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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8일 10시 06분 등록

칼의 노래

김훈 글/생각의 나무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김훈(1948∼ )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나 아직까지 잘 살고 있다. 아니 지금 최고의 소설가로써 명성을 구가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김훈의 삶을 보노라면 그에게 어울리는 한가지 단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조직에 대한 부적응자였다. 빼어난 문학적 감수성과 작가로써의 창조성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 능력을 조직과 융화시키기위한 뇌의 적응능력은 다소 떨어지든가 아니면 아예 관심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를 보면 그는 ‘창조적 부적응자’란 표현이 딱 맞아 떨어지는 사람일 수 있겠다.

김훈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인터넷이나 신문, 잡지 등에 나와 있어 여태까지 진행했던 다른 작가들의 자료 없음에 비해보면 거의 맨땅 짚고 수영하기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저자에 대하여 정리하고 기록하고 평가하기 만만치 않아 보인다. 이 대목에서 한숨이 나온다. ‘휴우~ 역시 쉬운 건 없구나. 또한 인간의 마음 만큼 간사한 마음이 없구나....’ 쉬우면 쉬운 대로 어려우면 어려운 데로 다 어려워하는게 우리 간사한 마음의 한 일면이다. 어찌됐든 어릴 때부터 그의 행적을 중심으로 쫓아가면서 현재의 그를 만나보도록 하자.

김훈은 1948년 5월5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소설가 김광주씨의 2남3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김광주(1910~1973)씨는 50년대말 ~ 60년대초 국내 무협소설 1세대 작가로 <정협지>, <비호> 등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김훈은 선친의 작품인 <비호>를 재출간하면서 서문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소년 시절에 병석에 누운 아버지의 구술을 받아서 무협지 원고를 대필했다. 그것이 내 문장 공부의 입문이었다. 가난은 가히 설화적이었다. 그 원고료로 밥을 먹고 학교도 다녔고 용돈을 타서 술도 마셨다. 그 아이가, 그 아버지의 나이가 되도록 늙어서 다시 그 책을 펴내니 눈물겹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김훈의 아버지, 김광주씨의 생애를 간단하나마 살펴보자. 김광주씨는 수원생으로 경기고보를 졸업한 뒤, 1933년 상하이 남양의과대학에 입학한다. 이후 그는 김구(다음주 만날 사람이 백범 김구선생임을 생각한다면 이 또한 절묘한 연결이라 할 수 있겠다)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에서 이봉창, 윤봉길 의사와 함께 생활하면서 동인극단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 당시 김광주씨는 상하이 홍구공원에 폭탄을 투척할 사람으로 윤봉길 의사와 함께 거론되다 김구 선생이 막판에 윤봉길 의사를 낙점한 일화도 있는데, 만일 당시에 김광주씨가 낙점받았다면 필시 김훈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김광주씨는 광복후에도 김구선생을 보필했으며 1947년 경향신문 문화부장,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니 김훈은 2대에 걸친 소설가 겸 기자 집안 출신인 셈이다. 애초 김광주씨는 정통 소설가로써 지내다 말년에 접어들면서 무협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는 밥벌이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아래는 <오마이뉴스>가 김훈에 대해 쓴 글의 일부이다.

‘소설가 김광주씨가 그의 아버지다. 김훈의 기억에 따르면 아버지는 매일 억겁의 술을 마셨다. 5년 동안 암을 앓았고 73년 작고했다. 가난했다. 아버지가 누워서 글을 불렀다. “거기서 점 찍어, 줄 바꿔."라고 했다. 김훈은 “그때 받아쓴 것이 문장수업이 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소년인 나는 내 아버지의 쓰라린 위장을 위하여 남비를 들고 시장거리로 가서 해장국을 사 오곤 했다. 어느 겨울 새벽에 나는 해장국집 문지방에 낀 얼음 위에 자빠져서 끓는 국물을 뒤집어쓰고 허벅지에 화상을 입었다. 나는 선지와 콩나물을 바지 위에 뒤집어 쓰고, 빈 남비를 들고 춥고 어두운 새벽거리에서 울었다. 나는 이 세월들과 내 아버지의 생애를 뛰어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이를 갈면서 울었다”(주여, 망자를 당신 품 안에, 문학기행)

김훈은 이 가난 즉, 밥벌이에 대하여 상당히 비참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칼의 노래>의 대단한 성공으로 지금은 ‘밥벌이의 어려움’에서 다소 비껴서 있지만 성공 전까지 지독한 어려움에 처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자전거 여행>이 나오기 전 극도의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자전거 여행’을 앞두고 새 자전거를 사 마당에서 바퀴를 굴리고 있으니, 김훈의 부인이 김훈에게 한 마디 했다고 한다. “이 양반이 벌라는 돈은 안 벌고, 다 늙어 무슨 자전거냐”고. 그러자 김훈이 대꾸하길, “모르는 소리 마라. 이 자전거가 우릴 먹여살릴거다”라고. 김훈의 말처럼 그 자전거는 당시 생활이 어려웠던 김훈을 먹여살릴 수 있었다.

이번에는 <밥벌이의 지겨움>중에서 김훈이 말하는 밥벌이에 대하여 한번 들어보자.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흐흐.. 우리들의 목표는 밥벌이가 아니지만, 아무 도리가 없다고 김훈은 말한다. 아무 도리 없다고. 밥 안먹고 살 수 있는 놈이 누가 있으랴! 애초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생물학적 구조가 그렇게 되어버렸는데.. 모르겠다. 한 천년? 만년? 정도 지나 생물학적으로 진화 또는 퇴화되어 밥을 안 먹고 공기만 먹고도 살 수 있는 그런 생명체로 거듭나게 될 지도....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계속 가던 길을 가자.

작가 김훈은 아버지인 김광주씨가 작고하던 1973년 <한국일보>에 입사한다. 당시 그는 고려대 4학년 중퇴의 학력을 갖고 있었는데, 집안이 가난하였던 까닭에 등록금을 제대로 낼 수 없었고 몇 차례나 휴학을 반복한 후 결국 졸업을 못한 것이다. 굳이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도 딱히 없었던 김훈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라 밥벌이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했고(이전에는 막노동판에도 나갔다고 한다) 그 와중에 <한국일보>의 입사지원 자격이 `고졸’이라는 점에 착안해 지원하게 되었다. 당시 다른 언론사는 모두 지원자격이 `대졸’이었다. 그러나 면접에서 `대졸’이 아니라는 게 문제가 되었는데, <한국일보> 또한 지원자격을 `고졸’로 했을 뿐 실제로 대학졸업을 하지 않은 사람이 한국일보 기자가 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장기영 한국일보 회장이 당돌했던 김훈을 눈여겨 봐 김훈은 한국일보 기자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조직생활에 전혀 맞지 않는 인물인 김훈은 한국일보에서도 몇 차례나 그만뒀다 다시 들어갔다를 반복하다, 이후 <시사저널> 편집장으로 또한번 이름을 떨치게 된다. <시사저널>은 90년대 초반 시사주간지 시장이 만개할 때, 가장 먼저 시장을 열었던 곳으로, 김훈은 이곳에서 기자로서뿐 아니라 데스크로서의 능력도 발휘한다.

그러던 김훈은 엉뚱한 이유로 시사저널을 그만두게 되는데, <한겨레21>이 지금은 없어진 `쾌도난담’ 코너에 적장이나 다름없는 김훈을 초청했고, 이 초청에 응한 김훈은 “나는 남자들보다 더 뛰어난 여자를 본 적 없다” 등 가부장적이고 다분히 군국주의적인 발언을 마구 쏟아낸다. 이런 일이 벌어진 뒤, <시사저널> 기자 일부가 사표를 내고, 여성계를 중심으로 김훈 비난여론이 들끓자 김훈은 결국 사표를 던지게 된다.

이후 김훈은 야인으로 머물면서 전국을 풍륜(風輪)이라고 이름붙인 자전거를 타고 달린 뒤 쓴 수필집 <자전거 여행>(2000), 이어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칼의 노래>(2001) 등을 쓰며 작가로써의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보다 자유로워 진 것이다. 이후 현장에 대한 감을 익히기 위하여 다시 <한겨레>에 입사하여 짧은 기간 조직생활을 한 후 지금은 순수 작가로써의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저서 중 가장 많은 독자에게 알려진 책이 『칼의 노래』일 것이다. 왜 김훈은 ‘이순신’을 썼을까. 고려대와의 인터뷰 내용을 살펴보자.

“대학 2학년 때 도서관에서 우연히 『난중일기』를 발견하고 읽은 적이 있다. 『난중일기』 속에 그려진 현실의 모습은 완벽한 지옥의 모습이었다. 이순신은 아무도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 말 그대로의 지옥의 복판에 고립되어 있었다. 이순신이 거느리던 부대는 특별히 용맹하거나 정예화된 부대가 아닌 당시 보편적인 부대였다. 그래서 이순신의 부하들 역시 탈영하고 나서서 싸우기 기피하는 자들였으므로 이순신 편은 아니었다. 또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은 이순신을 견제하는 조정 대신과 전쟁에 대해 어떤 지원도 책임도지지 않으려 하는 임금도, 조선에 쳐들어온 왜군도 적……. 한 마디로 이순신은 완벽히 적에게 포위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지옥같은 현실 속을 굳건한 의지로 놀랍게 돌파해 나간다. 이순신은 흔히 봉건적 관념인 ‘충성심’의 상징으로 여겨지는데 (물론 이것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나는 이순신에게서 충성심 보다 더 강한 내면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보상을 기대하지도 않고, 즉 어떤 희망에 기대지 않고도 지옥을 돌파해내는 이순신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됐다. 그러나 『난중일기』를 본 당시에는 이것을 소설로 쓰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를 써보리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막연한 생각이 30년의 세월을 흘러 소설화 됐다.”


『칼의 노래』이외의 저서로 독서 에세이집『내가 읽은 책과 세상』『선택과 옹호』여행 산문집 『문학기행』,『풍경과 상처』『자전거여행』『원형의 섬 진도』, 시론집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밥벌이의 지겨움』, 장편소설『빗살무늬 토기의 추억』,『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강산무진』,『개(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남한산성』,『칼의 노래』,『현의 노래』등이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목이야 어디로 갔건 간에 죽은 자는 죽어서 그 자신의 전쟁을 끝낸 것처럼 보였다. 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남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내 몸의 깊은 곳에서, 아마도 내가 알 수 없는 뼛속의 심연에서, 징징징, 칼이 울어대는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나는 등판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캄캄한 바다는 인광으로 뒤채었다.(26P)

죽여야 할 것들을 다 죽여서, 세상이 스스로 세상일 수 있게 된 연후에 나는 내 자신의 한없는 무기력 속에서 죽고 싶었다.(32P)

이미 숨이 끊어진 아전의 몸을 으깨던 매와, 보리쌀로 죽을 끓여 먹었을 그의 식솔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혼자 않아 있었다. 나는 맑은 청정수를 들이켜고 싶었다.(45P)

나는 김덕령처럼 죽을 수도 없었고 곽재우처럼 살 수도 없었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 주기를 나를 바랐다.(82P)

전하, 전하의 적들이 전하를 뵙기를 고대하고 있나이다. 신은 결단코 전하의 적들을 전하에게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적들은 전하의 적이 아니라 신의 적인 까닭입니다…….(82P)

여기는 사지였다. 일출 무렵의 아침 바다에서는 늘 숨을 곳이 없었다. 사지에서, 죽음은 명료했고, 그림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 역류 속에서 삶 또한 명료했다. 사지에서, 삶과 죽음은 뒤엉켜 부딪혔다. 그것은 순류도 아니었고 역류도 아니었다. 거기서 내가 죽음을 각오했던 것인지, 삶을 각오했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나는 그 모호함을 중언부언하지 않겠다.(85P)

……신의 몸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에는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신(臣) 이(李) 올림(90P)

사지에서는 살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아마도 살길이다. 살 길과 죽을 길이 다르지 않다. 너희는 마땅히 알라(93P)

찐 고구마로 저녁을 먹인다면 다음날 아침은 대책이 없었다. 밝는 날 아침에, 바다 위에서 적의 군량으로 나의 군사를 먹일 수 있을 것인지, 어느 가까운 포구로 군사를 물려서 먹일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먹일 필요가 없을 것인지를 나를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명량의 물길은 엎치락뒤치락 네 번은 바뀔 것이다.(100P)

-사내야 사내야. 사내가 죽어야 한다.(111P)

내가 적을 죽이면 적은 백성을 죽였고 적이 나를 죽인다면 백성들은 더욱 죽어나갈 것이었는데, 그 백성들의 쌀을 뺏고 빼앗아 적과 내가 나누어 먹고 있었다. 나의 적은 백성의 적이었고, 나는 적의 적이었는데, 백성들의 곡식을 나와 나의 적이 먹고 있었다. 대낮에 오한이 오면서 임진년에 총 맞은 왼쪽 어깨가 쑤셨다. 바람이 없는데도 먼 바다에서 물결이 일었다. 내일, 바다에는 비가 내릴 것이었다.(117P)

세상은 칼로서 막아낼 수 없고 칼로써 헤쳐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칼이 닿지 않고 화살이 미치지 못하는 저쪽에서, 세상은 뒤채이며 무너져갔고, 죽어서 돌아서는 자들 앞에서 칼은 속수무책이었다. 목숨을 벨 수는 있지만 죽음을 벨 수는 없었다.(124P)

한 자루의 칼과 더불어 나는 포위되어 있었고 세상의 덫에 걸려 있었지만, 이 세상의 칼로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덫을 칠 수는 없었다.(137P)

김수철의 시선은 오랫동안 면사첩에 박혀 있었다. 그가 눈물을 떨구었는데, 그의 얼굴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환갑연의 덕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으리, 오래오래 사십시오.
―알았다. 내 그럴 작정이다.(142P)

탯줄에 붙어서 여자의 배로 태어나는 인간이 혈육의 이마와 눈썹을 닮고, 시선까지도 닮는다는 씨내림의 운명을 나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송장으로 뒤덮인 이 쓰레기의 바다 위에서 그 씨내림의 운명을 힘들어하는 내 슬픔의 하찮음이 나는 진실로 슬펐다.(151P)

배는 살아있는 생선과 같다. 전선과 어선이 같고, 판옥선(板屋船)과 협선(挾船)이 매한가지다. 생선의 몸이 물을 읽듯이 배는 물을 읽고, 물을 받아내면서 나아간다. 여울을 거스를 때 생선이 때때로 몸통 전체를 뒤틀며 물에 저항하듯이, 배도 몸통 전체를 뒤틀며 파도와 파도 사이를 빠져나간다. 물에 맞서는 배의 저항은 물에 순응하기 위한 저항이다. 배는 생선과 같다. 배가 물을 거스르지만, 배는 물에 오래 맞설 수 없고, 물을 끝끝내 거절하지 못한다. 명량의 역류를 거슬러 나아갈 때도, 배를 띄워주는 것은 물이었고 배를 나아가게 하는 것도 물이었다. 생선의 지느러미가 물살의 힘과 각도를 감지하듯이 노를 잡은 격군들의 팔이 물살의 힘과 속도와 방향을 감지한다. 장수의 몸이 격군의 몸을 느끼고, 노 잡은 격군의 몸이 물을 느껴서, 배는 사람의 몸의 일부로써 역류를 헤치고 나아간다. 배는 생선과도 같고 사람의 몸과도 같다. 물속을 긁어서 밀쳐내야 나아갈 수 있지만, 물이 밀어주어야만 물을 따라 나아갈 수 있다. 싸움은 세상과 맞서는 몸의 일이다. 몸이 물에 포개져야만 나아가고 물러서고 돌아서고 펼치고 오므릴 수가 있고, 몸이 칼에 포개져야만 베고 찌를 수가 있다. 배와 몸과 칼과 생선이 다르지 않다.(156P)

사직은 종묘 제단 위에 있었고 조정은 어디에도 없었다.(160P)

싸움은 싸움마다 개별적인 것이어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때마다 그 싸움이 나에게는 모두 첫 번째 싸움이었다. 싸움은 싸울수록 경험되지 않았고, 지나간 모든 싸움은 닥쳐올 모든 싸움 앞에서 무효였다.(167P)

죽은 여진의 가랑이 사이에서 물컹거리던 젓국 냄새와 죽은 면이 어렸을 때 쌌던 푸른 똥의 덜 삭은 젖냄새와 죽은 어머니의, 오래된 아궁이 같던 몸냄새가 내 마음속에서 화약 냄새와 비벼졌다.(168P)

살려주자, 살게 하자, 살아서 돌아가게 하자……. 내 속에서 나 아닌 내가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아베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울음과 아베를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울음이 내 몸속에서 양쪽 다 울어지지 않았다. 몸속 깊은 곳에서 징징징 칼이 울었다. 가장 괴롭고 가장 선명한 길을 칼은 가리키고 있었다.(188∼189P)

목숨을 가로지르며 건너가는 칼날에 산 것의 뜨겁고 뭉클한 진동이 전해졌다.(189P)

칼로 적을 겨눌 때, 칼은 칼날을 비켜선 모든 공간을 동시에 겨눈다. 칼은 겨누지 않은 곳을 겨누고, 겨누는 곳을 겨누지 않는다. 칼로 찰나를 겨눌 때 칼날에 닿지 않은, 닥쳐올 모든 찰나들을 겨눈다. 적 또한 그러하다. 공세 안에 수세가 살아 있지 않으면 죽는다. 그 반대도 또한 죽는다. 수(守)와 공(攻)은 찰나마다 명멸한다. 적의 한 점을 겨누고 달려드는 공세는 허를 드러내서 적의 공세를 부른다. 가르며 나아가는 공세가 보이지 않는 수세의 무지개를 동시에 거느리지 못하면 공세는 곧 죽음이다. 적과 함께 춤추며 흐르되 흘러들어감이 없고, 흐르되 흐름의 밖에서 흐름의 안쪽을 찔러 마침내 거꾸로 흐르는 것이 칼이다. 칼은 죽음을 내어주면서 죽음을 받아낸다. 생사의 쓰레기는 땅 위로 널리고, 칼에는 존망의 찌꺼기가 묻지 않는다.(202P)

길고 가파른 전투가 끝나는 저녁 바다는 죽고 부서져서 물에 뜬 것들의 쓰레기로 덮였고 화약 연기에 노을이 스몄다. 그 노을 속에서 나는 늘 살아 있었고, 살아서 기진맥진했다.(240P)

너는 속히 종이를 장만해서 조정으로 보내라. 이것이 어찌 임금인 내가 할 소리이겠느냐. 임금의 민망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너는 마땅히 헤아려라.(271P)

진은 거대한 새처럼 물위에서 너울거린다. 너울거리면서 적을 가슴깊이 품는다. 품어서 죽인다. 펼쳐서 가두고, 조여서 품고, 품어서 죽인다. 적을 품어서, 적의 안쪽에 숨어 있는 적의 죽음으로 적을 죽인다.(281P)

부대를 잃고 퇴로를 잃은 적들은 갯벌의 바위틈이나 물고랑에 게처럼 모여서 울었다. 무수한 적들이 울어대는 울음소리는 여름날 논 개구리들의 울음소리처럼 서로 비벼지면서 갯벌을 넘어왔다. 그때, 적들은 죽기로 작정한 자들처럼 필사적으로 울었다. 적의 울음의 기세는, 내 함대의 정면으로 들이닥치던 적의 공세를 닮아 있었다. 그 울음은 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울음을 모두 소진한 뒤에, 울음의 끝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의 맹렬한 울음이었다.(301P)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내 젊은 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 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 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387-388P)


3. ‘내가 저자라면’

지난주 이순신장군의 원작 <난중일기>에 이어 이번 주에는 현대작가의 가공역사소설인 <칼의 노래>를 읽게 되었다. 원작을 읽고 그 응용을 읽으니 뭐라 할까 기초에 튼튼한 집을 지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마치 수학 정석을 제대로 이해하고 시험에 임한 것과 같다. 흐흐. 덕분에 <칼의 노래>란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며 읽은 듯하여 뿌듯하였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들어가자면 이 책은 원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맛을 가진 작품이다. 음식에 비유하자면 냉면에 비할 수 있겠다. 즉 이순신의 원작 <난중일기>가 함흥냉면이라면 김훈의 <칼의 노래>는 평양냉면이라 표현하고 싶다. 부연설명하자면 함흥냉면의 경우 그 국물맛이 처음 먹는 사람에게는 밋밋하지만 몇 번 먹고 그 깊은 맛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국물맛이 드물다고 한다. 이처럼 <난중일기> 또한 단순하고 같은 내용의 재미없는 반복처럼 읽힐 수 있겠지만 그 깊은 맛(내용, 심리)를 알게되면 이처럼 맛있는 작품이 드물 것이다. 이에 반하여 평양냉면의 경우 그 맛이 화려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양냉면을 맛있는 냉면의 1순위로 올려 놓는다. 이처럼 <칼의 노래>는 화려한 문체와 장엄한 서식 그리고 비장미로 무장한 소설이다. 누구에게나 공감을 호소하며 감정이입에 몰두하고 있다.

만약 <칼의 노래>를 읽고자 하는 독자가 있다면 <난중일기>를 먼저 읽고 그 후 <칼의 노래>를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야만이 이순신의 깊은 고뇌와 슬픔, 아픔을 더 깊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순서를 바꾸어서 읽는다면 과연 <난중일기>를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 다소 어렵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내가 저자라면...’ 이같은 책을 쓸 수 있을까? 최소한 내 전공은 아닐 듯 싶다. 역사에 대한 이해와 한 인간에 대한 완벽한 심리를 읽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 능력 밖이란 생각이다. 이 책은 이순신이란 한 인간의 고뇌와 아픔, 슬픔, 고민, 괴로움, 번뇌 등 모든 힘들고 어려운 것을 그 어깨에 지우고 써나간 소설이다. 그만큼 이순신의 어깨는 무겁고 힘겨울 수 밖에 없다. 실지 임진왜란에는 정규군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의병, 승병들이 일어 나서 왜적에 대항하여 싸웠다. 하지만 승전에 대한 뚜렷한 결과가 없던 만큼 조선수군에 그만큼의 기대가 몰렸을 것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의 모든 향방이 이순신의 어깨에 달려있는 것처럼 비추는 것은 이순신의 고뇌를 더욱 더 증폭시키기 위한 작가의 ‘가정’이 아닐까? 또한 그것이 소설의 묘미가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눈물이 흘렀다. 괴로웠다. 처음엔 가슴이 감동으로 뭉클거렸지만 그 뭉클거림은 오래가지 못했다. 곧 아픔으로 전환되었고 그 아픔은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오래도록 가슴 시리도록 만들었다. 특히 명량해전시 조선해군의 죽음과 왜군의 죽음 그리고 일반 백성인 어부들까지 싸우다 장렬히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는 그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왜 다 죽어야만 하는가. 그들의 죽음이 있었기에 과연 지금 우리의 평화가 있는 것인가. 책의 한편에 간단히 메모를 해둔게 있다.

‘우리의 죽음도 슬프고 적의 죽음도 슬프다. 아버지와 함께 나선 전쟁, 아버지의 죽음도 슬프고 이어진 아들의 죽음도 괴롭다. 뭔 소설이 이러냐... 흐르는 눈물이 주체되질 않는다....’
-5/27 삼일아카데미 강의장에서 혼자 남아-

또한 책을 읽는 내내 칼로 베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선명하고 날 선 칼날이 나의 몸을 베어 들어오는 서늘한 느낌, 그리고 이어지는 긴 고통. 피의 솟구침. 비린내. 화약냄새. 온갖 시체 썩어가는 냄새. 젖국냄새. 똥 냄새... 당시 세상은 온갖 더러운 것, 쓰레기들의 세상이였다. 괴로웠다. 온통 화약연기 속에 숨이 막혔다.

여진과의 하룻밤에 사용한 ‘젖국냄새 그러나 안은 평화롭고 포근했다’란 표현과 면의 죽음 그리고 복수에 대한 심리묘사는 탁월하다 못해 가슴을 울리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이러한 것 때문에 <칼의 노래>가 많이 읽혔을 것이다. 대단한 소설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구성을 살펴보고 마무리짓고자 한다. 이 책의 전체적인 진행은 시간상 흐름으로 전개되며 큰 부분은 ‘장’에 대한 구분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소제목을 이용하여 진행되고 있다. 즉 ‘책머리에’를 제외하고 ‘칼의 울음’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들리지 않는 사랑 노래’까지 모두 44개의 소제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소제목의 내용들은 아주 짧은 단편식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소단편들이 모여 전체 장편소설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아마도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책을 써 간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쓰여지는데로 쓴 후 나중에 조합을 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러한 구성은 장편소설에 있어 잘못되면 흐름을 깰 수도 있는 단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유연한 흐름으로 연결되어 각 편마다 유기적 작용으로 인한 시너지 효과 및 작품성을 더욱 더 가미시켜 주는 효과를 나타내었다.



여기는 사지였다. 일출 무렵의 아침 바다에서는 늘 숨을 곳이 없었다. 사지에서, 죽음은 명료했고, 그림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 역류 속에서 삶 또한 명료했다. 사지에서, 삶과 죽음은 뒤엉켜 부딪혔다. 그것은 순류도 아니었고 역류도 아니었다. 거기서 내가 죽음을 각오했던 것인지, 삶을 각오했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나는 그 모호함을 중언부언하지 않겠다.

<칼의 노래(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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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9 17:44:09 *.64.21.2
함흥냉면의 경우 그 국물맛이 처음 먹는 사람에게는 밋밋하지만 몇 번 먹고 그 깊은 맛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국물맛이 드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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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수를 말하는 국물맛을 말한거라면 평양냉면 이겠지요.
(평양냉면-물냉면 함흥냉면-비빔냉면)

또 물냉면이라도 모든 물냉면이
'그 국물맛이 처음 먹는 사람에게는 밋밋하지만 몇 번 먹고 그 깊은 맛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국물맛이 드물다고 한다.'
가 아니라
그 표현은 밀면을 사용한 평양냉면만 그러합니다.
필동면옥 을지면옥 을밀대 가 대표적 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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