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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일 18시 57분 등록
난중일기(亂中日記)
이순신(李舜臣) 글/김혜니 역해/타임기획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이순신(李舜臣, 1545∼1597)

“戰方急 慎勿言我死 勿令警軍”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마라. 군사를 놀라게 해서는 안된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기 직전 장군이 남긴 마지막 말-

지금부터 이순신 장군의 대한민국 내 인기도를 한번 알아보도록 하자.

2007년 주간지 시사저널이 공무원, 기업경영자, 법조인, 언론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 각 분야 리더 1000명을 대상으로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자랑스러운 인물을 묻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이 조사에서 이순신 장군은 24.6%의 지지를 받아 28.2%의 지지를 받은 세종대왕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오피니언 리더 뿐만이 아니다. 2001년 한국 방송사의 하나인 SBS에서 일반 성인 4,500명 대상들을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을 뽑는 조사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3위를 기록했고, 2003년 8월 한국의 통신사 연합뉴스에서 전국 만 20세 이상 성인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 여론 조사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3위를 기록했다. 네티즌들을 대상으로한 조사에서도 이순신은 항상 선두주자에 서있는데, 월간 조선에서 2002년 1월 한달동안 네티즌 1만5천여명을 대상으로 한국역사상 최고의 인물을 묻는 조사에서도 이순신장군은 4위를 기록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어떠한가. 1982년 삼성생명이 전국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가장 많이 읽는 위인전을 조사한 결과 1위는 이순신 장군으로 조사가 되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2005년의 서점가 조사에서도 다른 위인들은 거의 사라지거나, 시대상에 맞는 새로운 위인으로 교체가 되었지만 이순신 장군관련 도서는 2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어린이와 청소년사이에서 여전히 베스트 셀러로 기록이 되고 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도서로, 영화로, 드라마로, CF로도 다시 부활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을 소설로 한 김훈의 <칼의 노래>는 2007년 12월 100만부를 돌파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인 고뇌를 담은 <칼의 노래>는 2001년 한국 출판 문화계의 권위있는 상인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까지 번역이 되어 전세계로 출간이 되고 있다. 저자인 김훈씨는 이 소설을 통해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선 지도자들이 가져야 할 윤리의식과 사회 안에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삶의 태도를 다루고 싶다고 말했다. 저자의 기획 의도대로 이 소설은 500여년전 이순신 장군의 고뇌를 이시대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슴에 그대로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노무현 전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여 그의 정치적 고난의 시기에 즐겨찾는 책으로 대중적으로 소개가 되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21세기 한국역사에 이순신 장군이 부활하게된 결정적 계기중에 하나는 2005년 한국의 공영방송 KBS에서 방영된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 때문이다. 대한민국 전국 시청률 30%를 기록한 이 드라마는 기존에 조명되었던 이순신 장군의 영웅적 업적보다는, 고민하고 좌절하는 가운데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인간적 모습을 그려 일반 국민들에게 호소력있게 접근해갔다. 특히 당시 한국의 상황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역사 교과서 왜곡, 일본 우익 지도층 인사의 연속된 망언 등으로 반일 감정이 확산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23전 23승 통쾌한 승리로 일본 함대를 격퇴시킨 이순신 장군의 드라마상의 생생한 모습은 국민들에게 대리 만족을 주기에 충분했다.

O 삶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32세가 되어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과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다.

1586년(선조 19) 사복시 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가 되었다. 이때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이후 1589년(선조 22) 선전관과 정읍(井邑)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竹島)로 옮긴 뒤, 장문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97년(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의 밑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했다.

그의 후임 원균은 7월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3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선조 31) 2월 고금도(古今島)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유품 가운데 《난중일기》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는 국보 제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충무공유물은 보물 제326호로, 명나라 신종이 무공을 기려 하사한 충무충렬사팔사품(통영충렬사팔사품)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도 그와 관련하여 많은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문학·영화 등의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O 집안배경

이순신은 덕수이씨 12대 손이다. 그의 시조인 이돈수(李敦守)는 고려중엽 고종 때 신호위 중랑장(神虎衛 中郞將)의 벼슬을 지냈으며 그 선조는 나타나지 않고 다만 1218년 거란의 침입 때 출정한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4대조 때 조선왕조의 개칭을 맞이하면서 문반으로서의 두각을 나타내 조선시대에 105명의 문과급제자와 정승 7명, 대제학 5명, 공신 4명, 청백리 2명을 낸 덕수이씨는 중종에서 영조 때까지의 3백년간이 가장 융성을 누린 시기로 나타나고 있다.

7대조인 이변(李邊)은 영중추부사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그의 증조부인 이거(李據)는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한 후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이조 좌랑 등 청요직을 역임하면서 엄격한 탄핵과 간쟁을 서슴지 않아 ‘호랑이 장령’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李百祿)은 기묘사화에 연루돼 고난을 겪었다. 이로 인해서 아버지 이정(李貞)은 벼슬에 뜻이 없이 평민으로 지냈다. 때문에 집안 형편은 더욱 기울어졌다. 하급 무관직인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다고는 하지만, 이는 정규관리가 아니라 임시직이나 명예직쯤으로 여겨진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초계 변씨(卞氏)이다. 이순신의 형제로는 희신(羲臣), 요신(堯臣), 순신(舜臣), 우신(禹臣) 등 4형제가 있다.

덕수이씨 종중에서는 이순신과 이율곡(栗谷) 그리고 이식(李植 : 1584 ~ 1647) 등 몇몇 집안을 명문으로 치고 있지만, 이순신과 이율곡은 제 4대 조상 때에 나누어져 이순신은 제 12대가 되고, 이율곡은 제 13대가 되어 두 사람의 촌수는 19촌 숙질간이 되며, 이율곡과 이식은 이율곡의 증조부 때에 서로 나누어져 이식은 제 15대가 되고, 이순신은 이식의 먼 증조 뻘이 된다.

O 난중일기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부터 시작하여 전쟁이 끝나는 순간을 앞에 두고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전사하기까지(1592. 1. 1~1598. 11. 17), 진중에서 있었던 7년간의 일을 기록한 일기이다.
《난중일기》는 두 가지의 전적이 있다. 하나는 이순신이 진중에서 친필로 기록한 초고본으로서 7책 205장이 전해지며 국보 제 76호로 지정되어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실려 있는 것인데 4권(권5~권7)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를 두고 특별히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난중일기》란 이름은 이순신이 전사한 후, 198년이 지난 1798년(정조19년)에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찬자의 편의상 이름이 붙여진 데에서 연유한다.
《이충무공전서》는 정조대왕의 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규장각(奎章閣) 문신(文臣)인 윤행임(尹行恁)과 예문관(藝文館) 검서관(檢書官) 유득공(柳得恭)이 1793년부터 3년간에 걸쳐 그의 모든 행적을 모으고 기록하였으며, 시·잡저(雜著)·장계(狀啓)·난중일기·부록 등의 총 1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난중일기》를 두고 초고본과 전서본 사이에는 내용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전서의 편찬자들이 충무공의 친필 초고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생략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초서본의 내용이 전서본에 있지 않은 부분도 있다.
반면 초고본에 비해 전서본 《난중일기》가 더 많은 기록을 가진 부분도 있다.
초고본 《난중일기》에는 임진년 1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의 기록과 을미년의 1년 및 무술년 10월 8일부터 12일까지의 기록이 전서본보다 더 빠져 있다. 이는 곧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할 당시에는 일기의 초고가 있다가 후에 없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의 개인적 전장체험뿐만 아니라 전쟁전의 상황과, 임진왜란 당시의 전황을 알 수 있는 객관적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다. 예를 들어 임진년의 일기를 간단히 살펴보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이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 전쟁준비에 충실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국가의 제삿날에도 업무에 임하는 열정과, 진지와 병영관리에 태만하거나 소홀한 부하관리를 문책·처벌하는 엄중함도 보인다. 거북선의 제작과정과 개전초기의 전황, 4차 출전(부산포해전)까지의 전투기록 등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부산포해전 이후 8차 출전까지의 해전상황과 전적, 가족과 친지들과 관련한 개인사, 관리들의 인사조치, 정치군사에 관한 서신교환 등이 수록되어 있다.

O 세계인들의 평가

■ 이순신은 서양 사학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 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원칙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의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영국인에게 Nelson,과 견줄 수 있는 해군제독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이순신이 동양의 위대한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영국 해군준장,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해를 다시 손 본 공로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

■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임진왜란 참전 왜군 장수,와키사카 야스하루>

■ 옛부터 장군으로서 묘법을 다한 자는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 해군 장군으로서 이를 살펴보면 동양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NELSON(1758-1805)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불행히도 이순신은 조선에 태어났기 때문에 서양에 전하지 못하고 있지만 임진왜란의 문헌을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장군이다. 서양에서 이에 필적할 자를 찾는 다면 네덜란드의 Ruyter Michiel(1607-1678) 이상이 되어야 한다. 넬슨과 같은 사람은 그 인격에 있어서도 도저히 어깨를 견줄 수가 없다. 장군(이순신)의 위대한 인격, 뛰어난 전략, 천재적 창의력, 외교적인 수완 등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절세의 명장으로, 자랑으로 삼는 바이다.<일본 해군준장, 사토 데쯔라로>

■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승전 축하연 답사에서-일본 해군제독, 토고 헤이하찌로>

■ "이순신의 죽음은 마치 넬슨의 죽음과 같다. 그는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이기었다"
<출처: "朝鮮役(조선역)- 일본 석학, 토쿠토미 테이이찌로>

■ 이순신은 청렴한 인물로, 그 통솔력과 전술능력으로 보나 충성심과 용기로 보나이러한 인물이 실재(實在)했다는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상적 군인이었다.영국의 넬슨 이전에 있어서의 이름난 장수이기도 하거니와 세계 역사상 이순신만한 사람이 없으며, 이 인물의 존재는 조선에 있어서까지도 잊혀지지 않겠지만, 도리어 일본 사람의 편에서 그에게 존경심이 계승되어, 명치유신 기간에 해군이 창설되기까지 하였으니, 그업적과 전술이 연구되어져야 한다. <역사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 고니시, 시마즈 등은 이순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싸우다가 또 패주했다. 이야말로 죽은 제갈(諸葛孔明)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쫓은 것이나 다름없다. 싸움이 그치자 그제서야 비로소 이순신의 죽음을 안 진린은 놀라고 배에 엎어지기 세 번이더니 탄식하기를 “실로 그만한 자 고금에 다시없다!”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그 충렬(忠烈). 조선왕조는 쇠망하기 시작하여 3 백년 뒤 일본에 합병 되었다. 하나, 호걸 이순신의 영명(英名)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이조사 대전)저자, 아오야 나기(靑柳南冥)>

■ 도고가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그 발가락 한 개에도 못 따라간다. 이순신에게 넬슨과 같은 거국적인 지원과 그 만큼의 풍부한 무기와 함선을 주었다면, 우리 일본은 하루 아침에 점령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단히 실례인 줄알지만, 한국인들은 이순신 장군을 성웅이라고 떠받들기만 할 뿐 그 분이 진정으로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것은 우리 일본인보다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일본 해군 전략 연구가, 가와다 고오( 川田功 )>


O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http://yisunsinkr.prkorea.com/index.htm,
http://www.e-sunshin.com/e-sunshin/main/main.jsp,
http://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임진년(壬辰年) 일기(1592년 1월 1일 ∼ 8월 27일)
- 마침내 걱정했던 왜적의 침략이 시작되다

5월 초1일(경오)
수군들이 일제히 본영 앞바다에 모였다. 날씨는 흐렸지만 비는 오지 않고 남풍만 세게 불었다. 진해루에 앉아서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과 흥양 현감 배홍립, 녹도 만호 정운 등을 불러 들였다. 이들은 모두 분격하여 자기 몸조차 잊어버리니 과연 의사義士라 할 만했다.(35P)

5월 29일(무술) 맑음
군관 나대용이 이 싸움에서 탄환을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했으나 중상은 아니었다.(38P)

8월 28일 맑음
새벽녘에 앉아 꿈을 생각해 보았다. 간밤에는 나쁜 꿈인듯 했으나 곰곰 생각해보니 도리어 좋은 꿈인 것 같았다.(46P)


계사년(癸巳年) 일기(1593년 2월 1일 ∼ 9월 14일)
-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다

2월 초10일 아침에 흐렸다가 맑게 갬
두 번이나 유인해 보았으나, 그들은 우리 수군을 무서워하는터라 나올 듯하다가도 다시 들어가 버렸다. 끝내 잡아 섬멸할 수가 없으니 매우 분한 일이었다.(52P)

2월 14일(기해) 맑음
큰 적을 앞에 두고 전략을 짤 때, 술을 지나치게 마셔 이 지경에 이르니 사람됨에 더 할 말이 없다.(53P)

2월 30일(을묘) 종일 비
뜸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57P)

5월 초4일(정사) 맑음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건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祝壽의 술잔을 드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으로 남을 것이다.(63P)

5월 13일(병인) 맑음
달빛은 배에 가득 차고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민다.(65P)

5월 16일(기사) 맑음
마음이 몹시 울적해서 베개를 베고 누워 가슴앓이를 했다. 왜냐 하면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늑장을 부리며 멈추고 있으니 어떤 꿍꿍이가 있는 듯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라를 위하여 걱정이 많은 터에 일이 이와 같으니 더욱 탄식이 나오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66P)

5월 30일(계미) 종일 비
정말 가소롭다. 명나라 관리가 보낸 불화살 1,530개를 나누지 않고 혼자 쓰려고 하다니 잔꾀가 아주 심하여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다.(72P)

6월 초3일(병술) 새벽에 맑더니 늦게 큰비가 내림
각 도의 군사가 많아야 5,000을 넘지 못하고 또 군량미도 거의 떨어져 간다고 했다. 적들의 방자함은 날로 더해 가는데, 일마다 이와 같으니 어찌 하잔 말인가?(74P)

6월 초8일(신묘) 잠깐 맑더니 바람이 또 고르지 못함
옥과玉果의 향소鄕所에서 지난해부터 수군을 잡아서 보내는 일에 성실하지 못해 도망하는 자가 거의 100여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번번이 거짓말로 대답하기에, 이 날 목을 베어 매달아서 여러 사람에게 보였다. 거센 바람이 그치지 않아 마음도 어지럽다.(75P)

7월 초1일(계축) 맑음
인종仁宗의 제삿날이다. 밤 기운이 몹시 차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도 놓이지 않아 홀로 배에 앉아 있노라니 온갖 회포가 일어난다.(83P)

7월 초9일(신유) 맑음
이 날 밤, 바다에 뜬 달은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빛인데, 서늘한 바람이 잠깐 불어 왔다. 홀로 뱃전에 앉아 있으려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85P)

7월 15일(정묘) 아주 맑음
가을 기운이 바다로 들어오니 나그네 회포가 어지럽다. 홀로 배 뜸 밑에 앉았노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이 뱃전에 비치니 정신이 맑아져서 잠 못 이루는 어느새 닭이 벌써 우는구나!(88P)

7월 25일(신사) 맑음
새벽녘 꿈에서 아들을 얻었다. 포로로 잡혀 갔던 군사들을 찾을 징조라고 풀이했다.(90P)

8월 13일(갑오)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홀로 배 위에 앉았노라니 회포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일었다.(94P)


갑오년(甲午年) 일기(1594년 1월 1일 ∼ 11월 27일)
- 당항포 싸움에서 승리하고 장문포의 왜군을 격파하다

1월 초1일(경진) 비가 퍼붓듯 내림
어머니를 모시고 한 살을 더하게 되니, 난리 중이나마 다행한 일어었다.(103P)

1월 11일(경인) 흐리나 비는 오지 않음
어머니를 뵈려니 아직 주무시고 계셨다. 큰 소리로 부르니 놀라 깨어 일어나셨으나 기운이 쇠진하시어 살아 계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았다. 오직 눈물이 흐를 뿐이다. 말씀하시는 것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으셨다.(104P)

1월 12일(신묘) 맑음
아침을 먹은 후에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하고 두세 번 타이르면서도 헤어지는 슬픔을 말하지 않으셨다.(104P)

1월 20일(기해) 맑기는 하나 큰바람이 붐
살을 에듯 추워서 여러 배에 헐벗은 사람들이 목을 움츠리고 추워서 떠는 소리를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106P)

2월 초5일(갑인) 맑음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겹겹이 있는 큰 고개로 내려가니 봉우리들은 빼어나게 아름답고 구불구불 동서로 뻗어 있었다. 봉우리 위엔 평탄한 곳이 있었는데, 거기에 좋은 자리를 잡으려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꿈에 봉우리 위에 한 미인이 혼자 앉아서 손짓했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111-112P)

2월 12일(신유) 맑음
“바다 위에서 해가 지나도록 나라를 위하여 애쓰는 것을 내 항상 잊지 않노라. 그러니 공운 세운 장사 壯士인데 아직 상을 받지 못한 자들을 적어 올리라”-선조의 밀지密旨-
위에서 밤낮으로 애쓰신다는 말을 들으니, 고마움과 그리움이 한이 없다.(114P)

5월 초9일(병술) 비
종일 빈 정자에 홀로 앉아 있으려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고 머릿 속이 매우 산란하였다. 무슨 말로 형언하랴. 가슴이 막막하여 취한 듯, 꿈꾸는 듯, 멍청이가 된 듯, 미친 듯 하였다.(128P)

6월 초4일(신해) 맑음
저녁에 겸사복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글 가운데, “수군 여러 장수들과 경상도의 여러 장수들이 화목하지 못하다 하니, 이제부터는 예전의 습관을 모두 고치도록 하라”라는 말씀이 있었다. 통탄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곧 원균이 술에 취해서 망령된 짓을 한 때문이었다.(132P)


6월 초5일(임자) 맑음
밤 10쯤 급창及唱 금산金山과 그 처자 3명이 모두 유행병으로 죽었다. 3년 동안이나 눈 앞에 두고 믿고 부리던 사람들이 하루저녁에 죽으니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132P)

7월 13일(기축) 계속 비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를 걱정하다가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니, ‘군왕 군왕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몹시 길한 괘다. 다시 짚었더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두 괘가 모두 길하였다.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또 유 정승에 대해 점쳤더니, ‘바다에서 배를 얻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다시 점쳤더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몹시 길한 괘였다.
비가 내릴지 갤지를 점쳐 보았더니, ‘뱀이 독기를 뿜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장차 큰 비가 내릴 모양이니 농사일이 근심스러웠다.(139P)

7월 21일(정유) 맑음
아들 회가 방자房子에게 곤장을 쳤다는 말을 들었다. 아들을 붙잡아 뜰에 데려다 놓고 꾸짖어 가르치되 때리지는 않았다.(141P)

8월 30일(을해) 맑고 바람도 없음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몹시 중하다고 했다. 지금쯤은 이미 생사가 결정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러하니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있으랴? 그러나 세 아들과 한 딸이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가슴 마음 아픈 일이었다.(147P)

9월 초1일(병자) 맑음
앉았다 누웠다 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촛불을 켜 놓고 뒤척거렸다. 이른 아침에 세수를 하고 조용히 앉아서 아내의 병세를 점을 쳤다. ‘중이 속세에 돌아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다시 쳤더니, 의심이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매우 길하였다. 또 병세가 나아질 것인지 어떤지를 점을 쳤다.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148P)

9월 20일(을미) 바람은 계속되나 비는 멎음
홀로 앉아서 간밤 꿈을 생각했다. 꿈에 바다 가운데 외딴 섬이 달려와 내 눈앞에 와서 주춤 섰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모두 놀라 사방으로 달아 났지만 나만은 혼자 서서 끝까지 그것을 지켜 봤다. 그 광경이 매우 장쾌했다. 이것은 왜적인 화친을 애걸하고 스스로 멸망할 징조라고 생각했다. 또 내가 준마 駿馬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으니, 이것은 내가 임금의 부르심을 받고 올라갈 징조라고 생각했다.(150-151P)

11월 15일(기축) 맑음
날씨가 봄날처럼 따뜻했다. 음양陰陽이 질서를 잃은 것 같으니 참으로 재변災變이다.
상주尙州에 사는 사촌누이의 편지를 가지고 그 아들 윤엽尹曄이 본영에 왔다. 누이의 편지를 보니 눈물이 뺨을 적셨다.(158-159P)


을미년(乙未年) 일기(1595년 1월 1일 ∼ 12월 18일)
- 다가 올 싸움에 대비하다

5월 초4일(병자) 맑음
오늘은 어머니의 생신이다. 직접 잔을 올리지 못하고 먼 바다에 홀로 앉아 있으니 가슴 속에 품은 생각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으랴!(177P)

5월 29일(신축)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음
사직社稷의 위엄과 영령英靈의 도움으로 겨우 조그만 공을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가 분에 넘쳤다.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서 티끌만큼도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군사를 거느리기에는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을 따름이다.(179P)

7월 초7일(무인)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음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내린 유지를 보니 놀랍고 황송함을 이길 수 없었다. 김응서金應瑞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스스로 허물을 뉘우치고 힘쓴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가? 만일 쓸개가 있다면 반드시 자결이라도 할 일이다.(185-186P)

11월 15일(제미) 맑음
아버님의 제삿날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홀로 앉아 아버지를 그려 보노라니 떠오르는 온갖 회포를 막을 길이 없었다.(200P)


병신년(丙申年) 일기(1596년 1월 1일 ∼ 10월 11일)
- 왜군의 전략에 큰 차질을 주다

1월 초10일(정축) 맑았느나 서풍이 거세게 붐
이른 아침에 적이 다시 나타날지 여부를 점쳤다.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다시 또 점쳤더니 ’임금을 보고 모두들 기쁘하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209P)

2월 14일(신해) 맑음
밤바다 위에 떠오른 달은 대낮처럼 밝고 물결 위에 비친 달빛은 비단결 같은데, 혼자서 높은 수루 위에 기대어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어수선하여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215P)

3월 24일(신묘) 맑음
어두워지자 매우 피곤하고 수시로 식은 땀이 흐르니 이는 분명 비가 올 징조였다.(222P)

4월 19일(을묘) 맑음
이 날 아침에 남녀문에게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기쁘기 한량없었으나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소문은 전부터 퍼져 있었으나 아직 확실한 기별은 오지 않았다.(224P)

5월 18일(갑신) 비는 갰으나 바다에 안개는 걷히지 않음
저녁에 탐후선이 돌아왔는데, 어머니께서 안녕하시기는 하나 전처럼 식사를 못한다고 하니 걱정스럽고 눈물이 핑 돌았다.(228P)

7월 19일(을해) 맑음
새벽에 꿈을 꾸니 어떤 한 사람은 화살을 멀리 쏘고, 또 한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이었다. 내 스스로 점을 쳐보니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의 무리가 멀리 도망간다는 것이요, 또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은 머리 위에 있어야 할 갓을 발로 차서 부수었으니, 이는 적의 괴수를 모두 섬멸할 조짐이었다.(234P)

8월 초10일(갑술) 맑음
새벽에 과거장을 열었다. 모두 합하여 각각 면은 55보, 봉은 35보, 해는 30보, 회는 35보, 완은 55보를 쏘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모두 합격하였다.(240P)

8월 12일(병자) 맑음
하루 종일 노를 빨리 저어 밤 10시쯤 어머니께서 계신 곳에 당도하였다. 백발이 부스스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기운이 흐려서 하루하루를 지탱하시기도 어려운 듯했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서 밤새 어머니의 마음을 위안하면서 기쁘게 해 드렸다.(241P)

10월 초7일(경오) 맑고 따스함
아침 일찍 어머니를 위하여 수연壽宴을 베풀면서 하루 종일 즐겁게 보냈다. 매우 다행스러웠다.(246P)


정유년(丁酉年) 일기(1597년 4월 1일 ∼ 12월 30일)
- 도원수 권율의 막하로 백의종군하다

4월 13일(계유) 맑음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음訃音을 전했다. 뛰어나가 가슴을 치면서 뛰고 뒹구니 하늘의 해도 캄캄하였다. 즉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이미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는 애통함을 어찌 다 기록하랴!(뒷날 대략 적었다) (253P)

4월 16일(병자) 궃은 비
마을을 바라보고 통곡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야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으랴.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 길이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253P)

4월 19일(기묘) 맑음
일찍 길에 오르면서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리오. 천지간에 어찌 나 같은 일이 또 있을 것인가. 일찍 죽는 것만 못하구나.(254P)

5월 초5일(을미) 맑음
이 날은 단오절端午節인데, 멀리 천리 밖에 종군하여 어머니에 대한 예절을 드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곡하고 우는 것조차 맘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니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보응報應을 당하는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하여 둘도 없을 것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다만 때를 잘못 만난 것을 한탄할 뿐이다.(255-256P)

5월 12일(임인) 맑음
신흥수가 와서 원균의 점을 쳤는데, 첫 괘가 수뢰둔 水雷屯인데 천풍구 天風姤로 변하였다. 이 점괘는 본체를 이기는 것이라 크게 흉하다고 했다.(257P)

5월 21일(신해) 맑음
나라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은 것에 따라서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그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 올 수 있다는 것인가.(258P)

7월 초7일(병신) 맑음
오늘은 칠석날이다. 슬프고 그리운 마음 어찌 다 표현할 수 있는가? 꿈에 원균과 한자리에 있는데, 내가 원균 위에 앉아서 음식상을 받자 원균이 즐거운 기색을 보이는 것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었다.(266P)

7월 초9일(무술) 맑음
달빛이 대낮 같아 어머니 그리는 슬픔으로 밤 깊도록 울면서 잠들지 못했다.(267P)

9월 15일(계묘) 맑음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말하기를, “병법에 이르기를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고 했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도 두렵게 할 수가 있다’고 했다. 이 말들은 모두 지금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날에는 즉시 군율에 의해서 다스려 조금도 용서치 않으리라”고 거듭 엄중히 말했다. 이 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지시하기를, “이렇게 하면 이길 것이요, 이렇게 하면 질 것이다” 했다.(280P)

9월 16일(갑진) 맑음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안위를 불러 “안위야! 네가 군법軍法에 죽고 싶으냐?”하고, 다시 불러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가면 살 듯 싶으냐?” 외쳤더니 안위는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진하여 들어갔다. 나는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해 있기만 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수 있겠느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형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고 외쳤다.(281P)

10월 14일(신미) 맑음
저녁에 천안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집에서 온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움직이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겉봉을 대강 뜯고 둘째 아들 열의 글씨를 보니, 겉에 ‘통곡’이라는 두 자가 써 있었다. 면이 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것을 예감하고 간담이 서늘하여 목 놓아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한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이것은 이치가 잘못된 것이다. 천지가 어둡고 저 태양이 빛을 잃는구나! 슬프다, 내 어린 자식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상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는데 하늘이 너를 왜 지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가? 내가 죄를 지어서 그 화가 네 몸에까지 미친 것이냐? 이제 장차 내가 목숨을 부지한들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간단 말이냐? 차라리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구나. 네 형과 네 누이와 너의 어머니도 또한 의지할 곳이 없어졌으니, 아직 목숨은 남아 있어도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있을 뿐이로다. 오직 통곡할 뿐이로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처럼 길구나.(288P)

10월 16일(계유) 맑음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인데도 나는 마음 놓고 울어 보지도 못했다.(288P)

12월 초5일(신유) 맑음
도원수의 군관이 유지諭指를 가지고 왔는데, “어제 선전관 편에 들으니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상제의 예법만 따르고 방편方便을 쫓지 않아 여러 장수들이 민망히 여긴다 하니, 사정私情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국가의 일이 한창 바쁘고, 또 옛 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가 용맹이 없으면 효자가 아니라 했고, 전쟁에 나가서 용맹스럽다는 것은 소찬素饌을 먹어 기력이 약한 자로서는 안 되는 일이다. 예기禮記에도 경經과 권權이 있다고 해서 꼭 원칙대로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니, 경卿은 내 뜻을 깊이 생각하여 소찬 먹는 일을 그치고 권도權道를 쫓아 나라를 구하라” 하였다.(295P)


무술년(戊戌年) 일기(1598년 1월 1일 ∼ 11월 17일)
- 노량 해전에서 순국하다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일반 범주에 속하는 책이 아닌 한 개인이자, 민족의 영웅의 가장 사사로운 영역이라 부를만한 일기이다. 그것도 일생활의 일기가 아닌 전쟁 중에 쓴 일기라고 해서 <난중일기亂中日記>라 부른다. 본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가지 궁금한 점이 떠오른다. 이 글이 전쟁 중의 일기라면 과연 이순신 장군은 평상시에도 일기를 썼을까? 고개가 조금 갸우뚱해진다. 하지만 난중일기를 다 읽고 난 후 느껴지는 이순신장군의 성품이나 성격, 그리고 습관, 생각 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썼을 듯 싶다. 다만 전쟁 중의 기록서라는 가치를 지니는 난중일기와는 달리 개인적 내용이 많이 들어간 일기는 공개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문중에서 보관하거나 아니면 유실된 것 아닐까?...

학생 시절에 접한 이순신 장군은 23전 23승의 패배를 모르는 세계적 장군이자 강직하며 불의를 못참고 진정 무관으로 타고난 생애를 훌륭히 살다간 민족적 영웅이었다. 또한 원균을 포함한 여러 시기집단의 모함에 의해 거의 죽음직전까지 갔다가도 백의 종군하라는 왕의 명령에 복종하고 다시 오뚜기처럼 꿋꿋이 일어나 당시 조선을 왜적의 침입에서 온 몸으로 구해내고 장렬히 전사한 마치 영웅 드라마의 주인공 같은 인물이었다. 전혀 실화 같지 않은 삶을 살다간 영웅, 그가 바로 우리 마음 속에 각인되어 있던 이순신이였다.

작년에 처음으로 이 책 <난중일기>를 온전히 읽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정말 재미없었다. 왜 학교에서 <난중일기>를 제대로 안 가르치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단 가장 부각되어야 할 전쟁씬이 그냥 넘어가거나 있다 하더라도 아주 간략하게 되어 있어 읽는 묘미가 없었다. 한마디로 시시했다. 또한 전화번호부를 보는 것처럼 수많은 실명들이 거론되고 아주 많은 회의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나 제대로 속시원히 그 내용을 언급하지도 않는다. 그냥 ‘...했다’ 이런 식이니 재미 있을 리가 없었다. 또 왜 그리 어려운 옛단어들이 많은지 사전을 찾아가며 보지 않고는 쉽게 내용이해도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몇 장 넘기다 보면 잠들기 일쑤이고 결국에는 한달 남짓 해서 책을 다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중일기>를 읽으며 새롭게 알게된 사실들이 무척 흥미로웠다. 또한 민족적 영웅 이순신에 대한 인간적 면모를 알게 되어 불굴의 이미지로만 각인되어 있던 가슴 속의 이순신을 꺼내고 보다 인간적이며 뜨겁고 애처롭기까지 한 이순신을 내 가슴 속에 다시 담아둘 수 있게 된 점은 내 스스로에게도 큰 수확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이번 <난중일기>는 2번째 읽게 되었는데, 다음에 읽을 <칼의 노래>가 더욱 궁금해졌다. 그래서 사실 <칼의 노래>를 먼저 읽었다. 다음 북리뷰에 자세히 쓰겠지만 눈물 없이 보기 어려운 내용이 많았다. 이순신의 눈물에 그리고 백성들의 눈물에 같이 눈물 흘렸다. 가슴이 쓰렸고 또 많이 아팠다.

<난중일기>를 읽으며 새롭게 알게된 이순신의 면모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신음하는 이순신.
일기 도중 병에도 잘 걸리고 한번 아프면 며칠을 고생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또한 식은 땀을 흘리며 신음에 잠 못들기도 하며, 종의 도움으로 잠을 청하는 모습도 나온다. 내가 생각할 때 이러한 원인은 1592년 5월 29일에 있었던 사천전투에서 적의 총탄에 맞은 것에 대한 후유증 때문으로 보여진다. 당시 왼쪽 어깨 관통상을 입었는데 치료를 하긴 했지만 전시중이라 꾸준하며 확실한 치료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로 인해 후유증이 있었으며 전투에 대한 스트레스와 겹쳐 항상 좋지 않은 몸상태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난중일기가 아닌 계사년(1593년) 3월 22일 이후에 쓴 한 편지에서 “탄환 맞은 구멍이 헐어 문드러져 고름이 흘러나와 아직도 옷을 입지 못했다”며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연일 밤마다 씻어도 아직 차도가 없고, 여러 날을 치료했어도 아직 신속하게 진군을 하지 못하게 됐으니 근심스러울 따름이다”라며 애끓는 심정을 진솔하게 전하는 내용을 보아 알 수 있다.

둘째, 기상청장의 자격을 갖춘 이순신
<난중일기>에 보면 매일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날씨다. 맑음에서부터 시작하여 비, 바람, 구름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 날들이 많다. 왜 일까, 생각해 보았다. 이순신 장군은 해군의 장이었다. 당연히 해상전을 해야만 했고, 해상전에서 중요한 것은 날씨와 바람 그리고 바다의 움직임이였을 것이다. 즉 모든 전투를 하기위해 고려해야할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항상 날씨를 주목했던 것이다. 게다가 ‘일식이 일어날 때인데 일어나지 않았다’ 와 같은 일기의 내용은 보다 더 전문적으로 기상을 파악하고 있던 것으로 보여진다. 23전 23승의 전적이 이러한 기초적 조사와 대비에서 시작된 것으로 파악된다.

셋째, 자나깨나 회의, 이야기하는 이순신
<난중일기>안에는 수 많은 회의와 이야기를 하는 이순신의 모습이 나온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누구를 만나 이야기하고 회의하는 식이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했을까? 살아가는 이야기? 재테크? 나라 안팎 이야기? 조정의 움직임? 자식 이야기? 여자 이야기? 전시 중이라 당연히 왜군의 움직임, 정보 그리고 조선 수군의 대비상황, 군량, 전선 구축 상황 등 전쟁에 관련된 이야기 였을 것이다. 하루하루 상황을 챙기며 대비하고 또 대비하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고로 이순신은 직관에 의한 판단을 내리는 장수가 아니라 수많은 정보들을 듣고 조합한 후 숙고하고 또 숙고하며 결론을 내리는 신중한 장군이였으리라. 결론에 이르기까지 고뇌할 그의 모습이 바로 이 시에 나와 있는 그대로이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넷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순신
점치는 모습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중간중간에 글자점을 치는 그의 모습이 나온다. 점괘에 따라 기뻐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그의 모습은 그래서 너무나 인간적이다. 어느 누가 이순신이 점괘에 따라 일희일비했으리라 생각이나 했을까. 또한 꿈꾸는 모습 또한 인간적이다. 꿈을 꾸고 난 후 그 내용을 일기에 기재하며 해몽을 통해 기뻐하는 모습은 역시나 점 치는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경리까지 겸하고 있는 이순신의 모습도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우수사가 군량 20섬을 꾸어 갔다’란 내용을 보게 되면 大삼도수군통제사가 군량미까지 계산하고 있어 상당히 꼼꼼하거나 나쁘게 말하자면 쪼잔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전쟁 중 수군을 먹이기 위한 식량에 그만큼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수군들을 이끌고 어떻게 전쟁을 할 것인가. 자나깨나 부하들에 대해서도 신경을 쏟고 있는 이순신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인간적이다.

그 외,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글 잘쓰는(장계도 직접 쓴다) 이순신. 효자 이순신. 종의 죽음에도 매우 아쉬워하는 이순신. 벼슬에 초탈한 이순신 등등 새롭게 알 수 있었던 그의 모습은 영웅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적이기 때문에 더욱 가까이 느껴질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아쉬운 죽음을 맞이한 지 500년이 넘었다. 아직도 그는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그가 없었더라면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 때 어떻게 되었을까. 명나라와 왜구에 의해 반토막 나지 않았을까? 생각만해도 아찔하지 않은가. 그렇게 되었더라면 그 후의 역사는 더욱 더 굴욕적인 역사가 되지 않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삶을 위해 대신 맞이한 역사적 죽음이 되는 것이리라. 당시 그의 죽음에 대한 묘사가 더욱 가슴을 시리게 한다.


이순신의 죽음을 들은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는 각 진영이 연이어 통곡하며 마치 자기 어버이를 잃은 듯했다. 영구가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이 곳곳에 제물을 차려 놓았다가 상여를 붙잡고 통곡하며 ‘공께서 우리를 살리셨는데 지금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신단 말입니까?’ 이렇게 울부짖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모여든 군중으로 길이 막혀 상여는 가지 못하게 되고 길 가는 사람들도 눈물을 뿌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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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3 12:27:33 *.36.210.11
하나, 정말 대단한 실례를 함부로 범하고 있음을 일본인 해군 전략 연구가 가와다 고오는 아는 걸까?

이순신의 업적은 미처 다 몰라도 누구나 다 알고 애송하는 는 詩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우리는 신화적 전략과 성공적 위업 때문에만 이순신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일본인 그는 아는 걸까? 세계적 가장 뛰어난 해군 제독과 견주어 인물 이순신이 우리 민족이라는 것을 자랑 삼기 전에 우리 마음 속에 먼저 살아 있어야 하고 살아 있다는 걸, 그건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근간의 연속극 방영이나 역량 있는 작가에 의해 태어난 것이 결코 아니라 이미 오래 전 우리 국민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었다는 걸 감히 이해 할 수 있는 걸까? 그러나 우리는 너무 정적인 마음으로만 앞서는 감이 없지 않기는 하지. 어딘가 주눅이 든 듯한 역사를 안고 살아가는 것도 사실이기도 하고. 매운 작은 고추의 맛은 일본인들에게 다 빼앗겨 버린 걸까? 왜 우리는 한 마음으로 섬기지 못하는 걸까? 왜 같은 인물을 두고 하다 못해 동상도 치웠다가 세웠다가 하면서 발광스런 정책을 펴야만 하는 걸까? 언제까지... 바로 그 허튼수작 때문에 외세의 침략을 받고 놀아나며 백성들은 죽을 고생을 하여 겨레와 한반도의 역사를 당당히 지켜왔건만.

"도고가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그 발가락 한 개에도 못 따라간다. 이순신에게 넬슨과 같은 거국적인 지원과 그 만큼의 풍부한 무기와 함선을 주었다면, 우리 일본은 하루 아침에 점령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단히 실례인 줄알지만, 한국인들은 이순신 장군을 성웅이라고 떠받들기만 할 뿐 그 분이 진정으로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것은 우리 일본인보다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일본 해군 전략 연구가, 가와다 고오( 川田功 )>

"이순신의 죽음을 들은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는 각 진영이 연이어 통곡하며 마치 자기 어버이를 잃은 듯했다. 영구가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이 곳곳에 제물을 차려 놓았다가 상여를 붙잡고 통곡하며 ‘공께서 우리를 살리셨는데 지금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신단 말입니까?’ 이렇게 울부짖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모여든 군중으로 길이 막혀 상여는 가지 못하게 되고 길 가는 사람들도 눈물을 뿌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 중에서>

두울, 이 순신의 아내에 대한 마음은 자식 '면'의 죽음이나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묘사한 부분과 무척 차이가 난다. 그 시대의 충과 효의 사상이 그러했다고 하지만 오늘의 나는 글이라 하여도 야속하기 짝이 없고 서운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여자의 뱃속을 뚫고 나온 존재들이여! 어찌 그리 쪼잔한지. 하지만 이미 일심동체여서 그 자신도 비명에 갔듯 한가지였을까?

8월 30일(을해) 맑고 바람도 없음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몹시 중하다고 했다. 지금쯤은 이미 생사가 결정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러하니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있으랴? 그러나 세 아들과 한 딸이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가슴 마음 아픈 일이었다.(147P)

저녁에 천안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집에서 온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움직이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겉봉을 대강 뜯고 둘째 아들 열의 글씨를 보니, 겉에 ‘통곡’이라는 두 자가 써 있었다. 면이 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것을 예감하고 간담이 서늘하여 목 놓아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한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이것은 이치가 잘못된 것이다. 천지가 어둡고 저 태양이 빛을 잃는구나!..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직 목숨은 남아 있어도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있을 뿐이로다. 오직 통곡할 뿐이로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처럼 길구나.(288P)

4월 13일(계유) 맑음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음訃音을 전했다. 뛰어나가 가슴을 치면서 뛰고 뒹구니 하늘의 해도 캄캄하였다. 즉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이미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는 애통함을 어찌 다 기록하랴!(뒷날 대략 적었다) (253P)

세엣, 리더 스스로가 혼자 치는 점에서 바람 잘 날 없는 고독한 영웅의 일상의 면면을 보게 된다. 신이 아닌 인간의 신과 같은 열망의 절절한 외로움... 얼마나 험난한 길인가. 얼마나 노심초사 해야만 하는 길인가 말이다. 어미를 생각하듯 자식을 돌보듯, 내 어미 섬기듯 내 자식 먹이듯 하는 책임 있는 지도자의 혼신의 나날들. 돌다리도 두들기고 또 두들겨 보는 하루 하루 그날 그날의 밀리지 않는 반성과 늘 깨어 있고자 하는 염원, 그리고 뼛속까지 사무치는 평화로운 일상에 대한 간절한 조바심에 새삼 숙연해 진다.

또한 지도자는 자신만의 신념과 감각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깨우침도함께 얻는다.

월 초8일(신묘) 잠깐 맑더니 바람이 또 고르지 못함
옥과玉果의 향소鄕所에서 지난해부터 수군을 잡아서 보내는 일에 성실하지 못해 도망하는 자가 거의 100여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번번이 거짓말로 대답하기에, 이 날 목을 베어 매달아서 여러 사람에게 보였다. 거센 바람이 그치지 않아 마음도 어지럽다.(75P)

7월 25일(신사) 맑음
새벽녘 꿈에서 아들을 얻었다. 포로로 잡혀 갔던 군사들을 찾을 징조라고 풀이했다.(90P)

1월 20일(기해) 맑기는 하나 큰바람이 붐
살을 에듯 추워서 여러 배에 헐벗은 사람들이 목을 움츠리고 추워서 떠는 소리를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106P)

7월 초7일(무인)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음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내린 유지를 보니 놀랍고 황송함을 이길 수 없었다. 김응서金應瑞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스스로 허물을 뉘우치고 힘쓴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가? 만일 쓸개가 있다면 반드시 자결이라도 할 일이다.(185-186P)

7월 19일(을해) 맑음
새벽에 꿈을 꾸니 어떤 한 사람은 화살을 멀리 쏘고, 또 한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이었다. 내 스스로 점을 쳐보니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의 무리가 멀리 도망간다는 것이요, 또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은 머리 위에 있어야 할 갓을 발로 차서 부수었으니, 이는 적의 괴수를 모두 섬멸할 조짐이었다.(234P)

9월 15일(계묘) 맑음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말하기를, “병법에 이르기를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고 했다. 또 고 했다. 이 말들은 모두 지금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날에는 즉시 군율에 의해서 다스려 조금도 용서치 않으리라”고 거듭 엄중히 말했다. 이 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지시하기를, “이렇게 하면 이길 것이요, 이렇게 하면 질 것이다” 했다.(280P)

9월 16일(갑진) 맑음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안위를 불러 “안위야! 네가 군법軍法에 죽고 싶으냐?”하고, 다시 불러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가면 살 듯 싶으냐?” 외쳤더니 안위는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진하여 들어갔다. 나는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해 있기만 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수 있겠느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형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고 외쳤다.(281P)

: 이 부분 특히 감동적이다. 이것이 리더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나에게는 이러한 인내와 원시안이 부족하다.^^

10월 16일(계유) 맑음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인데도 나는 마음 놓고 울어 보지도 못했다.(288P)

네엣, 오늘 나를 다시금 살게하며 구원하는 글귀

1월 12일(신묘) 맑음
아침을 먹은 후에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하고 두세 번 타이르면서도 헤어지는 슬픔을 말하지 않으셨다.(104P)

: 죽어가는 어머니의 입밖에 내지 않는 감내의 모정에서 생의 찬란한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보게 된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도 두렵게 할 수가 있다’(280p)
: 무지하게 멋지다.


리뷰 속 리뷰를 하게 되었구먼.ㅋ 항상 열심히 하려 애쓰는 그대에게 박수! 더워도 피곤해도 쭉~ 달려가시게. 랄 라라랄~ 재우쏭을 만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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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우
2008.06.03 20:05:33 *.122.143.151
북리뷰 속의 북리뷰 잘 읽었습니다.
못난 북리뷰를 '멋진 북리뷰'로 재탄생시켰군여~!!
좋아요, 아주 좋아요..
역시 태양녀 고추장 다운 매콤한 맛이 느껴져요.
그 맛을 나눠주심에 대단히 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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