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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2일 09시 59분 등록


평역 난중일기
이순신 원저, 김경수 편저 - 행복한 책읽기


I. 저자에 대하여

우리나라 최고의 스타 장군, 이순신을 만났다. 선발기준이 상당히 까다로운 변화경영연구소의 강사진 중 그는 최초의 한국인이었으며, 지극히 사사로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개하길 꺼려하는 자신의 '일기'를 교재로 삼은 특이한 인물이었다. 약 400년 전의 이 인물은 TV속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게임 속의 주인공으로, '이순신 리더십'이라는 리더십의 모델로 지금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번에 읽은 김경수 편저의 '평역 난중일기'는 부록으로 이순신에 대한 꽤 괜찮은 설명들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을 부분적으로 인용하며, 나의 말을 덧붙이고자 한다.

'난중일기' 이전의 그의 생애

이순신은 1545년(인종 1년) 4월28일(음 3월8일)에 서울 중구 건천동에서 이정(본관:덕수)과 초계 변씨 사이의 4남 1여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터는 현재 명보극장과 가까운 곳으로, 서울의 충무로역과 을지로3가 전철역을 있는 길 위에 위치한다.

그의 아버지 이정은 자신의 아버지(이순신의 할아버지) 백록이 중종 때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고충을 겪은 후, 아예 벼슬을 외면하고 산 인물이다. 그리하여, 아예 서울을 떠나 아내의 친정이 있는 아산의 백암리, 현재 현충사가 있는 방화산 기슭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다른 양반집 자제들과 마찬가지로, 이순신 또한 두 형과 함께 일찍부터 유학을 공부한다. 하지만, 22살부터 시작한 무술이 그의 관심을 더 끌었던 듯하다. 당시 사회가 무(武)를 천시하는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무인으로서의 길을 택한다.

이순신은 이웃 동네에 살던 전 군수 방신의 딸과 21세에 혼인하고, 이 상주 방씨 부인과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한 명의 아내가 더 있었는데, 바로 무과에 응시하여 낙방한 후 얻은 해주 오씨이다. 그녀와의 사이에는 2남2녀를 두었다. 28살에 처음으로 무과에 응시했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낙방을 하고 만다. 하지만, 4년 후에 다시 도전하여 병과 4등으로 급제하였고, 그해 12월에 한남 삼수 동구비보의 권관에 임명되었다.

3년의 임기를 오지에서 보낸 그는 35세에 서울로 돌아와 훈련원의 봉사로 재직한다. 이때 그에게는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하는데, 다름 아닌 자신의 상관인 병조정랑 서익이 제의한 부당한 인사청탁을 거절한 것이다. 이에 서익은 나쁜 감정을 갖게 되고, 후에 결국 보복을 당하게 된다. 이처럼 곧은 이순신은 결국 서울 생활 8개월 만에 다시 충청병사의 군관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그리고 9개월 후 전남 고흥읍의 발포(전남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 만호로 수군과의 인연을 맺게 된다. 하지만, 서익이 이순신을 모함하는 장계를 올린 것으로 인해 결국 파면되고 만다. 1581년, 그이 나이 37세였다.

다행이 다음해 5월에 복직되어 한 동안 일 없이 지내다가 이듬해 5월에 다시 훈련원 봉사로 임명된다. 훈련원에서 14개월을 보낸 그는 함경도 남병사의 군관으로 북청에 부임했다가 3개월만인 10월에 경흥 건원보의 권관에 임명되었다. 1583년 10월에는 여진족 추장 울지내를 잡는 공을 세우기도 했으나, 포상을 받기는 커녕 이 일로 북병사 김우서의 모함을 받는 황당한 일을 겪기도 한다. 같은 해 11월8일, 그는 아버지 이정은 죽음을 맞이하나, 이순신의 이를 다음해 1월에야 알게 된다. 이 소식을 듣고 그는 곧 고향으로 돌아와 3년 상을 치렀다.

탈상을 마치고는 사복시 주부로 임명되었다가, 서애 유성룡의 추천으로 16일 만에 조산보 만호로 임명된다. 이듬해 8월에는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한다. 그리나 여진족의 침입으로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생기자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물어 첫 번째 백의종군을 명 받는다. 1588년 1월 백의종군이 해제되었고, 윤6월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지내다가 이듬해 2월 전라감사 이광의 부름을 받는다. 군관겸 조방장 자리였는데, 이것이 그가 상관에게 인정받는 첫 무대가 된다. 같은 해 12월에는 정읍 현감에 임명되었으며, 이때부터 온전하게 가장의 책임을 지게 된다. 그의 어머니와 두 형이 남긴 조카들과 한 집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2년 2월에 그는 진도 군사로 발령받는다. 그런데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 가리포(완도) 첨사, 전라좌수사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는 승진의 단계를 무시한 발탁이었으며, 유성룡의 강력한 추천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2월13일, 그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자리인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부임하게 된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순신은 그 해 1월 1일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직전인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 동안의 병영 생활을 몸소 보고 듣고 행한 대로 일기에 남겼다.

'난중일기' 속의 이순신

그는 매일 날씨를 기록하고, 그 날의 일과를 기록했다. 전쟁 중이었는데도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에 대해 느꼈던 것을 두서없이 옮겨본다. 우선 무엇보다도 꼼꼼한 사람이다. 전쟁 중에 몸이 아프건 아프지 않건, 바쁘건 한가하건, 술을 먹었건 안 먹었건 매일의 일을 단 한 줄이라고 그렇게 기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도 요즘처럼 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먹을 갈아 붓으로 썼을 것 아닌가? 정말 꼼꼼하다 일기에 적인 업무관련 내용을 보더라도 작은 것 하나하나 일일이 챙겨가며, 빠짐없이 처리했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람이 업무상으로 보면 좋긴 하지만, 밑에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혹시 피곤한 상관은 아니었을런지

그는 누구보다 애국자이고 타고난 공직자이다. 그는 무관이지만, 탁월한 선비정신의 소유자이다. 나라에 대한 걱정이 끊이질 않는다. 자기 먹고 살자고 한심한 짓을 하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그들의 그런 짓들을 보며 우습다는 말로 자주 표현한다. 그의 일기 속에는 우습고 답답한 세상에 대한 한탄이 많다. 세상이 우습고 답답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가보다. 자신의 일에 대해 소홀한 자들에게는 여지없이 벌을 내리고 처벌했다. 그에게는 요령이 통하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FM(Field Manual)대로 하는 군인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효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며칠을 멀다하고 어머니에 대한 걱정과 근심을 일기에 드러내고 있다. 남자들이 군대 가면 철이 들어 어머니 생각이 그렇게 많이 나는 것과 같은 이유일까? 항상 곁에서 지켜봐드리지 못해서였을까? 이순신은 생(生) 과 사(死)를 넘나드는 전장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염려가 한결같다. 효심 뿐 아니라, 자식에 대한 사랑도 남다르다. 그 시대의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아버지라 보기 어렵다. 요즘 세대의 아버지들처럼 세심하고 다정다감하다. 실제 자식들에게도 그러한 마음을 마음껏 표현했는지 일기 속에서만 그렇게 비춰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과 그 표현이 당시의 사람들 같지 않아 보였다. 특히, 아들 면이 전사했던 날의 그의 일기는 그 애절함이 가슴으로 전해진다.

당시 사람들의 기준에서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도 술을 꽤나 즐겼던 사람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술을 마셨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술에 취하게 만들었을까? 그는 군인이다. 그것도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실전에 배치된 최전선 군인이다. 그런 상황에서 술이 어느 정도 위안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그는 험한 바다 사나이 아닌가?

또 매일같이 활쏘기를 했다. 아마 거의 유일한 놀이였으며, 무관으로서의 훈련이었을 것이다. 손님이 오든. 혼자 있든, 훈련으로 쏘기도 하고, 내기로 쏘기도 했다. 진정 활쏘기를 즐겼던 듯하다. 내기에서 지는 것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으로 보아 활쏘기 실력이 그리 대단했던 것 같지는 않다.

나이 탓이었을까? 나라에 대한 근심과 가족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을까? 유난히도 몸이 안 좋았음을 기록한 날이 많아 보였다. 무관으로서 몸이 그렇게 안 좋을 때가 많다는 것이 다소 놀라웠다. 항상 우리들에게는 한 인간이기보다는 영웅의 모습으로 비춰졌던 사람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러한 아픔 속에서도 불타는 그의 애국심과 자신의 임무에 대한 사명감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그의 죽음에 대한 논란

'자살이냐? 타살이냐?'. 이순신도 역시 유명인인가 보다. 그의 죽음이 자살일지도 모른다는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뛰어난 전쟁영웅들도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조정의 간신들에 의해 비방과 모략을 받아 험한 꼴을 당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총탄과 화살이 빗발치는 전쟁 터에서 갑옷을 벗고 앞으로 나가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과연 나라 일에 그리 걱정 근심이 많던 그가 왜군을 앞에 두고, 자살을 할 생각을 했을까? 난 '아니다'에 한 표를 던지겠다.



II. 내 마음을 무찔러 든 글귀

머리말

이제 그 육중한 문자 속에 무성음으로 박제되어 있는 그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풀어야 하겠다고 생각한 그 순간부터, 나는 이곳(현충사)에 오고 싶었다.

일기에는 그 어떤 허세나 윤색이 없다. 나라를 걱정하고 전쟁을 지휘하는 이순신에게서는 지사와 장수의 풍모가,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자식을 애틋해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자에 대한 미움을 숨기는 않는 데서는 인간적 면모가, 시를 짓고 피리 소리에 취하여 비 내리는 정취를 감상하는 데서는 풍부한 감성이 느껴진다.

비범한 영웅의 웅변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의 목소리를 듣는다.

어떻게 해야 끊이지 않는 전쟁의 위협이 상존하는 이 현실을, 참된 인간의 모습을 잃지 않고, 더 나아가 그 위에 삶의 깊이를 더하며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임진년 壬辰年, 1592_

16) 자기 한 몸 살 찌울 일만 하고 이런 일은 돌아보지 않으니, 앞날 일도 짐작할 만하다. 토병 석공 박몽세가 돌 뜨는 곳에 가서 이웃집의 개에게 피해를 끼쳤기에 곤장 80대를 때렸다.

18) 선창으로 나가 쓸 만한 널조각을 고르는데, 때마침 수장안 피라미 떼가 몰려 들기에 그물을 쳐서 2천여 마리를 잡았다. 참 대단했다. 그대로 전선 우후 이몽구를 데리고 전선 위에 앉아서 술을 마시면서 봄 경치를 즐겼다.

19) 순찰사의 편지를 보니 통사들이 뇌물을 많이 받고 명나라에 무고하여 병사를 청하는 일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게 우리가 일본과 함께 딴 뜻을 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게 했다. 그 흉측함은 참으로 이를 데가 없었다. 통사들이 이미 잡혔다고는 하지만 이상하고 억울함을 이길 수가 없었다.

20) 석공들이 새로 쌓은 인공 연못의 구덩이가 무너졌기에, 석공들에게 벌을 주고 다시 쌓게 했다.

22) 여러 가지 전쟁 준비와 관련하여 결함이 많이 보여 군관과 색리들에게 벌을 주었으며, 첨사(첨절제사)는 잡아들이고 교수는 내어보냈다. 방비가 다섯 포구 중에서 가장 못하건만 순찰사가 표창하는 공문서를 올렸기 때문에 죄상을 검사하지 못하니, 참으로 기가 막혀 웃을 일이다.

27) 아산으로 문안 보냈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님이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정말로 다행한 일이다.

36)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으며, 나도 또한 왼편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으로 뚫고 나갔지만 중상은 아니었다.

39) 조금 뒤에 큰 왜선 20여 척이 부산에서 들어오다가, 우리 군사를 보고는 개도로 물러갔다.

43) 서풍이 차게 불어 나그네 마음이 산란했으며, 이날 밤에는 꿈자리도 어지러웠다.

계사년 癸巳年, 1593_

49) 우후가 술주정으로 망령된 말을 했다. 기막힌 꼴을 어찌 모두 말할 것인가. (중략) 큰 적을 무찌르는 일로 논의하는 자리에 이렇게까지 함부로 마시니, 그들의 사람됨에 분함을 이길 수 없었다.

59) 오늘은 어머님 생신이었으나,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술잔을 바치지 못하였다. 평생의 한이다.

62) 이날 밤, 달빛은 배 위에 가득 차고, 혼자 앉아 있으니 이 생각 저 생각에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밀었다.

63) 몸이 몹시 불편하여 베개를 베고 누워서 신음하던 중에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늦추며 머뭇거리는 것은 무슨 딴 꾀가 없지 않은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나라를 위한 걱정이 많았던 차에 이와 같은 일도 있으니, 더욱도 한심스러워 눈물이 났다. 점심 때 윤봉사에게서 "관동 아주머니가 양주 천천으로 피란 갔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울음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어찌 세상 일이 이렇게도 차가운고, 장례는 누가 맡아서 치렀을까?

71) 거친 바람은 그치지 않고 마음속도 산란하다.

72) 아침에 흰 머리카락 몇 가락을 뽑았다. 흰머리가 난 것이 큰일은 아니지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그래서 송구스럽다).

78) 나라는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도 놓이지 않아 홀로 배 뜸 밑에 앉아 있노라니 온갖 생각이 일어난다.

91) 식사 후에 우수사의 배에 가서 하루 종일 이야기했다. 거기서 원 수사의 음흉한 일을 듣고, 정담수가 근거 없는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꼴을 들었다. 가소로웠다.

96) 어머님을 모시고 함께 한 살을 더 하게 되니, 난리 중에도 다행한 일이다.

갑오년 甲午年, 1594_

97) 어머님께 가니 아직 주무시고 계셨다. 웅성거리는 바람에 놀라 깨셨다. 기운이 가물가물해 앞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 하니, 애달픈 눈물만 흘릴 뿐이다.

97)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하고 두세 번 타이르면서도 헤어지는 슬픔을 말하지 않으셨다. 선창에 들어와서는 몸이 불편한 것 같아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99) 맑으나 큰 바람이 불어 살을 에듯 추웠다. 여러 배에 헐벗은 사람들이 목을 움츠리고 추워서 떠는 소리를 냈다. 차마 듣기 어려웠다.

122) 종일 빈 정자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심란했다. 무슨 말로 형언하랴. 가슴이 막막하고 취한 듯, 꿈속인 듯, 정신이 몽롱한 게 멍청이가 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하다.

123) 집에 물이 새서 마른 데가 없었다. 배 사람들의 거처가 편치 않을 것이 무척 염려스러웠다.

125) 비가 조금도 그치지 않으니, 싸움하는 군사들이 오죽 답답하겠는가!

127) 아침에 아들 울이 본영으로 갔다. 이별하는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홀로 빈 마루에 앉아 있노라니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늦게 바람이 사나워지자 걱정이 더욱 커졌다.

128) 아들의 편지가 왔는데 잘 돌아갔다고 했다. 또 아내의 편지에는 '아들 면이 더위를 먹어 앓는다'고 했다. 괴롭고 답답하다.

128) 어머님께서 평안하시나 면은 병세가 극심하다고 했다. 지극히 가슴 아프다.

133) 이날 밤 마음이 심란해서 홀로 마루에 앉아 있는데, 스스로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걱정이 쌓여 밤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만일 유정승이 어찌 되었다면 장차 나라 일을 어찌할 것인가.

134) 저녁 내내 비가 오는데 홀로 앉아 있는 느낌을 이길 수 없다.

144) 이날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는 것이다. 벌써 생사가 바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나랏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다른 일에까지 생각이 미칠 수 있으랴. 세 아들,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

145) 여러 장수들과 함께 죽기를 맹세하고, 원수 갚을 뜻으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158) 아들 울의 편지를 보니, 어머님께서 변함없이 평안하시다고 한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상주의 사촌 누이 아들 윤엽이 본영에 이르러 어미의 편지와 자기 편지를 보내왔다. 그것을 보니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을미년 乙未年, 1595_

180)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며, 입으로는 교서를 외면서 얼굴에는 군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이 있음을 어찌하랴.

197)
북쪽에 갔을 때도 같이 일하고
남쪽에 와 죽고 삶을 같이 하더니
오늘 밤 이 달 아래 잔을 나누면
내일은 우리 서로 떠나겠구려.

병신년 丙申年, 1596_

217) 홀로 앉아서 아들이 떠나간 것을 생각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224) 참 어이없다. 조정의 지도가 이럴 수 있는가. 체찰사로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이렇게 무의미할 수 있는가. 국가의 일이 이렇고 보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226) 기운을 차릴 수도 없었고 땀도 많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병의 시초인 것 같다.

236) 일찍이 목욕탕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있었다. 우수사가 방문했다가 이야기하고 돌아갔다. 또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물이 너무 뜨거워서 도로 나왔다.

237) 이날은 어머님의 생신인데 헌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해 마음이 편치 못했다.

257) 울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어머님이 내내 평안하시다니 다행, 다행이다.

260) 종일 노를 빨리 저어 밤 10시경에 어머님 앞에 이르렀다. 백발이 부스스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기운이 흐려져서 아침 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부둥켜 앉아, 밤이 새도록 어머니를 위안하면서 기쁘게 해 드렸다.

정유년1 丁酉年, 1597_

274)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한다. 뛰쳐나가 둥그러지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280) 아침 저녁으로 그립고 서러워 마음에 눈물이 엉겨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은 어찌하여 내 사정을 살펴 주지 못하는고, 왜 어서 빨리 죽지 않는지.

285)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다소에 따라 죄의 경중이 결정한다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장차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야말로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인가.

288) 아침에 종들이 고을 사람들의 밥을 얻어 먹었다고 하기에 종들을 때리고 도로 갚아 주었다.

정유년2 丁酉年, 1597_

328)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336) 저녁때 어떤 사람이 천안으로부터 와서 편지를 전하는데, 미처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겉봉을 대강 뜯고 아들 열의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자가 씌어 있어 면의 전사를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그 빛이 변했구나. 슬프고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너는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앙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을 목숨을 부지한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함께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이미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뿐이다. 하룻밤을 지내기가 길고 길어 1년 같구나.

337)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이 부음을 들은 지 꼭 4일째 되는 날인데, 마음 놓고 울지도 못 했으므로 수영에 있는 염한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



III. 내가 저자라면

내가 저자라면? 어째 이번엔 제목이 좀 이상하게 여겨진다. 남의 일기를 읽고, 이것을 내가 쓴다면 어찌어찌 쓰겠다고 말을 해야 하니, 이게 말이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책의 특성상 이 부분도 '난중일기'라는 책 자체에 대한 내용과 함께, 저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거론될 것이다.

'난중일기'. 서양에 '안네의 일기'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이순신의 일기가 있다.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들어왔던 이 제목의 책을 이제야 읽게 되었다. 읽을거리 중에 남의 일기 만큼이나 재미있는 것도 없을텐데, 이 일기만큼은 그리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과제도서가 아니었다면 평생 읽지 않았을 것 같은 책을 이번 주에 또 한 권 읽고 말았다. 기대했던 바와 같이 지극히 사적인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리 큰 흥미를 느낄 수는 없었다. 결국 400년에 달하는 시간적 거리감으로 인해 나와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힘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좀 더 사적이고 좀 더 재미있고, 자극적인 것을 나도 모르게 기대했던 것일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멋진 한마디를 남기며 세상을 떠난 영웅의 하루하루는 참 시시하고 재미없어 보였다. 치열한 전투가 있는 기간이 아니라면, 그의 일상은 그저 비슷비슷한 업무로 가득차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그 모습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영웅의 일기는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우리랑 별 다르지 않다니. 실망스러웠다. 영웅도 어머니가 그리워 우는 사람이었고, 자식이 보고 싶어 우는 사람이었다. 맘에 안 드는 얄미운 짓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속으로 욕하는 사람이었고, 활을 쏘는 것으로 내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내기에서 이기면 진 사람의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기도 했으며, 자신이 지면 다소 기분이 언짢아 보이기도 했다. 목욕을 하려다 물이 뜨거워 물 밖으로 나왔다는 그의 기록은 나를 웃기기까지 했다. '난중일기', 참 재미없는 일기다. 그런데, 우리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쓴 일기라고 생각하니, 이것이 꽤 재미있다. 그도 슬프면 울고, 웃기면 웃고, 화나면 화내는 인간이었다.

역사적 가치를 뺀 '난중일기'

이 책은 다들 알다시피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7년(1592~1598년) 동안에 걸쳐 기록한 일기이다. 그가 공직에 있는 사람인 관계로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사항이 많기는 하지만, 어떠한 공적인 이유도 없이 쓴 개인적인 일기이다. 일부 유실된 부분을 제외하면, 전쟁 중에 이토록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다는 것부터가 나를 매우 놀라게 했다.

'난중일기'는 어차피 그것이 가진 역사적 가치와 함께 읽혀져야 할 책이다. 역사적 가치을 뺀다면, 정말 단순한 내용이 어치보면 지루하리 만치 반복되는 일상의 기록일 뿐이다. 그렇다면, 일단 '난중일기'에서 그러한 가치를 빼고 한 번 바라보도록 하겠다. 이는 대부분 이순신 개인에 대한 탐구가 될 것이다.

일기를 읽으며 자꾸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날씨의 기록이었다. 맑음. 맑음. 비. 아침에 맑다가 소나기가 오다 갰다. 종일 비가 내렸다. 매일의 일기는 이와 같은 날씨의 기록으로 시작된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 방학 숙제로 썼던 일기가 떠오른다. 전쟁터에서 근무하는, 특히 날씨에 가장 민감한 바다를 근무지로 삼아 일하는 그에게는 날씨라는 것이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어떠한 이유로 그가 그것을 기록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시대의 날씨를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고해도 좋을 만큼 자세하고 충실한 자료를 남겨주었다.

공적인 성격이 배제된 개인적인 일기인 만큼, 그 속에서 이순신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무엇보다도 자식으로서 느끼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스러움이 절절하다. 틈나는 대로 사람을 보내 어머니의 소식을 전해 듣고, 소식을 기다리며 마음 졸이는 그의 모습은 역시 그도 한 인간일 수 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자식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아버지의 모습, 나라를 사랑하고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장군으로서의 모습,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동료들과 부하들에 대한 전우애를 간직한 리더로서의 모습 등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당시 사람들의 감정 표현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사람들에 대한 감정 표현에 상당히 솔직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위엄이 있어야 할 장군으로서 어머니의 안부를 듣지 못해 초초해 하는 모습이나, 부정한 짓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조소를 퍼붓는 모습은 일기가 아니라면 결코 볼 수 없는 모습일 것이다. 특히나 그의 아들 면이 전사한 소식을 들었을 때의 비통한 심정을 적어내린 글을 읽으면서는 내 마음 속에도 그 안타까움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했다.

나라의 녹을 먹는 공직자로서 그는 자신의 역할에 정말 충실했던 사람이다. '난중일기' 속에 비친 그의 모습은 물론이며, 임진왜란 전의 그의 행적을 통해서도 그가 얼마나 올곧은 사람이었는가는 쉽게 알 수 있다. 언제 어느 상황에서건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았고, 법도와 양심을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들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그는 동요하지 않고 냉철한 판단력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장수로서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는 엄격함과 그에 못지않은 자애로움을 함께 지닌 사람이었다.

역사적 가치를 더한 '난중일기'

'난중일기'는 전쟁 중에 쓴 일기이다. 전장의 최전선에서 부대를 지휘하는 장군의 시각으로 기록된 일기는 공식적인 전쟁사에서 다루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생사를 함께 하는 전우들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그들에 대한 느낌, 정말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사람이 누구인지, 요령을 피우는 사람이 누구인지, 나라로부터는 어떠한 명령을 받았는지, 그것이 제대로 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누가 상을 받았고, 누가 벌을 받았는지, 누구와 어떤 내용을 편지를 주고 받았는지 등등 공식적인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들이 가득 들어있다. 이순신 개인은 물론이며, 당시 상황에 대한 세밀하고 신뢰할 만한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수군으로 활약한 이순신의 기록은 당시 군사제도와 관련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군사 뿐 만이 아닌 당시의 정치, 경제, 문화적 상황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당시 민중의 생활상 등을 여러 부분에서 직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이 '난중일기'를 하나의 예술작품 자체로 바라봐도 좋을 것이다. 문관으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겸비한 무관의 글은 색다른 멋을 지닌 작품으로 인정받을 만하다. 사실 일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개인적 속내를 시(詩)나 다른 방법으로도 표현했었다면 이러한 가치가 훨씬 더 배가 되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순신의 인간적 면모를 종합하여 보여주고 있는 한 사관(史官)의 논평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순신은 충성스럽고 용맹한 사람이었으며, 더욱이 재능과 지략이 뛰어났다. 군기가 엄하면서도 사졸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기꺼이 그를 따랐다.... 그의 죽임이 알려지자 호남 지방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비록 늙은 노파에서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슬퍼하여 마지 않았다. 그의 높은 충성심과 나라를 위하는 마음과 자기 몸을 잊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그의 생애는 옛날의 명장에 비하여 조금도 더할 바가 없다..."
- '선조실록', 권106, 31년 11월 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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