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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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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2일 11시 58분 등록

p.134. 26일(계사)날이 맑고 서풍이 불었다. 늦게 나갔더니 조방장과 방답, 녹도가 와서 활을 쏘고 경상 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체찰사의 명령이 왔는데, 전일 우도의 수군을 돌려 보내라고 한 것은 회계를 잘못 본 까닭이라는 것이었다. 우스웠다.
p.137. 5월 초4일(경오)맑음. 이날은 어머님의 생신인데 헌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여 심회가 평온하지 못했다. 나가지 않았다. 오후에 우수사가 사무 보는 집에서 불이 나서 집이 모두 탔다. 이날 저녁 문촌공이 부요로부터 왔다. 조 종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조 정이 4월 초1일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슬프고 애석하다. 우후가 앞산에서 여제를 지내기로 했다.
p.144. 7월 18일(계미)맑음. 각처의 공문을 적어 보냈다, 충청 우후와 홍주 판관이 충청도의 도둑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알렸다. 저녁때 들으니 항복한 왜적 연은기, 사이여문 들이 흉학한 음모를 꾸며서 남녀문을 죽이려 했다고 한다.(중략)
22일(정해)맑았으나 큰 바람이 불었다. 종일 나가지 않고 홀로 다락 위에 앉아 있었다. 종 효대, 팽수가 흥양의 군량선을 타고 나갔다. 저녁때 순천서 보낸 통문을 보니, 「충청도 도둑이 홍산서 일어난 것을 곧 죽였다는데 홍주 등 세 고을이 포위 당했다가 간신히 면했다」고 했다. 참 한심한 일이다. 자정에 비가 크게 쏟아졌다. 낙안의 교대할 배가 들어왔다.
p.149. 윤8월 12일(병자)맑음. 종일 노를 빨리 저어 밤 10시쯤에 어머님 앞에 이르렀다. 백발이 부수수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기운이 흐려져 아침 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이 새도록 위로하여 그 마음을 풀어 드렸다.
13일(정축)맑음. 모시고 옆에 앉아 아침 진지상을 드리니 대단히 즐거워하시는 빛이었다. 늦게 하직 인사를 드리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오후 6시쯤에 작은 배를 타고 밤새 노를 재촉하였다.
정유
공은 나라를 위해 뼈와 살을 다 바쳤건만, 공에게 돌아간 것은 감옥살이뿐이었다. 그러나 공은 아무도 원망하지 아니 했다. 마지막 생명을 나라 위해 바칠 수 있는 시간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감사하며 말없이 백의 종군까지 하였고, 또 다시 공은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었던 것이다.
p.156. 4월 초1일(신유)맑음. 옥문 밖으로 나왔다. 남문 밖 윤 간의 종의 집에 이르러 봉, 분, 울, 사행, 원경 들과 한방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하였다. 지사 윤 자신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가 보러 왔었다. 울적한 마음을 한층 이기기 어려웠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 식후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기헌도 왔다.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기로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술을 마시고 몹시 취해다. 영공 이 순신이 술병을 차고 와서 같이 취하며 간담하였다. 영의정이 종을 보냈고, 판부사 정 탁, 판서 심 희수, 찬성 김 명원, 참판 이 정형, 대사헌 노 직, 동지 최 원, 동지 곽영 들이 사람들 보내어 문안했다. 취하여 땀이 몸에 배었다.
p.156-157. 초5일(을축)맑음. 해가 뜨자 길을 떠나, 바로 선영에 이르렀다. 수목이 두 번이나 산화를 겪고 타죽어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산소에 나아가 울며 절하고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하였다. 저녁때가 지나서 외가로 내려가 사당에 절하고, 그 길로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선대의 사당에 울면서 절하였다. 들으니, 남양 아저씨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저물어 집에 이르러 장인 장모님의 신위 앞에 절하고, 바로 작은 형님과 여필의 부인 되는 제수의 사당에도 다녀 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심회가 좋지 않았다.
p.157-158. 12일(임신)맑음. 종 태문이 안흥량 으로부터 들어와 편지를 전하는데, 어머님의 근력은 아주 쇠약하시나, 초 9일 위 아래 여러 사람이 무사히 안흥에 닿았다고 한다. 법성포에 이르러 자고 있을 때, 닻이 끌려 떠내려 가서 배에 머무른 지 엿새 만에 서로 나뉘었다가 무사히 만났다고 한다. 아들 울을 먼저 바닷가로 보냈다.
13일(계유)맑음. 일찍 아침을 먹고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 찰방 집에 잠깐 들러 이야기하는 동안 울이 종이 애수를 들여보내어 「아직 배 오는 소식이 없다.」고 했다. 또 들으니, 황 천상이 술병을 들고 흥백의 집에 왔다 하므로 홍과 작별하고 홍백의 집에 이르렀더니,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한다. 뛰쳐 나가 뛰며 궁그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곧 해담으로 달려 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는,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야 이루 다 어찌 적으랴.(뒷날 대강 적었다.)
14일(갑술)맑음. 흥 찰방, 이 별좌 들이 들어와 곡하고 관을 짰는데, 관은 본영에서 준비해 가지고 온 것으로 조금도 흠난 데가 없다고 한다.
15일(을해)맑음. 늦게 입관했다. 친숙한 벗 오 종주가 모든 것을 정성껏 해 주니,뼈가 가루가 되어도 잊기 어렵다. 관에 대해서는 다른 유감이 없으니 이것만은 다행이다. 천안 원이 들어와서 행상을 준비하고, 전 경복씨가 연일 진심으로 상복 만드는 일들을 돌봐 주니 슬프고 감사한 말을 어찌 다하랴.
16일(병사)궂은비. 배를 끌어 중방포에 옮겨 대어, 영구를 상여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며 찢어지는 아픔이야 어떻게 다 말하랴.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나는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 길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천안 이 돌아갔다. (중략)
18일(무인)비, 종일 비가 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머리를 내놓지 못하고, 그저 빈소 앞에서 곡만 하다가 종 금수의 집으로 물러나왔다. 늦게 계(계- 어떤 목적 아래 조직된 단체)원들이 나 있는 곳으로 모여 와서 곗일을 의논하고 헤어졌다.
19일(기묘)맑음.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 앞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 하랴. 어찌 하랴. 천지간에 날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뇌의 집에 이르러 선조의 사당에 하직을 아뢰고 그길로 금곡강 선전의 집앞에 이르러 강 정, 강 영수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하고, 다시 그길로 보산원에 이르니, 천안 군수가 먼저 와 말에서 내려 냇가에서 쉬고 있으며, 임천 군수 한 술이 중시(중시- 한 번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이 다시 보는 과거. [참고]초고에 13일부터 이날 (19일)까지 뒷날 적었다고 밝혔다.)보러 서울 가는 길에 앞길을 지나다가 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들어와서 조문하고 갔다. 회, 면, 울, 해, 분, 완과주부 변존서들이 함께 천안까지 따라 왔다. 원 인남도 보러 왔기에 작별한 뒤 말에 올랐다. 일신역에 이르러 잤다. 저녁에비가 뿌렸다.
p.160. 5월 초4일(갑오)비. 이날은 어머님 생신이라 슬프고 애통함을 참을 길 없었다. 닭이 울자 일어나 앉아 눈물만 흘렸다. 오후에 비가 몹시 퍼부었다. 정 사준이 와서 종일 돌아가지 않아다. 이 수원도 왔었다.
초5일(을미)맑음. 새벽 꿈이 매우 어지러웠다. 아침에 부사가 보러 왔었다. 늦게 충청 우후 원 유남이 한산에서 와서 원 공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또 진중의 장졸들이 모두 다 배반하므로 앞으로 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으리라고 하였다. 이날은 단오절인데, 천 리 밖에 멀리 종군하여 어머님 영연을 멀리 떠나 장례도 못 모시니 무슨 죄로 이런 갚음을 당하는고.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하여 짝이 없을 것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초6일(병신)맑음. 꿈에 돌아가신 두 분 형님을 만났는데, 서로 붙들고 우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장사를 지내기 전에 천 리 밖으로 떠나와 군무에 종사하고 있으니, 대체 모든 일을 누가 주장해 한단 말이냐. 통곡한들 어찌 하리」하셨다. 이것은 두 형님의 혼령이 천 리 밖까지 따라 오셔서는 근심하고 애닲아함을 이렇게까지 하신 것이니 비통함을 금치 못하겠다. 또 남원의 추수 감독 일을 염려하시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연일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도 아마 형님들의 혼령이 그윽히 걱정하여 주는 탓이라 슬픔이 한결 더하다. 아침 저녁으로 그립고 설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은 어째서 내 사정을 살펴 주지 못하는고. 왜 어서 죽지 않는지.
p.161. 초10일(경자)궂은 비가 내렸다. 이날은 태종의 제삿날이다. 옛날부터 비가 온다(옛날부터 비가 온다- 이조3대 임금 태종이 아주 가물 때 죽었는데, 죽으면서 어떻게든지 비를 오게 한다 하더니, 죽은 후 과연 비가 왔으며, 그후 그날만 되면 비가 온다고 전한다.)고 하는데, 늦게 큰 비가 왔다. 박 줄생이 보러 왔었다. 주인이 보리밥을 지어서 내왔다. 장님 임 춘경이 운수를 봐 가지고 왔다. 부찰사도 조문하는 서장을 보내 왔다. 녹도 만호 송여종이 삼과 종이 2가지를 부의로 보냈다. 전라도 순찰사가 백미와 중품 쌀 각 1곡씩을 군관을 시켜 보내면서 콩과 소금도 구해 보낸다고 말했다.
p.163. 체찰사는 내가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공생을 보내고, 또 군관이 지각을 보내더니 조금 있다가 또 사람을 보내어, 「진작 상제된 소식을 듣지 못했다가 이제야 듣고 놀라며 애도한다」하고 군관을 보내어 조상하며, 저녁에 만나 볼 수 있겠는가를 물으므로, 나는 「저녁에 당연히 가서 뵙겠다」고 대답하고 어둘녘에 가서 뵈니, 체찰사는 소복을 입고 기다렸다. 조용히 일을 이야기하는 중에 「일찌기 임금의 분부가 있었는데, 거기에도 미안스런 말이 많았는 바,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고 하며, 또 말하되, 「음흉한 사람의 무고하는 행동이 심했건마는 임금이 굽어 살피지 못하니 나랏일을 어찌 할꼬」하는 것이었다. 떠나올 때에 남 종사 가 사람을 보내서 안부를 물었으나 나는 밤이 깊어서 나가서 인사하지 못하노라고 대답해 보냈다.
p.168. 19일(무인) 새벽 닭이 세 회를 울 때 문을 나서 원수 진중에 이르러 할 즈음 날이 훤히 밝았다. 진에 이르니 원수와 황종사관이 함께 나와 앉았다. 내가 들어가 뵈니, 원수가 내게 원 균의 일을 말하되, 「통제의 일은 말할 수가 없소. 조정에 청하여 안골, 가덕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가 토벌해야 한다 하니, 그게 무슨 심사겠소. 밀고나가지 않으려는 뜻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천으로 가서 세 수사를 독촉하여 진격하도록 할 예정이오. 통제사는 내가 지휘할 것도 없소」하였다. 또 위에서 내려 온 분부를 보니, 「안골의 적은 경솔히 들어가 칠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원수가 나간 후, 황 종사관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데, 얼마 지나서 초계원이 왔다. 작별하고 나오려 할 때 황 종사관이 초계에게 진 찬순을 심부름시키지 말라고 당부하니 원 수부의 병방군관과 원이 모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내가 돌아올 때, 사로잡혔다가 도망해 온 사람이 나를 따라 왔다. 이 날 대지가 온통 찌는 듯 더웠다. 저녁에 작은 워라말이 풀을 조금 먹었다. 낮에 변 덕기, 덕장변 경완, 변 경남 들이 보러 와고, 진사 이 일장도 보러 왔었다. 밤에 소나기가 크게 퍼부어 처마의 낙수가 물을 쏟는 것 같았다.
p.171. 초6일(을유)맑음. 꿈에 윤 삼빙을 만났는데, 나주로 귀양간다고 했다. 늦게 이 방이 보러 왔다. 빈 방에 홀로 앉았으니 그리움과 비통함을 어찌 말로 다하랴 저녁에 바깥채에 나가 앉았다가 변 존서가 마홀방에서 돌아오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왔다. 안 각 형제도 흥백을 따라 왔다. 이날 제사에 쓸 중배끼 5말을 꿀에다 만들어 봉해서 시렁 위에 얹었다.
p.172. 초9일(무자)맑음. 내일은 열을 아산으로 보내려고 제사에 쓸 과물을 감봉했다. 늦게 윤 감, 문 보들이 술을 가지고 와서 열과 변 주부에게 작별 술을 권하고 돌아갔다. 이날 밤 달빛이 대낮 같아 어머님 그리는 슬픔과 울음으로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초10일(기축)맑음. 새벽에 열과 존서를 보낼 일로 앉아 날 새기를 기다렸다. 일찍 아침을 먹고 정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고 통곡하며 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구레에서 온 말을 타고 가니 더욱 염려된다. 열 등이 막 떠나자 황 종사관이 와서 한참이나 이야기하였다. 늦게 서 철이 보러 왔다. 정 상명이 종이로써 말혁 만들기를 끝냈다. 저녁에 홀로 빈 방에 앉았노라니 정회가 끓어 올라 잠을 못 이루고 밤새 뒤척거리기만 했다.(중략)
14일(계사)맑음. 이른 아침에 정 상명에게 종 평제, 귀인과 짐말 두 필을 주어 남해로 보냈다. 정은 전마를 끌어올 일로 보낸 것이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체찰사와 함께 한 곳에 이르니 송장들이 널렸는데, 혹은 밟고 혹은 목을 베기도 했다.
p.173.16일(을미)비가 오다 개다 하면서 종일 흐리고 맑지 않았다. 아침 식사 후에 손 응남을 중군에게 보내어 수군 소식을 알아보게 했더니 그가 돌아와 중군의 말을 전하는데, 좌병사의 긴급 보고로 보아 불리한 일이 많다고 하면서 갖추갖추 말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한탄스런 일이다. 늦게 변 의정이란 사람이 수박 두 덩이를 가지고 왔다. 그 꼴이 같지않아 어리석고 용렬하다. 두메에 박혀 사는 사람이 배우지 못하고 가난해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리라. 이 역시 소박한 태도이다. 이날 낮에 이 회남을 시켜 칼을 갈게 했는데, 아주 잘 들어 적장의 맨 대가리를 벨 만했다. 소나기가 쏟아졌다. 아들 열이 길 가기에 고생될 것을 생각하고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p.185. 초7일(을미)맑음. 탐방 군관 임 중형이 와서 보고하되 「적선 55척 중에 13척이 벌 써 어란포 앞 바다에 와 닿았는데, 아마 그 뜻이 우리 수군에 있는 것이 겠다」하므로 여러 장수들에게 군령을 내려 재삼 신칙했다. 오후 4시께 적선 12척이 과연 대들었다. 우리 배들이 닻을 들고 바다로 나가서 적선을 추격하니, 적선은 뱃머리를 돌려 도망했다. 멀리 바다 밖까지 쫒아가다가 바람과 조수가 모두 역류요, 또 복병선이 있을 우려도 있어 더 쫒아가지 않았다. 벽파정으로 돌아와서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오늘 밤에는 반드시 적의 야습이 있을 것이니 모든 장수들은 미리 알아서 준비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대로 시행하리라」하고 재삼 타일러 경계하고 헤어졌다. 밤 8시에 적이 과연 야습을 해와 탄환을 많이 쓰고 덤비었다. 내가 탄 배가 바로 앞장을 서서 지자포를 쏘니 강산이 흔들렸다. 적들도 범할 수 없음을 알고 네 번 나왔다. 물러갔다 하면서 화포만 쏘다가 자정이 지나서는 아주 물러났다.
p.187-188. 16일(갑진)맑음. 이른 아침에 특별 경찰 부대가 보고하기를「적선이 수효를 알 수 없도록 많이 명량으로 해서 곧장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을 향해 들어온다」고 하였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1백 30여 척이 우리 배들을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적하는 것이라 스스로 낙심하고 모두 회피할 꾀만 내는데 우수사 김 억추가 탄 배는 벌써 2마장 밖에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나, 현자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니 탄환은 폭풍우 같이 쏟아지고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그러나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서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얼굴빛이 질렸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되,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하고 여러 장수의 배들을 돌아보니 먼 바다에 물러가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자 해도 적들이 더 대어들 것이라 나가도 돌아서도 못 할 형편이 되었다.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군령을 내리는 기를 세우라고 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 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뱅 위에 서서 친히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하니 안 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하였다. 그래서 두 배가 적진을 향해 앞서 나가자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긔 배 2척에 지령하여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 붙듯하여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니 안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창으로, 또 혹 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치고 막다가 배 위의 사람이 기진맥진하므로,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쫒아 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3척이 거진 다 엎어지고 자빠졌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 응두의 배가 뒤쫒아 와서 합력해 쏘아 죽여 적은 한 놈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투항한 왜인 준사 는 안 골 있는 적진으로부터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위에 있다가 바다에 빠져 있는 적을 굽어보더니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바로 안골 있던 적장 마다시 라고 말했다. 내가 무상 준사가 좋아 날뛰면서 「그래 마다시다」하고 말하므로 곧 명령하여 토막토막 자르게 하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였다. 우리 배들은 적이 다시 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쫒아들어가 지자, 현자 대포를 쏘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이 퇴각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싸움하던 바다에서 그대로 정박하고 싶었으나 물결도 몹시 험하고 바람도 역풍이라 형세 또한 위태롭고 외로와 당사도로 옮겨가서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참으로 천행이었다.
p.188. 19일(정미)맑음. 일찍이 떠나 행선 했다. 바람은 부드럽고 물결도 순하여 무사히 칠산 바다를 건넜다. 저녁에 법성포에 이르니 흉악한 적들이 육지로 해서 들어와 인가 곳곳에 불을 질렀다. 해질 무렵에 홍농 앞 바다에 이르러 배를 대고 잤다.
p.188-189. 10월 초1일(무오)맑음. 아들 회를 보내서 저의 모친도 보고 집안 여러 사람의 생사도 알아 오게 하였다. 심회가 극히 산란하여 편지를 쓸 수 없었다. 병조의 역자가 공문을 가지고 내려와서 아산 집이 적에게 분탕질 당해 잿더미가 되어 남은 것이 없다고 한다.
p.190-191. 14일(신미)맑음.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헛디디어 내 가운데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는 않았는데 끝에 아들 면이 엎디어 나를 안는 것 같은 형상을 보고 깨었다.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늦게 배 조방장과 우후 이 의득이 보러 왔다. 배의 종이 경상도로부터 와서 적의 정세를 전하였다. 황 득중들이 와서 보고하기를, 「내수사의 종 강 막지라는 자가 소를 많이 치기 때문에 12마리를 끌어간 것이라」고 하였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혼란해졌다. 겉봉을 대강 뜯고 열의글씨를 보니 거죽에 「통곡」두 자가 씌어 있어 면의 전사를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시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한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 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앙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 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마는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 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밤 9시께 비가 내렸다.(중략)
17일(갑술)맑았으나 종일 큰 바람이 불었다. 새벽에 흰 띠를 띄고 향을 피우고 곡했다. 비통함을 어찌 참으랴. 우수사가 보러 왔다.
p.193. 늦게 적에게 붙었던 해남의 정 은부 와 김 신웅의 계집 등, 왜놈을 지시하여 우리 사람을 죽인 2명과 선비의 집 처녀를 강간한 김 애남을 모두 목베어 효시하였다. 저녁에 양 밀이 도양장 의 벌레먹은 곡식을 제멋대로 나눠 준 일로 곤장 60대를 때렸다.(중략)
초2일(기축)흐리나 비는 오지 아니 했다. 일찍 들으니 우수사의 전선이 바람에 떠내려가다가 바위에 걸려 깨졌다고 한다. 참 통분한 일이었다. 병선 군관 당언량을 곤장 80대 쳤다. 선창에 내려가 앉아 다리 놓는 것을 감독했다. 그 길로 새집 짓는 곳으로 올라갔다가 어두워서 배로 내려왔다.

p.195. 16일(계묘)맑음. 아침에 조방장, 장흥 부사 및 진중에 있는 여러 장수가 모두 보러 왔다. 군공 마련기를 보니 거제 현령 안위가 통정이 되고 그 나머지도 차례차례 벼슬을 받았으며, 내게는 은자 20냥을 상금으로 보냈다. 명나라 장수 양 경리가 붉은 비단 한 필을 보내면서, 「배에다 패홍(패홍- 승진했을 때에 배에다 붉은 비단을 걸어 그 공을 치하하는 예식이다, 육군 권 도원수에 대한 기사에도 이런 기사가 있다.)하는 예식을 올리고 싶으나 길이 멀어 가지 못 한다」고 하였다. 영의정의 답장도 왔다.

p.196. 도원수의 군관이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이번 선전관 편에 들으니, 통제사 이 순신이 아직도 상제의 예법대로만 지키고 방편을 좇지 않아 여러 장수들이 민망히 여긴다고, 하니 사정이야 간절하지만 국사가 한찬 바쁘고, 옛 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가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라 하였고, 전쟁에 나가 용감하다는 것은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곤비한 자로서는 능히 하지 못하는 일이라, 예기에도 원칙을 지키는 경이 있고 방편을 취하는 권이 있어 꼭 원칙대로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니 경은 내 뜻을 생각하여 소찬 먹는 것을 치우고 방편을 좇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울러 고기 반찬을 하사하셨으므로 더 한결 감개무량했다. 해남의 강간 약탈한 죄인들을 함평이 자세히 심문했다.
p.197. 이 밤은 해가 다 되는 그믐밤이라 비통한 마음이 더욱 더했다.
무술
임진란 이후 7년의 전쟁은 무수한 생명과 재산을 앗아가고, 이제 마지막을 고하는 최후의 해가 되었다. 아니 충무공 자신이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는 최후의 순간이 시시 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내 충무공은 자기 한 몸을 던져 조국을 위기에서 영원히 살린 것이다.
p.200. 9월 19일(신축)맑음. 아침에 좌수영 앞 바다로 옮겨 정박하니 눈에 보이는 것이 참담했다. 자정에 달을 타고 하개도에 옮겨 대었다가 날새기 전에 행군했다.
20일(임신)맑음. 오전 8시에 유도에 이르니 명나라 장수 육군 유 제독이 벌써 진군하였다. 수륙으로 협공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여 두려워하는 모양이 많기로 수군이 드나들며 대포를 쏘았다.
21일(계묘)맑음. 아침에 진군하여 혹 활을 쏘고 혹 화포를 놓고 종일 싸웠으나 물이 매우 얕아서 진격할 수가 없었다. 남해의 적이 경쾌선을 타고 들어와서 정탐하려 하므로 허사인들이 추격했더니 적은 육지에 내려 산으로 올라갔다. 그래서 그 배와 여러 가지 물건을 뺏아다가 도독에게 바쳤다.
22일(갑진)맑음. 아침에 진군하여 나갔다 들어왔다가 하다가 유격이 왼편 어깨에 탄환을 맞았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명나라 군인 11명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 지세포 만호와 옥포 만호도 탄환에 맞았다.
23일(을사)맑음. 도독이 화를 내고 서천 만호 및 홍주 대장과 한산 대장을 각각 곤잔 7대를 때리었다. 금갑도, 제포, 회령포에게도 함께 15대씩 때리었다.
p.202. 11월 초8일 도독부를 방문하여 위로연을 베풀어 종일 술을 마시고 어두워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도독이 보자고 청하므로 곧 나갔더니, 도독이 말하기를 순천 왜교의 적들이 초10일 사이에 도망해 철퇴하는 기별이 육지로부터 통문이 왔으니 급히 진군하여 돌아가는 길을 끊어 막자고 했다.
초9일 도독과 더불어 일제히 행군하여 백서량에 이르러 진을 쳤다.
초10일 좌수영 앞 바다에 이르러 진을 쳤다.
11일 유도에 이르러 진을 쳤다.
12일
13일 왜선 10여 척이 장도에 나타나므로 곧 도독과 약속하고, 해군을 거느리고 추격하니 왜선은 움추려 들어가 종일 나오지 아니 했다. 도독과 함께 장도로 돌아와 진을 쳤다.
14일 왜선 2척이 강화할 차로 바다 가운데까지 나오니 도독이 왜말 통역관을 시켜 조용히 왜선을 마중하여 붉은 기와 환도 등 물건을 받았다. 오후 8시에 왜장이 작은 배를 타고 독부로 들어와서 돼지 2마리와 술 2통을 도독에게 바치고 갔다.
15일 이른 아침에 도독을 가 보고 잠깐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왜선 2척이 강화할 차로 두 번, 세 번 도독의 진충으로 드나들었다.
16일 도독이 진 문동을 시켜 왜영으로 들여 보내더니 조금 있다가 왜선 3척이 말 1필과 창, 칼 등을 도독에게 가져가다 바쳤다.
17일 어제 복병장 발포 만호 소 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들이, 왜의 중간배 1척이 중간배 1척이 군량을 가득히 싣고 남해로부터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 바다에까지 추격하였더니, 왜적은 기슭을 타고 육지도 올라가 달아났고, 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3. 내가 저자라면
두 권의 책을 읽는 것은 여러 가지로 흥미로웠다. 저자는 같지만 시대의 편이에 따라 다르게 역서한 역자의 관점도 눈에 띄고 무엇보다 불과 이 십 여년 이지만 한글의 변천사도 볼 수 있었다. 그런 점들을 살펴보며 느낀 것은 역사는 역시나 산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기록되어 보존되어야하는 책무가 우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자들의 편의에 따라 수정되고 나아가서는 왜곡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백년 후쯤, 우리 후대들에게 이순신은 어떤 인물로 그려지고 있을 런지 자못 궁금해진다. 나무 같은 성향의 이순신도 자칫하면 역사안의 작은 한숨정도로 남을 소지가 컸던 사람이었다.


♣ 저자에 대한 평가
무엇보다 후대의 미화된 손이 아닌 본인 자신의 손으로 기록한 그를 만난 것이 즐거웠다. 그의 신하로서, 지아비로서, 어버이로서, 동료로서 그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유지하느라 여러 마음을 남을 살피는 마음으로 살아낸 그는 인간적이라기보다는 내 눈에는 완벽을 꿈꾸는, 진정 사람이고 싶어 했던 사람으로 비쳐졌다.

그의 효심은 거의 매일처럼 기록되고 있으며. 어려운 처지에서도 백의 종군하는 기상은 임금에 대한 충절을 강조하지 않아도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신하와 상관을 걱정하는 마음, 아내와 아이들을 걱정하는 그 마음의 깊이에
내마음을 내려 놓을 수 있어 위로 받았으며, 때때로 그의 의구심과 절망, 그의 여러 마음에 이입되어 그와 교감하며 지낼 수 있었다.

전쟁이 그의 일상 이었던 때였음에도, 평화시인 지금 우리시대의 어떤 남성상과도 견줄 수 없을만큼 매력적인 남성이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2005년도에 완역된 송찬섭의 난중일기중 몇가지를 올려 두며 서평을 마친다.

♣ 난중일기. 송찬섭, 2005년 9월6일, 서해문집



글을 시작하기 전에
p.5. 그간 우리가 이순신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구국의 영웅’ 그 자체였다. 이것은 1960년대 군사 정권이 영웅사관을 통하여 그들의 권력을 더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이순신에 대한 책이 발간되고 각종 기념비와 동상, 기념관이 세워졌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이순신을 제대로 알리기보다는 정권 강화, 유지를 위한 이용에 치중되었다. 때문에 우리가 이순신에 대해 받은 교육은 다소 왜곡되어 있었다.
p.6. 1960년대 이은상 씨가 중심이 되어 번역본을 간행하였고, 이를 답습한 책들도 여러 권 출판되었다. 이은상 씨의 번역본은 상당히 잘 된 것이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 수정하거나 통일시켜야 할 부분도 있고, 무엇보다도 책의 중요성이나 자료적 성격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 책이기도 하다.
『난중일기』와 이순신에 대하여
p.12. “이순신은 무인 속에 있어서 이름과 칭찬이 드러나지 않다가, 신묘년에 서애 유성룡이 정승이 되어 그를 쓸 만한 인재라고 하여 정읍 현감에서 차례를 뛰어넘어 전라 좌수사를 제수하니, 드디어 중흥의 제일 명장이 되었다. 아아, 지금 세상엔들 어찌 또한 이와 같은 인물이 없겠는가. 다만 인재를 알아 추천하는 자가 없을 뿐이다.” ― 이수광, 『지봉유설』
p.17. 1597년 통제사가 된 원균은 칠천량에서 대패했다. 1백여 척의 전함이 모두 깨어지고 바다 속에 가란앉아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이후 다시 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거의 초토화된 수군을 수습하여 한 척의 거북선도 없이 오직 전선 13척을 가지고 명량 싸움에 나섰다. 그때 적의 함대 수백 척을 보고 겁을 먹은 거제 현령 안위가 도망하려 하자 이순신은 뱃전에서 그를 불러 크게 꾸짖었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결국 안위는 싸움에 앞장섰고 대패할 것만 같았던 싸움은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이듬해 11월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 노량 싸움 중에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죽음을 맞는다.
일러두기
p.18. 다섯째: 난중일기는 1592년에서 1598년까지 7년간에 걸쳐 쓰였으나 부분적으로 유실된 내용이 있다. 이러한 부분은 이충무공전서를 통해서 보충하였다. 그리고 가끔 중간에 몇 달씩 일기가 빠진 부분이 있다. 그 가운데 중요한 일이 있었던 기간에 대해서는 장계를 통해 보충하였다. 또한 1597년의 경우 4~10월간의 일기와 8~12월간의 일기가 두 권이 있어서 8~10월은 겹쳐 있다. 겹친 부분은 내용을 하나로 합쳐서 정리하였는데 대체로 후자를 따르면서 전자로 보완하였다. 원본에 손을 댔다는 부담은 있으나 하나의 날짜에 두 종류의 일기가 있다는 것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불편할 듯하여 내용을 손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정리하였다.

p.26.
이순신의 가계
돈수―변――거―――――백록――――정―――――
IP *.9.1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