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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6일 07시 36분 등록
#1. 프롤로그

연구원이 끝나갈 무렵 북페어에서 발표한 내 인생의 첫번째 책 제작안인 『공무원 엉덩이 때리기』에 대하여 출판사 관계자 분의 조언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법조계의 비판적인 글이지만, 공무원 사회에서도 적용될수 있고, 논리적인 측면, 소재와 구성면에서 참고하라고 권해준 책이었다. 읽으면서 내내 비평의 어려움과 용기에 대한 생각을 하였다. 저자는 현재 법조계가 아닌 대학 교수의 신분이지만, 책에서 실명까지 거론하는 등 비평의 강도를 보면 자기 자신의 철저함과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용기의 힘은 이런 자신에 대한 신념과 남과 다른 길을 가면서 불편함을 기꺼이 감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그 경계에서 적절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비평을 위한 비평만이 아닌, 앞으로 나가야할 비전과 구체적으로 해야할 일을 제시하고 있었다. 기존 현직 공무원들이 쓴 비평의 책들이 한계점을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비판이 객관적인 시각과 구체적 대안의 제시가 부족하였다.앞으로 내가 책을 쓰면서 풀어야 할 문제다.

#2.작가에 대하여

저자는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군법무관과 서울지검 서부지청 검사를 지냈다. 유학 중이던 아내를 돕기 위해 검사직을 사임하고 도미, 약 2년간 집에서 딸을 키우며 홀로코스트 및 소수자의 인권에 관한 다양한 책들을 섭렵했고, 예루살렘에 있는 Yad Vashem 연구소에서 잠시 공부하기도 했다. Cornell Law School을 졸업한 후 귀국해 잠시 한동대학교 법학부에서 강의를 하다가 지금은 경북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기독교 월간지 <복음과 상황>에 장기간 칼럼을 연재했고, "인권법에서 사라진 인권 : 차별 금지조항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며", "누가 장애인인가 : 장애 모델과 장애의 개념". "기독교 정신과 평화주의"등의 논문이 있다.

99년도 월간지 <복음과 상황>의 칼럼에서 '열등감에 관하여'라는 칼럼이 있었는데, 내용이 한순간에 눈에 들어왔다.

세상의 어떤 자리도 인간을 열등감으로부터 자유케 하지 못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최고의 자리를 향해 아무리 달려가 봐도, 그 자리를 확보하고 나면, 또 더 나은 자리가 눈앞에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어디에 가도 자기보다 나은 사람은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을 이런 열등감으로부터 자유케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그리스도 안에서 열등감을 극복해 봐야, 남들이 나를 우습게 보는데 어떻게 하느냐고요? 그와 관련하여 한 가지 말씀을 더 드리겠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생애 최고의 순간"이 한번쯤 있게 마련입니다.
직장에 취직하는 순간일 수도 있고,
박사학위를 따는 순간일 수도 있고,
결혼하는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문제는
어떤 사람들에게 이 순간이 너무 빨리 찾아온다는데 있습니다.
즉 대학입학과 동시에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겨우 10대 후반의 나이에 마치 온 세상을 다 소유한 것처럼 가문 전체의 축하를 받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이미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이한 사람들은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마련입니다.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만약 이미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여 가족들이 부르는 만세 소리를 들었다면, 빨리 그 자리를 떠날 궁리를 하십시오. 거기 오래 머물면, 당신의 인생은 거기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해야 할 깊은 열등감을 내부적 문제라고 한다면, 사회의 시각은 외부적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부적 문제는 열심히 실력을 쌓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현직 검사를 그만두고 아내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여성, 장애인 등 소수자의 권익을 위한 배려와 희망의 글들, 스스로 일류가 아닌 이류 법조인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등을 볼때 자유로우면서도 살아가는 여유가 느껴졌다. 머리말에 쓴 그의 말도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법과 시민이 따로 노는 어두운 현실을 뚫고 나가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용기라는 생각을 하고 힘을 얻었습니다."

주요저서로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의 실태를 처음 소개하고 이들에 대한 대체복무 인정을 주장했던 칼을 쳐서 보습을(2002), 평화의 얼굴(2007)등이 있다.

#3. 가슴을 치는 구절

<머리말>

(2) 저는 그 벽을 조금이라도 허물어 보고자 이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먼저 정의(正義)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승자의 일방적인 폭력이 지배하는 까닭에 표면상 평온해 보이는 사회를 ‘법의 지배’로 오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법의 탈을 쓴 폭력의 지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의 명령’과 같은 절대적인 규범이 사라진 세상에서 정의란 결국 올바른 절차와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서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것’ 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정의나 진리를 찾아가는 이런 과정을 일부 전문가들이 독점해서는 안 되며 그럴 수도 없습니다.

(3) 남을 비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남을 비판한 그 잣대로 내가 비판받으리라는 것은 꼭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매일의 일상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법조계를 이야기 하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춰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게 지금도 마음에 걸립니다. 인격적으로 저보다 훨씬 훌륭한 분들임에도 세계관 차이로 제 비판의 대상이 된 분들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서장 - 법학과의 불화>

(27) 독일학자들은 자기네 학설 전통을 죽 따라가다가 마지막에는 반드시 자기 머리에서 나온 생각으로 논문을 마무리 합니다. 그 정도라도 자기 생각이 들어가야 자기 논문, 자기 이론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독일 학자들의 생각을 죽 따라가다가 마지막에도 독일 학자의 이론으로 끝을 맺습니다.

(29) 시험에는 도가 튼 291명 시험 전문 ‘선수’들의 경쟁에서 제가 낄 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몇 줄이라도 저의 의견을 적어 넣을 수 있었던 사법시험 2차와는 달리 사법연수원의 시험은 늘 정답을 요구했습니다.

(33) 보통 소크라테스식 강의(Socratic Method)라고 불리는 미국 법과 대학원 수업 방식은 이처럼 미리 정답을 설정하지 않고 교수와 학생 사이에 오가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학생들의 논리적 사고를 증진시키는 것입니다. 어차피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자기 입장을 정하는 것이 변호사의 삶이라면, 이처럼 정답 대신 자기 나름의 논리를 갖추도록 훈련하는 방식이 합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39) 실력 없는 교수에게 배우는 학생들에게 미안함을 느낄 때는 가끔 있으나, 저는 이러한 이류 생활이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이류 법학자, 이류 법조인의 삶을 즐기게 된 것이겠지요

(40) 일류법학자들만 넘쳐나던 지난 세월동안 우리 법학이 시민 생활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데 철저히 실패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저 같은 이류 법학자가 존재한다 해서 사회 전체적으로 보아 큰 해가 되지는 않겠지요.

<정답은 없다>

(67) 토론 하면 ‘양보’나 ‘타협’을 떠올리기 보다는 끝없는 싸움만 연상하게 되는 우리 문화도 문제입니다. 대화에서는 자꾸 승패만을 가르려 합니다. 토론이 끝날 때마다 이긴 사람과 진 사람을 가르려 하다 보니, 토론 참여자는 지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게 됩니다. ‘대화’는 승패를 가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것입니다.

(72) ‘신의 명령’과 같은 절대적인 규범이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가 찾는 정의는 결국 올바른 절차와 합리적인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만들어 진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답을 가진 사람들의 번쩍번쩍 하는 빛나는 아름다운 얼굴을 포기하는 대신에 우리는 관용을 통한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유일한 해답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바로 그 고통스러운 자기 한계 고백의 토양에서만 자라날 수 있는 나무입니다.

<국가란 이름의 괴물>
(82) 국가를 사랑하지 말자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국가에 대한 ‘사랑 표현’을 강제할 수는 없으며, 국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중요한 것이 국가를 ‘통제’하는 일임을 강조하고 싶을 뿐입니다. (중략) 국가를 사랑하는 것을 강조한 나라보다는 국가를 통제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 나라가 그나마 ‘덜 나쁜’ 나라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05) 가공할만한 국가의 범죄에 참여한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괴물들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이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사회 속에서 늘 칭찬받으며, 윗사람 말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른들 또는 권위자들이 시키는 일이라면 “왜?”라고 묻지 말고 그냥 “예”라고 말하라는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만이 이 사회에서 왕따 당하지 않고 ‘원만하게’ 살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윗사람, 어른, 권력자, 권위를 가진 사람의 명령이나 가르침에 대해서, 그들의 말이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라, 정말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진짜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111)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이전에 상상도 못했던 독재 권력이 출현할 수 있는 최적기 일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독재 권력의 출현을 감지하고 예방해야 할 의무를 지닌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바로 법률가들입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법률가 집단에게도 큰 기대를 걸기가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법률가들이 국가 권력의 통제를 생각하기 보다는 국가 권력을 누리는 쪽으로 자신의 역할을 고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암담한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법률가의 탄생>

(119) 신분이 수직으로 상승하는 이런 경험은 우리들의 정신세계에 충분히 나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날부터 습관적으로 “뭘요, 저는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라고 겸손한 척은 배우지만, 이미 시험합격자의 내면에 ‘나는 남과 다르다’는 의식이 자리 잡은 후입니다. 스스로를 벌레처럼 느끼게 하던 심리공간을 특권의식이 메워가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겸손한 사람이지만, 내면세계는 ‘땅값 상승으로 한몫 잡게 된 졸부들’의 그것과 갈수록 비슷해져 갑니다.

(125) 튀는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가혹한 것이 법조계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 시민단체에서 쥐꼬리만 한 보수를 받으며 일하는 변호사들, 무료 상담을 자원하는 사람들도 법조계 내부의 눈으로 보면 그저 ‘튀려고 하는 사람들, 그렇게 떠서 국회 위원하려는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어차피 남을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 수재집단에게 튀는 동료의 존재는 술안주로 씹기에 딱 알맞은 대상입니다.

(141) 미셸 푸코는 사법당국으로부터 형의 집행이 떨어져 나감으로써 법률가들이 ‘처벌’이라고 하는 불명예스럽고 불유쾌한 일을 직접 수행하지 않게 된 과정을 신체형의 소멸과 관련하여 흥미롭게 설명합니다. 사법과 형벌의 분리를 이야기한 푸코의 주장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저는 이런 ‘막연한 불쾌감으로부터의 자유’를 우리나라 법률가들만큼 제대로 누린 사람들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142) 국가의 괴물화를 막아야 할 법률가들이 오히려 괴물이 된 국가권력의 손발이 되어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한 사례는 세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제 정신을 되찾은 후에도, 괴물의 수족이 되었던 법률가들이 우리나라처럼 떳떳하게 잘살고 있는 사례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없습니다. 역사 앞의 정직한 반성과 공개만이 고문 재발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똥개 법률가의 시대>

(148) 이와 관련하여 관공서 주변에 회자되는 말 중에 “꺼진 불도 다시 보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관료 직에서 물러나 재야에 있는 사람이지만, 그가 정권의 변화에 따라 언제 되살아나 장관직 등에 복귀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법조에서는 이런 경향이 훨씬 심각합니다. 검사장 출신 퇴직 변호사들의 경우, 그와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은 여전히 고등검사장 또는 검찰총장으로 남아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꺼진 불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꺼진 불 옆이 불들은 여전히 ‘켜진’ 불이기 때문에 적지 않은 영향력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런 ‘꺼진 불’들을 함부로 대하는것이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153) 전관예우의 뿌리가 ‘인간관계’라면, 문제를 해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워낙에도 학연, 혈연, 지연이라고 하는 ‘인간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에서, 그 인간관계를 무 자르듯이 잘라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법조 개혁이 어려운 이유입니다. 수직과 수평의 관계들로 꽉 짜여진 틀 속에 갇힌 법률가 집단이 국가 권력의 통제라고 하는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국가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를 생각하기에 앞서 눈앞의 관계들과 자신의 앞날만은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법률가들의 현주소이기 때문입니다.

(159) 실력을 갖춘 청렴한 법률가로 평가받던 사람조차 인간관계 때문에 언제든지 차떼기 범죄자로 전락할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이 거미줄 같은 인간관계망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인위적인 방법으로 이런 촘촘한 관계망을 끊어 내기란 쉽지 않겠지만, 우선 단일하고 폐쇄된 특권집단의 탄생을 막는 것으로 의미 있는 출발점을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173) 고객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청지기의 증가는 궁극적으로 국가 권력의 통제라고 하는 법률가 본연의 임무를 다하는 데에도 유익합니다. 잡다한 혈통을 가졌지만 주인인 시민에게 충성을 다하는 새로운 청지기의 등장을 저는, 우리 법조의 희망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 정신>

(216)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정신은 그 반대지점에 위치한 것입니다.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읽고 해석할 권리를 인정한 개신교의 종교개혁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죠. 이단종파를 막고 교리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안전한 방법은 최고 기관에서 성경 해석권을 독점하고 다른 평신도들은 모두 그 해석을 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리에 어긋나면 모두 이단으로 처벌하면 됩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러한 손쉬운 방법 대신 평신도 모두에게 성경을 읽고 해석할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사제 계급의 특권을 부인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220) 종교의 자유는 자기 눈으로 볼 때, 확실히 이상해 보이는 행동이지만, 헌법이 종교의 자유로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하 행동을 관용한다는 것입니다. 이상해 보이지 않는 행동에 대해서는 관용하는 것은 이미 관용이 아니지요.

(232)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가 일종의 형제관계이듯, 그 우산 아래 보호를 받는 우리 ‘이상한 사람들’도 헌법 아래에서는 일종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기본권을 인정한 헌법 정신입니다. 결국 ‘관용’ 또는 똘레랑스‘라고 표현되는 ’서로 받아들임‘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지요.

<말하지 않을 권리, 그 위대한 방패>

(241) 방송과 수사기관이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하는 데에서 명백한 차별행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이나 장관 또는 미군 병사처럼 권력이 있거나 함부로 다루었다가 손해배상 소송을 당할 가능성이 있는 상대방에게는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사생활을 보호해주고, 그렇지 못한 피해자들에게는 유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250) 그런 여러 가지 장치가운데 역사가 만들어온 가장 위대한 권리가 바로 진술 거부권, 즉 ‘말하지 않을 권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병이 구속 상태이든 불구속 상태이든지 가에 수사기관이 대화를 통해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모두 임의수사에 속한다면, 끝까지 그 임의수사로서의 성격을 지키기 위해 조사대상에게 주어지는 어떤 힘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진술 거부권인 것입니다. 위대한 권리이지만, 동시에 당연한 이치를 확인한 것에 불과한 권리가 진술 거부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52) 우리나라에서 진술거부권을 사용해온 피의자가 어떤 사람들인지 살펴보면 진술거부권의 힘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최근 제 기억에 남아 있는 몇 사람만 꼽아보다도, 권노갑씨와 비슷한 시기에 수뢰협의를 받았던 신광옥 법무부 차관,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 사건에 서정우 변호사, 몰카 사건의 김도훈 검사 등이 모두 수사 초기부터 상당한 기간동안 묵비권을 행사했습니다. 특징은 모두 변호사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었지요. 그 밖에도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 독일에서 돌아온 송두율 교수 등이 묵비권을 행사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사용하지만,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진술거부권의 고지’를 받아도 무슨 뜻인지 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 진술 거부권인 것입니다.

(256) 여러분이 그런 절벽 앞에 선 피의자라고 생각해보면, 왜 피의자들이 그 절벽 앞에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자백을 하게 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결국 대단한 수사기법을 지니지 못한 대검 중수부나 서울지검 특수부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웅변이 아니라, 진술거부권일 수밖에 없습니다.

(267) 그것을 몰라서 선진국들이 이런 권리를 인정해온 것은 아닙니다.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사기관에 의한 인권침해로 한 명의 범인을 잡는 것보다는 백 명의 무고한 시민의 희생을 예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권리들을 보장해온 것입니다.

(276) 그리고 무엇보다 진술거부권을 인정한 헌법 정신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조사받을 때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기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 문제입니다. 진술 거부권의 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가 인간에게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8장 잃어버린 헌법, 차별받지 않을 권리>

(301) 차별받는 이웃을 위해 일하고 싶은 의욕은 있지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눈앞의 과제 때문에 많은 시간을 공익분야에 투자할 수 없습니다. 변호사들끼리 하는 이야기 중에 “변호사는 돈을 먹어야만 작동하는 기계이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변호사 노릇을 계속하다 보면 아무래도 돈을 많이 받은 사건에 더 힘을 기울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4. 내가 작가라면

가. 책의 구성에 대하여

서장을 포함하여 전체 9개 장을 구성되어있고, 개개의 장에서 평범하지 않은 주제, 색다른 소재를 통해 논리가 전개되었다. 저자 개인의 사례는 다른 법률가와는 차별화가 이루어지는 동기였다. 개인의 이야기가 힘을 얻는 다는 것이 바로 경험의 중요성이고, 그러한 경험이 현재의 사상과 책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본다. 특히 서장 '법학과의 불화' 3장 '법률가의 탄생'과 4장 '똥개 법률가의시대'는 개인이 법률가가 되었던 경험을 살려 현재 법조계의 현실을 생생하게 표현하여 법률이 현실과 괴리에 대한 논리적인 뒷받침을 하였다.
소재면에 있어서도 현실적이면서도 관심을 끌만한 것이 많았다. 제 2장 '정답은 없다"에서 음란과 예술의 차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웃기면서도 우리의 실상을 아는 사례로 논지의 이해나 실제 사회속에서 이루어지는 법률이 얼마만큼 인식의 차이가 큰 것인지도 알 수 있었다. 각 장마다 연결되는 부분은 없지만, 전체적으로 볼때 일반 시민이 느끼는 법률과 실제 법률과의 차이가 녹아있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국가라는 문제도 우리나라의 문제점과 외국의 사례, 그리고 판례들을 보면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다른 한면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 비판의 용기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직에 있으면서 첫 책으로 공무원 사회에 대한 비평과 희망에 관한 책으로 쓰고 싶었다. 행정고시에 합격하지 않고, 외국에서 근무한 경험도 없고, 국가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큰 업무를 해본적도 없다. 제 6장에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헌법정신이라는 말이 나온다. 헌법에서 원칙을 벗어난 예외를 인정해주어 소수를 인정해주는 것을 말하는데, 나의 개인적인 일로도 그럼에도 정신을 주입하고 싶었다. 그러한 지위, 계급, 근무경험 등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나름대로 책임감을 갖고 일하는 하위직 공무원의 애환과 관점을 담고 싶다. 법조계와 공직은 업무의 범위에서나 관련된 정부조직, 그리고 관련된 당사자가 복잡한 분야이다. 검사나 판사는 한사람 한사람이 독립적인 행정기관이지만, 공무원은 관료조직이라는 커다란 틀 속에 갇혀 있다. 또 대통령 임기에 따라 색깔을 달리해야 하는 운명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책을 읽고 법조계를 바로보는 관점리 아닌, 나만의 관점을 가질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다. 문제의 깊은 점과 역사, 그리고 적절하면서도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것이다. 하위직 공무원들의 애환이 희망이 되고, 그들의 노력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단초가 되는 마음으로 나의 첫 책을 쓰고 싶다.
IP *.118.10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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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
2008.06.18 15:26:55 *.75.127.219
최영훈님. 북리뷰 잘 읽었습니다.제가 직접 보지는 않은 책이지만
적절한 책을 절실하게 잘 읽고 꼭 필요한 부분을
챙기시었다는 생각이 듭니다.주제넘게
거기에 제가 몇가지 추가 하고 싶어 글을 올립니다.
얼마전에 신문지상에 유행한 말로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라고 했었습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영혼은 스스로 결정할 처지가 아니라는
뜻으로 쓴 것 같은데 각자의 역할이 다른 것이지
당시의 곤란한 처지를 호도하는 얘기로 들립니다.
사물을 보는 것은 어차피 시각에 따라서 전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군대에서나 사회에서 조직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느낀 바로는
많은 경우에 하위직은 자기의 의견을 말할 기회가 한정 되어 있고
또 대부분의 경우 잘 표현할 능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상위직 못지않게 하위직도 꼭 필요하고
나름대로 훌륭한 철학이 필요하다도 봅니다.제가 보기에는
최영훈님은 표현할 능력이나 기회도 가졌고 또 의미있는
시각을 가지셨다면 무엇을 망서릴 필요가 있을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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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6.19 02:03:55 *.36.210.11
호이땅 호이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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