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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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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8일 15시 23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칼의 노래. 이순신-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김훈. 생각의 나무. 2001.

♣ 저자에 대한 생각

작가와 4번 정도 대면 할 일이 있었던 나는 만날 때마다 그 입장이 달랐다. 처음엔 그가 [칼의 노래]로 동인 문학상을 받았던, 2001년도에 기자와 작가로 만났고, 그 후 사석에서 두어 번 만났으며, 우리학교에 [남한산성]의 저자로 강연차 온 그를 만났다.

[칼의 노래]로 동인 문학상 수상 후 만났던 기사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다음은 그와의 인터뷰 기사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1. [칼의 노래]에서 말하고 싶었던 가장 큰 축은 무엇인가?

[칼의 노래]는 ‘이순신’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는데 ‘이순신’은 내가 역사에서 차용한 역사의 인물일 뿐이다. [칼의 노래]에서의 전쟁은 영웅이 하는 전쟁이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민중이 역사를 이끌어 간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대하여 나는 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 전쟁은 엘리트의 소수가 일으키는 것이고, 민중은 그 밑에서 노를 저을 뿐이다. 그들의 생각이나 입장은 전쟁에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핵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정말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지 않았고,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전쟁은 끝이 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민심이 귀한 것은 알고 있으나 역사의 구조상, 그들은 전쟁에서 그 하위개념으로 놓이게 된다. 그런 의미로 냉정히 본다면 나는 민주주의자가 아닌 것이다.

또한 ‘칼’은 일회성의 의미이고 그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칼은 무엇이든 베어야 기능하게 되는 것이고, 그래야 칼의 논리를 이끌어 갈 수 있다. 그런 칼에 언어로 멋을 내는 것, 칼에 시를 부여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2. 기자 출신의 작가라는 선입감에 대해

27년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기사가 담보해야 하는 ‘사실’ 의 부분에서 생각이 늘 많았다. 사실이 ‘사실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써야만 했고, 거기서 오는 소통의 부재감이 힘들었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그 목마름을 달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기자라고 해서 그 경험을 다 글로 쓰는 것도 아니며, 소설의 소재로 쓰이는 건 더욱 아니다. 현실과 소설은 분명 다른 것이다. 나는 소설가가 되려고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쓰기 위해’ 소설을 쓰는 것이고, 그런 나를 사람들은 작가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다.



김훈과 만남을 가지면서 그가 툭툭 내뱉듯 던지는 말에 숨은 의미는 많지 않아 보였다. 그는 공간의 입장에 따라 분명하게 자기의견을 드러냈으며 가끔은 연결어미가 닿지 않는 문장으로 자기를 표현하기도 했다. 외로움은 천박한 것이고, 자신은 외로움 같은 것은 모른다던, 그는 지금쯤은 작가적 외로움이 더 이상 사치가 아니란 걸 알게 되지 않았을까 묻고 싶다.

어쨌거나 내가 추측하게 된 것은 그가 글의 힘, 다시 말해서 펜의 위력을 알고 있으며, 때로 그것을 행사할 줄도 안다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발언을 했다면 ‘실언’이라기보다 다분히 의도적인 ‘실언’으로 보이고 싶은 공식적 ‘말’, 자신의 영향권 아래 있는 ‘말’을 즐기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 때문에 누구 보다 그는 오래 쓰는 작가가 될 예감이다.

동인 문학상, 이상 문학상, 황순원 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자 소개
생애 초기- 나는 1948년 5월5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소설가 김광주씨의 2남3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 김광주(1910~1973)씨는 50년대말~60년대초 국내 무협소설 1세대 작가로 <정협지>, <비호> 등을 썼다. 아버지는 수원생으로 경기고보를 졸업한 뒤, 1933년 상하이 남양의과대학에 입학했고 이후 그는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에서 이봉창, 윤봉길 의사와 함께 생활하면서 동인극단을 운영하기도 했다.

아버지에 대해 좀 더 말하자면 그 당시 아버지는 상하이 홍구공원에 폭탄을 투척할 사람으로 윤봉길 의사와 함께 거론되다 김구 선생이 막판에 윤봉길 의사를 낙점한 일화도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1947년 경향신문 문화부장, 편집국장을 지냈다. 그러니 우리 부자는 2대에 걸쳐 글쟁이로 먹고 사는 가계를 인 셈이다. 아버지는 정통(?) 소설을 쓰다 말년에 접어들면서 무협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병석에 누워서도 “거기서 점을 찍어, 줄 바꿔"라고 말하면 나는 그 말을 받아 무협지 원고를 대필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이 나의 첫 문장수업이라고 할 수 있다. 소년이었던 나는 매일 술을 마시는 아버지를 위하여 냄비를 들고 시장에 가서 해장국을 사 와야 했다. 어느해 겨울 아침에는 해장국집 문지방에 언 얼음 위에 미끄러져 끓는 국물로 허벅지에 화상을 입었고. 추운 거리에서 선짓국을 뒤집어쓰고 울었던 기억은 아직도 내게 상흔으로 남았다. 여하튼 그 알량한 원고료로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니고, 용돈을 타서 술도 마셨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고. 5년 동안 암을 앓다 73년 작고했다. 어찌나 가난에 한이 맺혔던 세월이었는지 아버지의 생애를 뛰어넘는 것이 나의 목표가 되었다.

♣ 청년기- 기자로서의 나.
아버지가 작고하던 1973년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당시 나는 고려대 4학년을 중퇴했다. 등록금을 제대로 못내 몇 차례나 휴학을 하다 결국 졸업을 못한 것이다.
딱히 신문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지만 생계를 잇기 위해 막노동판도 기웃거린 처지라 이일저일 가릴 형편이 아니었는데 <한국일보>의 입사지원 자격만이 ‘고졸’이었던지라 얼른 지원했다. 그러나 면접에서 `대졸’이 아니라는 게 문제가 됐다. 지원자격을 ‘고졸’로 했을 뿐 대학졸업을 하지 않은 사람이 한국일보 기자가 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좋게 당시 장기영 한국일보 회장의 눈에 어찌어찌 하여 들어 출근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 사회부 경찰팀 (기동취재팀) 기자로 5년을 지내고 문화부로 옮겨 문학을 담당했는데, 이때 ‘문학기행’의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다. 부서는 마음에 들었고, 일 또한 할만했다. 돌아보면 제일 즐거웠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 시사저널 시절- 그러나 조직생활이 생래적으로 맞지 않은 나는 신문사를 나갔다 들어왔다를 반복하다, <시사저널> 로 옮겨 앉았다. 일간지인 신문사보다는 주간지인 <시사저널>이 여유가 있을 것 같아서였고 신생 시사 주간지 형식도 마음에 들었다. 편집장일도 보게 되고 그럭저럭 지명도를 높여가던 차에 ‘쾌도 난담’ 사건이 터졌다. 그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져 결국 기자들이 사표를 내고, 당사자였던 나 또한 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사표를 낼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의 내 행동을 두고 아직도 여러 견해가 많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없다. 말이라는 것이 한번 쏟아 내면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고, 현직에 있는 것도 아닌 지금, 시절 지나간 변명으로 또 파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생의 중기- 자전거
그 후는 알려진대로 자전거와 함께 한 세월이다. 나는 어디에도 소속되고 싶지 않아 나의 애마인 자전거풍륜(風輪)과 전국을 떠돌았다. 그리고 바람의 바퀴자국, <자전거 여행>(2000)을 냈는데 책은 그런대로 입소문을 타고 팔려 주었다.
그러나 나는 혼자 글을 쓰는 직업,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야인인 것이 때로는 좋기도 때론 고립된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이 시절 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 <칼의 노래>(2001)를 펴냈는데 그것이 작가로서의 내 이름을 만들게 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 이 팔려 생계가 해결되자 나는 다시 현장 기자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기왕이면 내게 딱지처럼 앉은 보수를 한겨레라는 진보속에서 들여다보고 싶었다. 나의 그런 바람은 <한겨레>의 비공식라인을 타고 논의됐고, 그해 2월 부국장 대우 사회부 기동팀 취재기자로 입사하기에 이른다. 나로서는 7번째 회사입사인 셈이다. 이때 진보로 알려진 홍세화도 편집위원으로 입사했는데 보수와 진보가 나란히 입사했다며 타 언론들은 입방아를 찧어댔다. 그때 마침 나는 <조선일보>의 동인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터였는데 내부에서 나의 입사를 반대하는 말들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 <한겨레> 생활
나는 생생한 현장감을 즐기고 싶어 데스크가 아닌, 사회부 기동취재팀에 배치됐고, 출입처는 종로경찰서였다. 종로경찰서에는 기존의 1진 기자가 있었고, 나는 형식상으로는 종로 2진이었지만 경찰서에는 잠깐 들러 현장감을 스케치 했을 뿐이다. 후배 기자들은 물론 경찰들까지도 나를 어려워하는 것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마다 30대 중반의 캡에게 전화로 보고를 했는데 그 생활은 나에게 적당한 긴장감과 소속감을 주었다. 다른 기자들은 이메일로 하는 보고를 하는데 반해 아무리 익히려 해도 컴퓨터를 다룰 수 없던 나는 전화로 보고를 해야만 했다.

아침보고를 마치고 나면 취재를 나가거나 종로서 앞 참여연대 느티나무 카페 또는 인근 커피숍에서 원고지에 기사를 썼다. 3시전에는 어떻게든 원고를 넘기는 것이 나의 법이었다. 후배기자들 원고 마감 어기는 것을 질책하던 나였고, 마감시간 어기는 것은 기자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나이든 현장기자가 없는 우리나라의 실정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실예로 가끔 현장에서 날 더러 할아버지라고 하는 전경들을 만날 때는 참 불쾌하고 곤혹스러웠다.

민항기 추락사고 당시, 현장취재차 부산에 내려가 병원에서 유족들을 취재하고 있는데, 당시 대통령 후보 당내경선 중이던 노무현 후보가 위로차 왔다가 내손을 잡고 “얼마나 심려가 크십니까?”라고 해 황당해 했던 적이 있다.

사람들은 그런 일로 인해 대통령이 [칼의 노래]를 읽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한겨레 기자 생활은 결국 일 년 만에 그만 두었다. 사람들이 보수라고 말하는 내가 진보를 대표한다는 한겨레에서 할 일이 있을 줄 알았던 것이나 그곳에서 나는 나이듦을 봤고, 미국을 객관적으로 보는 세대들과 만났다.

그리고 그 만남에서 늙음은 곧 낡음이 아닌가 하는 쓸쓸한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촛불을 들고, 진보인 노무현을 지지하는 군중을 보면서 늙은 보수인 내가 신문사에서 전할 일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칼의 울음
p.17.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린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가서 소멸했다. 저녁이면 먼 섬들이 박모 속으로 불려가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먼 섬부터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이어서,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p.18. 서로 알지 못하는 적의가 바다 가득히 팽팽했으나 지금 나에게는 적의만이 있고 함대는 없다.
나는 정유년 4월 초하룻날 서울 의금부에서 풀려났다. 내가 받은 문초의 내용은 무의미했다. 위관들의 심문은 결국 아무것도 묻고 있지 않았다.

p.18-19. 이 세상에 위로란 본래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나는 장독으로 쑤시는 허리를 시골 아전들의 행랑방 구들에 지져가며 남쪽으로 내려와 한 달 만에 순천 권률 도원수부에 당도했다. 내 백의종군의 시작이었다.

p. 21. 목이야 어디로 갔건 간에 죽은 자는 죽어서 그 자신의 전쟁을 끝낸 것처럼 보였다. 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내 몸의 깊은 곳에서, 아마도 내가 알 수 없는 뼛속의 심연에서, 징징징, 칼이 울어대는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나는 등판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캄캄한 바다는 인광으로 뒤채었다.

안개 속의 살구 꽃
p.24. 서울로 가는 함거에 오르기 전에 나는 내 후임자인 원균에게 함대, 병력, 군량, 총포, 화약, 창검, 포로 그리고 행정 사항을 인계했다. 원균은 나를 실은 함거가 어서 떠나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는 실물의 수량과 보존 상태를 확인하지 않은 채 인수서에 도장을 찍었다.
p.25. 그는 전투의 결과에 얻을 것이 있다고 믿었다. 나는 때때로 수많은 적의 머리를 주어서 그를 달랬다. 그의 활화산 같은 적의와 분노가 날개를 펴고 달려드는 적의 방사진 앞에 장졸과 함대를 집중시켰던 것이다.
갑옷마저 잃어버린 원균은 거제도의 산속으로 달아났다. 그는 칼 한 자루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는 나무 그늘 아래 주저앉아서 그 뚱뚱한 몸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뭍까지 쫓아온 적의 칼을 받았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도 죽었고 충청 수사 최호도 배가 부서질 때 바다에서 죽었다.
다시 세상 속으로
p.32. 나는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진 한 움큼이 조선의 전부였다. 나는 임금의 장난감을 바칠 수 없는 나 자신의 무력을 한탄했다. 나는 임금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함대를 움직이지는 않았다. 나는 즉각 기소되었다. 권률이 나를 기소했고 비변사 문인 관료들은 나를 집요하게 탄핵했다. 서울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는 동안 나는 나를 기소한 자와 탄핵한 자들이 누구였던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정치에 아둔했으나 나의 아둔함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p.33. 울어지지 않는 울음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한 불덩어리가 내 몸 깊은 곳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것을 나는 느꼈다. 방책, 아아 방책. 그때 나는 차라리 의금부 형틀에서 죽었기를 바랐다. 방책 없는 세상에서, 목숨이 살아남아 또다시 방책을 찾는다. 나는 겨우 대답했다.
-방책은 물가에 있든지 없든지 할 것입니다. 연안을 다 돌아보고 나서 말씀 올리겠습니다.
-고맙네, 속히 시행하게.(중략)
권률이 돌아간 뒤, 나는 종을 시켜 칼을 갈았다. 시퍼런 칼은 구름 무늬로 어른거리면서 차가운 쇠비린내를 풍겼다. 칼이 뜨거운 물건인지 차가운 물건인지 나는 늘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는 칼을 코에 대고 쇠비린내를 몸 속 깊이 빨아넣었다. 이 세상을 다 버릴 수 있을 때까지, 이 방책 없는 세상에서 살아 있으라고 칼은 말하는 것 같았다.

칼과 달과 몸
p.41.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밥을 먹었다. 입이 작은 그 여자는 큰 놋숟가락을 힘들어했다.
-내가 출옥했기로 네가 어찌 왔느냐?
-전에, 제 몸을 편안해하시기에……

허깨비
p.47. 중국 산수화를 들여다보고 있던 임금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옥에 갇힌 자들을 끌어내서 죽였다. 팔십 먹은 노파를 곤장으로 쳐 죽였고, 여덟 살 난 남자아이와 다섯 살 난 여자아이를 무릎을 으깨서 죽였다. 목격한 사실을 자백하라는 위관의 심문을 아이는 알아듣지 못했다.(중략)
그는 농사를 짓는 농부처럼 근면히 살육했다. 살육의 틈틈이, 그는 도가풍의 은일과 고독을 수다스럽게 고백하는 글을 짓기를 좋아했다. 그의 글은 허무했고 요염했다.

p.48. 나는 맑은 청정수를 들이켜고 싶었다. 이 세상과의 싸움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헛것은 칼을 받지 않는다. 헛것은 베어지지 않는다.
술취한 선전관으로부터 길삼봉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길삼봉은 임금 자신일 것이었다. 그리고 승정원, 비변사, 사간원, 사헌부에 우글거리는 조정 대신 전부였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는 길삼봉이 숨을 수 있는 깊은 숲이었을 것이다.
몸이 살아서
p.54.구례에 도착하던 밤에 혼자서 술을 마셨다. 술이 먼 것들을 가깝게 당겨주었다.
p.54-55. 부고를 받던 날 시골 객주집 행랑방에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나는 어머니를 순천에 모셔왔다. 순천은 우수영이나 통제영에서 가까웠다. 어머니는 내가 출옥했다는 소식을 듣고 순천에서 아산으로 올라왔다. 어머니는 남해안을 돌아서 서해로 올라가는 화물 배편을 얻어 탔다. 엿새가 걸렸다. 어머니는 배에 관을 싣고 있었다. 배가 아산에 닿았을 때, 어머니는 배 안에서 당신 혼자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는 당신이 싣고 온 관 속에 누웠다. 나중에 들으니, 어머니의 시신은 가랑잎처럼 가벼웠다고 한다. 나는 어머니의 초상을 치를 수 없었다. 그날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순천에 모실 때 가끔 찾아뵈면, 어머니는 아들을 어려워했고, 아들에게조차 내외를 했다.

어머니는 내가 방 안으로 들어가면 병상에서 몸을 일으켜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내렸고 이부자리를 단정히 했다. 안아보면 어머니는 한 움큼이었다. 어머니의 몸에서는 오래된 아궁이의 냄새가 났다. 내가 안을 때, 어머니는 고개를 돌리며 수줍어했다.
-어서 가거라. 가서, 나라의 원수를 크게 갚아라.
내가 돌아갈 때 어머니는 늘 그렇게 말했다. 나는 차라리 어머니가 어리광을 부려주기를 바랐다. 두 달이 지났으니, 어머니는 땅 속에서 썩었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혼자서 취했다. 허리가 결리면서, 비가 내렸다. 차가운 늦가을 비였다. 어머니의 몸과, 피난민들의 노숙 자리에 내리는 비를 생각하면서 나는 자꾸 마셨다. 술은 비처럼 몸 안으로 스몄다. 아침에도 비는 멎지 않았다. 안주 없이 마신 술에 속이 쓰렸다. 빗소리를 들으며 혼자서 뒤채었다. 더 이상 떠돌아다니면서 확인할 것도 건질 것도 없었다.

p.56-57. 이것이,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한 죄인에게 임금이 할 수 있는 소리인가.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나는 임금이 가여웠고, 임금이 무서웠다. 가여움과 무서움이 같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임금은 강한 신하의 힘으로 다른 강한 신하들을 죽여왔다. 양호는 계속 읽었다.

p.57. ……이제 그대를 상복을 입은 채로 다시 기용하여 옛날같이 전라 좌수사 겸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노니, 그대는 부하를 어루만지고 도망간 자들을 불러 단결시켜 수군의 진영을 회복하고 요해지를 지켜 군의 위엄을 떨치게 하라. 그대는 힘쓸지어다. 군율을 범하는 자는 장졸을 막론하고 그대의 지휘로 처단하려니와, 그대가 나라 위해 몸을 잊고 나아감은 이미 다 겪어보아 아는 바이니 내 구태여 무슨 말을 길게 하리오……
내 끝나지 않은 운명에 대한 전율로 나는 몸을 떨었다. 나는 다시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수군통제사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전라 좌수사였다. 나는 통제할 수군이 없는 수군 통제사였다. 내가 임금을 용서하거나 임금을 긍정할 수 있을는지는 나 자신에게도 불분명했다. 그러나 나의 무(武)는 임금이 손댈 수 없는 곳에 건설되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p.58-59. 나는 장계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붓을 들어 맨 마지막에 한 줄을 더 써넣었다. 나는 그 한 문장이 임금을 향한, 그리고 이 세상 전체를 겨누는 칼이기를 바랐다. 그 한 문장에 세상이 베어지기를 바랐다.
……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신(臣) 이(李) 올림

식은 땀
p.71. 그 저녁에도 나는 적에 의해 규정되는 나의 위치를 무의미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힘든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지는 어느 날, 내 몸이 적의 창검에 베어지더라도 나의 죽음은 결국은 자연사일 것이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지는 풍경처럼, 애도될 일이 아닐 것이었다.

p.74.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교서를 받았을 때 나는 김덕령의 죽음과 곽재우의 삶을 생각했다. 나는 김덕령처럼 죽을 수도 없었고 곽재우처럼 살 수도 없었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 주기를 나는 바랐다.
적의 기척
p.78. 거기서 내가 죽음을 각오했던 것인지, 삶을 각오했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나는 그 모호함을 중언부언하지 않겠다.
p.83. ……신의 몸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에는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신(臣) 이(李) 올림
구덩이
p.114-115. 나는 개별적인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온 바다를 송장이 뒤덮어도, 그 많은 죽음들이 개별적인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나는 여자가 죽으면 어디가 먼저 썩을 것인지를 생각했다. 나는 그 썩음에 손댈 수 없을 것 같았다. 죽은 자는 나의 편도 아니고 적도 아니었다. 모든 죽은 자는 모든 산 자의 적인 듯도 싶었다. 내 몸은 여진의 죽은 몸 앞에서 작게 움츠러들었다.

나는 죽은 여진에게 울음 같은 성욕을 느꼈다. 세상은 칼로써 막아낼 수 없고 칼로써 헤쳐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칼이 닿지 않고 화살이 미치지 못하는 저쪽에서, 세상은 뒤채이며 무너져갔고, 죽어서 돌아서는 자들 앞에서 칼은 속수무책이었다. 목숨을 벨 수는 있지만 죽음을 벨 수는 없었다. 물러간 적들은 또 올 것이고, 남쪽 물가를 내려다보는 임금의 꿈자리는 밤마다 흉흉할 것이었다.
그날 밤, 해남의 민촌으로 보냈던 녹도 군관 이철이 돌아왔다. 백성을 먹이고 시체를 묻고, 역질에 걸린 자들을 격리했고 무너진 백성들의 집을 일으켜 세웠다고 보고했다. 이철이 적과 내통해서 백성들을 밀고했던 접장과 향리 세 명을 붙잡아왔다. 이철은 조서를 제출했다. 그들의 죄는 명백했다. 새벽에 모두 목 베었다. 머리는 마을에 걸었고 몸통은 낮에 여진을 묻었던 구덩이에 함께 묻었다. 새벽에 종을 시켜 탕약을 끓여 마셨다. 초겨울의 물소리가 날카로웠다.

바람 속의 무 싹
p.121. 하루 종일 물의 칼들이 일어섰다. 저녁 바다는 거칠었다. 인광의 칼날들이 어둠 속에서 곤두서고 쓰러졌다. 캄캄한 바다에서 칼의 떼들이 부딪혔다.
내 안의 죽음
p.128- 129. 이원길이 돌아간 지 보름 뒤에 임금이 보낸 면사첩을 받았다. 도원수부의 행정관이 면사첩을 들고 왔다. ‘면사’ 두 글자뿐이었다. 다른 아무 문구도 없었다.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임금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은 죄에 대하여 죽음을 면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면사첩을 받던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나는 ‘면사’ 두 글자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죄를 사면해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죽이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젖냄새
p.134. 내가 보기에도 면은 나를 닮았다. 눈썹이 짙고 머리 숱이 많았고 이마가 넓었다. 사물을 아래서부터 위로 훑어올리며 빨아당기듯이 들여다보는 눈매까지도 나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 눈매는 내 어머니의 것이기도 했다. 시선의 방향과 눈길을 던지는 각도까지도 아비를 닮고 태어나는 그 씨내림이 나에게는 무서웠다. 작고 따스한 면을 처음 안았을 때, 그 비린 젖냄새 속에서 내가 느낀 슬픔은 아마도 그 닮음의 운명에 대한 슬픔이었을 것이다.

p.139. 쓰러져 뒹굴며 통곡하는 늙은 아내를 생각했다. 나를 닮아서, 사물을 아래에서 위로 빨아당기듯 훑어내는 면의 눈동자를 생각했고, 또 내가 닮은 내 죽은 어머니의 이마와 눈썹과 시선을 생각했다. 젊은날, 국경에서 돌아와 면을 처음 안았을 때, 그 따스한 젖비린내 속에서 뭉클거리며 솟아오르던 슬픔을 생각했다. 탯줄에 붙어서 여자의 배로 태어나는 인간이 혈육의 이마와 눈썹을 닮고, 시선까지도 닮는다는 씨내림의 운명을 나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송장으로 뒤덮인 이 쓰레기의 바다 위에서 그 씨내림의 운명을 힘들어하는 내 슬픔의 하찮음이 나는 진실로 슬펐다.

사지(死地)에서
p.148. 길에서 쓰러진 조선 계집과 포로들을 마차바퀴로 뭉개버리고 적들은 또 다른 고을의 조선 백성들을 끌어갔다. 적들이 지나간 마을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적의 말똥에 섞여나온 곡식 낟알을 꼬챙이로 찍어 먹었다. 아이들이 말똥에 몰려들었는데, 힘없는 아이들은 뒤로 밀쳐져서 울었다. 사직은 종묘 제단 위에 있었고 조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무거운 몸
p.182. 내 어깨에는 적이 들어와 살았고, 허리와 무릎에는 임금이 들어와 살았다. 활을 당겨 표적을 겨눌 때 나는 내 어깨에 들러붙은 적을 느꼈고 칼의 세를 바꾸려고 몸을 돌릴 때 나는 내 허리와 무릎 속에서 살고 있는 임금을 느꼈다.
p.182-183. 나는 바닥 없는 깊이로 떨어져내렸고, 잠에서 깨어나는 새벽에는 식은땀에 젖었다. 의식이 다시 돌아올 때 나는 어둠 속에 걸린 환도 두 자루를 응시하고 있었다. 임금의 몸과 적의 몸이 포개진 내 몸은 무거웠다.

2권
물들이기
p.22-23. 칼로 적을 겨눌 때, 칼은 칼날을 비켜선 모든 공간을 동시에 겨눈다. 칼은 겨누지 않은 곳을 겨누고, 겨누는 곳을 겨누지 않는다. 칼로 찰나를 겨눌 때 칼은 칼날에 닿지 않은, 닥쳐올 모든 찰나들을 겨눈다. 적 또한 그러하다. 공세 안에 수세가 살아 있지 않으면 죽는다. 그 반대도 또한 죽는다. 수와 공은 찰나마다 명멸한다. 적의 한 점을 겨누고 달려드는 공세는 허를 드러내서 적의 공세를 부른다. 가르며 나아가는 공세가 보이지 않는 수세의 무지개를 동시에 거느리지 못하면 공세는 곧 죽음이다. 적과 함께 춤추며 흐르되 흘러들어감이 없고, 흐르되 흐름의 밖에서 흐름의 안쪽을 찔러 마침내 거꾸로 흐르는 것이 칼이다. 칼은 죽음을 내어주면서 죽음을 받아낸다. 생사의 쓰레기는 땅 위로 널리고, 칼에는 존망의 찌꺼기가 묻지 않는다.
새 칼에, 검명 여덟 글자는 내 필적대로 새겨져 있었다. 다 지워버리고 물들일 염자 한 글자뿐이었더라도 좋았을 뻔했다. 칼에 새겨진 문자는 아무래도 쑥스러워 보였다.

베어지지 않는 것들
p.27-28. 임금의 절망은 깊었다. 종전(終戰)을 사직에 고하기 전에, 우선 능을 범한 적병의 머리를 사직에 바치려는 것이 임금의 조바심이었다. 그때 고하도 수군 진영에 잡혀 있던 포로는 승병장 처운이 승주 조계산에서 생포해 온 16명이었다. 내 포로들은 임진년에 건너온 자들이 아니었다. 포로들은 모두 4년 뒤인 정유년에 파병된 자들이었다.
성종릉과 중종릉은 임진년 가을에 파헤쳐졌다고 하나 그 전인지, 그 뒤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 다음해인 계사년 봄에 경기도사가 영의정 류성용에게 보고했고 류성용이 임금에게 고했다. 그때 임금은 피난지 의주에서 떠나 서울로 돌아가는 길목에 평양 남쪽 영유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여수 좌수영에 포진하고 율포의 적들을 걷어내고 있었다. 전황이 다급했던 시기였으므로 조정의 선전관들이 자주 수영까지 내려왔다. 나는 조정의 일들을 들을 수 있었다. 수영으로 내려온 선전관들은 밤늦은 시간에 수하들을 물리치고 목소리를 낮추어서 범릉의 참변을 말해주었다.
두 선왕릉이 파헤쳐진 사변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경기도사였다. 경기도사의 보고를 받은 영의정 류성용은 지체없이 명 육군 총병관 이여송의 군막을 찾아가 대문 앞에서 통곡했다. 류성용은 이어 만월대 정자 위로 올라가 능이 있는 남쪽을 향해 이마를 찧으며 통곡했다. 임금은 행재소 마당에 쓰러져 통곡했다. 임금은 성종묘와 중종묘가 있는 남쪽을 향해 통곡했고, 명의 천자가 있는 북쪽을 향해 통곡했다. 임금은 울음의 방향을 바꾸어가면서 오래오래 통곡했다. 방향을 바꿀 때 세 번씩 절했다. 임금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중신들은 대열의 방향을 바꾸어가며 통곡했다. 이마를 땅에 찧고 주먹으로 땅을 치고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중신들은 통곡했다.

언어와 울음
p.47. 임금은 길게 울었다. 신하들도 따라 울었다. 사신이 또 황제의 말을 전했다.
너희가 신하된 나라의 굳셈을 잃지 말고 스스로 조치하라.
임금은 흐느껴 울었고 중신들도 울었고 백성들도 울었다. 명의 구원병이 압록강을 넘어왔을 때 임금은 강가에까지 마중나가 울었다.
계사년에 임금은 환도했다.
p.51. 임금의 언어와 임금의 울음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임금은 울음과 언어로써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언어와 울음이 임금의 권력이었고, 언어와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은 보이지 않았다. 임금의 전쟁과 나의 전쟁은 크게 달랐다. 임진년에 임금은 자주 울었고, 장려한 교서를 바다로 내려보냈으며 울음과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날은 번뜩였다. 임진년에는 갑옷을 벗을 날이 없었다. 그때 나는 임금의 언어와 울음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p.57. 그해 겨울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격군과 사부들이 병들어 죽고 굶어 죽었다. 나는 굶어 죽지 않았다. 나는 수군 통제사였다. 나는 먹었다. 부황 든 부하들이 굶어 죽어가는 수영에서 나는 끼니때마다 먹었다. 죽은 부하들의 시체를 수십 구씩 묻던 날 저녁에도 나는 먹었다.
아무 일도 없는 바다
p.59.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고쳐 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결국 두려웠다.
노을과 화약 연기
p.69. 만의 좁은 어귀는 생사의 멱통과도 같았다. 거기서부터 공세를 몰아서 만 안쪽의 적들을 밀어붙이면 적은 물러설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내 함대가 만 안쪽으로 깊이 들어와 있을 때 적들이 나를 우회해서 만의 어귀를 역봉쇄하면 나는 물러설 자리가 없었다. 적과 나에게 생사의 조건은 언제나 같았다.
사쿠라 꽃잎
p.81. 그날 저녁에 술을 먹여 안위를 재웠다. 명량에서 나는 머뭇거리는 안위를 배 위에서 베려고 했다. 안위는 그 후 깊고 조용한 무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가 잘 죽을 수 있는 자리를 찾고 있음은 확실해 보였다. 그날 밤 안위는 취했다. 적의 내륙 기지에 조선 백성 수백 명이 끌려와 있고 이들이 모두 적의 최일선으로 배치되어, 아군이 순천을 공격한다면 우선 이 전진 배치된 조선 백성들과 부딪힐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안위는 무표정했다. 안위는 자꾸 마셨다.

비린 안개의 추억
p.85. 여진의 울음은 그 몸 속의 세상이 몸 밖의 세상을 견디지 못해 우는 울음 같았다. 여진은 죽고, 죽은 여진의 몸 냄새는 새벽 안개의 비린내에 실려 내 마음속을 흘러다녔다.
날개
p.100. 나는 적의 공세 안에 적의 죽음이 내포되어 있기를 바랐다. 달려드는 적의 살기 속에 적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내가 적을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적에게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더라도 나는 적에게 이미 내포되어 있던 죽음만을 죽일 수 있었다.
p.103. 물은 퍼덕거리려는 날개를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돌아서서 펼치고, 조이면서 다가올 때, 노를 잡은 격군들의 몸은 북과 겉돌았다. 북에는 날개의 환상이 담겨 있었고 노는 물에 잠겨 있었다. 중군 전위에서 흔드는 깃발의 신호가 양쪽 날개끝까지 연결되지 않았다. 두 날개의 분기점에 중군 대열을 형성할 때, 몰려드는 배들이 부딪혀 노가 부러졌고 고물이 깨어졌다. 방향을 전환시키는 쇠나팔이 울릴 때마다 격군들의 함성이 터져나왔고 감독 군관의 고함 소리는 목이 쉬어 있었다. 날개는 무거웠다. 날개는 좀처럼 펼쳐지지 않았다.
p.105. 나는 아직도 적의 전체를 한꺼번에 맞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적의 전체를 나누어서 맞아야 했다. 수성포의 적들을 시급히 걷어내지 않으면 적의 중심은 바싹 다가올 것이었다. 안개는 점점 짙어갔다.
옥수수숲의 바람과 시간
p.121. 나는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포로들은 모두 각자의 개별적인 울음을 울고 있었다. 그들을 울게 하는 죽음이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죽음을 우는 그들의 울음과 그 울음이 서식하는 그들의 몸은 개별적인 것으로 보였다.
p.121-122.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때, 나는 칼을 버리고 저 병신년 이후의 곽재우처럼 안개 내린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개울물을 퍼먹는 신선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적은 적의 개별성이었다.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적의 개별성이야말로 나의 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p.122. 저마다의 울음을 우는 개별성의 울음과 개별성의 몸이 어째서 나의 칼로 베어 없애야 할 적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나는 알 수 없었다. 적에게 물어보아도 적은 대답할 수 없을 것이었다.
몸이여 이슬이여
p.156-157. -통제공의 명성은 중원에서도 우레와 같소. 적은 이제 물러갈 것이오. 내 보기에 통제공은 이 작은 나라의 장수라 하기에는 재주가 아깝소. 통제공은 큰 판을 주물러야 할 사람이오. 전쟁이 끝나면 좀 쉬었다가 대국으로 들어와 벼슬을 하시오. 내가 우리 천자께 공을 천거하리다.
진린에게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전쟁이 끝나는 날, 물결 높은 바다에서 적탄에 쓰러지는 내 죽음의 환영이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그 환영을 떨쳐냈다. 날은 무더웠다. 진린은 군복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아가며 마구 마시고 마구 지껄였다. 진린의 머리 뒤로 해가 지고 있었다. 내 죽음의 환영은 노을 속에서 어른거렸다.
소금
p.168. 진린은 사슴고기를 회로 먹었다. 진린은 내 수영에서 주는 밥을 먹지 않고 자신이 데리고 온 전속 요리사의 음식을 먹었다. 머지않아 바다에서 적의 전체를 맞을 때, 진린의 함대 전체를 적의 진로나 퇴로 앞에 장애물로 막아세울 수는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때 적의 화력은 진린 쪽으로 집중될 것이고, 적의 허는 내 앞에 노출될 것이었다. 나는 진린의 함대가 필요했고, 적의 육상 기지를 바다에서 부술 수 있는 진린의 장거리포가 필요했다.
p.172. 그리고 그때 이미 임금은 나를 다시 죽일 수 없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나는 문장의 수사를 띠워서, 곧고 애달픈 충정을 고백하는 문체로 장계를 새로 썼다. 선전관은 새로 써준 장계를 들고 서울로 떠났다. 조선 조정은 내가 써준 장계를 명군의 감찰관에게 제시했다.
서늘한 중심
p.175. 그 빈 공간과 빈 시간 앞에서, 내 허리에 매달린 칼의 허망을 나는 견딜 수 없었다.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첩보는 지나간 것들의 지나감을 전했고, 바다는 늘 아무 일도 없었다.
빈손
p.184. 하루하루가 무서웠다. 오는 적보다 가는 적이 더 무서웠다. 적은 철수함으로써 세상의 무의미를 내 눈앞에서 완성해 보이려는 듯했다. 적들의 철수의 대열을 정돈하는 밤마다, 적들이 부수고 불태운 빈 마을에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꿈을 꾸었다.
무술년 가을에 연락관 3명을 유정에게 보냈다. 권관 김용을 조장으로 삼고 군사 10명을 딸려주었다. 군사들에게 건어물과 말린 사슴고기를 실려서 유정에게 보냈다.
볏짚
p.200. -가는 적을 보내는 것은 병법의 이치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 아니오. 장수의 용기는 사졸의 용기와는 다른 것이오. 아시겠소, 통제공. 수급은 싸우지 않고도 얻을 수 있소.
고니시가 진린과의 약속을 지킨다면, 고니시는 퇴로를 열기 위해 제 부하 2천 명의 머리를 잘라서 진린에게 바칠 것이었다.
p.202. 여기는 내가 죽을 자리는 아니었다. 나는 적의 전체를 내 전방에 두어야 했다. 나는 노량 바다로 가기로 했다. 적들은 거기서 합쳐질 것이었다. 적보다 먼저 노량으로 들어가서, 적 퇴로의 진행 방향 앞에 나는 포진해야 했다.

들리지 않는 사랑 노래
p.212.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내 젊은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 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냄새들은 화약 연기에 비벼지면서 멀어져갔다. 함대가 관음포 내항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관음포는 보살의 포구인가. 배는 격렬하게 흔들렸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는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요해 보였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

3. 내가 저자라면

♣ 책의 형식
장편에서는 잘 쓰지 않는 밀도 높은 1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고백체 형식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을 가진 [칼의 노래]는 바로 그 시점 때문에 문학사에 영웅의 이야기를 담은 새 지평이란 평가를 받았다. 1인칭 서술의 일관된 시점으로 번번이 등장하는 전투 전후의 긴장미와 압축미를 잘 살리고 있기 때문에 읽는 동안 이입이 어렵지 않다.
이 땅의 많은 남성 독자들이 작품을 읽고 울었다라는 평을 듣게 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 칼의 운명
이 책에서 나는 저자가 살아오면서 갈았던 칼과 베고 싶었던 칼과 휘두르고 싶었던 칼을 보았다. 그 칼이 이순신 장군의 칼을 만나 “一揮掃蕩 血染山河”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또는 “칼로 적을 겨눌 때, 칼은 칼날을 비켜선 모든 공간을 동시에 겨눈다. 칼은 겨누지 않은 곳을 겨누고, 겨누는 곳을 겨누지 않는다. 칼로 찰나를 겨눌 때, 칼은 칼날에 닿지 않은, 닥쳐올 모든 찰나들은 겨눈다.” 라고 말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특유의 문체로 적요하지만, 세상을 향해 품은 적의와 공격성을 엿 볼 수 있었다.
작가는 칼을 지닌 자의 슬픔, 베어야 하는 칼의 슬픔으로 칼이 징징징 운다고 표현 하며, 칼을 사물화가 아닌 생명체로 인격화 하고 있다.

♣ 목숨
작가는 나라를 선택하지 못하는 국민, 즉 신하된 입장의 죽음의 형식에 깊은 사유를 남기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일찍이 용비어천가를 지어야 했던 이유와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고쳐 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결국 두려웠다.’
또한 ‘나를 죽이면 살릴 수 없기 때문에 임금은 나를 풀어준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를 살려준 것은 결국은 적이었다. 살아서, 나는 다시 나를 살려준 적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 주기를 나는 바랐다.’ ‘임금은 나를 죽여서 사직을 보존하고 싶었을 것이고 나를 살려서 사직을 보존하고 싶었을 것이었다.’
‘나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아무런 은총도 없는 자리에서 죽고 싶었다. 내가 죽어야 할 자리는 우수영보다 훨씬 더 뒤쪽이라야 마땅했다.’라거나 ‘그리고 그때 이미 임금은 나를 다시 죽일 수 없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나는 문장의 수사를 띠워서, 곧고 애달픈 충정을 고백하는 문체로 장계를 새로 썼다.’라고 말하고 있다.

훗날 신하된 자의 죽음, 또는 인간의 죽음에 관한 사유에 대하여 내가 물었을 때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을 존경하지만, 그러나 나라가 목숨을 바칠 것을 강요하는 나라는 인정할 수 없다. 나에게 목숨을 바치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그런 그의 말은 목숨을 바칠만한 나라가 아니라면 장계를 고쳐써서라도 목숨은 보존되어야 하고, 후에 장렬히 죽을 수 있는 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풍경묘사
임진왜란의 칠년간의 전장터를 작가는 냄새와, 바람과 빛깔로 묘사하고 있다.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의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 싶었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린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가서 소멸했다’
‘먼 바다에서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 부딪칠 때마다, 잿빛 섬들은 회오리 속으로 불려갔다. 수면을 훑는 바람이 밀물로 달려드는 물결을 거꾸로 때리면 뒤집히는 물결이 곤두서면서 흰 칼날들이 일어섰다’
‘내륙의 산맥 위로 보름달이 올랐다. 달빛은 산맥과 바다를 가득 채우면서 그 아득한 공간을 비워놓고 있었다’ ‘바다는 고요해서 물길의 작은 속살까지 배의 이물에 느껴졌다.’‘물 위에 낮게 뜬 안개는 순하고 가벼웠다. 아침 햇살이 스미면 안개는 섬 사이를 띠처럼 흘러서 먼 바다로 몰려갔다. 해 뜨는 쪽으로 몰려간 안개의 띠들은 분홍빛 꼬리를 길게 끌면서 사라졌다. 걷히는 안개 너머로 먼 섬은 붉었고 가까운 섬은 푸르렀다.’

♣ 마치는 말

임진왜란 칠년을 차용해서 작가가 펼쳐 놓은 [칼의 노래]에는 안개와 바다와 칼과 목숨이 등장한다. 때문에 김훈은 부정하고 있지만 바다를 서사로한 한 편의 유장한 시를 감상한 느낌이다.

그를 만나본 후, 문학이 문학의 권위위에 존재하는 형식이 아닌, 오직 소통의 형식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그의 말에도 일정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여진을 묘사한 여러 부분이 불쾌하게 읽혔다, 자신의 몸에서 안온했던, 그 자신이 편하기만을 바랐던 소박한 여진의 몸이 적장의 몸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에만 관심이 있던 그는 여진을 인격체가 아닌 소유물로 보고 있다.

‘여진의 울음은 그 몸속의 세상이 몸 밖의 세상을 견디지 못해 우는 울음 같았다. 여진은 죽고, 죽은 여진의 몸 냄새는 새벽안개의 비린내에 실려 내 마음속을 흘러다녔다.’
이 대목에서 화자가 여진을 부르는 것은 사람의 이름을 회상하는 것이 아닌 관기, 본능적인 육욕에 관한 회상 씬 정도로 읽힌다.
때문에 여러 시체들과 함께 매장한 여진의 무덤에서 그녀를 떠올리는 것조차 그 같은 속내를 포장한 것으로 읽히는 것이다.

김훈의 남성우위주의와 가부장적인 행태는 일찍이 그의 인생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사건을 만든다. 그가 시사 저널 편집장으로 재직할 때 진보 한겨레 21에서 그의 표현대로라면 적장인 그를 초대해 마련한 ‘쾌도난담’ 에서 편견으로 가득찬 독설을 뱉어 씻을 수 없는 말의 상흔을 남겼다. 그 사건으로 후배기자들이 사표를 내는 것으로 모자라 자신까지도 사표를 내고 말았다.

세상이 다 알고 있는 그의 보수성향이었음에도 그의 발언이라고 믿기 어려워 항간에서는 그 말의 진위를 파악하느라 여론이 들끓었다. 그 후에 여성단체에서 심심찮은 공격을 받은 그는 황순원 문학상을 수상한 [폐경]을 내 놓는다. 그 작품이 탄생한 배경에는 그런 세간의 이목을 달래보자는 김훈의 속내가 숨겨져 있다라는 항간의 비평이 있다.

신군부 당시, 전두환을 위한 용비어천가를 썼던 그는 누군가는 썼어야 하는, 후회하고 싶어도 후회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 같은 심경을 그는 [칼의 노래] 중에서 '나는 장계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붓을 들어 맨 마지막에 한 줄을 더 써넣었다. 나는 그 한 문장이 임금을 향한, 그리고 이 세상 전체를 겨누는 칼이기를 바랐다. 그 한 문장에 세상이 베어지기를 바랐다.
……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신(臣) 이(李) 올림'
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의 말이 진실인가에는 물음표가 남는다. 그는 오랜 시간 수구와 보수로 불리워 왔고, 문단안의 진보시각에서는 그런 그의 특성으로 인해 그의 작품들이 조망 받고, 대거 문학상을 받았다고 비판하는 눈들도 있다.

사석에서 심수봉의 노래는 눈앞에서 똑똑 떨어지는 가수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의 소리이고, 양희은의 소리는 소리 안에 삶의 전망을 담고 있어 멀리 간다던 김훈. 그는 양희은과 심수봉의 소리중 어떤소리이고 싶은 지 궁금해진다.

난중일기의 반복된 날씨글 속에 간단체로 묘사된 그 풍경들이 왜 '칼의 노래' 보다 훨씬 심금을 울리는지, 역사소설을 쓸 때 어디까지 미화하거나 가감 할 수 있을 지를 작가는 더 고민해야 할 것이다.

비평이 심했던 빗살무늬 토기, 그리고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의 시대를 열며 자신만의 독자축을 구축한 김훈,
장편소설을 쓰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간다는 것이다라던, 김훈이 전장의 ‘칼’이 이시대의 ‘글’ 과 동의어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역사를 차용한 것이 아닌 현재와 소통하는 그의 '장편소설' 을 만나고 싶다.
자전거로 유럽을 횡단하고 있다는 요즘의 그가 더 넓어진 지평의 새 작품을 들고 오길 고대한다.

문체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조사가 무서워 조사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그가 정치적이 아닌 ‘작가’ 김훈으로 쓴 무구한 작품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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