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오현정
  • 조회 수 1901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8년 6월 2일 05시 58분 등록
책 : 난중일기
저자 : 이순신
출판사 : 서해문집

Ⅰ.저자에 대하여

<생애>

이순신(李舜臣,1549~1598)은 본관이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서울의 건천동에서 태어나서 32세가 되어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무관으로서 첫 관직에 진출한다. 그 후에도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과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다.

1586년(선조 19)에는 사복시 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가 되었는데 이때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한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이후 1589년(선조 22) 선전관과 정읍(井邑)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 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竹島)로 옮긴 뒤, 장문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97년(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의 밑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했다.

그의 후임 원균은 7월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3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선조 31) 2월 고금도(古今島)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유품 가운데 《난중일기》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는 국보 제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충무공유물은 보물 제326호로, 명나라 신종이 무공을 기려 하사한 충무충렬사팔사품(통영충렬사팔사품)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도 그와 관련하여 많은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문학•영화 등의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난중일기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전쟁 중에 쓴 일기. 7책. 부록 1책. 빠진 부분도 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1592)로부터 끝나던 해(1598)까지의 일을 간결 •명료하게 기록하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전적(典籍) 중의 하나이다. 이 책은 일기와 서간첩 및 임진장초와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다.
【친필초고본과 이충무공전서본】 난중일기에는 두 가지 전적이 있는데, 그 하나는 이충무공의친필 초고본으로, 충남 아산(牙山)의 현충사(顯忠祠)에 보관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있다. 본래 충무공은 다만 일기를 썼을 뿐, 거기에 어떤 이름을 붙였던 것은 아니며, 정조 때에 이르러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의상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여 권5에서 권8에 걸쳐 수록한 다음부터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충무공전서》는 1795년(정조 19)에 완성되었는데, 그 편찬작업은 윤행임(尹行恁)과 유득공(柳得恭)이 맡아 하였다. 그런데 충무공의 친필 초고본과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 까닭은 전서의 편찬자들이 충무공의 친필 초고를 가져다가 정자로 베껴 판각에 올릴 때에 생략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대신 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부분이 정작 충무공의 친필 초고본에는 빠진 부분도 있다.

즉, 임진년 정월 1일부터 4월 22일까지, 그리고 을미년(乙未年) 1년 동안과 무술년 10월 8일부터 12일까지가 누락되었는데, 이것은 필경 편찬작업과정이나 아니면 그 후에 유실된 것 같다. 친필 초고본은 별책 부록까지 합하여 8책에 이르며, 제5책과 제6책은 두 책이 모두 정유년(丁酉年) 일기여서, 8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가 중복되어 있다. 그 까닭은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제5책에 간지(干支)가 잘못 적혀 있는 곳이 많고, 또 내용을 보아도 제6책의 것이 비교적 자세하게 적혀 있는 점으로 미루어, 나중에 충무공이 시간 여유를 틈타 앞의 간지의 잘못을 바로잡는 한편, 기억을 더듬어 보완하였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내용】 국난을 극복해낸 수군사령관으로서 충무공의 엄격하고도 지적인 진중생활을 평이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유비무환의 진중생활, 인간 이순신의 적나라한 모습과 생각, 부하를 사랑하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 부하에 대한 사심없는 상벌의 원칙, 국정에 대한 솔직한 간언, 군사행동에 있어서의 비밀 엄수, 전투상황의 정확한 기록, 가족 •친지 •부하장졸 •내외 요인들의 내왕 관계, 정치 •군사에 관한 서신교환 등이 수록되어 있다.

【가치】첫째,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상황을 가장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일기로서, 전란(戰亂) 전반을 살피는 사료(史料)로서의 가치와 나라의 위급을 구해낸 영웅(英雄)의 인간상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생사를 걸고 싸우던 당시의 진중일기(陣中日記)로서 그 생생함이 더욱 돋보이며, 단순한 전쟁사 이상의 가치가 있다. 셋째, 그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여러 부문에 걸친 측면사와, 특히 수군(水軍)의 연구에 도움을 준다. 넷째, 충무공의 꾸밈 없는 충(忠) •효(孝) •의(義) •신(信)을 보여주는 글이라는 점에서 후세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다섯째, 무인(武人)의 글답게 간결하고도 진실성이 넘치는 문장과 함께 그 인품을 짐작케 하는 웅혼(雄渾)한 필치는 예술품으로서도 뛰어나다.

자료 인용 : 네이버 백과사전, http://yisunsinkr.prkorea.com/index.htm,
http://www.e-sunshin.com/e-sunshin/main/main.jsp,

Ⅱ.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글을 시작하기 전에
그간 우리가 이순신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구국의 영웅’ 그 자체였다. 이것은 1960년대 군사 정권이 영웅사관을 통하여 그들의 권력을 더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난중일기>와 이순신에 대하여
그렇지만 적과 대치하여 있는 것만으로도 힘든 상황에서 바쁜 가운데 일기를 계속 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이순신은 부하들과 함께 신중하게 싸움을 준비하고, 부모를 걱정하다 날이 새도록 잠 못 이루고, 매일같이 활쏘기 연습을 하고, 전쟁에 임하여 물러섬이 없다. 이순신은 꿈에 왕이 피난 가신 일에 대하여 이야기가 미치자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고, 아들을 보내놓고 걱정스럽다 못해 병이 나고, 홀로 어머님 생각에 눈물 흘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적에 맞서 싸울 때는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는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고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곁코 용서하지 않겟다.”라고 외치며 아군의 10배가 넘는 적에게 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 역시 사람인지라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도 했다. 특히 뒷날 그를 모함하여 죽음 직전에까지 몰아넣은 원균에게 이순신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물론 일기를 보면 그가 원균을 나쁘게 본 데는 대개 그럴 만한 근거가 따르기는 한다. 일기에 따르면 여러 지휘관들이 원균의 잘못이나 흉을 여러 차례 보고하고 있다. 이순신은 그런 원균을 ‘可笑(가소롭다)’라고 표현하였다. 이 표현은 이순신이 몹시 못마땅할 때 쓰는 욕으로서 대부분 원균에게 쓰였다.

1592년 왜적의 침략이 시작되다
[p49]여러 장수들은 한마음으로 분발하여 모두 죽을힘을 다했다. 배에 있는 관원과 군사들도 역시 그 뜻을 본받아 서로 격려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적을 동서로 에워싼 채 바람과 우레같이 대포를 쏘고 활을 쏘아 대었다. 적들도 탄환과 화살을 쏘다가 기운이 떨어지자 배 안에 있는 물건들을 정신없이 바다에 내던졌다. 화살을 맞은 자가 몇 명인지 알 수 없고 물에 떨어져서 헤엄치는 놈도 몇 명인지 몰랐다. 한꺼번에 무너지고 흩어져서 바위 언덕으로 기어오르며 서로 뒤쳐질까 겁을 내는 꼴들이었다.

[p37]맑다. 적선을 살피면서 거기서 그대로 잤다.

[p59]그 가운데 나이가 대략 24,5세쯤 되어 보이는, 풍채가 건간하고 의복이 화려한 왜장이 칼을 짚고 혼자 서서 지휘했는데, 남은 부하 여덟 명과 함께 대항하면서 끝내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p62]견내량의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의 배끼리 부딪치기 쉬우므로 싸움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적이 만일 형세가 불리하면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갈 것이라 생각되기에 한산도 한바다로 꾀어내어 통째로 잡아 버릴 전략을 세웠다. 한산도는 거제와 고성 사이에 있어서 사방에 헤엄쳐 나갈 길도 없다. 혹 육지로 오르더라도 굶어죽기 십상일 것이다.

[p70]
27일 ……찬 서풍이 불어 나그네 마음이 평안하지 않았다. 밤에는 꿈자리도 몹시 어수선했다.
28일 맑다. 새벽녁에 앉아 꿈을 생각해 보았다. 밤에는 나쁜 꿈인 듯 했으나 곰곰 생각하니 도리어 길한 것 같았다.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p84]그런데 전라 우수영의 우후가 술주정하며 마음대로 지껄여 대었다. 그 짓이 입에 담을 바가 되지 못하니 어찌 모두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어란포 만호 정담수, 남포도 만호 강응도 마찬가지였다. 큰 적을 무지르려 작전을 약속하는 이때에 술을 지나치게 마셔서 이 지경에 이르니, 그 사람됨이야 더 할 말이 없다. 분통을 이길 길이 없었다!

[p87]그러나 발포 2선, 가리포 2선이 명령도 없이 뛰어들었다가 얕은 곳에서 (좌초에)rffu 적들에게 공격당하고 말았다. 분하고 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얼마 뒤 진도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괘씸하여 말하기조차 싫다. 분하고 통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p87]원수사는 너무도 음흉하여 말로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다.

[p91]초 10일 맑다. 아침을 먹은 뒤 사량으로 향하였다. 낙안 사람이 왕이 머물러 있는 곳에 와서 “명나라 군사가 벌써 송경에 다달았는데, 날마다 비가 내려 길이 질어서 행군하기가 어렵답니다. 날이 개면 서울에 들어 오겠다고 약속했답니다.”라고 전하였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니 기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량 첨사 이홍명이 보러 왔다.

[p94]맑다.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

[p97]피난 중에 계신 왕의 사정을 자세히 전하였다. 통곡하고 통곡할 일이로다!

[p97]밤에 달빛이 배에 가득한데 혼자 앉아 뒤척뒤척하였다. 온갖 시름이 가슴을 쳐서 자리에 들었으나 잘 수 없었다. 닭이 울 즈음에야 얕은 잠이 들었다.

[p98]술이 여러 배 돌자 경상 수사 원균이 왔는데 술주정이 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배 안의 장병들 중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망령된 짓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영산령이 취하여 넘어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우습다. 밤에 바로 두 선전관이 돌아갔다.

[p98]마음이 불편하여 드러누워 끙끙 앓았다. 명나라 장수가 증도에 머뭇거리는 게 다른 생각이 있는 듯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매우 걱정스러웠다. 일마나 이러하니 더욱 탄식이 나오고 눈물이 흘렀다.

[p99]아침에 명나라 사람을 만나 보니, 절간의 포수 왕경득이라고 하였다. 글자를 조금 아는 것 같아 한참 동안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알아들을 수 없어서 매우 답답하였다.

[p104]원균이 송 경략이 보낸 불화살을 자기만 쓰려 하였으나 병사 편에 공문을 보내 나누어 보내라 하니까, 공문의 내용을 매우 못마땅해 하면서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명나라 관리가 보낸 불화살 1천 5백 30개를 나누지 않고 혼자서 모두 쓰려고 하다니 그 잔꾀가 아주 심하여 말로 다하기 어려울 정도다. 저녁에 조붕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해 현령 기효근이 배를 우리 곁에 대었는데, 그 배에 어린 처녀를 싣고 남이 알까 봐 두려워했다. 우습다! 나라가 위급한 이때 배에 예쁜 색시를 싣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가 꼴이 아니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균부터가 이러하니 어찌 하겠는가?

[p114]밤기운이 매우 서늘하여 자리에 누웠어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잠시도 풀리지 않았다. 혼자 배를 덮는 뜸 밑에 앉으니 가슴속의 생각이 만갈래나 되었다. 선전관이 내려왔다는 전갈을 받았는데 초저녁의 왕의 유지를 가지고 왔다.

[p120]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 나그네의 가슴이 어지럽다. 혼자 배의 뜸 밑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머리에 들고 정신이 맑아지네.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어느덧 닭이 우는구나.

[p123]새벽에 꿈에서 아들을 얻었다. 이는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을 얻을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p124]꿈에 영의정이 와서 인사를 하기에 나도 답례를 하였다. 이야기가 왕이 피난가신 일에 미치자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였다. 적의 형세는 벌써 사그라졌다고 말하며 서로 실정을 의논할 즈음 좌우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드는데 꿈이 깼다.

[p124]또 원수사가 망령된 말을 하였는데 나에 대해서도 좋지 못한 말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모두가 망령된 짓인데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1594년 명∙일 간에 강화가 진행되다
[p140]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돌아가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잘 가서 나라의 욕됨을 속히 씻어라.”하고 말씀하시며 몇 번이고 거듭 타이르셨다. 헤어지는 데 대하여서는 조금도 슬픔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선창에 되돌아오니 몸이 불편하여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p141]소비포 만호로부터 경상도 여러 배들의 사부와 격군들이 거의 굶어죽을 지경이라는 말을 들었다. 참담하여 차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또 원 수사와 공연수, 이극함이 서로 좋아하던 여자들을 모두 다 사사로이 관계 하였다고 한다.

[p146]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겹겹이 쌓여 있는 큰 고개를 바로 내려갔다. 봉우리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구불구불 동서로 뻗어 있었다. 봉우리 위의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잠에서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꿈에 미인 하나가 홀로 안자 손짓을 했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다. 우스웠다.

[p151]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평정될 리가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p152]암행어사 유몽인은 국가의 위급한 난리를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일을 꾸며 갈 것에만 힘써서, 남쪽의 헛된 소리에만 귀 기울인 것이다.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무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 때문에 겪는 아픔이 더 이상 심하다.

[p167]비가 계속 내렸다. 하루 내내 빈 정자에 혼자 앉아 있었더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고 머릿속이 매우 어지러웠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가슴이 막혀 취한 듯, 꿈꾸는듯, 바보가 된 듯, 미친 듯 하였다.

[p169]날씨가 흐리더니 가랑비가 내렸다. 저녁에 큰 비가 와서 밤새 지붕이 새러 마르지 않았다. 각 배의 사람들이 거처하는데 고생스러울까 매우 걱정이 되었다.

[p172]”수군 여러 장수와 경상도의 장수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이제부터 예전의 나쁜 습관을 모두 바꾸라”는 말씀이 있었다. 통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는 원균이 취하여 망발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p172]밤 10시경 급창 금산과 처자 세 명이 모두 전염병으로 죽었다. 3년 동안 눈앞에 두고 부리던 자가 하루 저녁에 죽어 버리니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p174]아침에 울이 본영으로 갔다. 헤어질 대 마음이 아득하기만 하였다. 혼자 빈 동헌에 앉아 있노라니 마음을 걷잡을 길이 없었다. 오후 늦게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어대니 걱정이 앞서 마음이 더욱 무겁기만 하였다. 충청 수사가 왔기에 활쏘기를 하다가 같이 저녁을 먹었다. 달 빛 아래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옥피리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오랫동안 앉아있다가 헤어졌다.

[p175]그런데 아내의 편지에는 면이 더위를 심하게 앓는다고 한다 몹시 걱정스럽다.

[p180]궂은비가 내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는데 하루 내내 그치지 않았다. 울이 가는 길이 힘들지 않을까 매우 걱정스러웠다. 또 면의 병이 어떤 상태인지도 궁금하였다.

[p180]저녁에 탐색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면의 병이 중하다고 하니 걱정스럽기 짞이 없다.

[p180]비가 계속 내렸다. 혼자 앉아서 아들 면의 병세를 걱정하다가 글자를 짚어 점을 보았더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으니, 밤에 등불을 얻는 격이라고 한다. 두 괘가 모두 좋아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또 유정승에 대하여 점을 쳤더니, 바다가 배를 얻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다시 점쳐 보았더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매우 좋았다. 저녁 내 비가 내렸다. 혼자 앉아 있노라니 외로운 심정이 이길 길이 없었다. 늦게 송정이 돌아갈 때 소금 한 섬을 주어 보냈다. 오후에 마량 첨사와 순천 부사가 보러 왔다가 밤을 타서 돌아갔다. 비가 갤 것인지를 점쳤더니, 뱀이 독을 내뿜는 것 같다는 괘를 얻었다. 큰 비가 올 듯하여 농사가 매우 걱정스러웠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초저녁 발포 탐색선이 편지를 가지고 돌아갔다.

[p193]아침에 탐색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심하다고 한다. 이미 생사가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러하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는 어떻게 살아갈까? 가슴이 아프고 괴롭구나.

[p194]이른 아침에 세수를 하고 조용히 앉아서 아내의 병세를 점을 쳤더니, 중이 속세에 돌아오는 것 같다고 하였다. 다시 쳤더니, 의심이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매우 길하다. 또 병세가 나아질 것인지 어떤지를 점쳤더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이것도 오늘 안으로 좋은 소식을 들을 징조이다.
………저녁에 탐색선이 들어왔는데 아내가 나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기운이 몹시 약하다고 하니 매우 걱정이다.

[p198]혼자 앉아서 간방의 꿈을 떠올려 보았다. 바다 가운데 외딴섬이 달려와 눈앞에 주춤 서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모두들 놀라 사방으로 달아났지만 나만은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보았다.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이것은 왜 높이 평을 구걸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내가 좋은 말을 타고 천천히 갔는데 이것은 내가 임금의 부름을 받아 올라갈 징조이다.

[p208]상주에 사는 사촌누이의 편지를 가지고 그 아들 윤엽이 본영에 왔다. 누이의 편지를 보니 눈물이 흐르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p210]”국가가 위험한 때를 당하여 무거운 책임을 맡았다면서 어찌 보답할 마음은 가지지 않고, 음탕한 여자를 거느린 채 관사에는 들어가지 않고 성밖 집에 멋대로 거처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니 어떻게 할 것인가? 또 각 고을과 진포의 수군에 게 육전이나 쓸 군기를 배정하여 독촉하기에 바쁘니, 이 또한 무슨 이치인가?” 하였다. 순변사는 말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니, 한바탕 꿈이었다.

1595년 휴전 상태가 계속되는 속에서

[p216]장흥 부사가 찾아 왔는데 그에게 들으니 순변사 이일이 하는 것이 아주 모양이 좋지 않다고 한다. 나를 해치려고 애를 쓴다고 하니 우습기 짝이 없다.

[p233]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하루 내내 주룩주룩 내렸다. 사직의 위엄과 영령의 도움으로 겨우 형편없는 공밖에 세우지 못했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 한 공로도 바치지 못하였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군사를 거느리기에는 부끄러울 뿐이다.

[p235]새벽에 울이 들어왔는데 구순 어머니의 병환이 좀 나아지셨다고 한다. 그러나 구순 노인이 이렇게 위독한 증세를 얻으셨으니, 근심스러워 눈물이 흘렀다.

[p239]나라의 제삿날이어서 관청에 나가지 않았다. 혼자 수루에 기대어서 나라를 생각하니 위태로비가 아침 이슬과 같았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재목이 없고, 밖으로 나라를 바로잡을 기둥이 없으니 이 나라가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p239]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신이다. 슬픔에 젖어 생각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p241]이를 보니 놀랍고 황송함을 이길 수가 없다. 김응서란 대체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 회개하여 힘쓴다는 말을 듣지도 못하였는가? 만야 쓸개 있는 자라면 반드시 자결이라도 할 것이다.

[p246]하루 내내 여러 장수와 같이 술에 취하였다. 밤에 희미한 달이 수루를 비추어서 누워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시를 읊조리며 기나긴 밤을 지냈다.

[p247]체찰사와 만나 조용히 이야기 나누다 보니 그는 백성의 고통을 없애려는 일에 뜻이 있는 것 같다. 호남 순찰사가 헐뜯으려 하는 기색이 많으니 한탄스럽다. 나는 김응서와 같이 늦게 촉석루에 올라가서 장사들이 싸우다가 죽은 곳을 둘러보았다. 참담하고 비통하기 그지 없었다.

[p251]같이 이별주를 마시고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 선 수사와 작별하며 짧은 시 한 수 를 써 주었다.

북쪽에 갔을 때도 고락을 같이 하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하는 구나.
오늘 밤 달빛 아래 한 잔 술을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을 아쉬워하겠구나.

1596년 왜적이 드디어 철수하다
[p268]맑았으나 서풍이 거세게 불었다. 이른 아침에 적이 다시 나올지 어떨지 점쳤더니,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다시 점을 치니 임금을 뵙는 것 같단 괘가 나왔다. 좋은 괘라고 모두 기뻐하였다.

[p269]이전에 영의정이 천식으로 몹시 편찮다고 들었는데 나았는지 모르겠다. 글자로 점을 쳐보았더니,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또 오늘 어떤 길흉의 조짐이 있는지 들으려고 점을 쳐 보니,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이 괘는 매우 좋구나. 매우 좋구나!

[p270]늦게 대청에 나가 공문을 처리한 다음 항복한 왜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먹였다.

[p277]밤에 바다 위에 떠오른 달은 대낮처럼 밝고 물결 위에 비친 빛은 비단결 같은데, 혼자서 높은 수루 위에 기대어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어수선하여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p294]아침에 남여문을 통하여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기쁘기 그지없었으나 다만 믿기 어려웠다. 이 소문이 일찍부터 퍼졌는데 아직 정확한 기별은 오지 않았다.

[p296]밤이 깊도록 즐거이 뛰놀게 하였는데 그것은 내 스스로 즐기자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들의 수고를 풀어주자는 생각에서였다.

[p307]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화상을 멀리 쏘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었다. 혼자 점을 쳐 보니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또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은 머리 위에 있어야 할 갓을 걷어차니 적의 괴수를 모조리 잡아 없앨 징조라고 하겠다.

[p308]해가 진 뒤에 항복한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 된 사람으로서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마당놀음 한 번 하기를 간절히 바라므로 금하지 않았다.

[p312]수루에 앉아 아이들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느라고 바람에 몸이 상하는 중도 몰랐다. 늦게 대청에 나가서 황 몇 순을 쏘다가 몸이 몹시 불편하여 그만두고 안으로 들어왔다.

[p319]하루 내내 노를 빨리 저어 밤 10시쯤 어머니가 계신 곳에 당도하였다. 백발이 성성한 체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끊어지는 듯하시는 모습이 하루하루를 지탱하시기도 어려운 듯하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서 밤새 위로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풀어 드렸다.

[p321]병영으로 돌아왔다. 원균이 흉한 짓을 하였으나 여기에 적지 않겠다.

[p324]이중익이 군색한 말을 많이 하므로 옷을 벗어 주었다.

[p326]새벽에 배를 돌려서 어머니를 모시러 갔다. 일행과 더불어 배를 타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하루 내내 즐겁게 모시게 되어 다행스러웠다.

1597 백의 종군에 나서다
[p331]울적한 마음을 한층 이기기 어려웠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헌도 왔다.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니 사양하지 못하고 억지로 술을 마셨더니 몹시 취하였다.

[p337]조금 있자니 배에서 달려온 좀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 대강 적으리라.

[p338]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리고 나니 비가 크게 쏟아졌다.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으로 떠날 길이 또한 급해서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다만 빨리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천안 군수가 돌아갔다.

[p342]꿈에 돌아가신 두 분 형님이 만나 서로 붙들고 울었다. 형님들이 말씀하시기를 “장사를 지내기도 전에 천리 밖에서 종군하고 있으니, 누가 일을 맡아서 한다는 말이야? 통곡을 하더라고 어떻게 할 것인가?”하셨다.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까지 따라오셔서 이와 같이 근심하고 걱정하시니 슬프고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또 남원의 추수 일을 감독하는 데 대해서도 걱정 하시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매일같이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도 아마 형님들의 혼령이 은근히 걱정하여 주시는 것이라 생각하니 슬픔이 한결 더했다.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슬퍼서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었는데도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나를 밝혀 주지 않는가? 어찌 빨리 죽기 않는가?

[p344]원균이 온갖 계략을 써서 나를 모함하려고 하는데 이 역시 운수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에 잇닿아있으며, 헐뜯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만 한탄할 따름이다.

[p348]나라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으로서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결정하니, 이러다가는 끝이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이리라.

[p354]아들 열이 곽란을 앓아 간밤에 내내 신음하여 걱정으로 속이 다 탔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열이는 닭이 울어서야 차도가 조금 있어 잠이 들었다.

[p363]꿈에 원균과 한자리에 있는데 내가 원균 위에 앉아서 음식상을 받을 때 원균이 즐거운 기색을 보이는 것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 없다.

[p371]모든 사람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하였다. 또한 대장의 잘못은 말로 다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거제의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 현령과 새벽 2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하여 눈병을 얻었다.

[p374]밤에 꿈을 꾸었는데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이른 아침 뜻밖에 선전관 양호가 와서 임금이 내린 교서, 유서와 유지를 가져왔는데,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p374]아침을 먹고 길을 떠나 옥과현 경계에 이르니 피난민들로 길이 가득 찼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 부축하고 가는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위로하며 달랬다.

[p381]벽파진으로 돌아와서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기를 “오늘 밤에는 반드시 적의 야습이 있을 것이니 모든 장수들은 미리 알아서 준비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대로 시행하리라.” 하고 두 번 세번 거듭 타이르고 끝마쳤다. 과연 밤 10시쯤 적이 쳐들어와서 어둠을 이용하여 탄환을 계속 쏘면서 공격해 왔다. 내가 탄 배가 곧바로 앞장을 서서 지자포를 쏘았더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다. 적들도 우리를 당할 수 없음을 알고 네 번쯤 들어왔다 물러갔다. 이들은 전에 한산도에서 승리를 얻은 자들이었다.

[p385]밤에 신인이 꿈에 나타나 가르쳐 주시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하였다.

[p386]김응함을 불러 “너는 종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하였다.

[p393]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 떨어졌는데 말이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안는 듯하더니 깨었다. 이것이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p394]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거칠게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단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들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운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p403]아산 집에 편지를 쓰려고 하니 눈물을 거둘 수가 없었다. 죽은 아들을 생각하는 정을 누르기 어려워서였다.


Ⅲ. 내가 저자라면

난리 중에도 매일을 기록하다.

이 책은 전쟁을 겪는 장군이 자신의 매일의 일상을 기록한 일기이다. 사실 내용이라 봤자,
날씨와 그 날 일어났던 일, 그 날 일어났던 일에 대한 감흥 뿐이다. 잘라서 말하면 독자로
가 읽기에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난리 중에 이 글을 썼다는 생각에 미치면 이야기가 약간 달라진다. 난리 중,
그러니까 그는 날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어쩌면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에서 그가 적었던 일기는 그가 얼마나 날마다 깨어 있는 인간이었나를 보여준다. 그는 날마
다 일기를 쓰면서 급박한 상황 속에서 자칫 잘 못 내렸을 수도 있을 자신의 판단에 대해서
재고를 해 볼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다. 한 국
가의 정사, 그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전쟁의 진행 상황, 개인적인 감정에 이르기 까지 그
는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일기를 통해 자기 자신과 대화를 했던 것이다.
날마다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자, 이순신은 날마다 자신을 성장시킬 수단을 하나
가졌던 셈이다.

영웅으로 불리운 평범한 인간

우리에겐 전쟁 영웅으로 남아있는 이. 순. 신. 오늘날 그의 일기를 보면 그는 영웅이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평범한 인간 이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는 어머니를 그리워 하고, 자식
들을 걱정하며, 아들의 죽음 앞에서 목 놓아 울고 싶어하던, 술을 마시고 놀이를 하던 그런
평범한 한 인간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평범한 우리들도 영웅을 꿈꾸어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 평범한 그가 훌륭한 전략을 만들어 내고, 부하들을 잘 다스리며, 난중에도 식구들을 잘 건사하고, 주변의 시기와 질투를 잘 참아내며, 끝내는 멋지고 의로운 죽음을 맞는 그런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평범한 우리도 우리 안의 영웅성을 끌어 내어 영웅의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그러나, 개인적인 일기이니 좀 더 감정적으로 솔직했으면

일기는 개인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일기를 쓰면서도 자신의 내면 속의 센서(sensor)를 작동을 시킨다. 다시 말하면 자유롭게 자신의 느낌을, 의견을 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한 옳은 일을, 의무를 기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기가 성찰의 기능도 하고 있지만 일면으론 자신의 감정을 분출을 시키는 그런 기능도 담당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순신의 일기는 좀 더 감정적으로 솔직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바램을 한 번 가져본다. 유교주의적인 질서의 사회에서 남자로서 또한 사회의 지도자로서 살아가야 했던 한 사람으로서 그는 일기 내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많이 억누르고 있다. 일기에서만은 좀 더 많이 울고, 많이 아파하고, 좋은 감정도 표현해 보고, 심한 욕설도 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으면 그 자신에게나 훗날 그의 읽기를 읽는 우리 독자들에게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일기를 통해 많은 묵은 감정들을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이고 훗날 그의 읽기를 읽는 우리들은 그의 감정에 좀 더 몰입해서 더 재미있을 책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IP *.72.227.114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