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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8일 18시 04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김훈은 글쟁이다. 김훈은 글로써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라는 공간에서 삶을 이어왔다. 그의 글은 신문기사와 시사주간지 기사, 산문과 소설이라는 다양함이 뒤섞여 이어져 왔다.

그는 기자라는 직업으로 30년을 살았다. 1973년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그는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을 거쳐 국민일보와 한국일보, 그리고 한겨레신문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언론사라는 공간과 기자라는 직업은 그게 그거 같지만, 그 기간동안 거쳤던 시간들은 사실 많이 다른 글쓰기의 과정이다. 한국일보시절 ‘문화부 기자 김훈’은 시리즈 기사인 ‘문학기행’으로 필명을 날린다. 당시 그의 기사는 기존 형태와 많이 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4년 시사저널 사회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시사주간지라는, 일간신문과는 전혀 다른 문법과 호흡이 필요한 기사를 쓰게 된다. ‘기자생활의 꽃’으로 불리는 편집국장을 거쳐 이사를 역임한 뒤 회사를 떠났다. 그 뒤에도 그는 국민일보 편집위원과 ‘친정’이었던 한국일보 편집위원 생활을 잠깐씩 했다.
김훈의 기자생활 중 가장 특이한 이력은 2002년 한겨레신문에서 경찰기자로 일한 것이다. 물론 부국장이라는 직급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편집국장은 그 직업의 ‘정상’이고 경찰기자는 ‘출발점’이다. 경찰기자는 처음 기자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 거치는 고되고 거친 보직이다. 수습기자를 길들이는 트레이닝 과정의 하나이다. 혹독하기가 군대에서의 유격훈련 못지않다. 유격훈련은 며칠이면 끝나지만 이 보직은 몇 달이 될지 1년 이상이 될지도 알 수 없다. 휴식이 보장되지 못하고, 집에 들어가는 날이 보장되지 못하고, 인간적 대접을 받기 힘들다. 사건과 사고가 발생하면 항상 현장을 찾아가야하고 상황이 끝날 때까지 현장을 지켜야 한다. 편집국장을 역임한 사람이 경찰기자로 뛰는 것은, 장관까지 지낸 사람이 동사무소 공무원으로 일하는 것보다 더 파격적인 일이다. 그래서 김훈은 기자이면서 기자에게 많은 인터뷰를 당했다. “글쓰기를 위한 현장의 감각이 필요했다”는 그의 목적성으로 보자면 최선의 선택이다. 세상을 살면서 그만큼 삶의 현장을 직접 만나는 직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경찰기자의 위치에서 쓰는 기사 자체가 또 하나의 글쓰기의 과정이 되었을 것이다.

김훈은 ‘풍경과 상처’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자전거 여행’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그 중에서 세간의 시선을 많이 끌었던 작품은 ‘자전거 여행’ ‘칼의 노래’ ‘남한산성’이다. 세 작품은 그에게 글쟁이로서의 탄탄한 입지를 만들어 주었고 경제적으로도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김훈의 글은 긴 시간동안 주목을 받아왔지만 단행본으로 출판된 ‘자전거 여행’은 그에게 ‘이 시대 최고의 산문’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기도 했다. ‘자전거 여행’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문장은 저자가 쓴 서문에 있다. 김훈은 서문의 말미에 이렇게 썼다. ‘새 자전거를 장만했다. 이 책을 팔아서 자전거 값 월부를 갚으려 한다. 사람들아 책 좀 사가라.’ 재미있고 속이 시원한 문장이다. 글이 어떻고, 문학이 어떻고, 시대가 어떻고 가 아닌 ‘나 돈이 필요하니 책 좀 많이 사라’는 말은 무더위에 시달리던 한여름의 소나기 같다.
그는 항상 ‘밥’을 포기하면서 까지 문학을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기존의 문학을 하던 트렌드와는 전혀 다르다. 문학이 우선이 아니라 밥이 우선이라는 관점이다. 그것 역시 파격적이다. 박경리 선생님이 글에서 말한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상업적인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간혹 상업적인 사고를 가진 문학인들을 볼 수 있는데, 진정한 문학은 결코 상업이 될 수 없습니다. 문학은 추상적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컵 같은 것이 아닙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정신의 산물을 가지고 어떻게 상업적인 계산을 한단 말입니까?’ 와는 많이 다른 관점이다. 옮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두 사람의 견해는 너무 다르다. 그 심원의 깊이에서는 합치점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밖에서 보는 관점이 차이는 너무 커 보인다.
문학을 위해 쓰던지, 밥을 위해 쓰던지 간에 김훈은 한국 문학계에 깊이 뿌리를 내린 듬직한 나무이다. 독자들도 그의 작품을 항상 기대한다. 이미 그의 문장에 많은 사람들이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김훈은 글로 생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글로 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는 글쟁이다.


● 마음에 들어 온 글귀

1권

한산, 거제, 고성 쪽에서 불어오는 동풍에는 꽃핀 숲의 향기 속에 인육이 썩어가는 고린내가 스며 있었다. 축축한 숲의 향기를 실은 해풍의 끝자락에서 송장 썩는 고린내가 피어올랐고, 고린내가 밀려가는 바람의 꼬리에 포개져서 섬의 꽃향기가 실려왔다. 경상 해안은 목이 잘리거나 코가 잘린 시체로 뒤덮였다.
포탄과 화살이 우박으로 나르는 싸움의 뒷전에서 조선 수군은 적의 머리를 자랐고 일본 수군은 적의 코를 베었다. 그것이 전과의 증거물 이었다. 잘라내 머리와 코에서 적과 아군을 식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바다에서는 모든 적들이 모든 적들의 머리를 자르고 코를 베었다. 지방 수령들은 만호진이 무너지기 전에 이미 달아났다. 포구로 몰려온 적들은 산속으로 숨어든 피난민의 아녀자들까지 모조리 죽이고 코를 베어갔다. 피난민들은다만 얼굴 가운데 코가 있기 때문에 죽었다.
나는 보았으므로 안다. 조선 수군들은 물 위에 떠다니는 아군들의 시체를 갈고리로 찍어 건져올려서 갑판 위에서 목을 잘랐다. 목을 자르기 위해 작두를 따로 싣고 다니는 자들고 있었다. 목이 잘린 시체들은 다시 물에 던져졌다. 그 머리와 코의 숫자로 양측 지휘관들은 승진했고, 장려한 수사로 넘치는 교서를 받았다. [19]

목이야 어디로 갔건 죽은 자는 죽어서 그 자신의 전쟁을 끝낸 것처럼 보였다. 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내 몸의 깊은 곳에서, 아마도 내가 알 수 없는 뼛속의 심연에서, 징징징, 칼이 울어대는 울음이 들리는 듯 했다. 나는 등판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캄캄한 바다는 인광으로 뒤채였다. [21]

조정은 작전 전체의 승패보다는 가토의 머리를 간절하게 원했다. 가토는 임진년 출병의 제 1진 이었다. 가토의 부대는 한나절만에 부산성을 깨뜨리고, 꽃놀이 가는 봄나들이 차림으로 가마대열을 꾸며 북으로 올라갔다. 붙잡힌 조선 백성들이 그 가마를 메었다. 임금은 가토의 부대에 쫓겨 의주까지 달아났었다. 임금은 가토의 머리에 걸린 정치적 상징성을 목말라 했다. [32]

내가 적을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적에게 있을 것이었고, 적이 나를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나에게 있을 것이었다. 임진년 개전 이래, 나는 그렇게 믿어왔다. 믿었다기보다는, 그렇기를 바랐다. 그 바람은 숨막혔다. 좀더 정직하게 말해보자. 사실 나는 무인된 자의 마지막 사치로서, 나의 생애에서 이기고 지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나는 다만 무력할 수 있는 무인이기를 바랐다. 바다에서, 나의 무(武)의 위치는 적의 위치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마지막 사치는 성립될 수 없었다. 바다에서, 나의 위치는 늘 적과 맞물려 돌아갔다. 내가 함대를 포구에 정박시키고 있을 때도, 적의 함대가 이동하면 잠든 나의 함대는 저절로 이동한 셈이었다. 바다에서 나는 늘 머물 곳 없었고, 내가 몸 둘 곳 없어 뒤채이는 밤에도 내 고단한 함대는 곤히 잠들었다. [36]

크고 확실한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으므로, 헛것인지 실체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헛것들은 실체의 옷을 입고, 모든 실체들은 헛것의 옷을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 젊은 날, 여진족과 맞서 있던 두만강가 산속에서, 출렁거리며 대륙을 달려가는 산맥들은 보이지 않았고 남쪽 물가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눈보라 속에서는 눈과 바람의 저쪽이 보이지 않았지만, 크고 또 확실한 적들은 늘 보이지 않는 저편으로부터 몰려왔다. [44]

중국 산수화를 들여다보고 있던 임금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옥에 갇힌 자들을 끌어내서 죽였다. 팔십먹은 노파를 곤장으로 쳐 죽였고, 여덟 살 난 남자아이와 다섯 살 난 여자아이를 무릎을 으깨서 죽였다. 목격한 사실을 자백하라는 위관의 심문을 아이는 알아듣지 못했다. 때리고 꺾고 비틀고 지지면서 형리들은 울었고, 울던 형리들이 다시 형틀에 묶였다. 우의정 정철이 그 피의 국면을 주도했다. 정책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민첩하고도 부지런했다. 그는 농사를 짓는 농부처럼 근면히 살육했다. 살육의 틈틈이, 그는 도가풍의 은일과 고독을 수다스럽게 고백하는 글을 짓기를 좋아했다. 그의 글은 허무했고 요염했다. 임금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죽임으로써 권력의 작동을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길삼봉은 천 명이 넘었으나, 길삼봉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47]

나는 붓을 들어 장계를 써나갔다. 문장은 풀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런 의전상의 단어나 상투적인 어구를 끌어대며 장계를 지었다. 나는 장계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붓을 들어 맨 마지막에 한 줄을 더 써넣었다. 나는 그 한 문장이 임금을 향한, 그리고 이 세상 전체를 겨누는 칼이기를 바랐다. 그 한 문장에 세상이 베어지기를 바랐다. ……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삼도수군통제사 신(臣) 이(李) 올림 [58]

피난민이 들어간 지역은 누런 땅이 어느새 푸르게 바뀌었다. 겨울에도 무, 배추, 대파가 새파랗게 들을 덮었다. 보름달이 뜨는 저녁이면 진도 여자들은 바닷가 언덕에 모여서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춤추고 뛰고 노래했다. 우수영 쪽 여자들도 바닷가에서 둥글게 춤추면서 물 건너 진도 쪽 여자들에게 화답했다. 그 노래 소리는 수영 안까지 들렸다. 스스로 살아가는 백성들의 생명이 모질고도 신기하게 느껴져, 칼 찬 나는 쑥스러웠다. 적들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62]

삼도수군통제사이 교서를 받았을 때 나는 김덕령의 죽음과 곽재우의 삶을 생각했다. 나는 김덕령처럼 죽을 수도 없었고 곽재우처럼 살 수도 없었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 주기를 나는 바랐다. [74]

- 명량에서 적을 맞겠다. 우수영으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기다리자. 오늘밤 전 함대는 발진하라.
장졸들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나는 다시 말했다.
- 사지에서는 살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아마도 살길이다. 살 길과 죽을 길이 다르지 않다. 너희는 마땅히 알라.
전율이 장졸들의 얼어붙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전율에, 나는 안도했다. [85]

새벽에 쌀밥과 소금에 절인 배추와 쇠기름 뜬 무국으로 군사들을 먹였다. 연안 읍진들의 군량은 바닥이 났고 백성이 없는 내륙 관아에서 군량은 오지 않았다. 밥이 모자라 그릇마다 수북이 담아주지 못했다. 밥 주걱을 쥔 배식 군관들의 팔이 떨렸다. 배마다 찐 고구마와 말린 미역을 실었다. 바다에서 점심을 먹일수는 없을 것이었다. 찐 고구마로 저녁을 먹인다면 다음날 아침은 대책이 없었다. 밝는 날 아침에, 바다위에서 적의 군량으로 나의 군사를 먹일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먹일 필요가 없을 것인지를 나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명량의 물길은 엎치락뒤치락 네 번은 바뀔 것이었다. [92]

명량 어귀에서 북소리는 난타로 바뀌었다. 격군들의 몸이 북소리를 받아내지 못했다. 역류로 달려드는 물결과 앞으로 내모는 북소리 사이에서 격군들의 몸이 으스러지고 있었다. 배는 밀리면서 겨우 나아갔다. 후미의 전선들은 세 마장 이상 처져 있었다. 나팔을 불어서 후미를 당겼다. 대장선 우현 쪽 상갑판에 지휘 통제의 위치를 정했다. 우현이 물결에 밀리면서 배의 진행 방향이 틀어질 때, 북과 물결의 힘 사이에서 무너져 내리는 격군들의 이두박근의 경련이 내 몸에 전해져왔다. [93]

죽을 때, 적들은 다들 각자 죽었을 것이다. 적선이 깨어지고 불타서 기울 때 물로 뛰어 든 적병들이 모두 적의 깃발 아래에서 익명의 죽음을 죽었다 하더라도, 죽어서 물 위에 뜬 그들의 죽음은 저마다의 죽음처럼 보였다. 적어도, 널빤지에 매달려서 덤벼들다가 내 부하들의 창검과 화살을 받는 순간부터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들의 살아있는 몸의 고통과 무서움은 각자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각자의 몫들은 똑같이 무서움이었다 하더라도, 서로 소통될 수 없는 저마다의 몫이었을 것이다. 저마다의 끝은 적막했고, 적막한 끝들이 끝나서 쓰레기로 바다를 덮었다. 그 소통되지 않는 고통과 무서움의 운명 위에서, 혹시라도 칼을 버리고 적과 화해할 수도 있을 테지만 죽음은 끝내 소통되지 않는 각자의 몫이었고 나는 여전히 적의 적이었으며 이 쓰레기의 바다 위에서 나는 칼을 차고 있어야 했다. 죽이되, 죽음을 벨 수 있는 칼이 나에게는 없었다. 나의 연안은 이승의 바다였다. [123]

면의 부고를 받던 날, 나는 군무를 폐하고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환도 두 자루와 면사첩이 걸린 내 숙사 도배지 아래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바람이 잠들어 바다는 고요했다. 덜 삭은 젖내가 나던 면의 푸른 똥과 면이 돌을 지날 무렵의 아내의 몸냄새를 생각했다. 쌀냄새가 나고 보리 냄새가 나던 면의 작은 입과 그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아리를 생각했다. 날이 선 연장을 신기해하던 면의 장난을 생각했다. 허벅지와 어깨에 적의 칼을 받고 혼자서 죽어갈 때의 면의 무서움을 생각했고, 산위에서 불타는 집을 내려다보던 면의 분노를 생각했다. 쓰러져 뒹굴며 통곡하는 늙은 아내를 생각했다. 나를 닮아서, 사물을 아래에서 위로 빨아당기듯이 훑어내는 면의 눈동자를 생각했고, 또 내가 닮은 내 죽은 어머니의 이마와 눈썹과 시선을 생각했다. 젊은 날, 국경에서 돌아와 면을 처음 안았을 때, 그 따스한 젖비린내 속에서 뭉클거리며 솟아오르던 슬픔을 생각했다. 탯줄에 붙어서 여자의 배로 태어나는 인간이 혈육의 이마와 눈썹을 닮고, 시선까지도 닮는 다는 씨내림의 운명을 나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송장으로 뒤덮인 이 쓰레기의 바다 위에서 그 씨내림의 운명을 힘들어하는 내 슬픔의 하찮음이 나는 진실로 슬펐다. [139]

길에서 쓰러진 조선 계집과 포로들을 마차바퀴로 뭉개버리고 적들은 또 다른 고을의 조선 백성들을 끌어갔다. 적들이 지나간 마을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적의 말똥에 섞여나온 곡식 낟알을 꼬챙이로 찍어 먹었다. 아이들이 말똥에 몰려들었는데, 힘없는 아이들은 뒤로 밀쳐져서 울었다. 사직은 종묘 제단 위에 있었고 조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148]

2권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
‘강산을 물들이도다’에서 나는 색칠할 도(塗)를 버리고 물들일 염(染)자를 골랐다. 김수철이 한동안 글자를 들여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 물들일 염자가 깊사옵니다.
- 그러하냐? 염은 공(工)이다. 옷감에 물을 들이듯이, 바다의 색을 바꾸는 것이다.
- 바다는 너무 넓습니다.
- 적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20]

배는 몽탄, 학다리여울을 거슬러서 영산포까지 올라갔다. 거기는 나주평야의 깊은 속살이었다. 강물에는 파도가 없어서, 배는 비단 이부자리를 깔고 나아가는 듯했다. 해마다 역질이 돌고 군량 공출과 군역 동원이 가혹했으나 나주와 무안의 들판에 민생은 아직도 가늘게 뿌리박혀 있었다. 눈이 녹아내리는 봄물에 강물은 젖몸살을 앓듯이 불어났고 새파랗게 살아났다. 무안 쪽 강 언덕으로 펼쳐진 붉은 흙이 봄볕에 부풀어 있었다. 강물이 부풀고 흙이 부풀어 산천은 가득 차 오르면서 설레였고 부푼 강물과 부푼 흙을 스치는 바람은 달았다. [34]

아낙이 멍석위에 밥상을 차렸다. 나는 그 장터에서 송여종, 안위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아낙이 국밥 열 그릇을 말아서 나룻배 편으로 격군들에게 보냈다. 말린 토란대와 고사리에 선지를 넣고 끓인 국이었다. 두부도 몇점 떠 있었다. 거기에 조밥을 말았다. 백성의 국물은 깊고 따뜻했다. 그 국물은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진액처럼 사람의 몸 속으로 스몄다 무짠지와 미나리 무침이 반찬으로 나왔다. 좁쌀의 알들이 잇새에서 뭉개지면서 향기가 입 안으로 퍼졌다. 조의 향기는 안쓰러웠다. 아낙이 뜨거운 국물을 새로 부어주었다. 나는 짠지를 씹었다. 봄의 짠지속에 소금의 간은 가볍고 싱싱했다. [38]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간에, 다만 속수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48]

바다는 내가 입각해야 할 유일한 현실이었지만, 바람이 잠든 저녁 무렵의 바다는 몽환과도 같았다. 먼 수평선 쪽에서 비스듬히 다가오는 저녁의 빛은 느슨했다. 부서지는 빛의 가루들이 넓게 퍼지면서 물 속으로 스몄고, 수면을 스치는 잔바람에 빛들은 수억만 개의 생멸로 반짝였다. 석양에 빛나는 먼 섬들이 어둠 속으로 불려가면 수평선 아래로 내려앉은 해가 물 위의 빛들을 거두어들였고, 빛들은 해지는 쪽으로 몰려가 소멸했다. 바람 거센 어느 날, 그 물 위에서 일어서는 흰 칼날을 바람 잠든 저녁 바다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다. 바다는 전투의 흔적을 신속히 지웠고 함대와 함대가 부딪히던 물목은 늘 아무 일도 없었다. 빛이 태어나고 스러질 뿐, 바다에는 늘 아무일도 없었다. [61]

만의 좁은 어귀는 생사의 먹통과도 같았다. 거기서부터 공세를 몰아서 만 안쪽의 적들을 밀어붙이면 적은 물러설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내 함대가 만 안쪽으로 깊이 들어와 있을 때 적들이 나를 우회해서 만의 어귀를 역봉쇄하면 나는 물러설 자리가 없었다. 적과 나에게 생사의 조건은 언제나 같았다. [63]

안위가 노획한 적의 칼을 뽑았다. 안위는 칼을 나에게 넘겼다.
- 죽은 척후장의 칼입니다.
쇠가 살아 있었다. 칼자루에 감은 삼끈이 닳아서 반들거렸다 살아서 칼을 잡던 자의 손아귀가 뚜렷한 굴곡으로 패어져 있었다. 수없이 베고 찌른, 피에 젖은 칼이었다. 나는 그 칼자루를 내 손으로 잡았다. 죽은 자의 손아귀가 내 손아귀에 느껴졌다. 죽은자와 악수하는 느낌이었다. [71]

나의 전체로 적의 전체를 맞아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내 몸은 감지하고 있었다. 밤의 먼바다에서, 내 척후들은 비에 젖었다. 다가오는 시간을 피할 수 없듯이, 더듬어 들어오는 적을 피할 수 없었다. 적은 오지 않았지만, 적은 오고 있었다. 오지 않은 적의 기척이 물결을 따라 느껴왔다. [87]

다음날 아침에, 송여종은 우수영으로 돌아갔다. 송여종은 조선인 포로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병들고 다친 자들은 귀향시키고 나머지는 우수영으로 보내 협선의 격군들로 배치했다. 검불처럼 앙상한 노인들이었다. 나의 노와 적의 노를 번갈아가면 저어야 하는 백성을 생각하면서, 나는 머리의 비듬을 긁었다. 나는 찬 청정수를 마시고 실었다. 조선인 포로 1천여면은 적의 순천 요새에 전진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적에게 둘러싸였고 백성들에게 둘러싸였다. 바다에는 지나간 것들의 흔적이 없었다. 붙잡힌 백성들을 앞세우고, 적은 또 다가오고 있었다. [91]

군관이 포로들을 시켜서 죽은 포로들의 시신을 옮겼다. 가마니로 만든 들것에 시신을 실었다. 시신은 사지가 빠지고 부스러져서 너덜거렸고 죽처럼 흘러내렸다. 포로들이 흘러내리는 시신의 조각들을 삽으로 떠서 들것에 실었다. 시신을 옮기면서 포로들은 울었다. 늙은 포로도 울었고 젊은 포로도 울었다. 주려서 퀭한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늙은 포로의 울음소리는 목울대르 빠져나오지 못하고 배속에서 꾸룩거렸다. 늙은 포로는 메마른 소리로 울었다. 늙은 포로의 울음소리는 파충류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들여다 보았다. 포로들은 모두 각자의 개별적인 울음을 울고 있었다. 그들을 울게 하는 죽음이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죽음을 우는 그들의 울음과 그 울음이 서식하는 그들의 몸은 개별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때, 나는 칼을 버리고 저 병신년 이후의 곽재우처럼 안개 내린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개울물을 퍼먹는 신선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적은 적의 개별성이었다.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적의 개별성이야말로 나의ㅣ 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112]

정유년 가을엣 무술년 봄 사이에, 나무를 베어서 전선 30척을 새로 만들었고 물고기와 바꾼 쇠붙이를 녹여 총통을 만들었다. 내륙 관아의 부패한 수령들과 아귀다툼을 해가며 군량을 모았고 화약을 모았다. 군량을 빼돌리고 징집 대상자를 빼돌리는 여러 고을 수령들의 범죄 사실을 낱낱이 적어서 이들을 처형해 달라는 장계를 조정으로 보냈다. 장계는 조정에서 공개되었다. 그 지방 수령들의 뒤를 봐주던 조정 대신들로부터는 아무런 회신도 조치도 내려오지 않았다. [118]

나는 환도 아래서 몸을 뒤채었다. 나는 강화 협상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백골로 뒤덮인 강토에 쑥부쟁이가 우거졌고, 도성은 잿더미가 되었다. 적이 나이 강토와 연안을 내습했으므로, 적이 전쟁을 끝내기를 원한다면 군대를 거두어 돌아가면 될 일 이었다. 그리고 온 국토를 갈아엎고 돌아가는 적을 온전히 살려서 돌려보낼 것인지, 종자를 박멸해서 시체로 바다를 덮을 것인지는 적이 아니라 나와 내 함대가 결정할 일이었다. 적은 귀로의 바다 위에서 죽음을 통과해야만 돌아갈 수 있을 것이었고, 그 바다에서 적은 죽음과 나의 죽음은 또 한 번 뒤엉킬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그토록 단순하고 자명한 일이 단순하지도 자명하지도 않았다. [120]

적의 인후 앞에서 나는 온 천지의 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전쟁이 끝나는, 이 세상의 손댈 수 없는 무내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혼자서 숨죽여 울었다. 관아 객사로 올라간 등자석 패거리들은 거기서 또 술을 마시는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달이 높이 떠올라 숙사 방 안을 비추었다. 등판을 적시는 식은땀에서 누린내가 났다. 내가 맡는 내 몸의 냄새는 고단했다. 말하여질 수 없는 적의가 산더미처럼, 파도처럼 내 마음에 밀려왔다. 임진년에 이물의 앞쪽에서 눈보라로 나부끼면 달려들던 적을 맞을 때보다 더 크고 깊은 무서운 적의로 나는 잠들지 않았다. 적은 가까이 있었다. [141]

마지막 읍진의 군사와 장비가 도착하던 날 나는 종사관 김수철을 데리고 군사와 장비를 검열했다. 내 모든 것이 집중되었다. 그날 저녁에, 내 숙사 토방에 걸려 있던 면사첩을 끌어내려 불 아궁이에 던졌다. 나는 집중된 중심을 비웠다. 중심은 가볍고 소슬했다. 나는 결국 자연사 이외의 방식으로는 죽을 수 없었다. 적탄에 쓰러져 죽는 나의 죽음까지도 결국은 자여사일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적이 물러가버린 빈 바다에서는 죽을 수 없었다. 나는 갈 것이었다. [166]

무술년 동짓달에, 함대는 다시 고금도 덕동 수영을 떠났다. 내 모든 병력과 군량과 화약을 다시 배에 실었다. 모든 볏짚을 배에 실었다. 고금도 수영에 나는 남긴 것이 없었다. 내가 다시 살아서 기지를 연다면, 그때는 고금도가 아닌, 훨씬 더 적에게 가까운 경상 연안 쪽 어는 포구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기지를 닫았다. 나는 기지가 없고 모항이 없고, 숙영지가 없는 바다로 나아갔다.
- 닻을 올려라. 다시 광양만이다.
나는 모항없는 바다로 나아가는 장졸들을 위로할 수는 없었다. 군관들은 다음 기항지를 묻지 않았다. 진린의 함대 2백척이 뒤따랐다. 바다는 추웠고, 물결이 높았다. [181]

이자를 여기서 베어야 하나, 허리에 찬 칼이 천근의 무게로 늘어졌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임진년에 총 맞은 어깻죽지가 쑤셨다. 정유년에 형장에 으스러지던 아랫도리가 결려왔다. 나는 진린의 선실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여기서 이 자를 베어버리면, 아마도 사직은 끝장이 나고, 전쟁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될 것이었다. 아마도 그때, 나는 이 세계 전체를 적으로 맞아야 할 것이었다. [185]

다시 날이 밝았다. 바다는 고용했다. 포위망을 조이면서 적에게 다가갔다. 대열의 게통을 버리고, 적들은 산개했다. 적들은 개별적 철수를 시도했다. 적들은 바다 가득히 뿔뿔히 흩어졌다. 적들의 깃발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적들은 내 포위망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내 포위망은 교란되었다. 교전하는 함대 사이로 적서들은 한 척씩 빠져나갔다. 적들은 계통없이 달려들었다. 멀리 떨어진 내 전선들이 깃발 신호를 받지 못했고, 신호는 전달되지 않았다. 함대 전체를 통제할수 없었다. 각 방면별 수령들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나는 중군만을 인솔하고 적의 진로 맨 앞으로 나아갔다. 전투는 난전으로 돌입했다. 진은 무너지고 대열은 흩어졌다. 지휘 통제는 작동되지 않았다. 한 척이 닥치는 대로 한 척씩을 붙잡아 들러붙었다 모든 한 척이 전방위의 사선에 노출되어 있었다. 수평선 쪽의 적들도 마찬가지였다. 기나긴 하루였다. 시간은 정지한 듯 더디었다. 바다는 쓰레기에 덮였다. 화약 연기와 볏짚이 타는 연기에 뒤덮여, 먼 싸움은 기억 속의 싸움처럼 희미했다. 불붙은 적선들이 마지막 힘을 다해 노를 저어와서 내 대장선의 고물을 들이받고 깨어졌다. 적병들의 시체를 헤치면서 또 다른 적선이 불길을 날리며 달려와 대장선을 들이받고 깨어졌다. 적들은 사방에서 들이닥쳤다. [194]

갑자기 왼쪽 가슴이 무거웠다. 나는 장대 밖으로 쓰러졌다. 군관 송희립이 방패로 내 앞을 가렸다. 송희립은 나를 선실 안으로 옮겼다. 고통은 오래 전부터 내 몸속에 살아왔던 것처럼 전신에 퍼져나갔다. 나는 졸음처럼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다가오는 죽음을 느꼈다.
-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너는 내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내 갑옷을 벗기면서 송희립은 울었다.
- 나으리, 총알은 깊지 않사옵니다.
나는 안다. 총알은 깊다. 총알은 임진년이 총알보다 훨씬 더 깊이, 제자리를 찾아서 박혀 있었다. 오랜만에 갑옷을 벗은 몸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서늘함은 눈물겨웠다. 팔다리가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 몸은 희미했고 몸은 멀었고, 몸은 통제되지 않았다.
- 북을…… 계속…… 울려라. 관음포…… 멀었느냐?
송희립은 갑옷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북을 울렸다.
난전은 계속 중이었다. 싸움의 뒤쪽 아득한 바다위에서 노을에 어둠이 스미고 있었다. 적선을 태우는 불길이 바다 곳곳에서 일었다. 등판으로 배의 흔들거림이 느껴졌다. 격군들은 관음포를 향해 저어가고 있었다.
싸움터를 빠져나가 먼바다로 달아나는 적선 몇 척이 선창 너머로 보였다. 밀물이 썰물로 바뀌는 와류속에서 적병들의 시체가 소용돌이쳤다. 부서진 적선의 파편들이 뱃전에 부딪혔다. 나는 심한 졸음을 느꼈다.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내 젊은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 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 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냄새들은 화약 여기에 비벼지면서 멀어져갔다. 함대가 관음포 내항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관음포는 보살의 포구인가. 배는 격렬하게 흔들렸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는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용해 보였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 칼로 베이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쪽으로…… [195]


● 내가 저자라면 - 칼의 노래

짧다. 그리고 힘 있다. ‘칼의 노래’에서 펼쳐낸 김훈의 문장은 짧지만 힘이 가득하다. 징징징 울어대는 이순신의 칼처럼 김훈의 문장은 활자가 되어 종이 위에서 징징징 울어댄다. 이순신의 칼이 적을 베고 세상을 베어냈다면 김훈의 문장은 읽는 사람의 가슴을 베어낸다.

‘칼의 노래’는 김훈이라는 작가가 구사하는 단문체의 특장점을 만끽 할 수 있는 소설이다. 그의 문장은 독특하다. 무거우면서도 처연한 느낌을 주지만 질리지 않는다. 조용하지만 힘이 넘친다. 무거우면서 처연한 느낌이나 조용하다는 것은 그렇게 큰 장점이 아니다. 오히려 단점에 가깝다. 읽는 사람을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끔은 한없는 무기력에 빠지게 만든다. 환영받기 어렵다.
김훈의 문장은 분명 그러한 느낌을 주면서도 힘이 넘치고 읽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다. 그것이 독특함이다. 깊고 멀리 가는 강처럼 이리저리 손짓발짓을 하면서 애써 알리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깊은 맛이 배어있는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멀리 가있고는 한다. 뼈다귀만 있는 듯한데 무언가 풍성하다. 무심한 듯하지만 팽팽한 긴장을 준다. 단문체의 비장함과 함께 뚝뚝 끊기면서 부드럽게 연결되는 절묘한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것이 김훈의 문장이다.

이순신의 이야기인 ‘칼의 노래’와 삼전도의 굴욕을 다룬 ‘남한산성’은 김훈의 대표적 역사소설로 꼽힌다. 이순신의 이야기와 삼전도의 굴욕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것도 너무나 많이 알고 있는 내용이다. 이야기의 희소성도 없고 숨겨진 비밀스러움도 없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로 김훈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냈다. 단순한 소설적 재미로 접근했다면, 역사적 교훈으로 접근했다면, 역사를 돌아보는 이야기로 접근했다면, 두 작품은 그런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으로 본다. 두 작품의 성공에는 독특한 문장이라는 김훈만의 무기가 큰 몫을 차지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색다른 분위기와 문장의 독특한 힘으로 밀어간 것이다. 독자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은 대중들이 잘 알고 있는 사건을 소재로 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라는 그 소재는 언론을 통해서 너무 많이 알려졌고 모든 사람이 그 미스터리에 관심을 가졌다. 사건의 시작에서 전개 과정 그리고 마무리까지 대중들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런 사건을 소재로 한 ‘살인의 추억’에 개봉 전부터 의문부호가 숱하게 쏟아졌다.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을 영화에 담았는데 흥행이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500만이라는 관객을 동원했다. 단순히 관객동원에만 성공한 것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호평이 쏟아졌다. 그 영화의 힘은 감독의 문법이 만들어 낸 구성이었다. 영화의 전개는 색다르지 않다.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내용은 같지만 영화는 독특한 힘으로 관객을 빨아들였다. 김훈의 소설도 그러하다.

간결하고 힘 있는 김훈의 문장은 한겨레 시절에 썼던 ‘거리의 칼럼’에서 두드러진다. 3매 분량으로 작성했던 이 기사에서 그는 간결성, 함축성, 간접성 이라는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신문기사들이 흔히 그러하듯 호소하거나 촉구하지 않는다. 옆에서 무심히 지켜보는 듯하지만 커다란 울림으로 더 큰 효과를 준다.
‘거리의 칼럼’ 한 편을 읽어보자.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는다. 외국 대사관 담밑에서, 시위군중과 대치하고 있는 광장에서, 전경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먹는다. 닭장차 옆에 비닐로 포장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먹는다. 된장국과 깍두기와 졸인 생선 한 토막이 담긴 식판을 끼고 두 줄로 앉아서 밥을 먹는다. 다 먹으면 신병들이 식판을 챙겨서 차에 싣고 잔반통을 치운다.
시위 군중들도 점심을 먹는다.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준비해 온 도시락이나 배달시킨 자장면을 먹는다. 전경들이 가방을 들고 온 배달원의 길을 열어준다. 밥을 먹고 있는 군중들의 둘레를 밥을 다 먹은 전경들과 밥을 아직 못 먹은 전경들이 교대로 둘러싼다.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한 거리의 식당에서 기자도 짬뽕으로 점심을 먹는다. 다 먹고 나면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는 또 제가끔 일을 시작한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3매 분량의 짧은 기사이지만 눈에 익은 문장이 눈에 뜨인다. 필자의 이름을 보지 않아도 ‘혹시 이 사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김훈의 문장은 자신의 독특한 모습과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 짧고 힘 있는 문장. 그것이 김훈의 문학을 밀고 나가는 힘이다.

IP *.123.2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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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6.09 15:15:27 *.248.75.18
항상 명쾌한 리뷰, 갈수록 돋보입니다.

김훈과 박경리 작가의 문학에 대한 생각이 어떤 점에서는 다르지만 어떤 점에서는 매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이데올로기도 생존을 능가할 수 없고, 글을 쓰는 행위가 살아가는 행위보다 가치있다고 볼 수 없다는 쪽으로 두 분의 의견은 상당 부분 수렴되는 것 같습니다.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김훈이 만난 이 산하의 농부들은 가방끈은 짧지만, 삶에서 배운 것은 가장 명확한 사람들이고 살아있음의 숭고함을 우리들에게 일깨우는 사람들입니다. 박경리 소설의 토대를 이루는 민초들의 삶도 그런 것이겠지요.

창이 올려놓은 박경리 선생의 마지막 산문, 읽고 speechless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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