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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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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2일 08시 00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종종 사람들에게 패러디되기도 하는 이 문장은 ‘이순신’ 하면 떠오르는 그의 명언일 것이다.
광화문에 서 있는 이 장군의 동상, TV에서 방영됐던 불멸의 이순신, TV광고로 이용되기도 한 이순신은 그만큼 어렸을때부터 익숙한 존재이다.
너무 익숙한 존재이기에 한 인간이라기 보다는 그냥 거기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단 하나의무생물적인 상징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난중일기를 통해 만나는 그는 성웅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이었다.
이순신 그는 누구인가?

약력
본관 : 덕수(德水) / 자: 여해(汝諧) / 시호: 충무(忠武)
- 1545년 : 서울 건천동(을지로 4가와 충무로 4가 사이) 출생
- 1577년 : 식년무과에 32세로 병과에 급제. 권지훈련원봉사로 첫 관직에 오름.
- 1589년 : 선전관과 정읍(井邑) 현감
- 1591년 :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를 거쳐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승진.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씀
- 1592년 : 임진왜란 일어남.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 (사천포해전)
- 1593년 :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됨
- 1597년 : 모함을 받아 파직,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됨. 이후 백의종군
- 1598년 :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의 유탄에 맞아 사망
- 그의 묘소 : 아산시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어 있음

대기만성형 인물
그는 32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무과에 합격해 공무원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물론 이전인28세에 시험에 응시했다가 말에서 떨어져 실격하기도 했지만 그것 또한 그 시대에 비춰볼 때 나이가 꽤 들어 늦게 일을 시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후 그가 만들어 낸 성과와 죽은 이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점들을 살펴보면 모든 면에서 대기 만성형 인물이라고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볼 때 20대에, 30대에 뭔가 이루지 못했다고 전전긍긍해 하고 무조건 앞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남들은 한창 달릴 시기이지만 중간에 한 2,3년쯤 멈춰 서서 본인에 대해, 본인의 진정한 천복에 대해 깨닫고 정진할 포인트를 마련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더 큰 길로 갈 수 있는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완벽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인간적인 사람
그가 직장 생활 중에서 겪는 어려움은 적지 않았다. 38세에 파직, 39세 승진, 43세에 첫 번째 백의 종군, 44세 낙향, 47세에 전라 좌수영, 48세에 임진왜란 발발, 53세 두 번째 백의종군, 54세에 노량해전을 끝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인생 자체가 굴곡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서 결코 진중함을 잃지 않았고 자신의 위치 및 해야 할 일을 해냈다.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결코 힘들었을 험난한 길이였으리라.
하지만 그런 그가 그렇게 인간미 없어 보이는 완벽한 인간형은 아니었다. 그의 일기를 살펴보면 맘에 들지 않는 이에게는 그 자신도 원망하거나 비판하기도 하고 병을 한탄하고, 부모에 대한 효심, 자식에 대한, 자신이 거느리는 사병들에 대한 사랑이 넘쳤던 그 누구보다 인간적이고 인간적이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세가지 설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의 죽음 외에 다른 두 가지의 견해들이 있다.
하나는, 그가 스스로 자살을 한것이라는 설인데, 즉 이순신은 우연히 전사한 것이 아니라, 자살하기 위해 일부러 갑옷도 벗어두고 적을 바로 앞에 두고 대치했다는 의견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순신은 전사한 것이 아니라 친족 및 측근들과의 합의하에 노량 해전에서 몰래 빠져 나와 은둔하여 살아갔다는 설인데, 당시 전쟁에서 이겼다 할지라도 그가 받게 될 시기와 이후 행보의 어려움을 감안해 은둔을 택했다는 의견이다.
어떠한 것이 진실인지, 400여년이 지난 현재에 그 사실을 밝혀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분명 이순신의 죽음에는 석연치 않은 점들이 많았고 또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인물이기에 그에 관한 신비로운 설도 많아진 것이 아닐까. 어떠한 죽음이 되었건 그가 역사의 장막으로 사라짐으로써 많은 아쉬움이 남기는 영웅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 참고 사이트 : 성웅 이순신 사이트http://www.e-sunshin.com/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난중일기와 이순신에 대하여
“이순신은 무인 속에 있어서 이름과 칭찬이 드러나지 않다가, 신묘년에 서애 유성룡이 정승이 되어 그를 슬만한 인재라고 하여 정읍 현감에서 차례를 뛰어넘어 전라 좌수사를 제수하니, 드디어 중흥의 제일 명장이 되었다. 아아, 지금 세상엔들 어찌 또한 이와 같은 인물이 없겠는가. 다만 인재를 알아 추천하는 자가 없을 뿐이다.”_이수광, <지봉유설>

1592년 왜적의 침략이 시작되다.
48p 적선이 있는 줄을 알고 이순신은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타이르기를 “망령되게 움직이지 말고 조용하고 무겁기를 산과 같이 하라”하였다.

53p ..그때 뜻밖에 본도의 도사 최철견의 첩정이 도착하여 비로소 임금께서 평안도로 옮겨 가셨다는 기별을 들었다. 놀라움과 분함이 극도에 달하여 하루 내내 서로 붙들고 오장이 찢어지듯 통곡하였다.

56p 2일 당포에서 싸운 뒤에 왜인들이 죽은 왜인의 머리를 많이 베어 한군데 모아 불사르고 그 길로 육로로 향하는데, 길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도 죽일 생각도 못하고 슬피 울면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75p ..그러나 위로 올라간 적들이 여러 곳에 꽉 들어 차 있는데, 그들이 돌아갈 길을 끊는다면 막다른 골목에 몰린 도적이 되어 버릴 게 걱정되었다.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87p 원 수사는 너무도 음흉하여 말로는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다.

92p 우수사와 활쏘기를 하였다. 그의 활 솜씨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서 가소로웠다. / 새벽에 대궐 쪽을 향하여 예를 드렸다.

94p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

98p 나라를 위해 매우 걱정스러웠다. 일마다 이러하니 더욱 탄식이 나오고 눈물이 흘렀다.
100p 여러 장수가 애써 권하여 몸도 불편한데 억지로 고기를 먹게 되니 매우 마음이 슬펐다.

108p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고 하여 어찌 싫어할 일이겠냐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뽑을 것이다.

114p 밤기운이 매우 서늘하여 자리에 누웠어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잠시도 풀리지 않았다.

117p 오늘 밤 달빛이 맑고 밝아서 티끌 하나 일지 않네. 물과 하늘이 한 빛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선듯 불어 온다. 뱃머리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는구나. / … 그러나 남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다.

120p 비가 먼지를 적실 정도로 왔다. 몸이 매우 불편하여 하루 내내 신음하였다. /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 나그네의 가슴이 어지럽다. 혼자 배의 뜸 밑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머리에 들고 정신이 맑아지네.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어느덧 닭이 우는구나.

121p 전사한 장병들의 명부를 보내왔다.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125p 아침에 맑았다가 저녁에는 비가 왔다. 농사를 생각하니 매우 흡족하였다.

127p 달빛이 대낮 같고 물결이 비단결 같아서 가슴속 생각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1594년 명,일 간에 강화가 진행되다.
149p 바다 위에 뜬 달이 맑아서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151p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평정될 리가 없다.

167p 하루 내내 빈 정자에 혼자 앉아 있었더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고 머릿속이 매우 어지러웠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가슴이 막혀 취한 듯, 꿈꾸는 듯, 바보가 된 듯, 미친 듯하였다.

179p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있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친다.

181p 만일 비상 사태에 의한 명령이 있을 때에는 비밀 병부와 맞추어 보아 의심이 없다고 인정한 후에 명령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188p 경상 수사의 군관과 색리들이 명나라 장수를 접대할 때 여자들을 시켜 떡을 이고 오게 하였다는 일 때문에 벌을 주었다.

208p 혼자 방 안에 앉아 있으니 슬픈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1595년 휴전 상태가 계속되는 속에서
229p 오늘은 어머니 생신이다. 직접 잔을 올리지 못하고 먼 바다에 홀로 앉아 있으니 가슴속에 품은 생각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으랴!

230p 혼자 대청 가운데 앉아 있으니 가슴속에서 갖은 생각이 만 갈래로 갈라진다.

233p 사직의 위엄과 영령의 도움으로 겨우 형편없는 공밖에 세우지 못했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 한 공로도 바치지 못하였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군사를 거느리기에는 부끄러울 뿐이다.

237p 수사의 병이 그리 중하지는 않았으나 바람과 습기에 많이 상한 듯 하여 매우 염려스럽다.

239p 혼자 수루에 기대어서 나라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았다.

241p 밤이 깊어 수루에 등을 대니 초생달 빛이 수루에 가득 차서 갖은 생각을 이길 길이 없었다.

251p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 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251p 북쪽에 갔을 때도 고락을 같이하고 /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하는구나 / 오늘 밤 달빛 아래 한 잔 술을 나누고 나면 / 내일은 이별을 아쉬워하겠구나

258p 홀로 앉아서 아버님을 그리워하니 떠오르는 온갖 회포를 막을 길이 없다.

1596년 왜적이 드디어 철수하다.
277p 밤에 바다 위에 떠오른 달은 대낮처럼 밝고 물결 위에 비친 빛은 비단결 같은데,혼자서 높은 수루 위에 기대어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어수선하여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308p 해가 진 뒤에 항복한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 된 사람으로서는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마당놀음 한번 하기를 간절히 바라므로 금하지 않았다.

312p 수루에 앉아 아이들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느라고 바람에 몸이 상하는 줄도 몰랐다.

314p 어두워지자 달빛은 비단 같고 나그네의 생각은 만 갈래라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319p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끊어지는 듯 하시는 모습이 하루하루를 지탱하시기도 어려운 듯하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서 밤새 위로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풀어 드렸다.

324p 이중익이 군색한 말을 많이 하므로 옷을 벗어 주었다.

337p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길에서 바라보니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 다 적을 수가 없다.

341p 아침에 울의 이름을 열 이라고 고쳤다. ‘열’은 음이 ‘열恱’이다. 싹이 처음 트거나 초목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뜻이어서 글자 뜻이 매우 좋다.

343p 매일 같이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도 아마 형님들의 혼령이 은근히 걱정하여 주시는 것이라 생각하니 슬픔이 한결 더 했다.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슬퍼서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었는데도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나를 밝혀 주지 않는가?

348p 나라 안팎에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으로서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결정하니, 이러다가는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 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 것이리라.

385p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하고 엄하게 약속하였다.

386p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군법에 죽고 싶으냐?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것이냐?” 하였다.

394p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 밖에 없구나! 마음을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396p 바람이 몹시 차가워 배에 탄 사람들이 추워서 얼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405p “…. 옛 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가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예에도 원칙을 지키는 경이 있고 방편을 취하는 권이 있는 것처럼 꼭 원칙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경은 내 뜻을 잘 깨달아서 소찬 먹는 것을 그만 두고 권을 좇도록 하다.”


3. 내가 저자라면
이순신의 일기인 ‘난중일기’를 읽다 보면 다양한 시대상과 함께 그의 업무와 성격적인 기질등이 드러난다.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관음증적 즐거움을 주는 것과는 다른 메마른 건조체의 일기 내용이지만 약 400년 전 우리 선조의 일기를 통해 조금이나마 살펴 보는 그 시대의 모습들이 잔잔한 재미를 주는 책이다. 또 ‘성웅 이순신’이라고 불리며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그를 문장으로 만나는 것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게 하는, 비록 혼자만의 친밀함이지만 한 인간을 바라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먼저, 이순신 장군의 일기를 통해서는 그 시대의 생활상들이 드러난다.
그 당시에는 제사가 중요한 의식의 일부로서 나라의 국경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국가의 제삿날에는 관공서도 쉬었던 것으로 보이고 개인의 제삿날 또한 바깥 출입을 삼가하며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보인다. 아직까지 제사가 남아 있지만 그것의 의미를 굉장히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서로간의 마음을 전하는 방법으로 소소한 먹거리들을 자주 주고 받고 한 것 같다. 그들은 서로에게 떡을 해오거나 고기, 청어, 홍시, 미역, 유자등을 주고 받았다. 먹고 사는 문제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었기에 먹거리를 들고 서로를 방문하는 모습들은 중요하고 일상적인 모습들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술을 마시며 자주 친목을 도모하곤 했는데, 일기에서 보이는 바로 이순신의 경우 잘 마시지 못하는 술을 힘들게 마시고 토를 하거나 앓아 눕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술은 현재나 과거나 우리 선조들의 최고의 접대 방법 및 친해지는 수단 이기도 하였던 것 같다.

그들의 놀이문화 또한 새삼 눈에 들어왔는데, 그들은 주로 활쏘기나 장기, 바둑 두기, 씨름 하기, 종정도 놀이등을 즐겼다. 전쟁 중이지만 그러한 소소한 재미마저 없었다면 그들의 삶은 더욱 팍팍하고 고달펐으리라. 어제,내일 동료들을 잃게 될 상황에서도 모두 모아 씨름을 시키거나 게임을 벌여 상을 주고 하는 모습들을 상상하니 일견 씁쓸해 지기도 한다. 이는 전쟁영화에서도 많이 접해온 가슴 아픈 장면이리라.

이순신 장군은 또 직접 다양한 생활 양식을 마련하는 방편들을 계획하고 실행하기도 한다. 왜적과의 전쟁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그 시대의 그는 농사에 대한 걱정 및 무 심기, 미역 따기, 생선잡기, 칡 캐기, 메주 쑤기등 다양한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걱정 및 해결까지 해나갔다.

이순신 장군의 일기에 비춰보면 그 시절 또한 비리가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라 안팎에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으로서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결정하니, 이러다가는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 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 것이리라.( 348p)” 라고 걱정하거나 암행어사의 비리를 적어놓은 그의 일기 속 넋두리를 보면 과거나 현재나 무전유죄,유전무죄라는 없어져야 할 이 말은 시대가 아무리 발전하고 변해도 사라지지 않는 우리가 반드시 없애야 할 구시대적 유물이 아닐까 싶다.

이순신 장군 개인적인 인생 부분을 일기를 통해 살펴본다면 그는 꽤나 우울하고 고단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사실 우울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는 혼자 있는 시간에 수많은 고민과 걱정으로 걱정하고 괴로워 하였다. 그랬기에 못 먹는 술이지만 접대 삼아 자주 술에 취해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또한 계속되는 바다 생활 때문인지 자주 잔병치레를 했는데 몸이 아파 공무를 보지 못하는 때가 꽤 많기도 했다. 병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그는 오 만가지 생각들로 갈갈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라고 자주 표현하기도 한다.

그는 어머니와 처,자식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는 상황이 죽는 날까지 오래 지속되었는데, 이는 그의 마음에 하나의 그늘로 남아 그를 괴롭히는 근심의 한가지였던 것 같다. 가족의 안위를 항상 궁금해 하고 어머니 생신에 축수 잔을 올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한탄하며 그는 스스로 많이 괴로워한다.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고 하여 어찌 싫어할 일이겠냐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뽑을 것이다.(108p)”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94p)”등에서 드러나듯 누구보다 효심이 깊었던 그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더더욱 그의 마음의 상처와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리라.

일기 속에는 현재와 같이 통신이 발달한 시절이 아니라 인편에 의해 대부분의 정보를 주고 받고 하게 되는 상황에 정보를 믿지 못하고 속고 속이는 상황들도 자주 묘사되기도 한다. 다양한 정보들에 대한 적절한 판단들로 진실을 가려내는 것들도 책무가 막중한 전장 속의 수장으로서 이순신 장군에게 부담과 무거움 짐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종종 사병들을 불러 피리, 퉁소를 불거나 거문고를 연주하게끔 하였는데, 우울해지는 그의 마음을 추스릴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리라.
또한 그는 자주 점을 치거나 꿈 풀이를 하기도 했는데, 앞을 알 수 없는 답답한 상황에 그가 마음의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다.

그는 또한 마음이 용감하고 씩씩하기만 한 장수의 모습뿐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한 사람이었다.
“경상 수사의 군관과 색리들이 명나라 장수를 접대할 때 여자들을 시켜 떡을 이고 오게 하였다는 일 때문에 벌을 주었다. (188p) “
“이중익이 군색한 말을 많이 하므로 옷을 벗어 주었다.(324p)”
“바람이 몹시 차가워 배에 탄 사람들이 추워서 얼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396p)”
이처럼 여자를 함부로 부리거나 사병들을 걱정하는 마음, 종으로 부리는 여자 아이를 멀리 보내놓고도 자식과 같이 걱정하는 모습에서는 권위적이지 않은 따뜻한 아버지와 같은 그의 성품이 보인다.

일기에 종종 보이는 비리자라던가 원균에 대한 그의 서술과 느낌들을 보면 그 또한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고 답답해 한 아주 인간적인, 보통의 우리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성인이고 완벽할 것만 같은 그에게도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는 모습들이 있다는 것이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성인의 모습 속에 드러나는 진솔적인 면모에 대한 아이러니랄까..

주욱 이순신 장군의 일기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일기는 참 단순한 구조를 가진다.
1. 날씨는 반드시 적는다. (날씨를 이렇게나 빠지지 않고 적은 이유는 수군장으로서 날씨가 중요한 관심사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날씨 중심의 작성이 이루어 진 것일까?)

2. 몸에 일어나는 증상들은 반드시 적는다.

3. 누가 오고 갔는지, 그날의 사건중심으로 되도록이면 꼼꼼이 적는다.

대략 3가지 정도에서 이순신의 그의 일상을 기록해 나갔는데, 여기에 아쉬움이 있다.
종종 시문을 지어 일기에 적기도 한 그는 무과출신의 장군이지만 훌륭한 문장가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그의 재능을 조금 더 살려 일기를 더욱 풍성하게 작성해 냈다면 그것을 접하는 지금의 우리에게 더욱 많은 울림과 작품들을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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