양태로 (꿈 속에서) 굴절되는데… 현재의 모든 현상 뿐 아니라 그것을 이기기 위해 우리가 취할 행동의 단서들이 (꿈에) 굴절되고 있음을 본다.”라고 말한 조셉캠벨의 해석을 굳이 덧붙이지 않더라도, 꿈은 의식과 무의식의 통로이며,나의 경우 극도의 긴장과, 두려움, 놓지 못하는 현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과제는 항상 꿈으로 나타남을 감안할 때, 그의 긴장과 성실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용맹하였으나 인간이기에 바다가 두려웠고, 바다를 뒤덮은 열 배가 넘는 수량의 왜선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는 나라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였으나 자신을 시기하는 무리들과 그 시기에 휩싸여 죽음까지 몰아갔던 임금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코 왜적이 임금께 갈 수 있도록 허락지 않겠다,고 그는 자신을 벨지도 모를 칼을 허리에 찼을 것이다.
자식으로서 어머님의 상을 치루지도 못하고 백의종군 하여야 했던 그의 삶이, 자식의 죽음을 먼저 보아야 만 했던 그의 비통하고 절규해야만 했던 삶이 평탄하고 아름다웠을리 없다.
망망대해의 수루에서 달빛이 찬연히 빛나고 비단결 같은 물결이 일 때 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그 세찬 바닷바람과 그 짠내내는 습한 기운에 어찌 아프지 않고 견딜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결국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워냈다.
그의 마음을 새삼 기리며, 노량을 향해 묵념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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