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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일 21시 07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2004년 9월 4일.
한 편의 드라마를 보기 위해 TV 앞에 섰다. 난 개인적으로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 편이다. 그럼에도 유일하게 매주 이 드라마를 보기 위해 부랴부랴 퇴근을 해서 TV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기억이 난다. 무너져가는 조국을 위해 외롭게 전장을 지키는 한 영웅을 위해 가슴 떨리는 마음으로 주말을 보냈던 것이다.

<불멸의 이순신>.
이 드라마를 통해 이순신을 대략 알게 되었다. 그리고 3년 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지난 3월 일주일 동안 잠과의 싸움을 하면서 다시 이 드라마를 보았다. 과거와는 다른 관점에서 이 드라마를 보았다. 과거에는 한 명의 불세출의 영웅이라는 측면에서 보았다면, 이번에는 철저하게 리더십이라는 관점에서 ‘그’를 보았다.

매번 이 드라마를 볼 때마다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픈지……모르겠다.

<난중일기>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구절들이 있다.

첫째, 몸이 아프다.
둘째, 활을 쏘았다.
셋째, 술을 먹었다.
(날씨는 제외했다)

그는 7년의 전란(戰亂) 동안 아프지 않은 날이 거의 없을 만큼 병치레와 싸워야만 했다. 어머님의 건강을 하루가 멀다하고 걱정하는 평범한 조선의 아들이었다. 조국의 안위와 가족의 편안을 항상 고민하는 ‘그’였다. 그의 마음 고생을 쉽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특히 <난중일기>에는 그의 인간적인 나약함과 솔직함을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성웅(聖雄) 이순신이 아닌, 인간(人間) 이순신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다.

충무공의 휘(諱)는 순신(舜臣)이고 자는 여해(汝諧)며 성은 이씨이고 본은 덕수(德水)인데 충무는 1643년(인조 21년) 공이 순국후 내린 공의 시호(諡號)이다. 공은 1545년 3월 8일(음력) 한성부건천동(서울 인현동)에서 부친 덕연군 이정의 사형제중 셋째아들로 태어나셨다. 공의 모친 초계(草溪) 변씨의 꿈에 시부(媤父)가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귀인이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고 하라"고 한 이조(異兆)가 있어서 선공이 그대로 명명을 했던 것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무인의 용력(勇力)과 문인의 재지를 겸비하여 문학을 공부하다가 뜻한 바 있어 22세에 들어서 무예를 연마하기 시작하여 32세 때 비로소 무과에 등제하셨다. 그래서 그 해 겨울에 일종의 초급장교인 권관(權管)으로 임명되어 함경도에 부임하니 공으로서는 첫 벼슬에 오른 셈이다. 공은 말과 행동이 엄격하고 지혜와 용맹이 특출하였으므로 다른 무사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학문과 서예에까지도 실력을 겸비하셨다.

소년시절부터 같은 동리(洞里)에서 자라온 유서애(柳西厓)는 그의 초인적인 능력을 일찍이 알아 왔는데 그때에 전랑(銓郞)(정부의 인사관)이었던 이율곡이 서애를 통하여 상면을 청하였으나 "우리는 종친이라 당연히 만나야 하지만 전랑으로 있을 때만은 만날 수 없다"고 거절하였으니 이는 그의 청렴함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리라.

국경경비에 3년간 임하다가 훈련원을 거쳐 36세가 되던 해 전라도 발포만호(鉢浦萬戶)로 임명되어 포구를 수비하셨다. 그러나 공을 시기하는 무리들 때문에 모함을 받아 38세가 되던 해 만호에서 파직당하셨다. 이 과정에서 감사인 손식(孫軾)이 공을 불러다가 진상을 알아보던 중 병서를 강(講)하고 진도(陣圖)를 그리게 하여 공이 작도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탄하였다.

공은 39세가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하고 다시 복직되어 함경북도 권관으로 근무하면서 호적(胡賊)의 괴수(魁首) 울지내를 사로잡아 양민을 보호하였다. 42세 정월 조산만호(造山萬戶)가 되었고, 43세에 록도둔전(鹿島屯田)을 관리하는 중에 호적의 습격을 받아 60여명이나 포로가되어 잡혀가는 것을 구출하다가 화살을 맞고 좌고(座股)에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도리어 모함을 받고 투옥되기도 하셨던 것이다.

45세 겨울 전라도 정읍현감에 태인관을 겸해서 산적한 모든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고 선정을 베풀어 온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럴 즈음 시국은 차차 어지러워 군란이 닥쳐올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공은 유성룡의 천거로 마침내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로 초임하니 47세 2월 임진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해였다. 공은 장차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직감했다. 조정에서의 분당에 의한 의견대립을 무시하고 자신의 권한과 범위내에서 전쟁준비에 열중하셨다.

좌수영 관할 아래 모든 장정의 군사훈련과 장비를 점검하고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무기였던 거북선을 만들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야말로 세계 철갑선의 원조요 임진란에 큰 공을 세웠던 것이다. 48세 되던 해 1592년 4월 13일 드디어 왜적이 부산에 상륙했다. 다음날 부산진이 무너지고 15일에는 동래성이, 5월 3일에는 서월이 함락되었다.

공은 전라도 관할이지만 4월 16일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제장(諸將)을 본영으로 소집하여 작전계획을 세우는데 모두들 "본도의 수군은 본도만 지키지 경상도까지 가서 적을 치는 것은 우리 임무가 아니다"라고 하는데 유독 군관 송희립(宋希立)이 반대하고, 만호 정운(鄭運)은 동조하니 공이 대열(對悅)하여 "국가가 위급한데 어찌 타도(他道)라고 좌시할까, 이에 후퇴하는 자는 참징(斬懲) 하리라."고 엄하게 명하고 5월 1일 제장을 모아 전함 24척을 당포 앞바다로 집결시켯다. 이 때 도피하려던 여도수군 황옥천을 참해서 효시(梟示)하고 옥포에서 약탈하는 왜적들을 무찔러 쳐부수니 이것이 5월 7일 제 1차 옥포해전 대승첩(對勝捷)이다.

그 다음 5월 29일 경상도 사천에서 승첩하고 6월 2일 다시 당포에서 승첩, 경상도 해상의 왜적들을 모조리 격파하였으니 이것이 제 2차 당포해전 대승첩이다. 그 다음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른바 <학날개 전법>으로 서해로 가려는 왜적들을 완전소탕하였으니 이것이 제3차 한산도대승첩이다. 그런데 부산의 왜적은 더욱 강해져 기지화되었으므로 공은 부산 앞바다에서 적을 공격하여 가장 큰 전과를 올렸으니 이것이 9월 1일 제4차 부산대승첩이다.

49세 7월 15일 여수 좌수영의 본영을 그대로 두고 전투본부를 한산도로 옮겨 서해로 가려는 왜적들을 무찌를 준비를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삼도의 수군을 통괄하는 주장(主將)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공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임시키니 이때가 8월 15일이었다.

원균은 자기가 선배인데도 그 하위가 되었음을 부끄럽게 알고 시기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공은 조금도 그에 개의하지 않고 군무에만 정진하여 수만석의 군량을 확보하고 각종의 무기를 준비하였다.

50세 때에는 전염병으로 십여일이나 고통을 당하면서도 군무에는 조금도 해태(懈怠)하지 않았으며, 전염병으로 죽은 군사와 백성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게 하고 또 글을 지어 제사해 주었다. 원균은 충청도에 가서 공을 비방하는 말만 퍼뜨렸으나 공은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조금도 원균을 비방하지도 않으니 모두들 원균이 옳은 줄로 알았던 것이다.

52세 겨울 일본에서 다시 오는 가등청정(加藤淸正)을 요격하라는 소서행장(小西行長)의 밀청(密請)에 공은 불청했던 것이다. 그래서 가등(加藤)이 다음해 1월 21일에 도래하니 조정에서는 2월 26일 그 호기를 놓쳤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원균이 통제사가 되었다. 이것은 적군의 음모와 원균의 시기로 역사의 큰 오점을 남긴 것이다.

이것을 본 많은 인사들이 상소문을 올려 출옥을 청하였다. 다행히 정탁(鄭琢)의 상소문이 주효하여 탈옥된 지 26일 만인 4월 1일 석방은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고 성복한 날에 백의종군하였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왜군이 다시 쳐들어오니 이를 정묘재란(1597년)이라 한다. 삼도의 수군이 모두 적멸하고 원균도 패사하였다. 그래서 공이 다시 통제사로 복직하여 여병(余兵) 백여명과 12척의 전함으로 결사항전하기로 맹서하였다.

그해 9월 16일 울독목으로 가서 세계해전상 유래없는 12척의 전함만으로 330척의 적함을 격파한 이른바 명량해전대승첩을 거두었다. 명량해전이 끝나자 공은 진을 목포 고하도(高下島)로 옮겼고 다시 고금도(古今島)로 옮기니 그때 수군의 병력이 팔천명에 이르렀다. 여기서 명나라 진도독(陳都督)이 오천의 군사와 함께 우리 수군과 합세하였다. 진도독도 충무공의 인격과 실력 앞에는 굴하여 "당신은 작은 나라 사람이 아니오"라고 감탄하기를 마지않았다.

1598년 8월 17일 임진란의 원흉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으매 왜적의 철군(撤軍)이 시작되었다. 공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마지막 달아나는 왜함 500여척을 추격하여 남해 노량에서 큰 격전을 벌였다. 공은 밤새 독전하다가 날이 샐 무렵에 탄환을 맞아 전순(戰殉)하셨다.(1598년 11월 19일) 임종시 유언에 따라 전투가 끝난 뒤에 발상(發喪)했으니 향년 54세였다.

이 마지막 격전으로 적은 크게 패하여 500여척의 전함중 겨우 50척만이 남해로 달아났다. 이로써 왜적은 완전히 의기소침하여 전의를 잃고 침략의 야욕을 굽히니 피비린내나는 7년간의 임진란이 종식되었던 것이다.

공의 순국후 선조는 공의 은공을 기려 우의정과 좌의정을 증직(贈職)하였고 정조는 영의정을 추증(追贈)하였다.

위의 글은 여수문화기행에서 실린 이순신의 생애를 인용한 것임.


2. 내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

이순신의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초 2일 신묘 맑음. 식사후에 몸이 몹시 불편하더니 점점 더 아파졌다. 온종일 밤새도록 신음했다. 초 3일 임진 맑음. 기운이 어지럽고 밤새도록 고통스러웠다. 초 4일 계사 맑음. 아침에야 비로소 통증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31p

왜적의 소식을 한번 듣고는 벌써 달아났고, 무기 등 온갖 물자도 모두 흩어져 남은 것이 없다고 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12시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속을 하니,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군수(신호)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아 한탄스럽다. 그러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게 될 범한 일인가. 37p

아침 식사 후 삼도의 군사들을 모아 약속할 적에 영남 수사(원균)는 병으로 오지 않고, 전라좌우도의 장수들만이 모여 약속했다. 다만 우후가 술주정으로 망령된 말을 하니, 그 입에 담지 못할 바를 어찌 모두 말할 수 있겠는가. 어란포 만호 정담수와 남도포 만호 강응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큰 적을 맞아 토벌을 약속하는 때에 술을 함부로 마셔 이 지경에 이르니, 그 사람됨이야 더욱 말로 나타낼 수가 없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55p

얼마후 진도의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할 일이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원균 때문이다. 59p

더위가 극심한데 삼가 살피지 못하였지만 체후가 어떠하신지요. 전에 앓던 학질과 이질이 지금은 어떠하십니까. 밤낮으로 엎드려 사모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가뭄이 너무 심하고 강의 여울도 매우 얕아져서 적에게만 도움되는 형세이니, 천지신명께서 도와주지 않으시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분한 마음을 품고도 할 말을 못하니 노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전에 안부편지를 받았으나 탄환 맞은 자리의 통증 때문에 바로 나아가 배알하지 못했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다만 지난번에 후퇴하여 돌아온 뒤로 얼마 안가서 다시 병사를 징발하였지만 민심이 이미 무너져있기에 세력을 모으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68p

나라를 위해 힘쓰는 일이 지금의 급무이지만 몸의 병이 이렇게 되었으니 북쪽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할 때면 다만 스스로 눈물을 드리울 뿐입니다. 74p

수사 원균은 송경략(송응창)이 보낸 화전을 혼자서 쓰려고 꾀를 낸다고 한다. 우습고도 우습다. 95p

남해 현령 기효근의 배가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에 어린 계집을 태우고 남이 알까봐 두려워한다. 가소롭다.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는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수사부터도 그러하니 어찌하랴! 97p

이 날 밤바다에 뜬 달은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빛인데, 서늘한 바람이 선뜻 불어온다.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113p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울적하네
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
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닭이 벌써 울었구나. 116p

말하는 가운데서 원수사의 음흉하고 도리에 어긋난 일이 많으니 그의 속임과 거짓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26p

흥양현감도 와서 명절 제사음식을 대접하는데, 원균이 술을 마시자고 하여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하여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지껄였다. 매우 해괴하였다. 127p

원수사가 와서 영등포로 가기를 독촉하였다. 참으로 음흉하다고 할만하다. 그가 거느린 배 25척은 모두 다 내보내고 다만 7, 8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씀씀이와 일하는 것이 다 이따위이다. 128p

오랑캐의 근성은 경박하고 사나우며 칼과 창을 잘 쓰고 배에 익숙하여 육지에 내려오면 문득 죽기를 각오한 마음으로 칼을 휘두르며, 아군의 나약한 무리들은 일시에 놀라 달아나니 어찌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할 수 있겠는가. 132p

나라 일이 다급한 때
누가 곽리의 충성을 바치리오.
서울을 떠난 것은 큰 계획 이루려 함인데
회복하는 것은 그대들에게 달려있네.
관산의 달 아래 통곡하고
압록강 바람에 마음이 슬퍼지네.
신하들이여! 오늘 이후에
그래도 다시 동과 서로 다투겠는가. 134p

칼날 휘두르며 이르는 형세가 비바람과 같으니 흉도의 남은 넋들도 달아나 숨고,
척검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떠는도다.
만 번 죽어도 한 삶을 돌아보지 않을 계책을 내고 보니 발분하는 마음 그지 없네.
국가를 편안히 하고 종사를 안정시키는 일에 충성과 능력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그렇게 하리라. 137p

추악한 적에게 함락된 지 장차 두 해가 되어 가는데 국가를 회복할 시기는 바로 오늘에 달려 있다. 한창 명나라 군사의 거마소리를 기다리느라 하루를 1년같이 여겼지만, 적을 쳐서 무찌르지 않고 화친을 위주로 하여 우선 흉악한 무리를 퇴각만 시키고 우리나라가 수년 동안 침입 당한 치욕을 씻지 못했으니, 하늘에까지 미친 분함과 부끄러움이 더욱 간절하다. 138p

새벽 꿈에 좋은 말을 타고 곧장 바위가 첩첩인 큰산마루로 올라가니 산봉우리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동서로 구불구불 뻗어 있었다. 봉우리 이의 평평한 곳에 자리잡으려고 하다가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어떤 미인이 홀로 앉아서 손짓을 하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우스운 일이다. 152p

군수 이광악이 술을 가지고 왔다. 장흥부사도 왔다. 임치첨사(홍견)도 같이 왔다. 곤양군수가 몹시 취해서 미친 소리를 마구 헤대니 우습다. 나도 잠깐 취했다. 173p

비가 내렸다. 하루 종일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침침하여 취한 듯, 꿈속인 듯,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177p

신경황이 들어왔는데 영의정(유성룡)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이보다 더한 이가 없을 것이다. 지사 윤우신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슬픈 마음이 그지 없다. 183p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의 평안하심은 알았으나, 면의 병세는 중하다고 하였다. 몹시도 애타지만 어찌하랴. 영의정 유성룡이 죽었다는 부고가 순변사가 있는 곳에 왔다고 한다. 이는 필시 유정승을 질투하는 자들이 말을 만들어 훼방하려는 것이리라.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이 날 저녁에 마음이 몹시도 어지러웠다.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마음을 스스로 걷잡을 수 없었다. 걱정이 더욱 심해져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유정승이 만약 돌아가셨다면 나랏일을 어찌할 것인가. 190p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떨가하고 염려하여 글자를 짚어 점을 쳐보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어 보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두 괘가 모두 좋아서 마음이 조금 놓였다. 도 유정승의 점을 쳐보니,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다시 점치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무척 좋았다. 저녁 내내 비가 내리는데, 홀로 앉아 있는 마음을 가눌 길 없었다. 늦게 송전이 돌아가는데, 소금 1섬을 주어 보냈다. 오후에 마량첨사와 순천부사가 와서 보고 어두워서야 되돌아갔다. 비가 올 것인가 개일 것인가를 점쳤더니, 점은 ‘뱀이 독을 내뿜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앞으로 큰비가 내릴 것이니, 농사일이 염려된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초저녁에 발포의 탐후선이 편지를 받아 가지고 돌아갔다. 191p

이 날 아침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롭구나. 김양간이 서울에서 영의정의 편지와 심충겸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분개하는 뜻이 많이 담겨 있었다. 원수사의 일은 매우 해괴하다. 내가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다니, 이는 천년을 두고 한탄할 일이다. 곤양군수가 병으로 돌아갔는데, 보지 못하고 보냈으니 더욱 유감스러웠다. 밤 10시경부터 마음이 어지러워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205p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여 촛불을 밝힌 채 뒤척거렸다. 이른 아침에 손을 싯고 조용히 앉아 아내의 병세를 점쳐보니, ‘중이 속세에 돌아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다시 쳤더니, ‘의심이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매우 길하다. 또 병세가 나아질 것인지와 어떤 소식이 올 지를 점쳤더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이 역시 오늘 중에 좋은 소식을 들을 조짐이었다. 206p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3년 동안 해상에서 있으면서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여러 장수들과 맹세하여 목숨 걸고 원수를 갚을 뜻으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지만, 험한 소굴에 응거하고 있는 왜적을 가볍게 나아가 칠 수가 없을 뿐이다. 더욱이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종일 큰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라 일은 어지럽건만 안으로 구제할 계책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206p

홀로 앉아 간 밤의 꿈을 기억해 보았다. 바다 가운데 외딴 섬이 달려와 눈앞에서 주춤 섰는데, 그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은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가지 지켜보았다. 참으로 장쾌하였다. 이 징조는 곧 왜놈이 화친을 애걸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나는 준마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다. 이것은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올라갈 징조이다. 210p

“나라가 위태하고 혼란한 때를 당하여 몸에 무거운 책임을 지고서도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배장 좋게 음탕한 계집을 끼고서 관사에는 들어오지 않고 성밖 집에 멋대로 거처하면서 남의 비웃음을 받으니 대체 어쩌자는 것이요? 또 수군 각 관청과 포구에 육전의 병기를 배정하여 독촉하기에만 겨를이 없으니 이 또한 무슨 이치요? 225p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도 다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이기고 지는 것이 반반이며,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설이다. 226p

무제시(無題詩)

비바람 몰아치는 밤
맘이 초조하여 잠 못 이룰 적에
긴 한숨 거듭 짓노라니
눈물만 자꾸 줄줄 흐르네
배를 부린 몇 해의 계책은
다만 성군을 속인 것이 되었네
산하는 오히려 부끄러운 빛 띠고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나라의 다급한 형세에
누구에게 능히 평정을 맡기리요
배를 몰더 몇 해의 계책은
이제 성군을 속인 것이 되었네
중원회복한 제갈량이 그립고
적을 몰아낸 곽자의를 사모하네 234p

“나라의 재앙이 참혹하고 원수가 사직에 남아있어서 귀신의 부끄러움과 사람의 원통함이 온천지에 사무쳤건만, 아직도 요사한 기운을 재빨리 쓸어버리지 못하고 원수와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있으니 분통하다. 무릇 혈기가 있는 자라면 누가 팔을 걷고 절치부심하며 그놈의 살을 찢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경卿은 적과 마주하여 진을 치고 있는 장수로서 조정이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적과 대면하여 감히 도리에 어긋난 말을 지껄이는가. 또 누차 사사로이 편지를 보내어 그들을 높여 아첨하는 모습을 보이고 수호, 강화하자는 말을 하여, 명나라 조정에까지 들리게 해서 치욕을 끼치고 사이가 벌어지게 했음에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도다. 마땅히 군법으로 다스려도 아까울 것이 없거늘. 오히려 관대히 용서하고 돈독히 타이르며 경고하고 책망하기를 분명히 하였다. 273p

하루내내 어머니를 모셨다. 내일 진중으로 들어갈 일로 어머니께서는 몹시 서운해 하시는 빛이었다. 379p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訃告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에 적었다. 388p

오늘은 어머님의 생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어찌 견디랴. 닭이 울 때 일어나 앉아 눈물만 흘렸다. 394p

오늘은 단오절인데, 천리 밖에 멀리 와서 종군하여 어머님 장례도 못 모시고 곡하고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로 이런 앙갚음을 당하는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하여도 짝이 없을 것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394p

저녁에 종 경이 한산도에서 돌아왔는데, 보성군수 안홍국이 적탄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놀랍고 슬픈 마음을 이길 수가 없다. 놀라 탄식할 따름이다. 적 한 놈도 잡지 못하고 먼저 두 장수를 잃었으니 통탄스러움을 어찌 말로 다하랴. 416p

슬프고 그리운 마음을 어찌 그칠 수 있겠는가. 꿈에 원균과 함께 모였는데 내가 원균의 윗자리에 앉아 음식상을 받을 때 원균이 즐거운 기색을 보이는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 없다. 420p

저녁에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심하여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422p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장의 잘못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427p

송사를 읽고

아, 슬프도다. 그때가 어느 때인데, 저 강이 떠나고자 했는가. 떠나면 또 어디로 가려했던가. 대저 신하된 자가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다른 길은 없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종사의 위태함은 마치 머리털 하나에 천균을 매단 것과 같아서, 이는 바로 신하된 자가 몸을 버려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인데, 떠난다는 말은 진정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될 것이거늘, 하물며 어떻게 입밖에 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강을 위한 계책을 세운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쇠한 몸으로 피눈물 흘리며 충심을 드러내되 일의 형세가 여기까지 왔으나 화친할 수 없음을 밝혀서 말할 것이요. 아무리 말하여도 따라주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계속 주장할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선 그들의 계책을 따라 자신이 그 사이에 간여하여 일을 낱낱이 꾸며 맞추어가며 죽음 속에서 살길을 구한다면, 혹 만에 하나라도 나라를 건질 이치가 있을 것이다. 강의 계책은 이러한 데서 나오지 않고 떠나가기만을 구하고자 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로서 몸을 내맡기고 임금을 섬기는 의리라 할 수 있겠는가. 445p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다스리어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 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460p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痛哭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470p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되는 날인데도 마음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470p

부록 : 다른 문헌에 남은 이순신의 최후 기록

이항복의 [백사집4권] 고통제사이공유사
이날 밤 삼경에는 이순신이 배 위에서 꿇어앉아 하늘에 축원하기를, “오늘은 진실로 죽기로 결심했사오니, 원컨대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축원을 마치고는 스스로 정예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노량으로 진군하였다. 502p

[충무공전서12권]이장군을 조문함 – 이이명

세인 혹 하괴성(장수를 상징하는 별)이 큰 바다 나루터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나 끝내는 김충용(김덕령)과 함께 돌아가셨네. 또한 장군이 기미에 밝은지를 의심하였거늘 결국 투구 벗고 결사적으로 나아가셨네. 나는 진실로 장군의 마음을 아나니 어찌 화를 두려워해서 삶을 가벼이 한 것이랴. 진실로 적을 섬멸하여 임금에게 보답하였으니 비록 만번 죽을지라도 그 또한 광영된 것이네. 505p

역자후기
- 난중일기 판독과 번역을 마치고


3. 저자에 대하여

난중일기는 7년의 시간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일기(日記)이다. 전체적인 내용에서 특별한 감정이나 개인적 생각을 최대한 자제한 상태에서 사실을 중심으로 서술해 나간 것이 특징이다. 물론 개인적 감정이 일기 곳곳에서 묻어나고 있지만. 특히 그는 적군과의 싸움도 그러했지만, 내부의 적들과 싸우기 위해 분투했다. 전장 내내 계속되었던 병치레, 동료 장군들의 불화, 충성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조정 등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나라를 위해 힘쓰는 일이 지금의 급무이지만 몸의 병이 이렇게 되었으니 북쪽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할 때면 다만 스스로 눈물을 드리울 뿐입니다.” 74p
“원수사의 음흉하고 도리에 어긋난 일이 많으니 그의 속임과 거짓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26p

동료 원균에 대한 그의 솔직한 감정은 그도 평범한 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또한 어머님의 대한 간절함과 애절함은 얼마나 효심(孝心)이 깊었던 인물인지를 알 수 있다.

오늘은 어머님의 생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어찌 견디랴. 닭이 울 때 일어나 앉아 눈물만 흘렸다. 394p

6월의 학습주제는 ‘그들이 스스로 본 그들’이다.
진정 이순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었을까? 그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해 했을까?

사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지독한 ‘외로움’ 때문이다.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라는 백의종군(白衣從軍)의 외로움을 그는 왜 선택했으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조국(祖國)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 했던 것은 단순한 ‘애국심’(愛國心)으로만 해석이 가능할까? 한산에서 떠오른 뒤, 노량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한 그의 소명은 무엇이었을까? 문득 이런 질문도 들었다. 그는 진정 행복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리더십을 이야기하지만, 진정한 리더는 무척이나 외롭다. 사무치는 외로움의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부하들의 힘겨움과 어려움을 이해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위치가 ‘리더’이지만, 리더가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기 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떠올렸다. 두 사람 모두 시대를 대표하는 불세출의 영웅이었으며, 진중 속에서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5현제 중의 한 사람이며, 스토아 학파의 중요한 사상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수많은 전장의 현장 속에서도 <명상록>을 집필했다. 이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철학을 논했었다. 신의 존재, 세상의 원리, 인생의 의미, 우리 해야 할 소명들에 대해 철학자를 능가하는 사상적 깊이를 보여주었다.

이에 반해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접하고 나서, 솔직히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순신만의 철학적 세계관과 인생관을 기대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러나 <난중일기>는 철저하게 개인적 감정과 생각을 배제한 채, 사실 위주의 서술로 이루어져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의 세계관과 철학적 바탕은 그의 글을 통해서 보다는, 그가 행동과 결과에서 유추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그는 철학자에 가깝기보다는, ‘혁명가’에 가깝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준비, 군사작전, 새로운 신무기, 인재등용의 제한철폐와 같은 발상의 전환은 그를 혁명가라 이름지울만 하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기존 지배세력의 헤게모니를 지탱하기 위한 역할보다는, 오로지 조국와 백성들의 안위(安危)와 안녕(安寧)을 고민했던 고독한 영웅이었다. 조국과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그것이 기존의 세력 및 체제와 반한다 하더라도 혁신(革新)과 변화(變化)를 받아들였다. 시대의 불운에도 그는 자기연민에 빠져 좌절하거나, 후퇴하지 않았다. 비극적 조건 속에서 가장 혁신적인 변화와 도전을 통해, 조선의 승리의 전주곡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다시금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변화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 자신이 어떠한 길을 걸어갈 것인가에 대한 화두가 필요하다. 가슴 떨리는 고민이 필요하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 추신 : 편역자 노승석은 8500자를 새롭게 해석하고 100여곳에서 150자의 오역을 바로 잡음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자의 노고어린 작업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이 가슴에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난중일기>는 철학서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는 책이기에, 번역자의 작업이 그리 빛나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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