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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4일 12시 05분 등록
The Power of Myth(신화의 힘)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대담 /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출판사


Ⅰ.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

1904년 3월 26일, 뉴욕의 아일랜드계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6살(1910년) 때 남동생 찰리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드 쇼」를 보러 갔다가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인디언을 몰아냈던 기병대장이 아닌, 아메리카 인디언에 매혹되었고, 그 후 인디언에 관한 책을 즐겨보고 수집품을 모으고,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가 이사한 지역, 뉴욕의 뉴 로셀에서 고립 도서관의 어린이 서가의 인디언 신화에 관한 책은 모두 다 읽었고, 11세에 성인 도서 서가 출입을 허락받아 공부를 계속해 나간다.
그 후에 그는 독서를 통하여 많은 지식과 다양한 문화,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데, 그의 다독( 多讀) 습관은 이때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1919~1921년 뉴 밀포드에 있는 캔터베리 예비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생물학이었다.

1921년 다트머스 칼리지에 입학하여 생물학과 수학을 공부하였다. 2학년 때, 그는 멜레코우스키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로망스 The Romance of Leonardo da Vinci』를 읽고 인문학에 눈을 뜨게 되고, 콜럼비아 대학 영문과로 전입한다.

[244] 모이어스 : 특별히 좋아하시는 영웅이 있는지요?
캠벨 : 어릴 때는 두 영웅이 있었어요. 하나는 더글러스 패어뱅크스, 또 하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지요. 나는 이 둘을 합친 것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오늘날에는 없습니다. 특정한 영웅을 좋아하지 않아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요즈음은 그를 화가, 과학자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셉 캠벨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통해서 인문학을 접했다는 게 놀랍다. 조셉 캠벨의 말대로 누군가 한 사람이 저서를 모두 읽고, 그리고 그가 읽었던 것들을 모조리 읽는다면 어떤 하나의 관점을 획득하게 된다는 데, 캠벨이 읽었다던『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로망스 The Romance of Leonardo da Vinci』는 그런 면에서 흥미로운 것이다.
더글러스 패어뱅크스는 영화배우로 서부영화에 많이 출현했다.

1924~1926년 육삼팀의 주자로 0.5마일 경주에서 콜럼비아 대학과 뉴욕시의 기록을 세운다. 그는 그 당시에 자신이 우승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을 때, 단지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이 대답은 그가 설명하는 신화의 이미지처럼 증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알고 있다, 느꼈다라는 말처럼 들린다. 또한 이때 재즈 밴드에서 색소폰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에는 존 스타인벡과 생물학자 에드 리켓츠와 교류하였다. 1934에는 켄터베리 스쿨에서 가르쳤으며, 사라 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다. 그곳에서 그는 그의 학생이었으며 마사 그레이엄 무용단 단원이었던 진 어드먼을 만나 1938년 결혼한다.

1942년과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와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1943년 침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침머의 유작들을 편집하는 작업을 많게 되었는데 12년 동안 작업하여 『인도의 예술과 문명』『왕과 시신』『인도철학』『인도 아시아의 예술』을 출판한다.
(이때의 작업이 신화을 연구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신화를 다룬 그의 다른 책에서 인도와 불교에 대한 수많은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 『신의 가면(THE MASKS OF GOD)』(전 4권)을 펴냈다.
프린스턴 대학 볼링겐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도 유명하며, 그 시리즈의 하나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출간하게 된다.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신화 이미지』 등의 저서를 통해 왕성한 지적 연구 활동을 펼치다 1987년 10월 3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세상을 떠났다.


Ⅱ. 가슴을 치는 글귀

개정판_옮긴이의 말 : 신화는 힘이 세다, 그로부터 어언 10년

[5] 한 문화 권역과 다른 문화 권역의 영웅, 혹은 구세주는, 두 문화권이 교섭한 경험이 없는 경우에도 서로 비슷비슷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바닥, 분석심리학자 카를 융이 ‘집단 무의식’이라고 부른 것, ‘원형’이라고 부른 것이 서로 비슷비슷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빌 모이어스의 서문 : 우주의 노래, 천구(天球)의 가락

[8]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는 것이지요.” - 조셉 캠벨

[11]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 조셉 캠벨

[12]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력이나 권능과 동일시 하지 않습니다. 해달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 ‘빛’과 동일시합니다. 그는 일단 여기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섬길 뜻이 있는 사람을 이런 식의 탈출을 하지 않습니다. 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신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沒我)가 아닌, 동아리는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 조셉 갬벨

[14]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 - 조셉 캠벨

[15]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한다.

[15] 살아 있음의 ‘경험’을 찾는 것

[15] 그(조셉 캠벨)에게 신화는,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춤을 추는 ‘우주의 노래’, ‘천구(天球)의 가락’이다. 우리는 그 노래와 가락의 후렴을 듣는다.

[16] ‘삶의 본질은 죽이는 것과 먹는 데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화가 다루어야 하는 위대한 신비가 바로 이것임’을 깨닫게 된다.

[18]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賢者)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言表)한다.”는, 힌두 경전에 나오는 통찰을 좋아한다.

[19] “천동설(天動說)적 세계관에서 지동설(地動說)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은 인류를 중심에서부터 벗어나게 한 듯하다. 중심이라는 것은 중요하다. 영적으로 볼 때 중심은 시점(視點)이 있는 곳이다. 높은 곳에 오르면 지평선이 보인다. 달에서면 지구가 떠오르는 광경이 온전히 보인다. 비록 텔레비전을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안방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 결과 지평선이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이 확장되었다. 고대 신화가 그 시대에 그렇게 했듯 이제 우리는 우리 시대를 섬겨, ‘우리 자신과 우주의 기적(무서운 것인 동시에 황홀하기도 한)’을 향한, 우리 지각(知覺)의 창을 깨끗이 닦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타락하게 하기는커녕 이 온 우주가 ‘우리의 내적 자연이 확대․투사 된 것’임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고대와 만나게 했다’. 말하자면 과학이 우리를 깨우쳐, 우리 자신이 실은 우리의 내적인 자연의 귀이자 눈이자 사고이자 그 말이라는 사실(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귀이자 하느님의 눈이자 하느님의 생각이자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했다는 것이다.

1. 신화와 현대 세계

[28]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은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29]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31]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이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33] 중국에서 ‘도(道)’를 나타내는 이미지를 보면,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이 서로 꼬리를 물고 상호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음양(陰陽)의 관계, 남성의 원리와 여성의 원리가 지닌 관계를 의미합니다. 결혼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람이 결혼을 하면 바로 이런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결혼한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재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 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35] 모든 아이는 거듭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아이는 지금의 세상에서 이성적으로 기능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어린 시절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나는군요. “내가 어렸을 적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46]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온몸에 두루 존재합니다. 이 의식은 의식을 하는 주제에게 살아있는 세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합니다.

[53] 이제 비행기도 우리의 상상력을 섬기는 존재가 되었어요. 가령 비행기가 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놓여나고자 하는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새가 상징하는 것도 마로 이것이지요. 인간은 이승의 속박에서 영혼을 해방시키고자 하는데, 뱀이 이승의 속박을 상징한다면 새는 이승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상징하지요. 이제부터는 비행기가 그 역할을 맡는 겁니다.

[54] “기계가 인간성을 마모시킬 것이냐, 아니면 기계가 인간을 섬길 것이냐?” ……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파우스트의 특징은, 기계가 정해준 과녁이 아닌 자신이 정한 과녁을 찾아내는 데 있지요.

[56] 각 종교는 정해진 명령 신호를 입력시켜야 접근이 가능한 일종의 소프트웨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59] 소년은 새에게 먹이를 주고자 아버지를 조르지요. 아버지는 새 따위에게는 먹이를 줄 수 없다면서 새를 죽여버리고요. 이 전설은 그 사내는 새를 죽이고, 새를 죽임으로써 새의 노래도 죽이고, 노래를 죽임으로써 제 자신을 죽인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로써 그 사내는 죽는 것이지요.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죽는 것이지요.
(중략) 인간은 자연만이 아니라 자기 본성도 파괴합니다. 노래를 죽이니까요.
.....
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 피그미족의 전설에 그것이 해설)

[61]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化神)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이기도 하지요.

[73]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해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74]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며 살 수 있게 됩니다.

[77] 모이어스: 모신(母神)으로서의 지구일 테지요. 이 이미지에서 새로운 신화가 태동할까요?
캠벨: 할 테지요. 오늘밤에는 무슨 꿈을 꾸게 될지 알 수 없듯이, 내일 어떤 신화가 태동할지 알 수 없어요. 신화와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옵니다.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입니다.

[78] 내 나라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종교 사회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 가 속하는 언어 집단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아시겠지요? 이렇게 태동한 신화는 이 집단, 저 집단, 그 집단의 철학이 아닌, 이 땅의 철학이 될 것입니다.

Eye on Pyramid on Dollar Bill

Joseph Campbell writes, "When you're down on the lower levels of the pyramid you will be on either one side or the other. But when you get to the top, the points all come together, and there the eye of God opens."

[85] 신화에는, 심연의 바다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이라는 순간이 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89]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Ran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91]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 삶의 요체 중의 하나가 바로 생명이 생명을 먹는,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먹는 행위 아닌가요?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먹는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 곧, 주로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이어지는 잔인한 의례의 기능인 것이지요. 말하자면 이 세속적인 세상은 원초적인 범죄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이 원초적인 범죄를 모방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이 모방의 의례에 참가함으로써 위에서 말한 마음과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 신화는 아주 비슷한 거지요.

[94] 《우파니샤드》에서 읽었지요.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내가 지었구나, 무든 까닭이나 내가 낳았음이라.’이로써 그는 그 지으신 이가 되었더라. 진실로 이 짓는 일에서 이것을 아는 자가 바로 창조주이니라.”

[96]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신비입니다.

[96] 생명력은 뱀으로 하여금 허물을 벗게 합니다. 흡사 달이 그 그늘을 벗듯이 말이지요. 달이 다시 차기 위해서는 그 그늘을 벗듯, 뱀은 거듭나기 위해서 그 허물을 벗지요. …… 때로 뱀은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동그라미 꼴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삶의 이미지이지요. 삶 역시 한 세대에서 이울면서 다음 세대로 넘겨져 거듭납니다. 뱀은 끊임없이 죽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영원한 에너지와 의식을 상징합니다. 끊임없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삶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문득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뱀 역시 삶에 대한 놀라움과 섬뜩함 같은 이미지를 지닙니다.
* 생명력, 경이, 놀라움과 섬뜩함, 혹은 장엄함 이런 것을 느끼는 순간 신비를 느끼는 순간을 사랑한다.

[96]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신비입니다.

[101] 하느님은 결국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초월해서 존재합니다. 하느님은 이름과 형상 너머에 있는 존재인 것이지요. 마이스터 헤크하르트는 궁극적인 떠남, 최고의 떠남은, 하느님을 위한 하느님으로부터 떠남, 모든 관념을 초월하는 경험을 위해 하느님이라는 관념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101]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에 갇혀 있어요.

[102] 속세의 근원은 영원입니다. 영원은 스스로 이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신에 관한 기본적인 신화적 관념이 바로 영원입니다. 신은 하나여도 속세에 내려와서 여럿 나뉘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지요. 인도에서는 내 안에 있는 신을 육체에 ‘사는 자’라고 한답이다. 이 신을 우리의 영원불멸하는 측면과 동일시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그 신과 동일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103] 그 자체로써만 존재하는 사실은 사상성(事象性)을 초월합니다. 생각될 수 있는 것을 초월합니다. 최상의 것은 생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표(言表)될 수 없습니다.

[105] 어느 날 ‘자기’라고 하는 신이 “내가 있다”고 했더랍니다. 그런데 이 ‘자기’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두려움을 느꼈더랍니다.
왜요?
영원이라는 것을 인식했으니까요. 그래서 이 ‘자기’는 “왜 내가 두려워하느냐? 존재하는 것은 나뿐인데?” 하고 생각했더랍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번에는 외로워지면서, 다른 하나가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일더라지요. 욕망을 느낀 것이지요. 그래서 이 ‘자기’가 부풀어, 둘로 나뉘어 각각 남성과 여성이 되어서는 이 세상을 낳았더랍니다.
......
‘자기’가 “내가 있다”고 진술한 직후에 공포를 느낀다는 신화가 그대로 되풀이 되고 있으니 놀라운 일 아닙니까? 일단 ‘나’만으로 외로움을 느끼면, ‘자기’는 다른 것과 함께 있다는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되고, 그런 욕망을 느끼게 되면 이 ‘자기’는 둘로 나뉩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세상이 비롯됨이요, 한 쌍의 대극이 비롯됩니다.

[105]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태아가 최초로 체험하는 것이 랍니다.

[106] 하느님은 금제를 세웁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하느님은, 아담이라는 친구가 필경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을 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굴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109]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신은, 자기가 바로 창조 그 자체임을 알겠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곧 창조 그 자체이고, 개인이 그 피조물이라는 것을 안다며, 하느님이 남자든 여자든 바로 그 개인 안에 거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도면 한 신에게서 두 측면이 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115] “저를 축복해주세요, 신부님. 제가 워낙 귀한 존재라서 그런지 지난 한 주일 동안 제가 한 것은 좋은 일뿐입니다.”

[115] “하느님 대 인간, 인간 대 하느님, 인간 대 자연, 자연 대 인간, 자연 대 하느님, 하느님 대 자연 ....., 무슨 종교가 이래요?

[120]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을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123] 은유는 신의 가면입니다. 이 신의 가면을 통해 사람들은 영원을 경험하지요.

[126] 초월자는 사유의 모든 카테고리를 초월한다.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이것은 카테고리입니다.

[128] “신이시여, 우리는 모두 영생불사하는 존재입니다. 영샹불사하니, 욕망에도 끝이 없습니다. 신께서 이러시면 저는 영원히 이 궁전이나 짓고 있어야 합니다.”

[133] 어느 한쪽이 선한 것은 그 반대쪽에서는 악한 것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참혹한 것임을 알면 물러서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 참혹함이 바로 신비,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의 바탕이라는 것까지 알아야 합니다.

[135] 영웅의 행동반경은 초월적인 것이 아닌, 초월의 장이 아니라 지금 여기, 선악이 있는 시간의 장, 대극이 있는 곳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초월의 장을 나서면 대극의 장으로 들게 마련입니다. 인류는 선악뿐 아니라, 남성과 여성, 정당함과 부당함, 이것과 저것, 빛과 어둠까지 알게 하는 지혜의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이 시간의 장에 있는 모든 것은 이원적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그러하고,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상상력 속에 존재하는 궁극적인 한 쌍의 대극은 남성과 여성입니다. 이 경우 남성은 공격적이고, 여성은 수용적이며, 남성은 전사(戰士)이고 여성은 몽상가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의 영역과 전쟁의 영역이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레오스(사랑)과 타나토스(죽음)라고 하지요.
헤라클레이토스는, 신에게는 모든 것이 선하고 옳고 의로우나, 인간에게는 어떤 것은 옳아보이고 어떤 것은 옳아 보이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할 때의 이 인간은 시간의 장, 결정의 장에 놓입니다. 삶의 여러 어려움 중 하나는 이 양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중심을 알고 있다. 나는 선과 악이라는 것은 이 속세의 착각일 뿐이요,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 차이도 없는 것임을 안다”, 이러한 인식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136] “나무 위에 새 두 마리가 앉아 있다. 아주 약삭빠른 녀석들이다. 그런데 함 마리는 그 나무의 과실을 먹는데, 다른 한 마리는 먹지 않고 관찰만 한다.”
자, 나무의 과실을 먹는 새는 그 과실을 죽이고 있지요. 그러나 관찰만 하는 새는 필경 굶어죽고 말 것입니다. 결국, 생명은 생명을 먹고서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137] “시바 신이시여, 이 몸을 신의 자비 앞에 던지나이다.”
그런데 이 시바 신에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누가 자신의 자비 앞으로 몸을 던지면 자비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바 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냐, 내가 너에게 자비를 내린다. 그러니 깡마른 괴물(아귀(餓鬼))이여, 그 괴물을 먹지 말아라.”
“그럼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나는 배고파 죽겠어요. 신이 나를 이렇게 허기지게 했으니 이 괴물을 먹겠소.”
이 말에 시바 신은 이렇게 명합니다.
“그렇게 배가 고프거든 너 자신을 먹어라.”
그래서 이 아귀는 발부터 시작해서 자신을 차례로 먹어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이게 바로, 남의 생명을 먹고 사는 생명의 이미지입니다. 결국 아귀가 있던 자리에는 얼굴 하나만 덩그렇게 남게 되지요. 시바 신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하지요.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이토록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을 터이다. 내 너를 ‘키르티무카’라고 이름하리라.”
‘키르티무카’는 ‘영광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시바 신전이나 불교 사원에 가보면 시바나 부처의 대좌(臺座)에서 이 가면 같은 것, 즉 영광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시바 신은 이 영광의 얼굴을 향하여, “누구든 너를 예배하지 않는 자는 나에게 올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138] “힌두의 사고 체계에 따르면 이 우주의 만물은 모두 신의 현현(신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폭력에도, 우둔함에도, 비천함에도, 사려분별이 없음에도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그랬더니 그분이 이럽디다.
“선생을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아니라고 하면 안 되겠지요.”

3. 태초의 이야기꾼들

[141] 고대의 신화는 몸과 마음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헛길로 들어서서 하느작거릴 수도 있고, 몸이 바라지 않는 것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142] 어린 시절에는 이 세상의 질서와, 복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시기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서 살지요. 그러나 성숙하면 이 모든 것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가 책임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지요. 이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면 신경증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내것처럼 사는 시절이 지나면, 이윽고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가 옵니다.

[142] 우리가 삶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들어갈 때는 입는 것도 달라지고 이름도 달라집니다.

[145] 사람은 죽임을 통하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이러한 행위와 관계있는 죄의식이 있지요. 매장에도, 친구는 죽었지만 다른 곳에서 계속해서 살 것이라는 의식이 반영됩니다. 이런 문맥에서 보면 내가 죽인 짐승도 죽은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살이 있는 것으로 됩니다. 태고의 사냥꾼들에게는 동물신이 있었어요. (중략) 사냥의 신화를 보면, 동물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계약을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동물은 사냥꾼에게 기꺼이 목숨을 내어줍니다. 그냥 내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삶이 육신의 한계를 초월하면, 회생의례(回生儀禮)를 통해 흙으로 돌아오든지 아니면 어머니의 뱃속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내어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 회생 의례는 그 부족이 주식(主食)으로 하는 동물에 대해서만 치러집니다.

[149] 짐승은 아버지와 같습니다. 프로이트 학파는 남자가 최초로 적을 느끼는 것은 아버지에게서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남자의 경우, 적은 잠재의식적으로, 심리적으로 아버지 이미지와 관계가 있다는 겁니다.

[152-155] *들소와 처녀의 이야기
“우리 일족을 죽이거든 그 들소춤을 주고 노래를 불러다오. 그러면 우리가 다시 살아나게 될 테니.”
바로 그 의례를 통해서 삶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이 새로운 차원에서 생명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그 들어간 곳을 통해 나올수도 있게 됩니다.

[156]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어떤 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될 때, 언론이 노출시키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적국의 국민을 순식간에 ‘그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랍니다.

[164] 여자라는 게 뮙니까? 생명을 나르는 수레 아닙니까? 생명이 여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면 여자는 이 생명을 낳고 먹여서 기릅니다. 여자의 힘은 대지의 여신이 지닌 힘과 동일시됩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해야 하는 일은 이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소년에게는 이런 일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외부의 힘이 소년을 성인으로 입문시키고, 개인보다 우대한 무엇인가를 섬기게 하는 것이지요.
* 캠벨은 뒤에서 신은 에너지를 나르는 수레라는 말을 썼고, 또 생명이 있는 것들은 에너지가 있는 것이고, 죽은 것들은 에너지가 없다고 했다. 조모신 부분이었던 것 같은데, 생명, 신, 우주, 에너지, 어머니, 여자 이 모든 것들은 이름만이 다를 뿐 같은 개념의 같은 존재로 파악되어야 한다.

[166] 의례의 기능이 우리를 늘 있었던 자리로 감싸들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밖으로 내던지는 데 있다는 것이지요.

[170] “사람들이 노래를 부를 때 나는 춤을 춘다. 나는 땅으로 들어간다. 나는 사람들이 물을 마시는 곳과 비슷하게 생긴 곳에 이른다. 나는 아주 먼길을, 멀고 먼 길을 여행한다. ...(중략).... 땅 속에서 올라오는 순간 나는 이미 오르기 시작한다. 실을 따라, 실을 따라, 남쪽으로 이어지는 실을 따라 오른다. 한 실을 다 따라 오르면, 이 실을 버리고 다른 실을 따라 오른다. 한 실을 다 따라 오르면, 이 실을 다 따라 오르면 또 다른 실을 따라 오른다. ...(중략) .... 이윽고 신의 집에 이르면 나는 아주 작아진다.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아주 작아져 있는 것이다. 나는 아주 작아진 채로 신의 집으로 들어간다. 거기에서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러다가 모두가 기다리는 곳으로 온다. 얼굴을 가리고 온다. 얼굴을 가리고 오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고, 오고, 또 오고 해서 마침내 나는 내 몸으로 다시 들어간다.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나를 기다린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무서워한다. 나는 땅으로 들어가고, 또 들어갔다가, 이번에는 돌아와 내 몸의 가죽 안으로 들어간다....(중략) .... 들어가서는 ‘헤에에에에’하고 소리친다. 이것은 몸속으로 다 들어갔다는 소리다. 그리고는 노래를 부른다. ‘느툼’ 신들께서는 우리 주위에 계시다.”
여기에서 ‘느툼’이라는 것은 초자연적인 권능을 말합니다.

[173] “귀신을 몰아낸답시고 그대 안에 있는 가장 귀한 존재를 몰아내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런 말을 했던 사람이 니체였지요. 아마? 소년에게 달라붙어 잇던 신(‘권능’)은 소년을 떠나기는커녕 아주 자리를 잡아버립니다. 그러니까 둘의 관계는 끝난 것이 아니고 새롭게 h된 것입니다.

[174] 세계의 중심점은 움직임과 정적(靜寂)이 함께하는 점입니다. 움직임은 시간이지만 정적은 영원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영원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일시적 체험에서 그 일시적 체험이 지닌 영원한 측면을 체험하는 것, 이거야 말로 신화 체험인 것입니다.
* 무용가인 아내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움직임(시간)과 멈춤(停, 영원)을 언급하여 우주를 신의 임재를 자신이 신과 하나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설명하려 한다.

4. 희생과 천복(天福)

[177]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 어느날 내게 꿈을 좇는 일은 자신안에 샘을 하나 가지지 않으면 꿈을 좇아 갈 때, 쉬 지치고 목이 말아 지치고 자신과 타인을 같이 힘들게 할거라는 이야기를 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꿈을 좇는 일은 생명샘을 갖는 것 그 자체가 아닌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천복을 좇는 것 그것은 이미 마르지 않는 샘을 갖는 것이다. ‘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에서 금빛 찬란한 물 속에서 선 아름다운 생명나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그 형태를 잃지 않는 생명나무를 만나는 황홀한 순간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177] 사는 곳을 성화(聖化)시키는 것, 이것은 신화의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원하는 삶에 자신을 맞추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자신이 사는 세상을 변화시킨다. 아주 오래도록 그리고 천천히 변화시킨다.

[178] 이 선은 반드시 끊어져 있지요. 새로운 정신은 바로 이 끊어진 곳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옵니다. 보리수 아래 앉아 있을 때 석가는 동쪽을 향하여 앉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동쪽은 해가 뜨는 쪽 아닙니까?

[179]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 필요불가결한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朝刊)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포란실(抱卵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 줄리아 카메론은 여백이란 시간을 모닝페이지를 쓰며 영적인 것을 체험한다. 만물을 창조한 신처럼, 자신의 창조성이라 것을 일깨워주는 자신(아티스트)를 깨웠고, 신과 더불어 세상의 아름다움을 누리고 창조작업을 했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의 저자도 침묵 속에서 몇시간이고 글을 쓰는 체험 경험을 통해서 여백의 시간에 무언인가를 창조해내는 것을 경험했다. 새벽에 글쓰는 이도 여백, 포란실에서 무엇인가를 키워내지 않는가.

[185] 중세 도시에 가보면 성당이 가장 높은 건물 행세를 합니다. 18세기에 조성된 도시에서는 정치가 벌어지던 장소가 가장 높은 건물 행세를 합니다. 현대 도시의 가장 높은 건물은 누가 차지하고 있지요? 당연히 경제 생활의 중심인 업무용 건물이지요.
* 사람들은 높은 건물로 그 시대의 지배적인 가치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도, 어느 것이 가장 중시되고있는지를 표출하고 있다.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도시의 건물들로 나타난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면서 이점을 지적했다.

[189] 모이어스: 오늘날 자연의 본성인 신성(神性)은 누가 해석합니까? 누가 우리의 샤먼입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해주는 이는 누구입니까?
캠벨 : 그것은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189] 모이어스 :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추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캠벨 :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 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192] 지리학은 우리의 문호와 종교 관념의 모양을 빚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막의 신은 초원의 신이 아닙니다.

[195] 나무의 경우, 사지를 자르면 다른 것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주 특별한 도마뱀 종류가 아닌 한, 동물의 사지는 한번 잘리면 다시 자라나오지 않지요.
따라서 숲과 농경 문화에는 종국적인 것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새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의 죽음이 있어요. 여기에서는, 개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개체가 아니라 식물아 한 가지에 불과한 것이지요. 예수는 이 이미지를 이용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 하고 말합니다. 이 포도나무 이미지는 도물 이미지와는 전혀 다릅니다. 농경 문화는 먹이가 될 식물을 끊임없이 추겨세웁니다.

[200] 천녀 모티프는 주로 수렵 문화권에 속합니다. 농경 문화권에서는 천녀 대신 땅에서 솟아나온 여자가 등장하지요. 쌍둥이는 상반되는 두 원리를 의미합니다. .....(중략) .... 이 ‘싹’, 혹은 ‘부싯돌’은 서로 상반되는 두 문화 전통을 상징합니다. 부싯돌은 칼을 만드는 데 쓰입니다. 칼은 동물을 죽일 때 쓰지요. 따라서 쌍둥이 중 ‘부싯돌’은 수렵 문화 전통을 상징하고, ‘싹’은 말할 것도 없이 농경 문화 전통을 상징합니다.

[201] 소년의 꿈속에 나타나는 잘생긴 젊은이는, 죽어서 소년이 속한 민족에게 옥수수를 주지요? 옥수수는 그의 주검이 자라나니까요.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했던 거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한 태어남, 이 두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군요.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203] 그리스도 자시은 그 나무의 열매가 되는 셈이지요. 그리스도는 영원한 삶의 열매이니다. 이 나무는 에덴 동산에 있던 두 번째 금단의 나무입니다. 인간이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첫 번째 나무의 과실을 따먹자, 하느님은 이 인간을 낙원에서 쫓아내 버리지요. 에덴 종산은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곳입니다. 남녀와 선악과 신인(神人)이라는 이원적인 구별이 없는 곳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여기에서 이원성의 과실을 먹고는 쫓겨납니다. 이렇게 쫓겨난 인간을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게 하는 남는 영생의 나뭅니다. 이 영생의 나무 아래 이르러야 우리는 ‘나’와 ‘아버지’가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204] 그런데 문 앞에는 ‘그룹’이 있는데, 이게 대체 뭡니까? 절에 가보면 두 문지기 중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고,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어요. 이것은 두 대극, 즉 공포와 욕망을 상징합니다. 에덴 동산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이 두 문지기가 우리를 위협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우리 삶을 두려워하면 동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이 더 크고 영원한 전체성의 한 기능임을 깨닫는다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을 섬긴다면, 이런 문지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205] 모이어스: 죽음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죽음이므로, 이 양자를 조화시켜야 하는 것이겠군요?
캠벨: 죽음과 삶의 균형을 잡아 주어야 하는 거지요. 이 양자는 한 사상(事相), 즉 ‘존재’의 두 측면이니까요.

[206] 마야 인디언은 의례의 마당에서 농구 경기 비슷한 시합을 합니다. 승패가 결정되겠지요? 그러면 이 긴 팀의 주장은 진 팀의 주장에 의해 그 자리에서 제물로 희생됩니다. 목을 잘리는 거지요. 삶에서 승리한 자만이 제물이 될 수 있다...... 이게 바로 희생과 관련된 옛날의 관념입니다. (중략) 마야 인디언의 이 의례에서 시합의 승자에게 내려지는 상은 거룩하게 희생될 수 있는 자격입니다.

[207] 최후의 만찬이 끝나고 뜰로 나가기 진적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함께 춤을 추자”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손에 손을 잡고 도는 춤판이 시작됩니다. 제자들이 돌고 있을 동안 예수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복 받으소서. 아버지시여!”
여기에 대해 제자들이 춤을 추면서 화답합니다.
“아멘.”
“나는 다시 나고 또 낳으리로다!”
“아멘.”
“나는 먹고 또 먹히리로다!”
“아멘.”
“춤추는 자들아, 나를 잘 보아라! 너희는 인간으로, 이제 내가 당할 고통을 고난으로 당할 것임이라!”
“아멘.”
“나는 달아나되 또한 머물리로다!”
“아멘.”
“나는 합하여지고 또 합하여지리로다!”
“아멘.”
“나는 너희가 두드리는 문이자 …… 너희가 나그네 되어 지나다닐 길이로다!”

[209] 해골 사냥은 신성한 행위, 신성한 살인입니다. 젊은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려면 반드시 제 몫의 살인을 해야 합니다. 죽음 없이 새 생명이 태아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다음 세대가 오게 하려면 앞 세대는 모두 죽어야 한다 ……. 이것이 이 의례의 의미입니다. 아이를 끼치거나 낳으면 곧 죽음을 맞아야 합니다. 아이는 새 생명입니다. 앞 세대는 이 새 생명의 보호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210] 자, 그런데 생판 모르는 젊은이 때문에 죽을 뻔했던 그 경찰관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아십니까? 그의 인생에서 만사가 그만 심드렁해져버린 겁니다. 가족에 대한 의무, 경찰관으로서의 책임, 자기 인생에 대한 의무 ……. 이 모든 것이 그만 무의미하게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그전에 품고 있던 희망이나 소원도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어요. 말하자면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 같았던 겁니다.
뒤에 한 신문기자가 물었지요.
“그 젊은이를 놓아버리지 그랬어요? 당신이 죽을 수도 있었는데.”
신문 보도된 바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 것으로 되어 있어요.
“놓을 수가 없었어요. 만일 그 친구를 놓아버렸다면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을 수도 없을 겁니다.”
쇼펜아우어의 말은 그런 심리적 위기가 형이상학적 깨달음의 돌파구임을 보여줍니다. 이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형이상학적 진실일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것이야 말로 우리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211]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 살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넣으라는 뜻입니다.

[211] 《신곡》끄트머리에서 단테는, 하나님의 사랑은 지옥의 바닥에 이르도록 온 우주에 사무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217] 종교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됩니다.

[217]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
* 단테의 《신곡》의 한 부분

[217-218] * 신이 가진 이중의 의미 Lucifer, Mechael : 쌍둥이 천사
Lucifer : 자만, 욕망, 공포의 상징
Mechael : 정의, 공정, 자비의 상징

[218] 중세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즉 ‘열정(passion)’이 ‘연민(compassion)’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

[218] 이 세상의 물질에 대한 인간의 추잡한 관심을, 고통을 나누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인간만이 지닌 가치의 세계 쪽으로 쏠리게 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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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우리가 순종하지 않아야 하느님의 자비가 소용에 닿게 됩니다. 순종하면 하느님에게 찬스가 생기지 않는 거예요. 루터는,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거든 “용감하게 죄를 지어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큰 죄인은 연민하는 하느님을 크게 깨달은 자인 셈입니다. 이것은 도덕의 역설과ㅏ 삶의 가치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아주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221] “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 싱클레어 루이스의 《바비트》의 한 구절

[223] 행운의 바퀴...... 이 바퀴에는 굴대도 있고 바퀴살도 있고, 테도 있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에,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223] 모이어스 : 천복이 있는 영생의 샘을 찾는 이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시겠습니까?
캠벨 :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224] 자기 천복과 관계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지 낯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225] “...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 그것 때문에 웃고, 그것 때문에 울어도 좋은 것... 그것을 하게.

[226] 산크리스트어에는, 이 세상의 가장자리, 즉 초우러의 바다로 건너뚜리 숭 lt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 세 가지 있어요. 즉 ‘사트(Sat)’ ‘취트(Chit)’ ‘아난다(Ananda)’가 그것입니다. ‘사트’라는 말은 ‘존재’, ‘취트’라는 말은 ‘의식’, ‘아난다’라는 말은 ‘천복’, 혹은 ‘황홀’을 뜻합니다. 이 말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지요.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닌지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처방에 영험이 있었던 듯 하군요.

[227]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 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내가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5. 영웅의 모험

[229] 우리는 이제 혼자 모험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다. 시대의 영웅들이 우리를 앞서 이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궁은 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는 이제 영웅이 길에다 깔아놓은 실을 붙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게 된다. 무서운 괴물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는 신을 만나게 되고, 남을 죽여야 하는 곳에서는 저 자신을 죽이게 됨, 외계로 나가야 하는 곳에서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외로워야 할 곳에서는 온 세상과 함께 하게 될 것임을 ........
- 조셉 캠벨

[229-230]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중략) 영웅은 여느 인간의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험에 뛰어들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상실한 것, 혹은 생명의 불사약 같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영웅의 모험에는, 출발과 귀한 사이에 일종이 주기(週期)가 있지요.

[230] 심리적인 미성숙의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삼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 229-230 에 나오는 영웅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20년도 더 오래전에 보았던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율리시즈]의 여행이 떠올랐고, 서유기에서의 손오공의 모험이, 그리고 ‘여름’을 찾아 길을 나선 아메리카 인디언의 이야기인 별자리 ‘물고기자리’에 얽힌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어느 부분에서인가는 비슷한 스토리이며, 결말도 비슷하다.
율리시즈는 신이 준 시련을 겪으며, 집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데 그가 우주의 끝이라고 해서 다다른 곳에서 신을 만난다. 그런데, 그 신의 모습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다. 그 장면은 너무나도 큰 충격이어서 그 장면을 기억한다. 율리시즈가 꼭 만나야 하고, 그가 극복해야 할 존재는 자신이었던 것이다. 서유기 속의 손오공은 온갖 유혹을 겪고, 악귀들 마귀들을 물리치고 천축국에 다다른다. 그리고는 천축에서 불경을 얻는다. 그러나 그 불경에는 아무것도 씌여있지 않다. 그럼 우리의 여행은 무엇이냐고 묻는 손오공일행에게 뒤를 보라고 한다. 이미 그들이 지나온 세상은 악귀들이 득실대는 험한 세상이 아니라 살만한 조화로운 세상이 되어 있다.
별자리 ‘물고기자리’는 이와는 다른 결말이다. 여름을 얻으러 떠난 이들은 죽어서 하늘에 남게 된다. 그들의 비늘이 꿰어져 하늘나라에 잡혀서 별로 남았는데, 물고기 자리는 여름이 시작을 짐작하게 하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에 있는 별자리이다. 여름을 구하러 가라고 일러준 이는 그 부족의 사람이 아닌, 외부에서 나타난 비밀을 아는 존재이다. 여름이 없는 곳에 여름을 알려준 이 이므로. 아마도 이 물고기자리 이야기는 영웅의 전설보다는 모신, 땅, 자연의 어떤 존재를 말하는 다른 장에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233] “좁은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중략) 유태전성에 나오는 영웅은 무서운 시험을 겪어야 보상을 받지요.

[234]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보는 것…… .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 변화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인가 보다.

[234] 지구촌 전부가 우리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할 이 마당에, 특정 국가, 혹은 특정 국민의 영웅이 우리에게 필요할까요? 나폴레옹은, 20세기 히틀러의 19세기판입니다. 나폴레옹의 유럽 침공 역시 무서운 사건이었지요.
* 4기 연구원은 지금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고 있다. 이순신을 읽을 때, 이순신과 맞선 일본의 장수는 어떤 인물인가를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234] 모이어스 : 그럼 지역 영웅은 우주적인 시련은 이기지 못하는 것이군요?
캠벨 : 그렇지요. 지역 영웅이라고 할 수도 있고 지역 신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지역 신은 자신에게 정복당한 백성들에게는 원수가 될 테지요. 영웅이냐 괴물이냐는 우리 의식의 초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지요.
모이어스 :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행적이 넓게, 혹은 신화적으로 살펴서 ‘영웅적인 행위’라고 할 때는 조심해야겠군요?
캠벨 : 글쎄요. 자기 백성을 위해 목숨을 버렸을 때는 영웅적인 행위라고 해야겠지요.

[235] 도덕적인 목표는, 자기가 속한 민족을 구하는 것, 특정 개인을 구하는 것, 어떤 관념을 받드는 것이 될 수 있지요. 영웅은 무엇인가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합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이지요.
* 영웅에 관련된 부분을 이야기하는 이번 장, ‘5.영웅의 모험장’에는 밑줄이 너무 많다.
다른 부분도 밑줄이 많지만, 이 부분은 특히 많다.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 많은 탓이다. 작년에 조셉 캠벨의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읽을 때는 영웅에 대한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이번 장이 그 책의 영웅들의 모험을 요약해주는 듯하다. 모이어스와 캠벨의 대담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읽었을 때 알지 못하던 것을 간결하게 요약하는 면이 있다.

[239]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242] “위험한 길은 이러하니, 면도날과 같다.”
* 힌두 경전에서

[244] 위험을 극복하지 못하면 추락합니다. ‘위험한 길’은 이런 것입니다. 이런 위험한 길을 갈 때는 자기 욕망과 열정과 감정을 따르되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위험이 우리를 다리 밑으로 밀어버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244] 모이어스 : 특별히 좋아하시는 영웅이 있는지요?
캠벨 : 어릴 때는 두 영웅이 있었어요. 하나는 더글러스 패어뱅크스, 또 하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지요. 나는 이 둘을 합친 것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오늘날에는 없습니다. 특정한 영웅을 좋아하지 않아요.

[247] 광명을 내적으로 체험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그것을 읽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거나, 읽을 능력이 없었던 겁니다.

[248] 승리의 순간에 맞게되는 이 완전성의 정점에 가해지는 악센트, 대단히 그리스적이지 않습니까?

[252] 소년은 먼저 어머니에게서 떨어져야 하고, 삶의 에너지 전부를 자기에게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른이 됩니다. “아버지를 찾으러 가라”는 신화가 전하고 있는 메시지가 바로 이겁니다.

[260] 어떤 사람이 일정한 성취에 이르러 사회에 나타나면, 사회는 당시에 알려져 있던 모든 종류의 마술을 그에게 바쳐버리지요. 그래서 이런 인물이 정도에 지나치게 신격화되어버리는 겁니다.
* 엘리야의 공중부양에 관한 것을 언급한 부분의 설명

[261] 우리는 자아가,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쇼를 연출하는 줄(주도권을 행사하는 줄) 알지만, 아니에요. 무엇이 쇼를 연출하는가 하는 것은, 가로 선 아래에서, 즉 무의식에서 무엇이 솟아오르냐에 달려 있어요. 한 인간이 “쇼를 연출하는 게 나 자신이 아니구나”, 이런 걸 깨닫는 시기가 바로 사춘기예요. 전혀 새로운 요구 체제가 우리의 의식 아래에서 자기 존재를 알리면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나 사춘기 청소년에게는 여기에 아무 지식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장악할 수 없어요.

[263] 모이어스 : ‘자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자기’와 우리가 잘 모르는 또 하나의 ‘자기’, 즉 진짜 ‘자기’가 잇을 수 있는데요. 신화는 어떻게 하면 이 진짜 ‘자기’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까?
캠벨 :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중략)
또 하나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 나는 주로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 만 같은 사람들의 책을 통해서 배웠어요. 이 두 사람은 기초적인 신화 테마를, 젊은이들이 경험하는 개인적인 문제, 어려움, 깨달음, 관심의 해석에다 응용하고 있으니까요. 이러한 문제의 본질을 잘 알고 있는 소설가의 작품에서 신화 모티프를 선택해서 길잡이로 삼는 것도 좋겠지요.

[265] 우리 생각의 체계에 맞게 이 조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이 조직의 배후에 작용하는 역사적인 힘은 그 정도의 행동은 의미도 없을 만큼 거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만, 우리에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요.

[266] 너는 가슴으로 사는 사람, 인간성을 섬기는 사람이겠느냐, 아니면 ‘음험한 세력’이 요구하는 대로 하며 사는 사람이겠느냐, 이렇게 묻고 있는 겁니다. 물론 가슴으로 사는 살마이어야 하지요. 생명이 있는 곳은 가슴이니까요.

[267] 모이어스 : “새 옷을 입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옛날 옛날 한 옛날의 이야기로구나…….” 이게 바로 제가 <스타워즈>를 처음 보았을 때 한 생각입니다. 영웅이 모험의 소명을 받고 여행을 떠나 시련을 겪고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승리를 얻은 뒤 사회의 홍익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돌아온다…….
* 새로 만들어지는 신화, 창작신화, 신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많은 이야기들은 모두 이런 감탄을 들을 만하다.

[269] 물고기가 삼키는 바람에 영웅이 물고기의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들어갈 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말해서 변한 모습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어요. 어둠(저승)으로 내려가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고래는 우리의 무의식에 갖혀 있는 생명의 힘을 상징합니다. 은유적인 의미에서 물은 무의식이고, 수생동물은 생명, 혹은 무의식의 에너지입니다. 고래가 나타났다는 상황은 이 무의식이 의식적인 인격을 압도하고 힘을 얻은 상태를 만들지요. 즉 이때부터는 무의식이 의식을 극복하고 의식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269] 모험의 첫째 단계에서 영웅은 기왕이 살던, 자기에게 버릇 들어 잇는 곳, 일정한 수순의 힘을 행사하던 곳을 떠나 한 세계와 다른 세계 사이의 문턱에 이릅니다. 이 문턱이 말하자면 호수나 바다의 가장자리지요. 이 문턱에서 심연의 괴물이 영웅을 기다립니다.

[270] 의식은 우리 인간 존재의 부수적인 기관일 뿐이에요. 그러므로 이 의식이 우리의 존재를 통제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의식은 기가 한풀 꺾인 상태에서 우리 인간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다는 존재는 아닌 것이지요.

[272] 모이어스 : 신화가 오클라호마주(州)의 농투성이 아들을 꼬드겨 영웅이 되고 싶어하게 만들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캠벨 :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

[272] 모이어스 : .... ‘드높은 영혼의 모험’은 무엇입니까?
캠벨 :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273]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사람들에게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273] 모이어스 : 우리의 자아는 무엇입니까?
캠벨 :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275] 모이어스 : 저는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 신화에 대한 선생님의 해석을 좋아합니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에게, “미궁에서 나오는 방법만 가르쳐주면 영원히 사랑하리라”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줍니다. 테세우스는 미궁으로 들어갈 때 이 실타래의 실을 풀었다가 그 실을 따라 무사히 미궁을 빠져 나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실밖에 없었다”고 하셨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 뿐 인 것 같은데요.
* 연구원 4기 수업(두 번째 수업)에서 이한숙이 이 부분을 인용해서 말했다. 우리는 미궁을 들어가야 하고, 미궁에는 괴물이 아닌 다른 것을 만나게 될 거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미궁을 빠져나올 실타래도 가졌다고 얘기했던 것 같다.

[276] 《아더왕 이야기》에는 아주 재미있는 이미지가 나옵니다. 원탁의 기사들이 어둠의 숲으로 성배를 찾으러 나갈 즈음 화자(話者)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무리 지어 숲으로 들어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각자 나뉜 채 자기가 선택한 지점에서 숲으로 들어갔다.”
선생님께서는 이것을, 개체로서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서구 특유의 발상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개체로서 삼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혼자 어둠과 맞서는 것이라고요.

[277] 서구인들은 ‘나’안에 잠재해 있는 삶의 과녁이자 이상을 살지, 절대로 남의 안에 있는 가능성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78]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인간이 사는 한살이(유아기를 보내고, 성인이 되고, 나이를 먹고느 세상을 떠나는)의 이미지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죽음을 직면하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받아들일 때,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뿐 아니라 스핑크스의 저주도 풀리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279]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自己性)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284] 우리는 예술을 공부하고 예술의 기법을 배우러 가서 스승이 강요하는 것만을 열심히 좇곤 하지요. 그러다 보면 기법을 쓰기는 씌되 스승이 시키는 대로 쓸 것이 아니라, 한번 자기 식으로 써보고 싶은 때가 오지요. 이게 바로 사자의 행위가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이때가 되면 학생은 스승에게서 배운 모든 기법을 버립니다. 자기에게 완전히 동화되었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때부터 예술가로서의 홀로 서기가 시작됩니다. 이때 이 신출내기 예술가가 지니는 순수는 바로 예술가의 순수입니다. 변용된 순수이기 때문에, 이것은 아이의 순수와는 다른 것이지요. 이때부터 신출내기 예술가가 하는 행동은 예술의 기법을 습득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행동과는 다릅니다.

[285] 예술 학교 학생들에게는, 스승이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가를 알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바로 이 순간이 스승이 가르치고자 하는 기법을 모두 자기의 것으로 동화시킨 순간, 날 준비가 된 순간이지요.
* 날 준비가 된 순간......

[286]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 겁니다.

[287] 구혼을 거절하는 순간에,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는 순간에, 모험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이로써 주인공은 자기가 전혀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땅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바야흐로 소설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면, 기존의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 기존의 법을 어기지 않으면 창조적인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296] 부처는 보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보살이란 영생의 진리를 깨달았으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에 내려와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이 세상의 슬픔에 참여하는 자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경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지니는 자기 중심적인 수성(獸性)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慈悲)’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297]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건데,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의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니체)가 말했듯, 우리가 우리 삶의 어떤 한 측면에 대해서만아리도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동화시키기가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그만큼 더 위대해지는 거랍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가 삼켜버리는 악마가 그런 우리에게 권능을 부여합니다.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돌아오는 상(賞) 또한 그만큼 큽니다.

[301]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속세적 욕망이나,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놓여납니다.

[303] 아니에요.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인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서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303] 영웅의 모험, 즉 살아있음의 모험.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308] 대지가 식물을 낳듯 인류의 여성은 인간을 낳지요. 대지가 그 식물을 기르듯 인류의 여성도 인간을 기릅니다. 따라서 여성이 지니는 마력은 대지가 지니는 마력과 같은 것이지요. 따라서 그 둘은 상호 관계 아래에 있어요. 그래서 만물을 낳고 기르는 에너지의 화신은 당연히 여성의 모습을 지니지요.
(중략)
여신이 창조신일 때 이 여신은 몸은 곧 우주가 됩니다. 이 여신은 바로 우주와 동일시 됩니다.

[311] “그대는 검푸른 새, 붉은 눈의 초록 앵무새. 그대에게는 그대 아들이 그렇듯 빛이 있다. 그대는 계절이자 바다이다. 시작이 없는 그대는 우주에 내재한다. 바로 거기에서 만물이 비롯된다.”
- 《우파니샤드》 중에서

[311] 우리의 삶의 근원이 무엇인지, 우리 몸, 우리의 육체의 형상과 이 만물을 짓는 에너지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알아내어야 한다는 겁니다. 에너지가 없는 몸은 살아 있을 수가 없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에서, 무엇이 몸에서 나오고 삶이고, 무엇이 에너지와 인식에서 나오는 삶인가를 느끼고 있지 않아요?

[311] 인도의 성적 신비는, 세계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그렇듯 신성한 신비에 속합니다. 생명 창조의 신비인 것이지요. 아기를 생성시키는 행위는 우주적 행위입니다. 따라서 신성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지요. 따라서 생명의 에너지가 시공의 장으로 분사되는 이 신비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링감과 요니의 상징. 곧 창조적으로 결합된 남성과 여성인 것입니다.

[318] 끊임없이 먹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어요. 그리고 우리가 먹는 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생명입니다. 이것은 음식과 먹는 일이 지닌 성찬 의례적 신비입니다.

[318] “아, 놀라워라. 아 놀라워라, 아, 놀라워라! 나는 먹거리다, 나는 먹거리이다. 나는 먹거리이다. 나는 먹거리를 먹는 자이다. 나는 먹거리를 먹는 자이다. 나는 먹거리를 먹는 자이다!”

[328] 신의 죽음과 재생 이미지는 어느 문화권의 신화에서도 볼 수 있는 아주 흔한 이미지입니다. 흔히 이런 이미지는, 달마다 죽음을 맞았다가 재생하는 달의 이미지와 관련된 형태로 나타나고는 하지요. 달이 죽음을 맞기 때문에 세상의 밤은 이틀 밤 동안, 혹은 사흘 밤 동안 암흑 천지가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리스도 역시 이틀 밤. 혹은 사흘 밤 동안 무덤에 있지 않았던가요?

[328] (예수가 태어난 날짜를 동지 전후 빛이 부활하는 날짜로 잡은 것은) 우리의 삶과 우리의 생각과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즉 과거의 죽음과 미래를 향한 부활, 곧 수성(獸性)의 죽음과 영혼으로서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죽음과 재생의 상징을 보면 이점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지요.

[333] 중국의 음양(陰陽) 이미지를 아시지요? 원 안에 검은 물고기 비슷한 형상과 흰 물고기 비슷한 형상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검은 물고기 비슷한 형상을 자세히 보면 가운데에 흰 점이 하나 있어요. 물론 흰 물고기 비슷한 형상에도 검은 점이 하나 있고요. 바로 이 점이 있기 때문에 음양은 상호 작요하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든, 참여하지 않으면 상호 작용을 일으킬 수 없어요. 하느님을 ‘절대타자(絶對他者)’로 보는 관념이 엉터리인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절대 타자’와 나 사이에는 상호 작용이 있을 수 없지요.

[334]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사회, 그 사회의 어떤 무리와 동일시하는가?” “우리는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속한 특정 무리와만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
* 아니타로딕의 『영적인 비즈니스』라는 책을 읽었을 때, 왜 책 이름을 그렇게 붙였을까 의문이었다. 조화여신의 입장에서 지구촌이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본다면 ‘영적인’이라는 말이 적절하게 보인다.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339] 이렇듯 사랑은 눈과 눈을 통하여 마음을 얻는다. 눈과 눈은 마음의 척후병이라서 마음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를 샅샅이 염탐한다. 이렇듯 서로가 하나가 될 때, 두 눈과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될 때, 두 눈이 본 것을 마음이 좋게 여기므로, 여기에서 온전한 사랑이 태어난다. 오로지 마음이 움직이는 데서만 태어나거나 시작될 뿐, 사랑은 다른 데서는 태어나지도 시작되지도 않는다.
두 눈에 마음에서, 두 눈과 마음이 기쁨을 누리는 덕에, 두 눈과 마음이 그리 하기를 바라는 덕에 사랑이 태어난다. 진정한 사랑에 빠진 자는 사랑이, 가슴과 눈과 눈에서 태어난 온전한 정성임을 알기 때문에 사랑이 다름 아닌 희망임을 알기 때문에 서둘러 연인에게로 달려간다. 그러면 눈은 꽃을 피우고, 가슴은 꽃을 성숙하게 하는데, 이 성숙한 열매에서 여무는 씨앗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한다. - 귀로 드 보르네이유

[345]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호에서 육체적인 하나 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동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346] 《트리스탄과 이졸데》이야깁니다만, 이 두사람이 사랑의 묘약을 마신 뒤에야 유모는 그 사시을 알고는 트리스탄에게 달려가, “그대는 죽음을 마셨다.” 고 말합니다. 이때 트리스탄은 이졸데의 유모에게 이렇게 대답하지요.
“죽음이라니 ……. 이 사랑의 고통 말이오?”
여기에서 그의 이 말이 중요합니다. 결국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지요.

[348] 단테는 무슨 사회학자처럼 프란체스카에게 “아가, 어째서 그렇게 되었느냐? 보아라. 이 꼴이 도지 않았느냐”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자 프란체스카가 그 내력을 잠깐 이야기하는데 , 이 대목은 단체의 《신곡》중에서도 명구로 꼽힙니다.
“저와 파울로는 정원의 나무 밑에서 기사 랜설럿과 귀네비어 이야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이 두 주인공이 첫 입맞춤을 나누는 대목을 읽다말고 저와 파울로는 서로를 바라보았는데, 그그리고 나서는 그날 그 책을 한 줄도 더 읽지 못했습니다.”

[349]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에서

[353] ‘자비’ 함께 고통받는다는 의미지요. ‘passion’은 곧 고통인데 이걸 ‘함께(com-)’하는 것이 곧 ‘자비(compassion)’인 것이지요. 독일어로 자비는 ‘미트라이트(mitleid)’라고 하는 데, ‘미트(mit)’는 ‘함께’라는 뜻이고, ‘라이트(leid)’는 ‘고통’ 혹은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356] 성배 이야기의 테마는 인간의 내적 관심이 떠나버린 땅이나 나라를 그 무대로 합니다. 인간의 내적 관심이 떠나버린 땅, 곧 황무지 아닙니까? 황무지의 기본적인 성격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살기는 살되, 죽은 삶을 살고 있는 땅, 자기 삶에 대해 아무 용기도 없이 사는 땅, 남이 하는 대로, 남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사는 땅이 바로 황무지입니다.

[358]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인 것은 바로 인간에서 물질과 정신이 만나기 때문이다.” - 토마스 만

[359] “모든 행동은 좋게도 결과하고 나쁘게도 결과하느니…….”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은 그 결과에서는 한 쌍의 대극을 낳는다는 겁니다.

[359] 성배는, 자기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삶을 상징합니다.
(중략)
“싫습니다. 저는 아내를 벌겠습니다. 주어지는 아내는 싫습니다.”
이게 바로 유럽의 시작입니다. 개인주의가 꽃 피는 유럽, 성배 전설이 있는 유럽의 시작이라는 겁니다.

[360] “영혼은 그 짝을 찾지 않고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짝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 칼 구스타프 융

[365] 평생의 약속이니까 우리 삶의 가장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지요. 만일에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는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

[368] 결혼이라는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이성(異性)의 측면과의 만남이랍니다.

[368] 모이어스 :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문득, “나는 이 사람을 전부터 알고 있다”, 혹은 “이 사람을 좀더 알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에 관한 자기 발견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캠벨 : 참 신기한 일도 다 있지요. 이건 흡사, 그 사람과 함께할 미래가 기정사실이 되어 우리에게, “이 사람이 바로 나와 함께 살 사람이다”,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 같아요.

[369] 사랑에는 면역성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을 어떤 관계에 면역되게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373]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發火點)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8. 영원의 가면

[375] 신비를 체험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 오감(五感)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우주의어떤 차원이 있다는 걸 압니다.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니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서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파니샤드》의 한 구절

[378] 기도는 신비에게 말을 걸고 명상하는 행위

[379] 우리가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예수의 이미지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어떤 신의 이미지는 결정적인 장애, 궁극적인 장벽이 되는 수가 많아요. 자기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자기 나름의 소아병적 생각에 집착해 있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어마어마하게 큰 체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보다 큰 체험이 접근해오는 순간에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이미지에 매달림으로써 거기에서 도망쳐버리려고 합니다. 이걸 사람들은 신앙으로 오해하고는 하지요.
아시다시피 우리의 영혼은 서로 다른 중심, 혹은 서로 다른 원형적인 경험의 단계를 지나 상승합니다.

[380] 모든 존재의 이 궁극적인 바탕은 두 가지로, 즉 한 가지는 형상을 통하여, 또 한가지는 형상이 없는 존재, 혹은 형상을 초월한 존재로 체험될 수 있습니다. 형상을 통하여 신을 경험할 경우 거기에는 우리의 형상을 짓는 마음이 개입합니다. 따라서 형상을 짓는 우리의 마음이 신에 반영되게 마련입니다. 여기에는 주체가 있는 객체가 있지요.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가 믿는 신과 하나 되기여야 합니다. 신과 하나가 된다면 이원성은 초극되고 형상은 사라집니다.
이렇게 하나 된 곳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도 없고 ‘나’도 없어요. 모든 개념을 완전히 초극해버린 ‘나’의 마음은 사라져 존재의 바탕과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381] 힌두교 경전에 보면, “오로지 신만이 신을 섬길 수 있다”는 말이 나와요. 신을 경배하고 신의 말씀에 따라 살자면, ‘나’ 자신과 그 신이 표상하는 영적인 원리를 동일시하지 않으면 안되는 겁니다.

[381]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383] 나는 이 20세기를 줄기차게 살고 있습니다만, 어릴 때부터 우리의 원수라는 것은 있지도 않고, 있었던 적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특정한 대상을 잠재적인 적으로 만들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공격을 정당화시키자면, 증오와 오해와 멸시와 공작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공작의 메아리가 지금 이 시간에도 도처에서 들리고 있군요.

[383] 모이어스 : 선생님께서는, 예수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느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이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심이니라”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고상하고, 대담한 가르침이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385] “신부님, 증명이 되어버린다면 믿음의 가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386] “내 입으로 마시는 자는 나와 같이 될 거이고, 나 또한 그와 같이 될 것이다.”
누구든 말씀의 메시지를 삶 속으로 동화시킬 수 있으면 곧 그리스도와 동등해질 수 있다. 이게 바로 이 구절의 의미인 겁니다.

[387]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자기 삶을 타인에게 주어버리는 인생이 있어요. 가슴의 열림으로 상징되고 있는 삶이 바로 이런 삶인 겁니다.
모이어스 : 그런 삶의 본원은 무엇입니가?
캠벨 : 남의 삶에서 ‘나’의 삶을 인식하는 것, ‘나’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신은 그 하나의 삶을 표상하는 이미지입니다.

[389] 신은 알파요 오메가요, 본원이자 종국입니다. 따라서 원은 바로 시간의 장과 공간의 장에서 완결된 완전성을 상징하는 겁니다.

[393] (신화적인) 이미지는 우리를 도와 우리 자신과 상징적인 힘의 동일시를 가능하게 합니다. 자기 자신과 범용해 보이는 어떤 대상의 동일시는 쉬운 것 같아도 사실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범용해 보이는 것 깨달음의 촉매(觸媒)라는 가치를 부여하면 이때부터는 이 범용해 보이는 것이 상당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393] 우리의 삶은 어디에선가 쉴새없이 솟아오르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으로 끊임없이 생명을 내어보내는 곳, 이곳이 바로 무궁무진한 에너지의 근원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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