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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0일 13시 39분 등록
열정과 기질

하워드 가드너 / 임재서 옮김 / 문용린 감역






1. 작가에 대하여

1938년 11월 9일, 나치는 독일 전역에 수 만개에 이르는 유대인 가게를 약탈하고 2백 50여 개 시나고그(유대인 사원)에 방화를 저질렀다. 유대인 차별에 항거하는 움직임으로 한 유대인 소년이 파리 주재 독일 외교관을 암살한 것이 발단이었다. 당시 유대인 91명이 살해되었고, 3만 여 명이 체포되었다.

“약탈당한 유대인 상점의 깨진 유리창 파편이 반짝거리며 거리를 가득 매웠다” 하여, 이 사건은 ‘수정의 밤’, 혹은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라 불리게 된다. 크리스탈나흐트를 시발로 나치의 광적인 유대인 말살정책이 시작되었으며, 당시 독일 언론과 지식인들은 이에 침묵했다. 독일 인구의 3%에 해당하는 유대인들이 국부의 1/4을 차지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질시와 반등 때문이었다.

유년기의 회상과 두 가지 사건
역사적인 크리스탈나흐트가 있던 날, 가드너Gardner 내외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들은 독일의 뉘른베르크Nuremberg에서 태어나 그곳에 정착했던 유대인이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펜실베니아Pennsylvania의 작은 채광마을이었던 스크랜턴Scranton이었다. 그리고 5년 뒤인 1943년, 가드너 내외에게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그가 바로, 하워드 가드너Howard이다.

하워드의 유년기는 매우 평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비범했다. 그는 스스로의 학창시절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거무스름한 머리결에, 약간 통통한, 안경을 낀 소년이었다. 평균키에 걸음걸이는 약간 어부정했고, 달리는 것도 시원찮았다. 공부는 열심히 하는 부류였다. 독서를 좋아했으며, 많은 것에 관심이 있었다. 더 어려운 것, 더 좋은 방법에 대해서 형들이나 선생님들, 어른들에게 몹시 질문을 해댔다. 나는 쓰는 것을 좋아했으며, 7살 때는 학교 교지에 저널을 기재하기도 했다. (…)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과 수학은 완벽하게 할 줄 알았다. 그러나 편벽되게 좋아하는 과목은 없었다. 역사와 문학, 예술에 대해서는 약간의 관심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특이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 색맹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색맹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대목이 좀 느닷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막을 알고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사시였고, 시력이 매우 나빴다. 상대방의 얼굴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근시인데다가, 역시 색맹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가지 기능이 더해진 매우 두꺼운 안경을 끼어야 했을 것이다.

그의 글을 읽으며 의아했던 사실은, 사회과학자인 그가 음악적으로도 상당한 소양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이다. “스트라빈스키는 리듬 분절을 작품의 시그니처(signature)로 삼는 화음을 구상했던 것인데, 단7도 음정을 더한 Eb장조와 Fb장조의 결합을 통해 불협화음적 요소가 강한 화음을 만들어냈다. (…) 『봄의 론도』의 코보로보드(khoborovod) 멜로디를 표현하는 데는 무려 일곱 개나 되는 상이한 기보법이 존재한다거나, 느린 반음계 악절로 이루어진 2부의 서주부분이 골치 아픈 문제를 야기했으리라는 점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 피아노를 쳤다. 실제로 재능도 있었기에, 사춘기가 오기 전까지는 피아니스트나 작곡가가 될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피아노를 쳤던 일에 대해서 하워드는 매우 짧고 간결하게,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아마도 음악적 경력을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피아니스트보다는 작곡가가 되는 일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연습이 성가신 일이 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가 어릴 적 기억하는 가장 큰 사건은 두 개이다. 하나는 나치에 의해 자행되었던 홀로코스트Holocaust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형 에릭Eric의 죽음이다.

유대인 소년들은 13세가 되면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바르 미츠바Bar Mitzbar’라 불리는 성인식을 치른다. 이제부터는 부모를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이 직접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의 유대교 전통의식이다. 이 의식에는 ‘야드 바셈Yad Vashem’이라 불리는 ‘유대인 학살 기념관’을 견학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곳에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유대인 학살 장면이 전시되어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전경과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침상, 소모품, 옷가지 등을 진열해 두었고, 대량학살장면, 총살장면, 생체실험장면 등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이 개방되어 있다. 소년들은 이곳을 견학하고 나오면서 눈물을 흘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잊을 수는 없다.” (사실, 나는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용서’란, 그 사건을 다시 기억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유대인은 AD135년 디아스포라Diaspora를 통해 전 유럽으로 흩어졌으며, 이후 나라 없는 이방인이란 이유로 (유럽)각지에서 차별대우를 받아왔다. 가톨릭이 드세던 중세에는 예수를 죽인 악마의 자손이라 하여 곳곳에서 화형에 처해졌으며, 흑사병이 나돌던 르네상스 초반(1348년)에는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서 전염병이 돌게 되었다”라는 누명을 쓰고 떼죽음을 당했다. 급기야 세계 2차 대전 중에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 정책’에 따라 6백 만 명이 학살되는 홀로코스트를 겪게 된다. 이렇듯 2,000년 이상 (사실은 2,500년간이다) 지속되어 온 유대인들의 나라 없는 설움은 그들의 민족주의 사상인 시오니즘Zionism에 깊게 새겨져 있다. 이것은 그들의 핵심적인 교육정책이기도 하다. 하워드 가드너뿐만 아니라, 미츠바를 치르는 유대 소년들에게 홀로코스트는 유년기를 가로지르는 가장 큰 사건임이 틀림없다. (하워드는 13살이던 1956년에 미츠바를 치렀다고 쓰고 있다)

그는 좀 에둘러서 이렇게 회상한다. “이 끔찍한 사건에 대해 부모님이 자주 언급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그분들에게 영구적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분들은 운 좋게도 사전에 대피한 경우이다. 친척들 중에는 죽음의 캠프에서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고, 이미 죽은 경우도 많았다. 나의 아버지는 작은 연맹을 이끄셨는데, 그것은 디아스포라와 유럽에서의 운명(나치의 유대인 정책)때문에 뿔뿔이 흩어져버린 가족들을 찾아주기 위한 모임이었다. 스크랜턴의 작은 아파트는 매일 밤 새로운 친척(유대인 이주자)들로 붐볐으며,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한동안 같이 살기도 했다.”

두 번째 사건은 그의 형 에릭의 죽음이다. 가드너 내외가 미국으로 건너 올 당시에는 3살 난 아이가 있었다. (1935년 생) 그러나 어머니가 하워드를 임신 중이던 1943년(혹은 1942년), 8살(혹은 7살)이 되던 해에 그는 사망한다. 하워드는 형이 있었다는 사실을 꽤 오랫동안 몰랐던 것 같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부모님은 나에게 에릭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아니, 할 수 없으셨을 것이다. 우리 집 여기저기에는 에릭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나는 그 사진의 주인공이 가까운 친척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스스로’ 알게 되었다. 그가 내 형이었음을.”

그는 이후 부모에게 에릭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에릭이 죽을 당시, 그(하워드)를 임신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하워드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이에 대해 그는 격정적으로 쓰고 있다. “에릭을 향한 사랑이 나에게 옮겨졌음은 당연하다. 이분들의 사랑으로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비록 그 사랑을 깨닫게 되는 데에는 이후로 수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그 사랑의 영향력과 결과만큼은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나 유효하다.”

간주곡1
하워드는 본문(『열정과 기질』)에서 총 7명의 천재성을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그가 이 책에서 하고자 했던 바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1)천재들의 창조성 유형을 살펴보고 각각의 특이성(차이점)을 밝힌다. 2)창조성의 본질, 즉 어느 정도의 공통점을 찾아낸다. 3)(천재성과 견주어)’현대(the modern era)’에 대한 결론, 즉 1900년대의 시대성을 밝힌다.

여기서 하워드가 ‘현대’라고 이름 붙인 시대성의 특징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가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창조성에 대한 연구는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밝히는 것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가 하려는 바도 다르지 않다. 그는 7명의 천재성을 탐구하여 이 같은 내용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존의 방식에 한 가지 요소를 추가했다. 바로 개인의 창조성에 기여하는 ‘시대성’을 밝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1)그가 정의한 ‘현대’의 의미와 2)“창조성과 견주어 시대성을 밝힌다”는 의미가 생소할 것이다. 이것부터 해결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1)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는 전체적으로 ‘해체(19세기의 관습과 풍습이 해체된다)’가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이 시기를 흔히 ‘아방가르드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기성관념이나 유파를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이룩하려던 모든 혁신적 예술활동’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 시기가 하워드가 정의한 ‘현대’에 해당한다. 2)이에 대해, 그가 주목하는 바는 두 가지이다. 그것은 ‘교차성’과 ‘파급성’이다. 교차성은 “새로운 회화가 존재할 수 있다면 새로운 무용이나 시, 혹은 정치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 시대의 천재들이 보인 창조성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교차하고 있다는 것이다. 파급성은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어느 한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 순식간에 전세계에 전파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으로, 매체의 발달을 통해 정보의 전파속도가 빨라지면서 서로의 영역이 기민하게 반응하며 촉진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창조성 못지 않게, ‘현대’라는 한 시대에 관해서도 결론을 내리고 싶어 했다. (물론 창조성과 연관한 결론이다) 그가 검증하고 싶었던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다. “인간을 형성하고 그 특성을 만들어 내는 데에는 시대의 기여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나는 특별히 해체의 분위기를 띠는 아방가르드적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들을 선택했다. (7명 모두 이 시기의 인물들이다) 이들이 그렇듯 발군의 천재성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현대’라는 시대성(교차성, 파급성)의 영향이 크다. 이들을 탐구하다 보면, 분명 ‘현대’라는 시대의 특성도 드러날 것이다.”

이런 일들(3가지: 창조성의 공통점, 차이점 찾아내기, ‘현대’라는 시대성 밝히기)을 하기 위해 그는 몇 가지 분석도구를 창안해 냈으며, ‘생산적인 비동시성’, ‘파우스트적 거래’, ‘10년 규칙’ 따위의 새로운 개념들을 제안했다. 그 중에서도 ‘구성적 주제’라 하여, 그가 각각의 인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초점을 두고 있는 3가지 주제가 있다. 모든 인물 분석은 이 3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기술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아동(아직 창조성이 개발되지 않은)과 창조적인 어른의 관계
2) 창조적인 인물과 작품과의 관계
3) 창조적인 인물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이에 대한 그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1)개인은 내부에 어떤 분야의 대가가 될 만한 소질을 싹으로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창조성이 발휘되는 성인으로 성장해 가지 못하고, 2)그러한 소질을 심화하고 강화시킬 수 있는 적절한 일의 체험기회(교육, 훈련 등)를 필수적으로 가져야 한다. 또한 3)이러한 체험의 과정에서 타인(가족, 친구, 경쟁자, 후원자 등)으로부터 격려와 지원을 받는 의미 있는 인간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그는 7명의 천재들(프로이트, 아인슈타인, 피카소, 스트라빈스키, T.S. 엘리엇, 그레이엄, 간디)을 선정했다. 공통점과 차이점을 명백하게 하기 위해 각기 다른 분야의 창조성으로 선정했으며, ‘현대’라는 시대성을 밝히기 위해 모두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시기에 창조성을 발휘했던 인물들로 선별했다.

그는 명백한 사회과학자이다. 그의 목표는 뚜렷하다. 1)창조성의 공통점 찾기. 2)창조성의 차이점 찾기. 3)’현대’라는 시대성 밝히기(창조성을 중심으로). 이를 위한 분석의 틀도 마련해 두었다. (간주곡2, 3에서 소개한다) 그리고 이에 부합하는 두 가지 가설도 세워두었다. (창조성에 대한 것과 시대성에 대한 것)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7명의 ‘현대’ 창조성도 선정되었다. 이제 증명만이 남았다.

간주곡1-2
나는 이번 저자소개를 기획하면서, 그가 천재들을 분석했던 방법을 똑같이 적용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방식대로 그를 소개해보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간주곡의 형태로 나의 3번 항목인 ‘여신’부분을 이곳에 가미할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 같다. 그의 방식을 따르기로 해놓고 둘을 나누어 기술하면, 이야기가 분산되거나 의미 없는 중복이 발생할 것임이 분명했다. 기왕에 재미있게 써보기로 한 것, 마음껏 무리를 해볼 셈이다. (이번 ‘여신’은 저자소개 부분과 합쳐졌다)

유년기 개괄
하워드의 유년기는 프로이트처럼 특별히 공부를 잘했다거나 피카소처럼 신동의 면모를 보였던 것은 아니다. 스트라빈스키나 그래이엄처럼 자신의 분야를 어렸을 때부터 (십 대일 때) 발견해서, 별 굴곡 없이 외길을 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아인슈타인이나 T.S. 엘리엇처럼 평범한 모범생으로 학교를 졸업한 범주에 해당한다. 이어 기술하겠지만, 심지어 그는 하버드의 학부과정을 졸업한 이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스스로의 진로를 찾아내지 못했다. 프로이트가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신의학분야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 역시 30대 중반 무렵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교육심리학분야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수학이나 물리학처럼 선수생명이 짧은 분야(30대 이전에 창조적인 업적이 쏟아지고 이후에는 차츰 매몰된다)에 뛰어들었다면, 그는 아마 지금과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예술, 철학, 문학 따위의 분야들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관록의 창조성을 쏟아낼 수 있는 ‘사회과학’분야에 몸을 실었고, 결과적으로 이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창조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매우 겸양적인 태도로 스스로의 성취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지식이라는 거대한 건물아래 벽돌 한 장을 더 끼워 넣은 셈이다. 이대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유년기 내내 그는 뚜렷한 관심분야가 없었다. 역사, 문학, 예술 따위에 약간의 관심이 있었다고 하는데, 특이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하버드에서 그의 첫 전공은 역사였다) 미츠바를 치르기 전까지 그가 온통 관심을 쏟았던 것은 보이스카우트, 이글스카우트 따위의 캠핑활동이었다. 수학과 과학을 잘했고,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했으며, 꽤 오랫동안 피아노를 쳤고, 질문하기를 좋아했다. 몸으로 하는 일에는 서툴렀고, 편벽되게 좋아하는 것은 없었다. 이런 식이라면, 주위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평범한 모범생 꼬마를 상상하면 틀림이 없겠다.

이렇듯, 진로에 대해서라면 그의 유년기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듯 매우 컴컴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의 이른 시기에 유일하게 두드러졌던 점은, 특별한 점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집 밖으로 쏴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꽃을 따러 다니지도 않았고, 곤충을 연구하지도 않았고, 쥐를 해부하지도 않았다. 라디오에 관심이 있거나 차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심리학으로 방향을 틀면서 (박사학위 수료 이후) 지금과 같은 경력을 쌓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십대 시절에 심리학과 관련한 저서를 몇 편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는 심리학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갖지 못했었다는 것이다. (향후 심리학 분야에서 얼마간의 성취를 이루어낼 터인데도 말이다) 지적으로 다재 다능했던 프로이트. 4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던 피카소.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흥미가 있었던 스트라빈스키. 도덕적인 중재를 즐겼던 소년 간디. 그가 조사했던 대부분의 천재성 재원들에 비하면, 그의 유년기에는 이렇다 할 천재성의 싹이 발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던 아인슈타인과 십대 후반이 될 때까지 무용과는 전혀 관련 없는 삶을 살았던 마샤 그레이엄, 전형적인 ‘하버드 맨’이었지만 (하워드도 ‘하버드 맨’이다) 갈피를 못 잡고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몇 번이고 진로를 수정해야 했던 T.S. 엘리엇과 같은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 아직은 그의 유년기를 결론 짓기에 이른 감이 있다.

하워드가 구성적 주제로 삼은 첫 번째 항목은 ‘아동과 창조적인 어른간의 관계’이다. 이 주제를 통해 그가 하고자 했던 질문은 이런 것이다. “유년기의 모습에서 창조성의 싹을 발견할 수 있을까? 유년기의 어떤 사건들이 창조성에 영향을 미치는 걸까? 아동과 창조적인 어른간의 함수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 하워드의 검증과정이다. 결과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특정 그룹의 특이성으로 묶이기도 했지만, 이어 살펴볼 내용처럼 좀더 보편적인 내용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7명의 천재들을 조사하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대략 이런 것이다.

“천재들의 유년기는 안정되어 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충분한 지원을 받는다. 어떤 재능이 발견되면, 언제든 그것을 심화시킬 수 있는 교육환경이 제공되었다. 부모나 유모처럼, 무한한 격려와 칭찬, 사랑을 제공받을 수 있는 든든한 후원관계도 갖추고 있었다. 미래에 대해 희망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났으며, 향후 자신이 집중하게 될 분야에 쉽게 노출되어 있었다.”

물론, 천재들이 모두 똑같은 유년기를 보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각각의 천재들이 상당한 교집합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하워드도 그랬다. 하워드의 유년기는 프로이트, 혹은 아인슈타인과 흡사했다. 계층상승을 이룬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교육받은 부모 밑에서 배움과 성취, 그리고 도덕성 따위의 덕목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며 자라났다. 흔히 말하는 부르주아 집안에서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밝은 미래를 희망할 수 있는, 더없이 유복한 환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워드는 본문의 결론 부분에서 전형적인 창조자(Exemplary Creator)의 초상을 짧게 기술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은 “대부분의 천재들이 종교적인 갈등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본문에서 가져와본다. “집안에는 종교적 분위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덕적인 분위기가 배어 있어서 (…) 한때는 종교를 거부했다가도 훗날 다시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하워드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도덕적인 분위기가 배어 있는 전통적인 유대교 집안에서 자라났다. 아버지가 유대 네트워크를 위해 활동했던 점. 유년기의 가장 큰 사건으로 미츠바와 홀로코스트를 회상했던 점. 이런 점들로 봐서, 하워드 역시 유대교의 종교적 함의와 무관하지 않은 인물로 평가된다. 또한 자전적인 글을 쓰면서 유대적인 성향을 뚜렷이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시오니즘적(유대 민족주의) 성향을 읽을 수 있다.

하버드에서의 생활 – 학부생 시절
1961년 9월, 그는 하버드에 입학한다. 하버드는 그에게 각별했다. 그는 하버드에서의 생활을 ‘영혼을 위한 엘리시움 들판(Elysian field for the mind)’과 같았다고 쓰고 있다. (엘리시움 들판은 희랍 신화에 나오는 낙원으로 평화롭고 안락한 곳을 묘사할 때 쓰인다) 그는 하버드를 사랑했으며, 자신이 하버드의 성원이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관련이 있든 없든, 그는 결국 하버드의 교수가 되었다)

그의 생애는 하버드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맞았다. 무엇보다도 그를 자극했던 것은 이전에는 만나 볼 수 없었던 선의의 경쟁자들에 둘러싸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오랫동안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나는 처음으로 적어도 나와 대등한, 아니 나를 넘어서는 친구들 사이에서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학문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나는 그저 보통에 불과했다. 이러한 긴장감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도 성공적인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역사학을 전공하면서, 교과과정 이외에도 많은 과목을 수강했다. 그것도 모자라 여러 과목을 청강하기도 했다. 그가 들었던 과목은 역사학, 사회학, 생물학, 신경학, 의학, 법학, 심리학, 인류학, 철학 등등 굉장히 광범위했다. 그는 법학이나 의학 분야의 과목에도 발군의 재능을 보였지만, 그 분야에 대해서는 아무런 꿈이 없었다. 그가 관심 있는 분야는 조금 독특했다. 처음에는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 따위의 인문분야에 끌렸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분과로 흩어진 순수학문보다는 몇 개의 분야가 합쳐지는 학제적 연구에 더욱 관심이 쏠렸다. 그는 결국 사회 관계학Social Relations으로 전공을 수정했다. 이 분야는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따위가 합쳐지는 학제적 연구분야였다.

하워드는 각각의 천재성을 기술하면서 이들의 ‘아버지상’을 제시해왔다. 천재들은 유년기에 부모나 유모, 친척 등과 같은 후원자로부터 사랑의 지원을 받는다. 그러나 재능이 심화되는 시점부터는 새로운 후원자나 동료, 혹은 스승이 필요하다. 이들은 개인의 재능을 이해하고 칭찬과 지적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인물들로, 보통의 경우 천재들의 첫 번째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피카소의 경우는 조르쥬 브라크가 그랬고, 스트라빈스키에게는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그랬으며, 마사 그레이엄에게는 루이스 호스트가 그랬고, T.S. 엘리엇에게는 에즈라 파운드가, 프로이트에게는 장 마르탱 샤르코가, 아인슈타인에게는 맥스웰, 로렌츠, 푸엥카레 등의 저작들이 그랬다.

역시 하워드에게도 그의 ‘아버지상’이 있었다. 그의 첫 번째 스승이자, 이후의 모든 저작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카리스마 넘치는 정신분석학자Psychoanalyst’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이다. 에릭슨은 하워드가 학부 3년과 4년을 보낼 당시, 그의 지도교수였다. 그가 역사학에서 사회 관계학으로 전공을 바꾼 이후부터이다.

그는 에릭슨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쓰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1973년부터 집필된 그의 저작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정신(Mind)과 관련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다중지능이론을 소개했던 그의 획기적인 저작 『마음의 틀』도 원제는 『Frames of Mind: Theory of Multiple Intelligences』였다. 이 밖에도 정신을 다룬 수많은 저작들이 있는데, 대략적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The Unschooled Mind』 학생들은 어떻게 사유해야 하며, 학교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Creating Minds』 창조성에 대한 분해. 이 책, 『열정과 기질』의 원제이다.
『Leading Minds』 리더쉽에 대한 분해.
『Extraordinary Minds』 예외적인 인물들에 대한 초상(portrait)과 그 예외성에 대한 연구.
『The Disciplined Mind』 모든 학생들이 이해해야 하는 것들.
『Changing Minds』 인성과 행동을 바꾸기 위한 7가지 해법. (창조성, 리더쉽, 예외성 등을 위해서)
『Five Minds for the Future』 리더가 되기 위한 5가지(훈련, 종합, 창조, 존경, 윤리) 마음가짐Mind

정신분석학자에서, 향후 발달심리학자로 노선을 갈아타게 되는 에릭 에릭슨은 ‘인간성장의 8단계’, ‘사회성 발달이론’ 등을 내놓았으며, 특히 ‘청년기의 정체성 위기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그는 1960년부터 1970년까지 하버드에서 가르쳤으며, 『유아기와 사회』(1950), 『정체성과 생활주기』(1959), 『청년 루터』(1958), 『간디의 진리』(1969) 등의 저작을 남겼다. (하워드는 본문에서 여러 차례 에릭슨의 저작을 인용하고 있다) 하워드가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것처럼, 에릭슨은 청년기에 화가를 지망했을 정도로 그림에 조예가 깊었다. 두 사람 간에는 학문적인 코드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코드도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에릭슨이 인간 정신의 감성적인 측면에 집중했던 데 반해, 하워드는 인간 정신의 특정한 성취에 집중했다는 데에서 그 방향이 좀 달랐다고 할 수 있다.

하버드에서의 (학부)생활이 끝나갈 즈음, 그는 또 다른 스승을 만나게 된다. 인지 심리학자인 제롬 브루너Jerome Bruner와 진 피아제Jean Piaget이다. 브루너는, 역시 하버드의 교수로 ‘인지(cognitive) 연구센터’를 창설한 인물이다. 지각, 사고, 학습, 언어 따위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인지과정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왔다. 하워드는 브루너를 마주치고부터 자신이 집중해야 할 분야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사회 관계학에서 심리학으로 관심 분야를 다시 한번 수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 하워드는 심리학과 관련한 여러 저서들을 탐독하게 되는데, 이때 만나게 되는 인물이 바로 피아제이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그(피아제)의 강력한 저작들을 읽고 인지발달심리학(cognitive developmental psychology) 쪽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게 된다.” 피아제는 스위스의 심리학자로 주로 어린이의 정신발달, 특히 논리적 사고 발달에 관한 연구에 집중한 인물이다.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아동의 언어와 사고』, 『발생적 인식론 서설』(3권) 등이 있다. 어린이의 사고 과정이 ‘자기중심적’임을 밝힌 그의 저작들은 당시 학계에서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하워드는 이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의 생애는 두 개의 상징으로 점철된다. 언어와 음악이다. 나는 언어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다. (…) 그리고 나는 음악적 감성을 내 글에 담으려 한다. 나는 완전히 논리적, 수학적 사고에 맞추어진 사람이다. 공간적인 기술이나 신체 감각적인 시도는, 내게는 전혀 없다. 게다가 나는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대해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까?) 나는 사람들을 연구한다. 특별히 인간의 감성적인 측면보다는, 특정한 성취와 관련한 부분을 연구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나의 스승인 에릭 에릭슨보다는, 나의 학문적 멘토인 진 피아제나 제롬 브루너와 닮았다 하겠다.”

간주곡2
모든 군더더기를 차치하고 나면, 하워드의 질문은 매우 짧게 요약된다. 궁극적으로 그는 이렇게 묻고 싶은 것이다.

“창조성은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해서 하워드는 그의 동료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개념을 빌려왔다. 칙센트미하이의 개념은 창조성을 구성하는 3가지 요소인 1)개인성, 2)비(非)개인성, 3)다(多)개인성 이다. 이것을 좀더 설명적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

1)개인성: 재능 있는 개인
2)비개인성: 개인이 활약하는 특정 분야나 학문 영역
3)다개인성: 인물과 성과물의 질적 수준을 판단하는 장(field)

이 밖에도 아(亞)개인성이라 하여 창조적 인물의 유전적 특징이나 신경생물학적 특성에 대한 연구가 있는데, 이 내용은 하워드도 잠깐 언급하는 수준에서 논의를 맺었다. 인지 심리학(경험적으로 발견되는 영역에 초점을 둔다)의 분야를 넘어서는 내용이기 때문에 특별히 다루지 않은 것이다.

3번 항목에 장(場)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이것 역시 칙센트미하이의 용어이다. 장이란, 창조적인 인물이 뛰어든 분야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의 모임을 지칭한다. 아인슈타인의 경우는 물리학 학회나 대학 교수집단이 될 것이고, 피카소의 경우는 미술 애호집단이나 비평가 집단, 제도권의 화가들이 될 것이다. 프로이트는 정신의학이라는 장을 스스로 개척했으며, T.S. 엘리엇은 창조성이 사그라진 중년 이후부터 문학 비평가로써 장의 핵심적인 인물이 된다.

칙센트미하이는 창조성에 대해 이렇게 주장했다. “창조성은 이 세 요소가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으로 볼 때 가장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하워드는 그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앞서 소개한 바, 7인의 창조성을 탐구하기 위한 구성적 주제로 삼은 것이 다름 아닌 위의 세 요소이다. 하워드가 행한 연구는 각 개인성 내부의 탐구이거나, 각 개인성 상호간의 탐구이다. 즉 슨, 개인성, 비개인성, 다개인성을 세부적으로 고찰하는 것, 그리고 각 항목 간의 증폭 내지는 반등 따위의 연관을 밝히는 것이 초점이라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구성적 주제에 대한 재론이 되었지만, 그(하워드)가 행한 창조성 연구의 ‘가장 근본적인 개념’이 여기서 파생된 것이기에 말을 늘였다. 그는 “창조성은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나 이렇게 묻기 전에 그는 이런 질문을 먼저 해야 했다. “창조성이란 무엇인가?” 언제든 사안에 대한 ‘정의’가 명백하지 않으면 논의는 평행선을 달리게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시작점을 명확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렇게 시작(정의)한다.

“창조성은 1)예술가의 머리나 손에 있는 것도 아니고, 2)특정 분야나 3)심판관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창조성이라는 현상은 오직 이 세 요소(개인, 분야, 장)들간의 상호작용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으며, 그럴 때에만 좀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을 좀더 웅변적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 “재능 있는 개인이 장(field)을 통해 성장하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이것이 창조성이다.”

그는 명백한 사회과학자인 만큼, 창조성의 정의에 대해서도 일정한 제한이 필요했다. 곁가지를 쳐 내고 모양새를 다듬어 자신만의 용어로 만드는 일이다. (논의를 집중시키고 사소한 논란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개인은 (모든 분야가 아닌) 어떤 특정 분야에서만 창조적일 수 있다.
2) 창조적인 개인은 정규적으로 창조성을 발휘한다.
3) 문제풀이뿐만 아니라, 작품의 제작, 새로운 질문의 고안 따위도 창조성이라 할 수 있다.
4) 그 자체로 창조적인 것은 없다. 창조적 행위는 반드시 특정 문화(혹은, 장)에서 검증, 발현 된다.

창조성에 대해서 한 가지 더 눈 여겨 보아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바로 ‘창조성의 발달 과정’이다. 개인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창조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른바 ‘창조성 지도Creativity Map’이다.

1)특정 분야에 대한 유년기의 관심. 2)특정 분야를 선택. 3)선택한 분야에 정통한 후, 새로운 가능성, 혹은 모순점을 발견. 4)단계적인 탐구. 5)고립, 방해, 혹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격려와 지지를 받음. 6) 서서히 새로운 상징체계를 만들어감. 7)관련 장에서 평가를 받음. 8)좀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두 번째 혁신을 이룸.

7인의 연구과정은, 이 지도를 펼쳐놓고 각각의 일대기를 지도상에 해당하는 곳으로 가져다 놓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나의 대형 지도 위에 7색의 점을 찍어놓고, “얼마나 일치하는지”, 혹은 “얼마나 어긋나는지”를 보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하워드가 집중하는 지점은 6번과 7번 사이이다. 해당 분야에서 기존의 체계를 뒤흔드는 완전히 새로운 결과물이 창조되고, 주인공은 장의 핵심인물로 부상한다. 그리고 해당 분야는 한 단계 상승을 이룬다. 주인공은 이어 8번으로(두 번째 혁신) 향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다시 3번, 4번, 5번의 과정이 반복된다. 운이 좋다면, 그는 다시 한번 전인미답의 결과물을 쏟아 낼 것이고 이어 해당 분야를 장악하게 된다. 창조성은 이런 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창조성의 작용에 관련해서) 그가 초점을 두고 있는 질문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유년기의 무엇이 창조성에 활용되는가? 주인공은 어떤 식으로 선택분야에 정통해지는가? 어떤 스승, 어떤 동료, 어떤 후원자를 만나는가? 이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받는가? 새로운 상징체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무엇인가? 새로운 창조물이 소개되었을 때, 장의 반응은 어떤가? 정치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두 번째 혁신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지나? 완전히 새로운 것인가, 아니면 과거와 현재의 종합인가?”

우리는 지금 하워드 가드너라는 교육심리학자의 일대기를 보고 있는데, 이제 막 6번 항목, 그러니까 “새로운 상징체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무엇인가?” 라는 상자를 열어볼 차례가 된 것이다. 이제, 그가 어떻게 해당분야를 장악해가는지 살펴보자.

사회심리학의 전개 – 성과
에릭슨에게서 시작된 인간 정신에의 관심은 브루너를 만나 심리학으로 굳어졌으며, 피아제의 저작들을 통해 인지발달심리학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이후 그는 잠깐 동안 런던에서 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다시 하버드로 돌아와 넬슨 굳맨Nelson Goodman이 설립한 (1967년 설립) 프로젝트 제로Project Zero에 합류하게 된다. 프로젝트 제로는 인간의 예술성과 창조성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교육 대학원으로, 하워드는 이곳에서 자신의 관심분야인 인지발달심리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실상 그의 관심분야는 심리학 전반이었던 것 같다. 학부시절에 의학과 생물학을 좋아했던 그는, 인지발달심리학을 넘어 신경심리학 분야에도 손을 뻗치고 있었다. 하워드는 박사학위 수료 후, 신경의학자인 노만 게쉬빈드Norman Geschwind와 함께 일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신경심리학을 연구해보기로 마음먹는다. 이후 20년 동안 실어증 치료(aphasia clinic) 연구에 주력한 그는, 이 분야에서도 상당한 경력을 이어간다. 그의 가장 중요한 학술 논문도 이 분야에서 나온 것이며, 학계에서도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의 기반을 확립했다. (하워드는 현재 보스턴 대학의 신경병학(neurology) 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최종적인 관심분야는, 역시 인지발달심리학, 혹은 교육심리학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의 가장 주요한 과학 논문은 우뇌의 언어능력을 조사한 것으로, 신경심리학에 관한 것이다. 아마도 나는 신경과학학자(neuroscientist)로써 꽤 무리 없이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던 것 같다. 나는 심지어 신경생물학자(neurobiologist)라고도 불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결과적으로 교육학의 개혁과 그에 대한 사회적 정책에 따른 이슈로 나의 과학적 진로를 틀었다. 내 분야는 천상, 사회과학이었던 것이다.”

그의 최초 저작은 『Man and Men: Social Psychology as a Social Science』(1970) 이다. [공저(co-authored)이다] 부제가 ‘사회과학으로써의 사회심리학’ 인걸로 봐서, 학자의 길을 걷게 된 초기부터 그의 관심은 사회심리학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970년이면 하워드의 나이가 27세일 때이다) 또한 그의 획기적인 저작 『마음의 틀』(1983)이 소개되기 전까지는 총 6권의 책이 소개되었는데, (모두 개인저작, 공저는 없다) 이들의 주제도 역시, 모두 사회(심리학)과학적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가 비록 신경심리학에 얼마간의 관심을 쏟았다 할지라도, 그의 집중분야는 한결같이 사회심리학이었던 것이다. (『마음의 틀』 이후로는 말할 것도 없다)

그의 사회심리학적 저술들을 소개한다. 먼저 개인 저작이다.

『The Quest for Mind』 (1973) 진 피아제, 클라우드 레비-스트라우스, 그리고 구조주의 운동
『The Arts and Human Development』 (1973)
『The Shattered Mind』 (1973)
『Developmental Psychology』 (1979) 발달 심리학 개괄
『Artful Scribbles』 (1980) 아동의 그림(낙서)이 가진 함의
『Art, Mind & Brain』 (1982) 창조성에 대한 인지적(cognitive) 접근
『Frames of Mind』 (1983) 다중 지능 이론
『The Minds New Science』 (1985) 인지 혁명의 역사
『To Open Minds』 (1989) 현행 교육제도의 딜레마
『Art Education and Human Development』 (1990)
『The Unschooled Mind』 (1991) 학생들은 어떻게 사유해야 하며, 학교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Creating Minds』 (1993) 창조성에 대한 분해
『Multiple Intelligences』 (1993) 이론의 실행, 『마음의 틀』 증보판.
『Leading Minds』 (1995) 리더쉽에 대한 분해.
『Extraordinary Minds』 (1997) 예외적인 인물들에 대한 초상(portrait)과 그 예외성에 대한 연구.
『Intelligence Reframed』 (1999) 21세기를 위한 다중 지능 이론
『The Disciplined Mind』 (1999) 모든 학생들이 이해해야 하는 것들.
『Making Good』 (2005) 젊은 전문가들의 직업 윤리
『Development and Education of the Mind』 (2005) 하워드 가드너의 그간의 연구 개괄
『Multiple Intelligences』 (2006) 다중 지능 이론의 개정 및 확장, 『마음의 틀』 두 번째 증보판.
『Changing Minds』 (2006) 인성과 행동을 바꾸기 위한 7가지 해법
『Five Minds for the Future』 (2007) 리더가 되기 위한 5가지 마음가짐
『Responsibility at Work』 (2007) GoodWork 프로젝트의 성과물, 일과 개인의 윤리적 측면에 초점

다음은 공저이다.
『Man and Men』 (1970) 사회과학으로써의 사회심리학
『Intelligence』 (1996)
『Practical Intelligence for School』 (1996)
『Good Work』 (2001) 비범함과 직업윤리

그는 20권 이상의 책을 썼으며 700여 편의 논문을 썼다. 무엇보다도 ‘다중지능이론’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 교육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그의 저작들은 인간의 정신 분야 중에서도, 특별히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핵심 된 논의는 “어떻게 성취와 개발, 진흥을 이룰 것인가?”에 관한 것으로 ‘교육’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최근에는 변화, 회복, 치유 따위의 주제로 관심분야가 옮겨졌으며, 특히 윤리적인 측면에 집중하고 있다.
『』
저작 활동에서 눈 여겨 볼 점은 1999년부터 2005년까지 6년간의 공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는 그가 굳 워크Good Work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새로운 연구를 진행하던 때로, (1995년부터이다) 그의 관심분야가 ‘개발, 성취’ 문제에서 ‘마음, 윤리’ 문제로 이양되는 시점이다. 공백을 깨고 발표된 첫 번째 저작 역시, 젊은이들의 직업 윤리를 다룬 내용이었으며, (『Making Good』(2005)) 잇달아 소개되는 저작들도 개인의 마음가짐과 윤리적 가치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0년 전에 시작한 굳 워크 프로젝트는 그의 논리대로라면 (그는 ‘10년 법칙’을 주장한다) (간주곡3에서 다룬다) 성과물을 쏟아낼 때가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2006년부터는 활발한 저작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가장 최근에 발표된 『Responsibility at Work』(2007)에서는 어느 정도의 결과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총 9개 분야에서 1,200명 이상의 직업인들을 심층 인터뷰했으며, 이를 토대로 인간, 사회, 경제간의 일단의 함수를 밝혔다. “성취의 핵심은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에서 나온다” 라는 주제이며, 개인의 윤리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현재 그의 가장 핵심적인 연구는 굳 워크 프로젝트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의 동료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 윌리엄 데이몬William Damon, 진 나까무라Jeanne Nakamura이며, 굳 워크 프로젝트의 사실상 첫 번째 결과물 – 『Responsibility at Work』 이전에 『Good Work』(2001)와 『Making Good』(2005)이 있다 – 이라 할 수 있는 『Responsibility at Work』도 이들 네 사람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이들은 9개 분야 [보도(journalism), 유전(genetics), 극(theatre), 고등 교육(higher education), 박애(philanthropy), 법(law), 의료(medicine), 사업(business), 대학 이전 교육(pre-collegiate education)] 에서 뛰어난 공헌을 한 리더들을 연구한다. ‘마음가짐’, ‘윤리’, ‘직업’ 따위의 테마로 인간 정신활동을 탐구하려는 시도이다.

하워드는 현재, 대학원시절부터 몸담았던 프로젝트 제로Project Zero 연구소의 책임자로 있다. 프로젝트 제로는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개발해 왔으며, 실제로 청소년들에게 그러한 교육을 시범적으로 실시하는 보조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그가 현재까지 이루어 낸 연구성과들의 모체는 다름 아닌 프로젝트 제로 연구소이다. 그는 이곳에서 ‘다중지능이론’, ‘지능과 창조성’, ‘교육방법론’, ‘두뇌개발’ 따위의 결과물들을 내놓았으며, 지금도 끊임없이 인간개발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진행하는 중이다. 최근에는 굳 워크 프로젝트에서 얻은 통찰과 프로젝트 제로 연구소의 노하우를 접목해 더욱 의미 있는 교육 모델을 창안해 내고 있다.

그는 왜 사회과학자인가?
모든 학자들이 그렇겠지만, 그 역시 자신의 분야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사회과학보다는 수학, 물리학, 화학 따위의 자연과학이 더 어렵다는 통설에도 못마땅해 하는 듯 하다. 무엇보다도 그가 분명히 해두려는 점은 “어려운 자연과학을 피해 좀더 쉬운 사회과학분야를 택한 것이 아닌가?” 라는 의혹을 불식시키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옹호한다.

“나는 결코, 수학이나 물리학, 또는 화학 쪽에 끌려본 적이 없다. 더 어려운 과학이라고? 나는 실상 생물학을 좋아했다. 덕분에 나는 노벨상 수상자인 조지 왈드George Wald를 스승으로 둘 수 있게 되었다. (…) 나는 신경 심리학자이다. (…) 나는 20여 년 간 실어증(aphasia clinic) 치료를 위한 연구를 진행했다. (…) 나는 인지 신경과학학자로써 꽤 무리 없이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던 것 같다. (…) 그러나 나는 결과적으로 교육학의 개혁과 그에 대한 사회적 정책에 따른 이슈로 나의 과학적 진로를 틀었다. 내 분야는, 천상 사회과학이었던 것이다.”

그가 좀 흥분했기에, 독자는 오히려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의 변(argument)을 좀더 읽어보자.

“내가 책상머리에 붙은 권위적인 이론 과학자에 불과하다고? 내 대답은 ‘아니올시다’ 이다. 나의 재능은 혁신적인 실험이라기 보다는 여러 영역간의 통합에 있다. 나의 연구는 꽤나 쓸만한 것이었다. (사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My research was perfectly respectable) 물론 나보다 나은 연구자들도 있다. 이를테면 이런 사람들 앞에서 나는 작아진다. 나는 폴 에크만Paul Ekman이 ‘안면(face)의 감정 표현’을 10년 동안 연구해 온 것에 경이를 표한다. 나라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어려운 과학 영역에 빠져들기보다는 차라리 인간성이나 예술 따위의 것에 빠져드는 부류이다. (…) 만약 내게 새로이 경력을 결정할 기회가 온다 하더라도, 나는 아마 다시 심리학을 찾아갈 듯 하다. 대신 나는 현행의 추세에 따를 듯 한데, 최대한 허용범위가 넓은 분야로, 이를테면,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이나 ‘인간성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 따위를 내 분야로 삼게 될 것 같다. 인간에 대한 관심을 추구하는 나의 성향은 여전할 것이다.”

자신이 조사했던 7인의 천재들처럼, 그 역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넘친다. 그래서 말인데, 여기서 잠깐 피조사자들과 조사자간의 웅변(자기표현)이 어떻게 다른지, 혹은 얼마나 비슷한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그가 조사했던 천재들의 재담이다. 먼저 프로이트부터.

나는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내 스스로가 중요한 성취를 이루리라는 확신이 있다. 문제가 있다면,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 그런 성취를 이룰 것인가”의 여부이다. – 프로이트 (각색했음) (자신감이 좀 심하다)

나의 죽음은 배가 침몰하는 일과 같다. 거대한 배가 침몰하면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빠질 것이다. – 피카소 (당황스럽다)

『페트루슈카』의 성공은 나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봄의 제전』에 착수할 즈음에 내 귀를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 스트라빈스키 (무난하다)

나는 정상에 오를 것이다. 누구도, 아무것도 나를 막지 못한다. 그리고 나 홀로 그 길을 갈 것이다. – 그레이엄 (젊은 시절) (역시 당황스럽다)
나는 무용가가 되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나는 무용가로 선택된 것이다. – 그레이엄 (노년에)

나는 보통 이하의 능력밖에 갖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다. 날카로운 지성을 지닌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난 괘념치 않는다. 지성의 발달에는 한계가 있지만 마음의 성장에는 그런 한계가 없다. – 간디 (자신감 표현이라기 보다는 경구에 가깝다)

내가 어떻게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보통의 어른이라면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생각하느라 길을 멈추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런 문제는 아이 적에나 골몰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지능 발달이 더뎌서 어른이 된 뒤에나 겨우 시간과 공간에 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나는 보통 능력을 가진 아이보다 그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었다. – 아인슈타인 (지나친 겸손이다)

커다란 강 근처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교감할 수 없는 뭔가를 품고 살아간다. – T.S. 엘리엇 (시인답다)

사실 마지막에 소개한 T.S. 엘리엇에게는 “젊은 시절의 프로이트나 아인슈타인, 혹은 피카소가 지녔던 대단한 자신감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중년 이후에 탁월한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고전들을 재평가하고 당대에 활동하던 작가들에게 일침의 언담(言談)을 쏟아냈던 것으로 보아, 자기 분야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다른 천재들 못지 않게 충분했으리라 여겨진다. 하워드는 그(T.S. 엘리엇)에 대해, “작품이나 작가의 수준을 판단하고 자신만만한 경구 식 표현으로 결론을 내리는 데 특장(특별한 장점)이 있었다” 라고 쓰고 있다. 이런 일은 자신감이 결여된 사람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능력이다.

하워드의 주장대로, 천재들은 (하워드 자신도 포함해서) 자신감 넘치는 완벽주의자들임이 분명하다. 나름대로의 특징들이 있긴 하지만, 스스로의 분야에 대한 평가와 (분야와 관련한) 자기이해만큼은 누구 못지 않은 최고의 전문가수준에 올랐을 것이다. 역시 노년에 이르러 아인슈타인은 과학과 철학을 논했고, 스트라빈스키는 음악과 인생, 철학을 접목시켰으며, T.S. 엘리엇은 그 분야의 비평가로 활동했고, 그레이엄은 안무가로 일했다. 이밖에 프로이트, 피카소, 간디는 자기분야에서 죽을 때까지 헌신했다.

(미하이칙센트의 개념을 빌면) 이들은 해당분야의 개인성, 비개인성, 다개인성에 대해서 명확한 결론을 가지게 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자신의 분야(비개인성)가 무엇인지, 혹은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 동시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분야의 장(field)과 그것을 이루고 있는 성원들(다개인성)에 대해서도 일단의 결론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선전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이들은 평생 동안 정치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이들은 스스로(개인성)에 대한 결론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것을 할 줄 알고, 왜 그런지, 이 분야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결론을 말이다. 그리고 이런 견해들은 다른 누가 가진 그것보다 정확하고 때론 신랄한, 게다가 재기 발랄한 것임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같은 맥락이다. 하워드는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자신의 장점과 약점에 대해서. 자신이 할 줄 아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이 왜 그런가에 대해서. 그는 스스로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고 있는 걸까? 이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다. 그는 스스로의 ‘개인성’에 대해 뚜렷한 기술을 남겨두었다. 그의 글을 그대로 옮긴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결론적으로 나는 사회과학분야에서 연구자(researcher)가 되었고 통합자(synthesizer)가 되었다. 나의 경력을 이루어 온 근거(clues)가 무엇이었을까? 스스로 보건 데 다음 네 가지이다.”

[첫째, 나는 항상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이 있었다. 이것은 훈련 받은 것은 아니다. 아이일 때부터, 나는 책, 신문, 잡지, 심지어는 백과사전 읽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특별히 전기집에 빠져들었다. 요즈음은 더하다. 나는 누구보다도 많은 신문과 정기 간행물을 읽는다. (이건, 정말이지 권할만한 일이다) 나의 이런 성향은, (모든 수수께끼들을 탐조하려는 호기심) 광선 같은 집중을 요하는 분자생물학이나 물리학보다는 사회과학 분야에 더욱 적절할 것이다. 게다가 이런 성향은 “내가 왜 새로운 영역을 조사하는데 망설이지 않는지”를 설명해준다. 나는 아직 탐조(described)되지 않은 분야가 무척 궁금하다. 배우고 싶다. 어떤 분야든 분석하고, 통합하고, 공유하고 싶다.

둘째, 나의 관심은 자연 세계의 작동이나 물질계 따위의 비인간적인 영역이 아니다. 나의 관심은 온통 인간이나 사회문제에 대한 것이다. 왜 이런가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냥 내 가족의 대부분이 이렇다. 이에 대한 내 추측은 대략 이렇다. 내 부모님과 그 이전 세대는 크게 교육받은 부류라 할 수 없다. (물론 당신들의 자식들에게는 교육의 중요성을 열심히 피력하셨지만) 그래서인지 이분들의 과학적 소양은 보통의 수준이었다. 그래서였던 것 같다. 이분들은 예부터 인간적인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나도 그런 성향을 이어받은 것 같다.

셋째, 인간을 향한 나의 관심에는 이런 특징이 있다. 그들에 대해 약간의 거리를 두는 것이다. 나는 인간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더 좋다.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삶을 기술한다던가, (소설가가 된 양) 그들을 도우려 한다는 것은 (의사나 선생님이 된 양) 나와는 맞지 않는다. 스크랜턴에 거주하는, 경계에 걸친 두 그룹(이민자, 유태인)의 일원으로써, 나는 이러한 인간적 이슈(이민자, 유태인)에 더욱 주목하게 되었던 것 같다. (메이플라워호의 후손들과 크리스탈나흐트의 후손들 사이에는 어떤 경계가 존재했다)

(유년기에) 홀로코스트, 형의 죽음 따위의 고통스러운 사건으로부터 보호받았던 나로써는, 이후 인간적 경험이란 이름으로 고통이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을 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거리를 둠으로써) 그런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 발짝 물러서서 그들을 관찰하고 조사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사실 나는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사진으로, 영화로, 글로써 접하는 것에 대해서도 참을 수 없는 거부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관여하고 있던 프로젝트 때문에 (그때서야) 겨우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아주 최근에서야 ‘피아니스트’를 볼 수 있었는데, 당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락한 삶에서 불편한 사람으로의 이주, 고문, 그리고 멸망. 이런 냉혹한 운명을 관찰하는 것이 나로써는 너무나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넷째, 무언가 이해하려면, 내 경우는 주로 정의하고 특징짓고, 분류하는 따위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윌슨E.O. Wilson이 나에 대해 한번 지적한 것처럼, 나는 인간에 대한 접근을 동물학자(naturalist)들처럼 한다. 심지어 심리학과 사회 관계학 분야에서 내가 초기에 썼던 논문을 살펴보면, 내가 얼마나 분류에 열중(classifying bent)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나의 책은 대략 이런 패턴을 따르고 있다. 1)흥미로운 현상을 선정한다. 2)접근법을 개발한다. – 어떤 분류법을 소개하는 방식이다. 3)그리고는 그 분류법에 해당하는 각 항목의 원인이 되는 요소와 예를 찾아내어 논의를 발전시킨다. 나는 이러한 과정을 내 연구 분야에 두루 적용하고 있다. 인지과학 『The Mind’s new science』, 창조성 『Creating Minds』, 지도력 『Leading Minds』, 직업윤리 『Good Work』, 그리고 가장 최근 저작인 『Changing Minds』까지.

내 접근법은 또한, 설명적(explanatory)이라기 보다는 기술적, 묘사적(descriptive)이다. 독자는 섬세한 묘사를 접하면서, 결국 서서히 설명적인 모델로 빠져들게 된다. 나는 이따금 설명과 묘사간의 경계를 지난다. 훌륭한 묘사는 우리에게 설명적인 통찰을 준다. (설명이 가지는 특유의 부담 없이) 그리고 이것은 나를 여타 과학자들과 구별해준다. (물론 사회과학자도 포함이다) 과학자들의 글은 책이라기보다는 논설이나 학술논문의 성격을 띠기 십상인데 반해, 나의 글은 일반인들을 향해 가독성이 좋다. 내 글은 쉽게 읽힌다. 바로 내가 바라는 바이다. 내 연구가 대중에게 다가가기 쉬운 형태로 읽히는 것이 나의 의도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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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6.11 10:03:09 *.36.210.11
[ 훌륭한 묘사는 우리에게 설명적인 통찰을 준다.]

- 멋진 표현이네요.

[나의 글은 일반인들을 향해 가독성이 좋다. 내 글은 쉽게 읽힌다. 바로 내가 바라는 바이다. 내 연구가 대중에게 다가가기 쉬운 형태로 읽히는 것이 나의 의도이다.]

- 하워드 가드너가 개구장이님처럼 열심히 노력한 흔적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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