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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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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2일 11시 01분 등록
이순신의 난중일기, 노승석 역, 동아일보사


저자 소개

난중일기를 쓴 인간 이 순신

김훈은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을 받고 수상 소감 대신 1953년 미제국주의의 스파이란 명목으로 ‘사회주의 조국’ 평양에서 처형당한 시인 임화의 생애를 들추어낸다. 정치범으로 처형되었지만 시인으로 죽었을 그 젊은 패륜아의 절망의 바닥을 헤아려보려고 김훈은 긴 겨울밤을 홀로 고투하였다고 한다.
나는 이번 주 <난중일기>와 <칼의 노래> 두 권을 다 읽었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그의 소설 때문에 더욱 입체적으로 내 머리 속에 살아났다. 작가는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한 현실의 운명과, 이 무의미한 삶을 무의미한 채로 방치할 수 없는 생명의 운명 사이에서 절망의 힘으로 절망과 싸워나가야 하는 존재라고 김훈은 말한다.
그 절망은 이순신의 것이며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이순신, 그는 자신을 배반하는 전시 상황 속에서 그 가련한 운명을 헤치고 나올 아무런 전략적 방편도 없었다. 죽음이 곧 사는 길임을 몸으로 증명해내는 것 밖에는. 나는 하루하루 일기를 쓰는 전장에서의 이순신의 마음을 절대 헤아릴 수 없다. 헤아린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는 가장 고독한 자로 거기에 있었다. 그는 당대 현실에 맞서서 싸웠고 절망했고, 다시 싸웠고, 다시 절망했다.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때마다 그 싸움은 그에게는 모두 첫 싸움이었다. 싸움은 싸울수록 경험되지 않았다. 지나간 모든 싸움은 닥쳐올 싸움에서 무효였다(칼의 노래 167) 그는 그렇게 싸우고 싸우다 죽었다. 그가 죽기 전 바다는 적과 적 사이에서 고요했고, 그가 죽은 바다 위에는 달무리가 어제처럼 변함없이 떠올랐다. 그는 기지도 없고 모항도 없는 바다에 늘 떠 있었고, 살았으나 죽었었다. 그는 이제 세상의 바다를 다 건너서 붉은 노을이 지는 저 수평선 사이로 영원히 항진해 사라졌다. 혹독하고 무참했던 삶은 막을 내렸고, 적은 다 멸절되었지만, 그는 끝끝내 삶에게도, 적에게도 닿을 수 없었다. 세상은 온통 부조리였고 무의미였다.
그 부조리와 무의미는 그의 죽음 안에서만 완성될 수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역자 노승석의 노고

이 책은 나오기 전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다 먼저, 기존 번역본을 뛰어넘는 ‘난중일기 완역본’이라는 점이다. 초서연구가인 노승석씨는 ‘난중일기’ 필사본 9책(국보 제76호)의 초서를 완전히 해독하여 8500여자를 새롭게 번역했으며, 150여자의 오류를 수정했다.
“전시에 급하게 쓰여진 난중일기는 흘려 쓴 초서로 돼 있어 해독이 어려웠고 일부 글자가 마멸되기도 했다. 일제시대에 간행된 판본을 근거로 1960년 노산 이은상 선생이 한글 번역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번 번역본은 실제 친필본에 대한 엄밀한 고증에 근거해 기존 번역서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다” <경향신문 2005년 9월 26일자>
두번째는 처음으로 공개하는 이순신의 편지 원본 및 해설이 수록되어 있어서 그 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한 인간으로서의 희비애락을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고, 드러나지 않았던 충무공 주변의 인물에 대한 관심도 불러 일으킨다는 점이다.
그 다음은 철저한 고증으로 ‘난중일기’ 에 나오는 인명과 지명을 새롭게 밝히고 바로 잡았다는 점이다. 난중일기 기존 번역본에는 조선과 명나라가 협공한 곳으로 유도가 나오는데 이는 묘도의 오득이며 충무공을 연모한 한양 기생은 세산월이 아닌 내산월로 확인됐다. 넷째, 항간에 떠돌던 충무공의 은거설과 자살설에 대해 쐐기를 박았다. 일각에서는 ‘이순신이 면주(免?:투구를 벗다)하고 싸웠다’는 기록 때문에 ‘이순신이 자살하는 심경으로 전장에 나갔다’고 봤지만 ‘면주’란 ‘병사가 결사적으로 싸우는 모습에 대한 은유적 표현일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삼국유사>와 <사기열전>에서 이미 경험한 바이지만, 역사를 담고 있는 이런 류의 오랜 문헌의 경우 역자의 수고는 결정적이다. 지난하고 어려운 작업을 필생의 업으로 삼은 그런 역자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고전의 세계에서 명징한 통찰을 건져 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의 역자인 노승석씨에게 크게 감사한다. 일기 밑에 그 많은 역주를 다는 것 역시, 엄청난 에너지와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래도 이 책에서 좀더 보충하면 좋을 것들
일기에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은 여러 해전들을 독자들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시 전투의 모습을 그린 전투도를 삽입해서 당시 왜군과 우리 해군의 총포와 무기들을 시각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해주면 좋을 것 같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 전쟁에 대해 총제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도록 국가 간 역학관계(명나라-일본-조선)와 당시의 정국 등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겠다. 또한 원균과 이순신은 왜 서로 반목했는지. 해전에서 10전 10승을 하고도 이순신은 왜 하옥되어야 했는지, 선조는 이순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당시 이순신의 진가를 알아준 사람들은 누구였는지, 이순신 자살설의 배경은 무엇인지 등, 일기의 원전에서는 자세히 알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한 설명도 덧붙여지면 좋을 것 같다.


2. 마음에 남는 글귀


4. “어느 날 신선의 별장에 이르렀을 때, 매번 서호 월악산 구름과 수죽의 경치를 그리워하여 마음이 이에 달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22. 비가 크게 내려 윗사람 아랫사람 모두가 꽃비에 흠뻑 젖었다.

31. 식사 후에 몸이 몹시 불편하더니 점점 더 아파졌다. 온종일 밤새도록 신음했다/기운이 어지럽고 밤새도록 고통스러웠다/아침에야 비로소 통증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44. …한 모퉁이의 외로운 신하가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애통해 하니 간담이 찢어지는 듯하다

충무공이 자주 하는 일: 활쏘기, 바둑두기, 원균 원망하기, 술마시기, 어머니 안부묻기, 제삿날 공무 쉬기…

62. 배의 뜸 아래 웅크리고 앉아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 속에 치밀어 올라 마음이 어지럽다.

74. 나라를 위해 힘쓰는 일이 지금의 급무이지만 몸의 병이 이렇게 되었으니 북쪽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할 때면 다만 스스로 눈물을 드리울 뿐입니다

84. 글로 적기로 생각하면서도 배와 육지에서 매우 바쁘고 또한 쉴 새가 없어서 잊어둔 지 오래였다. 여기서부터 계속한다…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었으나 적을 토벌하느라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 한이 되겠다.

87. 피란 중에 임금의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통곡할 일이다.

88. 이날 저녁 달빛은 배에 가득차고 혼자 앉아 이리 저리 뒤척이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자려해도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닭이 울 즈음에야 선잠이 들었다.

102.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그런데 흰 머리카락 난 것을 어찌 싫어하랴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113. 남해현령이 또 와서 전하기를, “광양 순천이 이미 분탕질 당했다.”고 하였다..,이 소식을 들으니 뼛속까지 아파와 말을 할 수 없었다…이날 밤바다에 뜬 달은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빛인데, 서늘한 바람이 선뜻 불어온다. 홀로 뱃 전에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116.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울적하네/ 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 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닭이 벌써 울었구나.

128. 경상우수사 원균이 왔다. 음흉하고 속이는 말을 많이 하였다. 몹시 해괴하다.

138. 국가를 편안히 하고 종사를 안정시키는 일에 충성과 능력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그렇게 하리라…사직의 존엄한 신령에 힘입어 겨우 작은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초월하여 분에 넘친다. 장수의 직책을 지닌 몸이지만 세운 공은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못하는 입으로는 교서를 외우지만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145.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어 살을 에듯이 추웠다. 각 배에서 옷을 갖춰 입지 못한 사람들이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추위에 떠는 소리는 차마 듣지를 못하겠다. 보성 군수가 와서 만났다. 밤새도록 앓았다.

(점괘를 치는 충무공)
191.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떨까 하고 염려하여 글자를 짚어 점을 치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 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어보니 ‘밤에 등불을 얻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다시 점치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무척 좋았다. 저녁 내내 비가 내리는데 홀로 앉아 있는 마음을 가눌 길 없었다…비가 올 것인가 개일 것인가를 점쳤더니 점은 ‘뱀이 독을 내뿜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앞으로 큰 비가 내릴 것이니, 농사일이 염려된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196.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밤에 꿈을 꾸니 머리를 풀고 곡을 했다. 이것은 매우 길한 조짐이라고 한다.
205-.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여 촛불을 밝힌 채 뒤척거렸다. 이른 아침에 손을 씻고 조용히 앉아 아내의 병세를 점쳐보니 ‘중이 속세에 들어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다시 쳤더니 ‘의심이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매우 길하다. 또 병세가 나아질 것인지와 어떤 소식이 올 지를 점쳤더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이 역시 오늘 중에 좋은 소식을 들을 조짐이었다.

226.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만한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만한 기둥 같은 인재가 없으니 더욱이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 다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이기고 지는 것이 반반이며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설이다.

231. 무제시- 비바람 몰아치는 밤/ 맘이 초조하여 잠 못 이룰 적에/ 긴 한숨 거듭 짓노라니/ 눈물만 자구 줄줄 흐르네/ 배를 무린 몇 해의 계책은/ 다만 성군을 속인 것이 되었네/ 산하는 오히려 부끄러운 빛 띠고/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231

(어머니의 안부가 며칠이라도 당도하지 않으면 초조해서 견디지 못하는 충무공의 효심)
239.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또 팔순의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

261. 궂은 비가 그치지 않아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다. 새벽꿈이 몹시 심란했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신지 소식을 듣지 못한지가 벌써 이레나 되니 애가 타고 걱정이 된다.

265. 탐후선이 오지 않아 어머니의 안부를 알 수 없었다. 걱정이 되고 눈물이 난다.

267. 저물녘에 척후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 이질에 걸리셨다고 한다. 걱정이 되어 눈물이 난다.

271. 혼자 기대어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만한 재목 같은 존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281. 희미한 달빛이 수루를 비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시를 읊었다.

287. 우수사와 경상수사가 함께 와서 이별주를 같이 나누고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선수사(거이)와 작별하며 짧은 시 한 수를 써 주었다.
북쪽에 갔을 때에 같이 힘써 일 하더니/ 남쪽에 와서도 죽고 삶을 함께 했네/ 오늘밤 달빛 아래 한 잔 술 나누고 나면/ 내일은 우리 서로 헤어지겠구려

병신년 3월(323-332)
날씨를 모아본다.

초1일 무진 맑음
5일 맑다가 구름이 끼었다.
6일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9일 아침에 낡다가 저물 무렵에 비가 내렸다
10일 비가 계속 내렸다
13일 종일 비가 내렸다
14일 궂은 비가 걷히지 않는다.
16일 비가 퍼붓듯이 쏟아져 종일 그치지 않았다.
17일 흐리다가 종일 가랑비가 내리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18일 맑았으나 종일 동풍이 불고 날씨는 몹시 싸늘했다.
19일 맑았으나 동풍이 거세게 불고 날씨가 매우 차가웠다
20일 바람이 거세고 비가 계속 내려 종일 나가지 않았다
21일 종이 큰 비가 내렸다
22일 맑음
25일 새벽부터 비가 내기기 시작하여 종일 퍼부어 잠시고 그치지 않았다
26일 서풍이 불었다
27일 남풍이 불었다
28일 궂은 비가 몹시 내리며 개지 않았다.
29일 궂은비가 걷히지 않았다.

328. 식은땀이 등을 적셔 옷 두겹이 다 젖고 이부자리도 젖었다. 몸이 불편하였다.

329. 밤새도록 비가 왔다. 땀이 옷과 이불을 적셨다…자정이 지나 비가 잠깐 그치고 새벽 3시경 이지러진 달이 비치기 시작하였다. 방밖에 나가서 산보하였으나 몸이 몹시 피곤하였다.

340. 아침에 흐렸다가 큰 비가 왔다. 농민의 소망을 흡족하게 채워주니 기쁘고 다행한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

353. 새벽꿈에 어떤 사람이 멀리 화살을 쏘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이었다. 스스로 이것을 점쳐보니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가는 것이요,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은 머리 위에 있어야 할 것이 채인 것이니 이는 적의 괴수를 모조리 잡아 없앨 징조라 하겠다.

358. 밤 10시쯤에는 꿈 속에서도 땀을 흘렸다.

369. 종일 바삐 노를 저어 밤 10시경에 어머님께 이르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곧 끊어지려 하시는 모습이 아침 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새도록 위안하며 기쁘게 해 드리면서 그 마음을 풀어 드렸다.

374. 내산월도 와서 만나고 술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

“스스로 예쁜 것만 믿다가 홍등가에 잘못 드니 천애의 땅에서 영락할 줄 어찌 알았으랴. 번화란 거리에서 한 번 더렵혀지고 바닷가 꽃 속에서 부질없이 풍월 읊네. 한 가득한 오주에서는 봄 풀이 푸르고 꿈깨는 금곡에서는 석양빛 짙네. 아름다운 얼굴 빌려오지 못하고 나이만 들었으니 붉은 촛불과 맑은 술잔 그대 어이하리오” - 이순신이 내산월에게 지어준 시

383. 한산도가-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큰 칼 차고 깊은 시름할 때/ 어디선가 들리는 오랑캐/피리소리가 시름 더하네

정유년 4월 초1일 신유- 맑음 옥문을 나왔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었다. –

387-8. 새벽꿈이 매우 심란하여 이루다 말할 수가 없었다…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미친듯 마음을 가눌수 없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였다…기력이 다 빠진데다 남쪽으로 갈 일이 급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아침에 둘째아들 울의 이름을 열로 고쳤다. 열은 음이 열悅이다. 싹이 처음 트거나 초목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뜻이니 글자의 뜻이 매우 아름답다. 394

394 비가 내렸다. 오늘은 어머니 생신이다. 슬프고 애통함을 어찌 견디랴. 닭이 울 때 일어나 앉아 눈물만 흘렸다.

401.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

420. 이날 제사에 쓸 중배끼 다섯 말을 꿀로 만들어 봉해서 시렁 위에 얹었다.
(어머니를 아직도 그리워하며 잠 못이루고 가슴을 찢는 순신).

444. 아 슬프도다 그 때가 어느 때인데 저 강이 떠나고자 했는가. 대저 신하된 자가 임금을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다른 길은 없다.

449. 낮에 곡성현에 이르니 인간에 불 때는 연기가 끊어졌다.

460.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다스리어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461-463 (장쾌한 일대 드라마 명량대첩):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고 하였다…나는 배 위에서 직접 안위를 불러서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 간다고 어디 가서 살것이냐? 고 말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격하였다.….비단옷을 입은 적장 마다시를 잡아 시체를 토막내어 적에게 보이게 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꺽였다. 우리의 여러 배들은 적이 다시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쫓아 들어가 지지 현자 총통을 쏘니 소리가 산천을 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댔다. 그디어 적선 31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후퇴하여 달아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했다…이번 일은 실로 천행한 일이었다.

469-470 (면의 죽음이 예시된 불길함 꿈과 그대로 된 현실)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로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는데 막내 아들 면이 끌어안는 듯한 형상이 보이더니 깨었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慟哭’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시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들 앞으로 무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471. 새벽에 고향집의 종 진이 내려온 꿈을 꾸었는데 죽은 아들이 생각나서 통곡을 하였다…어두울 무렵 코피를 한 되 남짓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어찌 말로 다하리요 이제는 죽고 혼령이 되었으니 불효를 이리 저지를 줄을 어찌 알 것인가. 비통한 마음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하여 가눌 수가 없었다.

483. “전진에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 전진에서 용감하다는 것은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노곤한 자의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경은 내 뜻을 깊이 깨달아서 소찬 먹기를 그만두고 방편을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유지와 함께 고기 반찬을 하사하였는데 마음은 더욱 비통하였다.

486. 오늘 밤은 한 해를 끝마치는 그믐밤이어서 더욱 비통한 마음이 심하였다.

* 부록, 다른 문헌에 남은 이순신의 최후 기록

502. 11월 18일에 남해, 이날 밤 삼경에 이순신이 배 위에서 꿇어앉아 하늘에 축원하기를 “오늘은 진실로 죽기로 결심했사오니 원컨대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503. 11월 19일, 아침에 순신이 직접 북채를 잡고 먼저 배에 올라가 추격해 죽이니 적이 배꼬리에 엎드려 일제히 순신을 향해 총을 쏘았으므로 순신이 탄환을 맞았다. 급히 장좌와 아들 이회에게 명하여 방패로 자신이 신체를 가리게 하고 곡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였다.
504. ..진실로 적을 섬멸하여 임금에게 보답하였으니 비록 만번 죽을지라도 그 또한 영광된 것이네.

514. “산이 높아서 하늘과 멀지 않고 강물이 고와서 금방 신선을 만날 듯 하네.”

545. 돌아보건대 번역하는 과정에서 임란과 관련된 근거자료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고 아직 미진하게 다룬 점들은 계속 연구 보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ㅊ서로 필사된 <난중일기>전편을 판독한 것을 토대로 기존 판독본들과 비교분석하여 오류를 바로 잡고 또 기존에 언급되지 않은 부분까지 밝혀낸 점등은 역사에 비쳐진 이충무공의 자취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일조할 것이라 생각한다.


3. 내가 저자라면

이순신의 문장은 수사를 배제한다. 매일매일 바다의 날씨를 꼼꼼히 살폈고 적과 아군의 형편을 기록했다. 그의 글은 무인다운 글쓰기의 전범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나는 그의 일기를 읽으며 기록에 대해 강박을 가진 자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나에게도 있는 것이다. 그의 일기는 간혹 길어지기도 했지만, 보통 5-10줄 내외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매우 간결한 것이다. 긴 일기를 쓸 형편은 안되고, 하루를 기록하지 않고는 그 하루를 넘길 수 없었던 시절, 내 일기가 바로 이순신의 일기와 같았다. 그 일기는 가계부의 아래 네모난 칸에 일지처럼 쓰는 것이었다. 200자를 넘기지 않아야 했고, 가장 필요한 단어만 사용하여 하루의 일과를 효과적으로 축약해서 써야 했다. 나의 원칙은 이러하였다. 날짜와 날씨를 꼭 적을 것, 중요한 사건 중심으로 쓰되 만난 사람이나 한 일을 적을 것, 그리고 느낌을 간단히 남길 것. 이순신의 일기에서도 그런 점이 보인다. 그의 일기가 담은 내용 만으로 보자면 그 스케일은 나 같은 속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크다. 그러나 그의 일기 속을 헤치고 들어가 보면 그는 나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고뇌하고 번민하며 기뻐하는 한 인간이 속살 그대로 그곳에 있는 것이다.
이순신은 함경도에 첫 배치를 받았을 때 <함경도일기>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 일기 외에도 (알려지진 않았지만) 많은 일기를 많이 썼을 것이다. 그는 하루를 문자로 잡아두지 않으면 불안하고, 그렇게 정리해두지 않으면 하루를 잘 보낸 것 같지 않게 느끼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일기에서 빠진 부분은 그가 뺀 것이 아니라 그의 사후 그의 일기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너무 개인적인 내용이라고 삭제된 것들이라고 한다. 얼마 전에 한 달치 빠진 그의 일기가 복원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글을 적어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배와 육지에서 매우 바쁘고 또한 쉴 새가 없어서 잊어둔 지 오래였다. 여기서부터 계속한다”(84)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의 글쓰기는 강박 이상이다. 그에게 글쓰기는 이미 밥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일기를 통해 영웅 이순신이 나의 레벨로 내려와 주어서 고맙고 기쁘다. 무얼 먹고, 어디가 아팠고, 누굴 만났고, 무엇을 했으며, 어떤 일을 당했고, 기분은 어땠는지 나열한 그의 담백한 문장은 침묵이 열 마디 보다 더 깊이 말하는 것처럼, 현란한 수사가 있는 글보다 우리를 그의 상황 가운데로 더 깊이 이끌고 간다. 흥미진진한 묘사도 없고, 클라이맥스도 별로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지루한 글인데도, 읽다가 목에 걸려 꺽꺽 같이 울고 싶어지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은 수수께끼다.

이순신이 말하는 이순신
이순신이 직접 쓴 단 한 권의 저서, 이순신이 말하는 이순신, 그것이 <난중일기>다. <난중일기>는나라를 걱정하고 사람들을 아꼈으며,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에 충실했던 한 인간이 겪은 7년간의 전쟁과 그로 인해 격동하는 극적인 삶의 기록이다. 이순신은 평생 두 가지 전쟁을 치러야 했다. 밖으로는 한 나라의 무장으로서 목숨을 걸고 침략자들을 막아야 했으며, 안으로는 권력을 다투며 등 뒤에서 칼을 겨누는 내부의 적들과 맞서야 했다. 나라의 명운을 쥐고 거대한 침략자와 싸워야 하는 장수로서의 시대적 사명, 권력의 암투와 알력의 소용돌이에서 모략과 음해를 견디고 생존해야 하는 인간적 번민, 이것이 <난중일기>에 그려진 이순신의 모습이다.

왜 <난중일기>인가
최근 들어 이순신의 재조명 작업이 활발해지면서 이순신 관련 책들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칼의 노래>, <임진왜란 해전사>, <두 얼굴의 이순신>, <이순신이 싸운 바다> 같은 저작이나 이순신의 면모 중 특정한 부분을 떼어 확대 분석한 이순신의 리더십 연구서들은 모두 이차 저작물들이다. 이 책들은 나름대로 기여하는 바가 많다. 그러나 이순신 자신이 기록한 1차 텍스트를 읽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작업이다. 일기 만큼 그 사람을 제대로 드러내는 것은 없다. 우리 고전들이 다 그렇듯이, <난중일기> 역시 모두들 잘 알고는 있지만 직접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다. 〈난중일기〉를 읽는다는 것은 ‘이순신 자신이 말하는 이순신’을 가감없이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그 자신이 직접 쓴 글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안 후에 다른 2차 텍스트를 읽는 것처럼 의미있는 작업이 또 있을까. 그의 육필일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걸러진 이순신의 모습(혹은 일방적으로 그려진 성웅의 모습)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그의 모습을 읽어낸다는 것, 그것이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순신

지금까지 내 속에 있었던 이순신의 이미지는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며 장엄하게 전사하는 영웅의 이미지다. 영정 사진 속에서 근엄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그는 단정하고 온화해보이지만 그 표정에는 내면의 강건함이 묵직하게 우러난다. 그리고 광화문 사거리에 큰 칼을 옆에 차고 위엄있게 동상으로 서있는 우리들의 영웅 이순신 장군. <난중일기>는 그런 그의 이미지를 바꾸어 준다. ‘저기’ 추상적인 영웅 이순신은 ‘여기’ 피와 살을 가진 따뜻한 한 인간으로 애잔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는 자주 아프다
한산섬 수루에 홀로 앉아 장군이 낭랑한 목소리로 시조를 읊으셨을 달 밝은 밤에 나는 그의 일기를 읽는다. ‘강림산 비껴 질러 달은 넘어가니 사방이 적막하고 기운은 고요한데’ 장군은 신역이 쑤시고 아파 밭은 기침을 하며 괴로와 한다. 그렇다. 장군 이순신은 의외로 많이 앓았다. 몸이 편치 않아 신음으로 자주 밤을 새웠으며 아침에 일어나면 옷이 땀에 흠뻑 젖어있곤 했다. 그의 칼을 보고 아무나 들 무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왜 그리 식은 땀을 자주 흘리며 아파했을까. 적의 칼 뿐 아니라 임금의 칼에도 언제든 죽을 수 있는 당시의 상황에서 그의 고뇌가 보이는 것 같다.
"...교서 아래서 잠자는 새벽마다 어둠 속에서 오한이 났고 식은 땀이 흘렀다. 종을 불러 옷을 갈아입을 때, 초구에 묶어둔 배들이 바람에 부대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일상은 단조롭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그의 주된 업무는 공격보다는 방어였다. 호남쪽엔 적이 자주 출몰하지 않았기에 장군의 일상은 단조로왔다. 활을 쏘고, 찾아온 사람을 만나고, 술을 마셨다. 술과 관련된 묘사가 일주일 3-4번씩도 등장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용장과는 거리가 먼 일상이다. 군졸들의 탈영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군대에 대한 불신은 백성들이 징집을 기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치리와 군기를 목적으로 그는 자주 사람의 목을 베었다.

그는 가족에게 한없이 자애롭다
가족을 사랑하는 자애로운 남편이요, 아버지요 아들인 그. 그는 전쟁 중에도 이 삼일 간격으로 충청도 아산의 집에서 소식이 안 오면 애닯아 한다. 일기의 많은 부분이 고향에서 소식이 왔다는 내용이고 모친의 건강을 항상 기록하고 있다. ‘요사이 탐선이 엿새가 되도록 오지않는다. 어머님 소식을 알 수 없어 걱정스럽다’. 그의 효성은 참으로 지극하다. 모친이 죽었을때 상중이라는 이유로 전쟁 중에도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아 아랫장수들도 민망하여 고기를 먹지 못하니 임금이 유시를 내려 그를 책망하는 구절이 있다.

그는 놀이를 좋아한다
휘하의 장수들이 장군의 거소에 찾아오면 술을 함께 마시거나 혹은 바둑을 두거나 어쩌다가 한 번씩은 종정도(벼슬놀이) 같은 것을 즐긴다. 하지만 가장 즐기는 놀이는 활을 쏘는 것이다. 거의 매일 10순(여기서 1순은 화살 5대)에서 20순 가량 활을 쏜다. 그에게서 무인의 향취를 느끼게 하는 유일한 일상의 행위다. 다른 장수와 화살을 쏘아서 이기면 즐거워하여 꼬박 기록을 하는 그의 모습도 재미있다.

꿈 해몽과 점보기를 즐긴다
일기에 보면 그는 꿈을 자주 기록한다. 불길한 꿈을 꾸면 좋지 못한 소식이 들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가 가끔 주역을 펼쳐놓고 점을 치는 건 평범한 일상 속의 그의 긴장과 초조함을 대신하는 일이다. 괘에 괘념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자신을 다스리는 한 방법으로 점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대목들도 눈에 띈다. 가령 ‘휘하장수 아무개의 첩이 본집에 들어가 강짜를 부렸다니 자못 우습다’ 이런 류의 구절은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던 장군의 체모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웃음 한 방울을 내 얼굴에 흘린다.

원균과의 관계
원균을 흉악한 변절자요 역사의 간신으로 알고 있었으니 처음에 그가 원균을 나쁘게 묘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갈수록 태산, 그 정도가 점점 심해져서 그가 시비를 제대로 가리고 있나 염려가 될 지경이었다. 둘 간의 관계가 수긍이 가지 않았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원균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다. 그것은 전술상의 의견 차이에서 생겨난 불화와는 다른 감정이다. 그는 원균이라면 일단 배알이 꼬일 만큼 혐오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그가 원균을 그토록 증오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 까닭은 일기에 명쾌하지 않다. 전쟁초기 그는 전라수사였고 원균은
경상수사로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그는 왜 원균만 보면 밴뎅이 고갈딱지가 되는건지.

유성룡과의 좋은 관계
그는 윗사람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한 것처럼 보인다. 정승 유성룡을 그가 특히 공경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철 따라 유성룡을 비롯한 몇몇 판서, 정승 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물품을 진상한다. 가끔 꿈에서 유정승을 만나 대화를 한다는 내용도 보이는데 그는 유정승을 자신의 보호자로 느끼며 심리적으로 많이 의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성룡은 이순신을 추천해 전라좌수사가 되게 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순신이 투옥되었을 때는 정치적 입장이 난처하고 미묘하여 이순신을 제대로 변호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늘 이순신과 편지를 주고받아 그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이순신의 사람됨을 누구보다 지지하고 믿어준 사람이다.

고뇌하는 그가 살갑다
난중일기는 전투 상황이나 그 당시 정곡을 소상히 전하지는 않는다. 전투는 임진년과 정유년의 일기에만 주로 나오고 그 사이 계사년 갑오년 을미년 병신년의 일기에는 전투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다. 기껏해야 어쩌다 배 1-2척을 쫓아갔다가 돌아왔다는 정도이다. 책의 후반부에 가면 정유재란이 일어날 무렵 그가 백의종군으로 서울에서 여수로 다시 내려올 때의 행적과 정유재란 때의 전투 모습은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전투중의 긴박감이 흐르는 대목도 몇 차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일기의 내용은 거의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관한 것이니 흥미를 안겨줄 내용이 별로 없다. 줄거리가 없는 소설처럼 자못 지루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의 일기가 큰 감동을 주는 것은 행 간에 담긴 그의 마음이 어느 순간 우리 속 깊이 침투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이야기는 애초 해 뜨고 해지는 이야기이며 밥 먹고 잠자고 사랑하며 고뇌한 이야기가 전부인지 모른다. 더구나 전시 상황에서 설명할 수도 설명될 수도 없는 부조리로 가득 찬 인생들을 바라보며 그 참담함과 깊이 싸워야 했고, 자신의 실존과 늘 부딪혀야 했던 인간 이순신의 절박함은 밥을 먹고 잠을 잤다는 그 평범한 귀절에 오히려 더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날짜(숫자)를 써나갔을 그를 생각하면 역사의 실존으로 우리와 아직도 함께 존재하는 그를 느낄 수 있다.

나는 성웅 이순신보다 이런 고뇌하는 그가 더욱 살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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