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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4일 12시 02분 등록

[394] 존재하게 되니까 여기에서 두려움과 욕망이 시작되는 겁니다. 두려움과 욕망을 버리고, 우리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 한 점으로 돌아가보세요. 이 한점이 바로 요체랍니다. 괴테는 신성(神性)은 산 자에게 유효하지 죽은 자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신성은 존재하기 시작하고 변화하는 데 유효하지, 존재가 확정되고 변화가 끝난 데서는 유효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기와 변화하기를 농하여 신에게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이고, 지성은 존재가 확정된 것, 변화가 끝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삶의 모습을 다듬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지적 탐색은 우리 내부의 발화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발화점은 존재의 모습이 확정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과는 무관하고, 공포도 없고 욕망도 없는 순수무구한 점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모르는 체 용감하게 전장으로 달려나가는 병사의 마음이 바로 이 한 점의 상태와 같지요.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생성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식물 생장의 신비이자 전쟁의 신비이기도 한 것이지요.

[396] 우리는 신화의 이미지를 메타포라고 부르지, 사실이라고 부르지는 않거든요. 신화 이미지는 우리의 내적 체험과 삶을 위한 메시지가 됩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면 신화 체계는 문득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이 되는 것이지요.

[397] 어떤 사고 체계를 지닌 사람에게든 사고 체계 자체가 무한한 삶의 의미일 수는 없어요. 어떤 사고 체계에 만족하고, 이만하면 정리가 된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장난꾸러기 신이 끼어들면 모든 것은 난장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자체가 바뀌면서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399] 미학적 체험에 대한 조이스의 정이는, 그 대상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질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예술 작품이 우리에게, 그 작품이 그린 대상을 소유하고 싶다는 느낌을 일게 할 경우, 조이스는 그것을 예술작품이고 하지 않고 포르노그라피라고 부르지요. 진정한 미학적 체험은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대상을 비평하지도, 거부하지도 않게 해야합니다.

[399] 예술작품이란 액자에 넣어 두게 하고, 처음에는 그저 바라보게 하고, 다음에는 그것이 작품임을 느끼게 하고, 다음에는 부분의 관계를 깨닫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작품이 지녀야 하는 필수적인 미학적 요인(관계의 조화 정연한 리듬)입니다. 예술가가 복선으로 깔아놓은 우연한 리듬에 감동을 받을 때 우리는 여기에서 빛을 경험합니다. 이때 우리는 미학에 사로잡힙니다.

[401] 조금 전에 달리기 경기와 관련된 절정 체험을 이야기하시면서 선생님께서는 그 경기가 아름다웠다고 하셨습니다. ‘아름다움’은 미학적인 용어입니다. 아름다움은 조화니까요.

[401] 예술작품에는 다른 측면의 정서가 있어요. 즉 아름다움의 측면이 아닌 장엄함의 측면입니다. 우리가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장엄함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 장엄한가 하면 이들은 정상적인 생명의 형상은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큰 힘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대무변의 우주는 장엄합니다.

[402] “그때를 회고하면 어떻습니까?”
“장엄했지요.”
* ‘아~ ’하고 감탄을 하게 하는 순간들의 모음...

[404] 모이어스 : 영원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까?
캠벨 :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 있지요. 아니, 없는 데가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이지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경험하지 못하면 천국에 가서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천국은 영원한 곳이 아니에요. 천국은 영속하는 곳일 뿐입니다.

[405]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이 세상의 슬픔에 동참하는 것과 관련된 중요한 개념이 있어요. 이 개념은 시간이 있는 데엔 슬픔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이 슬픔은 우리의 온 존재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참 모습입니다.

[406] 머리 위로 불칼을 높이 치켜 든 부처 이미지는 그런 의미엣 대단히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자, 이게 어디에 쓰이는 칼일까요? 이게 바로 분별의 칼입니다. 현세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410] 예술이 ‘비춰어내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신에 대한 예술가의 생각, 신에 대한 사람들의 체험……. 그러나 궁극적인 신비, 무량의 신비는 역시 인간의 체험 너머에 있어요.

[412] 인드라의 그물은 실과 보석으로 짜여진 그물입니다. 즉 실과 실이 만나는 곳마다 보석이 달려 있는데, 각 보석에는 다른 보석이 비칩니다. 이것은, 어떤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많은 사건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413] 화분의 길은 곧 중심으로 향하는 길이지요.
“내 앞도 아름답고, 내 뒤도 아름답고, 내 오른편도 아름다고, 내 왼편도 아름답고, 내 위도 아름답고, 내 아래도 아름답다. 나는 화분의 길에 들었노라.”

[413] 심리적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414] 무상(無常)한 것은 모두 은유적인 해석의 대상입니다.

[414] ‘옴’은 소리라는 것, 곧 우주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인 소리입니다.

[415]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밖에는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Ⅲ. 내가 저자라면

1)

신화학자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의 인터뷰를 정리하여 구성한 이 책을 보면서.... 문득 내가 빌 모이어스라면 조셉 캠벨과 어떤 대화를 나눌까? 기자의 입장이라면, 혹은 프로그램 진행자로서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를 초청했다면 어떤 대화를 나눌까라는 생각에 둘과의 인터뷰를 생각했다.
만일 내가 그들을 인터뷰하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물을까? 3가지만 각각 질문하고, 나에게도 그들에게 한 질문을 내게도 해서, 그들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를 섞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셉 캠벨을 위해 뽑은 질문이다. 그의 책을 읽다보니 요즘 이것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되었다. 이 질문은 조셉 캠벨에게 하는 질문이면서 동시에 나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Q1 : 선생님께서 제일 좋아하는 신화는?
Q2 :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Q3 : 인생의 중요한 계기, 변곡점에 대해서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이미 제 이야기를 책을 통해서 보셔서 아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렷을 적 아버지와 동생과 같이 가서 본 ‘웨스트와이드 쇼’에서 기병대장이 아닌 아메리카 인디언에 빠져서 한동안 제가 도서관에 들락거리며 그에 관한 읽고 물건을 수집하고 한 것은 아실 겁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그동안 이룬 목적이나 현재의 상태로 말한다면 그때의 그 쇼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감흥의 강도, 뭔가를 만들어내는 방아쇠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건 제게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죠.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로망스 The Romance of Leonardo da Vinci』를 꼽을 수 있겠군요. 다트머스 칼리지에서 생물학과 수학을 공부하던 중에 멜레코우스키가 쓴 이 책을 읽고는 이 책을 읽고는 인문학에 눈을 끄게 되었고, 콜럼비아 대학 영문과로 전입하게 되었죠.
대공항 시기에 우드스톡에서의 독서와 집필은 드러나기 보다는 내적으로 뭔가를 축적하는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변곡점이 되려면 에너지가 집약된 부분이 있어야죠. 사회적인 면에서 보자면 은퇴니 칩거니 하는 말을 하겠지만, 저는 우드스톡에서 태초의 세상과 원시, 세계의 곳곳의 역사와 문화를 탐방하는 여행을 그때 한 거죠.

빌 모이어스를 위한 질문이다.
Q1 : 스타워즈를 즐겨보셨다고 하셨는데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요?
(조지 루카스 감독, 아더왕 전설, ‘포스’....)
Q2 : 무슨 일을 계기로 신화와 조셉 캠벨에 빠지시게 되었나요?
Q3 : 조셉 캠벨과 있었던 인상적인 추억하나?

적어두고 하루를 묵히고 보니 이 질문들도 내게 해야할 질문같다.

나에게
Q1 : 당신이 좋아하는 신화는?
제가 좋아하는 영화에서는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겠어?’라는 명대사가 자주 등장하더군요.
그 영화를 볼 당시 전 중국, 홍콩에서 만들어진 영화에 푹 빠졌었습니다. ‘변검’이라는 영화인데, 꼬마가 죽음을 각오하고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오죠. 영화에서 보니 중국의 집은 지붕이 아주 높더라구요. 아이가 지붕에서 뛰어내릴 때, 자신을 키워준 노인의 결백을 믿어달라고 소리치고는 그랬지요. 너무나 놀랐답니다. 다행히 그 아이의 주장을 듣던 사람이 얼른 달려가서 아이를 받았지요. 이야기가 자꾸 고리를 물고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데요, 좀더 거슬러 올라가죠. 그 아이를 받아낸 사람은 경극의 배우였답니다. 그 지역에 공연을 온 사람이었죠. 자신의 어머니의 죄를 대신에 지옥불에 뛰어든 어느 여인의 역할을 맡았고요. 그 경극의 스토리는 그 여인의 효심에 여인과 어머니가 모두 극락으로 간다는 이야기이지요. 불경에 이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읽을 때 잠깐 울었답니다. 영화 볼때는 충격 그 자체였지요.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내어주는 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죠. 한마디로 감동이었답니다.
하여간 그 꼬맹이는 이 사건을 계기를 자신을 양자로 삼으려고 데려왔지만, 계집애라는 것을 알고 냉냉하게 대하던 할아버지가 이 녀석을 자신의 아들처럼 소중하게 여기지요. ‘변검’이라는 경극의 탈을 순식간에 바꾸는 기술도 전수받게 되구요.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겠어?’라는 명대사가 여기에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 대사가 이 스토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홍콩영화에서 오락물로 만들어진 것에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싸움에 휘말려들어서 어려운 싸움을 해야 할 때, 이 대사가 등장하더군요.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겠어?’ 약간은 코믹하게 말하긴 하지만요.

‘방세옥’에서는 악덕한 군주에 맞서서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결국은 죽음을 각오해야 했고, 서유기를 모티브로 ‘선리기연’이란 영화에서도 이 대사가 나옵니다. 온갖 괴물이 가득한 곳을 지나서 천축에 가야하는 데, 그때 삼장법사던가 손오공이던가도 ‘내가 아니면 누가 가겠어?’라고 하지요. 영화배우 주성치가 나오는 영화에서는 거의 매번 이 대사가 등장하지요. 불의에 저항해서 삶이라는 것을 지켜야하니까요. 그런데 그 지켜야 할 삶이라는 게 자신보다는 더 큰 그가 속한 세계의 삶이더라구요.
그러니까,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겠어?’라며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자신이 가진 것, 마지막까지 내어주어야 하는 결단의 순간을 맞는 겁니다.

기독교에서도 이런 대목이 나오죠. 신자가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에 이런 대목이 있지요.
'Jesus Chiris, .....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orm the dead; He acended into heaven, ....'
‘그는 죽었다.’라고 번역되는데, 그대로 번역하면 ‘그는 지옥으로 내려갔다’ 잖아요.
왜 그런 곳에 갑니까? 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면 가지 않는 것이지. 하여간 그러한 행위 때문에 세상이 밝아졌다고 봅니다. 자신의 주변에 삶을, 생명을 만들어냈어요. 세상이 더 살만한 세상이 된거죠.

이 들이 모두 같은 상황이고, 같은 주제를 말하고 있다고 하면 너무 억측주장일까요?
하여간 저는 이런 이들 때문에 지금 제가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Q2 : 당신에게 신은?
요근래에 조셉 캠벨 아저씨와 줄리아 카메론 아주머니에 영향을 많이 받았나봐요. ‘유비쿼터스’ 하나님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아티스트웨이라는 책에서 줄리아 카메론은 자신의 내면으로 들여다 보는 것은 신이 자신에게 축복한 창조성을 해방시키는 것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내면의 어린 아티스트의 창조성을 격려하면서 신과 더불어 존재하는 환희를 맞보라고 하지요. 그리고, 그것은 창조적 작업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조셉 캠벨 아저씨가 들려준 세계의 여러 신화들 또한 자연, 창조주, 우주, 에너지, 신, 자아, 생명, .... 에 대해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언어로는 다른 존재로 구분해 낼 수 있겠지만 본질은 하나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니까, 멀리서 지켜보고, 혹은 너무나 거대하고 때로는 내게 무심했던 신이, 지금은 내안에 있고, 또 동시에 내가 보고 있는 사물에 있고, 나를 감싸고 있는 공기에 있고, 식물에 있고, 동물에 있고, 내 적들에 있고, 내 사랑하는 이들 속에 있고, 햇볕 속에 있고, 시간 속에 있고, 찰나에 있더라구요. 여전히 무심하고, 또 동시에 다정하죠. 제가 그 속에 그냥 들어앉아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구요, 제가 풀어져서 녹아서 섞일 수 있는 존재가 신인 것 같습니다. 줄리아 카메론이 해준 이야기처럼 신은 신을 느끼고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을 축복하죠. 창조성이란 이름으로. 살아있는 것을 창조하는 신의 손길을 잠시 빌려와서 제게서 뭔가가 살아나게 하고 싶어요. 유비쿼터스 하나님. 모든 곳에 존재하는 신을 제대로 느끼고 싶습니다.
살아있음을 축복하고, 살아있는 생명 그 자체로 살고 싶습니다.

조셉 캠벨 아저씨와 줄리아 카메론 아주머니가 자신을 알고, 자유로워지라고 했던 것 같은데……. 요근래 전 너무 진지해져 버린 게 아닐까 합니다.

Q3 : 신화를 접하면서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는데?
아까도 잠시 언급한 ‘서유기’도 그렇고요, 불경의 속의 붓다의 이야기, 지옥에 간 어머니의 이야기, 성경 속의 이야기, 이집트나 인도의 신의 이야기들을 모두 짬뽕으로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굉장히 ‘유쾌한 짬뽕’이에요. 하하하.
우리들의 삶의 모든 이야기를 신화로 간주하게 되었어요. 마구잡이로 뒤섞여서 신화 아닌 것도 신화가 되고 그러는 거 같습니다.

신화를 보면서 왜 자꾸 인간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질까요? 짬뽕을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책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들

[78] 내 나라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종교 사회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 가 속하는 언어 집단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아시겠지요? 이렇게 태동한 신화는 이 집단, 저 집단, 그 집단의 철학이 아닌, 이 땅의 철학이 될 것입니다.

* 어느 강연에서 21세기에 추구해야 할 것으로 화해(和解)를 꼽았는데, 자연과 인간의 화해, 종교간의 화해를 꼽았다. 그리고 2개의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데, 그것은 생각이 잘나지 않는다.
내가 속하는 종교 사회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한 것의 경계를 더욱 확장시켜서 글로벌하게, 전지구적이고, 우주까지 넓혀간다면 우리가 품고 살 철학은 무엇이 될까? 캠벨과 모이어스의 대담에서 자주 등장하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삶과 정신이, 인도나 이집트의 생명 탄생과 대지의 풍요에 대한 신화들은 이런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91]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 삶의 요체 중의 하나가 바로 생명이 생명을 먹는,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먹는 행위 아닌가요?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먹는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 곧, 주로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이어지는 잔인한 의례의 기능인 것이지요. 말하자면 이 세속적인 세상은 원초적인 범죄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이 원초적인 범죄를 모방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이 모방의 의례에 참가함으로써 위에서 말한 마음과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 신화는 아주 비슷한 거지요.

* 인간은 먹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죽이고 먹기 때문에, 그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야하는 한계 때문에 신에게 다가가고 신과 하나될 수 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 버린 존재, 그리고, 그 한계가 자신을 더 이상 가두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될 때, 한 단계의 도약에 이르고... 신과 더불어, 그리고 자신과 더불어 고통을 함께하며 그것이 삶임을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된다.

먹는 것과 관계되는 신화를 연구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다.

[101]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에 갇혀 있어요.
* 『구름을 버너난 달처럼』에서 박흥용은 주인공 한견주의 이름을 가지고 유희를 할 때 한견자(犬子), 한개(韓犬), ‘한계(限界)’라는 것을 통해서 주인공이 가로막혀 있는 한계 너머를 보게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 ‘견자’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한계가 받아들이고 그 뒤 너머의 세상을 본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캠벨이 말하는 자신의 천복을 좇아가는 길에 만나는 변화, 수(獸)성에서 인간성으로 신과 만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IP *.72.1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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