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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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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8일 17시 58분 등록
1.저자소개.

김훈은 1948년 5눨 5일 종로구 청운동에서 소설가 김광주씨의 2남3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선친의 작품인 <비호>를 제출간하면서 서문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소년 시절에 병석에 누운 아버지의 구슬을 받아서 무협지 원고를 대필했다. 그것이 내 문장 공부의 입문이었다. 가난은 가히 설화적이었다. 그 원고료로 밥을 먹고 학교도 다녔고 용돈을 타서 술도 마셨다. 그 아이가, 그 아버지의 나이가 되도록 늙어서 다시 그 책을 펴내니 눈물겹다”라고 말했다.
병석에 누웠던 아버지가 불러주는 문장부호 하나까지 받아쓰게 된 것이 문장연습 이었다고 밝힌바 있으니 김훈은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의 아버지 김광주는 누구인가?
김광주씨는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에서 이봉창, 윤봉길 의사와 함께 생활하면서 동인극단을 운영했다. 김광주씨는 광복후에도 김구를 보필했으며 1947년 경향신문 문화부장, 편집국장등 언론인으로 활동했으며 후에 무협작가로 등단했다.

김훈은 <한국일보>에서 처음 기자 생활을 했다. 그 당시 학력제한을 두지 않은 유일한 곳이 한국일보 였고 고졸인 그는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황을 하게 된다. 그러니 좆;ㄱ생활에 잘 맞지 않는 인물인 김훈은 몇차례나 그만뒀다 다시 들어갔다를 반복한다. 이후 <시사저널> 편집장으로 이름을 떨친다. 그러던 그가 <한겨레21>의 ‘쾌도난담’이란 코너를 맡게 되면서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언급, 양육강식에 대한 발언 등등의 이유로 시사저널 편집국장을 그만두게 된다
“80년대를 지겨워 하던 나는 1989년 12월 31일, 아무런 대책없이 신문사를 때려치우고 나왔다. 이런 시대의 언론인 노릇을 그만두고 새롭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2년동안 유랑을 했다. 2년을 버티고 나니 쌀이 없었다. 먹고 사는 일이 처절했다. 쌀이 없다는 것은 이데올로기 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할수 없이 언론으로 복귀를 했다. 쾌도난담 기사 때문에 물의가 일어났고 이런 내가 국장이란 공적인 위치에 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여론이 있었다. 그래서 ‘내 언론인 30년 생활을 수치와 오욕으로 끝내자’라고 생각하고 10분도 머뭇거리지 않고 회사를 나왔다”고 말했다.

이후 김훈은 야인으로 머물면서 전국을 풍륜(風輪)이라고 이름붙인 자전거를 타고 달린 뒤 수필집 <자전거 여행>2000년, 이어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칼의 노래>2001년 등을 쓰며 지냈다.
그는 자전거 여행이란 글은 행복하게 쓴 글이라고 한다. 그는 처음 자전거를 탔을 때 ‘깜짝 놀랐단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좋았단다’ ‘이렇게 좋은걸 모르고 살았구나 싶어 기가 막혔단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50이 넘은 그에겐 살인적인 어려움이렀다고 한다. 하지만 “여행의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그것을 쓰는 일은 세상은 이처럼 아름답고 살만한 곳이라고 썼기 때문에 좋았다”고 한다. . 나 역시 이 자전거여행을 읽으면서 김훈 선생의 빼어나가나 수려하지 못하겠지만 이런 여행집하나 갖고 싶다는 욕심을 내 본적 있으니 그가 얼마나 기쁜 마음이었을는지 감히 짐작해 본다.

그러다 2002년 초 그는 현장기자로 돌아가고 싶어했고, <한겨레>로 입성한다.
몇 년동안 시골에 쳐 박혀서 글 쓰고 책만 보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관념과 추상 속에 빠져 삶 자체가 몽롱하고 불투명해졌다. 죽은 몸인지 산몸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이게 도대체 사는 것인가 싶었다. 다시 삶의 현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의 문장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올곧이 전하고 울리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울려 낸다. 꾸밈이 없는데도 수려하고 그저 내뱉고 있는 것 같은데도 어딘지 모르게 깊게 깊게 파고드는 느낌이 든다.
그런 그가 스스로 앞으로 소설을 쓰겠지만 한없이 소설을 쓰지는 못할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소설가와 소설을 쓰는 사람은 다른데 소설을 쓰는 사람은 내면의 필요성에 따라서 자기가 몇 개의 소설을 쓸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나는 사람이고 소설가란 소설이란 형식을 통해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란다.

그는 자신이 제일 잘 할수 있는 것은 음풍농월(吟風弄月)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것들 속에서 아름답게 살고 싶단다. 그러나 그 역시 아무나 할 수 없단다. 왜냐면 ‘혼자서 잘 놀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칼의 노래를 통해 받은 동인문학상을 수상소감의 한 구절을 음미하면서 그에 대한 소개를 마치고자 한다.

“생사의 급박함을 스스로 알아서 사람 모이는 대처에 나다니지 않고 혼자서 처박혀서 한 글 한 글 쓰도록 하겠습니다. 무리를 아늑해하지 않으며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2.내 마음속에 무찔러 들어온 글귀

눈이 녹은 충남 아산 현중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 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19

저녁이면 먼 섬들이 박모 속으로 불려가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먼 섬부터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이어서, 바다에서는 늘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21

나는 정유년 4월 초하룻날 서울 의금부에서 풀려났다. 내가 받은 문초의 내용은 무의미했다. 위관들의 심문은 결국 아무것도 묻고 있지 않았다. 그것들은 헛것을 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가엾었다. 그들은 헛것을 정밀하게 짜 맞추어 충과 의의 구조물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의 사실에 입각해 있지 않았다. 22

이 세상에 위로란 본래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23

그 머리와 코의 숫자로 양측 지휘관들은 승진했고 장려한 수사로 넘치는 교서를 받았다. 24

다시 내 앞에 펼쳐진 바다는 감당할 수 없는 넒이로 아득했고 나는 한척의 배도 없었다. 25

목이야 어디로 갔건 간에 죽은 자는 죽어서 그 자신의 전쟁을 끝낸 것처럼 보였다. 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내 뭄의 깊은 곳에서 아마도 내가 알 수 없는 뼛속의 심연에서 징징징 칼이 울어대는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나는 등판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캄캄한 바다는 인광으로 뒤채었다. 26

바다를 건너는 바람은 늘 산맥처럼 출렁거렸다.
바다에서는 언제나 그랬다. 바람이 아니라 파도에 실려서 수평선을 건너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메뚜기떼가 풀섶에서 서걱대는 소리 같기도 했고, 먼 속에서 쥐떼가 씻나락을 까먹는 고리 같기도 했다. 그 소리는 환청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또렷했지만, 들리는가 싶으면 물소리에 묻혀버렸고 몰려가는 바람의 뒤끝에서 다시 살아났다. 바람이 잠들고, 달빛스민 바다가 기름처럼 조용한 밤에도 사각 사각 사각, 그 종잡을 수 없는 소리는 수평선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마도 식은 땀의 한기에서 깨어나는 새벽의 환청이 밤이나 낮이나 나를 따라다니는 모양이었다. 28

나는 안다. 원균은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고 아무도 말리지 못할 무서운 적의를 지닌 사내였다. 그 사내는 모든 전투가 자기 자신을 위한 전투이기를 바랐다. 그는 전투의 결과에 얻을 것이 있다고 믿었다. 30

죽여할 것들을 다 죽여서 세상이 스스로 세상일 수 있게 된 연후에 나는 내 자시ㄴ의 한없는 무기력 속에서 죽고 싶었다.

나의 전쟁은 나의 죽음으로써 나의 생애에서 끝난 것이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분명한 끝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귀 기울이면, 사각 사각 사각 어두운 수평선 너머에서 내 적들이 노 저어 다가오는 소리는 또렷이 들려왔다. 32

겨울 바다는 물결이 높았다. 그 물결 높은 바다 위에서 며칠이고 진을 펼치고 언제 올지 모르는 적을 기다리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37

나는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수는 없었다. 내가 가진 한 움큼이 조선의 전부였다. 나는 임금의 장난감을 바칠 수 없는 나 자신의 무기력을 한탄했다. 나는 임금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함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38

권률, 그는 무수한 아수라를 돌파한 자의 살기를 몸속 깊이 숨기고 있었고 나는 나의 살기로 그의 살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39

울어지지 않는 울음 같기도 하고슬픔 같기도 라고 한 불덩어리가 내 몸 깊은 곳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것을 나는 느꼈다. 방책, 아아 방책, 그때 나는 차라리 의금부 형틀에서 죽었기를 바랐다. 방책없는 세상에서, 목숨이 살아남아 또다시 방책을 찾는다. 나는 겨우 대답했다. 39

시퍼런 칼은 구름 무늬로 어른거리면서 차가운 쇠비린내를 풍겼다. 칼이 뜨거운 물건인지 차가운 물건인지를 나는 늘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는 칼을 코에 대고 쇠비린내를 몸 속 깊이 빨아 넣었다. 이 세상을 다 버릴 수 있을때까지, 이 방책없는 세상에서 살아 있으라고 칼은 말하는 것 같았다. 40

내가 적을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적에게 있을 것이었고, 적이 나를 이길 수 있는 조간들은 나에게 있을 것이었다. 임진년 개전 이래, 나는 그렇게 믿어왔다. 맏었다기 보다는, 그렇기를 바랐다. 41

크고 확실한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으므로 , 헛 것인지 실체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근 헛것들은 실체의 옷을 입고, 모든 실체들은 헛것의 옷을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 50

길삼봉은 누구냐?라는 질문은 누가 길삼봉이냐?라는 질문으로 바귀었다. 질문의 구조가 바뀌자 길삼봉의 허깨비는 피를 부르기 시작했다. 52

길삼봉은 강력한 헛것이었다. 바다 건너의 적들처럼, 길삼봉은 보이지 않았다. 내 칼은 보이지 않는 적을 벨 수 없었다. …이 세상의 싸움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헛것은 칼을 받지 않는다. 헛것은 베어지지 않는다. 54

가여움과 무서움이 같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64

보름달이 뜨는 저녁이면 진도 여자들은 바닷가 언덕에 모여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춤추고 뛰고 노래했다. 우수영 쪽 여자들도 바닷가에서 둥글게 춤추면서 물 건너 진도 쪽 여자들에게 화답했다.그 노랫소리는 수영 안까지 들렸다. 스스로 살아가는 백성들의 생명이 모질고 신기하게 느껴져, 칼 찬 나는 쑥스러웠다. 적들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70

어쩔 수 없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지는 어느날, 내 몸이 적의 창검에 베어지더라도 나의 죽음은 결국은 자연사일 것이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지는 풍경처럼, 애도될 일이 아닐 것이었다. 79

김덕령- 임금의 사직은 끝없이 목숨을 요구하고 있었고 천하가 임금의 잠재적인 적이었다.
김덕령을 잡아들일 때 임금은 –덕령은 삼국에서 가장 용맹한 장수다. 누가 능히 이자를 뭈을 수 있겠는가?- 라면서 발을 굴렀다고 한다. 김덕령은 용맹했기 때문에 죽었다. 임금은 장수의 용맹이 필요했고 장수의 용맹이 두려웠다. 사직의 재단은 날마다 피에 젖었다. 80-81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주기를 나는 바랐다. 82

물길이 거꾸로 돌아서는 사이사이마다 바다는 기름처럼 고요해졌고 그 고요한 잠시가 끝나면 물살은 다시 거꾸로 돌아섰다. 84

일출 무렵의 아침 바다에서는 늘 숨을 곳이 없었다. 사지에서, 죽음은 명료했고, 그림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 역류 속에서 삶 또한 명료했다. 사지에서 삶과 죽음은 뒤엉켜 부딪혔다. 그것은 순류도 아니었고 역류도 아니었다. 거기서 내가 죽음을 각오했던 것인지, 삶을 각오했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85

나는 적이 울들목 사지로 들어와 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적선 12척으로 적을 맞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전략이었다. 전략이라기 보다는 그 이외에는 아무런 방책이 없었다. 나는 그 사지가 적에게 공지 (空地)로 인식되기를 바랐다. 벽파진은 내가 적을 맞을 해역이 아니었다. 나는 12척 뿐이었다. 벽파진 동쪽의 넓은 해역은 나만의 사지였고 울들목은 적과 나의 사지였다. 나는 죽기를 위해 죽음을 각오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85

다시 커져오는 달빛이 물속 깊이 스몄다. 적은 밀물이 사나운 보름을 겨누어 커져가는 달빛을 따라 올 것이었다. 86

살 길과 죽을 길이 다르지 않다. 93

적의 선두를 부수면서 물살이 바뀌기를 기다려라. 지휘체계가 무너지면 적은 삼백 척이 아니라, 다만 삼백 개의 한척일 뿐이다. 96

겁에 질림 사부들은 적선이 눈에 띄면 아득히 먼 적들을 향해 쏘아댔다. 그들은 적을 쏘지 않고 적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쏘았다. 그것이 그들의 위안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103

저마다의 끝은 적막했고, 적막한 끝들이 끝나서 쓰레기로 바다를 덮었다. 그 소통되지 않는 고통과 무서움의 운명 위에서, 혹시라도 칼을 버리고 적과 화해할 수도 있을 테지만 죽음은 끝내 소통되지 않는 각자의 몫이었고 나는 여전히 적의 적이었으며 이 쓰레기의 바다 위에서 나는 칼을 차고 있어야했다. 죽이되, 죽음을 벨 수 있는 칼이 나에게는 없었다. 나의 연안은 이승의 바다였다.114

그때, 베어야 할 것들 앞에서 종팔품 젊은 권관의 칼은 날래고 순결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칼로써 지켜내야 하고 칼로서 막아내야 할 세상의 의미를 돌이켜볼 수 없었고, 그 하찮음들은 끝끝내 베이지지 않는다는 운명을 알지 못했다. 122

어두운 수평선 너머에서, 사각 사각 사각, 적의 함대가 노 저어 다가오는 환청에 시달리는 저녁이나, 환도 두 자루와 면사첩이 걸린 숙사 방에서 요를 적시는 식은땀의 한기에 깨어나는 새벽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주 조선소를 돌아보았다.130

물에 맞서는 배의 저항은 물에 순응하기 위한 저항이다.

싸움은 세상과 맞서는 몸의 일이다. 몸이 물에 포개져야만 나아가고 물러서고 돌아서고 펼치고 오므릴 수가 있고, 몸이 칼에 포개져야만 베고 찌를 수가 있다. 배와 몸과 칼과 생선이 다르지 않다. 131

우수영에서 머뭇거리다가, 어느 날 밤, 육지와 바다에서 협공하는 적의 야간 기습을 받고 발진하기도 전에 전멸하는 악몽에 나는 오랫동안 시달렸다.137

- 나으리의 몸이 수군의 몸입니다.
- 그렇지 않다. 수군의 몸이 나의 몸이다. 144

내 속에서 나 아닌 내가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아베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울음과 아베를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울음이 내 몸 속에서 양쪽 다 울어지지 않았다. 159

아베는 다시 내 앞으로 끌려와서 무릎 꿇려졌다.
- 칼을 다오.
군관이 칼을 나에게 건넸다. 나는 칼을 뺐다. 푸른 날 위에서 쇠비린내가 풍겼다. 종사관 김수철이 내 팔을 잡았다.
- 나으리, 어찌 손수....
- 비펴라, 피 튄다.
김수철은 물러섰다. 나는 이베를 베었다. 목숨을 가로지르며 건너가는 칼날에 산 것의 뜨겁고 뭉클한 진동이 전해졌다.160

병은 아득한 적과도 같았다. 흐린 날들의 어깨 쑤심증은 내 몸 속에 들어와 살고 있는 적의 생명으로 느껴졌다. 163

나를 살려준 것은 결국은 적이었다. 살아서, 나는 다시 나를 살려준 적 앞으로 나아갔다. 세상은 뒤엉켜 있었다. 그 뒤엉킴은 말을 걸어볼 수 없이 무내용했다.165

칼은 겨누지 않는 곳을 겨누고, 겨누는 곳을 겨누지 않는다. 칼로 찰나를 겨눌 때 칼은 칼날에 닿지 않은, 닥쳐올 모든 찰나들을 겨눈다. 171

백성의 국물은 깊고 따뜻했다. 그 국물은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진액처럼 사람의 몸 속으로 스몄다. 187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197

함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강산을 물들이다에서 나는 색칠할 도를 버리고 물들일 염자를 골랐다. 200

김수철이 물들일 염자가 깊사옵니다.
그러하냐? 염은 공 工이다. 옷감에 물을 들이듯이 바다의 색을 바꾸는 것이다. 201

칼로 적을 겨눌 때 칼은 칼날을 비켜선 모든 공간을 동시에 겨눈다. 칼은 겨누지 않는 곳을 겨누고, 겨누는 곳을 겨누지 않는다. 칼로 찰나를 겨눌 때 칼은 칼날에 닿지 않은, 닥쳐올 모든 찰나를 겨눈다.

칼은 죽음을 내어 주면서 죽음을 받아 낸다.202

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희망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언어로 개념화 된 어떤 미래도 생각하지 않았다. 희망은 멀어서 보이지 않았고 희망없는 세상에서 죽음 또한 멀어서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지만, 살아있는 나에게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수 없이 분명했다. 213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혀했다. 먹은 낀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 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232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엇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학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다 나는 고쳐 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결국 두려웠다. 239

삶은 집중속에 있는것도 아니었고 분산속에 있는것도 아니었다. ㅁ르기는 하되, 삶은 그 전환속에 있을 것이었다. 개별적인 살기들을 눈보라처럼 휘날리며 달려드는 적 앞에서 고착은 곧 죽음이었다. 243

말은 비에 젖고, 청춘은 피에 젖는구나…청춘의 날들은 흩어져 가고, 널린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 날리네…젊은 것들의 글이었다. 260

그날 저녁에 술을 먹여 안위를 재웠다. 명령에서 나는 머뭇거리는 안위를 배 위에서 배려고 했었다. 안위는 그 후 깊고 조용한 무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가 잘 죽을 수 있는 자리를 찾고 있음은 확실해 보였다. 261

산 것의 목숨에는 울음 같은 것이 살아있는 모양이었다. 263

새벽 순찰길의 바다 안개는 보이지 않는 바다 저편의 냄새를 실어다 주었다. 새로운 싸움을 예비하는 새로운 시간이 안개에 실려 내 몸속으로 스몄다. 바다에는 지나간 것들의 흔적이 낭아있지 않다. 바다는 언제나 낯선 태초의 바다였다. 264

다시 자리잡는 백성들의 삶이 나는 불안했다. 그해 봄에 적은 너무나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바다에는 싸움의 흔적이 없었고 밤이면 고기를 쫓는 배들의 어화가 안개 속에 흐릿했다. 봅의 새벽 바다에는 안개가 자주 찌었다. 268

나의 전체로 적의 전체를 맞아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내 몸은 감지하고 있었다. 밤의 먼 바다에서 내 척후들은 비에 젖었다. 다가오는 시간을 피할 수 없듯이 더듬어 들어오는 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적은 오지 않았지만 적은 오고 있었다. 오지 않은 적의 기척이 물결을 따라 느껴왔다. 273

적을 적의 사정거리 경계점까지 유도해 놓고 갑자기 나의 함대를 거꾸로 돌려 공세를 바꾼다는 것은 힘들지만 가능한일일 것이다. 그때 나의 함대는 거꾸로 돌아선다. 선두는 후미가 되고 후미는 선두가 된다. 선두나 후미는 본래 없는 것이다. 선두는 돌아서서 후미가 되고 후미는 돌아서서 선두가 된다. 선두는 돌아서면서 날개를 이룬다. 날개는 적을 멀리서 둘러싼다. …날개는 멀리서부터 적을 조인다.
적은 집중되고 나는 부산된다. 집중된 적은 분산된 나를 행해 쏜다.
…적은 계통을 잃는다. 적은 흩어진다. ,,,진은 거대한 새처럼 물위에서 너울거린다. 너울거리면서 적을 가슴깊이 품는다. 품어서 죽인다. 펼쳐서 가두고 조여서 품고, 품어서 죽인다. 적을 품어서 적의 안쪽에 숨어 있는 적의 죽음으로 적을 죽인다. 280-281

물은 늘 거칠었고, 물은 늘 노에 저항했다. 배는 그 저항의 힘으로만 나아갔다. 281


바람의 방향은 사람의 몸으로 감지할 수 없는 전방위였다. 바람은 모든 방향에서 불어와 모든 방향으로 몰려가는듯 싶었다. 그 막막한 바람이 돛폭에 걸려 내 함대를 적에게 가까이 밀어주었다. 먼 수평선쪽에서 구름이 흩어지고 노을의 띠들이 엉킬 때 바람은 거기서 불어오고 있었지만 바람에 절어서 쓸리는 몸이 바람의 방향을 감지할 수 없었다.316

나는 이런 방식으로 전쟁이 끝나는 , 이 세상의 손댈 수 없는 무내용을 감당할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혼자서 숨죽여 울었다. 329

먼바다에 가랑비가 내릴 때 바다에서는 시간을 식별할 수 없었다. 시간은 풀어져서 몽롱했다. 새벽같기도 했고 저녁 같기도 했다. 341

술 취한 머릿속에는 썰물이 빠져나간 갯벌이 펼쳐졌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적이 아닌 아무것도 없을 듯 싶었다. 350

내 숙사 토방에 걸려 있던 면사첩을 끌어내려 불 아궁이에 던졌다. 나는 집중된 중심을 비웠다. 중심은 가볍고 소슬했다. 나는 결국 자연사 이외의 죽음까지도 결국은 자연사일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적이 물러가버린 빈 바다에서는 죽을 수 없었다. 나는 갈 것이었다.357

날마다 쌓이는 볏짚을 바라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아닌 어떤 힘에게 빌었다. 내가 저 볏집에 불을 당겨 적선들을 모조리 태우기 전까지는 비가 오지 않게 해달라고 나는 빌었다. 비는 오지 않았다. 371

나는 빌었다. 무엇을 향해 빌었는지. 나는 빌고 있었다. 바다는 문득 고요했다. 이제 죽기를 원하나이다. 하오나 이 원수를 갚게 하소서. 382

고통은 오래전부터 내 몸에 살아왔던 것처럼 전신에 퍼져 나갔다. 나는 졸음처럼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다가오는 죽음을 느꼈다.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너는 내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내 갑옷을 벗기면서 송희립은 울었다. 386

-나으리 총알이 깊지 않사옵니다.
-나는 안다. 총알이 깊다. 총알은 임진년의 총알보다 훨씬 더 깊이, 제 자리를 찾아서 박혀 있었다. 서늘함은 눈물겨웠다. 팔다리가 내 마음에서 멀어져 갔다. 몸은 희미했고 몸은 멀었고 몸은 통제되지 않았다.

내 몸을 이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열리지 않았다. 나는 애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냄새가 끼쳐왔다. 이실 수 없는 졸음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내 젊은날 한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냄새들은 화약연기에 비벼지면서 멀어져 갔다.387-388


3.내가 저자라면..

김훈은 칼의노래를 쓰는 두달 동안 아침 6시에 일어나서 9시까지 방 다섯개를 창틀에 먼지하나 없이 청소를 하고 12시까지 글을 썼으며 그 두달동안 8개의 이빨리 빠졌노라고 말했다. 김훈은 스무살 초반에 난중일기를 읽었는데 인간의 삶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지옥이며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차라리 죽는게 낫겠구나 싶었단다.

공감한다. 나 역시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으며 그 영웅이 참으로 비극적 영웅으로 느껴졌고 그의 삶이 너무나 고단했겠구나 생각했다.
난중일기를 보면 백의종군이후로 그는 여러 번 ‘죽는만 못하다.’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특히 어머니의 죽음앞에서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함에 탄식했고 아들 ‘면’의 죽음 앞에서 그는 통곡했고 절규했다.
작가 김훈은 이런 이순신의 모습을 고뇌하는 인간으로 재조명하므로 이순신 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속에서 우리의 민족이 얼마나 비루하고 참혹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보여준다.
그 한 예로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 보면 그런 단편적인 사실을 유추해 볼수 있는데 임금이 종이가 없어서 남해의 해군에게 종이를 만들어 보내라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당시 조정의 참상이 짐작된다고 그 끔찍한 시대의 아픔을 토로했다.

또한 그의 문체는 독특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그는 스스로 이순신 장군의 가파른 문체를 모방한 것이라고 밝혔다. 난중일기에는 문학적 수사가 전혀 없는데 가령 ‘오전 바다위 날씨는 어떻고 오늘 몇 명이 탈영해서 몇 명을 잡아 목을 뱄다.’ 하는 식의 문체에 매료되어 주어와 동사만 가지고 썻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순진 장군의 문체에 비해 그의 글은 너무 화려하다. 그는 살은 다 빼버리고 뼈다귀만 가지고 썼다고 말했지만 그래서 그의 문체에서 역동적인 힘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순신을 담기에 그의 글은 너무 수사학적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시작하는 칼의 노래는 이순신의 영광을 다루지 않는다. 오직 극심한 고통과 번민이 그의 죽음까지 얼마나 집요하게 그에게 계속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 이 방책없는 세상에서 살아있으라고 칼은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세상과의 싸움은 부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처음 보는 바다는 외면하고 싶도록 두려웠다. 나는 바다와 맞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고…”

김훈의 글에서 나는 희망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아쉽다.

이순신, 그는 비극을 지닌 한 인간이었다. 많이도 아팠고 바다위에 떠 살아야 하는 그 망망대해 앞에서 그는 두려웠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저 수평선 너머, 저 섬들 사이 사이마다 적들이 있었고 볼 수 없음에 더욱 두려웠을것이고 절망했을것이다. 밤마다 울어대는 파도소리에 그 역시 꺼억 꺼억 소리내지 못하고 속울음을 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이순신이 허무주의 였거나 비관주의 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남들보다 조금 더 깊은 비극을 갖었으나 그 비극적 아픔을 위대함으로 승화해낸 영웅으로 그를 기억하고 싶다.
그렇기에 그는 노량해전에서 목숨을 다해 싸워 낼 수 있었으며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작가가 우리에게 조금더 희망적 메시지를 남겨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마지막으로 2주간 읽었던 이순신 장군의 활동무대에 서고 싶다.
옥포해전, 한산해전, 노량해전을 돌아보며 그의 숨결을 느끼고 싶다.
그 쪽빛 바다 앞에 그저 아름답구나 하던 생각은 얼마나 무지한가! 그렇게 막연히 바라보던 그 바다위를 떠다니던 수군과 적군의 시체들이 보이는듯 할터이고, 통제사가 부르는 칼의노래와 마주하게 되리라.
바다 소리, 파도 소리, 수많은 군사들의 함성소리, 그리고 민초들의 신음 소리가 들려올테고 칼로써 지켜내고 막아내야할 그 절박함 속에서 끝끝내 베어내지 못했을 그의 쓸쓸함은 오롯이 통제사의 몫이었을 것이다.
“죽이되, 죽음을 벨 수 있는 칼이 나에게는 없었다. 나의 연안은 이승의 바다였다”는 그를 만나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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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9 17:53:11 *.64.21.2
이순신을 담기에 그의 글은 너무 수사학적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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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문장도 조용한것 같으면서 가끔 요설스럽지요.
어느때는 지나친 언어의 장난이 아닐까 싶은 부분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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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8.06.11 21:42:35 *.145.231.77
아니예요. 김훈의 글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어요.
남한산성을 읽어보세요.
지배자는 패배를 찾지만 민중들은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어요.

진한 글들을 올렸네요.
오늘 홍대부근에 갔다가 연락드리지 못했어요.
혹, 공부하는데 방해될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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